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17 (17/84)

16631946118418.jpg

Episode 17

“언니는 아파.”

“아프긴 하지…….”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절대 방 안에서 나오면 안 돼! 푹 쉬어.”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니야. 바로 어제도 열심히 일했는걸?”

“그래도! 안 돼! 오늘은 푹 쉬어! 내가 하녀장님께 미리 휴가계도 받아왔으니까.”

“제멋대로구나.”

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화났나……? 그녀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니는 눈부시게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라일라 네가 원하니까.”

화났구나……. 언니는 손을 뻗어 밴드를 붙여놓은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근데 계속 그 상처가 어떻게 났는지는 안 알려줄 생각이야? 벽에 세게 부딪혔다는 말은 안 믿어.”

“……미안.”

키가 멀대 같이 크고 울퉁불퉁한 남자한테 얻어맞았다고 하면 걱정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다시는 언니의 우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나 때문에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했으면 정말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말 안 하길 잘한 거야. 

“너는 항상 그렇구나.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 그래도…… 언젠가는 말해줄 거지?”

언니가 쓸쓸하게 웃었다. 그래, 언젠가 우리가 공작가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졌을 때 모두 말해줄게. 내가 알고 있는 미래와 그 미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했던 일, 그리고 이 상처까지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빙그레 웃었다. 

“……내가 언제 언니한테 솔직하지 않을 때가 있었나?”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고는 방을 나왔다. 

아무튼…… 좋아. 됐어! 찜찜한 일이 많기는 하지만 언니를 방 안에 가둬둘 수 있게 됐어!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축 처지는 것 같아서 걷는 내내 휘청거렸다. 

감기 때문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감기 기운이 격하게 몰려오더니 오늘 아침에 절정을 이뤘다. 

“주, 죽을 것 같아…….”

방에서 괜찮은 척 하느라 얼마나 혼났는지. 오늘만큼은 열이 올라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려준 홍조증이 도움이 됐다. 괜찮다, 아프지 않다고 몇 번이나 자기 최면을 걸었다. 아프지 마. 내 몸 상태는 괜찮아. 괜찮아야 해. 나는 니고르 백작의 대리를 감시해야 한단 말이야. 

그들이 정말 공작의 생일을 축하해서 온 건지, 아니면 언니를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확인해야 했다. 만약 후자라면 억지로라도 추천장을 얻어내고 당장 도망가야 했다. 

생일 파티는 한 시 즈음에 열리며 언니를 방에 데려다준 지금은 고용인들의 아침식사가 막 끝난 시간이었다. 

내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이나 또 레몬과 싸웠나, 하고 웃는 사람들의 얼굴과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의 레몬과 그의 무리들을 지나쳐 부엌으로 향했다. 

내가 맡은 일이 정원에 늘어진 파티용 테이블에 음식을 정리해두는 것과 파티에서 손님들이 다 먹은 음식을 새롭게 채워 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엌에서 음식을 받아올 필요가 있었다. 

주방장에게 뜨끈한 수프를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다른 하인과 함께 옮기기는 했으나, 역시 냄비가 크고 뜨거워서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안 그래도 열 때문에 더워 죽겠는데 더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이즐리와 눈을 마주쳤다. 와 하필이면 이즐리랑 마주치냐. 

곧바로 눈을 돌리지 못한 이유는 그가 꽤나 멋진 차림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생일 파티라서 그런지 확실히 예쁘게(인정하고 싶지 않다) 꾸미고 있었다. 부스스하던 머리는 깔끔하게 뒤로 넘겼고, 항상 허름했던 옷은 깔끔한 정장으로 변해 있었다. 항상 후줄근하게 체육복을 입고 다니던 옆집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정장을 입고 나온 것 같은 충격이랄까. 

