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그 뒤, 루시안은 정식으로 황궁에 있는 태후를 찾아가 아리엘을 대공가로 데려가기 위한 허락을 받았다.
태후는 그동안 아리엘이 마음 고생한 것 때문에 못마땅해 했지만, 그 소식을 들은 황제는 기절할 듯이 놀라 뒤집어졌다.
“라, 라, 라카트옐 대공자가 허락을 구했다고?”
대공가는 제국의 수호신 격으로 황실보다 위에 있는 존재였다.
역대 어떤 라카트옐도 인간에게 허락을 구한 뒤 행동한 적이 없었다.
마음대로 해도 막을 사람이 없었으니까.
“대체 대공자비가 얼마나 소중하길래 저렇게까지?!”
또한 대공가는 힘든 아리엘 곁을 지켜주었던 다이아나와 세실에게 감사를 표했다.
“무기고를 열어서 세실 경에게 검을 선물하겠다.”
마티어스는 세실에게 천 년의 보검 '알테라스'를 선물했다.
살아있는 검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도 알려져있는 알테라스는 대륙 최초의 소드 마스터가 소유했던 검이었다.
명문 무가라고 불리는 하이츠 백작가를 포함해서 제국 기사들 중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명검인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세실의 아버지와 오라비들은 부러움과 질투에 땅을 치며 배 아파했다.
“알테라스? 그 전설의 검이 라카트옐 가 무기고에 있었다고?”
“아니, 그걸 세실에게 하사하셨단 말인가?”
하이츠 백작은 뒷목을 잡고 넘어졌고, 오라비들은 그깟 계집애한테 천년의 명검 알테라스가 웬 말이냐며 부들부들 떨었다.
“여자에게 명검이라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지!”
그들은 애써 허세를 떨어댔지만, 그런 말을 할수록 돌아오는 건 사람들의 비웃음뿐이었다.
세실이 오라비들을 실력으로 꺾었다는 것이 이미 사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간에는 이제 하이츠 백작가보다 최초의 여기사 세실이 훨씬 더 유명해졌다.
“모니카 공녀에겐…… 무어든 원하는 것을 주지.”
이어진 마티어스의 말에 다이아나는 냉큼 대답했다.
“그럼 아리엘이요.”
순간 마티어스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가 가라앉았다.
그가 서늘한 인내심을 보이며 말했다.
“……아리엘라 빼고.”
졸지에 가장 원하는 것을 제외당한 다이아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라카트옐에게 요청하면 제국의 절반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다이아나가 오래전부터 염원했던 '공작위 계승권'도 말만 하면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 능력으로 얻고 싶어.’
결국 다이아나는 '대공가에 방문을 거절당하지 않을 권리'를 요청했다.
이번에 아리엘이 의식을 잃은 기간 동안 한 번도 그녀의 귀염둥이를 보지 못했던 게 큰 후유증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좋다. 허락하지.”
그 요청을 받아들인 마티어스는 또 하나의 선물을 주었다.
모니카 공작가와 협력 가문을 맺은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라카트옐이 다른 가문과 협약을 맺었다는 소식에 제국 귀족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 일 덕에 모니카 공작가는 제국의 세 공작가 중 가장 위상이 높아졌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리엘은 곧장 브루노어를 만나게 되었다.
아리엘이 크림슨 하트였다는 걸 알게 된 브루노어는 한참 말을 잇지 못하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제 마법사 인생을 걸고요.”
“감사해요, 스승님.”
그리고 아리엘은 그에게 조심스레 히스의 안부를 물었다.
“히스 녀석은…….”
브루노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연당한 손자놈은 돌아오자마자 그에게 안겨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오랜 짝사랑이 많이 아팠던 모양이었다.
“머리 좀 식히라고 마탑에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괜찮을까요, 히스는……?”
브루노어가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겁니다.”
그리고 그는 아리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리엘님께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히스 녀석이 나쁜 길에 빠질 뻔했다가 돌이켰더군요.”
브루노어는 이번에 히스가 한 고백을 통해 손자가 타락의 무리에 접근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라카트옐을 죽일 수 있는 강한 힘을 얻기 위해 집을 뛰쳐나갔던 히스는 아리엘을 생각하며 유혹을 뿌리쳤다고 했다.
그래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아기 마님!”
“마님!”
집에 돌아온 아리엘은 모두에게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을씨년스럽기만 했던 대공저는 아리엘이 돌아옴과 동시에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모닥불 가든에 따스한 불빛이 켜졌고, 유리 온실도 다시 정비되었다.
집사 알렌과 재무관 달튼은 손을 맞잡고 감격을 나누었고, 주방장 홀슨은 펑펑 울며 쿠키를 산더미처럼 구웠다.
정원사 우즈는 조용히 아리엘에게 행운을 빌어줄 윈터베리 나무를 정원 가득 기르기 시작했다.
집에 온 아리엘을 번쩍 안아 올려 몇 바퀴 돌려준 마티어스가 물었다.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으냐?”
꺄아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린 아리엘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밥부터 먹고 싶어요.”
마티어스가 당장 수잔을 향해 눈짓했다.
엄청난 만찬을 준비하라는 의도가 형형한 눈빛에 드러났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간단히 먹어도 돼요. 다만…….”
아리엘은 루시안과 마티어스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셋이 같이 먹으면 안 돼요?”
아리엘은 속으로 몰래 그간 얼굴이 상한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식사를 챙길 계획을 세웠다.
초롱초롱한 아기 병아리 같은 눈빛에 두 라카트옐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
같이 식사한 것이 언제 적 일인지 까마득한 두 남자였기에 눈빛엔 불편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리엘의 풀죽은 물음이 쐐기를 박았다.
“안 되나요……?”
그녀가 묻자마자 두 남자는 동시에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안 되긴.”
아리엘에게 안 된다고 말하는 선택지는 이미 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식사 자리 전에 미리 상대를 제거하는 한이 있더라도.
* * *
라카트옐 가족의 식사는 아리엘과 마티어스가 늘 저녁 식사를 함께하던 다이닝 홀에서 이루어졌다.
한사코 아리엘과 가까운 자리에 앉으려는 두 라카트옐 때문에 셋은 옹기종기 붙어 앉았다.
‘행복하다…….’
아리엘은 자신을 사이에 두고 나눠 앉은 루시안과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2년 전, 가을 소풍 이후로 이렇게 단란한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앞으론 매일매일 같이 밥 먹자고 해야지.’
아리엘은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단 한 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기 마님을 위한 만찬입니다!”
아직도 눈가가 붉은 주방장 홀슨이 주방 하인들을 대동하고 줄줄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크림이 듬뿍 든 가리비 스프엔 다진 바질 잎이 들어가 향긋했고, 가볍게 꿀을 입힌 채소들은 부드럽게 익어 있었다.
낮은 온도에서 오래 조리해 겉은 카라멜처럼 노릇하고 속은 살살 녹는 양고기 스테이크, 허브 소스를 곁들인 토끼 다리살 요리도 있었다.
꼭 붙어 선 수잔이 열량이 높고 아리엘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세심하게 그녀 옆에 놔 주었다.
음식 냄새를 맡은 아리엘은 문득 배고픔을 느꼈다.
‘이래 본 게 언제였더라……?’
타락이 만든 이공간에 갇혀있었던 것이 몇 개월이었다.
빠져나온 뒤에는 주변에서 아리엘의 식사를 챙겼지만, 루시안과 헤어졌다는 충격 때문에 거의 먹지를 못했다.
새삼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게 아득한 예전으로 느껴졌다.
수잔이 훌쩍거리며 아리엘 몫의 고기를 썰어주었다.
“어유, 이 얇은 손목 좀 봐…… 익힌 감자 조각도 못 썰겠네요.”
음…… 감자보다 백 배는 큰 바위도 마법으로 쪼갤 수 있는 걸요.
하지만 수잔에게서 받는 과잉보호가 좋아서 아리엘은 배시시 웃기만 했다.
큼직하게 썰어 볶은 쇠고기 옆에는 입맛을 돋우는 색감의 당근 요리가 함께 있었다.
버터와 향신료로 글레이즈드 한 당근 요리에서 황홀한 향기가 풍겼다.
아리엘은 눈을 감고 후각을 가득 만족시키는 향기를 느꼈다.
포크로 당근을 콕 찍어 입에 넣자 달콤한 맛이 물씬 풍겼다.
‘근데 두 사람은…….’
살짝 지켜보니 아니나 다를까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당근 요리 쪽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번갈아 본 아리엘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덩치 큰 애기들 같아.’
그녀는 조그맣게 물어보았다.
“라카트옐은 다 당근을 싫어하는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동시에 식기를 든 손을 멈췄다.
두 라카트옐의 시선이 잠시 날카롭게 마주쳤다가 어긋났다.
아리엘이 얌전히 기다리고 있자, 한참 만에 루시안이 내키지 않는 듯 대답했다.
“……꼭 그런 건 아냐.”
응?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마티어스님과 루시안만 그런 거예요?”
아리엘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마티어스가 낮게 헛기침을 했다.
“……그래.”
아리엘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종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다이닝 홀에 울려퍼졌다.
역시 두 사람은 부자(父子)지간인가 봐.
아리엘이 웃자 루시안과 마티어스부터 사용인들까지 모두 하던 걸 멈추고 경이로운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
얼마전까지만 해도 적막하고 어두컴컴했던 저택이었다.
아리엘이 의식을 잃은 뒤, 대공가에는 절망의 그늘이 드리워 아리엘이 들어오기 전보다 더욱 황폐했다.
그런데 아리엘이 돌아와서 이렇게 웃고 있다니.
저택의 분위기는 이제 완전히 변해서 햇살이 환하게 내리쬐는 듯했다.
정작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져서 말똥말똥 그들을 마주 보았다.
다들 왜 그래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리엘의 관심을 다른 곳에 빼앗긴 루시안이 눈매를 슬며시 좁혔다.
“이것 좀 먹어 봐.”
그가 나이프로 자른 고기 요리를 아리엘의 입 앞에 가지고 왔다.
차게 식힌 뒤 얇게 저며 생무화과를 돌돌 만 새끼 돼지 요리였다.
얼결에 아기새처럼 받아먹어 버린 아리엘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아, 안 줘도 돼요. 루시안.”
한쪽 손으로 턱을 고이고 지그시 쳐다보던 루시안이 비딱하게 웃었다.
“그러면 더 주고 싶어지는데.”
그때 마티어스가 아리엘에게 다른 요리를 내밀었다.
바삭하게 익힌 연어 스테이크 조각이었다.
“어린애는 잘 먹어야지. 넌 야위었으니 더 잘 먹어야 하고.”
어, 어떡하지?
아리엘은 안절부절못하다가 눈을 꼭 감고 얼른 받아먹었다.
마티어스가 나직이 소리 내 웃었다.
정말로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 새가 된 기분이었다.
“저 혼자 먹을 수 있어요.”
아리엘이 삐약거렸지만, 이미 상대가 그녀에게 음식을 먹여준 걸 본 두 사람은 서늘하게 서로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 한 입 더.”
“이걸로 입가심은 어떠냐.”
“마티어스 건 먹지 마.”
“넌 아리엘 취향을 모르는군.”
아리엘 앞에 정신없이 음식을 날라 오기 시작했다.
그런 라카트옐 가족의 모습을 보는 사용인들은 다들 입을 가리고 흐뭇하게 웃었다.
* * *
식사가 끝나고 큼지막한 딸기 과육과 시럽이 올라간 우유 푸딩이 디저트로 나오자, 마티어스는 사용인들을 물렸다.
“다들 물러가라.”
시립해있던 사용인들과 알렌이 조용히 인사하고 사라졌다.
루시안은 타이를 느슨히 풀어헤치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아리엘만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리엘의 입속에 새빨간 딸기가 들어가는 모습을.
그녀의 조그만 볼이 볼록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지겨워지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제 몫의 딸기를 아리엘 앞에 옮겨놓았다.
디저트엔 손도 안대는 루시안과 마티어스였기에, 아리엘 앞에는 어느새 딸기가 산처럼 쌓였다.
딸기를 모두 해치운 뒤 찰랑이는 푸딩을 폭폭 떠먹던 아리엘은 가만히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얼굴을 살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라카트옐이라면 그 답을 알고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잠시 후, 그녀는 디저트 스푼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티어스님, 루시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타락에 대한 거예요.
그녀가 조그맣게 덧붙이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긴장하는 기색으로 자세를 바꾸었다.
아리엘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타락은 고문 도중에 계속 제게 말을 걸었어요. 자기가 살아야 저도 살 수 있다는 식으로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언에는 라카트옐과 크림슨 하트 사이의 연관성만 드러나 있었으니까.
루시안이 죽으면 그녀는 살고, 루시안이 살면 그녀는 죽는다.
그런데 타락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당연히 그자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들자 뜻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두 남자는 지금 아리엘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이 굳어서 새파란 분노가 넘실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왜……?
마티어스가 한 글자 한 글자 짓누르며 말했다.
“고문이라고?”
그가 묻자 아리엘이 화들짝 놀라며 창백해졌다.
마티어스는 그녀가 이 일을 말하지 않으려고 했었다는 걸 눈치챘다.
대마법사에게 들어서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듣게 되니 피가 차갑게 식었다.
마티어스는 화를 억누르며 부드럽게 물었다.
“그놈이 네게 무슨 짓을 했지, 아리엘라?”
아리엘이 입술만 달싹이며 더듬거렸다.
“그게…….”
마티어스는 나직이 덧붙였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건, 아니지만…….”
머뭇거리며 망설이던 아리엘이 이윽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이 죽은 모습을…… 보여줬어요.”
그리고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제가 두 사람에게 버림받도록 만들었고요.”
힘이 들어간 루시안의 손마디가 하얘졌다.
그는 아리엘이 죽은 모습을 본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아마 자신은 그 자리에서 미쳐버렸을 것이다.
이게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할 이성도 잃은 채.
“그리고 그게 통하지 않자…….”
어느새 아리엘은 잘게 떨고 있었다.
살짝 웅크린 어깨가 한없이 작고 연약해서 아연했다.
무얼 떠올렸는지 아리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지치고 아팠어요. 별거 아니었어요.”
루시안은 이를 악물고 아리엘과 눈을 맞췄다.
“별일이 아니라니. 그놈이 직접 널 고문했다고 말했는데.”
아리엘은 눈을 꾹 감았다.
타락이 자신에게 가했던 고통을 상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건 마치 지우기 힘든 흉터 같은 것이었다.
“정말, 별거…… 아니었…….”
간신히 말하는 그녀를 루시안이 말없이 와락 당겨 안았다.
마티어스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엘을 감싸 안았다.
그들의 포옹에서 여러 가지 감정들이 흘러들어왔다.
괴로움, 미안함, 슬픔, 분노, 위로…….
두 남자는 아리엘의 호흡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세 가족은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온기에 기댄 채 안고 있었다.
* * *
아리엘이 진정하고 난 뒤, 그녀는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을 털어놓았다.
“예전에 루시안에게 타락을 죽이는 방법을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때 루시안은 타락을 죽일 수 있는 시기가 있다고 했다.
그게 지금은 아니라고도 했었다.
이제 아리엘은 진심으로 그때를 알고 싶어졌다.
“타락을 죽일 수 있는 시기가 언제인지 궁금해요.”
왜 그가 자신이 살아야 저도 산다고 말했는지도요.
아리엘이 묻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약속이나 한 듯 둘 다 침묵에 빠졌다.
“…….”
잠시 후 마티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리엘라, 네게 해 줘야 할 이야기가 있구나.”
그러자 루시안이 위협적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안 돼.”
