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17장 (17/23)

17장




아리엘은 다음날까지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식사를 물리고 문을 걸어 잠근 채, 밤새 혼자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아 하염없이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루시안이 황궁에서 알아볼 것이 있다며 집을 비워서 다행이었다.

그가 집에 있었다면 이렇게 조용히 방에만 있을 수도 없었을 테니.

방 바깥에서는 종종 수잔과 하녀들의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엘은 목소리만으로도 그들을 하나 하나 구분할 수 있었다.

‘……내가 죽으면 다들 얼마나 슬퍼할까?’

6년간 이 집에서 함께 살면서 모두와 정이 듬뿍 들어버렸다.

수잔, 하녀들, 집사 알렌, 정원사 우즈, 주방장 홀슨, 재무관 달튼, 기사들…….

그들 뿐일까.

다이아나와 세실, 히스 그리고 어느새 친구처럼 신뢰하게 된 정보길드의 카디나.

친구들의 얼굴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리고 늦게 만났지만 지금은 가족이 된 할마마마.

죽음을 이해하지도 못할 여섯 살 미르와 미카…….

아리엘은 그들의 얼굴을 되새겨보다가 무릎에 괸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라리 이런 따뜻한 감정같은 거, 가르쳐주지 말지 그랬어요.’

지난 삶에서 죽을 때는 아무 미련도 없었다.

살고 싶긴 했지만 그것은 단순한 생존 본능이었을 뿐, 살아야 할 간절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슬퍼할 거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어쩌면…….’

어쩌면, 그들에겐 같이 슬퍼할 사람이 있으니 언젠가는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위로하고, 함께 했을 때의 추억을 꺼내어 이야기하고, 추억하며.

하지만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은……?

두 사람은 어떡하지? 둘에겐 의지할 사람도 없는데.

불이 꺼진 방안에서 아리엘의 작은 그림자가 어깨를 떨었다.

그녀의 삶은 시한부를 선고 받은 것과 다름 없었다.

그리고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그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몇 달 후에 죽게 된다는 것을 알리는 겨우 몇 마디 말로 히스의 삶이 끝나게 될 텐데.

어차피 죽을 목숨인 자신이 어떻게 앞으로 창창한 히스의 삶을 빼앗을 수 있을까……?

아리엘은 차오르는 고통스러움을 힘겹게 삼키며 생각을 이어갔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면…….’

아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죽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하게, 그 전에 떠나야 해.’

그렇게 하면 그 누구도 마음 아프게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다들 아리엘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른 채 멀리 떠났다고만 생각한다면…….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상실을 겪을 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으로 슬퍼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

그녀가 떠나는 것만으로 모든 게 괜찮아질 수 있었다.

다 괜찮을 것이다. 아리엘 자신만 사라진다면.

어린 시절에 한 루시안과의 결혼이 끝나고, 마법 연구를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되겠지.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것처럼 이 집을 나가자.

수잔과 할마마마, 친구들에게 몇 년치 편지를 써놓고 마탑에 부탁해야지.

내가 죽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냥 연락이 뜸해지다 어느 날 연락이 끊겼다고 여기도록.

그렇게 서서히 기억 속에서 지워지도록…….

아리엘은 차가워진 손끝을 꼭 잡으며 떨림을 애써 무시했다.

‘안주인이 없으니 집안 정리를 어떻게 할지 미리 다 적어두고…….’

“그리고, 루시안한테는…….”

계약을 끝내자고 말해야겠지.

계약서 상 계약이 종료되는 때는 아리엘이 17세가 되는 시점이었다.

그 때 자신은 죽을 테니, 그 전에 계약을 종료 시켜야 한다.

“내 생일이 오기 전에 내보내달라고…….”

그 말을 중얼거리자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했다.

아리엘은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정신 차려, 아리엘라. 마음 단단히 먹어야지.

티내면 안 돼. 담담해져야 해.

너한테는 남은 사명이 있잖아.

“그 때까지 크림슨 하트와 라키엘의 눈을 지켜내야 해.”

루시안이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두 눈과 심장이 모두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아리엘은 죽기 전까지 크림슨 하트인 자신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반드시.

‘루시안과 드래곤의 눈을 타락에게서 지켜낼 거야.’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남은 힘과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것이 행복하지 않을까.

잃을 것이 없으니, 자신은 온몸의 마나를 닳을 때까지 퍼내고 또 퍼내서 루시안을 보호할 수 있다.

타락의 계획을 망치는데 얼마든지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죽을 때가 가까워 오면 브루노어에게 보호마법을 부탁한 뒤에 멀리 멀리 떠나서 결계를 치고 숨어버려야지.

나 혼자서…….

혼자서 죽어야지. 이번에는.

‘충분히 행복했잖아.’

그러니 이게 전부라고 해도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툭.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혹여나 문 바깥의 누군가가 울음소리를 들을까 봐 아리엘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죽였다.

계획은 모두 세워졌지만 조금도 후련하지 않았다.

‘엄마, 나 자신이 없어요.’

……사실은 너무 무서워요.


* * *


아침이 밝아오자, 아리엘은 잠갔던 방문을 열었다.

오늘은 출타했던 루시안이 황궁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녀가 문을 열자마자 들어온 수잔이 심각한 얼굴로 소리쳤다.

“세상에, 어제 식사를 거르셔서 살이 쏙 다 빠지셨네요!”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살이 빠지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겨우 두어 끼 건너뛴 것뿐인걸요.

하지만 수잔의 눈에 아리엘은 항상 굶어 죽기 직전인 것처럼 비치는 듯했다.

수잔이 부산스레 식사를 준비했다.

홀슨이 솜씨 좋게 끓인 버터 치킨 스튜.

사워크림을 곁들인 거대한 와플 더미.

그리고 체리주를 부어가며 부드럽게 익힌 조각 스테이크가 한 상 가득 나왔다.

“자, 이것 좀 드셔보세요. 이것도요.”

수잔이 살뜰히 이것저것 권하는 대로 음식을 입에 넣자, 갑자기 가슴 속이 뭉클했다.

‘여길 떠나면, 이렇게 수잔이 다정하게 챙겨줄 일도 없겠지?’

나에게는 이제 여기가 집인데…….

아리엘은 스푼을 내려놓고 가만히 수잔의 허리를 껴안았다.

아리엘의 접시에 흰 롤빵으로 탑을 쌓던 수잔이 어머, 하며 손을 멈췄다.

“아기 마님……?”

조용히 수잔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 그녀에게서 나는 햇볕 냄새를 느끼던 아리엘이 말했다.

“수잔,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죠?”

“그럼요.”

다정하게 대답한 수잔은 몸을 돌려 아리엘을 꼭 감싸 안았다.

“저도 아리엘님을 정말 사랑한답니다. 매일매일 더 많이요.”

아리엘은 말없이 수잔을 더 꼬옥 끌어안았다.

수잔의 품은 열 살 때나 지금이나 포근하고 안심되었다.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던 수잔이 노래를 부르듯 말했다.

“아마 제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아기 마님일걸요?”

아리엘은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수잔을 더 많이 사랑하는걸요?”

“어머나, 제가 아기 마님 훨씬 더 사랑하는데요?”

둘은 누가 더 많이 사랑하는지 옥신각신했다.

수잔이 따뜻한 롤빵을 건네며 말했다.

“얼른 드세요. 스튜가 식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수잔의 눈가엔 따스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식사하고 계세요. 롤빵에 바를 산딸기 잼 좀 가져다드릴게요.”

서둘러 나가는 수잔의 뒷모습을 보며 아리엘은 몰래 눈시울을 붉혔다.


* * *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아리엘에게 달튼이 찾아왔다.

“대공자님께서 오늘 늦은 오후에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서신을 전해달라고 하시던데요.”

‘……?’

아리엘은 의아한 기분으로 서신을 받아들었다.

몇 시간 후에 집에 올 거라면서 왜 편지를 보냈을까?

달튼의 기색을 살펴보자, 그는 들뜬 얼굴로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었다.

아리엘은 머뭇거리며 서신의 봉인을 떼고 편지를 열었다.

황실에 머물면서 쓴 듯, 편지지 윗부분에는 황실의 금색 문양이 찍혀있었다.

그 아래로 특유의 필체로 적은 루시안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하려던 얘기. 5시 종이 칠 무렵에 얼음별 탑으로 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아, 계약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던…….’

이렇게나 빨리……?

잠시 아연해진 아리엘은 들고 있던 편지를 놓칠 뻔했다.

그때는 루시안이 무슨 말을 할지 걱정되고 피하고 싶기도 했는데.

하지만, 이제는…….

아리엘은 편지를 잠자코 내려다보다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좋아요, 루시안. 나도…… 해야할 말이 있으니까요.’

아리엘이 편지를 읽은 것을 확인한 달튼이 물러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안이 돌아오기 전까지 해둬야 할 일들이 있었다.

아리엘은 방 한편에 놓여있는 원목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루실리온 후작가의 청동색 가보.

다이아몬드 참이 달린 나비 목걸이.

핑크 다이아몬드 세렌디피티가 박혀있는 티아라가 든 함.

인어 모양 사탕병, 시에라 왕국령의 소유 증서와 인장 반지.

보석 달걀 장식.

벨벳 상자에 담긴 오로라 그린 다이아몬드 세트.

대공자비로서가 아닌, 루시안에게 개인적으로 직접 받은 선물들만 모아놓은 곳이었다.

루시안에게 받았던, [너를 보내.]라고 적힌 편지도 이곳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다른 물건들은 앞으로 정리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만…….’

이 물건들은 오늘 당장 정리해야만 했다.

아리엘은 마지막으로 제 손목에 걸린 마정석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

그녀는 루시안에게 해야 할 말을 마음 속으로 연습해보았다.

혹여 진심이 아니라는 걸 들킬까 봐.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티낼까 봐.

스스로도 속일 수 있을 만큼 완벽해질 때까지, 아리엘은 혼자서 그 말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 * *


‘이상하군.’

디트리히는 돌아갈 채비를 하는 루시안의 기색을 살폈다.

수호목을 지키는 건에 대해 논의하고 돌아가는 대공자는 오늘따라 생각을 다른 곳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기세가 묘하게 들끓는 듯한…….’

그제 저녁 심기가 뒤틀린 채 황궁에 들이닥쳐서는 제국에서 '오라버니'라는 말을 없애면 어떻겠냐고 위협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잠깐, 대공자. 오라버니라는 단어를 없애면 손위의 남자 형제를 어떻게 부르게 하려고…….’

‘무슨 상관이지? 아무튼, 아리엘이 네놈에게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면 그만인데.’

‘뭐……?’

‘아, 오라버니란 말을 쓸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괜찮겠군.’

오라비라 부를 자가 아예 사라지면 되지 않나.

마치 당장이라도 눈앞의 황태자를 없앨까 가늠하는 그 서늘한 눈빛에 디트리히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었다.

‘이거 혹시…… 질투인가?’

물론 질투라는 평범한 말로 정의하기엔 일을 벌이는 규모가 상식을 모조리 뛰어넘었지만.

이쯤 되자 디트리히는 한편으로 궁금해졌다.

아리엘을 향한 대공자 루시안의 마음이.

예전부터 생각해온 것이지만, 단순히 소유욕이라고 하기엔 넘치는 부분이 많았다.

디트리히는 돌아가기를 서두르는 기색인 루시안에게 흘리듯 물었다.

“아리엘라에겐 떠나는 일정을 언제 말해줄 생각이지?”

아리엘의 이름을 들은 루시안이 날서게 반응하며 그에게 차가운 시선을 두었다.

“아리엘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것도 아내에 대한 질투인 건가?

디트리히는 든든한 친정 오빠의 역할을 다하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대공자비는 라카트옐의 안주인이기 이전에 황실의 공주이기도 해.”

하지만 루시안은 아름다운 눈썹을 치켜올리고 잔혹하게 말했다.

“황실을 없애면 그 공주 작위는 없어지지.”

그 애한테 있는 것 중 어떤 것도 잃게 하고 싶진 않지만…….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그가 퇴폐적이게 풀어진 셔츠의 주머니에 타이를 밀어 넣었다.

“그러니 아리엘한테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말문이 막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디트리히는 더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그 애에게 정말 진심인 건가?”

짙은 청색의 눈이 디트리히의 불손함을 벌하듯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예상외로 떨어진 대답은 지독히 선명했다.

“그래.”

마침내, 5시의 종이 울었다.


* * *


탑으로 가기 전, 아리엘은 비어있는 루시안의 방에 들렀다.

가져온 것을 루시안의 책상 위에 소리나지 않게 내려놓은 그녀는 가만히 책상 위를 쓸어보았다.

“…….”

집사 알렌이 항상 치워두는 그곳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비록 보통 귀족 가문의 전 재산과 맞먹는 값어치의 물건들이 성의 없게 놓여있긴 했지만.

6년 전 이곳에서 루시안과 아리엘은 계약 결혼을 맺고 서명을 했었다.

‘그때 일은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한데…….’

불과 얼마 전의 일이 까마득한 옛날같이 느껴졌다.

마티어스가 크림슨 하트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던 일.

그때 아리엘은 복받친 감정에 울고 말았었다.

마치 자신도 이 가족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들과 헤어지지 않아도 될 이유를 말해주는 것 같았기에.

아리엘의 작은 그림자는 한참 동안 책상 앞에 홀로 오도카니 서 있었다.


* * *


루시안은 하얀 프리지아 꽃다발을 한 손에 든 채 탑을 올랐다.

약속한 5시가 되자 햇빛은 슬그머니 진해져 온 풍경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겨울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는 얼음별 탑이지만, 이런 따뜻한 날에는 그저 세상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일 뿐이다.

지금쯤엔 아리엘이 와 있겠지.

달튼에게 명해놓은 대로라면, 탑 꼭대기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생화가 가득 놓여있을 것이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박동 소리를 높였다.

가장 춥고 어두운 심해 같은 푸른 눈은 이제 가장 높은 온도의 불꽃처럼 푸르렀다.

여태 라카트옐의 에고 속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인간들처럼 상대에게 날 것 그대로 마음을 꺼내놓는 일이.

아예 감정 자체를 느낄 일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는 사랑을 고백하는 첫번째 라카트옐이 될 것이고, 마지막 라카트옐이 될 것이었다.

마침내 탑의 꼭대기에 도착한 루시안은 장식된 생화 가운데에서 그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꼬맹이 아내를 발견했다.

화이트 라일락, 백합, 흰 수국.

크림색의 가든로즈, 은방울꽃과 흰색 히아신스.

그녀는 탑의 종루에 장식된 꽃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얀 꽃들 사이로 사랑스러운 붉은 머리칼이 나부끼고, 달콤한 색깔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자리했다.

바람을 맞아 그런지 아리엘의 눈가가 조금 발그스름했다.

제길. 뭐가 저렇게 예뻐.

루시안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프리지아 꽃다발은 잠시 후를 위해 등 뒤로 감춰졌다.

반가움을 담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안.”

아리엘이 그를 향해 작게 웃어 보였다.

루시안은 긴 다리로 순식간에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아리엘라.”

왔어요? 하고 묻는 작은 입술이 종긋하고 귀여웠다.

주먹을 꽉 쥐고 있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끌어당겨 입 맞춰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기 어려웠다.

아마 네 감정은, 이런 나와는 퍽 다르겠지.

하지만 에두른 유혹은 이제 끝났다.

제 마음을 통째로 꺼내어 보이고, 그녀를 잔뜩 흔들어서, 원하는 마음을 얻고 가질 것이다.

수호목을 지키는 일 때문에 그는 한동안 대공저를 비울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없는 동안 아리엘이 자신만 생각하도록.

알려줘야지. 내가 널 어떻게 여기는지.

그렇게 루시안이 입을 떼는 순간이었다.

“저…… 루시안.”

아리엘이 뜻밖에도 그를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먼저 얘기해도 돼요?”

아주 잠시 불안한 기분이 스쳤지만 루시안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 봐.”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아리엘이 여린 손목에 걸려있던 마정석 팔찌를 툭 풀었다.

자신이 허락 없이는 빼지 말라고 했던 팔찌였다.

그녀의 행동에 루시안이 멈칫하는 사이, 아리엘이 그에게 차분히 팔찌를 내밀었다.

“이거. 돌려줄게요.”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뭐하는, 왜……?”

아리엘은 루시안의 굳은 표정을 차마 계속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자 조금 더 쉬워졌다.

그녀는 연습한 대로 담담하게 속삭였다.

“이제 계약이 끝나기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요. 정리할 건 정리해 둬야죠.”

하도 거듭해서 연습한 말이라 꽤나 진심인 것처럼 들렸다.

“뭐?”

이해가 안된다는 듯 루시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쓸어넘겼다.

그에게서 드물게 당황한 목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왔다.

“잠깐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뭘 끝내?”

“루시안.”

