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5
누가 알까?
어제 건넸던 사직서가 다시 내게 돌아올 때의 기분을.
“……저한테 이걸 왜 주시는 거예요, 하녀장님?”
나는 내 앞에 떠밀린 사직서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겉봉지에 잉크로 “라일라 핸슨”이라는 단어가 흘려 적혀 있는 이것은 나의 사직서였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하녀장님이 입을 열어 믿을 수 없는 말들을 하기 시작한다.
“라일라, 공작님께서 사직서를 처리해주지 않겠다고 하시더구나.”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왜요……? 왜 공작님께서 사직서를 처리해주지 않는 건데요?”
“나도 모르겠구나.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유리아의 것은 처리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왜 네 것만…….”
“……뭔가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이건…… 너무 이상하잖아요. 왜 갑자기…… 공작님께서……?”
“그렇게 말해도 내가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단다. 공작님께서 안 된다고 하셨으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거겠지. 아는 게 생기면 말해줄 테니 일단 나가보렴.”
그렇게 내쫓기듯 밖으로 나왔다. 나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왜 처리해주지 않는 건데? 그럴 이유가, 이유가 없잖아…….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었잖아 그럼 왜?
속이 배배 꼬이는 것 같았다. 맞지 않는 안경이라도 쓴 것처럼 눈앞이 가물가물하게 흐려진다.
내가 뭘 잘못했나?
형식을 틀리게 썼나? 사직서에 들어간 말 중에 공작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든 무언가가 있었나? 서류를 뜯어 안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언니의 것이 반환됐더라면 도련님들 중 한 사람이 이상한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되돌아온 게 내 사직서였기 때문에, 나는 도통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직서를 세게 쥔 채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공작에게 직접 찾아가서 물어봐야 하는 걸까? 무작정 찾아간다고 그녀가 일개 하녀인 나를 만나줄지 아닐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만나서 물어봐야 했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공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다른 방의 두 배나 되어 보이는, 장미꽃 무늬가 정성스레 새겨진 거대한 문에 다가갔다.
함부로 침입하면 큰 해를 입을 것만 같은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오세스가 막 그 문을 열고 나왔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공작과 정장을 갖춰 입은 누군가의 모습이 슬그머니 엿보였다. 손님인가? 정문에서 누군가를 맞이했던 기억은 없었기에 집사일지도 모른다. 하나 집사 치고는 너무나 화사한 정장이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오세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는 나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라일라?”
“안녕하세요, 도련님.”
“여기는 어쩐 일인가요?”
“공작님을 만나 뵙고 싶어서요. 긴히 드릴 얘기가 있어서…….”
“지금 공작님께서는 바쁜 일이 있어서 만나 뵙기 어려울 것 같네요. 굳이 공작님께 해야 하나요? 저한테 할 수 있는 이야기면 해도 괜찮은데.”
오세스가 빙그레 웃으며 내가 들고 있는 사직서를 바라보았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이 이상하게 기분 나빴으므로, 나는 슬그머니 사직서를 등 뒤에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공작님이 많이 바쁘시다니 다음에 찾아봬야겠네요. 그럼 전 이만……“
“그러고 보니 저택을 나갈 생각이라면서요?”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려고 하자 그가 문득 생각난 사람처럼 툭 내뱉었다.
“아쉽네요. 당신이 떠난다는 게. 저뿐만이 아니에요. 라일라가 간다니까 아서 역시 많이 아쉬워하더라고요.”
그리고 오세스가 내 눈높이만큼 허리를 낮추고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서가 공작님께, 라일라의 사직서를 받지 말라고 했을까요?”
“네? 아서 도련님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도련님?”
내가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오세스는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을 곱게 접어 웃어 보이고는 자리를 떠났을 뿐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옷을 잡아챘다가 감히 귀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 버린 나의 행동에 놀라 얼른 사과하며 손을 뗐다.
