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8 (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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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

고용인들에게 자유 시간은 있는가? 주말은? 

……이라고 묻는다면 전자는 있고 후자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돈이 많으면 사람 좀 더 뽑을 것이지. 나쁜 놈들이 있는 애들만 굴려 먹는다. 

아, 그래도 다행인 것은 휴가를 쓸 수 있다는 것일까. 휴가 안 주는 데도 있으니까 여기가 훨씬 나은 걸지도 모른다. 

내가 이 말을 왜 하냐면 오늘따라 미친 듯이 일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즐리가 내게 심부름으로 손질 맡겨놓은 자기 검을 찾아오라고 했을 때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런 일은 전속 하인에게 시키라고 방문을 닫고 툴툴대지도 않았다. 

심부름을 하다가 딴 길로 새서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신나게 놀다가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물론 엄청 늦으면 안 되지만 적당히 늦는다면 누가 뭐라 할까! 

그러나 언니를 생각하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그러면 나는…… 나는 정말로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해치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 라일라! 안 탈 거야?”

한참 동안 저택을 바라보다가 마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한 달 전, 나와 유리아 언니를 저택으로 배달해줬던 사람이었다. 얘기를 나누다가 조금 친해졌다. 그 뒤로 가끔씩 저택에 마주쳐서 처음과 달리 뭔가 원수 같은 사이가 돼버렸달까. 

“가요, 가! 재촉하지 말아요!”

“나 참…… 정신을 어디다 빼고 있는지. 타기 싫으면 번화가까지 걸어가면 될 거 아니야?”

“누가 타기 싫대요? 탔으니까 얼른 출발하죠.”

“귀엽지 않은 꼬맹이…….”

“유리아 언니는 제가 귀엽다고 했는데.”

마부가 혀를 찼다. 

“이런……. 너희 언니 눈이 안 좋은지 미처 몰랐구나.”

“우리 언니 눈 좋거든요! 저어기 멀리 있는 산에 사는 동물까지 볼 수 있을 정도라고요!”

이젠 코웃음까지 친다. “이랴”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공작가의 넓은 정원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창문에 머리를 가만히 기대고 있자 어느새 문을 통과했다. 

지금 가지러 가는 것이 이즐리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검이라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마차를 내어주기는커녕 걸어갔다 오라고 했을 것이다. 

번화가와 공작가까지의 거리가 그리 먼 것은 아니었지만……. 기왕이면 걷는 것보다는 뭘 타고 가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애매한 거리에서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가는 것처럼 말이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그래서 그런가 어쩐지 우울감이 내 몸을 슬금슬금 잠식했다. 

도망치고 소리 지르고 살려달라고빌어도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백작가에서의 일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운명에서도 과연 빠져나올 수 있는지 고민을 했다. 물론 그 순간은 아주 짧았다. 

왜 그딴 고민을 하고 있는 거야 라일라? ‘우린’ 도망쳤잖아. ‘우린’ 벗어났잖아. 할 수 있어. 그 망할 도련놈들한테서 도망칠 수 있어. 이직만 성공하면 돼. 그렇지? 

마차는 금방 번화가에 도착했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번화가를 쭉 둘러보고 있자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언니 옷이 좀 낡은 것 같으니까 새 옷을 사자. 봄이니까 예쁜 원피스는 어때? 아니면 편한 셔츠랑 바지는? 거기에다 내 것도 좀 사고, 그래, 하녀장한테 줄 뇌물용 사과 파이도 사자. 

그것까지 하면 꽤 많은 점수를 딸 것이라 예상한다. 추천장을 받으려면 좀 더 살랑대는 게 좋겠지. 나는 손 안에서 짤랑대는 지갑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마차에서 내려서 총총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대장간 안에는 근육이 울퉁불퉁한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위협적으로 꿈틀거리는 그것들을 보고 있자면 본능적으로 까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황소 같은 여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험악한 화상 자국부터 어마 무시한 얼굴까지, 포스만 보면 이곳의 대장 같다. 

외모로 차별하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서 렸다. 