그녀가 조용히 그를 부르자, 루시안이 멍하니 아리엘을 응시해왔다.

아리엘은 호흡을 가다듬고 그를 눈동자에 담았다.

아무것도 아닌 양 말하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별일 아닌 듯이.

나는 절대로 당신을 해칠 수 없어. 죽일 수 없어. 그 대가가 내 목숨일지라도. 그러니까.

“우리, 이혼해요.”

하얀 프리지아 꽃잎이 탑 아래로 천천히 추락했다.


* * *


결국 그녀의 목소리 끝이 흔들렸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루시안의 아름다운 얼굴은 혼란스러운 듯 일그러져 있었다.

인내심 없이 당장이라도 왜냐고 물을 것 같던 그가 입을 연 것은 정작 한참 후였다.

“……그깟 계약서 때문인가?”

루시안의 목소리에 묻은 날카로운 기세 때문에 아리엘은 흠칫했다.

그가 위협적으로 천천히 한 발자국 더 다가와서 물었다.

“그 종이 쪼가리 하나 때문에? 그래?”

오싹할 정도의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순간이지만 사냥당하는 사냥감의 심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루시안이 순식간에 제 손에 계약서 두루마리를 소환했다.

그리고 아리엘이 막을 틈도 없이, 검푸른 마나가 그의 손을 휘감았다.

“……!”

루시안의 소드 마나에 닿은 두루마리는 한순간에 산화됐다.

보란 듯이 계약서를 불살라버린 그가 손에 남은 재를 바닥에 후드득 떨어뜨리며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애초에 계약서는 널 묶어두기 위한 거지, 다른 용도는 없었어.”

그가 낮게 짓누르듯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계약을 몇백 년 단위로 할 걸 그랬지.”

분노한 기색을 억누른 그가 말했다.

“이제 됐지, 아리엘라. 다시는 이혼이라는 말-”

그의 행동에 놀라서 눈만 둥그렇게 뜨고 있던 아리엘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루시안이 너무나 예상외의 반응을 보여서 하마터면 준비했던 말을 모두 잊을 뻔했다.

“아뇨.”

그녀가 고개를 젓자 루시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아리엘은 더듬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마법 계약은…… 계약서가 불타도 나나 루시안이 죽기 전까진 유효해요.”

잠시의 침묵 후에 그가 확인을 하려는 듯 말끝을 누르며 되물었다.

“유효하게, 만들고 싶은 건가?”

아리엘은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본심과 다른 말을 하는 게 힘이 들었다.

“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루시안이 그녀의 팔을 잡아채 붙들었다.

타오르는 그의 눈과 마주한 아리엘은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왜 갑자기 망할 이혼을 들먹이는 거야.”

루시안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네 말대로 계약이 끝났다면 그 후엔 그냥 여태까지처럼……!”

“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지만 아리엘이 입을 떼자 루시안은 벼락을 맞은 듯이 말을 멈췄다.

아리엘은 속삭이는 것처럼 작게, 그러나 망설이는 기색은 없이 말했다.

“……저는 여길 떠날 생각이에요.”

루시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아리엘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때까지 계약서에 적힌 대로 대공자비가 돼서 아내 노릇을 해왔잖아요. 계약이 모두 끝난 뒤엔…… 떠나고 싶어요.”

정확히는 생일이 되기 전에 떠나야 하겠지만 일단은 이렇게만 말해두었다.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은 루시안의 손에 악력이 더해졌다.

세게 쥐인 팔이 아파서 아리엘은 약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 동안 태워버릴 듯이 그녀를 노려보던 루시안이 이를 악물고 입을 뗐다.

“……어떤 새끼야.”

“네?”

영문 모를 말에 눈을 크게 뜨자, 그가 섬뜩한 음색으로 짓씹었다.

“어떤 새끼가 널 꼬였냐고. 그 어린 마법사 새낀가? 아니면 허여멀건한 낯짝으로 오라비란 소리나 듣고 있는 황태자 놈? 친구랍시고 붙어있는 여자들 중 하나인가? 누구야. 말해.”

루시안의 살기 때문에 아리엘의 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다.

그녀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면.”

뇌까린 그가 고개를 숙여 아리엘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지?”

루시안의 눈 속에 여러 개의 감정이 한꺼번에 나타나 소용돌이쳤다.

“내가 너를 제대로 못 지켜내서? 널 다치게 한 놈에게 아직 복수를 못해줘선가? 아니면 내가 주는 게 부족해?”

거친 숨을 들이켠 그가 낮게 이를 갈았다.

“……혹시. 나와 처음 계약할 때부터 그럴 작정이었나?”

긴 침묵이 지나갔다.

아리엘이 대답하지 않자 루시안은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지독하게 상처받은 빛이 서서히 번져나갔다.

그가 세게 쥐고 있던 아리엘의 팔을 놓았다.

그녀의 팔은 벌써 자국이 남은 듯 화끈거렸다.

혼자서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탑 안의 공간을 성마르게 오가던 그가 아리엘 바로 앞에 와서 그녀의 양어깨를 확 움켜잡았다.

“계약 중에는 뭐든 내 명령에 따르기로 했었지.”

아리엘은 움찔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명령하지.”

“뭐를…… 요?”

명령이라는 말에 대답하는 아리엘을 한참 어둡게 응시한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지 마.”

아리엘은 찰나 숨을 멈추었다.

분명 명령인데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 순간 가슴이 저릿했다.

항상 그녀를 한없이 약하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뭘, 하지 말란…….”

루시안의 목소리가 섬뜩할 만치 낮게 깔렸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렇게…….”

아리엘은 잡힌 어깨를 움츠렸다.

더럭 겁이 났다. 마음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다 들켜버릴 것 같았다.

안 되는데.

이번에는 혼자서 감내하고 사라져야 하는데.

그녀는 있는 힘을 모두 짜내어 겨우 목소리를 냈다.

“계약을 깨뜨리라는 명령은…… 들을 수 없어요.”

“그딴…… 그딴 소리가 아냐.”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여태까지 네게 내가 그것밖에 안 돼? 그게 전부였냐고.”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 계약이 전부였다면 그녀가 지금 루시안 대신 죽으려고 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버려서 당신을 죽일 수 없는 나는…….

그녀는 다시 입술을 달싹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진짜 라카트옐이 아니잖아요.”

초조해서 물어뜯은 입안에서 피 맛이 감돌았다.

아리엘은 시선을 내리깐 채 속삭이며 말했다.

“일부일 뿐이지, 똑같아질 수 없는걸요. 내 몸엔 맞지 않는 옷이에요. 그러니까 계약이 끝나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고요. 그리고 좀 더 분수에 맞게 살래요.”

루시안이 그녀의 어깨를 세게 틀어쥐고 이를 악물었다.

“분수. 그놈의 분수. 그까짓 게 뭔데……!”

잡힌 어깨 때문에 아리엘의 눈에 옅게 눈물이 고였다.

그녀의 눈물을 본 그가 불에 덴 듯 작은 어깨를 놓았다.

“하.”

그 반동에 아리엘은 두어 걸음 뒤로 밀려났다.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엉망진창이었다.

루시안이 쉽게 납득하지 않으리란 건 예상했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까지…….

허공에 잠시 제 손을 띄우고 있던 루시안이 이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집어뜯듯 쓸어내렸다.

그는 날뛰는 기세를 억누르려는지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루시안이 걱정된 아리엘이 그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그에게서 놀랍도록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하겠지. 계약이 끝난 후에도 네 삶은 내 것이라고 했던 말.”

아리엘은 다가가려던 동작을 멈추고 물러났다.

속마음이 서글프게 말했다.

그 약속은…… 이뤄질 거예요. 당신 심장으로 돌아가서 영원히.

루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짙푸른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물며 계약이 끝나기 전인 지금은.”

퇴폐적이게 갈라진 목소리가 읊조렸다.

“넌 오롯이 내 거지.”

그러니 명령을 내리겠어.

그가 상처 입은 눈빛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오만하게 명령했다.

“오늘부터 내 침실로 옮겨.”

……네?

아리엘이 숨을 멈춘 채 미약하게 되묻자 그가 비틀린 듯 웃었다.

“귀족계에서는 흔히 이렇게들 한다더군.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보통 귀족 가문에서는 결혼한 남녀가 16세가 넘으면 따로 쓰던 방을 합쳐주곤 했다.

방을 같이 쓰면서 자연스럽게 금슬을 늘리고 후사를 보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뭐라 말을 해보려고 했지만, 아리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국 이것뿐이었다.

“……알겠어요.”

그녀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자 더 화가 치미는지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친 루시안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마정석 팔찌를 주워들었다.

아리엘의 시선이 팔찌를 향했다.

루시안이 잇새에 힘을 주어 말을 밀어냈다.

“주인이 사라졌으니 버려야겠지.”

차갑게 말한 그가 탑 밖으로 팔찌를 집어 던졌다.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아, 하며 그것을 막으려다가 동작을 멈췄다.

팔찌에서 황급히 시선을 떼는 그녀를 확인한 루시안이 하얗게 뼈마디가 드러나게 주먹을 쥐었다.

억누른 신음을 뱉은 그가 아리엘을 남겨두고 먼저 뒤를 돌았다.

사라진 그의 자리에는 짓밟힌 프리지아 꽃잎만 흩어져 있었다.


* * *


탑을 내려간 루시안은 기세를 다 헤쳐 풀어놓은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기세 때문에 올려놓은 물건들이 흔들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도자기와 액자들이 떨어져 깨지고 사슴 머리 박제가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그는 쳐다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아리엘뿐이었다.

이혼을 말하던 아리엘.

떠나겠다고 하는 아리엘.

제 손에 틀어 잡혀 바르작거리던 아리엘.

죽어도 아프다, 싫다 소리는 안하고 꾹 다물던 여린 입술.

“제길.”

기세 때문에 흔들리던 장식장이 결국 쓰러져 유리가 산산조각났다.

루시안이 책상에서 뭔가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책상 위에 원래 없었던 물건들이 나무 상자에 고이 담긴 채 놓여있었다.

루시안의 기세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하.”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자신이 아리엘에게 줬던 선물들이었으니까.

루실리온 후작가의 가보, 나비 목걸이, 티아라…….

“…….”

그 맨 위에 놓여있는 보석 달걀 장식이 두 눈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는 천천히 보석 달걀을 집어 들었다.

온갖 값진 것들로 만들어진 보석 달걀이지만 가장 귀중한 것은 그 안에 있었다.

루시안의 손이 달걀 장식의 숨겨진 부분을 눌렀다.

그러자 보석 달걀이 로켓처럼 반으로 달칵 열리며 안의 공간을 드러냈다.

한참 그 안을 들여다보던 루시안은 그것을 든 채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보석 달걀 안에 들어있던 것이 바닥으로 떨어져 팅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떨어진 물건은 깨진 유리 조각 근처까지 굴러갔다가 원을 돌며 멈추었다.

금속의 고리 가운데 박힌 이터널 다이아몬드가 투명하게 빛을 반사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반지.

아리엘을 위해 그가 준비했던 청혼 반지였다.


* * *


밤이 되자 아리엘은 루시안의 방으로 갈 준비를 했다.

목욕 후에 머리를 말려주던 수잔에게는 루시안 방에서 얘기를 나누다 잘 거라고 말해두었다.

수잔이 부드럽게 빗질을 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기 마님, 혹시 대공자님이 수작 부리려고 하면 호되게 혼내주셔야 해요?”

초조함이 가득한 중에도 아리엘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수, 수작이라니.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사랑스러우신데 왜요.”

놀리듯 말한 수잔이 아리엘의 이마에 쪽쪽 입을 맞춰준 뒤 나긋하게 투덜거렸다.

“대공자님한텐 너무 아깝다니까요. 평생 제가 끼고 살고 싶은가 봐요.”

아리엘은 수잔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도 수잔 옆에 계속 살고 싶어요.”

수잔이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사시면 되지요, 오래오래, 평생.”

아리엘은 대답 없이 그냥 수잔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정말 그러고 싶은데,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그럴 수가 없대요. 미안해요, 수잔.

다정하게 매무새를 정돈해준 수잔이 나간 뒤 아리엘은 루시안이 시킨 대로 그의 방으로 향했다.

침실로 가기 전에는 항상 호위들을 물리기 때문에 지금 그녀는 혼자였다.

“…….”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가는 길이라 자꾸만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게 복도의 중앙쯤에 도달했을 때였을까.

“흐윽.”

야속한 심장 통증이 또다시 아리엘을 덮쳤다.

아리엘은 심장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옆의 벽을 붙잡았다.

“아…….”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며, 아리엘은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기댄 어깨가 벽에 붙은 채 미끄러지듯 아래로 무너졌다.

이 순간에조차 혼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헥터와 랄프가 봤으면 걱정했을 거야.

수잔이 봤다면 얼마나 마음 아파했겠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호흡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자, 그녀를 짓누르던 통증은 어느샌가 사라졌다.

“하아, 하아…….”

아리엘은 핏기가 사라진 손을 벽에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나니 이 통증이 이해가 갔다.

왜 대마법사 브루노어도, 의사 밀러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는지.

그녀가 열여섯 살이 되는 생일에 찾아온 이 통증은 시계의 초침 같은 것이었다.

1년 후 다가올 죽음의 징조.

아리엘은 벽에 기댄 상태로 눈을 감았다.

체념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흔들리면 안 돼.

심장이 계속 경고를 보내고 있잖아.

아리엘의 작은 짝사랑은 그녀의 짧은 생처럼, 채 피지도 못한 채 져버리고 있었다.


* * *


루시안의 방에 도착해서 똑똑 노크를 하고 살며시 문을 열자, 불이 꺼진 빈방이 보였다.

“……?”

어라, 루시안은?

아리엘은 조심조심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뎌 들어갔다.

한참 둘러보고서야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안 들어왔나…….”

아리엘은 침대와 긴 의자를 번갈아 보다가 의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에 루시안 방에 왔을 때는 침대에서 잤지만 이젠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가 침대에서 잘 때 방 주인인 루시안은 항상 의자에서 잤었으니까.

안 그래도 나한테 화가 나 있는데 침대까지 차지할 수는 없잖아.

털가죽이 깔린 의자에 조심스레 몸을 눕히고 이불을 덮은 아리엘은 꼼지락거리며 잠잘 자세를 잡았다.

벌컥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아리엘은 깜짝 놀라서 움찔했고, 열린 문으로 복도 불빛을 등진 남자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걸어 들어왔다.

‘루시안…….’

가라앉은 기세로 들어온 루시안이 빈 침대를 확인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기척을 따라 천천히 아리엘이 있는 의자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의자에서 이불을 두르고 반쯤 몸을 일으킨 그녀를 본 그가 으득 이를 갈았다.

“……너 정말.”

난폭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루시안이 긴 의자 등받이에 양손을 짚고 아리엘에게 몸을 기울였다.

바짝 밀착한 그가 으르렁거리며 낮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날 밀어내는 건가? 날 비참하게 만들면서?”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숨을 멈췄다.

루시안이 이를 악물고 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이제 나와는 한 침대도 쓸 수 없다고 무언의 시위라도 하는 거야?”

아리엘은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말하려다 입을 꼭 다물었다.

그가 스스로를 비웃듯이 중얼거렸다.

“얌전히 침대에 와 있으면 설득이라도 해보려고 했지. 네가 이러고 있는 줄은 모르고, 빌어먹게도.”

말끝에 그가 아리엘을 의자에서 확 안아 들었다.

“꺅.”

아리엘은 숨죽인 비명 소리를 냈고, 다음 순간 바로 침대 위에 눕혀졌다.

루시안에 의해 그녀의 한쪽 손목이 침대 위로 지그시 눌렸다.

“루시안…….”

놀라서 가냘프게 부르자 그가 낮고 어둡게 웃었다.

“왜. 겁나? 결혼 계약이 뭔지 이제야 실감 되나?”

루시안은 분노와 어두운 감정이 잔뜩 뒤엉킨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아리엘을 밀어붙여서 제 마음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그녀에게 정말로 거절의 말을 듣는다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나도 모르겠는데.

결국 널 부서뜨려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르니.

그래.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가둬놓으면 달아나지 못한다.

해치고 망가뜨리면 떠나지 못해.

그렇게라도 해서…….

루시안은 당장이라도 부서뜨리려는 듯한 시선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

아리엘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분명히 두려운 상황인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탑에서 상처받은 듯 자신을 바라보던 루시안이 떠올랐다.

화내는 것도, 무섭게 구는 것도 그인데 왜 그가 더 상처받고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나에게만 보이는 착각인가요?

그리고 화가 난 루시안이라도 상관없이 같이 있는 게 너무 좋다면…… 제가 이상한 걸까요?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루시안의 얼굴에 애틋하게 닿았다.

그 접촉을 느낀 루시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낮게 실소했다.

“……하. 이건 또 뭐-”

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아리엘은 깜짝 놀라서 손을 거뒀다.

