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9
목이 탄다. 나는 직원이 건네는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성분이 필요한 게 이런 일이었구나. 나는 멀뚱히 눈앞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보석들을 바라보았다. 너무 반짝여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생전 이런 곳을 와본 적이 없다. 눈을 반쯤 감고는 게슴츠레 그것들을 훑었다. 하나라도 가져보고 싶다. 팔면 부자 될 텐데.
“라일라는 여성분이니까 똑같은 성별의 취향을 아주 잘 알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세스가 내 옆에 다가와 속삭였다.
“그러니까 제일 예쁜 걸로 골라주지 않을래요?”
당장 떨어져라. 얼마나 가까이 오는지 귀가 다 근지러웠다. 불편했지만 티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언니가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말했기 때문이다.
근데 어떻게 해? 그냥 얼굴이 막막 구겨져 버리는 걸!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 때문에 안 좋은 일을 겪은 적도 많지만 반대로 내가 솔직해서 좋다고 다가오는 사람도 많았으니, 장점으로 두면 안 되는 걸까?
기다란 손가락이 유리를 홅는 동시에 그의 몸이 멀어졌다.
“가격대는 어떻든 상관없으니까. 제일, 제일 예뻐 보이는 걸로요. 감정 없는 사람도 한눈에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해볼게요.”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거냐. 부담 주려고 환장했습니까, 휴먼? 그렇게 말하면 뭘 고를지 모르겠단 말이야! 당장이라고 머리를 쥐어 잡고 빽 소리를 지르고 싶다.
우리는 지금 비싼 액세서리 가게에 와 있다. 오직 귀족들만 받아준다는 유명 디자이너의 가게에 말이다. 이 정도로 화려한 가게에 와본 것은 아까 놈이 강제로 데려간 옷가게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VVVIP 취급을 받으며 손님용 식탁으로 안내된 것이 시작이었다.
뒤에 ‘~만 골드’ 정도 붙을 것 같은 차와 쿠키, 호객용 선물로 추정되는 보석들이 줄이어 들어오자 눈이 홱 돌아갈 뻔했다. 이것이 바로 다이아 수저의 삶? 기절하려다가 겨우 참았다.
유리로 만든 샹들리에가 달려 있는 이곳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파티장 같았다.
저거 너무 커서 떨어질 것 같아.
괜한 불안감인 걸 알지만 그냥. 천장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가 내게 부탁한 것은 공작의 생일선물을 대신 골라달라는 것이었다. 근데 이딴 걸 왜 나한테 부탁하는지 모르겠다.
엄마 취향은 자식이 제일 잘 아는 거 아니야?
어쩌면 그는 어머니의 취향을 알아보려고 노력했으나, 전혀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물건을 가져다 바치든 언제나 자로 대고 그린 것 같은 미소나 차가운 무표정만이 돌아올 터인데.
근데 의외다. 직원들이 내게 건네는 카탈로그를 훑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솔직히 공작가 정도 되는 고위 귀족이면 직접 액세서리를 주문 제작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가게에서 만든 기성품을 산다는 게 의외였다.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보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언니랑 어울릴 것 같다.”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푸른색 보석을 눈에 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오세스 부탁 때문에 온 거니까. 게다가 아무리 언니에게 어울리는 물건을 찾아봤자, 이렇게 비싼 선물은 해줄 수도 없었다.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공작에게 어울리는 물건이라……. 그 뱀파이어 같은 사람한테는 빨간색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눈이랑 깔맞춤 하면 괜찮지 않겠어? 빨간 액세서리에 까만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떠올리자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뭐, 이 세계도 검은 옷은 거의 장례식 때만 입어서 굳이 그런 드레스를 입을 것 같지는 않지만.
“흐으음…….”
