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23 (23/84)
  • 1663194636.jpg

    Episode 23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 같았다. 원작에서도 라일라가 이즐리의 전속 하인이 됐었나? 아니 그랬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전속 하인은 비서와 비슷한 역할로, 24시간 내내 모시는 분의 곁에서 일정 조정, 정보 수집, 대리 출석 등의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만큼 일을 잘하거나 영리한 사람을 전속 하인으로 뽑는 편이었다. 

    근데 그런 직책에 나를 올리려고 했다고? 나를? 왜? 우리는 그저 평범한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 아니었나?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이즐리가 내게 장난을 치고 나는 그걸 받아주며 투닥거리던, 꽤나 친근한 관계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 이상이나 이하의 무언가는 없었다. 자기 곁에 두고 괴롭힐 작정인가? 공작의 생일 파티를 시작으로 이야기가 전부 꼬여버린 기분이다. 아니, 확실히 꼬였다. 

    더 이상 머리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신이 나를 엿이라도 먹이려는 양 계속해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짜증과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다. 다시 울 것 같다. 

    ……괜찮아. 어차피 공작가에서 나가면 해결될 일이니까. 

    “……하녀장님, 무척 감사하지만 저는 전속 하인이 되기에는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전속하인이 되기로 했으니 이제부터는 교육을 받게 될 거란다. 다 받으면 꽤 번뜻한 모양새가 나올 거야.”

    나는 한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하녀장님 저는, 이즐리 도련님의 전속 하인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아서 도련님? 오, 아니면 레몬이나 다른 애들처럼 오세스 도련님의 하녀라도 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구나.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단다.  차기 공작이 될 그분께는 공작님께서 직접 엄선한 사람을 붙여줄 생각이거든!”

    그녀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게 틀림없었다. 확실히 말해두는 게 좋겠지. 

    “아뇨, 저는 추천장을 받고 싶어요.”

    하녀장님 이 차를 한 번 홀짝이곤 내려놓았다. 그 얼굴에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띄워져 있었다. 

    “공작가를 나갈 생각이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벌써? 겨우 한 달에서 조금 더 지났을 뿐이란다.”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정이 생겨서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유리아 언니도 같이요. 언니 몫까지 추천장을 써주시면 정말 감사할 거예요.”

    “아, 정말, 놀라워. 이건 전혀 예상 못했네.”

    하녀장님은 그리 중얼거리더니 손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네가 갑자기 친한 척 다가오기에 뒤늦게 권력욕이라도 생겼나 싶었단다. 그 점을 탓하려던 건 아니야. 난 솔직한 애들이 아주 좋거든. 근데, 나가고 싶어서 그렇게 귀엽게 굴었던 거라고? 전속 하인을 시켜주든 돈을 더 주든 네겐 다 쓸모없다 이거지?”

    "……."

    너무 급하게 말을 꺼냈나? 말을 잘못했나? 하녀장님의 눈치를 보며 치마를 꽉 잡았다. 하녀장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갑작스레 일어났을 때는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 보이고는 그 안에 있는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서랍 어느 칸에서 편지지 두 장을 꺼내 의자에 앉았다. 하녀장님은 선 상태로 그 종이에 깃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방 안은 사각사각, 펜이 움직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슬쩍 고개를 들어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하녀장님은 편지지의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다 채운 다음, 마지막에 사인을 휘갈겨 넣고 내게 보여주었다. 

    공작가를 상징하는 장미꽃 문양이 그려 넣어진 편지지에는 유리아 핸슨과 라일라 핸슨의 유능한 일 처리 실력과 뛰어난 친화력, 밝은 성격 등을 칭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추천장이었다. 

    “추전장이라……. 그래, 그 정도야 써줄 수 있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네가 꽤 마음에 들었거든. 자 받아라.”

    “감사합니다……!”

