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Chapter 1 (20/23)

Chapter 1




1년 후.

차가운 바람이 아리엘의 몸을 파고들었다.

아리엘은 털 망토를 여미며 양팔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맞은편에는 겨울을 닮은 아름다운 남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서 있었다.

인내가 고갈된 목소리로 루시안이 천천히 눌러 말했다.

“아리엘라. 이리 와.”

아리엘은 눈을 감은 채 몇개월 전을 회상했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그 순간들을.

입안에 감돌던 달콤한 웨딩케이크 설탕 장식의 맛.

따뜻한 날씨에 만개했던 분홍색 장미와 눈부시게 희던 면사포 베일.

사랑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만약 그때 루시안이 똑같은 요구를 했다면 아리엘은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갔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발걸음을 막는 것이 있다면 뭐든 물리치고 루시안에게 달려가 안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아리엘은 두려워하며 루시안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럴 수 없어요.”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 * *


현재.

폭풍 같았던 생일이 지난 후, 갓 열일곱 살이 된 아리엘은 처음 살아보는 성년의 나날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특히 다이아나는 '성년 버킷 리스트'라는 것을 가져와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리엘을 데리고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네 열일곱 살 생일을 얼마나 기다렸다구!”

겨울 휴가를 받아서 합류하게 된 세실도 다이아나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아기인 널 데려갈 수 없어서 우리도 미뤄뒀다.”

나이가 어려서 친구들보다 훨씬 나중에 성년을 맞은 아리엘은 먼저 어른이 된 친구들에게 차근차근 성년의 삶을 배우기로 했다.

“뭐부터 하면 돼, 다이아나?”

다이아나가 흥분으로 뺨을 붉히며 대답했다.

“할 게 너무 많아서 탈이야, 귀염둥이야. 야시꾸리한 내용의 사랑 연극도 보러가야 하고…….”

야, 야시꾸리한?

아리엘은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다.

말을 이으려던 다이아나가 별안간 정색하며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연극을 보는 내내 절대 눈을 가리거나 귀를 막지 않는 거지. 그래야 진짜 어.른. 이니까. 들었지, 세실?”

세실이 붉어진 얼굴로 항의했다.

“무, 무슨 소리냐. 성애도 어디까지나 사랑의 한 영역으로서 난 전혀 부끄럽지 않…….”

“어머나, 지난번에 빌려준 연애소설을 부끄럽다고 빼꼼빼꼼 보던 사람은 어디 갔지?”

“그건……!”

말문이 막혀버린 세실이 얼른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냐, 다이아나. 너도 가본 적 없으면서.”

다이아나가 부채를 착 접으며 도도하게 대꾸했다.

“흥! 이 언니가 미리 정보를 수집하면서 다 예습을 해 놨지. 우리 귀염둥이가 성년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아리엘은 아웅다웅하는 친구들을 보며 작게 웃었다.

그녀도 새로 시작된 성년의 삶에 궁금한 점이 많았다.

‘하긴. 난 열여섯 살까지의 삶만 두 번 살았으니까.’

열일곱 살의 삶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아리엘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대로 삶이 펼쳐질 것이었다.

다이아나가 다시 버킷리스트를 읊기 시작했다.

“아리엘에게 술이 든 봉봉초콜릿도 먹여봐야 하고, 유명한 칵테일 장인을 불러서 파티도 해야지.”

“우와…….”

아리엘이 감탄하자 어깨가 으쓱해진 다이아나가 속삭였다.

“그런 게 바로 어른의 디저트라는 거야.”

이렇게 친구들과 노는 것도 즐거웠지만 역시 아리엘은 라카트옐 부자와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그녀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을 한 공간에 두는 것을 목표로 삼고 열심을 내는 중이었다.

“이제부터 라카트옐 가족은 하루에 한 번 이상 같이 식사하는 거예요. 알았죠?”

아리엘은 어린 사촌 동생들에게 설명하듯 조곤조곤 타일렀다.

서로를 바라보며 매우 불편해하던 아름다운 두 남자는 아리엘이 성년식 생일 선물로 그것을 바라자 끝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지.’

아리엘은 매일 함께 하는 식사가 끝나면 두 남자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산책 끝 무렵에는 모닥불 가든으로 가서 시간을 보냈는데, 문제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항상 가든의 양 끝에 나눠 앉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좀 가까이 앉으면 덧나는 건가요?’

게다가 부자(父子) 아니랄까 봐 둘 다 똑같은 것을 요구했다.

“아리엘라. 넌 내 옆에 앉아야지.”

“그 녀석 말 들을 것 없다. 이리 와 앉거라.”

어휴…… 바보 라카트옐 남자들.

결국, 아리엘은 중앙에 있는 벽 난롯가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녀가 나직하게 소리 내어 책을 읽고 있으면, 어느새 두 라카트옐은 아리엘의 바로 옆까지 와 그것을 듣고 있는 것이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마티어스는 눈을 감고 아리엘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아리엘의 발치에 앉은 루시안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는 시간.

그렇게 즐거운 일상들이 하루하루 쌓여갔다.

‘매일 이렇게만 행복하면 좋겠다.’

문제는 다이아나가 쏘아 올린 사소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 * *


“아리엘, 겨울이 끝나면 결혼 준비를 할 거지?”

응? 결혼?

아리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이아나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다이아나가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아리엘을 꼭 껴안았다.

“왜, 어릴 적에 한 결혼을 이어가고 싶으면 성인이 되어서 다시 결혼서약을 해야 하잖아.”

그렇게 말한 다이아나가 곧장 덧붙였다.

“'성대한' 결혼식과 함께.”

음, 결혼 자체보다 결혼식에 강조점이 찍혀있는 듯한 기분은 착각이겠지?

물론 다이아나 말대로 제국에선 어릴 때 한 결혼은 성인이 되면 무효가 된다.

성인이 되고도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다시 결혼서약 절차를 거쳐야 했다.

아리엘이 그냥 말똥말똥 쳐다보기만 하자 다이아나가 아리엘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난 네가 결혼하든 안 하든 상관없지만, 아니, 사실은 안 했으면 하지만…….”

순간 다이아나의 눈에 번뜩이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어차피 할 거라면 내 귀염둥이는 반드시 5월의 신부가 되어야 해!”

네? 5월의 신부요?

아리엘이 잘 모르는 눈치이자 다이아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 5월의 신부! 추운 겨울도 아니고, 더운 여름도 아니고, 딱 5월. 가장 따스하고 아름다운 계절에 결혼하는 거야. 그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하도 많아서 드레스 맞추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지?”

주먹까지 불끈 쥔 친구를 본 아리엘은 서둘러 삐약삐약 말했다.

“난 언제 결혼하든 상관없어. 꼭 5월이 아니어도…….”

하지만 다이아나는 어느새 수첩을 꺼내 들고 ‘5월 결혼 계획’을 적어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5월에 식을 하려면 적어도 지금쯤에는 꽃 주문을 넣고…….”

결혼식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세실마저 은근 기대하는 얼굴로 아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구 계획을 써 내려가던 다이아나가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런데 아리엘, 당연히 대공자님께 프러포즈는 받았겠지?”

세실이 이어 말했다.

“맞아. 분명 멋진 프러포즈였을 거다.”

“어땠어? 얼른 말 좀 해 줘 봐.”

다이아나는 귀염둥이가 받은 프러포즈를 상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응? 아니, 안 받았는데.”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아리엘의 대답을 들은 다이아나와 세실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뭐어어?!”

아리엘은 친구들의 격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나와 루시안은 한 번 결혼했었는걸.

예전에는 계약이 끝나면 헤어질 줄 알았지만 지금은 서로 좋아한다는 것도 확인했고…….

하지만 그녀의 친구들에게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한 듯했다.

다이아나와 세실은 아리엘에게 들리지 않게 뒤를 돌아서 소곤소곤 말했다.

“다이아나, 내가 대공자님을 잘못 본 모양이다. 기본적인 예의인 청혼도 하지 않다니.”

“내 말이 그 말이야. 반지 하나 없이 내 귀염둥이를 날로 먹으려고 해? 내 그놈을 그냥……!”

친구들의 행동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고 있던 아리엘이 물었다.

“저기, 프러포즈란 게 꼭 필요한 거야?”

얼른 다시 뒤를 돈 다이아나가 상냥하게 말했다.

“그럼. 아리엘, 결혼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과정이 바로 프러포즈란다.”

세실도 한 마디 거들었다.

“프러포즈는 다른 말로 청혼이다. 청혼 없는 결혼이란 없어, 내 레이디.”

그, 그 정도인거야?

아리엘이 당황해있는 동안 다이아나와 세실은 또 뒤를 돌아 소곤댔다.

“이제 보니 결혼식이 문제가 아니네. 우리 아리엘 데려다가 고생만 시킨 대공자를 교육 해줘야겠어.”

“동의한다. 마음 고생이라도 해야지.”

어느새 루시안은 아리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이아나와 세실의 공동의 적이 되어있었다.

두 친구는 아리엘의 손을 한쪽씩 붙잡고 말했다.

“아리엘, 대공자님이 그냥 어물쩍 결혼하려고 하면 아직 결혼 안 한다고 해. 알겠지?”

“최대한 결혼을 꺼리는 눈치로. 프러포즈 전엔 절대 허락하면 안 된다.”

“응? 으응…….”

얼결에 대답한 아리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결혼하는데 프러포즈가 그렇게 중요한 줄도 몰랐네…….

애초에 루시안과의 결혼 생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아리엘의 혼란은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경험한 최초의 결혼은 프러포즈 대신 계약을 통해서였고, 결혼식은 루시안의 날치기…….

‘아.’

그때, 문득 아리엘의 머릿속에 반짝 생각이 떠올랐다.

‘프러포즈가 꼭 필요하다면, 내가 준비할까?’

맞아. 그러면 되잖아!

아리엘의 입가에 생긋 미소가 떠올랐다.


* * *


한편 루시안은 아리엘의 생일 다음 날부터 프러포즈 계획에 돌입한 채였다.

그는 가장 먼저 아리엘의 측근인 저택 사람들을 불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작은 주인님.”

영문을 모르고 불려온 집사 알렌과 하녀장 수잔, 재무관 달튼은 무섭게 가라앉은 루시안의 분위기에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한참 뜸을 들이던 루시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리엘라에게 청혼을 하려 하는데.”

‘……!’

그 말을 들은 세 사람의 입가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세상에. 들었나요? 청혼이래요, 청혼!’

셋은 라카트옐 가에서 일하면서 생긴 능력, 일명 '눈빛으로 대화하기' 스킬로 호들갑을 떨었다.

‘드디어 우리 작은 주인님이…….’

‘크, 라카트옐에도 봄이 오나 봅니다.’

낮게 혀를 차 그들의 눈빛 대화를 중단시킨 루시안이 경고했다.

“아리엘에겐 비밀로 해.”

“예.”

세 사용인이 흐뭇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손에서 오닉스 큐브를 굴리며 책상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있던 루시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다.”

그의 눈이 섬뜩한 푸른빛을 내며 사용인들을 응시했다.

대답을 잘못하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거두어갈 듯 냉혹한 눈빛이었다.

“아리엘이 좋아하는 것을 한 가지씩 말해.”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세 사용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장 먼저 달튼이 입을 열었다.

“아기 마님께선 꽃을 정말 좋아하시지요. 꽃시장이 열릴 때 나들이도 여러 번 가셨고, 새로운 꽃을 보시면 말려서 친구분들께 선물도 하시고요.”

꽃이라…….

그건 그렇지. 아리엘이 꽃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서늘하게 달튼을 훑어본 루시안이 짧게 옆으로 턱짓을 했다.

“다음.”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던 알렌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마님께선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십니다. 작은 나비나 반딧불이부터 큰 동물까지 가리지 않고 좋아하셨습니다. 심지어 동물 인형도 좋아하셨죠.”

……그것도 옳다.

아리엘이 온갖 벌레들을 다 귀여워하던 걸 떠올린 루시안의 입술이 우아하게 비틀렸다.

“좋아. 다음.”

다음 순서는 자타공인 아리엘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수잔이었다.

“우리 아기 마님께서는…….”

대답을 기다리는 루시안의 시선이 수잔에게 머물렀다.

역시나 아리엘이 좋아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달튼과 알렌의 몸도 수잔 쪽으로 슬며시 기울었다.

수잔이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또박또박 말했다.

“마티어스 대공님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그 대답을 들은 순간 루시안의 손에서 오닉스 큐브가 박살이 났다.

“……하녀장. 방금 뭐라고 했지?”

루시안의 잔혹한 음성이 수잔을 향했지만, 수잔은 굴하지 않았다.

루시안을 똑바로 바라본 수잔이 다시금 못을 박았다.

“아기 마님께선 대공님을 매우 좋아하신다고요.”


* * *


루시안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내리깔렸다.

“좋아한다니, 무슨 소리지?”

방 공기가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그 기세에 사용인들이 얼어붙은 사이 그가 이어 물었다.

“내가 그 애에게 청혼 선물로 마티어스의 일부라도 줘야 한다는 건가?”

예에? 뭘…… 줘요?

수잔과 달튼 그리고 알렌까지 모두 귀를 의심했다.

두려운 와중에도 수잔은 라카트옐 남자의 해석 방식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안 남자들은 대책이 없다니까. 가엾고 대견한 우리 아기 마님.

“그런 게 아니라…….”

수잔이 입을 열자 느른하게 눈매를 치켜올린 루시안이 말을 잘랐다.

“아니면. 설마 아리엘라가 남편인 나보다 마티어스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뱃속까지 서늘해지게 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리엘을 떠올린 수잔은 용기를 내 심호흡을 했다.

“두 분 중 어느 분을 더 좋아하신다 말씀드릴 순 없지요.”

루시안의 눈빛 온도가 좀 더 낮아졌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들긴 마찬가지야.”

“하지만 확실한 건 아기 마님께서 대공님을 무척 아끼시고, 친아버지처럼 따르신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스쳤다.

신을 빚어놓은 조각상 같은 얼굴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린 그가 말했다.

“……애초에 애를 마티어스한테 맡기는 게 아니었어.”

친부인 후작에게 잔인한 학대를 당했던 아리엘이기에 친아버지 대신 마티어스를 아비처럼 따르게 된 것이리라.

“마티어스와 아리엘을 떼놓을 수 있는 방법은?”

루시안이 진지하게 묻자 수잔의 얼굴이 굳어졌다.

“힘으로 떼어놓으실 순 있지만 그러면 아리엘님이 매우 슬퍼하실 거예요. 당연히 대공자님께도 실망하실 겁니다.”

“실망?”

루시안이 낮고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리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제 머리를 헝클었다.

“그건 안 돼. 안 그래도 그 애가 사랑하는 게 너무 많아서 불안한 참이거든.”

아름다운 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내가 순위에서 밀리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

수잔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숨을 가다듬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기 마님을 위해서 이 이야기만은 꼭 해야 했다.

“대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리엘님에겐 친구가 많답니다. 하지만 한 친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친구를 덜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어요. 둘 다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람의 세계는 확장되는 것이지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루시안이 미동도 없이 수잔을 응시했다.

“특히나 아리엘님이 대공님을 사랑하는 것과 대공자님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다른 영역이에요.”

둘 다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아버지와 연인을 사랑하는 것이 다르듯이 말이에요.

수잔이 설명했지만 루시안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데. 난 사랑하는 게 아리엘뿐이라. 다른 곳을 향한 그 애의 애정마저 모두 잘라내서 나에게만 붙여놓고 싶거든.”

결국 수잔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물었다.

“그럼 대공자님은 대공님이 아예 사라지길 바라세요?”

수잔의 질문을 들은 루시안이 당장이라도 대답하려는 듯 입을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

그리곤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눈빛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답답함에 던진 질문이었는데 뜻밖의 긴 침묵이 돌아오자 수잔은 기민하게 루시안의 기색을 살폈다.

어머. 이거 괜찮은 신호인 것 같은데요, 아기 마님?

“다 나가 봐.”

이윽고 루시안이 턱짓으로 사용인들을 물렸다.

내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알렌과 달튼이 얼른 수잔을 문으로 데려갔다.

