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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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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2

    - 라라, 그건 안될 것 같아. 돈도 많이 주고, 복지도 좋고……. 이렇게 좋은 직장을 언제 또 구해보겠니. 에밀리 아주머니가 우릴 위해서 노력해 주셨잖아. 마음에 들지 않아도 좀 버텨주면 안 될까?

    에밀리 아주머니는 부모님을 잃고 힘들게 살아가던 우리를 보살펴주시던 분이다. 

    그녀는 몰락 귀족이자 공작가에서 높은 직책을 맡은 하녀였다. 

    하녀 몇 명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 오자 냉큼 우리를 추천해 주셨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 저택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겠지.

    “나도 알아, 안단 말이야!”

    이불 속에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공작가의 하녀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얼마나 좋은 직장인지 안다. 

    하지만 끔찍한 미래가 그곳에 도사리고 있다면 이직 정도는 당연히 입에 담을 수 있지 않겠는가?

    칫, 언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당장이라도 미래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내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언니는 내 이마를 짚어본 다음에 의무실에 데려가려고 하겠지. 

    으아…… 진실을 아는 사람만 괴롭습니다! 

    나는 이불을 마구 발로 걷어찼다. 옷을 입고 있던 언니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옷 갈아입어.”

    “너도 슬슬 일어나야지. 일할 시간이잖아.”

    “으응…… 그렇지……. 귀찮아 죽겠다.”

    모든 고용인은 2인용 방을 사용한다. 집사나 하녀장 같은 높은 직책은 예외지만. 우리는 자매라서 그런지 아니면 입사 동기라서 그런지 같은 방을 쓰게 해 줬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옷장으로 다가갔다. 하녀복은 원피스 형태라서 그냥 몸 넣고 지퍼만 올리면 된다. 엄청 편하다는 말씀. 

    앞치마를 두르고 의기양양하게 섰다. 언니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코를 비틀었다. 

    “악! 왜 그래?!” 

    “그냥 속상해서.” 

    "……?"

    “우리 라라의 귀여운 얼굴이 다쳤잖아.” 

    “……흠 뭐, 그건 좀 슬픈 일이지.”

    고용인들의 아침은 엄청 일찍 시작된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옷 갈아입고 나가야 한다. 

    현관에 모여서 오늘도 힘내잡시고 단체로 “오늘도 공작가에 충성을!” 이 지랄 한 번 한 후에 밥 먹고 일하러 간다. 

    질린다 질려. 

    충성 맹세를 외친 후에 터덜터덜 식당으로 갔다. 아는 얼굴이나 친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면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나와 언니는 고용인들의 파도에 휩쓸려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레몬과 그의 무리이다. 

    “팍씨.” 

    뭘 꼬나봐. 집게손가락으로 내 눈을 가리킨 후 그들을 향해 콕콕 찔렀다.  레몬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다. 

    쟤네 얼굴 꼴 좀 보라지. 그러게 남의 욕은 왜 해? 

    그러다 언니한테 들켜서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다. 

    그래. 솔직히 공작가 복지 좋은 거 인정해. 생일이면 돈 더 주고, 무슨 일 있으면 며칠 쉬게 해 주고, 게다가 식당 밥이 이렇게 잘 나오는걸. 

    옥수수 수프와 고기가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그렇게 맛있어?”라며 웃는 언니를 보고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얼른 이직할 자리를 찾아봐야지 언니랑 나랑 둘 다 행복해질 텐데.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하고 순진한 언니, 그런 언니가 불행해진다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 거란 말이야. 

    식사를 마친 후 빗자루로 복도를 대충 쓸었다. 언니는 원작에서처럼 공작가의 장남인 오세스의 방 청소를 하고 여러 손님용 방을 청소하는 역할을, 나는 정원으로 통하는 복도 청소랑 둘째 도련님인 이즐리의 방을 청소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복도는 눈치 슬슬 보면서 대강 쓸고 이즐리의 방은 주로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청소했다. 좀 더럽다 싶으면 전속 하인이 와서 치워달라고 하기도 했고. 

