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22 (2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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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22

    “예쁘다.”

    남자는 감격에 찬 얼굴로 소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소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무표정한 얼굴에 슬그머니 새어 나오는 것은 혐오의 감정이다. 

    유리아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깊이 심호흡을 하곤 주먹을 쥐었다. 

    “……내가 칭찬해줬다고 너무 좋아하지 마. 너보다 예쁜 여자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거든. 평민 주제에 내게 선택받은 넌 운이 아주 좋은 거다.”

    유리아는 그 말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자신은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나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소녀의 손을 들어 살며시 입맞췄다. 그는 뭔가 퍼뜩 생각난 것처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근처에 있던 줄을 잡아당겼다. 

    잠시 뒤, 하인들이 선물 상자들을 들고 들어왔다. 그것들을 유리아와 백작 주변에 놓아두고는 제 일이 끝났다는 양 나가 버린다. 

    “어젯밤에 좀 때린 것 가지고 그렇게 뚱하게 구는 거야? 밖에 나갔다 온 김에 대충 네 선물을 사 왔으니까 그만 화 풀어라. 우물쭈물하지 말고 얼른 열어봐.”

    유리아는 어떠한 감정 한 톨 없이 자신에게 안겨지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유리아가 그 흔한 감사의 말도, 감격에 젖은 표정도 보이지 않자 남자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소녀에게서 상자를 빼앗아 리본을 풀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액세서리였다. 그녀의 눈 색과 똑같은 하늘색의. 

    “어때. 좋아? 여자들은 이런 걸 좋아하잖아?”

    여전히 유리아는 무표정했다. 

    백작은 다급하게 바닥에 놓인 선물상자들을 풀었다. 머리띠, 섬세하게 레이스가 바느질되어 있는 하얀색의 잠옷부터 드레스까지 내용물은 다양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유리아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선물을 보내는 이가 받는 이의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것들의 아름다움도, 뛰어난 가치도 모두 소용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 웃지 않는 거야……. 내가 널 위해 이렇게 선물까지 사 왔잖아! 그러니까, 그딴 표정 짓지 말고 웃어! 당장 웃어보라고!”

    유리아는 말없이 백작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자신에게 웃어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얼마나 부끄러움을 모르고, 죄책감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면 그리 말할 수 있으리라. 

    마음만 같으면 죽어도 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아는 머릿속에 선명하게   인물의 얼굴을 떠올리며 억지로 웃었다. 그제야 백작은 만족한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백작이 유리아의 손을 그러잡았다. 

    유리아는 그런 백작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백작님…… 제 동생은 잘 있는 거죠……?”

    “그래.”

    “식사는 잘하고 있나요?”

    “그래…….”

    “잠은 잘 자고 있나요?”

    “……동생 얘기는 그만하라고 했지? 매일 동생, 동생, 동생! 지겹다, 지겨워. 잘 있으니 걱정 좀 그만해.”

    거짓말.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 이후 백작이 라일라에게 무슨 짓을 했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 날 유리아는 스스로를 상처 입혔다. 

    “어떻게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어요?! 나만 잘하면 동생은 놔준다고 했잖아!”

    화병이 깨져 카펫이 축축하게 젖어가고, 

    “왜……왜 하필 나야?”

    피가 뚝뚝 떨어지고, 

    “왜 하필 나랑 라일라야……?”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 애원하는 흐느낌이 뒤섞여서 뭐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예뻐? ……내가, 내가, 내가……. 내가 예뻐서 그렇다고?”

    그래서 이렇게 한다고? 그럼, 이렇게 하면 안 예뻐? 이제 날 놔줄 거야? 유리아의 얼굴에 하나 둘 생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자 마치 기적처럼 그 오만하고 이기적인 남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흐릿한 시야에서도 선명하게 저에게 다가오는 손이 있었다. 애원하는 손이 있었다. 백작의 손이다. 자신을 기만하고, 모욕한 남자의 손이다. 유리아가 그것을 다급하게 쳐내자 여성의 짧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작의 방은 고용인 휴게실로 바뀌고, 눈앞에 있는 이는 육중한 체구를 가진 사내에서 친구인 비앙카로 바뀐다. 

