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7
에밀리 아주머니는 하녀장을 향해 소리 질렀다.
“하녀장님,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이 아이들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겠어요?”
방 앞에는 하녀장님과 라라, 에밀리아 주머니와 익숙한 얼굴의 하녀가 보였다. 저보다 열 살 정도 더 많은, 옆방에 살고 있는 모니카였다. 벌컥 문이 열려 마구 헤집어진 방이나 하녀에게 붙잡혀 있는 에밀리 아주머니보다 더 먼저 눈에 띈 것은 하녀들에게 깔린 채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는 라라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걸까? 유리아는 저를 붙든 남자들의 손을 모조리 내팽개쳐버리고 라라에게 달려갔다. 라라를 제압한 하녀들을 우악스럽게 밀치고는 재빨리 라라를 일으켜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평소 같으면 그들에게 짧은 사과라도 건넸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유리아는 동생의 몸을 확인하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어디에 맞은 것처럼 뺨이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어딘가에 긁힌 무릎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다.
“라일라, 라라, 내 동생…….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이거 누가 다치게 했어. 저 사람들이야? 많이 아파? 괜찮아?”
라일라는 멍한 얼굴로 유리아를 쳐다보았다.
“……이즐리 도련님이 나한테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니까 의무실에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하녀들이 여기로 데려오더니……. 나는…… 나는 모르겠어……. 나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어…….”
모든 걸 포기한 것만 같은 그 눈과 마주한 유리아는 슬픔보다도 더 큰 분노를 느꼈다. 유리아는 이미 니고르 백작의 저택에서 라일라와 똑같은 눈을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라일라를 뒤로 숨기고는 답지 않게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던 것이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일인 걸? 너희들에겐 정말 실망했어. 추천장을 써준 걸 후회하게 되는구나! 어떻게, 감히 도련님의 물건을 훔치다니……. 간이 부었구나? 너흴 추천해준 에밀리가 불쌍할 따름이야.”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는데요? 지금 제가 알 수 있는 건 당신들이 내 동생에게 함부로 굴고 있다는 사실뿐인걸요.”
유리아는 애써 분노를 꾹꾹 눌러 담고 말을 했다. 하녀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터뜨렸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차마 들어주기 어려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어느 날, 우리의 옆방에 살던 모니카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평민에 불과한 라일라가 보석으로 만들어진 브로치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그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날마다 유리아 아니면 라일라가 비싼 물건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모니카는 오늘 우리의 방은 뒤져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자 도련님들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잔뜩 발견됐단다. 모니카는 우리가 도련님들의 물건을 훔친 것을 깨닫고 하녀장에게 알렸다.
하녀장은 처음에 믿지 못했지만 모니카를 비롯한 여러 하녀들의 증언과 방에서 나온 물건들을 보고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범인인 유리아와 라일라를 불러 이 일을 추궁하고 벌을 주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이 일의 전말이었다.
도둑질을 했다고? 누명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혹시 공작님이 나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복이라도 한 걸까? 설마 그럴 리가. 시간을 더 주겠다고 했는걸.’
유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희는 그런 일 한적 없어요.”
유리아는 이 상황에 숨이 턱 막혀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에요……. 다시 조사해보세요. 증언한 사람들이 전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저흰 죄가 없어요.”
“증거가 여기 있는데 계속 발뺌만 하는구나!”
하녀장은 유리아의 팔목을 부여잡고 억지로 방 안으로 들였다. 그녀는 서랍 안에 들어 있던 화려한 장식의 단검을 보여주었다. 찢어진 베개 안에 들어 있던 액세서리들을 쏟아내었으며, 옷장 옷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던 책들을 꺼냈다.
유리아는 그 속에서 오세스가 좋아하는 책들을 보았고, 이즐리가 심심찮게 돌리고 있던 단검, 아서가 가끔씩 귀에 걸고 다니는 귀걸이를 발견했다.
목격자와 증인, 증거까지 모두 나왔다. 아니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녀가 꺼내는 말들을 그저 같잖은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이대로 죄를 뒤집어썼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치안대에게 넘겨지면 운이 좋은 것이고, 운이 나쁘면 감히 귀족의 물건에 손을 댔다며 어딘가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유리아는 주먹을 쥐었다.
“……정말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 어떻게 해야 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해결할 수 있을까? 라라, 만약 너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나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 기억을 잃기 전의 너였다면 분명히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난 한심해. 멍청해. 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려고 해도 항상 이 모양 이 꼴이야.
그때였다.
“……맞아요. 훔쳤어요.”
라일라가 메마른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람들 말에서 틀린 부분이 좀 있네요. 사실 저희 둘이 훔친 게 아니라, 다 제가 혼자 훔친 거예요. 도련님들 물건을 보니까 탐이 나서라고요. 고양이 앞에 생선을 두고서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는 게 우스운 일 아닌가요? 그러니까 언니는 놔주세요. 유리아는 아무 잘못 없으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걸 인정하면 안 되는 거잖아.