방을 나서는 수잔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 * *


아리엘은 거대한 프라카티아 나무에 걸린 그물 침대를 그네 삼아 앉아 있었다.

“루시안은 언제 돌아오려나.”

루시안은 타락과의 전투 후에 약해진 결계를 보수하기 위해 북부 영지로 며칠 떠나 있는 상태였다.

타락은 죽었지만, 한 번 타락에 물든 마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들로부터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계석으로 땅을 보호하는 게 중요했다.

‘나도 따라가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엔 안된다고 했지…….’

루시안이 매혹적인 얼굴을 무기로 회유하는 바람에 아리엘은 그와 함께 가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를 떠올린 그녀는 골이 난 채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루시안의 얼굴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솔직히 루시안이 작정하고 꾀려고 한다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그를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힘으로도, 아름다움으로도 루시안은 너무나 우월한 존재니까.

‘하지만, 크림슨 하트인 나까지도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건 너무하잖아.’

예쁜 얼굴에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어떻게 매번 그러냐고, 바보 아리엘.

루시안이 유해한만큼 나도 면역력이 필요하다구!

아리엘은 한참을 씩씩대다 오늘 친구들과 보고 온 연극으로 간신히 생각을 돌렸다.

다이아나가 세실과 아리엘을 데리고 간 곳은 귀부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은 사랑 연극을 하는 곳이었다.

초심자인 아리엘을 위해 다이아나는 최대한 서정적이고 순한 내용의 연극을 골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부끄러운 장면들이 있었다.

‘그, 금방 암전이 되긴 했지만…….’

괜히 얼굴이 빨개진 채 생각에 잠겨있던 아리엘은 그만 그물 침대를 흔들던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앗.”

그물침대가 빙글 앞으로 돌아가면서 그녀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덥석.

바닥에 닿기 직전,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으며 안아 들었다.

아리엘은 눈이 동그래져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갑자기 콩닥거리며 그녀의 숨을 차오르게 만들었다.

“……루시안?”

방금까지 면역력 이야기를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이 남자에겐 그런 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잠시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루시안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내 병아리는 악당을 물리칠 정도로 세면서, 넘어지긴 하는 거야?”

루시안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아리엘은 빨개진 채 얼른 몸부림을 쳤다.

“내려줘요.”

그의 붉은 입술이 한쪽으로 비뚜름히 올라갔다.

“안 되겠는데. 또 넘어질 수도 있고.”

“루, 루시안이 안 잡았으면 마법 썼을 거예요.”

한번 더 소리내 웃은 루시안이 아리엘을 받아 안고 있던 자세 그대로 그물 침대 위에 천천히 쓰러졌다.

그리곤 대답했다.

“나한테도 기회를 좀 주지그래. 널 구할 기회.”

정신을 차려보니 루시안 아래에 누워서 그를 올려다보게 된 아리엘은 당황스러움에 뺨을 붉혔다.

“그러니까…….”

빨개진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루시안이 갑자기 아리엘의 얼굴에 짧은 키스를 퍼부었다.

안 그래도 빨개진 아리엘은 토마토처럼 완전히 새빨개지고 말았다.

아까 연극을 본 탓인지 괜히 이런 상황이 더 의식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생각했다.

‘루시안과 결혼하면…… 이런 것 이상도 하겠지?’

아리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식 올리고 나면, 어느 저택이 좋지? 영지의 저택? 아니면 수도 저택?”

그리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중얼거렸다.

“네겐 친구라는 벌레들이 있으니 역시 수도 저택이려나.”

루시안의 유혹적인 목소리와 가까워진 그의 얼굴, 그리고 맞닿은 몸 때문에 정신이 없던 아리엘은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아직 안 되는데……!’

친구들과 프러포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아리엘은 나름대로 저녁마다 몰래 프러포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프러포즈 준비가 한참 덜 됐는데…….’

아리엘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루시안. 결혼은 조금 미뤄도…….”

루시안이 의아한 듯 눈매를 좁혔다.

“미뤄?”

아리엘은 이때다 싶어 얼른 삐약삐약 대답했다.

“네. 겨울이기도 하고…….”

그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듯, 루시안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문제라면 지금 봄이나 여름인 나라도 있어. 거기로 가면 되잖아.”

“그 문제가 아니라…….”

아리엘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정말, 루시안은 내 맘도 모르고…… 멋지게 프러포즈해주고 싶단 말이에요.

“아, 아무튼 아직은 안 돼요!”

조그맣게 외친 그녀는 얼른 도망치기를 선택했다. 더 이상 설명할 말이 없는걸?

한편 남겨진 루시안의 귓전에는 아리엘의 마지막 말만이 남아 맴돌고 있었다.

“안 된다고……?”


* * *


며칠 후.

아리엘은 그 날 자신이 결혼을 미루고 싶다고 한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몸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왜 지금은 안 된다는 건데.”

갑자기 계단 난간 아래에서 튀어나온 루시안 때문에 깜짝 놀란 아리엘이 소리쳤다.

“이번엔 또 어디서 나타난 거예요!”

“그게 중요해? 이유를 말해.”

아, 정말…….

아리엘은 작은 이마를 짚었다.

루시안은 그 날 이후, 그녀가 지나가는 곳마다 불쑥불쑥 나타나서 캐묻기 시작했다.

아리엘 방의 문 뒤에서.

“결혼을 미루려는 이유가 뭐야. 응?”

“깜짝이야! 모, 몰라요.”

정원 조경수 옆에서.

“안된다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놀래라……!”

다이닝홀 창문으로 나타나며.

“말해줘. 응?”

“루시안, 이렇게 자꾸 무섭게 나타나면 혼나요.”

아리엘은 이제 정말로 드래곤의 집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왜 저렇게 집요한 거야……?’

오늘도 예외는 없어서 아리엘은 계단 한가운데에서 루시안에게 가로막힌 상태였다.

루시안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사랑이 식은 건가?”

“네에?!”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루시안이 관능적이게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변한 거여도 상관없어. 내가 다시 돌려놓을 테니까. 말만 해.”

“절대,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아리엘은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아이참, 프러포즈 준비 중이란 걸 말할 수도 없고!

아리엘이 머뭇거리자 루시안이 천천히 다가와 제 머리를 그녀의 이마에 기댔다.

그의 달콤한 향기가 끼치자 아리엘은 조금 혼미해졌다.

“네가 말을 해줘야 알지, 아리엘라.”

저음의 목소리가 슬쩍 처연한 빛을 담았다.

그리고 루시안이 고개를 기울여 아리엘과 눈을 맞추었다.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또…… 이러네, 루시안.’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속삭였다.

“얼굴 공격은 반칙이잖아요.”

“내가 영원히 널 이기지 못한다는 거 알잖아.”

드래곤이 온 힘을 다해서 하는 유혹을 이겨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아리엘은 백번 천번 털어놓고 싶은 심정을 꾹 참고, 루시안의 이마에 콩 머리를 갖다 댔다.

“안 돼요. 나중에 말해줄게요.”

“…….”

열심히 유혹하다 거절당한 루시안은 조금쯤 불만스러워 보였다.

아리엘은 배시시 웃으며 총총 달아났다.

‘조금만 기다려요, 루시안.’

이제 곧 준비가 끝나거든요.


* * *


세실이 짧은 휴가를 마치고 황궁으로 복귀한 건 세 친구의 버킷리스트가 절반 이상 이루어진 후였다.

그간 열심히 친구들을 끌고 다녔던 다이아나는 오늘은 약속을 잡지 않고 혼자 상점 거리로 나섰다.

“후후, 아리엘 선물을 살 건데 아리엘을 데려갈 순 없잖아?”

오늘 다이아나가 들르려고 하는 곳은 각종 술이 담긴 초콜릿을 파는 가게였다.

봉봉 초콜릿이라고도 하는 이 초콜릿은 요즘 제국에서 연인이나 신혼부부에게 선물로 인기가 많았다.

“뭐…… 대공자님을 위해 주는 건 아니지만. 흥.”

어디까지나 다이아나는 아리엘이 헤롱거리는 귀여운 모습을 '자신이' 보고 싶어서 주문을 하려는 것이었다.

다이아나가 팸플릿을 넘기며 구경하고 있자, 초콜릿 장인이 나와서 물었다.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다이아나는 팸플릿을 내려놓은 뒤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초콜릿 종류는 괜찮은데 술이 도수가 너무 세군. 센 것은 빼고 약한 것들로 채워도 괜찮나?”

“예, 예, 그러믄요.”

“그럼 바닐라와 생강 향, 복숭아향, 카라멜 향, 오렌지와 오렌지필 리큐르 두 개씩. 나머지는 딸기와 라임향 로제 와인으로.”

“예.”

“대금은 모니카 가로 청구하도록 하게.”

흡족하게 주문을 넣고 돌아서려던 다이아나의 머릿속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잠시만.”

“예? 뭐가 더 필요하십니까?”

다이아나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우아하게 웃었다.

“도수 높은 것을 딱 하나만 넣어주게. 포장지에는 티 나게 하지 말고.”

초콜릿 장인이 주문서를 고치는 동안 다이아나는 흐뭇한 얼굴로 생각했다.

‘우리 아리엘이라면 그거 하나 먹고도 확 취하겠지?’

그녀는 조금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내 앞에서 먹여야지. 귀엽겠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주문을 마치고 가게를 나선 다이아나는 멀리에서 낯익은 형상을 발견했다.

후드 사이로 살짝 드러난 물색 머리카락, 황실 기사단에서 지급하는 부츠.

‘세실이잖아. 상점가엔 웬일이지?’

그런데 다이아나가 반갑게 부르려는 순간, 세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휙 몸을 틀어 외진 골목으로 사라졌다.

“……?”

다이아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수상함을 느꼈다.

그녀가 아는 세실은 절대로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가족보다 가까운 삼총사에게 비밀을 만들 사람은 더더욱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방금 세실의 태도는…….

‘마치 몰래 누굴 만나거나, 무슨 일을 벌이는 사람의 모습이잖아.’

다이아나는 서둘러 세실이 사라진 방향으로 따라가 보았으나 세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이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뭔가 냄새가 나. 사건의 냄새가…….”


* * *


다음날 다이아나는 곧장 아리엘을 찾아가서 어제 세실을 본 이야기를 했다.

“글쎄, 업무 시간에 후드까지 쓰고, 으슥한 골목으로 막 사라졌다니까!”

자초지종을 들은 아리엘도 고개를 갸웃했다.

세실을 잘 아는 친구들이 느끼기에 세실이 했다고 보기 어려운 행동들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쳐.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건 이상해.”

이것도 다이아나의 말이 맞았다.

세실은 가족들과 헤어져 황궁에 들어간 뒤로, 일상의 시시콜콜한 일들을 모두 친구들에게 공유했다.

아리엘이 개발한 마법 통신구를 이용하면 직접 만나는 것처럼 수다를 떨 수 있었다.

고민하던 아리엘이 조심스레 추측을 내놓았다.

“혹시 임무 중이었던 게 아닐까?”

다이아나가 애정 어리게 아리엘을 끌어당겨 자기 어깨에 기대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봤는데…… 임무 중이었다면 걔가 그렇게 사람들 눈을 피해 다닐 애니? 기사의 긍지 어쩌고 하면서 당당히 다녔겠지.”

초조하게 부채로 손바닥을 두드리는 다이아나를 보며 아리엘도 덩달아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세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가족 일이라든가, 신변에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거나…….

세실 성격에 힘든 일이 생겼더라도 친구들에게 쉽게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 걱정스러웠다.

그때 다이아나가 갑작스레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알았다.”

아리엘은 반색하며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뭔데, 다이아나?”

다이아나가 허공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연애야.”

으응?!

다이아나가 아리엘의 양 뺨을 감싸 쥐며 말했다.

“그렇잖아! 임무라고 하기엔 너무 수상하고, 개인적인 일이라면 우리한테 상의를 안 할 리가 없는데.”

아리엘이 눈만 깜빡이고 있자 다이아나는 이미 결론을 내린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리 몰래 비밀 연애 중인 게 분명해.”

그리고 다이아나는 갑자기 즐거운 기색으로 아리엘을 와락 껴안았다.


“어떤 놈팡이가 순진한 세실을 꼬신 건지 알아봐야겠어!”

어어, 그러니까…….

다이아나, 난 세실이 그런 걸 숨겼을 것 같지 않은걸?

하지만 세실이 걱정되긴 마찬가지였으므로 아리엘은 일단 다이아나와 함께하기로 했다.


* * *


다음 날 외출하기 전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집무실에 들렀다.

문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가자, 긴 흑발 머리의 권태로워 보이는 미남자가 서류 틈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리엘라.”

아리엘은 손에 든 쟁반을 조심조심 옮겨서 마티어스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요즘 아리엘은 마티어스와 매일 티 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차 가져왔어요, 마티어스님.”

마티어스가 미소를 억누르려는 듯 수려한 턱을 만지작거렸다.

“고생스럽게 네가 직접 가져올 필요 없대도.”

아리엘은 속으로만 작게 웃었다.

좋으시면서 괜히 저렇게 말씀하신다니까.

“하나도 안 힘든걸요.”

아리엘은 준비해온 찻물에 찻잎을 넣고, 마티어스 책상 옆 의자에 앉았다.

도자기 티 팟에서 차가 우러나는 향기가 퍼져 나왔다.

조용히 앉아서 향기를 음미하고 있는데 한참 만에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의자에 앉으면 발이 바닥에 안 닿는구나.”

“네?”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을 돌렸다.

‘앗.’

어릴 때에 비해서는 많이 컸지만, 마티어스 집무실 의자에 앉으면 여전히 아리엘은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어린애 취급을 당해버린 그녀는 볼을 붉히고 작게 중얼거렸다.

“제가 작은 게 아니라 의자가 너무 큰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마티어스가 의자의 크기를 눈으로 가늠해보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느라 피곤하니 키가 안 크는 게지.”

응? 친구들이요?

잠시 어리둥절하던 아리엘은 이내 마티어스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아하.’

다음의 문장을 마티어스 어로 해석하시오.(10점)

해석을 끝낸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물었다.

“제가 친구들하고만 놀아서 섭섭하세요?”

그러자 마티어스가 슬쩍 웃곤 아리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구나.”

와, 마티어스님이 이렇게 솔직하신 거 오랜만인걸요?

아리엘은 작게 키득거린 뒤 마티어스에게 말했다.

“조만간 또 소풍가요, 우리.”

“그래. 이번에는 산 하나를 통째로 밀고 그 자리에…….”

“그, 그런 거 말고요!”

마티어스를 열심히 말리며 아리엘은 다 우러난 차를 찻잔에 따라 마티어스에게 건넸다.

적당한 온도의 차를 한 모금 마신 마티어스가 나직이 말했다.

“맛있구나.”

아리엘은 수줍게 미소지었다.

루시안과 있으면 이렇게 느긋한 티 타임은 어렵기에 이런 시간은 마티어스와만 누릴 수 있었다.

‘마티어스님은 언제나 우리와 같이 있어 주시겠지?’

결혼을 해도, 몇 년이 지나도, 언제나 항상 계셔주시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아리엘의 가슴 속엔 행복이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라카트옐과 가족이라는 건 정말 운이 좋은 거야.’

갓난아기 때 부모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리엘에게 마티어스가 라카트옐이라는 건 무척 안심되는 일이었다.

마티어스는 쉽게 다치거나 아픈 보통 인간과는 다르기에, 예상치 못한 일로 갑자기 아리엘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섭섭해하시지 않게 얼른 소풍 계획을 세워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엘은 생긋 미소지었다.


* * *


다이아나와 아리엘은 며칠째 세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아리엘이 지분을 가진 정보 길드, 나잇워커를 이용한다면 쉽게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리엘은 친구의 일을 정보 길드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이 택한 방법은 이것이었다.

“밤마다 통신 마도구로 이야기를 나눌 때 세실을 떠보는 거야.”

다이아나의 제안에 따라 두 사람은 세실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털어놓을 수 있도록 열심히 유도해보았다.

“세실, 언제나 우리가 있다는 거 알지?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하면…….”

