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16 (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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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16

    라라, 아무리 쓰레기라도 머리를 벽돌로 내려치면 어떻게 해?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경비병들에게 저 꼴을 들키면 어쩌려고? 

    언니는 살인마 동생을 둔 사람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을 것이다. 안 그래도 짐짝인데 훨씬 쓸모없는 짐짝이 되어버리겠지. 

    죽진 않았어도 저런 상처를 만들었으니 폭행범으로 신고당할지도 모른다. 아니, 뒷골목 깡패로 보이니 신고는 못 할 것이다. 하면 자기들만 잡혀가지. 

    타악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아, 앞에 서 있던 깡패한테 뺨을 얻어맞았다. 입안이 터졌는지 피 맛이 느껴졌다. 

    “라일라……!”

    레몬이 입을 뻐끔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도 와, 지금 레몬이 내 이름을 부른 건가?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야 쟤가 내 이름을 부른 적은 처음이 었으니까 맨날 이년, 저년, 여우, 재수 없는 계집애, 걔라고만 불렀잖아.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 걸지도 모른다. 

    “실실 쳐 우는 것 좀 봐라.”

    “형님, 아무래도 이거 진짜 미친년 같은데.”

    그러게 나 진짜 미쳤나 봐.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웃냐, 바보 같은 라일라. 놈에게 어떤 취급을 받건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했다. 

    뺨에 커다란 상처가 나 있는 남자가, 그러니까 내 뺨을 후려친 남자가 내 얼굴을 잡아챘다. 뭐라 뭐라 떠드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얼굴에 침을 뱉어버리고는 주먹으로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그리고 반대로 돌아서서 내 손목을 잡고 있던 남자의 팔을 거세게 깨물었다. 비명 소리가 터지고 손목이 풀렸다. 

    “도망가자.”

    “……뭐……?”

    나는 얼빠진 레몬의 손을 잡아채고 그 자리에서 도망갔다. 아무리 내가 싸움에 강해도 남자 두 명은 못 이겨. 

    체격 차가 있었다. 남자들은 우리를 따라오려고 했지만 근처에 지나가는 경비병들을 발견하고 쏜살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경비병의 옆에는 아까 봤던 중년 부부가 붙어 있었다. 아, 저들이 불러온 거구나. 경비병들은 남자들을 쫓았다. 

    그 무시무시하다는 전쟁 영웅, 록산 에머스의 땅에 저런 것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 깡패, 사기꾼 등의 범죄자들을 쥐 잡듯 잡아서 치안이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원작에서도 이런 식으로 언니와 양아치들이 조우한 적이 있던 것 같다. 단지 도련놈들이랑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감히 그딴 이유로 우리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예쁜 언니를 위험에 빠뜨리다니, 작가 자식 죽여버린다……. 

    그때였다. 

    “언제까지 잡고 있을 생각인데?!”

    레몬이 내 손을 뿌리쳤다. 

    “너……. 왜 날 도와줘? 나 싫어하잖아!”

    뭐야 왜 당연한 소릴 하고 앉았어. 

    “당연히 싫어하지.”

    “그러면 왜……!”

    “근데 그거랑 이거랑은 별개잖아.  사람이 사람을 돕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 

    당연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내 부모님의 원수! 이런 게 아닌 이상은 친절을 베풀어 줄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 상황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건 쓰레기 아닌가……. 

    뿌리쳐진 손을 만지작거리고 고개를 들자, 레몬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걸 발견했다. 뭐지? 영혼이 빨려버린 것 같은 모습이다. 곧이어 옅게 탄 피부가 새빨갛게 변했다. 

    “……나, 나였다면 꼴 좋다고 무시했을걸?”

    “뭐? 무시할 거라고? 진짜? 쓰레기…….”

    “닥쳐! 그리고…… 너 진짜 미친놈 아니니?! 어떻게 거기서 벽돌로 사람 머리를 때리니?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그렇게 많이…….”

    “참 나~ 구해줘도 난리야……! 그럼 그 상황에서 뭘 어쩌는데? 조금만 늦었으면 네가 큰일 났을걸? …… 머리 때린 건 좀 오버라는 거 인정하지만…….”

    “그냥 경비병을 불러오면 되는 일이잖아! 이거 완전 살인마 아냐?!”

    살인마라니…….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아니거든…….”

    “……반응이 왜 그런데……. 사람 기분 이상해지게…….”

    내 반응이 뭐? 입을 삐쭉 내밀고 째려보자 입을 꾹 다물어서 린다. 드디어 조용해지려는 모양이다. 나는 만족스레 웃고는 다시 광장으로 향했다. 뒤에서 레몬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좀 소름 돋기는 했지만…… 워…….”

    “뭐라고?”

    “……맙다고…….”

    “뭐? 잘 안 들려.”

    “……두 번은 안 말해! 일부러 안 들리는 척하는 거지? 재수 없는 계집애! 여우같이 사람 속을 배배 꼬이게 하고!”

