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시간은 흘러 5월의 가장 따스한 날, 결혼식이 열렸다.
제국은 이날을 국경일로 선포하였고, 결혼식장으로 황궁의 거대한 홀이 열렸다.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홀로 꼽히는 화이트 캐슬이었다.
그렇게 수천 명이 북적이는 화이트 캐슬의 가장 조용하고 깊숙한 곳.
흰 꽃으로 장식된 신부 대기실에 아리엘은 시녀들과 함께 앉아있었다.
“아리엘님, 떨리지 않으세요?”
“하객이 만 명이 넘는대요! 일부 사람들은 식을 보지도 못한다고요.”
아리엘은 새벽부터 일어나 마사지와 향유 목욕을 하느라 몽롱한 상태였다.
게다가 지난밤 꾼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에, 시녀들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뭔가 불길한 꿈을 꾼 것 같았는데…….’
꿈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굉장히 두렵고 불안한 꿈이었던 것 같다.
결혼식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다이아나의 말로는 신부가 결혼을 앞두고 우울하거나 불안함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메리지 블루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아리엘은 루시안과의 결혼이 두렵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욱 왜 그런 꿈을 꾼 것인지 궁금했다.
‘꿈에 엄마도 나왔었지.’
엄마가 꿈에 나온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어렸을 적 후작가에서 학대를 당할 때나 가끔 꿈에서 엄마를 만나곤 했었다.
아리엘은 오랜만에 만나는 엄마가 반가워서 매달렸지만, 꿈속에서 만난 엄마는 아리엘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꿈에 대해 생각하던 아리엘은 시녀들이 머리를 빗겨주는 동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직 웨딩드레스가 도착하지 않아서 아리엘은 실내용 원피스 위에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똑똑 울리고 커다란 상자를 든 수잔과 헬렌이 들어섰다.
“수잔.”
졸던 아리엘은 수잔을 보고 활짝 웃었다.
결혼식 준비 동안 수잔은 집안일을 다른 하녀들에게 맡겨두고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아리엘을 돌보는 일 외에는 모두 아리엘의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데에 시간을 쏟았던 것이다.
마담 헬렌이 아리엘에게 인사로 볼키스를 한 뒤 말했다.
“드디어 웨딩드레스를 입을 시간이에요, 아리엘님. 어제 새벽에 마무리 작업이 끝났답니다.”
수잔이 드레스를 만들었고, 그 위의 장식은 헬렌이 마무리했다.
수잔이 어찌나 드레스에 공을 들였던지, 드레스라면 질리도록 본 헬렌조차 이건 장인의 역작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신부인 아리엘은 아직 웨딩드레스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고마워요, 수잔. 헬렌도.”
수잔이 아리엘을 안아주며 말했다.
“더 잘 만드는 장인들도 있지만, 제가 직접 해드리고 싶었어요.”
아리엘도 수잔을 꼭 껴안으며 대답했다.
“수잔이 만들어준 것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살짝 눈가를 훔친 수잔이 아리엘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자. 이제 입어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우신가 보게요.”
아리엘은 헬렌과 시녀들의 도움으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수잔이 아리엘 체형에 딱 맞게 만든 벨 라인 웨딩드레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리엘은 처음 라카트옐 가에 왔을 때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꼈다.
“……너무 예뻐서 손대기가 무서워요.”
아리엘은 수잔이 한땀 한땀 정성을 들여 만들었을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살며시 들었다.
드레스를 입은 아리엘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수잔이 결국 눈가를 훔쳤다.
“세상에.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것 같네요, 우리 아기 마님.”
아리엘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어렸을 때 수잔이 웨딩드레스 만들어준다고 했을 땐, 그 말이 이뤄지지 못할 줄 알았어요.”
“근데 이루어졌네요, 아기 마님. 내 아기 공주님이 이렇게 결혼을 하다니…….”
아리엘과 수잔은 부둥켜안고 행복을 나누었다.
학대당한 채 대공가에 왔던 아리엘을 보듬어 안아준 수잔은 아리엘에게 친엄마와 같았다.
삭막한 대공가에서 지내다 사랑스러운 아리엘을 만난 수잔에게도 아리엘은 친딸 같은 존재였다.
아리엘은 결혼해서도 수잔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좋았다.
‘엄마가 있다면…… 꼭 이런 느낌이겠지?’
수잔은 눈물을 쏟아낸 후, 결혼식에서는 울지 않겠다며 얼굴을 정돈하러 나갔다.
아리엘은 이제 시녀들 도움으로 머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방문객이 온 것은 그때였다.
“내 새끼, 안에 있느냐?”
찾아온 것은 아리엘의 할머니, 태후였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리엘을 본 태후는 너무 놀란 나머지 뒤로 넘어져서 시녀들이 황급히 받쳐주었다.
“내, 내 손녀가 천사라니. 천사였다니!”
“할마마마……!”
한바탕 소동이 진정되고 나서 태후는 아리엘에게 면사포 베일과 그것을 고정하는 고정 빗을 선물했다.
태후의 시녀가 소곤소곤 설명했다.
“이 베일은 엘프의 옷감이라고도 불리는 세네르 직물이랍니다. 가볍고도 아름답지요. 마모나 변색이 되지 않아서 백 년은 그대로입니다.”
태후가 촉촉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건 면사포 고정 빗이란다. 몇십 년 전 내가 결혼할 때 썼던 물건이지. 황실 예물이니 네 자식에게 물려줘도 될 거란다.”
태후가 선물한 고정 빗은 자잘한 참깨 같은 다이아몬드가 전체에 박힌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그리고 이건 네 삼촌, 황제의 선물이란다.”
태후는 황제가 아리엘에게 새로 하사한 공주의 티아라 또한 전해주었다.
아리엘이 면사포를 쓰고 고정 빗으로 고정한 뒤, 티아라를 쓰자 식장 안으로 갈 준비가 거의 끝났다.
그 모습을 본 태후도 결국 눈물을 흘렸다.
“네 어미인 로잘린드가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이렇게 예쁜 딸이 결혼하는데…….”
태후가 아리엘을 부둥켜안았다.
아리엘은 태후의 품속에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결혼하는 날에는 원래 엄마 생각이 나는 걸까?
지난밤 꿈에서 나타났던 엄마를 생각하자 마음이 아려왔다.
감정을 추스른 태후는 아리엘의 뺨에 입을 맞춘 뒤 방을 나갔다.
“네 앞날을 축복한다, 아가야.”
태후까지 사라지자 헬렌이 마지막 매무새를 만지며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준비됐네요. 부케만 챙기면 되겠는걸요?”
그때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꽃다발은 내가 주지.”
루시안?!
아리엘은 루시안의 목소리를 듣고 후다닥 일어나서 커튼 뒤로 숨었다.
“루시안 안 돼요! 신부랑 신랑은 서로 보면 안 된댔어요!”
루시안이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아리엘이 숨은 커튼 앞에 키 큰 남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리엘은 혹시 루시안이 커튼을 확 젖혀버릴까 봐 긴장하며 커튼을 꼭 모아 쥐었다.
루시안 앞에선 긴장을 늦춰선 안 돼.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잠시 커튼 앞에 서 있던 루시안은 헬렌과 시녀들을 내보낼 뿐, 커튼을 걷고 들어오지 않았다.
“…….”
바깥이 조용해지자 아리엘은 조그맣게 말했다.
“얼른 가요, 루시안.”
루시안에게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어딘지 어둡고 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얼굴 좀 보여줘. 도저히 못 참겠어서 왔으니까.”
아리엘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망설였다.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루시안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녀는 한참 만에 결국 커튼을 걷고 루시안 앞에 나섰다.
“…….”
루시안은 아리엘이 커튼 사이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리엘의 우윳빛 피부와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오고, 그녀가 입은 웨딩드레스와 면사포가 차례로 보였다.
루시안의 입술이 벌어졌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숨을 멈춘 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인간들의 결혼 예식 따위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몇천 년 만에 라카트옐에게 찾아온 크림슨 하트는 아무래도 그의 심장을 멈추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루시안은 은은히 볼을 붉힌 아리엘을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중얼거렸다.
“넌 날 파멸시키러 온 악마가 분명해.”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난데없이 억울해졌다.
뭐야. 다들 입에 발린 소리라도 천사 같다고 해줬는데, 너무해.
조그만 눈썹을 세게 모으자 루시안이 다가와 그녀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는 아리엘의 손목을 가두듯이 쥐었다.
“솔직히 말해서 결혼식은 걷어치우고 당장 집에 가둬두고 싶은데.”
아리엘은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루시안이 그녀의 손목을 들어 올려 안쪽 여린 살갗에 입술을 눌렀다.
그의 푸른 눈이 이채를 발하며 말했다.
“어차피 머지않아서 그렇게 될 거지만.”
응? 그건 무슨 뜻…….
아리엘이 어리둥절해서 눈을 크게 뜨는 사이, 루시안이 상자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자. 세 번째 예물이야. 결혼식 날 주기로 약속했었지.”
맞아. 잊고 있었다.
아리엘은 불안함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루시안의 붉은 입술이 오만하게 미소를 그렸다.
“네 거야.”
그가 상자를 열고 안에 든 것을 보여주었다.
안에 든 것은 심해같이 짙은 푸른색을 띤 구슬이었다.
겨울밤 밤하늘을 모두 녹여 섞은 뒤 굳히면 이런 모습일까?
아리엘은 그 신비로운 기운에 홀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게 뭐예요, 루시안?”
루시안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우월한 종족의 태생적인 여유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내 일부.”
“네?”
아리엘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런데 루시안이 구슬을 손에 들고 그의 소드 마나를 흘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구슬 안에서 푸른 불꽃에 휩싸인 거대한 사자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아리엘이 놀라서 숨을 삼키자 루시안이 그녀의 귓전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 시종마야.”
아리엘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런 생물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시종마요……?”
루시안이 기분 좋은 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드래곤은 자신의 힘을 나눠서 시종마를 만들 수 있어. 내 소드 마나로 만들었던 마정석 팔찌처럼, 내 기세의 응집체지.”
그가 흡족하게 덧붙였다.
“살아있는 것을 만든 건 처음이야. 이것은 널 지켜주고 네 뜻이면 뭐든 할 거야.”
그때 푸른 화염으로 타오르는 듯한 사자가 불쑥 소리를 냈다.
낮게 그르릉거리는 소리는 깊은 용광로 속에서나 들릴 법한 소리였다.
아리엘이 놀라서 눈만 깜박이고 있자, 푸른 사자가 아리엘에게 우아하게 다가와 그녀의 몸통에 머리를 비볐다.
시원한지 뜨거운지 모를 기운이 끼쳐왔다.
아리엘은 본능적으로 이 사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도 시종마라고 불리는 이 신비로운 짐승이 마음에 들었다.
‘왠지 어렸을 적 루시안을 보는 것 같아.’
아리엘은 용기를 내서 푸른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잠시 보고 있던 루시안이 짧게 혀를 찼다. 그러자 사자가 스르륵 몸을 투명하게 바꾸고 사라졌다.
“어? 사라졌어요.”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시안이 그녀의 손에 푸른 구슬을 쥐여주며 말했다.
“네가 부르면 언제든 돌아올 거야. 네 거니까.”
가까이 다가온 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아리엘과 이마를 맞대었다.
“이제 칭찬해줘.”
그렇게 말한 루시안이 못 참겠다는 듯이 아리엘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서로의 호흡이 뒤섞이고 달콤한 숨결이 넘나들었다.
입맞춤이 이어지자 그동안 꿈 때문에 불안했던 아리엘의 마음은 스르르 녹아버렸다.
‘그래. 루시안인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시안과 결혼하는 거잖아.
아리엘은 이 결혼에 누구보다도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루시안을 사랑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키스가 계속되자 아리엘은 결혼식에 늦을까 봐 루시안을 밀어냈다.
루시안이 여운이라도 느끼듯 그녀의 코끝에 입 맞추며 말했다.
“하…… 이제 부케까지 가졌으니 완성이군.”
그제야 아리엘은 그가 가져온 하얀 카라꽃 부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뺨을 붉히며 말했다.
“아직 아니에요.”
그리고 그녀는 부케에서 작은 꽃 한 송이를 빼서 루시안의 재킷 주머니에 꽂아주었다.
부케와 부토니에. 신랑이 신부와 같은 것으로 장식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를 장식한 꽃은 청초하고 예뻤지만, 루시안의 아름다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아리엘의 꽃 한 송이가 자신에게 온 것은 본 루시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마티어스가 노크와 함께 들어왔다.
신부 아버지가 신부를 식장으로 데려가는 순서가 다가온 것이다.
들어와서 루시안을 발견한 마티어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루시안을 노려본 뒤 아리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자, 나갈 시간이다. 아리엘라.”
그리고 루시안에게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아빠가 왔으니 신랑은 나가주실까.”
루시안이 자리를 떠나며 차갑게 대꾸했다.
“어차피 내게 넘겨줄 손, 오래 붙잡고 있을 생각 마.”
두 라카트옐 사이에 위험한 기세가 흘렀다.
아리엘은 못 말린다는 듯이 웃고는, 살며시 마티어스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가요, 마티어스님.”
엄마, 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건 어쩌면 제 숙명인가 봐요.
그래도 전 좋으니, 부디 제 행복을 빌어주세요.
* * *
루시안이 떠난 뒤, 아리엘과 마티어스는 신부대기실에서 나와 결혼식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식장 안으로 들어가려면 야외를 통해야 했기에 아리엘은 드레스를 입은 채 조심조심 걸었다.
꽃이 뿌려진 하얀 비단 천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길.
보조를 맞춰 걸어주던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아리엘라. 내가 네게 처음 줬던 선물, 기억나느냐?”
아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밖에 나가셨다가 절 위해 사 오셨잖아요. 하얗고 예쁜 성 모양 오르골을요.”
“그래. 그랬었지. 그 성 이름이 뭔지도 내가 말해줬던가.”
“아뇨. 하지만…….”
아리엘은 멈춰 서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수잔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그 오르골 모양은…….
떠올리자마자 아리엘의 입술에서 저절로 말이 새어 나왔다.
“화이트 캐슬.”
마티어스가 기특하다는 듯 수려하게 웃었다.
“기억이 나는 모양이구나.”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갑자기 알게 된 사실에 놀라 말했다.
“맞아요. 화이트 캐슬 모양 오르골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있는…….”
그리고 그녀가 눈을 들었을 때, 아리엘은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웅장한 화이트 캐슬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와.’
어릴 적 자주 가지고 놀았던 오르골의 모양과 완전히 똑같은 성이었다.
눈부시게 하얀 석조를 깎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세운 성.
외할머니인 태후가 손녀딸을 위해 열어준, 황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홀이기도 했다.
어느새 아리엘 바로 옆으로 다가온 마티어스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혹시 이것도 보고 싶을까 해서.”
마티어스가 내민 것은 그가 아리엘에게 선물했던 화이트 캐슬 모양 오르골이었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녀장에게 말해 네 방에서 가져왔지.”
아리엘은 그것을 받아들고 눈에 담은 뒤, 다시 한번 실제 화이트 캐슬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워요.”
아리엘이 오르골의 태엽을 돌리자 7년 전과 똑같이 맑고 영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아리엘의 마음속에는 행복함이 가득 차올랐다.
지금 마티어스는 대공가에 와서 살았던 그녀의 삶 전부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따스하고, 포근하고, 보호받는 기분을.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때 나는 몰랐다. 네가 우리에게 이만큼 소중해질 거라는 걸.”
그가 자조하듯 작게 웃었다.
“아니.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지만 반쯤은 모른 척했지.”
라카트옐은 아리엘이 크림슨 하트라는 것과 그녀의 심장이 자신들의 저주를 푸는 열쇠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이 물건을 본 순간, 네 생각이 났었다. 네가 이렇듯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아이라는 걸 느꼈는지도 모르겠어.”
“마티어스님…….”
아리엘은 결국 울먹이며 그에게 안겼다.
아직도 마티어스의 키는 너무나 크고, 그녀는 작아서 어릴 적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를 꼭 안아준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눈물을 훔쳐주고는 말했다.
“자. 네가 주인공인 날이다. 웃는 모습 좀 보자.”
아리엘은 젖은 눈으로 활짝 웃어 보였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면사포를 내려준 뒤, 자신의 큰 손 위에 아리엘의 손을 얹었다.
“이제 들어가자꾸나.”
화이트 캐슬의 높은 문이 천천히 열리고 신부의 행진이 먼저 시작되었다.
아리엘은 달콤한 선율에 맞춰 천천히 홀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화동인 꼬마 사촌 동생들, 미르셀라와 미카엘라가 바구니에서 꽃을 꺼내 그녀의 앞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실감이 나는지 갑자기 심장이 떨려왔지만 마티어스의 단단한 손이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멀리에서 키가 크고 늘씬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보통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자아내는 아우라와 어떤 것이든 제멋대로 다룰 수 있는 매혹을 지닌 사내였다.
‘루시안.’
잠시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을 취한 듯 바라보고 있던 루시안이 더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리엘라.”
짙은 희열에 차 있는 그의 목소리가 그녀를 부르자 아리엘의 몸이 짧게 전율했다.
루시안은 마티어스의 손에서 아리엘의 손을 이어받고 그녀를 앞으로 이끌었다.
‘마티어스님…….’
아리엘은 뒤를 돌아서 마티어스와 눈을 마주쳤다. 마티어스의 다정한 끄덕임이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신부와 신랑이 행진을 하는 동안 아리엘의 손을 진득하게 얽어 쥔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속삭였다.
“이제 도망은 허락 안 해. 내 옆에서 살고, 내 옆에서 죽는 거야.”
아리엘은 작게 웃고 말았다.
그녀가 그보다 더 바라는 게 있을까?
아리엘은 말없이 그의 손을 꼭 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드디어 신부와 신랑이 행진을 마치고 주례 앞에 서자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아리엘은 주례석에 있는 브루노어와 눈짓으로 인사했다.
브루노어가 기쁨에 찬 눈빛으로 서약서 두루마리를 펼쳤다.
결혼식 순서가 이어지는 동안 아리엘은 루시안의 시선이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찌나 노골적인지 면사포로 가려진 얼굴이 뚫릴 것만 같았다.
‘루시안, 식순에 집중 안 하고…….’
아리엘은 당황한 나머지 면사포 속에서 얼굴을 붉혔다.
다시 생각해도 라카트옐 남자의 머릿속은 알 수가 없다니까.
주례인 브루노어가 서약서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 당신은 아리엘라 로벨린 데 슈테인을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존중할 것을 맹세하십니까?”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이 아리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맹세하지. 내가 죽음을 맞는 날까지.”
아득한 시간을 사는 드래곤에게는 그야말로 영원을 약속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두근대며 벅차올랐다.
이어서 아리엘에게도 같은 질문이 주어졌다.
“아리엘라 로벨린 데 슈테인, 당신은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을 남편으로 맞아…….”
그녀는 루시안과 눈을 마주친 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제 심장이 멈추는 날까지.”
말 그대로 그녀와 루시안은 언제가 되든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것이다.
