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4
언니는 영광이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네, 보잘것없는 실력이지만 원하신다면.”
오세스가 떠난 뒤, 나는 언니에게 많이 혼났다. 왜 예의 없게 행동하고 자기 멋대로 거짓말을 하냐는 것이었다. 혼나는 것도 슬펐지만 나 때문에 언니가 오세스에게 목도리를 선물하게 된 것이 훨씬 더 슬펐다.
언니는 무척이나 화가 난 듯 보였지만, 다행히 혀 짧은 소리로 애교를 부리자 용서해주었다. 혀 짧은 소리라니……! 나 자신이 너무 징그러워서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하지만 언니가 좋아하니까 됐다.
아무튼!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한 나는 두 번째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언니의 옷을 얇게 만들기다. 옷을 얇게 입고 시린 가을바람을 맞으면 감기에 걸리겠지?
교복처럼 하녀 복도 여름에 입는 옷과 겨울에 입는 옷이 나뉘어 있었다.
보통 여름과 봄에는 반팔에 무릎까지 오는 검은 하녀용 원피스(난 하복이라고 말한다)를 입었고, 가을과 겨울에는 긴소매에 발목까지 오는 옷(동복이라고 칭하고 있다)을 입었다.
그래서 나는, 언니의 옷에 음식을 쏟아 못 입게 만든 뒤에 하복을 입게 만들 생각이었다.
부엌에 가서 끈적한 수프를 억지로 받아낸 다음에 옷에 쏟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언니가 어디선가 새로운 동복을 받아온 것이다. 하녀장님이 입으라고 주셨다고 할 때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
다시 한번 쏟아도 하녀장님께 한 벌도 얻어오고, 또 쏟으면 에밀리 아주머니에게 얻어오고, 포기하지 않고 쏟아부어주면 친구에게 카디건과 두꺼운 스타킹을 빌려오고, 마지막으로 또 쏟아부으면 다른 친구에게 다시 빌려오는 바람에 실패했다. 하복을 입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이건 아무래도 아니야. 다른 계획이 필요해…….
그것뿐이랴, 일부로 넘어져서 언니의 옷에 수프를 쏟아버리는 걸 아서에게 들키기까지 했다. 아직도 놈이 내 옆을 지나가다가 “남한테 음식 던지는 건 취미야?”라고 한 게 잊히지 않는다.
“취미는 개뿔! 전부 언니를 위한 행동이란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 같은 건 내 고민을 하나도 모르겠지? 죽어버려 아서 에머스! 쓰레기 자식! 나쁜 자식! 펌프를 위아래로 꾹꾹 눌러 물을 길었다. 입구에서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와 통에 담긴다. 현재 나는 이즐리네 방 창턱을 닦았던 걸레를 닦기 위해 빨래터에 와 있었다.
계획이 전부 실패다. 더 이상 감기 걸리게 하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정말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떡하지? 어떡하면 조…… 나는 찬물이 담긴 통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그래, 이 방법이 있었어…….”
비를 맞은 다음 날 감기에 걸리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찬물을 맞으면 감기에 걸리고 말 것이다.
나는 찬물이 가득 담겨 있는 통을 안고 언니를 찾았다. 언니, 나 곧 언니한테 좀 심한 짓 할 건데…… 용서해줄 거지?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니 다가, 1층 복도 끝자락에 있는 창고 앞에서 언니를 찾았다. 뭔가가 잔뜩 담긴 상자를 꺼내고 있었다. 상자가 꽤 무거운지 바닥에 내려놓고 땀을 닦아낸다. 마침 등 뒤를 보이고 있으니 지금이 기회일까?
그래, 지금이 기회야.
나는 물통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고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금 저지를 일 때문일까,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사랑에 빠지더라도 이렇게 두근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점점 언니의 등이 가까워질수록 숨쉬기가 어려웠다.
언니 미안해. 진짜 미안해. 진짜 진짜 미안해하고 있는 거 알지? 하지만 언니는 나를 이해해줘야 해. 용서해줘야 해. 이건 모두, 모두 언니를 위해 이러는 거니까!
……그렇지?
“너 뭐 해?”
“끄악!”
갑작스레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쿵,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손에 들고 있던 물통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곧 통을 홱 뒤집혔고 찬물들이 나를 덮쳤다. 차가운 기운이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눈을 꾹 감았다.
모든 게 지나갔을 때 머리가, 옷이, 온몸이 축축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고 입과 콧구멍으로 들어온 액체가 주룩주룩 흘렀다. 나는 바닥에 물을 뱉어내며 “씨”로 시작하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 쏟아버렸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즐리가 있었다. 그는 창문에 몸을 걸친 채 나를 보며 재수 없게 낄낄 웃고 있었다.
“하하,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 괜찮아?”
“……괜찮아요……”
괜찮기는? 너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쳐 버렸는데! 물을 나한테 쏟기까지 했다. 이즐리 에머스는 내 인생에서 최고로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일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고 영원히 그렇겠지.
