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7 (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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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7

    “더러운 손 치워.”

    와우. 

    짝,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호의 반, 용서해달라는 마음 반으로 내민 손이 튕겨 나갔다. 나는 손을 부여잡고 그를 째려봤다. 

    아오. 개자식. 근데 오늘은 내가 잘못했으니까 봐준다. 아니 봐주세요, 저를-. 

    “도련님 괜찮으세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그러려는 의도가 아니 었는데, 실수로 그만…… 헉, 머리 아프세요?”

    근데 콱 뒤져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가 한 손으로 머리를 쥐고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아서에게 뻗은 손이 방패막에 막힌 것처럼 튕겼다. 물론 이놈한테 진짜로 방패막이 있는 것은 아니고, 아서가 내 손을 쳐내는 태도가 방패막처럼 견고하다는 소리다. 

    “웬 이상한 머리띠 쓴 게 떨어져선…….”

    아서의 험악한 표정을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번엔 진짜로 기분이 상한 건가? 식은땀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홀가분하게 풀려 있던 마음이 다시 세게 조여 온다. 

    이 세계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엄연히 신분제와 왕권이 존재하는 나라. 그 견고한 피라미드 가장 아래층에 있는 평민이 최상위권에서 노니는 귀족의 심기를 살짝만 건들면 어떻게 될까? 목이 뎅겅 떨어진다. 도마 위에서 볶음밥 재료로 쓰이기 위해 잘게 잘리는 당근처럼 뎅겅 뎅겅 뎅겅. 

    짜잔, 아름다운 유리아 씨 이거 보세요. 당신 동생이 볶음밥 재료가 되었습니다! 배불뚝이 백작이 활짝 웃으면서 나를 전시했다. 

    ……라니 이게 무슨 끔찍한 상상이람! 저 개 같은 자식은 상상 속에서도 짜증 나게 구네. 훅훅, 진정하자 라일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아서가 싹수없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쓰레기는…… 음, 맞구나! 

    하나 아서는 내 목을 썰어버리는 대신 싸늘하게 일갈했다. 

    “당장 꺼져!”

    “네 넵, 꺼질게요.”

    감사합니다, 도련놈님. 냉큼 꺼지려는데 이번에는 눈치를 쓰레기통에 덩크한 오렌지가 내 다리에 다가와서 얼굴을 비볐다. 

    귀엽기는 한데 지금 상황에서는 괴롭기만 하다. 너, 너 평소에는 나 피해 다녔으면서 왜 지금만 그래? 

    “오, 오렌지야 언니랑 저리 가자…….”

    일단 데리고 피신시킬 생각에 오렌지 쪽으로 손을 뻗었다. 오랜만에 참 얌전히도 잡혀준다. 

    혹시 내 머리띠를 보고 날 생쥐로 인식해서 그런가? 잡아먹으려고 가까이 오는 걸까. 

    “잠깐 멈춰.”

    “네네? 왜 그러세요?”

    “그거 뭐야.”

    “아, 이거요……?”

    고양인데요. 저택에 고양이가 들어왔다고 화내려나. 내 가물가물한 기억상으로는 얘가 고양이를 좋아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아마 아닐 거야!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저렇게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을 리가 없어! 

    “고양이 데리고 이리 와.”

    “넵!”

    ……좋아하나? 

    아서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나도 고양이를 들고 그 옆에 다가갔다. 

    “만져도 안 할퀴어?”

    “마음에 드는 사람 한테는요……?”

    전 좀 할퀴어졌거든요. 닭고기도 줬는데……. 아서가 삐뚜름한 얼굴로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다. 

    오렌지가 이번에는 눈치가 좀 있는 모양인지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할퀴었으면 이번에야말로 목이 뎅겅 날아가지 않았을까? 

    오렌지가 저 싹수없는 아서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길을 받아들일뿐더러 그 손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머리통을 마구 비비고 있으니까! 

    아, 이건 차별이야. 난 싸가지도 있는데. 오렌지는 그런 취향인 걸까? 