그때까지 절대 서로를 떠나지 않으리라.
아리엘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신했다.
시선을 돌리자 주위에서 그녀의 친구들과 태후, 그리고 수잔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진 아리엘은 문득 어젯밤 꿈에 나타났던 엄마를 떠올렸다.
자신을 염려하는 듯했던 엄마의 모습…….
아리엘은 마음속으로 엄마에게 속삭였다.
‘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마침내 제가 있을 곳을 찾았으니까요.
아리엘은 살짝 붉어진 눈망울로 모두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박수 소리와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리엘은 쏟아져 내리는 축하와 축복 속에서 서약을 마쳤다.
그렇게 서약과 반지 교환식이 끝나자 브루노어가 결혼식의 마지막 순서를 시작했다.
“제국의 수호신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결합을 정식으로 인정합니다. 신랑과 신부, 키스로 모두 앞에 선언하세요.”
그러자 여태 식순에 관심도 없던 루시안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그는 한 팔로 아리엘을 번쩍 안아 올리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면사포를 걷었다.
“널 행복하게 할 거야. 반드시.”
아리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도 행복한걸요.”
루시안이 그녀를 안은 채 진하게 키스했다.
수천 명이 넘는 하객들에게서 우레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결혼식의 어느 순간보다 의욕적인 그의 열렬한 입맞춤을 받으며, 아리엘은 루시안이 이 순서만 기다려 온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루시안, 설마 키스만 기다린 건 아니죠?
‘……정말 못 말린다니까. 내 드래곤은.’
* * *
제국 역사상 가장 성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결혼식이 끝났다.
본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피로연장으로 이동했고, 아리엘과 루시안 곁에는 가까운 사람들만 남았다.
그중 단연코 가장 흥분한 것은 화동을 맡았던 꼬마 사촌들이었다.
“우리 오늘 결혼했다! 결혼했다!”
꽃바구니를 든 일곱 살짜리 미르와 미카가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외쳤다.
꼬마들을 붙잡은 유모가 서둘러 그들을 타일렀다.
“미르셀라, 미카엘라 공주님. 오늘은 공주님들이 결혼한 게 아니라 아리엘님이 결혼하신 거예요. 공주님들은 축하하러 오신 거랍니다.”
꼬마들은 잘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동하면 결혼하는 거 아니야? 나랑 누냐랑.”
“나랑 언니랑.”
쌍둥이 아니랄까 봐 똑같은 말을 하는 꼬마들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 루시안은 웃음기 하나 없이 대답했다.
“아니다. 결혼은 나와 아리엘라가 하는 거지.”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애기들 말인데 뭘 또 정색하고 그래, 이 남자는……?
루시안을 무서워하는 쌍둥이들이 후다닥 아리엘 뒤에 숨어서 고개만 뺐다.
“결혼하면 뭐 하는 건데?”
응?
아리엘은 순수한 쌍둥이들의 질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결혼하면 뭐하냐고?
어, 그게…….
아리엘은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때 루시안이 아리엘을 쌍둥이들에게서 빼앗으며 말했다.
“결혼한다는 건 이런 거다.”
그가 보란 듯이 아리엘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온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앗. 저기, 루시안! 여기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요……?
말릴 틈도 없이 쏟아지는 공세에 아리엘은 어질어질해졌다.
쌍둥이들은 자체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틈으로만 보며 중얼거렸다.
“우오오…….”
만족할 만큼 키스를 남긴 루시안이 쌍둥이들을 보며 승리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런 게 결혼한 사람의 권리지.”
그의 눈에 마치 이런 글자가 쓰여 있는 듯했다.
‘내 거다.’
그 말을 들은 쌍둥이들이 자기들끼리 의미심장하게 마주 보았다.
쌍둥이들이 뭔가 일을 꾸밀 때 그런다는 것을 아는 아리엘이 불안함을 느낀 순간.
쌍둥이들이 아리엘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
달려든 쌍둥이들은 두 마리 강아지처럼 아리엘에게 뽀뽀 세례를 했다.
간지러운 뽀뽀를 받은 아리엘이 소리내 웃자 꼬마들이 환호를 질렀다.
“와! 우리도 결혼했따!”
그리곤 루시안이 떼 놓을 틈도 없이 쪼르르 달려서 나가버렸다.
루시안이 어이없다는 듯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철부지 쌍둥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태후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제 우리도 피로연장으로 가지요.”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며 태후는 아리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내 새끼,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천천히 오거라.”
사람들이 인사를 하며 나가는 가운데, 언제 왔는지 디트리히가 아리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리엘라.”
루시안이 차가운 눈으로 디트리히를 응시했다.
빨리 꺼지라는 듯한 시선과 함께 날카로운 기세가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그런 루시안을 한번 바라본 디트리히가 맑고 상냥한 어조로 아리엘에게 말했다.
“언제나 행복을 빌겠습니다.”
아리엘은 미소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디트리히는 아리엘에게 화사하게 웃어준 뒤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대공자. 신혼여행 떠나기 전에 이야기 좀 하면 좋겠는데. 저번에 이야기하려던 건이야.”
디트리히의 어조가 진지해서 아리엘은 둘이 나눌 이야기가 뭔지 궁금해졌다.
침묵하던 루시안이 서늘하고 무관심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했다.
디트리히가 아리엘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말했다.
“오라비로서 항상 당신의 편이 될 테니 힘든 일은 뭐든 상의하세요.”
“네, 레온 오라버니.”
때마침 디트리히의 부관이 부르러 왔기에 디트리히는 눈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디트리히가 가자,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루시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오라버니란 말을 진작 없앴어야 했는데.”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내가 오라버니란 말을 쓰는 걸 싫어하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오라버니라는 말을 없앨 건 또 뭔가요?’
라카트옐 남자들 사고방식은 정말 예측을 할 수가 없다니까.
그때 루시안이 입속말로 섬뜩하게 읊조렸다.
“아니면 오라비라 부를 사람을 없애든가.”
응?
그 말은 혹시 레온 오라버니를…….
아리엘은 얼른 삐약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루시안이 아리엘의 손목을 감싸 쥐며 선수를 쳤다.
“날 달랠 생각 마. 어린 것들에 오라비란 것까지…… 너와 피 섞인 것들이라고 봐줄 순 없으니.”
그리고 루시안은 아리엘의 손등을 제 엄지로 지긋이 문질렀다.
마치 아까 디트리히의 입맞춤을 지우려는 듯이.
“난 항상 진심이거든.”
“…….”
태생적으로 포식자 위치에 있는 루시안이지만 아리엘에 관련된 일에는 도무지 방심을 할 수가 없었다.
아리엘의 관심을 벌레들에게 조금이라도 빼앗길까 불안해서.
그런데 잠시 가만히 그를 보고 있던 아리엘이 꼬물꼬물 다가오더니 그의 귓가에 손을 댔다.
루시안은 그녀가 제 귀에 말을 하도록 고개를 깊이 내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해 봐.”
가까이 다가온 아리엘의 간지러운 숨결에 홀린 사이, 그녀가 속살거리며 말했다.
“사랑해요.”
루시안은 가슴 한가운데에서 거센 심장박동을 느꼈다.
아는 사실인데도 매번 들을 때마다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틀어 아리엘과 눈을 마주쳤다.
루시안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엘이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속삭였다.
“여유를 좀 가져봐요. ……내 신랑님.”
거기까지 듣고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손에서 힘을 스르르 풀어버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리엘이 달콤한 빛깔의 눈동자를 장난스레 빛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말했잖아, 나한테 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리엘이 그의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
여보. 두 글자로 된 아주 달콤한 말을.
“이거요?”
처음 들은 말과는 달랐지만 루시안은 얼이 빠진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이 기대하는 듯이 살짝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정지됐던 사고 회로가 돌자 그의 귀와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다시 말해 봐.”
겨우 정신을 차린 루시안은 다급하게 아리엘을 붙잡았다.
“어떤 거요? 처음 거? 두 번째 거?”
“둘 다. 아니, 두 번째 거.”
아리엘이 애써 새침한 표정을 짓더니 돌아섰다.
“안 말할래요.”
“다시 말해달라니까.”
“싫어요.”
“얼른.”
“기억 안 나요.”
결국 루시안은 그녀에게 항복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엘에게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함락되지 않을 수 있을까.
“……넌 날 다루는 법을 너무 잘 알아.”
그를 연인에서 남편으로 승격시키는 마법의 단어 하나로 아리엘은 가볍게 그를 달래고 승리를 얻어냈다.
넌 내가 네 말 한마디에 어디까지 행복해질 수 있는지 모르겠지.
몰라도 상관없어.
그 조그만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넌 이미 내 전부니까.
“우리도 가요.”
그를 이끄는 아리엘을 따라가며 루시안은 바보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갓 결혼한 신랑이 지을 수밖에 없는 행복한 웃음이었다.
* * *
아리엘과 루시안의 결혼 피로연은 사흘 동안 열리게 돼 있었다.
심지어 사흘째 아침에 두 사람이 신혼여행을 떠난 뒤에도 밤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황실의 금지옥엽과 라카트옐의 후예가 결합하는 '국가 경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웨딩드레스를 벗은 아리엘은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고 연회에 참석했다.
“꺅! 아리엘, 너 너무 예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리엘의 모습에 홀딱 반했던 친구들은 피로연 드레스를 입은 모습에 다시 반해버렸다.
우아하고 그림 같아 보이는 벨 모양 웨딩드레스와는 달리 피로연 드레스는 청순하면서도 화사했다.
아리엘의 가냘픈 몸매를 강조하도록 허리선 아래가 그대로 떨어지는 레이스 드레스였던 것이다.
“이제 첫날밤이 기다리고 있으니 떨리겠다. 그렇지?”
멀찍이 마티어스와 서 있는 루시안을 힐끔 본 다이아나가 속닥거렸다.
“그건…….”
아리엘은 하얀 뺨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궜다.
결혼식 때 너무 떨려서 그 이후에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첫날밤 생각을 하니 또 가슴이 콩닥거렸다.
세실이 아리엘의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거렸다.
“괜찮다. 지금은 생각하지 말고 맛있는 것이나 먹자, 아리엘.”
“응.”
안 그래도 긴장하는 바람에 아리엘은 전날부터 음식을 많이 먹지 못했었다.
결혼식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배고픔이 느껴졌다.
아리엘의 친구들은 신부의 속에 무리가 되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음식들을 열심히 배달해주었다.
“자. 귀염둥이야, 아- 해봐. 얇게 저민 연어로 치즈와 삶은 병아리콩을 감싼 거야.”
“이것도 먹어 봐라, 내 레이디. 수비드한 닭고기에 허브 소스를 친 거다.”
아리엘은 자기 손으로 직접 먹으려고 했지만 다이아나와 세실은 그녀가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어허. 결혼하느라 힘들었으니 가만히 있어야지.”
결국 아리엘은 새끼 새처럼 얌전히 앉아 음식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태후가 등장했다.
“내 새끼. 네가 좋아하는 딸기를 가져왔단다.”
딸기가 가득 든 디저트 쟁반을 가지고 온 태후는 역시나 아리엘에게 먹이는데 여념이 없었다.
아리엘이 배가 터질 지경이 되어서야 태후와 친구들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숨도 안 쉬어져…….’
배불리 먹은 아리엘은 무심코 눈으로 루시안을 찾았다.
“……?”
그런데 루시안이 눈 닿는 곳에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마티어스님이랑 같이 있었는데, 어디 갔지?
아리엘은 일어나 루시안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과 중앙 홀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지나며 루시안이 어디로 간 건지 찾아 헤맸다.
‘조금 있으면 같이 춤도 춰야 하는데.’
루시안의 모습이 멀리에서 보인 건 그때였다.
앗, 찾았다.
그를 발견한 아리엘은 몰래 다가가서 놀래킬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기척을 숨기는 마법을 사용하려다 루시안이 금방 눈치챌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면, 혹시…….
아리엘은 루시안이 자신의 일부라며 줬던 시종마가 불현듯 생각났다.
루시안에게서 나온 것이니까 어쩌면 시종마의 힘은 눈치채지 못하려나?
그녀는 처음으로 시종마를 불러내 보았다.
시종마의 힘을 사용하자 루시안이 두른 기세에 아리엘의 기척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기척을 숨기는 마법과 똑같은 효과를 내었다.
루시안은 뜻밖에도 디트리히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아까 하려던 그 이야기인가?’
심각한 표정의 두 남자는 복도 쪽으로 나갔고, 아리엘은 그들을 따라 드레스를 들고 종종걸음을 쳤다.
원래는 루시안을 놀래켜줄 생각이었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싸우는 건 아니겠죠, 두 사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즈음 아리엘은 문 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낮고 위협적인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마티어스도 똑같은 걱정을 하더군.”
이어서 들려오는 디트리히의 목소리도 전에 없이 딱딱했다.
“그럴 수밖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생각하기 싫으니.”
루시안이 인내하는 듯 숨을 길게 쉬고는 말했다.
“너희가 얼마나 걱정을 하든 내가 그 일을 두려워하는 것만은 못할 거다.”
“좋아. 이해해. 하지만…….”
디트리히의 말을 루시안이 차갑게 잘랐다.
“너도 알 텐데. 3년 후 아니면 7년 후에나 생각해볼 일이란 걸.”
어쩌다 보니 엿듣게 된 아리엘은 두 사람이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마티어스님이 걱정을 하고, 루시안이 두려워하는 일이 대체 뭘까?
아직도 악의 세력이 남아서 위협이 되는 걸까?
루시안의 말을 들은 디트리히가 조금 진정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직은 걱정할 이유가 없지. 가능성이 있는 때를 미리 알고 있으니 대비할 수 있고.”
“알아들었으면 더 이상 주제넘게 끼어들지 마.”
루시안은 이제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려는 듯했다.
하지만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기억해. 절대로 아리엘라에게 아이가 생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
거기까지 들은 아리엘은 얼른 자리를 떠났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한참 멀리 떨어져서야 참았던 숨을 내쉰 아리엘은 들은 것을 곱씹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였어.’
그것도 루시안과 그녀 사이에 생길 수도 있는 아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티어스님은 아기가 생기기 어려울 거라고 했는데…….’
라카트옐의 후손이 생기는 것은 굉장히 낮은 확률이고, 몸이 약한 아리엘에겐 불가능한 일일 거라고 했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거지?’
마치 그 일이 가능하다는 듯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아리엘은 일단 마음을 정리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마티어스와 루시안을 신뢰했다.
그리고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니고 결혼식 날이잖아.
그녀는 나중에 때를 봐서 물어보기로 하고 그 일을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 * *
연회장으로 돌아가자 어느새 피로연의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셔라, 마셔!”
그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명백히 푸른 사자 기사단이었다.
술이 담긴 오크통을 산처럼 쌓아놓은 그들은 황실 기사단과 대치 중이었다.
“우리가 모시는 레이디의 명예를 걸고 이기겠다!”
“무슨 소리! 아리엘라 공주님의 명예를 걸고 우리가 이기겠다!”
황실 기사단과 푸른 사자 기사단은 마주 앉아 술잔을 콸콸 채웠다.
“이기는 쪽이 아리엘라님의 명예를 드높이는 거다. 건배!”
“건배! 건배!”
아리엘은 떠들썩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포스스 웃었다.
다들 못 말려.
그때 아리엘 곁에 온 루시안이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유혹하듯 말했다.
“너한테서 딸기 냄새가 나는데. 먹고 싶게.”
아리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 무슨 말이에요. 루시안은 딸기도 별로 안 좋아하면서…….
그녀의 반응을 본 그가 픽 웃은 뒤 아리엘의 허리를 감싸 홀 가운데로 이끌었다.
“춤 추자.”
신랑과 신부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루시안의 팔에 안겨 춤 동작을 이어가면서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대리석을 깎은 듯한 얼굴선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짙은 푸른색 눈동자. 관능적인 상상을 부추기는 붉은 입술이 눈앞에 있었다.
다른 사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솟은 키와 늘씬하면서도 남성적인 선까지 어우러진 그는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몸에 자연스레 배어있는 오만함과 지배자의 기세 또한 루시안을 더욱 매혹적이게 만들었다.
“긴장 풀어. 아리엘라.”
그가 재미있다는 듯 아리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리엘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세상에. 내가 얼마나 숨을 못 쉬고 있었던 거야?
루시안이 아리엘의 몸을 지탱해주며 나른하게 말했다.
“이제 결혼도 한 사이잖아.”
“……불공평해요.”
아리엘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난 맨날 루시안한테 정신이 팔리는데 루시안은 저런 소리를 할 여유도 있고.
“불공평하지. 그리고 난 불공평한 게 마음에 들거든.”
“…….”
아리엘은 골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루시안은 완전 이기적이야. 혼자만 다 가지고.
루시안이 뇌쇄적이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비록 내 쪽이 형편없게 불리하더라도 말이야.”
응? 루시안이 더 유리하다는 이야기 아니었어요?
아리엘이 눈으로만 묻자 루시안이 신음하듯 웃었다.
“네가 어떻든 내가 그 이상으로 네게 빠져있단 것만 알면 돼. 아리엘라.”
그렇게 말하는 루시안이 행복해 보였기에 아리엘은 배시시 웃으며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춤은 루시안이 리드하는대로 따라가면 돼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진짜 좀 억울하긴 한데.
아직도 이렇게 막 가슴이 보글보글한 거…….
그들의 춤이 끝나자 사방에서 휘파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리엘과 루시안이 제자리로 돌아가려던 차, 갑자기 덩치 큰 헥터와 날렵한 랄프가 나타났다.
“아기 마님, 신랑 좀 빌려가겠습니다.”
“누구한테 뭘 빌려?”
루시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늘하게 되물었지만 기사들은 이미 단단히 결심하고 온 듯했다.
“되죠, 아기 마님? 원래 피로연 첫날은 다 이런겁니다요!”
헥터의 눈빛에 장난기가 마구 흘러넘쳤다.
아리엘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랑도 회포를 풀어야지.
루시안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리엘의 허락이 떨어지자 두 기사가 루시안의 팔을 붙잡았다.
“좋아요, 좋아! 신랑의 자격을 증명하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푸른 사자 기사단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루시안을 끌고 갔다.
아까 술통을 쌓아두고 마시던 테이블 쪽이었다.
경쟁하듯 술잔을 들이키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루시안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어, 신랑이다!”
“신랑님이다!”
그 순간, 서로를 이기겠다고 기를 쓰던 푸른 사자 기사단과 황실 기사단은 한마음 한뜻으로 타겟을 바꾸었다.
‘타도 신랑!’
‘우리 귀한 레이디(공주님)을 데려가는 도둑놈!’
그들의 공공의 적은 순식간에 루시안이 되었다.
이미 거나하게 술이 오른 기사들은 겁을 상실하고 루시안의 앞에 술잔을 놓았다.
“여기 있는 사람 다 이겨야 신방으로 보내드립니다!”
“신랑은 신부를 지킬 수 있는지 증명하라, 증명하라!”
아리엘은 눈만 깜박이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니, 서로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회포를 풀려는 게 아니었어?
당황하는 아리엘에게 다이아나가 귀띔을 해주었다.
