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21 (2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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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1

모든 게 엉망이다. 다 망가졌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좋은 아침이야 라라.”

나를 깨워준 하녀는 기지개를 쭉 편 다음, 창문을 열었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며, 그녀의 매끄러운 혹청색 머리를 흐트러뜨린다. 

“이렇게 공작님의 생일 파티가 끝났구나…… 몇 날 며칠 동안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하루 만에 끝나는 걸 보면 조금 허무하단 생각이 들기도 해.”

그녀는 언니와 친하게 지내는 하녀 중 하나인 비앙카였다. 나보다 다섯 살 많고, 언니보단 세살 많았다. 비앙카는 눈치가 좋은 사람이라 간밤에 왜 언니와 싸웠는지 묻지 않았다. 물어봤더라면 아마 난 화를 냈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창문을 닫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라일라, 너랑 유리아가 싸울 줄은 몰랐어.”

나도 몰랐다. 우리가 싸우게 될 줄은. 어릴 때 이후로는 전혀 싸워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언니와 싸우기엔 너무 나이가 많았고(전생과 현생을 합쳐서) 언니는 착했으니까. 

“……저도요.”

나는 장롱에서 하녀복을 꺼냈다. 비앙카는 어색하게 웃더니 제가 어제 방에서 가져온 옷을 꺼내 입었다. 

어제 우리는 함께 밤을 보냈다. 언니가 나랑 같이 있고 싶지 않다고 방을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아침에 방을 나와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도 아침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진 않았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누르며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 언니가 밖으로 뛰쳐나가고 내가 소리를 빽 지르자 에밀리 아주머니와 의사 할아버지는 급하게 의무실로 들어왔다. 

나는 에밀리 아주머니를 보자마자 베개를 던져버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욕을 뱉었다. 전부 당신 탓이라고, 왜 제멋대로 행동하냐고. 

누가 그런 걸 원했냐고. 

누가. 

- 미안해, 라라. 미안하구나. 그게 너랑 유리아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어. 

- ……시끄러워요. 

- 네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널 위한다는 이유로 행동한 내가 밉니? 그럼……. 너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 거니? 왜 유리아의 마음은 이해해주지 않는 거니. 

에밀리 아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줍곤 그렇게 물었다. 

- 누가 교훈 같은 거 달랬어요? 나가. 당장 나가라고! 

내가 잘못한 걸까? 잘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언니에게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아침 식사 시간에도 떨어져 앉았다. 평소와 달리 식사를 하고 있는 하녀장님 앞에 앉아 웬일로 아침을 드시냐고 물으며 호감을 사기 위해 아무 쓸모없는, 어디서 들은 웃긴 이야기나 지껄여댔다. 

알렉산더에게 백작이 언니에게 아직도 집착하고 있는 말과 앞으로 이 저택에 많이 오게 될 거라는 정보를 들었으니 하루라도 빨리, 한시라도 빨리 그녀에게 추천장에 관한 것을 물어야 한다. 그 건에 대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슬쩍 물어왔다. 

“……라일라, 무슨 일이니?”

“네? 뭘요?”

“왜 언니랑 싸운 거니. 너희 둘 아주 사이가 좋았잖아.”

역시 소문 다 났네. 고용인들 사이에서 소문은 빨리 돈다. 누가 비밀 연애라도 한다 치면 하룻밤 사이에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누가 애인이랑 헤어지고 애인의 친구를 만난다더라, 이러한 막장 연애담을 들을 때는 재미있다고 깔깔댔지만 당사자가 되니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나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휘 저었다. 갑자기 입맛이 떨어졌다. 

“그냥…… 별거 아니에요. 가끔 자매들끼리는 정말 쓸데없는 이유로 싸우고 다시 화해하고 그런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근데 참 이상하지. 난 너희가 싸우지 않을 줄 알았어.”

그 말에 뭐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어제 계단에서 굴렀다고 하던데 괜찮니?”

“네 물론이죠! 일에 전혀 지장 없을 거예요.”

