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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8 (2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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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8

뜨겁고 질척이는 무언가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파……."

피였다. 본래는 붉은색이었을 그것은 기사들이 복도에 켜놓은 작은 횃불만이 옅게 빛을 발하는 어두운 지하감옥에서는 짙은 보라색으로 보였다. 

보라색으로 보여서 다행이다. 지금은 이즐리 에머스를 연상시키는 붉은색이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놈의 눈동자 같은 선명한 빨간색을 맞닥뜨리게 되면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대어 앉은 상태로 눈을 감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왜 나랑 언니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된 걸까. 모든 일이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아직까지 현실감이 없다. 

그저 지독한 악몽에 빠져버린 기분일 뿐.

나는 이즐리에게 강제로 끔찍한 짓을 당한 후 저택의 의무실에서 눈을 떴다. 도저히 일어날 기운이 나지 않아서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기운이 나지 않는 수준이 아니었다. 우울하고 괴롭고 끔찍해서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뇌를 파고든 벌레라도 되는 양, 이즐리의 얼굴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라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갑자기 의무실 안으로 기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나를 잡아채고 강제로 여자 숙소에 데려갔다. 그 후로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을 받고 이 꼴이다. 

설마,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이즐리의 짓일까? 내가 자기 마음을 안 받아줬다고 응징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떠나지 못하게 잡아두는 건가? 나는 마음속으로 이 일의 범인이 이즐리 임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여러 명의 하녀들이 우리가 도둑질을 하는 걸 봤다는 가짜 증언을 했다. 

하녀들을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위에 앉은 권력자일 게 뻔했다. 

각 고용인들의 장들과 공작, 공작의 아들들. 하녀장과 집사장, 공작 같은 사람이 내게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범위는 눈에 띄게 좁혀진다. 공작의 아들들, 그중에서 가장 수상한 것은 이즐리. 원작에서도 언니를 지하에 감금한 장본인 중 하나였으니 내게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역겨운 새끼. 더러운 놈. 쓰레기. 그깟 거지 같은 감정 때문에 이런 짓을 한 거야?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심장을 꺼내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조리 도려내고 싶다. 내가 이래서 너희들을 싫어했었어. 니고르 백작과 똑같은 놈들이니까.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력과 힘을 사용해서 상대를 옥죄는 쓰레기니까! 

이것이 이즐리의 짓이라면 유리아가 나랑 같이 도둑질 범인으로 몰린 것도,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된 것도 나 때문이구나. 생각해보면 그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은 언제나 나 때문이었다. 니고르 백작에게 끔찍한 일을 당한 것도, 지하 감옥에 갇힌 것도, 모든 것이. 

나 때문. 

가슴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뜨겁고 답답하고 괴로운, 여러 종류의 것이 뒤섞여 차마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이다. 그것은 눈물의 형태로 몸속에서 빠져나간다. 피와 눈물이 뒤섞여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눈물을 소매로 닦아내고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울지 마. 울지 말란 말이야. 울 자격도 없잖아. 

그때 감옥에 벽에 이리저리 퉁겨 웅웅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들려왔다. 

“라라!”

유리아의 목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괜찮아? 왜 아까부터 답이 없었어? 걱정했잖아.”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한 차례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답했다. 

“……좀 기절을 해서 그래. 갇힐 때 벽에 머리를 잘못 박았나 봐.”

“세상에……. 기사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많이 아프니? 혹시 피가 나는 건 아니지? 약이, 약이…… 아…… 여기에는 없구나…….”

걱정하는 목소리는 상냥하기 그지없다. 착한 유리아는 언제나 내게 상냥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내가 저지른 짓을 모르기 때문이겠지. 만약 내가 그녀를 구해주겠답시고 저지른 짓을 알게 된다면 분명히 착한 그녀라도 나를 원망할 것이 뻔하다. 

‘내 인생이 망가진 건 전부 너 때문이야.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잖아!’ 

그 예쁜 얼굴이 분노와 혐오로 일그러질 것이라 생각하자 심장이 욱신거렸다. 미안하다는 작은 웅얼거림은 벽에 막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유리아는 계속해서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아까 많이 무서웠지?”

"……."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우린 정말로 도련님들의 물건을 훔친 적이 없잖아.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는 법이잖니. 곧 하녀장님이 죄가 없다는 걸 아시고 우리를 풀어줄 거야.”

거짓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서. 목소리가 덜덜 떨렸기에 나를 걱정시키기 않으려고 애써 밝은 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거대한 힘이 우리를 이곳으로 떠밀었고, 따라서 풀려날 길은 전혀 없다는 걸. 이제 곧 죄인으로 찍혀 감옥 안에서 썩어가거나 운이 나쁘면 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절절히 예감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도…….

