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
안녕 망주식. 오늘도 잘생기기는 쓸데없이 잘생겼구나?
“좋은 아침이에요, 유리아.”
“네 좋은 아침이네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인사말밖에 안 했는데 벌써 핑크빛이다.
어, 왜인지 모르겠는데 굴러다니는 돌덩이가 된 기분인데?
“라일라도 반가워요.”
그때 오세스가 나를 보고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인사를 받기 싫었지만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며 맞인사 해줬다.
그는 이 저택의 도련님 중에서 가장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둘째가 망나니고 셋째가 싸가지라면, 첫째는 천사이니라.
괜히 하녀들이 오세스 곁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다. 환생 후 기억을 잃었던 나는 오세스가 언니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자 내 마음은 집 안을 돌아다니며 베개를 물어뜯는 비글처럼 들뜨기 시작했었다.
도련님이 언니한테 호감을 가졌나 봐! 둘이 진짜 잘 어울린다. 만약 언니가 오세스랑 결혼하면 어떨까? 귀족에다 부자니까, 매일매일이 행복할 거야.
잘생겼으니까 얼굴 뜯어먹을 맛도 있을 테고…… 라고 엊그제까지는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습니다만…….
다 꺼져. 울 언니 아무한테도 못 줘.
언니는 최소한 잘생기고 어리고 부자고 언니만 사랑해주고 인성 좋은 사람만 만나야 해. 넌 인성 면에서 아웃이다, 이 말씀이야.
나는 언니의 품에 파고들며 몰래 오세스를 노려봤다. 오세스는 굉장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지금까지 두 사람이 만나면 눈치껏 피해 다녔으니까! 아, 이 얼마나 호구 같은 행동이었단 말인가!
자리 안 피해 주니까 심기 불편하니? 많이 불편하길.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이요. 유리아한테 건네줄 게 있어서요.”
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아침이나 먹으러 가시지.
오세스가 언니한테 들고 있던 책을 건넸다. 언니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가요?”
“패션 관련 책이에요. 의상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다고 했잖아요.”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뭘요, 유리아는 항상 내 방을 깨끗이 청소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잖아요. 한 번쯤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걸요. 그냥 받아주세요.”
와, 하녀한테 저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네. 애초에 아랫사람한테 존댓말을 하는 윗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역시 한때 내가 남편으로 밀었던 개새끼답다. 나도 한 번쯤 이즐리한테 그런 말 들어보고 싶다.
음…… 생각해보니까 좀 아니다. 그 말을 듣게 되는 날은 내 제삿날일 테니까.
언니가 부담 백 퍼센트와 감동이 마구 뒤섞인 미소를 띠며 책으로 손을 뻗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드…….”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외치며 언니 대신 냅다 그 책을 받아 들었다. 썸? 연애 플래그? 모두 와작와작 씹어드릴게.
언니의 시선이 따갑다. 보나마나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잔소리하고 싶은 거겠지.
흥, 언젠가 나 덕분에 살았다고 말하는 날이 올걸? 언니는 매우 심기 불편해 보였지만 오세스 때문에 겨우겨우 참는 것 같았다.
오세스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심장이 설렘과 공포로 미친 듯이 뛰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도련님 아직 식사를 안 하셨다고 했죠? 얼른 가서 식사하셔야죠. 안 먹으면 기운이 안 나잖아요.”
저리 가라는 소리이시다. 하지만 오세스는 나갈 생각은 안 하고 자꾸 언니한테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우리가 나가는 수밖에.
나는 언니의 등을 쭉 밀며 문 쪽으로 보냈다.
“언니, 이제 옆방도, 옆 옆방도 청소해야지.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라라!”
나는 문을 닫고 후다닥 나갔다. 언니를 밀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너 왜 그래?”
“뭘?”
“도련님한테 예의 없는 행동을 하면 안 되잖아. 남에게 건네는 선물을 대신 받아 드는 건 좋지 않아. 그리고 대화를 끊는 것도 안 돼. 네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알았어. 다음부터는 안 그러면 되잖아.”
내가 툴툴대자 그녀의 눈꼬리가 휘었다.
