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6 (6/84)
  • 16631945668503.jpg

    Episode 6

    “라라.”

    누군가 내 몸을 흔들었다. 으으, 그러지 마. 더 자고 싶단 말이야. 

    나는 사람은 최소 열 시간 이상은 자야지 피로가 풀린다고 생각하는 파였다. 내가 하녀만 아니었다면 점심까지 자고 있었을 텐데! 

    “라라, 일어나. 이즐리 도련님이 여섯 시에 연무장으로 오라고 하셨잖니.”

    “헉……!”

    아 맞아. 이즐리! 번뜩 눈을 떴다. 

    그 이름을 들으니까 잠이 확 깨네.  지금 시간은 몇 시지? 

    늦으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진짜 가기 싫다. 그냥 청소할 때만 얼굴 보는 사이가 되고 싶다. 

    “지금은 다섯 시 삼십 분이야.”

    “고마워 언니!”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옷까지 갈아입었다. 빗으로 뒤엉킨 머리를 마구 빗어낸 후에 문을 열었다. 

    내게 손을 흔들어주는 언니에게 마주 인사한 나는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고 있을 시간이라서 그런지 복도는 한적했다. 

    연무장에는 기사들이 한창 아침 훈련을 하고 있었다. 

    고용인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직종을 하나 꼽아보자면 기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입구에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이즐리를 찾았다. 기사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남자가 보이자 바로 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련을 하고 있음에도 잠옷이나 다름없는 헐렁하고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다. 

    저러다 맞아서 심하게 멍이나 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소망일 것이다. 이즐리는 황제와 기사단장을 놀라게 했던 검술의 천재로, 기사단에 들어와 달라는 제의까지 받았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단지……. 

    - 재미없어 보여서 안 들어간 건데?

    - 네에?! 

    정말 미친놈이라니까. 나였다면 감사하다고 절한 다음에 얼른 들어갔을 텐데. 

    연무장 입구에서 주춤대고 있다가 이즐리와 눈이 마주쳤다. 

    기사 하나를 때려눕힌 그가 얼른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그, 그래, 갑니다 가요! 

    검을 들고 있는 그는 평소보다 열 배는 더 무시무시하다. 코앞까지 다가갔다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이즐리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근처에 있던 기사에게 대강 검을 던져주었다. 저러다가 저 사람 손 다치면 어쩌려고 저래?! 내가 다 깜짝 놀란다. 

    역시 남의 안위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사이코패스다. 

    “안 늦었네.”

    “……그럼요. 늦으면 안 되죠.”

    그가 근처에 있던 하인을 불렀다. 

    하인이 옳다구나 박스를 건넸다. 그 벌칙 상품인지 뭐가 담겨 있는 상자로 보였다. 

    “눈 감아.”

    “넹……?”

    뭔데, 뭔데 그래. 벌칙으로 꿀밤이라도 먹이려는 건 아니지? 예전에도 그런 적 있잖아, 개자식아. 

    그가 내게 손을 뻗자 자연스레 눈을 감게 되었다. 

    “자 벌칙…….”

    그리고 머리에 무언가가 씌워졌다. 

    머리띠인가? 

    “하하……!”

    뒤이어진 웃음소리. 

    “하하하! 예상보다 더 안 어울리잖아!”

    이즐리 놈은 명백하게 나를 비웃고 있었다. 

    뭘 그렇게 처웃어. 너 귀족만 아니었으면 두 눈퉁이 진즉에 밤탱이 됐다. 

    눈을 슬쩍 뜨자 커다란 손이 앞을 가렸다. 얼굴의 반을 감싸는 뜨끈한 온기가 끔찍하게 느껴진다. 기사들이 헉, 하고 놀라는 소리를 냈다. 

    “누가 눈 뜨랬어?”

    “헙."

    “농담. 떠도 돼. 너도 네 꼴을 봐야지.”

    그가 상자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거울이 햇빛에 반짝이다가 내 얼굴을 비췄다. 

    나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매만졌다. 동그랗고 얇은 덩어리 두 개가 머리띠 위에 달려 있었다. 쥐 머리띠였다. 

    왜 이딴 걸 씌우고 난리야? 물론 귀여운 내게는 뭐든 안 어울리는 것이 없겠지만. 