“미, 미안해요. 잘게요.”

한쪽 손목을 잡은 루시안의 힘이 풀린 틈을 타, 그녀는 얼른 손에 닿는 이불을 끌어당겨 뒤집어썼다.

어떡해. 미쳤나 봐.

이불 속의 동그란 형체가 발발 떠는 모습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던 루시안은 그녀 위에서 천천히 몸을 치웠다.

침대에 앉은 그는 아리엘의 손이 닿은 자리를 가만히 손으로 더듬었다.

불덩이라도 삼킨 듯 속이 뜨거워졌다.

“…….”

이윽고 붉어진 목덜미를 쓸어내린 루시안은 힘이 풀려 자신도 아리엘 옆에 몸을 누였다.

젠장.

도망가지 못하게 가두는 것은 일단 나중으로 미루었다.

계약이 끝날 때까지 그에게 시간은 많았으니까.


* * *


잠시 뒤, 루시안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하자 아리엘은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이불을 걷고 일어나 루시안 쪽을 확인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의 얼굴 윤곽을 희미하게 담아냈다.

‘……잠들었네.’

아리엘은 잠옷 위에 겉옷을 하나 걸치고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

방문이 조용히 닫히자, 누워있던 루시안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어딜 가는 거지.”

저 얇은 잠옷 차림으로는 기껏해야 그 핑크색 방으로 돌아가는 것 밖에는 하지 못할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속에서는 불이 타올랐다.

내 옆에서는 잠들 수 없다 이건가.

떠날 거라고 통보했으니 잠시도 머무르고 싶지 않다?

그래. 도망치면 쫓아주지.

돌아가면 도로 끌고 와 주지.

루시안은 이를 악물고 자리를 박찼다.

복도에 이미 아리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기척에 민감한 그는 얼마든지 그녀의 소리를 따라갈 수 있었다.

분홍색 침실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발걸음은 뜻밖에도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루시안은 타는 기세를 억지로 누르며 보폭을 크게 했다.

아리엘의 소리를 따라 저택 건물을 나서자, 멀리 희미하게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걸음을 재촉하던 아리엘은 정원쯤에서 오도카니 멈춰 서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녹스 플라이.”

마법 주문이 나오자 아리엘의 손에서 반딧불 크기의 빛이 동그랗게 흘러나왔다.

당장 그녀를 잡아채려던 루시안은 그 장면을 보고 뒤로 물러나 모습을 숨겼다.

자그만 빛의 구를 켠 아리엘은 도망가는 대신, 수풀 사이에서 열심히 뭔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계속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밤공기가 묘하게 무겁고 서글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툭. 투둑. 투두둑.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초여름으로 들어가는 첫 비였다.

아리엘은 비가 오는 것도 모를 만큼 집중한 채 찾는데 열심이었다.

그녀의 어깨가 젖어가는 것을 본 루시안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쏴아아-

빗발이 순식간에 소나기처럼 거세졌다.

그제야 아리엘이 깜짝 놀라며 조그만 손으로 빗줄기를 가늠하는 동작을 했다.

“비가…….”

못 참고 나서려던 루시안은 그녀가 마법으로 비를 막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강 제 머리와 어깨 위에 비를 막는 마법을 걸어둔 아리엘이 다시 풀숲을 헤치며 찾던 것을 이어갔다.

이미 비를 흠뻑 맞은 수풀을 지나다 보니, 비를 막아도 그녀의 옷과 머리가 젖어 들었다.

추울 텐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어 루시안은 이를 악물었다.

“아.”

한참 만에 아리엘 쪽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그토록 간절히 찾아 헤매던 걸 찾은 모양이었다.

수풀을 뒤져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그녀가 안심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찾은 것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것을 본 루시안의 머릿속에서 팽팽히 당겨져 있던 끈이 확 끊어졌다.

저 물건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저딴 게 뭐기에 이 밤에 나와서 비까지 다 맞아가면서 찾아 헤맸나.

대체 뭐가 그렇게 소중해서?

약해빠진 제 몸보다 소중한가? 그렇다면 반드시 부숴주지. 찾은 보람도 없이 눈앞에서. 잔인하게.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아리엘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리엘이 경기를 일으킬 만큼 화들짝 놀랐다.

“루시안?!”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그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한 루시안은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

낮에 그가 탑 바깥으로 집어 던졌던 제 마정석 팔찌였다.

플라티넘 소재의 얇은 팔찌에 어두운 푸른빛의 보석.

아리엘이 돌려주겠다고 그에게 넘겨준 것.

충격에 멈춰있던 그는 이내 아리엘을 잡아끌고 옆의 석조 가제보로 향했다.

배려 없는 보폭에 아리엘이 뛰다시피 끌려왔다.

가제보에 도착해 기둥에 그녀를 밀어붙인 루시안은 으르렁대며 입을 열었다.

“너 뭐야. 누가 이걸 찾으랬어.”

놀란 아리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이거, 루시안 거…….”

그에게서 버럭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버린 건데 왜 네가 다시 찾아!”

아리엘이 달싹 입술을 열었다가 시선을 피하며 다물었다.

젖은 몸 때문에 입술이 푸르게 질려있었다.

루시안은 그녀의 턱을 잡아 들어올려서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에서도 빗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말해.”

윽박지르듯 말하자 아리엘의 속눈썹에 빛이 반짝였다. 저게 빗방울인지 눈물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뭔가를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시안이, 버렸으니까요.”

당신 마정석이 버려져 막 굴러다니는 걸 참을 수 없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루시안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녀에겐 너무나 소중한 것이 그렇게 버려진 채로 있게 놔둘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눈에 밟혀서, 결국 아무도 모르게 밤에 홀로 나와서 찾아 헤맨 것인데…….

그것만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는 듯 그가 새파란 눈으로 재차 물었다.

“다시 찾아서 어쩌려고.”

찾는 것을 들킨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한참 망설이던 아리엘은 입술을 꼭 깨물고 속삭이듯 말했다.

“떠나기 전까진…… 제가 간직해두려고…….”

하. 루시안이 우습다는 듯 허망하게 웃었다.

“그럴 거면 왜 돌려줬는데.”

아리엘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그녀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대답해.”

그녀는 결국 눈동자만으로 시선을 피한 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발, 아리엘. 준비했던 대로, 아무렇지 않게 말해. 제발, 제발…….


“떠날 거니까요. 이것 때문에 루시안이 따라오면 안 되니까.”

하지만 입 밖으로 나간 목소리는 준비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형편없었다.

덜덜 떨리고 힘없는. 자기가 들어도 거짓말 같은 목소리.

“……아.”

그럼에도 루시안은 그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 같았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니까. 네가 떠나면 따라오지도 말라?”

아리엘은 눈을 꽉 감고 대답했다.

“……네.”

어차피 루시안은 따라올 수 없는 곳이니까요.

절대 따라오면 안 되는 곳이니까…….

그녀의 손목을 잡고있던 그의 악력이 거세졌다.

어찌 보면 당장 부러뜨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네 마음대로 해! 가지든 말든.”

그가 잡고 있던 아리엘의 손목을 홱 뿌리치며 내뱉었다.

그리고 그대로 가제보를 나서서 거칠게 저택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아…….”

아리엘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가늘게 떨며, 마정석 팔찌에 매달리듯 그것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시선은 저절로 빗줄기 사이를 지나는 루시안의 뒷모습을 쫓았다.

루시안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다가 멈춰서 더는 멀어지지 않았다.

잘못 보나 싶어서 아리엘이 눈을 깜박이는 순간, 그가 뒤돌아서서 무서운 기세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 대번에 아리엘을 제 재킷 안쪽으로 싸서 어깨에 둘러멨다.

순식간에 저택으로 들어온 루시안은 사용인들을 부르는 종을 요란하게 울렸다.

새벽에 봉변을 당한 하녀와 하인들이 죄다 몰려나왔다.

루시안이 제 어깨에 멘 아리엘을 하녀들에게 넘기며 말했다.

“내가 밤에 데리고 나가서 내 아내가 비를 맞았다. 비를 맞힌 건 나지만, 얘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너희 모두 가만 안 두겠어.”

서슬 퍼렇게 부당한 협박을 남긴 그가 하녀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당장 뜨거운 목욕물을 받아서 내 아내를 담가. 저 입술이 원래 색으로 돌아오기 전에 밖으로 나오게 하면 죄다 죽을 줄 알아.”

섬뜩한 기세에 하녀들이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루시안이 옆에 있는 하인들을 노려보았다.

“뭣들하고 섰지? 당장 주치의를 불러오지 않고.”

아리엘은 하녀들 손에 젖은 옷을 빼앗기고 욕조에 담가졌다.

아기 마님이 비를 맞았단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수잔이 아리엘을 보고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공자님도 참…… 방에 데려가 재우시려면 곱게 재우시지, 굳이 데려나가셔서 귀한 아기 마님 비를 맞히셨을까.”

욕조물에 몸을 따뜻하게 하는 약초가 담긴 찻잎 포푸리를 넣은 그녀가 신랄하게 중얼거렸다.

“여름 첫비는 맞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하여튼…….”

그 뒤는 루시안에 대한 욕인 것 같았지만 욕조에 들어가 긴장이 풀린 아리엘은 그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루시안이 하도 난리를 치는 바람에 결국 아리엘은 몸이 발갛게 익을 때까지 욕조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아리엘을 수잔에게 맡긴 루시안은, 내리는 빗속으로 사라져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 * *


다음날에는 라카트옐 가(家) 회의가 있었다.

루시안과 아리엘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모은 마티어스가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출발이었지.”

마티어스가 여상한 말투로 묻자 루시안이 나른하게 긴 다리를 교차하며 턱끝을 끄덕였다.

루시안의 부재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한 아리엘은 살짝 입을 벌렸다.

그녀의 놀란 표정을 읽은 마티어스가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리엘에게 아직 말해주지 않은 거냐.”

루시안이 아리엘 쪽을 힐끗 보았다가 한쪽 입술 끝을 쓰게 비틀었다.

그의 짙푸른 눈 안에서 어두운 기운이 위태롭게 일렁였다.

“……상관없잖아.”

낮게 혀를 찬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루시안 녀석이 요하네스 아카데미로 떠나게 됐다.”

“아카데미요?”

그리고 마티어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얼마전 아카데미에 숨겨져 있던 라키엘의 오른눈이 도둑맞았다.

타락은 눈을 훔치기만 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눈을 지키고 있는 수호목을 해쳐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조만간 수호목을 습격할 게 분명해서 루시안 녀석이 미리 가 있으려는 거다.”

루시안은 얌전히 설명을 듣고 있는 아리엘의 얼굴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충동적으로 옆에 앉은 그녀의 어깨를 제 쪽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갈 때 얘도 데려갈 생각이야.”


네?

아리엘은 당황해서 입만 뻐끔거렸다.

마티어스도 하던 말을 멈추고 무뚝뚝하게 루시안을 응시했다.

“……안 된다는 거 알 텐데. 위험하니까.”

루시안이 서늘하게 대답했다.

“여기 놔두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렇게 말한 그는 아리엘의 어깨를 쥔 손에 슬며시 힘을 주었다.

아리엘이 계약을 끝내고 떠나겠다고 한 것이 바로 어제였다.

이제 그녀가 한시라도 제 눈에 안 보이면, 그는 아무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미쳐버릴 것이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아리엘은 반드시 데려가야 했다.

그러나 마티어스는 여전히 마뜩잖은 기색이었다.

그때, 뜻밖에도 아리엘이 나섰다.

“타락이 공격할 때를 대비해서 가는 거라는 거죠, 마티어스님?”

“그래.”

마티어스에게 확인을 받은 아리엘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가냘프게 말을 꺼냈다.

“저도 갈게요.”

“뭐……?”

루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

아리엘이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마티어스를 향해 조그맣게 말했다.

“가고…… 싶어요.”

마티어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천천히 팔짱을 꼈다.

“네가 위험에 처하는 건 바라지 않는 일이다, 아리엘라.”

“알아요, 하지만 저는…….”

아리엘이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꺼냈다.

“여태까지 루시안이랑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는걸요. 아카데미 때문에, 또 전쟁 때문에…….”

그녀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이상 루시안과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

라카트옐 남자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런 말을 하는 아리엘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루시안은 놀라서 제 입안을 세게 깨물었고, 마티어스는 묘하게 질투가 섞인 눈으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아리엘라는 그렇다 치고. 루시안 너는 평소 같지 않구나.”

마티어스가 꿰뚫듯 루시안을 관찰했다.

“원래라면 이 상황에서 가장 반대하고 있을 것은 네 녀석일 텐데.”

루시안은 아리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말을 받았다.

“……나도 내 아내와 같은 마음이라고 해두지.”

고민하던 마티어스는 아리엘에게 몇 가지 조건을 붙인 뒤에 허락해주었다.

몸을 보호해주는 보호 마법과 각종 보호 마도구를 들고 가는 걸 전제로 한 것이다.

아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마티어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해요, 마티어스님.”

마티어스의 얼굴이 일순간 느슨해지며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 미소를 본 아리엘의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미소였다.

표현이 서툴고 직설적으로는 잘 말하지 않는 마티어스가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감정 표현.

마티어스가 당장 달튼을 불러 명령했다.

“달튼. 금고에 있는 호신 마도구를 죄다 꺼내 와.”

그렇게 함께 요하네스 아카데미로 가게 된 대공자비 부부는 나란히 마티어스의 집무실을 빠져 나왔다.

한참 조용히 복도를 걷다가 계단 갈림길이 나왔을 때, 아리엘은 조심스레 루시안과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탁.

하지만 루시안이 아리엘이 가려는 방향 쪽 벽에 손을 짚으며 길을 막았다.

그녀가 움찔하며 그를 돌아보자, 루시안이 노골적으로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제 양팔 사이에 아리엘을 가뒀다.

“너, 무슨 생각이야.”

아리엘은 벽과 루시안 사이에 가둬진 채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느꼈다.

루시안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떠나겠다면서 그런 단 거짓말을 잘도 하고.”

아리엘은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속으로만 작게 생각했다.

……거짓말 아닌데. 진심이었는걸요.

차라리 마티어스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둘러댄 말이었다면 덜 아팠을까.

루시안에게 본심과 다른 말을 해야 했을 때도 슬펐지만, 진짜 마음을 꺼내놓는 것도 그것 못지않게 아팠다.

떠나고 싶지 않더라도, 그녀에겐 시간이 얼마 없었으므로.

아리엘이 대답을 하지 않고 말갛게 바라보기만 하자, 루시안은 혼란스러운 듯 이를 악물었다.

“……네가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끌고 갔을 거야.”

그렇게 말한 루시안이 몸을 굽혀 그녀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가져왔다.

아름다운 얼굴이 가까워지자 아리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함께 가면 내 옆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테지. 난 잠시도 참기가 어렵거든.”

그가 아리엘을 가둬두었던 팔을 천천히 내리며 말했다.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마른 입술을 축인 아리엘이 고분고분하게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루시안은 비틀리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한 채 뒤돌아섰다.

이제 그는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아리엘 하나뿐이지만, 그녀에겐 그가 특별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다른 인간들에게 감정을 느낄 수도 있고, 다른 인간을 사랑할 수도 있었다.

외로운 것은 자신뿐이다.

둘이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 것도. 결국 혼자 버려지는 쪽도.

그 자신뿐이다.

마지막으로 루시안은 상처받은 음성으로 낮게 경고했다.

“그러니 다시는, 함께 하고 싶다는 말로 날 기만하지 마.”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아리엘은 고개를 떨구며 가슴 속에 고인 말들을 조용히 삼켰다.

사실은 그저…… 오래 함께 있고 싶을 뿐이라는 작은 소망 또한.


* * *


아리엘과 루시안이 수도의 게이트로 이동하는 중에 디트리히가 일행에 합류했다.

아리엘에게 인사한 디트리히는 곧장 루시안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아카데미 안에 적의 첩자가 있다. 우리는 그자를 찾아내야 해.”

라키엘의 눈이 사라지던 날 아카데미에 새로 출입한 사람이 없었다는 게 밝혀졌다.

아카데미 내부에 타락의 수하가 들어와 있다는 증거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시안이 성가시다는 듯이 일갈했다.

“아카데미를 폐쇄하라고 했잖아.”

아리엘은 생각 끝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안 되나요?”

디트리히가 잎새 같은 녹색 눈을 그녀에게 향한 채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수호목을 지키는 병사들 중에도 첩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

아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회에 골라내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습니다.”

“그럼 레온 오-”

그녀가 무심코 오라버니라는 단어를 말하려는 순간, 루시안이 느긋하게 '스' 소리를 내며 끼어들었다.

“오라버니라고 부르면 안 되지, 아리엘라.”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을 멈추었다.

루시안의 말투는 방금까지 둘만 있을 때와는 다른 어조였다.