    생생하게 다가오던 그 모든 것들이 꿈이었던 것이다. 

    유리아는 어젯밤 라일라의 생각을 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래서 답지 않게 피곤해했고, 비앙카는 그런 유리아를 휴게실로 안내했다. 잠깐 쉰다는 것이 졸아버린 모양이다. 비앙카는 얻어맞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유리아 괜찮아……?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내가 널 때린 거니……? 미안해. 내가, 내가 좀 정신이 없어서. 아주 이상한 꿈을 꿔버려서 그만…….”

    “뭐 이런 걸로 사과를 하고 그러니? 너 진짜 땀이 장난이 아니다. 무슨 꿈을 꿨기에 그래. 좀 닦아야 할 것 같은데?”

    비앙카가 땀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 지금은 누군가에게 만져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유리 아는 그 손을 거부하고 소매로 축축한 이마를 쓸었다. 

    지금 이 순간, 유리아는 미치도록 라일라가 보고 싶었다. 어릴 적 그녀는 그 믿음직하고 어른스러운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위한다는 이유로 그런 중요한 일을 숨기고 거짓말을 했으니까. 게다가 라일라도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유리아는 점심시간에도 식당에 오지 않던 동생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 * *

    “……크응……."

    소매를 코 밑을 문지르고 손으로 눈을 비볐다. 얼마나 울어댔던 것인지 눈가가 얼얼할 정도다. 

    진정되고 나서는 내가 했던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머리를 퍽퍽 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울었지? 언니랑 싸운 건 그냥 사소한 일일 뿐이잖아! 그게 뭐라고 울기까지 해?! 그리고…….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즐리 앞에서 운 건데? 다음에 마주쳤을 때 그 일로 제발 놀리지 않았으면. 

    또 복도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은 울면서 뛰어가는 나를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울면 안 되는데, 약해지면 안 되는데. 그래선 언니를 지킬 수 없었다. 

    그때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리고 수풀 속으로 무언가가 침입해왔다. 

    “……오렌지……?”

    오렌지 빛의 털을 가진 조그마한 고양이였다. 

    “……너 왜 여기 있어. 또 정원을 돌아다니던 거야? 오세스 도련님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쫓겨날 수도 있는데…….”

    “야옹.”

    나를 빤히 바라보던 오렌지는 그렇게 한번 울더니 내 다리에 얼굴을 부비기 시작했다. 

    야, 인마. 갑자기 웬 애교야? 이런 애 아니잖아? 손대려고 하면 도도하게 무시하거나 할퀴어대는 못돼먹은 고양이면서.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 못돼먹은 고양이가 울고 있던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리고 위쪽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오렌지, 너 왜 갑자기 이쪽으로…….”

    아서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쟤가 여기 있는 거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데 또 만나버렸다. 

    이즐리에 이어서 아서까지 만나다니, 난 얼마나 운이 없는 걸까?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수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격식에 맞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좋은 아침이에요.”

    “그건 잘못된 인사인 것 같군. 지금은 오후다.”

    “네? 오후라고요……?”

    아서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시간은 벌써 한 시를 넘기고 있었다. 어쩐지 배가 고프다고 했더니 점심이었단 말인가? 내가 그때까지 질질 짜고 있었다고? 세상에……. 

    “그, 근데 도련님은 왜 여기에……?”

    “……이놈 때문에. 자기 처지도 모르는지 또 당당하게 정원을 산책하고 있더군.”

    아서가 손을 뻗어 오렌지를 들어 올렸다. 오렌지를 얌전히 그의 손에 잡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았다. 

    “너야말로 수풀 속에서 뭐 하고 있던 거야?”