“그래.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건 무조건 우리한테 상의하는 거야. 알겠지?”

그러나 결과는 허탕이었다.

세실은 무척이나 감동받은 눈치였지만 끝내 별다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다이아나와 아리엘은 지난번 다이아나가 세실을 봤다고 한 거리의 찻집에서 세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아리엘은 달큰한 청무화과 조각을 띄운 무화과 티를 저으며 으슥한 골목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리엘, 저기……!”

창밖을 가리킨 다이아나가 아리엘의 손을 붙잡고 벌떡 일어났다.

으슥한 골목 근처로, 알 수 없는 꾸러미들을 손에 든 세실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증언한 대로 뭔가 수상한 기운을 잔뜩 풍기면서 말이다.

어느새 아리엘은 다이아나의 손에 이끌려 세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가 된 세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아리엘의 마나로 결계를 치고 이동해야 했다.

두 거리쯤 따라가던 중, 후드를 쓴 세실이 아주 낡은 간판의 잡화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잡았어.”

다이아나가 속삭였다.

“분명 저기서 누군가를 만나려고 하는 걸 거야. 손에 든 물건들도 관련이 있을 거고!”

두 친구는 조심스레 세실이 들어간 가게로 들어갔다.

잡화점의 구석에서 세실과 잡화점 주인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주인이 세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잡화점 주인이 접선 상대에게 안내해주려나 봐.”

세실이 위험한 사람과 만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리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때, 마음이 다급해진 다이아나가 세실을 불러세웠다.

“세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세실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너희들이 여긴 어떻게……?!”

화들짝 놀란 세실이 잡화점 주인에게 건네 받은 물건을 떨어뜨렸다.

와르르 떨어진 물건들이 다이아나와 아리엘의 발 앞까지 굴러왔다.

“…….”

그리고 그 물건들을 본 다이아나와 아리엘은 서로 마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세실, 어째서 이런 물건들을 가지고 있는 거야?


* * *


세실의 꾸러미에서 떨어진 물건들은 어린 남자아이의 물건이었다.

남자아이 옷가지와 속옷, 옷에 비해 좀 더 넉넉한 크기의 가죽 신발.

그 안에 신을 수 있는 남자용 양말 대님까지.

모두 일고여덟 살쯤 먹은 남자아이가 쓸 법한 물건들이었다.

물건을 들킨 세실은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주인장을 물렸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게.”

주인장이 사라지고 셋만 남게 되자 다이아나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 물건들은 뭐고.”

“그건…….”

세실은 난감한 얼굴로 바닥에 쏟아진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직감적으로 세실이 다른 사람의 비밀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실, 임무 중이었던 거야?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해줘. 우린 네가 걱정돼서 온 것뿐이니까.”

아리엘의 말을 들은 세실이 옅게 얼굴을 붉혔다.

“요즘 너희가 걱정해주는 건 알고 있었다. 왜 그런진 몰랐지만…….”

그리고 세실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 중인 것도 맞아. 이 비밀을 지키는 것도 임무에 포함된 것이고.”

거짓말을 못하는 세실의 성품을 아는 다이아나와 아리엘은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긴장이 풀린 아리엘은 세실을 꼭 안으며 속삭였다.

“세실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이어서 다이아나가 세실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말했다.

“나는 네가 몰래 연애라도 하는 줄 알았잖아!”

연애라는 말을 들은 세실이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아직 명예롭게 내 레이디 곁으로 가지도 못했는데 연애라니. 사치다.”

“아니면 협박을 당하고 있거나 큰 빚이라도 진 줄 알았다고…….”

다이아나와 아리엘이 자신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것을 깨달은 세실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너희를 걱정시켜서.”

다이아나와 아리엘은 세실을 도와 쏟아진 물건을 주웠다.

귀족 남자아이들이 쓰는 양말 대님을 유심히 보던 다이아나가 물었다.

“그런데 넌 공주님들을 모시잖아. 남자아이의 물건을 왜 갖고 있는 거야?”

“……말할 수 없어. 아무리 너희들에게라도. 부디 오늘 일은 잊어줘.”

임무에 관련된 일이라니 친구들도 더는 물을 수 없었다.

사실 아리엘 정도의 뛰어난 마법사가 따라오지 않았다면 소드 마스터인 세실이 미행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세실에게서 대답을 들을 순 없었지만 아리엘에겐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쌍둥이들과 관련된 문제인 것 같아.’

황실의 쌍둥이 공주, 미르와 미카는 아리엘의 사촌 동생이었다.

‘요즘 할마마마께서 걱정이 많아 보이시는 것도 어쩌면 이것과 관련된 일 때문일까?’

생각을 정리한 아리엘은 다이아나를 집으로 돌려보낸 후 세실과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그녀가 황궁에 도착하자, 태후는 아리엘을 보기 위해 시중도 마다하고 달려 나왔다.

“아리엘라, 내 새끼. 기별도 없이 어찌 왔느냐?”

“할마마마!”

아리엘은 태후와 꼭 안고 나서 세실의 손을 잡아 보였다.

“밖에서 세실을 만나게 되어서 같이 들어왔어요.”

세실의 손에 든 꾸러미를 본 태후가 조금 놀란 듯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아리엘라 네게 해줄 말이 있었지. 어서 들어가자.”

세 사람은 남의 눈과 귀가 없는 아리엘 소유의 여름궁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아리엘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태후는 오히려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에게까지 숨길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서 미뤄뒀지만…….”

게다가 최근까지 아리엘이 타락 일로 고생했다는 걸 알기에 태후는 더욱 이 고민을 아리엘과 나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네게도 말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태후가 아리엘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 일은 나와 황제 부부, 황태자만이 알고 있는 일이란다. 가까이에서 보필해야 하는 세실 경과 쌍둥이들의 유모에겐 알려주었지.”

최근 쌍둥이들의 유모가 아파서 세실이 유모 대신 물건들을 구해오게 되었고 그 바람에 다이아나의 눈에 띄게 된 것이었다.

“그랬군요…….”

태후는 비밀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미르셀라와 미카엘라가 이란성 쌍둥이라는 건 잘 알 테지.”

“네, 할마마마.”

태후가 한 번 숨을 고르고 말했다.

“외부에는 둘 다 여자아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둘 중 하나는 남자아이로 태어났단다.”

“…….”

진실과 마주한 아리엘은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세실이 떨어뜨린 물건들을 보았을 때부터 조금쯤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어쩌면 미르와 미카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이미 느끼고 있었는지도…….’

그녀는 태후와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하지만, 어째서 아이들 성별을 숨기신 거예요? 남녀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잖아요.”

태후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그래.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지. 진짜 문제는…….”

잠시 뜸을 들이던 태후가 말했다.

“두 아이 중 성력을 타고 태어난 아이가 있다는 것이란다.”

‘……!’

아리엘은 진심으로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성력이라고?

대대로 성력 보유자는 황실 직계에서 한 세대에 한 명씩만 태어났다.

‘이번 세대에는 이미 레온 오라버니가 있는데.’

성력을 가진 황태자, 디트리히 레온 드 슈테인이 다음 황제가 될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어째서 성력을 가진 황족이 또 태어난 거지?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제국 역사상 최초일 것이다.

놀란 아리엘의 얼굴을 본 태후가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

“네 생각이 맞다. 성력을 타고난 이상 그 아이는 황실 후계자 자격을 얻게 되지. 이것이 혼란을 일으킬까 봐 숨겼던 것이란다.”

태후의 말이 옳았다.

디트리히와 쌍둥이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황위 다툼을 할 수는 없겠지만, 디트리히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력 보유자가 황위 계승에서 우선권을 가지게 되니까.’

그러니 황실로서는 한 세대에 성력 보유자가 두 명이 태어난 것의 원인을 알기 전까진 숨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아리엘은 조심스레 태후에게 물었다.

“그럼, 성력을 가진 건 미르와 미카 중 누가……?”

태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다 입을 열었다.


* * *


쌍둥이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아리엘은 그 날 저녁 식사 시간에 마티어스와 루시안에게 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비밀을 들은 라카트옐 남자들은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설마, 이미 알고 계셨어요?”

아리엘이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면서 묻자 마티어스가 시선을 피하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라카트옐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력을 감지할 수 있으니까.”

와, 그럼 다 알고 계셨단 말이야?

이번엔 작은 미간을 모으고 루시안 쪽을 바라보자, 루시안이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인간의 성별을 구분하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고.”

아리엘은 허리에 작은 손을 착 얹고 물었다.

“그런데 두 분 다 저에겐 왜 말씀 안 하셨어요?”

“…….”

당황한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시선이 허공을 떠돌았다.

하지만 아리엘이 두 사람을 계속 빤히 바라보자 이내 대답을 꺼내놓았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네가 그 어린 것들과 놀아주는 게 거슬려서…….”

루시안이 변명을 하다 말고 서늘하게 볼멘소리를 했다.

“네 관심을 그것들이 가로채 가잖아.”

아리엘은 딱 기가 막힌 기분이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혹시 이런 비밀이 나 몰래 백 개는 더 있는 건 아니겠죠?

아리엘이 눈만 깜박이면서 서 있자, 그녀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라카트옐 남자들이 대형 사고를 친 짐승들처럼 슬금슬금 그녀에게 다가왔다.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아리엘라.”

신 같은 외모의 아름다운 남자들이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은 얼핏 홀릴 듯한 장면이었지만, 아리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이럴 때 보면 둘 다 애기들 같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지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인 라카트옐들이, 유치하게 일곱 살짜리 애들을 질투해서 그랬다는 것을.

아리엘은 허리 손을 풀며 생각했다.

‘어휴…… 어쩔 수 없지. 나도 라카트옐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넘어가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좋아요. 대신 벌을 줄게요.”

그러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눈에 띄게 반색했다.

“네가 주는 벌이면 뭐든 상관없다.”

“마티어스한테는 벌 줄 필요 없어. 나한테만 주면 돼.”

어라? 분명 벌이라고 했는데 반응이 왜 이러지?

저기, 제 말뜻 제대로 알아들은 거 맞죠……?

심지어 루시안은 짙게 미소지으며 아리엘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무슨 벌을 줄 건데, 응?”

은근히 기대하는 듯한 목소리에 아리엘의 뺨이 순간 붉어졌다.

벌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루시안!

그녀는 더 홀리기 전에 마음을 다잡고 두 남자에게 삐약삐약 말했다.

“두 분 서로 눈 쳐다보면서 칭찬 다섯 가지씩 하기. 시작.”


* * *


며칠후, 아리엘은 드디어 루시안에게 프러포즈를 할 준비를 마쳤다.

“다 됐다.”

아리엘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든 청혼 선물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루시안에게 잘 어울리겠지?”

그녀가 준비한 것은 자신의 마정석을 정제해서 만든 장신구였다.

마력을 덧씌우고 또 덧씌워서 루비보다 더 짙은 붉은 빛을 내는 보석이 박힌 이 장신구엔, 아주 특별한 마법까지 걸어두었다.

‘꼭 반지로만 쓰지 않아도 되도록.’

끼는 사람의 마음대로 반지나 목걸이, 커프스 단추 등으로 바뀌도록 만든 것이다.

아리엘이 이 선물을 준비한 이유는 자신도 루시안의 마정석으로 만든 팔찌를 받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팔찌를 차면 루시안의 존재가 느껴지니까…… 이걸 하면 루시안도 나를…….’

생각을 이어가던 아리엘은 괜히 빨개진 얼굴을 감쌌다.

마정석에 마력을 공들여 덧입히면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버려서였다.

“마침 내일 같이 영지 시찰을 가기로 했지.”

요즘 들어 외출할 때마다 아리엘을 집에 놓고 가려고 하던 루시안이 웬 일로 꼭 같이 가야 한다고 선언을 했다.

할 일을 마치면 놀다 오자고 말하기까지 했다.

‘데이트야.’

생각해보니 서로 마음을 확인한 후 그럴듯한 데이트를 해보지 못했다.

아리엘은 설렘으로 사르르 미소지었다.

“이번에 가면 이걸…….”

아리엘은 다시금 마정석 장신구를 품에 안으며 침대 위로 폭 쓰러졌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상상을 하며.


* * *


출발 날.

아리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수잔의 도움으로 단장을 했다.

루시안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하겠다고 다짐한 날이니, 오늘만큼은 꼬맹이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레이디 같고 어른스럽게 보여야지.’

처음 청혼할 때랑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말하고 싶었다.

‘루시안이 다시는 털 빠진 병아리 같은 소리 못하도록……!’

그녀는 루비같이 붉은 머리카락을 어깨로 드리우고, 우아한 고딕풍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었다.

섬세한 레이스 장식이 가는 목까지 올라와서 앳된 라인을 가려주었다.

단장을 마친 아리엘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 보았다.

뒤에서 그녀의 단장을 마무리해주던 수잔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상에, 우리 아기 마님 오늘따라 아가씨 같네요!”

“벌써 열일곱 살인걸요.”

아리엘도 조금 더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꾸민 자신이 마음에 들어서 수줍게 웃었다.

“이 정도면 루시안한테 어린애 소린 안 듣겠죠?”

아리엘의 머리를 매만져주던 수잔이 소리 내 웃었다.

“제 눈에야 항상 아기 같으시지만, 대공자님 눈에는 또 다르겠지요.”

“그래야 하는데…….”

보통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솟은 훤칠한 루시안 곁에 서면 왠지 스스로가 작게만 느껴지는게 사실이었다.

‘루시안보다 다리가 길어지게 해달라는 소원은 안 이루어지려나 봐.’

작게 한숨 지은 아리엘은 마차를 타는 곳으로 나갔다.

여느 때처럼 주인을 배웅하는 사용인들 무리가 현관에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먼저 나와 마차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루시안이 보였다.

“루시안.”

아리엘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가려다, 옷을 어른스럽게 입은 김에 조금 얌전을 빼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 다가오는 아리엘을 뚫어져라 보던 루시안이 당황스러운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리엘라.”

루시안이 왜 저러지? 뭐가 잘못됐나?

한참 동안 말문이 막힌 듯 제 얼굴을 문지르던 그가 불쑥 물었다.

“너 설마 다 알고 가는 건 아니지?”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져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에요?”

그녀의 물음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루시안의 붉은 입술이 슬쩍 호를 그렸다.

그리곤 별안간 아리엘을 번쩍 안아 올려 마차에 태웠다.

“꺅, 루시안……!”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리엘이 그의 어깨를 붙잡자, 루시안이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말했다.

“모르고 이러는 거면 넌 정말 무서운 존재야.”

아니, 그러니까 뭘요?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마차가 곧 출발했으므로 아리엘은 서둘러 사용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손에 든 마법 미니백 안에는 청혼 선물이 고이 잠들어 있었다.


* * *


오늘 루시안과 아리엘이 향한 곳은 남부에 있는 여러 대공령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대공가 영지는 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엘 소유의 로덴베른을 비롯한 몇 곳은 남부에 있었다.

‘먼 곳이라 게이트를 네 개나 지나야 하지.’

떨리는 청혼을 앞둔 아리엘은 굳세게 버텼지만, 세 번째 게이트를 지날 때쯤부터는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본 루시안이 가볍게 그녀를 끌어다 제 어깨에 기대 주었다.

“약해가지곤.”

그가 놀리듯 말하고 아리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미 잠에 취한 아리엘은 ‘보통 사람이라면 다 이렇거든요.’라고 반항하지도 못한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아주 깜깜한 저녁이었다.

아리엘은 자신이 루시안의 옷을 덮고, 널찍한 마차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마차 안에 마법등이 설치되어 있음에도 마차 안은 어두웠다.

아리엘은 놀라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

뭐야, 나 몇 시간이나 잔 거야?

그녀가 움직이자 어둠 속에서 듣기 좋게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깼네, 아리엘라.”

“루시안? 왜 불도 안 켜고 있어요? 우리 다 왔어요?”

“다 왔지.”

루시안이 손가락을 딱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마차 안이 환해졌다.

아리엘은 눈을 깜박이며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남부 영지의 저택일 거라고 예상한 것과는 달리, 그들이 멈춰있는 곳은 외딴 숲길이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의아해진 아리엘이 묻자 루시안이 한쪽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렸다.

