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11 (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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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1

“싫어…….”

모두가 잠든 어두운 밤, 연달아 들리는 신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깜깜한 어둠 속에 가려진 하얗고 이상한 얼룩이 진 천장이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니가 엉엉 울면서 베고 있는 베개를 쥐어뜯고 있었다. 

“하지 마……. 제발…… 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 언니의 침대에 다가갔다. 

“죽어버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잡아 쥐었다. 

“괜찮아…….”

언니는 가끔 아주 끔찍한 악몽을 꿨다. 그 옆에 앉아 언니가 제대로 잘 때까지 노래를 부르거나 안심할 수 있는 말을 해대며, 그 부드러운 손을 잡은 채로 배를 토닥여주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내가 곁에 있어. 계속 언니 곁에 있을 거야…….”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귀족에 대한 증오를 참을 수가 없어서, 가끔은 자고 있는 공작가의 일원들에게 달려들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닌 걸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 곧 괜찮아질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언니를 위해서 지옥까지 따라갈 수 있어. 봐, 이미 나는 한 번 지옥에 다녀왔잖아. 

그 가냘픈 손을 두 손으로 그러안고 속삭이자, 언니는 곧 안심한 듯 스르르 잠들었다.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손을 뗄 수 있었다.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잠 다 깼네.”

자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자면 언니처럼 똑같이 악몽을 꿀 것만 같았다. 

“좋아, 산책이나 하자.”

언니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은 몇 시일까? 생각보다 복도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달빛이 창문을 넘어 흐릿하게 복도를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난히 밝게 느껴지는 달을 잠시 감상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이었다. 

어디로 가볼까. 

그래, 정원에 가보자. 가끔 잠이 오지 않을 때 나왔던 밤의 정원은 아침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언제 화사하게 피어 있었냐는 듯 흐릿하고 차가운 색채가 되어, 건드리기만 하면 가냘픈 얼음판처럼 깨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피어 있는 꽃들을 콕콕 찌르며 정원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에 쓸쓸한 얼굴로 장미꽃을 매만지고 있는 공작을 발견하고 말았다. 어쩐지 보면 안 될 것 같은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 같아 후다닥 도망가버렸다. 

원작에 대한 기억이 돌아왔다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내용이라고 생각되는 에머스 공작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떠오른다. 

에머스 공작은 얼음 심장이라고 불렸다. 어떤 영식에게도 남자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들의 구애에도, 여자들의 구애에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견고한 얼음 벽을 녹인 것은 다름 아닌 평범하기 그지없는 평민 남자였다. 

두 사람은 동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마냥 열렬히 사랑했다. 그러다 공작의 부군이 마차 사고로 사망한다. 

장미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공작이 많은 돈을 들여 만든 마법도구로 인해 1년 내내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 있는 이 저택은, 어찌 보면 그를 기리기 위한 거대한 무덤과도 다름없었다. 그래서 공작의 세 아들은 장미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진짜, 기억할 필요도 없는 내용이라니까. 차라리 앞으로 어떤 식으로 놈들과 언니가 엮이는지 아는 편이 몇 배는 나을 것이다. 왜 제대로 기억 이 안 나는 거야! 

“머리를 한 번 더 부딪혀볼까……. 으음, 아니! 아니야, 실수하면 요단강을 건널지도 몰라. 그건 그렇고…….”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디지?”

아, 부엌 뒤편이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된 모양이다. 

오렌지 있을까?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았지만 오렌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때, 무언가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 뒷문 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뭐지? 도둑? 에이, 설마. 

주방장이 식자재 준비라도 하는 건가 보지. 근데 이렇게 밤늦게? 

“으흠…….”

슬그머니 뒷문을 열어보았다. 분명히 시간쯤 되면 주방장이 문을 잠그고 집으로 돌아갈 텐데도 불구하고, 애초에 잠겨 있지 않던 것처럼 쉽게도 열렸다. 

