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22/23)

Chapter 3




저택을 떠난 아리엘은 해가 지기 전에 임시로 은신처를 구했다.

쓰러졌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멀리 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아리엘은 어지럼증을 참으며 아무것도 없이 휑한 실내에 발을 들여놓았다.

“페더 윈드.”

작게 주문을 외우자 바람 원소들이 만든, 깃털같이 푹신한 침대가 생겨났다.

아리엘은 그곳에 주저앉아서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긴장해 있던 몸에서도 힘이 풀렸다.

잠시 쉬고 난 아리엘은 아까의 상황을 회상했다.

‘…….’

그녀는 수잔에게 마티어스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고, 마티어스에게 진실을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마티어스님. 어떻게 된 건지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마티어스는 침묵 끝에 허락했고, 노집사 알렌이 나서서 아리엘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알렌은 먼저 윤년의 블루문 때만 아기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러니 대공자님께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아리엘은 루시안이 놀란 이유를 천천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이를 죽이려 하는 루시안의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아리엘은 알렌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다가 아니죠, 알렌. 난 루시안이 왜 저러는지 알아야겠어요. 이유 없이 저러진 않을거라고 생각해요.”

“…….”

알렌은 다시 한번 아리엘에게 감복했다.

이렇게 속 깊은 분이 이제야 대공가에 들어오셨는데……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그의 눈이 축축한 슬픔을 담아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알렌은 괴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문을 들으신 적 있을 겁니다. 대공가 여인들은 다 요절한다는.”

아리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분명 사교계에는 그런 소문이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

설명을 이어가는 알렌의 목소리가 깊이 침잠했다.

“대대로 대공가는 보통 귀족가와 달리 후손이 생기는 간격이 길었습니다. 길게는 50년 넘게 아기씨가 태어나지 않은 적도 있었지요.”

그가 마티어스와 루시안, 아리엘이 그려진 가족 초상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선대 대공님들은 죽음을 원하기 전까진 후손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후손만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니까요.”

라카트옐에게 아버지와 아들이란 죽음을 위해 존재하는 관계.

그렇기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영역을 공유하고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후손을 위해서는 대공비가 필요했고, 대공가에 여인을 들여 아이를 보게 되면 그 여인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창백하게 질린 알렌의 입술이 천천히 말했다.

“수천 년 동안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

아리엘의 얼굴에서 놀란 기색을 읽은 알렌이 씁쓸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시다시피 라카트옐의 혈관에는 드래곤의 피가 흐르지요. 그것을 감당할 인간 여자는 없습니다.”

아리엘은 손으로 배를 감쌌다.

그럼 이 아이를 낳는다면 나도 죽게 되는 걸까……?

그녀는 알렌에게 물었다.

“정말로…… 죽나요?”

알렌이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편하실까요. 자연에서 새끼를 낳거나 알을 낳는다 해서 모체가 죽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는 고등한 존재인 라카트옐의 모체가 되기에 부족하지요. 그래서 모친 쪽의 특징은 조금도 물려줄 수 없는 것이고요.”

그런데 아이를 품고는 있으니…….

“인간 여인은 모체가 아니라 알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알렌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은 아이를 품고 영양을 주며 자라나게 하지만, 정작 아이가 태어나려면…….”

그 이후로 알렌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아리엘은 이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이 깨져야 하는 거네요. 즉…… 인간 여자는 죽는 거군요.”

알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리엘은 그제야 결혼식날 루시안과 황태자 디트리히가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억해. 절대로 아리엘라에게 아이가 생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너도 알텐데. 3년 후 아니면 7년 후에나 생각해볼 일이란 걸.’

윤년에만 생길 수 있는 라카트옐의 후손.

아이를 낳게되면 반드시 죽는 대공비들.

그 비밀을 아는 디트리히는 루시안에게 경고했을 것이고, 루시안 또한 윤년에는 주의를 기울이려 했을 것이다.

그때 마티어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루시안 녀석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리엘이 고개를 들자 마티어스가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가슴 아프더라도 아기를 포기해야 해.”

그녀는 눈앞이 막막해졌다.

아기를 살리려면 자신이 죽어야 하고, 자신이 살려면 아기가 죽어야 한다니.

어떤 말을 들어도 의연하려고 했는데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아리엘은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그녀는 다가온 마티어스의 옷자락을 붙잡고 간절히 말했다.

“윤년의 블루문이 아닌데도 생긴 아기니까, 태어나는 것도 다를지 모르잖아요. 제가, 제가 죽지 않을지도 모르잖아요…….”

기적처럼 찾아온 아기였다.

루시안의 이성이 약해졌던 그 첫날밤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그는 블루문 날에 자신을 안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 이유를 절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그런 일이 또 생긴다 해도 몸이 약한 그녀에게 아기가 생길 확률은 높지 않았다.

‘어쩌면 이 아이가 마지막일 텐데…….’

마티어스가 흐느끼는 아리엘을 감싸 안아주며 말했다.

“우린 널 사랑한다. 결국 너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

그때 다시 아리엘의 뱃속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아기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그녀에게 호소하는 것만 같았다.

아리엘은 울며 배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놔둔다면 몇분 후에 루시안이 돌아와서 이 애를 죽이겠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잠시의 시간.

이 아기와 아리엘 사이에 진짜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밝혀낼 수 있는 잠시의 시간만 있다면…….

아리엘은 마티어스를 바라보며 부탁했다.

“마티어스님, 도와주세요.”

마티어스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널 잃을 순 없다.”

아리엘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애타게 말했다.

“늘 저를 믿어주셨잖아요. 아무리 막막한 상황이어도 제 이야길 들어주셨잖아요. 이번에도 한 번만…….”

루시안의 눈을 피해 시간을 버는 걸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마티어스 뿐이었다.

아리엘은 그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루시안이 진정될 때까지만이라도…… 아기를 지키고 싶어요.”

“…….”

끝내 마티어스는 허락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어느 쪽이든 그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는 것 같았다.

다만 그는 아리엘이 짐을 싸는 것과 수잔이 아리엘을 위해 물건을 챙기는 것을 막지 않았다.

무언의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묵인으로 대공저를 떠날 수 있었다.

떠나기 직전, 그녀는 마티어스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약속할게요.”

반드시 돌아오겠노라고.

절대로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

회상을 끝낸 아리엘은 집을 나올 때 가지고 나온 물건들을 천천히 침대위에 풀어놓았다.

급하게 떠나야 했기에 가지고 나온 것들은 채 열 개도 되지 않았다.

늘 끼고 있는 결혼반지.

수잔이 급하게 챙겨준 식량과 물, 갈아입을 옷이 든 마법 파우치.

주니어를 부를 수 있는 보석.

그녀가 무방비할 때 지켜주고 돌봐줄 존재가 필요했기에 아리엘은 주니어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리엘은 양면 거울 모양의 마도구를 꺼내어 어루만졌다.

마도구에는 기억 마나가 저장한 루시안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루시안…….’

그녀는 루시안의 형상이 담긴 마도구를 품에 안았다.

루시안이 미운 말을 해서 상처받고 아팠지만, 그를 보지 않고는 한순간도 살 수가 없었다.

아리엘이 슬퍼하자 그녀의 감정에 감응한 주니어가 소환되어, 큰 몸으로 그녀를 둘러 감싸고 앉았다.

“주니어.”

아리엘은 주니어의 몸에 고개를 묻고 숨죽여 울었다.

따스한 불꽃 같은 주니어의 혀가 아리엘의 얼굴을 핥아주었다.

주니어를 통해 루시안의 모습을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아리엘이 도망 온 곳은 주니어와 루시안의 연결도 끊어지는 공간이었다.

“어떻게 하지, 주니어…….”

나 사실 너무 무서워.

아리엘은 자신이 한없이 약하게 느껴져 너무나 두려웠다.

그녀를 믿고 와준 이 아기를 지켜낼 수 없을까 봐.

아기를 지키더라도, 루시안과 마티어스를 다신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우리 엄마도 이렇게 무섭고 외로웠을까?’

뱃속에 품은 아기가 하루하루 자라날 때마다 많이 힘들고 두려웠을까?

세상에 혼자인 것만 같아 많이 슬펐을까……?

‘엄마,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보고 계시다면 와서 제 손 좀 잡아주세요.

한 번만 안아주세요.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세요…….

아리엘은 침대 위에 웅크려 누워서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불렀다.

어둠이 깊어질 때까지 오래오래 잠들지 못한 채.


* * *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아리엘은 가라앉은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제 자신이 마티어스에게 했던 말.

‘윤년의 블루문이 아닌데도 생긴 아기니까, 태어나는 것도 다를지 모르잖아요…….’

윤년이 아닌데도 라카트옐의 후손이 생긴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라카트옐의 역사는 인간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길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예외가 나타났다는 건…….

‘어떤 이유에서인진 모르겠지만, 라카트옐에게 절대적이었던 규칙이 깨진 게 분명해.’

규칙이 깨진 이유가 뭔지, 그것만 알아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자신과 아기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다면.

어쩌면 루시안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어떻게 알아내지?’

제국에서 라카트옐의 정체에 대한 정보는 극비였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대부분의 자료는 모두 대공가 기록고에 있었다.

지금 아리엘은 루시안에게서 도망 중이기에 그곳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대공가 기록고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다.

‘어차피 내가 알고 싶은 건 기록고에 없을 거야.’

만약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면 마티어스나 루시안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다못해 브루노어라도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전에 이런 사례가 있었다면 모를까, 이번이 처음이라 아무도 모를 게 분명해.’

생각을 전환해볼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핵심은 아기나 죽은 여인들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움직여야 해.’

벌써 하루가 지났으니 루시안이 자신을 찾고 있을 게 분명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생각보다 멀리 오지 못했기에, 서두르지 않으면 금방 그에게 잡힐 수도 있었다.

루시안은 그녀의 안위에 눈이 뒤집힌 상태니 그와 맞닥뜨린다면 큰일이었다.

지금은 어떤 말로도 그를 설득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리엘은 짐을 챙겨 은신처를 나섰다.

나가기 전, 그녀는 신중하게 가야 할 방향을 정했다.

라카트옐에 관한 정보에 해결책이 없다면 다른 쪽을 파 봐야지.

‘제국은 기본적으로 드래곤을 수호신으로 삼은 나라야.’

라카트옐과 드래곤을 연결시키는 사람이 없을 뿐, 제국을 세운 초대 드래곤에 대한 설화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드래곤에 대한 그 무수한 설화들 중에 실마리가 있지는 않을까?

‘마탑으로 가봐야겠어.’

마탑은 라카트옐 다음으로 많은 기록물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황실조차 마탑의 장서량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전해졌다.

갈 곳을 정한 아리엘은 후드가 달린 망토를 단단히 쓴 뒤, 추적을 할 수 없도록 자신에게 마법을 걸었다.

‘흔적이 드러나면 안 되니 주의 깊게 이동해야 해.’

곧장 가는 것보다 시일은 좀 더 걸리겠지만 지금은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아리엘은 이동할 땐 주니어조차 소환하지 않기로 했다.

주니어의 기운 때문에 루시안에게 위치를 들킬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제발, 이 길 끝에는 답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한편 아리엘이 떠났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루시안은 수하들을 모두 모아 수색조를 꾸렸다.

외부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리엘은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매우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녀가 공격을 하고자 한다면 소드 마스터를 제압할 정도고, 숨고자 한다면 원소인 물과 불, 땅과 바람이 최선을 다해 그녀를 숨겨줄 것이었다.

보통의 노력으로는 아리엘을 찾아낼 수 없다는 의미였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살벌한 주인의 명령에, 달 그림자는 사방으로 퍼져 아리엘의 흔적을 찾았다.

비가 내린 탓에 아리엘의 발자취를 찾기란 쉽지 않았고, 그마저도 어느 곳을 기점으로 완전히 끊겨있었다.

수색조에게 추적을 맡긴 루시안은 곧장 거울 호수로 향했다.

녹스 남작의 영지에 있는 거울 호수는 과거 라키엘이 자신의 눈 한쪽을 숨겨놓았던 곳이었다.

드래곤의 눈이 가진 힘 때문에 그 호수는 인간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

아리엘의 출생의 비밀과 타락이 아리엘을 납치했을 때 그녀의 위치를 알려준 것도 이 호수였다.

‘라카트옐의 저주를 푸는 방법까지 이것을 통해 알 수 있었지.’

이번에도 아리엘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지 몰랐다.

녹스 영지에 도착한 루시안은 마중 나온 녹스 남작에게 눈짓으로만 알은체를 하고 곧장 호수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녹스 남작이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루시안은 걸음을 옮기며 대꾸했다.

“말해라.”

“그 호수가…….”

이어진 녹스 남작의 말을 들은 루시안의 발이 우뚝 멈추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루시안의 기세에 눌린 녹스 남작이 땀을 뻘뻘 흘리며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거울 호수가…… 힘을 잃은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루시안은 녹스 남작의 말을 더는 듣지 않고 바로 호수로 향했다.

그가 호수 안에 있는 드래곤의 눈을 꺼내 흡수한 건 한참 전의 일이었다.

두 달 전쯤엔 아리엘도 호수 속에서 라키엘을 만났고, 호수의 능력을 경험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호수의 능력이 사라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도착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루시안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호수에 가서 물을 한 움큼 쥐어 본 그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제길.”

호숫물은 더 이상 그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아 거울처럼 잔잔하던 표면도 평범한 물처럼 결을 만들며 일렁였다.

“호수는 대공가 소유라 저희는 멀리서 지키기만 해서 호수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최근까지 몰랐습니다.”

녹스 남작의 일가는 거울 호수를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거울 호수를 사용하는 건 허락받지 못했기에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기만 했다.

“가신들 말로는 호수 표면의 잔잔함이 깨진 것은 두 달 전쯤부터라고 합니다.”

“그게 왜 지금에서야 내 귀에 들어오는 거지?”

얼음처럼 차가운 루시안의 일갈에 녹스 남작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 제가 보고를 늦게 받는 바람에…….”

“그것들은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군.”

분노를 눌러 담은 목소리로 씹어뱉은 루시안은 책임자들을 모조리 지하 감옥에 가둔 뒤 남작의 영지를 나섰다.

‘두 달 전이라…….’

두 달 전이라면 아리엘이 다녀간 직후였다.

아무래도 첫날밤 후 크림슨 하트가 그에게 완전히 흡수되면서 라카트옐의 블루문 저주가 풀렸고, 그에 따라 호수도 힘을 잃은 듯했다.

망할 라키엘 자식.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날 아리엘에게 비밀을 누설하고…….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거친 손짓으로 타이를 풀어낸 뒤 달 그림자를 소환했다.

“수색에 진척은?”

주인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수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직 대공자비님을 찾진 못했습니다. 다만…….”

“다만, 뭐.”

루시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대공자비님께서 이동하신 흔적을 찾았다고 합니다.”

보고를 들은 루시안은 목을 좌우로 비틀며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고 나갈 채비를 했다.

“거기로 이동한다.”


* * *


행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움직인 아리엘은 며칠 만에 마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속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다행히도 수색조는 자신이 만들어둔 거짓 흔적을 따라간 듯했다.

아리엘은 높이 솟은 마탑의 검은 첨탑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겨우겨우 여기까지 왔구나…….”

제국의 마탑은 아주 폐쇄적인 집단이었다.

마법사들에겐 열려있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닫혀있는 곳.

무수한 황금과 비밀이 들어가지만, 다시 나오지는 않는 곳.

아리엘이 가진 대공자비로서의 지위를 이용한다면 마탑에 정보를 의뢰하기란 쉬운 일일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이름과 신분을 밝힐 수 없어.’

그녀가 본명으로 의뢰를 하는 순간, 온갖 정보 길드는 물론, 루시안에게도 곧장 소식이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결국 아리엘은 마탑의 접수원에게 가명을 대며 의뢰비로 금화를 내밀었다.

그녀가 드래곤에 관련된 설화에 대한 정보를 의뢰하자, 접수원이 멈칫했다.

“그 사항은 민감한 내용이 섞여 있어서 탑주님의 허락이 필요한데요. 하필 지금 탑주님이 자리를 비우신 터라…….”

아리엘은 대답 없이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일단 부탑주님께 여쭤보겠습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말한 접수원이 텔레포트로 사라졌다.

그녀가 내민 금화의 양이 적지 않았기에 고객을 놓치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리엘은 언제든 자리를 뜰 준비를 하며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돌아온 접수원이 아리엘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곧 부탑주님이 오실 겁니다. 의뢰를 받아들이실지 말지는 그분 결정에 달렸습니다.”

빈방에서 부탑주를 기다리며 아리엘은 마탑의 수장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했다.

나잇 워커나 대공가 정보망을 이용하면 알아낼 순 있겠지만 여태까진 궁금한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평생 마탑에 와보기나 했을지 의문이었다.

‘마탑주는 베일에 싸인 노인이라고 들었는데…… 부탑주는 누구일까?’

그때 문이 열리며 로브를 입은 남자 하나가 걸어들어왔다.

아리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

뜻밖에도 눈앞에 있는 건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리엘과 마주친 상대도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히스……?”

접수원이 말한 부탑주의 정체는 다름 아닌 히스였다.

아리엘의 소꿉친구이자 한 스승 밑에서 마법을 배운 동기.

올해로 열여덟이 된 히스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키가 조금 더 컸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곱상하던 선이 꽤 거칠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흉터는 그가 지난 반년간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뭐, 뭐야, 너 여기에 어떻게…….”

히스가 말을 더듬으며 아리엘에게 다가왔다.

“내가 지금 꿈꾸는 건 아니지?”

그의 물음에 아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히스의 얼굴을 보니 반가움과 기쁨, 안도감이 밀려왔다.

먼 타지에서 가족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녀도 히스 못지않게 놀랐기에 묻고 싶은게 많았다.

“부탑주라니…… 히스, 어떻게 된 거야?”

아리엘의 질문에 히스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사실 시험의 탑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됐어.”

이어진 히스의 이야기는 이랬다.

대공가를 떠나 마탑에 들어온 그는 반년 동안 시험의 탑을 올랐다.

고생 끝에 탑의 끝까지 오른 히스는 마탑주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부탑주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마탑에서 부탑주란, 마탑주의 후계자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어린 나이로 엄청난 성취를 이룬 셈이었다.

“탑을 다 오르다니 힘들었겠네. 다친 데는 없어?”

아리엘이 걱정스레 묻자 히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작은 상처들 뿐이야. 다치고 싶어도 다칠 수가 없었지. 너와…… 약속했으니까. 무사히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겠다고.”

말을 마친 뒤 가만히 마주 보던 두 소년 소녀는 한팔로 가볍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이 전해졌다.

“이렇게 보니까 너무 반갑다, 히스.”

“……그래.”

포옹이 끝난 뒤 히스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근데 너는 어떻게 된 거야? 드래곤에 관한 걸 찾고 있다면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히스의 시선이 아리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야위었어?”

