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20 (2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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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0

유리아 핸슨은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여동생은 전날 밤부터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왜 돌아오지 않는 걸까? 분명 오늘 밤 함께 도망가기로 약속했으면서.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으로 집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보다 어느새 아침이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동생을 걱정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유리아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다가 현관으로 달려갔다. 

“나갈까……? "

그녀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다 눈을 꾹 감고 손을 거 둬들인다. 

“……아냐, 안 돼. 라라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밖을 돌아다니다가 백작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도와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짐은 되지 말아야지. 유리아는 제 자신에게 그리 되뇌며 나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라라?”

유리아는 퍼뜩 눈을 떴다. 문을 열자 나오는 사람은 그녀가 그토록 기다렸던 대상이 아닌, 아주 익숙한 얼굴의 사내였다. 똘마니라도 되는 양 항상 니고르 백작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남자였다. 보좌관이라고 했던가? 그는 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백작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편지였다. 이건 감일까? 사랑 고백이나 협박이 담긴 편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것을 건네받는 순간, 유리아는 싸한 기분을 느꼈다. 

이 안에 든 게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다. 편지를 열게 되면 정체가 드러나리라. 이상하게 안에 든 것을 보기 두려워 한참 동안 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뭐죠?”

“……직접 열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유리아는 편지의 입구를 험악하게 뜯어냈다. 그리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것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손이 미친 듯이 떨렸기 때문이다. 

편지에서 끈으로 묶여있는 연갈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나온 것이다. 

유리아는 혼란스러웠다. 뭐야? 이런 걸 왜 나한테 보낸 거야? 그런데, 이건 누구의 것이지? 혹시……. 

왜 이때 동생이 떠오른 것인가. 유리아는 알 수 없다. 알고 싶지 않다. 

“줍지 않으십니까? 선물을 보셨으니 안에 들어 있는 쪽지도 보셔야지요.”

남자는 편지를 집어 들어 유리아에게 건넸다. 울고 싶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다. 유리아는 편지를 집어 들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냈다. 머리카락이 엉겨 붙은 쪽지에는 매끄러운 글씨체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라일라 핸슨의 머리카락은 잘 받으셨습니까?’ 

아- 

유리아는 그 자리에서 속 안에 있는 것을 모조리 게워냈다. 거짓말이라고 울부짖고 남자의 다리에 매달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라일라의 머리카락이었다. 라일라는 무슨 일을 당한 걸까? 몸은 괜찮은 걸까? 동생의 상태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유리아에게 커다란 공포를 가지고 왔다. ‘그’ 백작에게 잡혀갔으니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반항하지 않았어도, 그냥 백작에게 가기만 했어도! 아, 라라……. 라라!”

그날 이후 유리아와 라일라의 삶은 악몽처럼 변해버렸다. 

* * *

눈을 떴을 때는 약초 냄새가 났다. 

이마에는 물 묻은 수건이 놓여 있었고, 목 끝까지 이불이 덮여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택의 의무실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그토록 찾고 있던 언니가 앉아 있었다. 

“언니.”

“……깼어?”

그녀가 이불 밖에 놓인 내 손을 꼭 잡았다. 

“오세스 도련님께서 복도에 쓰러져있던 너를 의무실에 데리고 와주셨어.”

오세스가 나를 데려다주었다고? 내가 옷자락을 붙잡고 언니를 찾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도, 나를 안아 든 사람도 그라고? 나는 그제야 벽면 한쪽에 기대 서 있는 오세스를 발견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같잖게도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라일라? 쓰러진 당신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의사가 라일라 당신이 독한 감기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다리 상태도 좋지 않은데 그동안 어떻게 돌아다닌 건지 신기해하더라고요. 그렇게 몸이 아프면 쉬지 그랬어요.”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기절하기 직전, 그가 했던 말들을. 마치 언니가 아니라 내게 관심이 있다는 마냥 지껄여대던 그 말들을……. 자꾸 신경이 쓰인다고? 그런 대사 보통은 여주인공한테 하는 거 아니야? 원작에서도 언니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난다. 근데 왜 내게 그런 말을? 왜? 왜? 하필이면…… 왜? 

언니가 아니라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혹은 불행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금방이라도 잡히는 아무 물건이나 그에게 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상체를 일으켜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세스는 고개를 저었다. 

