Episode 34
갉작, 갉작, 갉작.
이즐리 에머스는 무언가 긁어먹는 것 같은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뽀얗고 가느다란 어린아이의 다리가 보였다. 그는 멍하니 옅은 분홍색을 띠고 있는 무릎이나 체크무늬 멜빵 반바지, 제 다리를 간지럽히는 하얀 천을 내려다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 여기는 어디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었지?’
갉작, 갉작, 갉작.
아까 들었던 소리가 들려왔다. 이즐리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한 식탁이었다. 문양 하나 없이 심플하기만 한 하얀색 식탁보는 그 위에 올려진 음식들을 돋보이게 했다. 그제야 그는 제 손에 쥐어진 물건의 정체를 눈치챈다. 포크와 나이프. 갈색의 소스로 더러워진. 제 앞에는 엉망으로 잘린 스테이크가 놓여 있었다.
‘그래, 나는 식사를 하고 있었구나.’
갉작, 갉작, 갉작.
이즐리는 소리가 나는 곳, 제 어머니가 앉아 있을 상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작은 하얀 식탁보보다도 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은 얼굴 전체를 덮고 있는 데다가 너무나 두꺼워 그 뒤에 있는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 왜 가면을 쓰고 있어요?”
“가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이지.”
“네에? 지금 하얀 가면을 쓰고 계시잖아요. 그런 건 얼른 벗어버려요. 가면을 쓰고 있으면 식사를 못 하잖아요.”
“……하아……. 이지. 난 식사 같은 덜할 필요 없어. 네가 먹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걸. 그리고 난 가면 같은 건 쓰고 있지 않다니까? 하하, 알겠다. 또 장난을 치는 거구나? 이 귀여운 장난꾸러기 같으니라고.”
갉작, 갉작, 갉작.
“……그리고 그 가면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것 같아요…….”
갉작, 갉작, 갉작.
“……그냥 벗어버리면 안 돼요?”
“재밌는 농담이구나! 하하하.”
갑자기 공작이 웃기 시작했다. 이즐리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이질적인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뚝, 웃음이 그치고 공기가 바뀐다. 차갑고, 축축하고, 무겁게.
“후회하지 않겠니?”
이즐리는 목을 쥐었다. 공기를 들이마시니 목구멍이 얼어붙는 듯이 아팠기 때문이다.
괴로워.
“……코, 콜록……! 후회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돼요.”
“네가 벗으라고 한 거야. 네 탓이야. 전부 네 탓이야. 네가 바란 거야. 네가. 네가. 네가. 네가. 네가. 네가. 네가. 너희들이.”
“……어머니……? 왜…… 그래요. 콜록! 아까부터…… 무서워요……. 아니, 어머니가 무섭다는 게 아니라……. 그게…… 콜록!”
공작이 천천히 손을 올려 가면을 잡았다.
그 뒤에서 나온 것은 징그럽게 꾸물거리는 문어의 다리였다.
“어, 어머니……?”
여덟 개라고 생각했던 것은 열 개가 되고, 스무 개가 되고, 2백 개가 되고, 천 개가 되어, 아니,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길고, 굵게 뻗어 나와 식당 안을 가득히 덮는다.
“힉……! 이건 어머니가 아니야……!”
괴물이야!
그 정체를 알 수도, 알아채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 차라리 알고 싶지 않은 것. 기묘한 모양의 다리가 몸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끈적이고도 역겹고 징그러운 촉감에 이즐리는 비명을 질렀다.
“……헉!”
그리고 잠에서 깼다.
그는 어떤 꿈을 꿨는지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그 찝찝함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을 찌푸리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닫힌 커튼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온다. 또다시 아침이 왔다. 이즐리는 웅크린 상태로 고개를 살짝 들어 바닥을 비추는 빛을 바라보다가 다시 무릎 사이로 파묻었다.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웅 울려대는 소리와 달리 배고프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자신의 우울함에 정신이 팔려 다른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라일라……?”
매일 아침과 점심, 저녁에 라일라는 그의 방을 청소하러 왔다. 이를 떠올린 이즐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어제도 안 왔잖아.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이젠 일로도 보고 싶지 않다는 거야?’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라일라의 높고 낭랑한 목소리가 아닌 나이가 든 여성의 것으로 느껴지는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도련님, 아침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시끄러워……. 저리 꺼져. 안 먹는다고 했지? 더 귀찮게 굴면, 네 왼팔이나 오른 다리 중 하나를 잘라주겠어.”
“계속 그런 식으로 다른 하녀들을 위협한 건가요? 하아, 하녀장인 제가 아니었으면 다들 겁을 집어먹고 도망쳤겠군요. 이렇게 굶으시면 몸이 상해요. 저를 제외한 집사님들도 걱정이 많으시고요.”
문밖에서 하녀장이 누군가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사를 받은 주인공은 이즐리의 방문을 우아하게 두드리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즐리, 그만하고 나와서 식사해. 어린아이처럼 시위라도 하는 건가?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굶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머니도…… 널 걱정하시니까.”
“……퍽이나 걱정하시겠네.”
“……시끄러워. 참된 귀족이라면 형식적인 문장 정도는 보통 넘겨주는 법이라고.”
아서의 불퉁한 목소리에 이즐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벽면에 기대어 놓아둔 장검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라일라에게 대장간에서 가져오라 시킨 물건이었다.
‘……라일라한테 먼저 다가가서 사과해볼까……? 피하면 어떡하지……? 날 더 싫어하게 되면? 아니, 오히려 그냥 이러고 있으면 더 싫어할걸. 그래…… 일단은 만나보자. 잠깐, 그러고 보니 오늘이…….’
