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31 (3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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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31

툭, 툭.

"……흐음……."

길쭉한 손가락이 책상을 일정한 박자로 툭툭 친다. 공작은 저에게 온 편지를 읽어내리곤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다행히 허락이군.”

공작은 생일 파티를 제외하고도 여러 번 제임스 니고르를 저택이나 모임에 초대했다. 아직 수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니고르 백작은 공작의 초대에 호의적이었다. 

‘조사를 비밀스럽게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니케르먼 공작이라면 이상한 점을 느끼고 백작에게 경고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공작은 커피를 홀짝였다. 원두의 쓴맛이 입안에 감돈다. 마음만 같으면 전쟁터에서 사용하던 방법을 이용해 백작에게서 정보를 캐내고 싶었다. 

생각대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에머스 공작은 어릴 적 전쟁에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피 튀기는 전투도, 상대를 곤혹에 빠뜨리는 전술을 짜는 일도 잘했지만, 그중 가장 잘했던 것은 잡힌 적군이 정보를 토해내게 만드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거래가 있는지, 니케르먼 공작이 그를 열심히 옹호하고 보호하는 탓에 무슨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저번 황태자의 생일 때도 그랬다. 

겉모양으론 아닌 체하며 은근히 편을 들어주지 않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경매를 하는 무리는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 모양인지 아랫사람으로 추정되는 이를 잡아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점조직은 철저한 비밀 유지를 위해 흩어져 있기에 명령을 수행하고 전달하는 각 조직원들이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한다. 경매 조직 안에 있는 여러 개의 조직은 제삼자의 명령에 따라 각자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자기의 일 외에는 정보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고 자신의 일이 어떤 것과 연관이 되어 있는지, 위에서 어떠한 이득을 얻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증인도, 증거도 쉬이 모이지 않아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막다른 길. 

길을 찾기 위해선 지도가 필요했다. 

아니, 약간의 조언이라도 상관없다. 

공작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잔 바닥이 소리 하나 없이 책상에 닿자 보좌관이 다가왔다. 

“공작님, 알려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오늘 오후 라일라 핸슨과 유리아 핸슨이 도련님들의 물건을 훔친 죄로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알아본 바에 따르면 오세스 도련님께서 하녀들에게 돈을 주고 거짓 진술을 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 두 사람이 훔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고요.”

“그거 아주 잘 됐군.”

공작은 조언, 그러니까 핸슨 자매에게 어떻게 정보를 얻어낼까 고민하고 있었다. 

니고르 백작의 저택에서 오랫동안 버틴 그들이니 쓸모 있는 정보를 알고 있을 게 뻔하다. 

신사적인 방법을 사용해 그 정보를 얻어낼 생각이었지만 이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백작에 관련된 이야기를 제대로 말하는 조건으로 꺼내 준다고 한다면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핸슨 자매의 이야기를 해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다니. 공작은 오랜만에 오세스에게 칭찬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의도가 공작을 도우려는 것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더라도 말이다. 

‘라일라 핸슨이 저택을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겠지.’ 

그녀는 오세스를 비롯한 아들들이 라일라 핸슨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보좌관이나 그들의 전속 하인이 말해주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그녀가 모르는 일은 없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 감옥에 가보지.”

“네, 알겠습니다.”

공작과 그보좌관은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입구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은 그녀를 발견하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중 몇몇은 공작보다 먼저 들어서 복도의 불을 밝혔다. 두 사람은 감옥 안으로 들어섰고 뚜벅거리는 소리가 지하에 웅웅 울렸다. 그 발걸음 소리는 소녀들이 갇혀 있는 감옥 앞에서 멈춰 섰다. 

“이렇게 돼서 참 유감이야.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된 건지.”

그렇게 말하는 공작은 전혀 유감이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감정 한 톨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라일라는 왜 공작이 여기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고, 유리아는 당황한 듯 잠깐 눈을 크게 떴으나 잔잔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전에 공작이 했던 제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감옥에 갇혀 있던 시간 동안 과거의 일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공작에게 뭔가 말할 수 있는 내용을 떠올린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생각하려고 할 때마다 니고르 백작에게 잡혀 원치도 않는 일들을 당하고 해야만 했던 끔찍한 기억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오를 뿐이었다. 

억지로 겹쳐오던 입술의 촉감이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옆방에 있을 라일라에게 들킬까, 유리아는 조용히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삼켰다. 그리고 결국 그 일에 관해 떠올리는 것을 포기했다. 

공작은 감옥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을 내보내고 입을 열었다. 

“유리아 핸슨, 이제 뭔가 떠올랐나? 쓸모 있는 이야기라면 너와 네 동생을 여기서 꺼내 줄 수 있을 것 같군.”

“……전, 떠오르는 게 없어요. 정말이에요.”

정말? 

정말인가? 유리아는 자신에게 반문했다. 

‘아니, 거짓말이야.’ 

사실은 그냥 무서울 뿐이다. 떠올리려고 애를 쓰면 무언가 생각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유리아는 그때의 일을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말하는 것은 더욱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공작에게 무엇 하나 말해줄 수없었다 • 

‘왜 말해줄 수 없는거야……? 라라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해줬잖아.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데도, 라일라에게 어떻게든 나가게 해 준다고 말했는데도 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서 유리아는 제 손을 꼬집어 비틀었다. 

