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sode 4 (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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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

하녀라는 신분이 억울한 것은, 주어진 일뿐만 아니라 추가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 예를 들자면……. 

“이 책 좀 서재에 가져다 놔.”

“네엡…….”

점심에 청소하러 왔다가 이즐리 놈이 가져다 놓은 책을 대신 가져다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생전 책 같은 거 읽지도 않으면서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이게 다 몇 권이야. 하나, 둘, 셋, 넷, 다섯……. 

총 합해서 열 권이었다. 두껍기는 겁나게 두껍네. 다 백과사전이잖아! 원래 이런 일은 전속 하인이 해야 하는 거 아녀? 나는 청소 당번인데, 청소만 하면 되는 건데! 

하, 계급이 깡패라고 반항도 못 하겠다. 평소 같으면 싫다고 툴툴대기라도 하지 원작에서 그의 잔인함을 알아버린 이상 입을 꾹 다물고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침대에 누워 여유롭게 검을 닦아내는 이즐리를 째려봤다. 검이 곁에 있어서 두 배로 무섭다. 

쉬바 이직할 때 두고 봐. 침대에 똥 싸고 간다. 물론 진짜 싸면 목이 썰리겠지만. 

밖에 가서 가방 하나를 가져온 다음에, 그곳에 책들을 전부 욱여넣었다. 

다시 이 방에 오기 싫으니까 한 번에 옮길 생각이다. 

끙끙대고 있자 창문 옆에 가만히 서있던 전속 하인이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기요, 동정할 거면 도움으로 주세요. 

이즐리는 여전히 웃음이 한가득하다. 

“수고해~”

재수 없는 자식. 내가 귀족이고 놈이 하인이면 어떨까. 퇴직하고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괴롭혀줄 수 있는데.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만약 내가 귀족이면 언니도 귀족일 테고, 저 못돼먹은 놈들에게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 이미 평민으로 태어났는걸. 아, 이왕 환생할 거면 황제의 사랑받는 외동딸이나…… 뭐 그런 게 되고 싶었단 말이야. 

가방을 질질 끌면서 문으로 갔다. 

그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심한데 토끼나 만나러 갈까.”

토끼, 이는 이즐리가 언니를 부르는 별칭이다. 놀랄 때마다 눈이 둥그레지는 것이 토끼 같다고 했었나……. 아무튼 그런 이유로 붙여졌다. 

언니를 왜 만나? 그러지 마. 이 자식아!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 이즐리를 째려보고 말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너무 한 번에 눈이 마주쳐서 마치 이즐리가 계속 나를 보고 있던 것같이 느껴졌다. 

그는 하인에게 검을 맡기고, 나른한 사자처럼 옆으로 누웠다. 

“도와줄까? 팔굽혀펴기 열 번만 하면 생각해볼게.”

“……괜찮아요.”

너랑 별로 같이 있고 싶지 않걸랑요. 

“에이~ 너무 빨리 거절하는 거 아니야? 재미없네.”

이즐리가 얌전히 언니 인생에서 꺼져주는 게 제일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얼굴이 시뻘게질 때까지 힘을 주며 가방을 끌었다. 

어우, 겨우 문턱을 넘었네.이즐리가 자리에서 나를 졸졸 따라왔다. 

왜 따라와, 불편해, 사라져. 

“어,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왜 따라오세요?”

“네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덧붙여 내 집인데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냐고 묻는다. 

당당함에 몸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뭐, 언니를 보러 가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따라올 거면 좀 도와주지……. 죽어도 안 그러네. 

그가 내 어깨를 콕콕 찔렀다. 뒤를 돌아보다 볼을 찔렸다. 깔깔 웃는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놓아주고 싶다. 

도중에 마리를 발견하고 도와달라고 했는데, 이즐리가 도와주면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 협박하자 쏜살같이 도망가버렸다. 

마리야……. 나 버린 거야? 아니야 이해할게. 내가 너였다면 이즐리 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쳤을 테니 까. 

어쩐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우리는 곧 서재에 도착했다. 