마티어스가 가만히 루시안을 응시했다.
루시안이 싸늘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 얘길 들으면 얘가 어쩔지 몰라서 이래?”
“언제까지나 숨길 수도 없는 일이다.”
“안 된다고 했어.”
아리엘은 루시안의 옷자락을 당기며 가냘프게 불렀다.
“루시안…….”
그녀가 당기고 있는 제 옷자락을 내려다본 루시안이 낮게 신음했다.
“……안 돼. 아리엘라. 이건 날 위한 일이야.”
루시안을 위한 일이라는 말에 아리엘은 움찔했지만 라카트옐을 위해선 물러설 수 없었다.
“루시안, 제발요…….”
이제는 더 이상 숨길 때가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많은 것을 겪었고 알아버렸다.
그리고…… 숨기기만 하기엔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루시안이 크고 단단한 손을 뻗어 그녀의 양쪽 귀를 덮었다.
세게 막지 않았기에 소리가 모두 새어 들어왔다.
루시안이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가능하다면 네게 아무것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안전한 곳에 깊이 가둬두고만 싶었다.
아리엘은 루시안과 눈을 맞추고 있다가 그의 손에 제 손을 살며시 겹쳤다.
“나, 루시안이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아요. 힘도 세고, 마법도 잘하고, 음, 또…… 겁도 없어요.”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내 병아리가 힘이 세고 용감하다고? 언제부터?
하지만 나오는 건 웃음 대신 딱딱하게 굳어버린 표정이었다.
“날 너무 시험하진 마, 아리엘.”
아리엘은 작은 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나도 지키고 싶어요.”
그러자 루시안이 거친 기세로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넌 분명 네가 아니라 다른 걸 지키려 할 테니까.”
“…….”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마티어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리엘. 가능하다면 나도 네게 알리고 싶지 않구나.”
그의 수려한 얼굴은 깊은 우수에 잠겨있었다.
“하지만 난 이미 네게 약속했다. 네가 원한다면 뭐든 해도 된다고. 그러니 알려줄 수밖에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엘의 손을 루시안이 세게 움켜쥐었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문지른 마티어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타락을 없애는 방법을 알려주마.”
아리엘은 긴장해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오랜 세월 라카트옐만이 공유해온 비밀이 그녀 앞에 열리고 있었다.
“타락에게는 ‘핵’이란 것이 있다. 인간으로 치면 심장, 식물로 치면 뿌리 같은 것이지.”
마티어스가 듣기 좋은 저음으로 설명을 이었다.
“타락을 제거하는 방법은 간단해. 그 ‘핵’을 부수면 죽일 수 있지.”
아리엘은 그 원리를 이해했다.
사람의 심장을 칼로 찌르거나, 꽃의 뿌리를 꺾으면 죽듯이 타락도 핵을 파괴당하면 죽는 것이다.
“그 핵은 어떻게 부술 수 있나요?”
그녀가 묻자 마티어스가 손을 뻗어 아리엘의 머리칼을 자상히 넘겨주었다.
“타락의 핵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카트옐의 눈에도.”
“그럼……?”
그때, 마티어스를 외면하고 있던 루시안이 대신 입을 열었다.
“라카트옐인 나나 마티어스는 타락을 만나도 죽일 수 없다는 뜻이야. 힘을 일부 잃게 할 순 있지만, 제거할 순 없지.”
“아…….”
아리엘은 그제야 타락이 왜 그렇게 자신만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땅에 라카트옐을 쓰러뜨릴 수 있는 존재가 없듯, 타락을 죽일 수 있는 것 또한 없었던 것이다.
마티어스가 괴로움을 느끼는 듯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타락을 죽일 수 있는 건…….”
루시안의 짙은 청색 눈동자가 빙하처럼 서늘한 빛을 냈다.
그의 붉은 입술이 마티어스보다 앞서 말을 꺼냈다.
“타락의 핵을 볼 수 있고, 깨뜨릴 수 있는 건 [라키엘] 뿐이야.
두 눈과 심장을 흡수해 완전해진 드래곤.”
즉…….
루시안은 칼날이라도 삼킨 듯 고통스런 얼굴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쿵, 쿵, 쿵.
아리엘은 제 머릿속에서 맥박 뛰는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그녀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아.’
그녀의 입술이 홀린 듯 제멋대로 움직였다.
“제가 죽어야만. 타락을 죽일 수 있는 거군요.”
* * *
미약한 기쁨이 아리엘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타락, 네가 틀렸어.’
타락이 했던 말은 결국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타락은 루시안이 살면 자신과 아리엘이 죽고, 루시안이 죽으면 자신과 아리엘이 산다고 말했었다.
‘사실은 아니었던 거야.’
그녀와 타락은 한 배를 탄 운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리엘이 죽음으로써 타락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타락과 라카트옐, 그리고 크림슨 하트 사이의 관련이 모두 드러났다.
가려진 진실이 드러나자 한층 눈앞이 맑아진 듯했다.
루시안이 천천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네게 타락을 죽일 수 있는 시기가 있다고 한 건, 널 염두에 둔 것이었지.”
“제가 성년이 되는 때를요?”
그녀가 묻자 루시안이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냐! 나는 네가 성년이 될 때 죽게 된다는 걸 알지 못했어. 난…… 그러니까…….”
그가 성마르게 제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루시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네 수명만큼 기다릴 생각이었어.”
네……?
그가 고해성사라도 하듯 말했다.
“널 사랑해서 죽일 수 없게 됐으니까. 네가 살아있는 날 동안 지켜주고, 시간이 지나 순리에 따라 네가 숨을 거두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일 텐데도 상상하기조차 싫다는 듯 그가 치를 떨었다.
“심장을 얻은 뒤 타락을 베고, 나도 죽을 작정이었지.”
하지만 그 계획은 아리엘이 17세가 되는 생일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
루시안의 고백을 들은 아리엘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루시안이 그녀와 오래 함께 있길 원했다는 것이 날 것 그대로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세 가족 사이에는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한참 만에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아리엘이었다.
“저도 두 분께 말씀드릴 게 있어요.”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아리엘은 떨리는 제 손끝을 꼭 붙들었다.
엄청나게 겁이 나지만, 그럼에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사실…… 저는, 그러니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믿기 어려우실 거예요…….”
그러자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했다.
“뭐든 괜찮다. 아리엘라.”
그 말을 듣자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용기를 쥐어짜낸 아리엘은 눈을 꼭 감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는 한 번의 삶을 살고 죽었었어요.”
그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삶에서 겪었던 것들을.
후작가에서 학대를 받았던 일, 맞아서 불구가 되었던 다리, 타락의 무리에 팔아 넘겨졌던 것, 조종당하며 끌려다녔던 나날…….
“그렇게 열일곱 살 생일이 가까워 왔어요.”
하지만 제가 죽고 심장이 루시안에게 되돌아가기 전에…….
“타락이 절 죽였어요. 제 심장에 ‘운디르의 저주’라는 것을 박아 넣어놨기에 가능했죠.”
아직도 심장이 조각조각 터져버리던 감각이 생생했다.
아리엘은 오한으로 어깨를 떨었다.
“왜 시간이 되돌아온 건지…… 전 몰라요.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그때,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아리엘라.”
아리엘은 그제야 자신이 두 사람과 전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믿어주시지 않으면 어떡하지……?
믿어주더라도, 기분 나빠 하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린 마티어스가 아리엘과 시선을 맞췄다.
“우린 너를 믿는다. 당연히 네 말을 믿어.”
아리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
“지금껏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지만, 넌 세상에 최초로 나타난 크림슨 하트가 아니냐.”
라카트옐이 못 들어본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그렇게 말한 마티어스가 무뚝뚝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티어스님…….”
“오히려 네 회귀 덕에 널 만날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겠구나.”
갑작스레 눈물이 차올라서 아리엘은 당황스러워졌다.
“저, 저는…… 두 분이 실망하실 줄 알았어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고 이 집에…….”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가 네게 실망할 일은 없다.”
그가 아리엘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엄지로 쓸어주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라카트옐이야. 네가 우리를 죽이더라도 우린 너를 계속 사랑할 거다. 절대로 널 미워하거나 거부할 수 없어. 운명이라면 이게 운명이겠지.”
마티어스가 미처 닦지 못한 눈물이 아리엘의 뺨을 주륵 타고 흘렀다.
“저는…….”
그녀는 말을 맺지 못하고 눈을 꽉 감았다.
내가 듣고 있는 게 정말일까?
정말로 회귀했다는 걸 고백했는데도 받아들여 주시는 걸까?
마티어스가 아리엘이 깨지기 쉬운 유리라도 되는 듯 조심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리엘. 넌 좀 더 제멋대로 구는 아이가 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잠깐 시선을 맞췄다.
듣는 내내 분노를 억누르는 기색이던 루시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실리온 후작의 다리를 진작 썰어놓지 않은 것이 유감이군.”
“동감이다.”
너무나 라카트옐다운 두 남자의 대화에 아리엘은 그만 긴장을 풀고 소리 내 울면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두 남자는 아리엘이 자기들 대화 때문에 더 운다고 생각했는지 쩔쩔매며 아리엘을 달랬다.
“울지 마. 그런 말은 네가 있는 데서 하지 않을 테니.”
“그래. 네가 모르는 사이에 다 끝나 있을 거다.”
안할 거라고는 안 하시네요, 둘 다…….
아리엘은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마티어스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 * *
식사를 마친 라카트옐 가족은 퍽 쌀쌀해진 대공가 정원을 함께 걸으며 저녁 산책을 했다.
천천히 걷는 마티어스와 루시안 사이로 종종걸음을 치던 아리엘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타락은 이제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러자 루시안이 아리엘의 어깨를 감싸 제 재킷 안에 끌어들이며 대답했다.
“그놈은 자신이 소멸당하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발악할 거야. 네 심장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겠지.”
마티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타락은 마수를 부릴 수 있으니 마수 떼를 이끌고 공격해올 거다.”
아리엘은 조그맣게 삐약거리며 나섰다.
“마법사 무리도 있어요. 과거에 제가 속해있었던…….”
그녀는 걱정이 된 나머지 열심히 설명을 덧붙였다.
“한 명 한 명은 강하지 않지만, 모두 연합하면 전력이 막강해요. 과거엔 대공가 결계를 찢을 정도였으니까.”
또, 드래곤의 한쪽 눈도 여전히 가지고 있고…….
아리엘이 불안해하는 걸 느낀 마티어스가 나직이 웃었다.
“너는 네 걱정만 하면 된다, 아리엘.”
그러던 마티어스의 안색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하지.”
“그게 뭔가요, 마티어스님?”
마티어스가 조각같은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운디르의 저주’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네 심장에 넣을 수 있었다면 보통 물건은 아닐 테지.”
루시안의 목소리도 덩달아 낮고 심각해졌다.
“너는 인간이지만, 심장만은 크림슨 하트. 드래곤의 것이야.”
“그걸 건드릴 수 있는 물건이라면…… 큰 위협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아리엘은 작은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저도 적을 상대할 수 있어요. 이제 과거의 저와는 다른걸요.”
과거에도 소드 마스터가 포함된 라카트옐의 기사들을 몰살시켰던 자신이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공격 마법을 쓰지 않지만, 기량은 그때보다 더욱 뛰어났다.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끝까지 버텨서…… 제게 허락된 시간이 끝나면, 루시안에게 심장이 되돌아올 거고, 그러면…….”
아리엘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타락에게서 눈을 되찾고 그를 제거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시안이 홱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그의 눈동자는 분노인지 애원인지 모를 것으로 강렬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착각하고 있군. 난 네가 죽게 내버려 둘 생각 없어.”
아리엘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하자 루시안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 위에 서늘하게 얹혔다.
“네가 없으면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 나도 죽을 거야.”
‘하지만…….’
아리엘은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내가 살려면 루시안이 죽는 길밖에 없는걸요…….
그것만은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싫어요…… 루시안이 죽은 뒤에 저 혼자 남으면 저도 못 살아요.”
“너 정말-”
루시안이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리엘이 그의 말을 막았다.
“심장이 돌아오면. 루시안도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녀는 루시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사랑하는 것이 생길 때까지 살아주세요. 마티어스님과 오래오래 함께요. 네?”
루시안이 떨리는 손으로 아리엘의 뺨을 감싸 쥐었다.
“안 돼. 그 소원은 못 들어줘. 네가 없으면 내게 살아갈 의미 같은 건 없으니까.”
그가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여오면서 나직이 말했다.
“그렇게 두지 않을 거지만, 만약에. 만약 네가 먼저 죽으면…… 난 곧장 따라갈 거야. 그러니까 멀리 가지 마.”
이대로라면 영원히 논의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완고한 루시안의 태도에 아리엘은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럼, 다른 소원은 들어주나요?”
그가 녹일 듯이 강렬하게 그녀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네가 죽는 것만 아니면 뭐든.”
아리엘은 마티어스와 루시안을 번갈아 바라보며 삐약삐약 졸랐다.
“앞으로 매일 같이 밥 먹어요, 우리. 저녁 산책도 같이하고요. 또…… 가족 초상화도 만들고 싶어요.”
그녀의 소원을 들은 루시안이 매혹적으로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네가 바라는 건 다 할 거야.”
아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팔짱을 꼈다.
마치 둘을 연결하는 고리처럼.
그녀는 남은 시간 동안 마티어스와 루시안 사이가 진짜 가족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야 자신이 없더라도 두 라카트옐이 서로를 의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가 없어도, 서로가 죽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되어줄 테니까.
* * *
라카트옐 가족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불려온 사람은 아리엘의 초상화를 작업했던 화가였다.
수십 장의 초상화를 그린 뒤 은퇴를 선언하려 했던 그는 몇 년간 아리엘의 후원을 받아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었다.
“이번에는 한 장이면 된다. 딱 한 장.”
마티어스가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차가운 눈빛으로 명령했다.
그러자 루시안이 곧장 섬뜩하게 덧붙여 말했다.
“한 장이되 대신 완벽해야 하겠지.”
한 장만 그린다는 말에 안심하려 했던 화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한 번의 기회밖에 안 준다는 말이구나!’
그리고 무시무시한 라카트옐을 단번에 만족시키지 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끔찍한 상상을 해버린 화가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편, 아리엘은 가족 초상화를 그릴 생각에 잠도 못 이루고 설레했다.
초상화에라도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오래 슬퍼하길 바라진 않지만, 가끔 슬플 때면 위로가 되어주기를.
그래서 사실은…… 잊지 말아주기를.
‘그리고 이 추억이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들어 줄지도 몰라.’
아리엘은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과거를 회상했다.
회귀하기 전 과거에서는 이맘때쯤 마티어스는 존재하지조차 않았다.
젊은 나이에 대공위에 오른 루시안 홀로 건조하고 잔인한 눈빛을 하고 있을 뿐.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졌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와 현재의 두 남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서로를 불편해하는 건 여전하지만, 아리엘이 들어오던 무렵만큼 서로 날을 세우진 않는 듯했다.
말 한마디 섞기 싫어하던 예전과 달리 아리엘에 대해서만큼은 의견이 일치할 때도 자주 있었다.
‘이대로라면 가족이 깨지지 않을지도 몰라.’
아리엘은 두 남자가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화가가 생각에 잠겨있는 아리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대공자비님, 초상화 포즈는 어떻게 할까요?”
포즈요?
아리엘은 눈을 깜박이며 고민하다가 방긋 웃었다.
그녀의 앳된 목소리가 소근소근 대답했다.
“최대한 다정하게.”
* * *
화가는 아리엘과 상의한 포즈를 스케치해서 가지고 왔다.