그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곤 손가락으로 제 볼을 콕콕 두드렸다. 입모양으로 뭐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왜 저러는 거야? 내 뺨? 상처를 보고 놀랐나? 아니면 뺨에 붙은 밴드가 유난히 커서 신기하게 느낀 걸까? 저번에도 레몬과 싸우다 생긴 상처를 발견한 그가 이상한 반응을 보인 게 생각이 났다. 또 뭔 장난이라도 치려는 거 아니냐. 에이 몰라 무시하자.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꾸벅 인사를 하고 다음 음식을 가지러 가기 위해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집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빵조각을 옮겼다. 

음식 이름은 모른다. 그러다가 누군가를 찾는 것 같은 이즐리를 마주쳤다. 

이즐리가 찾던 사람은 나였는지 곧바로 내게 다가와서 상처에 대한 것을 물었다. 또 레몬이라는 애랑 싸운 거냐느니 자꾸 물어오는데……. 애써 웃어주면서 대충 답을 넘기고는 있으나 솔직히 좀 짜증 났다. 내가 싸우든 말든 누구한테 처맞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는 제대로 된 답을 해줄 때까지 계속해서 음식을 옮기는 내 옆에서 까불거리다가 한 시 정각을 가리키는 벽시계를 보고 정원으로 가버렸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고 말이다. 말 안 해주려고 하니까 또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봐서 얼마나 놀랐는지! 그냥 넘어졌다고 말하긴 했는데 안 믿는 눈치였다. 

부엌 의자에 앉아 조금 휴식을 취하고 한 시 이십 분 즈음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정원으로 향했다. 고용인들이 저택에 들어오는 귀족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초대 리스트를 든 하인은 그곳에서 들어오는 귀족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지크프리트 백작님!”

“어서 오세요. 에폴트 남작님!”

진짜 파티가 시작되었다. 

정원은 생일 파티를 위해 잔뜩 꾸며져 있다. 하얀 식탁보가 쓰인 테이블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뷔페처럼 다양한 음식들로 장식해두었다. 화장실에 들르려는 손님을 위해 개방해놓은 현관과 1층까지 꾸며놓았다. 

나도 언니처럼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통에 구석에 숨어서 그들의 입장을 지켜보았다.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대리가 올 수도 있으니까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니고르 백작의 대리는 어디 있을까?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누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을 주지 않으려야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공작가 사람들이다. 

공작과 그의 아들들은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채 한 곳에 모여 있었다. 평소와 달리 붉은 드레스를 입은 공작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색이 강한 검은 머리카락, 빨간 드레스와 대비되는 하얀 피부가 더더욱 희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진짜 흥미 없어 보이는 표정이다. 자기 생일 파티인데도 즐겁지 않은가 봐. 

뒤이어 차례로 정장을 갖춰 입은 도련님들을 바라보았다. 오세스는 미소를 띤 채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주위를 홱홱 둘러보던 이즐리는 하품을 하며 음식이나 집어먹고 있었으며 아서는 제 엄마한테 껌딱지처럼 꼭 달라붙어서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나눈다기보다는 그가 일방적으로 뭐라 뭐라 얘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을 떠들든 듣는 상대는 영 집중하는 것 같지 않은 태도였다. 아서는 한참 그렇게 떠들다가 우울한 얼굴로 샴페인을 홀짝였다. 

그 밖에 여러 귀족들을 둘러보았지만 대리로 보이는 얼굴을 없었다. 보통 대리로 오는 자는 해당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브로치를 달고 오는데, 니고르 백작가를 의미하는 네 개의 거대한 뿔이 달린 사슴의 얼굴이 그려진 브로치를 가슴팍에 달고 있는 자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리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좀 더 가까이 가볼까……?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에이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라라 여기서 뭐해?”

“어? 나…… 농땡이……?”

“나 참, 빈 음식 채워 넣는 담당이라서 지금은 여유롭다 이거지? 할 일 없으면 나처럼 서빙이라도 하지 그래?" 

이제 보니 그녀는 샴페인이 가득 든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쟁반 위를 바라보았다. 

저런 걸 어떻게 운반하는 걸까? 나라면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해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것 같은데 말이다. 에이미는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너 뭔가 평소보다 더 빨간 거 같아.”