“일단 내리지. 여기부턴 걸어가야 해.”

그렇게 말한 그가 마부와 호위 기사들까지 떼어놓았기에 아리엘의 의문은 더욱 커졌다.

‘어디 들를 데가 있나?’

아리엘은 수잔이 챙겨준 털 망토를 두르고 마차 밖으로 나섰다.

남부라서 따뜻해야 정상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겨울이어서인지 꽤 쌀쌀했다.

“이리 와.”

루시안이 아리엘을 제 재킷 안으로 감싸 넣고 이끌었다.

오르막길을 몇 분쯤 걷고 있던 도중, 아리엘은 재킷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물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건데요?”

“거의 다 왔어. 네 영지야.”

“아, 로덴베른이요?”

그렇게 되물은 아리엘은 머리를 갸웃했다.

그런데 로덴베른에 이런 고지대가 있었던가?

로덴베른은 다 평지인 걸로 아는데…….

‘아니 무엇보다, 이런 외딴 숲길에 어째서 전부 대리석 길이 깔려있는 거야?’

마침 도착했는지 루시안이 걸음을 멈췄다.

아리엘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깊은 산속이나 무인도처럼.

‘여기가 정말 내가 아는 로덴베른이라고?’


아리엘은 어두운 곳에서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물었다.

“루시안,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어두운…….”

그녀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루시안이 손가락으로 딱 하는 소리를 내자 갑자기 저 멀리 어두운 곳에서 작은 빛이 켜졌다.

‘어……?’

아니, 그냥 빛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 개의 작은 빛무리가 멀리에서부터 환하게 켜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리엘은 그녀와 루시안이 서 있는 곳이 엄청나게 높은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지역 전체가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은 곳.

“잘 봐.”

놀라서 멈춰있는 아리엘에게 루시안이 속삭였다.

그가 한 번 더 손가락으로 소리를 내자 다른 방향에서도 수없이 많은 불빛들이 파도처럼 켜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장관에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감탄을 흘렸다.

“와…….”

심장이 두근두근 맥박쳤다.

너무 아름다워.

‘이건…… 마치 점등식 같아.’

문제는 그 점등식이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걸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한 도시 이상의 면적에 걸친 점등식이었다.

그리고 불이 환하게 켜지면서 드러난 것은 아리엘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땅이었다.

어두웠던 곳을 불빛이 밝히자 수많은 거리와 집들, 건물들이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자 아리엘이 내려다보고 있는 모든 땅에는 수백 개의 불빛이 켜져 땅을 은하수처럼 수놓았다.

“루시안…….”

얼이 빠져버린 아리엘이 루시안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기억나? 네 이름으로 가져왔던 시에나 왕국령. 이젠 제국 땅이고, 정확히는 네 땅이지.”

“기억…….”

기억난다.

3년 전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시에나 왕국을 멸망시켰을 때, 라카트옐 부자는 항복한 백성과 관리들을 모두 살려주었다.

왕국은 지도에서 사라졌고 그곳은 제국의 땅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리엘 자신 소유의 대공령이 되었었다.

듣기로는 라카트옐 가에서 대공가 재정으로 그 지역을 재건하고 있다고 했다.

‘그 일 때문에 달튼이 엄청 고생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당시 항복했던 백성들 입장에서는 목숨을 건진 데다 대공가 지원으로 영지민이 되었기에 라카트옐에 충성하고 있다고 들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제국의 도시랑 다름없을 거라고 말로만 전해 들었는데…….

‘그런데, 거기가 여기라고요……?’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다가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복구가…… 끝난 거예요?”

루시안이 부드럽게 아리엘의 뺨을 쓸어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소드 마나로 척박한 땅이나 돌산을 좀 만졌지. 위험한 곳은 싹 민 뒤 다시 마을과 도시를 세웠고. 네 이름의 철자를 하나씩 따서 지역의 지명들을 지었어.”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유혹하듯 말을 이었다.

“이곳의 돌 하나 물 한 방울까지 다 네 거야. 저 불빛들도 널 위한 거고.”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조금 혼미해졌다.

그럼 영지 시찰이라고 한 건, 내게 저 광경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안 해주고 데려왔…….”

그때, 루시안이 그녀 앞에 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리엘은 깜짝 놀라 외쳤다.

“루시안?”

그가 아리엘을 올려다보며 눈을 맞췄다.

“새로 지어진 이 땅이 내 첫 번째 결혼 예물이야.”

결혼…… 예물?

아리엘이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멈춰있자 루시안이 제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이게 두 번째 예물.”

루시안이 꺼낸 물건을 본 아리엘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건…….”

그가 꺼낸 것은 루시안이 마수 전쟁에 나가 있을 때 선물한 보석 달걀 장식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밀어내야만 했을 당시 아리엘이 루시안에게 돌려준 것.

‘저걸 왜……?’

보석 계란을 꺼낸 루시안이 중간쯤에 있는 보석을 누르자, 달걀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

아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보석 계란이 열리는 물건이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루시안이 열린 보석 달걀 장식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

찬란한 빛을 내는 클래식한 모양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붉은 비단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 무릎을 꿇은 자세의 루시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터널 다이아몬드야.”

색기 짙은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세상의 어떤 금속으로도, 어떤 광물로도, 심지어 오랜 세월 흐르는 물이나 바람도 이 다이아에 흠집을 낼 수 없어. 절대 마모되지 않는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맸지. 네가 가진 내 마음은 영원하다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그가 아리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안에 보관해뒀어.”

보석 달걀 안에서 반지를 꺼낸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아리엘라 로벨린 데 슈테인 라카트옐. 나와 결혼해주겠어?”


* * *


아리엘은 숨을 들이켰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잠시 사고가 정지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루시안만 바라보았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루시안이 그녀에게 바치고 있는 반지와 청혼 모두가 너무나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

또 한편으로는 회귀 전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적으로 마주쳤던 첫 만남. 끔찍하고 비극적인 결말.

회귀로 겨우 다시 찾아온 기회와, 어둠 속에서 맺은 절박했던 결혼 계약.

회귀하기 전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준 남자가 결혼 상대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

그렇게 흐르던 기억은 루시안이 선물했던 보석 계란에까지 닿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오랜 시간 그것을 가지고 있던 자신이 떠오르자, 순간 복받치는 감정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루시안은 얼마나 더 사람을 놀래키려는 걸까?

자신이 루시안을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던 그 한참 전에, 루시안은 벌써 이 순간을 생각하며 반지를 준비한 것이다.

아리엘은 울면서 어물어물 입을 뗐다.

“결혼하자고요?”

“그래. 내가 사랑하는 건 영원히 너뿐이고, 서약하고 싶은 것도 너뿐이니까.”

한 번 더 청혼을 듣게 되자 아리엘은 다시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녀가 한참 동안 계속 울기만 하자 루시안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왜 우는 거야, 아리엘라. 반지가 마음에 안 드나? 다른 걸로 바꿀까?”

“그게 아니에요…….”

바보 루시안. 아리엘은 울면서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건…… 좋아서. 좋아서 우는 거예요.”

“좋아서라고?”

루시안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몸을 일으켜 아리엘에게 다가온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아리엘은 가만히 그 손길을 받으며 깨달았다.

아, 이 드래곤은 너무나 오랜 시간 감정을 잃어버려서 이런 것조차 가르쳐줘야 하는 거야.

너무 슬플 때 눈물이 나듯이, 기쁘고 감격스러울 때도 눈물이 난다는 것을.

‘그리고 난…… 그렇게 하고 싶어. 가르쳐주고, 배우고,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어.’

아리엘은 눈물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정신이 팔려있던 루시안이 물었다.

“응?”

아리엘은 루시안의 손에서 벗어나, 한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입고 있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도회에서처럼 살포시 인사하며 대답했다.

“청혼을 받아들인다고요, 대공자님.”


* * *


그 말을 들은 순간을 루시안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청혼을 준비하면서 수없이 상상했지만 상상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지독한 행복함과 동시에 그만큼의 두려움을 느꼈다.

이토록 연약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데, 나 같은 괴물이 과연 네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을까.

내가 과연 널 영원히 지켜주기에 충분한 존재일까.

지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임에도 아리엘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자,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물기 어린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하니 더 이상 그 생각조차 이어갈 수 없었다.

그저 루시안은 떨리는 손으로 아리엘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줄 뿐이었다.

반지는 운명처럼 딱 맞게 들어가 아리엘의 손가락 안에 멈추었다.

“…….”

루시안은 그 순간에 짧은 전율을 느꼈다.

그와 아리엘은 6년간 부부였지만 계약으로 이루어진 사이였고, 이제야 드디어 진짜 아리엘의 남편이 될 자격을 얻은 것이다.

그는 참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아리엘을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읏.”

아리엘은 숨이 막힌 가운데 작게 웃었다.

온몸으로 루시안의 감정이 전해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기쁨, 흥분, 떨림, 행복함, 불안함…….

잠시 포옹을 푼 루시안이 아리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상에 올라온 지하의 신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그려진 웃음은 아리엘을 혼미하게 했다.

“정말이지? 청혼 받아들인다는 거.”

그렇게 물은 그가 다시 아리엘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런 확인 절차가 몇 번이나 반복되자 아리엘은 어질어질해졌다.

하지만 행복함에 흥분한 라카트옐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는 급기야 아리엘을 번쩍 안고 소리 내 웃으며 한 자리에서 마구 돌았다.

“앗, 루시안, 좀…… 나 무서워요.”

아리엘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루시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섭다니까요. 어지럽잖아요.”

그러자 멈춘 그가 아리엘을 다시금 숨막히게 안으며 오만하게 말했다.

“지금 내 기분도 그래. 무섭고 어지러워. 그러니까 대리 체험한다고 생각해.”

“뭐예요, 그게!”

루시안 나빠!

그녀를 안고 숨을 고르던 루시안이 농밀하게 속삭였다.

“세 번째 예물은 결혼식 날 줄게.”

아리엘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세 번째도 있어요?”

루시안이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놀라지 마. 예물은 원래 세 가지를 주고받거든. 널 위해선 한 가지도 빠뜨릴 생각 없어. 인간들이 하는 건 다 할 거야. 물론, 인간들이 안 하는 것도 할 거고.”

욕심쟁이 루시안. 난 괜찮은데…….

루시안이 그녀를 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이제 대답해 줘. 왜 결혼을 미루려고 했는지. 응?”

아리엘은 그의 품에 파묻힌 채 눈만 깜박였다.

아니, 아직도 그게 궁금한 거였어?

그녀가 호다닥 몸을 빼고 그를 올려다보자, 루시안이 심각한 눈빛으로 아리엘을 마주 보았다.

“날 사랑한다며. 그런데 왜?”

아, 그러고 보니……!

아리엘은 자신이 결혼을 미루자고 했던 이유를 막 떠올렸다.

그리고 꼼지락꼼지락 소지품에서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그게…….”

준비할 때는 괜찮았는데 막상 말하려고 하니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오늘 와서, 결혼하자고 하려고…….”

이미 아리엘이 상상했던 청혼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지만 말이다.

청혼 준비를 했다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는 듯 루시안이 한참 만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발칙한 짓을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야? 날 불안에 빠뜨려 놓고.”

그리고 그는 아리엘의 뺨을 아프게 꼬집었다.

아리엘은 또 애 취급을 받은 기분에 웅얼웅얼 투덜거렸다.

“싫으면 안 줄 거예요.”

그러자 루시안이 정색하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줘 봐.”

아리엘은 못 이기는 척 그에게 마정석 장신구가 든 상자를 내밀었다.

루시안의 손에 의해 상자가 부드러운 또각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든 붉은 마정석을 본 루시안의 눈이 커졌다가, 그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눈빛에는 푸른빛 열기가 일렁이며 지나갔다.

“…….”

루시안이 침묵하며 제 입술을 매만지고만 있자, 아리엘은 불안해졌다.

오늘 루시안이 준비한 엄청난 청혼 선물들을 떠올린 그녀는 얼른 말했다.

“루, 루시안이 준비한 예물에 비하면 별 거 아니지만…….”

“아니, 마음에 들어.”

루시안이 전에 없이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그가 한 팔로 아리엘의 허리를 천천히 당겨 안았다.

그제야 아리엘은 루시안의 눈 속에 지독한 열기가 들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넌 이미 7년 전에 이 집에 들어올 때 가장 귀한 예물을 가져왔잖아. 드래곤의 심장. 너를.”

그에게서 느껴지는 열기에 아리엘의 몸이 잘게 떨렸다.

“내겐 너로 충분해.”


어느새 루시안의 고개가 기울어져 아리엘의 앞까지 닿았다.

그를 휩싸고 있는 열기에 압도되어버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다음 순간, 붉고 뜨거운 입술이 아리엘의 작은 입술을 삼키며 들어왔다.

그리곤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구석구석 헤집고 스치며 얽어맸다.

‘꼭 잡아먹히는 것 같아.’

아리엘은 7년 전에 해야 했을 생각을 이제야 하며 루시안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 * *


수도로 돌아온 뒤, 루시안은 자신이 아리엘에게 정식으로 청혼했음을 모두에게 알렸다.

당연한 수순으로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라카트옐 대공자와 대공자비가 다시 서약을 맺고 공식적으로 결혼한다고?”

어린 시절에 한 혼인이기에 성인이 된 후 둘의 결혼이 깨질 것이라고 생각한 귀족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여태까지 귀족들 사이에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대공가의 체면을 위해서 아리엘에게 잘해준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청혼으로 그런 소문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처음의 서약이 무효로 돌아갔으니 헤어질 수도 있는데, 다시 결혼한다니. 정말로 사랑하나 봐요.”

루시안이 시에나 땅 전체를 바치며 무자비한 스케일로 청혼한 사실도 어느새 제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들었어요? 시에나 땅 전체를 마법등으로 밝혔대요!”

“밤이었는데도 불을 모두 켜니 낮 같이 환했다죠? 어쩜, 로맨틱해라.”

그렇게 제국의 모든 여자들이 라카트옐 대공자의 프러포즈를 상상하며 황홀해 하고 있는 그때.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고 나선 이가 있었다.

“허락할 수 없다.”

바로 라카트옐 가의 가주, 마티어스 대공이었다.

소식을 들은 마티어스는 가주의 권한으로 둘의 결혼을 막아섰다.

제국법상 가족의 결혼이나 입양 등은 모두 가주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라카트옐 대공님이 결혼을 막고 있대요!”

“엥? 정말로?”

소문이 퍼지자 제국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역시 후작가와 집안 차이가 나서일까요?”

“대공자비의 신분이 황족인 걸로 밝혀졌는데도 대공님 눈에는 차지 않나 봐요.”

사람들은 대공이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결혼을 반대한다고 추측했다.

“하나뿐인 아들이니 그럴 수도 있지요. 후손이 귀한 라카트옐가잖아요.”

“사실 대공자가 여러 면에서 잘나긴 했고…….”

“그럼, 대공자와 대공자비는 금단의 사랑을 하고 있는 건가?”

어느새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아리엘은 시아버지에게 핍박받는 가련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마티어스가 이유를 밝혔다.

“아리엘라에 비해 대공자가 너무 부족해서 결혼시킬 수 없다.”

그 팔불출 같은 말을 들은 제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

“마티어스 대공님이 루시안 대공자의 친부 맞지? 대공자비의 아버지가 아니라?”

아무튼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마티어스 덕분에, 아리엘과 루시안의 약혼은 인정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과연 두 사람의 결혼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튀긴 옥수수를 씹으며 주목했다.

한편, 결혼 반대를 받은 루시안은 곧장 마티어스를 찾아갔다.

“가주의, 권한이라고?”

루시안이 한 글자씩 씹어뱉듯 말하자 마티어스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7년 전, 첫 결혼 때 내 허락을 받았던 것은 잊었나 보구나.”

루시안이 싸늘하게 받아쳤다.

“그건 아리엘을 위해 서류상 구색을 갖춘 거지. 지금은 달라.”

“어찌 됐든 안 돼. 허락 안 한다. 아직은 네 녀석에게 맡길 수 없어.”