아리엘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쓰러졌던 이후로 그녀는 식욕을 잃어 잘 먹지 못했다.

수잔이나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면 입덧 증상이란 걸 알아차리고 도와줬겠지만, 아리엘은 이유도 모른 채 끼니를 넘기기만 했다.

아기를 가진 채로 쫓기는 중이고 제대로 먹질 못하니 며칠 사이 살이 제법 빠진 터였다.

아리엘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드래곤에 대한 자료가 필요해. 그리고 하루 정도 숨어있을 곳도.”

히스가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예리하게 물었다.

“설마 너, 라카트옐의 눈을 피해서 온 거야?”

아리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히스는 정말, 이럴 때만 직감이 날카롭다니까.

숨길 수 있는 부분도 아니라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 해서.”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아리엘은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안았지만 히스에게 아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런 일까지 털어놔서 그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엘이 계속 입을 다물자 히스가 그녀를 의자로 이끌어 앉혔다.

“……좋아. 드래곤에 대한 자료는 원래 신분이 보증된 사람만 볼 수 있지만, 지금은 내가 책임자니까 그냥 내줄게. 원한다면 자료를 옮겨 적어도 돼.”

“고마워, 히스.”

안도하는 아리엘의 얼굴을 심란한 듯 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루 숨어있을 곳이라…….”

고민하는 기색이던 히스가 말을 이었다.

“여기 마탑엔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많아. 원하는 게 지식이든, 돈이든, 힘이든.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어. 라카트옐에게서 도망치고 있다면 더더욱.”

사방에 눈과 귀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리엘에 대한 정보를 나쁘게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만, 한 군데. 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 있긴 해.”

“어디인데……?”

“시험의 탑 꼭대기에 쉼터가 하나 있어. 머무르는 사람은 없고.”

히스가 초조한 듯 제 머리를 흩뜨렸다.

“시험의 탑은 각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게 되어있어. 라카트옐이라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한 번 끝까지 올라갔던 사람은 어디로든 갈 수 있지.”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은……?

“탑은 나를 기억하고 있으니 내가 쉼터까지 데려다줄게. 혹시 대공자가 오더라도 탑을 오르는데 시간이 걸릴 테니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아리엘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여태 그녀는 임시로 만든 이공간에서 하루씩 머무르며 이동해왔다.

편히 쉴 수 있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고마워. 정말…….”

안도하는 아리엘을 바라보는 히스의 얼굴은 어두웠다.

옛날부터 라카트옐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였으니, 아리엘이 대공가에서 나쁜 일을 당했다고 추측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한참 말이 없던 히스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무슨 일인지 말 안 해줄 거야?”

“…….”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걸 알아.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건 심각한 일이라는 거잖아.”

오랜 친구라서 그런지 히스는 아리엘의 마음을 쉽게 읽어냈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에게 더는 대답해줄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됐어.”

아리엘은 애써 말을 아꼈다.

히스에겐 이 정도 도움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리엘은 히스가 건네준 드래곤에 대한 두루마리 자료를 잔뜩 가지고 숙소로 올라갔다.

숙소에 혼자 남은 그녀는 밤새도록 자료를 읽고 필요한 것을 추려냈다.

새벽쯤이 되어서야 침대에 누운 아리엘은 탑루의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여름의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지금 아리엘의 머릿속을 채우는 건 온통 루시안뿐이었다.

‘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자 불쑥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 가슴이 아파왔다.

루시안의 체온, 향기, 그녀를 만지던 손길, 입맞춤 모든 것이 그리웠다.

‘나도 모르게 익숙해졌었나 봐요.’

매일 밤 당신 품에서 잠드는 일에.

아침에 일어나면 잠기운을 가져가는 달콤한 입맞춤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가만히 안고 있는 일에.

때론 루시안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아서 힘들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너무나 그리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건 항상 그의 차가운 얼굴이었다.

‘한 번도 바란 적 없어. 우리 사이엔 아기가 있어선 안 돼.’

이제는 그가 왜 아기를 바라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루시안이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아이를 바라진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아마 자신이 아기를 지키다가 죽게 된다면…….

루시안은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그녀의 안위만을 위하는 그를 저버리고 도망친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겠지.

‘하지만…… 루시안, 이 아기는 내 아기이기도 하지만, 당신 아기이기도 한걸요.’

아마 나는 닮지 않고 당신만을 닮았을.

그런 아기를 내가 어떻게 죽일 수 있나요……?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겠어요?

온기를 찾아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봤지만 루시안이 없는 침상은 그저 차갑기만 했다.

아리엘은 눈을 꼭 감은 채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루시안, 당신은 나보고 마음껏 원망하라고 했지만…….’

원망은 조금만 하고 잊어버릴게요.

어쩌면 너무 그리워서, 원망이 잘 안 되나 봐요.


* * *


마탑에 루시안과 기사들이 들이닥친 건 아리엘이 잠든 지 겨우 네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군대를 끌고 온 루시안은 다짜고짜 마탑을 뒤집어놓으며 온 일대를 수색했다.

“뭐 하는 짓입니까!”

부탑주인 히스가 나갔을 땐 이미 마탑 전체가 혼란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제국에서 권력의 상징은 세 개.

라카트옐 대공가, 황실, 그리고 마탑이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멋대로 침범한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반말로 항의했겠지만 지금 히스는 마탑을 대표하는 위치라 이를 악물고 격식을 갖추었다.

“아무리 대공가라도 허가 없이 이곳을 뒤질 순 없습니다.”

“…….”

검을 든 루시안이 대꾸 없이 히스를 내려다보았다.

이성을 반쯤 빼놓은 듯한 그 싸늘한 시선에 히스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아리엘라는.”

히스는 루시안의 기세를 견디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모르는 일 입니…… 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히스는 목이 잡혀 벽에 처박혔다.

루시안의 눈과 마주친 그는 대공자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큭, 으윽…….”

“그 애가 네 놈을 만나러 온 게 아니란 걸 알아. 하지만 주제넘게 그 앨 감싸면 얘기가 달라지지.”

숨이 막히면서도 히스는 루시안의 말에 확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치 아직도 숨기고 있는 아리엘에 대한 연정을 들킨 것만 같아서.

마침내 루시안이 손의 힘을 풀자 히스는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었다.

“아리엘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그 애가 그 집에서 도망치게 만든 겁니까?”

꽤나 거슬리게 긁었는데도 루시안의 표정엔 균열 하나 없었다.

그의 신경은 지금 온통 다른 데로 향해있는 것 같았다.

그때 루시안의 수하 하나가 오더니 그에게 보고했다.

“마법사들만 들어갈 수 있는 시험의 탑을 제외하곤 모두 뒤졌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시험의 탑이라…….”

입속말로 뇌까린 루시안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히스를 향해 명령했다.

“시험의 탑을 열어라.”

히스는 반항적으로 웃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마탑이 사라지는 걸 보고 싶은가 보군.”

낮게 깔린 루시안의 목소리와 서늘한 무표정은 사신을 만난 듯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인간이 아니라 버러지를 보는 듯한 시선.

본능적인 두려움을 간신히 이겨내며 히스는 한 글자씩 눌러 말했다.

“마탑을 멸망시킨다 해도, 시험의 탑 위에 닿을 순 없을 겁니다. 그 탑을 지은 건 초대 드래곤 라키엘로 알려져 있으니.”

다시 말해 드래곤의 힘으로 지어진 것이라, 라카트옐이라해도 그 법칙을 거스를 순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가볍게 눈살을 찌푸린 루시안이 검에 새까만 마나를 둘렀다.

마나에서 느껴지는 살기와 짙은 어두움에 히스는 숨이 막혔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오르지.”

히스는 루시안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어제 무언갈 숨기고 있는 것 같던 아리엘의 태도부터, 어딘가 미쳐버린 듯한 대공자의 모습까지.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은 상황이었다.

루시안은 수하들을 내버려 두고 시험의 탑으로 걸어 들어갔다.

히스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시험의 탑에 입성한 루시안은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두 베어 넘기며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꼭대기에 도달한 것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은 후였다.

누군가 시험의 탑의 정상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가 마탑 전체에 울리자 마법사들은 모두 얼이 빠져버렸다.

‘시험의 탑이 정복됐다.’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시험의 탑 꼭대기에 오르는 것은 일생의 목표였다.

마탑이 생긴 이래 시험의 탑의 정상까지 오른 마법사는 극소수였고, 반년에 걸쳐 정상에 오른 히스 역시 탑 안에서는 백 년 만에 나온 천재로 유명했다.

장애물 없이 꼭대기까지 그냥 걸어 올라가도 한 달은 족히 걸리는 곳이 시험의 탑이었다.

그런데 라카트옐 대공자가 그것을 몇 분 만에 주파해버린 것이다.

마탑은 외부인에게 침범당한 것보다 이 일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한편, 탑을 오른 루시안은 곧장 정상에 있는 쉼터로 향했다.

정상에 도착하자, 아리엘의 흔적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피가 끓어올랐다.

아리엘을 추적하면서 이토록 근접하게 온 것은 처음이었다.

루시안은 그녀의 흔적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곳을 찾아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잠겨있었지만, 그가 힘을 주자 한 번에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루시안이 마주한 것은…….

“……아리엘라.”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이었다.

갓 이곳을 떠난 듯, 아직도 아리엘의 온기와 향기가 남아있는.

절망한 채 서 있던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녀가 누웠던 침상에 고개를 처박았다.

“…….”

지독한 감정이 루시안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그는 아리엘의 향기를 게걸스레 삼키며 분노한 고성을 내질렀다.

“아리엘라……!”

이대로 그녀를 잃을 순 없었다.

설사 이 일로 아리엘이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다고 한다 해도 그녀가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아이를 죽이고 아리엘에게서 꺼낸 뒤엔…….

‘그래. 그땐 나도 네 용서를 바라지 않을 테니까.’

탑을 내려간 루시안은 히스의 멱살을 잡아 내던졌다.

마법을 발동할 틈도 없이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던져지면서 내상을 입은 히스는 피 섞인 기침을 뱉은 뒤 루시안을 노려보았다.

곧이어 루시안의 검이 목에 닿았다.

“……무슨 일이길래 이러는 거야?”

격식을 집어치운 히스의 물음에 루시안이 이를 갈며 대꾸했다.

“아리엘에게 아이가 생겼다.”

“……!”

히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히스가 사납게 되물었다.

“그런데 왜 그 애가 널 피해 도망쳐야 하지?”

루시안이 당장이라도 벨 듯이 살기를 흘리며 말했다.

“아이를 낳으면 아리엘은 죽게 된다. 하지만 아리엘은 내가 그것을 죽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지.”

히스는 충격을 받아 동작을 멈추었다.

루시안이 잔혹한 시선으로 히스를 내려다보았다.

“넌 방금 그 일을 도운 거다.”

한참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마침내 기세를 가라앉힌 루시안이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그가 마치 스스로에게 새기듯이 허공에 중얼거렸다.

“지금은…… 칼에 피를 묻힐 수 없어. 혹여나 내 업보 때문에 아리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히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항상 강하고 오만하기만 한 남자가 이토록 부서지기 쉬운 모습이라니.

루시안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아리엘을 향한 지독하고 깊은 감정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이 빚은 나중에 받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시안은 수하들과 마탑을 떠났다.

이 일로 제국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대공자의 아이를 가진 대공자비가 실종되어서 라카트옐 가문이 그녀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아리엘의 행적에 대해 제보를 하는 자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 보상으로 내걸렸고, 제국 곳곳에 라카트옐의 군사들이 수색을 나섰다.

이대로라면 아리엘이 발견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 * *


“아리엘이 실종됐다고?!”

소문을 듣고 가장 놀란 것은 아리엘의 친구인 다이아나와 세실이었다.

더구나 아이까지 가진 채 실종됐다는 이야기에, 그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대공가로 달려왔다.

대공가의 문은 외부인에게 굳건히 닫혀있었지만 다이아나는 '방문을 거절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마티어스와 루시안을 만나는 건 불가능했기에 두 친구가 만난 것은 하녀장 수잔이었다.

그 사이 수척해진 수잔이 다이아나와 세실에게 차를 내주며 그간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아기 마님은 실종되시지 않았어요.”

“그럼 왜 그런 소문이 난 겁니까.”

세실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잠시 감정을 가다듬은 수잔이 입을 열었다.

“라카트옐가에는 비밀이 있었지요. 여태 저조차도 몰랐던……. 대공가의 핏줄을 낳는 산모는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대공자님은 아기를 원하지 않으셨지만…….”

수잔이 슬픈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예기치 않게 아기가 생겼고, 대공자님은 아리엘님의 안전을 위해 아기를 없애겠다고 하셨어요.”

두 친구는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막았다.

“그럼, 설마…… 아리엘이 자기 의지로 사라졌다는 말인가요? 아기를 살리기 위해?”

수잔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다이아나와 세실은 충격을 받은 채 침묵했다.

일찌감치 내막을 알게 된 태후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앓아누워 궁밖을 나가지 않고 있었다.

한참 만에 다이아나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리엘은 어째서 우리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요?”

수잔이 다이아나의 손을 꼭 잡았다.

“가장 먼저 친구들 집을 수색할 걸 아셨을 테니까요. 지금 대공자님은 매우 예민하신 상태라 휘말렸다간 두 분이 큰일을 당하실 수도 있어요.”

“그래도…….”

말끝을 흐리던 다이아나가 문득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 그런데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아리엘이 죽을 수도 있는데 어서 찾아야지요!”

괴로운 얼굴로 앉아있던 세실이 다이아나의 말을 받았다.

“다이아나, 그 말은 아리엘의 동의 없이 아이를 죽여도 된다는 뜻인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세실.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생각은 다르다.”

세실의 말에 다이아나가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잖아. 그렇다면 아리엘의 생각도 꺾을 수 있어야 해. 아리엘이 무엇보다도 먼저니까. 나는…….”

다이아나가 결국 왈칵 눈물을 쏟았다.

“나는 아리엘 없이는 살 수 없어!”

세실이 다이아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알아. 나도 아리엘 없인 살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아리엘이 아기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억지로 아이를 없애선 안 된다고 생각해.”

“안 돼. 그럼, 흐윽, 아리엘이 죽는다잖아……!”

“강제로 아기를 죽이면 아리엘이 큰 상처를 받을 거다. 마음의 상처는 가끔 사람을 정말로 죽이기도 해.”

“흐어엉, 그럼 어떡해, 내 아리엘…….”

귀족가에서 자라난 다이아나와 세실은 주변 여자들을 본 경험이 많았다.

아이를 유산하거나 사고로 잃은 귀족 부인들이 오랫동안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다.

다이아나의 어머니도 다이아나를 낳기 전에 잃은 아기들의 기일을 아직도 기억하며 슬퍼하곤 했다.

그 슬픔 때문에 시들어가다 마음의 병으로 죽은 여자들도 있었다.

만약 아리엘이 잡혀 와 억지로 아기를 뺏긴다면 아리엘도 그렇게 마음의 병을 얻을까 봐 세실은 두려웠다.

다이아나가 흐느끼며 말했다.

“어째서 아리엘에게는 이런 힘든 일들만 생기는지 모르겠어…….”

아리엘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세실도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대체 아리엘은 어디에 있는 걸까. 밖에서 혼자 고생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다이아나와 세실은 항상 통신 마도구를 켜놓고 혹시나 아리엘이 연락을 취해오지는 않을까 기다렸다.

그들은 아리엘이 무사하기만을 빌며 매일 밤을 지새웠다.


* * *


간발의 차로 마탑에서 도망친 아리엘은 멀리까지 온 후에야 겨우 숨을 돌렸다.

루시안이 찾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마탑에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부디 이번 일 때문에 히스가 곤란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당분간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면 안 되겠어.’

아리엘은 한동안 이공간에만 숨어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직접 만든 이공간 안에 작은 오두막을 마련하고, 시종마 주니어에게 의지해서 매일을 버텨나갔다.

혹시나 모를 추적을 피해 이공간의 위치도 계속 옮기며 아리엘은 마탑에서 가지고 나온 방대한 자료들을 파고들었다.

‘루시안, 나 열심히 하고 있어요. 당신에게 돌아가기 위해…….’

그러니까 나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이 아기도……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납작하기만 했던 배는 조금씩 아기의 존재를 알리며 부풀기 시작했다.

입덧 때문에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 몸이 많이 약해진 아리엘은 자주 쉬어줘야 했다.

시종마인 주니어는 아리엘을 위해 추울 땐 따스하게 해주었고 더울 땐 시원하게 해주었다.

아리엘이 먹을 물과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주니어가 없었다면 아기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주니어에게선 루시안의 기운이 느껴졌기에, 아리엘은 그것을 의지해서 가장 힘든 시간들을 버텨냈다.

아기가 힘들어하는 것 같을 때면 그녀는 루시안과 있었던 행복한 일들을 아기에게 말해주며 안심시켰다.

사실 그건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달래는 것과 같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아기가 아리엘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느 때와 같은 밤.

아리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또 그 꿈이야.”

요즘은 자주 똑같은 꿈을 꿨다.

루시안이 그녀에게 돌아오라고 말하는 꿈이었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꿈에서 그는 늘 그렇게 애원했다.

그들의 사랑을 저버리지 말라고,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아리엘은 꿈속에서 온 힘을 다해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 소리가 루시안에게는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듣지 못하는 루시안을 앞에 두고 슬퍼하다가 잠에서 깨는 일의 반복이었다.

침대에 가만히 웅크려 앉은 아리엘은 어둠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

아리엘은 루시안이 아기와 자신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루시안이라고 답할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보다 그를 더욱 사랑했으므로.

‘하지만…….’

아리엘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배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이 애는 곧 나인걸요.’

신비롭고 기묘하게도 그 일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짧은 시간 동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아리엘 안에 싹터버린 것이다.

아기가 그녀 안에 자리 잡은 뒤, 아리엘이 느끼기에 아기와 자신 사이의 경계는 대단히 흐려져서 더 이상 두 개로 나누기 어렵게 되었다.

둘은 한 덩어리이고, 억지로 찢어놓으면 둘 다 죽는 한 생명체 같았다.

그렇게 아기는 그녀가 되고, 아리엘은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는 것만큼 간절히 아기를 보호하게 되었다.

‘나도 이런 게 너무 이상해요.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루시안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도 그게 맞는데, 아기가 죽는다는 생각만 해도 너무 괴로워.

똑똑하게 나만 생각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루시안, 미안해요…….

아리엘은 주니어에게 기대어 마음의 고통을 삼켰다.

‘이런 게 엄마인 걸까……?’

엄마라는 게 이런 건가요? 우리 엄마도…… 나한테 이랬을까요?

이해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리엘이 아기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리엘은 루시안을 자신과 아기보다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루시안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아기가 죽으면 그녀도 죽을 것이고, 그러면 영영 루시안을 아프게 할 것을 알기에.