나는 멀어지는 등을 보며 사직서를 구겨 쥐었다. 공작은 제 아들들을 사랑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일에 방해되지 않는 한에서 거의 대부분 들어주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공작은 아서의 말을 듣고 곧장 내 퇴직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해도 의문이 남는다. 오세스는 내게 왜 저 말을 해주는 것이며, 아서는 왜 내 사직서를 거부하라고 부탁한 것일까?
이상하잖아. 말이 안 되잖아. 내 퇴직을 막을 이유가 없는데, 어째서? 차라리 언니의 퇴직을 막았다면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외에 공작이 있으나 없으나 마나인 하녀의 사직서를 받지 않을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서를 만나 보기로 했다.
도련님 그거 사실이에요? 정말 도련님이 공작님께 제 사직서를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나요? 그게 사실이라면, 왜요? 혹시 서재에서 난리를 피웠던 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고양이를 구해주겠답시고 도련님 몸에 떨어졌던 게 기분 나빴나요? 아니면 정원에서 실례되는 일이라도 한 건가요? 그래서 저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금방이라도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질문들을 삼키며 곧장 아서의 방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그곳에 아서는 없었다. 하인들에게 물어 그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지만 서재에도, 조용한 응접실에도, 심지어 정원에도 아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사람 없이 고요한 저택의 뒤편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어디에 간 걸까? 보고 싶지 않을 때는 계속 눈앞에 얼쩡거리던 주제에, 왜 찾을 때는 없는 거야? 답답함에 소리라도 고래고래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옆에서 풀잎들이 무언가와 스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이즐리 도련님……?”
그곳에는 이즐리 에머스가 있던 것이다.
“……왜…… 여기에 계세요?”
평소에도 그다지 정돈되어 있지 않던 머리카락은 여전히 부스스했고, 옷에는 주름진 채 잔뜩 구겨져 있었다.
표정이 홀린 듯이 멍한 것이 도저히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왜 나가려고 해?”
“……네?”
뭐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즐리가 수풀을 헤치고 내게 다가왔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가슴이 섬뜩해진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한걸음에 내게 다가와서 두 팔을 붙잡았다. 나는 얼얼한 통증을 느끼며 짧게 신음을 흘렸다.
“내 전속 하인이 되는 게 그렇게 싫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도저히…….”
“아니면 그냥 내가 그 정도로 싫은 건가……?”
이즐리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웃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것은 그 표정이 안쓰러웠기 때문이 아니다. 나를 옥죄어오는 힘이, 나를 바라보는 눈에 담겨 있는 어떠한 감정이 너무나 낯설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파, 아파요. 놔주세요…….”
“……너 나 싫어하지?”
흠칫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감정이 얼굴에 쉽게 드러나는 사람이라 해도 그렇게 티가 났단 말이야?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더듬으려고 했지만 잡힌 팔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가 죽도록 보기 싫어서 나가려는 거잖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에요.”
에머스 저택의 도련님들은 언니와 내가 나가려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그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니고르 백작을 만나지 않기 위해 급히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내가 저를 미워하고 그래서 나간다고 한들, 그게 무어라고, 나를 이렇게 대한단 말인가? 그저 예의 없고 주제 모르는 하녀의 일방적인 증오일뿐이다. 잘나디 잘난 그가 조금도 신경 쓸 이유가 없단 말이다.
그래서 무슨 상관이냐고 내뱉고 싶었지만 이즐리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보다 몇 배나 커다란 남자는그 존재만으로도 커다란 위압감이 있다.
그가 저 거대한 손으로 내 뺨을 후려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주먹으로 내 배를 때리면 맞은 곳을 쥐고 주저앉아 엉엉 우는 수밖에 없다. 반항하려고 마구 몸부림쳐도 뺨을 마구 후려 맞은 다음 저 몸으로 눌려지면 조용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평소에는 맞는 것이 무섭지 않고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정신이 없어서일까, 상황이 많이 혼란스러워서일까 잘못하면 그에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즐리의 고함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두려움이 느껴짐과 동시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겁을 집어먹고 있을 여유는 없다. 우선은 한눈에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이즐리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눈치 못 챘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하, 근데, 나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거든……. 누가 나를 싫어하고,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정도는 안단 말이야. 애초에, 그렇게 미워 죽겠다는 눈빛을 하고 나를 쳐다보는데…… 어떻게 눈치채지 못하겠어……? 응?”