    나는 소설에서 언니에게 토끼 머리띠를 씌웠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이야 이 새끼. 

    “하루 종일 그거 쓰고 다녀.”

    그건 좀 아닌데. 고용인들이 나를 보며 수군댈 것을 생각하니 벌써 얼굴이 시뻘게진다. 아, 애초에 그냥 있어도 뻘겠지만. 홍조증이 생각보다 힘이 세서 말이다. 

    불만이 있지만 힘없는 고용인이 어찌 거절을 입에 담을까! 아아, 누군가 저 개새끼를 죽여주기를! 연무장에 빠져나가자마자 빼버려야지. 

    “연무장 나가자마자 빼기만 해. 더 심한 벌칙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혹시 독심술사세요? 얘가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는데. 집착남이 독심술까지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무서운가. 

    아무튼 이런 사정으로 하루 종일 머리띠를 쓰고 다니게 되었다는 소리이다. 

    언니는 맨 처음 나를 보고 입을 가렸다. 

    “너무 귀엽다. 라라, 이 언니의 심장을 터뜨려 죽일 생각이야?”

    “미안, 조금만 귀여울게.”

    “그러면 아침 소집 때도 계속 써야 하는 건가?”

    “으음, 그럴 것 같은데.”

    “……하녀장님이랑 집사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 자식 나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야! 완전 사이코…… 읍읍!”

    “라라! 소리 낮춰.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했어? 안 했어?”

    “뭐 어때, 여긴 우리 방이잖아. 들을 사람 없을걸?”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잖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그리고 언니의 예상대로 아침 소집 때 잔뜩 혼났다. 대충 하녀가 가오가 있지, 이런 걸 쓰고 다니면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즐리 놈이 쓰고 다니라고 했다고 하니 한숨을 쉬며 봐주셨다. 고용인들 사이에서 이즐리의 똘기는 유명했으니까. 

    예전에는 어떤 하인한테 집사장 엉덩이 걷어차고 오라고 했었단다. 협박받은 하인은 엉엉 울면서 엉덩이를 걷어찼고 집사장한테 제대로 찍혔다. 얼마 뒤 퇴사 엔딩을 맞이했다. 

    나한테 얻어맞은 이즐리 전속 하인이 마음씨가 착해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나도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심장이 아찔하다. 

    “저거 봐.”

    “귀여운 머리띠네.”

    “도련님도 참……. 저러다가 또 나가버리면 어쩌려고.”

    고용인들은 식당으로 가면서 내가 무슨 문화 유적이라도 되는 마냥 한 번씩 훑고 갔다. 

    대놓고 웃는 놈도 있었다. 너 나한테 찍혔어요. 얼굴 기억했어. 

    레몬과 그 일행한테 그 꼴이 뭐냐는 소리를 듣고 언니 몰래 다리를 한 번씩 걷어차 주었다. 종아리를 붙들고 콩콩 뛰는 모습이 참 볼만 했다. 

    이번 일로 하녀장한테 밉보였을까 봐 아침 먹을 때 사바사바 하러 갔더니 그냥 날 안쓰럽게 쳐다보면서 열심히 일하라고 했다.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공작이 식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 세상에 거의 3, 4주 만인가?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랑 지금. 

    오랜만에 아들들과 아침 식사나 같이 할 생각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싸가지 소멸 직전인 아서의 얼굴이 유난히 밝았다. 

    마마보이 자식.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즐리와 오세스는 짜증나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엄마를 싫어했다. 

    하지만 난 증오라고 불리는 그것이 애정이라는 감정의 다른 말인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예상하건대, 공작가의 아들들은 제 엄마가 공작이 아니었다면, 권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진작에 지하감옥에 가둬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뭐?”

    그들 사이가 어떻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나는 나와 언니의 안위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픈 사람인 걸? 

    어깨를 으쓱하고 복도 쓰는 일을 반복했다. 언제 하녀장 마음에 들어서 추천서를 받는담. 

    청소를 마친 나는 정원에 놀러 가기로 했다. 

    “조금만 돌아다니다가 언니한테 가야지~”

    장미 저택이라고 불리는 만큼, 1년 내내 장미가 만발한 에머스가의 정원은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일할 때 가끔씩 오면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어떻게 장미들이 안 시들고 계속 피어 있는 거랬지? 마법이랬나, 연금술이랬나. 