무언가를 떠올린 이즐리는 자리에서 일어서 벌컥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문이 거칠게 움직여 벽에 부딪혔고 그 소리에 아서와 하녀장은 조금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라일라, 내 전속 하인은……? 벌써 저택을 나갔어?”
그는 라일라가 사직서를 내고 사흘 뒤에 나간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사흘째였다. 이즐리의 말에 하녀장은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켰고 아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도련님……. 그 하녀는 아직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갈 수가 없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도 참 민망하네요……. 라일라와 그 언니는 그동안 몰래몰래 도련님들의 물건을 훔치고 있었답니다. 그 죄가 밝혀져서 지금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요.”
이즐리가 어이없다는 양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거짓말하는 거지……? 걔가 왜 그런 짓을 하는데? 라일라는 그럴 애가 아니야.”
"……."
“장난치지 말고 사실만 말하라고!”
짧게 한숨을 내쉰 아서는 하녀장을 물렸다.
“……내가 설명해줄게. 좀 진정해.”
그는 자신의 형제에게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서는 라일라에게 일어난 일을 찬찬히,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난 나쁜 방법도 아니라고 생각……. 이즐리……? 이즐리 에머스!”
아서는 이즐리가 라일라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자신과 비슷하게 단순한 호감이나 호기심이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이즐리가 이야기를 다 듣자마자 오세스를 찾아 멱살을 잡아 쥘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침 일찍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던 오세스는 갑자기 자신을 덮치는 인영에 의해 커다란 봉변을 당했다. 거대한 손이 그의 멱살이 잡아 쥐어 쥠과 동시에 몸이 가볍게 들어 올려져 벽에 밀어붙여진 것이다. 어마어마한 괴력이었다.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등과 벽이 맞붙는다. 고용인들은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거나 좀 연차가 있는 자들은 이 상황을 말릴 수 있을 직급의 사람들을 찾았다.
오세스는 얼얼한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다가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멱살을 잡혔을 때부터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 집안에서 그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있다. 그리고 성인 남자를 이리도 쉽게 들어 올릴 사람은 더더욱. 오세스는 이즐리와 눈을 마주치고는 미소 지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찾아와서 화를 내는지 모르겠는데요?”
“그걸 몰라서 물어……?”
이즐리가 그의 얼굴 코앞까지 다가가서 으르렁거렸다.
“아서에게 다 들었어. 형……. 오세스 네가 더러운 짓을 해서 라일라를 가뒀다는 소리를.”
“……소란 피우지 말고 놓으세요.”
“싫어.”
“……시끄럽게 굴면 어머니께서 좋아하지 않으실걸요. 여긴 어머니 집무실 앞이라고요.”
"……."
“그리고, 어차피 이즐리도 똑같지 않나요?”
이제부터는 고용인들이 들어 봤자 좋은 게 없는 소리들. 오세스는 이즐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실신한 그 하녀를 데리고 의무실로 들어갔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어. 그때 네 표정이 참 보기 좋았다던데?”
멱살을 쥔 손이 잘게 떨린다. 마주한 시선도 마찬가지다.
“하녀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기절까지 시켜? 그게 뭐야? 그 아이한테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거야, 이즐리 에머스? 그래 놓고 남한테 이렇게 하면 안 되지. 그리고 이런 식으로라도 하녀를 잡을 수 있으면 너도 좋지 않니? 이럴 시간에 네가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어떤 식으로 붙잡을지 머리라도 좀 더 굴려보는 건 어때?”
이즐리는 무어라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벽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세스는 땅에 발을 디딘 후 그의 멍청한 얼굴을 찬찬히 감상하곤 뒤를 돌았다.
‘짜증 나게…….’
그는 와이셔츠의 구겨진 부분을 만지작거리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로 돌아오긴 했지만 속마음은 그와 반대로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감정적이고 무식한 놈. 저런 녀석이 희대의 천재라고 불리다니,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오세스는 멀리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하녀를 향해 조곤조곤 부탁했다.
“이즐리의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니 의사에게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본래의 용건을 해결하기 위해 공작의 집무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뒤늦게 이곳에 온 아서는 어떤 상황이 일어났는지를 눈치채고 얼굴을 찌푸렸지만, 뒤돌아 있던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서는 공작의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서류에 파묻혀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어머니.”
“쓸데없이 소란스레 굴지 마라. 시끄러우니까.”
바깥의 소동을 눈치챈 공작은 그리 대답하곤 커피를 홀짝이며 문서를 훑었다. 고요한 응접실에서 종이가 접히고, 쓸리고, 소리가 들려온다.
“네, 죄송…….”
오세스가 사과를 건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공작이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부탁할 게 있지? 말해봐라.”
“눈치가 참 빠르시기도 하지……. 네, 맞아요. 용건이 있어서 왔어요.”
“지하 감옥에 갇힌 하녀들을 풀어주는 건 안 된다.”
“……왜죠?”
“이번 일에 쓸모가 있거든. 잘하면 내 고충을 풀어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하 감옥으로 가는 길을 막아 놓으신 건가요?”
오세스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지하 감옥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기사들이 공작의 명령이라며 그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공작이 직접 명령한 것이라면 공작가에 사는 그 누구도 이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렇지.”
“저는 몰랐어요. 그 둘이 어머니의 일과 연관을 있을 거라고는……. 왜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은 거죠? 저도 노예 경매 일에는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좀 더 확실해지면 이야기해줄 생각이었다. 너를 비롯해서 공자들에게도 전부. 너희들 역시 내 일을 꽤 도와줬으니까.”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공작의 허락하에 기사가 들어왔다. 그가 귓가에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무뚝뚝하게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유리아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