“……도련님 진정하세요. 저는, 저는 도련님을 미워하지 않아요. 제가 왜 그러겠어요?”
“거짓말쟁이.”
이즐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왜 나를 미워해? 왜 나를 무서워해? 우리 친했잖아. 날 친구로 생각하고 좋아했잖아. 근데 어느 날부터 이상해졌어……. 이상해졌다고……! 내가 장난칠 때면 화를 내줬으면서, 웃어줬으면서……! 이제는 끔찍하다는 표정을 해. 가끔씩 네 일상 이야기를 해주고는 했잖아. 누구랑 놀았고, 누구랑 친하고, 사이가 나쁘고……. 티는 내지 않아도 즐거웠는데……. 그랬는데, 이제 넌…… 나를 피하려고만 해…….”
그래, 우리의 사이가 좋았을 때도 있었다. 소설의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나는, 우습게도 그를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때때로 귀족 특유의 오만함이 엿보이기는 했으나 언제나 밝고 쾌활하고 내게 친근하게 대해줘서 곁에 있으면 즐거웠다. 친구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에요. 전 여전히 도련님을…… 좋아하는걸요? 주제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도련님을 친구처럼 생각했어요.”
이즐리는 억지로 토해낸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갑자기 변해버린 이유가 뭐야?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했어? 얼마나 큰 잘못이기에 그래? 그럼 평소처럼 바락바락 소리 지르면서 사과해달라고 말하면 되잖아. 도망가지 말고!”
그의 목소리가 우는 사람처럼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미약한 동정심과 함께 공포를 느꼈다.
나야말로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래요? 왜 나한테 이래요? 왜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붙잡는 거예요? 왜 울 것 같은 얼굴로 미워하지 말라는 것 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제발 내 앞에서 그딴 표정을 짓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면 지금 정말로 울고 싶은 사람은 나였으니 까.
그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제 이즐리의 얼굴에는 슬픔 대신 분노가 느껴졌다. 나는 뒤로 밀려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그 일은 한순간에 일어났다.
이즐리의 얼굴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다가 다시 내게서 멀어졌을 때서야 그가 내게 입 맞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눈앞이 흐려졌다.
이즐리 에머스의 모습이, 아니 온 세상이 돌에 맞은 수면처럼 일렁거린다.
“나, 나,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아니야…….”
입술에 남아 있는 온기가 있었다.
“……좋아해.”
머리가 아프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상한 음식이라도 먹은 사람처럼 배가 끔찍하게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참을 수 없는 거부감과 함께 토기가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까 떠나지 마…….”
“우웩-.”
결국 나는 속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냈다. 아직도 나를 부여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고는, 벽에 기대어 꺽꺽대며 토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왜?
내가 뭘 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를 좋아하는 거야? 왜 함부로 입을 맞추는 거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이야기가 꼬인 걸까? 언니를 좋아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렇다고 나를 좋아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가 비틀리고 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제는 내 눈앞에 있는 게 이즐리 에머스인지 제임스 니고르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굳이 두 사람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상대방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고 멋대로 신체 접촉을 해오는 것이 똑같다고 느껴졌다.
농담이냐고, 제발 농담이라고 말해달라고 해도 이즐리는 다시 좋아한다고 속삭여온다.
나는 절망했다.
악몽이다.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다.
그래, 그럴 거야. 이건 분명히 끔찍한 악몽에 불과하며, 잠에서 깨면 내방으로 침대에 누워 있을 것이다.
나는 턱 하니 막혀오는 숨을 쉬기 위해 애를 쓰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