“……괜찮지 않잖아.”

그 말을 내뱉고 나서야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손을 들어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열심히 달래주려고 하는 사람에게 이딴 말이나 하다니. 

평소처럼 그게 아니라고, 나도 우리가 풀려날 걸 믿고 있다며 동의해주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서 더이상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단순히 목이 메어서가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자 거짓된 희망에 도저히 동의할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니, 우리는 절대 괜찮지 않을 거야. 큰일을 당할 거야. 도둑질을 한 죄로 죄인으로 찍히고 고문을 당할 거야. 이즐리는 나를 사랑한다고 지껄이면서 온갖 방식으로 나를 괴롭힐 것이고, 언니는 자신의 사랑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죽여 버릴지도 몰라. 우리는 영원히 이 지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머릿속에서 절로 떠오르는 상상은 말하지 않기로 한다. 

내 부정적인 대답에 유리아는 입을 다물었고 지하 감옥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숨 막히는 고요함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 말에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듯, 잠시 뒤 유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알아.”

“……어?”

“……그래도,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해 줄게.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줄게. 너만은 반드시. 그러니까 울지 마, 라라…….”

유리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무슨 수로? 언니가 뭘 할 수 있는데? 여리기만 한 그녀가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리아는 내가 지켜줘야 할 대상일 뿐,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 었다. 원작에서도 공자들에게 도망치려다 결국 굴복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는 그녀가 애처롭게 내뱉은 말들을 믿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까? 이즐리에게 뭐든 할 테니 제발 풀어달라고 빌기라도 해야 할까? 그러면 불쌍하다고 풀어줄지도 모르잖아. 아니, 소용없을 거야. 동정심은커녕, 비열하게 웃으면서 평생 갇혀있으라고 말하겠지. 갇혀 있는 모습이 최고로 보기 좋다고 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내 행동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끔찍한 사건을 피하려고 발버둥 칠 때마다 더 끔찍한 결과로 돌아오고는 했다. 니고르 백작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공자들을 피하게 하려다 니고르 백작과 맞닥뜨리게 만들었고, 공자들과 엮이지 않게 하려다 이즐리의 마음을 사 지하 감옥에 갇히게 만들었다. 

나라는 존재가 유리아에게 악영향만 미쳤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이야기는 엉망이 되어갔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한 모든 행동들은 쓸모없었고 내 존재 자체는 살아 있는 죄악이다. 어쩌면 끔찍한 쓰레기는 니고르 백작이나 에머스가의 도련님들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호의와 도움을 명목으로 계속해서 유리아를 괴롭혀왔지 않은가? 

답답한 나머지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마음 같으면 철장을 붙들고 이즐리에게 욕을 퍼붓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온몸에 힘이 다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화나는 마음과 반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죽어버리고 싶다. 옆에서 유리아가 애처로이 내 이름을 불렀다. 

답하는 대신 그냥 눈을 감았다. 

저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거리는 구두 소리가 지하의 벽에 부딪혀 웅웅 울렸다. 누굴까? 이 저택에서 구두를 신는 것은 보통 귀족이나 집사 정도였다. 처음에는 이즐리가 내 꼴을 보기 위해 지하 감옥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즐리는 불편해 죽겠다면서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절대 구두를 신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구지? 에머스 공작이 감히 귀족의 물건을 훔친 멍청한 하녀들을 보러 온 걸까? 아니면 하녀장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려주기 위해 찾아온 걸까? 기사들이 다가오는 이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이는 소리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듣고는 눈을 떴다. 그곳에는 예상외의 사람이 서 있었다. 오세스 에머스가 주황색으로 빛을 내고 있는 램프를 든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도 나와 똑같은 시점에 이를 눈치챘는지 놀란 것처럼 이렇게 외쳤다. 

“도련님……?”

옆 감옥에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아가 철장에 바싹 달라붙어있는 게 틀림없다. 그녀가 무어라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다시 한번 “도련님!”하고 외쳤지만 오세스는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 빨간 눈과 마주치자 이즐리의 얼굴이 떠올라 눈살이 찌푸려진다. 

오세스가 왜 여기 온 걸까. 여기까지 올 이유가 있나? 유리아를 보기 위해 찾아왔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갇힌 감옥 앞에 서서 이상한 얼굴을 한 채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아를 보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라면 하녀장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잠깐 보러 왔나 보지. 얼마나 멍청하고, 어리석은 하녀들이 귀족의 물건에 손을 댔는지 궁금해서. 아니면 그 어리석은 하녀들에게 공작 대신 벌을 주기 위해 직접 찾아온 걸지도. 

오세스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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