    나는 억울했다. 정말로 안 들렸단 말이야!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저렇게 화를 내는 거야……. 

    곧 우리는 광장에 도착했다. 마리는 어디 있는 걸까? 아까 마리와 함께 있던 마지막 장소에 가보긴 했으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 온 것이다. 이 세계에는 신기하게도 길을 잃으면 제자리에 있거나 광장에 가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없으면 경비병에게 부탁해서 마리를 찾아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시계탑 근처에서 꽃을 팔고 있던 여자아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녀 언니들, 이름이 레몬이랑 라라예요?”

    “응, 맞아.”

    통통한 볼살이 무척이나 귀여운 아이였다. 어깨까지 오는 빨간색 머리는 어찌나 곱슬곱슬 거리고 풍성한 지 커다란 빨강 동그라미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내 손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려버리고는 새치름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쯧!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요!”

    “미…… 미안……. 에취!”

    그, 그래 아무리 귀여워도 함부로 머리를 쓰다듬는 건 예의 없는 짓인데.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하자 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이래서 어른들은.”

    좀 애늙은이 같다……. 아이는 바구니 안에 있는 꽃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마리라는 언니가 자기가 올 때까지 여기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래요. 아무것도 하지 말랬어요. 되도록 싸우지도 말고요. 굳이 싸울 거면 레몬의 머리에 땜빵을 만들어달라고 했고요. 아, 꽃 한 송이 사실래요?"

    “응? 어……. 예쁘긴 하지만 필요 없어.”

    “이렇게 말까지 전해줬는데 하나 사줘야 하는 거 아녜요? 정말 예의도 센스도 없는 언니야. 정 싫으면 제 머리 만지게 해 준 값이라고 생각하고 사달란 말이에요!”

    그런가? 얼떨결에 꽃 한 송이를 사게 됐다. 노란색인 게 참 예뻤다. 내게 받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표정이 밝았다. 

    돈이 그렇게 좋을까. 하기사 나도 돈이 좋다. 어렸을 때 저금통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돈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절로 웃음이 튀어나오곤 했으니까. 

    아이는 우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내 뒤통수를 확 후려친 레몬이 호구냐고 나를 질책했다. 괜히 시비를 거는 그녀의 손을 와작 깨물자 비명 소리가 잠깐 동안 광장에 울려 퍼졌다. 

    레몬은 더 이상 나랑 함께 있고 싶지 않다면서 저택에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내가 재빨리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아챘다. 

    “가만히 있어. 그러다가 또 그 깡패 새끼들 만나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나는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레몬도 내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내 옆에 앉았다. 근데 우리 사이에 너무 가깝게 앉는 거 아니니? 

    “멀리 떨어져 앉아!”라고 화를 내자 그녀는 팔꿈치로 내 어깨를 퍽 치고 옆으로 가버렸다. 

    맞은 곳을 매만지며 그녀를 째려보았다. 눈을 매섭게 치떴지만 반응을 안 해주니까 조금 뻘쭘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신발 근처를 지나가는 개미를 구경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뭐, 반응을 해주든 안 해주든 뻘쭘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레몬이랑 둘이서만 있어본 적은 처음이며 우리는 딱히 친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현재, 불쌍한 라일라는 어색한 사람과 단둘이 있어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친하게 지내자고 레몬에게 다가갔었다. 하지만 친구가 되지 못했다. 자기 무리랑만 놀고 내가 다가오면 꼬질꼬질한 애랑 엮이고 싶지 않다면서 벽을 쳐대는 사람과 어떻게 친해질 수가 있겠나. 

    그녀의 재수 없는 행동을 무시로 일관했지만 언니 험담을 한 이후부터는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리의 별것도 아닌 사이가 엄청나게 악화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멍 때리고 있을 때 레몬이 대뜸 말을 걸었다. 

    “너…… 뺨 괜찮아?”

    “아?”

    그래, 그러고 보니까 뺨을 얻어맞았었지. 그걸 떠올리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새 입안에 한가득 고인 피를 바닥에 뱉어냈다. 이때 레몬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정말, 요란스럽다니까. 

    “아니. 엄청 아픈데.”

    “그럼 왜 괜찮은 것처럼 굴어? 짜증 나게 진짜…….”

    괜찮은 것처럼 안 굴었는데……. 한껏 억울해하고 있자 레몬이 잠깐 어디 좀 갔다 오겠다면서 벌떡 일어섰다. 잡아봤지만 곧 돌아오겠다고 소리치며 가버리는 통에 어버버 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잠시 뒤 레몬이 돌아왔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연고를 내 다리 위에 던졌다. 

    “야, 발라.”

    “……너 미쳤어……?”

    레몬이 나를 위해 약을 사다 줬단 말인가? 미친 게 틀림없다. 그때 깡패한테 머리를 얻어맞은 건가? 레몬이 다시 연고를 홱 가져가며 화를 냈다. 