    이제 아침 여덟아홉 시쯤 되었으니 도련놈들이 밥 먹으려고 식당으로 내려올 때가 됐다. 딱 이 시간에 청소해야지~

    도도도 2층으로 올라가서 두어 번 이즐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고리에 활짝 핀 장미가 그려진 팻말이 걸려있는 걸 보니 없는 게 확실했다. 문을 열고 방 안을 쭉 훑었다. 이불을 쫙 펴서 정리하고 베개를 가지런히 모아뒀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주워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다. 

    이즐리 망할 놈, 맨날 옷을 막 벗어둔단 말이야. 내가 방 청소 담당이라서 이렇게 구는 걸지도 모른다. 날 괴롭히려고! 

    이 세계에서 환생하기 전 봤던 양말을 뒤집어 벗어두는 남편 썰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오 짜증 나. 청소하기 싫어. 하필이면 왜 얘 방을 청소해야 한담? 

    이 자식은 언니를 감금할 쓰레기에다가 방해된다고 원작 속 나를 죽인 개새끼였다. 물론 세 명이 같이 죽이기는 했지만 막타를 친 건 이놈이었다. 

    RPG 게임에서도 흔히 막타 친 사람한테 경험치를 주지 않던가. 고로 날 진짜로 죽이는 건 이놈이다. 이놈! 

    옷걸이를 꺼내서 걸어야겠다. 툴툴대며 옷장으로 다가갔다. 그때, 무언가가 옷장 문을 열고 불쑥 튀어나왔다! 

    “끄악!” 

    나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와 심장 뱉을 뻔했어. 

    끙끙대며 고개를 들자 숨 막히게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보기 좋게 탄 피부에 붉은 눈동자, 곱슬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 이게 같은 사람인가 싶은 뚜렷한 이목구비…… 바로 이즐리 에머스였다. 

    멍 때리지 마, 라일라. 잘생겼다고 생각하지도 마! 

    “하하! 놀랐지?” 

    “네, 네……. 좀 많이요…….” 

    님이 왜 여깄어요. 지금은 밥 먹을 시간 아니에요? 

    “식사하러 가신 거 아니었어요?”

    “너 놀라게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정성스러운 개새끼로구나.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즐리는 장난을 좋아했다. 간장 넣은 커피를 마셔보라고 주거나, 시도 때도 없이 놀라게 하거나, 가짜 뱀 장난감 같은 걸 던져주거나 했다. 

    캡사이신 잔뜩 넣은 쿠키를 준 것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한 달 내내 얘한테 시달리다가 악몽까지 꿨다. 분명 전에 일하던 하녀도 이것 때문에 그만둔 게 틀림없다. 

    이즐리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내 얼굴을 바라봤다. 뭐, 뭐야 왜 저렇게 봐? 

    “뭐야! 반응이 왜 이렇게 시원찮아? 재미없게.”

    “그런가요……? 허허……”

    “너 놀리는 재미로 사는 거란 말이야.”

    그러세요? 참 뭣 같은 것으로 사시네. 홱 그 얼굴을 외면했다. 

    하기야 원래라면 빽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어야 했다. 

    “도련님 진짜 너무해요!” 하면서.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너라면 눈 홱 돌아서 나를 죽일 사람한테 까불 수 있겠습니까, 휴먼? 

    옷장에서 옷걸이를 꺼내서 옷들을 고정했다. 

    뺨이 왜 이렇게 따끔따끔한가 싶었는데, 이즐리가 아직도 나를 보고 있는 탓이었다.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 왼쪽 뺨을 콕콕 찔렀다. 

    “다쳤어?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졌네.”

    “아.”

    어제저녁에 레몬 무리랑 싸워서 다쳤지. 주먹으로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 하필이면 뺨 밑부분을 맞아서 입술도 터졌다. 그래서 언니가 의무실에서 밴드를 가져와서 붙여줬었지. 

    흥, 그래도 괜찮아. 내가 더 많이 때렸으니까! 이래 봬도 오트밀 거리 불주먹이라 불리던 몸이다. 

    그나저나 누구보고 못생긴 얼굴이란 말이야. 

    주관적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나는 평범하게 귀여운 얼굴이었다. 

    동그랗게 틀어 올린, 곱슬기 있는 연갈색 머리카락과 짙은 갈색 눈동자, 적당히 어두운 피부, 홍조증 때문에 맨날 빨개져 있는 볼, 오른쪽에 툭 튀어나온 덧니. 