“꼬마 아가씨, 무슨 일이요? 검이라도 찾으러 오셨소?”

꼬마 아닌데……. 이제 열여덟 살이 됐는 걸! 

“넵…… 이즐리 에머스 도련님의 검을 찾으러 왔어요. 여기 공작가 증표요.”

내가 장미 문양을 보여주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곧 대장장이는 길쭉한 관을 가지고 왔다. 얼른 그것을 받아들였다. 

“무거울 텐데 괜찮겠소?”

“무겁다고…… 욬?!”

대장장이가 손을 떼자마자 어마어마한 무게감이 두 손을 압박해왔다. 

내 팔은 망가진 인형 팔처럼 축 늘어졌다. 대장장이가 다급하게 그것을 받아 들지 않았더라면 땅바닥에 처박혔을 것이다. 머리부터 말이다. 

미친 왜 이렇게 무거워? 쇳덩어리야? 생전 기사용 검을 들어봤어야지. 

이 정도로 무거울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눈을 끔뻑거리며 검과 대장장이를 번갈아 보고 있자니, 그녀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들어줄 테니 이리 주시오.”

대장장이가 직접 나와서 마차까지 검을 실어주었다. 

그녀는 연신 고맙다고 외치는 나를 멀뚱히 바라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곧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내 손을 뺐다. 자기 손녀 같아서 무심코 그래 버렸단다. 딱히 기분 나쁜 것은 아니라서 미소로 답을 했다. 

나는 다시 마차에 타기 전에 마부에게 외쳤다. 

“아저씨! 저 갈 데가 있는데 좀 기다려주세요!”

“뭣?! 도련님 심부름은 다 끝난 것 같은데 그냥 돌아가지?”

“안 돼요. 꼭 해야 하는 일이란 말이에요. 네? 기다려주세요~ 기다려주는 거죠? 그럼 그렇게 알게요.”

“참 나 뭐 이렇게 막무가내인 애가 다 있담. 그래그래, 알았다. 내가 졌다. 저쪽 번화가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볼일 끝나면 후딱 와라.”

“네네!”

내가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옷가게였다. 언니는 바깥에 나가는 걸 무서워했기 때문에 그녀의 옷을 대신 사주는 것은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어디 보자~ 이 원피스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 꽃무늬가 좀 화려하긴 했지만 유리아 언니의 미모라면 충분히 커버가 가능할 터였다. 

그녀의 옷을 다 고르다 보니 내 옷을 살 돈까지 써버렸다. 세상에……. 흠, 뭐 어때? 옷이 많아봤자 쓸모도 없는걸. 하녀복 말고는 다른 옷을 입을 새가 없었다. 몇 달 후에 다가올 축제에도 나는 저택에 있어야 할 테니. 

옷이 든 쇼핑백을 들고서 룰루랄라 베이커리로 향했다. 

“뇌물용 사과 파이~ 사과 파…… 헐.”

그때 나는 딱히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발견했다. 

갈색 머리에 흔치 않은 빨간 눈을 가지고 있는 남자는 명백히 내가 아는 개새끼였다. 

윽, 오세스다. 오세스야……. 

나는 곧바로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공작가 인간들이랑은 마주쳐봤자 하~나도 좋을 게 없다. 좋을 게 있었으면 진즉에 달라붙었겠지. 나 요즘 운이 왜 이렇게 없는 거야? 보기 힘든 얼굴들이랑 자꾸 마주치고. 

그러나 오세스가 모양 빠지게 도망가고 있는 하녀를 발견했는지 멀리서 나를 불렀다. 

“라일라!”

못 들은 걸로 할게요. 그럼 전 20,000- 

그러나 그때 누군가 내 손에 어깨를 탁 집었다. 

“도련님께서 부르십니다.”

오세스의 호위 기사였다. 나는 놀라서 까마귀 소리 같은 비명을 내지르고는 쇼핑백을 떨궜다. 

저, 저 나쁜 놈! 언니한테 줄 옷이 더러워졌잖아……. 후다닥 옷들을 집어넣으며 훌쩍였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하나도 느끼지 않는 것 같은 호위 기사가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지 주인 딱 닮아가지고 못돼먹었네. 