    아, 드디어 이걸 얻게 되는 건가? 그동안 그녀의 환심을 얻기 위해 먹을 것을 사다 바치고, 재밌는 얘기들을 조잘거리며 고생했던 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이것만 있으면 거지 같은 3형제와 니고르 백작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길 나가면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으리라.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편지지를 잡으려고 했으나 그전에 홱 뒤로 빼버리는 손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구나. 왜 그만 두려는 거니? 남들은 공작가에서 일하고 싶어서 안달인데, 너는 나가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

    “죄송해요. 개인 사정이라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그래, 알았다. 더 묻지는 않으마.  그럼 언제 나갈 생각이니?”

    “가능한 한 빨리요. 어……. 그전에 사직서 같은 거라도 써야 할까요?”

    “그래, 사직서를 쓰고 나가긴 해야지. 사직서를 제출한 날에서 일주일이 지난 후에 나가는 게 원칙이란다. 숙소 짐도 정리하고 네가 했던 일을 새로운 담당에게 인수인계 해줘야 한단다. 이건 사직서를 받고 난 다음에 자세하게 말해줄게.”

    “일주일보다 더 빨리 나갈 수는 없을까요……?”

    “일주일보다 더 빨리?”

    게슴츠레 뜨인 눈이 나를 훑었다. 

    “이유는 안 말해줘, 그런데도 사정이 있기는 해서 빨리는 나가고 싶어……. 정말 제멋대로구나. 후…… 사흘 후에 나가게 해 주면 되겠니?”

    “……감사합니다.”

    하녀장님은 내게 사직서와 비밀 유지 계약서가 담긴 봉투를 두 개 건네주었다. 언니와 내 것이다. 비밀 유지 계약서는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도 썼던 것으로, 공작가의 일을 밖에 떠들고 다니면 큰 처벌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기 전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아, 그리고 라일라.”

    “……네?”

    “좀 더 눈을 식히는 게 어떨까? 꼴이 말이 아니구나.”

    그리고 사무실의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얼굴에 열이 올라 뜨끈뜨끈했다. 세상에, 찬물로 세수한 뒤에는 별로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창문에 얼굴을 비춰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언니한테 서류를 전해주러 가야 하는데. 좀 더 가라앉히고 가야겠어.”

    이건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건네주자. 또 자기에게 말하지 않고 일을 벌였다고 화낼 것이 분명했다. 언니와 싸우는 일은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다. 그렇다고 늦게 말하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서류 안에 추천서를 넣고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더 오랫동안 찬물로 세수를 하고 수건에 물을 적셔 눈 위에 올려두었다. 그 상태로 일터로 향했다. 

    같은 구역을 청소하는 에이미는 어디서 딴짓을 하고 왔냐며 마구 화를 내었다. 고개를 숙이고 싹싹 빌자 당황하며 넘어가 주었지만. 눈이 많이 가라앉았는지 얼굴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던 에이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라라. 그 서류는 뭐야?”

    “아…… 이거?”

    솔직히 말해도 될까 고민했지만 그냥 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나중에 다 소문이 날 것이다. 

    어느 어느 구역에서 일하는 라일라라는 하녀가 하녀장 사무실에서 사직서를 들고 나왔다더라, 일을 곧 그만두려는 것 같다더라, 라는 식으로. 그렇다면 내 입으로 하는 게 낫겠지. 

    “사직서야.”

    에이미의 눈이 커졌다. 

    “뭐?! 사직서……? 잠깐, 내가 뭐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그럼 안 보였던 시간에 하녀장님 사무실에 있었던 거야? 너 하녀 일을 그만두려는 생각이야? 유리아 언니도?”

    "응."

    “……왜……? 이 정도로 좋은 직장은 없잖아…….”

    “그건 개인 사정이라 말하기 좀 그렇네.”

    “……아…… 미안."

    에이미는 눈을 내리깔고는 빗자루를 만지작거렸다. 그 얼굴에서 아쉬움과 슬픔이 뚝뚝 떨어졌다. 

    “그만두면 다른 귀족가에서 일할 생각이야? 아니면 다른 일을 구해보려고?”

    “응, 맞아. 다른 귀족가에서 하녀로 일하려고.”

