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잠시 후, 결국 아리엘은 숨이 가빠서 루시안을 밀어냈다.
가만히 놔두면 언제까지고 입맞춤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무섭게 달려들던 기세가 무색하게 루시안은 쉽게 밀려나 주었다.
아리엘은 쌕쌕 호흡을 고르며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저…….”
잠시 후 그녀가 작게 입을 떼자 루시안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그가 행복한 것을 감추지 못하며 불안해했다.
“몇 분만. 아니 몇 초만이라도…….”
아리엘은 대답대신 천천히 루시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는 모를 것이다. 지금 그녀가 얼마나 두려운지.
그에게 기댄 그녀의 몸은 잘게 떨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너.”
루시안이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도리질을 쳤다.
“잠깐만, 그냥…… 안아주세요.”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루시안이 아리엘을 제 몸 안에 완전히 가두며 끌어안았다.
체격 차이 때문에 그녀의 여린 몸은 거의 그에게 덮여버렸다.
아리엘은 깊이 눈을 감았다.
죽는 건 무서웠다.
하지만 루시안을 위해서라고 생각할 때는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나니…….
죽음이 그 전보다 몇천, 몇만 배는 무서워졌다.
자신이 사라진 후에 아파하게 될 루시안 때문에.
아리엘이 그의 허리를 더욱 세게 안자, 루시안이 약하게 숨을 참는 소리를 냈다.
‘말해야 해.’
아리엘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루시안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있는데, 그에게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면 그는…….
눈가가 아릿하게 아파오며 눈물이 차올랐다.
루시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 혼자 짊어지고 떠나는 것이 가장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떠나서 죽은 뒤엔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구원받을 테니까.
하지만 루시안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 그 자체가 그에게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었다.
아리엘 자신이라도 그럴 테니까.
그리고 혹시나 나중에라도 그녀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루시안은 다시금 큰 상처를 받게 될 수도 있었다.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게 죄어들었다.
‘그럼…… 어떻게 알려야 하지?’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브루노어의 이야기를 전해서 히스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아리엘은 고통스러워서 힘주어 눈을 감았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야 아프지 않을 텐데, 나 때문에…….
미안해요. ……미안해요, 루시안.
한참 동안 괴로워하던 그녀는 끝내 가까스로 떠올려냈다.
죽었다가 회귀했던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루시안 사실, 난 열일곱 살까지 살았다가 죽었었어요.’
‘미래를 보고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거죠.’
‘그 미래에서 난 열일곱 살 생일에 죽을 운명이에요. 그건 바꿀 수 없는 일이에요.’
루시안이 그 이야기를 믿지 못하면, 녹스 남작이 공격받을 것을 미리 알고 막아달라 했던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그래도 믿지 못하면 카디나의 남동생이 과거와 똑같이 습격당했던 것도 이야기할 것이다.
그래도 믿지 못한다면…….
자신이 타락에게 조종당해 라카트옐 저택을 침입했던 이야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가 죽는다는 걸 루시안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루시안. 사실…….”
그녀가 그렇게 온 힘을 짜내어 입술을 떼는 순간이었다.
펑!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아카데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빛의 여신상이 무언가에 공격받아 팔이 날아갔다.
콰쾅!
깨진 여신상의 팔이 떨어지는 소리가 육중하게 울렸다.
“꺄아악!”
혼잡하게 섞여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리자 주위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루시안은 민첩하게 아리엘을 제 뒤에 숨기고 상황을 살폈다.
적의 공격은 예상하던 바였다.
‘다만, 첩자가 움직였다면 어째서 아직까지 달 그림자의 보고가 들어오지 않은 거지?’
“뭔가 있군.”
루시안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 * *
다이아나와 디트리히는 아리엘과 루시안을 찾아 축제 길 여기저기를 헤맸다.
하지만 두 사람을 찾지 못한 채 거의 길의 끝까지 다다랐다.
그 때, 다이아나의 눈에 낯익은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은…… 안드레 왕자?’
달 그림자의 보고에 따르면, 오델른 왕국 사절단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고 했다.
그런데 사절단과 함께 있어야 할 왕자가 아카데미 안을 활보하고 있다니?
다이아나는 목소리를 죽이고 디트리히에게 왕자의 존재를 알렸다.
“저기 안드레 왕자가 있어요.”
왕자는 손에 쥔 무언가를 들여다보며 길을 거닐고 있었다.
서로를 마주 본 다이아나와 디트리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왕자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빛의 여신상이 폭발한 것은 그때쯤이었다.
펑!
여신상의 팔이 날아가자 주위는 큰 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안드레 왕자는 폭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듯, 놀라지도 않고 주위를 살피더니 은밀히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먹을 꽉 움켜쥔 다이아나가 말했다.
“전하. 여기서 사람들을 대피시키세요. 전 왕자를 뒤쫓을 테니.”
그리고 다이아나는 호위병 두 명을 능숙하게 불렀다.
“나를 따르거라.”
다이아나는 디트리히와 갈라져 안드레의 뒤를 쫓았다.
현장을 잡으려면 들켜선 안 되니 제법 거리를 두고 따라가야 했다.
다이아나는 초조하게 부채를 꺼내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 안드레는 손에 쥔 것을 들여다보느라 주위는 보지 않고 있는 듯했다.
‘저게 뭐길래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거지?’
다이아나는 안드레 왕자가 옆길로 꺾을 때 재빨리 그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했다.
‘손거울?’
손거울 안에 비칠 것이라고 해봤자 고작 제 얼굴뿐일 텐데.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난리통에서 자기 얼굴만 들여다보며 걷고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이아나의 영민한 머리는 곧 다른 가설을 세웠다.
‘혹시 거울 모양의 마도구인가?’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단단히 모아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안드레 왕자와 여신상 폭발이 관련 있다면, 그는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었다.
같은 시각, 베로니카 왕녀도 남동생 안드레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도 손거울을 들고 대공자비를 찾고 있어야 했다.
‘그 손거울…….’
베로니카는 이를 악물었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안드레와 베로니카에게 하나씩 건넨 손거울은 그자에게서 정보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마도구였다.
베로니카는 꺼림칙해서 처박아두고 거의 쓰지 않았지만, 안드레는 달랐다.
그는 홀린 듯이 하루에도 몇 번씩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그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래도 그자와 저 손거울은 이상해.’
미혹된 듯한 안드레의 행동에 베로니카의 마음속에 의심이 싹텄다.
그래서 전야제가 시작하기 전, 베로니카는 어젯밤 검은 망토의 사내에게 받은 물약을 몰래 검사해보았다.
사절단 중에 의학과 마법에 통달한 그녀의 수하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베로니카가 건넨 물약을 확인한 수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왕녀님. 이런 약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무슨 약이기에 그러는가.”
수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건…… 사람 몸속의 마나를 역류시키는 독약입니다.”
“마나를 역류시킨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마법사들은 마나를 가지고 태어나지요. 피가 혈관을 지나는 방향이 있듯이 마나도 몸속을 흐르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이 몸에 닿으면 마나가 흐름을 바꿔 역행할 것이고, 그러면…….”
수하가 목소리를 낮췄다.
“장기가 심각하게 손상돼 피를 토하게 될 겁니다.”
‘……!’
베로니카는 깜짝 놀랐다.
검은 망토의 사내는 분명히 이 약을 대공자비에게 쓰라고 했다.
베로니카가 약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그저 잠들게 하는 향이라고만 대답했었다.
‘역시 거짓말이었어!’
다치지 않게 납치만 한다고 생각했던 베로니카는 뒤늦게 이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안드레는 어디 있지?’
안드레가 섣불리 대공자비에게 이 약을 썼다가는 납치를 하기도 전에 아리엘이 죽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대공자비로 라카트옐을 협박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는커녕, 아리엘을 죽게 만든 책임을 오델른 왕국이 온전히 지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베로니카는 차마 아리엘이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보호 본능에 무척 약한 베로니카는 안 그래도 작은 소녀인 아리엘을 이용한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왕국을 위해서 납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애써 되뇌어 왔는데, 그 일이 아리엘을 심각하게 해치다 못해 죽일 수도 있다니.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베로니카는 황급히 안드레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안드레의 숙소를 찾아갔을 땐 이미 늦어있었다.
안드레는 벌써 제 수하들을 챙겨 사라진 후였다.
‘찾아야 한다.’
베로니카는 당장 후드를 뒤집어쓰고 안드레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찾아다닌 지 한참 만에 그녀는 드디어 남동생을 발견했다.
그런데…….
안드레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서 있었다.
대공자비가 분명했다.
안드레는 천사상 분수대를 사이에 둔 채 아리엘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뚜껑이 열린 약병이 들려있었다.
베로니카는 순간 제 수하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이 약은 너무 독해서 냄새만 맡아도 효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법사들에겐 치명적인 독이지요.’
베로니카는 제발 자신이 먼저 다다를 수 있기를 바라며 속으로 외쳤다.
‘그만둬!’
그녀는 안드레를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해 달렸다.
다이아나가 달려오는 베로니카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저 사람은…… 왕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안드레 왕자의 손에 쥐여 있는 약병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가 다가가는 곳에 누가 있는지도.
‘아리엘!’
주변에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데다, 분수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까지 더해져 기척을 눈치채긴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아리엘! 대공자님!”
동시에 베로니카는 젖먹던 힘을 다해 달려가 안드레의 손목을 낚아챘다.
“멈춰!”
하지만 베로니카가 안드레를 막았을 땐, 이미 루시안이 소드 마나로 그의 팔을 비틀어 잡은 뒤였다.
“무슨 짓거리냐.”
안드레의 손에 들린 물약은 한 방울도 아리엘에게 닿지 못한 채 그대로 병 안에 머물러 있었다.
“크윽……!”
자신이 하려던 짓을 들킨 안드레는 물약 병을 바닥에 내버리고 도주를 시도했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약병이 산산조각나며 흘러내렸고, 도망치려던 안드레는 바로 루시안에게 발목을 채여 바닥에 쓰러졌다.
곧이어 달려온 다이아나가 날카롭게 외쳤다.
“다 봤습니다, 베로니카 왕녀. 왕자가 한 짓도, 당신이 그것을 막으려고 한 것도. 살고 싶다면 당장 실토하세요.”
어느새 검을 소환해 안드레의 목에 겨눈 루시안이 서슬 퍼렇게 끼어들었다.
“뭘 봤다는 거지? 이것들이 아리엘에게-”
하지만 루시안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옆에 선 아리엘이 피를 분수처럼 토해내며 쓰러졌으므로.
* * *
“꺄악! 아리엘!”
다이아나의 새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루시안은 곧장 검을 내던지고 쓰러진 아리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리엘의 머리를 받쳐드는 손이 덜덜 떨렸다.
“왜…….”
아리엘의 낯빛은 거의 백지장에 가까웠고, 기절한 몸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 작은 몸속 피의 얼마만큼을 잃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피가 많이…….”
심지어 아리엘이 방금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루시안은 정신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머릿속에는 의사에게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이아나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베로니카와 안드레 때문에 루시안을 따라가지 못했다.
루시안이 아리엘을 안고 의사에게로 달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디트리히가 도착했다.
“모니카 공녀!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지만 디트리히는 다이아나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다이아나의 눈은 잔뜩 충혈돼 있었고 타국 왕족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침착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달한 다이아나가 말했다.
“전하. 저는 아리엘에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들을 취조해주세요.”
디트리히가 승낙하자 다이아나는 서둘러 아리엘이 있는 아카데미 의무실로 향했다.
아리엘을 안고 먼저 출발한 루시안은 기세를 마구 흘리며 사람들 사이를 갈랐다.
가는 동안 자신의 마나를 아리엘에게 흘려보낼까 했지만, 아리엘의 약해진 몸이 감당하지 못할까 봐 끝내 하지 못했다.
콰앙.
한달음에 의무실로 도착해서 부수듯 문을 열자 의사가 놀라며 달려 나왔다.
루시안은 가장 먼저 눈에 띈 침대 위에 아리엘을 내려놓고 의사의 멱살을 끌어다 침대 옆에 내동댕이치다시피 했다.
“당장……! 당장 내 아내를 좀 봐.”
실눈의 젊은 의사는 황급히 아리엘의 상태를 살피더니 얼굴을 굳혔다.
그는 체온 보존을 위해 아리엘을 천으로 감싸고 응급 처치를 했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하지만 루시안은 제대로 대답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계속 아리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맥박만 수십 번 확인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러니까…… 제길, 갑자기 피를…….”
그가 제 머리를 쥐어뜯듯이 헝클며 더듬더듬 설명을 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단어들이 마구 뒤섞여 나왔다.
그때, 때마침 도착한 다이아나가 나서서 설명을 보탰다.
다이아나의 눈가는 빨갛고 목소리엔 울음이 섞여 있었지만 루시안의 설명보다는 훨씬 나았다.
“누군가가 아리엘에게 약물을 쓰려고 시도했어요. 무슨 약인지는 모르겠지만, 약이 바닥에 쏟아진 후에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요.”
젊은 의사는 진지하게 그 설명을 듣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독약에 당하신 듯하군요. 일단 두 분은 잠시 앉아 계십시오.”
루시안이 진정하지 못하고 침대 주변을 서성이자, 의사가 다이아나와 루시안을 안심시켰다.
“걱정 마십시오. 해독을 한 뒤, 지난번처럼 증상을 가라앉히는 약을 쓸 테니까요.”
반강제로 루시안과 다이아나를 끌어다 입구 쪽 소파에 앉힌 의사는 약을 보관하는 유리 진열장을 열고 몇 가지 약들을 가져와 제조하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의무실의 철제 의자를 붙잡고 기세를 가라앉히려 애쓰다가 애꿎은 철만 우그러뜨리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제발…… 아리엘…….”
그가 얼굴을 감싸고 신음을 내뱉었다.
미친 듯이 동요하는 루시안을 본 다이아나는 조금 놀랐다.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품은 마음쯤이야 진작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이아나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아리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따라 죽기라도 할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진짜 얼굴을 본 것 같네.’
하지만 지금 다이아나도 만만치 않게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다이아나의 머릿속엔 의식을 잃은 채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아리엘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했다.
다이아나는 차가워진 손을 맞붙잡으며 제발, 제발…… 이란 기도만 속으로 반복했다.
그 사이 의사의 솜씨 좋은 손길 아래 약이 빠르게 완성되었다.
마시기 쉽게 작은 약병에 약을 덜어낸 의사가 아리엘의 입술 안으로 물약을 흘려 넣었다.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이제 곧 약 기운이 돌 겁니다. 편안해질 거예요.”
* * *
디트리히는 아리엘에 대한 걱정을 누른 채 베로니카와 안드레를 실내로 끌고 갔다.
달그림자들과 황실 근위병들은 몇 명만 남기고 수호목을 지키도록 보냈다.
실내로 들어간 디트리히는 곧장 검을 빼 안드레의 목에 들이댔다.
온화한 성정으로 유명한 디트리히였지만, 지금 안드레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차갑고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베로니카 왕녀.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즉시 왕자를 죽일 것이오.”
베로니카는 안드레 옆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앞에는 아리엘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장면만 계속 맴돌았다.
마침내 베로니카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모든 걸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이 말부터 들어주십시오. 대공자비님을 위해섭니다.”
그리고 그녀는 제발 늦지 않았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대공자비님이 쓰러진 건 독약 때문입니다. 몸속의 마나를 역류시켜 몸 안을 망가뜨리는 끔찍한…….”
그때 옆에 있던 안드레가 베로니카에게 악을 쓰며 소리쳤다.
“미쳤어? 그걸 말하면 어떡해!”
그 말을 들은 베로니카는 명치를 맞은 것처럼 숨을 멈췄다.
“너, 그걸 알고 있었단 말이냐? 그럼 알고도…….”
약의 정체를 알면서도 아리엘에게 독약을 쓰려 했단 말인가?
그녀의 남동생은 탐욕스러운 걸 넘어서 미쳐버린 게 분명했다.
베로니카는 서둘러 디트리히에게 호소했다.
“당장 해독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들었습니다. 제발 의사에게 이 말을 전해서 도움을 받으십시오.”
베로니카의 간절한 호소는 꽤나 진실되어 보였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그녀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아리엘에게 그 약은 조금도 닿지 않았다고 들었소. 그런데도 독약 때문이라고?”
“사실입니다! 그 약은 공기 중에 섞인 냄새만 맡아도 마법사에겐 치명적이라고 했습니다.”
디트리히는 한걸음 떨어져서 초조하게 입술을 매만졌다.
‘아리엘은 이미 의사에게 보냈다. 마법사 히스클리프에게도 곧장 가보라고 연락을 했으니 치유 마법도 가능할 테지.’
그럼에도 디트리히는 고민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리엘을 위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정보라면…….
그때 바깥에서 달 그림자 단원이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마법진 교란을 했던 자를 찾아냈습니다.”