“뭐? 내가? 착각이겠지!”

“뭔가 기운 없어 보이기도 하고…….  착각인가……?”

힘껏 웃어 보이자 에이미는 뒷머리를 긁적이다 서빙을 하기 위해 정원으로 들어섰다. 

나도 서빙 핑계로 들어가 볼까 하다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에밀리 아주머니를 발견했다.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주머니는 정확히 내가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얼굴이 너무 무섭게 일그러져 있는 걸 보고 나는 본능처럼 저택 안쪽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뭐야, 뭐지? 도대체 왜 저렇게 무섭게 쫓아오시는 거야?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나는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 그 층 맨 끝에 있는 손님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문 밖에서 에밀리아 주머니가 문을 세게 두드리며 꽥 소리쳤다. 

“라라……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니! 왜 말을 하지 않은 거야!”

“잠시만요. 에밀리 아주머니 좀 진정 좀 하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초대 리스트를 봤단다.”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어떻게요? 아주머니는, 아주머니는 리스트 체크 담당도 아니잖아요…….”

“담당이 잠깐 하늘을 보고 오는 사이에 대신 그 일을 맡았단다. 그때 알게 됐지.'’ 

“아…… 씨…….”

나는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왜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한 걸까? 언니 일에 정신이 팔려서 에밀리 아주머니를 신경 쓰지 못했다. 바보 같은 라일라. 멍청한 라일라. 무식하고 덜 떨어졌어. 짐 덩어리. 

그녀가 속삭이듯 내뱉었다. 

“그 자가 이 저택에 오게 됐다는 걸! 나는…… 나는 그 자가 이 저택에 초대됐을 줄은 몰랐어……. 어째서 그런 자를……. 공작님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 알 수가 없구나.”

“……이 저택에 있는 아무도 모를 걸요.”

“네가 하녀장님을 도와 초대장을 체크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걸 들었어.  그럼 이미 그 사람의 이름도 봤을 거 아니니. 그럼, 그럼 왜 말을 안 한 게야? 내가 널 도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그, 그건 아니에요. 아주머니는 저희를 돌봐주시고 이 저택의 하녀로 고용될 수 있도록 도와주셨잖아요.”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말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마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머니에게 말하면 언니가 알게 될 거 아니에요.”

……라는걸.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너…… 너 유리아에게 아직 이 얘기를 하지 않은 거니?”

“아…….”

실수했다. 이미 유리아 언니와 이야기를 끝냈고 앞으로 계획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어야 했는데. 

이제 그녀는 언니에게 니고르 백작의 대리가 온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에밀리 아주머니는 항상 그랬다. 뭐든 내가 혼자 해결하는 꼴을 보지 못했다. 항상 힘들어하는 언니를 굳이 끼워 넣어서 일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내가 혼자 하면 더 잘할 수 있는데도 그랬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달아 버티기 힘들 지경이었다. 금방이라도 은인과도 같은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에요. 얘기했어요.”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예요.”

“한 번 더 거짓말하면 유리아에게 말하러 갈 거야.”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유리아 언니에게 말하지 말아요.”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미안하지만 난 말해야겠다. 유리아도 그날의 당사자로서 이 일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러지 마세요. 언니에게 말하지 말라고요! 언니는 아파서 오늘 하루 동안 방 안에서 나오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그 사람과 마주칠 일이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어차피 대리잖아요? 그 사람이 아니라고요. 제가 다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제발 가만히 있어요. 제가 언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나요? 네?”

“넌 왜 그렇게 옛날부터 제멋대로인 거니! 왜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는 거야!”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난 유리아에게 말할 거야. 그렇게 알아라.”

“*발……. 그러지 말라고! 그러지 말란 말이야!”

나는 주먹으로 문을 세게 쳤다.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는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녀가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문을 열었지만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분노 때문인지 감기 때문인지 눈앞이 핑하고 돌았다. 

“제멋대로인 건 당신이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