“원래 피로연 첫날엔 신랑에게 술을 무척 많이 먹이는 게 관례야. 일종의 시험이지.”
아리엘은 놀라서 되물었다.
“시험?”
“그래. 보통은 신부 아버지와 형제들이 주도한단다. 신랑에게 먹이는…… 약간의 골탕이랄까?”
라카트옐 대공자에게 골탕을 먹일 수 있는 기회는 이번뿐이라고 생각했는지 기사들은 의욕이 넘쳐 보였다.
“더 부어!”
“혀가 마비될 정도로…….”
그들은 흥분한 채 루시안을 시험할 독주를 제조하고 있었다.
“좋아. 내 손주 사위의 술 실력을 한번 보세.”
어어?
할마마마까지 참전하시는 거야?
태후가 참가하자 분위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쯤 되자 아리엘은 슬그머니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라카트옐이라 해도, 저렇게 독한 걸 많이 마시면 쓰러질 텐데…….’
지금 루시안이 이겨야 하는 기사들은 60명이 넘었고, 태후는 루시안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감시하고 있었다.
아리엘은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곧 그녀 곁에도 친구들이 몰려들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리엘, 새신부들이 꼭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대. 가보자.”
“그래. 귀부인들이 속성 강의를 해주신다나?”
떠나면서 뒤돌아본 루시안의 모습은 독한 술을 물이라도 되는 듯이 수려하게 들이키는 모습이었다.
* * *
피로연이 끝난 뒤 아리엘은 녹초가 된 채 방으로 올라갔다.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이 반색하며 그녀를 맞았다.
“이제 오셨네요!”
시녀들은 아리엘을 우유로 채운 욕조에 담갔다가 꽃 오일을 푼 욕조에 담갔다가 하며 분주하게 목욕시켰다.
끝나고 정신을 차려보자 그녀는 얇은 잠옷 재질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다.
“신랑분은 방금 신방에 들어가셨어요.”
루시안이?
그 말을 듣자 아리엘은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시녀가 후후 웃으며 아리엘의 머리에 자잘한 장신구를 달아주었다.
“지금 연회장에 쓰러진 사람들 치운다고 난리래요. 대공자님을 술로 이겨보겠다고 한 남자들이 죄다 쓰러졌다죠?”
“그 와중에 대공자님은 걸음 하나 안 흐트러지고 나오셨대요.”
“그런 외모를 가진 분이 심지어 술도 세신가봐요.”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리엘은 라카트옐 남자들이 성년을 지나기 전엔 술에 몹시 취약하지만, 성년을 지난 후엔 술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리엘에겐 그 생각이 전혀 나질 않았다.
곧 루시안이 있는 신방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떨려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손이 막 바들거려서 아리엘은 제 손을 꼭 붙잡았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주워 들은 게 많아서 이런지도 몰랐다.
‘게다가 아까 연회 때…….’
귀부인들이 첫날밤 속성 강의라고 주워섬긴 말들은 아리엘을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부분은 경험 없는 그녀를 놀리려고 한 말이었지만 아리엘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시녀들의 치장이 끝나자 아리엘은 혼자 신방으로 올라갔다.
무거운 이중 문을 열자 은밀한 내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엘은 들어가기 전 심호흡을 했다.
“후…….”
그때 불쑥 키 큰 그림자가 그녀에게 드리웠다.
“설마 망설이고 있는 거야?”
“꺅!”
잔뜩 얼어있던 아리엘은 놀란 나머지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문간에 나타난 루시안이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뭐…… 괴물의 성에 바쳐진 제물이 따로 없군.”
그가 몸을 굽혀 아리엘을 달랑 안아 들었다.
아리엘은 루시안을 보고 놀란 게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루시안이 비딱하게 웃고는 아리엘을 안은 채 성큼 신방의 문턱을 넘었다.
아리엘은 숨죽인 채 그의 목에 매달려 눈만 도르륵 굴렸다.
루시안은 그녀를 데리고 창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신방 안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보고 싶진 않고?”
그제야 아리엘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방의 전경을 살펴보았다.
신부와 신랑을 위한 방은 흰색과 금색이 어우러져 화려했고, 짙은 향기를 내는 과일들만 골라 담은 장식 바구니가 여기저기에 걸려있었다.
완전히 익은 과일에게서 흘러나오는 달큰한 향기가 묘하게 긴장을 고조시켰다.
아리엘이 구경하는 사이 침대 쪽으로 걸어온 루시안이 그녀를 침대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아리엘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어느새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간 루시안이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잠옷 바람인 그녀와 달리 루시안은 아직 셔츠 차림이었다.
아리엘은 그런 루시안을 말똥말똥 보기만 했다.
“이리 와.”
잠시 기다리던 루시안이 아리엘 쪽으로 팔을 벌렸다.
아리엘은 마른침을 삼키고 머뭇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루시안 옆까지 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루시안이 그녀를 번쩍 들어서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
아리엘은 당황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루시안과 그녀는 마주 앉은 자세가 되어있었다.
아리엘이 꼼지락 멀어지려 하자 루시안이 한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결국 아리엘의 얼굴은 새빨개지고 말았다.
“루, 루시안…….”
그녀의 얼굴을 구석구석 눈으로 핥던 루시안이 느리게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이윽고 입을 뗀 그가 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쳤어.”
“……네?”
루시안이 아리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재차 말했다.
“지쳤다고.”
아. 그러고 보니…….
아리엘은 루시안의 옷자락에서 희미한 술 냄새를 맡았다.
루시안의 몸에선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술자리에 머무른 탓에 옷에 술 냄새가 배어있었다.
그가 시달렸을 걸 생각하자, 아리엘은 긴장도 잊고 울망울망해졌다.
“어떡해. 힘들었죠…….”
루시안이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마찰했다.
“그래. 공주님을 훔쳐 간 사악한 용을 잡으러 온 기사들과 맞서 싸웠거든.”
고개를 들며 아리엘의 얼굴 가까이로 온 그가 위험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어쩌나. 용이 이겨버렸으니.”
그리고 루시안이 아리엘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아리엘의 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콩닥거렸다.
루시안의 짙은 푸른 눈이 아리엘 바로 앞에서 최면을 걸듯 말했다.
“이기고 오느라 힘들었으니까…… 네가 예뻐해 줘.”
나른하게 말하니까 더 야하게 들리는 건 왤까?
아리엘은 눈을 질끈 감고 물었다.
“어, 어떻게 예뻐해 줘요?”
루시안이 낮게 웃고는 아리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아리엘은 조심스레 눈을 뜨고 손이 닿은 곳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그녀의 손에 자기 넥타이를 쥐여주었다. 그리고 아리엘과 눈이 마주치자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풀어주면 좋겠는데.”
아리엘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어릴 적 그의 넥타이를 매지 못해 놀림을 받았던 기억 때문일까?
그녀는 떨리는 손끝으로 루시안의 넥타이 매듭을 살살 풀어냈다.
넥타이가 완전히 풀리자, 루시안이 낮게 쿡쿡 웃으며 말했다.
“풀 줄만 알면 된다고 했잖아, 내가.”
넥타이를 푼 채 그가 한 손으로 셔츠 윗단추를 하나 끌렀다.
루시안의 흰 목이 드러나자 아리엘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하지만 루시안은 아리엘이 다른 데를 보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손이 천천히 아리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인간을 유혹해 파멸시키는 존재처럼 말했다.
“이제 뽀뽀해줘.”
아리엘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어디에…… 요?”
루시안이 제 볼 한쪽을 손으로 건드렸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아리엘은 그것에 조금 용기를 얻었다.
볼 뽀뽀 쯤이야! 그녀는 나름대로 용감하게 루시안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루시안이 그림처럼 웃고는 얼굴의 다른 데를 가리켰다.
“여기도.”
다시 아리엘의 입술이 내려앉자 그가 한 손으로는 셔츠 단추를 하나씩 끄르며, 다른 한 손으로 아리엘에게 뽀뽀 받을 곳을 짚었다.
“또 여기. 여기랑. 여기도…….”
셔츠를 다 풀은 그의 손은 어느새 아리엘의 등을 느릿하게 쓸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마침내 루시안의 손이 쇄골 근처를 짚자 아리엘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루시안의 목소리에 홀려 그의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를 해주는 데 열중했었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상의를 풀어헤친 루시안의 몸을 보고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그 와중에 자신의 등줄기를 따라 느릿느릿 움직이는 루시안의 손길이 느껴지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루, 루시안…….”
루시안이 고개를 돌린 아리엘의 얼굴에 도장을 찍듯 입 맞추며 말했다.
“이런 것도 못 봐서야 어떻게 잡아먹으라는 거야.”
하지만…….
루시안이 벗은 걸 본 건 아주 옛날이고, 또…….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정말 처음인데…….
아리엘이 속으로만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루시안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익숙해져야지, 꼬맹이.”
꼬맹이?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발끈하며 말했다.
“꼬, 꼬맹이 아니에요.”
“그래?”
놀리듯 말한 루시안이 자기의 한쪽 셔츠를 젖히며 끌어내렸다. 옷 속에서 늘씬하고 단단한 근육이 드러났다.
뭐 하는 거예요, 루시안!
분해서 그를 바라봤던 아리엘은 화들짝 눈을 감았다.
“그것 봐.”
루시안이 짓궂게 말하고는 아리엘의 손 위에 긴 손을 포개어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끌어다 제 살갗 위에 밀착시켰다.
매혹적인 그의 목소리가 회유하듯 속삭였다.
“이제 네 거잖아. 가지고 노는 법을 배워야지, 응?”
“그건…….”
루시안이 아리엘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부드럽게 대며 말했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어 봐.”
아리엘은 눈을 감은 채 일단 얌전해졌다.
하지만 루시안의 몸에 닿은 감촉이 낯설고 두려워서 손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잠시 그러고 있는 사이.
루시안의 심장이 박동하는 느낌이 손을 통해 전해져왔다.
강인한 소리가 불규칙한 박자로 울리는 게 아리엘에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루시안도…… 떨린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이마를 마주 댄 루시안의 숨소리와 그에 맞춰서 조금씩 밀리는 느낌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아리엘은 천천히 눈을 뜨고 루시안을 눈에 담았다.
“…….”
비현실적이야.
그녀의 남편은 실로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길고 유려한 목선을 따라 내려가면 남성적인 목젖과 그 아래 깎아놓은 듯이 뻗은 쇄골이 보였다.
넓은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좁아지는 선은 관능적이었고, 아름답게 자리 잡은 근육들은 신화 속 신을 그려놓은 그림 같았다.
‘정말 예쁘다.’
아리엘이 가진 것 중에는 예쁜 것이 많았다.
예쁜 방, 예쁜 물건들, 예쁜 음식이나 그릇들, 꽃과 보석…….
하지만 그녀가 가진 어떤 것도 루시안보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리고 루시안은 자신의 몸이 아리엘의 것이라고 했다.
‘손, 대보고 싶어.’
아리엘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루시안의 맨 살갗에 손을 대었다.
단단하지만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름다워요.”
그녀가 중얼거리자 루시안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아리엘은 점점 열중하며 천천히 루시안의 상체에서 손을 미끄러뜨렸다.
힘줄의 들어가고 나온 곳과 늘씬한 허리에 잡혀있는 잔근육까지.
아리엘이 그를 만지는 동안 루시안의 목덜미는 붉어졌고 눈빛은 점점 짙고 어두워졌다.
“이제 좀 적응됐어?”
그가 묘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루시안의 질문에 홀린 듯 그를 탐색하던 아리엘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어, 내가 방금……?’
그녀가 물러나려 하자 루시안이 쉽게 가로막고는 말했다.
“겁먹지 마. 진짜는 신혼여행지에서 할 거니까. 지금은 기분 좋은 것만 즐기면 돼.”
아리엘은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읍!”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루시안이 아리엘의 입술을 막고 들어와 격렬하게 그녀를 탐하기 시작했으므로.
“루…… 음, 읍…….”
그는 허기진 것처럼 아리엘의 입술을 베어 물며 빨아들였다.
한 손으로는 아리엘의 발목과 종아리를 부드럽게 쓸어올리며 그녀를 더욱 가까이 당겼다.
입술이 열리고, 그의 집요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아리엘은 심장이 요동치는 기분에 안절부절못하며 루시안의 몸을 짚었다.
그의 키스가 너무 자극적이라 서둘러 몸을 빼려 했지만,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작은 공간에서 도망갈 곳도 없이 잡힌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숨이 막히면서도 손끝까지 저릿한 전류가 흘러 아리엘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이 아득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달려든 루시안이 이윽고 템포를 낮추며 부드럽게 그녀의 입안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아리엘도 덩달아 몽롱해져서 감각에 천천히 몸을 맡겼다.
루시안의 가슴팍을 짚은 두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어깨가 떨리고 몸에 자꾸만 힘이 풀렸다.
루시안 쪽으로 무너지는 몸을 애써 추스르려는데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
그녀가 루시안 위에 앉아 맞붙어있는 곳에서 움직임이 느껴진 것이다.
아리엘은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입술을 떼고 할딱이며 말했다.
“루시안, 아래에서 뭐가 움직여요.”
떨어진 입술을 찾아 고개를 비튼 루시안이 갈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아, 신경 쓰지 마. 원래 그런 거니까.”
그다음에 다시 입술이 막혔기 때문에 아리엘은 잠시 뒤에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꾸 움직이는데?”
그때 루시안의 입맞춤이 좀 더 농밀해지는 바람에 아리엘은 눈을 꼭 감았다.
그가 키스를 이어가며 경고하듯 말했다.
“여기에만 집중해.”
다시 달콤함과 낯섦, 두려움이 뒤섞인 쾌락이 휘몰아쳤다.
결국 아리엘은 눈을 꼭 감으며 루시안의 목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 * *
입맞춤은 오래 지나도록, 아리엘의 진이 모두 빠질 때까지 이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밤이 깊어져 별의 각도가 달라졌을 무렵, 아리엘은 힘이 빠진 채 루시안에게 안겨있는 상태였다.
루시안은 약속대로 첫날밤의 일을 끝까지 치르지 않았지만, 아리엘은 그 장막 속을 조금쯤 엿본 기분이었다.
“이제 그만 자자.”
아리엘의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안고만 있던 루시안이 그녀를 베개 위에 눕혀주었다.
아리엘은 색색 숨만 내뱉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결혼식 준비와 피로연에 시달린 몸이 쉬게 해달라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그녀의 혼을 빼놓은 것은 루시안이었다.
아리엘은 가물거리는 눈을 깜박이며 루시안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과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침대로 돌아온 루시안은 아리엘을 가볍게 끌어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얼른 자.”
그가 아리엘이 잠들길 기다리면서, 둘 사이에는 잠시 녹진한 적막이 흘렀다.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아리엘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저, 루시안.”
“……그래.”
그녀가 말을 고르느라 또 잠시의 시간이 흘러갔다.
“루시안은, 그러니까…… 이런 거 해본 적 있었어요?”
루시안이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 묻는 거야?”
“하지만…….”
물론 아리엘은 라카트옐이 보통의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카트옐이 인간을 다른 종처럼 느낀다는 것 또한.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루시안이 부드럽게 채근했다.
“하지만 뭐.”
아리엘은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안은 너무 자연스럽기도 하고…….”
“자연스러워?”
“많이 해본 것처럼…….”
루시안이 당연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그녀의 말랑한 볼을 콕 눌렀다.
“여러 번 했잖아. 너랑.”
그야 키스는 여러 번 했지만요.
아리엘은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전에 했던 입맞춤 말고 오늘처럼 뭔가 야릇한 거…….
“그, 그러니까 제가 궁금한 건…….”
“뭔데.”
아리엘은 자꾸만 줄어드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냈다.
“라카트옐은 에고에서 경험 같은 거 불러올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루시안은 다 아는 거 아닌가 해서…….”
가만히 아리엘이 하는 말을 곱씹어 보던 루시안이 낮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런 걱정을 한 거야?”
그는 못 참겠다는 듯 아리엘의 귓가에 키스를 퍼부었다.
미치겠네. 뭘 먹고 이렇게 귀여운 거야.
정작 아리엘은 놀림감이 된 것 같아서 뾰로통해졌다.
웃음을 그친 루시안이 아리엘 옆에 몸을 누이고 눈을 마주쳤다.
“글쎄. 내 에고 속에는 지식적인 내용만 있어. 선대들은 자신들의 껍데기인 인간의 육체를 꽤 잘 이해하고 있었지.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그가 아리엘의 뺨을 희롱하듯 어루만졌다.
“이런 면에서 내게 도움이 될 만한 경험은 없어.”
듣기 좋은 루시안의 목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라카트옐은 모두 대를 잇기 위해서만 드물게 이런 종류의 행위를 거쳤으니까. 그러니…… 우리와는 달라.”
아리엘이 말똥말똥 듣고만 있자 그가 힘을 뺀 웃음소리를 냈다.
“나도 완전히 처음이란 뜻이야. 짝을 만나서, 이런 교감을 하는 것.”
그 말에 아리엘은 조금 용기를 얻었다.
루시안도 나처럼 처음이구나. 서로를 통해서 알아가는 것도 똑같은 거야.
그가 그녀의 얼굴을 선 따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 얘기도 해봐. 과거에 넌 열여섯 살까지 살았다고 했지. 접근하는 놈들이 있었을 텐데.”
아리엘은 곧장 대답했다.
“없었어요.”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삐약거렸다.
“애초에 그땐 절름발이에, 비쩍 마르고 키도 지금보다 더 작았고, 여자인 것도 숨기면서 지내서…….”
아리엘의 입에서 과거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루시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녀의 입술 언저리를 잠시 배회하던 그의 손이 내려와 천천히 아리엘의 이불을 덮어주었다.
“여기서 기분 좋아하면 좀 유치한 것 같은데.”
따스한 이불이 덮이자 겨우 버티고 있던 아리엘의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아리엘은 느리게 눈을 깜박거리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녀가 잠에 빠져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리엘이 완전히 잠들고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편안해지자 루시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득 차오른 달이 검은 밤하늘을 수놓으며 떠 있었다.
내일이면 저 자리에 요사스러운 푸른 달이 뜰 것이었다.
“…….”
루시안은 뭔가를 가늠해보려는 듯 제 손을 폈다 쥐었다 해 보았다.
이윽고 잠든 아리엘로 다시 시선을 내린 그의 표정은 복잡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 * *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뜨며 아리엘은 자신이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걸 기억해냈다.
‘오늘이야.’
어쩌면 결혼식 날보다 오늘을 더욱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오늘은 라카트옐의 저주가 풀린 뒤 처음으로 맞는 블루문 날이었다.
라카트옐은 본디 드래곤의 피를 이은 종족.
블루문이 뜨는 날이면 그들의 피는 태고적 용의 힘에 가까워지고, 그래서 육체가 지독한 파괴욕과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잃어버린 심장인 크림슨 하트, 아리엘의 존재가 모든 걸 바꿔놓았다.
‘라키엘이 그랬으니까.’
초대 드래곤이었던 라키엘은 예언을 남겼다.