그녀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기 전처럼, 약간 삐딱하고 매우 유혹적인 말투.

아리엘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콩닥콩닥 뛰었다.

‘황태자 전하 앞이라서 그런 거겠지.’

다른 사람 앞이라서 저렇게 말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을 알아버린 마음은 바보처럼 기뻐했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한편 아리엘이 뺨을 붉히며 동요하는 걸 본 루시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주먹이 꽉 쥐였다.

떠나겠다면서, 저 표정은 뭐란 말인가.

마치 그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던 말이 진심이나 되는 것처럼…….

이를 악문 그는 얘기나 계속하라는 듯 디트리히에게 성마른 고갯짓을 했다.

디트리히가 아리엘을 보며 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 아마 제가 동행하는 이유가 궁금하셨겠죠. 제 성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수호목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라키엘의 눈은 오염되어 적의 무기로 전락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눈을 되찾은 뒤 제 성력으로 정화를 해야 합니다. 물론 되찾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요.”

드래곤의 일부는 보통 무기와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무서운 힘을 낼 수 있었다.

그게 적의 손에 들어가면 싸움은 훨씬 어려워질 것이었다.

“한 가지 더. 저와 대공자가 공개적으로 움직임으로써 타락은 함부로 일을 벌이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쪽도 대공자의 힘을 아니까요.”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이 아카데미에 있다면 아무리 타락이라도 눈에 띄게 날뛰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이 이쪽에서는 타락의 첩자를 찾아내 수호목을 해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그들은 아마 요하네스의 축제 기간을 노릴 겁니다.”

디트리히의 말에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축제요?”

“예. 요하네스는 매해 여름마다 축제를 엽니다. 그때가 되면 내부가 상당히 혼란해지죠. 외부의 상인들도 들어올 수 있게 되고요.”

한마디로 적이 침투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전에 첩자를 알아낸다면, 타락의 덜미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눈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아리엘은 의아해져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타락은 죽일 수 없다고 들었어요.”

디트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라카트옐에게 직접 베이면 타락도 힘을 일부 잃게 됩니다.”

순간 아리엘의 머릿속에 타락의 이상한 행동들이 떠올랐다.

매번 루시안이나 마티어스를 마주치지 않고 극도로 피하려고 했던…….

과거에도 타락은 대공가에 아리엘만 침투시켰을 뿐, 그는 직접 가지 않았다.

‘라카트옐을 만나면 타락도 타격을 입는구나.’

그렇다면 루시안 옆에 있는 한 그녀는 안전할 것이다.

그녀에게 있는 크림슨 하트 또한 안전할 것이다.

중요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때 아리엘이 무릎에 올려놓은 나들이 모자에 달린 리본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디트리히가 리본을 주워 올렸다.

루시안의 시선이 서늘하게 그 동작을 뒤쫓았다.

디트리히가 다정하게 모자에 리본을 묶어주며 말했다.

“대외적으로는 평범한 스케줄로 보여야 해서 아카데미 관련 임무로 꾸밀 생각이었죠. 하지만 대공자비도 함께 간다면, 아카데미 '견학'이라는 명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카데미 견학.

조용히 가라앉아있던 아리엘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그녀는 루시안이 결혼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아카데미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 루시안의 학교에 가보는 거구나.’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조금 설렜다.

디트리히가 설명을 마치자 루시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섬뜩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야기가 다 끝났군.”

그가 가볍게 손끝을 움직이자 달리는 마차의 문이 휙 열렸다.

“그럼 이제 나가.”

‘……?!’

“잠깐-”

루시안은 악랄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디트리히를 다른 마차로 공간 전이해버렸다.

아리엘은 입을 살짝 벌린 채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린 루시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부부가 쓰는 마차에 다른 놈은 필요 없지.”

그리고 그는 디트리히가 아리엘의 모자에 묶은 리본이 마음에 안든다는 듯 풀어서 가져가 버렸다.

여섯 개의 게이트를 지난 후.

오랜 세월 평민과 여자에겐 금지되어 있던 곳.

제국립 귀족 아카데미 요하네스의 높은 문이 열렸다.


* * *


오델른 왕국의 사절단이 제국에 도착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왕국 사절단에는 오델른 국왕의 두 자녀, 안드레 왕자와 베로니카 왕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복 남매인 두 사람은 현재 다음 국왕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였다.

도착한 그들은 일부러 황태자와 아리엘 공주의 안부를 물었다.

“이런, 황태자 전하와 대공자님 내외가 아카데미 견학을 갔단 말씀이십니까? 안타깝군요. 꼭 뵙고 싶었는데요.”

“저희가 공주님께 드릴 선물도 이렇게 준비해왔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오델른에서 나는 귀한 향신료와 꽃잎차 등이 든 상자를 열어 보였다.

충분히 운을 띄운 그들이 황제에게 말했다.

“제국립 요하네스 아카데미의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사절단도 그곳에 견학을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 * *


요하네스에 도착한 디트리히와 루시안, 아리엘은 아카데미 전용 마차에 함께 올라 들어갔다.

요하네스는 석조로 이뤄진 거대한 성채 모양을 하고 있었다.

고풍스럽게 세월의 흔적이 묻은 상아색 석조 건물들은 아카데미의 역사를 짐작케 했다.

석조 건물의 기둥에는 담쟁이덩굴이 운치있게 타고 올라 있고, 사람 키만큼 긴 창문들엔 제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높은 대문을 지나자 아카데미를 지키는 마법진이 나왔다.

마법진을 읽을 수 있는 아리엘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수식이 상당히 복잡하게 되어 있네.’

그것을 보니 외부인이 쉽게 침입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법진에서 학교 건물로 넘어가는 아치는 웅장한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모든 곳에서 몇 세기 전 건축물 느낌이 물씬 풍겼다.

“와.”

아카데미에 처음 와 보는 아리엘은 주위를 둘러보며 몇 번이나 감탄했다.

내부로 들어가자 교복을 입고 하인을 대동한 채 걸어 다니는 귀족 영식들 무리가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아리엘 일행을 태운 마차는 아카데미 건물들을 지나 더 깊이 들어갔다.

검술 연무장과 궁술 수련장을 지나자 기숙사 건물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저곳 중 하나에서 머무를 겁니다.”

디트리히가 부드럽게 설명했다.

황실의 배려로 그들이 지낼 숙소는 깨끗하고 넓은 곳에 배정됐다.

하지만 루시안은 그 숙소를 거부했다.

“필요 없다. 난 내가 원래 썼던 곳에 머물지.”

예전에 대공자가 썼던 기숙사 건물은 여전히 아무도 쓰지 않고 비어있었다.

그곳은 층이 여러 개고, 방도 많아서 머물 곳이 많았다.

게다가 최근, 그곳에 있는 마법진에 침입이 있었으니 루시안이 거기에 머무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는 루시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리엘은 어쩐지 슬픈 기분으로 고개를 떨궜다.

‘여기에 와서도 루시안과 떨어져 지내게 되는 건가……?’

그때 루시안이 아리엘의 짐가방을 소드 마나로 홱 들어올리며 말했다.

“뭐해, 아리엘라. 따라오지 않고.”

네?

어리둥절한 아리엘의 얼굴을 본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내가 아내인 널 다른 숙소에 놔둘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어…….”

굳이 대답하자면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리엘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결혼한 부부가 숙소를 따로 쓰는 건 남들 보기에 이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대놓고 불안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부부라도 둘이 같은 숙소라니, 대공자. 난 반대야.”

그러자 루시안이 눈썹을 느리게 치켜올리며 살기를 흘렸다.

“반대?”

‘안 돼. 괜히 다른 사람한테까지 루시안의 화가 닿게 하면……!’

아리엘은 서둘러 루시안을 따라가면서 디트리히에게 인사했다.

“나중에 봬요, 전하.”

그제야 살기를 거둔 루시안이 보란 듯이 아리엘의 어깨를 감싸 안고 숙소로 향했다.

아리엘은 십년 감수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조금은 두근거리네.’

중요한 임무 때문에 온 거긴 하지만, 루시안이 아카데미 생활을 했던 공간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콩닥거렸다.


* * *


루시안의 기숙사 건물 안에서 아리엘과 루시안은 짐을 풀었다.

아리엘이 자연스레 루시안 옆방으로 가려고 하자, 그가 아리엘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문을 닫았다.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지. 내 침실로 옮기라고 했던 명령.”

루시안의 목소리는 다시 차갑게 돌아가 있었다.

아리엘은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짐을 풀면서 계속 그와 같은 방에 있으려니까 긴장되고 떨렸다.

아리엘은 루시안이 아카데미에서 지내던 방을 살그머니 둘러보았다.

‘……왠지 쓸쓸한 느낌.’

내부는 대공가처럼 호화로웠지만, 여기서 지내던 사람의 생활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삭막했다.

자신이 대공가에서 밝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때 루시안이 내내 혼자였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이 드넓고 적막한 기숙사 건물에서 홀로 어두운 벽난롯가에 앉아있었을 그를, 아리엘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여기에 같이 있게 돼서 다행이야.’

그녀는 서글픈 기분으로 기뻐했다.

적어도 루시안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기숙사 생활은 혼자가 아닐 테니까.


* * *


짐을 푼 뒤에는 디트리히, 루시안과 함께 정말로 아카데미를 둘러보았다.

그들 일행이 이목을 끄는 동안 루시안의 명을 받은 달 그림자 단원들이 수상한 것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었다.

“저기가 중앙 광장입니다.”

아카데미의 광장은 유서 깊은 신전을 재현해 놓은 듯했다.

높이 솟은 빛의 여신상의 손에서 자비로이 흘러나오는 분수대와 수백 개의 색깔 자갈로 모자이크된 광장 바닥.

분수대에서 흘러나온 물은 여신을 섬기는 사제 형상의 조각상들이 받치고 있는 둥근 황금 그릇 안으로 흘러들었다가 넘쳐, 광장을 빙 두른 검은 석조 수로를 타고 냇물처럼 흘렀다.

분수대를 이룬 매끄러운 석조에는 고대 문자로 ‘지혜의 빛, 진리의 어둠’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넓은 광장에는 교복 망토를 입은 귀족 소년들이 모여 앉아 있거나 바삐 지나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디트리히는 왠지 아리엘에게 아카데미를 안내할 수 있게 되어 기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들뜬 목소리로 아리엘을 아카데미의 이곳저곳으로 안내했다.

“헉……! 라카트옐 대공자비님이시다.”

“아리엘라 공주님이시잖아.”

“대공자비님?”

여자라고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아카데미에 드레스를 입고 양산을 쓴 소녀가 등장하자, 남학생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집중되었다.

귀족 소년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멈춰서서 아리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아리엘의 눈에 띈 건 다른 것이었다.

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두꺼운 양장 제본의 책들.

‘저거 다이아나가 한동안 마르고 닳도록 읽었던 책이네.’

다이아나는 어머니인 모니카 공작 부인이 공부를 금지시킨 탓에 한동안 대공가에 책을 맡겨두고 다녀야 했다.

그래서 아리엘은 그 책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도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요하네스 아카데미에는 정치학부와 검술학부가 있었다.

그리고 아리엘은 다이아나나 세실처럼 정치나 검술에 재능이 있는 소녀들을 알고 있었다.

‘여학생들도 들어올 수 있는 아카데미가 생기면 좋겠다.’

또, 아리엘은 제국 사냥대회에서 만났던 필리아 영애를 떠올렸다.

필리아는 마법사였다.

귀족 사회에서 마나를 타고 난 여자는 눈총을 받곤 했기에 그녀는 오랜 시간 사교계에 나올 수 없었다.

“다 대공자비님 덕분이에요.”

그녀는 아리엘 덕에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며, 마법으로 잡은 작은 사냥감을 선물했었다.

‘마법학과도 생기면 좋을 것 같아.’

아리엘이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그녀를 뒤따라가던 루시안은 기세를 풀어 아리엘을 훔쳐보는 소년들을 모두 물러가게 만들었다.

그는 얼굴을 붉힌 남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노려보며 살기를 풍겼다.

그 오싹한 기세를 버틸 사람은 그 중 아무도 없었다.

아리엘의 걸음이 중앙 벤치쯤에 다다랐을 때, 아리엘은 달려가던 남학생 한 명과 가볍게 부딪쳤다.

“엇, 죄, 죄송합니다.”

키가 작고 마른 남학생은 안색이 좋지 않았고, 부딪힌 사람이 아리엘임을 보고도 서둘러 다시 달려갔다.

그 광경을 지켜본 루시안이 그 괘씸한 것의 목덜미를 들어 올리려는 참이었다.

“어딜 가는 길이냐?”

지나가던 노교수가 남학생을 붙잡았다.

“그…… 저는……!”

학생은 크게 놀라더니 우물쭈물하며 진땀을 흘렸다.

그러자 학생에게 눈을 가늘게 뜬 백발의 교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따라와라.”

그리고 그는 면구스러운 듯 아리엘 일행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대공자님, 대공자비님.”

디트리히에게도 인사한 교수가 학생의 팔을 잡고 사라졌다.

어느새 대부분의 학생들은 건물 안으로 사라져, 주위에는 인적이 드물어져 있었다.

아리엘은 디트리히가 안내하는 대로 수호목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다.

“……!”

수호목을 직접 본 아리엘은 넋을 잃고 감탄했다.

‘아름다워.’

나무의 둥치는 신비로운 흰색이었고, 살아온 세월을 증명하듯 매우 거대했다.

아리엘 같은 소녀 서른 명이 양팔로 둘러도 모자랄 만큼.

넓게 퍼진 가지와 잎들이 나무 주위의 너른 공간에 그늘을 드리웠다.

고개를 한껏 꺾어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아리엘에게 디트리히가 말했다.

“수호목은 요하네스 아카데미의 상징으로 유명합니다. 아카데미의 길들도 수호목의 줄기 모양으로 뻗어있죠.”

“가까이 가봐도 되나요?”

디트리히가 상냥하게 웃었다.

“그럼요.”

아리엘은 천천히 나무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 옆을 엄중하게 지키고 있던 근위병들이 아리엘에게 절도있게 인사를 하며 길을 터 주었다.

병사들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황송한 듯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나무 앞까지 도달한 아리엘은 나무줄기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손을 통해 마나를 살짝 흘려 넣자 수호목이 잠에서 깬 듯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무가 제 줄기와 잎의 구석구석까지 아리엘의 마나를 통과시켰다.

‘엄청나게 중후한 느낌.’

여태까지 봐왔던 나무들과는 차원이 다른 깊이였다.

이 나무의 뿌리가 어디까지 아래로 닿아있는지 ㅊ 없을 만큼.

‘그리고…….’

아리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 나무가 나를 좋아해.

보통 나무들은 원소 마법사에게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몸의 중심이 나무에게로 확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만큼 수호목은 아리엘을 맹목적으로 좋아했다.

아리엘은 미소를 짓고는 나무를 살며시 껴안았다.

‘나도 네가 좋아.’

오랜 시간 네가 드래곤의 눈을 지켜줬다지.

그러자, 나무가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빼앗기고, 언제 타락이 수호목을 해치러 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당연할 것이다.

아리엘은 그녀의 마나를 담뿍 흘려 넣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넌 무사할 거야.”

나와 루시안이 지켜줄게. 걱정마.

이윽고 나무에서 손을 뗀 아리엘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루시안에게로 돌아갔다.

루시안은 수호목과 소통하며 뺨에 생기를 띄운 그녀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호목은 어떤 인간에게도 저렇게 반응한 적이 없었다.

마치 자신처럼, 아리엘에게만.

그때 돌아오던 아리엘이 불현듯 발걸음을 멈췄다.

“……아.”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작게 신음한 그녀가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숨이 막힌 듯 어깨를 움츠린 아리엘을 보고 놀란 디트리히가 그녀 쪽으로 한 걸음을 떼었다.

“아리엘라.”

하지만 그보다 먼저 루시안이 다가가 아리엘을 번쩍 안아 들었다.

또 그 빌어먹을 심장 통증인가.

그때 그의 품에서 아리엘이 기침을 했다.

작은 입 밖으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

눈을 크게 뜬 루시안은 잠시 멈춰있다가 이를 악물고 디트리히에게 소리쳤다.

“당장 아카데미 의사를 불러와!”


* * *


아리엘은 불려온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심장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려, 작게 웅크린 채 신음만 내뱉는 그녀의 옆에서 루시안이 성마르게 다그쳤다.

“뭐라도 해봐라. 꾸물대지 말고.”

높은 기압처럼 짓누르는 그의 기세에 의사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아카데미 전담 의사인 실눈의 젊은 의사는 아리엘을 한참 돌본 뒤에 약을 주었다.

“어떤 원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약이 고통을 덜어드릴 순 있을 겁니다.”

대공가의 의사인 밀러와 대마법사인 브루노어도 발견치 못한 원인이니 의사가 곤혹스러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가 준 물약을 마신 아리엘은 호전을 느꼈다.

