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5
“셋이 가서 이것 좀 사 오려무나. 내일 열리는 공작님의 생신 파티에 꼭 필요한 물건이란다. 요한슨이 깜빡하고 안 사왔지 뭐니. 한심한 놈……. 당장이라도 집사 자리에서 잘라버리고 싶구나.”
네, 좋아요. 집사장님. 심부름 시키는 거? 밖에 나가는 거? 아주 좋다고요!
“라일라, 마리, 그리고 레몬.”
왜 하필 쟤랑 같이 가야 하는 건데?!
“싫어요! 차라리 유리아 씨랑 둘이서 같이 가는 게 낫겠어요!”
“나, 나도 싫거든……? 레몬이랑 같이 갈 바에는 혀를 깨물고 죽겠어요!”
“뭐? 혀를 깨물고 죽겠다고?”
“차라리 유리아 언니랑 둘이서 가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니, 사랑스러운 직장동료야?”
“음식물 쓰레기보다는 쓰레기가 낫다는 의미란다……. 머리가 가벼운 직장동료야.”
“집사장님 아까 말 취소할게요. 쟤랑 같이 가느니 차라리 도…….”
도련님들이랑 같이 간다고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너무 끔찍하잖아. 그래도 레몬이 낫지.
“물 담긴 접시에 코를 박고 죽겠어요! 아니다……. 빨랫방망이로 머리를 다지는 건 어떨까요?”
마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기……. 얘들아 싸우지 말고 진정해……. 음, 그리고 집사장님의 얼굴을 보는 게 어떨까?”
레몬과 나는 동시에 집사장님의 주름진 얼굴을 보았다. 인자하게 웃고 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너희들이 그나마 할 일이 없어 보여서 시킨 것인데…… 가기 싫다고? 그래, 가지 말거라. 대신 일주일 동안 마구간 청소와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하거라.”
그렇게 우리 셋은 번화가로 나가게 되었다.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아, 마구간지기들도 지긋지긋해한다는 마구간 청소라니! 말들이 무대기로 싸놓은 용변들을 치워야 한단 소리였다. 또한 냄새나는 화장실을 닦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집사장님 직권 남용이 너무 심하신 게 아닌지? 레몬과 가는 게 매우 심기 불편하지만……. 그래도 마리가 있으니까 좀 나았다.
마리에게 꼭 달라붙은 채 레몬을 째려보았다. 레몬도 나를 째려보았다.
재수 없는 게 재수 없게 생기기도 했지. 그 정적 속에서 마리는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 일단 뭘 심부름해야 하는지 볼까?”
“그래!”
“그래.”
“……따라 하지 마, 노랭아.”
“너야말로 따라 하지 마…… 멍청아! 지는 칙칙한 갈색이면서. 풉, 이제 보니 갈색이 아니라 똥색이네~”
“넌 바나나 똥.”
레몬과 나는 서로의 머리를 쥐었다.
“……응, 그냥 나 혼자 볼게.”
마리가 허탈히 웃으며 심부름 해야 할 물건이 적혀 있는 쪽지를 읽었다.
그사이 우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싸웠고 말이다.
“아닌데? 내 머리 색 엄청 예쁜데? 우리 언니가 내 머리 색 밀크 초콜릿 같고 맛있어 보인다고 했는데?”
“나도 우리 어머니가 상큼하고 화사해서 여름이 떠오르는 색이라고 했거……."
“푸푸풉! ……에취!”
“더럽게 침 튀기지 마!”
싸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부 아저씨가 자기 쪽과 연결되어 있는 작은 문을 험악하게 열어젖히며 “이것들아! 시끄러워 죽겠다! 나이 처먹을 대로 먹은 것들이 왜 이렇게 소란스레 굴어?!”라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정말 성격 나쁜 아저씨다.
짧은 소란이 지나고 우리 세 사람은 마차를 타고 번화가에 도착했다.
번화가는 오늘도 시끌벅적했다. 사람들은 가게를 구경하며 쇼핑을 하고 있었고, 또 몇몇은 카페에 앉아 차를 홀짝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땅을 다스리는 공작의 생일이 다가와서인지 이 가게 저 가게 에머스공작가를 대표하는 장미 문양과 함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문패를 걸어 두고 있었으며, 공작 생신 기념 이벤트 같은 걸 열고 있었다. 나는 이것들을 쭉 둘러보다가 레몬과 마리를 향해 외쳤다.
“얘들아……. 나 화장실 좀.”
사실 마차 안에서부터 참고 있었어.
이제 더 이상 못 참을 거 같아. 레몬이 어이없다는 양 한숨을 쉬었고 마리는 거리 입구에서 기다리겠다며 얼른 갔다 오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근처 요리점에 가서 화장실을 빌렸다. 열심히 배출하는 내내 열 번 넘도록 기침을 했다.
“왜 이러지……. "
뭔가 몸 상태가 이상하다. 으슬으슬하고, 자꾸 기침을 하게 되고. 나도 찬물을 맞아서 그런 걸까? 설마 감기 같은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나같이 건강한 사람이 그 정도에 감기에 걸릴 리가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내게는 언니가 방에 갇혀 있을 동안, 니고르 백작의 대리를 감시해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절대 아플 수 없단 말이지.
코를 킁킁 거리며 가게를 나왔다. 내가 너무 기침을 많이 한다고 걱정한 가게 아주머니가 준 손수건을 들고서.
마리가 나를 기다리는 번화가 입구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마리는 근처 벤치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
“……레몬 얘 어디 갔어?”
“아, 그게……. 우리랑 같이 있기 싫다면서 심부름 쪽지를 가지고 가버렸어…….”
“레몬. 제멋대로. 죽인다. 예의 없기 때문에.”