디트리히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왕자와 왕녀를 바라본 뒤 물었다.
“누구였는가.”
달그림자 단원이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잡지는 못했지만 목격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달그림자의 말을 들은 디트리히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좋지 않은 예감이 그의 가슴 언저리를 싸하게 덮쳤다.
“……가봐야겠다.”
디트리히는 베로니카와 안드레를 가둬놓으라 명하고 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달그림자의 보고가 선뜩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법진 교란을 시도한 건 ……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첩자였단 말인가.
그리고 바로 그자가 있는 곳에 지금…….
‘아리엘이 위험하다!’
디트리히는 건물 앞에 매인 말을 잡아타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루시안은 초조하게 아리엘의 얼굴만 노려보다 의사를 향해 말했다.
“지난번과 같은 약을 썼다고 하지 않았나? 왜 아리엘이 아직 깨어나지 못하는 거지?”
깨어나긴커녕 아리엘의 혈색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아리엘이 누운 침대 옆에 서 있던 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루시안이 재차 성마르게 물었다.
“뭔가 잘못된 건 아닌가?”
파리한 안색으로 누워있는 아리엘을 확인한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 제대로 되고 있어요.”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묘하다는 걸 느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의사가 들고 있던 가위로 제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든 게 내 의도대로 되고 있지.”
‘……!’
막을 새도 없이 그의 손에서 흐른 핏방울이 아리엘의 몸 위로 떨어졌다.
화아아악-!
그러자 돌연 아리엘이 누운 곳에 시커먼 마법진이 생겨나며 그곳에서 강한 바람과 불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쾅-! 콰지지직-!
그 힘에 의무실의 모든 창문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났다.
안의 침대들 또한 죄다 날아갔고, 바람에 튕겨져나간 다이아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크읏……!”
짧은 순간 루시안은 저 마법진이 흑마법술의 일종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증거로 제물이 된 의사의 몸이 마법진에 생기가 빨리는 듯 점점 쭈그러들며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려 의사의 목을 잡고 바닥에 처박았다.
“네놈, 아리엘에게 무슨 짓을……!”
미이라처럼 변해가는 의사가 루시안을 마주보며 기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주인님을 위하여.”
그 순간 의사의 눈이 흰자위를 보이며 뒤집혔다.
그리고 검게 변한 그의 입이 이상한 모양으로 뒤틀리더니, 그 안에서 끼긱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늦었다, 라카트옐. 이미 붉은 머리는 납치 되었으니.”
이건 타락의 목소리……!
루시안은 핏속에서 끓어오르는 광기를 누르며 아리엘 쪽을 확인했다.
타락의 말과는 달리 아리엘의 몸은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였다.
루시안은 황급히 그녀의 몸을 안아들었다.
이곳까지 데려오는 동안 느꼈던 것보다 훨씬 차갑게 식은 체온이 닿았다.
“아리엘……!”
타락의 목소리가 끽끽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제물의 피가 떨어진 순간, 붉은 머리의 의식은 납치되었다.”
루시안은 빠르게 검을 소환해 의사와 아리엘을 연결한 마법진을 깨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타락이 선심이라도 쓰듯 말을 이었다.
“신중해야지. 이 마법진을 깨뜨리면 붉은 머리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텐데.”
루시안은 아리엘을 끌어안은 채, 타락의 목소리가 나오는 곳을 악에 받쳐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미이라가 된 의사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나 구름처럼 희미한 형체를 만들었다.
타락의 형상이었다.
검은 연기가 의사의 약병들 위를 느물거리며 스쳤다.
“처음부터 피를 토하는 데 듣는 약 따위는 없었다. 그건 마나의 흐름을 억제하는 약이었을 뿐이야. 일시적으론…… 그래. 괜찮아지는 것처럼 보였겠지.”
타락 모양의 검은 연기가 끽끽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막혀있는 마나를 아까의 독약으로 펑! 역류시켜 버린 거야. 아마 이 소녀는 피를 꽤 많이 잃었을 게다.”
루시안은 떨리는 팔로 아리엘의 몸을 부서져라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아리엘라, 정신 차려. 제발…… 내 목소리 들어.”
타락은 아리엘에게 온 정신을 쏟고 있는 루시안을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눈을 훔치려고 한 건 애초에 함정이었지. 원래 노리려던 건 이쪽이었다. 수도에 놔두고 왔다면 더 쉬웠을 텐데, 대공자 네놈이 내내 옆을 지키고 있어서 아주 성가셨어.”
검은 연기가 훅 뛰어올라 침대 위 허공을 맴돌았다.
“몸을 납치하는 건 영 어렵더군. 납치한다해도 라카트옐 네놈들에게 금방 빼앗길 테고. 그래서 붉은 머리의 의식을 납치했다. 너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타락이 큰 소리로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트렸다.
루시안은 이를 악물고 한 손으로 검을 움켜 쥐었다.
“의식이 되돌아올 때까지 붉은 머리는 결코 눈을 뜨지 못할 것이다.”
타락이 흡족하게 뇌까렸다.
“또, 함부로 육체와 의식을 연결하는 마법진을 제거했다가는 영원히 의식을 되찾지 못하게 되지. 마치 살아있는 시체처럼……!”
촤악.
루시안의 소드마나가 검은 연기를 베었다.
타락은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소드 마나에 닿은 검은 연기는 형체를 잃고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잠시후, 히스와 디트리히가 차례로 의무실에 도착했다.
디트리히는 뛰어들어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대공자! 당장 의사한테서 아리엘을……!”
도착한 그들은 미이라로 변해버린 의사와 엉망이 된 의무실, 그리고 충혈된 눈으로 창백한 아리엘을 끌어안고 있는 루시안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안 돼.”
디트리히는 자신이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카데미 마법진을 뚫으려는 시도를 한 첩자는 다름 아닌 의사였다.
이곳으로 달려오는 도중, 빛의 여신상을 공격해 축제를 혼란에 빠뜨린 것도 의사였다는 보고를 들었다.
드래곤의 왼쪽 눈을 훔친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아카데미 의사는 몸이 아픈 학생들이나 교수를 진찰하러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신분이 다른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만나 정보를 들을 수 있었고, 수상한 움직임을 보여도 쉽게 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리엘을 안아든 루시안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의 눈은 지금 정신이 나간 듯한 광기를 담고 있었다.
“대공저로 돌아간다. 브루노어에게 보여야겠어.”
피에 젖은 아리엘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서있던 히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일그러진 얼굴로 나섰다.
“마법진을 열게.”
그리곤 곧장 마법을 써서 소형 게이트를 열었다.
루시안과 히스가 대공저로 출발한 뒤, 홀로 남은 디트리히는 기절한 다이아나를 챙겨 모니카 공작저로 이동했다.
한편 축제가 한창이었던 아카데미 광장에선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여신상이 부서지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사고가 있었나보군.”
하지만 파괴된 여신상을 둘러싼 사람들이 말을 주고받던 것도 잠시,
펑-! 펑펑-!
불꽃놀이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축제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광장은 다시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늘엔 화려한 불꽃만이 반짝이다가 이내 천천히 사라져갔다.
* * *
대공저에 도착한 루시안은 소식을 듣고 나온 마티어스와 맞닥뜨렸다.
“아리엘라.”
급하게 뛰쳐나온 듯 항상 단정했던 마티어스의 긴 흑발이 흐트러진 채였다.
늘상 가라앉아 서늘하던 그의 눈 또한 황망하게 이지러져 있었다.
마티어스가 곧장 루시안의 팔에서 아리엘을 빼앗듯 가져갔다.
“대체…… 이게 무슨……!”
루시안은 혼이 팔린 얼굴로 마티어스의 품에 안긴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안고 올 땐 몰랐는데 마티어스에게 들린 모습을 보자 새삼 아리엘이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가 실감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루시안은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떨구며 낮게 침음을 흘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기에 그는 에고를 통해 기억을 전달했다.
“……!”
에고로 흘러들어오는 기억을 느낀 마티어스가 흠칫하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드래곤끼리는 에고를 통해 원하는 기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마티어스에게 기억 전달을 하는 걸 결벽적으로 싫어했기에 지금껏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마티어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 라카트옐은 지체하지 않고 대마법사 브루노어에게 찾아갔다.
거의 넋을 놓아버린 루시안 대신 마티어스가 설명했다.
“의식을 육체에서 분리해서 납치하는 마법을 쓴 것 같다. 이 녀석의 기억 속에서 본 바로는 마법진을 깨뜨리면 의식을 되찾을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
브루노어가 서둘러 아리엘을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제가 직접 봐야겠습니다.”
브루노어는 아리엘의 몸에 남은 흔적을 통해 흑마법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의 모양을 살펴본 브루노어가 놀란 듯 입속말을 했다.
“이건……!”
마법진이 끔찍하게 꼬여있었기에 대마법사인 브루노어도 해독에 오랜 시간을 쏟아야 했다.
두꺼운 마법책이 몇권이나 옆에 쌓이고, 시름이 깊어짐을 보여주듯 브루노어의 이마 주름이 깊게 패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브루노어의 입이 열렸다.
“이건…… 고대 흑마법입니다.”
브루노어의 목소리는 매우 침통했다.
“정확히 말하면 ‘소환술’이지요.”
“소환술?”
숨소리도 내지 않고 기다리던 루시안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브루노어가 시선을 무겁게 내리깔며 대답했다.
“예. 과거, 흑마법사들은 인간의 육체와 의식을 분리하는 법을 연구했었습니다.”
“그런 시도가 있었던 건 에고를 통해 알고 있지만 모두 실패했던 걸로 기억한다. 불가능한 일 아니었나.”
마티어스가 서늘한 목소리로 브루노어를 압박했다.
“무슨 마법인지 정확히 말해라. 아리엘을 구할 방법은 있는 건가.”
브루노어는 목에 뭔가 걸리기라도 한 듯 한참 말을 아끼다, 겨우 설명을 시작했다.
“흑마법은 철저히 인간을 망가뜨릴 용도로 만들어진 겁니다. 제국에서는 오래 전에 금지됐지요. 이 소환술의 경우에는 특히…….”
브루노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인간의 의식을 이공간으로 납치한 뒤 굴복시킵니다. 의식이 굴복하면 육체도 따라서 소환되게 만드는 거죠.”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신을 먼저 빼앗아간 뒤, 정신과 연결된 육체마저도 납치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도중에 연결을 끊으면…….”
“다시는 육체가 깨어날 수 없게 됩니다.”
분명 이론적으로만 가능하고 실제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
브루노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루시안이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의식을 굴복시킨다니, 그건 무슨 뜻이지?”
두려운 질문을 마주했다는 듯 브루노어가 고개를 떨궜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루시안은 신경줄이 끊어지는 듯한 불안을 느꼈다.
“말해라. 어서.”
마티어스의 재촉에 브루노어가 마른침을 한번 삼킨 후 입을 열었다.
“고대 서적에 의하면…… 고문을 한다거나…….”
쾅.
루시안이 뭔가를 집어던졌는지 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흥분한 목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고문? 방금 고문이라고 한 건가?”
마티어스가 브루노어에게 물었다.
“의식만으로도 고문이 가능하다는……?”
“그렇습니다.”
브루노어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꿈을 꿀 때, 꿈속에서도 육체를 가지게 되지요. 아리엘님이 의식 속에서 스스로의 육체를 인식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고문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내 탓이야.”
루시안이 절망하며 이를 갈았다.
“내가 잘못해서, 아리엘이…….”
그는 미친 사람처럼 브루노어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아리엘을 구할 방법은? 방법은 있겠지?”
브루노어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먼저 의식이 납치된 이공간을 찾아야 합니다.”
“찾는 방법은.”
“…….”
루시안이 으르렁거리며 물었지만 브루노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마법사들의 이공간이란 각자가 가진 고유의 것이었다.
사실상 다른 마법사의 이공간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선을 다해 찾아보겠지만…….”
브루노어는 그 이상의 약속을 할 수 없었다.
혈육처럼 아끼는 제자인 아리엘을 잃은 그의 얼굴 또한 비탄에 잠겨 있었다.
“……우선은 피를 많이 흘렸으니 아리엘님께 약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의식을 찾더라도 육체가 그때까지 버티지 못하면 큰일이니까요.”
그는 아리엘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마법약을 지으려 자리를 비웠다.
브루노어마저 사라지자 결국 루시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아리엘의 몸을 붙잡고 그 위에 머리를 기댔다.
“아리엘…….”
하얀 시트 위에 누워있는 아리엘의 얼굴은 시트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창백했다.
감긴 눈과 거의 들리지 않는 숨소리 때문에 마치 깊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리엘의 그 연약한 숨소리가 그의 신경을 갉아 먹는 것 같았다.
루시안은 미친 듯이 제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자책 때문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마티어스. 내가…… 내가 아리엘을 지키지 못했어.”
초점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 있던 마티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둘 다 이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쓰린 회한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괴로워하는 루시안 옆에서 아들을 바라보던 마티어스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아리엘을 누인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래…… 이게 괴로움이군. 이게 상실감이야.”
마티어스의 긴 흑발이 아리엘의 침대 위에 흩어졌다.
“상상이나 했느냐, 루시안? 라카트옐이 이런 걸 느낄 수 있으리라고…….”
아리엘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은 두 남자는 똑같은 절망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마티어스가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 아리엘의 의식이 약해지면 몸마저 납치될 거다. 이대로 이 애를 잃을 순 없어.”
마티어스는 몸을 굽혀 아리엘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 루시안에게 말했다.
“루시안 너는 아리엘 옆을 빈틈없이 지켜라. 나는 타락이 아리엘을 데려간 이공간을 수색할 테니.”
마티어스가 방을 떠난 후, 루시안이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만 저택 안을 가득 채웠다.
* * *
한편, 아리엘은 어딘지 모를 곳에서 눈을 떴다.
“으음…….”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분수대 앞에서 유리병이 떨어져 깨지던 장면과,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피를 토했던 것이었다.
아리엘은 바르작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어나면 의사나 루시안의 얼굴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지금 아리엘이 있는 곳은 사방이 모두 무한하게 깜깜한 공간이었다.
낯선 공간에 와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 아리엘의 심장이 덜컥했다.
‘내가 어디로 와 있는 거지?’
루시안은?
다이아나와 히스, 레온 오라버니는?
마티어스님은 무사하신 건가?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한쪽 방향으로 내달렸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거라면 분명 두드릴 벽이나 문이 있을 터였다.
“하아, 하아…….”
하지만 정신없이 달려봐도 계속 같은 곳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아리엘은 끝내 벽에 닿지 못하고 발을 멈췄다.
“…….”
그녀는 천천히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는 빛이 없는데도 스스로의 손이나 옷이 또렷이 보였다.
아리엘은 고운 미간을 살짝 접었다.
빛이 없다면 내 몸도 보이지 않는 게 정상일 텐데…….
그녀는 혹시 몰라서 마법을 발동해보았다.
“솔라디움.”
주문을 외우자 아리엘의 손에서 밝은 빛의 마법구가 솟아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마법구로 주위를 비춰보았다.
바닥과 천장, 옆의 어둠을.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긴 이상해.’
아리엘은 서서히 이곳이 어딘지 감을 잡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공간 속인 것 같은데…….’
하지만 아리엘 자신이 만든 이공간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스스로가 나가는 방법을 알았을 테니까.
“내가 다른 사람의 이공간에 끌려온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불길한 느낌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자신이 이공간으로 끌려왔다면 루시안도 위험에 빠져 있을지 몰랐다.
‘빨리 나가서 루시안을 도와줘야 해.’
아리엘은 브루노어에게 이공간에 대해 배운 모든 걸 떠올렸다.
루시안 정도의 상식을 거스르는 힘이라면 무조건 이공간을 부수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공간도 ‘공간’이기에 들어오고 나가는 입구가 존재했다.
그 틈은 깊이 숨겨져 있어 발견하기 아주 어렵겠지만…….
‘그곳을 부수면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아리엘은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이공간의 주인이 나타나기 전에 도망쳐야 해.’
다른 마법사가 만든 이공간 안에서 싸우게 되면 이길 확률이 거의 없었다.
지금 이 공간을 다스리는 건 그 마법사일 테니까.
‘한마디로 그자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공간이라는 거지.’
그자가 원한다면 이곳은 풍랑이 치는 바다가 될 수도, 물 한 모금 없는 사막이 될 수도 있었다.
아리엘은 빠르게 바람 원소를 불러냈다.
“실피디아.”
그녀가 명령하자, 바람 원소는 사방으로 퍼지며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바람 원소에 뭔가 닿는 것을 느낀 아리엘은 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달려가자 쓰러진 남자가 보였다.
‘여기에 끌려온 게 나뿐만이 아니었던 건가?’
아리엘은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레 그의 어깨에 손을 댔다.
그러자 남자의 몸이 힘없이 기울며 그의 얼굴이 보였다.
“……!”