“뭘요.”

오늘따라 그의 웃는 얼굴이 더 역겹게 느껴진다. 

“일단 의사가 약을 먹여뒀으니 쉬면 금방 나을 수 있을 거예요. 다리는 잘 모르겠네요.”

오세스는 오늘 하루 동안은 푹 쉬라는 말을 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유리아 언니는 오세스가 사라지는걸 빤히 지켜보더니 제 자리에 앉아있던 의사를 향해 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 잠깐만 나가주지 않겠냐고 간곡히 부탁했다. 의사 할아버지는 불만스레 홈,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주었다. 그러자 의무실에는 나와 언니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언니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는데 이상하게 나오지 않았다. 언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찾아다녔니?”

“응. 계속 찾아다녔어.”

그 얼굴은 슬픔을 담고 일그러진다. 

“나를 찾느라고 급하게 뛰어다니다가 계단에서 구른 거니? 다른 사람들에게 네가 다쳤다는 말을 듣고 바로 의무실에 왔어. 막상 와보니까 넌 없고……. 나는, 나는……. 미안해……. 미안해…….”

“……사과하지 마. 언니 잘못도 아닌데 왜 사과를 하는 거야? 그냥 내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것뿐이야.”

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빨리 눈물을 닦아내고는 괜찮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마음이 미어지려고 했다. 

언니가 울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슬프게 흐느끼기라도 했으면, 나는 언니가 약속을 어기고 방에서 나가버린 일이나 알렉산더의 말을 내게 전하지 않은 걸 용서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수는 없지. 

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왜, 왜 그랬냐는 거야. 왜 나한테 숨긴 거니? 니고르 백작이 이 생일 파티에 초대받고, 그 대신 대리들이 온다는 말을 해주지 않은 이유가 뭐야? 뒤늦게 에밀리 아주머니에게 그들이 여기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얼마나 놀랄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니?”

그래, 놀랐겠지. 그 끔찍한 자들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전하지 않으려고 한 건데. 에밀리 아주머니, 당신은 멍청하고 바보 같고 오지랖 넓기만 한 쓰레기야. 우릴 도와준 건 무척 고맙게 생각하지만 이건 용서 못해. 당신은 선을 넘은 거야.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언니, 그동안 어디 있었어? 에밀리아 주머니는 또 어디 있고? 둘 다 전혀 보이지 않던데.”

“……처음에는 3층 끝자락에 있는 창고에 앉아 있었어. 손님들에게 열린 곳은 정원이랑 현관뿐이니까 3층에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후에는 그 대리란 사람들의 얼굴을 봐 두긴 해야 할 것 같아서 정원으로 갔었고. 거기서 널 만나게 될 것 같아서 빨리 자리를 피했지. 그때는 너를 만나고 싶지 않았거든……. 네가 나한테 니고르 백작의 사람들이 오지 않는 걸 말하지 않았다는 게 너무…… 너무 화가 나고 배신감이 느껴져서……. 이렇게 다치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언니는 죄인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푹 숙였다. 

“난 괜찮다니까. 언니, 언니는 왜 나갔어? 그 사람들 마주쳐봤자 좋을 게 없잖아.”

“라라.”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말 돌리지 말고…… 왜 그런 건지 말해주면 안 될까?”

“……왜냐니……? 당연하잖아……. 전부 언니를 위해서 그런 거야.”

“나를 위해서라고?”

“응.”

언니가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답답하다는 양 가슴을 쥐어 잡고 버럭 소리쳤다. 

“아니! 그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나는 그딴 거 전혀 원하지 않았어!”

“……언니…… 지금 화낸 거야……?”

“그래! 화났어! 왜? 너한테 화내면 안 되니? 왜 나랑 상의도 없이, 말 한마디도 없이 네 맘대로 하냔 말이야! 니고르 백작의 저택에 있을 때도 그래. 난 괜찮다고, 평생 여기 있어도 괜찮다고 말했는데 네 멋대로 탈출시켰어. 그래서 넌 죽을 뻔했다고!”

언니가 그 사람들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까 봐, 상처 받을까 봐 나는 아픈데도 불구하고 언니를 찾아다녔다. 