크림슨 하트는 인간의 몸에 깃들어 태어날 것이고, 성년이 되면 죽어 그 심장이 원래 주인인 라카트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그래서 아리엘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라카트옐이 사라졌지.’
아리엘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순간, 크림슨 하트는 주인에게 돌아갔고 마지막 라카트옐인 루시안은 온전한 드래곤이 되었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라카트옐의 저주가 풀린 것이다.
‘이제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날이 왔어.’
그 일이 지나고 처음으로 다가온 블루문 날.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저주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아리엘로서는 누구보다 떨리는 심정이었다.
그녀가 눈을 뜬 것을 본 루시안이 침대 근처로 다가와 걸터앉았다.
“깼군.”
루시안은 이미 흐트러짐 하나 없이 옷을 다 갖춰 입고 있었다.
아리엘이 비몽사몽 그를 올려다보자 루시안이 그녀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그리곤 아쉬운 듯 잠시 멈춰있더니 말했다.
“밥 먹어.”
아리엘은 뭔가를 가지러 가려 하는 루시안을 얼른 붙잡았다.
“루시안. 오늘 어때요?”
일어나자마자 묻기엔 모호한 질문이었지만 루시안은 알아들은 듯 되물었다.
“블루문 이야기를 하는 건가?”
“네.”
그가 비딱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리엘의 뺨을 손끝으로 지분거렸다.
억눌린 욕망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과는 달리 손길은 담백한 편이었다.
“글쎄. 뭔가를 죽여서 피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걸.”
아리엘의 표정이 환해졌다.
됐어. 블루문 때 가장 빨리 드러나는 증상이 살육에 대한 욕망이잖아.
“그럼 괜찮은 거죠?”
그녀가 기대하는 어조로 묻자 루시안이 픽 웃었다.
“그래.”
아리엘은 웃으며 루시안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다행이다. 너무 행복해요. 루시안에게 저주가 사라져서.”
“……그래.”
루시안이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며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의 팔에 지그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아리엘은 루시안도 이 감격을 나눈다는 생각에 더 기뻐졌다.
그때 루시안이 나직이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아리엘라.”
“뭔데요?”
그의 품을 벗어나며 아리엘이 물었다.
루시안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침마다 이런 포옹을 받으려면, 저주가 꼭 필요한 건가?”
그리고 그가 농담기도 없이 진지하게 속삭였다.
“그렇다면 기꺼이 다른 저주라도 받고 싶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리엘은 흰눈을 뜨고 루시안을 노려보았다.
이깟 포옹하고 무서운 저주를 바꾼다니, 말도 안 되잖아.
그녀는 루시안의 팔을 콩콩 때려준 뒤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때 아리엘의 머릿속에 마티어스에 대한 생각이 스쳤다.
‘아 참, 마티어스님!’
마티어스님께도 오늘 상태를 물어봐야 하는데.
아리엘은 시녀들이 가져온 아침 식사 트레이도 제쳐두고 얼른 옷부터 갈아입었다.
‘마티어스님은 어떠실까? 루시안은 드래곤으로 완성됐다지만…….’
서둘러 매무새를 만진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집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마티어스님!”
한 뼘쯤 열려있는 마티어스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있던 마티어스가 보였다.
평소와 똑같이 서류를 보며 권태로운 자세로 기대앉아 있는.
‘계신다.’
달려온 아리엘을 본 마티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엘라.”
블루문 날인데도 집을 비우지 않고 집에 계셔.
마티어스를 확인한 아리엘은 달려가 그에게 포옥 안겼다.
“마티어스님, 괜찮으세요? 힘들지 않으세요?”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저주가 풀린 게 정말 맞나 보구나.”
그 말씀은…….
아리엘의 눈가가 촉촉해지자 마티어스가 슬쩍 미소지었다.
“파괴욕도, 비정상적으로 차오르던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저주를 네가 푼 거지.”
그리고 마티어스가 어릴 때처럼 아리엘을 안고 한 바퀴 돌려주었다.
아리엘은 행복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다 됐어.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은 괜찮아.’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걸 위해 목숨까지 던졌던 적이 있었던 아리엘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잃지 않으면서 저주가 사라지다니. 이보다 더한 행운이 있을까?
아리엘의 가슴 속은 행복함으로 가득 찼다.
* * *
결혼식 다음 날, 제국은 줄곧 축제 분위기였다.
황궁에서는 피로연이 계속되고 있었고, 국빈들과 귀족들은 무도회와 연회를 즐겼다.
제국의 모든 지역도 크게 행사를 열어 광장에서 춤을 추고 축제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아리엘과 루시안은 더 이상 공식 석상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들은 아리엘이 원한대로 집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정했다.
‘내일이면 신혼여행을 가게 되니까, 그 전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지.’
아리엘은 결혼식 때문에 미뤄뒀던 소풍 계획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두 남자를 앞에 두고 사근사근 제안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석류 정원에서 소풍 온 것처럼 놀아요. 어두워지면 모닥불 가든에서 저녁 먹고요.”
마티어스가 아리엘에게 선물했던 거대한 유리온실에는 그녀가 가꾼 예쁜 식물들과 일 년에 한두 번씩 새빨간 과실을 맺는 석류나무가 가득했다.
“안주인님 뜻대로.”
라카트옐 가족은 주방장 홀슨이 싸준 소풍 음식을 들고 온실에서 느긋한 한때를 보냈다.
이른 낮에는 아리엘이 결혼 선물로 받았던 페어리 홀스의 이름을 짓느라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오후에는 말을 타고 호숫가를 거닐며 또 몇 시간이 지났다.
이윽고 저녁이 되자 반딧불이가 호숫가 근처를 밝히기 시작했다.
“배고파요.”
아리엘이 말하자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준비해둔 식사가 모닥불 가든에 즉시 차려졌다.
돌이켜보면 아리엘이 이해 못 할 불길함을 느낀 것은 그즈음이었다.
식사가 시작되려던 차, 루시안이 어둑해진 하늘을 힐긋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리엘라, 저녁은 마티어스와 먹도록 해.”
“루시안은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영지에 다녀오려고. 신혼여행을 가려면 미리 일을 다 마쳐둬야 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루시안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있었기에 걱정이 된 아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배웅하고 저녁 먹을래요.”
“안 돼.”
조금 지나치다 싶게 루시안이 그녀를 막았다. 그리고 루시안이 마티어스를 향해 아리엘을 맡긴다는 듯 눈빛을 보냈다.
기묘한 불안감이 아리엘의 가슴께를 스멀스멀 잠식했다.
“내일 봐.”
루시안이 아리엘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춘 뒤, 더 하고 싶은 것을 인내하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침쯤에는 와있을 테니까.”
루시안이 자리를 떠난 뒤 아리엘은 자신이 느낀 불안함의 근원지를 찾으려 애썼다.
상황은 그다지 이상한 게 없었다.
블루문 날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시종일관 평온했다.
루시안이 자신에게 스킨십을 할 때마다 평소보다 지나치게 절제하던 것만 제외하면.
‘영지에 다녀올 일이 있다는 것도 그럴 만하고…….’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한 걸까?
그때, 저택 쪽에서 노집사 알렌이 헐레벌떡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알렌……?’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알렌이 어째서…….
알렌이 마티어스와 아리엘이 앉아있는 곳까지 당도해서 외쳤다.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리엘은 숨을 몰아쉬는 알렌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알렌?”
알렌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작은 주인님이 쓰러지셨습니다.”
* * *
루시안이 쓰러졌다는 말에 아리엘은 마티어스와 함께 서둘러 루시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입단속을 하라 하셔서 별채 침실에 모셔 두었습니다.”
라카트옐 저택에서 별채는 사용인들이 정기적으로 청소만 할 뿐, 따로 사람이 머물지 않는 외딴 건물이었다.
귀족 저택의 별채란 손님이 많이 방문하거나 아이가 여럿 생길 때를 대비해서 지어두는 건물인데 라카트옐 가에서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별채 침실에 도착하자 마티어스가 아리엘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일단 너는 밖에 있거라. 위험할지도 모르니.”
아리엘은 고개를 저었지만, 마티어스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울먹이며 발걸음을 멈췄다.
안으로 들어간 마티어스가 루시안의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아리엘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알렌에게 물었다.
“루시안이 왜 저런 건가요?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알렌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블루문 때문인 듯싶습니다. 블루문 때와 증상이 똑같으시니.”
아리엘은 믿을 수가 없었다.
블루문의 저주는 풀린 것 아니었나?
만약 블루문 때문이라면 왜 마티어스님은 괜찮으신데 루시안만…….
뒤늦게 불려온 대마법사 브루노어가 루시안을 본 뒤 아리엘에게 들어와도 좋다는 신호를 했다.
“루시안…….”
눈으로 확인한 루시안의 모습은 참혹했다.
통증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를 해친 흔적과 그가 깨뜨린 물건들 때문에 다친 상처에서 흐른 피가 옷 여기저기에 묻어있었다.
루시안은 발작을 막기 위해 침대에 스스로를 결박해놓은 상태였다.
“어, 어떡해…….”
아리엘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녀를 보고 몸을 일으키는 루시안때문에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심장이 돌아오면…… 흑, 다 괜찮아지는 거 아니었어요? 말도 안 돼.”
루시안의 손이 아리엘의 볼에 번진 눈물을 닦아냈다.
“울지 마. 지금 내 곁에 있는 건 위험하니 돌아가고.”
“안 돼요.”
나더러 가지 말라고 하던 작년 블루문 때의 당신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어떻게 가요…….
“이 밤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루시안이 고통을 참는 듯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아리엘의 얼굴을 윤곽만 따라서 어루만졌다.
“……미안. 네가 그렇게 기뻐했는데.”
아리엘은 소리 죽여 울음을 터뜨렸다.
루시안 바보. 왜 그런 말을 해요?
루시안은 원래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 같은 거 안 하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 내가 기뻐한 게 다 뭐라고…….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리엘은 울다가 브루노어와 마티어스에 의해 별채를 나왔다.
그녀가 방에 돌아가는 것을 거부해서,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응접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응접실에는 쉴 수 있는 흔들의자와 담요가 마련되어 있었다.
“쉬거라. 루시안 녀석은 괜찮을 테니.”
혼자 남은 아리엘은 벽난롯가에 웅크리고 앉아서 흐느꼈다.
그녀의 슬픔에 반응했는지 루시안이 선물한 푸른 화염 시종마가 나와서 아리엘 앞에 앉았다.
아리엘이 루시안과 닮았다고 주장하며 '주니어'라는 이름을 붙여준 녀석이었다.
나타난 주니어를 보고 아리엘이 더 울자, 시종마가 아리엘의 뺨을 길게 핥았다.
“주니어, 어떡해…….”
아리엘은 주니어를 안고 기댔다.
루시안과 비슷한 기운을 흘리는 시종마를 껴안자 슬픔이 덜어지는 듯했다.
그러던 아리엘은 곧 눈물을 슥슥 닦고 일어났다.
“아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얼른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망토를 걸쳤다.
“마티어스님께는 풀린 저주가 왜 루시안에게는 완전히 풀리지 않았는지 알아야겠어.”
아리엘은 곧장 마티어스에게 가서 허락을 구했다.
“녹스 영지에 있는 거울 호수에 다녀오고 싶어요.”
거울 호수는 라카트옐이 가진 보물 중 하나로, 그 안에 드래곤의 눈이 있었기에 사람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
‘루시안이 눈을 흡수해서 지금도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결연한 아리엘의 표정에 마티어스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허락해주었다.
아리엘은 한가롭게 마차를 탈 시간이 없어서 시종마, 주니어를 타고 투명화 마법을 건 뒤 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루시안의 힘을 받은 주니어와 함께였기에 무척 빠르고 안전했다.
아리엘은 오래지 않아 녹스 영지에 있는 거울 호수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거울 호수는 여전히 잔잔했고 거대한 거울처럼 하늘을 그대로 반사시키고 있었다.
“라키엘님. 당신을 만나야겠어요.”
아리엘은 호수 앞에서 심호흡을 한 뒤, 호숫물 안에 손을 담갔다.
그러자 손이 닿은 곳에서 미세한 빛이 흘러나오며 물 표면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거울 호수가 아리엘에게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리엘은 몸을 일으킨 뒤 깊게 숨을 마셨다.
아직도 거울 호수가 자신에게 반응한다는 건…….
‘라키엘님을 만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아리엘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호수 안으로 한걸음 발을 들여놓았다.
따스한 5월인데도 거울 호수의 물은 살얼음이 얼 것처럼 차가웠다.
아리엘은 천천히 걸어 들어가다 숨을 참고는 호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헤엄이 안 쳐져.’
거울 호수의 물은 특별한 힘을 가져서 인간의 몸은 그 안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아리엘의 몸은 호수가 바라는 대로 깊은 곳을 향해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눈을 감고 간절히 바랐다.
‘라키엘님, 대답해주세요. 제발…….’
숨을 쉬지 못한 아리엘은 금세 의식을 잃었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낯선 이공간 속이었다.
아리엘은 자신의 몸이 물속처럼 부유하며 둥둥 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호수에서 가라앉을 때와는 달리 숨 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한 짓을 했구나, 아이야.]
“……라키엘님? 당신인가요?”
아리엘이 묻자 목소리가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이 세계에 남아있는 라키엘의 사념. 그래, 나를 라키엘이라 불러도 된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어요.”
다 안다는 듯, 라키엘이 말을 받았다.
[오늘 뜬 푸른 달 때문이겠지.]
아리엘은 서러움에 울 것 같은 마음을 누르며 가냘프게 물었다.
“왜 루시안의 저주는 풀리지 않은 건가요? 심장이 돌아왔잖아요. 다 끝난 것 아닌가요?”
[…….]
라키엘이 한동안 침묵하다가, 왠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해줄 순 있다만 네 마음이 다칠 게다.]
“상관없어요. 루시안의 저주만 풀 수 있다면요.”
라키엘이 한숨 소리 비슷한 소리를 냈다.
결국 그는 결심한 듯 아리엘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내 예언을 기억할 게다. 크림슨 하트가 죽으면 그 심장이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아리엘의 심장이 불안하게 고동쳤다.
라키엘님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네 말대로 심장은 돌아갔지만, 그날 너는 죽지 않았지. 네 심장은 죽어서 그에게 돌아간 게 아니야.]
그 말은 옳았다.
아리엘이 죽기 직전에 타락이 시간을 멈추었지만, 드래곤의 심장은 제시간에 루시안에게 돌아갔다.
또한 크림슨 하트가 돌아갔음에도 아리엘은 죽지 않았다.
라카트옐 가족은 그것이 기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기적이라. 그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절묘한 운명이었지. 게다가 라카트옐의 존재에 걸린 저주는 해방되었으니…….]
마티어스가 더 이상 블루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보면 저주가 풀린 것은 확실한 듯했다.
라키엘의 목소리가 아리엘의 머릿속에 울렸다.
[하지만 네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크림슨 하트의 주인은 너와 루시안, 두 사람이 되어버렸다.]
심장의 주인이 두 사람……?
[그래서 크림슨 하트는 네 신랑과 완전히 융합하지 못했어.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건 그 이유다.]
“그런…….”
[네 신랑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게다. 블루문이 가까워 올 때 직감했겠지. 그래서 널 다치게 할까 봐 피하려 했을 것이고.]
아리엘은 루시안이 이미 알고 있었단 사실 때문에 마음이 저미는 듯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루시안은 계속 저렇게 블루문 때마다 힘들어야 하나요?”
라키엘이 가엾다는 듯 아리엘의 얼굴을 스쳤다.
[방법은 있다. 심장이 그와 융합될 수 있는 조건.]
아리엘은 간절한 심정으로 물었다.
“그게 뭔가요……?”
라키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조건은 첫째. 네가 죽든지, 아니면…….]
그 이후로 이어진 마지막 말을 들은 아리엘은 라키엘에 의해 의식을 잃고 물 밖으로 내보내졌다.
차가운 물 속에서 나온 아리엘은 기침으로 물을 토해냈다.
몸이 얼어붙은 듯 떨리며 오한이 들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니어.”
그녀가 부르자 푸른 화염 갈기를 가진 시종마가 나타나 아리엘을 부드럽게 제 등에 태웠다.
아리엘은 시종마의 갈기를 꼭 움켜쥐었다.
“돌아가자. 루시안에게 돌아가야 해.”
* * *
라카트옐 저택으로 돌아간 아리엘은 어디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루시안이 있는 별채로 향했다.
마티어스의 명령이 있었는지 별채는 접근 금지 표시가 되어있었고, 브루노어의 마법으로 결계까지 처져 있었다.
루시안이 위험하므로 블루문이 질 때까지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는 듯했다.
푸른 보름달이 하늘을 가득 채운 밤.
루시안이 홀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별채 근처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고 적막하기만 했다.
아리엘은 브루노어의 마법 결계를 지나 루시안이 있는 침실로 향했다.
바깥의 결계 때문인지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열고, 마른 입술을 축이며 침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암실처럼 커튼이 쳐진 방안은 달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다.
그 가운데, 아름다운 남자 하나가 짐승 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루시안…….”
아리엘은 그에게로 다가가 땀에 젖은 루시안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만 꾹 참고 겨우 속삭였다.
“나 왔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던 루시안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지금은 묶여있지 않아. 위험하니 물러서.”
처참한 모습임에도 그는 인간의 대표로 신의 형벌을 짊어진 젊은 영웅처럼 아름다웠다.
아리엘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도리질만 쳤다.
루시안의 음성이 조금 더 거칠어졌다.
“가라니까. 네게 흉한 꼴 보이고 싶지 않아.”
아리엘은 입술을 꾹 깨물고 대답했다.
“싫어요.”
“너 정말…….”
드디어 루시안의 목소리에 화가 난 기색이 비쳤다.
하지만 그가 이 모든 걸 알고도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과 홀로 다 감당하려고 했다는 걸 알고 있는 아리엘은 물러날 수 없었다.
“내가…… 언제 루시안 말 잘 들은 적 있어요?”
그녀가 울먹이며 말하자 루시안이 고통 속에서도 웃음소리 같은 숨을 뱉었다.
“없는 것 같긴 하군.”
아리엘은 그가 누운 침대에 앉아 그를 포옹했다.
호수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의 몸은 차가웠고 날씨에 맞지 않게 추위를 느끼며 떨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불덩이 같은 루시안의 몸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절대로.”
그녀를 밀어내려는 듯하던 루시안이 이내 잠잠해졌다.
아리엘은 달려오느라 불규칙해진 호흡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안긴 채 가만히 있던 루시안이 팔을 뻗어 아리엘을 세게 끌어안았다.
“이상하지. 네가 가까이 오면 고통이 옅어져.”
그의 더운 숨이 아리엘의 어깨에 흩어졌다.
아리엘은 그를 더 꼭 안으며 라키엘에게 들었던 말을 회상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아.’
호수 안에서, 어떻게 하면 크림슨 하트가 루시안에게 완전히 융합될 수 있는지 묻는 그녀에게 라키엘은 말해주었다.
[그 조건은 첫째. 네가 죽든지, 아니면…….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완전해질 것이고, 그가 완전해지면 고통은 사라질 게다.]