집사 알렌은 초상화의 배경이 될 벽에 자줏빛 공단 천으로 우아한 커튼을 치고, 아리엘이 앉을 의자를 준비했다.
“알렌. 내 집무실에서 태피스트리를 가져와라.”
마티어스는 특별히 아리엘에게 선물 받은 태피스트리를 초상화의 배경 벽에 걸었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각각 제복을 차려입었고 마티어스는 긴 망토를, 루시안은 한쪽 어깨에만 걸치는 반망토를 걸쳤다.
2미터 가까이 되는 훤칠한 키를 가진 두 남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젊은 신들의 모습 같았다.
‘와…… 두 사람 정말 멋있다.’
아리엘은 준비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볼을 붉혔다.
아리엘도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레이스가 많고 디테일이 가득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나오자 화가가 가족 초상화의 포즈 스케치를 보여주었다.
아리엘이 의자에 앉고, 두 남자가 의자 뒤에 나란히 ‘붙어’ 선 자세였다.
“이대로 자세를 잡으시면 그리겠습니다.”
스케치를 본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마뜩잖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아리엘을 중심으로 양옆에 떨어져 서면 되지 않나. 왜 붙어있는 거지?”
비지땀을 흘리던 화가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대공자비님께서 원하신 포즈라…….”
그러자 두 라카트옐의 입이 동시에 닫혔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침묵하며 조용히 안주인의 뜻에 복종했다.
하지만 스케치대로 어깨가 닿을 만큼 서로에게 가까이 서기는 싫었는지 어색하게 떨어져 섰다.
‘정말, 이럴 줄 알았어.’
그들의 반응을 예상했던 아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뽀르르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말했다.
“조금 더 붙어 서셔야죠.”
루시안이 작게 볼멘소리를 했다.
“충분히 가까운데.”
“어서요, 루시안, 마티어스님. 네?”
그녀가 팔을 살며시 끌어당기며 채근하자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마지못해 뻣뻣하게 붙어섰다.
아리엘은 그런 그들이 귀여웠지만 조금 더 밀어붙였다.
“어깨에 힘 빼고, 자연스럽게요.”
그녀는 도통 나아지지 않는 두 남자의 투샷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둘을 자연스럽게 가까이 서도록 만들었다.
맹수 같은 두 남자는 아리엘의 손길에 무방비하게 제 몸을 맡겼다.
‘이 정도면 됐겠지?’
남자들 포즈를 정돈하고 나서 아리엘은 자신도 의자에 앉아서 자세를 취했다.
한 손은 다소곳이 무릎에 얹고, 한 손은 나붓하게 팔걸이에 얹었다.
이제 정면을 보려는 순간…….
‘……!’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동시에 루시안이 의자 팔걸이에 올려져 있는 아리엘의 손을 끌어당겨 느긋하게 그녀의 손끝을 쥐었다.
서로에게 할 때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아리엘은 수줍어서 눈을 내리깔았다.
뺨이 발갛게 상기됐다.
‘정말…… 진짜 가족끼리 초상화 그리는 것 같아.’
어깨에는 든든한 마티어스의 손이 있고, 한쪽 손은 루시안에게 잡혀 있으니 마음이 몽글몽글하게 차올랐다.
화가가 긴장된 표정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잠시 후.
초상화 밑작업이 끝나갈쯤, 마티어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아리엘라. 이 뒤의 태피스트리 기억나느냐? 네가 내게 선물한 것인데.”
그리고 마티어스가 은근히 흡족한 기색으로 덧붙였다.
“네가 내 이름을 직접 자수로 놓았지.”
아리엘은 작게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어떻게 잊겠어요. 전 아직도 마지막 글자 모양을 고치고 싶은걸요.”
화기애애한 마티어스와 아리엘을 번갈아 보던 루시안이 퉁명스레 끼어들었다.
“자수라면 나도 있어. 그것도 처음 놓은 자수. 손수건에…….”
“아, 안 돼요!”
아리엘은 포즈를 취하는 것도 잊고 서둘러 루시안의 말을 막았다.
열 살 때 엉망인 자수 솜씨로 루시안의 이름을 수놓았던 걸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루시안이 과시하는 듯이 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것 말고도 직접 만든 선물이 많지.”
마티어스가 슬쩍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네 녀석이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내가 모은 것들만큼은 못할 거다.”
“망할 핑크색 종이배는 나도 있어.”
루시안의 대꾸에 마티어스가 여유롭게 받아쳤다.
“아리엘이 이 집에 와서 그린 그림 한 장도 못 가진 것이.”
“그러는 당신은 아리엘이 직접 뜬 핸드 워머도 없지.”
어…… 이, 이러다 두 사람 싸우는 거 아니죠?
아리엘은 당황해서 눈만 도르르 굴렸다.
내 의도랑 완전히 다른데?
분위기기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화가가 노련하게 쉬는 시간을 선포했다.
“잠시 쉬고 다시 하시지요.”
화가가 퇴장하자 수잔이 얼른 다가와 간식을 챙겨주고, 아리엘의 머리도 매만져 주었다.
“한입에 먹기 좋은 미니 마카롱이에요, 아기 마님.”
수잔이 색색의 쫀득하고 달콤한 마카롱을 반씩 쪼개어 아리엘의 입에 쏙쏙 넣어주었다.
그 와중에도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계속 투닥거리는 중이었다.
“난 아리엘이 기사들에게 나눠준 초콜릿도 가지고 있다.”
“나야말로 단장 놈들이 받은 손수건을 빼앗았지.”
결국, 둘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는지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성마르게 물었다.
“아리엘, 넌 누구 거지? 나? 마티어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묻는 루시안 뒤에서 은근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마티어스였다.
“아리엘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법적 딸이지.”
제국법상 아들과 결혼한 여자는 법적인 딸로 인정받았다.
루시안은 법으로 응수한 마티어스에 수려한 미간을 구겼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아리엘은 눈을 도르르 굴렸다.
마티어스님까지 왜 이러신담.
“나는 남편이니 네 것이야. 아리엘, 너도 당연히 그렇지?”
루시안의 유혹적인 푸른 눈이 느른하게 응시하며 그녀의 대답을 강요했다.
으으, 라카트옐 남자들 유치해!
아리엘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두 라카트옐은 아리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좋지?
그런 아리엘의 시선에 여전히 그녀에게 먹일 것을 준비하고 있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아리엘은 얼른 수잔의 허리를 폭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수잔. 전 수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수잔이 활짝 웃었다.
“어머나.”
그리고 수잔은 아리엘의 뺨에 마구 뽀뽀를 퍼부으며 애정을 표현했다.
“저도 아기 마님 거예요.”
“…….”
“…….”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왠지 패배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노려보았다.
“……하녀장을 제거해야 하나.”
루시안이 낮고 위협적으로 중얼거리자 마티어스가 침잠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린애에겐 저런 것도 필요한 법이지.”
묘하게 정신 승리 같은 말이었다.
* * *
그렇게 가족끼리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마수의 습격에 대비해 기사들을 훈련시키며 전투를 준비했다.
황실에서는 비밀리에 황실 마법사들을 지원했고, 대마법사 브루노어도 오랜만에 전장에 나갈 채비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제국에는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다.
“이거 저리로 가져가!”
“저 위에 걸려있는 걸 치우고 이걸 대신 걸어.”
연말이 되자 대공가 저택은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에드벨 절기 분위기를 냈다.
아리엘은 수잔, 하녀들과 함께 저택을 꾸미고 계란 장식도 직접 했다.
반면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에드벨 절기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해가 넘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올 아리엘의 생일 파티였다.
“여태까지의 생일 파티를 모두 합친 것보다 성대하게 준비해라.”
저택은 두 개의 파티를 준비하느라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두 사람도 참…….’
심지어 두 사람은 아리엘에게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냐고까지 물었다.
아리엘은 생일 파티가 이뤄지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애써 그들이 준비하는 것을 모른 척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티어스가 북부 영지의 결계를 확인하러 자리를 비운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아리엘은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앉아서 열심히 장식용 달걀을 색칠했다.
하지만 곧이어 루시안의 방해가 시작됐다.
“네가 딴 거 보는 거 싫은데.”
유혹하듯 말한 그가 아리엘의 손에서 슬쩍 붓을 빼앗았다.
“달걀 따위 말고 나 좀 봐.”
아리엘은 붓을 돌려받기 위해 얼른 손을 뻗었다.
“이것까지만 하고요…….”
다른 건 아니어도 마티어스와 루시안 방에 장식할 달걀만은 직접 칠하고 싶었다.
에드벨 달걀에는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루시안은 무슨 생각인지 아리엘에게 붓을 돌려주고 대신 붓을 쥔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런 거 말고 차라리 나를 칠해.”
“네?”
아리엘이 되묻는 순간, 그가 말릴 틈도 없이 아리엘의 손을 끌어다 제 얼굴에 푸른 물감을 확 묻혔다.
“앗, 루시안!”
그가 지독히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달걀 따위를 질투하게 만들진 말아야지.”
마주친 그의 눈빛엔 인내심이 바닥난 것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었다.
“네가 저걸 쳐다보고 있을 때 다 부숴버릴 뻔했잖아.”
“하지만…….”
아리엘은 미련이 남은 눈으로 달걀 바구니를 힐끔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자연스레 손을 까딱여 바구니를 저만치로 치워버렸다.
“자.”
그가 가벼운 동작만으로 아리엘을 테이블 위에 앉히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빨리 아까 달걀을 봤던 것처럼 날 봐줘. 뚫어질 것처럼 빤히.”
아리엘은 새빨개진 채 웅얼거렸다.
“그건 색칠하려고 그런 거잖아요…….”
“아니면- 달걀을 만졌던 것처럼 날 만져주든지.”
그것도 칠하려고 만진 건데……!
아리엘은 잔뜩 억울해졌지만, 할 수 없이 붓을 내려놓고 루시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사람의 주의를 너무나 쉽게 끌어당기는 미색이었다.
얼굴에 엉망으로 물감이 찍혔는데도, 루시안의 얼굴과 더해지니 어느 예술가가 의도적으로 얼룩을 그려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찬란한 그의 미색을 보고 있으면 눈이 달다 못해 녹을 것 같았다.
“……루시안은 참 예뻐요.”
그녀가 홀린 듯 말하자 그가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사파이어 같은 두 눈동자에서 사람의 뼈를 녹일 듯 강렬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제 좀 마음에 드는데.”
그 모습을 본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렸다.
아리엘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루시안은 왜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루시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누르며 감싸 쥐었다.
그의 눈에서 단 것이 뚝뚝 떨어졌다.
“널 유혹하기 위해서지.”
그와 몸이 닿자 공기의 밀도가 달라진 것처럼 편안히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긴장으로 바르르 떨면서도, 아리엘은 또 다른 질문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루시안은 왜 그렇게 힘이 센가요?”
그가 그녀의 손을 덮은 제 손가락을 아리엘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얽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네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붙들어 두기 위해서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루시안은 왜 그렇게…….”
말을 다 맺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그의 이마가 그녀의 이마에 닿아있었다.
아리엘의 코끝에 그의 코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
아리엘은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숨을 멈췄다.
이, 이건 너무 자극이 심하잖아…….
그녀의 질문을 다 듣지도 못했음에도 루시안이 대답했다.
“널 한입에 집어삼키려고.”
탁한 목소리로 말한 그가 아리엘의 입술을 베어 물듯 탐했다.
아리엘은 눈을 감으며 서툴게 루시안의 소매를 꽉 잡았다.
입술 사이로 몇 번이나 숨을 빼앗아간 그가 한참 만에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하…….”
루시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잠시 여운을 느끼는 듯하던 그가 고개의 각도를 틀어 어긋나게 하고는 아리엘의 귀 뒤편에 살짝 입을 맞췄다.
‘흣.’
낯선 감각에 아리엘이 움찔하자 루시안은 작은 귀의 선을 따라 몇 번 더 입술을 댔다.
하얗고 말랑한 귓불은 설탕으로 빚은 듯 연약해 보여서,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았다.
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내린 루시안은 아리엘의 하얀 목덜미에 지그시 콧날을 비볐다.
“제일 아름다운 건 너야.”
그렇게 말하곤 그는 몸을 물렸다.
아리엘은 얼이 빠진 채 어질어질해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넋이 쏙 빠지고 혼미한 느낌이었다.
‘와, 역시 루시안 너무 유해해…….’
루시안이 그녀를 테이블 아래로 내려주며 물었다.
“생일 때 받고 싶은 선물은. 생각해 봤어?”
아리엘은 겨우 어지러움을 이겨내고 고개를 저었다.
생일 선물이라니.
혹시 자신이 선물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덩그러니 남겨진 선물만 루시안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것 같았다.
‘원하는 게 생겨버리면, 나도 전투에 집중할 수 없을지 모르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루시안이 슬퍼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머뭇대며 솔직하게 대답하자 루시안이 부추기려는 듯 낮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놔. 마티어스한테도 선물을 요구해야 하잖아.”
그가 악랄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아주 구하기 힘든 거라도 난 상관없어.”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문득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났다.
‘맞아!’
이때까지 루시안과 마티어스의 전적을 떠올려봤을 때, 그냥 놔뒀다간 엄청 비싼 걸 준비할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
아리엘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 그럼 직접 만든 선물……!”
루시안의 눈이 조금 커졌다.
“뭐?”
아리엘은 필사적으로 삐약삐약 말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이 ‘직접’ 만든 선물이 갖고 싶어요.”
그리고 그녀는 살금 눈치를 살폈다.
‘직접 만들어 달라고 하면 비싼 건 못 준비하겠지?’
루시안은 빤히 들여다보이는 아리엘의 수를 읽고 픽 웃었다.
그는 붉은 입술을 비틀며 오만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러지.”
아, 됐다…….
아리엘은 조그만 어깨를 늘어뜨리며 소리없이 안도했다.
* * *
라카트옐 가족은 마지막 전투를 대비해, 수도를 떠나 북부의 라카트옐 영지로 향했다.
수도에 마수가 출몰하는 등 혼란에 빠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떠나기 전 아리엘은 친구들, 황실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녀는 수도로 출발하기 직전에 수잔에게 편지 뭉치를 맡겼다.
마지막까지 빼놓은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며 배웅하던 수잔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뭔가요, 아기 마님?”
아리엘은 수잔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편지예요. 저도 여기 온지 이제 곧 7년이 되잖아요. 하고 싶은 말들이 있어서 편지를 썼어요.”
“왜 이렇게 많이…….”
수잔이 뭔가 불안함을 느꼈는지 두툼한 편지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아리엘은 수잔의 허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제 생일 전날이 되면 겉봉에 쓰여 있는 사람들과 같이 읽어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출발 전에 수잔에게 뽀뽀를 졸랐다.
“이제 뽀뽀 열 번 해주면 갈게요.”
“아리엘님한테라면 백 번이라도 해드리지요.”
그동안 마차 앞에 서 있던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서로 할 말이 있는 듯 마주보았다.
무거운 공기가 내리누르는 가운데 루시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리엘을 살릴 방법은 이제 그것 하나뿐이야.”
마티어스가 가라앉은 눈으로 루시안을 응시했다.
“불확실한 가설일 뿐이다. 위험부담도 너무 커.”
“시도해볼 가치는 있지.”
긴 침묵이 지나간 뒤, 마티어스가 말했다.
“……그걸 찾으면. 한 가지만 기억해라.”
이어진 마티어스의 말을 들은 루시안의 눈 속에 잠시 고통이 스쳐지나갔다.
그들의 대화는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갈게요.”
수잔이 정말 열 번 쪽쪽 입맞춤을 해준 뒤에야 아리엘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자, 아리엘은 시야에 들어오는 대공가 사람들 모두에게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다들…… 안녕.”
