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12 (1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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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2

초대장과 리스트들을 대조해 보며 눈을 비볐다.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이 짓만 해대니까 힘들어 죽겠다. 그래도 하녀장의 마음에 들었다니, 뭐, 이 정도야 그냥 하죠! 

이제 슬슬 이직하고 싶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좀 더 기다려야 하나? 

“흐으음…….”

“왜 그러니, 라일라?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니?”

“네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를 향해 배시시 웃어준 뒤 다시 리스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금 더 점수를 따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호감을 사자마자 본론부터 말하면 정이 떨어지는 법이다. 갑자기 친한 척하던 사람이 돈 백만 원 빌려달라고 해봐. 엉덩이 걷어차이지. 

와중에 그녀가 대뜸 입을 열었다. 

“슬슬 입이 심심하네.”

“아! 그럼 제가 먹을 거라도 가지고 올게요!”

“그럴 필요는 없는데…….”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간식을 가져오겠다고 하자 좋다고 웃는다. 하하, 이거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말하기만 해~ 이거잖아요. 은근슬쩍 부엌에 갔다 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부엌으로 가는 내내 부산스레 무언가를 옮기고 나르고, 벽에 다는 고용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집사는 그곳에서 오세스와 함께 사람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천장에 장미처럼 접은 종이를 달고 있는 언니의 모습도 보였다. 

그제야 공작의 생일 파티가 다가온다는 것이 실감 났다. 그건 니고르 백작의 대리인이 온다는 말과 똑같았다. 

“……어떻게 하지?”

언니에게 말해야 하는 걸까? 그 돼지 새끼의 대리가 온다는 사실을? 사다리에 올라간 채로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과 예전의 우는 모습이 겹쳐 보였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안돼.”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언니를, 절대 상처 받게 하지 않을 거야.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꽁꽁 숨겨둘 거야. 

그때 의자를 옮기고 있는 레몬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입 모양으로 “재수 없는 계집애” 라고 말하고는 혀를 쭉 내밀었다. 요새 내가 하녀장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서 성질이 나는 모양이었다. 홱 하니 고개를 돌리고 정원으로 향하는 모습이 짜증 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가벼워졌다.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들어 보이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서 주방장에서 만든 지 하루 이틀 된 빵과 쿠키, 미지근한 음료, 딸기잼을 받아 들고는 다시 하녀장의 사무실로 가던 중이었다. 그때 나는 창밖을 훑어보며 걷다가 어마 무시하게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이즐리 에머스……!”

놈이 창 밖에서 언니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눈꼴이 셔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뭐야?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누길래 그렇게 즐거워 보여? 언니 그 자식한테 웃어주지 마요……. 걔 아주 나쁜 애란 말이야! 이즐리가 은근슬쩍 언니의 머리를 쓰다듬는 꼴을 보자니 뒷목이 당겨왔다. 아아, 화병으로 쓰러질 것 같아. 

나는 주변을 홱 둘러보며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고용인의 거의 대부분 정원을 꾸미고 있느라 휑했다. 고로 내 행동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완전 범죄를 저지르기 아주 완벽한 조건이군.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바구니를 뒤적였다. 쿠키는 너무 작고, 음료는 병에 들어서 맞는 사람을 골로 보낼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중심지에서 제 모습을 뽐내고 있던 식빵을 꺼냈다. 

“우리 언니한테 감히……. 먹고 죽어라……. 먹고 죽어……!”

이즐리를 향해 홱 던져버리고 재빨리 아래로 숨었다. 조심스레 일어나서 힐끔 밖을 살폈다. 안타깝게 빵에 맞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던진 식빵은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에 의해 반 토막 난 채 바닥에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패다. 작전상 후퇴……. 그대로 기어서 이 복도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딱딱한 무언가와 부딪혔다. 사람의 발? 나는 이마를 부여 잡고 고개를 들었다. 

“……아서 도련님……?”

“……뭐 하는 거지?”