    어……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이름이 오렌지……. 네가 지은 건가?”

    아서가 미소 짓고 있었다. 평생 차가운 무표정이나 인상 찡그리는 모습만 보이던 도련놈이었다. 새삼 웃고 있으니 얘가 예쁜 얼굴은 예쁜 얼굴이었다. 머리도 백금발이라서 천사 같아 보이기도 했다. 눈이 빨간색인 게 좀 미스지만. 

    “……제가 지은 건 아니고 주방장님이 지으셨어요.”

    참 나 라일라, 너 미쳤어? 천사는 개뿔 내 언니 감금할 악마 새끼지. 아서는 금방 원래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름까지 지어준 거 보니까 하루 이틀 만난 건 아닌가 보네. 우리에게 숨기고 고양이를 키우고 있던 건가?”

    "……."

    “공작가를 우습게 보고?”

    “아니에요!”

    “형님께 들켰다면 고양이도, 고양이를 숨겨줬던 것들도 다 쫓겨났을걸.”

    뭐라고 해야 하지? 맨 먼저 오렌지를 발견한 주방장을 팔아먹어야 할까? 그래, 좋았어. 팔아먹자. 

    사실 제가 아니고 주방장이 얘를 키우자고 했습니다. 주방장을 쫓아내요. 엉덩이 뻥뻥 까버리면서! 

    그가 들었다면 자기가 만든 밥 맛있게 먹고 뒤통수친 계집애라고 빽빽 소리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아서의 목소리가 나를 막았다. 

    “비밀로 해줄게.”

    “ 네?”

    “하…… 두 번씩이나 말해야 해?”

    “아, 아뇨. 비밀로 해주시면 감사하죠.”

    “대신 내가 널 부를 때마다 얘를 데려와.”

    띠용? 말 그대로 띠용스러운 상황이다. 내가 만화 속 캐릭터였다면 눈알이 총알처럼 튀어 나갔을 것이다. 

    이게 무슨 헛소리람. 그런 속마음과 달리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아서가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찌나 험악하게 다루던지 고양이가 괴로운 소리를 낼 정도였다. 

    이 둘째 사이코패스가 미쳤나. 

    “도련님, 주제넘은 소리인 건 알지만, 조금만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시는 건 어떨까요……?”

    짜증 가득한 눈이 내 얼굴을 훑었다. 

    “그게, 그러니까요. 아직 아기 고양이라서 많이 약하거든요. 그렇게 세게 쓰다듬으면 아파할지도……? 그냥 그렇다고요!”

    “알았으니까 입 좀 다물어.”

    싹수없는 놈. 그래도 손길이 전과 달리 부드러워졌다. 악마 같은 아서와 천사 같은 고양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래서 내가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서가 고개를 들어 웃는 나를 보곤 다시 고양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유리아라는 하녀의 동생 맞지?”

    “어……. 맞…… 맞는데…… 왜요……?”

    그걸 왜 물어봐. 뭔 수작 부리게! 확 마! 아서가 고양이에게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그를 무시무시하게 째려봤다. 

    하지만 더 이상 뒷말은 나오지 않고 시간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따뜻한 봄바람이 정원을 간지럽혔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서,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형님.”

    “끄억…….”

    초대하지도 않은 두 번째 불청객, 오세스가 나타난 것이었다. 언니에게 붙어 있지 않은 것은 좋지만 여기 나타나란 것도 아니었는데. 깜짝 놀라 앞으로 엎어졌다. 하마터면 코를 새롭게 건축해야 할 뻔했다. 

    “괜찮아요, 라일라?”

    오세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대충 괜찮다고 답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원에서 책을 읽으려고 왔어요.”

    지금 보니 그가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어려운 책이 옆에 놓여 있다. 

    아서는 정말 오렌지를 비밀로 할 생각이었는지 홱 하니 등 뒤로 감추어버린다. 