* * *


아리엘은 서부 협곡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곳에는 제국이 세워지던 당시의 유적이 많았다.

초대 황제와 함께 나라를 세웠던 라키엘의 흔적이 남아있기에,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가는 여정 동안 아리엘은 들키지 않기 위해 만전을 기했다.

일부러 험한 길만 골라서 지났고, 쉴 때는 작정하고 이공간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런 아리엘을 다른 사람들이 찾기란 어려웠다.

‘루시안이라 해도 방법이 없겠지…….’

하지만 여전히 어딜 가나 감시가 삼엄해서 아리엘은 늘 긴장하며 지냈다.

서부로 이동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집을 떠나온 지 넉 달, 아기가 생긴 지도 벌써 6개월을 넘어서고 있었다.

누군가 아리엘의 모습을 봤다면 유령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좋지 않았다.

끝나지 않는 입덧 때문에 비쩍 마른 몸, 창백한 얼굴, 신분을 감추기 위한 초라한 행색.

뼈만 남은 꼴로 움직이는 그녀는 곧 죽을 사람처럼 아파 보였다.

“……주니어, 난 괜찮아.”

시종마 주니어는 아리엘 곁을 맴돌며 줄곧 음식이며 물을 들이밀었다.

아리엘은 죽지 않을 만큼만 겨우 삼키고 음식을 밀어냈다.

“더 먹으면 토할 것 같아서 그래. 이따가 좀 더 먹을게.”

온종일 이동한 아리엘은 작은 마을 근처의 숲에 이공간을 열고 그 안에 숨어들었다.

요즘 그녀는 아기에게 매일 동화 하나씩을 이야기해주며 밤을 보내고 있었다.

아리엘은 어릴 적 달튼이 선물해줬던 수십 권의 동화책에 담긴 이야기들을 차례대로 기억에서 되살렸다.

“그래서, 꼬마 소녀는 할아버지와 살게 됐는데 산양젖 치즈를 만들며…….”


배에 손을 올린 채 조곤조곤 동화를 읊어주던 아리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추억을 회상했다.

라카트옐 저택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녀는 영양가 높은 음식에 적응하느라 자주 배앓이를 했다.

그때마다 수잔은 아리엘에게 계란으로 만든 부드럽고 맛있는 오믈렛을 해주곤 했다.

다른 음식은 다 주방장 홀슨에게 맡기던 수잔이 유일하게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해주는 음식이 그 오믈렛이었다.

수잔의 오믈렛을 떠올리자, 갑자기 아리엘의 배가 꼬르륵 울었다.

“……!”

아리엘은 방금 자신이 식욕을 느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한 번도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유독 그 오믈렛이 너무나 먹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구할 수가 없어.’

집에서 나올 때 수잔이 챙겨준, 보관마법이 걸린 식량은 아직도 풍족했지만 수잔이 갓 만든 따뜻한 오믈렛은 구할 방법이 없었다.

아리엘은 애써 먹고 싶다는 생각을 외면하며 침대에 몸을 누였다.

그럴수록 수잔이 만들어줬던 오믈렛 생각은 더욱 간절해지기만 했다.

‘이상해. 나 원래 배고픔 같은 거 잘 참는데…….’

회귀 전에는 더 심한 굶주림도 맛보았다.

심지어 아리엘은 지금 식량이 부족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잠들 수 없을 만큼 그 음식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몇 시간 동안 뒤척거린 아리엘은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기가…… 먹고 싶어 하나 봐.’

이런 적이 처음이라 몰랐지만 이렇게까지 느낌이 강렬한 걸 보니 아기와 관련된 일인 것 같았다.

‘미안해, 엄마가 몰랐어.’

그냥 내가 참으면 되는 건 줄 알았어.

그런 걸 구할 상황이 아니라서…….

아기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자 아리엘은 조금 무모한 용기를 냈다.

그녀는 가까이 있는 마을에 가서 재료를 구해오기로 마음먹었다.

“주니어, 너는 여길 지키고 있어. 네가 나오면 루시안에게 신호가 갈 수도 있으니까 나 혼자 다녀올게.”

주니어가 반대하는 듯 낑낑거렸다.

이를 세우지 않고 아리엘의 옷자락을 물고 당기는 모습이, 꼭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주니어. 금방 돌아올 거야.”

아리엘은 마을에 나가 달걀을 포함한 오믈렛 재료를 사서 돌아왔다.

재료를 판 여관주인 여자는 낯선 사람인 아리엘을 경계하면서도 그녀의 부른 배를 보더니 순순히 음식을 팔아주었다.

다시 무사히 이공간으로 돌아온 아리엘은 마법을 이용해 화덕을 만들었다.

오랜만에 소환된 불 원소가 춤을 추며 불을 활활 지폈다.

“아가야 조금만 기다려.”

제법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사실 아리엘은 오믈렛을 한 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회귀 전에는 오믈렛을 먹어 보지 못했고 회귀 후엔 마티어스의 과보호 때문에 주방에 출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믈렛은 그리 어려운 요리가 아니었다.

‘달걀에 생크림과 다진 재료를 넣고 잘 익히기만 하면 되는걸.’

아리엘이 원소들을 불러내자 물 원소가 재료를 잘라주었고, 바람 원소가 재료를 알맞게 섞어주었다.

불 원소는 오믈렛이 탐난다는 듯이 불꽃을 날름거렸지만 주니어가 으르렁거리자 시무룩해져 물러났다.

아리엘은 재료와 섞인 달걀물을 조리도구에 붓고, 열심히 뒤집으며 오믈렛을 익혔다.

불 조절이 쉽지 않아서 몇 번은 태우거나 덜 익어 망쳤지만 결국엔 그럴싸한 오믈렛을 만들어냈다.

“다 됐다…….”

아리엘은 스스로에게 감격해서 조그맣게 말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잘 익은 오믈렛을 한 입 떠 입에 넣었다.

수잔이 해주던 부드럽고 충만한 맛을 기대하며.

그런데, 입에 가득 넣고 오물오물 씹던 아리엘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그녀는 힘없이 스푼을 내려놓았다.

“……이 맛이 아니야.”

그녀가 만든 오믈렛은 너무 익힌 탓에 좀 질겼지만 평범한 맛에 속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오믈렛에 대한 갈망은 조금도 채워주지 못했다.

‘수잔이 만든 맛이 아닌걸.’

내가 먹고 싶은 건 정확히 그때 그 맛인데…….

아리엘은 당혹을 느끼며 다시 오믈렛을 만들었다.

만들고 한 입 먹고, 또다시 만들고 한 입 더 먹어봤지만 어떻게 해도 그 맛을 재현해 낼 수가 없었다.

결국 재료를 다 써버릴 때까지 아리엘은 원하는 오믈렛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망연자실한 채 엉망이 된 오두막을 바라보던 그녀는 불쑥 서러워졌다.

설움이 북받쳐서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견뎌냈다.

‘이까짓 것에 울면 어떡해, 아리엘. 너도 이제 엄마잖아. 참아야지.’

아리엘은 불 원소가 날름대는 화덕에 재료 쓰레기들과 못 먹게 된 오믈렛을 밀어 넣었다.

물 원소가 나타나 그녀의 손과 주위를 깨끗이 닦아주었다.

아리엘은 우두커니 앉아서 자신이 망친 오믈렛이 불에 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뱃속에서는 오믈렛이 먹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아가야, 미안. 엄마가 못나서…….’

결국, 서러운 울음이 터져버렸다.

수잔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수잔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텐데.

다정한 손길, 괜찮다는 토닥임, 애정 어린 입맞춤이 너무도 절박하게 필요했다.

“엄마…….”

아리엘은 그녀의 얼굴에 콧잔등을 들이미는 주니어에게도 반응하지 않고 혼자 울었다.

지금만큼은 주니어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혼란스럽고 괴로운데 그녀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나 아팠다.

아리엘은 오랜만에 소리도 죽이지 않고 엉엉 울었다. 갓난아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포륵.

갑자기 뱃속에서 거품이 터지는 것 같은 낯선 움직임이 찾아왔다.

“……?”

깜짝 놀란 아리엘은 울던 것도 멈추고 숨을 색색 내쉬었다.

방금…… 뭐였지?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라 그녀는 눈만 깜박거리며 헤맸다.

짧게 지나가 버리긴 했지만 분명 느꼈다.

그때 다시 비슷한 느낌이 배에서 느껴졌다. 포르르.

“……!”

아리엘은 놀란 마음에 배에 손을 얹었다.

혹시 아가야, 너니?

그러자 대답하듯 다시 한번 무언가 뱃속에서 움직였다.

아주 작고 연약한 움직임이었다.

조그만 기포가 터지는 것 같은 작은 두드림.

“…….”

그 순간 놀랍게도, 아리엘은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날 위로하려는 거야?”

아리엘은 웅크린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텅 빈 것 같이 허전하고 아프던 가슴이 따스하게 차올랐다.

……네 말이 맞아. 난 혼자가 아닌데.

그녀는 서둘러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냈다.

울어서 미안해. 너도 많이 슬펐지?

“안 울게. 이제 안 울어.”

아리엘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주니어의 갈기를 쓰다듬어주며 아기에게 속삭였다.

“엄마는 괜찮아. 안심해, 아가야. 우린 꼭 루시안에게 돌아갈 거야.”

그녀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배를 꼭 끌어안았다.

조금 진정이 되자 아기에게 하고 싶은 말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그랬어. 네 피가 너무 강력하고 엄마는 너무 약해서, 내가 널 지키지 못할 거래.”

아리엘은 서글프게 웃었다.

“그리고 어쩌면…… 너한테 나는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

언젠가 루시안에게 그의 모친에 대해 물었을 때, 그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에겐 어머니가 있지만, 없다고.

“너 같은 라카트옐에겐 엄마가 엄마로 여겨지지 않을지도 몰라. 나를 닮을 수도 없고, 그저 공간을 빌려서 태어날 뿐이니까.”

아리엘은 조심스레 배 위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너와 이러고 있으면…… 꼭 너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이 느껴져. 네가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

그녀는 목에 걸린 것 같은 덩어리를 애써 삼켰다.

“이런 걸 느끼면서 내가 선택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다 알아본 뒤에, 아무 방법도 없고 널 포기해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해도…….

“내가 널 포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아리엘은 마지막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아마 난 못할 것 같아.


* * *


아기가 뱃속에서 움직인 이후로, 아리엘이 아기에게 말을 거는 횟수도 부쩍 늘어났다.

그전에는 그냥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면 이젠 정말로 듣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하게 되었다.

계속 조금씩 이동하면서 아리엘은 연구에 몰두했다.

‘드래곤 설화는 대부분 건국 이야기라, 겉으로 보기에 나랑 아기의 일과는 상관이 없어 보여.’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만 있어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아리엘의 임신으로 인해 라카트옐에게 절대적이었던 법칙은 깨져버렸다.

그녀의 생각으론, 그 법칙이 깨진 시점은 루시안이 ‘완전한 드래곤’으로 각성한 이후였다.

그렇다면 완전한 드래곤이었던 라키엘을 통해 새로 바뀐 법칙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라키엘은 루시안 이전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드래곤이야. 초대 어둠의 드래곤.’

드래곤이란 걸 제외하고, 라키엘과 루시안 사이의 공통점을 찾을 순 없을까?

아리엘은 알고 있는 사실들을 하나씩 되짚어 올라갔다.

타락을 처리하기 위해 내려온 어둠, 라키엘.

그는 인간들 중 가장 큰 빛을 가진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제국을 세웠다고 전해졌다.

'큰 빛을 가진 사람'은 초대 황제를 가리켰다.

초대 황제는 가장 정순하고 위대한 성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것 외에는 이상할 정도로 알려진 게 없어.’

성별도, 이름도…….

2대 황제인 알란미스 황제부터는 역사책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초대 황제만이 신화 속 인물처럼 모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라고는, 그가 죽은 뒤 라키엘이 자신의 껍데기인 라카트옐을 남겨두고 신계로 돌아갔다는 사실 뿐이었다.

‘자신의 후손을 지켜달라는 초대 황제의 부탁에 따라서 한 일이었지.’

인간을 벌레같이 여기는 드래곤이 나라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자신의 일부를 남겨 후손을 지켜주기까지 했다니.

초대 황제와 라키엘은 생각보다 가까운 사이였던 듯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죽은 뒤에 땅을 떠나기까지 한 걸 보면…….’

“……!”

순간 아리엘의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맞아. 그 소녀.’

무의식 속에서 라키엘과 만났을 때, 라키엘은 말했었다.

그가 사랑했던 소녀가 있었노라고.

나이가 많이 들어 죽은 그 여인의 무덤 앞에서 우는 자신의 모습도 보여주었었다.

드디어 아리엘은 라키엘과 루시안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해냈다.

‘사랑.’

그래.

루시안은 드래곤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건 내가 처음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어.’

라키엘도 사랑했던 소녀가 있었다고 했잖아.

과거와 이번 일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것 하나뿐이었다.

그 소녀와 라키엘. 그리고 아리엘과 루시안.

‘인간을 사랑한 드래곤.’

드디어 실마리를 찾아낸 아리엘은 라키엘에서 그 소녀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 소녀는 누구였을까?’

라키엘이 보여준 소녀는 금발에 녹안을 가진 맑은 느낌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읽은 적이 없어.’

초대 황제가 죽고, 라키엘은 신계로 돌아갔다고 했으니 아마도 소녀는 그 당시의 사람일 것이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아리엘의 마음속에 문득 의문이 솟았다.

‘혹시 그 소녀의 정체가…… 베일에 싸인 초대 황제 아니었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긴 했다.

초대 황제가 여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2대 황제부터 지금의 우라노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자였기 때문에.

‘직접 확인해봐야 해.’

아리엘이 향하고 있는 서부 협곡에는 마물을 베고 나라의 터를 잡은 건국 위인들의 무덤이 곳곳에 있었다.

‘초대 황제의 무덤도 거기에 있다고 했지.’

아리엘은 서부 협곡에서 초대 황제의 무덤에 가장 먼저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라키엘은 반드시 그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을 거야.’

아리엘은 조금 더 힘을 내서 발걸음을 옮겼다.


* * *


아리엘이 사라진지 반년이 넘은 지금.

제국에는 루시안 대공자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그가 식음을 전폐하고 정신 나간 모습으로 수색대를 이끌고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대공자와 그의 군대는 제국 전체를 종횡무진하며 이잡듯 뒤졌다.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돌 하나, 나뭇가지 하나도 원래 모습대로 남지 못한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돌았다.

“마법사들을 끌고 다니면서 이공간이 있을 만한 곳은 죄다 마력 감지를 한대.”

“수상한 건 먼지 한 톨도 남겨두지 않는다지?”

루시안에게는 '제국의 사신(死神)'이라는 별칭이 하나 더 붙게 되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수색을 하던 루시안에게 제보 하나가 들어왔다.

서부 쪽의 작은 마을에서 후드 로브를 입은 작은 이방인이 음식을 사 갔다는 이야기였다.

“워낙 마른 체형이라 아기를 가진 듯한 배가 더 눈에 띄었답니다.”

메마른 눈동자를 한 루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거기로 간다.”


* * *


점점 좁혀들어오는 수색망을 피해, 아리엘은 겨우 서부 협곡에 이르렀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나서인지 그때의 유적은 모두 낡고 풍화된 상태였다.

그녀는 모든 유적들을 조사한 끝에, 결국 초대 황제의 무덤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찾았다.’

다른 것과 달리 초대 황제의 무덤만은 어제 갓 만들어진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마법의 흔적이 느껴졌다.

아리엘도 황족이기에 이 무덤은 그녀에게 먼 선조의 무덤인 셈이었다.

아리엘은 그 앞에서 잠시 묵념한 뒤 조심스레 다가갔다.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은 얇게 먼지가 앉아있었다.

입으로 후후 먼지를 불어내자,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드러났다.


[영생을 얻을 수 있었으되, 인간으로서 죽음을 택한 자.]


‘…….’

그곳에는 비석 주인의 이름도, 성도 나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비석에 적힌 글귀의 한 단어가 아리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생.'’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사람은 죽을 때 가장 중요한 말을 비석에 남기기에, 허튼 말인 것 같진 않았다.

아리엘은 자신이 읽은 단어의 뜻을 곰곰이 곱씹었다.

‘영생이라.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그럴 수 있었을까?’

성력 때문일까? 아니, 그건 아닌듯했다.

성력을 가진 역대 황제들도 인간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모두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라키엘이 사랑했던 소녀도 시간이 흘러 나이 들어 죽었다고 했지.’

그럼 초대 황제와 소녀는 동일 인물이 아닌 건가…….

아리엘은 왠지 기운이 빠져 무덤가에 주저앉았다.

이 추측이 틀렸다면 라키엘이 사랑했던 소녀를 찾기란 어려울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아예 찾을 수 없었으니까.

아리엘은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했다.

‘내가 라키엘이었다면.’

사랑한 사람을 어디에 묻었을까?

이곳 서부 협곡에는 초대 황제의 무덤 외에는 마법의 힘이 느껴지는 유적이 없었다.

하지만 라키엘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떠나보냈을 리가 없는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아리엘은 반짝 눈을 떴다.

‘잠시만.’

인간의 힘으로 영생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힘이라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키엘이 사랑하는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있을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혹시…… 그녀에게 영생을 줄 방법이 있었지만 그녀가 거절한 건 아닐까?’

그래서 비석에 저런 문구가 적힌 것이 아닐까.

아리엘은 몸을 일으켜, 마법의 힘이 느껴지는 비석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직감이 강하게 말했다.

이곳이 라키엘이 사랑했던 소녀가 잠든 곳이 맞다고.

아리엘은 손가락으로 비석의 글자 부분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 순간,

파아아-!

“앗……!”

아리엘의 손이 닿자, 비석이 그녀의 마나에 반응하여 강한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빛이 잦아들었을 때.

아리엘은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처절한 작별인사였다.


[네가 죽고 나서야 나는 마음껏 우는구나.

인간으로 살다 인간으로 죽고 싶다는 너 때문에 나는 여태 울지도 못하였다.

내 눈물이 너를 영원히 살게 할까 두렵다 하였지.


이제 만족하느냐. 인간의 딸아.

나를 울게 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인 네가 떠나고, 홀로 남은 나를 보아라.

억겁을 사는 생명체인 내가 흙으로 스러질 너 때문에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이제 널 보지 못하는 이 두 눈은 쓸모가 없구나.

사랑할 상대를 잃은 이 심장도 쓸모가 없구나.

나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지 못하겠다.


하지만 네게 약속했지. 네 후손들을 타락과 마수로부터 지켜주겠다고.

쓸모없어진 두 눈과 심장을 뽑아 흩어놓고, 내 피를 가진 육신을 남겨 약속을 지키마.

흩어놓은 것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 숨겨놓겠다.


언젠가 시간이 되어, 너와 닮은 마음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내 심장은 그 아이에게 깃들 것이다.]