부디 자신이 남긴 편지가 남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 * *
북부 라카트옐 영지에 도착해서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마수들을 꿰뚫을 대형 쇠뇌를 곳곳에 설치했고, 함정과 덫도 만들었다.
브루노어는 아리엘이 미리 알려준 상대편 마법사들의 정보를 토대로 마법진을 짰다.
그러던 와중, 황제가 디트리히 편에 황실 마법사들을 지원해주었다.
“아리엘라. 황실은 그대를 위해 싸울 겁니다.”
흰 전투복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은 브루노어의 지휘에 따라 싸움을 준비했다.
브루노어는 푸른 사자 기사단의 세 단장들과 작전을 논의했다.
“푸른 사자 기사단이 일반 마수를 처리하는 동안-”
브루노어가 마나로 허공에 작전을 그려서 보여주었다.
“마법사들은 두 팀으로 나눠서 움직일 겁니다.”
그는 붉은 술을 단 마법사들과 푸른 술을 단 마법사들을 나누었다.
한쪽은 공격 특화 마법사들, 한쪽은 방어 특화 마법사들이었다.
“공격형 마법사들은 전투를 하고, 방어형 마법사들은 푸른 사자 기사단을 엄호할 겁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은 모두 집중해서 훈련에 매진했다.
폭풍 전의 고요함이 영지를 가득 맴돌았다.
시간이 흘러 마지막으로 영지로 들어오는 거대한 철문 게이트를 봉쇄하기 직전, 갈색 말을 탄 남자 하나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다.
말에서 내려 회색 로브를 벗은 남자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히스.”
아리엘을 발견한 히스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딱딱하게 굳힌 그의 얼굴은 감정의 파도를 감추려는 듯 힘겨워 보였다.
“싸우러 왔어. 널 위해 싸우게 해줘.”
아리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지만, 브루노어가 히스를 데려가 전투 마법사 중에 넣어주었다.
그것으로 모든 전투 준비가 마쳐졌다.
* * *
한편, 편지를 맡아두었던 수잔은 아리엘 생일 전날이 되자 봉인을 뜯고 안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을 읽었다.
“다이아나, 세실, 카디나, 태후 마마, 수잔.”
수잔은 편지를 들고 황궁으로 향했고, 아리엘이 편지를 남기고 갔다는 소식에 모두가 모여들었다.
모여앉은 여자들은 아리엘이 남긴 두툼한 편지 봉투를 보게 되었다.
그중 몇 명은 짚이는 것이 있는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상석에 앉은 태후가 편지를 집어 들어 수잔에게 건넸다.
“하녀장이 읽어주게.”
이미 편지의 내용을 읽은 수잔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편지의 겉봉을 열고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들었다.
“아리엘님은…… 지금 전투에 나가셨어요.”
그 말을 시작으로 수잔은 아리엘의 편지 서두를 읽어주었다.
아리엘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라카트옐을 노리는 세력이 있고, 그들이 노리는 게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
아주 위험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싸우는 도중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의연한 어조로 쓰여있었다.
“……맙소사.”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수잔이 계속해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듣는 사람들에게는 아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모두들 다시 보고 가고 싶었지만,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글로 남겨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먼저 다이아나와 세실.
두 사람은 내게 언니였고, 동생이었고, 친구였어.
무슨 단어로 설명해도 그 이상의 의미였지.
다이아나,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나 꼭 다이아나 딸로 태어날게. 그래서 마음껏 예쁨받을게.
그리고 세실, 다음에 태어나면 나 꼭 세실의 엄마가 될게. 그래서 원없이 응원해주고, 검도 사주고 다 해줄 거야.
두 사람은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었어. 사랑해.
그리고 카디나.
우리가 서로 믿고 신뢰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
하지만 신뢰가 전부라고 하기엔 너무나 네 웃음소리가 그리울 것 같아.
네게 주고 싶은 것이 있어.
아딘 가문의 추적에서 벗어나 동생과 함께 당당히 살 수 있는 파문권이야.
꽤 힘들게 구한 거니까 꼭 써줬으면 해. 돌아가면 나잇워커에 도착해 있을 거야.
진심으로 네 행복을 바라. 너는 신분과 상관없이 내 친구였어.
사랑하는 수잔.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지만…… 내게 수잔이란, 다정함의 다른 말이에요. 포근함의 동의어예요.
내가 아는 따스함은 다 수잔이고, 내가 배운 사랑도 전부 수잔이죠.
내 마음속엔 이제 수많은 방이 생겼지만 그 모든 방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여전히 수잔이에요.
수잔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예요.
정말로 많이 사랑해요, 수잔.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남은 저택 사람들에게 전하는 편지는 수잔에게 맡길게요.
제 방 서랍 안에 넣어두었어요. 혹시 그들이 힘겨워하거든 전해주세요.
수잔이 만들어주는 웨딩드레스 꼭 입고 싶었는데…… 약속 못 지켜서 정말 미안해요.
마지막으로, 할마마마.
부디 슬퍼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손녀이자, 우리 엄마의 딸로서 죽을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엄마한테 간다면 할마마마가 많이 사랑해주셨다고 얘기할게요. 세상에서 제일 귀하게 여겨주셨다고요.
제가 할마마마 곁으로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시겠지만, 만약 죽어서 묻힌다면…… 라카트옐의 묘지에 묻히고 싶어요. 사랑해요, 할머니.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여기 있는 당신들을 만나서, 제 삶은 훨씬 나은 것이 됐어요.
눈 감는 순간까지 받은 사랑 잊지 않을게요.
- 아리엘라 라카트옐.]
편지가 끝난 뒤 모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리엘의 편지는 오랜 시간 준비한 듯한 느낌을 풍겼다.
그래서 모두들 알 수 있었다.
이 편지가 아리엘의 유언이었다는 것을.
* * *
마침내 그 시간이 찾아왔다.
무채색한 풍경에 안개가 자욱이 깔린 라카트옐 영지에는 기괴한 마수떼와 마법사들, 그리고 타락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마수 떼는 압도적으로 덩치가 컸고 몇몇은 코끼리만한 크기였다.
뻥 뚫린 검은 망토 속의 타락이 끽끽거리며 중얼거렸다.
“오늘만큼은 반드시…….”
크림슨 하트를 기다려온 것은 라카트옐만이 아니었다.
숙적인 라카트옐을 제거하기 위해, 타락 또한 크림슨 하트를 오래 기다렸다.
이제 오늘이 지나면 그 기다림의 결판이 날 것이다.
“파괴해라.”
타락의 명에 따라 수하 마법사들이 검은 마법구를 무차별로 폭격하기 시작했다.
브루노어가 설치해둔 결계 마법진을 깨트리기 위해서였다.
마법진이 공략되는 동안 라카트옐 진영은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콰앙! 콰직-!
키에에! 키아악!
거대한 파괴음과 함께 결계가 무너지자, 마수들이 울부짖으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적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타락의 무리는 마수 떼까지 포함해 우글우글한 반면, 라카트옐 진영은 기사단을 모두 합쳐도 열세였다.
하지만 전장에 루시안이 나타나자 순식간에 전세는 역전되었다.
마치 기선제압을 하려는 듯 루시안이 검기를 실은 검을 휘두르자, 마수 수십 마리가 단번에 썰리며 날아갔다.
검을 휘두르고 우아하게 착지한 루시안과 타락의 눈이 마주쳤다.
타락이 뿌득 이를 갈며 소리쳤다.
“공격해라! 붉은 머리를 찾아라!”
마수의 앞발을 피해 유희하듯 도약한 루시안이 서늘하게 웃었다.
그는 아래에 마티어스와 함께 있는 아리엘의 주위를 흘긋 바라보았다.
아리엘이 불러낸 바람, 물, 불, 흙의 4가지 원소들이 그녀를 지키듯이 둘러싸고 있었다.
“감당할 수 있겠나? 온 세계가 사랑하는 애를 건드리는 거.”
그리고 그는 유려하게 검을 고쳐잡았다.
섬뜩한 미소가 아름다운 얼굴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물론, 온 세계가 두려워하는 남자도 상대하게 될 거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시안은 검기를 실어 거대한 마수의 머리를 단번에 날려버렸다.
비릿한 피 냄새가 대기 중에 퍼져나갔다.
피를 본 푸른 사자 기사단이 크게 뿔피리를 불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히스와 브루노어는 한 팀으로 타락의 마법사들을 상대했다.
기사들은 화려한 검술로 일반 마수들을 해치우며 날뛰었다.
그동안 마티어스와 아리엘은 함께 움직이며 대형 마수를 사냥했다.
“윈터 블롬!”
마티어스 혼자서도 마수를 상대할 수 있었지만, 아리엘의 원소 마법이 동원되면 좀 더 빠르고 수월하게 베어내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마티어스에게 아리엘의 보호를 맡긴 루시안은, ‘그것’을 찾으러 홀로 적진 안에 뛰어들었다.
‘그건 타락의 손에 있겠지.’
그는 전장터를 종횡무진 휘저으며 타락의 그림자가 아닌, 본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 * *
전날 낮에 시작된 전투는 해가 지고 밤이 깊을 때까지 길게 이어졌다.
소드 마스터 세 명과 마티어스의 활약으로 마수 떼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상황은 라카트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보였다.
“계속 밀어내라!”
타락 쪽 마법사들이 물러나며 전열을 가다듬는 사이, 브루노어 또한 황실 마법사들을 한 곳으로 모으며 이끌었다.
후우웅-! 펄럭.
엄청나게 큰 바람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망루에 있던 푸른 사자 기사단원 하나가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용 마수다! 용 마수 떼가 오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한 채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흉측한 날개를 편 용 마수 떼가 몰려오고 있었다.
용 마수는 마티어스와 루시안 외에는 상대할 수 없는 강한 마수였다.
커다란 날개를 접으며 땅에 내려선 용 마수들은 아리엘만을 표적으로 삼은 듯 시뻘건 눈으로 그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판이 뒤집혔다.
“후퇴! 요새 안쪽으로 들어가!”
기사단에게 후퇴를 명한 단장들-네드, 헥터, 랄프-는 검에 검기를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마티어스를 지원하기 위해 나섰다.
소드 마스터가 아닌 사람은 이 싸움에서 살아남기조차 어려울 것이었다.
“주군, 저희가 뒤를 맡겠습니다!”
기사들이 한쪽 방향을 맡자, 마티어스와 아리엘은 등을 맞대고 나머지 방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공격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마티어스의 절제된 검날에 용 마수의 몸이 썰려 나갔다.
“가이아르 체인!”
아리엘이 주문을 외우자 땅에서 바위가 길게 연결된 형상이 솟아나 용 마수를 칭칭 감았다.
그 사이 그녀는 화염 계열 화살로 용 마수의 눈을 공격했다.
눈을 공격당한 용 마수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주위를 무작위로 마구 할퀴기 시작했다.
그 덕에 같은 용 마수들이 여럿 쓰러졌다.
하지만 용 마수가 수도 없이 몰려와서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한편, 소드 마스터 세 명은 힙겹게 드레이크 몇 마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공격을 피하며 용 마수들이 아리엘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했다.
가공할 힘을 가진 드레이크는 뿔이 달린 머리를 휘둘러 주위를 박살냈다.
콰앙! 쾅! 쿠웅!
드레이크가 머리를 내리칠 때마다 땅에 움푹 파인 구덩이가 생겨났다.
저기에 스치기만 해도 가루가 될 것이다.
결국 세 기사는 드레이크 한 마리와 정면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검기를 두른 검 세 개를 모아대고, 드레이크의 뿔을 막았다.
“으윽!”
가장 힘이 좋은 헥터를 중심으로 버티고 있음에도 세 기사의 발은 뒤로 지이이익 밀렸다.
이대로라면…….
뿔로 세 명을 묶어둔 드레이크가 앞발을 휘둘렀다.
때마침 그것을 발견한 아리엘이 비명처럼 외쳤다.
“조심해요!”
그 순간, 물빛의 머리카락이 허공을 가르며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채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명검 알테라스가 드레이크의 앞발을 막았다.
기사들과 아리엘은 막아선 사람을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실?”
자신의 이름을 들은 듯 아리엘 쪽을 돌아본 세실이 씩 웃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내 레이디.”
세 개의 검에 하나가 더해지자 밀리는 쪽은 마수가 되었다.
세실과 함께 힘을 합친 세 소드마스터는 있는 힘껏 드레이크를 밀어냈다.
바로 쇄도하는 공격을 막아내면서, 네드가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기사라면 이런 싸움에 빠질 수 없죠.”
말을 마친 세실은 또다시 큰 동작으로 알테라스를 휘두르며 드레이크의 뿔을 내리쳤다.
그때, 세실의 검을 둘러싸고 희미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루시안은 찾아 헤매던 것을 마침내 찾아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타락의 본체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여태까지 보았던 용 마수 중 가장 거대한 용 마수가 그것을 지키고 있었다.
“……고대 괴물이로군.”
철갑 같은 비늘을 두른 시커먼 용 마수는 머리가 셋에 눈이 수백 개 달린 끔찍한 생김새였다.
여러 눈으로 사방을 볼 수 있고, 움직임도 민첩했다. 거대한 아가리 사이로 뜨거운 입김이 쉭쉭 새어 나왔다.
루시안이 다가가자 괴물은 입안에서 불을 뿜으며 그를 노렸다.
여태까지 단숨에 베어 넘겼던 용 마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가설이 맞기만 한다면.’
자신이 죽지 않고도 아리엘을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복숭아처럼 물든 아리엘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빼앗기지 않을 수만 있다면.
루시안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입술에서 서늘하고 오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앞길을 막은 것의 최후는 죽음뿐이지.”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고대 마수에게 향한 검이 날선 빛을 발했다.
* * *
한편 마티어스와 기사들과 함께 용 마수 떼를 상대하던 아리엘은 타락의 전음을 듣게 되었다.
그녀가 상대하고 있는 마수의 입을 통해서였다.
[제법이구나. 붉은 머리.]
갑자기 들려오는 기괴한 목소리에 아리엘은 몸을 바짝 굳혔다.
제국 사냥 대회 때처럼 마수 안에 스며들어서 조종 중인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 놀라울 정도야.]
마법으로 마수의 공격을 받아내면서, 아리엘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나와 싸우고 싶으면 네 본모습으로 나타나.”
비겁하게 그림자나 안개로만 맴돌지 말고!
그 말을 들은 타락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무래도 그 목소리는 그녀에게만 들리는 듯했다.
[대화를 하기엔 이 모습이 더 적절하거든.]
그렇게 말한 타락이 곧이어 유혹하듯 말했다.
[네가 어떻게 회귀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회귀?
아리엘은 귀를 의심했다.
‘내가 회귀한 사실을…… 타락이 어떻게 알고 있지?’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녀가 이공간에 납치되었을 때, 타락이 보여주었던 환각 속에 회귀에 관련된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아리엘이 충격을 받는 모습을 음미하고 싶었는지 타락이 마수의 공격을 멈추게 했다.
“어떻게…….”
그녀가 중얼거리자 타락이 끼긱거리며 대답했다.
[회귀를 만든 것이 바로 나니까.]
“……!”
[과거의 그 날을 기억하겠지? 네가 대공가에 침입했던 날.
내 의도와 달리 너는 마지막 라카트옐을 죽이긴커녕, 그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널 죽이고 시간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지.]
아리엘은 충격으로 머리 안쪽이 쿵쿵 울리는 것을 느끼며 세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거짓말…… 당신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시간을 돌렸다는 거야.”
[그래, 지금은 당황스럽겠지. 너 말고도 회귀한 자가 있다는 것이.