나는 고심 끝에 귀걸이와 목걸이를 골랐다. 두 개는 세트라서 그런지 디자인이 똑같았다. 차마 손으로 들기 두려울 정도로 화려하고 값비싸 보이는 액세서리는 직원에 손에 예쁘게 포장되었다. 소파에 앉아서 가만히 홍차를 들이켜던 오세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눈 색이랑 똑같은 걸 고른 건가요?”
“네, 뭔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예쁘네요. 불에 타는 것 같은 빨강이예요.”
그의 하인이 액세서리 상자를 받아 들었다. 가게를 나서기 전에 손님용 테이블에 있던 과자에 시선이 갔다.
아까 먹어봤는데 엄청 맛있었다. 나는 과자를 입안과 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에 황급히 오세스를 따라갔다.
직원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긴 했어도, 뭐, 그게 뭔 상관이람! 우리 어차피 이번 한 번만 볼 거잖아요! 나 같은 여자는 그냥 잊어요! 바깥에 나가자 오세스가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으로 제 볼을 쿡쿡 가리켰다. 내 볼이 불룩 튀어나와 있는 모양이다. 이를 눈치채고 얼른 과자를 삼켰다.
“그러고 보니 아직 묻지 않았네요. 라일라는 누구의 심부름을 온 건가요?”
“이즐리 도련님이 검을 찾으러 오라고 하셔서 여기 온 거예요.”
“심부름은 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같이 마차를 타고 가는 건 어때요?”
“아, 아직이요. 심부름도 다 못 했어요! 먼저 들어가세요. 그리고 저도 마차를 가져오기는 해서…….”
“그럼 같이 가죠.”
젠장. 이런 식으로 갔다 왔던 대장간을 한 번 더 가게 될 줄이야. 거짓말이 들통 날까 식은땀이 흐른다.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왜 거짓말은 한 건가요? 저랑 같이 가기 싫어서? 아, 그렇구나……. 라일라는 제가 싫은가 보네요. 그럼 유리아를 손에 넣는 일에 방해가 되겠어요.’
‘도, 도련님 진정하세요.’
‘이만 사라져 주실래요?’
‘아오 개새끼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속마음 다 털어놓고 간다. 너는 아주 그냥…….’
푹찍푹! 끄아아! 그렇게 라일라는 세상을 떠났다. 뭐야 떠나지 마. 세상 떠나지 말라고!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나는 오세스를 밖에 세워두고 후다닥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검을 건네준 대장장이가 땀을 닦아내곤 내게 다가왔다.
“꼬마 아가씨, ‘또’ 무슨 일이오.”
“어, 그게……. 일단 목이 좀 말라서……. 물, 물 좀 마셔도 될까요?”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 때문에 다시 온 건가. 이상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내게 물을 건네고 있다.
대장간답게 안은 끔찍할 정도로 더운 주제에 물은 끝내주게 시원했다.
캬! 이제 좀 진정할 것 같네. 그리고 대장간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하시는데요……? 도련님은 먼저 가세요. 저는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니에요. 저도 기다릴게요.”
진짜 왜 이래. 형, 나 눈물 날 거 같아.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며 과장스레 행동했다.
“…… 아차! 생각해보니까 시간이 걸린다고 한 게 아니었네요. 그, 제가 어디 좀 갔다 온 사이에 마부 아저씨가 검을 챙기고 가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 거였어요! 그러니까 저는 그 마차를 타고 갈게요. 도, 도련님은 도련님의 마차를…….”
“그럼 그 마부분께 말씀드리고 제 마차를 타면 되겠네요.”
“사실 가기 전에 할 일이 조금 있어서…….”
“기다려드리면 될까요?”
그래 이 새끼야 알았어. 같이 가자.
마차 탄 다음에 뭔 헛소리를 할지 예상이 하나도 안 되네. 이런 방식으로날 피 말려 죽이려는 거냐?
항복의 의미로 그에게 두 손을 들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일단 기다려준다니 원래의 목적대로 베이커리로 갔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달콤하고도 고소한 향기가 풍겨왔다. 사과 파이를 계산하고 그 포장을 품에 안았다. 아까 오세스가 사준 옷과 사과 파이로도 손이 묵직하다. 이것이 바로 소비의 행복인가.