그 에머스 공작가에 도둑이 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만약 오세스를 만날 줄 알았더라면 절대, 절대 그 문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내 후회에 걸맞게 그곳에는 오세스가 있었다. 

책상 한편에 놓아둔 램프의 빛이 아른아른하게 남자의 형상을 띠었지만, 확실히 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원래 싫어하는 걸 더 빨리 눈치채는 법이다. 당근을 싫어하는 사람이 빵 안에 잘게 갈아 넣은 당근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의 그는, 평소의 번듯한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잠옷을 입고 있는 데다가 천장에서 쏟아진 것 같은 바구니나 식기, 향신료들에 의해 반쯤 묻혀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 묘하게 익숙하다. 뭐지? 뭔가……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원작에서인가? 

어둠에 묻혀 짙은 붉은빛을 띠는 눈동자와 마주치고 나도 모르게 뒤로 두 발자국 정도 물러나고 말았다. 

에이 씨 모르겠다, 도망가자!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서려던 때 손목을 턱 하고 잡혔다. 

얘는 왜 항상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잡는 거야! 

“아, 미안해요. 아팠나요?”

내가 뒤를 돌아보자 재빨리 손을 놓았다. 어느새 그는 램프를 들고 있었다. 램프의 환한 빛이 그의 얼굴을 노랗게 비춘다. 

“라라 맞죠?”

“네, 맞기는 하는데…….”

웬 라라……? 너무 친근한 호칭 아닌가? 우리가 친한 것도 아니고……. 그는 항상 나를 라일라라고 불렀다. 유리아의 동생, 엑스트라 라일라. 딱 그렇게. 

왜 갑자기 저렇게 부르는 걸까. 아! 알겠다……. 저놈 나랑 친근한 관계가 돼서 언니를 꼬여낼 속셈인 게 분명해. 

내 묘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재빨리 덧붙여온다. 

“죄송해요. 유리아가 계속 라일라를 그렇게 불러서 저도 모르게 붙어버렸나 보네요.”

오세스가 민망한 듯 웃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바구니들을 훑어보았다. 도망가기 실패인가……. 저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셨어요?”

“새벽까지 책을 읽다가 배가 고파서 부엌에 왔어요. 빵은 찾았는데 잼이 안 보이더라고요. 잼을 찾으려고 찬장을 뒤지다가 조금, 실수해버렸지 뭐예요.”

“……직접 오신 거예요? 왜요? 전속하인을 부르면 되지 않나요?”

“깨우기 미안하잖아요.”

“아…….”

그렇게 미안한 인간이 우리 언니는 어떻게 가뒀네. 

“라일라는 왜 이 밤에 깨 있는 건가요?”

“그냥…… 잠이 안 와서요.”

나는 선반에서 떨어진 바구니와 향신료 등을 정리했다. 도중에 오세스가 나를 도와주려는 것처럼 그것들을 뼜어 들어 선반에 차례차례 집어넣었다. 

정리가 끝나자 아래에 있는 선반을 뒤져 땅콩 잼을 꺼내고, 냉방 마법을 이용한 보관소에서(나는 이걸 냉장고라고 부른다) 딸기잼과 포도잼을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다 두었다. 

테이블에는 오세스가 미리 찾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식빵과 빵칼이 있었다. 

귀족이라면 항상 갓 만든 따뜻한 빵만 먹는 게 아닌가? 저런 식빵은 고용인들이나 가끔씩 간식으로 먹는 것이었다. 

“여기 잼이요.”

“와, 금방 찾았네요.”

그가 꽃처럼 웃으며 잼 뚜껑을 열었다. 

“라일라는 배고프지 않나요?”

“아, 네 뭐……. 저는 괜찮아요.”

오세스를 볼 때마다 원망의 감정과 더불어 아쉽다는 감정이 들곤 한다. 

손목을 잡자마자 아프냐고 놓는 것부터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는 점,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존중해주는 것 같은 모습. 