그의 얼굴을 확인한 아리엘은 비명을 삼키며 넘어져 뒷걸음질을 쳤다.
시야가 새하얗게 점멸하면서 숨이 막혀왔다.
남자는 쓰러진 게 아니었다.
그는 눈을 뜬 채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얼굴은-
“루시안…….”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데, 바닥을 짚은 손끝에 뭔가가 닿았다.
아리엘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 쓰러진 사람이 한 명 더 보였다.
긴 흑발 머리, 감긴 눈, 생기 없이 늘어진 단단한 목.
“마티어스님…….”
호흡이 턱 끝까지 밀려 올라왔다.
아리엘은 사시나무처럼 떨며 무릎걸음으로 마티어스에게 기어갔다.
말도 안 돼.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이 당했을 리가 없어.
그동안 내가 몰랐을 리가 없어.
두 사람은 강하잖아. 불사라고 했잖아.
아무도 해칠 수 없다고…….
아리엘의 눈에 정신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흐느끼며 마티어스의 손을 만져보았다.
아리엘의 머리를 항상 따뜻하게 쓰다듬던 그 커다란 손은 시체가 되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아리엘은 패닉 상태에 빠져 루시안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의 몸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아리엘이 사랑하는 푸른 눈이 감기지 못한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냐. 이런…… 이럴 리…….”
그러다 문득 주위를 둘러본 아리엘은 보고 말았다.
그녀의 주위에서 죽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수잔, 알렌, 다이아나, 세실, 달튼, 헥터…….
아리엘이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어 있었다.
“왜…… 왜……?”
그녀는 수잔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수잔, 수잔.…… 눈 좀 떠봐요. 수잔…….”
햇볕 내음이 풍기던 수잔에게서는 지금 싸늘한 피비린내만 풍겼다.
아리엘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뼛속까지 절망이 찾아왔다.
‘난……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요?’
루시안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마티어스를 잃는다는 건 생각해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너무 큰 고통 때문에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어지럽고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더 이상 살아있고 싶지 않았다.
떠난 사람들 곁으로 따라가고 싶었다.
아리엘의 눈에 죽은 랄프의 허리춤에 매인 레이피어가 보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검을 손에 넣었다.
‘그래, 나도…….’
나도 죽으면 따라갈 수 있어.
잠시의 고통만 참으면 루시안을 만날 수 있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루시안…….
그때 문득 아리엘의 눈에 루시안의 옷차림이 들어왔다.
“……아.”
아까 자신이 쓰러지기 전까지 루시안이 입고 있던 옷과 달랐다.
그걸 발견한 순간 기묘한 위화감이 아리엘의 본능을 건드렸다.
이상해.
죽은 루시안과 마티어스를 본 충격 때문에 마비되었던 이성이 천천히 되돌아왔다.
뭔가 이상해. 말이 안 되잖아.
분명 라카트옐을 죽일 수 있는 건 크림슨 하트뿐이라고 했는데.
나는 절대로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을 죽이지 않아.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이 겹쳐져서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손에서 레이피어를 놓았다.
칼이 떨어지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만약 이게 현실이 아니라면?’
현실일 리가 없었다.
아리엘은 분명히 어둠의 신이 내린 예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언을 듣지 못했다면 믿었을지도 모른다.
적의 손에 드래곤의 왼쪽 눈이 있고, 수호목이 안전한지 지금 그녀는 알지 못하는 상태니까.
아리엘은 웅크려 앉아서 팔로 떨리는 제 몸을 감쌌다.
“진정해, 아리엘. 진정해야 해…….”
그녀는 스스로에게 거듭 되뇌기 시작했다.
이건 실제가 아니야. 현실이 아니야.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이 죽었을 리가 없어.
적이 미르와 미카까지 해칠 이유가 없잖아.
믿으면…… 믿으면 안 돼.
“여길 나가야 해.”
그럼 밖에 루시안이, 살아있는 루시안이 있을 거야.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아리엘은 입술을 세게 깨물고 공격 마법구를 만들어냈다.
트라우마 때문에 사용을 꺼리는 마법이었지만, 아리엘은 공격 마법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이공간을 깨뜨리기 위해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뻗고 마법구를 전방으로 세게 터트렸다.
폭발음과 함께 서 있는 곳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충격 때문에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아리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주변의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녀는 놀란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몸에 오한이 돌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정말로 현실이 아니었던 건가?
긴장이 풀린 아리엘은 바닥에 주저앉아 가슴께를 부여잡고 호흡을 고르려고 애썼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리엘의 심장이 다시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멀리 있는 윤곽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루시안.
“루시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절박하게 그를 불렀다.
다행히 부르는 소리가 닿았는지 루시안이 아리엘 쪽을 쳐다보았다.
아리엘은 허겁지겁 그에게 달려갔다. 몇번이나 넘어질 뻔하면서.
‘역시 살아있었어.’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루시안이 이렇게 찾으러 올 텐데, 바보같이 내가…….
아리엘은 온 힘을 다해 달려가 루시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루시안, 루시안…….”
그녀는 주문처럼 그의 이름을 되뇌며 루시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아까, 시체가…… 전 꼭 죽은 줄로만 알고…… 너무 무서웠…….”
정신없이 말하고 있는데, 마주 안아줄 줄 알았던 루시안이 그녀를 천천히 떼어냈다.
아리엘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루시안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 가슴이 선득했다.
지금 그는 얼어붙을 듯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시안의 아름다운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날 속였더군.”
아리엘은 젖은 속눈썹을 깜박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여길 나가야 하는데. 이곳에 있으면 위험한데.
루시안이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가증스러워. 과거엔 날 죽이러 왔던 주제에, 모른 척 안주인 자리에 기어들어 오다니.”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루시안…….”
경멸하는 시선이 그녀의 가슴 한복판에 아프게 박혔다.
“다 알아냈다. 네가 회귀한 뒤에 의도적으로 대공가에 들어왔다는 것을. 내가 그 사실을 알고도 널 옆에 둘 줄 알았나?”
무슨 대답이든 하고 싶었지만 목이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만 들뿐이었다.
그녀를 보던 루시안이 성가시다는 듯 경고했다.
“집을 나가라.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아.’
아리엘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루시안은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건 여태 그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과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 철저하게 버림받고 있는 것이었다.
아리엘은 어쩔 줄 모르다가 가냘프게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그 손을 차갑게 막았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마티어스님……?”
방금까지 그의 시체를 봤기 때문일까.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행동보다도 그가 안전하다는 사실 때문에 감격해서 매달렸다.
“마티어스님, 괜찮으세요? 다치신 데는…….”
그러자 마티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아리엘에게 말했다.
“뻔뻔하군. 아직도 나를 그렇게 부르다니.”
천둥소리가 들린 것도 아닌데 귓전이 먹먹해졌다.
마티어스가 충격으로 굳어버린 아리엘의 작은 손을 뿌리치며 돌아섰다.
“네가 우릴 속였다는 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널 들이지 않았을 거다.”
말을 마친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그녀를 버려둔 채 멀어져갔다.
아리엘은 차마 그들의 뒤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멀어져 가는 걸 그저 두고 볼 수도 없어서 그쪽으로 몇 걸음을 내디뎠다.
‘집을 나가라 하시면 나갈게요. 제가 밉다 하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두 사람은…… 안전하게 나가야 하는데…….’
몸에 진짜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른다 해도 이처럼 아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가증스럽다며 그녀를 내치는 루시안과 마티어스의 시선을 떠올리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앞이 눈물로 뿌옇게 흐려졌다.
이젠 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빠져나가서 뭘 하겠는가.
어차피 이곳을 나가도 루시안이 없을 텐데.
마티어스를 다시는 보지 못할 텐데…….
그렇게 멈춰서서 멀어지는 두 사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아리엘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그래도 나가야 해.’
어차피 그들을 떠나려고까지 생각했던 자신이다.
둘에게 버림받더라도 크림슨 하트만은 안전하게 지켜서 돌려줄 것이었다.
그것만이 아리엘에게 남은 소망의 전부였다.
그러려면 나가야 해.
아리엘은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이미 시야에 보이지 않는 둘을 따라 달리다가, 아리엘은 갑작스러운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떻게 내가 회귀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말하려고 하는 순간 사건이 일어나서 아직 밝히지 못했는데…….
한 가지 의문이 들자 다른 의문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고 해도 이상해.
나는 누구에게도 내가 과거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말한 적이 없는걸.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아는 두 사람은 저렇게 행동하지 않아.’
루시안이 그녀에게 말했던 고백들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널 사랑해. 아리엘라. 제발 날 떠나지 마.’
그리고 마티어스가 해주었던 말들도 아리엘은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너는 영원히 우리의 약점이자 사랑스러운 존재일 거다. 아리엘.’
그들이 했던 말을 되새기자, 비로소 고통이 옅어지면서 제대로 된 사고가 가능해졌다.
아리엘은 두 사람에게 들었던 말들을 산소처럼 들이마시며 간신히 호흡을 이었다.
드디어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달리던 것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여기서 내가 보고 듣는 것은 모두 다 진짜가 아니야.”
이 이공간의 주인이 그녀에게 보여주는 것일 뿐인 거다.
깨달음과 동시에, 어딘가에서 소름 끼치는 타락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네가 본 게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 * *
그 말이 들린 직후, 갑자기 아리엘의 눈앞에 검은 망토를 쓴 형체가 나타났다.
“……타락!”
아리엘은 곧장 그의 공격에 대비해 마나 쉴드를 시전했다.
하지만 타락은 공격하려는 기미 없이 미끄러지듯 그녀 앞에 멈춰 섰다.
끼긱거리는 타락의 목소리는 어린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욱 끔찍하고 괴이했다.
“만일 현실이면 어떡하려고?”
아리엘은 검은 망토 안쪽의 뻥 뚫린 공간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아니란 거 알아.”
방금까지 ‘그’가 자신에게 루시안의 죽은 모습을 꾸며냈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새파란 분노로 물들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타락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런. 인간의 두려움은 어느 정도 현실에 기반해 있지. 그러니 너도 그리 두려워한 것 아니냐.”
그가 사실만 말해준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내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라카트옐의 죽음은 현실이나 다름없는 셈이지.”
아리엘은 입술을 세게 깨물며 날카롭게 대꾸했다.
“난 아직 네 손에 들어가지 않았어.”
과거에 그에게 속했던 경험이 있는 아리엘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완전히 타락의 손에 들어갔다면 이런 이공간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아리엘의 말에 타락이 낮게 웃는 소리를 냈다.
“똑똑하구나. 하지만 곧 널 얻게 될 거야.”
그가 아리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리엘은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준비해둔 마법구를 그를 향해 폭발시켰다.
펑!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마법구는 타락을 통과해서 허공에 터져버렸다.
“……!”
타락은 옷자락 하나 상하지 않은 채 아리엘을 향해 다가왔다.
망토 안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공간의 주인에게 공격이 통할 것 같으냐?”
그의 시체처럼 희고 차가운 손이 아리엘의 턱을 잡아 들어올렸다.
“하나 묻지.”
타락이 진심으로 그녀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네가 내 것이 된 뒤에도 라카트옐이 널 그 전처럼 사랑할 것 같으냐?”
아리엘은 대답 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생각이 모두 드러난 듯, 타락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순진할 데가.”
그가 쇳소리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라카트옐은 크림슨 하트를 사랑하지, 널 사랑하는 게 아니다.”
아리엘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직접 하는 말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도 없었다.
“네 말 따윈 믿지 않아……!”
아리엘은 다시 마법구를 생성해 가까이 있는 타락에게 터트렸다.
하지만 이번에 던진 마법구는 통과되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구는 반사되어 그녀에게 돌아왔다.
“……!”
아리엘은 자신이 한 공격에 타격을 입고 저 멀리 튕겨 나가 처박혔다.
몸의 뼈가 몇 개쯤 부러진 듯 상당한 고통이 찾아왔다.
“흐윽……!”
타락이 쓰러진 그녀를 차가운 뱀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크림슨 하트만 아니라면 너는 그들에게 똑같은 벌레일 뿐이야. 한없이 하찮지.”
그리고 그는 아리엘을 향해 길고 섬뜩한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렇게.”
그 순간, 아리엘에게 찾아온 것은 온몸을 꿰뚫는 끔찍한 통증이었다.
강한 전류로 온몸을 지지는 것같이 새하얀 고통이 밀려왔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서 가장 강렬한 고통이었다.
타락에게 만족감을 주지 않으려 피가 고이도록 입안을 깨물며 참으려 했지만, 이 고통은 견딜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아아아악!”
아리엘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억겁 같은 몇 초 후, 타락이 손가락을 거두었다.
동시에 아리엘에게 가해지던 고통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하아…… 흐, 하아…….”
그녀는 겨우 숨만 몰아쉬며 누워있었다.
타락이 아리엘 주위를 거닐며 나직하게 말했다.
“라카트옐이 크림슨 하트를 사랑하는 이유가 뭐라고 하더냐.”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잃어버린 심장이라서?
혼잣말처럼 뇌까린 타락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들이 뭐라고 했든 거짓말이란다.”
타락이 쓰러져있는 아리엘에게 가까이 와 몸을 굽혔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끝내고 싶어 해. 그뿐이다. 블루문 때마다 찾아오는 고통 말이야. 너도 가까이에서 봤으니 잘 알겠지?”
그가 딱하다는 듯 땀에 젖은 아리엘의 뺨을 손톱으로 어루만졌다.
스치는 곳마다 소름이 끼쳤지만, 아리엘은 결박 마법에라도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블루문 때마다 그런 고통을 당하는데도…… 널 예뻐한다는 이유로 크림슨 하트를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나? 이런 고통인데도?”
다음 순간 다시 끔찍한 고문이 시작됐다.
“아아악!”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불에 달군 대패로 살을 저미는 듯한 끔찍한 고통뿐이었다.
목이 쉴 때까지 비명을 지르고 또 질러도 사라지지 않는 고통.
타락의 목소리만 생생하게 귓전에 울렸다.
“이젠 알 때도 됐지 않느냐. 라카트옐이 널 집에 들였던 이유를.”
잠시 고문이 멈추었다.
숨을 헐떡이며 흐느끼는 아리엘에게 타락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들은 널 죽여서 심장을 빼내려고 집에 들인 거란다, 아이야. 처음부터 이용하려고 했던 거야.”
고통이 중단된 이 순간이 마약처럼 달콤하게 핏속에 퍼졌다.
그런 그녀를 알아주듯 타락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들을 미워해. 증오하고, 배신해. 그들을 죽여. 그러면 너는 산단다.”
타락의 손이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네가 사는 것 말고 뭐가 중요하지? 사랑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다.”
아리엘은 이를 악물고 그의 손을 떨쳐냈다.
“나…… 한테서…… 더러운 손 떼.”
“오.”
그녀가 고문에도 꺾이지 않고 반항하자 타락은 놀란 것 같았다.
그가 몸을 일으켜서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그럼 이건 어떠냐?”
타락이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게 제안했다.
“네가 그들을 구하는 거야. 네가 생각해도 이런 건 끔찍하지 않으냐?”
그가 손끝을 까딱이자 아리엘에게 또다시 고통이 밀려들었다.
“아아악!”
머리가 아득하게 비어가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이런 고통을 겪었다는 것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영영 구원받을 수 없는 고통을…….
타락이 그녀의 생각 사이를 교활하게 파고들었다.
“라카트옐은 줄곧 이 고통을 겪어왔다. 죽음은 그들이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야.”
그가 끊임없이 속삭이며 아리엘의 저항을 무너뜨렸다.
“어차피 그들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이 땅에 그들이 진정으로 애착하는 것 따윈 없어.”
너무 아파서 제대로 된 생각이 되지 않았다.
“너만이 그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 라카트옐을 죽이는 거야.”
그녀가 그러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이 고문은 그칠 것이다.
타락이 원하는 것은 아리엘을 꺾어 제 뜻대로 조종하는 것일 테니까.
고문이 길어질수록 점점 저항이 흐려졌다.
아파. 너무 아파요.
루시안, 마티어스님, 누구든 나 좀 구해주세요. 도와주세요.
엄마…… 엄마…… 제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요.
저 달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될 텐데.
‘하지만 나는…….’
아리엘은 루시안과 손을 잡고 걸었던 축제 길을 떠올렸다.
밝고 아름다운 불빛들, 단단하고 아름다운 루시안의 손, 두근대던 심장 소리.
잡았던 그 손 때문에…….
‘나는 결코 놓을 수가 없는걸요.’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엘은 다시 깜깜한 고통 속으로 잠겨 들었다.
* * *
황태자 디트리히는 오델른 왕국 사절단 모두를 끌고 가 심문했다.
안드레 왕자가 아리엘을 해치는데 공모한 것은 매우 심각한 국제 문제였다.
베로니카 왕녀는 오델른 국왕 대신 용서를 구했다.
“제가 모두 실토하는 대가로 왕국 멸망만은 막아주십시오.”