“라일라는 사과 파이를 좋아하나요?”
“네?”
가게를 나오면서 오세스가 뜬금없이 물었다.
저번에 생일을 물어본 것도 그렇고, 사과 파이를 좋아하냐고 묻는 것도 그렇고, 기분 더럽게 사람 신상을 파악해대려고 한다. 죽일 사람 정보를 미리 알아두는게 취향인가? 재수 없는 놈.
그렇다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꽤 만족한 듯 보였다. 사실 사과 파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과 파이보다는 호두 파이가 더 취향이다. 먹으려고 산 게 아니라 그냥 뇌물용으로 사는 건데…….
도련놈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도 없고, 딱히 내 취향을 말하고 싶지도 않다.
번화가 입구로 향하자 내가 타고 온 마차와 유난히 번쩍번쩍하게 빛을 내는 마차가 하나 있었다. 장미 문양이 달려 있는 것을 보지 않아도 오세스의 마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마부에게 가서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가 깜짝 놀라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왜 도련님이랑 같은 마차를 타고 가?”
“정말! 꼬치꼬치 캐묻지 말라고요!”
내가 버럭 화를 내자 마부가 몸을 움찔거린다. 오세스 때문에 괜히 예민해져서, 죄 없는 사람한테 화풀이나 해 버렸다. 민망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화내서 죄송해요. 저도 왜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어요. 일단 그렇게 알고 계시고, 먼저 가세요.”
“…… 에이 참나. 알았다. 얼른 와라.”
총총 오세스의 마차로 향했다. 그는 마차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다가오자 그 커다랗고 길쭉한 손을 내미는 것이다.
의도를 알 수 없어 멀뚱히 쳐다보고 있기만 하자 오세스의 입이 열렸다.
“잡고 올라가야죠.”
“……헉.”
귀족 영애처럼?
“괜찮아요…….”
그 손을 애써 외면했다. 끌려온 마당에 손까지 잡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끙끙대며 마차 안으로 들어서서 왼쪽 의자에 자리 잡았다. 오세스는 오른쪽에 앉아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마차가 움직이자 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차 안은 고요했다. 오세스는 아까까지만 해도 내 옆에서 조잘대고 있던 인간답지 않게 조용했다. 그는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것도 같았고,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은 저 붉은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럴 거면 왜 데려온 거람. 마음속으로 툴툴대며 무릎 위에 올려놓은 사과파이를 내려다 보았다.
그 적막함에서 묘하게 목이 졸리는 느낌을 받았을 때, 누군가의 입이 열렸다.
“라일라가 골라준 물건은 정말 예뻤어요.”
“……네네, 그렇죠.”
그가 제 옆에 덩그러니 놓아둔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아마, 그 가게의 디자이너가 가장 열심히 만든 작품이 아닐까요? 말은 안 했지만 그 가게의 물건 중에 가장 비싼 물건이 었거든요.”
“……아.”
“그러니까 예쁘겠죠. 당연히 그래야 해요.”
"……."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오세스가 어쩐지 쓸쓸하게 내뱉었다.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 내뱉은 말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혼잣말일지도 모르지.
그 모습이 누군가와 겹쳐 보인 것인지, 혹은 내가 잠시 돌아버린 것인지 이리 말하고 말았다.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분명히.”
아, 실수했다.
입 좀 닫고 살아, 라일라. 뭔 오지랖이냐? 너랑 언니 생각만 해. 응? 그러자 오세스가 아름답게 웃었다. 오늘 본 웃음 중에 유일하게 꽃(그중에서 파리지옥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같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래, 인간미 넘치는 웃음 말이다!
그렇게 웃지 마.
자기가 내 언니를 씹어 먹을 괴물 새끼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아서 속이 다 울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