아리엘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녀와 함께 있으면 루시안의 고통이 줄어드는지.
‘우리 둘이 합쳐져야 완성되는 거였던 거야.’
문득 그와 결혼하는 걸 괴물의 성에 들어온 거라 비유하던 루시안의 말이 떠올랐다.
동화 속에서 저주에 걸린 괴물은 누구도 들어오지 못할 벽을 쌓고 모두를 밀어냈지만, 결국 단 한 사람에게만은 성안을 허락했다.
그리고 이제 아리엘은 괴물의 성에 들어갈 뿐 아니라 저주에 걸린 그를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사실은…… 무서워.’
그녀로서는 전혀 겪어보지 못한 일로 걸어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리엘은 두려움과 긴장을 누르며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괜찮아. 루시안이잖아.’
그리고 루시안과 나는 서로를 위해 지어졌는걸. 난 알아.
그들은 두 번의 삶에서 모두 상대를 찾아냈고, 마침내 숨이 멎는 날까지 같이 있기로 언약했다.
그녀의 세상에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그건 루시안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거면 충분해. 아니, 완벽해.’
그렇게 두려움을 이겨낸 아리엘은 온 몸에서 용기를 쥐어짜 내서 루시안의 입술에 먼저 입을 맞췄다.
입술을 맞대었다가 떼자, 루시안이 혼란스러운 듯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뭐하는 거야, 아리엘라…….”
그녀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입 맞춰 줘요.”
아리엘의 요구에 따라 루시안이 고개를 들어 짧게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멀어지기 전에 아리엘은 루시안에게로 기대며 애타게 입맞춤을 이어갔다.
처음엔 그녀를 달래는 듯하던 루시안의 입맞춤은 금세 선을 넘어 거칠어졌다.
사실 그는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였다.
그의 입술이 사납게 아리엘의 입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힘이 빠진 아리엘이 그에게 체중을 싣자 루시안이 한 팔로 침대를 짚은 채로 그녀를 지탱하며 키스했다.
“하아…….”
정신없이 서로의 숨이 오가는 도중, 그의 손이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리엘은 눈을 꽉 감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때, 루시안이 신음하더니 아리엘을 떼어냈다.
“……안 돼.”
그의 힘이 훨씬 셌기 때문에 아리엘은 깃털처럼 밀려났지만, 훨씬 더 괴로워 보이는 건 그녀를 밀어낸 루시안 쪽이었다.
“이러면, 참기 힘들어져.”
그가 쉰듯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그는 제 힘을 모두 부어 인내를 되찾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리엘은 울음을 꾹 참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관없어요. 언제가 됐든 난 당신 거니까.”
무한한 유혹을 느끼는 듯 루시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돼. 너무 위험한 일이야.”
아리엘은 그의 손 위에 작은 손을 겹쳤다.
“위험하지 않아요. 루시안은 날 다치게 한 적 없는걸.”
“그런 의미가 아니야. 잘못하면 네게…….”
루시안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아리엘은 다시 키스로 그의 입을 막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어설픈 유혹이었다.
아리엘은 루시안이 자신에게 했던 것을 떠올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 순간 루시안의 이성은 확 끊겨버렸다.
아리엘의 시야가 빙글 돌더니 어느새 자세가 반전되었다.
낮게 신음한 루시안이 여유 없이 아리엘의 입술을 파고들며 키스했다.
키스가 깊어지고, 그의 손이 아리엘의 손을 사로잡듯 깍지 껴 잡았다.
차가운 피부에 뜨거운 손이 닿자 몸이 떨려왔다.
두 사람의 몸은 그대로 짙은 밤 아래에 얽히기 시작했다.
아리엘이 느끼기에 그 이후의 일은 희뿌옇기만 했다.
온몸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과 입술에 낯선 감각이 일어나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고, 루시안의 아름다움에 경탄했던 것도 같고, 아프다며 울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한번 시작된 일은 새벽녘이 될 때까지 이어졌고 아리엘은 울다가 신음하다가 끝내 잠시 의식을 잃듯 잠들어버렸다.
“…….”
고요한 가운데 눈을 뜨자, 루시안의 얼굴이 보였다.
온통 암막 커튼이 처져 있던 아까와는 달리 커튼이 걷혀있어서 푸른 달빛이 그의 벗은 상체와 얼굴을 비춰주었다.
루시안은 아리엘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엘은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목 마르겠지.”
루시안이 옆의 물병에서 물을 머금어 입술로 그녀의 입에 흘려넣어 주었다.
그리곤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좀 더 자도 돼. 아직 새벽이니까.”
아리엘은 안 나오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루시안…… 이제, 괜찮아요?”
그가 묘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괜찮아.”
“아직 블루문이 떠 있는데도요?”
“……그래. 아마 네 덕분이겠지.”
그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몸으로 느껴지더군. 불완전한 게 완전해지는 것이.”
아, 정말로…….
아리엘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모든 저주가 소멸되고 루시안의 형벌이 끝난 것이다.
침묵하며 가만히 아리엘의 뺨을 만지던 루시안이 돌연 굳어진 음성을 냈다.
“하지만 지난밤엔 아주 위험했어. 나조차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고. 그 계산 안에 넌 없었어야 했어.”
아리엘은 얼마든지 더 혼나도 좋았다.
그녀는 루시안의 짙은 푸른색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회 안 해요.”
“너…….”
“진짜로 후회 안 해. 루시안만 괜찮아질 수 있다면…… 그리고 루시안이 날 해칠 리 없으니까.”
“…….”
루시안의 표정은 화가 난 듯도 했고 무언갈 간신히 참는 듯도 했다.
이윽고 입을 뗀 그의 목소리엔 진득한 갈망이 묻어있었다.
“정말이지, 너무 몰아붙인 것 같아서 그만하려고 했는데…….”
말을 맺지도 않고 그가 아리엘의 입술에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낙인 같은 그의 입술이 다시 곳곳에 내려앉자 예민해진 몸이 금세 반응했다.
긴장해서 몸을 움츠리는 아리엘에게 루시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힘 풀어. 아까만큼 아프지는 않을 테니.”
아리엘은 눈을 꼭 감았고, 루시안이 이끄는 낯선 쾌락의 늪에 그와 함께 깊이 가라앉았다.
* * *
지치지도 않는지 루시안은 아침이 될 때까지 아리엘을 놔주지 않았다.
완전히 녹초가 된 아리엘은 더 버티지 못하고 헤롱거리다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떴을 땐 욕조 안에서 루시안에게 끌어안긴 채였다.
결국 늦은 아침에 아리엘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나서야 루시안은 아쉬운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잠시만 기다려.”
아리엘이 흐린 의식을 붙들며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그가 어디에선가 음식이 가득 담긴 트레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아리엘이 가물거리는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자 루시안이 그녀의 눈가에 키스하며 유혹하듯 말했다.
“너한테 먹일 것 좀 가져왔는데. 일어나.”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음식 냄새가 풍기자 아리엘의 배가 눈치 없이 다시 꼬르륵 울었다.
아리엘은 괜히 부끄러워서 꼬물꼬물 이불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런 그녀를 루시안이 이불째 들어 올려서는 침대 시트로 돌돌 감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힘들면 먹여줄 테니 가만히 있어도 돼.”
내가 무슨 아기도 아니고…….
뭐라 항변하고 싶었지만 아리엘은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루시안이 유려한 동작으로 계란 요리며, 아보카도를 바른 치즈빵을 아리엘의 입에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먹는 그녀를 만족스럽게 보던 루시안이 불쑥 말했다.
“피곤해하는 걸 보니 앞날이 걱정되는군.”
그리고 그가 손마디로 아리엘의 뺨을 쓸었다.
“체력 좀 키워야겠어, 너.”
묘한 함의를 가진 말에 아리엘의 흰 뺨이 붉게 물들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이제 다들 루시안과 나를 찾을 거예요.”
어제 마티어스에게 외출하겠다고 말한 뒤,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수잔이랑 마티어스님이 걱정했을 텐데…….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은 배부른 짐승처럼 나른하게 웃을 뿐이었다.
“지난밤에 네가 내 곁을 지키리란걸 예측 못 한 사람은 없을걸.”
그가 아리엘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갓 결혼한 신혼부부를 찾을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루시안 본연의 오만하고 낙관적인 목소리에 행복이 뚝뚝 묻어났다.
듣는 아리엘이 다 부끄러울 정도로.
아침 식사라고 하기엔 많은 양을 어르고 달래 다 먹인 루시안은 다시 아리엘을 침대로 데려갔다.
“잠깐, 해 떴는데…….”
아리엘이 환한 바깥 때문에 당혹해하자 루시안은 소드 마나로 커튼을 쳐 방을 어둡게 만들었다.
처음 단 것을 맛본 아이처럼 맹목적으로 붙어오는 그에게 아리엘은 속절없이 휩쓸렸다.
‘루시안 미쳤나 봐. 아예 안 나갈 생각인 건 아니겠지?’
아리엘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정오쯤 마티어스의 전갈이 올 때까지 루시안은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신혼여행 준비가 끝났다는 마티어스의 전갈에도 끝까지 늦장을 부리던 그가 이윽고 아리엘에게서 떨어졌다.
아리엘이 쉬는 동안 씻고 나온 루시안은 알렌이 하인을 통해 보낸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직 부끄러워서 시선을 돌리고 있던 아리엘은 우연히 자신의 팔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
눈을 깜박이고 다시 보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아직도 물음표와 느낌표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놀란 바람에 아리엘이 딸꾹질을 하자, 바지를 입고 셔츠는 앞섶을 채우지 않은 채 팔만 꿴 그가 돌아보았다.
“왜?”
시트를 두르고 기대앉아 있던 아리엘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루시안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몰라요.”
그러자 루시안이 건수라도 잡은 듯 씩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와 앉았다.
“말해 봐. 뭐 때문인데.”
그는 아리엘의 머릿속 생각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도리질만 치자 루시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얼른. 다시 확 벗겨버리기 전에.”
그가 아리엘이 두른 시트 자락을 잡고 나긋하게 협박을 했다.
아리엘은 시트를 양손으로 꼭 붙잡은 채 갈등하다가, 결국 울먹이며 입을 뗐다.
“팔목이…… 알록달록하잖아요.”
그녀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을 눈치챈 루시안이 긴장을 푼 듯 픽 소리 내 웃었다.
아리엘은 여전히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날 것만 같았다.
아니, 루시안은 멀쩡한데 왜 나만 알록달록해진 거야?
루시안이 울상이 된 아리엘을 빤히 보고 있다가 놀리듯 말했다.
“말했었잖아. 자국을 남기는 건 립스틱 말고도 방법이 있다고.”
아리엘이 뭐라 대답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리자 그가 슬쩍 덧붙였다.
“그리고 팔목만이 아닐 텐데.”
그의 말을 듣고 살짝 자신의 몸을 확인한 아리엘의 얼굴이 충격과 공포로 물들었다.
정말이잖아.
그녀는 이제 배신감을 느꼈다.
아리엘은 루시안의 손을 홱 뿌리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사람들을 마주하라고…….
루시안은 천하의 무양심이야!
이불 속에서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씩씩댔다.
아리엘의 동그란 모양이 이불 안에서 씩씩거리는 걸 본 루시안은 진심으로 이 귀여운 생명체를 삼켜버리면 어떨까 고민했다.
그는 이불 위로 아리엘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너 지금 나한테 불리한 생각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세상에 루시안은 독심술도 하나 봐.
이불 위로 그의 입맞춤이 내려앉는 게 느껴졌지만 아리엘은 입술을 앙다물고 몸을 단단히 웅크렸다.
“……다신 루시안이랑 같이 안 잘 거예요.”
그러자 루시안이 낮게 신음을 흘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죽인다는 말이 더 자비롭겠군. 난 지금도 참고 있는데.”
아, 진짜 루시안은!
아리엘이 참다못해 이불 밖으로 머리를 빼자, 루시안이 도둑 키스로 쪽 입술을 훔쳤다.
그의 뇌쇄적인 목소리가 아리엘의 코앞에서 울렸다.
“씻겨줄까, 혼자 씻을래?”
혼자 씻을게요, 절대로.
아리엘은 루시안이 아예 신혼여행을 내던지고 여기에 신방을 꾸리기 전에 얼른 욕실로 도망쳤다.
루시안이 없는 곳에서 안심하고 따뜻한 물로 씻던 아리엘은 자신의 몸을 제대로 확인하고 매우 심란해졌다.
온몸의 살갗이 한군데 멀쩡한 곳 없이 울긋불긋 난리가 나 있었다.
‘당분간은 누구도 목욕 시중 못 하게 해야 할 것 같아…… 루시안 바보.’
그렇게 씻고 나오자 그야말로 몸이 흐물흐물해진 기분이었다.
아리엘은 겨우 옷만 입은 채 욕실 입구에서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가 주저앉은 걸 본 루시안이 양팔로 가뿐히 아리엘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품에 들어온 그녀가 흡족한 듯 말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새끼 사슴이 따로 없는데.”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아리엘은 반박하려다 그냥 그를 노려보기만 하고 관두었다.
신혼여행을 위해 준비되어있는 마차로 아리엘을 안고 데려가면서 루시안이 말했다.
“계속 이렇게 다니면 좋겠군. 어차피 네 다리는 당분간 쓸 일이 없을 것 같거든.”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 말 왠지 무섭게 들리는데요?”
루시안이 듣기 좋게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유혹이 짙게 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렇게 바꾸지. 당분간 땅을 밟을 일 없을 거라고.”
그 순간, 아리엘은 루시안이 신혼 여행지에서 아예 방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아리엘을 화려한 사륜 마차에 태운 루시안은 마티어스와 사용인들에게 배웅을 받았다.
원래라면 아리엘도 함께였겠지만, 간밤에 루시안이 보이는 곳까지 모조리 흔적을 남겨놔서 나서기 부끄러웠다.
그녀는 마차 안에 숨어서 빼꼼 눈만 내놓은 채 인사를 받았다.
사용인들이 후속으로 따라갈 짐마차에 짐을 싣는 동안 마티어스가 잠시 루시안을 불렀다.
마주 선 채 서로 말이 없던 두 남자 사이의 침묵을 깬 건 루시안이었다.
“설명할 일이 있어.”
루시안은 아리엘에게 전해 들은 내용을 짧게 전달했다.
그녀가 그의 저주를 풀기 위해 라키엘에게 찾아갔던 것과 라키엘이 알려준 답까지.
그 이후에 벌어졌을 일을 예측한 마티어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윤년의 블루문이 아닌 걸 감사해야겠구나.”
루시안의 얼굴에도 깊은 자조의 기색이 어렸다.
“그래. 윤년이 아닌 게 다행이야. 그랬다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 아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마티어스가 루시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할 말이 있다.”
루시안은 대꾸 없이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마티어스가 생각이 많은 눈으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면 대공위와 수도 저택을 물려주마.”
루시안은 눈매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결혼했으니 때가 됐지. 보통 라카트옐은 그래왔으니.”
선대 라카트옐 대공들은 후계가 성인이 되면 대공위를 물려주고 후손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곤 했다.
그것을 기억해낸 루시안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마티어스가 멀찍이 서 있는 아리엘이 탄 마차를 흘긋 바라보았다.
“영지에 가 있을 생각이다. 나로서도 아리엘라가 있는 한 완전히 떠나진 못하겠군.”
“…….”
루시안은 마티어스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그를 빤히 응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침묵하던 루시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있어.”
대공위도 수도 저택도 넘겨줄 필요 없으니까.
덧붙인 루시안의 말에 마티어스가 의아한 표정을 띄웠다.
“뜻밖이군. 분가를 원하는 줄 알았는데.”
루시안이 마뜩잖은 얼굴로 서늘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없으면 아리엘이 그리워하잖아. 그냥 있어. 그리워하는 꼴이 더 속 뒤집히니까.”
“…….”
루시안의 말이 끝나자 두 남자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를 묘한 기류로 바라보던 끝에 마티어스가 대답했다.
“……그래.”
마침 짐마차에 짐을 싣는 일이 끝났다는 하인들의 신호가 왔다.
루시안이 시선을 돌리자, 마티어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다녀와라.”
루시안은 말없이 휙 돌아섰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냉기는 여전했지만 두 남자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일이 라카트옐이란 종족에게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를.
라카트옐 역사에서 성년이 넘은 두 수컷이 영역을 공유한 역사는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시작부터 서로를 죽이려 했던 그들이 영역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오직 아리엘이란 소녀 하나 때문에.
그리고 그녀가 존재함으로써 두 남자 사이에 생겨버린 미묘한 감정 때문에.
정작 이 순간을 7년 동안 바라왔던 대공가의 어린 안주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마차에서 신랑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이제 출발하지.”
루시안까지 마차에 올라타자 마부가 말을 몰았다.
아리엘은 마차 창문을 열고 모두에게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사용인들과 마티어스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십시오, 아기 마님!”
“가셔서 밥 잘 챙겨 드시고요!”
“건강히 돌아오거라.”
아리엘은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키스를 날려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과 기대만이 가득했다.
그런 아리엘을 바라보는 루시안의 얼굴에도 흡족함이 흘러넘쳤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신혼부부의 앞날에 장밋빛 미래 대신 다른 것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신혼여행 기간인 보름 동안 아리엘과 루시안은 남부의 라카트옐 개인 별장에서 머물렀다.
그곳은 대공가 소유의 해변을 낀 아름다운 곳으로, 별장 안의 어떤 창을 열어도 얕은 에메랄드색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두 사람과 극소수의 사용인들 외에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어 조용하고 은밀한 느낌을 주었다.
첫날, 바다에서 돌고래 무리와 반나절 동안 장난치며 논 아리엘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생각했다.
‘돌아갈 때쯤엔 피부가 그을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은 괜한 걱정으로 밝혀졌다.
첫날을 제외하고는 침실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시안은 최상급 해물 요리와 고기 요리, 디저트들을 공수해 아리엘을 매우 잘 먹였다.
그리고 그것이 계락이었다는 듯, 먹어서 생긴 에너지를 침대에서 몽땅 빼앗아갔다.
그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탐했기에 아리엘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렇게 탐닉하면서 여태까지 루시안이 어떻게 그녀를 가만히 두었는지.
아리엘이 성년이 된 지 거의 반년이 되었지만, 루시안은 결혼 전에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낸 적이 드물었다.
궁금함을 참다 못해 아리엘이 새벽녘쯤 묻자, 물을 가져오던 루시안이 땀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흩뜨리며 낮게 웃었다.
“네가 예전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재미있었을 텐데.”
“무슨 말이에요?”
그가 아리엘의 옆에 기대앉으며 대답했다.
“일찌감치 무서워서 도망갔을 거란 얘기야.”
“……?”
여전히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아리엘이 어리둥절한 눈빛을 하자 루시안이 느리게 아리엘의 뺨부터 어깨까지 스치듯 어루만졌다.
루시안의 접촉을 따라 아리엘의 피부에 열꽃이 피어났다.
