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9
오세스가 비장하게 내뱉은 말은 이랬다.
“라일라. 이마가…… 왜 그런 거죠? 상처가 심하잖아요.”
뭐라고? 이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내 이마에 대해 걱정하는 게 정상일까? 여기까지 와서도 착한 척을 하는 거야?
그는 천성이 차가운 사람이다. 단지 공작에게 예뻐 보이고 싶어서, 주변 사람들의 동경 어린 눈빛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착한 사람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본래 성격대로라면 죄수에게는 그 가면을 벗고 본모습을 보여줘야 할 텐데, 어째서 아직까지 착한 척을 하는 걸까.
유리아 앞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퍼뜩 오세스가 내게 관심 있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동시에 오세스의 말에 잊고 있던 상처가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이마를 벽에 박았으므로 흠집이 났을 것이다. 피까지 줄줄 흘렀으니 어느 정도로 심한 상처일지 대강 예상이 된다.
딱히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조용히 있자 그가 옆에 있던 기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이런 짓을 한 건가요?”
오세스는 갑자기 화내는 시늉을 했다.
그는 기사들에게 어떻게 한참 어린 소녀에게 손을 댈 수 있냐고 다그쳤다. 그들은 억울한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곤 사과했다. 오세스는 기사 하나에게 내 이마를 치료할 물건을 가져오라고 명령했고, 그는 명령에 따라 지상으로 향했다.
아주 이상한 광경이었다. 어디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어느 하나만 콕 집을 수 없을 정도로.
“라일라, 많이 아프죠? 조금만 참아요. 곧 기사가 약을 가지고 올 거예요.”
그가 친절하게 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기에 살짝 미친것처럼 보인다.
옆에서 철장이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유리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라…… 다친 거야? 아까 그런 말은 없었잖아.”
“……별거 아니야. 조금밖에 안 다쳤어.”
오세스가 눈살을 찌푸리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마 쪽을 힐끔 보는 모습이 마치 ‘별거 아니기는’, 하고 비꼬는 것 같다.
한참 내 걱정을 하던 유리아가 오세스를 향해 다시 한번 “도련님”을 외쳤다. 그제야 그는 유리아에게 시선을 돌린다.
“무슨 일인가요, 유리아.”
“……도와주세요.”
그가 유리아가 갇힌 감옥 앞으로 다가갔다.
“저희는 물건을 훔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어떻게 평민이 귀족님 무서운 줄 모르고 그런 짓을 하겠어요. 이건 뭔가 잘못된 거예요. 제발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사건의 진실을 밝혀주세요. 이번 한 번만 저를 믿어주세요.”
소용없다. 도와주지 않을 것이며 도와줄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일에는 이즐리가 엮여 있다. 우리를 도와준다는 건 그와 척을 진다는 것이다. 그런 귀찮은 일을 할 턱이 없다. 그리고, 도와준다고 하면 그게 다른 것보다 더 위험하다. 저 음흉한 새끼가 탈출을 조건으로 무슨 부탁을 할지 모르니까.
오세스는 진중함이 드러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믿어요. 전 유리아와 라일라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걸요. 분명히 누군가가 하녀들을 이용해 두 사람을 함정에 빠뜨린 게 틀림없어요.”
“도련님……!”
“걱정 말아요. 제가 잘 해결해줄게요. 이런 짓을 벌인 범인을 잡는 것도, 여기서 꺼내 주는 것도.”
썩은 동아줄이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하늘에서 다른 동아줄을 내려주지 않기에 썩었다는 걸 알면서도 유혹적이다. 유리아가 잡지 않도록 말려야 한다.
질질 기어서 철장 앞까지 다가갔지만 유리아에게 도움을 구하지 말라는 말도, 오세스에게도 꺼지라고도 하지 못했다.
말려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게 옳은 행동인지 모르겠다. 또 뭔가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무슨 결과가 나오든 차라리 가만히 있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어쨌거나 그의 도움을 받게 되면 감옥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오세스가 끔찍하게 웃었다.
이윽고 기사가 돌아왔다. 구급함과 물, 수건을 품에 안고 있던 그는 명령에 따라 철장 문을 열었다. 오세스가 약을 들고서 혼자 안으로 들어왔다.
기사가 함께 들어오려고 했지만 오세스가 그러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가 물이 담긴 대야와 구급함을 내려놓고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세스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조심스레 내 이마를 닦아주었다. 수건이 닿는 부위가 따끔해서 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럴 때마다 오세스의 손길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소중하게 여겨주는 것 같은 느낌에 속이 울렁거린다.
언제나 그들의 호의 엇비슷한 행동은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의, 원하지 않는 호의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는 솜씨가 퍽 능숙했다. 귀족이 상처치료라니, 전혀 안 어울리는걸. 이런 건 보통 아랫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오세스가 붕대를 테이프로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이즐리는 사고를 아주 많이 치는 아이였답니다. 매일 상처를 달고 다녔어요. 고용인들이 상처를 치료해주려 하면 이리저리 도망 다녔죠. 그런데 참 신기하죠. 제 앞에서만은 얌전해서 제가 그들 대신 상처를 치료해주곤 했죠.”