왕녀는 라카트옐이 2년 전 시에나 왕국을 멸망시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디트리히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리엘 대공자비가 깨어나면 가능하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멸망을 막을 길은 없소.”
아리엘을 잃는다면 ‘응징하는 라카트옐’은 오델른 왕국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대공과 대공자 둘 다 그럴 상태가 아니지만…….’
디트리히는 폐쇄된 라카트옐 저택을 떠올리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베로니카는 아리엘이 무사히 깨어났을 경우, 면책을 해준다는 조건으로 모든 것을 고백했다.
수상한 자가 국왕에게 접근해 아리엘 납치를 부추겼다는 것.
아리엘을 볼모로 라카트옐을 협박해 제국에 반기를 들려고 했다는 것.
그것에 가담해야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해서 자신과 안드레가 사절단으로 왔다는 것.
황제와 황태자가 오델른 왕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 다이아나가 나서서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그녀는 이번 일의 목격자로서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베로니카 왕녀에게 기회를 주죠.”
황제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모니카 공녀, 그게 무슨 뜻인가?”
“폐하. 오델른 왕국은 척박하지만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요충지입니다. 오델른이 없으면 동쪽 왕국들과의 외교에 차질이 발생할 겁니다.”
“그렇긴 하지.”
현명한 다이아나의 설명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왕국 내에 반란의 씨를 제거하는 것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디트리히가 다이아나의 의중을 파악하고 말했다.
“그 일을 베로니카 왕녀에게 맡기자는 뜻이군요.”
“예.”
다이아나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오델른 왕국의 썩은 부분을 도려낼 칼을 쥐여주는 겁니다. 베로니카 왕녀라면 뭐가 옳은지 판단할 수 있을 거예요.”
황제와 황태자는 다이아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라카트옐과 타락의 싸움을 드러내지 않고, 전쟁 없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아주 적격인 의견이었다.
“좋다. 공녀의 말대로 하지.”
황제로부터 관대한 제안을 받은 베로니카 왕녀는 깊은 감사를 표하며 승낙했다.
다이아나는 베로니카가 떠나기 전, 싸늘하게 경고했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길 바랍니다, 베로니카 왕녀. 아리엘이 깨어나더라도 오델른은 라카트옐에게 자비를 구해야 할 거예요.”
제국 황실의 면책을 받은 것이지 라카트옐에게 받은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다이아나는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아리엘에게도 사과를 전해야 마땅하고요. 안 그러면 라카트옐 뿐 아니라 저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정치적으론 타당한 합의점을 조율한 다이아나였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아리엘 생각뿐이었다.
베로니카가 진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겁니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아리엘이 깨어난다면 아리엘에게 진 빚은 반드시 갚겠다고 맹세했다.
“부디 쾌차해 주시기만을…… 바라겠습니다.”
그 후 제국 기사단의 원조를 받은 베로니카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함께 국왕인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어 승리했고,
“오늘부터 오델른 왕국을 다스리는 것은 베로니카 국왕님이십니다!”
국왕이 되어 직접 남동생 안드레를 처벌함으로써 제국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 * *
상황이 일단락된 뒤, 다이아나와 디트리히는 함께 태후를 만나러 갔다.
“태후 마마께서 상심이 크시다 들었어요.”
다이아나가 말하자 디트리히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할마마마께서 큰 실의에 빠지셨습니다. 늦게 찾은 손녀마저 잃으실까 매일 빛의 신전을 찾아 기도를 드리시지요.”
그가 이어 물었다.
“공녀께도 대공가에서 아무 연락이 없습니까?”
다이아나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 방문도 거절당했고요.”
아리엘의 의식이 납치된 후 대공가 저택은 아예 문을 걸어 잠갔다.
가까운 친지나 친구에게조차 마찬가지였다.
디트리히나 다이아나도 찾아가 봤지만, 굳게 닫힌 대공가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법사 히스클리프에게 연락을 넣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도 함께 방법을 찾아 헤매는 것 같았어요.”
이쯤 되자 사교계에도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요즘 대공자는 쓰러진 대공자비 옆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않는다더군.”
“대공은 어떻고. 그 집은 아예 어둠에 잠겼어.”
“대공님이 백방으로 다니시지만, 대마법사조차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던데요.”
다이아나는 황궁에 있는 세실을 자주 찾아가 함께 아리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리엘이 깨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세실은 보기 드물게 눈물까지 보였다.
두 소녀는 함께 부둥켜안고 울며 아리엘이 깨어나기만을 빌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계절은 어느새 가을이 되었다.
* * *
가을을 맞은 라카트옐 저택의 풍경은 예년과 전혀 달랐다.
한창 아름답게 단풍이 들어야 할 저택 숲은 라카트옐 두 명의 기세 때문에 잎이 다 져버려서 겨울처럼 앙상했고, 건물은 폐가처럼 을씨년했다.
햇빛이 밝은 날에도 대공저 주변은 폭풍처럼 암울한 기운이 둘러싸고 있어 어두컴컴하게 느껴졌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고 유령처럼 지나다녔고, 기사단은 전시처럼 엄중히 저택 주위를 지켰다.
한때 아리엘이 뛰어놀던 정원과 온실, 모닥불 가든은 모두 빛을 잃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녀를 위해 매일 과자를 굽던 화덕에도 불이 꺼진지 오래였다.
라카트옐 대공가에는 죽음의 기운만 가득했다.
아직도 안주인인 아리엘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시안은 폐인이 된 채 아리엘이 있는 방에 붙박여 지냈다.
돈과 정보와 시간, 사람 등 쓸 수 있는 것을 모두 동원했음에도 그들은 여태 아리엘의 의식을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마티어스도 말이 아닌 상태로 직접 대륙의 최남단부터 샅샅이 뒤지고 있었지만 수확이 없었다.
애초에 아리엘의 의식이 납치된 곳은 이공간으로, 그곳은 만든 사람이 아니면 찾아낼 수 없는 곳이었다.
드래곤의 피를 이은 라카트옐의 힘으로도 불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아리엘…….”
그녀의 옆에 앉은 루시안의 퀭한 두 눈은 탁하고 어두웠다.
고통으로 수척해진 얼굴 안에는 세상 모두에게서 피를 보고 싶은 광기가 갇혀있었다.
광기를 억누른 그의 표정은 어둠이 내려앉은 천사의 얼굴 아니면 숨이 멎을 듯한 비탄을 그려낸 명화 같았다.
그에게 드리운 그늘마저도 섬뜩하게 아름다운 미색이었지만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시안의 시선은 오로지 아리엘에게만 향해 있었다.
아리엘은 지금 석조로 만든 침대에 고이 누여있었다.
그녀의 몸은 의식이 납치당한 그때에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였다.
그리고 아리엘의 육체가 여전히 여기에 누워있다는 건…….
아직도 그녀가 싸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루시안은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미칠 듯한 광증을 느꼈다.
“차라리 포기해, 이 바보야.”
감긴 그녀의 눈은 고요했고 표정은 바람없는 곳의 수면처럼 잠잠했지만 루시안은 그녀가 겪고 있을 고통 때문에 당장 제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루시안은 아리엘의 차가운 뺨에 얼굴을 비비며 애원했다.
“버티지 말고 그냥…….”
한참을 그렇게 대답 없는 아리엘에게 말을 걸던 그는 그녀의 몸을 안고 방을 나섰다.
창백한 피부에 햇빛이라도 쐬어주기 위함이었다.
아리엘을 안은 채 을씨년스러운 블랙 가든을 거닐던 루시안은 그들이 함께 소풍을 갔던 그 가을날을 떠올렸다.
아리엘의 친모가 로잘린드 공주였음이 밝혀졌던 때.
그 때 아리엘과 마티어스, 자신은 거울 호수에서 가을 소풍을 즐겼었다.
모닥불의 불그스레한 빛에 비친 아리엘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떠오르자 뱃속이 아프게 죄어들었다.
“……거기 다시 가보고 싶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루시안은 문득 발작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이대로 아리엘이 영영 깨어나지 않아, 다시는 함께 거울 호수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지금 가야겠군.”
루시안은 아리엘을 안고 당장 채비를 해서 나섰다.
게이트를 지나서 녹스 영지에 도착하자, 타는 듯한 주홍빛으로 물든 메타세콰이아 나무가 지천에 깔려 아름다운 광경을 펼쳤다.
루시안은 천천히 호수까지 이어진 길을 걸었다.
눈을 감은 아리엘이 이 장면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온갖 원소들에게 사랑받는 그녀이니 직접 봤다면 즐거워했을 것이다.
한없이 느리게 걸었지만 결국 거울 호수는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루시안은 호숫가에 앉아 아리엘의 몸을 가만히 제 어깨에 기대놓았다.
거울 호수는 오늘도 그저 맑고 잔잔하기만 하여, 하늘을 고스란히 비춰놓았다.
마치 다른 세계와 이어놓은 통로처럼…….
루시안은 아리엘의 머리에 조용히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리엘. 아리엘. 미쳐버릴 것 같아.
눈 좀 떠줘. 여기 좋아했잖아, 응?
루시안은 머릿속으로 속삭였다.
세계와 완전히 상관없는 곳처럼 호수 주변은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마치 세상에 둘 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같이.
이대로 아리엘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몇천 몇만 번을 했는지 모를 가정이 다시 그의 정신을 후려쳤다.
루시안은 날카로운 고통에 숨을 들이쉬며 아리엘과의 추억을 되새겼다.
좋았던, 행복했던 추억들에 그는 간신히 매달렸다.
기억이 가장 최근에 그녀가 마음을 말해줬던 시간에 닿았다.
아리엘이 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귓전을 맴돌았다.
‘2년 전 거울 호수에서…… 나 뭔가를 봤어요. 열일곱 살이 된 내 모습이었죠.’
그 때 아리엘은 그녀의 옆에 그가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나,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성년이 되어서도 루시안 곁에 있는 것이었나 봐요.’
그리고 울음과 함께 흘러나오던 고백.
‘사랑해요, 루시안.’
거기까지 떠올린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품 속의 아리엘을 부서져라 세게 끌어안았다.
절망과 고통이 그를 몸부림치게 했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그거였다고, 겨우 들었는데…….”
그는 아리엘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이를 악물었다.
계약결혼을 한 뒤 루시안은 줄곧 아리엘이 원하는 것이 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명예를 사랑하지도, 돈을 기뻐하지도 않았다.
지극히 아름다운 것도 아리엘을 유혹하지 못했고 무서운 협박도 그녀를 꺾지는 못했다.
그런 아리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자신이었다고 했다.
거울 호수가 그녀의 마음을 비추어 보여주었노라고.
“……흐윽.”
루시안은 억누른 신음을 뱉었다.
그는 자신이 에덴 스톤을 얻기 위해 호수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보았던 장면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6년 전부터 그것은 언제나 똑같은 장면이었다.
뒤돌아 서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
소녀가 걸어가면 보석 같은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리고, 그것을 보는 자신은 늘 그 움직임에 넋을 잃는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가 뒤돌아 그를 바라본다.
생기가 도는 우윳빛의 뺨에 천천히 미소가 떠오르다가…….
끝내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
아리엘이 자라남에 따라 그녀의 모습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가 보는 것은 언제나 같았다.
그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아리엘의 모습이었다.
그 고통스러운 잔상에 눈을 질끈 감은 루시안은 누워 있는 그녀의 머리에 제 이마를 문질렀다.
“나도…… 널 봤다고 말해주지 못했어.”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항상 너였다는 말을…….
날카로운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친 것은 그 때였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
루시안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실성한 듯 말이 흘러나왔다.
“……맞아, 내가 원하는 것.”
라카트옐과 거울 호수가 반응하면 라카트옐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보게 된다.
거울 호수 가장 깊은 곳에 박힌 드래곤의 오른 눈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바라는 것…….”
루시안은 지난 마수 전쟁 이후로 거울 호수를 찾지 않았다.
국경을 지킬 결계석을 모두 재정비했으니 호수에 닿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거울 호수와 반응하면 무엇이 보일까?
루시안의 호흡이 흥분으로 불규칙하게 흐트러졌다.
“지금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아리엘의 의식이 있는 곳을 찾는 거야.”
루시안은 아리엘을 제 외투에 감싸 잔디에 곱게 눕혀두고 정신없이 호수로 다가갔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호숫물을 움켜 제 얼굴에 흐르게했다.
대리석 조각상같은 아름다운 얼굴에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그 순간, 무언가 장면이 그의 머릿속에 파앗. 그림처럼 떠올랐다.
* * *
루시안의 눈앞에 보인 장면은 어떤 공간이었다.
그러나 짧게 보였다 사라진 그 장면은 너무나 희뿌얘서 어떤 것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놀라서 숨을 헐떡였다.
지금껏 본적 없는, 새로운 장면을 본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봤던 것과 다른 것이 떠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희망이 생겼다.
“보였어. 분명…….”
날듯이 대공저로 복귀한 그는 마티어스에게 아리엘을 맡기고 다시 호수로 돌아왔다.
거울 호수를 내려다보는 루시안의 눈은 푸른 불꽃을 먹은 듯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거울 호수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호수 안에 맺히는 에덴스톤, 즉 결계석 때문이었다.
그리고 거울 호수 안으로 들어가는 건…… 매우 큰 고통을 동반했다.
‘정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기분이지.’
보통 사람들은 물의 저항을 받아서 물속에서 움직이기 힘들지만, 라카트옐은 예외였다.
우월한 피를 지닌 라카트옐은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고 호흡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라카트옐도 거울 호수 안에서만은 자유롭지 못했다.
애초에 거울 호수는 드래곤의 눈이 심겨져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침입자들로부터 눈을 지키기 위해 거울 호수의 물은 매우 차갑고 위험했다.
물이라기보다는 칼날 같은 물질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어.”
루시안이 들끓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일지라도 상관없지.”
아리엘을 찾을 수만 있다면. 구해낼 수 있다면.
망토를 풀어낸 루시안은 그대로 호수 안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갔다.
희뿌연 장면이 다시 머릿속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한 움큼의 물과 반응했을 때보다는 조금 덜 탁한 느낌이었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서 낭떠러지같이 깊어지는 물속으로 그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푸그르르르.
거울 호수의 물속은 수면에서 들어오는 빛이 없어 어두웠다.
살이 에이는 듯한 물의 온도도 라카트옐에게는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루시안은 해왔던 대로 물 아래 푸른 결계석이 빛나는 곳까지 물살을 가르며 내려갔다.
길고 늘씬한 몸체가 유연하게 물을 밀어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물의 압력이 더욱 심해졌다. 육체를 짜부라뜨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결계석이 맺히는 곳은 호수의 중간쯤.
더 이상 안쪽으로는 들어가 본 일이 없었다. 필요가 없었으니까.
몇천 년 동안 쌓여온 드래곤의 에고 속에는 그 안에 대한 지식 또한 있었다.
끝없는 어둠과 갈수록 더해지는 위험.
하지만 결국 선대 라카트옐은 호수 저 깊은 곳에서도 원하는 죽음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라카트옐의 피가 물려내려온 것을 보니.
결계석이 환히 비추는 곳에 도달하자 흐릿한 장면은 좀 더 선명해졌다.
언뜻, 붉은 머리카락을 본 듯도 했다.
루시안은 하아 숨을 내뱉었다.
물속에서 부그르르 공기가 맺혀 흩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결계석 아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결계석을 지나자, 귀 안이 터졌는지 시야에 제 피가 번졌다.
바깥이라면 피가 흐를 틈도 없이 아물었을 상처는 낫지 않고 계속 피를 흘려냈다.
거울 호수 안에서는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
루시안은 오직 그 희뿌연 영상을 선명히 보려는 욕망 하나로 온 몸을 베고 지나가는 물을 헤쳐 나갔다.
‘아리엘의 의식이 있는 위치를 보여줘.’
깊숙이 내려갈수록 영상은 또렷해지고 있었다.
갈망으로 속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의 귀부터 시작된 출혈은 다른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물을 한번 해칠 때마다 손과 발, 얼굴, 몸의 사방에 상처가 생겨서 피가 빠져나갔다.
호수가 그의 피를 게걸스레 받아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물지 않는 상처는 한줄기 두줄기 늘어나서 온 몸을 뒤덮었다.
점점 아래로, 아래로.
영상이 선명해짐과 반대로 그의 의식은 흐려지고 있었다.
끝내 루시안은 물을 헤칠 힘을 잃고 부유하다 가라앉기 시작했다.
무수한 상처들에서 피를 흘리며, 어디에 닿을지 알 수 없는 깊은 심연 속으로.
결국 죽음의 경계까지.
그리고 마침내.
루시안은 어둠과 맞닿았다.
* * *
희미한 의식 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내 피를 이은 사내야,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냐.]
.
.
.
아리엘라를 찾으러 왔다. 그 애가 어디 있는지 말해.
.
.
.