    “어, 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하하…… 그러네요……. 어, 그냥 사람은 가끔 수풀 속에 숨어 있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참 나,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전부터 생각했는데 넌 헛소리를 참 잘한단 말이야. 근데……. 너 눈이 왜 그러지? 마치…….”

    이상한 표정을 지은 아서가 내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운 사람처럼.”

    어? 하는 사이 손이 내게 닿았고, 그 손은 슬며시 내 눈가를 쓸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행동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아픔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얘가, 얘가 왜 이래? 누가 닿는 거 싫어하는 캐릭터 아니었나? 근데 왜 나를 만지지? 뭐 때문에? 저번에도 나를 숨겨준답시고 아무렇지 않게 내 머리를 만졌던 때가 떠올랐다. 기분이 나빴다. 

    “……저 이만 가볼게요. 일이 있어서요. 안녕히 계세요.”

    이 자리에 더 있으면 아서를 밀쳐버릴 것만 같아서 다급하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 도망쳤다. 뒤에서 “잠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했다. 

    저택에 다다라서야 안심하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진정하자, 라일라. 아서가 나를 만진 거? 그거 별거 아니야. 잠깐 머리가 돌아버렸나 보지. 그래서 자기 설정을 까먹은 게 분명해. 아직도 눈가에 따뜻한 감각이 남아 있어 소름이 돋았다. 

    나는 소매로 눈을 벅벅 닦아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하녀장님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점심에 만나기로 했었는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서 하녀장님의 사무실로 가야 했다. 

    오늘에야말로 추천장을 받고 공작가를 나가겠다는 말을 해야 했으니까. 

    분명 퉁퉁 부었을 눈을 가라앉히기 위해 화장실에서 찬물로 마구 세수를 했다. 울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도 않고, 아서에게처럼 울었냐는 소리를 들으면 너무 민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눈이 좀 가라앉았다는 생각이 들자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녀장님이 깃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계셨다. 

    “어서 오렴 라일라. 좀 늦었구나? 식당에서도 보이지 않고.”

    “죄송해요. 잠깐 일이 있어서…….”

    “일단 거기 소파에 좀 앉아 있어라.”

    나는 소파에 앉았다. 곧 자리에서 일어난 하녀장님이 내 앞에 앉았고, 어디선가 주전자와 찻잔 두 개를 들고 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찻잔에 쏟아부었다. 찻잔은 나와 하녀장님 앞에 하나씩 놓였다.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했지?”

    “……네.”

    “라일라, 네게 아주 좋은 소식이 있단다.”

    그녀가 은은히 미소 지은 후 차를 홀짝였다. 

    “이즐리 도련님의 전속 하인이 출산휴가를 냈다는 이야기 들어봤지? 그 집 부인이 예쁜 여자아이를 낳았다고 하더구나.”

    “네네, 들어봤어요.”

    고용인들 사이에서 한참 돌았던 이야기였다. 공작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도중에 퍼진 이야기라, 크게 축하해주지는 못했고 소소하게 박수를 쳐주거나 잘됐다는 덕담으로 끝났다. 

    “근데이 이야기는 갑자기 왜……?”

    “그래서 다음 이즐리 도련님의 전속 하인을 구해야 하는데……. 그게 네가 됐단다.”

    “……네……?”

    순간 철렁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충격이 얼마나 크던지. 혹여나 진짜 심장이 떨어졌을까 손을 들어 심장 부근을 만지작거리기까지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난 그녀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어리둥절한 표정이니? 마치 예상하지 못한 사람처럼 구는구나. 이런 것을 바라서 그렇게 귀엽게 굴던 것 아니니? 내가 널 추천했고, 도련님께서도 네가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 다른 사람도 아닌 널. 라일라, 도련님께도 퍽 귀엽게 군 모양이구나?”

    “……농담이시죠?”

    “내가 왜 이런 걸로 농담을 하겠니?”

    하녀장님은 환하게 웃었지만 나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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