“그래,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몸 상태는 많이 나아졌다. 감기는 약을 먹고 하루 쉬자 괜찮아졌고 다리는 아직 욱신거리기는 했으나 걸어 다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녀장님, 혹시 바쁘시지 않으면 제게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할 말이 있어서요.”

“그래? 마침 잘됐구나. 나도 내게 할 이야기가 있었거든. 지금은 좀 그렇고 점심을 먹고 난 뒤에 내 사무실로 찾아오너라.”

“네.”

내가 할 말은 뻔했다. 이직할 수 있도록 추천장을 써달라는 것이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내게 할 말은 뭘까? 좋은 소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끝마치고, 일터로 향하고, 복도를 쓸고 닦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와 언니에 대해 물어봤는지 모른다. 뭐가 궁금하다고 자꾸 그 일에 관해 묻는 걸까? 짜증이 난 나머지 그들을 향해 꽥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언니와 화해하면 좋겠다고 하는 에이미를 째려보기까지 했다. 

심지어 사이도 좋지 않은 레몬은 왜 내게 찾아와서 사탕 같은 걸 건넨단 말인가! 

누가 보면 내가 언니랑 싸운 게 아니라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래, 팔이라든가 다리.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 같은 거. 

씩씩대며 청소를 위해 이즐리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고리에 사람이 없다는 표시의 문패가 걸려 있지 않았다. 

방 안에 이즐리가 있다는 의미였다. 

아직 식사를 하러 가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냥 거르기로 한 걸까? 그의 방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

“네? 뭐라고요 도련님? 돌아가라고요?”

“들어오라고…….”

이왕이면 나중에 와서 청소하라고 말하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터덜터덜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늘어진 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이즐리가 보였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고 옷도 아직 잠옷이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기사라 그런지, 몸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기 때문이다. 

“안녕…….”

“네, 안녕하세요. 도련님.”

가라앉은 목소리나 축 처진 것 같은 모습.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어제는 그렇게 신나 보이더니 갑자기 왜 저래? 이거…… 같이 있기에는 좀 위험한 게 아닐까? 기분 더럽다고 내 목을 베어버릴지도. 

“제가 잠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돌아갈까요……?”

나 그냥 돌아갈게. 제발 나가게 해 주라. 

“아니!”

그는 내 말에 정신을 차린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이즐리는 눈을 비비고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고개를 좌우로 저어댔다. 그가 기지개를 쭉 켜면서 시간을 묻기에, 아홉 시라고 말하며 바닥에 흩어져있는 물건들을 치웠다. 그는 침대 헤드에 기대선 장난스럽게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너 봤어?”

“네? 뭘요?”

“생일 파티 때, 어머니가 내가 준비한 선물을 보고 보인 반응. 기껏 몇 날 며칠 성녀한테 부탁해서 축복을 받은 성검을 구해왔는데 반응이 너무 심심한 거 아니야? 겨우 ‘고맙구나’ 한마디라니. 그럴 줄 알았으면 그냥 시장바닥에서 아무거나 집어 왔지. 누가 그렇게 고생을 해서…….”

이즐리는 입을 다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뭐, 고생한 사람이 바보지.”

그가 다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뒤통수에서 폴폴 풍기던 우울한 기색이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다쳤다며? 계단에서 굴렀다는 소리 다 들었어. 심한 감기에 걸려놓고 뽈뽈 돌아다니던 것도……. 왜 그렇게 자주 다치는 거야? 혹시 아픈 걸 즐기는 건 아냐?”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으나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마치 내가 다치는 게 싫은 사람처럼, 날 걱정하고 있는 사람처럼 굴고 있다. 

걱정?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는 그가 남을 걱정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 

원작에서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남을 핍박하고 감금하는 훌륭한 귀족이었다. 하찮은 평민 계집애를 걱정할 리 없다. 내가 언니도 아니고. 그렇다면 비꼬는 거겠지. 날 걱정하는 것보다는 비꼬는 것이 훨씬 나았다. 

