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33 (3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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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3

유리아가 모든 것을 기억해내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혔을 때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녀가 그 일에 얼마나 집중해 있었냐면, 밤을 새웠음에도 피곤 한 점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유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철장 가까이 다가갔고 기사들은 옷자락이 돌바닥을 스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굳건하게 선 소녀가 그보다 더 굳건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공작님께 가겠어요. 그분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세요. 동생은 말고, 저만요.”

감옥의 문이 열렸고 소녀가 복도에 발을 디뎠다. 

“뭐 하는 거야…… 유리아?”

가만히 바닥에 누워 있던 라일라가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철창에 달라붙어 가까이 다가온 유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라라, 나 공작님께 니고르 백작에게 들었던 얘기를 하러 갈 거야.”

“……뭐?”

“노예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고 생각했어.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분명히 백작에게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 그날 안 좋은 일을 당해서 잊으려고 했을 뿐이지…….”

“너, 너, 그때 일을 떠올린 거야? 왜 그랬어……? 그딴 과거 떠올리려고 해 봤자 괴로울 뿐이잖아……! 백작 이야기만 나오면 덜덜 떨고 혹시나 그 자랑 마주칠까 봐 밖에도 못 나갔으면서……. 근데 그걸 남에게 말하겠다고?”

“응, 맞아.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무서워.”

유리아는 잘게 떨리는 몸을 부여잡으며 확신한다. 평생 자신은 니고르 백작을 무서워할 거라고. 잠시 잊거나 두려움의 크기를 줄일 수는있겠지만 그날의 기억은, 이 공포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 늙어 죽을 때까지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쉽게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공포라는,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이름을 가지지 않았을 테지. 

라일라가 울먹이며 버럭 소리쳤다. 

“무서운데 왜 그런 거냐고……! 너 혹시, 여기서 탈출하려고 그런 거야? 그럼 내가, 내가 떠올려볼게. 아니면 노예가 된다고 하던 사람들이 불쌍하기라도 하니……? 그 사람들이랑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

“……너는 아무것도 못할 거야. 막상 가도 입이 떨어지지 않을걸. 그러니까 가지 마…….”

“……라라.”

“……제발 가지 마 유리아. 그냥 평소처럼 나한테 맡기란 말이야…….”

유리아는 자신에게 뻗어오는 손을 마주 잡았다. 

“왜 가냐고? 네 말이 맞아. 여기서 나가고 싶어서……. 너를 여기서 내보내고 싶어서 가는 거야.”

“……싫어…….”

“……그것뿐만이 아니야……. 내가 바뀌고 싶어서 그래. 나는, 더 이상, 과거의 일로 덜덜 떨면서 울기만 하는 겁쟁이로 살고 싶지 않아. 네게 의지하고 싶지 않아. 네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네 옆에 당당히 서고 싶어. 도움이 되고 싶어……. 그리고…….”

‘그리고……?’ 

유리아는 잠시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니고르 영지에는 조그만 학교가 있었다. 평민에게 기초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다. 그곳에서 선생을 하고 있는 미란다의 잔잔하고도 평화로운 일상은 오늘 하교 시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경악과 충격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녀는 한 소녀만 빼고 다른 아이들을 전부 하교시킨 후, 소녀의 자리 위에 시험지를 나눠주고는 무어라 중얼중얼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백 점? 너 이거 누가 도와준 건 아니지? 컨닝은……. 아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어. 여긴 하급생들만 모아 둔 교실이니까.”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미안하구나, 라일라. 내가 잠시 정신이 팔려 있어서……. 이건 내가 잘못해서 배부한 상급생 수학 문제란다! 아이들 전부 점수가 너무 낮아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확인해보니 오늘 수학 시험지를 잘못 나눠줬지 뭐니! 아이들 모두 찍어서 대충 10점, 20점 나온 걸 너는 찍지도 않고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풀어내서 백 점을 맞았어. 어떻게 알았냐고? 여기 공식을 적어놓은 게 다 보이는걸.  하, 정말 기적 같은 일이구나. 수학을 이렇게 잘하는 아이는 처음이야.”

“아하…….” 

라일라는 턱을 괴고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대놓고 귀찮다는 표정은 선생님의 눈길에 닿자마자 순진무구한 미소로 변했다. 그 바로 옆에서 소녀의 언니, 유리아가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우연이예요. 언니한테 미리 배워뒀던 몇 문제만 풀어봤을 뿐인걸요. 그렇지 언니?” 

“어? 응…….” 

“나머지는 다 찍은 건데, 맞을 줄 몰랐어요.” 

“어머 그럼 증명을 한번 해볼까?”

미란다는 품에서 새로운 시험지를 꺼냈다. 이번에는 수도 아카데미생들이 푼다는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이 문제도 풀 수 있니? 이 공식은? 한 번 풀어보지 않으련?” 

라일라는 연필로 글자를 끄적이며 문제를 푸는 시늉을 했다. 맞지 않는 공식과 틀린 답들, 미란다의 얼굴은 점점 실망으로 물들어갔다. 그 뒤로 몇 번의 테스트가 있었지만 라일라는 풀지 못했다. 미란다는 한숨을 내쉬며 라일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아귀에 사탕을 쥐여주는 것은 덤이었다. 

“……잡아둬서 미안하구나. 이만 가보렴.” 

“네. 안녕히 계세요.” 