    “그렇구나……. 네가 간다고 하니까 너무 아쉬워……. 평생 같이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말에 빙그레 웃어주었다. 사실 에이미,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세상이 어떻게 사람의 생각대로만 이뤄질까. 그럴 수 있었다면 나와 언니는 평생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었을 것이고, 니고르 백작에게 잡혀 그런 짓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 저택에 발을 들이게 되는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너무 간 것 같다. 언니랑 싸우게 된 이후부터 자꾸 생각이 우울한 쪽으로만 빠진다. 아무튼, 전생의 기억이 되돌아온 순간부터 내가 이 저택을 떠나는 일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제 나가는 거야?”

    “아마, 사흘 뒤에……?”

    “그럼 너 가기 전에 송별회 같은 거나 하자! 마리도 부르고, 비앙카도 부르고, 다른 애들도 부르는 거야.”

    “좋지. 부엌에서 먹다 남은 빵이나 과일을 가져와서 먹자.”

    그 말에 에이미가 표정을 펴고 웃었다. 

    추천장과 사직서를 받았다. 오랫동안 질질 끌어왔던 걱정거리 중 하나가 이제야 해결됐다. 하지만 새로운 걱정이 하나 더 생겨났는데, 바로 이즐리였다. 

    내가 우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람하신 이즐리 에머스님의 얼굴을 다시 본다는 생각만 해도 어색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혹여나 그의 방을 청소하러 갈 때, 마주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방에 없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는 오히려 답지 않게 나를 피하는 것처럼 지나쳤다. 그게 조금 찜찜하기는 했지만…… 찾아와서 놀려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일을 하다 보니 하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다시 숙소 돌아갔을 때는 어제와 달리 언니가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로 자신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언니?”

    또 내 얼굴 보기 싫다고 다른 방어가 있을 줄 알았는데……. 혹시 나랑 화해라도 할 생각인 걸까? 

    그 바보 같은 생각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사라졌다. 서서히 고개를 든 언니는 분노를 참아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너한테 정말 화내기 싫어. 화내기 싫다고……. 근데 왜…….”

    그녀가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저녁 식사를 하는데 말이야…… 에이미가 찾아와서 내게 말하더라. 정말 공작가를 그만두고 다른 귀족가 하녀가 되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두 사람이 떠나게 돼서 너무너무 아쉽다고……. 라일라가 사직서를 들고 있는 걸 보고 정말 놀랐다고……. 라일라……. 내가 왜 그런 얘기를 네 친구에게 들어야 하니?”

    대충 이런 일은 예상했다. 소문이 빠르니까 내가 말하기도 전에 언니에게 전해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에이미가 될 줄이야. 

    작게 한숨을 쉬다가 품 안에서 서류를 꺼냈다. 

    “……언니, 진정해.”

    “이게 그 사직서야?”

    언니는 벌떡 일어나서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내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뺏어 들고는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진짜 웃긴다. 어떻게 추천서까지 받아왔니?”

    서류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널 모르겠어. 예전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더 그래.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공작가를 나가려고 하는 건데……? 갑자기 도련님들을 싫어하게 된 일이랑 뭔가 연관이 있는 거야?”

    언니가 하하, 하고 기운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그것도 아니면 저번에 백작 대리가 찾아온 일 때문이야? 차라리 그것 때문이라면 이해할게……. 제발 말 좀 해주면 안 될까……? 제발 말 좀 해줘. 그게 어려운 건 아니잖아……! 난 성인이야. 네 언니고,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멍청하지도 않아. 네가 지켜줘야만 할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야……”

    “하지만…….”

    애원을 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언니가 두 손으로 내 팔을 쥐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물을 눈에 담는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전처럼 싸움이 날 게 틀림없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말을 해야 할까? 니고르 백작이 아직도 언니를 잊지 못하고 찾아다닌다고. 그가 앞으로 이 저택에 계속 오게 될 것이며 언니를 발견하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괜찮을까? 언니가 충격을 받으면 어쩌지? 상처 받으면 어쩌지? 

    나는 언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