    “바르기 싫으면 말든가!”

    “아니 바를래. 공짜 아주 좋아.”

    나는 다시 그녀의 손에서 연고를 빼앗아갔다. 그것을 쭉 짜서 볼에 발랐다. 손이 볼에 닿을 때마다 따끔거린다. 아마 다음 날이면 멍이 들겠지. 언니가 보면 걱정할 텐데……. 그 깡패 새끼들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근데 여기 독 든 거 아니지?”

    “죽을래? 왜 발라놓고 그딴 말을 지껄이는 거야?”

    “그냥 문득 생각나서……. 근데 너 나 걱정해주는 거야?”

    “닥쳐, 닥쳐, 닥쳐! 누가 누구를 걱정해? 내가 왜 너 같은 걸 걱정하는데?”

    “……걱정하는 거 맞는 거 같은데.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이런 거에 익숙하거든. 기절할 정도로 심하게 얻어맞는 거나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게 아니면 오케이야.”

    이즐리의 명령으로 그의 하인을 걷어찬 이후로, 절대 남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싶지 않아 졌다. 그 하인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쪽팔려하며 엉엉 울었기 때문이다. 

    “시끄러워…… 그딴 말 하지 마. 너 때문에 갑자기 짜증 나는 일이 떠올랐잖아.”

    “응? 뭔데?”

    레몬은 옳다구나 입을 열었다. 

    “저번에 이즐리 도련님이 대뜸 내 엉덩이를 걷어차고 갔던 거! 막 ‘그거 네가 낸 거지?’라고 하면서……. 내가 뭘 냈다는 거야?”

    “와, 역시 이즐리 도련님이네. 에머스가의 대표 미친놈!”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다가 다시 정색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거랑 같은 의견이라니……. 기분 나쁘다. 이러지 말자 레몬, 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 엉? 사이좋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사이가 아니라 머리를 쥐어뜯고 팔을 깨무는 그런 사이잖아. 

    그런 내 생각을 전적으로 부정하듯, 내 입은 아주 친근하게 오랫동안 궁금해왔던 사항을 물어왔다. 

    “너 오세스 도련님 좋아하지?”

    “뭐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떤 년이 말한 거야?!”

    “아니……. 안 물어봐도 그냥 티가 팍팍 나거든…….”

    오세스 옆에만 가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수줍은 소녀로 변하는데 어떻게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언니와 오세스가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본 그녀의 눈이 질투로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언니에게 못되게 굴지만 않았으면 진작에 오세스와 저것을 엮어줬을 것이다. 아니, 엮어줬으려나? 레몬이 재수 없기는 해도 그에게 감금당하는 건 원치 않았다. 아마…… 말려줬겠지. 

    레몬의 얼굴과 귀, 목이 몽땅 빨개졌다. 이젠 레몬이 아니라 애플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으르렁거렸다. 

    “남들한테 말하고 다니면 죽여버릴 거야!”

    말 안 해도 들킬 것 같은데. 그런 의미로 코웃음 치자 레몬이 내 다리를 걷어찼다. 나는 다리를 부여잡고 툭 내뱉었다. 

    “앞으로 언니를 욕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비밀로 해줄게. 우리 언니랑 오세스 도련님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괜히 질투하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언니한테 막 여우라는 말이나 하고 말이야! 언니는 그냥 다른 사람들한테 하는 것처럼 똑같이 도련님한테 친절하게 군 거란 말이야! 도련님도 똑같고…….”

    뭐, 오세스는 사심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오해한 넌…… 완전 쓰레기야! 정말 못됐다고!”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오세스 도련님 얘기 좀 그만해!”

    그렇게 투닥거리는 사이, 마리가 나타났다. 

    “애들아, 기다리고 있었지? “ 

    그녀의 품 안에는 거대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너희들이 안 보이기도 하고, 심부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내가 다 사 왔어.”

    하하하…… 하고 허탈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는 삶의 괴로움이 듬뿍 묻어있었다. 마치 원하지도 않는데 조별과제의 조장이 된 사람처럼, 그리고 그 조별 과제의 조원들이 사정이 있는 척 도망치는 일을 겪고는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아, 미안해 마리야……. 우리가 쓰레기야……. 

    마리는 내 뺨을 보고 깜짝 놀라며 걱정하면서도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근데 너희 둘, 그사이에 좀 친해진 것 같네……?”

    “마리야 내가 머리에 총…… 아니 마법이라도 맞은 줄 알아?”

    “너 눈 나빠?”

    “응? 좋은데……. 저 멀리 있는 것들도 보이는걸.”

    레몬이 답답해 죽겠다는 듯 가슴을 퍽퍽 쳤다. 그 모습이 평화로워 보여서 내일 니고르 백작의 대리가 찾아온다는 것을 잠깐 동안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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