[너는 그 애가 있는 곳을 알게 될 것이다. 이곳은 진실을 보여주는 호수니까.]
.
.
.
[하지만, 진실은 때론 가혹한 법. 네가 원하는 진실만 가지고 올라갈 순 없지.]
.
.
.
[이것도 알려주마.]
오래묵은 용의 비늘같은 것이 루시안의 얼굴을 다정히 훑었다.
[네 소녀가 언제 죽게 되는지, 그 애의 수명을.]
그렇게 기어코 잔인한 진실이 그의 앞에 열리고 있었다.
* * *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호수 밖을 빠져나온 루시안은 피와 물로 붉게 젖은 채 풀밭에 고꾸라졌다.
“으윽……!”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상처들은 빠르게 아물고 있었지만, 말도 안 되게 몸이 약해진 것이 실감되었다.
온 몸의 뼈마디가 모두 부서진 듯 뼈끼리 붙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젖은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드래곤의 피가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혈관을 휘도는 것에 토기가 치밀며 머리가 핑 돌았다.
“흐으, 하아…….”
라카트옐로서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제 몸의 상처를 돌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루시안은 지독한 분노로 떨고 있었다.
“하…… 그래서 떠나려고 한 거였어, 아리엘라?”
그에 의해 쥐어뜯긴 풀과 흙덩이가 피투성이인 손 안에서 으스러졌다.
루시안은 자신이 라키엘의 의식과 닿았을 때를 회상했다.
호수 아래로 내려갈수록 보이는 것은 점점 선명해졌다.
그것을 끝까지 확인하기 위해 그는 악착같이 의식을 붙들었지만 온 몸의 피를 거의 잃고 난 뒤에는 가라앉는 것 외엔 할 수 없었다.
무기력하게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며 루시안은 작게 비소를 머금었다.
‘그렇다해도 어차피 죽을 수는 없는 것을.’
그는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물을 헤친 피부는 벌어지지 않은 곳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상처로 가득해 흉측했다.
그 모습마저 점점 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생 처음으로 의식을 잃는 순간.
루시안은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깊은 울림이 있는 존재의 음성이었다.
[처음이구나. 내 피를 이은 것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그 순간 루시안은 알 수 있었다.
그의 혈관에 흐르는 드래곤의 피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자가 어둠의 신이자 초대 드래곤, 라키엘이라는 것을.
* * *
그렇게 만나게 된 라키엘의 의식은 루시안에게 아리엘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너무나 은밀히 감춰져 있어서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그곳을.
그리고 그 대가로 라키엘은 다른 것 또한 보여주었다.
오래 전 그가 라카트옐이란 존재를 만들 때, 직접 내린 예언에 대하여.
크림슨 하트는 성년이 될 때까지 살다가 죽을 것이고, 그래야만 심장이 원주인에게 돌아간다는 것.
예언을 들은 루시안은 거센 충격에 휩싸인 채 분노를 터뜨렸다.
“수명을 알려주겠다는 얘기가 이거였나?”
17세가 되면 아리엘이 죽는다고?
그 애가 원한 것은……
산더미같은 황금이나 황제의 왕좌가 아니라 고작 성년이 되는 것뿐이었는데.
어둠의 신이란 게 뭐기에 그 소원을 방해하나.
“네까짓 것이 뭔데, 감히 내 아내의 운명을 결정해.”
루시안은 예언을 뱉은 라키엘을 향해 망설임없이 검을 뽑았다.
그는 응징하는 라카트옐이었다.
그리고 아리엘의 미래를 망친 자를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너부터 죽여주지.”
라키엘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되받았다.
의식만 남은 세계였기에 둘의 싸움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결판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은 결국 라키엘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의미없는 짓이다. 내 예언은 돌이킬 수 없으니.]
루시안은 아랑곳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하아, 돌려 놔. 흐…… 그 애가 알기 전에 당장!”
라키엘의 의식이 한숨처럼 대답했다.
[네 소녀는 이미 그 예언을 들었다.]
루시안의 공격이 멈추었다.
“뭐……?”
[그랬기에…….]
파앗- 루시안의 눈앞에 다른 영상이 펼쳐졌다.
라키엘이 보여준 것은 아리엘의 모습이었다.
대부분은 그도 함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첫 부분은 그 또한 처음 보는 장면들이었다.
스스로가 죽게 된다는 걸 깨달은 후, 아리엘이 방 안에서 혼자 조용히 우는 모습.
그의 방에 제가 선물로 받은 것들을 가져다 놓으며 지었던 쓸쓸한 표정.
얼음별 탑에서 다툰 뒤 그가 먼저 내려가 버리자 뒤따라 오던 아픈 시선.
“…….”
라키엘의 권능 앞에서 루시안은 그저 말을 잃고 아리엘의 모습에 혼을 팔았다.
조그맣게 그녀의 생각이 들려왔다.
‘당신을 위해 떠날 거예요. 루시안이 죽어야만, 내가 살 수 있다면.’
‘내가 아니라 당신이 살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여기까지다.]
목소리가 들린 후 시야에 강한 빛이 터졌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루시안은 라키엘의 의식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호수의 수면 위로 밀려나 물 밖으로 엉망인 몸을 이끌어냈다.
“흐으…… 하, 윽…….”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하루아침에 단호하게 떠나겠다 말하던 아리엘의 행동들이.
그를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떨리는 여린 어깨를 주체하지 못하던 그녀가.
루시안은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꽉 다물린 잇새에서 단어가 갈려 나왔다.
“바보같은 게. 저 혼자 끌어안고 떠나겠다면 내가 좋아할 줄 알고……!”
그는 부러진 팔을 신경 쓰지 않고 땅에 내리쳤다.
그리고 처절하게 고함을 질렀다.
“크아아악!”
죽여버릴 거야. 어둠의 신이든, 누구든 숨을 끊어놓을 거야.
세상 모든 것을 향한 증오가 생생하게 끓어올랐다.
“……절대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간신히 몸을 일으킬 상태가 된 루시안은 이를 악물고 일어나며 예언의 세 번째 마디를 곱씹었다.
[크림슨 하트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마지막 라카트옐을 죽여야 한다.]
바꿔 말하면 마지막 라카트옐이 죽으면, 크림슨 하트는 죽지 않는다는 거다.
루시안은 일어나며 피에 젖은 옷으로 입가의 피를 닦았다.
퀭하니 빈 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 속에 광기 어린 기쁨이 맴돌았다.
그는 잠시 붉은 입술을 비틀었지만, 곧 몸을 추스르고 채비를 했다.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아리엘을 찾으러 가야 해.”
루시안은 반쯤 회복된 몸을 이끌고 라키엘이 알려준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아리엘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허기가 느껴져도 음식이 주어지지 않았다.
추워서 온 몸이 덜덜 떨려도 덮을 모포 하나 없었다.
그러나 죽음 또한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루시안, 어디 있어요?’
마법으로 타락과 싸워보려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었고, 고문은 불규칙하게 그녀를 찾아와 헤집어놓았다.
잠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이제 아리엘의 일과는 너덜너덜해진 채 루시안을 부르는 것만으로 채워졌다.
‘루시안, 루시안…….’
핏물같은 것이 울컥 목구멍을 넘어왔다.
오랜만에 눈물이 한 줄기 메마른 뺨을 타고 내렸다.
‘마티어스님, 제발, 제 목소리 좀 들어주세요.’
저 너무 아파요. 괴로워요. 추워요.
어떻게 더 버텨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약해질 때마다 타락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아리엘을 흔들었다.
-버텨도 소용없다. 아무도 널 찾지 않아.
원념처럼 달라붙는 타락의 부름을 힘겹게 흘려내며 아리엘은 극한의 고비를 맛보았다.
뿌리치기가 너무 어려워.
이젠 쉬고 싶어.
엄마…… 저 좀 데려가 주세요.
점점 눈이 감겼다.
‘루시안이 보고 싶어요.’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죽기 전에 한 번만 더…….
타락의 목소리가 유혹적으로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보여주마. 나와 손을 잡으면 그를 다시 볼 수 있어.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대공자를.
이젠 한계라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엘은 지친 눈꺼풀을 느리게 밀어올렸다.
‘하지만 쉬더라도.’
죽더라도 네게 굴복하고 죽진 않아!
곧 자신의 힘이 다할 것을 예감한 아리엘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속으로 간청했다.
‘드래곤의 심장…… 정말로 제 심장이 크림슨 하트라면, 저를 루시안에게로 데려가 주세요.’
‘그에게 이 심장을 전해주고 죽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녀의 절박한 소원에 화답하듯 심장이 파닥파닥 뛰었다.
동시에 그곳에서부터 아주 작은 온기가 아리엘의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까딱도 할 수 없는 손 대신 몸을 매개로 마법구를 만들었다.
그녀가 구사하는 마법 중에 가장 마나를 많이 잡아먹는 원소 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
환한 빛이 터짐과 동시에 아리엘은 정신을 잃었다.
이게 마지막 남은 힘이었음을 느끼며.
* * *
타락의 이공간은 결계에 둘러 싸여 버려진 숲에 숨겨져 있었다.
루시안이 소드 마나를 두른 검으로 결계를 찢자, 마수들이 나타나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키에에에-!
루시안은 긴 촉수를 가진 마수를 검기로 베어낸 뒤,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촉수를 소드 마나로 태워버렸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그에게서 뿜어나오는 힘은 가공할 만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주위는 마수들의 시체로 가득해졌다.
루시안은 피가 흐르는 검을 질질 끌며 마수들이 지키고 있던 폐건물로 다가갔다.
버려진지 오래된 듯한 건물은 가시덤불로 둘러싸여 입구가 모두 막혀 있었다.
루시안은 날선 기세를 풀어놓으며 건물을 노려보았다.
아리엘의 의식을 납치한 이공간은 저곳에 숨겨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균열을 일으켜야 했다.
그는 건물을 무너뜨려서라도 이공간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브루노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리엘을 구할 방법은? 방법은 있겠지?’
‘먼저 의식이 납치된 이공간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브루노어는 후에 설명을 덧붙였다.
‘이공간 안으로 끌려간 의식은 그 이공간이 부숴지면 풀려나게 됩니다. 그럼…… 깨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루시안은 검을 세게 고쳐잡았다.
“저것만 부수면 구할 수 있어.”
타앗-!
그는 마수의 시체를 밟고 높이 뛰어오른 뒤, 검에 검기를 응축해 밀어넣었다.
검 주위를 검푸른 소드 마나가 섬뜩하게 둘러쌌다.
루시안이 건물을 향해 막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드드드드.
땅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건물의 어느 지점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마치 마법을 쓸 때 나는 빛 같았다.
루시안은 본능적으로 저것이 자신이 찾던 이공간의 균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부숴주지.”
그는 빛이 새어 나오는 지점을 향해 정확히 일격을 날렸다.
쾅! 치지지지직-!
검날과 이공간의 경계가 부딪히며 갈리는 듯한 소음이 지축을 울렸다.
하지만 라카트옐의 소드 마나 앞에서 이 세상의 물질은 힘이 없었다.
쩌저적.
루시안의 칼날이 깊이 들어가자 이공간은 시커먼 입을 벌리며 회오리치다 산산이 깨져버렸다.
후우우웅-!
직후에 바람 소리 같은 것이 울리더니 깨진 틈 사이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튀어나왔다.
기괴한 목소리가 끔찍하게 비명을 지르다가 외쳤다.
“크아아! 붉은 머리가 또 일을 망쳤구나! 거의 막바지였던 것을……!”
지난번에도 보았던 타락의 그림자였다.
타락은 라카트옐과 직접 마주치는 걸 피하기 위해 이런 그림자나 안개의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검은 안개가 소름 끼치는 얼굴 모양으로 뭉쳐지더니 웅웅 울리는 목소리를 냈다.
“대체 어떻게 여길 찾아낸 거지?”
라카트옐이라 할지라도 쉬이 찾을 수 없는 곳이었는데!
분통하다는 듯 이를 간 타락은 곧 쉿쉿거리며 루시안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분함을 억누르는 기색으로 말했다.
“붉은 머리의 의식은 되돌아갔지만 나는 잃은 것이 없다. 그것을 고문하는 동안 아주 즐거웠거든.”
고문.
검을 쥔 루시안의 손이 분노로 떨리기 시작했다.
죽여버리겠어. 맹세코 갈기갈기 찢어서…….
그의 잇새로 억눌린 말이 새어 나왔다.
“나와. 숨지 말고 나와서 싸워.”
당장 이리 나오란 말이다!
심상치 않은 기세가 드드드 땅을 진동시켰다.
하지만 타락은 끽끽대며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너는 아직 날 죽일 수 없지. 그리고 날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게 아니냐?”
이어 타락이 소름 끼치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가여운 네 크림슨 하트에게 알려줬다. 라카트옐이 크림슨 하트를 어떻게 이용하려고 했는지.”
‘……!’
루시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은 안개의 아가리 안에 검을 박아넣었다.
타락이 사라진 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감싸쥔 그는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주위의 물체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아리엘이 알아버렸다.
처음에 자신이 그녀를 신부로 맞은 이유가, 그 생명을 빼앗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 * *
아리엘을 처음 만났던, 6년 전 그 날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그래. 호기심이었다.
라카트옐이 몇 천 년을 기다려온 크림슨 하트의 존재가 궁금했다.
마티어스가 알아서 처리하게 놔둬도 될 것을, 굳이 찾아가 본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어린 것이 겁도 모르고 괴물 소굴에 발을 들이밀었다.
소녀는 어디로 도망쳤더라도 이곳보단 안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늦었지. 이미 내 손에 들어왔으니.’
아리엘이 마나로 만든 나비를 흡족하게 손아귀에 가두며 루시안은 생각했었다.
드디어 라카트옐의 숙원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드래곤 라키엘로 돌아갈 수 있다. 별것도 아닌 7년의 시간 뒤에.
흥분으로 온몸의 피가 끓었다.
“다 자란 크림슨 하트를 죽이고, 심장을 꺼내어 두 눈과 함께 흡수하기만 하면…….”
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아리엘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저와 결혼해주세요.’
그녀와 마주한 순간 루시안은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느껴본 감각이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어리고 연약한 붉은 머리의 소녀는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난생처음 마주한 감정은, 순식간에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변질시켰다.
‘내가 그렇게 하면. 넌 내게 뭘 줄 수 있지? 난 딱히 원하는 것이 없는데.’
어디까지나 거짓이었다.
그는 이 조그만 여자애에게 원하는 바가 확실히 있었다.
그 작은 몸 안에서 파닥파닥 뛰고 있는 심장.
그녀가 죽음과 맞바꿔 내놓아야 하는 대가를, 그는 원했다.
그러나 가두어두고 방치하려는 계획 따위는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
‘제가 열일곱 살 성인이 될 때까지만 당신의 아내로 살게 해주세요.’
찾아온 소녀는 공교롭게도 7년을 요구했다.
그에게 필요한 딱 7년의 시간을.
그냥 납치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루시안은 감정에 휩쓸려 결혼을 승낙했다.
그것은 결혼의 탈을 쓴 먹이 사냥이었다.
‘내가 없을 때 네 보호자는 마티어스 대공이야.’
마티어스에게 맡겨두고 저택을 떠날 때도 소녀를 죽이려는 생각이 바뀐 건 아니었다.
그저 비쩍 곯은 아리엘이 포동포동해진 것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물론 죽이긴 죽일 것이다.
다만 좀 더 살찌우고, 좀 더 행복하게 만든 뒤에.
그의 옆에서 아리엘은 끝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천적의 손에 떨어진 사냥감은 제 운명도 모른 채 방긋방긋 잘도 웃고, 포식자의 소굴에서 새근새근 평안히 잠들었다.
뿐만 아니라 집 안에 온통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존재를 키워갔다.
심지어 자신과 마티어스를 두려워하긴커녕 먼저 다가오기까지 했다.
뭔가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결국, 아리엘이 열한 살이 되던 생일날.
그의 정체를 알아버린 그녀에게 루시안은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자신을 무서워하길 바랐다.
피하고 증오하며 밀어내서, 그가 예정대로 그녀를 죽일 수 있는 구실이 되어주기를.
그러나 아리엘은 오히려 그를 끌어안았다.
불쌍해하며 안아주었다.
그 순간 루시안은 깨달았다.
‘나는 이 애를 죽일 수 없다.’
7년이 지나도, 그 뒤에도 영영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아리엘은 라카트옐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결국 루시안은 아리엘에게 나머지 삶을 선물하기로 했다.
17세가 지나도, 오래오래도록.
이 애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켜주기로.
시간이 흘러 제국 사냥대회에서 아리엘이 마수에게 죽을 뻔한 것을 막았을 때, 루시안은 마침내 자각하고 말았다.
아리엘을 죽일 수 없는 것뿐 아니라, 아리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마티어스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아버린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인 거냐.’
‘그때도 말했었지. 얘가 내 것이 되겠다고 했다고. 그러니 난 얘를 빼앗기거나, 죽게 내버려 둘 생각 따위, 없다고.’