뒤늦게 오세스가 다가왔다. 

“미안해요, 라일라. 그렇게 놀랄 줄 몰랐어요.”

“괜찮아요…….”

그가 내 얼굴을 보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미안한 얼굴이라……. 진짜 미안하기는 해? 말도, 표정도 온통 거짓말투성이인 인간이! 속으로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겉으로는 존중해주는 척하는 것이 바로 오세스라는 인간이다. 이놈이 공작가 놈 중에 제일 악질일지도 모른다. 

“언니한테 줄 거였는데…….”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아냐 괜찮아. 빨아서 쓰면 되는 거야. 새 옷이 더럽혀져서 슬프기는 하지만. 

“사과의 의미로 제가 새 옷을 사드리는 건 어떨까요?”

“네? 정말요?”

오세스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눈을 반짝인 것도 잠시……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괜찮아요! 정말로요. 도련님한테 그렇게 신세를 질 수는 없잖아요.”

뭘 좋아해, 이 멍청아! 오세스가 이런저런 핑계로 유리아 언니랑 엮이려고 들면 감당을 못한다. 그러나 오세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제 마음이 편치 않아요. 받아주세요.”

“진짜 괜찮은데…….”

나는 어느새 내 눈앞에 떡하니 놓인 쇼핑백들을 바라보며 몸을 덜덜 떨었다. 

끌려가다 보니 귀족들이 주로 이용하는 비싸 보이는 옷가게에 들어섰고 눈 돌아갈 만큼 비싼 옷들을 선물 받게 되었다. 

아, 진짜 괜찮다고 새끼야……. 왜 억지로 쥐여주고 그래. 

하, 그나저나 이게 다 얼마야? 요 별거 없는 하얀 와이셔츠는 왜 이렇게 비싸? 하나에 1 골드가 말이 돼? 

이것들 다시 환불해서 돈으로 받으면, 집은 못 사도 월세 정도는 꼬박꼬박 내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다시 옷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꺼내 보았다. 

“히익!”

너무 부담스러워서 피를 토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네놈의 흑심이 보여서 더 괴롭다, 오세스야. 

이제야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유리아 언니 곁에 딱 붙어서 자기를 방해하는 나를 죽이려는 셈이다. 부담스럽게 만들어서 마음을 서서히 죽여버릴 생각이겠지. 

다 알 것 같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살해 방법이란 말인가! 증거 하나 남지 않고 어느 날 싸늘하게 죽어 있는 시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겠지. 

오세스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마음에 들어요?”

“네네, 들기는 드는데 가격이…… 너무…….”

“좀 싼 편이죠? 그래서 여기서 간단하게 입을 수 있는 옷들을 많이 사는 편이에요.”

음, 다이아 수저 뒤져. 저기 가서 접시에 코 박고 뒤져버려. 난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여기서 입을 열면 그 수저 나 달라고 소리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 그러니까…… 전부 멋진 옷들이라고 생각해요. 언니한테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전 도련님한테 이렇게 비싼 물건들을 받을 수 없어요……. 너무 죄송한걸요.”

“아니에요. 꼭 받아주셨으면 해요.  아니면 저, 너무 미안해서 밤새 괴로워할지도 몰라요.”

억지로 안겨주기까지 하니 더 이상 거절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진짜 받는다? 싫다고 하는데 네가 안겨준 거다? 그러니까 유리아 언니랑 썸 타게 해달라는 말 같은 거 꺼내면 너 죽어!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마음 써주시니까 눈물이 앞을…….”

“그러면 절 좀 도와주시지 않겠어요? 마침 여성분이 필요한 일을 하려던 참이었거든요.”

여성분이 필요한 일? 그가 내게 신사처럼 손을 내밀었다. 

“원래는 유리아를 데려오려고 했지만, 바쁜 일이 있다고 해서 거절당했지 뭐예요.”

유리아라는 말에 내가 움찔하자 그가 꽃같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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