아리엘은 비석의 문구에서 느껴지는 슬픔에 압도되어 한참을 멈춰있었다.

‘정말로 여기가…… 그녀의 무덤이구나.’

겨우 슬픔에서 헤어나오자 문구 중 하나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내 눈물이 너를 영원히 살게 할까 두렵다 하였지.]


라키엘의 눈물이 그녀를 영원히 살게 한다고……?

전부 다 이해할 순 없지만 라키엘의 눈물에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라키엘의 눈물은 곧 드래곤의 눈물.’

이제 아리엘의 생각은 타락과의 마지막 전투 날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 의식을 잃은 그녀의 크림슨 하트가 루시안에게 돌아갔고, 아리엘은 기적적으로 살아났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났던 걸까?’

그녀의 죽음은 예정된 일이었다.

성년이 된 크림슨 하트가 죽으면 그 심장이 주인에게로 돌아간다는 예언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죽지 않았지. 어떻게? ……왜?’

아리엘의 심장이 루시안에게 돌아간 일과 그녀가 깨어난 일.

그 사이에는 딱 한 가지 사건밖에 없었다.

‘루시안이 눈물을 흘린 것.’

혹시 라키엘의 눈물에 무언가 힘이 있었다면.

그래서 라키엘 이후 처음으로 완성된 드래곤인 루시안의 눈물에도 똑같이 그 힘이 존재했다면.

‘루시안의 눈물이 가진 힘이 그때 내게 작용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내가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때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

여기서 너무 오랜 시간을 머물렀단 걸 깨달은 아리엘은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머지않아 곧 수색대와 맞닥뜨렸다.

수색대와 아리엘 사이의 거리는 몇십 미터 남짓이었다.

‘어떡해. 잡히겠어.’

뒤로 천천히 물러나면서, 그녀는 고민했다.

‘아기에게 무리가 갈까봐 마나가 많이 소모되는 마법은 쓸 수 없는데…….’

홑몸이었다면 광역 마법을 써서 수색대를 기절시키고 빠져나갔겠지만 지금 그것은 무리였다.

마법사가 포함된 수색조라면 텔레포트도 추적당할 위험이 높았다.

‘일단 물리적으로 거리를 벌려야…….’

아리엘이 몸을 돌려 도망치려는 순간이었다.

낯익은 목소리가 잔인하게 그녀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드디어 찾았네.”

그녀의 발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버렸다.


* * *


아리엘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뛰었다.

저 목소리를 얼마나 오랫동안 듣지 못했는지는 상관없었다.

그저 들은 순간 심장이 반응할 뿐이었다.

백 년 만에 듣는다 해도 그녀는 그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천천히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맞은편에는 겨울을 닮은 아름다운 남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서 있었다.

“…….”

루시안이다.

그를 본 순간, 어지럽고 꿈꾸는 것 같은 기분이 아리엘을 사로잡았다.

다른 것은 다 흐릿해지고 그만 또렷하게 보였다.

왜 저렇게 마른 걸까.

아무리 날 쫓았어도, 쫓기는 나보다는 잘 지냈어야 하잖아요.

근데 왜…….

“……이제 끝났어.”

인내가 고갈된 목소리로 루시안이 천천히 눌러 말했다.

“아리엘라. 이리 와.”

차가운 바람이 아리엘의 몸을 파고들었다.

집을 떠날 때 한여름이었던 날씨는 이제 어느덧 겨울의 초입에 다다라 있었다.

아리엘은 털 망토를 여미며 양팔로 자신의 배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아직 증명할 만큼 다 알아내지 못했는데…… 어떡해.’

빨리 이 자리를 떠나야 함에도, 이성을 배반한 발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루시안이야. 내 루시안이 저기 바로 앞에 있어.

핏속으로 달콤한 유혹이 번졌다.

그냥 그에게 달려가서 안기고, 끌어안고 그의 얼굴에 뺨을 비비며 용서를 구하고, 그의 사랑을 원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럼 이 아기는…… 루시안 손에 죽게 되겠지.

다시는 배 안에서 움직이는 이 연약한 박동을 느낄 수 없겠지.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건…… 싫어. 그것만은 안 돼.

아리엘은 두려워하며 루시안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럴 수 없어요.”

아기를 가지기 전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루시안에게 너무나 달려가고 싶었지만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지금은 갈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아기를 낳아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가야 해.’

루시안을 상대로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아리엘은 다시 한번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물러난 것에 자극을 받았는지 멈춰있던 루시안이 아리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 텔레포트를 할 준비를 했다.

그때 고함 같은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마.”

그 목소리가 너무나 절박하고 약하게 들려서 아리엘은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몇십 걸음 바깥에 멈춘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리고 있다는 걸 이 정도 거리에서도 알 수 있었다.

“반년이 넘었어. 널 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 버틴 게.”

그때서야 아리엘은 루시안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침착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텅 빈 그의 눈 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은 상상도 못할 만큼 어두웠다.

“이제 끝났어.”

루시안이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난 더는, 못 버텨.”

루시안은 자기가 짓씹은 입안에서 피 맛을 느끼며 아리엘을 응시했다.

아리엘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달려오면서도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녀를 죽일 뱃속의 괴물을 죽여 없애겠다는 생각.

그 이후에 아이를 잃은 아리엘이 그를 저주하며 떠나더라도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아리엘의 생명이 꺼지지 않은 것만으로 족하며.

하지만 여기서 아리엘을 찾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가 달려온 것은 그 애새끼 때문이 아니라 아리엘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저 자신이 그녀를 원해서, 그녀가 없이는 더 이상 숨쉴 수가 없어서 미친 듯이 찾아 헤맸다는 것을.

끝이라는 것은 그녀를 향한 자신의 인내심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아리엘 없이 한계까지 버텨온 그 자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루시안은 자신의 손에 든 검을 풀어 던지고, 무장을 해제했다.

“……빌라면 빌게.”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굳어버렸다.

진창에 빠진 듯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게. 네가 하란 대로 다 할 테니까…….”

말하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다시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마.”

그 순간 아리엘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르르.

애써 가둬놓은 감정이 둑이 터진 것처럼 흘러나왔다.

꽁꽁 싸매어 놓은 것들.

억지로 덮어둔 것들.

스스로 가둬놓은 것들.

아리엘은 울음을 터뜨렸고, 끝내 도망가지 못했다.

한참 기다려주던 루시안이 천천히 다가와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리엘은 소리 내 울며 참았던 말을 쏟아놓았다.

“보고 싶었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 루시안…….”

루시안의 손이 눈물범벅인 아리엘의 얼굴을 더듬고,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어루만졌다.

살이 빠져서 패인 볼을 만져보던 그가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꼴이 이게 뭐야, 대체…….”

문득 아리엘은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살이 빠질 대로 빠진 몸에 생기를 잃은 얼굴.

루시안이 자신을 못나졌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가 가라고 해도 절대 가지 않을 테니까.

“안 갈 거예요, 안 떨어질 거야…….”

아리엘은 욕심껏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던 루시안이 그녀를 떼어내고는 으르렁거렸다.

“바보같은 소리 마. 누가 보내기라도 한대?”

그가 사나운 기세로 입을 맞춰왔다.

입술이 열리고 침범한 그가 애끓는 소리를 내며 그녀를 삼켰다.

그 입맞춤을 받으며, 아리엘은 루시안 없이 자신이 지낸 시간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숨쉬고 살았을까, 루시안 없이.

지금 누군가가 루시안과 억지로 떨어지라고 한다면 죽을 것만 같았다.

아마 분명 죽어버릴 거야.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떨어질 줄 모르고 하나가 되어 있었다.


* * *


아리엘은 울다 결국 탈진해서 루시안의 품에 늘어졌다.

그녀를 안아든 루시안은 수색대를 돌려보내고 아리엘에게 말했다.

“일단 쉬자. 지내던 곳으로 가.”

아리엘이 부르자, 주니어가 소환되어 그녀가 지내던 처소로 루시안을 안내했다.

아리엘만 열 수 있는 이공간 속의 작은 오두막이었다.

그 안을 둘러본 루시안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의 상상보다 훨씬 더 좁고 초라한 곳이었다.

루시안은 겨우 남자 하나 눕기에 적당한 작은 침대 위에 올라가, 아리엘을 제 몸 위에 기대게 했다.

지친 아리엘이 하느작거리며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말없이 한참동안 그는 아리엘의 머리카락과 얼굴, 손끝, 발목, 자신의 손이 닿는 곳은 어디든 어루만지기만 했다.

“…….”

배가 눈에 띄게 부풀었음에도 아리엘은 예전보다 더 가볍게 느껴졌다.

루시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지낸 거야? 왜 이렇게 말랐어?”

퉁퉁 부은 눈을 겨우 깜박이던 아리엘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몸에서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래서 잘 못 먹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은 입속으로 망할 새끼,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그녀의 눈, 코, 입에 번갈아 입을 맞추며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하려던 아리엘은 문득 얼마 전에 먹지 못했던 오믈렛을 떠올렸다.

“……그거.”

“뭐든 말해 봐.”

왠지 부끄러워서 아리엘은 발갛게 얼굴을 붉혔다.

“수잔이 만든 오믈렛…….”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시안이 몸을 일으켰다.

“기다려. 금방 가져올 테니까.”

하지만 아리엘은 얼른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오믈렛이 먹고 싶긴 했지만 루시안과 함께 있는 것만큼 간절한 건 아니었다.

“가지 마요. 루시안은 가지 마…….”

결국 루시안은 수하 하나를 시켜 수잔에게 전갈을 보내게 했다.

“아리엘라가 어렸을 때 먹었던 오믈렛을 먹고 싶어 한다고 전해.”

소식을 전해 들은 수잔은 아리엘이 무사하다는 것에 한바탕 눈물 바람을 한 후에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으로 나섰다.

사실 오믈렛을 만드는 방법은 평범했지만, 아리엘이 '어렸을 때' 먹은 오믈렛은 조금 달랐다.

수잔은 찬장 깊숙이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아기 마님…….”

그 당시, 학대받아 또래보다 훨씬 작고 말랐던 아리엘을 위해 수잔은 오믈렛에다 아기들이 먹는 영양 시럽을 한 스푼씩 넣곤 했다.

영양 시럽은 맛이 약하고 특유의 향만 조금 있어서, 아기 마님이 이런 것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다.

수잔은 영양 시럽을 넣은 오믈렛을 한솥 만들어 마법 바구니에 포장해 보냈다.

오믈렛이 도착하자 루시안은 직접 아리엘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아리엘은 루시안이 덜어주는 오믈렛을 조심스레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

오물오물 씹던 아리엘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루시안은 불안함에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왜. 맛이 없어?”

그때 아리엘이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그녀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려놓고 황급히 물었다.

“왜 울어. 뭐가 잘못됐어? 치울까?”

아리엘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그녀가 울먹이며 작게 말했다.

“이거 정말 먹고 싶었는데,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몇 번이나 망쳤는데…… 너무 맛있어서…….”

“…….”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참 그녀를 응시하던 루시안이 고개를 떨궜다.

“넌 정말, 날 죽고 싶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그가 아리엘의 눈 밑에 대롱대롱 달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직도 난 네 배 속에 있는 것을 반기지 않고, 널 설득할 생각뿐이지만…… 네게 이따위 음식 하나 해주지 못한 건 지독히도 비참하군.”

루시안은 고통에 잠겨 그녀를 끌어안았다.

“너 대체 뭐야. 날 어디까지 떨어지게 만들어야 만족할 거야. 네 앞에서 난 보통 인간 남자들보다도 못한 존재가 된다고.”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 더 죽고 싶어지니까.”

아리엘에게 오믈렛 한 접시를 다 먹인 루시안은 그녀를 토닥여서 재웠다.

침대는 좁고 불편하기 그지없었지만 고요히 잠든 아리엘을 보고 있자니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러고 있어도 상관없게 느껴졌다.

아리엘은 자다가 몇 번이고 깨어나서는 그가 사라지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다시 잠들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녀가 깊이 잠들자, 루시안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오두막 안에는 놀라울 정도로 물건이 없었다.

아리엘이 이곳을 새로운 집으로 삼은 게 아니라 임시 피난처로 여겼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던 루시안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침대 맡에 놓여있는, 아리엘이 만든 마도구였다.

그리고 그 마도구 위에 떠올라 있는 것은 몇 개월 전의 자신의 얼굴…….

“…….”

그것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루시안은 시종마를 소환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나타난 주니어가 흘러내린 아리엘의 이불을 물고 끌어 올려주었다.

루시안은 눈빛으로만 주니어에게 명령했다.

여태까지의 일을 모두 토해내라고.

주니어가 루시안에게 돌아가 흡수되자, 주니어가 기억하는 그간의 일들이 모두 루시안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밤새도록 루시안은 그것을 보며 어둠을 지새웠다.


* * *


아침에 깨어난 아리엘은 뒤척거리며 노곤함을 만끽했다.

이런 게 얼마 만이었더라?

매일 감각을 곤두세우고, 일찍 일어나 은신처를 옮기는 생활이 몇 달째였다.

그런데 내가 어제는 왜 긴장을 풀고 잠들었었지?

천천히 눈꺼풀을 열자 눈앞에 꿈에 그리던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아, 루시안이다.

‘혹시 이거 꿈인가?’

아리엘은 반대편에 누워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루시안의 얼굴에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손끝에 따뜻한 살갗이 닿자 현실감이 찾아왔다.


“루시안…….”

잠자코 보고 있던 루시안이 고개를 들어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입술선을 입술로 더듬으며 그가 속삭였다.

“아침부터 그렇게 보는 건 반칙이지.”

멍하니 그의 키스를 받고 있던 아리엘은 갑작스레 차오르는 감정에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를 받아 안은 그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내 병아리가 아기가 다 됐네.”

“아니거든요…….”

민망함에 웅얼웅얼 반박하면서도 아리엘은 그의 가슴팍에 뺨을 기댔다.

분명 몇 달간 루시안을 피해 도망갔었는데도, 루시안을 다시 만나자 혼자 감당하던 것들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아리엘이 포옹을 풀자 루시안이 옆의 탁상에서 뭔가를 집어 들고 보여주었다.

“내 얼굴을 가지고 도망갔던데, 너.”

그의 손에 들린, 루시안의 얼굴이 담긴 마도구를 본 아리엘의 볼이 새빨개졌다.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손 마디로 쓸어내린 루시안이 말했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으면서.”

“그건…….”

“확실히 날 말려 죽일 셈이었던 거지, 내 잔인한 아내는.”

짓궂음이 섞인 말투로 말한 그가 아리엘을 안아 일으켜주었다.

“밥 먹자.”

어느새 오두막 안의 작은 나무 테이블 위에는 루시안이 가져온 진수성찬으로 가득했다.

음식을 덮었던 은제 뚜껑을 열자 아직도 김이 나는 음식들이 가득 나타났다.

하지만 아리엘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떨궜다.

“아마 난 못 먹을 거예요.”

수잔이 챙겨줬던 식량 바구니엔 아직도 음식이 많았다.

하지만 어제 먹었던 오믈렛을 제외하고는, 아기가 거부해서 대부분의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일단 먹어 봐.”

루시안이 붙어 앉아 그녀에게 식기를 쥐여주었다.

고소하게 튀긴 파스닙 무더기와 촉촉하게 익힌 닭고기, 버터 조각을 얹은 하얀 밀빵과 반숙으로 익힌 계란.

아리엘은 침을 꼴깍 삼킨 뒤 파스닙 칩을 입에 넣었다.

하지만 그 맛을 느낄 새도 없이 구역감이 몰려왔다.

“뱉어도 돼.”

아리엘이 음식을 뱉는 걸 도와준 루시안이 그녀의 배를 노려보았다.

아기 때문에 아리엘이 음식을 먹지 못하는 걸 알기에 화가 난 듯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말했다.

“이리 와.”

아리엘을 당겨서 제 무릎에 앉힌 루시안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왜 이러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아내 몸에 둥지를 틀었으면 밥은 먹도록 해야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서늘하게 뱉은 그가 아리엘에게 말했다.

“이 방법이 통할지도 몰라. 몇 번이나 이걸로 위기를 넘겼으니까.”

그리고 루시안은 자기 마나를 끄집어내, 닿은 곳을 통해서 아리엘의 몸에 흘려 넣었다.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서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식욕이 돌아오는 감각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다시 앞에 놓인 음식에 손을 뻗었다.

반숙 노른자에 밀빵을 적셔 입에 넣고, 긴장하며 기다렸다.

“…….”

맙소사. 아무렇지도 않잖아.

아리엘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루시안이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번에도 통했나 보네.”

매일 음식을 거부하던 아기가 웬일로 잠잠했다.

아리엘은 걱정하며 이것저것 음식을 맛보았지만 루시안의 마나가 몸에 흐르고 있어서인지 먹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신기해요. 어떻게 한 거예요, 루시안?”

“그냥…….”

루시안이 정성껏 바삭한 베이컨을 잘라 입에 넣어주며 대답했다.

“겁을 좀 줬달까.”

누구를?

아리엘은 묻고 싶었지만 입안에 가득한 베이컨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많이 먹어. 이거 다 먹어야 해.”

“이걸, 다요?”

“지금 네 모습으로 봐선 앞으로 삼 개월은 이렇게 여섯 끼씩 먹어야 할 판이야.”

그 정도는 아닌데…….

작아진 위장 때문에 많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아리엘은 의욕적으로 음식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루시안이 말을 꺼냈다.

“돌아가자. 이런 데서 지내게 할 순 없어.”

아리엘은 당황해서 배를 끌어안았다.

그녀도 간절히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직 아기에 대해 루시안과 생각이 다른 상태였다.

“아, 아기는…….”

그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하자 루시안의 얼굴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당장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반년에 걸친 대공자비 실종사건은 끝이 났다.

루시안은 아리엘을 안아 들고 라카트옐 저택으로 돌아왔고, 소식을 들은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과 황실 사람들, 그리고 아리엘의 친구들은 눈물을 흘리며 안도했다.

돌아온 아리엘이 가장 먼저 찾아간 것은 마티어스였다.


* * *


“……무사했구나.”

루시안에게 부축을 받아 들어오는 아리엘을 본 마티어스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아리엘은 울먹이며 마티어스에게 안겨 인사했다.

“돌아왔어요, 마티어스님. 약속대로요.”

마티어스는 오랫동안 그녀를 안아주었다.

아리엘은 그간의 고통이 드러나는 마티어스의 얼굴을 보고 속상해졌다.

“왜 이렇게 얼굴이 상하셨어요…….”

“인간이 심장 없이 산 것과 똑같지.”

나직하게 대답한 마티어스가 집무실로 그녀를 이끌었다.

마티어스의 집무실에 들어선 아리엘은 발 디딜 틈 없이 천장까지 쌓여있는 책들에 놀랐다.

모두 라카트옐의 혈통에 관련된 기록물들이었다.

‘마티어스님도 해답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구나.’