‘그때 했던 말. 지금은 의미가 다르지 않나?’
마티어스의 말이 옳았다.
자신이 한 말은 똑같을지언정 그 의미는 달랐다.
처음에는 아리엘을 죽이기 위해 소유했다면, 이제는 지켜주기 위해 품 안에 두고 있었다.
그때 루시안은 생각했다.
자신만 블루문 고통에 순응한다면, 아리엘과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가 아리엘을 죽이기 위해 이 집에 들였다는 사실을 영원히 감춘 채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물론 그녀가 성년이 되는 날 죽는다는 걸 몰랐을 때의 일이었다.
* * *
마티어스는 늘어진 아리엘의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침대 위로 올려주었다.
하얗고 조그만 손을 지켜보던 그는 아리엘의 손을 쥐고 그 위에 이마를 대었다.
“……아리엘라.”
아리엘의 의식이 납치된 후로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한시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눈을 붙이더라도 잠시뿐.
언제 아리엘의 육체가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평안히 쉴 수는 없었다.
루시안은 아리엘의 손목에 제 마정석 팔찌를 되돌려놓았다.
아리엘의 몸마저 납치되었을 때 위치를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마티어스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발…… 무사히 돌아와다오.”
잠시도 아리엘 옆을 떠나려 하지 않던 루시안이 그녀를 맡기고 나갔는 건 무언가 알아냈다는 걸 의미했다.
분명 아리엘의 의식이 납치된 곳과 관련된 것이리라.
“구하러 간 것이겠지.”
마티어스는 아리엘의 손을 다시 조심히 침대 위에 올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알 수 없는 초조감이 찾아들어, 그는 아리엘이 있는 방 바깥으로 나왔다.
아리엘의 방에는 이중 삼중의 결계가 되어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 정도는 안전했다.
마티어스가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수잔이 들어갔다.
수잔은 누워있는 아리엘을 위해 매일매일 커튼 색을 바꿔주며 신경을 썼다.
“우리 아기 마님, 잠들어서라도 지루하시면 안 되니까…….”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세상에! 아기 마님!”
기쁨에 찬 수잔의 비명소리가 방 밖으로 새어 나왔다.
* * *
눈을 떴을 때 아리엘이 처음 본 것은 낯익은 천장이었다.
크림색 바탕에 작은 꽃과 은사 문양. 그녀 방에 있는 침대 커튼도 보였다.
꼭 평범한 날의 아침처럼 자신의 방에서 눈을 뜬 것 같았다.
‘또 속는 건가?’
이젠 더 이상 속기 싫은데.
아리엘은 치미는 그리움을 누르며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귓가에 사부작사부작 수잔이 움직이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수잔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포근한 향기도 느껴졌다.
잠시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속더라도 보고 싶어.’
현실이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수잔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아리엘은 눈을 뜨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커튼 천을 솜씨 좋게 매만지는 수잔의 뒷모습이 보였다.
막을 새도 없이 주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기 전에 소원을 들어주는 건가 봐.’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 속에서 행복의 불씨가 튀어 올랐다.
아, 그럼 루시안도 볼 수 있겠네. 마티어스님도…….
아리엘은 누운 몸을 일으켰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꿈이라면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그녀가 일어나며 바스락 소리가 나자, 수잔이 뒤를 돌아보았다.
“…….”
어…… 수잔, 왜 그런 표정을 짓나요?
지금 수잔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서둘러 눈을 비빈 수잔이 비명처럼 외쳤다.
“세상에! 아기 마님!”
한달음에 가까이 온 수잔이 아리엘의 머리며 얼굴을 정신없이 어루만졌다.
“깨어나셨구나, 깨어나셨어!”
아리엘은 멍하니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수잔. 수잔이다. 내가 사랑하는 수잔.
지금은 그 사실만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힘드셨어요. 이렇게 어리고 작은데, 얼마나…….”
수잔이 펑펑 울며 아리엘의 등을 쓸어주었다.
아리엘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어쩜, 현실이 아닌데도 이렇게 현실 같을까. 진짜 수잔 같아.
잠시 눈물 바람을 한 수잔은 아리엘이 가만히 있자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으신가요? 아니, 내가 무슨 말을…… 자그마치 몇 달 동안을 납치당해 계셨던 분한테.”
그 말에 아리엘은 의아해져서 입을 열었다.
“몇 달이…… 지났어요?”
메마른 목에선 아주 작은 목소리밖엔 나오지 않았다.
수잔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아리엘의 하얀 뺨을 쓸었다.
아리엘은 그 손길이 너무 좋아서 눈을 감았다.
수잔이 울먹이며 말했다.
“11월이 되었어요, 아기 마님…….”
아리엘은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싱그런 푸른 잎이 가득하던 나무들이 이파리 없이 앙상하게 변해 있었다.
나뭇잎 그늘이 사라진 자리로 해가 비쳐 들어왔다.
“…….”
천천히 정신이 들었다.
온통 검정 일색인 이공간 안에는 계절이나 햇빛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여긴……?
‘나 돌아온 건가? 하지만 어떻게……?’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신의 긴 흑발 남자가 들어왔다.
아리엘을 발견한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빛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아리엘라.”
아리엘은 숨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았다.
마티어스님이다.
어떡해. 어떡하지? 너무 보고 싶었는데…… 뭐부터 말해야 할지 생각이-
그때, 잠시 멈춰있던 마티어스가 성큼성큼 다가와 아리엘을 와락 끌어안았다.
“……돌아왔구나.”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항상 무심하고 서늘한 태도인 마티어스가 이런 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마주한 그의 상태가 아리엘을 슬프게 했다.
‘마티어스님 얼굴이 엉망이야…….’
라카트옐의 육체는 웬만해서는 상하지 않는다.
아마 바깥사람들은 마티어스의 얼굴이 뭐가 달라졌는지 모를 것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곁에 있었던 아리엘은 그간 마티어스가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환상이 아니야. 환상일 수가 없어.’
아리엘은 드디어 현실임을 실감하고 마티어스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마티어스님.”
그녀를 소중하게 감싸 안고 있던 마티어스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그런 마티어스와 눈물을 쉴 새 없이 훔치고 있는 수잔의 곁에서 아리엘은 안도하며 눈을 꼭 감았다.
* * *
아리엘이 깨어났다는 소식은 빠르게 저택에 퍼져나갔다.
수잔과 하녀들, 알렌과 달튼, 브루노어, 기사단이 모두 몰려와서 기뻐했다.
소식을 들은 세실은 당장 황실에 휴가를 요청하러 갔고, 다이아나는 이동마법 펜던트를 사용해 곧장 달려왔다.
“아리엘!”
깨어난 아리엘을 본 다이아나는 체통도 잊고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울음을 터트렸다.
“흑, 나, 난…… 네가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오면서부터 울었는지 다이아나의 손수건은 이미 흠뻑 젖어있었다.
“다시는 널 못 보는 줄 알고 얼마나 슬펐는데…… 흐어엉.”
아리엘은 6년 전 다이아나와 처음 만났던 날 그랬던 것처럼 어쩔 줄 몰라하며 친구를 달랬다.
“울지 마, 다이아나. 울지 마. 뚝.”
“흐윽, 복수하려고 정보 길드랑 손잡고 흑, 관련된 사람 다 족쳐놨어. 나 잘했지?”
어?
다이아나를 토닥이던 아리엘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친구에게서 낯익은 라카트옐의 향기가 나는데, 기분 탓이겠지?
“아기 마님!”
“아리엘님!”
아리엘을 보는 사람마다 웃음과 울음을 터트리며 기뻐했다.
그들을 보는 아리엘도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집에 왔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수잔이 부산스레 가져온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아리엘은 마티어스에게 물었다.
“저, 루시안은요?”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답했다.
“그 녀석이 널 구하러 갔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미처 듣지 못했지. 곧 돌아올 게다.”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의 심장이 파닥파닥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루시안이 날 구하러 왔었어. 이제 곧 루시안을 볼 수 있어.’
때맞추어 하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공자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아리엘은 힘없는 다리로 낑낑대며 일어났다.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주위에서 말렸지만 루시안과 만나는 걸 단 한 순간도 늦추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다이아나와 수잔이 양옆에서 아리엘을 부축해주었다.
현관까지 나가자 루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아…….”
그를 눈에 담자마자 갑자기 감격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춰서 있는 사이 그녀를 발견한 루시안이 다가왔다.
“루시안!”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달려가 쓰러지듯 그에게 안겼다.
넘어지는 그녀를 받아 안은 루시안이 순간 엄청난 힘으로 아리엘을 세게 끌어안았다.
아리엘은 숨이 막혔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난 정말 바보였어. 루시안과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나는 절대 루시안을 떠날 수 없는데…….’
루시안이 마치 그녀의 향기를 삼키려는 듯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깨어난 아리엘을 보자 여태까지의 고통이 다 사라지는 듯했다.
그는 마약처럼 핏속에 번지는 황홀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아리엘, 날 용서하지 마.’
극도의 행복감과 동시에 가슴 안에서 쓴 것이 번졌다.
예언 때문이었다.
아리엘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라카트옐이란 존재 때문에 어른이 되어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지옥에나 떨어지라지. 어둠의 신 따위.’
루시안은 아리엘을 끌어안은 채, 저 뒤편에 서 있는 마티어스에게 기억을 전이했다.
기억을 넘겨받은 마티어스가 경악하며 얼어붙는 것이 보였다.
루시안은 천천히 아리엘을 떼어냈다.
차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그는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리엘라.”
아리엘은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루시안의 얼굴을 바라본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루시안의 얼굴은 이공간에서 봤던 환각처럼 냉담하게 굳어있었다.
“루시안……?”
루시안이 그녀의 뒤에 선 수많은 사람들을 성가시다는 듯 바라본 뒤 중얼거렸다.
“구경꾼이 너무 많군.”
그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자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가 사라졌다.
공간 이동을 시켜버린 것 같았다.
유일하게 남은 수잔과 다이아나가 놀란 듯 작게 소리를 질렀지만 루시안은 개의치 않고 다시 아리엘에게 눈길을 돌렸다.
곧 예언에 따라 죽게 될 그의 사랑스러운 꼬맹이 아내.
‘운명대로 흘러가게 놔둘 생각은 없어.’
그의 재능은 날 때부터 지금껏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운명도 파괴할 것이다.
그는 붉은 입술을 비틀며 쓰게 웃었다.
아리엘라. 내가 없어져야 네가 살 수 있다면…… 난 죽을 생각이야.
‘그리고 내가 죽는 것을 마음 약한 네가 볼 필요는 없지.’
그러니 위악이라도 떨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시안은 그녀에게 결코 닿지 않을 고백을 속으로만 남겼다.
사랑해. 네게 열일곱 살의 너를 선물해줄게.
* * *
마침내 루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떨어져 있는 수잔과 다이아나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네가 다 알아버렸다더군. 라카트옐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널 들였는지.”
그의 말에 아리엘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루시안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겠지만 맞아, 난 너를 죽이려고 들였어.”
“…….”
“7년 후에도 넌 내 것일 거라는 말도, 널 죽여서 흡수할 생각으로 한 말이었지.”
아리엘의 눈빛이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다시 고요해졌다.
그녀가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대답했다.
“들었지만 상관없어요. 내가…… 루시안을 사랑하니까요.”
루시안은 도리어 이를 악물었다.
그래. 넌 이런 애였지.
괴물을 괴물로 보지 않는.
그녀를 죽이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무너뜨린 것도 이런 아리엘이었다.
“상관이 없다?”
그는 날카롭게 되묻고는 혀를 찼다.
“넌 항상 그런 식이로군. 날 미워해야지. 증오하고 배신감을 느껴야지. 이렇게 순진하니까…… 결국 널 죽게 만들 나를 믿은 거야.”
아리엘은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해.’
왜 타락과 똑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루시안. 왜…….
그녀의 마음도 모른 채 루시안은 더없이 냉정하게 속삭였다.
“내가 널 사랑한단 말을 믿었나? 그게 네 손으로 심장을 꺼내다 바치게 하려는 속임수였다는 것도 모르고?”
아리엘의 눈앞이 아찔하게 어지러워졌다.
“…….”
그녀는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겨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요. 속임수였대도 상관없어. 당장 심장을 내놓으라 해도 줄게요. 그러니까…….”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루시안을 미워하라고 하지 말아요. 내겐 불가능한 일인데.
나만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도 상관없으니까…….
그때,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루시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해를 못하는군.”
그가 잔인하게 못을 박았다.
“이젠 네가 필요 없어졌어.”
‘……!’
아리엘의 숨이 멈추었다.
루시안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제 말이 아리엘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히는 것을.
그녀가 상처받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한참 만에 아리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이제 겨우, 집에 왔는데…….”
그렇게 말한 그녀가 무너지듯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루시안은 아리엘을 외면했다.
달래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다 거짓이라고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네가 날 사랑할수록 넌 더 상처받을 뿐이니.
차라리 날 미워하는 편이 나을 거다.
고개를 떨군 채 가냘프게 어깨를 움츠린 아리엘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럼, 한 번만 더 안아주면 안 돼요……?”
아리엘은 그 말 밖에는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마지막이라면 다시 한번 안기고 싶었다.
루시안, 나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아파서 몇 번이나 죽고 싶었어요.
당신 아니었으면 못 버텼을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많이 힘들었으니까…… 한 번만요.
“제발…….”
온 힘을 다해 짜낸 말에 루시안은 답이 없었다.
시야에는 흰 마디가 드러나게 쥐인 그의 주먹만 보였다.
이내 고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데리고 나가.”
아리엘 뒤에 있는 수잔과 다이아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이 다가와 아리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대공가에서 내보내라는 뜻이다. 황궁으로 데리고 가.”
“도, 도련님.”
수잔이 마티어스를 돌아보며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그들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루시안이 서늘하게 협박을 내뱉었다.
“당장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지금 얠 해치겠어.”
진심인 듯 그에게서는 첨예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섬뜩한 경고에 다이아나와 수잔은 일단 아리엘을 부축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그들에겐 아리엘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아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안 가요…….”
많이 안 바라는데. 한 번만 안아주면 정말 갈 건데.
이렇게 헤어지면 저는 어떻게 하라고…….
하지만 루시안은 한 점 자비도 없이 잔인하게 돌아섰다.
아리엘은 다이아나와 수잔에게 붙잡힌 채, 멀어지는 그를 애타게 불렀다.
“루시안! 루시안……!”
이상해요. 꿈이 끝났는데 왜 악몽이 이어지나요?
아리엘의 약해진 몸은 거기까지의 시간만을 허락했다.
루시안을 부르던 아리엘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 순간 루시안을 막아야 할 마티어스는 망연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현실이었으니까.
라카트옐은 더 이상 아리엘을 데리고 있을 자격이 없었다.
자신들 때문에 아리엘이 죽게 될 것이므로.
“루시안…….”
의식이 천천히 꺼져가는 것을 느끼며, 아리엘은 끝까지 돌아 서 있는 루시안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리엘이 쓰러지자 수잔과 다이아나는 깜짝 놀랐다.
“아리엘! 아리엘, 괜찮아?”
“정신을 잃으셨나 봐요, 어서 눕혀드려야……!”
차갑게 등을 보이고 있던 루시안이 그제서야 휙 돌아섰다.
수잔과 다이아나의 팔 안에서 힘없이 쓰러져있는 작은 아리엘의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신없이 아리엘에게 다가가는가 싶던 루시안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르고 그는 자신의 갈망을 배반하며 다시 뒤로 돌아섰다.
마치 몸을 강제로 돌려세우는 것처럼 뼈마디가 으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소름이 돋을 만큼 낮아진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데려가라. 내 눈앞에서 보이지 않도록.”
다이아나와 수잔은 아리엘을 데리고 황궁으로 향했다.
태후가 아리엘에게 내린 여름궁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아리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루시안은 곧장 소드 마스터인 헥터, 랄프, 네드를 불러서 명령했다.
“너희를 아리엘의 호위로 보내겠다. 개미 한 마리 주위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지켜.”
그렇게 아리엘이 대공저를 완전히 떠난 뒤.
마티어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절망한 낯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리엘이 죽는다는 예언이라니…….
긴 흑발이 쏟아져 내려 수려한 손 위로 흐드러졌다.
어느새 마티어스의 앞에 선 루시안이 낮게 입을 열었다.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겠지.”
마티어스는 고개를 들고 아들을 마주 보았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검을 소환한 루시안이 마티어스의 앞에 제 검을 던져놓았다.
무장을 해제한 것이었다.
오만한 웃음을 머금은 마지막 라카트옐은,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나를 죽여. 마티어스.”
* * *
뒤늦게 아리엘이 깨어났단 소식을 듣고 대공저로 돌아온 히스는 라카트옐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대공자가 죽지 않으면 아리엘이 죽는다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리엘이 왜. 그녀가 왜 죽는단 말인가.