"……."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아서도 꽤 다혈질에 사고뭉치라서 이즐리와 자주 싸웠어요. 제가 이런 일에 능숙한 건 아주 당연한 일이랍니다. 그러니 엉성하게 치료할까 봐 걱정하지 말아요.”
"……."
“아파도 참아요. 곧 끝날 테니까.”
그의 시선이 이마에서 내 얼굴로 내려왔다. 어둠에 가려져 짙은 보라색으로 보이는 적안이 나를 직시했다. 기다란 속눈썹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파르르 떨린다.
어두운 지하 감옥과 일렁이는 램프의 주황빛, 남자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참 신기한 일이지. 모두가 감탄하며 칭송할 것 같은 이런 모습이 내게는 혐오스럽게 다가온다. 그래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를 싫어한다는 것을.
“왜 도와주는 거예요?”
“말했잖아요. 두 사람을 믿는다고요. 범인이 아닌 걸 알고 있으니까 도와주려는 거예요.”
나는 웃었다. 너무 어이없어서. 그래, 그런 걸로 치자. 난 네 말을 믿을 생각이 없지만.
오세스는 말없이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고 곧 물건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들고 있는 것을 기사에게 건넨 그는 유리아와 나를 안심시키는 것처럼 다시 한번 꼭 탈출시켜주겠다고 말하곤 감옥을 나가버렸다.
* * *
지하의 어둠에 익숙해진 터라 햇빛에 닿은 눈이 따끔거린다. 오세스는 눈을 찌푸리고는 손으로 햇빛을 막았다.
감옥의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전속 하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오세스는 하인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다 뒤를 돌았다. 떠올리는 사람은 누명을 쓰고 갇혀 있는 하녀, 라일라 핸슨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참 얌전했지.’
평소에는 어디서 그 기운이 나는지 방방 뛰어다니던 소녀였다. 그러나 감옥에 갇히자 병든 말처럼 기운이 없어 보였다.
죽은 새처럼 생기 없는 눈이나 기사에게 험한 일을 당한 일을 당한 듯 심하게 찢어진 이마를 보자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평소에는 누가 그런 눈을 하든, 다치든, 죽어버리든 상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굳이 직접 치료까지 하는 친절을 베푼 것은.
최근의 자신은 너무나 이상하다.
공작을 제외하면 누구도 오세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유리아라는 하녀가 눈에 들어왔다. 평민답지 않은 곱고 아름다운 외모나 부드러운 말씨,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친절한 성격, 그 모든 것이 눈길을 끌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녀는 묘한 기품까지 가지고 있어서 하녀복을 입고 있지만 않았다면 귀족 영애라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동생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라일라라는 이름의 여동생이다.
분명 같은 배에서 나왔을 텐데 유리아와 라일라는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면 하나도 닮은 점이 없었다. 유리아는 아름다웠고 키가 컸고 어른스러웠다. 라일라는 평범했고 키가 작았고 어리석었다.
제 언니와 자신이 잘 어울린다며 엮어주려고 할 때는, 너무 주제도 모르고 멍청해 보여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올 지경이었다. 누구랑 누구를 엮으려고 하는 거지?
저런 동생을 가져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처럼 동생에게 열등감을 느낄 일이 없다는 일에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때의 오세스는 라일라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변화의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갑자기 나타난 괴물에게서 자신의 언니를 지켜주려는 것 같은 행동을 하며, 이전까지의 동경과 호감 어린 시선과 달리 짜증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부분에서 오세스는 깊은 흥미를 느꼈다.
신기해. 분명 저 애는 나를 좋아했을 텐데, 갑자기 싫어하게 되다니.
어떻게 사람의 감정이 하루아침에 저렇게 바뀔 수 있을까?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보여준 감정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마치 ‘그 사람’ 같았다.
그 뒤로 라일라는 오세스의 관심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자꾸만 생각나고, 시선이 저절로 따라갔다.
언제나 자신을 끔찍하다는 듯 바라보는 눈이 다시 호의를 띠면 어떨까, 전처럼 진심으로 환하게 웃어 보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가 하녀 일을 그만두고 저택을 나간다는 소식을 듣자 계속 이곳에 있어주기를 바라게 된다.
이상하게도.
라일라는 귀족의 물건을 훔쳤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다. 누명을 벗길 수 있게 도와주면 다시 과거처럼 웃어줄지도 모른다. 감사하다고 꾸벅 고개를 숙여올 것이 눈에 선명하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경비대에게 넘겨지거나 고문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구해주면, 마음속 깊이 감사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때 정 고마우면 계속 공작가를 위해 일해달라고 말하자. 그럼 저택에 남아주겠지. 아서처럼 공작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이게 더 확실한 행동이다.
만약, 그런데도 나간다고 하면?
자세한 계획은 없지만 대강 생각해둔 것은 있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행동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굳이 이유가 필요한가? 그는 고귀한 공작가의 장남이었고,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는 힘도, 자격도 가지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하녀 하나를 계속 붙잡아두고 싶으면 그냥 그리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오세스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하인에게 다가갔다.
“셰인. 하녀들에게 돈은 줬나요?”
“네, 도련님. 전부 전달해뒀습니다. 물론 입단속도 단단히 시 켰습니다.”
“잘했어요.”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