“아, 안 돼!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건 안 돼! 일단 심호흡하자, 라라.”
“후하후하.”
“진정이 됐니?”
“좀?”
“너무 화내지 마, 라라. 마차 안에서 심부름해야 할 물건은 모두 외워뒀으니까 우리끼리 가서 물건 사면 되지 않겠어? 응?”
“그래 그러자. 레몬 걔도 없고 더 좋네, 뭐!”
마리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뭐, 뭐야 그 반응은.
마리는 정말로 내가 레몬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말만 그런 거지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요. 패기만 할 건데요. 너의 안에서 나의 이미지란……?
그리고 우리는 첫 번째 심부름 거리인 생일 파티용 폭죽을 사기 위해 이벤트 상점으로 향했다. 도중에 나는 비명 소리와도 같은 이상하고도 익숙한, 공기를 빠르게 가르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멈춰 섰다.
채찍 소리였다. 마차를 빌려주는 가게에서 그곳에 고용된 것으로 보이는 마부들이 낄낄 웃으며 채찍을 휘둘러보고 있었다.
채찍이 그리는 날카로운 곡선을 눈에 담는 순간 갑자기 숨이, 숨이 막혀왔다.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덥지도 않은데 땀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쓸어내리자 질척이는 액체가 묻어났다.
“어……?”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있었다. 뒤에서 마리의 기다리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달리고 달리다가 낯선 곳에서 발을 멈춰 섰다. 근처에 벽에 기대서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내가 왜 이러지? 채찍을 보고 이러는 건가? 왜? 이제 괜찮아진 거 아니었나? 안 괜찮은 건가? 나 안 괜찮은가? 하나도 안 괜찮은가? 안 된다.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 했다. 내가 괜찮지 않으면 언니는 누가, 누가 지탱해주는데.
머리가 어지럽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괜찮냐며 다가오기에 괜찮다고 애써 웃어 보였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냈다.
“……이제 마리한테 돌아가야지……. 갑자기 뛰쳐나가서 놀랐겠지? 좀 미안하네.”
아까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고 있을까? 한숨을 푹푹 내쉬며 다시 돌아가기 위해 발을 옮겼다.
길거리를 걷는 사람 중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중년 부부가 눈에 띄었다.
그들이 유난히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기도 했지만 이런 말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그 골목길……. 빨리 경비병을 부르러 가야 하는 거 아녜요? 좀 위험해 보이는데…….”
“그러니까……. 이 거리에서 제일 악질적인 3인방이 아닌가. 얼른 경비병이라도 부르러 갑세.”
골목길?
길을 계속 걷다 보니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는 골목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그 중년 부부가 말했던 골목길일까? 그게 맞다는 걸 증명하듯, 그 골목길에는 여자 하나가 남자 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여자는 레몬이었다. 불량스러워 보이는 남자들에게 잡혀 있었다. 그녀는 답지 않게 울상을 지으며, 제 팔을 험악하게 잡아챈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 하지 마세요…….”
“앙탈 부리는 것도 귀엽네.”
“언니, 우리랑 가서 재밌게 놀자. 우리랑 한 번 놀면 다른 남자는 생각도 안 날걸?”
“그래 언제 세 명이랑 같이 데이트 해보겠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하하하,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자들이 한 여자를 겁박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화가 났다.
물론 사람이라면 당연히 화가 날 만한 장면이었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이 평범한 분노 같지 않았다. 속에서 무언가 우글우글 끓어올랐다. 숨이 가빠졌고, 눈앞이 팽팽 돌았다. 손가락 끝마디가, 뺨이, 등이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이 아파왔다. 나는 저들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레몬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홱 고개를 돌렸다.
- 난 괜찮아 라라.
저리 꺼지라는 것처럼.
- 너 같은 하찮은 평민 계집애가 뭘 할 수 있다고? 넌 그분이 원하는 대로 내 발밑에서 울기만 하면 되는 거야.
어차피 내가 자기를 구해주지 못할 것처럼 굴었다.
- 누가, 누가 도와 달랬냐고!
기분 더럽게도…… 그 무력한 모습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원하지도 않는데 멋대로 떠오르는 장면은, 가냘프고도 연약해 보이는 손이 나를 밀어내는 것이다.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매섭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은 욕설을 내뱉으면서 그렇게.
하지만 나는 이미 그 눈을 알고 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 눈은, 구해주길 원하는 눈이었다.
그 저택에서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같잖은 친절을 받기는 했으나 그뿐이다.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우릴 여기서 벗어나게 해 줘. 그렇게 빌었지만 남자는 우리를 외면했다.
나는 계속해서 어둠 속에 숨 죽여서 하루하루 고통을 받아왔을 뿐이고 당신은 원하지 않는데도 웃고 떠들고 사랑하는 척을 하며 괴로워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구해줘야 해.
아팠던 머리가 괜찮아지고, 동시에 정신이 선명해진다.
나는 바닥에 어지러이 놓여 있는 벽돌 중 하나를 잡아 쥐었다. 이걸로 머리를 후려치면 죽을까? 세게 치면 죽겠지.
그럼 죽어버리라지.
빠악!
바로 레몬의 옆에 있던 남자의 몸이 허물어졌다. 남자는 머리를 쥔 채 무릎을 꿇었다. 그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소란스럽던 뒷골목이 정적에 휩싸였다.
“너, 뭐야?! 미쳤어?”
다시 손을 휘두르려던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홱 낚아챘다.
그 손길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 지금 사람을 죽이려고 한 건가?
어느새 손아귀에서 풀려나 바닥을 나뒹구는 벽돌에서 시선을 떼고 얻어맞은 남자를 살펴보았다.
몸이 덜덜 떨며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것이 다행히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