    저 멀리서 가지치기하던 정원사가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 손을 번쩍 들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나무 위에서 파들파들 떨고 있는 존재를 발견했다. 

    “……고양이다.”

    아니, 그건 그냥 고양이가 아니었다. 오렌지였다. 먹는 오렌지가 아니라 이름이 오렌지다. 

    털 색깔이 오렌지를 닮았다 하여 새콤달콤한 이름이 붙여진 생물은, 고용인들이 몰래 키우고 있는 아기 고양이였다. 

    키우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좀 그러려나? 그냥 어느 날부터 주방 건물 뒤편에서 돌아다니는 아이를 주방장이 발견해서 먹이를 챙겨주곤 했다. 나도 닭고기 같은 거 줘본 적 있고. 

    “오렌지, 너 거기서 뭐 해?!”

    오렌지가 나무줄기에 찰싹 달라붙어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너 그러다가 고양이 알레르기를 가진 오세스한테 들키면 곧바로 쫓겨난다. 영영 이 저택에 들어오지도 못할걸!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오렌지를 올려다보았다. 어쩌지? 너무 어려서 내려오질 못하고 있다. 커다랗게 심호흡을 하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구해주자. 

    니고르 백작의 영지에서 살았을 때는 자주 나무를 타고 놀았다. 이 정도야 나한테는 껌이지. 두 팔에 힘을 주고 나무를 기어 올라갔다. 

    이거 정원사한테 들키면 된통 혼나겠다. 하지만 그 사람도 오렌지 좋아하니까, 오렌지를 구하려고 올라갔다고 하면 봐주겠지, 뭐! 

    지금 안 보고 있지? 됐어! 

    나는 끙끙대며 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고양이가 있는 가지에 손이 닿을 정도로 올라왔다. 

    고양이가 아기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오렌지 이리 와. 언니가 구해줄게.”

    그러면서 오렌지 쪽으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거기 하녀, 지금 뭐 하는 거지?”

    “어어, 잠깐 이 목소리는…… 으악!”

    내 얼굴을 밟고 밑으로 뛰어내려 가버린 오렌지에 더불어 갑작스레 밑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손을 놓쳐버렸다. 

    “으아아아악……!”

    나는 괴성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운동이라도 배울 것 그랬다. 그러면 착지법이라도 쓸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다가올 고통에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지상에 닿았을 때 아픔 같은 건 없었다. 푹신한 느낌만 들었을 뿐이다. 

    아래를 바라보자 눈을 감고 쓰러져있는 아서가 보였다. 

    “끄악…… 도련니임!”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목소리 듣고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미친 거 아니냐. 일개 시녀가 자기 엉덩이로 모시는 도련님을 죽여버린 것이다. 

    나는 얼른 아서의 심장에 귀를 대보았다. 다행히 심장이 잘 뛴다. 아니, 안심할 게 아니야. 죽여버린 게 아니라도 일이 심각하다고! 

    라일라 이 미친것아 너라면 엉덩이로 자기 기절시킨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 물론 난 용서할 수 있지만 얘는 아닐지도 몰라. 와 씨 이거 사망 플래그 맞죠?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댔다. 그 와중에 눈치 없는 오렌지가 자꾸 주변에서 얼쩡거렸다. 

    구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거면 저리 가주렴. 제발……. 

    그때 아서가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언제나 차가운 기운을 품고 있던 붉은 눈동자가 흐릿하게 풀려있다. 

    “도련님 몸 괜찮으세요?”

    그의 옆으로 다가가서 몸 상태를 속속들이 확인했다. 조, 좋아, 눈 움직임 좋고, 숨도 잘 쉬고 있고, 그리고, 그리고……. 

    “……단두대에 올라가고 싶어?”

    인성도 평소처럼 더럽네. 

    흠! 조졌군! 

    사람은 망했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질 때도 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아서에게 잡고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었다. 언니, 미안해. 나 오늘 죽을지도 몰라. 맞아 죽거나 목 잘려 죽거나 둘 중 하나일걸. 그래도 아무튼 수습을 해볼게. 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