급작스럽게 찾아왔던 고통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이제 안 아파요.”

예전에 피를 토했을 때와는 달리 열도 나지 않아서 아리엘은 금방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리엘이 괜찮아진 것을 확인한 루시안은 제 난폭한 기세를 누르려는지 잠시 바깥으로 나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디트리히가 의사를 치하했다.

“수고 많았다.”

그리고 디트리히는 아리엘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아리엘, 아무래도 대공가로 돌아가서 쉬는 게 나을 듯합니다. 이 일을 아시면 할마마마께서도 걱정하실 거고요.”

그 말을 들은 의사가 조심스레 나섰다.

“하지만, 전하. 이런 상태로는 게이트를 지나는 것부터가 무리일 겁니다. 대공자비님께서 며칠 더 약을 드시며 쉬신 뒤에 출발하시는 게 어떠실런지요.”

디트리히가 아리엘의 안색을 살피며 숙고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나가 봐라.”

의사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그리고 때마침 방 안으로 들어오던 루시안과 마주쳤다.

마치 투명인간을 보듯 의사를 지나친 루시안이 문을 열기 직전에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뭐지?”

루시안의 목소리는 낮게 갈라져서 매우 어두웠다.

의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히센입니다.”

루시안은 가보라는 듯 차갑게 고갯짓을 한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리엘 옆에 앉은 디트리히가 보였다.

“나가.”

서릿발같이 싸늘하고 위압적인 내침을 무릅쓰고 디트리히가 물었다.

“대공자, 아리엘이 아픈 이유를 모르는 건가?”

“아무도 알아내지 못하더군. 어쩌면 오늘 마나를 써서 그런 걸지도.”

순간 루시안의 머릿속에 수호목과 교감하며 마나를 사용하던 아리엘이 떠올랐다.

그 때문인가?

“여하튼 꺼져.”

디트리히를 방 밖으로 내쫓은 루시안은 침대맡에 다가가, 누워있는 아리엘과 눈을 마주쳤다.

혈색을 되찾은 아리엘이 약간 주저하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루시안은 하마터면 다정히 머리카락을 넘겨줄 뻔했다.

루시안은 주먹을 꽉 쥔 뒤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아직도 나와 같이 있겠다고 말할 건가?”

그는 당연히 아리엘이 돌아가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리엘은 언제나 그 잔소리만 해대는 하녀장이나 마티어스 놈의 곁을 더 좋아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몸이 아픈 상황이니 당장 돌아가겠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자신이 멀리까지 억지로 끌고 와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루시안은 스스로를 대단히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어졌다.

그때, 잠시 그를 응시하고 있던 아리엘이 자그맣게 대답했다.

“……네.”

루시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감정이 울컥 치밀어서 그는 가슴을 들썩였다.

“왜.”

그가 묻자 달콤한 빛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 동요는 잠깐 일어났다가 금방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그녀가 짧게 시선을 피하며 속삭였다.

“루시안이 명령했으니까요. 계약한 대로 의무를 다해야…….”

“또 그런 의무 운운이로군.”

루시안은 더 참기가 어려워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음대로 해.”

그는 성마르게 걸어가 문을 세게 닫고 방을 나섰다.

차마 아픈 아리엘 옆을 완전히 떠날 수가 없어서 침실 바깥쪽 공간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루시안은 무릎에 양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감쌌다.

“멍청한 놈.”

아직도 아리엘이 출발하기 전에 했던 말을 곱씹으며 희망 고문을 받는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더 이상 루시안과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그 달콤한 말을 믿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자신.

루시안은 신음하며 제 손에 더욱 깊이 얼굴을 묻었다.


* * *


아리엘이 회복을 하는 동안, 오델른 왕국의 사절단이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황제는 사절단이 아카데미를 견학하게 해달라는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다른 왕국의 방문을 거절한 적이 없었기에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이들과 함께 가도록 하라.”

황제는 모니카 공작 영애인 다이아나와 마법사 히스에게 이들과 동행하도록 명했다.

혹시 다른 꿍꿍이는 없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카데미까지 오는 여정 동안 오델른 왕국 사절단은 수상한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카데미에 도착한 다이아나와 히스는 아리엘이 아팠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장 아리엘에게 달려갔다.

“아리엘!”

방으로 뛰어들어온 다이아나가 침대에 앉아있는 아리엘에게 마구 돌진했다.

그녀는 곧장 아리엘의 양 뺨을 붙잡고 요리조리 살폈다.

“세상에, 아팠다며. 이 여윈 것 좀 봐!”

“우으…… 다이아나.”

아리엘은 반가워하며 다이아나의 손안에서 바둥거렸다.

침대 곁에 선 루시안을 겁없이 째릿 노려본 다이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가뜩이나 얼마 전에 쓰러졌던 애를 이 먼 데까지 데리고 오다니. 마이너스 200점이야.”

작지만 상대에게 분명히 들릴만한, 의도적인 목소리 크기였다.

루시안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가책을 느끼고 있는 상태라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왔어, 다이아나?”

삐약삐약 건네진 아리엘의 질문에 다이아나가 표정을 싹 부드럽게 바꾸고 사근사근 대답했다.

“오델른 왕국 사절단하고 같이. 폐하께서 우리 아버지를 보내시려고 했는데 내가 냉큼 자원했지. 내 귀염둥이를 보려고.”

그때, 디트리히에게 사절단 소식을 전달한 히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리엘은 그를 보고 조용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히스.”

히스는 아리엘을 보고 움찔하더니 귓불을 붉히며 무뚝뚝하게 인사했다.

가면무도회 때 이후로 그는 더욱 아리엘을 의식하고 있었다.

때론 아리엘을 대공자보다 먼저 만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워질 만큼.

뒤따라 들어온 디트리히가 아리엘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오델른 왕국의 왕자와 왕녀가 병문안을 하러 왔습니다.”


* * *


아리엘은 그녀에게 선물을 바치며 인사하는 오델른의 왕자와 왕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오델른 왕국 사람의 특징대로 무채색한 진회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루시안을 처음 본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그들도 루시안의 미색에 한동안 넋이 나가 있다가 뒤늦게 아리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아리엘라 대공자비님. 저는 오델른의 왕녀, 베로니카입니다.”

베로니카 왕녀를 본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정말로 내가 이상으로 삼고 싶은 모습…….’

오델른 왕국은 척박한 지역에 있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거친 느낌이 났다.

그 중에서도 베로니카 왕녀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각진 몸매의 소유자였다.

어린 시절의 아리엘이 이상향으로 삼았던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아리엘은 매우 키가 커지고 싶었던 소망에 아직 미련이 남아있었다.

‘멋있어.’

아리엘의 뺨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동경을 감추며 차분하게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베로니카 왕녀님.”

베로니카에 이어 남동생인 안드레 왕자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우신 공주님을 뵈니 제국에 얼마나 미녀가 많은지 실감이 되는군요.”

그리고 안드레는 자연스럽게 아리엘에게 다가가 손등 키스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나선 루시안과 디트리히, 히스에 의해 그 행동을 저지당했다.

“내 아내에게서 떨어져라.”

“제 여동생에게 입맞춤은 안 됩니다.”

그리고 평민인 히스는 안드레가 아리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의 망토 자락을 마법으로 슬쩍 밟았다.

안드레 왕자가 밟힌 망토 자락 때문에 휘청이는 사이, 곧장 아리엘 옆자리를 차지한 루시안이 그녀의 작은 손을 덮어 쥐었다.

마치 저놈에게 손등 키스를 허락할 생각도 말라는 듯이.

갑자기 루시안에게 손을 잡힌 아리엘의 뺨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루시안…….’

그녀는 미약하게 꼬물거리며 손을 빼보려고 했지만 루시안이 단단히 잡고 놔주지 않았다.

“인사를 마쳤으면 이만 가보지.”

그가 흉폭한 소유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오델른의 왕족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내 아내가 피곤해하지 않나.”

그리고 루시안은 열이라도 재려는 것처럼 아리엘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상황을 핑계 삼은 비겁한 스킨십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의 심장 박동은 가파르게 빨라졌다.

‘병이야, 아리엘.’

그것도 지독한 병이었다.

곁을 떠날 일만 남았는데도 루시안이 자신을 독점하려 드는 게 싫지 않다니.

이마를 쓸어주는 그의 손길이 이토록 가슴 저리게 좋다니…….

피지 못한 짝사랑이 죽음에게 먹혔더라도 감정은 바로 사라지지 않아서, 아리엘의 심장은 루시안이 곁에 있는 것을 바라고 원했다.

아리엘은 그의 뜨거운 손이 이마를 쓸어넘기는 것을 가만히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본 루시안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몸조리 잘 하시기를.”

행장을 챙겨 방을 나가면서 베로니카 왕녀는 아리엘을 잠깐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그때 살짝 베로니카를 훔쳐보고 있던 아리엘과 눈이 마주쳤다.

베로니카는 티 내지 않고 시선을 피했지만 속으로 흠칫했다.

마치 자신과 안드레가 무슨 의도로 여기에 왔는지 간파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정작 아리엘은 동경하는 마음에 베로니카를 지켜본 것뿐이었지만.

아리엘의 방을 나선 오델른 사절단은 안내받은 숙소에 들어간 뒤에야 긴장을 풀고 숨을 내쉬었다.

안드레 왕자가 소파에 드러눕듯 앉으면서 말했다.

“소문의 대공자비가 어떤가 했더니. 진짜 더럽게 예쁘잖아.”

그렇게 말하는 왕자의 눈에는 욕망이 내비쳤다.

안드레는 대공자가 왜 그렇게 대공자비를 싸고도는지 알 것 같았다.

분가루가 묻어날 것같이 하얀 피부는 우유빛 도자기 같았고, 색채가 선명한 붉은색 머리카락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투명한 피부가 살며시 붉어지던 모습은 또 어떻고.

어떤 남자라 해도 마음이 끌릴 것이다.

제 아내가 그렇게 예쁘면 당연히 경계가 되겠지.

“그런데 대공자 뿐만 아니라 주변 놈들도 죄다 난리던걸.”

안드레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가 대공자비에게 다가갈 때 황태자와 다갈색 머리의 마법사, 그리고 공작 영애가 보였던 반응을.

그들은 안드레에게 날선 적의를 드러내며 그의 접근을 막았다.

특히 공작 영애의 타오르는 눈빛은 무서울 정도였다.

성가시게도 대공자비는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나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았다.

쉽게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한참 떠들어대던 안드레는 옆에 앉은 그의 누이, 베로니카를 흘낏 바라보았다.

베로니카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민 안드레가 이죽거렸다.

“고상한 척 해봤자 누나도 똑같지. 남동생한테서 왕위를 빼앗으려는 야욕에 불타서 여기까지 왔잖아?”

그가 도발하자 베로니카의 무심한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안드레는 한껏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누나도 결국 대공자비를 납치해서 왕이 되려는 것뿐이니까.”

베로니카가 한숨을 내쉬고 입을 뗐다.

“닥쳐. 여기는 제국이다. 어디나 눈과 귀가 있는데, 모국의 안위가 걱정되지도 않나?”

안드레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킥킥 웃었다.

“아, 그래, 그래. 내 잘난 누이께서는 애국심이 투철하시니 뭐…….”

그렇게 말한 안드레는 시종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베로니카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

그녀 또한 대공자비에게 처음 받은 인상은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대공자를 보고 얼이 빠졌음에도 대공자비의 미모가 더욱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무채색한 외모가 특징인 오델른 왕국에서는 머리색이나 눈동자 색이 밝은 사람이 희귀했다.

그래서 검고 어두운 대공자보다 대공자비의 달콤한 붉은빛에 더욱 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파서인지 그녀에게서는 처연한 느낌마저 풍겼다.

보호 본능에 약한 베로니카는 저런 어린 소녀를 인질로 삼아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안드레가 왕위에 오르게 놔둘 수는 없어.’

그녀의 남동생인 안드레 왕자는 왕이 되기에 자질이 부족하고 방탕하며 성정이 탐욕스러웠다.

베로니카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이게 우리 오델른 왕국을 위한 길이야.’

고작 여자애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순 없지.

검은 망토를 입은 그 사내가 일러준 날은 푸른 달이 뜨는 날이었다.

베로니카는 그날을 기다려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 * *


디트리히와 루시안은 달그림자 단원의 보고를 받았다.

“수호목을 지키는 병사들을 지켜본 결과,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는 없었습니다.”

디트리히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학생들이나 교수 중에 첩자가 있다는 말인가?”

“…….”

“말해라.”

주인인 루시안이 허락하자 달그림자가 짧게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난감하군. 학생들이 대상이라면 범위가 너무 넓어. 행동을 제한하기도 어려울 테고.”

디트리히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심지어 귀족 아카데미인 이곳에는 학생들의 하인들 또한 수백 명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까지 모두 조사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번 가면 무도회 때 타락의 수하가 황궁의 시녀였기 때문에, 디트리히는 내심 병사들 중에서 첩자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른 결과에 이젠 계획을 바꿔야 할 때였다.

달그림자가 나간 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다이아나였다.

다이아나가 사뿐히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한 뒤 말했다.

“아리엘은 잠들었어요.”

들어와서 자리에 앉은 다이아나가 묘한 눈길로 루시안과 디트리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의도치 않게 들어버렸는데, 아카데미 내부에서 첩자를 찾고 계시다고요?”

‘……!’

디트리히는 당황한 얼굴로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사교계의 여왕이라더니, 과연 분위기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상당했다.

밉지 않은 뻔뻔한 미소가 입에 걸린걸 보니, 의도치 않게 들었다고 한 것은 거짓말일 테고.

하지만 다행히도 그 첩자가 드래곤의 눈과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다이아나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제게 생각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어요?”

더 숨기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디트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세요. 모니카 공녀.”

다이아나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정보 조작을 하는 거예요.”

“정보 조작이요?”

“네. 사교계에서 배신자나 세작, 입이 가벼운 사람을 가려내는 방법이죠.”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다이아나가 자신만만하게 손가락을 치켜들며 설명했다.

“여러 사람에게 서로 다른 정보를 비밀이라면서 공유하는 거예요. 그러면 잘못 새어나간 데를 역추적해서 누가 흘렸는지, 배신했는지를 알 수 있죠.”

그녀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지휘봉으로 아카데미 지도 위 여러 곳을 탁탁 찌르며 말했다.

“첩자가 솔깃할 만한 정보를 여기저기에 뿌려두면 분명 수상한 짓을 할 테고…….”

다이아나의 말을 이해한 디트리히가 이어 말했다.

“첩자의 범위를 줄일 수 있겠군요.”

“네. 잘하면 잡을 수도 있고요.”

디트리히는 새삼 다이아나의 지략에 감탄했다.

황태자비 후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봐왔지만 실제로 머리를 쓰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과연 사교계의 여왕다운 계책이군요.”

다이아나가 도도하게 턱을 치켜 올렸다.

“제가 좋은 인재인 걸 이제 아셨나요? 제가 꽉 잡고 있는 사교계는 온갖 음모와 술수가 판치는 곳이랍니다.”

디트리히는 잠시 머릿속으로 위험 부담을 점쳐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락이 노릴 것으로 예상되는 요하네스 아카데미의 축제 기간이 바로 코 앞이었다.

“……좋습니다. 공녀의 말대로 해보죠.”

고고하게 인사한 다이아나가 자리를 떠나자, 디트리히는 루시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퇴폐적으로 기대앉은 루시안은 아까부터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에 빠져있었다.

“대공자. 축제 전에 블루문이 뜬다는 건 알고 있겠지?”

블루문이라는 단어를 들은 루시안이 눈을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푸른빛 눈동자에 오싹함을 느끼며 디트리히가 물었다.

“여태까지처럼 블루문이 떴을 때 마수를 사냥하러 다녀올 건가?”

“아니.”

루시안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아리엘도 수호목도 여기에 있는데 내가 자리를 비울 순 없지.”

“하지만 그때가 되면…….”

블루문이 뜰 때마다 라카트옐이 극심한 살의와 고통을 느껴서 위험한 상태가 된다는 걸 아는 디트리히가 머뭇거렸다.

루시안은 서늘한 목소리로 오만하게 일갈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첩자 찾는 일에나 집중해.”

요요한 푸른 달이 뜨는 날이 빠르게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한편, 수도의 본가에 있던 마티어스는 홀로 저녁 식사를 하던 중에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곧 블루문이군.”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노집사 알렌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주인님. 올해는 특별히 윤년의 블루문이지요.”

마티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잊으실만 합니다. 큰 주인님께서는 20여 년 전 이후로 헤아리실 필요가 없으시니.”

“…….”

침묵하던 마티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루시안 녀석은 다르겠지.”

“그야 그렇습니다만…….”