“물론 너와 이런 것을 겪기 전에는…… 그저 상상만 했지. 네게 강렬한 유혹을 느꼈지만 제어가 안 되진 않았어.”
루시안의 눈이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응시했다.
“하지만…… 한번 경험하고 나니.”
피부에 닿는 그의 진득한 시선에 아리엘은 뺨을 붉히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넥타르(신화 속 신의 음료)를 맛본 인간이 이런 기분일지도.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상관없이 원하게 되니까.”
루시안이 고개를 기울여 아리엘의 어깨에 입술을 눌렀다.
“이제 너 자체가 내게 미약이 된 거야. 가까이만 있어도, 향기만 맡아도, 스치기만 해도…… 이렇게 되는걸.”
그리고 그가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아리엘에게 제 몸을 붙여왔으므로, 아리엘은 토마토처럼 완전히 새빨개졌다.
루시안이 그녀의 귓가에 깨물듯 입을 맞추며 엎치락 자세를 바꾸었다.
“그러니 알아둬. 날 바꿔놓은 건 너란 걸.”
* * *
그들의 긴 밤은 보름 동안 이어졌다.
심지어 집으로 돌아오는 날 아침까지도 루시안은 침대를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고, 녹초가 된 아리엘이 잠들었다 깨어 보니 집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은 채였다.
깨어난 그녀는 자신이 마차에 마련된 푹신한 양털 소파에 누워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인기척을 느껴 시선을 들자 옆에 앉아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루시안?”
어스름이 내린 마차 안, 여인의 창문으로 찾아온 청년 신 같이 아름다운 남자가 한 팔로 머리를 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엘이 깬 것을 보고 그의 붉은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보네.”
“어디…… 에요?”
루시안이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대답했다.
“이제 대공저에 다 왔어.”
그의 대답과 함께 낯익은 저택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엘은 반가움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집에 온 거구나…….’
아름다운 휴양지도 좋았지만 마티어스와 수잔, 그리고 대공가 식구들이 있는 집에 왔다고 생각하자 행복한 기분이 솟아올랐다.
이윽고 마차가 움직임을 멈추고 아리엘과 루시안을 내려주었다.
아리엘은 저택 현관 가장 앞에 나와 있는 마티어스를 보고 활짝 웃었다.
“마티어스님!”
마티어스가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팔을 벌렸다.
아리엘은 어린아이처럼 달려가서 마티어스에게 와락 안겼다.
“다녀왔어요.”
그녀를 안고 확 들어 올렸다가 내려준 마티어스가 말했다.
“마침 네 신방 준비를 마무리한 참이었지.”
“신방이요?”
얼결에 되물은 아리엘은 그녀를 보며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수잔과 사용인들의 얼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맞다. 이제 루시안과 방을 합치게 되지.’
아무 일도 없이 둘이 한 침대에서 잠만 잤던 결혼식 날 밤, 그들이 밤을 보낸 곳은 황실이 준비한 신방이었다.
하지만 둘이 정말로 지낼 곳은 대공가였으므로, 아리엘과 루시안이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대공가에서도 새로 신방을 꾸미게 되었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리엘은 수잔의 손에 이끌려 방을 보러 갔다.
“지금껏 대공가에서 가장 큰 방은 대공자님 방이었지요.”
아리엘은 자신이 열 살일 적 루시안의 방에 처음 가봤을 때 얼마나 놀랐었는지를 떠올렸다.
넓은 대공가 저택에 익숙해진 지금도 루시안의 방은 적응이 안 될 만큼 넓었다.
심지어 침실과 일하는 공간을 연결해놓은 마티어스의 집무실보다도 컸다.
수잔이 후후 웃으며 아리엘에게 귀띔했다.
“신방을 꾸미려고 대공자님 방을 옆방과 틔워 확장했답니다.”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깐. 그럼 방의 규모가……?
방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 다닐 수나 있을지 심히 염려됐지만, 기대하는 수잔의 얼굴을 보니 차마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수잔이 아리엘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부부싸움을 하면 대공자님은 도망갈 데가 없어도, 아기 마님 방은 그대로 뒀으니 언제든 도망치세요.”
익살스러운 수잔의 농담에 아리엘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침내 신방에 도착하자, 수잔이 아리엘의 눈을 가려주었다.
“자, 들어갈까요?”
한 발자국만 들여놨는데도 바닥에 깔린 양탄자의 부드러운 느낌과 포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루시안이 홀로 방을 쓸 때와는 사뭇 다른 공기였다.
소리 내어 숫자를 센 수잔이 아리엘의 눈을 가린 손을 치워주었다.
“짠.”
와아…….
아리엘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방을 둘러보았다.
새로 꾸민 신방은 핑크색 가득하던 그녀의 방도, 차가운 검은색만 가득하던 루시안의 방도 닮지 않았다.
루시안의 물건은 여전히 금속이나 우드의 어두운 톤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화사한 화이트 톤으로 꾸며져 있었다.
색감의 단조로움을 상쇄하듯 아름다운 생화 장식과 화려한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더해져 로맨틱함을 풍겼다.
게다가 방 한편에 위치한 커다란 침대는 흰 베일로 침대 커튼이 처져 있어 은밀하고 달콤한 느낌을 주었다.
모든 게 아리엘이 상상하던 이상이었다.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수잔.”
아리엘은 진심을 담아 수잔에게 말했다.
수잔이 미소를 지으며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원래 방 정리를 하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요.”
수잔은 아리엘에게 처음 방을 만들어주었을 때를 회상했다.
자기 것은 한번도 가져본 적 없던 가엾은 열 살의 꼬마 아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방을 본 소녀가 지었던 행복한 미소는 수잔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마찬가지로 그때의 감정을 떠올린 아리엘은 수잔에게 폭 안겼다.
“지금도 난 수잔이 해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요.”
“아기 마님…….”
아리엘의 어깨를 토닥이며 한참 동안 안아준 수잔이 갑자기 그녀를 떼어내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나저나 신혼여행 가서 대공자님이 밥을 잘 안 먹였나요? 왜 살이 더 빠지신 것 같죠?”
“그게…….”
날카로운 수잔의 시선에 아리엘은 발갛게 뺨을 붉히며 눈을 피했다.
저택에 있을 때보다 두 배는 더 잘 먹었는데도 살이 빠졌다는 건, 루시안이…….
눈치 빠르게 아리엘의 표정을 읽어낸 수잔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 되겠네요. 대공자님을 혼내드리든 해야지.”
신방을 다 구경하고 나와 마티어스에게 가자, 집무실에 있던 두 라카트옐이 아리엘을 맞았다.
마티어스가 자연스레 아리엘이 앉을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네가 성년이 됐으니 정식으로 안주인 대접을 해줘야겠지.”
응……?
여태까지 해주신 것만 해도 충분히 정식 안주인 이상인걸요?
어리둥절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슬쩍 웃은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앞에 화이트 골드로 만들어진 열쇠 본을 내려놓았다.
“이게 뭔가요, 마티어스님?”
“네 소유의 보물고 열쇠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열쇠지.”
아리엘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공가엔 보물고, 무기고, 기록고, 살림고 네 개의 커다란 보물창고가 있었다.
그런데 보물창고를 하나 더 만드신다고요? 그것도 제 것으로?
“열쇠 모양을 네가 원하는 대로 주문하려고 완성시키지 않았다. 골라보렴. 무슨 모양이든 상관없으니.”
아리엘은 이걸 받아도 되는지 망설였다.
지금까지도 마티어스와 루시안에게 받은 것들이 그녀의 금고 안에 가득한데 아예 보물창고가 생겨버리면…….
‘상상만 해도 무서워.’
이건 대놓고 그 안을 채워주겠다는 의지의 표명 아닌가.
그녀의 머뭇거림을 눈치챈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대공가 안주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네가 잘 해오기도 했고.”
마티어스가 안주인의 의무를 꺼내놓자 아리엘도 더 피할 곳이 없었다.
결국 아리엘은 눈을 꼭 감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여, 열심히 할게요.”
그러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동시에 말했다.
“아니. 넌 누리기만 하면 된다.”
“아니. 넌 누리기만 하면 되는데.”
“…….”
순식간에 들통난 라카트옐 남자들의 본심에, 아리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라카트옐 남자들은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속이 빤한 남자들의 행동에 아리엘은 작게 웃고 말았다.
‘나 참, 정말 어린애들 같다니까…….’
결국, 아리엘의 보물고는 만들어지기로 결정됐다.
아리엘은 고민 끝에 열쇠 모양을 ‘기울어진 달’ 모양으로 정했다.
“블루문 저주가 사라졌고, 더 이상 달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기념하고 싶어요.”
마침내 완성된 열쇠 모양은 기울어진 초승달을 반원이 감싸고 있는 형상이 되었다.
보물고와 열쇠를 넘겨준 마티어스가 말했다.
“아리엘라 네게 줄 선물이 한 가지 더 있는데…….”
또요?
아리엘이 창백해지자 루시안이 픽 웃었다.
그녀의 의자를 가볍게 끌어다 제 옆에 앉힌 그가 말했다.
“그 선물은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하는 편이 낫겠군.”
심지어 두 사람이 같이 준비한 거예요……?
아리엘은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티어스가 그녀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이번엔 너도 좋아할 선물이니.”
뭐길래 바로 알려주지 않으시는 거지?
끝내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선물은 내일 공개되는 걸로 마무리 되었다.
* * *
다음 날.
오랜만에 아리엘이 밤에 푹 자게 놔둔 루시안은 아침이 되자마자 그녀를 괴롭혔다.
루시안 품에서 잠든 아리엘이 아침에 깨어나서, 맞닿은 그의 몸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자마자 그걸 핑계로 잡아먹은 것이다.
덕분에 아리엘은 아침 일찍 일어났음에도 정오가 다 될 때까지 방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미련이 남은 눈으로 그녀를 쉬게 놔두고 욕실에 다녀온 루시안이 젖은 머리카락을 한 채 유혹하듯 말했다.
“그냥 나가지 말까?”
한 번 더 잡아먹힐까 두려웠던 아리엘은 이불로 몸을 단단히 감싸고 얼른 선물 핑계를 댔다.
“오, 오늘 보여줄 거 있다고 했잖아요, 루시안.”
스스로의 함정에 걸린 루시안이 한숨 같은 신음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군. 다녀와서 마저 하는 수밖에.”
루시안이 남긴 흔적 때문에 혼자 씻은 아리엘은 나머지 단장을 하녀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아리엘만 빼고 모두가 라카트옐 남자들의 선물에 대해 알고 있는지, 그녀를 단장해주는 하녀들의 손길이 아주 신이 나 있었다.
“예쁘게 해드릴게요. 오늘 최고로 우아해 보이셔야 하니까요!”
아리엘의 준비가 끝나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그녀를 마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게이트를 두 번 타고 꽤 먼 곳까지 온 그들은 이윽고 어딘가에 도착했다.
아리엘은 처음 와 보는 곳이 낯설어서 창문 밖을 살짝 내다보았다.
“다 왔구나.”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에스코트해 마차에서 내려주었다.
아리엘은 그제야 두 남자가 데려온 곳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은 매우 세련된 양식의 아름다운, 갓 지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거대한 부지였다.
“마티어스님, 여기가 어디인가요……?”
아리엘이 묻자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건물들이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군. 다 네 것인데.”
아리엘은 혼란스러웠다.
이 넓은 곳과 저 많은 건물들이 왜 자신의 것이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루시안 녀석이 네가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더구나. 여자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아카데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지.”
“……!”
사실이었다.
아리엘은 검술에 재능이 있지만 도둑 공부를 해야하는 세실과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능력보다는 결혼을 요구받는 다이아나가 늘 안타까웠다.
과거의 자신도 마법을 배울 방법이 없어 악당에게 처참하게 이용당했었다.
여자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있다면 비슷한 비극들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루시안이 듣다니…….
그때 불현듯 아리엘의 머릿속에 깨달음이 스쳤다.
‘그럼, 혹시 여기가……?’
그녀의 표정을 읽은 마티어스가 말했다.
“그래. 여자아이들을 위한 아카데미다.”
‘……!’
아리엘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놀란 그녀에게 마티어스가 여태까지의 일을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루시안이 여자아이 아카데미 이야기를 들은 것은 작년 가을, 요하네스 아카데미에 둘이 함께 머물렀을 때였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티어스는 루시안과 누가 아리엘에게 그것을 만들어줄 것인가를 두고 설전을 벌이다 결국 함께 선물하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가 남아있었다.
“본래 제국법 상 여자아이는 아카데미에 다닐 수 없었지.”
마티어스가 말하자 루시안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젠 과거일 뿐이지만.”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황실을 찾아가 예의 바르게 황제의 멱살을 잡고, 법을 고치도록 협박하는 일이었다.
라카트옐의 압박이 들어가자 황실에서는 몇백 년간 만들지 않던 ‘여학생 아카데미’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법이 바뀌자 마티어스는 비밀리에 부지를 사들여 마법사들을 미친 듯이 투입하는 공까지 들여가며 아카데미 건물과 기숙사를 지었다.
아리엘이 결혼식으로 바쁠 때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뒤에서 몰래 벌인 짓이었다.
그렇게 아카데미 건물이 완성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이런 선물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아리엘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감동을 받은 채 말했다.
어제, 그녀에게 너도 좋아할 선물일 거라고 했던 마티어스의 말이 맞았다.
다른 무엇보다 아리엘의 회귀 전 과거를 아는 유일한 사람들인 두 남자가 준비해준 선물이라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리엘은 감격한 마음을 담아 마티어스와 루시안을 끌어안았다.
“감사해요. 두분 다.”
작은 그녀의 팔에 두 남자는 다 들어오지 못했지만 그들이 아리엘을 감싸 안자 완벽해졌다.
한참 포옹을 나눈 뒤, 아리엘은 촉촉해진 눈가를 닦고 입을 열었다.
“이걸 보여주려고 오늘 이 먼 곳까지 데려오신 거예요?”
마티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뿐만은 아니지만.”
응? 그뿐이 아니라면…….
그때 루시안이 특유의 오만하고 매혹적인 어조로 말했다.
“오늘이 완공식 날이거든. 제국의 모든 귀족들 앞에 바뀐 법을 공포하는 날이기도 하고.”
잠깐. 잠깐만요.
완공식? 제가 오늘 완공식에 참여해야 한다고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아리엘의 뺨에 루시안이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카데미에 대한 권리는 전부 네게 있다는 걸 모두가 알게 할 거야.”
아리엘은 이제야 하녀들이 자신을 공들여 꾸며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황실과 귀족들 앞에서 아카데미 한 개를 통째로 받을 예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말은 없었잖아요, 루시안……!’
열 살일 적 결혼식이 오늘이라는 걸 당일에 알았던 때 같은 황당함이 밀려왔다.
놀라움과 당황이 가득찬 눈으로 루시안을 바라보자 그가 아리엘을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
“걱정 마. 넌 오늘 완공식 리본만 자르면 되니까.”
* * *
루시안의 말과 달리 아카데미 완공식은 어마어마하게 큰 행사였다.
제국은 오랜 세월 여자들이 교육을 받거나 사회적으로 성취하는 것을 억압해왔고, 따라서 소녀들을 위한 아카데미는 귀족들의 큰 반대를 받았다.
미리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귀족들은 딸을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집에서 얌전히 시집갈 준비나 해야 할 딸을 아카데미에 보내서 뭐하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검 좀 다룬다고 집안도 버리고 기사를 한다고 설치는 하이츠 가 첫째 영애 같은 아이들이나 나오겠지요.”
“여자아이들은 집안 관리나 외모 가꾸기만 배워도 충분해요.”
“난 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안 보낼 거요.”
하지만 완공식에 참여하라는 황제의 명을 어길 순 없었고,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누군지 알기 위해서라도 완공식에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황실과 대공가도 이런 귀족계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이 행사는 찬성하는 사람들보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배후에 라카트옐이 있다는 걸 널리 알릴 필요가 있거든.”
여유롭게 상석에 앉아 기세를 풀어놓은 루시안이 말했다.
그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와서 주변을 압도시켰다.
사람들은 공식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는 라카트옐이 세 명 모두 참석한 것에 대해 수군댔고, 포식자의 기세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혹시 이 일을 주도한 가문이 라카트옐 대공가 아닐까?’
‘그렇다면 감히 반항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마침내 행사가 시작되자 황제가 앞으로 나와 바뀐 법을 읽었다.
“이제부터 제국의 열세 살에서 열일곱 살 사이의 귀족 여아들은 모두 아카데미에 다니게 될 것이오.”
황제는 남자아이들이 다니는 기존의 아카데미와 동일하게 병이 있는 아이를 제외하고는 의무적으로 아카데미에 다니도록 법을 만들었다.
“이는 황실의 큰 어른인 태후마마의 뜻이자 제국의 번영을 원하는 황실의 뜻이오.”
긴장된 표정으로 라카트옐의 눈치를 살피며 두루마리를 읽던 황제가 말했다.
“그 뜻을 이어 아리엘라 공주이자 라카트옐 대공자비가 아카데미의 주인이 되어 이끌기로 했고, 그에 기뻐한 대공가가 모든 비용을 대 아카데미를 짓게 되었소.”
‘……!’
황제의 말에 귀족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심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 일이 라카트옐 대공가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서 귀족들은 자기 딸을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겠다고 뻗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라카트옐에게 밉보이기라도 하면…….
‘악명높은 대공가에 찍혀 어느 날 가문이 사라지는 위험을 감수할 순 없다.’
강한 사람에겐 약하고, 약한 사람에겐 강한 귀족들은 재빨리 태세를 바꾸었다.
그들은 박수를 치며 아카데미를 만든 황제와 대공가를 칭송했다.
“지혜로우신 결정이십니다!”
“집에서 놀거나 자수 따위나 배우는 딸들이 학문을 배울 수 있다면 좋지요, 하하.”
“꼭 제 딸을 아카데미에 보내고 싶습니다!”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끝까지 완공식의 자리를 지킴으로서 라카트옐이 아카데미의 거대한 후원자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
마지막 순서로 아리엘과 태후, 황제, 그리고 마티어스가 완공식 리본을 잘랐다.
기특한 손녀 아리엘의 손을 꼭 잡은 태후가 카리스마있게 말했다.
“이제 우리 제국에 현명하고 강한 인재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오.”
완공식은 순탄히 끝났고 귀족들이 앞 다투어 딸의 아카데미 입학 신청서를 쓰러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루시안이 아리엘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이제 여긴 네 거니까 마음대로 갖고 놀아, 아리엘라.”
아리엘은 한숨을 쉬며 몰래 그를 노려보았다.
루시안은 아카데미가 무슨 장난감인 줄 아나 봐.
그녀는 라카트옐 남자들이 막 만들어 던져준 아카데미에서 자랄, 소중한 소녀들의 미래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나 혼자는 어려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학생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새로 신설하는 마법학과를 잘 이끌 수 있는 사람 없을까?
아리엘은 고민 끝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생각해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도 소싯적 스승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마법사 브루노어……!’
브루노어는 마법에 대한 지식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황궁 마법사 시절, 수많은 생도들을 가르쳤다고 했다.