백작의 저택에 있을 때는 그의 인형처럼 살아가는 언니를 생각하면 너무 괴롭고 안타깝고 마음이 미어져서, 언니를 그렇게 내버려 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차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온몸이 아프고 오베론이 무서운데도 불구하고 언니를 벗어나게 해 주려고 애쓴 것이었다. 

근데 그 모든 것들이 쓸모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 노력을, 무시하고 있다. 뭔가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언니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말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내가 원하는 건 말이야……. 네가 힘든 일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하고 상의해줬으면 했어.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내게 의지해줬으면 했어.”

계속해서. 

“난 네 언니잖아, 네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잖아. 내가 못 미더운 거니? 멍청하게 울기만 하는 언니니까? 그래서 말해주지 않은 거야? 왜 말하지 않은 건데! 왜!”

계속해서. 

“이것뿐이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몰라. 라일라, 너 말이야. 어느 순간부터 이상해진 거 알아? 갑자기 이직을 하자고 하고, 도련님들에게 예의 없게 굴고 하녀장님한테 친근한 척 다가가고……. 엄청, 엄청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계속해서. 

“네가 딴 사람이라도 된 줄 알았어. 나는 네가 왜 갑자기 그렇게 행동하는지 말해줄 줄 알았어. 그래서 묻지 않았던 거야! 아무것도 묻지 않은 건 널 믿어서 그랬던 거라고! 아프지도 않은데 네 말대로 방 안에 가만히 처박혀있던 것도!”

계속해서, 계속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왜 그것도 이것도 말해주지 않는 건데.”

계속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들려온다. 

“너한테 나는 뭐니……? 넌 날 언니라고 생각하긴 하는 거야? 난 그냥 네 짐덩이일 뿐이니……?”

언니가 울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모습이 지겹고 짜증 난다고 느껴졌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내 목소리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분노와 짜증이 들어차 있었다. 

“……뭐?”

“언니한테 다 말해달라고? 다 말하고 상의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건가? 내가 왜? 내가 왜 언니한테 말해줘야 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내 입은 멈추지 않는다. 

“언니는 그때 일만 떠올리면 벌벌 떨고 무서워하잖아. 니고르 백작을 만날까 봐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잖아. 그래서 맨날 내가 언니 옷이랑 심부름을 대신 해주곤 했지. 그런 사람한테 어떻게 솔직히 말하지? 제정신이 아니면 말할 수도 있겠다. 멍청한 에밀리처럼. 언니, 내가, 내가 말이야. 언니를 위해서 그랬다고 하잖아.  그럼 그냥 받아들이면 돼!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내 말대로 따르라고! 전부 언니를 위한 일이란 말이야!”

내가 해결해줄 거야. 언니를 장난감처럼 이용한 니고르 백작에게서 벗어나게 해 줄 거고, 미래에 언니를 감금시킬 거지 같은 도련님들에게서도 탈출시켜줄 거야. 내가. 내가. 이건 모두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왜냐면, 언니가 니고르 백작에게 제 발로 찾아간 것은 모두 내 탓이었으니까. 그때부터 언니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으니까. 

언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넘어진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언니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싫어! 왜 설명도 없이 따라주길 원하는데?! 내가 네 꼭두각시 인형이라도 되는 줄 아니?”

“누가 꼭두각시 인형이래?! 그리고……. 나만 숨겼어? 언니야말로 왜 나한테 알렉산더가 한 말을 전하지 않은 건데?! 외국으로 도망가라면서 돈도 줬다잖아!”

“그때, 그때 너는 너무 아팠어! 전할 겨를이 없었다고! 돈? 돈은 포션 사는데 모두 써버렸어. 그걸로 치료하지 않으면 네가 죽을 것 같았으니까! 의사들은 전부 네가 가망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니……? 응?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언니가 소리를 꽥 질러댔다. 

“그리고 그 사람을 어떻게 믿고 외국으로 가는데! 그 인간은 니고르 백작의 보좌관이라고! 그래서 무시하고 이 공작령에서 지내기로 한 거야. 라일라, 나도 널 위해서 그런 거야. 그럼 너도 따라줘야 하는 거 아니니?!”

언니는 한참을 씩씩대다가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해 이불을 세게 쥐어 잡곤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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