알렌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마티어스가 자신의 식기들 외에는 텅 빈 식탁을 둘러본 뒤 냅킨을 집었다.

식사를 끝내겠다는 의미의 행동에 알렌이 황망하게 말했다.

“아직 음식이 한참 남았는데요, 주인님.”

마티어스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아리엘라가 없으니 이 시간이 별로 즐겁지 않군. 원래 이랬던가?”

아리엘이 들어온 후, 마티어스가 그녀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건 불문율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일까.

마티어스는 그 전의 기억이 희미하다고 느꼈다.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 식사에 익숙해진 건 알렌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원래 어떠셨는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마티어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마 우리 중 누구도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아리엘이 이 집을 따스함으로 가득 채우기 전으로는.

그녀가 겨우 며칠 집을 비웠을 뿐인데도 다들 아리엘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몸을 일으킨 마티어스가 긴 흑발을 쓸어넘기며 입속말을 했다.

“루시안 녀석은 수호목 때문에 거길 떠나지 못할 테니-”

그가 알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리엘에게 서신을 써야겠다. 블루문 때 그 녀석을 주의하라고.”

주인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아차린 알렌이 헛기침을 했다.

“걱정 마십시오. 괜찮으실 겁니다. 작은 주인님께서 아무리 지각이 없으셔도…….”

하지만 마티어스는 씁쓸하게 내뱉었다.

“자네는 몰라. 그게 어떤지.”

라카트옐은 블루문이 뜰 때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곤 했다.

그중에서도 자손이 없는 성년의 라카트옐은 윤년의 블루문이 뜰 때마다 고통과 더불어, 미약을 먹은 것과 같은 반응이 일어났다.

‘초대 드래곤이 라카트옐로 하여금 자손을 이어가도록 만든 저주지.’

이성이 마비되고, 아무리 견디려 해도 소용없는 미칠 듯한 갈망.

“루시안 녀석은…… 어쩔 수 없을 거다. 버티는 수밖에.”

낮게 한숨을 내쉰 마티어스는 집무실로 돌아가 아리엘에게 간단한 편지를 썼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 *


아리엘이 완전히 쾌차한 뒤, 일행은 다시 첩자를 찾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디트리히는 다이아나의 계책대로 정보 조작에 돌입했다.

그는 학생들과 하인들, 교수들을 그룹으로 나누어 수호목에 대해 서로 다른 정보를 뿌렸다.

“타락이 들으면 솔깃할 정보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별것 아닌 소문이겠지만요.”

루시안은 그들 중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있으면 바로 소식이 들어오도록 달 그림자를 아카데미 전체에 배치했다.

그렇게 적이 먹이를 물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행은 아카데미 곳곳을 돌아다니며 눈속임용 견학을 했다.

가끔은 오델른 왕국의 왕자나 왕녀와 동행하기도 했다.

디트리히와 히스가 안드레 왕자를 데리고 가면, 아리엘과 다이아나는 베로니카 왕녀와 함께 하는 식이었다.

오델른 왕국의 왕자가 몇 번이나 아리엘과 동행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매번 기각되었다.

첫 번째론 다이아나요, 두 번째론 디트리히와 히스, 마지막은 살기가 첨예하게 흐르는 루시안에 의해서 였다.

루시안이 항상 아리엘과 붙어 다녔기에 오델른 왕국 사절단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다같이 아카데미 승마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자들이 승마 장비를 풀고 돌아오는 동안 남자들은 승마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멀찍이서 그들을 본 다이아나가 문득 중얼거렸다.

“새삼 눈이 즐겁구나…….”

서로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각자 다른 방향을 보며 서 있는 남자들은 개성이 뚜렷했고, 각각의 아름다움을 전시하듯 보여주고 있었다.

찬란한 골든 블론드를 가진 디트리히는 태양을 머리 위에 둔 것마냥 빛났다.

호리호리한 몸에 반항적인 금색안을 가진 히스도 눈에 띄는 외모인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온몸에 어두운 마력을 휘감은 루시안의 위험한 아름다움 앞에선 모든 것이 퇴색되는 듯했다.

그의 아름다움은 신 아니면 악마나 가질 수 있을 법한 금단의 영역이었으니까.

“잘생긴 건 항상 옳아…….”

인정할 건 인정한다는 듯 다이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내 아리엘 쪽을 돌아본 다이아나는 아리엘의 가냘픈 어깨를 와락 껴안으며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귀여운 건 세상을 구하지!”

다이아나의 눈동자 안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 듯했다.

‘나한테는 귀여운 게 최고야.’

아리엘은 그런 다이아나가 귀여워서 작게 웃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 다이아나와 걷던 아리엘은 생각 속에만 담아뒀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다이아나. 여자들도 다닐 수 있는 아카데미가 생기면 어떨까?”

다이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너무 좋지! 귀족 영식들이 아카데미를 다닐 동안 영애들은 가정 교사에게 기초 교양만 배울 뿐이잖아.”

아리엘은 다이아나의 눈빛에서 목마름을 느꼈다.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뛰어난 소녀들이 배우지 못해서 좌절했을까?

아리엘은 마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엉망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있었다.

‘내 마지막은 바꿀 수 없더라도, 다른 사람들만큼은…….’

문득 아리엘의 머릿속에 자신이 후원하는 재단 수잔나의 소녀들이 떠올랐다.

재단 수잔나에서는 가난한 소녀들의 생계를 돕고, 그들이 예술이나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다.

달튼이 전해준 바로는 그들 중 재능있는 소녀들이 많다고 했다.

‘귀족들뿐 아니라 평민들도 다닐 수 있는 아카데미가 생긴다면 그 소녀들도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재단에서는 당연히 그들의 학비를 후원할 것이다.

아리엘은 다이아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누었다.

마구를 핑계로 뒤처져 걷던 베로니카는 우연히 아리엘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

오델른 왕국은 여자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긴 했지만, 왕족 외의 여자들에게는 아예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척박한 오델른에서 여자들은 그저 노동력으로 취급받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제국에서 말하는 기초 교양 수준도 배울 수 없었다.

그런 나라에서 자란 베로니카에게 아리엘의 이야기는 숨 막히게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아리엘에게 느끼는 호감 때문에 베로니카는 더욱 괴로워졌다.

‘내가 과연 저 소녀를 인질로 잡고 라카트옐을 협박할 수 있을까?’

가까이에서 보니 아리엘과 루시안이 서로를 의식하는 모습은 너무나 뚜렷했다.

아리엘의 나이가 어려서인지 내외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의 온 신경이 서로에게 쏠려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리엘을 인질로 잡는다면 라카트옐을 협박하는 건 쉬울 것이다.

‘하지만…… 대공자비가 무척 슬퍼하겠지.’

베로니카는 아리엘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베로니카는 그 생각을 떨쳐내듯 고개를 저었다.

검은 망토 사내가 일러준 날은 다름 아닌 오늘 밤이었다.


* * *


오델른 왕국 사절단을 돌려보내고 난 뒤 일행은 각자 숙소로 흩어졌다.

기숙사에 아리엘과 둘만 남자, 한동안 현관 앞에 멈춰 서있던 루시안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다른 방에서 자.”

아리엘은 영문 모를 명령에 당황했다.

“네? 어째서…….”

아카데미에 와서 그녀와 루시안은 줄곧 같은 침실을 썼다.

다만, 아리엘이 피를 토한 뒤 몸을 회복하는 동안 루시안은 그녀에게 자신과 한 침대에서 자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리엘에게 침대에서 자도록 명령한 뒤, 자신은 긴 카우치에 눕곤 했다.

타락에게서 지키기 위한 행동인 것 같았다.

‘그런 이유라도…… 좋았는데.’

루시안의 기척과 그의 체취가 느껴지는 방에서 지내는 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아리엘에게 분에 넘치는 행복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몸을 회복하자마자 다른 방으로 보낸다니?

결국…… 나와 함께 있는 것조차 싫어진 걸까?

아리엘의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한편 아리엘이 어깨를 떨구는 걸 안심한 것으로 여긴 루시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가 위협하듯 그녀의 귓가에 말했다.

“안심하지 마. 오늘만이니까.”

루시안은 하필 지금 다가온 블루문이 지독하게 증오스러웠다.

원래라면 북부 산으로 떠나서 혼자 감당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타락이 언제 아리엘을 노릴지 알 수 없으므로.

밤에 그녀를 다른 방에 떨어뜨려 놓더라도, 가까이에만 있으면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적이 눈앞에 있다면 싸울 수 있으니까.

어차피 그 피가 끓는 고통 또한 태고적 드래곤에 가까워지면서 강해지는 까닭이 아닌가.

강해진 피로 마수 대신 타락을 베어 버리면 될 일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루시안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엘의 얼굴을 샅샅이 눈으로 덧그렸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하얀 뺨, 가느다란 목덜미, 작고 말랑한 귓불.

어느 것 하나 연약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저렇게 약하고 부드러운 그녀가 오늘 자신과 함께 있는다면 필연적으로 다치고 말 것이다.

그는 시선을 홱 돌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오늘만 넘기면.

다시는 아리엘을 제 시야 밖에 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3층 끝방으로 가.”

루시안은 오늘 아리엘이 머물 처소를 일부러 그의 방과 가장 먼 곳으로 골랐다.

무슨 소리가 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먼 방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리엘은 오늘만 따로 자야 하는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기묘한 불안감만 가슴 속을 맴돌 뿐이었다.


* * *


밤이 되자 아리엘은 새로 옮긴 방에 혼자 남았다.

루시안의 명령으로 다 꾸며져 있어서 불편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 포근한 침대.

편안한 잠옷과 진정되는 향기를 퍼트리는 실크 플라워가 꽂힌 아로마 오일병.

일부러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침실로 왔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

아리엘은 침대에 웅크려 앉아 서늘한 공기에 몸을 떨었다.

실내 공기는 훈훈했음에도, 둘이 있을 때와는 달리 루시안의 온기가 없는 느낌이 싸늘하기만 했다.

아리엘은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속으로만 슬프게 중얼거렸다.

‘그래. 사실 루시안을 필요로 하는 건 내 쪽이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루시안이 자신을 억지로 옆에 붙여두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리엘은 알고 있었다.

실상 더욱 그의 곁자리를 애타게 원하는 건 자신이라는 걸.

루시안 옆에 있을 땐 늘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혹시나 막지 못한 애틋한 감정이 새어나가 버릴까 봐.

그렇게 마음을 들켜버리면, 떠나겠다는 말을 더 이상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러나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의 옆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루시안…….”

아리엘은 자그맣게 그의 이름을 입에 머금어보았다.

그 이름에 반응한 심장 한 편이 아프게 욱신거렸다.

루시안은 자신보다 힘이 만 배쯤 세니까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원하면 곁에 두고, 원하지 않으면 떼어놓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힘이 세지 못해서, 루시안이 멀리 있으라고 하면 따를 도리밖에 없는걸요…….’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그녀의 창가에 달빛이 느리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리엘이 달빛의 색이 푸르다는 걸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푸른색…….’

그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블루문의 시기를 되짚어 봤지만 시기가 맞지 않았다.

‘이상해.’

블루문은 일 년에 네 번 뜨는 게 법칙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다음 블루문이 뜰 때가 되지 않았다.

아리엘은 당장 침대를 벗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사람을 홀릴 것 같이 요사스러운 빛깔의 푸른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루시안은 갑자기 왜 오늘 나를 다른 방으로 보낸 걸까?

또, 블루문이 떴는데 왜 북부 산으로 떠나지 않은 걸까?

두려운 예감 때문에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그럼 루시안은, 지금 혼자서…….’

더 생각할 틈도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곁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아리엘은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작고 하얀 맨발로 루시안의 처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블루문의 고통은 달이 막 떠오른 이른 저녁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흥분한 호르몬이 치솟은 인간처럼 몸이 뜨거워지고, 생명체들을 향한 살의가 끓어오른다.

그다음에는 혈관 안쪽부터 불이 붙은 듯한 광기가 치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세포 하나하나를 조각내는 듯한, 신경과 조직이 뜯기는 듯한 고통이 퍼져나간다.

“흐윽…….”

어떻게든 고통을 잊어보려고 칼이나 사금파리로 스스로의 피를 보아도 잠시뿐.

지독한 드래곤의 피는 금세 상처를 아물게 해버리고, 안쪽부터 갈가리 찢기는 고통은 계속 이어진다.

바닥에 쓰러지면서 찢긴 이마에서 피가 흘렀는지 눈앞이 붉어졌다.

“흑, 하아, 으윽…….”

누군가 거대한 망치로 온 몸을 짓뭉갠다면 이런 느낌일까.

정신과 육체를 낱낱이 갈아 흩어버리면 이런 느낌일까.

루시안은 고통을 견디며 이성의 끈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걸 놓아버리면 쌓인 살의를 풀기 위해 주변을 학살하러 나갈지도 몰랐다.

아리엘이 있는 곳에서 학살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억눌렀다.

그러나 잔인한 블루문은 점점 힘을 키우며 더욱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윤년에는 블루문이 원래보다 한 차례 더 뜬다.

그리고 하필 이번이 그 한 차례 더 낀 블루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또 으레 뜨는 푸른 달이겠지만 그에게는 달랐다.

무엇이건 죽이고 싶은 살의와 동시에, 그만큼의 욕망도 함께 일어나니까.

드래곤의 에고에 담긴 지식을 통해 루시안은 그것이 인간들이 최음제나 미약을 먹었을 때와 비슷한 효과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안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때가 좋지 않긴 했지만 고통은 이미 수차례 겪어봤던 것이고, 욕망도 지나갈 것에 불과했다.

평소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루시안……?”

문 바깥에서 작은 소리를 내는 그 보드라운 유혹이 찾아들기 전까지는.

아리엘의 기척을 느낀 그는 뼈가 바스라질만큼 세게 주먹을 쥐었다.

제길.

이래서 떨어뜨려 놓은 건데.

뒤늦게나마 못 들어오도록 결계를 치기엔 고통이 너무 거셌다.

그는 바깥에서 듣지 못하도록 신음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참기 위해 손에 움켜쥔 무언가가 박살나는 바람에 부서지는 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뭔가 깨지는 소리를 들은 바깥의 아리엘이 놀란 듯 숨을 들이마시고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루시안, 루시안……!”

루시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자신이 아리엘을 가만히 놔둔다면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들어올 것이었다.

그의 꼬맹이 아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착해빠진.

그녀는 루시안의 기준으론 너무나 착하기 그지없었다.

보잘것없는 인간을 마차 사고에서 구하려다 자기가 다치고,

학대한 가족을 개의 먹이로 던져줄 생각도 하지 못하며,

저를 태운 말이 주제를 모르고 날뛰어도 죽이지 말라고 눈물을 글썽이는…….

그러니 떠나겠다고 했을지언정 당장 눈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겁을 줘서라도 보내야지.

루시안은 있는 힘껏 고통을 누르며 간신히 바닥에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멀쩡한 척 오래 버티기엔 무리였다.

빨리 보내야 했다.

그는 비틀비틀 걸어가 문고리를 홱 당겼다.

“루시안.”

그러나 하얗게 질린 채 문 앞에 서 있는 아리엘과 맞닥뜨린 순간, 루시안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아리엘이 곧장 그의 팔에 매달리며 물었다.

“루시안, 괜찮아요? 블루문이…….”

둘의 눈이 아주 가까이에서 마주쳤다.

루시안의 머릿속에서 맥박 소리가 쿵쿵 울렸다.


* * *


좋지 않군.

루시안은 턱을 세게 다물었다.

그에겐 순식간에 다가온 아리엘을 방어할 틈이 없었다.

쥐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그녀의 손이 그의 팔을 온 힘 다해 잡는 것도, 겁난다는 듯 움츠린 몸을 가까이 붙여오는 것도.

그녀가 움직이는 곳마다 달콤한 복숭아 향기가 풍겼다.

어지러울만큼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이건 정말, 좋지 않은데.

한편, 땀에 젖어 갈라진 루시안의 머리카락과 피범벅이 된 한쪽 얼굴을 본 아리엘은 충격에 굳어버렸다.

피는 멎은 듯 했지만, 빨리 상처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런데 그녀가 더 다가가려고 하자, 루시안이 뒤로 물러나며 그녀의 접근을 막듯 손을 들었다.

뭔가를 참고 있는 것처럼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였다.

“아리엘라.”

경고하는 어조로 그가 아리엘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문 바깥쪽으로 짧게 턱짓했다.

“필요 없어. 나가.”

축객령을 받았지만, 아리엘은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블루문이 뜨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느낀다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혼자 내버려 두겠는가.

게다가 지금의 루시안은 마치 화살에 맞은 짐승이 그것을 빼 주려고 하는 사람에게 으르렁대는 모습 같았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그가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너는 전혀 도움 안 되니까, 나가라고 했어. 이것도 따로 명령을 해야 하나?”

아리엘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루시안은 고통스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차갑게 말했다.