아리엘은 자신이 알아낸 것을 라카트옐 남자들과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녀는 대마법사 브루노어까지 불러 달라고 부탁한 후 여태까지의 일을 말했다.

초대 드래곤 라키엘에 대해 조사했던 일.

라키엘의 흔적을 따라 서부 유적으로 이동하다가 그가 사랑했던 소녀를 떠올린 것.

최초의 황제와 그 소녀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낸 것.

그녀의 비석에 적혀있던, 드래곤의 눈물에 대한 이야기까지.

“제가 성년이 되는 생일날 죽지 않은 이유가 그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루시안의 눈물 때문에요.”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듣고있던 마티어스가 브루노어를 향해 물었다.

“가능성이 있는 얘긴가?”

브루노어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라카트옐의 에고(ego)에 담겨있지 않다면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루시안이 딱딱하게 대꾸했다.

“에고엔 그런 내용이 없어. 라키엘의 기억은 우리에게 없으니까.”

라카트옐의 에고는 라키엘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라키엘 자신이 이 땅에서 겪은 기억까지 담겨있진 않았다.

브루노어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다만, 제가 알기로 서부 유적 근방 마을에 비석의 내용과 비슷한 어린애들 동요가 있습니다.”

“무슨 동요?”

“-어둠의 눈물은 신의 모래시계-라는 가사를 가진 동요지요.”

“…….”

고민에 빠져있던 마티어스가 말했다.

“브루노어 자네가 그 비석과 동요가 있다는 마을 근방을 좀 더 알아봐 주게.”

“예.”

“그럴 것 없어.”

루시안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드래곤의 눈물이 영생의 비밀이라면, 당장 시험해보면 되겠지. 아무나 붙잡아서 내 눈물을 뿌리고 죽여보면 될 일 아닌가?”

마티어스가 침묵 끝에 대꾸했다.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떤 생명체에게든 영생은 그리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와 아기를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킬 순 없었다.

마티어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생각해봐라. 네 녀석이 아무 때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는지.”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완전한 드래곤으로 각성한 뒤, 그가 눈물을 흘린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첫 번째는 아리엘이 죽음의 기로에 있을 때, 두 번째는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려고 할 때.

모두 아리엘이 깊게 연관되었을 때 뿐이었다.

루시안은 두려움에 잠겨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제길, 그럼 이제 어떻게…….”

“일단 아리엘이 건강해지는 게 먼저다. 아직 시간이 있어.”

이제 7개월째이니 아기가 나올 때까진 여유가 있었다.

마티어스가 루시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넌 아리엘라 옆에 있어라. 나와 브루노어가 알아보도록 하지.”

마티어스는 수잔과 주방장 홀슨을 불러 아리엘의 먹을 것을 잘 챙기도록 명했다.

그간의 여정으로 지쳤던 아리엘은 침실에서 잠이 들었고, 루시안은 그 곁을 지키며 그녀의 부른 배를 바라보았다.

“…….”

그가 자기의 마나를 흘려 넣어준 뒤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자 아리엘이 수줍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아기가 아빠를 알아보나 봐요.’

그래. 알아봤겠지.

아직 각인도 받지 못한 그것을 힘으로 찍어누른 셈이니.

루시안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몸 안에 숨은 생명체를 향해 살기를 흘렸다.

그러자 배 안에서 부드럽게 이어지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루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괴물 새끼라 잘도 괴물을 알아보는군.

“네가 내 핏줄이라면 이것도 알아야지.”

그는 잠든 아리엘을 깨우지 않을 정도로만 낮게 경고했다.

“내 아내를 조금이라도 해친다면 내가 널 가만두지 않으리라는 걸.”


* * *


아리엘이 돌아온 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쌍둥이 사촌들과 방문한 태후는 말없이 아리엘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기만 했다.

철없는 일곱 살배기 쌍둥이는 아리엘 주변을 맴돌며 그녀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다.

“누냐, 이거 봐. 아기가 나비 좋아해?”

“언니, 내가 잡은 사마귀가 더 커!”

쌍둥이의 호위를 맡은 세실도 아리엘을 만나 오랫동안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직접 오지 못하는 카디나와 옆 나라 국왕, 베로니카는 편지를 보내왔다.

의외로 마지막에 찾아온 사람은 다이아나였다.

방 안으로 들어온 다이아나는 부쩍 마른 아리엘의 몸과 부른 배를 보고는 우는 것 같이 웃었다.

“애가 애를 가졌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리엘과 다이아나는 웃음을 터트렸고, 끝내는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 뒤로 다이아나는 아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기와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 어떤 것도 약속할 수 없는 아리엘을 배려한 듯했다.

대신 다이아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들어 아버지가 결혼 이야기를 하셔.”

모니카 공작 영애인 다이아나가 적령기 넘도록 결혼하지 않았다는 건 사교계 단골 이야기 감이었다.

“나는 싫다고 했지만, 아버지도 이번만큼은 물러날 생각이 없으셔. 신분이 낮아도 좋으니 날 사랑해주는 좋은 남자를 데려오라고…….”

다이아나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마침 아버지께 지병이 있다는 게 밝혀져서 더 빨리 결혼시키고 싶으신가 봐.”

사실 공작씩이나 되는 가문에서 딸의 결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시켜주겠다는 건 엄청난 파격이었다.

그만큼 모니카 공작이 딸을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부모님 방식의 사랑도 너무나 감사해. 하지만 내겐 역시 결혼보다는 꿈이 중요한걸.”

다이아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이야기를 이었다.

“모니카 공작가는 공신 가문이고, 대대로 황실의 조언자, 책사 일을 해왔어. 나도 그 뜻을 이어 공작위를 받고 그 일을 하고 싶어. 그러니,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이 가문을 떠날 수 없어.”

잠자코 이야기를 들은 아리엘은 다이아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보여드려, 다이아나.”

“뭘?”

“세실이 모두 앞에서 실력을 뽐냈던 것처럼. 아버지에게 네가 공작위를 맡기에 충분하다는 걸 보여드려.”

“…….”

숨을 죽이고 침묵하던 다이아나의 눈에 반짝 이채가 서렸다.

“네 말을 듣고 나니 알겠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슬픈 표정을 지워낸 다이아나는 아리엘의 뺨에 입을 맞추고, 아리엘에게 간절한 부탁의 말을 남긴 뒤 돌아갔다.

“꼭 살아야 해. 알겠지? 절대로 포기하면 안 돼. 네가 없이는 안 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아리엘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남들이 반대하는 꿈을 지키는 것도, 목숨과 바꿔야 할지도 모르는 아기를 지키는 것도.

다이아나가 돌아간 뒤 아리엘도 결심했다.

“아가야. 끝까지 놓지 않을게. 너도, 나도.”

그러기 위해선 드래곤의 눈물에 대해 알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럴 시간은 남아있지 않았다.


* * *


아리엘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잘 먹기 시작하자 아기는 깜짝 놀랄 속도로 자라났다.

그전에는 아리엘의 작은 몸집에 비해 부른 배가 커 보이는 정도였다면, 이젠 정말로 만삭같이 보였다.

아기의 움직임도 활발해져서 보글거리던 태동이 아니라 밖에서도 태동을 느낄 정도였다.

‘브루노어, 빨리 돌아와 줘요.’

그녀가 세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떠난 브루노어가 어서 돌아와 주기를, 아리엘은 매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한편 루시안은 아리엘이 잠들었을 때 잠시 나갔다 오는 걸 제외하곤 늘 그녀 곁에 머물렀다.

‘행복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오롯이 루시안을 차지하고 있는 시간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가 시시때때로 아기를 없애자고 빌긴 하지만…….

아리엘은 또다시 그녀를 설득하려고 하는 루시안의 입을 입맞춤으로 봉해버리고, 화제를 바꾸었다.

“우리, 아기 이름이나 생각해봐요. 예쁜 이름이 생각 안 난단 말이에요.”

“네가 무사하지 않으면 그것한테 이름은 없어.”

루시안이 서늘하게 한 말에 아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역시 루시안은 이름 같은 거에 관심없나 봐.

‘그럼 미리 내가 지어놔야지.’

뭐가 좋을까?

아기 이름을 짓는 수많은 부모들 중 그래도 그녀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남자애 이름만 생각하면 되잖아.’

어차피 라카트옐가에서는 사내아이만 태어나니까.

그건 오로지 아버지 쪽 유전만을 따르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종족도, 성별도 아빠인 루시안을 따를 테고, 외모도 루시안만 쏙 빼닮았겠지.

아리엘은 자신의 곁에 있는 루시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부럽네.’

루시안만 닮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는데도 아기가 자신을 조금도 닮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약간 슬펐다.

‘날 조금이라도 닮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혹시, 그녀가 죽더라도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아기를 버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아기를 무사히 낳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간 죽게 되니까.’

그때 그녀와 닮은 아이를 두고 간다면 마티어스와 루시안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아기도 엄마를 떠올릴 수 있을 거고…….

상념에 젖어있던 아리엘은 고개를 붕붕 저은 뒤 아기 이름 생각으로 돌아왔다.

‘라카트옐의 후손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이름을 짓고 싶어.’

라카트옐, 드래곤, 암흑, 사자…….

‘사자……!’

라카트옐 가문의 문장은 푸른 화염 갈기를 가진 사자 문양이었다.

아리엘의 입 밖으로 한마디가 새어나왔다.

“라이오넬.”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는데 여념이 없던 루시안이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올렸다.

“그건 또 어떤 새끼 이름이야?”

당신 아들 이름이거든요, 루시안.

아리엘은 빙긋 웃고 그에게 말했다.

“아기 이름으로 어때요? 라이오넬 라카트옐. 미들 네임은 루시안이 지어줘요.”

“싫어.”

“애칭으로는 라이라고 부를 거예요.”

이거면 완벽해. 아기 라카트옐 이름으로.

아리엘은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아기에게 말했다.

“너도 마음에 들지, 라이?”

그러자 아기가 그 말에 반응하듯 부드럽게 발로 배 안을 밀었다.

아리엘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라이도 마음에 든대요. 이것 좀 봐요.”


그녀는 루시안의 손을 끌어다 배에 대 주었다.

루시안도 아기와 교감하면 매 시간마다 없애자고 조르진 못할 거야.

그때, 루시안의 손이 닿기가 무섭게 아기가 그의 손을 팩 걷어찼다.

“……?”

아리엘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아기는 깊이 숨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라, 이런 적은 없었는데…… 겁을 먹었나?”

그녀의 배에서 손을 거둔 루시안의 입술이 사납게 비틀렸다.

‘겁은 무슨. 적의가 느껴졌는데.’

요망한 괴물 새끼 같으니.

라카트옐 핏줄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발광이군.

그렇게 생각한 루시안은 자신이 그것을 생명 취급했다는 것에 기분이 나빠졌다.

‘아리엘라의 기억을 보지만 않았더라도.’

아리엘을 되찾은 날, 그는 주니어를 통해 아리엘이 지낸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주니어의 시선으로 보이는 모습이어서 다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기를 지키겠다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확고한지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빌어먹게도, 루시안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주니어의 기억 속에서 아리엘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그의 얼굴이 담긴 마도구를 쓰다듬고, 잠꼬대로도 그의 이름을 말했다.

아기가 그의 아이라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도 했다.

“…….”

그걸 다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저 괴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은 지금처럼 온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것의 이름 따윈 그만 생각하고 조금 걷자.”

“알겠어요.”

아리엘이 움직이기 어려워진 후부터 루시안은 그녀를 안고 화이트 가든이나 유리 온실 쪽을 산책해주곤 했다.

그 시간을 좋아하는 아리엘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이었다.

“흐윽.”

그녀가 갑자기 몸을 웅크리며 주저앉았다.

“아리엘!”

루시안은 그녀를 빠르게 받아 안았지만, 손쓸 새도 없이 아리엘은 파랗게 질리며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는 저택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의사! 의사를 불러와!”


* * *


조용했던 라카트옐 저택은 발칵 뒤집혔다.

불려온 의사 밀러가 손발이 차갑게 식고 핏기를 잃은 아리엘을 진찰했다.

마티어스가 전에 없이 무서운 말투로 말했다.

“어떤 상태인지 말해라, 당장.”

신중하게 여기저기를 살핀 밀러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기가 커져서, 아기에게 빼앗기는 산소 양이 너무 많습니다. 당장 아이를 꺼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아리엘님이 생명을 잃을 겁니다.”

루시안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럼 당장 죽이고 꺼내.”

“그게…….”

그때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은 아리엘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안 돼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루시안은 살기를 거두고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리엘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제발, 아리엘라. 마지막 기회야.”

아리엘이 힘겹게 말을 쥐어짰다.

“죽이면, 안 돼요. 아기는 아무 잘못 없어요. 나는 괜찮으니까…….”

“그것이 널 죽이고 있다잖아……!”

“조금만 시간을 벌면 돼요. 브루노어가 곧 올 테니까…….”

루시안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다 네가 죽으면.”

그가 무너지듯이 아리엘의 몸 위로 얼굴을 묻었다.

먹이 사슬 최상에 있는 포식자가 두려움에 떨며 작은 소녀에게 매달렸다.

“널 잃으면……!”

아리엘의 손이 그를 더듬어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다.

작은 손이 온 힘을 다해 붙잡는 느낌에 루시안은 고개를 들었다.

아리엘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젖은 눈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만약에요. 만약이지만, 내가 아기만 살리고 죽으면…….”

루시안은 무시무시하게 그 말을 끊었다.

“그런 말 하지 마.”

하지만 아리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죽어도 아기에게 각인해주고, 이름도 지어주고, 예뻐해 줘야 해요. 알았죠? 약속해요.”

루시안이 실성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약속 못 해. 그런 약속 안 한다고. 약속하면 네가 죽을지도 모르잖아. 각인 따위 안 하고, 그 괴물은 산 채로 묻어버릴 거야.”

“그러지 말아요…….”

아리엘이 울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자 루시안이 그녀와 이마를 맞대고 으르렁거렸다.

“그래. 그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살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란 말이야. 날 떠나면 가만 안 둘 거야.”

결국 아리엘은 루시안 뒤에 있는 마티어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마티어스님…….”

고통스러운 얼굴로 서 있던 마티어스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뒷일은 내가 책임지마.”

아기와 루시안까지도 책임져주겠다는 말이었다.

겨우 안심한 아리엘은 횡설수설하며 당장 아기를 죽이겠다는 루시안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루시안, 잘 들어요.”

“듣지 않을 거야.”

“내 말 잘 들어요.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아리엘은 루시안의 얼굴에 손을 얹고 그와 눈을 맞췄다.

자신의 어디에서 이런 확고함이 나오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게 자신의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말이라서일까?

“꼭 했어야, 하는 말인데 너무 늦었어요. 지난 생에서 루시안이 나한테 손 내밀어줬었다고 말했었죠.”

타락과의 전투 전에 아리엘은 회귀했다는 사실을 마티어스와 루시안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하지만 세세한 상황까지는 말하지 않았었다.

“그때…… 루시안의 손을 잡은 순간 내 인생은 바뀌었어요. 루시안이 나한테 새로운 삶을 준 거예요.”

아리엘은 숨을 고르려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7년 전에 사실, 나 그 남자 하나 만나려고 대공가까지 온 거였어요. 그땐 루시안이 기사단 사람 중 하나인 줄 알았거든요. 어리고 가진 것 없는 내가 진짜 대공자님이랑 결혼할 수 있으리라곤 감히 생각지도 못했었어요. 그냥, 그 남자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점점 핏기를 잃어가는 그녀를 보던 루시안이 다급히 말을 막았다.

“그만 말해. 너 지금 아프다고.”

하지만 아리엘은 할딱거리면서도 말을 이었다.

“루시안을 사랑해서 나 정말 행복했어요.”

루시안이 괴로움을 누르려는 듯 이를 악물었다.

“곧 죽을 사람 같은 말 그만해, 응?”

아리엘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사랑해요, 루시안. 내 남편이어서 고마웠어요.”

“사랑해. 나도 사랑해.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죽으면 용서 안 할 거야.”

아리엘은 눈물을 흘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루시안도 이젠 알죠? 아기를 죽이면, 나도 죽을지 모른다는 거.”

“아리엘라.”

“나랑 만났을 때부터 이미 아기를 죽이기엔 늦었다는 거, 알고 있었죠.”

루시안의 눈빛에 절망이 지나갔다.

아리엘은 자신의 말이 맞다는 걸 확신했다.

“그래서 안 건드린 거잖아요.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건드렸다간 내가 죽을까 봐 아기도 못 해쳤던 거야.”

그리고 아기와 자신의 목숨을 묶어버린 건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루시안의 위협으로부터 도망가서 아기가 충분히 자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원망할 법도 한데 루시안은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리엘은 루시안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는 선택지가 하나뿐이에요.”

그녀는 루시안의 손을 끌어다 제 볼에 대었다.

“날 믿고, 아기 포기하지 말아요.”

“그런…….”

곧장 입을 열려는 루시안을 아리엘이 서둘러 막았다.

“나를 포기하란 소리가 아니에요. 나 노력할 거예요. 꼭 살 거야. 나 믿죠?”

“네 목숨이 걸렸는데 어떻게…… 어떻게 믿으란 거야.”


아리엘은 아이처럼 그의 손에 뺨을 누르며 말했다.

“아주 예전에 내가 물었던 거 기억나요? 라카트옐이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떻게 되냐고.”

“…….”

“그때 루시안이 그랬잖아요. 라카트옐은 잘못된 선택 같은 거 안 한다고. 설사 그렇다 해도 판을 뒤집으면 된다고요.”

루시안은 자신이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하지만 지금만은 그 말을 적용할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랬을 테지만, 이 선택은 아리엘의 생명과 직결된 일이었다.

나는 모르겠어, 아리엘라.

그저 너를 잃은 내가 어떤 괴물로 변해버릴지 장담할 수가 없어.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소녀는 눈을 빛내며, 고요히 말했다.

“나도 아기도 라카트옐이에요. 내가 뭘 택하든, 라카트옐이니까. 판이 뒤집힐 거예요. 난 알아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루시안의 머리를 미약하게 당겨 그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사랑해요.”

루시안은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아리엘을 이길 수 없었다.

아리엘의 운명을 결정할 선택을 제 손으로 감히 내리지도 못하는 겁쟁이가 자신이었다.

루시안은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을 했다.

“네가 잘못된다면 난 곧장 죽을 거야.”

아리엘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라키엘이 했던 것처럼 눈과 심장을 뽑고, 마티어스에게 부탁해 곧장 널 따라갈 거야.”

아리엘은 그러지 말라는 듯 가냘프게 고개를 저었지만 아까의 말로 힘이 다한 듯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힘겹게 버티며 깨어있던 그녀는 곧 정신을 잃었다.

루시안에게 '곁에 있어줘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 * *


의사 밀러는 곧장 아리엘을 깨끗한 천이 깔린 침상으로 옮기고 처치를 준비했다.