“대체 무슨 권리로?”

마티어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리엘의 보호자 된 권리로.”

“…….”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인내한 루시안이 섬뜩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없애줄 명분을 만드는 건가? 죽음으로 가주 자리를 내놓고 싶은가 보지?”

대공인 마티어스가 죽게 되면 다음 대공은 자연스럽게 루시안이 된다.

그러면 라카트옐 가의 가주도 루시안이 될 것이고, 본인의 결혼쯤이야 얼마든지 승인할 수 있는 위치가 되는 것이다.

두 남자의 대립을 밖에서 듣게 된 아리엘은 놀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루시안!”

뛰어 들어온 아리엘을 본 루시안이 제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알 텐데. 너와 나 사이를 방해하는 건 뭐든 없앨 각오가 돼 있어.”

루시안의 어조는 완연한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회귀하기 전 과거에 있었던 일이 그녀의 기억을 스쳤다.

‘과거 이맘때쯤에 루시안은 실제로 대공이었어.’

젊은 라카트옐 대공에 대한 소문은 하도 유명한 이야기라, 당시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아리엘조차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대공인 루시안 위에 마티어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아들이 승계를 받는 경우는 없었다. 있더라도 아버지가 위독할 경우만 가능했다.

‘라카트옐이 병들어 위독할 일은 없으니…….’

아마 두 라카트옐의 다툼으로 마티어스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리라.

마티어스의 죽음을 생각하자 아리엘은 창백해졌다.

‘과거는 다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대로라면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크게 다투고, 둘 중 하나를 잃게 될지도 몰랐다.

‘안 돼. 나 때문에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 돼.’

회귀를 겪은 아리엘에게 과거가 반복된다는 건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서서 애타게 말했다.

“마티어스님, 화내지 마세요. 루시안, 마티어스님과 싸우지 말아요, 네?”

하지만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완고했다.

“아리엘라. 이건 네 문제가 아니라 저 녀석 문제이니 넌 신경 쓸 거 없다.”

“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때, 툭.

아리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것을 본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아리엘을 울리다니?

한참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그녀를 보고 남자들이 얼어붙은 사이, 아리엘이 말했다.

“두 분 다 미워요.”

그리고 그녀는 방을 나가버렸다.

아리엘의 눈물과 그녀에게 미움받았다는 사실에 너무 놀란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따라가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아리엘이 식사 자리에 나타나지 않자 대공가에는 비상이 걸렸다.

바야흐로 아리엘의 가출 사건이었다.


* * *


아리엘의 가출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흥분한 채 방을 오갔다.

“갔을만한 곳은?”

마티어스의 물음에 달 그림자 단원이 바로 답했다.

“황궁의 여름궁, 모니카 공작가 저택, 나잇워커 비밀 가옥. 이 세 군데입니다.”

곧이어 루시안이 성마르게 물었다.

“추적은 어떻게 됐나.”

다른 달 그림자 단원이 고개를 숙였다.

“마법사셔서 추적이 어렵습니다. 하녀장 말로는 작은 손가방에 짐을 싸서 나가셨다고 합니다.”

마티어스가 충격 받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짐까지 싸서 나갔다고…….”

루시안이 감정을 억누르며 차갑게 명령했다.

“브루노어를 불러와. 마법사니까 추적하는 법을 알겠지.”

달그림자 단원들이 나가자 마티어스와 루시안 사이에는 베일 듯한 침묵만 남았다.

둘 다 아리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자신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있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직접 찾으러 나갔을 두 남자가 발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티어스가 먼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와 결혼하면 아리엘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진 않겠지.”

루시안의 목소리가 침잠한 채 흘러나왔다.

“……알아. 하지만 난 원래 이기적인 존재야. 그 애가 나를 사랑한다는 이 시간을 놓칠 수 없어. 언젠가 그 사랑이 식어도 떠날 여지를 주지 않을 거야.”

창문을 향해 선 마티어스가 씁쓸하게 말했다.

“우리 같은 존재 곁에서 그 애는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도 가질 수 없고.”

마티어스의 말에 루시안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주먹 또한 단단히 쥐어졌다.

“아리엘이 네 녀석을 사랑하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니 그 애에게 선택지를 줘라. 약혼만 하도록 해.”

루시안이 서늘한 눈으로 마티어스를 노려보았다.

“약혼 하에 너희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라. 하지만 아리엘이 나중에…… 우리가 줄 수 없는 것을 찾아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서약은 하지 마라.”

“그런……!”

루시안이 이를 악물고 말을 꺼내려 할 때, 달그림자 단원이 들어와 외쳤다.

“대공자비님을 찾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라카트옐 부자는 벌떡 일어났다.

“어디냐.”

“황궁의 여름궁입니다.”


* * *


“세실 경, 빨리!”

세실은 쌍둥이들의 손에 이끌려 여름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몇 시간 전, 아리엘이 여름궁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태후로부터 비밀리에 전해졌다.

문제라면 쌍둥이들이 그것을 듣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아리엘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리엘 덕후 새싹들인 쌍둥이들이 듣고 말았으니 고생은 세실 몫이었다.

“누냐한테 가!”

“언니한테 가! 당쟝!”

쌍둥이들은 일정을 모두 무시하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세실도 아리엘에게 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기사의 의무를 저버릴 순 없었다.

“지금은 안 됩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세실과 쌍둥이들은 태후에게 겨우 허락을 받고 아리엘에게 가는 중이었다.

세실은 쌍둥이들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아리엘님이 피곤하실 수 있으니 너무 떠드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아리엘이 잠든 후였다.

여름궁의 궁인이 세실에게 살짝 귀띔해주었다.

“태후 마마와 이야기를 나누신 뒤 코코아를 세 잔이나 드시고 잠드셨어요. 뭔가 속상한 일이 있으셨던 모양이에요.”

세실은 살금살금 쌍둥이들을 이끌고 아리엘의 방에 들어갔다.

“쉿.”

들어가기 전 주의를 주자 쌍둥이들이 조그만 손가락을 입술 앞에 대며 세실의 말을 따라 했다.

“쉿.”

“쉿.”

평소에는 시끄럽기가 용 마수 저리가라인 악동 쌍둥이들도 잠든 아리엘 앞에서만큼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아리엘은 침대에 옹크려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쌍둥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대 난간에 매달려, 잠든 아리엘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화아…….”

“뉴나 예뻐…….”

세실은 아리엘의 이불을 조심스레 덮어준 뒤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아리엘이 무슨 일로 짐까지 싸서 여름궁에 온 것인지 걱정됐지만 깨어난 뒤에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열심히 아리엘의 얼굴을 구경하던 쌍둥이들이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았다.

“언니가 매일 집에 안 가고 여기 있으면 좋겠다. 그치?”

“우리가 뉴나한테 집에 가지 말라고 하자.”

“그래, 좋아.”

아리엘이 깨면 그들이 거하게 떼를 쓸 것을 예상한 세실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쌍둥이 중 미르셀라가 세실에게 물었다.

“세실 경. 근데 세실 경은 왜 맨날 집에 안 가?”

미카엘라도 합세했다.

“맞아. 세실 경은 쉬는 날에도 궁에만 있자나. 혹시 가족이 업써?”

세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집도 있고 가족도 있습니다. 다만 안 가는 것뿐이지요.”

쌍둥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애?”

“그게…….”

세실은 잠시 머뭇거리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집에 돌아가도 반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안 가는 것이 나아요.”

“져런…….”

미르셀라가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작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말했다.

“걱정 마, 세실 경. 우리가 나중에 새로 성(姓)을 내려줄게. 우리가 세실 경의 주군이니까. 세실 경 이름으로 된 기사단도 줄게.”

꼬맹이의 허세에 불과하다는 건 알지만 세실은 얼른 정색했다.

“그런 소리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궁에는 듣는 사람이 많으니.”

주의를 준 뒤 세실은 진지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전 임자 있습니다.”

쌍둥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누구?”

세실이 엄숙하게 대답했다.

“아리엘님이요. 언젠가 반드시 아리엘님을 레이디로 모시는 기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전 아리엘님 거예요.”

“…….”

쌍둥이들은 뭔가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조그만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눈치더니, 미카엘라가 의욕적으로 물었다.

“어떡하면 아리엘 누냐 것이 될 수 있어?”

세실은 살짝 웃고 대답해 주었다.

“라카트옐 대공가에 푸른 사자 기사단이란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아리엘님을 레이디로 모실 수 있지요.”

그 말을 들은 미카엘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으래? 그렇단 말이지?”

순간 세실은 약간 불안해졌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 *


어느새 아리엘이 가출한 지 사흘이 지났다.

라카트옐 남자들은 그날 바로 아리엘이 어디 있는지 찾아냈지만, 두 남자를 보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말에 사흘째 쩔쩔매고 있는 중이었다.

“또 거절 당했어.”

오늘만 스무 번째 여름 궁에 다녀온 루시안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리엘과 하루라도 떨어져 있으면 가시가 돋는 라카트옐 두 남자는 말라가는 식물의 느낌을 알 것만 같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역시나 여러 번 거절당한 마티어스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이쯤 되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무엇이 아리엘을 그토록 속상하게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맞댈 수밖에 없었다.

“루시안 네 녀석이 한 말을 듣고 아리엘이 뛰어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 후에 마티어스 당신이 한 말을 듣고 울며 나갔던 것 같은데.”

예리하게 서로를 노려본 둘은 다시금 천천히 기세를 가라앉혔다.

침묵이 흐른 후, 마티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 애 앞에서 이런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눈물까지 보인건…… 분명 뭔가 있다는 거지.”

아리엘은 회귀 전에 두 남자의 비극적인 결말을 보았기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서로를 없애겠다고 하는 말에 크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남자는 끝내 그것을 알아내지 못하고 다른 결론을 냈다.

“일단 얼굴을 보고 얘기해야겠어.”

“맞는 말이다.”

결국 라카트옐 두 남자는 여름궁에 침입하기로 결심했다.

라카트옐은 인외의 존재이기에 그들은 숨 쉬는 것보다 쉽게 경비병들을 따돌리고 여름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리엘이 있는 곳은 여름궁의 깊숙한 내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마침내 그곳까지 도착해서 문을 두드렸다.

“아리엘.”

“아리엘라.”

라카트옐 부자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안에서 놀란 숨소리가 들렸다.

작은 발걸음 소리가 도도도 문 쪽으로 다가왔다가, 가만히 문 앞만 맴돌았다.

아리엘의 기척을 느낀 루시안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리엘라, 문 열어. 네가 싫다면 마티어스와 싸우지 않을 테니.”

“옳다. 아리엘, 더 이상 네 앞에선 다툴 일 없을 거다.”

두 남자는 열심히 서로 싸우지 않을 것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듯 문 앞에 머물던 발걸음은 두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멀어졌다.

한참 만에 문 안쪽에서 희미한 아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세요. 지금은 얘기 안 할래요.”

결국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또 쫓겨나고 말았다.

평소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나려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리엘이 가출까지 감행했기에 두 남자는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 아리엘의 마음을 더욱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내실 앞을 서성이던 그들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따라오시오.”

바로 아리엘의 할머니, 태후였다.

태후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을 응접실로 이끌었다.

차를 한 잔 대접한 뒤, 태후는 나이 든 사람답지 않게 힘 준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돌아가는 건 우리 아리엘 마음이오. 솔직히 말하면 영영 여기에 살게 하고 싶은 심정이고.”

“…….”

두 라카트옐은 왠지 모를 죄인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모든 인간을 개미보다 하찮게 여기는 라카트옐이지만 아리엘의 친혈육 앞에서는 귀한 손녀를 훔쳐 가는 남자들일 뿐이었다.

태후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새끼 아리엘에겐 대공저가 집인 모양이더군.”

그 말을 들은 라카트옐들의 눈이 빛났다.

루시안이 무어라 말을 하려 하자 태후가 손을 들어 막았다.

“아리엘을 만나게는 해주겠소. 하지만 둘 다는 안 되오. 둘이 다퉈서 상황이 이렇게 된 건데 동시에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순 없지.”

마티어스가 딱딱하게 물었다.

“그럼 누가 들어간단 말인가.”

태후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도리어 둘에게 물었다.

“애초에 둘은 왜 싸우셨소?”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서로를 날카롭게 바라본 뒤 대답했다.

“내 아들 대공자가 아리엘과 결혼할 자격이 없기에 반대했다.”

“마티어스는 반대할 자격이 없지. 이건 나와 아리엘 사이의 일이니.”

두 남자를 번갈아 살핀 태후는 아리엘이 왜 가출했는지 알 것 같았다.

‘라카트옐이란 종족은 사내들끼리 함께 존재할 수 없다더니. 진짜였구만, 쯧쯧.’

하지만 할머니된 사람으로서, 아리엘의 행복을 위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태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아리엘을 만날 자격은 이렇게 정합시다.”

태후의 아이디어는 이랬다.

“예로부터 용기 있는 자가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세 가지 수수께끼를 맞히는 설화가 많았지.

나도 아리엘에 대한 세 가지 문제를 낼 것이오. 먼저 두 개를 맞힌 사람에게 만나게 해주겠소.”

말을 마친 태후는 잠시 나갔다가 만년필과 종이를 들고 돌아왔다.

종이에는 두 개의 질문이 쓰여있었다.


[1.아리엘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은?

2.아리엘이 이번에 화를 낸 이유는?]


침묵하며 그 질문들을 읽고 있는 두 남자에게 태후가 말했다.

“마지막 문제는 이것이오. 얼마 전 마수와 싸우러 갈 때, 아리엘이 내게 유언을 남겼었소.”

아리엘의 유언이라는 말에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눈빛이 180도 바뀌었다.

태후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 애가 나에게 남긴 유언을 맞추는 게 세 번째 문제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태후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 * *


파괴와 살육으로 악명 드높은 라카트옐 남자들은 더없이 신중하게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적었다.

어찌나 신중했는지 기다리던 태후가 깜빡 졸 정도였다.

하지만 둘 다 아리엘의 유언 내용은 맞히지 못했다.

태후는 그들에게 받은 답 종이를 가지고 아리엘을 찾아갔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필적을 본 아리엘은 깜짝 놀라서 태후를 바라보았다.

“할마마마, 이건……?”

태후는 아리엘의 보석 같은 붉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거라, 아가. 네 신랑 될 사람과 시아버지 될 사람인데 그래도 할미가 한번은 시험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태후는 다시 라카트옐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돌아왔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리엘이 뭐라고 하던가.”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들이 아이처럼 기대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태후는 새삼 알 것 같았다.

이들이 아리엘을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지.

‘자기들이 그런 만큼 아리엘도 저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걸 깨달으면 좋으련만…….’

태후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정답에 더 가깝게 문제를 맞힌 사람은 마티어스 대공이오.”

‘……!’

평소 금욕적이고 서늘한 마티어스의 얼굴에 은근한 화색이 돌았다.

반면 루시안의 얼굴은 충격을 받아 석고상처럼 차게 굳어버렸다.

대화를 할 자격을 얻은 마티어스는 일어나 아리엘의 방으로 향했고, 루시안은 절망에 빠져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 태후가 루시안에게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아리엘이 내게 남겼던 유서요. 이걸 읽으면서 기다리시오.”

루시안은 급히 그 편지를 받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이윽고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읽은 그의 눈에, 짙은 감정이 깃들었다.

한편, 마티어스는 아리엘의 방문을 노크했다.

긴장하며 기다리는 그의 앞에서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아리엘라.”


문을 직접 열어준 아리엘은 마티어스를 보자마자 그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마티어스님.”

고민 끝에 마티어스는 문제의 답을 정확하게 맞추었다.

아리엘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가출을 할 정도로 화가 났었는지.

모든 질문의 정답은 그들 안에 있었다.

마티어스의 답을 읽은 아리엘은 마티어스를 먼저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긴 포옹이 끝난 뒤, 마티어스는 아리엘의 뺨을 가만히 토닥였다. 아리엘이 어렸을 적 그랬던 것처럼.

아리엘은 수줍은 미소를 짓고 마티어스를 방 안으로 이끌었다.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티어스가 먼저 아리엘에게 설명했다.