‘괜찮아.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오세스 도련님께서 도와준다고 했잖아.’ 

유리아는 그가 정말로 저희를 구해주리라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나 구해주려 해도 공작에 의해 막힐 수 있다는 것을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공작은 무감정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다시 한번 말하지. 넌 안다. 분명히 아는 게 있을 거다. 니고르 백작과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있었을 텐데 모를 리가 없어. 노예와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은 게 있겠지."

"……."

“네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거다. 노예로 팔려 평생을 고통받을지, 구출되어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갈지. 그들이 불쌍하지도 않나? 흠……. 영 입을 열고 싶은 표정은 아니군. 더 시간을 줘야 하는 건가? 언제까지?”

그때 라일라가 공작의 앞까지 다가와 철장을 부여잡았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이 흔들리는 것 같은 소리가 울린다. 공작은 라일라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머리에 감긴 붕대나 피가 묻은 옷, 혼란에 젖은 얼굴은 무척이나 불쌍해 보였지만 공작에게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공작님? 니고르 백작이니, 노예니, 시간을 주니…….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아직 네 언니가 말을 해주지 않았나?”

공작은 장갑 낀 손으로 턱을 쓸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그럴 시간이 없었겠군. 거의 집무실에서 나가자마자 갇힌 셈이니 말이야.”

공작은 친히 라일라에게 집무실에서 말했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해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소녀의 얼굴은 점점 구겨졌다. 

“이만 가보도록 하지. 떠오르는 게있으면 기사에게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해라.”

그렇게 공작은 감옥을 떠나고 기사들이 돌아왔다. 

그녀가 무슨 지시를 했는지 기사들은 정중한 태도로 핸슨 자매에게 혹시 필요한 게 있는지, 어디 불편한 데가 있지 않은지를 물어왔다. 그러나 라일라와 유리아, 두 사람 다 답을 하지 않았고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지하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 순간의 정적을 유리아는 무겁다고 느꼈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공작의 말을 숨겼다고 생각한 라일라가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라일라는 숨기는 게 많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무언가를 숨기고 말해주지 않으면 화를 내곤 했다. 예상대로 분노 어린 목소리가 옆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여기서 탈출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뭐야? 언니, 왜 말 안 했어? 진작 말해줬으면 공작이 오기 전에 뭐라도 떠올려보려고 했을 거 아니야. 예상하지도 못할 일이 일어나서 아무 말도 못 했잖아.”

“……정신이 없었어. 너무 갑작스럽게 이런 일이 일어났잖아.”

“변명하지 마! 말할 시간은 많았잖아!”

“미안해 라라. 네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좀 괜찮아지면 말하려고 했어. 정말이야.”

"……하……."

허탈한 웃음이 섞인 한숨 소리가 났다. 이를 들은 유리아가 몸을 웅크렸다. 

라일라는 화가 났다. 제가 유리아에게 화낼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 화가 났다. 그래서 소리를 질렀다. 

지하 감옥은 소녀의 찢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가득 찼다. 그 소리를 들은 기사들은 몸을 움찔거렸고 유리아는 깜짝 놀라 라일라의 이름을 거듭 외쳤다. 

라일라 핸슨은 하루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키스를 당했고,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혔다. 

갇히는 과정에서 머리에 충격을 받고 과거의 기억이 일부분 돌아왔고 공작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기까지 했다. 

누명을 쓴 것이 이즐리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작의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혼란스러웠다. 

그녀 자신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과거에 니고르 백작에게 붙잡혔을 때와 똑같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스트레스는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안 그래도 니고르 백작의 일이나 도련님들의 일 때문에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녀가 겹친 악재와 충격에 폭발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불안과 공포를 분노라고 생각하는 것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라일라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유리아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상황에도 화가 났고,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났고, 공작에게도 화가 났고, 도련님들에게도 화가 났다. 

그냥 모든 것에 화가 났다.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벽에 머리를 박았다. 

퍽, 퍽, 퍽, 퍽! 

“라라……? 이게 무슨 소리야? 너 뭐 하고 있는 거야……?”

퍽, 퍽, 퍽, 퍽! 

“너 설마…… 아니지? 하지 마, 라라…… 하지 마!”

퍽, 퍽, 퍽, 퍽! 

“하지 말라고!”

……퍽. 

“……제발…….”

라일라가 계속해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자 기사가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라일라가 계속해서 머리를 박자 기사가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에게 잘 대우하라는 당부를 들었던 터라 그녀의 행동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만하십시오. 그러다 큰일 납니다.”

그 말에도 라일라는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기사는 얼굴을 억지로 붙잡았다. 그러자 라일라는 마구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소리까지 지르며 난리를 부려대는 탓에, 기사는 그녀를 바닥에 짓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버둥거리던 라일라는 잠시 뒤 아까 일으켰던 일들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기사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상태를 확인했다. 한눈에 봐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마에는 상처가 났고, 바닥에 누르다 어딘가에 잘못 박았는지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소녀는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그는 다른 기사와 상의한 후에 의사를 데려오기로 했다. 

한 기사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라일라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유리아의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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