처음엔 나도 나만이 회귀한 줄 알았다.
하지만 네가 열 살이 되자마자 내 손아귀를 피해 도망쳤을 때 깨달았지.
너 또한 회귀했다는 걸.]
기분이 나빠졌는지 타락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 후에도 너는 번번이 내 계획을 망치며 나에게서 도망갔어.
모니카 공작의 여식을 죽여, 딸의 죽음에 절망한 공작을 끌어들이는 것부터 막혀버렸지.
나잇워커, 클라리스 공주, 녹스 남작, 유니스, 루실리온 후작가.…….]
‘……!’
아리엘은 한 번에 밀려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이느라 숨을 헐떡였다.
회귀 후에 그녀가 크고 작게 바꾼 부분들이 타락과 연관 있는 일이었다니.
타락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쳐있었단 말인가.
[인정한다. 네 덕분에 나도 고생을 좀 했지. 하지만 시간은 내 편이다.]
타락이 조종하고 있던 마수가 쉬익 소리를 내며 다시 날개를 폈다.
[곧 시간이 다하면, 넌 죽게 될 테니까.]
그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타락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타락이 빠져나간 마수는 이전처럼 짐승의 소리를 내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버텨야 해.’
끝까지 버텨서 루시안에게…….
문득 눈을 들어보니 희미하게 새벽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태어난 출생시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성년으로 넘어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수의 공격을 피하며, 아리엘은 애타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끝없이 용 마수 떼가 몰려들고 있었고 마티어스와 기사들은 그것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루시안은 어디 있지……?’
루시안은 전투 초반부터 마티어스, 아리엘과 떨어져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벽이 지날 때까지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리엘의 가슴이 불안감으로 두방망이질 쳤다.
‘루시안, 왜 오지 않는 거예요…….’
이 싸움의 끝이 어떻든 그녀는 루시안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다.
마지막에 보는 얼굴이 루시안의 것이었으면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전투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조차 루시안은 그녀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리엘은 그가 스스로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돼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제 쏟아져 들어오는 마수의 행렬도 거의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이것만 막아내면 루시안을 찾으러 갈 수 있어.
아리엘은 양손으로 거대한 검은색 마법구를 생성한 뒤 전방에 흩뿌렸다.
“엘리멘탈 스플릿!”
검은색의 마법구가 튀어나가며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 갈색의 구로 갈라졌다.
갈라진 마법구는 동물의 머리 같은 형상으로 용 마수들에게 달려들었다.
용 마수들이 몹시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곧장 다음 공격을 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다.
“……흐윽.”
그때, 갑작스러운 심장 통증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마치 반으로 쪼개지는 것처럼 눈앞이 하얘질 정도의 고통이었다.
아리엘은 심장께를 부여잡고 힘없이 무릎을 꺾었다.
그녀가 쓰러진 것을 발견한 마티어스가 외쳤다.
“아리엘라!”
흐릿해진 시야로 아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안 돼.’
이 위기를 넘기지 못하면 과거와 똑같이 허망하게 죽고 말 것이다.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했었잖아.’
자신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걸 모두 했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타락의 뜻대로 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아리엘은 땅을 짚은 손으로 세게 흙을 움켰다.
시간은 이제 그녀의 죽음이 예정된 곳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타락?’
라카트옐의 승리도 머지않았다는 거야.
아리엘은 눈을 감고 온몸의 마나를 끌어모았다.
난 끝까지 라카트옐을 위해 버텨낼 거야.
그 순간 아리엘의 몸에서 선명한 붉은색의 빛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붉은빛이 비침과 동시에 엄청난 힘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콰콰콰쾅!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터지고 갈라지며 바람의 폭풍을 만들었다.
뻗어 나간 그 힘이 용 마수들에게 닿자, 마수들의 몸이 불에 닿은 종이처럼 타버리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끼아아아악!
태워지는 마수들의 섬찟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도 잠시, 이내 마수들은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모두 잿덩이로 사라져버렸다.
“…….”
마수들의 시체만 남아있는 대지에 선 마티어스와 세 소드마스터, 그리고 세실은 동작을 멈춘 채 말을 잃었다.
마티어스조차 처음 보는 거대한 힘이 아리엘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이, 이럴 수가!”
용 마수를 모두 잃은 타락의 진영은 이미 패색이 짙었다.
타락의 수하 마법사들이 모두 사색이 되어 폐허가 된 전장을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승기가 완전히 라카트옐 쪽으로 기울자, 남은 마수들과 타락의 마법사들은 도망가는 것을 선택했다.
전장터는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
하지만 그 전장터 한복판에는, 가냘픈 붉은 머리의 소녀가 시체처럼 쓰러져 있었다.
“아리엘!”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루시안이 달려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리엘, 안 돼!”
루시안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아리엘의 얼굴과 목 뒤를 받쳤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숨은 너무나 미약했다. 마치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그는 아리엘을 끌어안고 오열하듯 말을 토해냈다.
“아니야. 아직……!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 아리엘, 아리엘…… 눈 떠.”
이대로라면 아리엘이 성년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형편없이 갈라진 루시안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아리엘의 귓전에 속삭였다.
“내가 왔어. 응? 눈 좀 떠봐. 제발…….”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모두 아리엘의 호흡에 촉각을 세울 뿐.
적막한 폐허에 타락이 등장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간사한 뱀의 혀를 움직였다.
“내가 그 애를 되살려줄까?”
그렇게 말하는 타락의 손에는 ‘운디르의 저주’가 들려있었다.
* * *
정신을 잃은 아리엘은 자신의 의식이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몸이 무겁고 나른했다.
이대로 끝도 없이 가라앉아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한참 가라앉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점점 다가왔다.
[드디어 만났구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 것만 같았다.
그녀의 일부가 그가 누구인지 선명히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라키엘…… 님?”
푸르스름한 빛이 가까이 다가와 아리엘을 감쌌다.
목소리가 딱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지쳤겠지. 아이야, 조금 쉬는 게 어떠냐.]
아리엘은 감기는 눈을 깜박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죽은 건가요?”
[글쎄.]
“루시안은 무사한가요?”
[잘 모르겠구나.]
그 대답에 아리엘은 서러워졌다.
죽어서까지도 루시안이 안전한지 확인할 수 없다니. 라키엘님 나빠.
그녀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느끼며 말했다.
“왜 그러셨어요?”
[무엇을.]
“왜…… 라카트옐이 오랫동안 그런 형벌을 짊어지게 만드셨어요. 그들은 잘못한 게 없었는데.”
목이 메어서 목소리가 떨렸다.
잠시 침묵하던 라키엘이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게 꼭 너 같은 소녀가 있었거든.]
그 말과 함께 아리엘의 눈앞에는 반짝이는 금발에 잎사귀처럼 연한 녹색의 눈을 가진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아리엘은 그 소녀가 왠지 디트리히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든, 내 후손이든…….]
잠시 말이 없던 라키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었고, 결국 죽게 되었지.]
이제 아리엘의 눈앞에는 백발의 노인 여자가 관 속에 누워있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 옆에는 기묘할 정도로 아름다운 생명체가 엎드려 슬퍼하고 있었다.
아리엘의 심장이 찌르르 울었다.
라키엘이 금발 녹안의 여자를 지독히 사랑했던 감정이 쏟아져 들어왔다.
[죽기 전에 그녀는 내게 약속해달라고 했어. 타락으로부터 자신의 사람들을 지켜달라고. 나는 그러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라카트옐의 모습을 취한 거군요.”
[그래. 나는 본디 어둠의 신.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몸이라 돌아와야 했으니까.
대신 나는 내가 입고 있었던 드래곤의 육체를 인간으로 변모시켜 세상에 남겨두었다.]
라키엘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내 두 눈을 뽑고, 그녀를 사랑했던 심장마저 뽑아냈지.
그 후에는 너무나 쉬웠다. 감정은 사라지고 남은 맹세만 이행하면 되었으니까.]
라키엘이 아리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눈과 심장을 제거한 존재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그날 라키엘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렇게 그녀에 대한 기억을 가진 나라는 존재는 신계로 돌아왔고, 내가 남긴 라카트옐의 육체는 피가 이끄는 대로 마수와 타락을 쫓게 된 것이다.]
내막을 모두 알게 되었음에도 조금도 후련하지 않았다.
아리엘은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저는 라키엘님이 미워요.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을 아프게 한 당신이…… 정말 미워.”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서 숨이 찼다.
하지만 아리엘은 힘주어 한 마디 한 마디 뱉어냈다.
“그것만은 꼭 말하고 싶었어요. 라카트옐에게도…… 그들을 사랑해서 대신 울어주고, 당신을 미워해 줄 사람이 있다는 거.”
[…….]
가책을 느끼는 듯 침묵을 지키던 라키엘이 한참 만에 물었다.
[……내가 네게 뭘 해주길 바라느냐.]
아리엘은 깊이 눈을 감았다.
죽음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있는 지금, 그녀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마지막에…… 루시안 얼굴을 보지 못했어요. 루시안의 지금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것뿐이에요.”
라키엘이 나지막이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넌 정말로…… 크림슨 하트로구나.]
어쩐지 몇 번이나 들어보았던 말인 것 같았다.
[좋다. 네가 원하는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여주마. 어쩌면 네게는 낯선 모습일지도 모르겠구나.]
다음 순간 가라앉던 아리엘은 몸이 확 부유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와 조우했다.
* * *
“내가 그 애를 되살려줄까?”
루시안은 눈을 들어 검은 망토를 쓴 형상을 바라보았다.
그림자나 안개의 형상이 아닌 타락의 본체였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의 살의가 차올랐다.
그러나 라카트옐인 그의 눈에는 타락의 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애를 되살릴 방법을 알지.”
여유롭게 말한 타락이 제 손에 들려있는 뒤틀린 마름모꼴의 검은색 물체를 보여주었다.
“이것이면 붉은 머리를 살릴 수 있다. ‘운디르의 저주’라는 것이지.”
루시안은 타락의 손에 들린 물체를 노려보았다.
아리엘의 이야기에서 들은 적 있는 그것이었다.
아리엘을 조종하는데 사용되었다던 저주의 보석.
타락이 그 물체를 손안에서 굴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것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어. 무슨 능력인지 아나?”
이 순간에도 아리엘의 숨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하기만 했다.
타락이 아리엘을 내려다보며 킥킥거렸다.
“직접 보여주는 편이 빠르겠지. 이제 그 애의 생명은 10초쯤 남았군. 그럼 이제 셈을 시작할까. 10. 9. 8…….”
루시안은 아리엘의 마지막 숨까지 붙잡아보려 그녀의 가느다란 몸을 끌어안았다.
안 돼. 아리엘, 아리엘, 아리엘.
“7, 6, 5, 4…….”
타락이 단조롭게 숫자를 읊으며 한 손으로 운디르의 저주를 치켜들었다.
“3, 2…… 1.”
딱.
마지막 숫자를 세며 타락은 운디르의 저주를 손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
루시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타락이 운디르의 저주를 내리친 그 순간 시간이 멎었던 것이다.
아리엘이 마지막 숨을 내쉬기 직전의 시점에.
멈춰버린 시간 속은 고요했다.
바람 소리, 횃불이 타는 소리, 사람들의 숨소리 모두가 멈추었다.
아리엘도 살아있는 채로 멈추었다.
얼어붙은 공간 속에 깨어있는 것은 마티어스와 루시안 뿐이었다.
지금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타락이 기괴하게 웃었다.
“‘운디르의 저주’의 능력이 뭔지 이제 알겠나? 이걸로는 시간을 만질 수 있어.”
타락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게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먼저 이야기해야겠지.”
그는 창백하고 끈적끈적해 보이는 손가락으로 그 검은 보석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이건 라키엘의 일부로 만들어졌다.”
‘……!’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소리없이 놀랐다. 라카트옐인 그들조차 몰랐던 사실이었다.
눈과 심장 외에 라키엘에게서 떨어져 나간 다른 것이 있었다니.
“라키엘 놈은 쉽게 두 눈을 뽑았지. 하지만 몸속 심장을 뽑으려 할 땐, 먼저 이것을 뜯어내야 했어.”
타락이 운디르의 저주를 루시안의 발치에 던졌다.
“이건 라키엘의 비늘이다. 심장을 가리고 있었던 보호막이었지.”
뒤틀린 마름모꼴의 결정이 루시안 앞에 떨어져 기묘한 빛을 냈다.
“나는 그것을 훔쳐서 내 힘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크림슨 하트를 조종할 때 써먹었지.”
타락이 흡족한 목소리를 냈다.
“또 시간의 능력도 사용했어. 한 번 쓰면 7년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썼지. 첫 번째는 시간을 되돌리는 데에, 두 번째는…… 바로 지금.”
타락이 루시안의 주위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내가 멈춘 시간을 풀기만 하면 저 소녀는 죽게 되겠지.”
맞는 말이었다.
타락이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기만 한다면, 아리엘은 마지막 숨을 내쉴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그의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윽고 한 자리에 멈춰 선 타락이 유혹하듯 말했다.
“나는 네 소녀를 살려줄 수 있어. 시간이 다시 흐르기 전에 네가 죽기만 하면 된다.”
그가 루시안의 발치에 있는 ‘운디르의 저주’를 가리켰다.
“자, 선택해라. 이걸 네 몸에 직접 찔러넣는다면 너는 죽는다. 드래곤은 드래곤으로만 해칠 수 있지. 이게 내 마지막 무기인 셈이야.”
타락이 기괴하게 입을 찢어 웃었다.
“대신 붉은 머리는 살려주마.”
루시안은 아리엘의 몸에 얼굴을 묻었다. 시린 숨이 그녀 위에서 흩어졌다.
“…….”
아리엘라. 나는 널 위해 뭐든 할 거야.
내 존재 전부를 버릴 수도 있어, 널 위해서라면. 사랑해.
날 위해 울지 마. 아리엘.
루시안은 천천히 손을 뻗어 운디르의 저주를 집어 들었다.
* * *
‘아…….’
아리엘이 조우한 것은 아주 거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였다.
세상의 모든 색을 섞어놓은 듯한 검은 몸 표면은 신성할만큼 우아했고, 푸른 눈동자는 아득한 물속처럼 깊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아리엘은 그 생명체의 발톱 하나보다 작았다.
그것은 드래곤이었다. 신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
두렵고 압도되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그 생명체를 보고 엄청난 슬픔을 느꼈다.
그것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생명체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울고 있었다.
“울지 마요.”
자신이 라키엘에게 말했던 소원은 루시안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생명체가 혹시…… 루시안의 본체인 걸까?
아리엘은 그것의 서늘한 비늘에 제 뺨을 문질렀다.
“제발 울지 말아요…….”
본능이 오로지 그의 눈물을 멈추게 하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 차올랐다.
아리엘은 그것의 눈앞으로 가서 그것과 머리를 맞대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드래곤은 그녀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아리엘은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그 목걸이에는 홍옥 같은 붉은 보석이 달렸고, 붉은 보석은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아리엘은 그 목걸이를 풀었다.
“이거 줄게요. 이거 줄 테니까…… 그만 울어요, 네?”
그녀는 목걸이를 거대한 드래곤에게 걸어주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두 팔을 한아름 벌려 그 생명체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그렇게 안고 있었을까.
갑자기 아리엘은 가슴 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뭐지……?’
아리엘은 눈을 뜨고 드래곤과 눈을 마주쳤다.
이제 드래곤의 푸른 눈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 * *
루시안은 천천히 손을 뻗어 운디르의 저주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자신의 손에 쥔 그는 다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녀가 눈을 뜨고 살아난 모습을 보고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리엘이 웃는 모습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었으면…….