라카트옐과 결혼해서 산다면 보통 인간인 아리엘이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

긴 수명의 문제와 후손 이야기까지 말했다.

“라카트옐은 아이를 가지기 어렵다. 매우 어렵고, 네게는 불가능한 일일거야.”

“어째서…….”

마티어스는 놀란 듯한 아리엘을 보며 가라앉은 슬픔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면 막을 수 없겠지. 하지만 난…… 널 사랑하기에 막고 싶은 것이다.”

잠시 아리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여태까지는 타락의 위협에서 라카트옐을 지켜야 했고, 자신도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이런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티어스님은 다 생각하고 계셨구나.’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말을 들었음에도 마음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잠시 감정을 정돈한 아리엘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마티어스님. 전 루시안을 사랑해요. 그래서 결혼하고 싶고요. 하지만…… 제가 결혼하고 싶은 건 루시안 때문만이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마티어스는 놀라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아리엘이 설명하기 어려운 듯 말을 고르다 이어 말했다.

“서약을 하고 법적으로 결혼을 하고 싶은 이유는…… 루시안 그리고 마티어스님과 진짜 가족이 되고 싶어서예요.”

아리엘은 항상 가족의 정이 고팠었다.

친가족에겐 사랑받지 못했지만 그녀는 라카트옐로 와서 가족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더 라카트옐 성을 달고 이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아리엘은 이제 아득한 회귀 전을 떠올렸다.

“예전, 제가 회귀하기 전에는 대공가에 가족이란 것이 없었어요. 마티어스님도 돌아가시고, 저도 죽고, 루시안 혼자 남았었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남겨진 루시안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며 혼자 살아갔을지.

“지금은 셋이 있잖아요. 라카트옐이라는 이름 하에.”

비록 사이는 나쁘지만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서로의 힘, 고통,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같은 종이며 부자지간이었다.

그리고 아리엘은 그들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아리엘은 이 연결고리가 사라지는 비극을 원하지 않았다.

“아이를 가질 수 없더라도, 제가 두 분보다 훨씬 더 빨리 죽게 되더라도…….”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함께 할 수 있을 때까지 루시안 그리고 마티어스님과 같이 살고 싶어요. 그거면 돼요.”

그러기 위해서 약혼이나 다른 유한한 방식 말고.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싶었다.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을 하는 드래곤처럼, 아리엘도 이것이 마지막 사랑이기에.

“저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이 라카트옐과 함께 하는 시간인 걸 아셨고, 제가 화낸 이유가 두 사람 중 누구도 잃기 싫어서란 것도 아셨다면…….”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

“반대하지 말아 주세요.”

‘…….’

아리엘의 속마음을 들은 마티어스는 한참 후에 결국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그리고 그는 몇 번이나 아리엘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넌 정말로…… 크림슨 하트로구나.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으니.”


* * *


마티어스와 이야기가 끝난 뒤 아리엘은 태후에게 부탁해 루시안을 불러 달라고 했다.

루시안은 읽던 유언장도 놓지 않고 곧장 아리엘의 방으로 찾아갔다.

며칠이나 거절당했던 것이 무색하게 문이 열리고, 아리엘의 모습이 보이자, 그는 아무것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잠시 안겨있던 아리엘이 약간 새침하게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루시안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방금 마티어스님이 저희 결혼을 허락해주셨어요.”

루시안은 귀를 의심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마티어스는 의견을 꺾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정말인가?”

그가 묻자, 아리엘이 조그만 턱을 도도하게 올리고 말했다.

“네. 하지만 루시안, 조건이 있어요.”

이 조건은 라카트옐과 떨어져 있는 동안 그녀가 열심히 생각한 것이었다.

“조건? 무슨 조건.”

루시안은 아리엘의 어떤 조건이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끝에서 가장 희귀한 것을 구해오라고 해도 기꺼이 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는 아리엘을 너무 쉽게 얻지 않았나.

착해빠진 데다 욕심도 없는 그의 꼬맹이 아내는 아무 조건 없이 그를 사랑했으니까.

마침내 아리엘이 조건을 말했다.

“만약 루시안이 마티어스님을 해치면 루시안하고 결혼하는 건 취소예요. 그러겠다고 말만 하더라도 취소예요. 영원히요.”

단호한 아리엘의 말에 루시안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소리를 흘리며 웃었다.

그래. 넌 이런 애지.

대책 없이 바보 같은 크림슨 하트.

루시안은 7년 전 결혼 계약서의 조건을 받아들이던 아리엘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을 받아들이지. 안주인님.”

‘됐다…….’

그제야 아리엘은 안심한 얼굴로 작게 미소지었다.

그때 루시안이 손에 들고 있던 아리엘의 유언장을 들어 보였다.

“이거 진심이야?”

태후에게 남긴 아리엘의 유언은 이것이었다.

죽는다면 황실 무덤이 아니라, 라카트옐 가의 무덤에서 잠들고 싶다는 것.

그녀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대공가 가족임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유언장을 들킨 아리엘이 깜짝 놀라서 그것을 빼앗았다.

“남의 편지를 보는 게 어디 있어요.”

“이젠 남이 아니잖아.”

짓궂게 말한 루시안이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아리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아리엘에게 말했다.

“그럼 결혼식장에 네 손을 잡고 들어가는 건 내가 해도 될까, 아리엘라.”

아리엘은 믿을 수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로 마티어스님이 아빠 역할을 대신 해주시는 걸까?

“내가 그러고 싶으니.”

마티어스의 말을 듣고서야 아리엘은 행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너무 기뻐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루시안이 아리엘의 손을 잡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자 그럼, 일이 마무리됐으니…….”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동시에 아리엘에게 말했다.

“이제 집에 돌아오는 거지?”

“이제 집에 돌아오는 거지?”

닮아도 너무 닮은 라카트옐 부자의 모습에 아리엘은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네. 집에 가요, 우리.”


* * *


일단 결혼이 결정되자, 아리엘 주변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합심해서 결혼식 준비에 불타올랐다.

“준비는 많이 안 해도 돼요……!”

아리엘은 친구들과 가족들만 모인 작은 결혼식이면 된다고 열심히 주장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반대했다.

일단 귀한 손녀를 결혼시키게 된 태후부터가 펄펄 뛰었다.

“내 손녀는 공주이기도 한데 간소한 결혼식이라니. 절대 안 된다!”

태후는 아리엘의 손을 꼬옥 붙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결혼식 장소는 이 할미가 준비해주마.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홀을 열 것이야. 황제의 대관식 때만 열리는 곳이지.”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만요, 그런 곳에서 결혼식 해도 되는 건가요?

“대, 대관식 때만 열리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태후는 단호했다.

“내 손녀가 결혼한다는데 감히 누가 나한테 반대를 하겠느냐?”

그렇게 결혼식 장소가 결정되어버린 뒤, 다이아나는 엄청난 하객 명단을 뽑기 시작했다.

제국의 귀족들을 모두 초대하고 그중에서도 엄선된 사람들만 식장에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그럼 난 신부 들러리 초청을 하도록 하지.”

세실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아리엘, 나와 다이아나를 신부 들러리로 부를 거지?”

“당연하지. 내 친구들인데.”

세실은 아리엘의 의견에 따라 카디나까지 신부 들러리로 초대했다.

그때, 옆 나라 국왕이 된 베로니카 왕녀에게서도 신부 들러리를 하고 싶다는 편지가 도착했다.

그렇게 최종 신부 들러리 4명이 결정되었다.

신부 들러리가 누구인지 들은 카디나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우리 아리엘님 대단한데요?”

“무슨 소리야, 카디나?”

“이런 결혼식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제국 최고 공작가 공녀님에, 제국 최초 여기사, 정보 길드 두목, 그리고 옆 나라 여왕이 신부 들러리라니.”

다이아나는 푸른 사자 기사단을 초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초청을 받은 푸른 사자 기사단은 소드 마스터 세 명-헥터, 랄프, 네드-을 중심으로 축하 검무를 준비하기로 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 힘든 검기로 화려한 볼거리를 만든 것이다.

게다가 결혼 소식을 처음 들은 헥터와 랄프는 울며불며 기사들과 눈물을 닦을 손수건 수백 장을 공동구매했다.

“어흑흑, 우리 아기 마님이…… 결혼이라니. 손수건을 걸음걸음 뿌려서 우리 레이디 앞길에 꽃길만 깔아드리겠어.”

그뿐만 아니라 식장 안을 꾸밀 꽃은 루시안이 특별히 준비했다.

아리엘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꽃이라는 것을 아는 그는 아예 아리엘의 눈동자 색과 똑같은 색의 장미 품종을 만들도록 했다.

“새로 만들어라. 전에 없었던 것으로.”

수백 명의 꽃 전문가가 달려들어 탄생시킨 그 장미꽃은, 달콤한 빛깔의 분홍색 장미로 겹겹이 싸인 봉오리가 아주 사랑스러웠다.

신비롭게도 아랫부분은 진한 분홍색이고 위로 올라올수록 우윳빛을 띠었다.

루시안은 이 품종의 장미는 대공가 외에는 재배할 수 없도록 했다.

“아리엘라. 이 꽃은 오직 네 정원에서만 구할 수 있어. 너만 가질 수 있고.”

꽃의 이름은 '에이로슈 장미'. 꽃말은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정해졌다.

단 한 번의 사랑이라 함은, 일생에 딱 한 번만 사랑을 하는 드래곤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신부 앞에 꽃을 뿌려주는 화동은 아리엘의 사촌 동생, 미르셀라와 미카엘라 공주로 정해졌다.

둘 중 한 명은 공주가 아니긴 하지만, 대외적으론 그랬다.

그 외에도 각지에서 보내오는 결혼 축하 선물, 엄청난 예산을 들이는 마차 행렬 등 끝도 없이 일이 커져갔다.

이쯤 되자 아리엘은 규모가 너무 커져버린 결혼식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어.’

아리엘은 마지막으로 마티어스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모두가 결혼식 때문에 난리인 마당에 마티어스만이 다른 사람들을 말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티어스님, 좀 더 간단하게…….”

마티어스가 서늘하고 이성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간단하게 대륙 전체의 나라에 공문을 보내도록 하지.”

그건 간단한 게 아니잖아요!

아리엘은 결국 울상을 짓고 말았다.

마티어스의 뜻에 따라 황제는 주변 나라 국빈들을 모두 초청해 모이도록 했다.

아리엘은 걱정되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하며 마티어스에게 물었다.

“마티어스님, 예산이 괜찮을까요?”

이러다 우리 집 파산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마티어스는 어린아이 대하듯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매달 이만큼씩 쓴다고 해도 괜찮다, 아리엘라.”

아리엘은 놀라서 토끼 눈을 했다.

이, 이 큰돈을 매달요?

말문이 막힌 그녀가 입술을 뻐끔거리자 마티어스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매일 써도 재정에는 영향 없지.”

아리엘은 결국 라카트옐 남자들의 기행을 말리는 것을 포기하게 됐다.

‘마티어스님이 제일 무서워…….’


* * *


결혼식은 다이아나가 열렬히 주장했던 대로 5월로 정해졌다.

식장과 전 대륙을 아우르는 하객 명단이 정해지자 결혼식 준비는 더더욱 급물살을 타며 빠르게 진행되었다.

5월까지 시간이 얼마 없었으므로 대공가에는 매일같이 재봉사와 화훼 전문가, 보석디자이너가 드나들었다.

그렇게 결혼식 준비가 한창 진행되던 와중, 문제가 터진 곳은 뜻밖에도 마티어스 대공 쪽이었다.

“네에? 마티어스님이 재봉사를 두 번이나 바꾸셨다고요?”

안주인인 아리엘에게 보고를 하러 온 알렌이 비지땀을 흘리며 설명했다.

“예, 마님.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결혼식에서 아리엘의 친아버지 자리를 대신하기로 한 마티어스는 시작부터 강력하게 주장했다.

“신부 아버지의 역할은 신랑의 기를 죽이는 것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그는 자신이 신랑인 루시안보다 더욱 눈에 띄게 차려입을 것이라 예고했다.

“아리엘 가족 역할이니 마땅히 신랑 놈을 이겨야지.”

그 말을 들은 알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주인님, 의미가 한참 왜곡된 것 같습니다만…….’

끝내 마티어스는 평범한 디자인의 예복이 아닌, 신랑 수준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예복을 만들도록 했다.

거기에다가 남자용 장신구들도 모두 최상급 고대 보물로만 골랐다.

“주인님, 괜찮을지요. 작은 주인님께선 아직 보석을 고르시지 않았는데…….”

제국의 결혼식에선 신부 측과 신랑 측의 장신구 급을 맞추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니 최상급을 골라버린 마티어스의 행동은 대놓고 신랑 기를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알렌의 만류에도 마티어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혼식 날 주인공은 오로지 아리엘라 뿐이어야 해. 나도 루시안 녀석도 그날은 그 애의 장신구나 다름없지. 신부 측 장신구가 신랑보다 빛나야 하지 않겠나?”

마티어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내가 그날만큼은 아리엘의 '아버지'라서 말이야.”

폭주하는 마티어스 때문에 결국 알렌은 아리엘에게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주인님을 좀 말려주십시오. 이러다 작은 주인님이 알게 되시면 두 분이 또 싸우실 겁니다.”

알렌의 말대로 두 남자가 다툴까 걱정이 된 아리엘은 살짝 마티어스를 찾아갔다.

마티어스는 마침 예복을 피팅해보고 있었다.

“마티어스님?”

노크를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연 아리엘은 서 있는 마티어스를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와…….’

햇살을 등진 마티어스는 훤칠한 키 때문에 당당해 보였고, 우아한 예복핏이 그의 잘 짜여진 몸을 드러내 아름다웠다.

장엄한 자수 문양이나 금사로 짠 어깨 견장도 그와 맞춘 듯 잘 어울렸다.

신랑이라 해도 믿을 만큼 젊은 모습에 수려한 긴 흑발이 한층 분위기를 더했다.

‘마티어스님 정말 멋있다.’

여태 마티어스는 사교계에 잘 나가지 않았고, 아리엘을 위해서만 몇 번 얼굴을 비추었다.

그럴 때조차 외양을 꾸미는 데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다.

물론 라카트옐이기에 꾸미지 않아도 다른 남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 외양에 신경 쓴 마티어스는 아리엘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리엘이 멍하니 보고만 있자 마티어스가 소매 커프스를 풀며 낮게 웃었다.

“왜 그러고 있지? 어서 들어오지 않고.”

그 말에 아리엘은 정신을 차리고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마티어스가 기대하는 투로 부드럽게 물었다.

“어떠냐. 이 정도면 신부 아버지로서 신랑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겠지?”

앗, 마티어스님. 아직도 그 이야기이셔.

아리엘은 어떻게 그를 말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자꾸만 나쁜 속마음이 속닥거렸다.

‘알렌이 부탁해서 와보긴 했지만, 마티어스님이 이렇게 멋있는데……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그녀의 갈등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자. 견장에 달 보석인데 네가 골라줬으면 좋겠구나.”

얼결에 보석을 받아든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티어스님은 보라색 사파이어도 어울리고, 블랙 다이아몬드도 예쁠 것 같아.’

아리엘이 금 받침대에 물린 보석 몇 가지를 고르자 마티어스가 그것을 견장에 달았다.

“어떠냐, 아리엘.”

“엄청 멋있어요!”

마티어스가 직접 단 모습을 보자 아리엘은 은근 욕심이 생겼다.

이것도 예쁘지만, 더 예쁜 게 있을지도 몰라.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다른 것도 달아보세요, 마티어스님.”


아리엘은 어느새 본래의 목적을 잊고 마티어스의 장신구를 고르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보라색 보석은 눈동자 색이랑 잘 어울리고, 샴페인 다이아는 화려해 보여요.”

아리엘이 신중하게 보석을 바꿔보며 말하자 마티어스가 슬쩍 미소지었다.

“화려한 것도 좋지. 신부와 어울리는 보석이면 더 좋고.”