유리아는 라일라를 제 품으로 끌어안곤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마구 소리 질렀다. 아니라고, 너무 무서워서 거짓말을 했다고, 사실은 자기 혼자 다 훔친 거라고. 용서만 해주면 뭐든 하겠다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하녀장은 더 이상 두 사람의 변명을 듣기 싫다며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기사들은 유리아와 라일라를 잡아챘고, 저택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에밀리의 고함이나 유리아의 반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유리아와 라일라는 분리되어 철창에 갇혔다. 유리아의 오른쪽 감옥에는 라일라가 있었고, 라일라의 왼쪽 감옥에는 유리아가 있었다. 유리아는 기사들에게 내팽개쳐진 탓에 바닥에서 험하게 굴렀다. 기사는 두 명만 남은 채 나머지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갔다.
유리아는 바닥에 부딪혀 얼얼한 턱을 쥐고는 철장 쪽으로 다가갔다.
“라라! 라라, 괜찮아?”
건너편에서는 아무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라라…….”
유리아는 초조해졌다. 라라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감옥으로 던져졌다.
혹시 어딘가에 부딪혀서 정신을 잃은 건 아닐까? 그래서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 상황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유리아도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옆에 있을 라라가 걱정되어 그럴 수가 없었다. 기사들에게 동생의 상태를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 * *
내 이름은 라일라 핸슨.
나는 전생을 기억을 가지고 로맨스 판타지 소설, 「장미 저택의 비밀」에서 환생했다. 좋아했던 소설이었기 때문에 알고 있던 여러 사실들을 조합해 내가 이 피폐 소설에 환생했다는 것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세상에! 어떻게 신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신을 믿지는 않았어도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자주 가던 나에게! 다른 좋은 소설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피폐 소설이란 말인가? 그래도 나는 이 세계의 가족들을 사랑했다.
특히 나의 언니이자 이 세계의 주인공인 유리아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착하고, 말 예쁘게 하고, 잘 웃고, 귀엽게 생겼고, 나보다 한참 어리면서도 언니랍시고 나를 챙겨주려는 이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전생의 내게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더 정이 갔다. 그래서 더더욱 「장미 저택의 비밀」이 피폐 소설이라는 것에 크게 절망한 것이다.
왜 피폐니? 여주부둥물이면 좀 좋아! 우리 귀여운 유리아가 잘생기고 능력 좋은 남자들에게 사랑받는 걸 볼 수 있다면 무척이나 행복했을 텐데.
괴로워해도 소용없다. 이미 미래는 정해져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생의 기억을 이용해 그 미래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가장 먼저 내가 바꾸기로 한 것은 부모님의 죽음이다.
원작에서 원단 상인이던 부모님은 원단을 베르모르 후작령에 있는 의상 가게에 가져다주다가 뒷골목 깡패에게 습격당해 죽는다. 그래서 나는 절대 베르모르 후작령에 있는 의상 가게와는 거래하지 말라고 부모님께 조언했다.
내가 전생의 기억을 이용해 또래답지 않은 똑똑한 모습을 여럿 보여주었으며(부모님은 나를 천재라고 생각했다) 전생의 세계에 존재하던 물건들을 내가 스스로 개발한 척 보여준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내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들은 내 말대로 베르모르 후작령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부모님이 타고 오던 마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마부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부모님은 사망했다. 슬프고 괴로웠다. 차마 말로 다 꺼내지 못할 절망이 나를 덮쳤다. 그렇다고 쓰러져서 멍청하게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게 돌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유리아, 나의 가족, 언니이자 동생 같은 소녀.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유리아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유리아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바로 엄마의 친구인 에밀리의 집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 추천을 받아 에머스 공작가에서 일하게 되는 줄거리였다. 그래서 나는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다, 여기 계신 부모님의 무덤이 우리를 그리워한다는 등의 온갖 억지를 부려대며 니고르 백작령에 남자고 말했다.
내게 유난히 약하던 유리아는 결국 내 말을 따르기로 했다.
우리는 각자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었다. 난 정말 잘 살 자신이 있었다.
돈을 조금만 더 모아서 이곳을 떠나 가정교사를 하거나 머릿속에 있던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장사를 해볼 생각이었다.
유리아와 나는 한동안은 행복했다.
니고르 백작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어 버리고 그의 아들이 새로운 영주가 되기 전까지는.
내가 만약에 니고르 백작령에 남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우리는, 유리아는 그럴 일을 당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러니까 전부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미래를 알아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그깟 지식 하나 가지고 있다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나았을 거야. 알고 있기에 더 괴로웠다.
눈을 떴을 때, 우울한 과거는 사라지고 차가운 현실이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나는 지하 감옥 벽에 머리만 기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에 젖어 뒤통수의 얼얼한 통증을 느끼게 된 것은 꽤나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아무래도 기사가 나를 던질 때 머리를 잘못 부딪쳐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머리에 충격을 받았다고 잊어버린 과거의 기억 중 하나가 되돌아왔다. 끙끙거리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나는 한참 멍하니 철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주먹으로 제 머리를 후려쳤다.
이를 세워 팔을 깨물고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벽에 머리를 몇 번이나 부딪히고는 실실 웃었다. 나에 대한 혐오감이 치밀어 올라와 도저히 나를 벌주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정말 나 때문이었구나. 내가 백작령에 남자고 해서 그런 일이 생긴 거구나. 하하.
"……하하하……."
죽어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