루시안은 고개를 기울여 아리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눌렀다.
“미안해.”
고통으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흐으…….”
눈물 없는 흐느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아리엘의 심장 쪽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 붉은 기운은 마치 가지를 뻗듯이 루시안 쪽으로 향해, 그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리엘에게 고개를 묻고 흐느끼고 있던 루시안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오래전 거세당했던 라카트옐의 눈물이었다.
고인 눈물은 그대로 아리엘 위에 떨어져 내렸다.
툭.
화아아-!
그 순간 밝은 빛이 아리엘과 루시안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곧 자신의 숙원을 이룰 거라 믿고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던 타락의 낯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 이 무슨……!”
바로 그 후에, 의식을 잃고 있던 아리엘이 작은 기침을 터트리며 깨어났다.
“아…….”
그녀는 눈을 뜨며, 방금까지 보던 드래곤의 얼굴이 점점 루시안의 얼굴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변해가는 그의 모습 속에서 눈동자만이 똑같이 겹쳐졌다.
짙은 청색의 눈동자. 아리엘이 사랑하는 루시안의 눈이었다.
“루시안…….”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본 루시안은 믿기 어렵다는 듯이 아리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리엘……?”
뒤에서 타락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쳤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아리엘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루시안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 그에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잡히던 허공 속에서 새파란 빛을 내는 푸른색 검이 생겨나 그의 손에 쥐였다.
그것을 본 타락이 기겁해서 외쳤다.
“어떻게? 그 검은 라키엘만이 소환할 수 있는 검인데……!”
루시안이 잔혹한 미소를 머금고 입술 끝을 비틀었다.
방금 아리엘에게서 흘러나온 붉은 빛이 들어온 후, 그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는 그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미 나는 라키엘이 되었거든.”
그는 시간을 거슬러, 마티어스와 나눴던 대화를 회상했다.
* * *
아리엘이 집에 돌아온 후,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백방으로 그녀를 살릴 방법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예정된 운명을 피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절망하던 중, 루시안이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내가 다른 존재가 되면 아리엘이 살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무슨 뜻이냐.”
“내가 인간이 되거나 라카트옐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면, 마지막 라카트옐이 죽는 것일 수도 있지 않나.”
그리고 루시안은 자신이 거울 호수에서 겪은 일을 설명했다.
아리엘이 납치당한 곳을 알아내고 물 밖으로 밀려났을 때, 그는 자신이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수 밑 깊은 곳에 닿음으로써 드래곤의 오른눈이 그에게 흡수되었던 것이다.
“난 이미 드래곤의 한쪽 눈을 얻었어.”
한쪽 눈만을 얻었는데 달라졌다면…….
“두 눈 모두를 취하면 심장이 없더라도 라카트옐과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가설은 그렇게 세워졌다.
계획은 이것이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루시안이 용 마수들을 상대하는 대신 타락이 훔쳐간 드래곤의 왼눈을 찾아 흡수하는 것.
하지만 그 계획에 따르는 위험은 상당했다.
처음 눈을 얻을 때에도 루시안은 거의 죽음의 경계까지 가야 했었다.
두 번째라고 다르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럼에도 루시안은 확고했다.
“아리엘을 살릴 방법은 이제 그것 하나뿐이야.”
“불확실한 가설일 뿐이다. 위험부담도 너무 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지.”
긴 침묵이 지나간 뒤,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그걸 찾으면. 한 가지만 기억해라.”
뜸을 들이던 마티어스는 루시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리엘에겐 네가 필요하다는 것을.”
루시안의 눈 속에 잠시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 * *
라카트옐 영지에 도착한 뒤, 그들은 바쁘게 전투를 준비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짧게 만난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무뚝뚝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떠나는 루시안의 등 뒤에서 마티어스가 당부했다.
“아리엘을 믿어라.”
루시안은 뒤돌아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강한 아이다. 한 번 운명을 거스른 아이야. 이번에도 그 애가 해낼 거다.”
“…….”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오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 그 애를 믿자.”
루시안은 그 자리에 잠시 붙박여있다가 말없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전쟁이 시작된 뒤, 루시안은 전장을 누비며 드래곤의 왼눈을 찾아 헤맸다.
그것은 머리 세 개 가진 괴물이 지키고 있었고, 루시안은 사투 끝에 그것을 해치웠다.
마침내 드래곤의 왼 눈을 손에 넣은 루시안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흡수했다.
“크윽……!”
눈이 흡수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고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눈이 온전히 흡수된 후에야 그는 아리엘에게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돌아온 뒤 마주한 것은 죽어가는 아리엘의 모습이었지만.
“내가 그 애를 되살려줄까?”
타락이 그녀를 살려주겠다 유혹할 때에 루시안은 쉽게 유혹에 끌렸다.
그에게는 아리엘의 생명이 전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오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 그 애를 믿자.’
왜인지 마티어스의 말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루시안은 운디르의 저주를 단숨에 스스로에게 꽂아 넣지 못했다.
그렇게 타락이 시간을 멈춰 아리엘을 살려놓은 동안, 크림슨 하트는 주인에게로 되돌아왔고…….
“두 눈을 취한 후 심장을 얻었으니, 이제 나는 다른 존재지.”
이제 루시안은 라카트옐이 아니라 완전한 드래곤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는 천적을 마주한 것처럼 얼어붙어 있는 타락에게 걸어갔다.
손에 쥔 푸른 검을 들고 타락을 노려보자, 타락 안에 검게 뭉쳐있는 시커먼 핵이 보였다.
“안 돼-!”
타락이 쇠를 긁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루시안은 망설이지 않고 푸른 검을 그 핵에 찔러넣었다.
키에에에에엑-!
푸른 검에 찔린 타락은 끔찍한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산산이 흩어져 소멸되고 말았다.
* * *
‘결국 예언은 이런 의미였나, 라키엘.’
애초에 라카트옐은 타락과 마수를 대적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
타락이 사라진다면 ‘라카트옐’은 이 세계에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없다.
루시안이 방금 타락을 죽임으로서 라카트옐의 역할은 끝났다.
‘그리고 크림슨 하트는…….’
마지막 라카트옐을 죽여야만 살 수 있다고 했던 크림슨 하트는 그를 드래곤으로 완성시킴으로서 그 예언을 이루었다.
크림슨 하트가 죽이는 것은 루시안의 생명이 아니었다.
‘라카트옐이라는 존재 그 자체인 것이지.’
옳다. 라카트옐은 오늘 죽었다.
불완전한 몸에 갇혀있던 라카트옐은 죽고, 온전한 드래곤이 되었으니.
오늘은 라카트옐이라는 존재가 종말을 맞는 날인 것이다.
“아리엘.”
오랜 싸움의 종지부를 찍은 루시안은 아리엘 곁으로 돌아갔다.
무릎을 꿇고, 그녀를 제 팔로 지탱해 반쯤 일으켜주자 아리엘이 말갛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눈빛 사이에 여러 가지가 지나갔다.
이윽고 가늘게 숨을 내쉬며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심장이 돌아갔는데…… 제가 어떻게 살아있어요?”
루시안은 아리엘의 눈가를 손끝으로 진득하게 쓸었다.
“내 눈물 때문에. 내 눈물이 아무래도 널 치료한 것 같아.”
그는 오늘까지 모르고 있었다.
드래곤의 두 눈과 심장이 만나야만 라카트옐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눈물을 잃어버렸던 라카트옐은 비로소 눈물을 되찾았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아리엘이 문득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나…… 크림슨 하트 아니에요? 루시안은 내게 더 이상 감정을 느낄 수 없나요……?”
그 물음에 루시안은 낮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도 너는 내 심장이야. 영원히 내 심장일 거야.”
그는 고개를 숙여 아리엘과 이마를 맞댔다.
“나는 여전히 너 말고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어.”
드래곤은 단 한 번의 사랑을 한다.
영원히 그만둘 수 없는 사랑.
사랑하는 사람이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 사람과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밖에 없었던 라키엘처럼.
드래곤에게는 처음 사랑이 유일한 사랑인 것이다.
루시안에게는 그게 아리엘이었다.
어느새 마티어스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리엘은 가녀린 팔을 뻗어 마티어스와 루시안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지금만큼은 마티어스와 루시안도 망설이지 않고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한 덩어리가 된 세 사람은 한참동안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 * *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폐허가 된 라카트옐 영지를 황실 마법사들이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금 그들에게는 더욱 우선으로 할 것이 있었으니까.
“이제 가장 중요한 게 남아있지.”
루시안에게 새끼 토끼마냥 달랑 안겨있던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말에 가물거리는 눈을 깜박였다.
“중요한 일요?”
어리둥절한 아리엘의 얼굴에 두 남자가 낮게 소리 내 웃었다.
마티어스가 손가락으로 아리엘의 뺨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했다.
“오늘은 네 생일이 아니냐.”
생일……?
아리엘은 그제야 완전히 동이 튼 아침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귀하기 전, 과거의 그녀는 보지 못했던 열일곱 살 생일의 아침이었다.
주홍빛, 보랏빛, 하늘빛과 분홍빛이 뒤섞인 아름다운 일출이 아리엘을 비추었다.
‘……아.’
그녀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느끼며 숨을 멈추었다.
열 살에 처음 되돌아와서 바꾸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맞아서 다리를 못 쓰게 되는 그날 밤의 운명을 바꾸고 맞이했던 그 아침이.
그날처럼 벅찬 감격이 아리엘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바뀌었어.’
처음에 발버둥치며 운명을 바꾸려 했던 것은 아리엘 혼자였지만, 그 후로는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함께 해주었다.
‘우리가…… 바꿨어.’
이제부터의 미래는 아리엘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시간일 것이다.
드디어 기나긴 과거의 책장이 덮이고, 새로운 페이지가 시작된 것이다.
루시안이 아리엘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며 뇌쇄적인 어조로 속삭였다.
“하루가 통째로 남아있으니 생일 파티를 하러 가야지.”
그렇게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아리엘을 데리고 수도로 돌아갔다.
푸른 사자 기사단과 라카트옐 본가 사람들도 모조리 함께 데리고 갔다.
그들이 수도에 도착하자, 지난밤 아리엘의 안녕만을 기도하며 밤을 지새운 태후와 수잔, 다이아나와 카디나는 드디어 아리엘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리 귀염둥이가 무사히 돌아왔대요!”
“아아……!”
태후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수잔을 부둥켜안고 마구 뛰며 기쁨을 나누었다.
가장 정보에 빠른 카디나가 나잇워커에서 들어온 소식을 전했다.
“라카트옐 가에서 오늘 아리엘님 생일 파티를 연다고 합니다!”
생일 파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들은 미리 준비해 둔 어마어마한 양의 선물을 마차에 닥치는 대로 싣기 시작했다.
선물 준비를 마친 태후가 사뭇 비장하게 앞장섰다.
“당장 대공가로 출발하자.”
모두의 눈에 아리엘의 이번 생일을 최고로 만들겠다는 결의가 번뜩였다.
* * *
아리엘은 수도의 집에 돌아가는 도중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전날부터 내내 전투를 치러서인지 감기는 눈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그녀의 눈앞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수잔? 할마마마……?”
고개를 돌려보니 친구들도 모두 아리엘의 침대맡에 앉아있었다.
“다이아나, 세실, 카디나…….”
아리엘이 그들을 둘러보며 포스스 미소를 짓자 친구들이 아리엘에게 갑자기 달려들었다.
“앗……!”
달려든 친구들은 아리엘의 말랑한 뺨을 마구 조물거리며 아리엘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요 말썽쟁이! 아주 혼나야 돼!”
“다이아나 말이 맞다, 아리엘. 혼자 우리랑 헤어질 준비를 하다니.”
카디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뺨 잡아 늘이기 100년 형입니다, 아리엘님.”
“으우…….”
친구들에게 혼쭐이 난 뒤에 아리엘은 기어드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런 아리엘이 너무 귀여웠던 나머지 그들은 더 이상 혼내지 못하고 와락 끌어안았다.
태후와 수잔도 눈물을 훔치며 아리엘을 안아주었다.
눈물 바람이 지나간 후에, 다이아나가 세실을 쿡쿡 찔렀다.
“언제 말할 거야?”
“이, 이제 말하려고 했다. 안 그래도.”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일이지?
쭈뼛거리며 부끄러워하던 세실이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밝힐 게 있어.”
세실이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풀어서 제 손에 쥐고는 아리엘과 눈을 맞췄다.
“지켜봐 줘.”
아리엘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세실이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희미한 하늘빛이 검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이 떨리는 듯한 미세한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검기……?”
아리엘은 세실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세실, 소드 마스터가 된 거야?”
세실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검기를 거두었다.
세실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최근에 수련이 막혀서 한참 답답했었다. 그런데 너와 함께한 전투에서 마수를 상대하다가…… 검기를 각성하게 됐어.”
아리엘은 세실의 품에 와락 안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축하해, 세실! 너무너무 축하해!”
이로서 세실은 제국 최초의 여기사일 뿐 아니라 최초의 여성 소드 마스터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세실의 어깨에 V모양을 교차해놓은 소드 마스터의 증표가 달려있었다.
“아리엘 네 덕분이야.”
아리엘은 세실이 노력한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세실을 꼭 안고 축하와 기쁨을 나누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낸 뒤, 태후가 아리엘에게 말했다.
“또 손님이 있단다.”
“손님…… 이요?”
누가 찾아온 걸까?
“들어오게.”
태후가 허락하자 문이 열리고 회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걸어들어와 아리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대공자비님. 오델른의 베로니카입니다.”
“아…….”
아리엘은 베로니카를 알아보았다.
숱많은 진회색 머리카락 위에 왕관을 쓴 늠름한 모습의 베로니카는 여전히 아리엘의 이상향 모습 그대로였다.
타락의 납치에서 깨어난 뒤, 안드레 왕자가 한 짓과 베로니카가 그것을 막으려 했다는 걸 들었던 아리엘은 그녀가 반가웠다.
“베로니카님.”
베로니카는 이제 오델른의 국왕이었지만, 아리엘이 무사히 생일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로서 방문한 참이었다.
베로니카가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꽃다발을 건네며 말했다.
“생일, 정말 축하드립니다.”
베로니카는 공식적으로 가져온 마차 몇 대 분량의 선물뿐 아니라 개인적인 선물도 주었다.
“오델른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있는 해변입니다. 아리엘님의 소유이니 언제든 방문하셔서 놀다 가셔도 됩니다. 그곳의 지명은…… 흠, 크흠. 아리엘님의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말을 맺으며 베로니카가 헛기침을 했다. 베로니카의 얼굴이 왠지 붉었다.
뜻밖의 선물에 아리엘은 어쩔 줄 몰라하며 눈을 깜박였다.
한참 머뭇거리던 그녀는 결국 뺨을 발그레하게 밝히며 대답했다.
“꼭…… 놀러갈게요.”
그렇게, 보호 본능에 약한 베로니카와 훤칠한 여성을 동경하는 아리엘은 금세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모인 여자들은 이제 아리엘이 생일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고르며 전투력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다이아나와 마담 헬렌이 아리엘을 꾸며주겠다고 나섰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입어 봐, 아리엘!”
“제가 직접 제작한 장신구가 200여 종이니 골라보세요.”
자, 잠깐…… 전 방금 일어났는걸요?
“아기 마님, 꿀을 섞은 우유예요. 여기 바닐라 크림을 가득 채운 베이비 슈도 있고요. 드시면서 입어보세요.”
어, 어어……?
어느새 아리엘은 휩쓸려서 인형처럼 마구 옷이 갈아입혀지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아리엘이 무슨 드레스를 입어도 심장을 부여잡았고, 그 뒤에서 마담 헬렌은 눈을 반짝이며 쉴 새 없이 새 옷을 가지고 왔다.