아리엘이 정신을 잃은 이상 아이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꺼낼 수는 없었고, 살을 찢어서 꺼내야 했다.

제국의 의원들은 산모를 포기하는 경우 아니면 그런 식으로 아기를 받지 않았다.

출혈이 너무 심해서 산모가 죽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대공가에서 여성의 몸을 연구한 밀러는 달랐다.

‘충분한 양의 봉합 포션만 있다면, 이쪽이 더 안전할 수도 있어.’

다행히 대공가에는 대마법사 브루노어가 있었다.

브루노어는 떠나기 전, 이런 상황을 대비해 찢긴 살을 붙이는 봉합 포션과 고성능 회복 포션을 매우 많이 준비해놓고 갔다.

밀러는 훈련받은 하녀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처치를 시작했다.

브루노어가 라카트옐 저택으로 돌아온 것은 그쯤의 일이었다.

서둘러 돌아오느라 매무새가 흐트러진 백발의 대마법사는 바로 마티어스와 루시안을 찾았다.

“발견했습니다!”

아리엘의 손을 붙잡고 있다가 방해된다는 이유로 밀러에게 쫓겨난 루시안과 방 앞을 서성이던 마티어스가 곧장 브루노어를 잡아챘다.

“어떻게 됐나?”

“말해. 지금이라도 내가 들어가 해결할 수 있으니.”

숨을 고르지도 못한 브루노어가 그들에게 천에 싸인 식물 하나를 내밀었다.

몇 송이의 꽃이 피어있는 들풀이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라카트옐 남자들의 무서운 눈빛에 브루노어가 입을 열었다.

“이것이 그 동요가 만들어진 이유였습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브루노어는 서부의 작은 마을들을 돌며 그 동요가 언제부터 내려왔는지를 조사했다.

예상대로 '어둠의 눈물은 신의 모래시계'라는 가사를 가진 동요는 아주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듯했다.

“마지막으로 외부와 거의 단절된 아주 높은 바위산 위 마을까지 갔습니다.”

그곳은 제국의 땅이긴 했지만, 너무나 외진 곳이라 제국의 문물이 흘러 들어가지 않은 곳이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몇백 년 전의 생활 모습대로 소박하게 살고 있었다.

그리고 브루노어는 바로 그곳에서 동요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이 풀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 적부터 변함없이 이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 마을의 설화에 따르면 땅으로 내려온 어둠, 즉 라키엘이 과거에 사랑하는 이를 잃고 흘린 눈물이 바로 이 들풀에 떨어졌다고 한다.

드래곤의 눈물을 받은 들풀은 한철을 지나 한 해, 아니 수백 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은 이 식물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

생명체라면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신의 모래시계를 멈춰버린, 어둠의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그 말은…….”

마티어스가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엘라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건가?”

루시안은 천을 풀어헤쳐, 그 안에 담긴 들풀로 떨리는 손을 뻗었다.

만져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인간들의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는 기운이 그곳에 감돌고 있었다.

라키엘과 같은 종족인 루시안은 그곳에 응축된 슬픔, 절망, 고통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식물에 손을 댄 순간…….

[또 너로구나.]

루시안은 라키엘이 만든 이공간 속에 빨려 들어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변은 온통 어두웠고,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루시안은 적의를 드러내며 라키엘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파란 안광을 내며, 거대한 눈 하나가 나타났다.

드래곤의 눈이었다.

[내가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남겨둔 연결고리가 여기였지. 호수도 정리했고, 이게 끝이구나.]

“날 내보내. 내 아내가 곁에 있어 달라고 했으니.”

루시안의 서늘한 일갈에 라키엘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 사랑스러운 아이와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하는 건 아쉽군.]

루시안은 더 인내하지 않고 손에 마나를 끌어모았다.

[너는 나와는 달랐다. 마지막 라카트옐이자, 재림한 어둠아.]

“힘으로 부수기 전에 헛소리 그만하고…….”

[나는 사랑해서 놓아주었고, 너는 기어이 붙들었지. 조금은…… 네가 부럽구나.]

루시안은 말없이 결계를 깰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라키엘의 마지막 말과 함께 이공간이 사라졌으므로.

[네가 이겼다.]

어두운 환영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생생한 들풀과 자신만이 남아있었다.

루시안은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졌다.


* * *


같은 시각, 밀러는 놀라운 광경을 마주했다.

아기를 꺼내고 황급히 봉합 포션을 부을 필요도 없이, 아리엘의 피부 위 상처가 난 위치에서 희미한 빛이 흐르며 벌어진 곳이 봉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마치 아기를 가진 적도 없다는 듯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리엘의 몸 위에는 상처 하나 없었고, 하얗게 질려있던 안색도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이게 어떻게 된…….”

놀란 밀러와 하녀 조수들은 열심히 살펴보았지만 아리엘에게 위태로운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호흡과 혈색, 모든 게 정상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기님을 살펴보아라.”

하녀들은 아리엘의 몸을 옷과 이불로 감싸고 아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리엘라!”

그때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은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아기가 찢어져라 울고 있었지만 두 남자는 그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아리엘에게만 모여들었다.

밀러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짧게 설명한 뒤 아기를 내밀었다.

“축하드립니다. 소공자님을 얻으셨습니다.”

아들이라는 이야기에도, 여전히 두 남자는 아리엘에게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아리엘이 왜 눈을 뜨지 못하는 거지?”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있는 것이냐?”

“아리엘님은 지극히 정상이시고 의식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돌아올…….”

그때 아리엘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숨까지도 멈추었고, 밀러도 긴장하며 아리엘의 맥을 살펴보았다.

살짝씩 움직이던 눈꺼풀이 이윽고 열리자 아리엘의 눈이 그들을 향했다.

“아리엘라……!”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굽혔다.

초점을 맞추려는 듯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아리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기운이 없는지 번번이 실패했다.

한참 만에 아리엘이 간신히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거봐요, 내가…… 살 거라고, 했잖아.”

힘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루시안은 그녀의 얼굴에 키스하고 정신없이 뺨을 비비며 대꾸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항상 네가 옳고 내가 틀렸어.”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묻히게 할 만큼 아기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하녀들은 아기를 달래지 못하고 있었다.

아기를 감싸고 따뜻하게 해줬지만 아기는 호흡을 어려워하며 계속 울었다.

밀러와 하녀들은 이유를 몰랐지만, 라카트옐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리엘은 루시안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루시안, 아기…… 각인을…….”

루시안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일어나 하녀들의 손에서 아기를 빼앗았다.

그의 한 손에 움켜잡히는 작고 뜨거운 생명체 덩어리가 제 아비의 손에서 울음을 그치고 쌕쌕 숨을 내쉬었다.

루시안은 아기를 향해 제 마나를 흘려 넣었다.

마나는 아기에게 부드럽게 흘러 들어갔고, 몇 초가 흐르자 아기가 눈꺼풀을 옴찔거리며 눈을 떴다.

“어머나, 소공자님 눈동자가…….”

하녀들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안은 탁한 색의 눈동자와 눈을 맞추었다.

고대 적부터 내려온, 라카트옐이 후대 라카트옐에게 주는 생명의 낙인.

아기와 정확하게 시선이 마주치고, 루시안은 '각인'이라 불리우는 행위를 했다.

그의 안에 있는 에고가 아기에게도 생겨나는 것이 시선을 통해 느껴졌다.

루시안의 힘이 아기에게 스며들어간 뒤 각인이 끝나자, 탁했던 아기의 눈동자 색깔이 맑고 선명해졌다.

자지러져라 울던 아기는 이제 그의 부친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데리고 나가라.”

루시안은 다시 하녀들에게 아기를 던지다시피 맡기고 아리엘에게로 돌아갔다.

아기를 챙겨서 나가며, 하녀들이 아리엘에게 들릴만한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소공자님 눈동자가 붉은색이에요!”

루시안이 제 곁으로 돌아오자 그의 손을 꼭 붙잡은 아리엘이 말했다.

기운이라고는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기쁨이 감돌았다.

“루시안…… 들었어요? 아기 눈이 붉은색이래요. 나 닮았대요.”

“상관없어. 네가 죽지 않고 살았잖아.”

루시안은 아리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다 상관없다는 말만 몇 번이고 반복했다.

가만히 안겨있던 아리엘은 이내 루시안의 어깨가 짧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뜨거운 액체가 그녀의 목덜미를 적시는 것도.

“루시안……?”

여태까지 참아왔던 온갖 감정이 밀려오는 듯 그는 아리엘을 안은 채 무너졌다.

아리엘은 그런 루시안을 꼭 안으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내 신랑님. 나 여기 있어요.”

그가 우는 것을 한참 안아주고 있던 아리엘이 마티어스를 향해 미소지었다.

“마티어스님. 루시안 좀 봐요. 아기보다 루시안이 더 우는걸요.”

그녀에게 다가온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세게 끌어안았다.

아리엘도 마티어스를 꼭 마주 안았다.

마티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아리엘의 뺨을 쓰다듬었다.

“……고맙다. 살아줘서. 우리의 생명이 되어줘서.”

한동안의 포옹이 끝난 뒤, 아리엘은 뒤늦게 들어온 브루노어에게 물었다.

“브루노어, 어떻게 된 거예요?”

촉촉한 눈빛으로 서 있던 브루노어가 목이 멘 채 대답했다.

“예상하셨던 그대롭니다.”

아리엘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시선이 마티어스와 루시안에게 향했다.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아리엘은 울지 않기 위해 애쓰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럼 나, 마티어스님이랑 루시안이랑 계속 함께 할 수 있는 거예요?”

마티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두 분보다 내가 먼저 떠나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이번에는 루시안이 답했다.

“그래.”

아리엘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그녀를 안아준 루시안이 말했다.

더없이 확고하고 아주 행복한 목소리로.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거야.”


* * *


아기 라이오넬은 태어나자마자 수잔과 주니어가 전담해 키웠다.

보통 아기보다 힘이 월등히 세기 때문에 놀아줄 땐 주니어가 맡고, 돌보는 건 수잔이 했다.

아리엘은 금방 회복했지만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성화로 한동안 휴식을 취해야 했다.

아기 얼굴을 보여주려고 수잔이 데려왔을 때, 아리엘은 약간 걱정스럽게 아기를 받아 안았다.

“아기가 엄마를 알아볼까요?”

아리엘의 이마에 뽀뽀를 해준 수잔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맹세하건대, 알아볼 거예요. 아기 마님.”

아리엘은 조심스레 아기를 안고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천에 싸여 옴작거리던 아기가 아리엘과 눈을 맞춰왔다.

“아…….”

아리엘은 숨을 멈추고 아기를 바라보았다.

‘너였구나.’

정말 아름다운 아이였다.

루시안을 빼다 박아놓은 듯한 이목구비에 빽빽하고 긴 검은 속눈썹.

보석 같은 붉은 눈동자가 루시안과 확연히 달라 보이는 분위기를 주었다.

그때, 아리엘을 가만히 보던 아기가 눈을 반짝거리며 방싯 웃었다.

“어머나.”

수잔이 짧게 놀란 소리를 냈다.

“소공자님이 처음으로 웃으셨어요.”

곁에 있던 하녀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가 아무리 재롱을 피워도 안 웃으셨는데!”

“장난감이나 모빌에도 관심이 없으셨다고요.”

“정말 아기 마님을 알아보시나 봐요!”

아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아기를 꼭 안았다.

날 알아보겠니, 라이?

‘그래. 나도 너를 알아.’

우리는 몇 개월간 함께 싸워온 동지였지.

아기가 배 안에 있을 때, 아기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던 것 같던 느낌은 지금도 여전했다.

아리엘은 지금도 아기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끈으로.

그녀는 아기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고마워. 우리한테 와줘서.”

그렇게, 라카트옐의 후손이 엄마를 엄마로 여기지 못한다는 법칙은 라이오넬 대에서 깨졌다.

아기 라이오넬은 아리엘을 사랑했다.

……좀 지나칠 정도로.

아리엘을 만난 뒤로 아기는 극성스레 엄마에게 매달렸고 그 사실은 저택의 모두에게 퍼져나갔다.

그 말을 들은 집사 알렌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공자님도 역시 라카트옐이야.”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꽤나 달랐지만, 아기는 아리엘 앞에선 한없이 순하고 예쁜 아기가 되었다.

아리엘만 보면 사랑스럽게 웃고 아리엘이 움직이는 곳에만 시선을 두었다.

웃음을 보여주는 건 오직 아리엘에게 뿐이었다.

아리엘과 떨어지면 온 힘을 다해 울어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덕에 아기가 태어난 뒤 아리엘은 아기를 줄곧 곁에 두어야 했다.


어느 낮, 아리엘을 보러온 마티어스는 살뜰히 그녀를 챙긴 뒤, 잠든 아기를 향해 무뚝뚝한 시선을 보냈다.

“……루시안 녀석을 빼닮았군.”

아리엘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열심히 아기 얼굴을 들여다보며 발견해낸 사실을 말해주었다.

“눈매는 마티어스님을 닮았어요.”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픽 웃었다.

“루시안 녀석이 퍽 싫어하겠구나.”

“저는 좋은걸요. 마티어스님을 닮아서.”

기분 나쁘지 않은 듯 입꼬리를 밀어올린 마티어스가 불쑥 말했다.

“네 핏줄이 생겼으니 너에게 페르 제도의 엘윈 광산을 주마.”

“네? 하지만 그건…….”

엘윈 광산은 마티어스가 선대에게 대공위를 받을 때 따로 받은 귀한 것이었다.

광산의 이름 또한 마티어스의 중간 이름자를 따서 지어졌다.

사람 심장만한 크기의 루비 덩어리가 턱턱 나와 수입도 어마어마한 곳이었다.

그걸 준다는 것은 유산의 일부를 물려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열심히 거절하는 아리엘에게 마티어스가 말했다.

“어린것에게 줄 순 없지 않으냐. 괘씸한 녀석인데.”

‘……!’

방금의 말을 마티어스어로 해석하자면, 광산은 아기와 아리엘 두 명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뜻이었다.

아기를 마티어스 자신의 핏줄로 인정한다는 뜻도 있었다.

그런 의미라면 아리엘은 거절할 수 없었다.

아리엘은 결국 마티어스의 허리를 꼭 안으며 말했다.

“감사해요. ……아버님.”

아버님 소리에 급격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들며 마티어스가 말했다.

“무얼…….”

“마티어스님이 최고예요.”

아리엘의 '아빠 최고!' 공격을 받은 마티어스가 심장을 부여잡고 살짝 비틀거렸다.

그는 어쩔 줄 모르고 헛기침을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 쉬어라.”

나가기 전, 그는 요람에 누인 아기의 볼을 슬쩍 건드려보았다.

잠든 아기가 귀찮은 듯 낑낑거렸다.

“고약한 것.”

밖으로 나가는 마티어스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 * *


라카트옐 대공자비가 무사히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에 제국은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아리엘이 아이를 낳다 죽기라도 하면 라카트옐에 의해 제국이 멸망할지도 모른다고들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 생각이 딱히 틀리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아리엘은 약간 머리가 아팠다.

“성명식이 오늘이라죠?”

“대공손은 어떻게 생겼을까?”

고위 귀족의 자녀가 태어나면 황실에서 성명식(name ceremony)을 하게 된다.

아이 이름을 공식적으로 귀족 계보도에 올리는 의식이었다.

대공가 후손인 만큼, 황실에서는 황손이 태어났을 때보다 더 크게 성명식을 열어주었다.

초대받은 귀족들은 모두 '그' 루시안의 아들이 어떻게 생겼을지를 두고 수다를 떨었다.

“예로부터 라카트옐 사내들은 모두 미색이 빼어났다고 해요.”

“게다가 대공자비님의 아름다움까지 닮았다면…….”

“아, 라카트옐 가문이 들어와요!”

성명식에 등장한 라카트옐 가족은 네 명이었다.

얼마 전 손자를 보았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젊은 모습의 현 대공 마티어스.

몇 년 안으로 대공위를 승계받을 대공자 루시안.

그리고 한동안 '소공자'로 불릴 대공손과 아기를 안고 있는 아리엘.

비단 천에 싸인 아기의 머리가 보이자 귀족들은 아기를 구경하기 위해 목을 길게 뺐다.

아기의 얼굴이 드러난 건 황실의 어른인 태후가 아기의 이마에 금빛의 성수를 떨어뜨려 줄 때였다.

“와……!”

드러난 아기는 밤을 베어놓은 듯 새까만 머리카락에 눈같이 흰 피부,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아기인데도 시선을 모여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

“눈은 대공자비님을 닮았네.”

물론 아기의 붉은 눈이 아리엘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빛을 띤 건 아니었다.

아리엘과 달리 아기는 순결한 핏빛같이 새빨간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주위를 얼릴 것같이 시린 붉은색.

포식자의 색이었다.

태후가 성수를 아기에게 떨어뜨려 주자 황제가 나와서 성명식을 시작했다.

가주인 마티어스가 아기의 이름이 담긴 종이를 황제에게 내밀었다.

“라카트옐 대공가의 후손에게 '라이오넬'이라는 이름을 주노라.”

황제가 이름을 읽은 뒤 아리엘과 루시안에게 물었다.

“아이에게 줄 가운데 이름은 무엇인가.”

아리엘은 루시안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라이오넬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지은 것이었고, 중간 이름은 루시안에게 맡겨놓은 터였다.

‘엉뚱한 이름만 아니면 좋겠는데.’

아직도 아기와 가깝지 않은 루시안을 고려하면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아리엘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시선을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한 루시안이 느릿하게 웃었다.

아리엘뿐 아니라 회장 안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할 만큼 유혹적인 미소였다.

루시안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테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안이 그녀와 계속 시선을 맞춘 채 말을 이었다.

“라이오넬 테오 라카트옐. 아이 이름은 이것이 될 겁니다.”

테오라면…….

'신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자였다.

미들 네임이 마음에 든 아리엘은 행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오넬 테오 라카트옐.

신이 선물한 대공가의 작은 사자.

정말 좋은 이름이었다.

“테오…….”

아리엘이 작게 되뇌자 아기가 제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 듯 짧게 소리 내 웃었다.

“……!”

그 마법 같은 웃음에 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아기에게 사로잡혀 버렸다.

“하아…… 어쩜 저렇게 예쁠 수 있죠?”

“제가 태어나서 본 아기 중에 가장 예뻐요.”

“대공가 아기만 아니면 납치하고 싶을 정도예요…….”

아기는 나머지 성명식을 치르기 위해 태후에게 안겨 단상 위로 올라갔다.

단 위에 누워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며, 자연스레 왕처럼 군림하는 아기를 멀리서 바라보던 아리엘은 문득 루시안에게 물었다.

“루시안. 저 아이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까요?”

아리엘의 손을 얽어 쥔 루시안이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이미 널 사랑하잖아.”