    미인에 적합한 조합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귀엽다는 말씀. 

    이즐리가 궁금한 얼굴을 했다. 

    “뭐 하다가?”

    “그냥 좀…….”

    “그냥 좀?”

    언제 내 걱정했다고 물어댄대? 좋아하는 사람 동생에게 점수 좀 따 볼 생각인가? 얘가 다른 사람 눈치 보면서 사는 인간은 아닌데……. 

    에이 몰라! 엮어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튀자. 

    나는 재빨리 옷걸이를 걸고 나서 인사를 했다. 도망치듯 방 밖으로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문이 닫혔다. 

    오잉?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즐리의 손이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가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항상 웃고 다니는 인간이라 그런 얼굴이 익숙하지 않았다. 

    대, 대충 말했다고 화내는 거야? 갑자기?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곧 재수 없을 만큼 잘생긴 얼굴에 능글맞은 웃음이 피어오른다. 나는 후- 하고 안심의 한숨을 내뱉었다. 

    “왜 다쳤냐니까?”

    3:1로 싸워서 다쳤다고 말하기도 뭐하네. 

    “그냥 넘어졌어요.”

    “거짓말.”

    그가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쓸어내렸다. 

    멍청하게 그 얼굴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도 잠시, 뭔가 불안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후다닥 거울로 다가갔다. 이마에 검은 선이 쭉 그어져 있었다. 숯 칠을 한 것 같았다. 

    나는 소매로 마구 이마를 닦아냈다. 

    우씨 잘 안닦이잖아? 이거 하려고 나 막은 거였어! 저 망할 놈! 

    뒤를 돌아보자 이즐리의 입꼬리가 하늘을 찌르려고 했다. 진짜 여러 가지 의미로 찔러버리고 싶네. 물론 찔리는 건 내 쪽이겠지만. 

    원작에서 내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하…… 멍청이!”

    이즐리는 그대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마 식당에 가려는 거겠지. 

    그의 뒤통수에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닫힌 문에 가운뎃손가락을 날려주었다. 

    나가다 뒤로 자빠져서 코 깨져라. 

    큼큼, 이제 언니를 만나러 가자. 도련놈들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견제해야 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진도를 얼마나 나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연애 플래그가 보이면 잘근잘근 씹어주겠어.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거닐었다. 주변을 홱홱 둘러보며 언니를 찾았다. 

    어디서 청소하고 있을까. 

    꽃병을 닦고 있는 하인이 보인다. 

    콧잔등에 오도독 찍혀 있는 주근깨가 인상적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헨델? 

    “저기요, 유리아 언니 보셨어요?”

    “유리아? 저쪽 방을 청소하고 있던데.”

    “감사합니다!”

    복도 끝방을 청소하고 있다, 이거지? 

    총총 끝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언니가 풀어 젖혀진 커튼을 한 곳에 모아 묶고 있었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라라.”

    그 예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드리웠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생겼을까. 붉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자 나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우리 언니는 너무 예뻐. 너무 예뻐서 별별 놈들이 다 꼬이는 게 문제지만. 

    “무슨 일이야?”

    “언니 보고 싶어서 왔지!”

    “귀엽긴.”

    예스, 제가 바로 언니의 귀염둥이죠. 언니가 내 볼을 꼬집곤 쭈욱 늘렸다. 

    “근데 이마에 까만 게 묻은 거 같은데…….”

    “아, 이거…… 별거 아냐. 나중에 닦을게.”

    “이리 와 이 언니가 닦아줄게.”

    “아냐 아냐 괜찮아!”

    괜찮다고 말해도 언니는 소매에 물을 묻혀 내 이마를 닦아준다. 언니의 소매가 새까맣게 물들자 나는 슬퍼졌다. 일을 도와주겠다고 팔을 걷어들자 언니가 나를 만류했다. 

    그때, 방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에머스 공작가임을 의미하는 피처럼 붉은 눈이 곱게 휘었다. 구김살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정장이 그가 완벽주의자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자식은 내가 언니 신랑 후보로 밀던 오세스였다. 내가 말아먹은 주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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