옆에 있던 수잔은 어미새처럼 착실히 아리엘의 입에 간식을 넣어주었다.
‘저기, 다들 왜 이렇게 열정적인…….’
아리엘은 정신이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좋아서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다.
“이제 다 됐다. 어쩜, 내 귀염둥이 오늘 너무 예쁘잖아! 그치, 세실?”
다이아나의 물음에 세실이 완전히 무장해제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군. 과연 내 레이디야.”
헤롱헤롱 치장을 마치자, 드디어 아리엘은 자신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역대 제국에서 열린 생일 파티 중 가장 성대했다고 역사에 기록될 파티였다.
* * *
한편, 아리엘도 모르는 사이에 라카트옐 남자들의 선물은 이미 국가 단위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물건 같은 걸 선물로 취급하기엔 너무 하찮지.”
그렇게 말한 루시안이 서늘한 마력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무릇 살 수 있는 것 중 가장 값비싼 건 시간 아니겠나.”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아리엘의 열일곱 번째 생일을 기념해 제국의 ‘하루’를 통째로 사버렸다.
마티어스의 명에 따라 제국의 모든 사람들은 깜짝 공휴일을 맞았고, 라카트옐에서 푼 엄청난 파티 음식과 음악을 즐기러 모두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타락과의 긴 전쟁에서 라카트옐이 승리했다는 걸 알게 된 황제는 이날을 아예 역사에 남기기로 했다.
“오늘을 국경일로 지정하겠다!”
황제는 아리엘의 생일을 매년 돌아오는 국경일로 선포하고, 주변 왕국들 전부에 아리엘의 미들네임을 딴 기념성을 짓기로 결정했다.
“또, 황성 뜰을 평민과 귀족들에게 개방해 공주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 것이다.”
수도의 모든 사람들은 황실에서 주최하는 아리엘라 공주의 생일 연회에 초대받았다.
황실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연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라카트옐 가에서는 아리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모인 특별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아름답게 장식된 홀에는 대공가에서 일하는 식구들, 푸른 사자 기사단, 태후를 비롯한 황실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아리엘의 친구들과 스승인 브루노어 또한 행복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한 가운데에는 이 파티를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한 라카트옐 두 남자가 훤칠한 자태로 서서 아리엘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들이 준비한 아리엘의 생일 선물은 홀 한쪽에 쌓여서 거의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아리엘님 오십니다!”
수잔의 손에 눈이 가려진 채 파티장으로 들어온 아리엘은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파티를 잘못 찾아왔나요?
다들 여기 있는 거 맞죠?
수잔이 루시안의 신호에 따라 숫자를 세고, 아리엘의 눈을 가린 손을 치웠다.
“3, 2, 1…… 짜잔!”
펑! 파아아-! 펑펑!
눈을 가린 손이 사라지자마자 아름답게 터지는 마법 폭죽이 아리엘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생일 축하해요!”
아리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화려한 폭죽에 깜짝 놀란 아리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하나같이 행복한 웃음을 짓는 그들을 보며 왈칵 샘솟는 감동을 느꼈다.
“…….”
뭐예요, 다들…….
그들과 마주하고 있던 아리엘은 결국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아리엘의 눈에 반짝 물기가 비치자마자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몰려와 아리엘을 안아주었다.
“아기 마님.”
“내 귀염둥이.”
“아리엘님!”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안긴 아리엘은 눈물이 섞인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정말 이날이 온 게 현실일까?
꿈인 건 아닐까?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소도 때려잡을 덩치의 기사들은 먼발치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며 아리엘만 보고 있었고, 저택 사용인들은 각자 손수건을 꺼내어 수십 장의 손수건을 아리엘에게 내밀었다.
한명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소중한, 그녀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들이었다.
열렬히 쏟아지는 포옹 속에서 아리엘은 용케도 난폭한 기세를 풀지않고 얌전히 있는 두 라카트옐을 바라보았다.
두 라카트옐 남자들은 오직 아리엘이 기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세를 눌러 감추며 인간들을 용인하고 있었다.
물론 아리엘의 옆에 바짝 붙어서 포옹을 하는 사람들 한명 한명을 못마땅해하는 눈빛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아리엘의 가슴 속이 따스하게 찌르르 울렸다.
‘마티어스님, 루시안…….’
라카트옐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리엘에게는 유일무이한 가족이었다.
출생이 밝혀졌다고 해도 아리엘에겐 가장 처음 생긴 가족이 라카트옐이었고, 죽어서 묻히고 싶은 곳도 라카트옐이었다.
아리엘에게는 오래전부터 단 한 가지의 소원밖에 없었다.
라카트옐 가족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
지금 이렇게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웃고 있으니 그간의 모든 고생이 잊혀지는 듯했다.
포옹 세례가 끝나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다가와 아리엘의 이마와 뺨에 입을 맞추었다.
“생일 축하한다, 아리엘라.”
“생일 축하해. 내 꼬맹이 아내.”
아리엘은 눈물을 꾹 참으며 살짝 웃었다.
“네. 마티어스님, 루시안.”
마티어스가 직접 걸어가 테이블 위에 있던 잔을 집어 들었다.
“자, 아리엘의 생일을 축하하며 건배하지.”
그것을 신호로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샴페인이 담긴 종 모양의 유리잔을 손에 들었다.
목소리가 엄청나게 큰 호위 기사 헥터가 기다렸다는 듯 우렁차게 외쳤다.
“우리 아리엘님을 위해 건배!”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치며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건배!”
한곳으로 모여 부딪치는 유리잔의 영롱한 소리가 파티장을 가득 채웠다.
건배 후엔 웃음과 함성이 뒤섞이며 아리엘의 이름이 연호되기 시작했다.
“아리엘님! 아리엘님!”
아리엘은 사람들에게 떠밀려 선물의 산이 쌓인 곳으로 이동했다.
쌓인 선물을 본 그녀의 얼굴은 잠시 창백하게 바뀌었다.
‘설마 이게 다 진짜 선물인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다음 생일이 돌아올 때까지 선물만 풀어도 다 못 풀어볼지 모른다.
선물 상자 대부분은 장식일 거야. 그, 그렇지?
누가 대답 좀 해주세요…….
그 선물 상자들 옆에서 아리엘의 반응을 보고 있던 마티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일이니 마땅히 선물이 있어야겠지.”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팔을 살포시 잡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파티면 충분한걸요.”
그녀의 행동에 마티어스의 표정이 순간 느슨하게 풀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다. 네가 성년을 맞는 생일인데 선물이 빠질 순 없지.”
“그래. 어차피 모든 게 다 네 것이라도 말이야.”
그렇게 말한 루시안이 붉은 입술을 비틀며 아찔하게 웃었다.
“자. 첫 번째 선물.”
그가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자 선물 더미 옆에 쳐져있던 공단 커튼이 열리며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곳에는…….
‘……!’
아리엘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마주하게 된 것은 수천, 수만 송이의 장미꽃이었다.
아리엘의 머리카락색과 꼭 같은 스칼렛 레드 색의 빨간 장미가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장관이라 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옆에서 그녀의 어깨를 감싼 루시안이 유혹하듯 속삭였다.
“성년에는 장미꽃을 선물한다지. 1000년의 보존 마법이 걸려있어.”
놀라움에 멈춰 서 있기만 하던 아리엘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1000년? 이 극단적인 숫자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나는데……?
정보길드에 있는 내 정보가 1000년 독점 아니었던가?
기억을 되짚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크고 다정한 손길로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에 드느냐?”
은근한 기대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아리엘은 그만 포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여간 라카트옐 남자들 스케일이란.
성년에는 원래 장미꽃다발이나 꽃 한 송이만 받는 거라구요…….
하지만 두 남자가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 너무 귀여워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어요.”
아리엘이 마음에 든다고 하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흡족한 시선을 짧게 주고받았다.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은 두 남자 사이의 기류에 아리엘은 두근거림을 느꼈다.
‘세상에. 설마 둘이 화해한 걸까?’
그렇다면 최고의 생일 선물일 텐데.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도, 두 부자는 언제 시선을 마주쳤냐는 듯 빠르게 서로를 외면해버렸다.
‘……에휴.’
아리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그래도 이 정도로 발전한 게 어디람.’
비록 셋이서 한 거지만 전에 포옹도 했고…….
잠깐이라도 눈빛을 교환한 건 엄청난 발전인 거겠지?
아리엘은 서로의 시선은 외면했어도 멀찍이 떨어지지 않고 가까이 서 있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모습을 보며 열심히 스스로를 위안했다.
엄마, 아직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익숙지 않은가 봐요.
그래도 이만큼 발전했으니 앞으로를 기대해 봐도 되겠죠?
아리엘은 희망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라카트옐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으니까.
“다음 선물도 보겠어?”
이번에는 루시안이 묘하게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리엘은 또 무슨 기함할 광경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눈을 딱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까딱하며 말했다.
“홀슨. 가지고 와.”
그러자 선물 더미 뒤에서 커다란 트레이를 끄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엄청난 선물의 산 뒤에서 나타난 것은…….
가나슈로 글레이즈드 코팅되고, 시럽에 감싸인 붉은 딸기가 가득 얹힌 거대한 초콜릿 케이크였다.
“와아…….”
아리엘은 고개를 꺾어야만 다 볼 수 있는 커다란 케이크를 보고 발그레 뺨을 붉혔다.
어딘지 투박하고 단순한 모양이긴 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쏙 들었다.
아리엘이 케이크를 구경하는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루시안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자 루시안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네가…… 직접 만든 선물을 원했잖아.”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잠깐 귀를 의심했다.
네? 그게 무슨 뜻…….
그 순간 약간 허술해 보이는 케이크의 모양이 아리엘의 직감을 건드렸다.
‘설마 저 케이크……?’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보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얼굴이 드물게 벌건 색으로 물들었다.
“솔직히 말해 잘 만든 건 아니지만…….”
“저쪽을 좀 가리면 더 괜찮긴 하다만…….”
“아니, 그냥 파괴하고 다시 만드는 편이…….”
“딸기로 더 덮을 걸 그랬나.”
아리엘은 작은 손을 얼른 흔들며 외쳤다.
“자, 잠시만요!”
그녀는 심장이 너무 빨리 파닥거려서 터질 것만 같았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정말로…… 두 사람이 케이크를 직접 만드셨어요?”
질문을 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파괴가 재주인 라카트옐이 뭔가를 만들어 내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타락과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그녀는 루시안에게 말했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이 ‘직접’ 만든 선물이 갖고 싶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라카트옐이 직접 만든 선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했던 말이었다.
라카트옐은 부수는 데에는 재주가 있지만, 뭔갈 만드는 것에는 처참했으니까.
직접 만들어 달라고 하면, 생일 선물을 미리 준비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난…….’
아리엘은 자신이 17세 생일을 맞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두 남자가 섣불리 생일 선물을 준비하지 않길 바랐었다.
그래서 했던 말인데, 그런데…… 그런데…….
“정말로…… 두 사람이 케이크를 직접 만드셨어요?”
아리엘이 물음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당연하다는 듯 동시에 대답했다.
“네가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느냐.”
“네가 케이크를 좋아하잖아. 꼬맹이.”
‘…….’
놀라고 감동받은 것 이상의 감정이 아리엘을 덮쳤다.
아리엘은 약간 기울어진 초콜릿 케이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그녀가 물기로 잠긴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어떻게 만드셨어요, 이걸?”
루시안이 관능적인 미소를 비딱하게 머금고 말했다.
“라카트옐에게 불가능이란 없어.”
너무나 루시안다운 대답에 아리엘은 작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대신 그녀는 눈가를 훔치며 속삭였다.
“정말이네요.”
루시안이 자연스레 아리엘의 손에 케이크 칼을 쥐여주었다.
아리엘은 얼른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절대 못 잘라. 아까워서 절대 절대 못 먹어요.
서툰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 라카트옐 수제 케이크는 정말 보존 마법이라도 걸어서 보관해두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루시안의 아름다운 손이 아리엘의 손 위에 겹쳐졌다.
“생일 케이크는 잘라야지.”
와아아-!
모든 이들의 환호 속에 아리엘은 약간은 엉성한 초콜릿 케이크를 잘랐다.
그 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던 집사 알렌은 문득, 저 케이크가 만들어지던 과정을 회상했다.
* * *
한 달 전.
아리엘이 받고 싶어하는 선물을 알게 된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고민에 빠졌다.
“직접 만든 선물이라…….”
라카트옐 나름대로는 상당히 도전적인 일인 셈이었다.
차라리 진귀한 물건을 구해달라거나,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다 가져다 달라 했다면 간단했을 텐데.
고민하던 그들은 결국 하녀장 수잔과 집사 알렌을 불러 물었다.
“아리엘이 뭘 좋아하지?”
심각한 표정의 두 라카트옐을 번갈아 본 백발의 알렌은 치솟는 감격을 느꼈다.
‘세상에, 두 주인님께서……!’
라카트옐이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직접 만들겠다고 나선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아기 마님이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인 것이다.
막연하게 아리엘이 삭막한 두 남자를 변화시켜주기를 바랐던 알렌의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수잔 또한 비슷한 심정으로 흐뭇하게 두 라카트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던 마티어스가 불쑥 중얼거렸다.
“새로운 도시를 하나 만들어줘야 하나.”
‘예?’
알렌과 수잔은 동시에 입을 딱 벌렸다.
아기 마님이 말했을 땐 소박한 느낌이던 '직접 만든' 선물이, 왜 라카트옐에게 가면 이렇게 변하는 거지.
느른한 자세로 기대앉은 루시안이 무심하게 덧붙였다.
“아니면 아예 제국을 하나 만드는 건?”
마티어스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리엘라도 성년이니 제국 정도는 가져야지.”
결론을 내린 듯 루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두면 정말로 나라를 하나 만들러 나갈 기세라, 수잔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잠시만요.”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뭐가 문제냐는 듯 서늘한 시선을 보내왔다.
수잔은 마른침을 삼킨 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리엘님이 좋아하시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좀 더 작고, 정성이 들어간…….”
루시안이 알겠다는 듯 짙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성?”
그런 거 말고!
수잔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니, 어떻게 된 분들이 선물을 제국, 성 이런 것 밖에 생각을 못하시는 거야?
수잔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직접 구운 과자나 케이크 같은 것이 어떨까요?”
“…….”
그 말을 들은 라카트옐 남자들은 상당히 당혹한 표정이 되었다.
케이크? 그런 것도 선물이 되나?
알렌은 조마조마하게 눈치를 살폈다.
‘라카트옐에게 음식을 맡기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텐데…….’
대대로 대공가의 집사를 맡아온 그는 라카트옐이라는 종족이 얼마나 만드는 것에 재능이 없는지 알고 있었다.
몇년 전에 루시안이 가고일을 해체하려다 잿덩이로 만들어버린 일도 있지 않았나.
하지만 수잔은 굴하지 않고 아기 마님을 위해 열심히 그들을 설득했다.
“아리엘님은 디저트를 좋아하시니까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수잔의 말을 들은 두 남자는 한참 만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리엘은 케이크를 좋아하지.”
“……마침 생일이기도 하니 선물로 괜찮겠군.”
수잔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일날 선물로 성이나 제국을 받는다면 아리엘이 얼마나 시무룩해할 지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식은땀이 밴 이마를 닦던 알렌도 그게 가장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라카트옐이 만드는 케이크는 상상도 되지 않지만…….
‘드래곤의 에고가 있으니 뭐든 배우면 잘 해내시겠지.’
그때만 해도 알렌은 그렇게 믿었다.