브루노어에게 배웠던 아리엘은 그가 이 일에 적합하다고 확신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아리엘은 곧장 브루노어를 찾아가 부탁했다.
“브루노어, 아카데미의 학장님이 되어주세요.”
자초지종을 들은 브루노어는 안된다며 펄쩍 뛰었다.
“저는 황실과 대공가에 큰 죄를 지은 몸입니다. 금제를 어겨 대공가에 유폐되었던 사람이 어떻게…….”
하지만 히스를 지켜야 했던 브루노어의 사정을 아는 아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브루노어가 지켜야 했던 비밀은 이제 사라지고 없잖아요. 제가 무사히 성년을 넘긴 뒤로 황실과 대공가의 유폐도 풀렸고요.”
브루노어가 건드려서는 안 될 비밀을 건드린 건 사실이었지만 이제 그건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아리엘의 거듭된 설득에 갈등하던 브루노어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전 대공가의 ‘집안일 마법사’입니다. 제가 그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잖습니까. 저 없이 대공가 살림이 안 돌아가는데 다른 일을 또 맡을 수는…….”
아리엘은 브루노어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아카데미에 루시안이 만든 게이트가 있어요. 대공가랑 연결되어 있는. 브루노어가 원한다면 매일 집을 오갈 수도 있을 거예요.”
결국 브루노어는 아리엘의 뜻에 따라 아카데미 학장이자 마법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중요한 일을 맡아줄 학장을 정한 아리엘은 아카데미 이름을 '에반젤린'으로 짓고, 네 동의 기숙사 건물에 삼총사와 친어머니의 이름을 붙였다.
<아리엘, 다이아나, 세실, 블랑쉐.>
블랑쉐는 아리엘의 친어머니인 로잘린드 공주가 자신의 신분을 모른 채 살아갈 때의 이름이었다.
마침 여자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아카데미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에 기뻐하던 단짝 친구들은 아리엘에게 찾아와 감격을 나누었다.
“우리는 다니지 못했지만 우리보다 어린 영애들은 학교에 다닐 수 있을 거야!”
“나도 열세 살로 돌아간다면 다니고 싶은 마음이다, 아리엘.”
아리엘이 기숙사 이름을 그들의 이름을 따 지은 걸 말해주자, 다이아나와 세실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공작가의 하나뿐인 영애지만 가문을 이을 수 없다는 사실에 반항하고 있는 다이아나와 여자의 몸으로 당당히 기사가 된 세실.
여자아이들에게 금기시되던 마법을 익혀 마법의 위상을 높인 아리엘.
그리고 신분을 잃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갔던 블랑쉐 후작 부인.
모두가 소녀들에게 상징성 있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아리엘이 기숙사 이름을 이렇게 지은 뜻을 깊이 이해했다.
“아리엘, 우리가 가진 꿈이 무엇이든…… 내 꿈 1순위는 언제나 너의 친구일 거야.”
아리엘과 세 친구는 처음 그들이 친구가 되었을 때, 서로의 비밀과 꿈을 나누었을 때를 회상하며 부둥켜안았다.
그들의 꿈들 중 하나가 현실이 된 날이었다.
* * *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아카데미 일로 정신없었던 아리엘은 완공식이 끝나고 나서야 친구들과 회포를 풀 수 있게 되었다.
세 친구는 자리를 옮겨 아리엘의 유리 온실에 있는 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진한 아이스 초콜릿 티를 앞에 둔 다이아나와 세실은 아리엘을 요모조모 살펴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신혼여행은 어땠어?”
다이아나의 물음에 이어 세실이 열렬하게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던 아리엘은 당황해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런 건 물어도…….
아리엘이 빨개지자 다이아나가 부드럽게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대공자님이 잘해주셨니?”
그 질문에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엔 할 수 없었다.
신혼여행 내내 루시안이 그녀를 대하던 방식을 생각하면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러우면서도 탐욕스러웠고, 온몸에 그의 흔적을 남기며 아리엘이 스스로에게 있는지조차 몰랐던 감각을 일깨워냈다.
눈만 데구르르 굴리던 세실이 불쑥 물었다.
“그…… 힘들지는 않았고?”
아리엘은 초콜릿 티를 몇 모금 마셔 목을 축였다.
속눈썹을 내리깔고 손을 꼼지락대던 그녀는 이윽고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사실, 아직은 좀 무서워.”
루시안이 만들어내는 감각은 너무 강렬하고 자극적이어서 때론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그녀가 도망가게 놔두지 않고 감각의 끝까지 몰아붙여, 높은 곳에서 낙하하는 것 같은 두려움과 쾌락이 그녀를 사로잡도록 했다.
몇 번 겪으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일만큼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그런 것에는 평생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리엘이 조심스럽게 몇 마디를 털어놓자, 다이아나와 세실은 볼을 붉히며 서로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좋았나 봐!’
‘부끄러워하는 것 좀 봐.’
‘귀여워 죽겠어!’
다이아나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정보 길드의 카디나가 준 선물은 사용해 봤어?”
응?
카디나가 준 선물이라면…….
‘그 야한 속옷들?!’
아리엘은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카디나의 짓궂은 선물은 아리엘의 옷 상자들 깊숙이에 잘 숨겨져 있었다.
‘지금도 루시안이 감당 안 되는데 그런 걸 보여주면 큰일이 날 거야……!’
아리엘은 안절부절못하며 그 물건들을 없애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귀여운 아리엘의 반응을 실컷 즐긴 친구들은 다른 화젯거리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새 마도구 출시를 기다리고 있어.”
아리엘이 개발한 호신 마법 장신구, 이동마법 펜던트, 공간 마법 가방 등은 이미 제국에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색이 아름다운 마법 등불의 유행도 대단해서 귀족들 사이에 수요가 높았다.
요즘은 아리엘 전속 마도구 공방이 그녀 대신 주문을 처리하고 있었다.
“세실이랑 만날 수 없을 때 연락하던 통신 마도구도 황실부터 주문이 들어갔다고 했지?”
“응. 할마마마께서 좋아하셔서.”
세실이 가족들과 갈등을 겪을 때 삼총사가 서로 연락하기 위해 만들었던 통신 마도구는 거기에 그치는 듯했으나, 세실이 가진 마도구를 태후가 보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뭐라? 이 도구와 내 손녀가 연결되어 있다고? 진짜인가, 세실 경?’
손녀인 아리엘과 자주 대화하고 싶었던 팔불출 태후는 황실 이름으로 특별 주문을 넣었다.
아마도 몇 년이 지나면 제국에서 통신 마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꽤 생겨날 것 같았다.
“다음은 뭘 만들 거야, 아리엘?”
사실 아리엘의 마음속엔 이미 다음에 개발할 마도구가 정해져 있었다.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면 나는 마티어스님과 루시안 옆을 떠나게 되겠지.’
그녀는 자신이 죽고 나서도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을 그대로 남겨 추억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두 사람이 너무 많이 슬퍼하지 않도록.
그러려면 현재는 초상화를 그려 단란한 한때를 남기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리엘이 원하는 건 그것을 넘어선 것이었다.
‘함께한 시간 자체를 통째로 저장해서 남길 순 없을까?’
아리엘은 원소 마법으로 기른 고대 식물에서 추출하는데 성공한 '기억 마나'를 떠올렸다.
‘그거라면 가능할지도…….’
아리엘은 친구들에게만 소곤소곤 털어놓았다.
“다음 마도구는 '저장 마도구'가 될 거야.”
* * *
2개월 후.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계절은 금방 바뀌어서 바깥엔 여름의 기운이 가득해졌다.
어제 밤새 루시안에게 시달린 뒤 느지막이 일어난 아리엘은 마도구 개발을 위해 커다란 대공가 서고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리엘 옆에는 커다란 덩치의 시종마, 주니어가 엎드려 그녀의 곁을 지켰다.
브루노어의 마법으로 시원한 실내에서 커튼을 통해 들어오는 여름 햇볕을 받으며 연구하던 아리엘은 이내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기 마님.”
졸고 있는 아리엘을 살며시 흔들어 깨운 수잔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주무실 거면 들어가서 주무세요.”
아리엘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아니에요. 이제 낮 두 시인데…….”
아까 많이 잤는데 왜 이렇게 졸린 걸까?
아리엘이 잠을 깨려고 애쓰자 수잔이 안쓰럽게 바라보다 말했다.
“시원한 마실 거라도 갖다 드릴까요?”
“네, 수잔.”
아리엘은 눈을 반짝였다.
수잔이 손가락을 몇 개 펴며 물었다.
“그럼 골라보세요. 석류청으로 만든 아이스 티, 얼린 바나나와 우유를 간 쉐이크, 꿀 섞은 토마토 주스. 어떤 거 해드릴까요?”
“음…… 석류 티 먹을래요.”
“금방 해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수잔은 정말로 몇 분도 되지 않아서 유리 티 팟에 차갑고 새콤한 붉은 음료를 가득 가지고 돌아왔다.
“고마워요, 수잔.”
수잔이 예쁜 유리잔에 국자로 석류알과 액체를 알맞게 담아주었다.
아리엘은 석류티를 홀짝이며 얼음 그릇에서 얼음을 집어 주니어의 입에도 넣어줬다.
그녀가 맛있게 석류 티를 마시는 걸 흐뭇하게 보던 수잔이 입을 열었다.
“근데 요즘 신 것만 찾으시네요.”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래요?”
“네. 원래 세 번에 두 번은 달달한 음료를 찾으셨는데, 요즘은 세 번이면 세 번 다 신 것만 달라고 하시거든요.”
아리엘은 최근의 자신이 그랬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빙긋 웃었다.
“수잔은 그런 것도 다 기억하고 대단해요.”
수잔 최고!
기분좋게 웃은 수잔이 약간 염려스러운 듯 아리엘의 뺨을 만졌다.
“그래도 조금 걱정되네요. 우리 아기 마님이 더위를 타시나……?”
“몰랐는데, 그런가 봐요.”
늦잠을 자게 되거나 살이 빠지는 등 그녀의 신체 리듬에 관련된 일은 다 '루시안'이라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아리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일상이 하루하루 흘러갔다.
마도구 개발에 힘쓰던 아리엘은 드디어 작은 양면 거울 모양의 마도구를 완성해냈다.
“됐어.”
한쪽 면의 거울에 기억 마나를 채워 넣은 뒤 작동시키면, 기억 마나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고스란히 기억해 저장하고 반대편 거울에 보여주는 식이었다.
아직 초기 단계라 움직이는 모습까진 담지 못했다.
“이걸 제대로 시험해봐야 하는데…….”
아리엘은 개발에 성공한 마도구를 가지고 풍경을 담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조금 있다가 루시안이랑 모닥불 가든에서 디저트 먹는 시간이니까, 시험해보고 가면 되겠다.’
타박타박 화이트 가든으로 향하는 길을 걷던 아리엘은 멀찍이 낯익은 형상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안?’
티타임 시간쯤 만나기로 한 그녀의 남편이 미리 와서 모닥불 가든의 나무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아리엘은 반가워서 도도도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응?’
팔짱을 낀 자세로 조각상처럼 기대앉은 루시안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루시안의 아름다움과 맞닥뜨리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의 미색에는 인간의 심장을 졸아붙게 하는 그런 점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좀처럼 그가 잠든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항상 먼저 지쳐서 잠드는 쪽은 아리엘이었기 때문이었다.
‘루시안도 피곤하긴 했나 봐.’
매일 그렇게 막…… 새벽까지 안자고 그러니까 그렇지.
아리엘은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럴 거면서 하루도 안 거르고 밤마다…….’
바보 루시안.
아리엘은 루시안의 이마에 살짝 허공 꿀밤을 남겼다.
그녀가 그러는데도 세상 모르고 잠든 그의 모습에 아리엘은 용기를 얻어 코앞까지 다가갔다.
고요히 그를 보고 있자니 자신의 심장 소리가 가장 크게 들렸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니까 진짜 예쁘다…….’
내 남편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세상에서 제일 예뻐.
가슴이 두근거려서 한참 보고만 있던 아리엘은 그제야 손에 든 마도구를 떠올려냈다.
그녀는 기억 마나를 채운 쪽 거울에 풍경 대신 루시안을 담고 홀린 듯이 작동시켰다.
은은한 빛이 스치고 지나가자 반대쪽 거울에 루시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리엘의 얼굴도 기쁨으로 물들었다.
“아, 성공했…….”
그때, 루시안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꺅!”
깜짝 놀란 아리엘은 마도구를 놓쳤고 루시안이 다른 손으로 유연하게 그것을 받아냈다.
아리엘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품에 넘어뜨린 그가 말했다.
“그렇게 날 때리고 싶었어?”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아리엘은 숨을 할딱이며 되물었다.
“네?”
루시안이 지척에서 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가까이 와줬으니까 때려 봐. 허공만 때리지 말고.”
바, 방금 꿀밤 준 거 말하는 건가요? 하지만 그건 자는 줄 알고…….
그가 신화 속 야누스처럼 금세 얼굴을 바꾸고 유혹하듯 말했다.
“원망일지라도 허공 따위가 날 대신하다니 기분 나쁘잖아.”
그것까지 질투하는 거야?
아리엘은 기가 막혀서 눈만 깜박거렸다.
무엇보다 그의 위에 쓰러진 자신의 자세가 무척 신경 쓰였다.
환한 낮에 누가 보면 부끄러울 자세인데…….
난감한 얼굴의 그녀에게 루시안이 선심 쓰듯 속삭였다.
“아니면 입맞춰 주든가. 응?”
아리엘은 조그만 미간을 모으고 그를 노려보았다.
맨날 이런 식이야, 루시안은.
하지만 금단의 과실처럼 붉고 아름다운 그의 입술은 분명 유혹적이긴 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눈을 감고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달콤한 박하 향이 코끝을 간지럽게 맴돌았다.
자, 이제 됐죠?
아리엘은 눈을 뜨고 몸을 물렸다. 아니, 물리려고 했다.
어느새 그녀의 뒷머리를 손으로 감싼 루시안이 제 상체를 일으키며 아리엘의 입술을 열고 들어왔다.
“읏.”
거침없이 입안을 헤집는 그의 움직임에 아리엘은 몸을 떨었다.
입술이 몇 번이나 삼켜졌다.
버거워진 아리엘이 겨우 그의 어깨를 두드리자 루시안이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짙푸른 눈동자 속에 화염이 일렁였다.
몇 번 더 그녀의 입술에 짧게 키스하며 그가 중얼거렸다.
“하아…… 길목에서 기다린 보람이 있네.”
혼미해진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다렸다고요? 그럼 아까 잠들어 있었던 건…….
루시안이 악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속았다는 걸 깨달은 표정의 아리엘에게 그가 놀리듯 말했다.
“난 내 병아리처럼 잠이 많지 않거든.”
* * *
루시안과 디저트를 먹는 시간은 그가 고집을 부려 새롭게 만든 일정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리엘이 먹는 것만 지켜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늘의 디저트는 샹티 크림을 얹은 시원한 슈와 오렌지 속살을 발라 뿌린 샤베트였다.
왠지 배가 고파진 아리엘은 열심히 슈를 잘라 조그만 입에 밀어 넣었다.
옆에 앉아 꼭지를 자른 딸기를 그녀 옆으로 밀어주던 루시안이 아리엘의 입술에 묻은 슈크림을 훑으며 말했다.
“잘 먹이는데 왜 이렇게 약해빠졌는지 모르겠군.”
무슨 나를 키우는 동물 대하듯 말하지 말아요, 루시안.
아리엘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딸기와 슈크림을 한입에 삼켰다.
하지만 요즘 자꾸 졸리고 허기진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살 찌려고 이러나 봐요…….”
수잔의 잔소리가 줄어들 테니 체중이 느는 건 좋은 일이지만, 요즘은 왠지 체력이 늘어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자꾸만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지기만 했다.
루시안이 아리엘의 말랑한 뺨을 슬쩍 어루만졌다.
“넌 좀 쪄야 해. 너무 가벼워서 만질 때 무서우니까.”
그렇게 말한 그가 다른 손끝으로 아리엘의 허리선을 느리게 더듬었다.
아리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루시안은 정말……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나 봐.’
그녀는 그의 손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루시안은 그 생각밖에 없어요?”
그러자 루시안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네가 옆에 있는데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해? 난 많이 참고 있는 거라고.”
“아, 안 참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아리엘의 질문을 들은 그의 분위기가 슬쩍 위험하게 바뀌었다.
루시안이 긴 속눈썹을 관능적으로 내리 깔며 말했다.
“널 안 재우겠지. 밤에만 그러는 게 아니라, 낮에도.”
‘…….’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달콤하고 나른한 한낮의 디저트 타임이 순식간에 긴장된 분위기로 물들었다.
묘하게 팽팽해진 공기 속에서 침묵하던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가 어두워진 눈동자로 아리엘과 눈을 마주쳤다.
“지금은 참을 수가 없네.”
루시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리엘은 그에 의해 번쩍 들려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아리엘의 목소리는 입맞춤에 의해 먹혀버렸고, 루시안의 입술이 외설스레 그녀의 목덜미와 쇄골에 내려앉았다.
“루, 루시안…….”
한 팔로 테이블을 짚은 그가 아리엘의 어깨부터 아래로, 얇은 드레스 천 위로 입을 맞췄다.
옷 위로 닿는 간지러운 키스에 아리엘은 어쩔 줄 모르며 바르작거렸다.
이윽고 그가 아리엘을 번쩍 안아 든 뒤 저택으로 향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녀는 침실의 소파에서 그에게 입맞춤 세례를 받고 있었다.
어둡게 커튼까지 친 루시안이 그녀의 드레스 리본을 풀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해 둬. 안 참으면 이렇게 된다는 걸.”
* * *
그렇게 낮부터 밤까지 그의 품에 갇혀있던 아리엘은 완전히 지쳐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밤에 그녀는 기묘한 꿈을 꾸었다.
타락과의 마지막 전투 날, 정신을 잃은 채 무의식 속에서 보았던 장면이었다.
‘……!’
루시안과 같은 기운을 품은 거대한 검은 드래곤이 눈앞에 있었다.
초대 용 라키엘은 그 모습이 루시안의 본체라고 했었다.
인간의 껍데기에 갇혀있는 라카트옐의 진짜 모습이라고.
하지만 그때와 달리, 어둠 속에 거대한 몸을 똬리 튼 드래곤은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꿈속에서 아리엘은 그 드래곤에게 가까이 다가가 루시안의 이름을 불렀다.
‘루시안……?’
그러자 드래곤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아리엘은 드래곤의 눈동자를 보고 숨을 멈추었다.
루시안의 심해같이 어둡고 짙은 푸른색이 아니었다.
비둘기의 피 같은 루비색의 붉은 눈동자였다.
‘루시안이 아니야.’
하지만 붉은 눈을 가진 드래곤은 아리엘에게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아리엘은 경계도 하지 않고 그것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것의 콧잔등을 쓰다듬으려 했고…….
“……헉!”
아가리를 벌린 그것은 아리엘을 삼켜버렸다.
“하아, 하아…….”
“왜 그래, 아리엘라.”