“그래, 그럼 됐어.”
왜 언니의 웃는 얼굴을 보면 울컥하게 될까.
언니, 진짜 언니는 내가 지켜줄 거야. 알았지? 우리 이 거지 같은 저택에서 살아남자.
뒤에서 아주 작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세스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던 것이다! 오우 소름이야.
“같이 걷지 않을래요? 마침 식당도 같은 방향이니까요.”
“네, 좋…….”
나는 텁, 언니의 입을 틀어막았다.
“죄송해요. 저희 이쪽 방을 청소해야 해서.”
훠이훠이. 오세스가 아쉽다는 표정을 하곤 복도를 나아갔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열심히 해요, 유리아, 그리고…… 라일라.”
다시 잔소리가 시작되려고 한다. 나는 모르쇠 순진한 얼굴로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뭐? 우리 이 방 청소해야 하는 거 맞기는 하잖아? 난 잘못 없어! 혼낼 거야? 아니지? 입을 가리고 눈을 빛내며 올려다보자, 언니가 입술을 뻐금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언니의 하얀 뺨이 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아…… 정말, 귀여워…….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니.”
히히, 나는 빙그레 웃으며 눈앞에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리는 방을 청소하고 쉬고를 반복했다.
복도 청소는 뭐……. 다른 사람들이 대충 했겠지!
문득 고개를 올렸을 때, 벽 높은 곳에 매달린 시계는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새 밥 먹을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오늘 점심이 뭐였더라? 과일 샐러드랑 감자, 고기볶음이었던가? 고기가 들어가면 메뉴가 어떻든 좋았다.
식당으로 가서 고개를 홱홱 돌렸다.
찾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 있지? 아, 저기 있다. 아침에는 식욕이 없었던 모양인지 통 보이지 않던 얼굴이었다.
마침 옆자리가 비어 있어서 다행이다.
후다닥 그녀의 옆에 자리 잡았다. 재수 없는 레몬이 옆에 딱 달라붙어 있기는 해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지. 언니는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내 앞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그녀, 그러니까 하녀장은 샐러드를 우아하게 입안에 집어넣곤 냅킨으로 입을 톡톡 닦았다. 여우처럼 찢어진 눈이 나를 힐끔 훑었다. 나는 사람 좋게 히죽 웃었다.
“그래, 반갑구나.”
하녀가 쉽게 이직하는 방법이 두 가지쯤 있는데, 첫째가 하녀장의 마음을 사로잡아 추천장을 받는 것이요, 둘째가 다른 귀족에게 스카우트를 받는 것이다.
솔직히 두 번째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제부터 하녀장의 마음을 사로잡아볼 생각이었다.
제3의 길로 하녀를 포기하고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것도 있겠지만……. 역시 하녀만큼 꿀인 것도 없어서! 최대한 하녀로 취업할 수 있게 노력해볼 생각이다.
큼큼, 아무튼 하녀장님! 나의 귀여움과 아부로 살살 녹여드릴게요.
평소에 안 친한 상대가 갑자기 달려들면 재수 없게 보이기는 하겠지만, 꾸준히 아부하고 귀여움을 떨면 분명 좋은 쪽으로 생각이 변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녀는 권력욕 득실거리는 아부꾼을 싫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부가 싫었다면 옆에 레몬을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일도 못 하고 재수도 없지만 아부 떠는 것 하나만은 최고인 그녀를 말이다.
레몬이 나를 노려봤다. 뭐 인마. 나도 아부 좀 떨어보자.
평소라면 식탁 밑에서 다리를 걷어차거나 나를 데리고 밖으로 가서 좀 꺼지라며 바락바락 소리쳤을 텐데, 유난히 조용하다.
어제 나한테 된통 얻어맞아서 그런 걸까?
하녀장은 성실하고 일 처리가 완벽한 유리아 언니를 좋게 생각했고, 그래서인지 나도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음, 내가 레몬 쥐어팬 것도 알고 계시려나. 그럼 점수 좀 깎일 텐데.
“하녀장님, 팔찌가 정말 예뻐요. 어디서 사신 거예요?”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 첫 번째. 상대를 칭찬하라! 새 학기 교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친구 사귀기 아주 유용한 방법이지.