교실을 나가기 전, 유리아는 다시 한번 시험지를 바라보았다. 차마 자신의 수준으로 풀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문제들이 그득그득 적혀 있었다. 라일라는 평소처럼 유리아의 손을 잡고 학교를 나섰다. 정문을 빠져나가기 전에 유리아는 물었다. 

“라라, 정말 몰랐던 거야? 아……. 못 풀었다고 뭐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라라라면 뭔가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서……. 왜냐면 항상 뭐든 잘하고……. 그냥…….” 

“응. 풀 수 있어. 근데 안 풀었어. 괜히 풀었다가 귀찮아질까 봐.” 

“첫 번째 문제 답은 2고, 두 번째는 루트 3, 세 번째는…… 딱히 기억 안 나네. 뭐, 이런 재미없는 얘기 하지 말고 오늘 어땠는지나 들려줘. 오늘도 남자애가 괴롭힌 건 아니지?” 

“응? 아냐! 오늘은…… 괜찮았어.”

유리아는 라일라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웅얼거렸다. 

“……풀 수 있었구나…….” 

‘나는 절대 못 풀 것 같은데. 역시 라라는 대단해. 나도…… 앞으로 수학 열심히 해야지. 라라보다 훨씬 더 수학을 잘하고 싶어.’ 

라일라가 수학을 잘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라일라는 상인인 부모님이 돈을 계산하는 것을 돕고는 했고, 가끔은 계산 중 틀린 부분을 지적해주었기 때문이다. 

똑똑한 데다 야무지기까지 해서 다른 아이들 말이라면 흘려듣는 어른들은 라일라의 말은 듣는 척이라도 해주었다. 남자아이들은 유리아를 우습게 알고 괴롭혀댔지만 라일라는 무서워하며 되도록 덤비지 않으려고 했다. 

아이들 중에서 가장 나무를 잘 탔고, 싸움을 잘했고, 뛰어난 말솜씨로 상대를 약 올리는 재능까지 있었다. 

요리도 잘해서 부모님이 밖에 나가 있을 땐 유리아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는 했다. 뜨개질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유리아가 겨울마다 받는 목도리는 모두 라일라가 짠 것이었다. 

유리아가 가장 놀란 것은 의상 디자인에도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녀가 순식간에 그려낸 짧은 미니스커트나 파격적인 디자인의 옷들을 잊지 못한다. 

“어떻게 이런 디자인을 생각해냈어……? 라라 너 천재야? 나 같은 게 아니라 라라 네가 의상 디자이너가 되는 게 훨씬…….” 

“천재는 무슨……. 그냥 심심해서 그려본 거야. 그 그림 마음에 들면 너 가져.” 

라일라는 뭐든지 잘했다. 라일라는 유리아의 절대적인 우상이었다. 그녀의 멋진 모습을 볼 때마다 유리아는 항상 생각했다. 

라라보다 더 똑똑해질 거야. 

라라보다 더 의상 디자인을 잘할 거야. 

라라보다 더 나무를 잘 탈 거야. 

라라보다 더 뜨개질을 잘할 거야. 

라라보다 

라라보다 

라라보다! 

‘그리고, 너를 이기고 싶어.’ 

생각해보면 유리아는 항상 라일라를 이기고 싶었다. 

사랑하는 마음과 호승심은 별개였다. 아니,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이기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섬으로써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당신을 이길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 그러니까 어쩌면 이 순간은……. 

“내가 다 해결하고 올게. 이제 라라 네가 나한테 의지해줘.” 

유리아가 처음으로 라일라를 이긴 순간일지도 모른다. 

‘……무슨……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라일라는 눈을 찌푸렸다. 왜냐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뿌연 연기라도 낀 것처럼, 딱 그곳만 뭉개진 것처럼 유리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유리아가 하고 있는 생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젠 유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나를 구해주겠다고? 자기한테 의지하라고? 네가 뭔데? 네가 어떻게? 넌 겁쟁이잖아. 내가 지켜줘야만 하는 사람이잖아! 왜,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거지? 왜?’ 

왜? 

그 심리를 이해하고 싶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흐릿하게 비쳤던 얼굴이 제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유리아는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주한 눈은 각오와 용기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듬직함마저 느껴졌다. 

“여기서 꺼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유리아가 라일라의 손을 놓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제야 라일라는 깨달았다. 자신이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유리아는 약하지 않다.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강하지 않다면, 어떻게 그 끔찍했던 과거의 일을 하나하나 뒤져볼 수 있겠는가? 그것도 모자라 좋지도 않은 추억 일부분을 남에게 말하러 갈 수 있을까?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당연하지! 그럴 수 있어. 유리아를 위해서라면…….’ 

정말로? 

채찍 소리만 들어도 주저앉으면서? 오베론의 얼굴만 보면 덜덜 떠는 주제에? 공작에게 노예 관련된 이야기만 해주면 꺼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 왜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한 거지? 왜 유리아를 잡고 대신 내가 말하러 가겠다고 하지 않는 거지? 왜냐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까. 무서우니까. 떠올리는 것도, 누군가에게 그것을 말하는 것도 두려워 미칠 것 같으니까. 

무섭다. 

라일라는 억지로 눌러왔던 감정을 상기했다. 역겹고도 끔찍한 생김새의 공포가 몸을 타고 올라와 얼굴을 핥는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것은 질척이는 어둠과 닮아 있어, 라일라는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유리아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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