서재에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지만 정식으로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첫 번째는 막 이 저택에 왔을 때 저택 구조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 지나쳤고, 두 번째에는 방을 착각해서 들어와 버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다랗게 뻗어있는 책꽂이들. 그리고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보다 더 많은 책이 있는 서재는 서고를 관리하는 사람을 제외하곤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야 그럴 것이 비싸고 희귀한 서적이 가득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뱉었다. 물론 전생에 이와 비슷한 도서관에 자주 들리기는 했으나,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서관은 처음이었다. 

역시 돈이 최고구나. 아, 부자 되고 싶다.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얘야. 여기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  아,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사서가 나를 쫓아내려고 하다가, 이즐리가 홱 손짓을 하는 것을 보고 물러섰다. 그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웃댔다. 

“뭐야, 그 얼굴은. 서재 처음 봐?”

“네네, 처음이에요. 여기 진짜 서재 맞아요? 너무 예쁜ㄷ……."

헉 나도 모르게 신나게 떠들어버렸네. 진정, 진정.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사서에게 다가갔다. 가방에 담긴책을 건네자 사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가져다 놓겠다고 한다. 

이제 갈 시간인가.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때 이즐리가 대뜸 내뱉었다. 

“숨바꼭질하자.”

“네에?”

“서재에서 숨바꼭질하자고. 나 심심하거든~”

진짜 뜬금없는 인간이네. 저기 벽에 정숙이라고 쓰인 종이가 있는데요. 

이즐리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히죽히죽 웃었다. 

에이 씨, 팔 풀어버리고 싶네. 난 정말 놈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평민이 귀족을 거부할까? 

“내가 찾을 테니까 네가 숨어.”

딱히 내 동의도 없이 숨바꼭질은 시작되었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대충 들키고 끝내지……. 

“쉽게 들키면 가만 안 둘 거야.”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협박을 가득 담고 있다. 

으으 망할 자식. 언니도 모자라서 나까지 괴롭히는 거냐! 마음만 같아서는 그냥 나가고 싶다. 

이즐리는 벽에 기대서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백까지 센다고 그랬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서재를 구석구석 돌았다. 그리고 책이 꽂힌 곳을 손으로 싹 쓸어내며 터벅터벅 걸었다.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와서 주변을 반짝반짝하게 빛냈다. 이즐리와 멀어지니 숫자 세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서재는 기분이 이상해질 정도로 고요했다. 

낯선 느낌, 마치 다른 세계에 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음, 나는 전생에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으니 다른 세계가 맞기는 하지만. 

그렇게 걷다가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얼굴이었다. 놀랍게도 언니와 공작가의 셋째 도련님인 아서가 서로 껴안고 있었다. 

저편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마치 후광처럼 느껴졌다.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오갔다.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처럼. 

어, 어버법, 이게 무슨……!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지르고 둘 사이를 파고들고 말았다. 찍지 마. 로맨스 찍지 말라고! 니들 장르 로맨스인 척하는 피폐잖아, 개새끼야! 

나는 온몸으로 엉겨 붙은 두 사람의 손을 떼어내곤 바닥으로 엎어졌다. 나는 데굴데굴 굴렀다. 벽에 이마를 세게 부딪히고 뒤로 넘어졌다.눈앞이 팽팽 돌았다. 치마가 반원을 그리다가 가라앉는다. 

등 뒤가 이상할 정도로 배겼다. 바닥에 책들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천장이 보인다. 책이 잔뜩 빠져 있는 책장도, 언니의 얼굴도. 

깜짝 놀라서 입을 가리고 있네. 

“라, 라라? 괜찮니? 어디 다치진 않았어?”

그 상태로 말없이 언니를 올려다보았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왜 서로 안고 있던 거야? 벌써 진도 거기까지 나갔어? 애들 마음을 다 사로잡아버린 거야? 

나는 책 속에서 세 도련 놈들이 언제부터 언니에게 반하고, 또 언제 그 마음을 깨닫게 됐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 내가 한 달을 기억을 잃었답시고 쓰레기통에 처박은 게 잘못이지! 진작에 떼어놓을 걸 그랬어. 

옆에 있던 아서가 한숨을 내쉬며 내가 닿았던 부분을 탁탁 털어냈다. 

