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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6 (2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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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26

    유리아는 찻잔과 따뜻한 차가 잔뜩 든 주전자, 차와 어울리는 간식을 올려둔 트레이를 밀고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평소에는 다른 하녀가 이 일을 도맡아 했는데 오늘은 어째선지 공작이 특별히 유리아를 콕 집어 차를 가져오라고 시킨 것이다. 

    담당 하녀가 아픈 것도 아니고, 휴가를 간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의문을 느끼면서 집무실에 노크했다. 

    “공작님, 차와 간식을 가져왔습니다.”

    “들어오도록.”

    유리아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예법에 신경 쓰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집무실 안에는 공작과 손님으로 추정되는 이가 앉아 있었다. 원래라면 공작가에서는 손님이 오기 며칠 전부터 다들 그에 관련된 안내를 받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고용인들이 저택에 찾아오는 손님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의 정체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공작의 비밀 손님이라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저를 여기에 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저 손님의 정체를 밖에 내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이 무거워 보였던 걸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어 올린 유리아는 손님의 얼굴을 보곤 너무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야? 

    알렉산더였다. 

    짙은 갈색 머리에 녹색 눈, 그가 소파에 앉은 채 유리아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은 눈이 마주치자 와락 구겨진다. 

    왜 그런 짜증 난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 오히려 그런 표정은 내가 지어야 옳지 않아? 

    만약 이 자리에 공작이 없었다면 그녀는 당장 알렉산더에게 달려가 무슨 꿍꿍이냐며 그 속내를 추궁했을 것이다. 그를 보면 니고르 저택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유리아는 벌벌 떨리는 손에 애써 힘을 주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륵, 하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찻잔이 채워진다.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라라가 말해줬었잖아. 니고르 백작과 에머스 공작의 교류가 많아질 거라고. 교류의 시작으로 제 보좌관이라도 보내줬나 보지? 유리아는 공작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보좌관 몫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때, 공작이 말했다. 

    “알렉산더 발터, 인사라도 하지 그러나? 아는 얼굴 아닌가. 유리아 핸슨은 이래 봬도 네 주인의 연인인데, 인사하지 않으면 예의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유리아가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려 산산조각 내버리고, 김을 뿜고 있는 따뜻한 차를 바닥에 쏟아버린 것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재빨리 사과를 했다. 

    “죄송, 죄송합니다. 얼른 치우겠습니다.”

    치마를 그러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지금, 공작님이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내가 니고르 백작의 연인이라고 말한 거야? 어떻게 그걸……? 

    니고르 백작은 그녀를 저택에 있는 방에만 가둬두고 고용인의 출입도 대부분 막았기 때문에 유리아가 그에게 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공작의 힘이라면 그 정도 정보쯤은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작은 저택의 수많은 하녀 중 한 사람에 불과한 유리아의 정보를, 뭐가 궁금하다고 굳이 힘을 들여 알아낸 거란 말인가. 분명 그녀에게는 쓸모없는 정보일 텐데. 유리아는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치울 필요 없다. 그대로 거기 서 있어라.”

    고개는 들라는 말에 유리아는 슬그머니 얼굴을 들었다. 알렉산더는 화난 것 같은 얼굴로 공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그동안 모른 척 넘어가 준 것도 고마워해야지. 이런 사실을 숨기면 우리 사이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겠나. 나는 말이야, 우리의 일에 유리아 핸슨이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쓸모 있는 정보를 알고 있지도 않을 겁니다. 그녀는 그저…… 백작에게 놀아난 피해자에 불과하니까요.”

    “그건 그대 생각이고.”

    유리아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꽤 많은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는 어떤 모종의 계약이 있으며, 그 일에 자신이 큰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가 공작에게서 유리아의 존재를 숨겼다는 것은……. 

    공작이 차를 홀짝였다. 

    “지금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녀는 눈치를 보다가 공작의 물음에 몸을 움츠렸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모시는 분의 비밀을 알게 된 하녀가 살해당하는 것은 비일비재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도망쳤을 텐데.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했으나 공작은 계속 말을 잇는다. 

    “알다시피 이 제국에서 노예는 불법이다. 선대 황제와 함께 노예 경매를 없애고 이를 열었던 귀족들을 멸살했던 것은 공작가에서 이뤄낸 일 중 꽤 훌륭한 업적에 속하지. 하지만 요즘 다시 뒷 세계에서 노예 경매가 유행한다고 하더군.”

    알렉산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주먹으로 내리쳐진 테이블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푹 젖은 그의 얼굴이 울긋불긋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공작님! 제발 그만하십시오! 저 애를 이 일에 끌어들이지 말아 달란 말입니다…….”

    “어리석은 놈. 대의를 위한 일에 네 같잖은 감정을 집어넣지 마라. 저 아이를 보다 보면 네 가족이라도 생각나는가 보지?”

    “전, 저는…….”