그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물어보는 거지? 왜 땅을 기어가고 있냐고 묻는 건가? 빵 던진 거 본 건 아니겠지? 기어 다니고 있는 거 말하는 거겠지? 식은땀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내 기대를 무너뜨리고 그는 이렇게 물었다. 

“지금 이즐리 저놈한테…… 빵을 던진 거야?”

아…… 젠장할……. 망했다. 망했다. 망했어. 어디까지 본 거지? 라일라 이 바보 멍청아……. 화가 난다고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해! 으아아악! 과거의 나를 마구 패 버리고 싶다! 언니가 매일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랬잖아……. 

이 멍청이! 

언니, 유리아 언니 나 오늘 정말 죽을지도 몰라……. 아서가 이즐리를 싫어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하찮은 하녀가 그에게 식빵을 던지는 걸 용납할 정도는 아니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한 뒤에 더듬더듬 말을 했다. 

“아, 저, 저기 이건……. 손이 미끄러져서…….”

“그런 것치곤 빵이 아주 잘 날아가던데.”

"……."

그렇죠. 환상적인 포물선을 그렸죠. 

투포환 선수라도 할 걸 그랬나 봐요. 

“그게 아니고요……. 오, 오해에요……!”

“그럼 뭐지?”

“빠, 빵을 들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운 거예요……. 진짜로요……. 그래서 바닥에 쓰러졌는데……. 어라? 빵이 손안에 없는 게 아니겠어요? 알고 보니까 이즐리 도련님께 날아갔지 뭐예요? 전 그럴 의도가 하나도 없었는데…….”

"……."

“……진짠데…….”

아서가 손으로 입을 꾹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내 변명에 화까지 났는지 몸을 잘게 떨기까지 한다. 에이 씨 안 통하네. 나는 땅에 머리를 처묻고 엉엉 우는 체를 했다. 

“진짜예요……. 믿어주세요!”

“우는 거로 넘어가려고 하다니 간이 크…… 쉿.”

힐끔 위를 바라보자 아서가 제 입술 위에 검지를 꾹 누르며 반대쪽 손으로는 무언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위아래로 까닥까닥……. 나한테 뭔가 말하고 싶은 거 같은데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말로 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지켜보자 한숨을 푹 쉬더니 내 머리를 꾹 눌렀다. 맨날 우아한 척하는 아서치고는 꽤 험악한 행동이었다. 뭐, 뭐 하는 거지. 더 머리 박고 있으라는 건가. 넵, 아까 걸 못 본 척 해주신다면 얼마든지 박아드리겠습니다! 

그때 바로 위에서 이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동생~ 사랑스러운 아서~”

식빵을 던진 범인을 찾으려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이제 더 이상 언니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날 잡으러 왔다는 걸 무서워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아까보다 더 몸을 낮추고 숨을 죽였다.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 멍청아.  수준 떨어져 보이니까.”

“이 주변에서 누구 본 적 없어?”

"……."

“아니~ 가만히 있는데 누가 나한테 이런 걸 던졌다니까?”

“빵? 몰라. 아무도 없었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서를 올려다 보았다. 어? 왜 감춰주지? 내게 던졌다고 일러야 하는 거 아니야? 그의 성격대로라면 그게 맞는 것이 아닌가? 문득 기억을 찾기 전의 일이 떠올랐다. 

청소하다가 실수로 꽃병을 깨뜨렸을 때가 있었다. 하필이면 그걸 아서에게 들켰었는데, 얼굴을 구기고 잔소리를 좀 했을 뿐이지 다른 데 가서 청소하라고 나를 보내버렸다. 나는 꽃병을 배상하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하루 종일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저녁 때서야 그가 내가 부순 꽃병을 자기가 부쉈다고 거짓말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처럼 어리벙벙한 기분이다. 가끔씩 머리가 돌아버릴 때가 있는 건가? 

“근데 너는 왜 숨어있는 거야?”

“헉…….”

이즐리가 창문 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바구니를 재빨리 숨기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넘어졌어요…….”

“하, 그래 넘어졌겠지.”