그는 놀란 호흡을 억눌렀다.
그 순간 불청객을 알아챈 두 라카트옐의 눈이 찰나 짐승처럼 번득였다.
하지만 그들은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가차 없이 인기척을 무시해버렸다.
조금 더 엿듣던 히스는 루시안과 마티어스의 대화에 등장하는 다른 이름을 듣게 되었다.
‘우리 할아버지 이름이 어째서 나오는 거지?’
거기까지 들은 히스는 당장 브루노어를 찾아가 자신이 들은 것에 대해 물었다.
“할아버지. 크림슨 하트가 뭐예요? 아리엘이 크림슨 하트여서 죽는다는 게 무슨 소리냐구요……!”
두려움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히스의 턱 끝에는 미처 하지 못한 질문이 매달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대번에 새파랗게 질리는 브루노어의 얼굴에서 히스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브루노어의 입에서 충격을 받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리엘님이…… 크림슨 하트였다고?”
크림슨 하트에 대한 예언은 알고 있었지만, 브루노어는 그것이 아리엘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는 히스에게 라카트옐의 대화 내용을 캐물었다.
“대공자가 죽지 않으면 아리엘이 죽을 거라고 했어요. 대답 해줘요, 할아버지. 그게 사실이에요?”
“……맙소사.”
자신이 예언에 대해 알려줬던 아리엘이 크림슨 하트였다는 걸 깨달은 브루노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날, 히스는 모든 진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브루노어가 황실 대마법사 자리에서 쫓겨난 이유가 라카트옐과 관련 있었다는 것.
그리고 크림슨 하트에 얽힌 예언까지도.
“내가 여태 네게 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까닭은…… 널 지키기 위해서였다.”
브루노어는 라카트옐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겐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리엘에게 이야기를 해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혈질의 어린 손자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가는 히스가 경솔하게 움직여 죽음을 자초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남은 혈육을 지키기 위해 브루노어는 감추는 걸 선택했었다.
‘이젠 너무 늦어버렸지만…….’
드디어 모든 내막을 듣게 된 히스는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성년이 되면 죽는다는 크림슨 하트가, 아리엘인 거네요.”
다 라카트옐놈들 때문이었어.
그 혼잣말을 마지막으로 히스는 브루노어의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그의 금색안에 위험한 분노가 타올랐다.
‘라카트옐을 죽일 수 있는 강한 힘이 필요해.’
한때 브루노어에게도 있었던, 힘에 대한 갈망이 히스에게서 넘실거렸다.
그렇게 대공저를 나간 히스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한편 황궁으로 보내진 아리엘은 그녀 소유의 여름궁에 머물렀다.
손녀를 되찾은 태후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고, 다이아나와 세실이 아리엘 옆에 계속 머무르도록 허락해주었다.
“세실 경, 미르셀라와 미카엘라 호위는 잠시 쉬어도 좋아. 다이아나 공녀와 함께 아리엘에게 힘이 되어주게.”
수잔 또한 대공저로 돌아가지 않고 아리엘을 돌보았다.
하지만 극진한 보살핌에도 아리엘은 내내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잠으로 도망치기라도 하려는 듯이.
잠시 깨어났다가도 겨우 눈만 깜박이고 있다가 다시 스르르 잠들곤 했다.
그런 아리엘을 걱정하는 태후에게 황궁의는 쩔쩔매며 말했다.
“공주님의 몸에는 큰 이상이 없습니다. 다만…… 무언가 심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아 보입니다.”
황궁의의 말에 수잔과 다이아나는 대공자의 차가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절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던 아리엘을 떠올렸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수잔의 얼굴에 짙은 수심이 드리웠다.
“가끔 일어나셨을 땐 억지로 괜찮은 척하시지만…….”
수잔은 다이아나와 세실 앞에서 결국 눈물을 보였다.
“마치 살 기운을 잃으신 것 같아요.”
* * *
그 시각.
거대한 지진과 낙뢰가 맞붙은 것 같은 싸움이 땅을 뒤흔들며 일어나고 있었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북부에 있는 험준한 라카트옐 령이었다.
사시사철 겨울 같은 날씨에, 발 디딜 틈 없이 험악한 지형 때문에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은 땅.
그곳에서 두 개의 날 선 검이 숨 쉴 틈 없이 맞부딪치고 있었다.
캉! 카강!
짙푸른 두 개의 검기가 충돌할 때마다 거센 진동파가 퍼져서 주위의 나무와 바위를 부서뜨렸다.
쿠쿠쿵-! 콰앙!
초토화된 곳의 중앙에서 싸우고 있는 자들은 루시안과 마티어스였다.
둘의 전투는 마치 라카트옐의 싸움이 어떤 것인지 과시하는 듯 파괴적이었다.
“후…….”
멀찍이 물러나 잠시 거리를 둔 긴 흑발의 사내, 마티어스가 낮게 숨을 골랐다.
잠깐 숨을 돌렸나 싶은 찰나 다시 루시안의 공격이 쇄도해 들어왔다.
루시안의 공격은 거침없이 위험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정말 벨 생각도 없는 것이.’
마티어스는 낮게 혀를 차며 방어하는 검에 소드 마나를 강하게 실었다.
절망한 루시안의 공격은 사납기만 하고 전혀 정교하지 않았다.
화풀이라도 하듯 내리치는 검의 파괴력은 폭발적이었지만 그의 움직임은 허점투성이였다.
‘마치 공격당하려고 일부러 틈을 보이는 것처럼…….’
그 공격을 받아내고 있는 마티어스는 흔들림 없이 방어에 몰두하고 있었다.
루시안의 공격이 아무리 날카롭고 도발적이어도 상관없이.
에고를 스스로 각성한 루시안은 역대 라카트옐 중에 가장 강했다.
루시안이 진심으로 싸우고자 한다면 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루시안은 지금 누가 봐도 이길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한참의 시간 동안 몇백 합이 지났을까.
공격을 멈춘 루시안이 긴 검을 땅에 꽂은 뒤 그것을 짚고 섰다.
그리고 싸늘하게 씹어뱉었다.
“뭘 망설이는 거야, 마티어스.”
그가 마티어스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한 것은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세계에서 그를 해치울 수 있는 힘을 가진 건 마티어스뿐이었다.
라카트옐인 그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같은 라카트옐 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마티어스는 줄곧 방어만을 할 뿐,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성년이 된 후에 당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알지 않나.”
자신이 이토록 자비롭게 목숨을 쥐여주는데 무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이제 반대로 내 숨통을 끊어. 그러면 그 애는 크림슨 하트의 정체성을 잃고 평범한 소녀로 살게 될 거야.”
그의 말을 들었음에도 마티어스는 미동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루시안의 잇새에서 갈리는 소리가 나왔다.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도약한 그가 마티어스를 향해 다가와 검날을 목선에 들이밀었다.
피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마티어스는 제 목줄기에 차가운 검이 와 닿는 것을 가만히 관망했다.
아주 가까이에서 맞붙은 부자의 시선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루시안이 이를 악물고 낮게 말했다.
“뭐 하는 짓거리야. 마티어스.”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는 끝, 마티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각인을 하지 않았어도 넌 내 아들이다. 언젠가 네 손에 죽어줄 생각이었지.”
서늘한 목소리가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내 손으로 널 해칠 순 없다.”
루시안의 검푸른 기세가 좀 더 섬찟하게 높아졌다.
그의 입술 끝이 사납게 비틀렸다.
“아리엘을 위해서야. 당신도 그 애를 지독히 아끼지 않나?”
아리엘을 살리고 싶지 않아?
그 애가 죽도록 내버려 둘 생각인가?
루시안의 말에 마티어스의 눈이 고통스럽게 침잠했다.
아리엘을 살리려면 루시안이 죽어야 한다.
그리고 루시안이 죽지 않으면…… 아리엘이 죽게 된다.
마티어스는 절망스럽게 눈을 깊이 감았다.
그럼에도 그는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리엘이 의식을 잃고 있었던 일 이후에 라카트옐로서 두 번째로 느끼는 무력감이었다.
루시안은 그의 아들이었고 아리엘은 그의 목숨과도 같았다.
그는 둘 다 잃을 수 없었다.
“그 애를 위하기에 널 해칠 수 없는 거다.”
마티어스는 루시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절망이 마티어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애는 널 사랑해.”
그 말이 잔혹하게 루시안의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난 그걸 저버릴 수 없다. 널 잃는 것도 원하지 않고.”
“……닥쳐.”
루시안은 당장이라도 마티어스를 벨 듯이 검을 밀어붙이고 으르렁거렸다.
그 상태로 멈춘 채, 두 라카트옐은 한참을 대치했다.
이윽고 마티어스의 목에 겨눴던 루시안의 검이 떨어졌다.
처절한 목소리가 루시안에게서 흘러나왔다.
“그 애 없는 세상에 내가 살아있을 일은 없어. 내가 세상에서 사랑하는 건 아리엘뿐이니까.”
그러니 어서 나를 베.
루시안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카강! 캉!
본능적으로 검을 내리치면서 그는 비소를 머금었다.
‘쓰레기 같은 예언.’
라카트옐을 죽일 수 있는 게 크림슨 하트뿐이라니.
라카트옐 대공가가 악명이 높은 것은 무자비한 응징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존속 살해.
그것이 라카트옐의 피를 타고 흐르는 광기를 증명했다.
시기와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라카트옐은 오래 전부터 후대가 선대를 죽이며 이어져왔다.
‘그런데 크림슨 하트만이 죽음의 열쇠라고?’
어둠의 신은 멍청한 예언을 하는 걸로도 모자라 역사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루시안은 검푸른 기세를 극한까지 방출하며 마티어스를 압도했다.
‘날 죽여. 그리고 이 어둠을 종결짓자, 마티어스.’
다시 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그 시각, 아리엘은 얕은 잠의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오랜 시간의 고문은 그녀를 약하게 만들었지만 무너뜨리진 못했다.
실제로 아리엘은 타락에게 일방적으로 고문당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마법을 발동해 이공간을 약화시켰다.
오직 루시안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하지만 이젠 돌아갈 집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리엘의 의지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이젠 네가 필요없어졌어.’
루시안의 말을 떠올린 그녀는 몸을 웅크려 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속 안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17세가 되는 생일에 죽는다는 잔인한 현실을 알고도 아리엘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오직 루시안과 마티어스 때문이었다.
자신이 죽고 나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었기에.
그러나 루시안은 마치 아리엘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듯이 그녀가 필요없다고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속임수였다는 것보다 그것이 더욱 아팠다.
톡. 톡.
작은 새가 쪼는 것 같은 소리가 아리엘의 침실 창문에서 들렸다.
아리엘은 그냥 베개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루시안과 마티어스에게 환각에서처럼 내쳐진 뒤에는 뭐가 꿈이고 현실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것도 꿈일 거야.
톡. 토독. 톡.
하지만 작은 소음은 지치지 않고 그녀의 창문을 두드렸다.
아리엘은 결국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낮이었는지 아직 해가 떠 있었다.
창문 밖에는 정말 뜻밖의 사람이 있었다.
“……히스?”
창문 밖 허공에 부양 마법으로 떠 있던 히스가 멀찍이서 작은 돌을 던져대다가 아리엘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
“히스!”
아리엘은 놀라서 얼른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깨어난 뒤 히스를 본 기억이 없었다.
아마 그녀가 대공저에서 나올 때 그곳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히스가 안으로 들어오자 호위들이 달려와 막아섰다.
낯익은 얼굴인데도 헥터와 랄프, 네드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괜찮아요.”
호위들을 진정시킨 뒤 히스와 둘만 남게 된 아리엘은 소꿉친구를 살펴보았다.
그는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처럼 지쳐보였다.
“히스. 오랜만이지. 그 때 너를 못 봐서-”
아리엘이 조심스럽게 시작한 말은 끝맺음되지 못했다.
성큼 다가온 히스가 별안간 아리엘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히스……?”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힘들었어. 네가 죽을까봐 겁났어. 무서웠어.”
“…….”
그제야 자신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을 히스도 보았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리엘은 긴장한 어깨에서 힘을 풀고 친구를 다독였다.
“……미안. 하지만 나 이제 괜찮아. 루시안이 구해줬…….”
루시안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히스는 이미 눈치 챈 듯 했다.
포옹한 팔을 푼 히스가 한참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나, 타락 놈에게 접근했었어.”
“뭐?”
아리엘은 경악해서 되물었다.
계속 고개를 숙인 채 히스가 웅얼거렸다.
“마탑 출신 떠돌이인 척 숨어들어갔어. 널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이건 라카트옐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과거에 그 무리에 속해있었던 아리엘은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이라도 타락의 무리에 들어가기만 하면 악에 물들어서 조종당하곤 했다.
아리엘은 다급히 물었다.
“너 괜찮아? 아무 짓도 안 당했어?”
히스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어.”
잠시 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네가 살 방법을 알아내 왔어. 대공자가 죽기만 하면 돼. 그럼 네가 가진 크림슨 하트도 그 빛을 잃게 될 거야.”
“히스……!”
냉정한 히스의 말에 아리엘은 숨죽인 소리를 질렀다.
“그럼 너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거고, 더 살 수 있어. 적들이 너를 노릴 일도 더는 없을 거야.”
그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노린다 해도 내가 지켜줄게. 아리엘, 나는 네가 죽는 걸 볼 수 없어.”
히스가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언제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게 커진 손아귀였다.
그가 아리엘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대공자가 죽게 놔두고 나와 떠나자.”
히스는 금방이라도 텔레포트를 쓰려는 듯 그녀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아리엘이 그를 멈추는 것이 먼저였다.
“잠깐만. 죽게 놔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히스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지금 대공과 대공자가 싸우고 있어. 둘 중 하나만 살아남겠지. 대공자는 전혀 방어를 하고 있지 않아. 이대로라면 대공자가 죽을 거야.”
‘루시안이 죽는다고?’
아리엘의 명치에서 숨이 막혔다.
히스의 목소리가 간곡해졌다.
“제발 내 말 들어, 아리엘. 그가 죽어야 네가 살아. 대공자도 네가 살기를 바랄 거야.”
아리엘은 히스의 손아귀에 잡힌 손목을 빼냈다.
목소리가 벌벌 떨려서 나왔다.
“히스…… 네 말 뜻은 알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야.”
“난 너만 살릴 수 있다면 다른 건 상관없어!”
버럭 목소리를 높인 히스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네 마음은 이미 알아.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그 자식만 보면 네가 얼굴을 붉히는 게 빤히 보이는데.”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그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널 희생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내가 아니어도 돼. 차라리 다른 사랑을 해.”
아리엘은 히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나며 대답했다.
“다른 사랑은 없어, 히스.”
“고작 열여섯 해 살아놓고 무슨 소리야. 넌-”
히스의 말을 아리엘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막았다.
“두 번이었어.”
“…….”
“그리고 두 번 다…… 그 사람이야.”
히스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리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아리엘에게는 너무나 명백한 진실이었다.
그녀는 두 번의 짧은 삶을 살았고, 두 번 모두 루시안 때문에 죽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두 번 다 그를 잊을 수 없었다.
그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리엘은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안았다.
“부탁할게, 히스. 날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데로 데려다 줘.”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왜 싸우고 있든지 상관없었다.
아리엘은 그곳으로 꼭 가야만 했다.
둘 중 하나가 목숨을 잃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허락받지 못하더라도, 막을 거야.’
루시안이 상관말라고 내쫓아도 온 힘을 다해 그 싸움을 멈출 것이다.
히스가 미쳤냐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데려다 달라고? 네가 죽을 걸 뻔히 알면서 내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아리엘은 민트색 실내 드레스 위에 서둘러 겨울 망토를 걸치며 말했다.
“내가 직접 찾아가고 싶지만 그러면 너무 늦을지도 몰라.”
“네가 죽는단 말이야! 모르겠어?”
“알아. 그래도…….”
아리엘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혀 그렁거리다 흘러내렸다.
“그래도 가야 돼.”
내겐 내 목숨보다 루시안이 더 소중하니까.
그녀가 속삭인 말에 히스는 좌절해서 멈추어 섰다.
아리엘이 눈물을 얼굴에서 닦아내고 절박하게 히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부탁이 안 되면…… 소원권을 쓸게. 거기…… 거기가 어딘지 알려줘.”
히스는 자신이 어린 날에 생각없이 넘겼던 소원권이 이 순간 끔찍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마법사는 자신의 마나를 걸고 한 약속을 어길 수 없다.
그리고 이제 그는 아리엘에게 더 이상 떠나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진짜 마음을 보아 버렸으므로.
히스는 자신이 아리엘을 그곳에 데려다주게 될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 * *
루시안과 마티어스의 싸움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둘 다 지쳐있었지만 마티어스는 여전히 반격할 생각이 없었고, 루시안은 여전히 공격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평행선 같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오면 반드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끝장내게 될 싸움이기도 했다.
