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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8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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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18

    나는 에밀리 아주머니를 말리기 위해 달렸다. 하녀장님이나 집사님께 들키면 혼날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잡기 위해 달렸다. 

    내가 왜 아주머니를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하지만 이미 지나버린 일을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그녀를 잡으면 파티가 끝날 때까지 어딘가에 묶어서 가둬두자. 입에는 손수건을 욱여넣고 밧줄로 막아버리자. 

    좀 심한가? 괜찮아. 나중에 사정을 설명하면 되지 않겠어? 

    그리고 언니 방문을 제대로 막아버리자. 

    대걸레 같은 걸로 손잡이를 고정시킬까? 서랍으로 앞을 가로막을까? 나오지 않기로 했지만 혹시 모르잖아. 갑자기 정원 산책을 하고 싶어서 귀족들이 우글우글한 그쪽으로 와버리면 어떡해? 그러다가 봐 버리면 어떡해.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곳에서 발을 헛디뎌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뾰족한 모서리에 이마를 얻어맞자 세상이 깜깜해졌다. 어둠 속에서 빛이 팍 하고 튀더니 시야를 밝혀주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여러 고용인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삐- 하는 이명과 웅성거리는 소리가 뒤섞여서 머리가 아팠다. 

    “계단에서 구른 거야?”

    “누가 얘 좀 의무실에 옮겨봐!”

    “작은 사고입니다. 손님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손에 샴페인을 든 귀족이 나를 내려다보다가 집사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빨리 언니한테 뛰어가야 하는데 몸이 잘 안 움직인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다. 게다가 어지럽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그냥 이상해.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이 좋은 날에 소란을 일으켜서 되겠습니까? 코센 씨가 옮겨주시죠.”

    집사장님이 심각한 얼굴로 코센이라는 남자를 가리켰다. 코센은 내게 다가와서 나를 부축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남자에게서 벗어나 똑바로 서려고 노력했다. 다리 전체를 후려치는 격통에 제대로 서 있는 게 힘들었다. 

    구를 때 다리를 부딪혔나 봐. 내 쪽으로 손을 뻗는 남자의 가슴을 쭉 밀었다. 

    “……괜찮아요. 전 괜찮아요.”

    “하지만 그렇게 심하게 굴렀는데, 어떻게 부축 없이 의무실에 갈 수 있겠니. 자, 어서 이리 와서 기대렴.”

    “……아니에요. 조금 구른 것뿐이에요. 전 진짜 괜찮다고요.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알아서 갈 수 있어요.”

    그렇게 말했지만 의무실에 갈 생각은 없었다. 에밀리 아주머니를 잡아야 했다. 

    나는 사람들을 파헤치고 고용인 숙소로 향했다. 

    걷는 게 힘들다. 자꾸 절뚝이게 된다. 그래도 계속 걸었다. 

    난 숙소에 다다랐을 때 이미 아주머니가 언니에게 모든 말을 전했음을 직감했다. 

    이미 너무 늦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계단에서 구르지만 않았어도 제시간에 도착해서 아주머니를 잡을 수 있었을까?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방으로 향했다. 혹시 모르잖아. 

    그렇지? 그런 거지? 

    방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불 위에 누군가 있었던 흔적만 남았을 뿐이다. 

    아, 말했구나. 온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실이 끊긴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언니…… 유리아 언니…….”

    안 돼. 울지 마. 괜찮아.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최소한 언니를 대리와 만나게 하지는 말자. 

    문고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는 어디로 갔을까? 에밀리아 주머니와 함께 가버린 걸까? 아니면, 아니면 무섭다고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어딘가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열로 머리가 핑 돌고 걷기 힘들었기 때문에 나는 벽에 살짝 기댄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1층에서 3층까지, 숙소의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그 안을 살펴보았지만 언니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저택의 본관으로 향하기로 했다. 

    정원에 나 있는 지름길을 이용하면 빨리 본관으로 갈 수 있었다. 수풀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며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적 드문 이곳에 사람이 찾아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남자의 발랄한 목소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한숨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니고르 백작님도 참.”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익숙한 이름이 내뱉지만 않았어도. 

    무섭다고 발악하는 사람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이 목소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그놈의 목소리, 잊으려 해도 차마 잊지 못한 목소리. 

    동시에 머릿속에서 채찍 소리가 울리고,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흐릿했던 기억이 선명해지고 채찍을 든 남자가 한 손으로 내 뺨을 가볍게 두드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 아아- 불쌍하긴. 어쩌다가 백작 눈에 띄어가지고. 너나 너희 언니나 불쌍하긴 매한가지다.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눈앞이 흐려지고 몸뚱이가 바닥으로 추락한다. 

    부스럭, 하고 풀잎이 짓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시야가 훤해졌을 때 나는 앞으로 엎어진 채 밑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일어나려고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젠장…….”