아서 놈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비웃었다. 저 새끼가……. 그래 솔직히 좀 바보 같은 변명이긴 했다. 근데 그 상황에서 그것만큼 최적의 변명은 없었다고. 이미 눈앞에서 모든 걸 목격한 이에게 뭐라 더 말한단 말인가? 

이즐리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악마처럼 웃었다. 반 토막 난 식빵이 그의 손에서 달랑거렸다. 

“혹시 이거 네가 던진 거 아냐? 던지고 숨어 있던 거 아니냐고~”

“아, 아닌데요…….”

“이건 범인이 아냐. 그러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아서가 나를 감싸주는 건가? 아무튼 감싸주는 것(추정)과 동시에 이즐리의 얼굴이 갑자기 무표정해졌다. 그가 아서의 얼굴에 식빵을 던진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식빵이 주르르 흘러내려 땅바닥에 떨어졌고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아서는 “나 지금 화났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로 이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이즐리 쟤는 갑자기 왜 화를 냈던 것이며 또 왜 갑자기 제 동생의 얼굴에 식빵을 던진다는 말인가? 음식 아까운 줄 모르고. 

입을 뻐끔거리며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미친놈들이니까 미친 짓을 하는 거겠지. 그렇지? 그리고 재수 없는 놈이 우스운 꼴을 당하자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이즐리 에머스!”

아서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즐리의 멱살을 잡아챘다. 

“이런 쓰레기 같은…….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충동적이고 멍청하고 폭력적이야! 전혀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군!”

"아…… 아아~"

말 그대로 폭력적인 이즐리가 저도 알 수 없다는 양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갑자기 짜증 나서?”

와, 분노조절장애가 있구나! 미래에 나를 칼로 푹찍푹 할 남자다워! 두 사람은 보는 사람이 무서워질 정도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분위기나 오고 가는 말은 험악한데 주먹을 안 쓰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아서였으면 진작에 이즐리 눈을 밤탱이로 만들었을 텐데. 

“어우, 굉장히 격렬히 싸우시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나는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빠져나갔다. 아무도 안 잡아서 다행이다! 복도를 거닐다가 오세스를 발견해서 다른 쪽으로 도망을 가기도 하고 언니를 만나서 한 번 꼭 안아주기도 하며 하녀장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안경을 쓰고 연신 서류 훑던 그녀는 내게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꽤 늦었구나, 라일라. 부엌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을 텐데.”

“아~ 그게 하늘 좀 구경하고 오느라…….”

하늘 좀 구경하고 왔다. 이는 화장실 갔다 왔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었다. 하녀장님은 피식 웃으면서 소파 쪽으로 손짓을 했다. 

“그러니? 알았으니 자리에 앉으렴.”

“넵! 아, 여기 간식거리요. 그리고 들꽃이 예뻐서 따왔어요.”

주방 뒤편에서 발견한 옅은 갈색의 들꽃을 건넸다. 종류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을꽃 아닐까. 하녀장님의 쓰다듬을 받고는 후다닥 소파에 앉았다. 

라일라, 너 너무 아부를 잘하는 거 아니야? 내가 황제의 신하였다면 최고의 간신이 되었을 텐데……. 평범한 하녀인 게 원망스럽구나! 쯧쯧! 이참에 공작의 마음도 함 꼬셔봐? 참 나, 그 인형 같은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실없는 상상을 하면서 해죽헤죽 웃었다. 

그러다가 소파 한 모퉁이에서 털실이 담긴 바구니를 발견했다. 아까 전에는 위에 천이 덮여 있어서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가져가고 싶다……. 

의상 디자이너를 꿈꾸는 언니는 뜨개질이나 바느질하는 걸 좋아했다. 뜨개질 바늘과 털실을 가져가면 무척 좋아할 것이다. 내가 털실을 빤히 보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하녀장님이 이렇게 말하셨다. 

“그 털실이랑 바늘, 가져갈래?”

“어? 정말요?”

“그래, 뭔들 못 주겠니. 주방장한테 줄 털실 하나만 빼고 다 가져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언니 내가 이거 들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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