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19 (19/84)
  • 16631946198936.jpg

    Episode 19

    그 저택에서 탈출하고 우리는 마차를 타고 도망쳤다. 마차에는 알렉산더가 준비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는 마차 좌석 밑에 숨겨진 공간에 우리는 꾸역꾸역 들어갔고 그로써 불시 검문을 하는 니고르 백작의 기사들을 피할 수 있었다. 

    모든 긴장이 풀리듯,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첫 번째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에밀리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울고 있었고, 두 번째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낯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주변에는 붕대와 약들이 가득했고 지쳐 누워 있는 유리아 언니와 에밀리 아주머니가 보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언니가 나를 보며 울고 있었다. 

    - 라라,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부탁이야, 라라……. 제발 죽지 마. 제발 나를…… 나를 혼자 두고 가버리지 마……. 

    언니는 그 가냘프고 힘없는 손으로 내 손을 부여잡고 간절히 빌었다. 

    -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버릴 거야……. 

    아, 언니를 두고 가면 안 되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리에게는 서로 밖에 없었다. 나는 언니가 죽어도 슬픔을 이겨내고 꿋꿋이 나아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달랐다. 언니는 아주 유약한 사람이라 정말 내가 없으면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 

    언니의 손을 맞잡아주고 싶었지만,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거지 같은 몸뚱이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구멍 난 풍선처럼 계속해서 기운이 빠져나갈 뿐이다. 뺨에 와닿는 눈물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래, 나는 죽음을 예감했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네 번째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언제 다쳤냐는 듯 몸이 가벼웠다. 언니는 빈 병을 들고서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냐 묻자, 언니는 짧게 말했다. 

    - 포션. 

    언니가 어떻게 포션을 사? 그걸 살 돈이 어디 있다고? 무슨 짓을 한 거야? 언니를 붙잡고는 수많은 질문들을 내뱉었다. 하지만 언니는 답해주지 않았다. 단지 내 손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여잡고 내 앞에 무릎을 꿇었을 뿐이다. 

    - 라라,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평생 함께 있는 거야. 

    끝까지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그때 알렉산더에게 받은 돈으로 포션을 샀던 걸까? 도대체 얼마나 많이 줬길래……? 아니, 애초에 왜 알렉산더의 말을 전하지 않은 거지? 대신 언니는 기억을 잃은 내게 앞으로 공작령에서 숨어 지내자고 말했다. 

    마침 에밀리 아주머니가 하녀로 지낼 수 있게까지 해줘서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공작은 무능한 자를 혐오했고 새로 백작위에 오른 제임스 니고르도 좋아하지 않았다. 생일 파티나 티파티에도 초대하지 않았고 말도 섞지 않는다 하였다. 제임스 니고르가 공작령에 발을 디딜 일은 평생 없었다. 

    하녀로 공작가에서 살게 되면 평생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은 이번 생일 파티에 니고르 백작을 초대했다.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다. 

    공작뿐 아니라 여러 청렴하고 명망 높은 귀족들은 니고르 백작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공작가의 추천장이 있으면 그런 곳으로도 쉽게 이직할 수 있으리라. 

    공작가의 하녀를 그만둔 뒤에는 다시 그곳의 하녀가 돼 숨어 살 생각이었다. 또 실패하면 부모님의 무덤과 추억이 남아 있는 이곳을 버리고, 그제야 외국으로 도피해야 했겠지. 

    생각해보면 너무나 억울하다. 가해자는 아무렇지 않은 양 가만히 있는데 왜 피해자인 우리가 도망 다니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인지. 

    “……유리아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죠?”

    "……시끄러워…….”

    알렉산더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 공작령에 있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니긴 했습니다. 에머스 공작은 니고르 백작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평생 제 땅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게 했겠지요.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앞으로 공작은 계속해서 백작을 초대하고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겁니다.”

    “……왜?”

    “……그에게 얻어낼 게 있으니까요.”

    “그게 뭐냐고?”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습니다.아무튼 하루빨리 이곳에서 나가세요. 이러다가 언젠가 백작을 만나게 될 테니까요. 그건 당신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앞으로 백작이 계속 찾아온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알렉산더는 장갑에 붙은 풀잎을 떼어내곤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백작은 당신의 언니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데려오는 여자들 모두 당신의 언니와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더군요. 갈색 머리에 파란 눈동자…….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하하……. 우스워라. 그딴 쓰레기가 사랑이라니. 만약 유리아를 만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제발 멀리 도망가란 말입니다…….  일이 모두 끝날 때까지. 제가 백작이 당신들을 찾지 못하게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를 겁니다.”

    “……그런 일까지 했어……? 왜……?”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 보았다. 

    니고르 백작이 우리를 찾지 않기에, 새 여자를 찾고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안이 가시지 않아서 조금의 경계심을 가지고 지내왔다. 그런데 사실은 알렉산더 저 자가 우리를 돕고 있던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슬프게 웃었다. 

    “왜냐고요? 당신이 저택을 떠날 때 말하지 않았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뭔가 말했던 것도 같은데……. 

    - 그가 제게서 ……을 앗아갔으니까요. 

    기억 속의 알렉산더는 분노를 꾹 눌러 참는 얼굴로 이를 갈고 있었다. 