자신이 신부 아버지 역할임을 은근히 어필하는 마티어스 때문에 아리엘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아빠랑 결혼식 준비를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이제 다른 걸 골라볼까.”


* * *


한편 아리엘이 마티어스의 방에 가서 결혼식 복장을 골라주고 있다는 소식은 착실히 루시안의 귀에 들어갔다.

“몇 시간째 나오지 않고 희희낙락하고 있다…….”

루시안에게서 흘러나온 기세에 책상 위 물건들이 드드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게다가 마티어스가 선언했다지. 결혼식에서 신랑을 이기겠다고.”

질 수 없겠군.

섬뜩하게 중얼거린 루시안이 알렌을 호출했다.

알렌이 불안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오자 루시안은 곧장 말했다.

“당장 내 결혼식 예복과 장신구 후보들을 챙겨.”

“예?”

“마티어스한테 간다.”

“그, 그게 무슨…….”

당황하는 알렌에게 루시안이 악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를 거라면 나도 만만치 않거든.”

그 시각.

아리엘은 끙끙거리며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건 이거대로 예쁘고, 저건 저거대로 잘 어울리고…….”

정말, 마티어스님은 안 어울리는 게 뭐야!

아리엘은 열심히 골라봤지만 뭐든 다 소화해내는 마티어스 때문에 후보가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이대로라면 내일이 돼도 다 못 고를 게 분명해.’

이 보석을 그냥 다 달고 가시면 안 되는 걸까?

그때, 마티어스 방의 문이 저절로 휙 열리며 루시안이 들어왔다.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시안!”

무단으로 밀고 들어온 루시안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아리엘라?”

그야…….

아리엘이 대답하려는 찰나, 마티어스가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아리엘의 결혼식에 입을 내 예복 장식을 정해주고 있었다만.”

순간 루시안과 마티어스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루시안이 먼저 아리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용건은 다른 데에 있었다.

“남편 것은?”

루시안의 질문에 아리엘은 당황해서 삐약삐약 대꾸했다.

“수잔 말로는 결혼 전까지 신랑과 신부는 서로 드레스, 예복 차림을 보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

아리엘의 논리적인 대답에 루시안은 말문이 막힌 채 미간을 구겼다.

하여튼 하녀장은 도움이 될 때가 없군.

그는 팔짱을 끼고 초조하게 아리엘 앞을 오가다 툭 말했다.

“장신구 정도는 괜찮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리엘이 머뭇거리자 루시안은 곧장 마티어스 맞은편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오만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알렌. 내 장신구도 펼쳐놔.”

알렌이 이젤 모양의 원목 거치대를 가져와서 루시안의 장신구들을 늘어놓았다.

남자 셔츠 깃에 다는 체인 브로치며, 부토니에를 고정하는 핀, 커프스 단추…….

그것을 본 아리엘은 창백해지고 말았다.

“설마 나한테 저걸 다 골라 달라는 건 아니죠, 루시안?”

난 못해. 절대 못해.

마티어스님 것도 못 골라서 이러고 있는걸?

아리엘은 고개를 저으며 안된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루시안이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결혼식에서 신랑이 다른 남자한테 질 순 없지.”

밀착하는 둘을 본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휙 빼앗아가며 대꾸했다.

“그렇게 나온다면 다시 결혼을 취소하는 수가 있다.”

루시안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때야말로 전쟁이야, 마티어스.”

몇마디 주고받은 라카트옐 남자들은 아리엘에게 말했다.

“아리엘, 결혼식장에서 너와 가장 어울리는 건 나여야 해.”

“아리엘라. 신부 아버지가 이겨야 저 녀석이 설치지 못할 거다.”

자기가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두 남자 때문에 결국 아리엘은 울상을 짓고 말았다.

‘글쎄, 제 결혼식은 대결이 아니라구요.’

바보 라카트옐 남자들!


* * *


이런저런 말썽들이 있긴 했지만, 시간은 잘도 흘러 어느새 결혼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다이아나가 아리엘 앞에 사람 키만큼 긴 두루마리를 가지고 온 건 그때였다.

“……? 다이아나, 이게 뭐야?”

어리둥절해 하는 아리엘을 다이아나가 덥석 끌어안으며 말했다.

“네 브라이덜 샤워를 열거야!”

이번에는 아리엘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브라이덜 샤워란, 결혼하기 전에 신부가 여자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하룻밤을 지새우는 파티였다.

“결혼식 직전에는 너무 바쁘니까 한 달 전쯤 파티를 열어야 한다구.”

다이아나가 가져온 두루마리에는 브라이덜 샤워 파티를 어떻게 할 것인지 상세한 계획이 적혀 있었다.

“여자들끼리 보내는 마지막 밤이니까 특별해야지.”

다이아나는 눈과 입이 모두 즐거운 파티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음식이며 음료, 테이블 세팅을 가장 예쁘고 화려하게 할 거야. 최고의 파티 전문가를 불러서.”

그리고 그녀는 참석자들의 드레스 코드도 정했다.

“또, 브라이덜 샤워는 사람이 너무 적어도 안 돼.”

아리엘 성격대로라면 가장 친한 친구들 몇 명만 부를 테지만, 훌륭한 브라이덜 샤워라면 최소 스무 명 이상의 친구를 불러야 체면이 살았다.

“그럴 땐 사교계 영애들 중 몇을 초대하곤 하지.”

하지만 아리엘은 사교계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아서 다른 영애들과 친분이 많지 않았다.

“걱정 마. 내가 엄선한 영애들만 브라이덜 샤워에 초대했으니까!”

다이아나는 아리엘과 인연이 있는 영애들 위주로 세심하게 초대 명단을 짰다.

명단을 읽으며 감탄하는 아리엘의 얼굴을 보며 다이아나는 전율했다.

‘최고야. 짜릿해.’

요즘 그녀의 인생은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었다.

‘원하는 덕질을 돈 걱정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다니. 인생 만족도 최상!’

아리엘의 완벽한 결혼을 위해 필요한 건 뭐든지 마티어스가 금괴를 흩뿌리며 해결했으므로, 다이아나는 예산 걱정 없이 최상의 것만 아리엘에게 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이아나는 선물 목록 종이를 꺼냈다.

“아리엘, 너도 알지? '브라이덜 샤워'는 신부 지인들이 선물을 비처럼 준다고 해서 샤워란 말이 붙은 거야.”

하지만 아리엘에겐 선물로 장만해야 하는 물건이 없었다.

필요한 물건이나 가구는 태후와 마티어스, 루시안이 이미 다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물은 없어도 돼!”

“그건 우리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마, 귀염둥이야.”

그렇게 말하며 다이아나는 아리엘에게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이미 선물 준비도 다 끝났다고. 후후.

다이아나가 계획을 마저 설명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아리엘 옆에 와 앉았다.

“뭐 하고 있었지?”

그렇게 말한 상대가 느긋하게 아리엘의 입술을 훔치곤 말했다.

“내 아내의 시간을 빌리려면 허락이 필요한데.”

“루시안!”

얼결에 키스당한 아리엘이 펄쩍 뛰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루시안은 가만 보면 부끄러움이란 게 없는 것 같아!

아리엘은 허둥지둥 루시안을 밀어내고 그를 노려보았다.

루시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한테도 뭘 할 건지 말해줘야지.”

그때 다이아나가 나섰다.

아까의 장면에 다이아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언니답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아리엘의 브라이덜 샤워를 준비중입니다.”

아리엘을 보며 꿀이 뚝뚝 떨어지던 푸른 눈이 다이아나를 향하며 서늘하게 변했다.

“파티라.”

“네. 신부의 결혼을 기뻐하는 파티지요. 당연히 괜찮으시겠죠?”

잠시 침묵하던 루시안이 짧게 대답했다.

“나도 간다면.”

그러자 다이아나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이 대공자 놈이 뭐라는 거야?

“어머, 무슨 소릴! 이건 여자들끼리 하는 파티라고요, 대공자님.”

루시안이 그림 같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 없는 곳에서 아리엘이 파티를 한다고.”

다이아나가 웃으며 보란 듯이 아리엘의 어깨를 감쌌다.

“남자는 단 한 명도 오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다이아나의 손이 아리엘에게 닿는 것을 보고 있던 루시안이 싸늘하게 물었다.

“내가, 남자만 경계하는 걸로 보이나?”

그쯤 되자 아리엘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시안.”

아리엘이 조그맣게 경고하자 루시안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낮게 신음했다.

못마땅한 기색을 다 감추지 않은 그가 다이아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인간들이 하는 건 다 해야지. 완벽하게 하도록.”

다이아나가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고혹적으로 웃었다.

눈에는 대공자에게 지지 않겠다는 결심이 넘쳐흘렀다.

“당연하죠. 우리 아리엘 일인데.”


* * *


브라이덜 샤워 날.

아리엘은 집주인으로서 자신의 방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분홍색이 가득한 아리엘의 방은 그녀가 자라면서 확장 공사를 여러 번 해서 파티를 열기에도 부족함 없는 크기였다.

방 입구에서 다이아나와 세실이 손님들이 가져온 선물을 받아 한곳에 쌓아두었다.

“이런 게 바로 귀족의 파티군요.”

정보 길드 두목이라는 신분을 감추고 보통 영애처럼 꾸민 카디나가 다가와 연극 투로 말했다.

“아리엘님의 친구가 되니 이런 간지러운 옷도 입어보고. 영광입니다.”

카디나가 나풀거리는 드레스 단을 들어 올리며 키득거렸다.

아리엘은 레몬 머랭 쿠키를 집어 카디나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와줘서 고마워. 신분까지 속이고.”

“이런 자리에 제가 빠질 수 없죠. 쓸 만한 정보가 있는 곳엔 항상 이 카디나가 있다는 걸 잊지 마십쇼.”

한량처럼 말한 카디나가 자리를 떠나며 눈을 찡긋했다.

“참, 제 선물 기대하세요. 아주 특별하니까요.”

말을 마친 카디나가 저만치에 모여있는 영애들 쪽으로 이동했다.

“어머머, 여기들 계셨군요.”


그리고 평생 귀족 영애였던 것처럼 간드러지게 말하며 섞여들었다.

금세 다른 사람처럼 말투를 바꾸는 카디나를 본 아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하여튼 카디나는 대단하다니까…….’

손님들이 모두 모이자 브라이덜 샤워 파티가 시작되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손님들은 아리엘을 중심으로 푹신한 러그에 둘러앉았다.

예쁘고 맛있는 디저트들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영애 중 한 명이 말했다.

“아리엘님, 대공자님과의 러브 스토리 좀 풀어주세요!”

그러자 앉아있던 손님들 모두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보통 브라이덜 샤워에서는 신부의 러브스토리를 듣는 게 필수 순서였다.

“맞아요. 저도 듣고 싶었어요.”

“대공자님과 어떻게 사랑에 빠지셨는지 궁금해요.”

심지어 알 만큼 아는 세실과 다이아나도 다시 듣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아리엘은 당황해서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그런 건…….”

뭐라고 해야 하지?

회귀하기 전 만났던 남자를 만나러 대공가에 찾아왔는데, 대공자와 계약 결혼을 하게 됐고, 사실 대공자가 '그' 남자였다고?

아니면 라카트옐은 사실 드래곤의 후예인데, 그들이 잃어버린 심장인 크림슨 하트가 자신이었다고?

자신이 생각해도 기막힌 우연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다른 소녀가 꿈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분명 운명적인 만남이셨겠죠?”

‘……!’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미소지었다.

맞아. 기막힌 우연의 연속. 죽음도 좌절하게 만들지 못했던 마음.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으니 정말로 운명이 아니었을까?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아리엘이 조그맣게 대답하자 소녀들 모두가 꺅꺅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어떻게 된 건지 어서 말해주세요!”

곤란해하는 아리엘 대신 다이아나가 나서서 이야기를 풀었다.

아리엘이 대공가의 비밀을 제외하고 말해둔 그대로의 스토리였다.

“첫 만남 땐 아리엘이 위험에 처했을 때였대요. 마침 대공자님께서 아리엘을 구해주신 거죠.”

“어머나. 진짜 운명이네요!”

다이아나가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날 아리엘은 대공가에 잠시 들러 도움을 받았고, 그때 마티어스 대공님께서 아리엘을 마음에 들어 하셨대요.”

세상에, 그 냉정하고 무서운 마티어스 대공님이?

소녀들이 깜짝 놀라 웅성거렸다.

“하지만 아리엘과 대공자님은 그 사실을 몰랐고, 헤어진 뒤 서로 마음으로만 그리워했죠.”

어쩜…….

영애들은 감동에 빠져서 서로의 어깨에 기댔다.

“결국 마티어스 대공님께서 허락하셔서 대공자님은 아리엘의 친가에 찾아가 직접 청혼까지 하셨대요. 그리고 알콩달콩 살다가…… 이렇게 성년이 되어서 정식으로 결혼까지 하시는 거랍니다.”

와…….

모인 사람들 중에는 아직 결혼을 한 영애가 없었기에 다들 상상만 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정말 부러워요!”

“저도 운명의 상대를 만날 수 있을까요?”

러브스토리 뒤에도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맛있는 음료와 디저트가 쌓인 트레이가 두 번 바뀔 때쯤, 다이아나가 박수를 치며 시선을 모았다.

“자. 이제 브라이덜 샤워의 꽃. 선물 증정식을 할까요?”


* * *


다이아나는 아리엘을 방 한편에 쌓인 선물 더미로 이끌었다.

“아리엘. 뭐부터 풀어볼래?”

아리엘은 고민 끝에 가까운 친구들 선물을 먼저 풀어보기로 결정했다.

첫 번째로 풀어본 세실의 선물은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게 주문 제작된 호신용 단검이었다.

검 손잡이의 중앙에는 아리엘을 연상시키는 붉은 루비가 박혀있었다.

“네가 강한 건 알지만, 언제나 안전했으면 해서.”

그렇게 말한 세실이 아리엘을 꼭 안아주었다.

다음으로 풀어본 다이아나의 선물은 고급 가죽으로 커버를 씌운 책이었다.

“우리 가문에서 물려 내려오는 가문관리 비법 책이야.”

그 말을 들은 소녀들이 모두 깜짝 놀라서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모니카 공작가의 비법 책?”

“세상에. 그런 건 친자매들끼리만 공유하는 거잖아요.”

다이아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아리엘을 껴안았다.

“제게 아리엘은 자매나 다름없으니까요.”

다음은 이웃 나라의 국왕이 된 지 얼마 안 된 베로니카의 선물이었다.

베로니카는 일정이 바빠서 선물과 인사만 전한 뒤,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선물 상자를 열자 안에서 초록색의 둥근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아나가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건 행운석 목걸이네!”

“행운석?”

“응. 아주 척박한 지대에서만 발견되는 보석이야. 베로니카님 나라에서 나는 유일한 보석이지. 지닌 사람에게 운과 기쁨을 준다는 속설이 있어.”

다이아나 말로는 행운석은 보석의 가치가 뛰어나진 않지만 매우 희귀해서 구하려는 사람이 줄을 선다고 했다.

“실제로 이 보석을 가진 사람들이 행운을 맞은 일이 많대.”

아리엘은 베로니카의 마음을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다음 선물 상자를 열자, 선물을 준 사람의 이름 대신 '익명'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익명의 선물?”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브라이덜 샤워에서는 좀처럼 익명 선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리엘은 상자에 든 쪽지를 집어 들었다.

“사랑하는 상대와 운명을 묶어버린다는 주술 도구……?”

그때 꾸며낸 목소리의 카디나가 불쑥 말했다.

“어머. 그건 서로의 피로 어둠의 주술을 하는 도구라고 알고 있는데!”

손님들이 호기심에 꺅꺅거리는 가운데 아리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

이런 짓궂은 선물을 할 사람은 여기에 카디나 뿐이었다.

카디나, 아까 말한 특별한 선물이란 게 혹시?

눈이 마주치자 맞은편에 앉은 카디나가 윙크를 했다. 그러더니 쪽지를 뒤집어 보라는 손짓을 했다.

쪽지를 뒤집자 다른 문장이 적혀 있었다.


[장난이고, 진짜 선물은 아래에.]