나는 하녀장의 팔찌를 눈으로 훑었다. 번쩍번쩍, 보라색 보석이 달린 것이 예쁘기도 하지. 손톱보다 더 작기는 하지만.
아마 모조 보석이 아닌 진짜 보석일 것이다. 하녀장의 월급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하녀장이 기분 좋게 웃었다.
“보는 눈이 있구나. 남편에게 결혼기념일 선물로 받은 거란다.”
“와~ 남편분이 정말 로맨틱하시네요.”
“후후, 나는 익숙해서 잘 모르겠지만……. 다들 그렇게 말하곤 하더구나.”
“팔찌가 예뻐서 그런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어우 내가 이 정도로 입을 잘 털 줄이야. 역시 뭔 일이든 해보기 전에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발가락까지 핥을 기세로 칭찬을 해대자 하녀장은 아주 흡족해 보였다.
그에 비하면 언니의 표정이 굉장히, 굉장히 묘해졌다.
‘우리 동생이 간신이라니’ 대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워워 언니,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세상에는 간신이 되어서라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때 레몬이 불쑥 튀어나왔다.
“무슨 소리니? 팔찌보단 하녀장님이 두 배는 더 아름다우시지.”
한 판 해보겠다 이거냐? 내가 째려보자 레몬이 흠칫거린다. 나한테 쫄았다는 게 쪽팔리는지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닌데? 열 배는 더 아름다우신데?”
“허! 백 배거든?”
“아님, 천 배임.”
“만 배.”
“1억 배.”
한 식탁에서 아부 대결이 열렸다.
사실 아부 대결인지 경매를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주변인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훑었다. 언니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하녀장과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라라."
언니가 “쉿” 하라는 듯 손가락을 길게 펴서 제 입에 대었다.
꽤 근접한 곳에 앉아 있던 에밀리 아주머니가 입 모양으로 미쳤냐고 물었다. 그리고 지퍼를 다는 시늉을 한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나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칭찬이 계속될수록 하녀장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던 것이다.
그녀의 손가락이 안으로 오그라든다. 너무 지나친 칭찬은 사람을 쪽팔리게 하는 법이다.
레몬은 지가 이긴 줄 알고 코웃음 치며 웃었다. 결국 레몬은 하녀장님께 닥치라는 말을 들었다.
하하, 꼴좋다!
식사가 끝난 다음에 언니는 나를 붙잡았다.
“라라, 너 정말 왜 그래? 갑자기 좀, 달라진 것 같아.”
“에이, 달라지기는 무슨.”
“하지만 평소같으면…….”
뒷말이 이어지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기억을 잃었을 때의 나는 도련님한테 그렇게 대하지도 않고, 하녀장한테 그런 식으로 다가가지도 않는다 이 말이지?
눈치가 빠르기도 하지.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언니의 등을 쭉 밀었다.
“이제 밥 다 먹었으니까 일하러 가야지!”
있는 힘을 다해 밀어내자, 언니는 한숨을 푹 쉬더니 “알겠어”라고 중얼거린다.
“언니, 질투 나니까 도련님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면 안 돼. 알았지? 응?”
나는 헤어지기 전에 그녀의 귓가에 이리 속삭여주었다.
언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오세스 방을 청소하러 갔다.
대충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난 진심이란 말이야.
질투보다는 ‘위험하니까 피해라’에 더 가깝겠지만…….
에밀리 아주머니가 지나가다가 내 앞에 턱 멈춰 섰다.
그녀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우아하게 웃었다. 나보고 더 높은 직급이라도 되고 싶냐고 묻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주머니는 “그럼 왜 그런 거니? 그거 말고는 이유가 없는데”하고 중얼거리더니 평소같이 새빨간 내 볼을 콕 찌르고 가버렸다.
나는 손으로 볼을 비비며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훑었다.
직급 상승이란 하녀장의 보조가 되거나, 도련님의 전속 하인이 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을 맡게 되는 것이다.
아뇨, 그딴 거 말고 추천장을 원하는 건데요.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