    - ……을 위해 계속해서 이 감정을 참아왔는데……. 당신네들을 보고 있으려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단 말입니다. 

    눈빛만 보면 금방이라도 백작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니고르 백작이 당신에게서 무엇을 앗아갔었지? 그렇게 물어볼 분위기도 아니라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움직이자 그 안에 있는 뇌가 출렁거리고 눈앞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열이 너무 오른 모양이다. 

    “……가보겠습니다. 오베론과 마주쳐도 좋을 게 없으니 어딘가에 숨어 계시죠.”

    알렉산더는 그렇게 말하고 저택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다시 내가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숨어 있거나 그럴 때가 아니었다. 니고르 백작이 언니에게 집착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더 빨리 언니를 찾아야 했다. 알렉산더는 모를까 오베론을 만나게 된다면, 그 간악하고 비열한 간신은 백작에게 쪼르르 달려가 언니에 대해 말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냥 언니를 찾아서 어딘가에 가둬두는 게 아니라 왜 내게 알렉산더의 말을 전하지 않았는지까지 물어봐야 했다. 머리가 복잡하다.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제는 정말 서 있기 괴로울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한 손으로 이마를 꾹 누르면서 저택 쪽으로 향했다. 지팡이라도 있으면 좀 더 편하게 저택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조금 더 걷자 한창 파티를 하고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하녀가 공작이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선물 상자들을 하나하나 개봉하고 있었다. 공작은 그 옆에서 무심하게 그것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상자가 열릴 때마다 그 안에 든 것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거나 아주 대단한 물건이라 떠들어댔다. 나는 그 속에 끼어 있는 오베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재빨리 몸을 숨겼다. 

    떨지 마……. 떨지 말라고 라일라. 그곳에서 탈출한 건 벌써 몇 달 전의 이야기인데, 왜 마음은 아직도 그곳에 있는 것 같은 걸까? 

    “다음은 오세스 도련님께서 준비한 액세서리입니다.”

    조그마한 상자가 열리고, 내가 고른 붉은색의 액세서리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과 맞닿은 그것이 발하는 빛은 무척이나 밝아 눈이 아플 정도였다. 

    “아…… 그래, 무척이나 아름답군. 역시 나의 아들이야.”

    열기 없는 목소리, 감흥 없는 표정.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무감정한 모습. 

    미소를 띤 오세스가 그녀의 앞에 걸어 나와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에 드신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제가 걸어드리겠습니다. 어머님.”

    “그래. 거기 하녀, 내게 채워진 목걸이와 귀걸이를 빼주도록.”

    하녀는 조심스레 공작의 목걸이와 귀걸이를 뺀 후에, 오세스의 선물을 건넸다. 공작은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오세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쁘니?”

    “네, 아름다우세요. 마치 봄의 요정이 내려온 것 같습니다.”

    다음은 이즐리의 선물이었다. 내가 보기엔 장식 하나 없고 하얀색으로 도배된 심심한 검이었는데,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아주 대단하고 희귀한 검이라 하였다. 이번에도 공작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오세스는 잠깐 그 곁에 서 있다가 저택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가족 놀이를 하고 있는 그들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있는 하녀들을 다 살펴보았으나 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에밀리 아주머니나 언니의 행방을 물었지만 아무도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그때, 한 하인이 저택을 가리키며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언니가 저곳으로 급하게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저택으로 들어가 현관을 지나고 1층 복도를 다 뒤져보고, 계단을 올라 2층 복도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눈앞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리에서 힘이 풀렸고 그대로 복도에 쓰러졌다.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눈앞이 흐물흐물 거리며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몸을 일으켜 끙끙대며 벽에 기대앉았다. 벽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 끝이다. 움직일 수 없다. 

    열이 올라서 제대로 된 생각도 할 수 없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고, 다리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이제 곧 기절하겠지. 

    그때 누군가가 계단에서 내려와 내게 다가왔다.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듯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시야가 깜깜해지기 시작하고 있던 터라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사람의 아무 데나 잡아챘다. 번들번들하고 매끄러운 옷감이 느껴진다. 옷자락을 잡은 모양이었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진짜 죄송한데…… 저희 유리아 언니 좀 찾아주면 안 될까요……? 언니 좀 찾아서 저한테 데려와주세요……. 네……? 아니다……. 그냥 데려오지 마세요. 이 모습을 보면 언니가 걱정할 거예요. 언니한테 아무 데나 숨어 있으라고 하면 안 될까요……. 아니면, 아니면 언니 곁에라도 있어주세요…….”

    “……라……. 라라…….”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끊겨서 들려온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계속 뭐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 그거 제 이름 맞죠? 죄송해요. 너무 아파서…….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려요.”

    갑자기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 않는다. 

    내 몸이 옆으로 기울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라라…… 당신은 참 이상해요.”

    그리고 갑자기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당신은 분명히 저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언니랑 이어주려고 했잖아요. 그러다 갑자기 당신의 언니한테 다가가지도 못하게 하고 저를 미워하기 시작했죠.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요?”

    볼에 맞닿는 옷감이나 등이나 다리 밑에 닿는 온기, 좋지만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향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안아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다시 태도를 바꿔 유리아 곁에 있어달라고 말하네요. 당신이라는 사람을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꾸, 신경이 쓰이나 봐요.”

    끊겨가는 의식 속에서 그 목소리만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