    그러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어디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바람이라도 분 것 아닙니까?”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쥐새끼라도 숨어 있는 거 아냐?”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있으면 그 자에게 여기 있다는 사실을 들킬지도 모른다.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다시 그곳에 가는 건가? 그건 싫었다. 

    그곳에 다시 갈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더 나았다. 

    가쁜 숨을 가다듬고 재빨리 수풀 속을 파고들어 몸을 숨겼다.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남자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앞을 겨우 볼 수 있을 정도로만 수풀더미를 파헤쳐 그들을 지켜보았다. 

    바로 오른쪽,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 두 남자가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백작님은 이 좋은 날에 그런 실수를 저지르면 어쩌자는거야? 이번 이 사업을 넓힐 기회가 될 수도 있었는데……. 난 가끔 백작님 대가리에 뇌가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백작님은 파란 피가 흐른다는 귀족, 당신이 함부로 판단할 분이 아닙니다. 게다가…… 사고였지 않습니까.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여자가 갑자기 백작님을 공격할 줄은.”

    “하하하! 네 입으로 들으니까 더 웃긴 걸……! 백작님이 제일 아끼는 보좌관인 네가 전해주라고. 앞으로 조심 좀 하라고 말이야. 그럼 좀 들어 처먹을지도 모르지.”

    두 남자를 눈에 담은 순간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소리를 지르려는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둘 다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옷에 달린, 하얀 사슴이 그려진 브로치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니고르 백작의 사람들이다. 

    와이셔츠 앞섶을 풀어헤친 남자는 오베론으로, 뒷골목에서 일하던 깡패이자 백작이 아끼는 하인 중 하나였다. 

    그가 안대로 가린 오른쪽 눈은 내가 검으로 공격한 부위였다.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나자 손이 벌벌 떨렸다. 

    그가 내게 했던 짓을 떠올릴 때면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턱 막혀온다. 

    다른 남자는 보좌관인 알렉산더였다. 언니와 내가 저택을 빠져나갈 때 도와줬던 남자. 

    왜 하필 지금 마주치게 된 걸까? 언니가 얌전히 방 안에 있어주기만 했더라면 몰래 그들을 따라다니며 이곳에 온 목적을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몰래 따라다닐 수나 있었을까. 오베론의 목소리를 듣고 그 얼굴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몸이 떨려오는 것을. 

    그때였다. 

    알렉산더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은 아주 짧았고, 알렉산더는 다시 고개를 돌려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갔기에 눈을 마주쳤던 게 착각인가 싶었다. 

    그래도 혹시 몰랐다. 나는 재빨리 수풀에서 손을 놓고 몸을 웅크렸다. 

    알렉산더는 오베론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오베론은 불만을 표하다가 저택으로 가겠다고 했고 한 사람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아 있던 알렉산더가 내가 숨은 수풀로 다가왔다. 

    나는 눈을 감고 하하, 하고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 들켰구나. 

    알렉산더가 속삭이듯 내뱉었다. 

    “라일라.”

    내 앞에 있는 수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구 흔들렸다. 

    나는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장갑 낀 손이 수풀이 가르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오베론에게 느꼈던 두려움을 그에게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풀이 완전히 갈라지고 내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담담한 표정이 무너져 내리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화난 것 같기도 했고, 슬픈 것 같기도 했고, 잔뜩 지쳐 보이기도 했다. 

    “당신이 맞군요.”

    알렉산더는 연신 한숨을 푹푹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단, 오베론은 갔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유리아도 여기 있는 겁니까? 제가 이 제국이 아니면 어디라도 좋으니 도망가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 나라를 떠나서 살 수 있을 정도로 돈도 충분히 준비해주지 않았습니까. 알겠다고 했으면서 왜…….”

    “……알렉산더 당신이 그렇게 했다고?”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도망가라고 했었다고? 돈도 준비해줬었다고? 

    그는 저택에서 도망치게 도와주기는 했어도, 그런 식의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 이마를 꾹 누르고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기억날 리가 없지. 

    나는 저택에서 도망쳐 나와 며칠 동안 끙끙 앓은 다음,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전생의 기억을 거의 통째로, 과거의 기억을 부분 부분 잃었지만 살아가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그렇기에 애써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게 이런 식으로 또 한 번 엿을 먹일 줄은 몰랐다. 가장 처음 먹은 엿은, 이 저택의 도련님들이 미친 집착 남주라는 것이다. 

    “……그딴 거 몰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당신들이 저택에서 도망친 후, 전 백작 몰래 돈을 들고 찾아갔었습니다.  에머스 공작령에 있는 에밀리라는 사람의 집이었죠. 당신을 불렀지만 나오지 않고 대신 유리아가 나타나더군요.  그녀는 당신이 많이 아프기 때문에 나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돈을 주며 외국으로 도망쳐 살라고 말하고 떠났습니다. 유리아가 전해주지 않았습니까?”

    “……뭐……?”

    이건 기억상실증이랑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였다. 그냥 유리아 언니가 내게 말을 하지 않은 부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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