아리엘은 주술 도구를 꺼내고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상자 안에는…….

“……!”

카디나의 진짜 선물을 발견한 아리엘의 뺨이 확 붉어졌다.

이, 이게 뭐야 카디나!

안에 든 것은 차마 손님들 앞에 꺼내놓지 못할 물건이었다.

평생에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던, 노출이 많고 야한 속옷들이 아닌가.

아리엘을 놀래키는데 성공한 카디나가 키득키득 웃다가 얼른 얌전한 척 표정을 바꾸었다.

그리고 선량한 말투로 말했다.

“언제나 부부 금슬이 좋으시길 바라겠어요, 대공자비님.”

카디나는 진짜 못 말려.

아리엘은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상자를 침대 아래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손님들의 선물을 다 풀어보았는데도 선물 상자는 몇 개나 더 남아있었다.

손님들이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이 와글와글 외쳤다.

“큰 것들도 열어봐요, 대공자비님!”

오늘 파티에 참여한 여자 손님들은 주로 작은 선물 상자에 선물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파티에 와보니 이미 커다란 선물 상자가 몇 개나 쌓여 있었던 것이다.

모두의 호기심은 그 커다란 상자들로 향했다.

원칙상, 신랑과 신랑 가족은 브라이덜 샤워에 선물을 줄 수 없기 때문에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대공님이나 대공자님이 보내신 게 아니라면, 누가 선물을 보냈을까?’

아리엘도 역시 그 선물들의 주인이 누군지 궁금했기 때문에 큰 선물 상자 하나를 골랐다.

“이것부터 열어볼게요.”

선물 상자를 열자, 안에 선물을 준 사람이 누군지 적힌 종이가 들어있었다.

“[푸른 사자 기사단].”

소리 내어 그 이름을 읽은 아리엘은 깜짝 놀랐다.

세상에. 기사단 식구들이 언제 선물을 준비했지?

그녀는 조심스레 종이 포장지를 걷어내고 안에 든 것을 꺼냈다.

그 물건을 알아본 손님 몇 명이 새된 소리로 외쳤다.

“마수의 가죽과 모피들이네요. 그것도 가장 비싸고 좋은 것들만!”

아리엘도 선물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대공가의 푸른 사자 기사단은 제국에서 유일하게 마수를 잡는 기사단이었다.

마수는 체력이 강하면서도 몸놀림이 빨라서 마수 사냥은 다른 사냥보다 훨씬 위험하고 힘들었다.

그런 마수에게서 나오는 털, 가죽, 뿔 등은 동물 가죽보다 훨씬 인기가 높았다.

“동물에게서 나오는 것보다 튼튼하고 가벼운 데다 따뜻해서 질이 좋잖아요.”

“윤기가 자르르한 빛깔이 동물 가죽과 비교도 할 수 없죠.”

이렇다 보니 마수의 부산물은 매우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귀족들조차 평생 가죽 한 개를 볼까 말까 한 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가죽과 털이 몇 피스나 상자 안에 들어있었다.

“제가 이런 걸 결혼 선물로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졸도했을 거예요.”

“저도요. 이런 건 억만금을 줘도 물건이 없어서 못 구한다고요.”

“이게 다 몇 장이야…… 북쪽 산맥 마수들 씨가 말랐겠어요.”

그렇게 황홀한 표정으로 그것을 살펴보던 손님 중 하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이 가죽은 처음 봐요. 따뜻한 색감에, 부드럽고…… 너무 좋네요.”

그들이 가리킨 것은 맨 아래에 있는 가죽 하나였다.

이 가죽이 어느 마수의 가죽인지 모인 사람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몇 번이나 마수 가죽과 털을 선물 받아 본 아리엘도 처음 보는 가죽이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세실이 입을 열었다.

“미노타우르스 가죽입니다.”

미노타우르스?

거대한 소 모양을 한 전설의 괴물? 그걸 세실이 어떻게 알지?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세실에게 물었다.

“설마, 세실 너도 같이 간 거야?”

세실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냥…… 몸도 풀 겸. 아리엘 네 거니까.”

감동한 아리엘은 세실을 꼭 안아주었다. 푸른 사자 기사단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담아서.

짧은 시간에 이런 선물을 직접 준비하려면 쉽지 않았을 터였다.

나 몰래 이런 걸 준비하다니.

다음에 더 놀라운 선물로 혼내줘야겠어.

“다음 선물은…….”

아리엘이 다른 선물 상자를 열자, 카디나가 그 안에 적힌 이름을 큰 소리로 읽었다.

“디트리히 레온 드 슈테인. 황태자 전하의 선물이네요!”

그리고 안에 든 것은…….

웬만해서는 동요하지 않는 다이아나가 진짜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축복을 기원하는 황실의 수석……!”

아리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이아나를 마주 보자 그녀가 다정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건 집안에 두면 모든 질병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어. 황실의 보물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국보야.”

아무래도 제국의 차기 황제가 사촌 여동생을 귀애한다는 소문은 진실인듯했다.

‘제국 전체가 아리엘라 대공자비님 손에 좌지우지된다는 게 사실인가 봐.’

모인 손님들 모두는 그 엄청난 사실에 말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선물이 공개되자 분위기는 조금 나아졌다.

“어라. 이번에도 익명의 선물이네요?”

커다란 상자 안에는 색색의 마법 비약과 마법 재료들이 특수한 병에 담겨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것 또한 판다면 수도 저택 몇 채는 그냥 살 수 있을 정도로 귀한 재료들이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귀한 물건이란 것만 알았지만 그중 마법사인 필리아 영애는 물건의 진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건…… 레전드 급 마법 비약이네요. 마법사의 기량을 늘려주고 몸을 보호해주는.”

필리아 영애는 손이 떨려 감히 병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손님들은 꺄르르 거리며 선물을 준 익명의 사람을 예측했다.

“이런 선물을 한 사람이 대체 누굴까요?”

“익명이니 대공자님이실지도요.”

아리엘도 이 선물을 보낸 사람이 누굴까 생각에 잠겼다.

선물을 준 사람은 마법에 조예가 깊은 게 분명했다.

그럼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은 아닐 텐데.

혹시 그녀의 마법 스승인 브루노어일까?

하지만 브루노어라면 익명으로 선물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설마.’

히스, 너야?

아리엘의 소꿉친구이자 마법 수업의 동기인 히스는 얼마 전 마탑으로 수련을 하러 떠났다.

‘마탑에는 이런 귀한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창구가 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만큼 희귀한 재료를 구하려면 여간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비약은 직접 제조해야 하니 훨씬 더 고생했을 것이고.

선물로 받은 비약들을 하나하나 만져보던 아리엘은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작은 비약 하나를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프라카티아 나무용 비약.’

역시, 히스 너구나.

함께 프라카티아 나무를 심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선물이었다.

‘고마워, 히스.’

아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히스가 잘 지내길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이제 커다란 상자에 담긴 선물은 딱 하나가 남아있었다.

선물 상자 중 가장 크기가 컸기에 모두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아리엘은 낑낑대며 발돋움을 해서 상자의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

상자 안에는 눈부시게 흰 털을 가진 예쁜 말 인형이 들어있었다.

실제 말 크기보단 작지만 아리엘의 키만큼 큰 실물 인형이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인형을 꺼내자 손님들이 손을 모으고 외쳤다.

“이건 페어리 홀스 인형이잖아요!”

페어리 홀스는 유니콘의 후예라고 불리는 희귀한 품종의 말이었다.

연한 금빛의 갈기에 눈같이 흰 몸통, 영민한 검은 눈과 우아하고 긴 다리.

아리엘은 선물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말 인형에 붙은 종이 태그를 떼어냈다.

“이것도 익명인가요, 대공자비님?”

익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물을 준 사람이 바로…….

“[아빠]라고 적혀 있어요.”

순간 아리엘은 혼란스러워졌다.

친부인 루실리온 후작은 태후의 감독 아래 지하 감옥에 있었다.

그럼 아빠가 누구지?

당황하는 아리엘의 귀에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옆방 문을 열어보라고 적혀 있어.”

아리엘은 긴장된 발걸음으로 다가가 옆 방문을 열었다.

그녀의 뒤에 있는 손님들이 깜짝 놀라 탄성을 뱉었다.

“저건……!”

아리엘의 눈앞에 있는 것은 황금빛 갈기에 새하얀 몸을 가진, 진짜 살아있는 암컷 페어리 홀스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번만큼은 네 '아빠'로서 주는 선물이다.”

말의 고삐를 쥔 마티어스가 서 있었다.

“마티어스님…….”

긴장이 풀린 아리엘이 겨우 중얼거리자, 마티어스가 다가와 아리엘에게 페어리 홀스의 고삐를 넘겨주었다.

“루시안 녀석 소유의 말은 괜찮은 놈이지만 네 소유의 말도 있어야지.”

아리엘이 루시안의 말인 반카를 타고 다니는 것을 염두에 둔 선물이었다.

유니콘이라고 해도 믿을 고귀한 외양의 말을 넘겨준 마티어스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군.”

아리엘은 정신을 차리고 페어리 홀스와 눈을 맞추며 갈기를 쓰다듬었다.

마음에 들고 말고가 있을까?

이 말은 그녀가 태어나서 본 말 중에 가장 아름답고 순해 보이는 말이었다.

게다가 마티어스가 준 선물이 아닌가.

“감사합니다. 마티어스님. 정말 마음에 들어요.”

아리엘이 수줍게 뺨을 붉히며 말하자 마티어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에 든다면 오늘은 나를 다르게 불러줬으면 하는데.”

마티어스님도 참…….

그의 말뜻을 해석한 아리엘은 부끄러워서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아버님.”

마티어스가 입꼬리를 늘어트리며 수려하게 미소짓다 말고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으음…… 이건 '아빠'로서 주는 선물인데…… 흐음.”

으응?

아리엘은 눈을 크게 떴다가 마티어스가 기대하듯이 흘끔거리는 걸 보고 방긋 웃었다.

“감사해요, 아, 아빠.”

결국 아빠란 호칭을 얻어낸 마티어스가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크흠, 큼.”

고개를 돌린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티어스의 귀가 발간 것은 확연히 보였다.

그러던 마티어스가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이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네 결혼 선물이 부족한 것 같군. 네 말이 뛰어놀 목장 부지와 친구들과 모일 살롱 건물 몇 채를 더 주지.”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아뇨, 잠깐만!”

“그리고 보물고에 있는 다이아몬드 샹들리에와…….”

“마, 마티어스님……!”

그런 아리엘과 마티어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여자 손님들은 모두 황홀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이아나와 세실, 카디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리엘의 시집살이는 아무래도 꽃길일 듯했다.


* * *


마티어스가 하인들에게 말을 맡긴 뒤 돌아가고, 다시 여자들만 남자 아리엘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마티어스님 말리는 거 힘들어…….’

브라이덜 파티가 끝난 뒤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대공가가 준비한 마차로 돌아갔다.

다이아나, 세실 두 친구만 남아 아리엘과 함께 잠들 예정이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아리엘은 넓은 침대에 친구들과 함께 엎드려 수다를 떨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열 살에서 열다섯 남짓이었던 소녀들은 어느새 아가씨로 자랐지만, 여전히 철부지처럼 꺄르르 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어머니가 어렸을 적엔 미래의 신랑 얼굴을 미리 보려면 이렇게 해야 했대.”

“어떻게?”

“초승달이 뜬 밤에 촛대와 손거울을 들고 계단을 거꾸로 오르는거야.”

아리엘은 긴장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

“그러면 손에 든 거울에 결혼할 남자의 얼굴이 비친대!”

세실이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거울에는 자기 모습이 비쳐야 정상 아닌가?”

“이 외통수 좀 봐. 그러니까 주술이라는 거지.”

세실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뜬 다이아나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도 어릴 적에 해봤어. 그런데 아무리 해도 남자 얼굴은커녕 아무것도 안 비치는 거 있지?”

“아무것도?”

이번에는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이아나 모습은 비쳤어야 하는 거 아니야?”

“…….”

순간 다이아나가 창백해지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 그러네……?”

세 친구는 동시에 소름이 끼쳐서 옹기종기 모여 누웠다.

“왠지 무섭다…….”

“괜히 말했나봐…….”

“근데 왜 아무것도 안 비친 걸까?”

무서움에 오들오들 떨던 그들은 황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또 우리 할머니 세대 때는 결혼식이 지금보다 훨씬 복잡했대.”

“얼만큼?”

“결혼하기 전에 약혼 의식을 세 달 치르고, 그 이후에는 정화 의식을 한 달 치러야 했다지?”

다이아나의 말에 세실도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그리고 예물 교환도 한 달에 하나씩 복잡한 과정으로 서로의 집에 전달했다고 해.”

“지금도 전통 대부분이 남아있긴 하지만…….”

어머니 손에서 자라지 못한 아리엘은 다이아나와 세실이 해주는 결혼 이야기에 홀딱 빠져들었다.

아리엘도 결혼 준비가 복잡하고 힘들었지만, 다이아나나 마담 헬렌의 도움 없이 보통 귀족 여성들처럼 해야 한다면 해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결혼이 보통 일이 아니었구나…….’

그녀는 결혼을 간단하게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했다.

‘그보다, 그 많은 걸 결혼식 하나를 위해서 다 준비하는 거야?’

아리엘은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대체 어떻게 결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들 이렇게 복잡하고 힘든 일을 다 해내고 결혼을 하는걸까?’

그렇게 친구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리엘 방의 불이 꺼졌다.

결혼식 날은 하루하루 착실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 루시안의 방에서는 몇 년 만인지 모를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들의 방을 찾은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마주 앉아있는 광경.

이 모습을 노집사 알렌이 보았다면 놀라서 수명이 5년은 짧아졌을 모습이었다.

권태로운 자세로 앉은 마티어스가 나직이 말했다.

“결혼식 다음 날이 블루문이지.”

블루 블러드 문.

라카트옐에게는 저주와도 같은 시기.

푸른 달이 뜨는 이 밤에는 라카트옐의 힘이 태고의 용과 가까워지고, 그 때문에 라카트옐은 극한의 고통과 파괴욕을 느끼게 되었다.

“알고 있어.”

루시안이 차가운 눈으로 건조하게 대꾸했다.

블루문이 결혼식 다음 날이기에, 바로 출발해야 하는 신혼여행이 하루 미뤄졌다.

아리엘의 안전을 위한 결정이었다.

마티어스가 의자 팔걸이에서 가볍게 손가락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어떨지 모른다. 저주가 풀렸으니. ……적어도 너만큼은.”

라카트옐은 본디 불완전한 드래곤이었으나, 루시안은 드래곤의 눈과 심장을 흡수해 완전한 드래곤으로 각성했다.

그러니 블루문의 저주가 루시안에게만은 사라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아직 입증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루시안의 푸른 눈이 마티어스를 향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마티어스가 루시안과 시선을 마주치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도 조심하라는 말을 하는 거다. 저주가 풀렸어도 블루문이 뜨면 용의 피는 강해지겠지. 아리엘을 대할 때 조심하지 않으면 그 애가 다칠 거다.”

“…….”

루시안의 얼굴에 순간 미약한 불안이 스쳤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내가 아리엘을 다치게 할 일은 없어.”

마티어스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은 노란빛이 선명한 달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랬으면 좋겠다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라카트옐은 본디 인간보다 강하고, 라키엘로 각성한 루시안은 더욱 강했다.

블루문이 다가오면 루시안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험해질 것이다.

“이미 아리엘은 블루문 때에 너와 함께 있었던 적이 있었지. 두 번이나. 그때 그 애가 무사한 건 행운이었어.”

잠시 망설인 마티어스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이제 위험한 건 네 힘만이 아니다.”

마티어스의 말뜻을 알아들은 루시안이 붉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이번에는 윤년의 블루문이 아니야, 마티어스. 아리엘라는 내 옆에서 안전할 거야.”

윤년의 블루문이 아니라는 말에 마티어스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쩌면 몇 년은…… 안전하겠군.”

오래 묵은 라카트옐의 비밀이 뱀처럼 똬리를 튼 채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밤.

두 남자는 말없이 오랫동안 그렇게 함께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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