    눈치를 되찾은 오렌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좀 의외네. 저렇게까지는 안 할줄 알았는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세스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 

    징그러울 정도로 신사같이 굴던 저 남자도 고양이만 보면 얼굴이 무섭게 변하곤 한단다. 

    나는 본 적 없지만, 주방장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오렌지를 숨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 뭐해. 오렌지는 저택 정원을 지 맘대로 누비고 있던데. 

    오세스는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원래라면 같이 붙어 있을 조합이 아니긴 했다. 

    나라도 ‘뭐여, 내일은 태양이 서쪽에서 뜨려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건 처음 보네요.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친구라도 된 걸까요?”

    “형님, 저런 것과 제가 친구가 되다뇨. 농담이 지나치세요.”

    인마~ 나도 니랑 친구 취급받기 싫어요. 너랑 친구가 될 바에는 차라리 이즐리한테 찐하게 키스할게. 

    우웩. 상상하니까 속이 울렁거린다. 

    내가 말없이 헤죽 웃고 있기만 하자, 오세스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내 얼굴을 빤히 지켜보다가 조금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라일라, 그 머리띠 참 귀엽네요.”

    “……감사합니다…….”

    “이즐리가 선물한 거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딱 어울리는 거로 줬네요.”

    “네, 도련님께서 주시긴 하셨죠…….”

    어울린다는 건 뭐지. 내가 쥐새끼 같다는 건가? 멋들어진 미소를 단 채로 사람 설레는 말을 하고 있지만, 저 말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진짜 평생소원인데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다. 미친놈 두 마리의 출현으로 멘털이 아까부터 -1씩 깎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들 나한테 독 대미지 입혔냐? 100이었던 멘털이 이제 50으로 치닫고 있다. 

    “에취!”

    갑자기 오세스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급하게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입과 코를 가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해요. 실례를 했네요.”

    나는 들었다. 그가 “고양이가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라고 하는 것을. 나는 식은땀을 닦아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보니까 할 일이 있어서! 저 이만 가봐야 할 것같아요. 두 분 다 안녕히 계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전 이만…….”

    “네? 벌써요? 두 사람 아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즐겁게 이야기? 그거 아니야. 아서가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고양이는 데리고 가야 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오렌지 평소에도 잘 돌아다녀서 괜찮은데요. 얘가 괜히 정원 나무 위에 올라가서 까분 게 아니라고요. 

    그래도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아서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지 않겠는가. 

    그 자리에 앉아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를 외치며 멍하니 마음을 수련했다. 두 사람은 나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충 들어보니 공작의 생일 파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이야기이다. 와, 이제 곧 그 사람 생일 파티구나. 귀족의 생일 파티만큼 끝내주는 것도 없다. 그날엔 고용인들도 맛있는 걸 마음껏 먹을 수 있단다. 

    대신 공작을 축하하는 파티인 만큼 많은 귀족이 찾아올 것이다. 잘못하면 뭐다? 응, 모가지 뎅강~ 

    그때 “유리아”라는 단어가 귀를 스쳤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오세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놀란 것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다가 방긋 웃었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유리아는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어요.”

    “형님이…… 그런 하녀 생일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방을 청소해주는 분인데 이런 것도 모르고 있으면 안 되죠.”

    뭐든지 “내 방을 청소해주는 소중한 하녀”라는 말로 넘어가려는 태도가 불만스럽다. 

    선물이라도 챙겨줄 속셈이냐?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거짓말을 내뱉었다. 

    “아……. 언니 생일은 벌써 지나갔어요. 아마 4월 1일이거든요.”

    지금은 벌써 10월이다. 챙겨주기도 뭐 할 정도로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럼 라일라는요?”

    "……저요……?”

    내 생일은 왜 묻나 모르겠지만 대충 진실을 말해줬다. 

    내 생일이 11월 7일이라는 것을 들은 오세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인사를 하고 가버렸다. 아서와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가져가.”

    아서가 내게 고양이를 홱 던져버렸다. 정말 동물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놈이다. 떠나가는 뒤통수를 한참이나 노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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