악몽에서 깨어난 그녀는 꿈을 묻는 루시안의 물음에 고개만 젓고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꿈에서 루시안이 아닌 다른 드래곤을 봤다고 하면 분명 질투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루시안의 체온은 따뜻했고, 아리엘은 안심한 채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루시안은 드물게 아리엘이 잠들어 있는 동안 자리를 비웠다.
아리엘은 지난밤에 그에게 들어서 루시안과 푸른 사자 기사단이 마수 때문에 하루 정도 집을 비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보니 루시안은 이미 자리에 없었고, 수잔이 아침 시중을 들어주었다.
“자. 따끈한 우유 수프에요. 드셔보세요.”
아리엘은 비몽사몽 일어나 수잔이 쥐여주는 스푼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방 안 곳곳에 못 보던 빛무리가 보석처럼 흩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비빈 아리엘은 수잔에게 물었다.
“수잔, 저게 뭐예요?”
수잔이 부드럽게 웃더니 창문을 가리켰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에 무언가가 걸려있었다.
아리엘이 처음 보는, 투명한 보석을 엮어놓은 모양의 예쁜 장식품이었다.
수잔이 아리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썬 캐쳐랍니다. 대공자님이 아기 마님 침대맡에 걸어두고 가신 물건이에요.”
“썬 캐쳐요?”
수잔이 콧노래를 부르듯 말을 이었다.
“드림 캐쳐는 아시지요? 드림 캐쳐가 악몽을 몰아내듯이, 썬 캐쳐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햇볕의 좋은 기운만 방에 들인다고 해요.”
정말 예쁘죠? 하고 덧붙인 수잔의 말에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식 자체도 아름다웠지만 보석이 태양을 받아 퍼트린 빛무리는 낮의 별처럼 예뻤다.
수잔이 아리엘의 머리를 정돈해주며 말했다.
“대공자님은 아기 마님 방의 창문이 허전한 게 은근 신경 쓰이셨나 보네요.”
핑크색이 가득했던 지난 아리엘의 방 창문에는 마티어스가 선물한 드림 캐쳐가 걸려있었다.
그쯤까지 생각이 닿자 아리엘은 묘한 의심에 사로잡혔다.
‘혹시 오랫동안 그걸 질투했던 건 아니겠지?’
마티어스 것 대신 자신의 선물을 걸어두며 즐거워했을 루시안의 사악한 얼굴이 떠오르는 듯했으나 아리엘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마침 어젯밤의 악몽도 있고 하니 빛이 나쁜 기운을 몰아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아리엘은 열심히 기지개를 켠 뒤 침대를 나섰다.
화창했던 아침 날씨와는 달리 낮부터는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하루종일 아카데미 일로 브루노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쉬러 방에 돌아왔다.
‘루시안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데이 베드에 누워서 루시안을 생각하자 어제 개발에 성공한 마도구가 연이어 떠올랐다.
아리엘은 호다닥 일어나서 탁상 위에 놓인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양면 거울이라 한쪽 면에는 평범하게 주위가 반사되어 보였지만, 반대편에는…….
“있다.”
기억 마나가 저장한 루시안의 잠든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물론 잠든 게 아니라 잠든 척했던 거지만…… 나쁜 루시안.
속으로 작게 투덜거린 아리엘은 마도구 위에 떠오른 루시안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다니.
간질간질한 행복이 솟아올랐다.
아리엘은 마도구가 보여주는 루시안의 형상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듣는 사람 없이 혼자 고백한 건데도 괜히 부끄러워진 아리엘은 얼른 마도구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마티어스님과 차를 마시러 가는 김에 달튼에게 루시안의 어린 시절 이야기나 들려달라고 해야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어? 몸이 왜 이러지?’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시야가 빙글 돌았다.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기 마님!”
아리엘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놀라서 쟁반을 떨어뜨리고 달려오는 수잔의 모습이었다.
* * *
아리엘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루시안은 하던 일을 내던지고 곧장 저택으로 돌아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뚫으며, 그의 머릿속엔 오만 가지 두려운 생각들이 떠돌았다.
원하기만 한다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라카트옐과 아리엘은 달랐다.
드래곤의 심장을 품고 태어나긴 했어도 아리엘은 기본적으로 인간, 즉 유한한 존재였다.
아프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리엘의 침상 곁에는 브루노어, 대공가 주치의 두 명이 모두 불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부른 마티어스의 표정은…….
그때 루시안은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렸다.
도착한 자신을 발견한 마티어스의 얼굴이 전에 없이 절망적이었으므로.
“내 아내의 어디가 아픈 건지 말해. 당장.”
어떤 병이라도 그는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불치병이라 해도, 지상의 끝까지 뒤져서라도 약을 찾아낼 것이다.
섬뜩하게 갈려 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아리엘의 주치의인 밀러가 나섰다.
“아프신게 아닙니다. 다만…….”
이어진 밀러의 말을 들은 루시안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았다.
그 일은, 아리엘에게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리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빗줄기가 굵어지며 창문에 번쩍 빛이 비쳤다. 천둥이 연이어 울렸다.
쾅, 우르르르.
마치 20여 년 전 선대 대공비의 장례식 날 같은 날씨였다.
* * *
아리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며 기억을 되짚자 아까 쓰러졌던 것이 기억났다.
‘어떻게 된거지……?’
그녀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아까 같은 현기증은 일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주치의가 다녀간 흔적과 아무렇게나 의자에 걸쳐져 있는 루시안의 제복 재킷이 보였다.
‘루시안이 돌아왔구나.’
그런데 다들 어디 있는 걸까?
아리엘 옆에는 지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고 벽난롯불 외엔 등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이상해.’
평소 아리엘이 재채기만 해도 호들갑을 떠는 수잔과 저택 사람들이었다.
지나치게 조용한 주위가 아리엘에게 불안감을 불러 일으켰다.
“주니어.”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주니어를 불렀다. 그러자 허공에서 푸른 화염이 솟아나며 거대한 사자 모양의 시종마가 나타났다.
아리엘은 힘없이 주니어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부탁했다.
“주니어…… 루시안이 어디 있는지 알려줘.”
시종마는 루시안이 자기의 힘을 나눠서 만든 존재였기에 루시안과 연결되어 있었고, 아리엘은 종종 주니어를 통해 루시안에 대한 간단한 사실을 묻곤 했다.
아리엘의 말에 반응한 주니어가 루시안의 위치 대신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루시안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검사 해. 그럴 리가 없으니.”
그의 목소리는 매우 거칠고 흥분한 듯 들렸다.
“몇 번이나 다시 했습니다.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을 만큼 정확합니다.”
루시안과 대화하고 있는 것은 아리엘의 주치의, 여의사 밀러였다.
밀러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아리엘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당혹스러움을 읽었다.
“말이 되질 않아. 이건 이전에 없던 일이야.”
“두 분이 성혼하신지 두 달이 넘었으니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아니. 너희 같은 것들은 이해 못 해.”
루시안이 밀러의 말을 잘랐다.
밀러가 잠시 침묵하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리엘님의 모든 증상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밀러의 목소리가 아리엘의 귓전에 화살처럼 꽂혔다.
“임신이라는 것을요.”
‘……!’
아리엘은 짧게 헉 숨을 들이쉬었다.
터져 나오는 놀란 소리를 막기 위해 한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내가 방금 맞게 들은 걸까?’
내가, 아기를 가졌다고요……?
그녀는 본능적으로 납작한 배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전혀 몰랐는걸……’
아리엘은 갓 결혼한 데다 어린 나이였고, 어머니나 손아래 형제들이 없어서 이런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요즘 이상하긴 했다.
루시안 말마따나 잘 먹고 잘 자는데도 늘 피곤했고, 평소와 달리 입맛도 조금 변했다.
달거리는 원래 건너뛸 때가 많아서 상상도 못했는데…….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왔다.
‘마티어스님은 내가 아기를 가지기 어려울 거라고 말해주셨지.’
라카트옐은 특별한 체질을 가지고 있어서 후손이 생기기 어렵다고 했다.
게다가 자신처럼 몸이 약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아기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감히 바라지도 않았던 아리엘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기가 없더라도 마티어스와 루시안, 두 남자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찾아와 줬구나. 기적처럼.’
놀람이 잦아들자 아리엘은 마티어스와 루시안을 떠올리며 기쁨에 잠겼다.
두 남자는 내색하지 않아도 아리엘이 그녀를 닮은 아기를 가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미안해하고 슬퍼했었다.
두 사람 다 이번 일에 얼마나 놀랐을까?
그때 주니어를 통해 루시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리엘에게 절대 알려선 안 돼. 그 애가 조금이라도 마음 아픈 꼴은 못 봐.”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왜 나한테 알려서는 안 된다는 거지?’
밀러의 당황한 목소리도 뒤이어 들려왔다.
“아기 엄마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런 일을 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루시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어떻게 봐도 아기가 생긴 아버지의 기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것을 만든 책임은 나한테 있어. 그리고 이건 아리엘의 목숨이 달린 일이야. 한시도 놔둘 수 없다.”
“그럼 정말로…….”
루시안이 냉혹하게 잘라 말했다.
“꺼내서 죽여야지. 그것이 내 아내의 몸에 더는 기생하지 못하도록.”
‘……!’
아리엘은 충격에 비틀거렸다.
저 사람이…… 내가 아는 루시안이 맞을까?
루시안의 목소리를 한 다른 존재가 아니고?
그녀를 위한다는 말을 들으면 아리엘이 아는 루시안이 맞았다.
‘하지만 어떻게, 루시안이…….’
왜?
왜 우리 둘 사이의 아기를 두고 저렇게 잔인하게 말하는 거지?
손발이 차갑게 식으며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호흡이 잘 이어지지 않아서 아리엘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야. 루시안은 날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루시안도 당황해서 그런걸 거야.
진심이 아니죠?
애초에 아기가 생기지 못할 거라고 예측했던 건 그녀의 건강 때문이었으니, 걱정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걸 것이다.
‘대화를 해봐야 해. 루시안과 얘기를 나눠보면 해결될 거야.’
아리엘이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 사이.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루시안이 들어왔다.
그는 깨어나서 침대에 앉아 있는 아리엘을 보고 약간 당혹해하는 기색이었다.
“일어났어?”
아리엘은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혼란스러워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은데, 사랑하는 사람 앞이라 그게 너무나 어려웠다.
루시안이 다가와서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춘 뒤 부드럽게 말했다.
“좀 더 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붙들며 입을 열었다.
“루시안…… 나 왜 쓰러진 거예요?”
루시안이 천천히 아리엘에게서 손을 거두고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감정을 누르며 뜸을 들인 그가 애써 평온한 목소리를 냈다.
“별일 아니야, 아리엘라. 과로라고 하더군. 며칠은 약을 먹으며 쉬어야 해.”
아리엘은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모아쥐었다.
루시안이 자신을 속이고 하는 말, 행동 모두가 그녀를 아프게 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아리엘의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거짓말. 왜 거짓말하는 거예요.”
그녀가 고개를 들자 루시안의 흔들리는 시선이 보였다.
그가 억누른 듯한 음성으로 느리게 말했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아기가…….”
아리엘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자 루시안의 가면은 산산이 부서졌다.
감추지도 못하고 그가 아연한 표정을 드러냈다.
아리엘은 확인 사살을 받은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한테 아기가 생겼다면서요…… 다 알고 있어요.”
그때 아리엘은 처음으로 완전히 무너지는 루시안의 표정을 보았다.
더 이상 평온함을 가장하지 않고 그가 다급히 아리엘의 침대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아리엘, 잘 들어. 당장 그것을 없애야 해.”
없앤다고요?
아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왜요……? 싫어. 왜 그래야 하는데요?”
루시안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다는 거 알아요. 나도 정말 놀랐지만…… 이건 좋은 일이잖아요. 루시안을 닮은 아기가 와준 건데…….”
“아리엘, 제발.”
“혹시 내가 몸이 약해서 그런 거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루시안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며 말을 끊었다.
“너와 이렇게 이야기할 시간도 없어. 난 지금 온 내장이 쥐어짜이는 기분이야. 당장 기세를 써서라도 그것을 죽이고 싶다고.”
아리엘은 숨을 할딱이며 가냘프게 말했다.
“이해가 안 돼요. 나는…… 루시안이 좋아할 줄 알았어요. 나만큼은 아니어도 기뻐할 줄 알았어.”
“…….”
루시안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리엘이 그를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듯이 슬프게.
이제 아리엘은 그게 사실일까 봐 조금 두려워졌다.
“기대하진 못하더라도 조금은…… 우리 사이에 아기가 생기는 걸 바라지 않았어요?”
돌아온 대답은 차갑고 단호했다.
“한 번도 바란 적 없어. 우리 사이엔 아기가 있어선 안 돼.”
힘이 탁 풀리며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심이었구나.’
가슴 한가운데가 벌어져 상처가 난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아프기 어려울 테니.
그녀의 눈물을 본 루시안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한참 만에 아리엘은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시안이 바라지 않더라도, 이 애는 잘못이 없잖아요…….”
아빠인 루시안이 바라지 않았다고 해서, 엄마인 아리엘이 그 사실도 모른 채 품었다고 해서 아기를 탓할 순 없었다.
루시안이 회한에 잠긴 목소리로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래. 진짜 잘못은 나한테 있지. 하지만 그것에게 잘못이 없다고?”
그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널 죽일 거야, 아리엘라. 난 절대 그걸 용납할 수 없어.”
“안 죽을 수도 있어요. 다른 산모들이 그랬다고 해서 꼭 나도 그러리라는 건…….”
“아니. 난 알아. 그것은 널 해칠 괴물이야.”
“루시안…….”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지 루시안이 거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섰다.
“날 얼마든 원망해도 좋아. 다 내 탓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죽어야 해.”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방을 오가다, 아리엘의 뺨에 흐른 눈물을 보고 낮게 잦아든 음성으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의사를 데려올 테니.”
루시안이 방을 떠나자 아리엘은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아파요. 마음이 너무 아파.
엄마, 나 어떻게 해야 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슬퍼서 몸을 웅크리자 뱃속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리엘은 납작한 배 위에 손을 얹으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미안, 미안해 아가야. 너까지 슬프게 만들려는 건 아니었어.’
아빠가 지금은 놀라서 그런 거야. 넌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가 아니야.
‘…….’
마치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듯 통증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다른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뚜렷하게 그녀에게 전해져왔다.
경이로운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아리엘은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런 아기를 해치게 둘 순 없어. 적어도 루시안이 진정될 때까지만이라도…… 내가 지켜야 돼.’
아리엘은 배를 손으로 감싼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렁줄을 당기자 수잔이 창백해진 얼굴로 들어와 아리엘을 안아주었다.
아리엘은 수잔의 품에 안긴 채 숨을 고르며 말했다.
“마티어스님을 불러주세요.”
* * *
아리엘의 부탁을 들은 수잔은 조용히 마티어스를 불러왔다.
알렌과 함께 들어온 마티어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비통한 얼굴이었다.
“마티어스님…….”
아리엘이 그를 부르자 마티어스가 한참 말을 아끼다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자책과 자괴감이 배어있었다.
“네가 우리 때문에 위험해질 일은 다시 없을 줄 알았다. 그럴 거라고 믿었어.”
아리엘은 당장이라도 마티어스에게 안겨 서럽게 울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녀는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마티어스님. 어떻게 된 건지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그녀는 배를 보호하듯 제 몸을 감싸 안았다.
“제게도 알아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까요.”
한편, 아리엘을 남겨두고 방을 떠났던 루시안은 곧장 의사에게 가지 못하고 비 오는 정원을 방황했다.
그의 고통어린 기세에 싱그럽던 식물들이 루시안의 궤적을 따라 시들었다.
‘처음부터…….’
애초에 아리엘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괴물의 씨가 그녀 안에 자리 잡았다는 것도, 그것을 죽여야 한다는 것도.
선량한 그녀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만약 자신이 라카트옐이 아니라 평범한 남자였다면, 물론 그랬더라도 그는 반대했겠지만, 그녀에게 이토록 상처를 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저주한다.’
루시안은 이 순간 자신의 피와 혈통을 저주했다.
라카트옐이 후손을 갖기 어려운 것은 임신할 수 있는 특정한 시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윤년의 블루문.’
라카트옐 종족은 4년 정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년의 블루문 때만 임신이 가능했다.
윤년에도 블루문 날은 1년에 5일밖에 되지 않으니 확률은 더욱 희박했다.
‘하지만 올해는 윤년도 아니었지.’
그렇기에 루시안은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블루문 기간 동안 그는 강해지고 이성이 옅어지기에 곁에 있는 아리엘이 다칠까 걱정했을 뿐, 아이가 생길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사가 말한 시기를 보아 아기가 생긴 것은 지난 블루문 때가 분명했다.
지독하게 아름답고 행복했던 첫날밤의 기억은 그에게 지옥이 되었다.
‘내가 오만했다.’
윤년의 블루문 때만 조심하면 된다고 여겼기에 그는 방심했다.
자신이 주의하면 조절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시 빌어먹을 운명이 그를 조롱하게 될 줄은 모르고.
‘다른 것도 아니고, 아리엘의 목숨으로…….’
루시안은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절대로 그녀를 잃을 수 없었다.
그는 의사를 부르러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의사인 밀러가 하지 못한다고 하면 아리엘을 재운 뒤 자신이 기세를 풀어 그것을 죽이면 될 것이다.
죽인 것을 꺼내는 것 정도는 의사가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밀러를 반강제로 끌고 아리엘이 누워있는 방에 도착한 루시안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발걸음을 멈췄다.
불길함을 누르고 천천히 문을 열자, 침대 맡 의자에 앉아있는 마티어스의 모습이 보였다.
함께 방 안에 있던 알렌의 얼굴은 슬픔에 잠겨있었고…….
‘……!’
그 어디에도 아리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루시안은 숨이 막히는 감각을 느끼며 말했다.
“무슨…… 아리엘라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괴로워하고 있던 마티어스가 무겁게 대답했다.
“그 애는 떠났다.”
떠나?
루시안은 순간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떠났다고? 어디로?”
세상의 모든 땅은 라카트옐이 가지 못할 곳이 없었다.
과거 잃어버린 드래곤의 눈을 찾을 때 라카트옐은 깊은 호수 속과 높은 산 위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연약한 소녀가 대체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그의 손아귀에서.
루시안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말해, 마티어스. 지금 이럴 때가 아닌 걸 당신도 잘 알잖아. 아리엘이 죽을 거라고. 시기를 놓치면 그 애 안전도 장담 못해.”
두려움 때문에 끝에 가서는 거의 소리를 지르는 꼴이 되었다.
“아리엘이 어디로 떠났지?”
그의 물음에 마티어스가 천천히 시선을 마주쳤다.
마티어스의 눈에서는 거짓을 읽을 수 없었고, 절망만이 가득했다.
“나도 모른다. 다만…… 그 애는 약속했어.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루시안은 대화를 그만두고 재킷을 집어들고 뛰쳐나갔다.
당장 아리엘을 찾아 데려와야 했기에.
추후 대륙사에 기록될, 대 추격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