“난 내 소유물이 본분을 잊는 건 질색이야.”

‘……!’

아리엘은 순간 표정을 가다듬지 못하고 창백해졌다.

심장이 쿵 떨어지며 온몸에 피가 차갑게 식었다.

소유물. 본분.

그녀가 그의 소유인 것, 본분을 지켜야 하는 것 모두 다 맞는 말이었다.

루시안은 사실을 짚어준 것뿐이다.

그런데 마음이 이상했다.

뭔가가 속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순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너무 아팠다.

아무 말이라도 꺼내고 싶은데 입술만 떨리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안이 너무 아파 보여서 도저히 그의 말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문틀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팔에 난 힘줄이 팽창해 움직였고, 손마디는 하얗게 질린 채였다.

결국 견디기 힘든지 루시안이 이를 꽉 문 채 약하게 휘청거렸다.

“루시안-”

놀라서 내민 그녀의 손이 루시안의 손에 짧게 닿았다.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그의 체온, 그리고…….

탁!

큰 소리를 내며 루시안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아리엘은 놀란 숨을 들이켰다.

뿌리친 루시안도 자기 행동에 놀란 듯 붉은 입술을 벌리며 물러났다.

그는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 아리엘과 훌쩍 거리를 벌렸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완전히 외면한 그가 재차 차갑게 내쳤다.

“내가 지금 살의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쯤은 알겠지. 빨리 도망가. 다치고 싶지 않으면.”

하지만 그의 경고에도 아리엘은 절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루시안. 나는 그럴 수가 없어요.

그녀는 자신이 여기 있어야 하는 까닭을 스스로에게조차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도움이 되지도 못할 텐데.

그럼에도 아리엘은 도저히 그가 혼자 고통받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혼자 아픈 건, 나로도 충분하니까. 그러니까…….’

아리엘은 젖어드는 제 눈가를 느끼며 속삭였다.

“아프잖아요. 힘들잖아요. 옆에 있을게요. 네?”

그녀는 가늘게 떨며 몸을 방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것을 본 루시안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이 방 안으로 한 발짝만 더 들어오면 안전 장담 못해.”

섬뜩한 목소리였다.

온몸이 얼어붙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의 짙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 날선 빛을 흘리며 경고하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아리엘의 본능도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얼마나 위험한지.

어쩌면 그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

하지만 아리엘은 본능의 경고를 뒤로한 채, 안으로 한 발자국 더 내디뎠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루시안의 손이 그녀를 잡아채 안으로 끌어들인 뒤 닫힌 문에 밀어붙였다.

“흣.”

문이 등에 밀려 덜컹 소리를 냈다.

“다가오면 다친다고 경고했을 텐데.”

루시안이 낮고 오만하게 뇌까렸다.

피로 얼룩진 아름다운 얼굴이 죽음의 신처럼 다가왔다.

“내가 널 해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판이야. 요즘 난 널 해칠 생각뿐이었거든.”

하지만 이미 이 방 안에 들어온 이상 아리엘이 할 수 있는 대답은 많지 않았다.

아리엘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뭐?”

“다쳐도 좋으니까, 제발…….”

그 뒤의 말은 목 안으로 삼켜졌다.

‘제발 혼자서 아파하겠다고 말하지 말아요.’

그것만 아니라면 뭐든 해줄게요. 뭐든 다 해줄 거예요…….

결국 눈물이 흘러나와서 아리엘은 얕게 흐느꼈다.

그 눈물을 본 루시안이 아리엘의 양옆에 손을 짚고 윽박질렀다.

“빌어먹을, 계약이라면서 나한테 신경 쓰지 마.”

그는 끔찍한 고통과 혼란스러움 때문에 이성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성이 끊어진 것은 아리엘이 먼저였다.

울던 아리엘이 겁도 없이 그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싫어요.”

그리고 발칙하게도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자그마한 손이 제 딴에는 힘을 주며 그의 뺨을 쥐고 끌어당겼다.

어딘지 그녀는 화가 난 것 같아 보였다.

“신경 쓸 거예요.”

루시안은 그녀를 새파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시선만으로도 인간을 낱낱이 발라 해부할 수 있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왜지?”

하지만 아리엘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물이 더 나올 것처럼 목 안쪽이 막혔지만, 그것 또한 꾹 눌렀다.

대신 그녀는 그의 대리석같은 피부를 어루만지며 속으로만 말했다.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루시안…….’

루시안의 턱이 세게 다물렸다.

그의 손이 아리엘이 제 뺨에 얹어놓은 작은 손을 속박하듯 얽어 쥐었다.

이제 그도 화가 난 듯 보였다.

그가 자신을 떼어내겠구나 하고 그녀가 생각하는 찰나, 그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다 네 탓이야.”

루시안의 손이 거칠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리엘은 그의 힘이 제 몸을 찢어놓을 것을 예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찾아온 것은.

델 것처럼 뜨거운 그의 입술이었다.


* * *


‘……!’

아리엘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해볼 새도 없었다.

루시안의 그림자가 지며 어둑해지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것을 덮쳐왔다.

“읍.”

아리엘이 눌린 입술 사이로 놀란 소리를 냈다.

그 사이 루시안은 그녀의 얼굴을 커다란 양손으로 가두어 쥐었다.

그가 얕게 입술을 벌리고 아리엘의 분홍빛 입술을 물었다.

색기 어린 입술의 움직임 사이로 어두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왜 항상 그런 식이지?”

그녀의 숨을 훔쳐 삼키며 그가 속삭였다.

날 겁내라고 경고한 건 어디로 듣고.

적어도 천적에게 멋도 모르고 다가오는 짓은 말았어야지.

루시안이 단 것을 머금듯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나를…… 하, 자극하지 말라고 했잖아.”

지독하게 낮고, 색기있게 잠긴 목소리.

아리엘의 숨이 잠시 멈추었다.

가냘픈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떡해.’

머리로는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가까이 있는 루시안에게서 들끓는 열이 느껴졌다.

‘루시안 몸이 불덩이 같아.’

보통 아픈 게 아닌 듯했다.

사람이었다면 당장 기절해도 이상할 것 없는 온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아리엘은 생각을 이어가는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의 달아오른 숨이 넘어오는 게 머릿속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열을 내려줘야 하는데…….’

인간을 매혹해 삼켜버리기 위해 태어난 양, 루시안의 입맞춤은 순식간에 그녀를 마비시켰다.

그녀의 입술에 오아시스라도 있는 듯 그는 목마른 사람처럼 아리엘을 갈구했다.

숨이 막힌 아리엘이 도망가면 집요하게 따라와 입술을 부딪쳤다.

입을 맞추고 있을 뿐인데, 더 나쁜 짓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씩 떨어질 때마다 못 참겠다는 듯 낮게 신음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힘이…….’

정신없이 찾아드는 입맞춤을 받던 아리엘은 그의 달콤한 숨결에 자꾸만 힘이 풀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팔로 그의 어깨를 짚고 몸을 지탱하려 애썼다.

루시안의 열이 자신에게로 옮겨온 것 같이 맞닿은 입술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윽…….”

입맞춤 사이사이에 루시안은 고통 섞인 신음을 뱉었다.

아름다운 미간이 경련하듯 찌푸려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엘은 이 입맞춤이 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그녀는 무너지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루시안이 아파서 이런다는 건 알지만…….’

지금만큼은 그가 자신을 애타게 원하는 것 같아서.

착각인 걸 알면서도 행복했다.

어리석지만, 지금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해.

아리엘은 루시안의 어깨만 겨우 짚고 있던 손을 그의 목 뒤로 둘렀다.

키 차이가 너무 나서 루시안이 잔뜩 몸을 숙인 상태임에도 발돋움을 해야 했다.

그녀가 아이처럼 매달리자, 거세지는 그의 욕망이 느껴졌다.

지금만큼은 자신이 머지않아 죽는다는 사실마저 잊히는 것 같았다.

아리엘은 눈을 감은 채 루시안의 뒷머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옮겨오기를 바라면서.

‘조금만 참아요, 루시안.’

내가 죽고 나면 다 자유로워질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면 이 고통도 끝날 테니까, 이번만…….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루시안이 흥분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의 입술을 놔 주었다.

그의 눈가에는 여전히 최상위 포식자의 짙은 매혹이 배어있었다.

아리엘과의 입맞춤이 광기와 살의를 희석시켜줬지만, 그녀를 향한 갈망에는 오히려 불을 지폈다.

자신을 올려보는 아리엘의 젖은 눈망울과 발갛게 부어오른 작은 입술에 잠깐 눈앞이 아찔해졌다.

“…….”

놓여난 아리엘은 자신이 전혀 반항하거나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그때, 그녀의 양 뺨을 놓은 루시안이 신음을 흘리며 무너져 내렸다.

“으윽…….”

아리엘이 서둘러 그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체격 차이가 너무 심해서 함께 넘어져 버렸다.

쓰러진 루시안은 땀을 비오듯 흘리며 고통스럽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리엘은 어쩔 줄 모르고 그의 옷깃만 붙잡았다.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그녀의 크고 둥근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고통에 잠식된 루시안 앞에서 방황하던 그녀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물수건이라도…….”

하지만 아리엘은 다 일어나기도 전에 루시안에게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그녀를 끌어당긴 루시안이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가지 마.”

아리엘은 울며 고개를 내저었다.

“방에 안 돌아가요. 물수건만…….”

“안 돼. 가지 마.”

그가 약한 목소리로 거듭 말했다.

“가지 마, 아리엘…….”

아리엘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파서 횡설수설 내뱉는 그 말이 당신을 영영 떠나지 말란 뜻으로 들린다면…….

그저 내 바보 같은 망상이겠죠.

그럼에도 그녀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루시안의 곁을 지켰다.

밤하늘 꼭대기까지 떠오른 푸른 달이 지려면 아직도 한참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 * *


그 시각.

베로니카 왕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검은 망토의 사내가 일러준 장소로 나갔다.

검은 망토의 사내는 오늘이 아니면 감시를 피해 접선하기 어려울 거라고 말했었다.

푸른 달이 뜬 기묘한 밤.

안드레가 일찌감치 처소를 나갔던 걸 보면, 그도 따로 검은 망토의 사내를 만나고 온 게 분명했다.

베로니카는 검은 망토가 준 마도구로 그를 불러냈다.

처음 만날 때부터 검은 망토는 꺼림칙하기 그지없었다.

대공자비를 직접 만나본 후로는 더욱 검은 망토에 대한 예감이 좋지 않았다.

‘우리 왕국의 이득을 위해서라고 아버지를 유혹했지만, 오히려 재앙이 되는 건 아닐까.’

그러나 탐욕에 미친 아버지와 안드레를 막기 위해서라도 베로니카는 이 일을 해내야만 했다.

찾아온 검은 망토의 사내는 베로니카에게 작은 약병에 든 액체를 주었다.

베로니카는 액체를 내려다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걸로 뭘 하라는 건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주 작은 틈입니다. 왕녀님.”

약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일러준 사내가 흉측한 입을 찢으며 웃었다.

“아카데미 내부에 제 수하가 있으니, 그다음은 그가 알아서 할 겁니다.”


* * *


다음날 아침.

아리엘은 눈꺼풀을 파고드는 빛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창 안으로 햇빛이 새어 들어와 눈이 부셨다.

그녀는 살짝 눈을 찡그리며 잠의 경계에서 꼼지락거렸다.

몸이 닿아있는 곳은 푹신한 침대 위였다.

‘침대 위……?’

문득 어젯밤의 기억이 아리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새벽녘까지 고통스러워하는 루시안의 손을 잡고 울다가, 그가 무어라고 말할 때마다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아무 대답이나 속삭이다가…….

결국 지쳐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깨어보니 어제처럼 딱딱하고 유리 파편이 널브러진 바닥이 아니라 침대 위였다.

아리엘은 눈을 깜박이며 천천히 초점을 맞췄다.

눈을 뜨자, 햇살이 숨 막히게 쏟아져 들어오는 창을 등진 남자와 고요히 눈이 마주쳤다.

루시안이었다.

어쩐지 그가 잠든 자신을 한참동안 지켜보고 있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상황을 깨달은 아리엘은 허둥대며 몸을 일으켰다.

어제의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오며 머릿속을 헤집었다.

푸른 달이 떴던 어젯밤, 찾아간 자신에게 날선 말을 하며 쫓아내던 루시안, 그의 경고를 뒤로하고 침범하자 급작스럽게 찾아왔던…….

입맞춤.

그 기억까지 떠올린 아리엘은 하마터면 입술에 손을 얹을 뻔했다.

그 대신 그녀는 양손으로 주먹을 꼭 쥐며 팔 아래에 얌전히 붙들어 두었다.

블루문에 잠식된 채 그녀를 집어삼켰던 루시안은 지금 말끔한 낯이었고, 이성 따윈 던져버리고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아리엘 또한 지금은 판단력이 또렷했다.

그래서 아침의 햇살 아래에 선 두 사람 사이에는 퍽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

“…….”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침대를 벗어난 아리엘은 구겨진 하얀 실내 드레스만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후회, 해야 하는데.’

후회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아무리 마음속을 뒤져보아도 후회의 조각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루시안이 어제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가 걱정돼서 심장이 조여들 뿐이었다.

한편 루시안은 고개를 푹 떨군 아리엘을 보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꼈다.

‘역시 어제 일을 후회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잔상처럼 남아있는 어젯밤 아리엘의 모습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유혹에 무너져 그녀에게 입 맞추던 그를 밀어내지 않고 도리어 매달리던…….

그걸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이 뜨거운 액체로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어젯밤부터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움켜잡고 묻고 싶었다.

너 정말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봐. 왜 그렇게 행동해.

왜 내 고통에 울고, 왜 네 몸을 던져. 정말 죽고 싶기라도 했어?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하나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는 원래 인내에 재능이 없었으므로, 묻지 못한 질문들이 속을 까맣게 불사르며 파고들 따름이었다.

“…….”

루시안은 방을 떠날 준비를 하며 사부작사부작 작은 소리를 내는 아리엘의 모든 움직임을 시선으로 쫓았다.

끝내 아리엘이 방을 나서는 것보다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게 앞섰다.

아리엘이 문밖을 나서기 직전, 루시안은 잔뜩 억누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도.”

소리없이 움직이던 아리엘이 눈에 띄게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조차 그녀가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어제도…… 계약 때문이었어?”

그의 질문을 들은 아리엘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참만에 간신히 말을 꺼냈던 루시안은 성급하다 싶을 만큼 빠르게 그녀를 막았다.

“아냐. 대답하지 마. 알고 싶지 않으니까.”

불쌍해서 그랬다고, 응당 베푸는 동정이었다는 대답을 들으면 진짜 밑바닥을 보여버릴 것 같았다.

죽을 수 없는 목숨인데도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아리엘이 쓸데없이 선량하다는 건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아는 일이니.

“가 봐.”

어제 이후, 최근에 그가 아리엘에게 세웠던 날은 이미 무뎌져 있었고, 그래서 음성 또한 낮고 비참했다.

아리엘의 입술에 자신이 만든 상처가 남아있는 것이 가책을 더했다.

루시안은 아리엘이 나가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 외면하며 뒤돌아섰다.

습관처럼 주머니 속에 든 반지를 씁쓸하게 어루만지며.

때문에 그는 아리엘이 그에게 무의식적으로 다가가려다가 애처로운 눈길로 발을 멈추는 것도.

담담하게 돌아서려 안간힘을 쓰지만, 사실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는 그녀의 작은 어깨도 전혀 보지 못했다.


* * *


오늘은 요하네스 아카데미의 축제가 시작되는 전야제였다.

외부인이 쏟아져 들어와 매우 혼잡한 날이기도 했다.

밤의 축제를 앞둔 일행은 식사 자리에서 여태까지 조사했던 성과를 나누었다.

“여태까지 정보 조작으로 반응이 온 것은 학생들 쪽이야.”

디트리히의 말에 루시안이 성의없게 하고 있던 나이프질을 관두고 비딱하게 턱을 괴었다.

“그중에 첩자로 위장한 놈이 있는 거로군.”

다이아나의 계책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디트리히가 흘린 정보가 다름 아닌,

‘요하네스를 지키는 마법진을 교란하는 방법’ 이었으니까.

당연히 실제로 가능하진 않았지만, 적을 속여 솔깃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내용이었다.

이쪽에서 일부러 흘린 정보로 의심받을 걱정도 없었다.

“금욕적이어야 하는 아카데미에선 몰래 금지된 물품을 구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으니, 이런 종류의 소문이 크게 이상한 건 아니지.”

하지만 실제로 마법의 힘을 가진 자-학생일 리 없는-가 시도를 한다면, 덜미를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디트리히는 다이아나가 제안한 대로, ‘마법진 교란이 가능한 장소’에 대한 정보를 그룹마다 다르게 뿌렸다.