아기가 아리엘을 사랑하는 것조차 질투 난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리엘은 그를 살짝 흘겨준 뒤 다정하게 중얼거렸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면 좋겠어요.”

루시안이 픽 웃으며 깍지낀 손을 들어올려 아리엘의 손등에 키스했다.

“쉽지 않을걸. 녀석도 라카트옐이니.”

그리고 그는 아리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날 위해선 녀석에게 다른 상대가 생겼으면 좋겠군. 녀석과 내 아내를 나누는 게 슬슬 한계거든.”

“루시안……!”

아리엘이 얼굴을 붉히자 루시안이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오늘 이후론 멀리 떨어뜨려 놓은 아이 방에서 재우니 널 독차지할 수 있겠지.”

아리엘은 한숨을 삼켰다.

루시안은 분명 좋아한다고 하는 말일 텐데 왜 불길해지는 걸까……?


* * *


여기, 아리엘이 모르는 뒷이야기가 있다.

아기가 아리엘에게 꼭 붙어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새로 태어난 꼬마 라카트옐이 상상 이상으로 영악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아기는 아리엘 앞에서는 천사 같지만 아리엘의 관심을 빼앗길라치면 악마로 돌변했다.

그리고 아기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아리엘이 가장 사랑하는 두 남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었다.

“으아앙!”

영리한 눈을 반짝이는 아기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아리엘과 시간을 보낼 때마다 훼방을 놓았다.

그 탓에 아리엘을 두고 라카트옐 세 명이 싸우는 꼴이 되어버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몇 주째 아리엘을 빼앗긴 두 라카트옐은 회의를 열어 아리엘에게서 못된 새끼 드래곤을 떼어놓을 궁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물리적으로 떼 놔야 한다.”

“아리엘이 녀석을 예뻐하니 방법이 없어.”

이리저리 머리를 모은 라카트옐 두 남자는 나름대로 묘책을 생각해냈다.

“보통 귀족가에서는 애가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방과 멀리 떨어진 아기방으로 보내지.”

“독립심을 기른다는 구실로 아리엘을 설득하면…….”

그렇게 두 라카트옐은 아기가 성명식을 치른 뒤에는 방을 나누도록 아리엘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성명식 날이 온 것이다.

성명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루시안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드디어 아리엘에게 붙은 영악한 혹을 떼어낼 수 있겠군.’

속사정을 모르는 아리엘만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아기가 잠들 시간이 되자, 아리엘은 '라이 안녕. 아침에 보자'하고 아기에게 뽀뽀를 해주었다.

수잔이 아기를 안고 나간뒤 그때만 기다리던 루시안은 아리엘이 편지를 쓰는 책상에 걸터 앉았다.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말했다.

“드디어 둘 뿐이네. 거의 1년 만이야.”

깃펜을 내려놓은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둘만 있었던 적 많지 않아요?”

그러다 그녀는 루시안이 뭘 뜻하는지 알아차리고 뺨을 붉혔다.

“아, 뱃속에…….”

“이제 진정한 의미의 둘이지.”

루시안의 한쪽 입술이 아름다운 호를 그렸다.

그가 고개를 깊이 숙여 아리엘의 입술 근처에 자잘한 키스를 남겼다.

아리엘이 간지러운 듯 웃고, 루시안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는 순간이었다.

“으아아앙!”

문가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곧이어 노크를 하고 수잔이 들어왔다.

아기를 어르던 수잔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리엘님하고 떨어지는 게 싫으신가 봐요.”

눈앞에 아리엘이 나타나자 아기는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치고 아리엘을 향해 작은 손을 뻗었다.

“응아응.”

“라이, 엄마가 없어서 슬펐니?”

아리엘은 아기에게 다가가 달래주었다.

루시안은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져서 이를 갈았다.

이번에 아리엘은 라이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내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재워서 보내든, 놀아주고 보내든 아기는 아리엘의 방에서 나가자마자 자지러지게 울었고 결국 돌아왔다.

“…….”

이 사태에서 가장 화가 난 것은 명백히 루시안이었다.

심지어 아기는 돌아올 때마다 루시안을 향해 의기양양한 눈빛을 보내기까지 했다.

아기와 루시안 사이에 무언의 신경전이 오갔다.

‘내 아내다.’

‘우리 엄마야.’

아기가 좀처럼 안정되지 못하는 것을 본 아리엘은 고민에 빠졌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어.’

그녀는 어릴 적 자신이 자주 만들던 나비 모양의 마나를 불러냈다.

아리엘의 마나로 만들어진 나비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아기의 시야가 닿는 근처에 가서 맴돌았다.

“라이, 이 나비들이 밤새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아기는 나비가 마음에 드는 듯 손을 뻗어 만지려 들었다.

아리엘은 아기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고 나비 마나에게 좋은 꿈을 흘려 넣었다.

아기가 잠들면 나비들이 아기에게 좋은 꿈을 선사해줄 것이었다.

마침내 수잔이 데리고 나가려고 하자,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데려가 재우고 오지.”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 루시안은 아기 근처에도 잘 가지 않았다. 근데 힘든 '아기 재우기'를 하겠다고?

“금방 올게.”

다정하게 아리엘에게 말한 루시안은 수잔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았다.

정확히는 받아 '쥐었다'.

미묘한 앙심을 품은 채 아기를 바라본 루시안은 아기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로 나가자 아기는 이번에도 크게 울음을 터뜨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루시안에 의해 좌절되었다.

“……하면 ……할 거다.”

아기의 귀에 루시안이 무언가 경고하자 아기는 조용해졌고, 이내 아리엘의 나비 마나로 관심을 돌렸던 것이다.

루시안은 아기방 요람에 아기를 넣어두고 한 번 더 무서운 눈빛을 보낸 뒤 사라졌다.

정말로 루시안이 아기를 무사히 재우고 오자 아리엘은 루시안을 칭찬해주었다.

“루시안 멋져요!”

기분좋은 기색을 감추지 않고 루시안이 말했다.

“앞으로 녀석을 재우는 건 내가 맡지.”

그리고 그는 악랄하게 웃었다.

아기 라이오넬의 앞날에 닥친 크나큰 시련이었다.

루시안이 다녀오는 사이 다이아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 쓴 아리엘은 봉투에 밀랍을 녹여 부은 뒤 라카트옐 인장을 꾹 찍었다.

“다 됐다.”

“그럼 이제 남편을 좀 봐주실까.”

아리엘의 손에서 자연스레 인장을 가져간 루시안이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꺅, 루시안!”

루시안이 아리엘을 침대에 가볍게 던져놓고 그 위를 유연하게 타고 올랐다.

아리엘은 새빨개졌고, 긴장때문에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루시안이 말했다.

“계속 물어보고 싶었어.”

그가 한 손으로 아리엘의 어깨선을 쓸며 물었다.

“내가 없는 시간동안, 어땠어?”

이미 주니어를 통해 다 지켜본 루시안으로서는 상당히 짓궂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리엘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잠시 발간 입술을 잘근거리며 그때를 회상하던 아리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외로웠어요. 보고 싶고, 그립고.”

그녀는 루시안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속삭였다.

“내 절반이 잘려나간 것 같았어요.”

감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눈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있던 루시안은 작게 '미치겠네'하고 중얼거린 뒤 아리엘의 입술을 여러번 훔쳐갔다.

자세를 바꿔 그녀를 끌어안고 누운 그가 말했다.

“뭐가 그리웠어? 다 말해봐.”

아리엘은 열심히 손을 꼽으며 말했다.

그녀도 이참에 못 부린 어리광을 다 부릴 생각이었다.

“뽀뽀해주는 거랑, 이렇게 안아주는 거랑, 가만히 심장 소리 듣는 거랑…….”

수십 가지나 늘어놓다가 아리엘은 문득 루시안에게 물었다.

“루시안은요?”

그녀를 빤히 응시하던 그가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대답했다.

“난 할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

“…….”

아리엘은 말없이 그를 꼭 안아주었다.

떨어져 있던 지난 시간이 둘 모두에게 버티기 힘든 고통이었다는 걸, 이제 그녀도 이해했다.

아리엘의 포옹에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쉰 루시안이 그녀를 빙글 돌려 자신의 위에 앉혔다.

“그러니까, 예뻐해 줘.”

자세 때문인지 분위기가 야릇하게 반전되었다.

아리엘은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떨궜다.

상체를 일으켜 아리엘의 목선을 따라 키스한 루시안이 유혹적으로 말했다.

“내 얼굴이나 몸은 그립지 않았던 거야?”

정말, 루시안!

아리엘이 그를 흘겨주자 루시안이 애틋하게 속삭였다.

“네가 내 한 조각만이라도 그리워했다면 난 그걸 제물로 삼을 수도 있어.”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의 심장이 마구 콩닥거렸다.

루시안은 저렇게 위험한 말을 멋대로 한다니까.

하지만 그 말과 말을 하는 표정 속에 담긴 감정은 너무나 진심 그대로여서.

속절없이 그에게 당겨지고 마는 것이다.

루시안이 그녀의 등을 느리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말해줘. 날 원해?”

아리엘은 눈을 꼭 감고 대답했다.

“네.”

루시안이 말하고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럼 가져가.”

두 사람의 숨이 얽히고, 둘은 상대가 사막의 오아시스라도 되는 듯이 간절하게 서로를 들이마셨다.

아무리 원해도 부족한 것만 같았다.

긴 긴 밤, 아리엘과 루시안은 지나버린 시간을 보충하듯 서로를 탐하고 또 탐했다.

상대의 귓가에 밤새도록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며.


* * *


1년 뒤.

라이오넬 테오 라카트옐은 라카트옐답게, 튼튼하고 빨리 자라났다.

겨우 한 살이지만 벌써 아장아장 걷고 짧은 단어 정도는 말도 할 수 있었다.

달라지지 않은 점이 있다면 여전히 아리엘 껌딱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리다는 것과 사랑스러운 외모를 아주 잘 이용하는 영악한 아기였다.

라이는 자신을 돌봐주던 하녀에게 애교를 떨어 정신을 쏙 빼놓은 뒤 열심히 졸랐다.

“엄마. 엄마항테 가.”

평소 그를 돌봐주던 하녀장 수잔은 이런 수작에 넘어가지 않았다.

울거나 떼를 써도, 천진난만하고 귀엽게 졸라도 절대 봐주지 않았다.

그러니 수잔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였다.

“하지만, 소공자님…… 아기 마님께선 대공님과 티타임 중이세요. 대공님은 방해받는 걸 싫어하셔요.”

애교에 거의 넘어간 하녀가 마지막 양심을 지키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라이에게는 아직 필살기가 남아있었다.

일명 울먹울먹 기술.

“히잉, 라이 엄마 보구시퍼요. 앙대?”

“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천사같이 예쁜 아기가 무해하게 조르는데 넘어가지 않을 어른은 드물었다.

결국 라이는 마티어스와 아리엘의 티타임에 침투하는 것에 성공했다.

아리엘은 라이의 통통한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엄마랑 할아버지랑 이야기 나눌 동안 얌전히 있어야 해?”

“녜.”

고분고분 대답한 그는 티테이블 근처 작은 매트 위에서 노는 것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절대 얌전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라이는 아리엘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긴 흑발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

엄마가 할아버지라고 부른 남자. 마티어스 대공.

라이는 에고(ego) 속을 뒤져서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찾았지만 마티어스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에고 속 할아버지란, 노집사 알렌이나 마법사 브루노어처럼 쪼글쪼글하고 흰 머리를 가진 늙은 개체였다.

찬란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가진 마티어스는 할아버지란 말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을 거슬린다는 듯 서늘하게 볼 때가 종종 있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이는 살금살금 다가가 테이블보를 당길 준비를 했다.

테이블보를 당기면 차가 쏟아질 거고, 그럼 마티어스의 옷이 젖어서 티타임이 끝나버리겠지?

‘내가 엄마를 차지하는 거야.’

조그만 머리로 계산을 마친 계략 라카트옐은 샐쭉 웃으며 테이블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휙-

라이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앗, 들켰다!

라이가 다급하게 제 소드 마나를 흘렸지만 이내 달콤한 붉은색의 마나에 의해 소드 마나가 꽁꽁 묶여버렸다.

“라이오넬 테오 라카트옐.”

라이는 얼른 목을 움츠렸다.

부드러운 어조지만 아리엘이 자신의 풀 네임을 부를 때면 혼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착하게 있어야지.”

아기를 다시 매트 위에 올려둔 아리엘이 가만히 혼내는 눈빛을 보내자 라이는 서둘러 실수인 척을 했다.

“후웅, 몰라쪄…… 잘모해써요.”

아리엘은 라이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은 뒤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마티어스가 흐뭇하게 말했다.

“이제 능력이 완전히 개화했구나.”

아리엘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를 낳은 뒤 그녀의 마법 능력엔 큰 변화가 있었다.

원래도 원소 마법에 특화되어있던 아리엘은 원소 마법의 최고 경지, '정령 마법'을 개방하게 되었다.

이제 불, 물, 흙, 바람의 원소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정령을 불러내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다.

‘마력도 무한하게 늘어서 마나 소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이전에는 마나 소모가 큰 마법을 썼을 때 몸에 무리가 가곤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무리 마나를 사용해도 정령들에 의해 다시 채워지니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정령 마법사가 된 아리엘은 라카트옐에 필적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라카트옐인 라이보다 자신이 약해서 걱정했던 아리엘은 이제 라이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닌 수준이 되었다.

그녀의 마법이 개화하는 걸 지켜본 브루노어는 이렇게 말했다.

‘명실공히 대륙 최강자가 되셨군요.’

뿐만이 아니었다.

아리엘이 개발한 기억 마나 마도구는 이제 상용화 단계였다.

기억 마나를 캡슐로 만들고, 캡슐을 마도구에 끼워 작동하면 원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다.

또한, 남긴 장면은 종이나 천에 옮겨서 보관할 수도 있었다.

아리엘은 이것을 '사진 마법'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것이 상용화되면 아리엘의 모습을 남겨놓겠다고,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이미 몇백 개 단위의 주문을 넣은 상태였다.

“티타임에 날 부르지 않다니, 아리엘라.”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 루시안이 아리엘의 뺨에 입을 맞추며 옆자리를 차지했다.

‘아이고…….’

아리엘은 다 모여버린 라카트옐 세 남자를 보며 탄식했다.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라카트옐은 최대 두 명까지인데.’

자기들도 같이 있는 거 불편해하면서 왜 이러는 건가요……?

루시안은 차갑게 식은 눈을 한 마티어스와 앙칼진 고양이처럼 그를 경계하는 라이오넬을 차례로 바라본 뒤 아리엘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앞으론 날 빼먹지 마.”

아리엘만 모를 뿐, 지금 대공가 저택 안은 치열하고 피튀기는 전쟁 중이었다.

내용은 말할 것 없이 세 남자의 ‘아리엘 차지 전쟁’.

아리엘의 총애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그들은 밤낮 물밑에서 서로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는 아리엘은 재잘재잘 이야기를 꺼냈다.

“브루노어가 샘플이 필요하다니 아카데미에 한 번 다녀오려고 해요. 그래서…….”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티어스가 나섰다.

“나와 함께 가지. 내가 가서 쓸만한 연구용 건물을 세워주마.”

루시안도 지지 않았다.

“내가 같이 가야지. 검술학부에 마땅한 시범 스승이 없다며. 검술 시범 정도는 내가 해줄 수 있는데.”

내세울 것 없는 아기는 귀여움을 방패로 삼았다.

“랴이도! 가티!”

아리엘은 난감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세 사람이랑 다 같이 가는 건 무리인데……?”


그 순간 마티어스, 루시안, 라이오넬의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한 놈만 살아남는다.’

아기가 먼저 선수를 쳤다.

라이는 비장의 무기, 애교를 꺼내들었다.

보석같은 붉은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아리엘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라이 앙 데려 가요? 우웅?”

너무나 사랑스러운 모습에 아리엘의 마음이 약해지려는 찰나였다.

아기의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을 다소 거칠게 쓰다듬은 루시안이 한 마디로 아기를 제압했다.

“녀석은 곧 낮잠 잘 시간이잖아. 나랑 오붓하게 다녀오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적의 스케줄을 잘 꿰고있던 루시안이 첫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아기가 아니었다.

“으아아앙! 아파!”

루시안이 쓰다듬은 머리가 아프다며 라이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힘 조절을 하지 않고 아기를 만졌다며 아리엘이 루시안을 혼내준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혼나는 루시안을 보며 라이오넬은 히죽 웃음지었다.

그렇게 아들과 손자가 서로를 격퇴하는 걸 보고만 있던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피곤하게 그럴 것 없다. 내가 다 해주지. 검술 시범도, 건물도.”

결국 최종 승리를 차지한 것은 마티어스였다.

아리엘은 아기를 루시안에게 맡긴 뒤, 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둘이 좀 친해지도록 해요.”

“엄먀!”

“아리엘라!”

패배한 두 남자가 다급히 아리엘을 불러봤지만 소용없었다.

루시안과 라이에게 공평하게 뽀뽀해준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사라졌다.

“…….”

분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던 두 라카트옐은 서로를 노려보다가, 각자 마티어스를 이길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쓰라린 목소리로 이를 갈았다.

“마티어스가 영지로 내려간다고 할 때 그냥 놔둘 것을.”

그리고 라이오넬은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찻잔을 엎어버렸어야 하는건데.’

하지만 루시안의 표적은 마티어스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최근 자신에게서 가장 많이 아리엘을 빼앗아가는 아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보니 네 녀석, 아주 요망한 것을 배웠던데…….”

매번 라이오넬이 얼굴 공격과 애교로 아리엘을 녹이는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얼굴 공격으로 아리엘을 꼬시는 기술이 자신에게서 물려내려온 줄도 모르고 루시안은 아기를 자연스레 협박했다.

“그래봤자다.”

손에 잡혀 허공에 매달린 아기가 루시안을 빤히 노려보았다.

루시안이 아기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리엘은 내 얼굴을 제일 좋아하거든. 그래서 나랑 결혼한 거야.”

그 말을 들은 아기가 흠칫했다.

루시안은 유치한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사악하게 아기와 마주보았다.

“넌 절대 날 못 이긴다.”


* * *


에반젤린.

새로 문을 연 여자아이들을 위한 아카데미.

에반젤린은 수많은 귀족 영애들을 학생으로 받으며 제국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제 여자아이들은 사교계 데뷔보다 아카데미 입학을 더욱 먼저 준비했다.

파티에서 인맥을 쌓는 것보다 아카데미 인맥을 중시하게 되었고, 결혼만이 여자 아이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인식은 옅어졌다.

소녀들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학문, 검술, 마법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교육이 시작되니 자연스레 그들이 배운 것을 펼칠 자리도 필요해졌다.

아리엘은 이제 그런 자리들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루시안이 '자리 만들어. 싫으면 그 자리에 앉아있는 놈들을 없애주지.'하면 쉽게 만들어 지겠지만…….’