* * *
케이크를 만들기로 결정한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비밀리에 주방장 홀슨을 찾아갔다.
“내놔.”
“……예?”
무시무시한 두 주인님이 느닷없이 뱉은 말에 홀슨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뭘 내놓으라는 거지? 설마…… 내 목?
“케이크를 만드는 방법.”
예에?!
홀슨은 루시안이 머리를 내놓으라고 말한 것보다 더 놀랐다.
케이크요? 두 분이 케이크를 만드시겠다고요?
하지만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진지해 보였다.
달콤 폭신 보들한 케이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남자였지만, 아리엘의 선물이라는 말에 홀슨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럼 일단은…….”
홀슨은 아리엘 생일 파티에 자신이 만들 예정이었던 3단 가나슈 케이크의 레시피를 꺼내 들었다.
“내가 만들지.”
“내가 만들겠다.”
동시에 말한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서로를 차갑게 노려보다가 반대 방향에 각각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경쟁이라도 하듯 다시 서로를 노려보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케이크 만들기 수업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험난할 듯싶었다.
그렇게 케이크 만들기 연습이 시작된 뒤, 알렌은 자신의 믿음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라카트옐 주인님들도 안되는 게 있었구나……!’
드래곤의 에고 덕에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홀슨이 보여준 과정을 무리 없이 익혔다.
겉으로만 보면 홀슨 뺨치게 능숙한 동작으로 케이크를 만들어 내는 두 남자의 모습은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우월한 아름다움 덕에 그들은 인간에게 신의 기술을 하사하기 위해 내려온 신들 같았다.
하지만…….
“음, 이건…… 어떻게 하시면 같은 레시피가 이렇게 되는 겁니까?”
루시안과 마티어스의 결과물을 마주한 홀슨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파괴손 라카트옐 둘은 끝내 괴악하게 그을린 재료 덩어리만을 남긴 채 케이크 만들기에 실패했다.
그쯤 되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표정은 아주 좋지 못했다.
“처음이군. 이런 기분.”
이 세상에서 못 구할 것이 없는 그들은 자신들이 아리엘이 원하는 작은 선물 하나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에 당황과 분노를 느꼈다.
루시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힘이야.”
가을 소풍 때 자신들이 구운 고기와 바닷가재 요리를 아리엘이 맛있게 먹어서 케이크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알렌은 ‘그건 단순히 불 위에 올려놓는 거니까 된 겁니다만…….’ 이라는 말이 턱 끝까지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그 후에도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몇 번이나 더 시도했지만, 끔찍한 모양과 그것을 능가하는 더 끔찍한 맛만 계속 증명될 뿐이었다.
옆에서 쩔쩔매며 케이크 제작을 돕던 홀슨은 끝내 두손 두발 다 들고 물러났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케이크를 보시면 아기 마님이 놀라실 게 분명해요…….”
다른 건 몰라도 아리엘 생일에 이런 케이크를 놓을 수 없다는 홀슨의 결심만은 확고했다.
아기 마님 생신에는 최고로 예쁜 케이크를 올려야 해!
하지만 아리엘이 원하는 선물을 줘야만 하는 라카트옐 두 남자도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사이에 껴서 눈치만 살피던 알렌이 나섰다.
“제가 본 바로는…… 큰 주인님께선 맛은 괜찮은데 모양이 문제고, 작은 주인님께선 모양은 괜찮은데 맛이 문제시니…….”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살벌한 눈빛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알렌은 죽을 각오로 입을 열었다.
“두 분이 함께 만드시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알렌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두 라카트옐이 싸늘하게 알렌을 노려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기세에 알렌의 무릎이 달달달 떨렸다.
뜻밖의 탈출구를 찾은 주방장 홀슨이 슬그머니 말을 보탰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은데요…….”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시선이 이번엔 홀슨을 향했다.
홀슨은 대번에 찔끔해서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
한참의 침묵이 지난 뒤.
두 라카트옐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허공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맞부딪쳤다.
* * *
그 모든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가나슈 케이크는 가까스로 홀슨의 합격점을 받았다.
모양이 부족한 부분은 깔끔하게 썬 체리와 딸기를 올려 무마했다.
“진짜 정말로 두 사람이 이걸 다 만든 거예요?”
아리엘은 행복한 기분으로 묻고 또 물었다.
이 모든 걸 라카트옐 남자들이 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마티어스가 붉어진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로.”
아리엘은 케이크를 자르긴 했지만 아까워서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곳곳에 보이는 서툰 흔적을 볼 때마다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어느새 그녀의 입술 앞에 케이크 조각을 가져온 루시안이 유혹하듯 말했다.
“한 입 먹어 봐.”
진한 초콜릿 향기가 바로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아리엘은 눈을 꼭 감고 도리질을 쳤다.
“안 돼요. 앞에 두고 보기만 할 거예요.”
“네가 안 먹으면 아무도 못 먹게 다 태워버릴 거야.”
“다시는 이런 거 없을까 봐…….”
“또 만들어주면 되잖아.”
“그래도…….”
실랑이가 길어지자 루시안이 짙은색의 긴 속눈썹을 매혹적이게 움직이며 달콤하게 말했다.
“얼른, 응?”
열심히 유혹한 보람이 있어 아리엘이 끝내 케이크를 한 입 받아먹었다.
체리 과육과 초콜릿 크림이 듬뿍 올라간 시트를 입에 넣은 아리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맛있어.’
모양도 기대 이상이었는데 맛은 그 이상이었다.
초콜릿 시트를 두른 가나슈가 입에서 부드럽게 녹고, 촉촉한 시트와 크림이 달콤하게 어우러졌다.
체리와 딸기의 산뜻함이 진한 초콜릿의 풍미를 더욱 살려주었다.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사르르 웃음을 지었다.
“맛있어요.”
그제야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긴장된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아리엘은 두 남자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최고의 선물이에요.”
여태까지 받은 선물 중에서 제일 좋아요.
그녀가 말하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가 그려졌다.
마티어스가 홀슨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 연회 음식을 내 와라.”
아리엘의 생일 파티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자리에 앉아서 선물을 풀며 생일 축하 인사를 받던 아리엘은 뒤늦게 도착한 꼬마 동생들을 보고 활짝 웃었다.
“미르, 미카.”
올해 일곱 살이 된 쌍둥이는 비슷했던 머리 스타일을 서로 바꾸고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힘이 넘치는 꼬마들답게 우다다 달려온 쌍둥이들이 아리엘에게 매달렸다.
꿀빛의 금발 머리를 오종종 양갈래로 땋아올린 미르셀라가 아리엘의 얼굴에 뽀뽀를 쪽 하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언니!”
아리엘은 감동을 받아서 미르셀라를 꼭 안아주었다.
쌍둥이와 가족이 된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그 사이 담뿍 정이 들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이 이렇게 어린이가 되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꼬마들이 이제 언니라고도 할 줄 알고…….’
부쩍 자란 쌍둥이들의 모습에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때, 어깨까지 오는 백금발의 곱슬머리 위에 왕관을 쓴 미카엘라가 아리엘에게 강아지처럼 얼굴을 부비며 외쳤다.
“생일 축하해, 누나!”
으응……?
잠깐, 언니라는 호칭이 정리된 거 아니었어?
당황하는 아리엘에게 자기들이 직접 쓴 편지를 선물한 쌍둥이들은 유모의 손에 이끌려 졸래졸래 사라졌다.
쌍둥이들이 사라지자 황태자 디트리히가 와서 아리엘에게 선물을 건넸다.
“아리엘라. 생일 축하합니다.”
“감사해요, 레온 오라버니.”
디트리히의 얼굴을 본 아리엘은 문득 라키엘의 기억 속에서 본 금발녹안의 여인을 떠올렸다.
여인은 대대로 황실에서 물려내려오는 외양과 무척 닮아있었다.
어쩌면 그 여인은 황실의 먼 선조였을까?
디트리히가 성스러워 보이는 녹안을 휘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의 행복을 빌겠습니다.”
아리엘은 그에게 화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네, 오라버니.”
디트리히가 물러간 뒤, 그녀에게 찾아온 것은 오랜 친구였다.
“히스.”
함께 전투를 치른 히스는 전투 도중에 팔을 다쳐 잠시 붕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치유 마법을 썼는데도 시간이 조금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녀 앞에 서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눈빛을 보내던 다갈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이내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
“나, 이제 여기를 떠나려고.”
“…….”
“마탑에 들어가서 ‘시험의 탑’에 응시할까 해.”
‘시험의 탑’은 마법사들에게는 위험한 도전이자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작게는 몇 년, 많게는 수십 년간 시험의 탑에서 나오지 않는 마법사들도 많았다.
히스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며 돌아섰다.
“나중에 보자. 잘 지내.”
그때, 아리엘의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히스. 나 마지막 소원권, 지금 써도 될까?”
히스는 뒤돌아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마법으로 소원권을 소환한 아리엘이 히스의 손에 그것을 건네며 말했다.
“언제가 되도 좋으니까…… 반드시 건강하게 브루노어에게 돌아와. 브루노어에겐 네가 필요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침묵하던 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엘이 그의 무사와 안녕을 빌어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엘의 이 소원이 앞으로 그를 지켜줄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려면 다치거나 죽지 않아야 하니까.
“……고마워.”
속삭이는 듯한 말을 마지막으로 히스는 대공가를 떠났다.
히스까지 사라지자, 루시안이 다가와 아리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춤추자.”
연회가 한창인 홀의 중앙에서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몇 쌍의 남녀가 있었다.
그중 물빛 머리카락의 세실과 함께 춤추고 있는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지?
하지만 루시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아리엘과 시선을 마주하며 능숙하게 춤을 리드했다.
아리엘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언제쯤 되어야 루시안에게 익숙해지는 걸까?
아마 평생 안 될 거야.
춤을 추며 루시안이 낮고 퇴폐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엘라. 뭐 부족한 거 없어?”
“부족한 거요?”
영문 모를 그의 말에 아리엘은 눈을 깜박였다.
루시안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딱하게 웃었다.
“아직 내 선물이 남았거든.”
아직도요?!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장미꽃과 케이크 외에도 다른 선물을 잔뜩 주었다.
그런데 더 있다니. 이제 정말 혼내줄 거야!
아리엘은 낑낑거리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루시안은 그녀를 제 품에 가두고 놓아주지 않았다.
낮게 깔린 웃음 뒤로 그의 말이 이어졌다.
“성년이 될 때 무슨 선물을 받는지 알아?”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장미꽃…… 아니에요?”
“그것만은 아니지.”
그렇게 말하며 루시안이 아리엘의 턱 아래를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아리엘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훅 가까이로 다가온 루시안이 도취된 듯이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다른 선물은 이거야.”
루시안이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 도장을 눌렀다.
말캉한 입술 사이로 달콤한 숨이 흘렀다.
‘……아.’
그제야 아리엘은 성년에 받는다는 선물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 * *
입맞춤이 끝난 후, 얼굴이 빨개진 채 딸꾹질을 시작한 아리엘 때문에 루시안은 자리를 비워야 했다.
“마실 것 좀 가져오지.”
그 사이 그녀에게 다가온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아리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리엘은 겨우 딸꾹질을 멈추고 휴, 크게 숨을 내쉬었다.
루시안과 입맞춤을 하다 보면 정말…….
그녀는 다시 새빨개지려는 볼을 감싸쥐었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리엘라. 이제 열일곱 살이 되었으니 결혼이 끝났구나.”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국법상 어릴 적에 한 결혼은 성인이 될 때에 무효화되고, 둘의 합의가 있는 경우에만 다시 이어졌다.
그 전에 한 결혼은 성인 이후에는 서류에 남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예전의 아리엘은 루시안과 자신이 계약 결혼을 한 사이기 때문에 열일곱이 되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계약 이상의 사이가 되었으니 결혼 계약이 끝난 것은 의미가 없었다.
마티어스가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에 수려한 미소를 머금었다.
“넌 아직 어리지. 네가 다시 루시안과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넌 영원히 라카트옐이다. 네가 원하는 만큼 이 집은 너의 집일 가야.”
이제 갓 성인이 된 어린 아리엘을 배려해주는 마티어스의 말에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네, 마티어스님.”
대답한 아리엘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 가득 행복이 차올랐다.
어느새 아리엘 옆에 다가온 수잔이 아리엘의 어깨를 감싸며 안아주었다.
“아기 마님, 제가 했던 약속 지킬 수 있게 됐네요.”
수잔이 애틋하게 아리엘의 머리를 넘겨주며 말했다.
“나중에 결혼식 하실 때, 최고로 예쁜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드릴게요.”
자신이 편지에 썼던 내용을 떠올린 아리엘은 수잔에게 아이처럼 폭 안겼다.
“네, 수잔. 꼭이요.”
한편, 아리엘에게 줄 음료를 들고 돌아가던 루시안은 헥터와 마주쳤다.
헥터가 루시안에게 다가와서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거대한 팔꿈치로 루시안의 허리를 쿡 찔렀다.
“대공자님. 아기 마님께서 성년이 되면서 결혼이 무효가 되었잖습니까.”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들은 루시안은 사납게 눈매를 찌푸리며 헥터를 바라보았다.
“뭐?”
눈치 없는 헥터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 청혼하면서 반지는 주셨겠죠? 프로포즈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
프로포즈를 했냐고?
루시안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입을 다물었다.
헥터의 말이 맞았다.
아리엘이 성년을 맞으면서 그들이 정식으로 서명했던 결혼은 무효가 되었다.
그리고 반지는…….
루시안은 전투에 나가기 전 다시 보석 달걀 안에 돌려놓았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떠올렸다.
“……반지 아직 안 줬는데.”
그가 말하자 헥터가 화들짝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엥? 아직 프로포즈를 안하셨단 말입니까? 아기 마님이 이후에도 신부가 되어주겠다고 승낙 안하셨어요?”
안했다.
루시안은 둘이 따로 했던 결혼 계약서도 자신이 불태워버렸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는 낮게 신음하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아리엘이 그를 사랑하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결혼 승낙은 받지 못했다.
만일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순간, 무슨 생각이 스친 듯 루시안의 눈빛이 잠시 빛났다.
아리엘이 알면 기겁할 만한, 대륙 전체를 뒤집어놓을 생각이었다.
“승낙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지, 그럼.”
루시안은 날카로운 눈매를 아름답게 휘며 중얼거렸다.
열 살, 앳된 아리엘이 청혼하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첫 결혼 때는 그가 아리엘에게 청혼을 받았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세상 모두가 알도록 그녀에게 청혼하리라.
다른 남자들이 아리엘을 탐낼 생각 따윈 하지도 못하도록.
그리고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되도록 만들 것이다.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루시안의 붉은 입술이 비뚜름히 올라갔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아리엘은 천진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루시안은 위험한 눈빛을 숨긴 채 아리엘에게 다가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앗.”
안고 올려다보자, 아리엘이 사랑스러운 빛깔의 눈동자로 그를 마주보았다.
“아리엘라.”
루시안은 천천히 제 넥타이를 잡아 아리엘의 손에 목줄처럼 쥐여주었다.
그리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녀의 턱에 스치듯 입을 맞췄다.
“내가 네 것이라고 말해 줘.”
토마토처럼 뺨을 붉힌 아리엘이 조그맣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안 놔줄 거예요.”
그 말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루시안이 그녀를 안고 몇 바퀴 돌려주었다.
아리엘은 꺄 비명을 지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그녀의 생일 파티가 어느새 끝나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행복하게 웃었다.
그녀가 있는 곳이 여기라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항상 생일과 같을 테니까.
그렇게, 대공가에서의 아리엘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대공가의 아기 마님> 完
외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