마음 같으면 가운뎃손가락을 눈앞에 흔들면서 욕을 해주고 싶었다. 귀족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텐데…… 귀족만 아니었어도! 망할 놈의 신분제.
“많이 축축해 보이는데 가서 닦아야겠네.”
“그러네요.”
이즐리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 안 내?”
응. 안 내. 너같이 무시무시한 미래의 살인마한테 낼 화는 없어.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역시 이상해졌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이즐리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나를 발견한 언니가 내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즐리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내 앞에 앉아, 옷소매로 얼굴을 쓱쓱 닦아주었다.
“라라 괜찮니? 이게 무슨 꼴이야……. 물을 가지고 가다가 넘어졌어?”
언니가 한쪽 벽에 기대 있는 나무통을 힐끔 바라보았다.
“어…… 발을 헛디뎌서……”
“얼른 갈아입어. 감기 걸리겠다. 복도는 언니가 정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물을 쏟아부으려던 대상이 나를 걱정하며 일으켜주자 죄책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냐 내가 그런 건데 내가…….”
“걱정하지 말라니까? 응?”
“으응……”
언니에게 떠밀려 방으로 가다가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즐리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 가버린 거지? 사라져 주면 나야 좋지만.
그 뒤로 나는, 언니에 의해 방에서 수건으로 닦였다. 나가라고 등을 밀어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적반하장으로 닦아줄 거라고 화를 내던 언니는 서랍에서 수건을 꺼내 내 머리와 몸을 쓱쓱 닦아냈다.
너무해……. 왜 자꾸 내 알몸을 보려고 하는 건데…….
같이 목욕한 것도 어릴 때의 일이라 내 몸을 언니에게 보이는 것도 쪽팔리고 남에게 닦이자 어린애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고 싶다. 수치사로 사망할 수 있다. 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언니가 등을 닦아주는 것을 받아들였다.
“라라, 아프진 않지?”
“응…….”
아프진 않고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어 언니. 사랑스러운 언니를 아프게 만들려는 죄를 받고 있는 건가…… 그래, 그런 게 틀림없다.
등을 닦아내는 손길이 이상할 정도로 조심스럽다. 등에 나 있는 상처를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진짜 신경 쓸 필요 없는데……. 내 등에는 예전의 사건으로 흉터들이 잔뜩 나 있었다. 보기 흉할 정도로.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등에 나 있던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물었고 이제는 아프지도 않았다.
아니……. 아프지 않다는 건 거짓말일지도. 다시 정정해서 말하자면, 가끔 환상통을 느끼기는 했으나 정말로 괜찮았다.
그때 손가락이 등을 대각선으로 쭈욱 쓸어내렸다. 그게 너무 간지러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좀 끼치지 마, 라라……”
앞으로 물을 조심해서 들고 다니라는 말이겠지? 앞으로 물을 쏟지 않게 조심하겠다고 당당히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몸을 다 닦고 나서 하복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언니와 달리 남에게 빌려서라도 굳이 동복을 입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동복은 언니가 빨래터의 옷과 이불을 잔뜩 널어두는 곳에서 말려준다고 가져가 버렸다. 큰코다쳤지만 아직 언니에게 물을 쏟는 계획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나는 다시 통을 들고 언니가 있을 빨래터로 달려갔다. 빨래터에서 일하는 하녀들이 한쪽 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쉬고 있었다. 이미 내 하녀복은 빨랫줄에 걸린 상태였고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나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통을 가득 채웠다. 통이 가득 채워졌을 때,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길게 지어졌다.
고개를 올리자 언니가 보였다.
언니가 통을 잡았다. 그 진동에 통 안에 담긴 물들이 출렁였다.
촤악…….
“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한순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입을 뻐끔거리며 한참 동안 어버버 거렸다.
저 멀리서 쉬고 있던 빨래터의 하녀들도 깜짝 놀라서 괜찮냐고 소리치다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니가 통을 번쩍 들어 올려 자기 자신에게 쏟아부었으니까!
“……언니…… 갑자기 왜 이런…… 이런 짓을……?”
더, 더웠어……? 아니, 덥더라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거 아냐?! 내 혼란스러운 얼굴을 못 본 사람처럼 담담히 말하기 시작한다.
“다 젖어버렸네.”
“어……? 어어……”
“춥다. 감기에 걸릴 것 같아.”
“다, 닦는 거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라일라. 내가 알아서 할게.”
언니는 화났을 때 날 ‘라라’가 아니라 ‘라일라’라고 부른다. 뭐지? 왜 화난 거지? 설마 내가 일부로 물을 부어버리려고 한 것을 들킨 걸까? 내 생각을 읽지 않은 이상 그럴 리는 없었고, 들키더라도 언니는 이 정도로 화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가 화를 내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다.
언니가 환하게 웃어 보이곤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 웃음을 보자 뭔가를 들킨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음 날 언니는 감기에 걸렸다. 계획대로 됐다는 게 좋기는 한데……. 묘하게 찝찝해서 기뻐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언니를 아프게 만들었다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감기는 언젠가 나으니까.
그것처럼 언젠가 언니한테 웃으며 이때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