아, 진짜 언니신랑 후보로 딱 좋은 놈이었는데……. 왜 그랬니. 왜 미래에 언니를 감금해버린 거니……! 아냐 애초에 속내가 좀 음흉한 놈이니까 이렇게라도 거를 수 있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제 슬슬 가볼까?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라일라. 가지 마요.”

“……네?”

“혼자 먹는 건 좀 외로워서요.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요?”

네? 앉아요. 부탁이라는 듯 말하고 있으나 저것은 명백히 명령이었다. 무슨 속셈이래 저놈? 나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싫어, 싫어, 싫어! 더 이상 너랑 여기 있고 싶지 않다고! 

“죄송해요. 좀 졸려서요.”

“예전이었다면.”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조그마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냥 말하는 거라고 하기에는 작았고, 중얼거림이라고 하기에는 내게 닿을 정도로 컸다. 나한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예전이었으면 같이 앉아서 먹어줬을 텐데. 그렇죠?”

예전이었다면 같이 먹어줬을 거라고?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나는 다시 그의 쪽으로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어준 다음 인사를 하고 나갔다. 

불행 뒤에는 행운이 온다고 했던가. 

그날 아침, 나는 식사를 한 후 하녀장의 사무실에 초대받았다. 하녀장은 믿음직한(사실은 그냥 마음에 드는)하녀들을 몇 명 데려와 자신의 방에서 일을 시키곤 했다. 

레몬도 가끔 그녀에게 불려 가 서류를 살펴보거나 그녀를 보조했다. 즉 그녀의 사무실에 초대를 받았다는 의미는, 완전히 하녀장의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였다! 

세상에, 그 애플파이가 호감도를 크게 올리는 데 도움이 됐던 걸까!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그러안고, 잠시 화장실에 간 하녀장이 올 때까지 소파에 앉아 발을 마구 흔들었다. 

사무실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라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때 나는 그녀의 책상에서 “파티 초대 귀족 리스트”라고 쓰여 있는 문서를 발견하고 말았다. 공작의 생일 파티에 초대할 사람들의 목록 같았다. 

“아…….”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이미 리스트를 들고 급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라일라 너 왜 이래? 이 모습을 들키면 그동안 쌓아뒀던 호감이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은 계속해서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그자가 목록에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손이 벌벌 떨렸다. 

지크프리트 백작, 로랑 후작, 에폴트 남작……. 

“……."

니고르 백작. 

“이 자식이…….”

그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와작 구겨진 종이를 허둥지둥 다시 폈다. 자국이 조금 남기는 했으나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쉰 다음 다시 리스트를 들여다보았다. 

미치겠네……. 이놈이 장미 저택에 온다고? 귀족의 생일 파티는 초대한 사람만 을 수 있다고 들었다. 이 리스트에 적혀 있다는 것은 에머스 공작이 니고르 백작을 초대했다는 의미다.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한 거지? 

니고르 백작은 평판이 좋지도 않았고, 영지 운영은 개판으로 했다. 귀족 눈에는 그의 먼지만 한 장점이라도 보이는 걸까? 

절대 언니와 마주치게 하지 않겠어. 

백작의 이름 옆에는 “대리 참석”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다행히 대리인을 참석시키는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리스트를 원래 자리에 되돌려두었다. 

막 방에 들어온 하녀장이 나를 보고 생긋 웃었다. 

“왔구나.”

“네! 부르셨다고 해서요.”

“책상에 놓인 리스트 보이니?”

그녀가 손으로 리스트를 가리켰다. 

나도 모르게 흠칫거리고 말았다. 뭐지 몰래 본 거 들켰나. 모가지 뎅겅 뎅겅인가? 

“초대할 귀족분들 리스트야. 잘 보고 초대장 개수랑 받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해주렴.”

“제가 이런 일에 또 소질이 있죠!”

“네가 요즘 믿음직해 맡기는 것이니 실수 없이 하려무나.”

아씨 나한테 맡긴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훔쳐보지 말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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