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5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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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

언니가 찔린 사람처럼 황급히 내뱉었다. 

“제가 책을 꺼내려다가 그만……. 실수로 쏟아버렸어요. 아서 도련님이 막아주시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몰라요.”

고개를 홱 들어 언니와 아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언니 머리 위로 책들이 떨어지고 아서가 급하게 언니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겨 팔로 책을 막아내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안고 있던 거였나? 다행이다……. 이러쿵저러쿵한 일이 아니라서. 

안심의 한숨을 내뱉으려다가 멈칫했다. 이렇게 멀쩡해 보여도 얘네는 집착과 계략의 화신이었다. 

혹시 썸 타보려고 뭔가 수작 부린 거 아니야? 사서한테 책 떨어뜨리라고 하고 구해주는 척한 거 아니냐고! 

아서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덕분에 귀한 책들이 더러워졌어.”

“우리 언니가 실수 좀 할 수 있지 뭐…….”

돈도 많은 놈이 그러는 거 아니다. 

작게 중얼거렸는데도 들린 모양인지 아서가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째려보았다. 

“뭐?”

……웁스. 

“으응? 왜 그러세요……?”

제가 뭔 말을 했던갑쇼? 저는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는데요. 

나는 몸을 움츠리며 후다닥 이즐리의 뒤로 숨었다. 잠깐 내가 왜 얘 등 뒤로 숨었지?! 얘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인데. 

언제 숨었냐는 듯 등 뒤에서 빠져나와 당당하게 서자 이즐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서가 허,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책 중 하나를 들어 올려 언니에게 건넸다. 

“네가 찾던 책이 이거지? 받고 얼른 나가.”

“귀족의 의무” 어쩌구 라고 쓰여 있는 책이었다. 

저게 오세스가 찾아달라고 한 책? 왜 저렇게 재미없어 보이는 책을 보는지 알 수 없다. 애초에 언니를 납치해 가둬버린 세 형제의 심리도 이해할 수없다. 

저 싹수없는 도련님이 직접 책을 주워주는 걸 보면, 언니한테 마음은 있는 모양이었다. 아직 입덕 부정기 상태인 것 같았지만. 

“감사합니다.”

언니가 방긋 웃으며 책을 건네받았다. 아서의 얼굴이 갑자기 멍하게 풀렸고 이즐리는 흥미 가득한 얼굴로 언니를 응시했다. 

이런…… 미소에 홀려버렸구나! 

「장미 저택의 비밀」에 나오는 서술에 따르면, 그들은 울 아름다운 언니의 환상적인 웃음을 볼 때마다 심장이 제 것이 아니게 된 것처럼 미친 듯이 뛴다고 하더라. 이를 알고 있는 이상 저들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나는 일부러 책을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버렸다. 

“헉, 실수를 해버렸네~ 죄송해요.”

커다란 소리를 듣고 나서야 두 사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흘려버린 책들을 대충 꽂아 넣고 언니의 팔을 잡아당겼다. 

“언니, 이제 가자.”

“그래.”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곤 아서에게 인사를 했다. 나도 두 도련놈들에게 인사하고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이즐리가 아직도 내 목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딜 가려고?”

“이제 책도 반납했으니까 일하러 가야죠……”

“나한테 잡혔잖아. 벌칙을 받아야지.”

“……버, 벌칙이요?”

이게 무슨 소리야? 벌칙 얘기는 없었잖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즐리를 올려다보았다. 

“쉽게 잡히면 가만 안 둔다니까?”

잠깐만요 도련놈아.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언니가 저러는 거보고 난리 안 피울 동생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변명할 말이 내뱉어지지 않는다. 뭐라고 해도 억지 부리면서 벌칙을 받으라고 그러겠지.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짓자 언니가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가 입 모양으로 “괜찮아, 진정해 라라” 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정말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벌칙이 뭔데요……?”

“내일 연무장에 오면 알려줄게. 한 여섯 시면 되려나?”

여섯 시라니! 내가 언니 덕분에 겨우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진짜 제멋대로인 인간이다. 절망스러운 기분을 맛보고 있자니 옆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서재 시끄러워지는 거 싫으니까 다 나가.”

아서는 그렇게 말하고, 옆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래 나가라면 나가줘야지. 나 또한 아서와 더 이상 대면할 생각은 없었다. 

이즐리는 “귀여운 녀석”이라고 중얼거리고 우리를 끌고 서재를 나갔다. 

나는 도망치다 잡힌 노비처럼 뒷덜미를 잡힌 상태로 질질 끌려나갔고, 언니는 귀족 영애처럼 에스코트 되었다. 역시 저놈은 개자식이야. 

멋지게 에스코트 해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함부로 언니의 어깨에 손을 올린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언니를 내 쪽으로 끌어당겨 이즐리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의 눈썹이 불만스레까닥였다. 

뭐, 뭐 어쩌라고! 하지만 내 시선은 소심하게 바닥을 파고들었다. 

다행히 이즐리는 눈치껏 꺼져주었다. 아까처럼 끈질기게 붙어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인제야 언니와 둘이서만 남았구나! 

우리는 오세스에게 책을 전달하기 위해 그의 방으로 향했다. 언니의 팔이 걸음에 맞춰 앞뒤로 달랑거렸다. 

그곳에 팔짱을 끼자 걱정스러운 시선이 돌아왔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걸까. 

언니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재 주변이라 그럴까? 다들 일에 집중하는 듯, 통 고용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도련님이랑 둘이서 숨바꼭질을 했었니? 그래서 같이 있던 거야?”