그럴 경우 반발이 생길 수도 있고, 라카트옐에 대한 악명이 높아질 수도 있었다.

그러던 중 다이아나가 아리엘을 찾아왔다.

다이아나와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아리엘이 무사히 아기를 낳은 후 다이아나는 1년간 모니카 영지로 내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편지로만 활발히 연락을 주고받았던 두 친구는 서로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았다.

“내 귀염둥이!”

“다이아나, 잘 지냈어?”

아리엘을 숨막히게 안은 채 다이아나가 황홀한 목소리를 냈다.

“하아…… 이제 살겠어. 몸속 아리엘 수치가 너무 떨어져서 죽기 직전이었거든.”

다정히 둘러앉은 그들은 편지를 언급하며 수다를 떨었다.

“세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수도에서 제일 큰 디저트 가게를 갔다며?”

“응. 쌍둥이들의 감시를 피해서 만나야 해서 얼마나 힘들었다구!”

근황 이야기가 끝나자 아리엘은 다이아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다이아나, 계획한 일은 잘 끝났어?”

그러자 다이아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귀신은 속여도 내 귀염둥이는 못 속이겠네.”

다이아나는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지난 1년간의 일을 풀어놓았다.

“그때, 네 충고를 듣고 아버지에게 내가 공작가를 이을만한 사람인걸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망설임없이 모니카 공작령으로 떠난 다이아나는 아픈 아버지 대신 공작령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공작령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현명하게 다스려 영지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무려 1년이라는 시간동안 다이아나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공작가와 가솔들을 아끼고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냈다.

“처음에는 돌아오라고 화를 내시던 부모님도 차차 생각을 바꾸셨어.”

모니카 공작도 다이아나의 총명함을 모르던 게 아니었다.

다만 딸이 험한 길을 걸을까 봐 애써 외면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다이아나가 훌륭히 자신의 능력을 보였으니 부모로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니카 공작은 병석에서 다이아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원했던 건 너를 결혼시키고 죽는 것이었지만, 이젠 마음이 바뀌었다.

네가 내 다음 공작이 되는 걸 보고 죽고 싶어졌어.

너는 나와 네 어머니의 좋은 점만 닮았으니, 나보다 나은 공작이자, 가주가 될 거다.]


다이아나가 수도로 돌아오자 모니카 공작은 딸을 데리고 직접 입궁했다.

그리고 황제에게 후계자를 다이아나로 정했음을 이야기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제 딸이 모니카 공작위를 잇게 해주십시오.’

황제는 크게 당황했다.

여아들을 위한 아카데미로 반발을 받은 게 불과 얼마전인데, 공녀를 차기 공작으로 임명해달라니.

귀족계가 발칵 뒤집어질 게 뻔했다.

하지만 그때, 황태자 디트리히가 나섰다.

디트리히는 아리엘 옆에서 다이아나의 재능을 본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다이아나의 능력에 대해 설명했고, 그녀를 지지해주었다.

‘물려주실 나라에 다이아나 모니카 공작이 있다면 든든할 겁니다.’

황제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럼에도 결정을 하지 못했다.

‘정 모니카 영애가 필요하면 황후로 맞으면 되지 않으냐.’

마티어스 대공이 나서지 않았다면 황제는 끝내 반대했을 것이었다.

소식들 들은 마티어스는 황제에게 '변화하지 않으면 고여 썩을 것'이라고 짧은 경고를 남겼다.

황실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직접 나서겠다는 은근한 협박을 담은 메시지였다.

황제는 결국 승낙했지만 비난받지 않기 위해 자신은 쏙 뒤로 빠졌다.

‘공녀가 공작위를 잇는 것은 허락하겠다. 하지만 인정받는 것은 공녀 스스로 해야 할 것이다.’

다이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폐하.’

그녀는 계책을 생각해냈다.

‘공작위를 물려주는 것은 가주의 권한이니 다른 가문에서 대놓고 공격하기 어려워. 하지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다르지.’

다이아나가 이대로 공작이 된다해도 정치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모두들 눈에 불을 켤 것이다.

여자는 어리석어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겠지.

그래서 그녀는 황제에게 청을 했다.

‘모니카 공작가는 대대로 황실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지요. 과거 선조들은 그런 직책을 '재상'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재상 제도를 부활시켜 아버지를 임명해주십시오.’

다이아나의 예상대로 귀족들은 남자인 모니카 공작이 재상이 되는 것에는 반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이아나의 반전 카드는 다음에 있었다.

재상으로 임명된 모니카 공작이 곧장 선언한 것이다.

‘내가 지병이 있으니 내 후계자인 공녀에게 재상 대리를 맡기겠다.’

절차 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귀족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다이아나는 아버지가 영지에서 요양을 하는 동안 재상직을 대리하며 자연스럽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여아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것도 모자라서 재상 대리라니요!”

“당장 모니카 공작을 파면해야 합니다!”

난장판이 된 회의장에서 다이아나를 도운 것은 뜻밖에도 루시안 대공자였다.

“그렇게들 불만이면 스스로 나가는 건 어떤가.”

루시안의 싸늘한 말에 좌중은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일단 맡겨본 뒤에 떠들어도 늦지 않을 듯한데.”

그리하여 다이아나는 기회를 얻었다.

그게 몇 주 전의 일.

반대파들은 다이아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누구도 풀 수 없는 진퇴양난의 외교 문제를 그녀에게 떠넘겼다.

“모니카 공작님이라면 당연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니, 영애도 가능하겠지?”

일부러 조롱하듯 호칭을 영애라고 부르며 맡긴 일에 다이아나는 이를 갈고 매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녀는 그 일을 완벽하게 해결하고 황제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

‘허허, 모니카 가에 이런 인재가 숨어있었는지 몰랐군!’

반대하던 귀족들의 입이 모두 쑥 들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다이아나는 공식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축하해, 다이아나!”

아리엘은 활짝 웃으며 다이아나와 손을 맞잡았다.

정세를 살피며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직접 들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리고 이건 태후 마마께서 추진하신 건데…….”

다이아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여자아이들이 황궁에서 일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게 된대!”

사실 태후에게 그 일을 추진해달라 부탁한 것은 바로 아리엘이었다.

그리고 똑똑한 다이아나가 이것을 간파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다 네 덕이야. 에반젤린 아카데미가 생기지 않았다면, 세실의 선례가 없었다면, 네 충고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어렸을 적 네가 날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다이아나가 눈물을 매단 채 아리엘에게 말했다.

“모두 너로부터야. 아리엘, 고마워.”

두 친구는 다시금 서로를 포옹하며 감동을 나누었다.

잠시 후, 감동의 포옹이 끝난 것은 라이오넬의 난입 때문이었다.


* * *


오늘도 엄마를 차지하기 위해 술수를 쓴 라이오넬은 낯선 여자가 아리엘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다이아나의 눈도 동그랗게 커졌다.

“어머, 저 애가 그럼……?”

그간 수도에 없었기에 다이아나가 소공자 라이오넬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응. 라이오넬이야.”

아기와 다이아나는 짧은 순간 서로를 탐색하고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라이오넬은 눈을 가늘게 떴다.

‘경쟁자지만, 잘 보여야 할 상대군.’

그런 라이오넬을 관찰한 다이아나도 판단을 내렸다.

‘호오, 이거 '계략 라카트옐'이구나!’

다이아나는 마음속에서 마티어스를 무심 라카트옐, 루시안을 치명 라카트옐로 정의해놓고 있었다.

그녀의 목록에 계락 라카트옐, 라이오넬이 추가되었다.

서로를 탐색하던 그들은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휴전을 결정했다.

다이아나는 아리엘을 부추겨 라이를 쫓아내지 않았고, 라이는 다이아나와 아리엘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어른답게 웃으며 아리엘에게 말했다.

“아기가 대공자님을 많이 닮았네.”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루시안이 어렸을 때 꼭 저랬을 것 같아.”

아기의 외모를 찬찬히 뜯어본 다이아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뭐, 눈동자는 널 닮아서 예쁘지만.”

새침한 다이아나의 말투에 아리엘은 까르르 웃었다.

대화가 이어지던 중, 다이아나가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소식 들었니? 황제 폐하 말이야.”

아리엘도 태후에게 이미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조만간 황태자 전하께 황위를 양위하신대. 나이는 많지 않으시지만, 눈이 많이 나빠지셔서 천천히 물려주시려나 봐.”

이 일은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질병이라면 고칠 수 있겠지만 황제의 시력 문제는 병 때문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측근이 음식에 탄 독 때문에 생긴 것이기에, 사라지지 않고 일에 신경을 쓸수록 상태가 점점 나빠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 들었어. 쌍둥이 공주님에 대해서.”

디트리히는 차기 황제로서 다이아나 모니카를 제 사람으로 만든 상태였다.

게다가 그녀는 아리엘의 친우이기에 비밀을 믿고 말할 수 있었다.

“공주님 중 한 분이 사내아이라는 것. 그리고…… 두 분 중 한 분이 성력을 가지고 태어나셨다는 것도.”

아리엘은 차분하게 대답해주었다.

“응. 미르셀라가 여자아이, 미카엘라가 남자아이야. 미카엘라의 진짜 이름은 미카엘인 셈이지.”

다이아나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성력을 가진 쪽은?”

“…….”

아리엘은 자신이 태후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를 회상했다.

그때 자신은 태후의 대답을 듣고 무척 놀랐지만, 초대 황제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나서는 그 사실에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빙긋 웃고 다이아나에게 대답했다.

“성력을 가진 쪽은, 미르셀라. 여자아이야.”


* * *


쌍둥이 공주들의 생일날이 되자, 아리엘은 동생들을 위해 대공가에서 가족 파티를 열었다.

태후와 디트리히가 쌍둥이들을 데리고 대공가에 방문했고, 가족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하는 라이오넬은 아기용 예복을 차려입었다.

“언니!”

“누나!”

와다다 달려온 쌍둥이가 아리엘에게 와락 안겼다.

그들을 안아주며, 아리엘은 태후와 디트리히에게 인사를 했다.

“아기는 어딨어, 누나?”

“아기 볼래, 아기!”

아리엘은 푸른 사자 기사단의 헥터와 놀고 있는 라이오넬 쪽으로 쌍둥이들을 보내주었다.

태후도 아기를 보고 싶은 눈치라 아리엘은 디트리히만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

잠시 걷다가 아리엘은 디트리히에게 물었다.

“레온 오라버니. 다이아나에게 쌍둥이 이야기를 하신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아리엘은 다이아나와 친구이며 그녀를 믿으니 말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차기 황제인 디트리히가 공작가를 이을 다이아나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디트리히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리엘을 마주 보았다.

“이미 제 대답을 알고 계신 것 같군요.”

아리엘은 심호흡을 하고 물었다.

“정말, 후계자를 미르셀라로 지목하실 생각이신가요?”

디트리히가 무언의 긍정을 표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얼마 전 신전에 서약했습니다. 평생 제국을 위해 살고, 제 핏줄을 남기지 않기로.”

그의 얼굴에 잠시 씁쓸한 감정이 지나갔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디트리히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후계는 미르셀라 저 아이가 될 겁니다. 물론 무수한 반대를 이기고 싸워야겠지만요.”

한편, 아기를 보러 갔던 쌍둥이들은 거대한 몸집의 헥터와 맞닥뜨렸다.

“우와…… 엄청 커.”

“산만 해.”

라이오넬을 던졌다가 받아주기를 반복하던 헥터가 쌍둥이들을 발견하고 껄껄 웃었다.

“공주님들 오셨습니까!”

쌍둥이들은 서로 마주 보고 동시에 중얼거렸다.

“목소리도 되게 커…….”

잠시 아기를 구경하던 쌍둥이들은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르셀라는 아기를 보기만 하고 아리엘에게 돌아왔고, 미카엘은 헥터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헥터는 미카엘에게 푸른 사자 기사단 이야기와 자신이 아리엘의 호위를 맡았던 이야기를 자랑스레 풀어놓았다.

심지어는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한 아리엘 어린 시절 이야기도 줄줄 늘어놓았다.

“그래서 아기 마님이 사슴 인형 위에서 잠드셨는데, 그 모습을 보고 다들 심장이 쿵……!”

아리엘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미카엘이 그 얘기에 홀딱 빠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리엘에게 돌아온 미르셀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리엘의 손을 붙잡았다.

“왜 그러니, 미르?”

아리엘이 다정하게 묻자 미르셀라가 고민이 많은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있잖아, 언니. 할마마마가 그러는데 내가 황제가 되어야 한대.”

아리엘은 미르셀라의 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너는 하고 싶니?”

그러자 미르셀라가 뜻밖에도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언니가 하라고 하면.”

아리엘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미르셀라는 금세 다시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나 이전에 여자애는 없었대…….”

아리엘은 무릎을 굽혀 미르셀라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그렇지 않아.”

미르셀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응. 예전에도 있었어.”

그리고 아리엘은 귓속말로 소곤소곤 무언가를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미르셀라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그럼 나도 할래! 황제 돼서 아무 허락도 안 받고 언니 마음대로 만나러 올래!”

아리엘은 웃고 미르셀라와 손을 잡았다.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자.”

그때 멀리서 미카엘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와서 외쳤다.

“누나! 나 푸른사자 기사단에 들어갈 거야!”

응? 갑자기?

아리엘이 영문을 몰라 바라보는데 미카엘 뒤에서 헥터가 머리를 긁적이는 게 보였다.

“헥터? 무슨 일이에요?”

“그, 그게…… 제가 아기 마님 호위했던 이야기를 했더니 미카엘님도 하겠다고 하시지 뭡니까요.”

그 사이 미르셀라와 미카엘은 왁왁거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황제가 되면 언제든 언니 만나러 올 수 있어!”

“푸른 사자 기사단이 되면 누나를 레이디로 모신댔어!”

“언니는 내 거야!”

“아냐, 누나는 내 거야!”

그때 갑자기 나타난 루시안이 쌍둥이들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아리엘은 내 거다.”

결국 그는 쌍둥이들을 울리고 말았다.


* * *


선물을 전해준 디트리히는 가족 식사 전에 자리를 떠났다.

곧 황위를 물려받을 예정이라 너무 바쁜 탓이었다.

디트리히가 돌아가기 전, 아리엘은 그를 불러세웠다.

“오라버니.”

그리고 그녀는 디트리히에게 가지런히 정리된 문서 묶음을 건넸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든 디트리히는 문서를 펼쳐보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이걸…….”

아리엘이 내민 것은 최초의 황제에 대한 문서였다.

그녀와 브루노어가 조사한 것을 토대로 정리한 초대 황제의 역사.

문서에는 드래곤 라키엘과 초대 황제의 관계, 초대 황제 무덤의 비석에 적힌 라키엘의 편지까지 상세히 나와 있었다.

“나중에 미르셀라가 황제가 되는 것을 누군가 반대하거든, 이것을 제시하세요.”

그리고 그녀는 확고하게 못 박았다.

“누구도 그 애의 정통성에 말을 보태지 못할 거예요.”

제국을 세운 최초의 황제는 여자였다.

혈혈단신으로 드래곤과 계약을 맺고 나라를 일으켜 세운 초대 황제가 여자인데 누가 감히 미르셀라가 여자라는 이유로 핍박할 수 있을까?

“만일 이 사실을 알고서도 반대한다면…… 그들은 아리엘라 라카트옐을 상대해야 할 거예요.”

라카트옐 공식 서열 1위이자, 대륙 최고의 마법사인 아리엘의 선언이었다.

디트리히는 서늘하기까지 한 아리엘의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옅게 미소지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의심의 여지없이 너무나 라카트옐 그 자체였다.


* * *


디트리히가 자리를 떠난 후 가족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마티어스와 루시안, 그리고 라이오넬은 서로 아리엘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다 식당 벽 하나를 날려버렸다.

그럼에도 싸우는 걸 멈추지 않았는데,

“그만.”

작고 맑은 목소리 하나가 들리자마자 그들은 주인을 만난 맹수들처럼 얌전해졌다.

아리엘은 마법으로 식당 벽을 완전히 복구한 뒤, 세 라카트옐을 자리에 앉혔다.

“또 싸우면 혼나요.”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라카트옐 남자들을 손쉽게 제압하는 아리엘의 모습에 사용인들은 모두 존경과 사랑의 눈빛을 보냈다.

저택 안을 휩쓰는 라카트옐 전쟁에 끼어 고통받는 것은 사용인들이기 때문이었다.

‘아기 마님이 안 계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

‘우린 매일매일 등 터져 죽었을 거야.’

그들은 라카트옐 저택의 실세이자 진정한 주인이 아리엘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했다.

파티 자리는 떠들썩하고 즐거웠다.

쌍둥이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아름다운 케이크가 등장했고, 아리엘은 쌍둥이들에게 각각 명마 한 필씩을 선물했다.

쌍둥이의 호위로 참석한 세실과 아리엘의 지인으로 초대받은 다이아나도 쌍둥이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마티어스는 따로 선물을 하지 않고 쌍둥이들에게 물었다.

“갖고 싶은 건?”

그리고 쌍둥이들의 대답을 예상한 듯 무섭게 덧붙였다.

“아리엘라 말고.”

쌍둥이들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한가지씩 원하는 것을 말했다.

“푸른 사자 기사단에 넣어주세요!”

이 소원은 미카엘의 것이었고,

“헤메티아 왕국 주세요!”

이것은 미르셀라의 소원이었다.

헤메티아 왕국은 대륙의 또 다른 나라로서, 제국이 정복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 나라였다.

해맑은 미르셀라의 소원에 마티어스가 대답했다.

“전쟁하면 푸른 사자 기사단을 보내주지.”

훗날, 호사가들은 헤메티아가 미르셀라의 손에 떨어진 건 바로 이 순간이나 다름없었노라고 회상했다.


식사가 끝나가는 가운데 아리엘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며 회귀 전의 자신을 잠시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는 누군가를 위해 우는 법을 알지 못했고, 그녀를 위해 울어줄 사람도 가지지 못했었다.

하지만 운명은 바뀌었다.

이제 아리엘 곁에는 내 사람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이 아주 많아졌으니까.

라카트옐 남자들, 저택 사람들, 친구들, 황실 가족들…….

이 행복한 순간에 아리엘은 기억 마나를 채운 마도구를 꺼내, 사람들을 불렀다.

“다들 여기 보세요!”

아리엘의 부름에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도구를 발동시켜 그들의 모습을 남겼다.

찍힌 모습을 보려고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마님도 나오셔야지요.”

집사 알렌이 아리엘을 이끌어 가족들 틈에 세워주었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어깨를 감쌌고, 루시안이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라이오넬은 아리엘의 다리에 매달려 머리를 부볐다.

“한 번 더 남기시지요.”

아리엘은 진심을 다해 활짝 미소 지었다.

사진 마도구 속에 떠오른 장면에는 그녀의 가족들이 가득했다.

아리엘은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엄마, 보고 계신가요?’

부디 보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행복해진 지금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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