그의 눈썹이 서로 만날 지경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심기 불편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은발에 가까운 백금발이 빛에 반사돼 눈이 부셨다. 

붉은 눈동자에는 경멸이 가득 담겨있다.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눈빛이다. 

갑자기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달려들어서 기분이 더러워졌나 보다. 

근데 언니 인생 망칠 놈이 언니랑 한 편의 로맨스를 찍고 있으니 당연히 달려들 수밖에 없지! 음, 이. 일단 사과를 하자! 

“제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져버렸네요. 죄송…….”

“넌 뭐야……? 언제부터 서재가 하찮은 것들의 집합 장소가 된 거지? 누구의 허락을 받고 들어온 거야?”

말 끊는 거 봐라. 절단 신공이 장난 아니시네요. 어, 허락…… 받았을 걸요, 아마? 

사서가 쫓아내려다가 말기도 했고 이즐리가 숨바꼭질을 하자고 하기도 했으니까, 암묵적으로 받은 게 아닐까? 

그러나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꼴이야?”

이즐리가 오른편 책장에 손을 짚고 나타났다. 그의 눈이 세 사람을 차례로 훑었다. 

“얘 내 허락받고 들어왔어. 같이 서재에서 숨바꼭질을 하기로 했거든.”

“하, 서재에서, 숨바꼭질? 어린애도 아니고. 쪽팔리지도 않아?”

“어 안 쪽팔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미친 듯이 싸우기 시작한다. 이때를 기회라고 여겼는지, 언니가 후다닥 달려와서 날 일으켜주었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꼭 안았다. 왜 이렇게 말랐담. 언니는 안 그래도 말랐는데 저택에 들어온 이후 더 마른 기분이다. 분명 저 새끼들 때문이 틀림없어. 

“그나저나 다들 왜 여기 모여 있대? 나 몰래 파티라도 했나?”

“신경 끄고 꺼져.”

아서가 차갑게 일갈했다. 아서 놈은 귀족답지 않게 경박한 이즐리를 싫어했다. 반대로 아서는 엄청 귀족다워서 재수도 없고 싸가지도 하나도 없었다. 

아서는 이즐리를 싫어했고, 이즐리는 아서 놀리는 걸 좋아했고, 나는 뭐 그냥 두 놈 다 싫었다. 

꺼져. 사라져. 언니 인생에서 나가. 

이즐리는 그를 무시하며 유리아에게 다가갔다. 

나는 더 세게 언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언니가 잠깐 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 모습이 정말 토끼 같아서, 언니를 그렇게 부르는 이즐리의 심정을 이해할 뻔했다. 

“안녕 토끼야. 여기서 뭐 해?”

“안녕하세요, 도련님. 오세스 도련님의 부탁을 받아 책을 찾으러 왔어요.”

“아~ 형이? 형은 무슨 재미로 책을 읽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즐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즐리는 언니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 허리춤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언니한테 이렇게 할 수 있는 내가 부러운 거냐? 언니가 나만 좋아한다고 해서 푹찍푹 한 놈들이라 조금 무서워지려고 한다. 하지만 견제하기 위해서는 이게 최곤데. 

“무식한 너는 책의 즐거움을 모르겠지.”

아서가 톡 쏘아내자 이즐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알고 싶지는 않은데. 검 가지고 노는 것도 충분히 재밌거든.”

나는 눈치를 보며 언니를 밖으로 끌었다.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언니가 “책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렸다. 그런 거 나중에 찾아! 집착남 두 명이 있으니 두 배로 위험하단 말이야. 

그러나 망할 놈의 이즐리가 내 목덜미를 턱 잡고 놔주지 않았다. 장난기 가득한 붉은 눈동자가 시선으로 바닥을 쓸었다. 

“왜 책들이 이렇게 바닥에 널려 있는 거야?”

이즐리가 아서에게 책으로 블록 쌓기라도 했냐, 이게 네가 말한 즐거움이냐고 되물어서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게 나도 그거 좀 궁금했는데. 

아까는 언니랑 아서가 껴안고 있는 게 너무 충격적이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바닥에 책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책장은 이빨이 빠진 마냥 다섯 번째 줄에 있는 책들이 거의 대부분 빠져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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