    알렉산더는 뭐라 하고 싶은 사람처럼 입을 뻐금거리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노예 경매에 대한 건 소문만 돌뿐이지 그 정체를 제대로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는 그저 멍청한 소문이라 치부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거든. 그런 소문이 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귀족에게서 니고르 백작이 경매와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

    “그런데 그는 다음 날 자살한 시체로 발견됐어. 그럴 인간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시체에게선 더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그 후에 경매에 관한 증거나 실제 그 경매가 일어나는 장소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지. 발터가 스파이로서 열심히 행동해주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어. 증거를 찾거나 현장을 잡아야 죄를 묻든 말든 할 텐데 말이야. 나와 비등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니고르 백작의 뒷배가 되어준 게 틀림없어. 우선, 나는 그 뒷배를 니케르먼 공작가로 추측하고 있지. 이상할 만큼이나 백작과 붙어 다니더군.”

    노예. 그 말에 유리아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 조각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와 혐오감, 참을 수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알렉산더가 공작의 스파이였다고? 언제부터? 그래서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 탈출을 도와준 거였을까? 부글거리는 속 안을 게워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왜…… 그런 말을 제게 해주시는 건가요?”

    “그대가 이 일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까. 니고르 백작의 곁에서 거의 1년을 버텼지 않나. 어떻게 알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지? 돈 주고 겁 좀 먹이면 뭐든 털어놓는 게 이 세상이니까. 명목상 연인으로 있었을 테니 니고르 백작의 내밀한 속사정까지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이제야 알겠다. 분명 공작은 이것을 물어보기 위해 차를 내오라고 시킨 것이다. 

    “전…….”

    유리아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쥐었다. 식은땀을 쓸어낸 손이 기분 나쁘게 축축했다. 모른다. 노예? 경매? 뒷 세계? 그런 걸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알고 있다고 해도…….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고 싶지 않다. 그 어떤 사람도 악몽을 꾸고 깨어난 뒤에 그 꿈을 다시 떠올리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네게 노예 경매와 관련된 이야기도 하지 않았나?”

    “저는…… 아무것도…….”

    유리아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행동으로 나온 걸지도 모른다. 문손잡이를 잡았지만 열고 나갈 자신은 없었다. 고용인들이나 여러 사람들의 두려움을 사는 공작이 무서웠고 멋대로 나간 다음 그녀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는 건 모조리 말해. 정보가 쓸모 있다면 큰 상을 줄 수도 있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자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유리아는 움직이는 것을 물론이고, 숨을 쉬는 것도 버겁다고 생각했다. 공작은 무표정했지만 심기가 불편한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이에요……. 저는…… 저는 그저…….”

    “모르는 사람은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아. 말을 하기 싫은 건가, 하지 못하는 건가? 니고르 백작에게 협박이라도 받았나?”

    협박 같은 것은 받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떠한 기억은 협박보다도 효과적으로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다. 유리아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하자 공작은 “흠……”하는 소리를 내다가 차를 홀짝였다. 보다 못한 알렉산더가 입을 열었다. 

    “……공작님. 그녀에겐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때의 일은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닙니다. 떠올리는 것으로도 많이 괴로울 겁니다.”

    “그럼 시간을 좀 더 주도록 하지.”

    유리아는 공작의 허락과 오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협박 같은 부탁을 듣고 나서야 집무실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고작 마주한 시간은 몇십 분밖에 되지 않음에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유리아는 벽에 기대어선 채, 움직이지 않는 다리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난 통에, 도리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라라가 미친 듯이 보고 싶어졌다. 그 자그마한 품에 안겨 힘들고 괴롭다고 하소연을 내뱉고 싶었다. 유리아는 홀린 것처럼 동생이 일하는 구역으로 걸어가려다가 멈춰 섰다. 그리고 자신의 한심함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없이 흐느꼈다. 

    “……난 정말 멍청하고 한심한 인간이구나.”

    이 와중에도 동생에게 의지할 생각을 하다니! 이러니까 라라가 자꾸 자기 혼자서 해결하려는 거 아니야? 라라는 기억을 잃었다. 자기 나이 같지 않게 어른스럽던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속내를 알 수 없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린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라라도 이제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겠구나, 하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 제가 알던 그녀와 달라져버린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라라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면서도 의지하려고 한다면 낯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다. 유리아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 제 뺨을 세차게 때렸다. 

    얼얼한 고통만큼 정신이 차려지는 것 같았다. 

    공작이 제게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고 하면 라라에게도 말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였다. 라라 역시 니고르 백작의 저택에서 거의 1년 동안이나 버틴 사람이 아닌가. 어쩌면 자신을 부르기 이전에 라라를 불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라라가 보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의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 조그만 아이를 품에 안고선 혹시 공작님과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가 네게도 무섭게 대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유리아는 라라를 찾기 위해 저택을 뒤지려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사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유리아를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뭐 하는 거냐 물어도 답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몸부림쳐보지만 한 사람이 여러 명을 이길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렇게나 몸을 단련한 기사를 유리아가 어찌 이기겠는가. 기사들은 잔뜩 지친 유리아를 붙든 채 어디론가 데려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유리아는 그들이 여자 고용인 숙소, 그것도 자신과 라라의 방으로 저를 데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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