마티어스가 방어할 때 그 검기에 루시안이 목을 가져다 대는데 성공한다면.
루시안이 살벌하게 내리치는 검을 받아치길 마티어스가 포기한다면.
실상 루시안은 기회를 보는 중이었고, 마티어스는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이제 끝이다.’
루시안은 마지막 미망을 버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지독하게 아리엘이 보고 싶었다.
아리엘.
이 순간 너를 만지고, 네 눈 위에 키스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네가 본 나의 마지막이 차갑게 돌아서는 모습이 아니라 웃는 모습일수만 있다면.
무엇을 대가로 지불하라해도 할 텐데.
이기적이라 해도 좋아. 내가 네게 나쁜 기억이 아니기를 바라는 이 마음이.
마지막 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마지막이니까 말해도 되겠지.
아리엘라. 너를 내 소유물이라 말했었지만 사실 반대였다.
내가 네 주위에 매여 긴 시간 빙빙 돌았지.
널 처음 본 순간 알았던 거야.
긴 암흑을 지나 마침내 빛에 닿았다는 걸.
난 언제나 네 것이었어. 영원히 네 것일 거야.
그러니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마.
안녕.
그렇게 두 남자가 마지막 합을 겨루는 순간이었다.
파앗-!
달콤한 붉은빛의 마나가 튀어나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안 돼요!”
두 남자가 멈추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아리엘은 둘의 힘이 서로를 해치려는 순간에 그들 사이로 제 몸을 집어던졌다.
라카트옐의 힘에 의해 찢겨 죽게 될지도 몰랐지만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마나를 두른 아리엘과 라카트옐의 힘이 거세게 충돌했다.
쾅!
짧은 찰나, 아무도 보지 못하는 사이, 그 힘들 사이에 기묘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맞부딪치는 대신 튕겨나가 쓰러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티어스님! 루시안!”
아리엘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녀는 자신과 가까운 곳에 떨어진 마티어스를 황급히 살폈다.
쓰러진 마티어스는 다행히 다친 데가 없어보였지만 지친 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리엘이 마티어스 옆에 무릎을 대고 앉자 마티어스가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엘라.”
마티어스의 길고 마디진 손이 천천히 올라와 아리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가 서늘한 입매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어떻게 왔느냐.”
아리엘은 제 뺨에 올라간 마티어스의 커다란 손을 양 손으로 붙잡고 숨을 헐떡였다.
“마티어스님, 왜…… 두 사람이 이런 싸움을…….”
마티어스가 그녀를 달래듯 뺨을 토닥였다.
간간이 눈을 감고 차오른 호흡을 내쉬는 걸 반복하면서 그가 대답했다.
“루시안 녀석이 알아버렸거든. 네가 성년이 될 때 죽게 된다는 걸. 그것 때문에 우리를 떠나겠다고 했다는 것도.”
“……!”
어떻게…… 어떻게 알게 된 걸까?
히스가 무사하니 브루노어를 통해서 알게 된 건 아닐 것이다. 그럼 어떻게?
아리엘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티어스가 창백해진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루시안은 죽으려 한다. 네가 심장을 내주지 못하도록. 그게 널 살리는 길이라 믿는 게지. 나는 막으려 한 것이고.”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루시안은 제가 필요 없다고…….”
마티어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리엘에게 말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죽으려는 거다. 라카트옐에게 필요한 존재는 늘 파멸을 맞지. 녀석은 널 살리려 하는 거야.”
“……아.”
마티어스의 말이었기에 아리엘은 그 말을 믿었다.
루시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자신을 살리려 한다는 사실은 믿을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구해주었으니까.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녀석에게 가 보거라.”
“……네.”
아리엘은 울먹이며 대답한 뒤 마티어스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일어나자 호위들이 달려와 마티어스를 부축했다.
아리엘은 멀리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루시안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부서진 고목의 그루터기에 등을 기댄 채 흐트러진 자세였다.
가까이 가자마자 아리엘은 루시안에 의해 와락 팔이 잡혀 끌어당겨졌다.
“흣.”
정신을 차렸을 땐 얼굴이 그의 코 앞에 멈춰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그의 향기가 끼쳐오자 힘이 툭 풀렸다.
“감히 네가 뭔데 끼어들어. 죽으려고 작정했어?”
헤어질 때와 똑같이 차갑고 냉혹한 얼굴로 루시안이 윽박질렀다.
하지만 아리엘의 팔을 잡은 그의 손은 어조와 달리 경악했다는 듯 잔뜩 긴장해 있었다.
“잘못 닿았으면 형체도 없이-”
그녀의 안위 때문에 흥분한 것 같은 루시안을 보자, 아리엘의 심장이 고동쳤다.
아직도…… 내가 조금은 루시안에게 소중한 존재일지도 몰라.
아리엘은 그와 눈을 마주친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죽으려고 했어요?”
그 물음에 루시안이 멈칫하더니,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팔을 차갑게 놓았다.
한순간도 걱정한 적 없다는 듯이.
“죽이려고 한 거야.”
“……거짓말.”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부정하는 아리엘의 말에 루시안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가 비웃듯 오만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왜 너 따위한테 거짓말을 하지? 가치없게.”
“또…… 거짓말.”
아리엘이 재차 부정하자 루시안의 눈빛은 숨길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그는 동요한 걸 티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아리엘이 천천히 그의 심장에 귀를 가져다댔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다시 말해봐요. 다 듣고 있으니까.”
“…….”
루시안은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아리엘의 머리가 제 가슴에 닿는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글거리던 그의 기세는 순식간에 힘을 잃고 꺾여버렸다.
미친 듯이 반응하는 심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아리엘이 고개를 들고 마주한 루시안의 눈빛에서 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절망과 고통, 자책이 뒤엉킨 감정 뿐.
“……흐.”
본모습을 보여버린 그가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리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왜 그랬어요. 내가 그렇게 우스웠어요? 내가 당신한테 줄 수 있는 단 한 가지마저 주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루시안이 미웠다.
자신이 생명 바쳐 살리려 한 목숨을 쉽게 버리려고 한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얕게 흐느끼며 물었다.
“내가 필요없다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쳐놓고, 왜 그랬냐고요.”
루시안은 피가 나도록 제 혀를 깨물었다.
이토록 가까이에, 제 심장소리가 고스란히 들키는 가운데 거짓말을 할 방법이 있을까.
네가 우스웠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한순간이라도 아리엘이 그렇게 생각했다는데 화가 났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게 자신이라는 것도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그녀와 얼굴을 맞댔다.
“아직도 모르겠어?”
죽는데 실패한 그에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처참하게 함락된 라카트옐이 마침내 고백했다.
“내가 죽으려고 하는 이유는 하나 뿐이야.”
네가 없는 세상에 난 살 수 없어.
……널 사랑하니까.
* * *
“널 사랑하니까.”
아리엘은 그 말을 듣고 숨을 멈추었다.
루시안이 사랑한다는 고백을 잔인하게 뒤집어버린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는 더없이 확실하게 못박았었다.
그가 아리엘과 결혼한 이유는 그녀가 가진 크림슨 하트를 노려서였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도 순조롭게 그것을 얻기 위함이었노라고.
아리엘이 그래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루시안은 이젠 그것마저도 필요없다고 내쳤었다.
그런데…… 날 사랑한다고요?
아리엘의 사고회로는 정지해버렸다.
루시안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직도 환각 속인건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루시안이 으르렁거리며 그녀가 멀어지지 못하게 붙잡았다.
“나 같은 것 때문에, 아니. 이 세상 같은 것 때문에 널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어. 떠나서 혼자 죽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한차례 억눌린 고함을 토해낸 그가 한풀 꺾여서는 아리엘의 조그만 손 위에 제 얼굴을 묻었다.
애닳은 소리가 목 안을 긁듯이 흘러나왔다.
“괴물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네가 죽으면 나도 살아있지 않을 거야.”
이내 고개를 든 루시안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리엘. 이건 내 저주야. 저주받은 삶이지. 갇혀있는 인간의 육체에서 풀려날 방법은 하나. 널 죽여서 네 심장을 취하는 것뿐이야.”
그의 입매가 사납게 비틀렸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내게 의미있는 건 너 뿐인데. 내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온 세상에 너 하나인데.”
루시안이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소리내어 조소했다.
“이미 금단의 과실을 맛본 뒤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나는 너를 죽이지 못해. 널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지.”
그러니 이건 끝나지 않는 저주야.
“어떤 고통보다…… 널 잃는 게 더 싫다는 것이 말이야.”
루시안이 떨리는 팔을 뻗어 아리엘의 어깨를 쥐었다.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그녀를 사로잡듯 시선을 빼앗았다.
“제발 부탁이야.”
그가 아리엘에게 애원했다.
“내게 명령을 해. 내가 한 번, 너를 위해 날 쓸 수 있게 해준다고 했잖아.”
아리엘은 루시안이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들었다.
그녀가 열한 살이 되던 생일에 루시안은 라카트옐의 정체를 드러냈고, 그녀에게 선물을 주었었다.
‘생일 선물을 줄게. 아리엘라.’
‘언젠가 한 번쯤은 너를 위해 날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지.’
‘기억해. 오직 너를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어.’
루시안이 그녀를 잡은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절박하게 아리엘의 귓가에 흩어졌다.
“나더러 죽어달라고 해. 그럼 기꺼이 죽어줄 테니.”
‘…….’
한참동안 가만히 멈춰있던 아리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루시안이 6년 전의 약속을 기억 속에서 불러일으킨 건 효과가 있었다.
‘아…… 그래.’
그랬구나.
그 오래전부터 당신은…… 이런 날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처음부터 나를 희생시킬 생각이 없었네요.
줄곧 날 구원할 생각뿐이었던 거예요.
아리엘은 이제 알 것 같았다.
루시안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의 사랑은 너무나 파괴적이어서 스스로마저 태워버리는 사랑이었다.
파괴가 유일한 재능인 그녀의 남편은 사랑 앞에서조차 다르지 않았다.
아리엘은 드디어 진실된 루시안을 보게 되었다.
그는, 아리엘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리엘은 볼에 흐르는 뜨뜻한 액체를 느끼며 루시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맞춤을 받은 루시안이 놀라며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먼저 입맞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명령할게요.”
자신만을 위해서 그를 사용할 수 있다면, 아리엘이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아리엘은 흐린 시야에 루시안을 담으며 웃었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내가 죽기 전까지 함께 있어줘요. 이게 내 소원이에요.”
아리엘의 말을 들은 루시안은 완전히 넋을 잃은 듯 한참동안 미동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는 의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잠시 후에 루시안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네게 그랬는데도, 여전히 날…… 사랑해?”
그는 자신이 아리엘에게 상처주었던 걸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리엘이 떠나겠다고 하자 눈이 뒤집혀서 그녀에게 화를 내고 차갑게 굴었던 자신이다.
그녀를 타락의 손길에서 막지 못했고, 고문당하고 돌아온 그녀를 안고 달래주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아리엘이 돌아오자마자 사랑을 부정하고 내보내기까지 했다.
자신이 아리엘을 사랑하는 건 섭리나 마찬가지이니 어쩔 수 없지만, 그녀는 달랐다.
수없는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떠난다 해도 그 누구도 그녀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루시안은 떨리는 눈으로 아리엘을 응시했다.
“너에게 뭐든 해주려고 하는 놈도 있고, 널 나에게서 지키려고 하는 놈도 있어. 난 널 탐하고 갈취하고 빼앗으려고 하는 놈이지. ……그래도 날 선택할건가?”
그렇게 물어놓고 정작 아리엘이 분홍빛 입술을 열자 그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후회할 기회는 없어. 이게 마지막이야. 정말 내 곁에 있겠어?”
아리엘이 눈물에 젖어서 반짝이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루시안의 속은 바짝 타들어갔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이 짧은 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리엘이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어요. 사랑하는 사람 옆에.”
루시안은 아리엘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것이 자신인지, 그녀인지 알수 없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날 사랑해?”
아리엘이 그와 눈을 맞췄다.
그녀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대답이 들린 순간 루시안은 잡아먹을 듯 그녀의 입술을 덮치며 키스했다.
의지력이 바닥 나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던 히스는 쓸쓸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 * *
입맞춤이 끝나고도 루시안은 아리엘을 놔주지 않고 그녀와 이마를 맞댄 채 한참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시선을 받고 있으려니까 그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아리엘은 노골적인 그의 시선에 얼굴을 붉혔다가, 결국 시선을 피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미워요.”
그녀는 옹알거리듯 작게 말했다.
거짓말이었다지만, 그녀가 필요없다고 말하며 내쫓았던 루시안이 조금은 미웠다.
“미워하지 마. 네가 날 미워하면 난 말라 죽을 거야.”
그렇게 말한 루시안이 아리엘의 손을 끌어다 주먹을 쥐게 하고 자기 어깨를 때렸다.
“차라리 때려.”
아리엘은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러니까 더 미워지려고 해요.”
루시안이 초조하게 붉은 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봐.”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돼요…….”
아리엘은 다시 훌쩍였다.
루시안이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며 낮게 속삭였다.
“젠장. 날 미워하지 말아달란 게 그렇게 어려워?”
“루시안이 미운 짓만 하잖아요.”
“하여튼 한 마디도 안 지고…….”
그가 말을 끝맺지 않고 아리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눌렀다.
잠시 후 입술이 떨어졌을 때 아리엘은 어질어질해서 눈을 깜박였다.
루시안의 향기가 너무 가까이에서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아직도 미워?”
그가 묻자 아리엘은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다시 해야겠네.”
루시안이 살짝 고개를 비틀며 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음에 닿은 입술은 좀 더 농염했다.
그녀의 입술이 달기라도 한 듯 움직이는 그의 입술에 아리엘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짧고 허덕이는 키스를 마친 뒤 루시안이 물었다.
“지금은?”
겨우 정신을 차린 아리엘은 얼른 그를 밀어냈다.
“……아, 안 미우니까 이제 그만 해요.”
그가 나지막이 쿡쿡 웃었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안이 웃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언제였더라?
가슴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루시안은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던 게 언제였냐는 듯 금방 기운을 회복했다.
마티어스를 먼저 대공저로 모신 호위들이 돌아와서 루시안을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됐어.”
성가시다는 듯 거절한 루시안이 그들에게서 물을 받아들고 마신 뒤, 머리부터 흘러내리도록 물을 부었다.
마치 열을 식히려는 것 같았다.
반면 아리엘은 추워서 오슬오슬 떨고 있었으므로 그의 행동이 신기하기만 했다.
“가지.”
루시안이 아리엘을 담요에 싼 뒤 번쩍 안아 들고 일어났다.
아리엘은 깜짝 놀라서 몸부림을 쳤다.
“나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루시안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내가 싫은데.”
“루시안 피곤하잖아요.”
“뭐?”
그가 아주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반문했다.
“라카트옐에게는 피곤이란 개념 따윈 없어. 칼을 찔러 넣어도 회복되는 몸인 거 봤지 않나?”
그렇게 말하며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유혹하는 것처럼 말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으면 팔이라도 한 번 잘라봐 줄까?”
“아뇨! 됐어요! 안겨 갈게요.”
아리엘은 황급히 루시안의 목에 매달리며 그의 동작을 막았다.
아무리 회복된다지만 남편 팔이 잘리는 모습 같은 거 보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그러자 루시안이 그림처럼 눈썹 사이를 좁히며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지금 날 놀린 거야?’
조금 분해진 아리엘은 고개를 치켜들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어.’
둘의 눈이 가까이서 마주쳤다.
찰나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루시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스르르 사라졌다.
그 상태로 잠시 마주 보던 둘은 동시에 재빨리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리엘과 루시안 둘 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 팔로도 가뿐히 그녀를 고정한 그는 호위들이 몰고 온 말에 훌쩍 뛰어올랐다.
사랑스러운 아리엘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리엘.
비록 죽는 것은 실패했지만 난 반드시 널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거야.
그전에 일단은.
같이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루시안은 아리엘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집에 가자.”
아리엘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 드디어 집으로 가는 것이다.
엄마, 나 이제 집에 가요.
그래서…… 그래서 너무 행복해.
대공저까지 돌아오는 여정은 빠르고 거침없었다.
그동안 아리엘은 말을 모는 루시안을 여한 없이 구경할 권리를 얻었다.
루시안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져 흰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입고 있는 하얀 셔츠는 젖은 채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근육으로 단단히 짜인 늘씬한 상체가 셔츠 안으로 비쳐 보이고, 말을 움직이는 그의 팔과 목선에 도드라진 힘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읏…….’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호흡하느라 살짝 벌어진 루시안의 붉은 입술과 달아오른 숨, 젖은 머리카락이 잔인한 색기를 흩뿌렸다.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루시안은 진정 유해한 존재가 분명했다.
이렇게 사람을 홀리다니.
아리엘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에게는 안 들렸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