“……설마요.”

“그럼 좀 덜 다쳐보려고 노력을 해봐, 응?”

“네.”

이즐리가 불만스럽다는 양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몸을 일으켜 침대 한 편에 앉은 그는 막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 하인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는데……. 너, 언니랑 싸웠다며. 의외네.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 다니고 사이좋은 것처럼 굴었잖아.”

이즐리가 웃었다. 우리 두 사람이 싸운 일이 재밌는 일이라도 되는 마냥. 이상하게 가슴 부근이 울렁거렸다. 아까처럼 대충 넘기면 될 텐데 그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도련님, 그게 도련님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제가 싸우든 말든 도련님이 도대체 왜 신경을 쓰는 건데요. 어차피 도련님은 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저한테 신경 끄라고요. 

왜 자꾸 다들 그 이야기만 하는 걸까? 남의 일에 뭐가 그렇게 관심이 많아? 듣고 싶지 않단 말이야. 제발 떠올리지 좀 않게 해 줘.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그것이 눈물이라는 것은 이즐리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나서야 눈치챘다. 나는 손을 들어 천천히 눈가를 쓸어보았다. 뜨뜻미지근하고 투명한 액체가 묻어 나왔다. 

쪽팔려.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언니와 내게 해를 끼칠 사람에게는 더더욱.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역시 제가 청소하고 있으면 도련님이 방에 계시기 불편하실 것 같아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양해를 구하고 돌아서려는 그때, 이즐리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너 울어……? 왜?”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고 했지만 무자비한 악력이 나를 강제로 붙들었다. 

손목이 얼얼했다. 

“……죄송한데, 도련님……. 저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왜 우냐니까? 내가 뭘 했다고.”

그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붙잡았다. 일렁이는 붉은 눈이 내 얼굴을 샅샅이 훑는다. 눈을 마주친 순간 토할뻔했다. 이즐리는 내가 걱정돼서 죽을 것 같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지? 어차피 당신은 남 걱정 따위는 못하는 사람이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원작을 본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가식적인 태도에 속이 울렁거렸다. 

다시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놔주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더욱 강한 힘으로 나를 옥죌 뿐이다. 

이즐리가 내 눈가를 쓸어내리며 다시 되물었다. 

“왜 그러는 건데! 나……. 나 때문이야? 아니면 누가 또 때리기라도 한 거야? 그 레몬이라는 하녀? 걔 혼내줄까?”

나야말로 물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왜 걱정하는 사람처럼 굴어? 왜 친절한 사람인 척해? 나는 가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오늘따라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왜 이러시는 건데요……? 제가 울 든 말든 도련님이 무슨 상관이길래?”

내가 지금 귀족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 제정신인가? 예의 없다고 뭐라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엇나가는 입을 주먹으로 후려쳐버리고 싶었다. 

“……죄송해요.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아요.”

나쁜 일이 연달아 일어나서일까? 아니면 손목이 너무 아파서일까? 다시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눈앞이 흐려져서 이즐리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이 위안이다. 

“……손목이 너무 아파서 그만 되는대로 내뱉어버렸나 봐요.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놔주시면 안 돼요?”

이즐리는 불에 덴 사람처럼 퍼뜩 손을 뗐다. 얼얼한 손목을 매만지다가 가보겠다며 홱 몸을 돌렸다. 혹시나 인사를 하고 가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을까, 공손히 인사를 하고 곧바로 방을 나왔다. 

잘못한 사람은 저놈인데 사과는 내가 하고 나갈 때는 인사를 해야 한다니. 그놈의 신분제라는 녀석은 참 엿같기도 하구나. 

이럴 때는 때때로 전생이 그리워지곤 했다. 제대로 기억도 안 나는 주제에 말이다. 

방에서 벗어났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인사해오는 고용인들을 지나쳐 숨어 있을 곳을 찾았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와 싸운 일로도 그렇게 난리가 났었다.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 

나는 정원 깊숙한 곳, 수풀 속에 처박혀 한참 동안이나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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