기어가는 것 같이 작은 목소리. 그래서 나도 똑같이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으응…… 하긴 했어. 난 진짜 하기 싫었거든? 근데 도련님이 자꾸 하자고 그래서…….”

“……아니야 잘했어, 라라. 앞으로도 그렇게 도련님 말을 따라줘. 절대 싫다는 티를 내지 말고 얌전히 지내야 한단다. 전에도 말했지만…… 여긴 우리가 살던 그 동네가 아니니까.”

이미 기억 돌아오기 전에 내가 이즐리 앞에서 “왜 이딴 장난을 하냐”, “도련님 진짜 너무하다”라며 생난리를 피운 전적이 있긴 했지만……. 언니한테는 비밀로 하자. 

“물론, 네 몸에 큰 해를 끼칠 일이 생기면 바로 도망가도 좋아. 너도 알다시피 귀족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좋잖니.”

언니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네가 걱정이 돼. 이즐리 도련님의 관심을 끄는 것 같아서.”

“관시임……? 언니 그냥 그 도련님은 나한테 장난치는 게 재밌을 뿐이야.  진짜 관심은…….”

언니한테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관심은?”

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란 말인가? 

이즐리뿐만 아니라 다른 두 도련님의 관심은 언니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내가 오히려 걱정을 해야 할 판인데, 참. 그녀는 곧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도련님께서 무슨 벌칙을 주시려는 걸까?”

“글쎄 나도 모르겠네. 걱정하지 마 언니. 별거 아닐 거야.”

“그래도 걱정이 되는걸……”

“보나 마나 뜨거운 커피 원샷 하기, 전속 하인 엉덩이 걷어차고 오기 같은 거겠지. 평소에도 잘만 그런 거 시키던데.”

엉덩이 걷어차기라는 부분에서 언니가 웃었다. 

웃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다 기분이 좋네. 

우리는 오세스의 방 앞에 도착했다. 

언니가 책을 가져다 줄 동안 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벽에 기대서 발을 내려다 보았다. 한 달 전에 받은 검은색 에나멜 구두는 이미 색이 바래 후줄근하다. 그걸 보자 이 저택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언니가 자기를 막 따라다니는 내게 의문을 가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평소에도 달라붙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앞으로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기를. 

그때, 갑자기 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개를 들자마자 얼굴이 소나기 내리는 시험지처럼 구겨졌다. 레몬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 너 정원 가는 복도 청소 담당 아니야? 왜 일 안 하고 도련님 방 앞에서 얼쩡거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네가 신경 쓸 바는 아니거든?”

홱 주먹을 들고 위협하자 몸을 움찔거린다. 

“너 같은 폭력배랑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되다니. 너무 끔찍해. 짜증나.”

“나도 짜증 나거든?!”

레몬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래, 좋은 생각이네. 조금 더 까불었으면 한 대 먹여줬을지도 모른다. 다음번에는 반대쪽 눈도 밤탱이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 언니가 나왔다. 

“무슨 일 있었니? 밖에서 소리가 들려서.”

“아니, 아무 일도.”

나는 들고 있던 주먹을 얼른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나는 언니에게 방 안에서 도련놈과 무슨 썸싱 없이 바로 책만 주고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안심했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이번에도 식당에서 하녀장 옆에 앉아서 친근한 척 달라붙었다. 

그로써 알게 된 것은 그녀가 사과파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다음에 뇌물로 바쳐야겠다. 

식사를 끝낸 후 청소를 하기 위해 이즐리의 방에 갔다. 운 좋게도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대강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몰래 그의 베개에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들키면 혼나겠지만 안 들키면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복수란 말씀! 

현관 쪽을 지나치다 고용인들이 거대한 문 양옆에 주르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니도 끼어 있었다. 

아마 일을 하고 돌아온 공작을 맞이하려는 생각이겠지. 오늘은 밖에 나가서 아홉 시에 저택에 도착한다고 들었다. 나도 눈치껏 그들 사이에 껴서 인사할 준비를 했다. 

곧 거대한 공작가의 문이 열렸다. 공작이 그의 하인과 저택에 들어왔다. 고용인들이 머리를 숙였다. 

잘생긴 아들내미들을 둔 만큼 그녀도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매끄러운 검은색 머리카락과 핏빛 눈동자. 피부는 어찌나 하얀지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뱀파이어가 아닌가 싶었다. 세 도련놈은 인간미라도 있지 그녀에게는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가 풍겼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그녀는 인간이 맞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분명히 그렇게 나왔다. 요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나 인간이 틀림없다고. 

반짝이는 구두가 눈앞을 지나갔다. 허리 아파 죽겠네. 빨랑빨랑 지나가라 공작아. 

공작이 현관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가까운 곳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이 싸가지 없는 목소리는 아서의 것이로구먼. 엄마가 왔다고 헐레벌떡 뛰어온 것 같다. 

아 진짜 좀 공작이 다 지나간 다음에 말 걸라고! 계속 이렇게 숙이고 있으면 얼마나 힘들고 괴롭고 빡치는 줄 알아?! 

“어머니, 돌아오셨네요.”

“그래.”

“오랜만에 같이 저녁 식사해요.”

“아니, 바빠서 그럴 수 없다. 다음에 하도록 하지.”

공작은 참 차갑게 거절을 했다. 아서는 매일 공작한테 식사를 청하곤 했는데 돌아오는 답은 대부분이 거절이다. 

그녀는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집무실이나 밖에서 해결하는 편이다. 저렇게 애절하게 말하는데 좀 같이 먹어주지.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하지 않는 식사에 자신이 굳이 껴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어쩐지 아서가 울상을 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공작이 다 지나치고 나서야 나는 허리를 들었다. 

아서는 울상 대신 화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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