정치학과 학생들 그룹에는 아카데미 동문 벽.

검술학과 학생들 그룹에는 서문 담장.

교수 그룹에는 북동쪽 성루…… 등등의 식이었다.

각 집단 사이에는 신분 차가 있어서 서로 교류가 없다는 허점을 노린 시도였다.

“그리고 아카데미 동문 벽에서 마법진을 교란하려는 시도가 있었어. 감시망을 피해 가서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지만.”

‘동문 벽’이라는 정보를 들은 학생들은 모두 정치학과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의 인원은 결코 적지 않았지만, 달그림자를 모두 풀면 한명씩 감시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제 잡는 것만 남았군.”

흥분한 어조로 말한 디트리히가 다이아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공녀 덕분입니다. 훌륭한 계책이었어요.”

아리엘에게 건네줄 빵에 버터를 듬뿍 바르던 다이아나가 도도하게 대꾸했다.

“고마우시다면, 저희 아버지가 물러나신 뒤에 제게 전하의 오른팔 자리를 주시는 것도 생각해보세요.”

제국의 황태자에게도 자존심 높은 모습이던 다이아나는 자신이 준, 베리 콩포트와 버터가 듬뿍 발린 빵을 아리엘이 먹기 시작하자 금세 표정이 흐물흐물해졌다.

‘아아, 내 귀염둥이는 어쩜 먹는 것도 이렇게 예쁠까?’

공녀의 새침했던 표정이 스프처럼 녹진녹진하게 바뀌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디트리히는 놀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잠시 소처럼 샐러드만 묵묵히 씹어야 했다.

상황 파악이 모두 끝나자, 디트리히는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보이는 루시안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조용히 달 그림자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대공자는 전야제에서 인파에 섞여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다이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대공자님이 다른데 한눈을 팔고 있는 척을 해야 첩자가 안심하고 수상한 짓을 할 수 있겠죠.”

디트리히가 루시안에게 말했다.

“수호목 근처에 함정 마법진을 설치해뒀어. 학생들 감시도 할 거고. 그러니 대공자는-”

루시안이 서늘하게 디트리히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나와 아리엘은 전야제에 참석하지.”

놀란 아리엘은 말없이 음식에만 두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아리엘의 안전에 대해 걱정이 되는 듯 몇 마디 잔소리를 늘어놓은 디트리히도 결국 루시안과 그녀가 함께 가는 것에 동의했다.

그런데 갑자기 다이아나가 뭔가를 발견한 듯 외쳤다.

“어머, 아리엘. 입술이 왜 그러니?”

다이아나는 이걸 방금 발견한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내 귀염둥이 입술이……”

아리엘은 뭔가 묻었나 싶어 얼른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부드럽게 손을 막고 아리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속상해라. 여기가 터졌잖아. 게다가 부었고.”

‘…….’

그 말에 어제 일을 떠올려버린 아리엘이 하얀 뺨을 붉혔다.

다행히 다이아나는 아리엘에게 상처가 났다는 사실에 분개한 나머지 아리엘의 반응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다 이랬어, 응?”

“그냥…….”

아리엘은 얼버무리며 속삭였다.

“꿈을 꿨나봐. 아침에 깨보니까 이렇게…….”

“어휴, 무슨 사나운 꿈을 꿨길래.”

새빨개진 아리엘은 우물쭈물했고 다이아나는 가져온 립크림을 아리엘에게 세심하게 발라주며 마음 아파했다.

그 사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루시안의 귀 끝만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해가 지자 아카데미 내부는 불빛과 음악,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상품을 걸고 벌이는 결투장 옆에는 벌써 흥분한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넓은 광장은 각종 경기와 연극 등으로 가득 차 시끌벅적했다.

초대받아 온 근처 지방의 젊은 귀족 남녀들도 아카데미 안을 활보하며 사교를 즐겼다.

물건과 음식을 팔러 들어온 상인들의 수레와 천막이 아카데미의 길을 빼곡히 수놓으며 늘어져 있었다.

마법으로 모양을 조절하는 분수대 옆에는 폭죽 준비가 한창이었다.

요하네스 아카데미에서 1년 중 유일하게 허락되는 자유의 날이다.

어느새 아리엘과 루시안이 인파 속에 섞여야 할 시간도 다가왔다.

다이아나는 자신이 축제에 가는 것보다 더 신이 나서는 아리엘에게 드레스를 몇 벌이나 갈아입히며 즐거워했다.

“아리엘. 딱 한 벌만 더 입어보자, 응? 절대 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고…….”

디트리히는 나갈 준비를 하는 루시안에게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아리엘라와 갈 거라면 기세는 거두고 다녀 줘.”

그가 걱정스레 아리엘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혹시나 지난번처럼 그 애를 노리는 자들의 눈에 띌 지도 모르니.”

루시안은 미려한 얼굴을 찌푸리며 디트리히를 노려봤지만, 그도 축제 한 복판에서 기세를 두르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벌레 떼처럼 많은 인간들 사이에 파묻힐 생각에 불쾌해도, 아리엘을 타락의 눈에 띄게 할 수는 없으니까.

“연락할 일이 있다면 달그림자를 보내라.”

그 말만 남기고 루시안은 아리엘을 데리러 갔다.

다이아나의 손길을 받은 아리엘은 연한 분홍색의 나들이 드레스 차림이었다.

귀족들의 무도회에 갈 때처럼 화려한 드레스가 아니라, 축제를 돌아다니기 좋은 가벼운 차림새.

그리고 스칼렛 레드의 붉은 머리카락은 일부만 땋아 여름꽃 두세 종류로 장식했다.

청초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루시안은 잠시 아찔한 혼미함을 느끼며 멈춰 섰다.

“…….”

신은 왜 하필 저 소녀에게 크림슨 하트를 내린 걸까.

라카트옐을 유혹해서 완전히 파멸시키려고?

그런 의도라면 아주 효과적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아리엘이 무엇을 요구해도 다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세상 모든 금은보화를 가져와 그녀 앞에 쌓아놓으라고 해도,

제국을 멸망시키고 황제의 자리를 그녀에게 바치라고 해도,

하다못해 여기에 있는 인간들의 목숨을 죄다 끊어놓으라 명령해도 그는 복종할 것이다.

그를 떠나겠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가지.”

루시안은 쓰린 감정을 느끼며 아리엘을 데리고 나섰다.


* * *


시끄러운 축제로 들어간 뒤에도 둘 사이의 기류는 묘하기만 했다.

아리엘은 어제의 일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언제 타락이 공격해올지 모르는데…….’

이렇게 달콤한 생각만 곱씹고 있다가는 루시안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

‘네가 여기에 왜 있는지를 떠올려, 아리엘.’

타락으로부터 루시안을 지키고, 드래곤의 눈을 되찾아주고, 크림슨 하트를 뺏기지 않기 위해 남아있는 거잖아.

그녀는 몇 번이나 표정을 가다듬고 마음을 단단히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제의 첫 키스의 기억이 자꾸만 생각이 나서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편, 루시안에겐 축제의 불빛이며 떠들썩한 소리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어제 일을 떠올리며 희망에 잠기는 것과, 얼핏 차분한 아리엘의 얼굴에 절망하는 것을 반복했다.

광장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서 혼잡해졌다.

루시안은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들 따위에게 밀리지 않는 몸을 가진 그와는 달리 조그맣고 약한 아리엘은 사람들에게 부딪히거나 휩쓸리기 쉬웠다.

아니나 다를까 아리엘은 그의 옆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보였다.

루시안은 제 몸으로 그녀의 옆을 막아서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위험하니까 잘 붙어있어.”

귓가에 대고 말하자, 아리엘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그 뒤에도 아리엘은 좀처럼 그에게 가까이 붙지 않았다.

……어제 일을 의식해서겠지.

루시안은 쓰디쓴 기분으로 손을 뻗었다.

‘앗.’

아리엘은 제 손을 움켜쥐는 루시안의 손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소, 손을…….’

안 그래도 그가 사람들을 막아준 것 때문에 평정심을 잃었는데, 손까지 잡히니 심장 소리가 마구 높아졌다.

심지어 루시안은 그냥 손을 잡은 게 아니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얽어 끼우며 빠짐없이 잡은 모양새였다.

이렇게 잡히니 루시안의 아름다운 손 모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길게 뻗은 손가락과 그 손의 유려한 마디, 겹쳐진 손목에 도드라진 힘줄까지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왔다.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리면 어떡하지.’

아리엘은 너무 떨려서 손에 힘을 주지 못했다.

그러자 루시안이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며 단단히 잡았다.

그가 자조적으로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상관없지. 내가 널 잡으면 되니.”

루시안과 손을 잡자 사람들 틈을 걷는게 훨씬 쉬워졌다.

그제야 아리엘은 축제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의상으로 온몸을 장식한 희극 배우들, 고기를 구우며 불쇼를 하는 상인, 향신료가 잔뜩 묻은 축제 음식들.

길거리를 노니는 흥겨운 악사들이 아리엘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그것을 본 루시안의 손에 힘이 슬쩍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아리엘의 마음은 간질간질한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다.

손을 잡고 함께 걸으니 꼭 루시안과 연인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좋아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축제 길을 걷다니…….

문득 마음이 뭉클해졌다.

죽기 전에 이런 행복이 한 번은 허락되는구나 싶어서.

과거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이 루시안을 만나서 이렇게 달라졌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괜찮아.’

나 혼자만의 마음이어도.

결국 고백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해도.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이 더 이상 아프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아리엘은 처음 자신이 마도구 사업으로 돈을 벌었을 때, 알렌과 머리를 맞대고 루시안의 선물을 고민했던 일을 떠올렸다.

어떤 선물을 생각해도 루시안이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기에 좌절을 맛보았던 기억이었다.

‘이젠…… 나도 줄 수 있는 게 있어.’

심지어 그녀가 라카트옐에게 줄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드래곤의 심장. 크림슨 하트는 그들에게 없는 것이니까.

선물의 값이 죽음일지라도…… 아리엘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갈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손을 마주 잡고 걸은 이 기억 때문에, 그녀는 죽을 때도 외롭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리엘은 마지막 미련까지 지워내며 작게 웃었다.

엄마, 나 이 정도면 정말 잘 산 거 맞죠?


* * *


아리엘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을 얽은 채 길을 걷던 루시안은 문득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말랐군.’

항시 작다, 가냘프다 여겼지만 요즘 유난히 더 마른 것 같았다.

허구한 날 붙어있는 모니카 공녀가 아리엘을 보고 야위었다고 할 정도니.

루시안은 불현듯 초조해졌다.

금방이라도 아리엘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요즘의 그녀는 건드리기만 해도 곧 부서질 모래성처럼 약해 보였다.

이렇게 잡고 있어도 금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루시안의 이성을 지탱하고 있는 줄이 팽팽히 당겨졌다.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의 우월한 감각은 아리엘의 눈길이 닿는 곳을 기민하게 쫓고 있었다.

여기저기 축제를 둘러보던 아리엘의 시선이 축제의 꽃인 길거리 음식들에 신기한 듯 잠시 머물렀다.

그것을 본 루시안이 우아하게 손을 까딱여 대기 중인 마부 하나를 불렀다.

그리고 마부에게 금화를 던져주며 명령했다.

“저기 있는 것들 종류별로 다 사와.”

뭘 먹이기라도 해야 좀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아리엘이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루시안?”

그 금화 하나로는 길거리 간식 정도가 아니라 점포도 살 수 있었지만 마부는 토 달지 않고 명을 따랐다.

그러느라 잠시 아리엘의 손을 놓고 있었을 때였다.

아카데미 학생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기마 행진을 하는 행렬이 가까이 다가왔다.

흥분한 인파가 몰려들면서 아리엘은 순식간에 그 틈에 휩쓸려버렸다.

“아……!”

루시안은 한 박자 늦게 그것을 발견했다.

아리엘의 동그란 뒤통수가 몇 초 만에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시야에서 사라졌다.

더 이상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아리엘이 보이지 않았다.

“아리엘.”

루시안은 사람들 틈을 마구 헤치며 아리엘을 불렀다.

“아리엘라!”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녀가 자신 앞에서 영영 숨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라카트옐의 능력으로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릴까 봐.

그렇게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될까 봐.

근거 따윈 없는 불안감이었다.

계속 불렀지만 아리엘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루시안의 눈앞이 깜깜하게 물들었다.

최상위의 포식자인 그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두려움이었다.

공포가 새까만 아가리를 벌려 남아 있는 그의 이성을 덮쳐버렸다.


* * *


같은 시각.

기숙사 내부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다이아나와 디트리히는 달그림자의 보고를 받았다.

“수상하게 움직이는 학생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보고를 들은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델른 왕국 사절단이 보이지 않는다고?”

“왕자와 왕녀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밖은 혼잡해서 수색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다이아나가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전하. 뭔가 이상합니다. 분명 첩자는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절단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다니요.”

그때, 다른 달그림자 단원들이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마법진 교란이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북동쪽 성루입니다.”

다이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교수들에게 풀었던 정보군요.”

디트리히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어쩌면…… 첩자가 한둘이 아니었을지도요.”

특히 오델른 왕국의 사절단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그는 달그림자 단원에게 수색을 명했다.

“당장 사절단을 찾아라. 나와 모니카 공녀는 대공자 부부를 찾아 경고를 전할 테니.”

디트리히와 다이아나는 황실 호위병을 이끌고 축제 한복판으로 나가서 아리엘과 루시안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 * *


인파에 휩쓸린 아리엘은 사람들에게 떠밀려 한참을 이동했다.

마나를 약하게 몸 밖으로 밀어내서 부딪히거나 눌리진 않았지만, 아예 텔레포트를 쓰기엔 곤란했다.

‘마법을 쓰면 적의 눈에 띌 수도 있다고 했어.’

특히 텔레포트는 사용할 때 빛이 나기 때문에 적의 이목을 끌지도 몰랐다.

‘이동한다고 해도 아까 루시안이 있던 곳이 어딘지 모르겠고.’

그렇게 정신없이 휩쓸려 가다 보니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이 나왔다.

아리엘은 낑낑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헤쳤다.

인파가 몰려가는 흐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갈림길에서 빠져나온 아리엘은 참았던 숨을 휴 내쉬었다.

행렬을 따라 사람들이 우르르 사라지자, 곧 길은 아까보다 덜 혼잡해졌다.

‘얼마쯤이나 온 거지?’

루시안과 함께 있었던 곳과는 풍경이 달랐다.

고개를 빼고 보아도 아까 그곳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꽤 멀리까지 휩쓸려 온 모양이었다.

아리엘은 주위를 둘러보다 가장 큰 천사상 분수대 앞으로 가서 섰다.

루시안을 찾아 헤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움직이다가 엇갈리는 것보다는 잘 보이는 데에서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아리엘은 유난히 허전한 제 손목을 연거푸 어루만졌다.

풀숲에서 찾은 마정석 팔찌는 기숙사 건물 안에 두고 온 참이었다.

그러니 루시안이 자신을 찾기도 어려울 테고, 루시안이 기세를 풀어놓지 않는 한 자신이 그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터였다.

‘떨어지면 안 되는데. 지켜줘야 하는데.’

아리엘은 긴장으로 몸을 움츠리고 주먹을 꼭 쥐었다.

‘루시안은 강하니까, 그의 심장만이라도 내가 지킬 거야.’

절대 타락이 해치게 두지 않아.

내가 루시안에게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인걸.

지난번 선물했던 초상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자신을 보내는 거다.

마지막 남은 생명까지도, 그에게.

아리엘은 자신의 심장께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다.


* * *


한편 루시안은 기세를 쓰면 안 된다는 것도 잊고 기감을 펼쳤다.

“아리엘라!”

라카트옐의 기세에 닿은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그는 아리엘이 사라진 방향을 헤매며 그녀의 소리나 향기를 찾으려 노력했다.

머릿속엔 몇 개의 단어만 토막 난 채 떠돌아다녔다.

안 돼. 사라지지 마.

날 떠나지 마.

이렇게는 안 돼.

아직 나는, 아무것도 네게…….

그렇게 한참을 찾아 헤매던 루시안은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에 다다랐다.

“아리…….”

무심결에 큰 소리로 아리엘을 부르려던 그의 눈에 오도카니 서 있는 아리엘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천사상 분수대 앞에 있는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

아리엘은 어디도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하.”

루시안은 말 그대로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가지 않았어.”

날 버리고 사라지지 않았어.

아리엘의 시선은 아까 그와 헤어졌던 곳으로 가는 길에 향해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루시안은 미친 사람처럼 짧게 웃음을 흘렸다.

묻고 싶었다.

‘날 기다렸어?’

내가 널 찾을 거라 굳게 믿고, 얌전히 여기에 있었던 거야?

그런 거라면 아리엘이 당장 자신에게 칼을 박아 넣는다 해도 행복할 것 같았다.

그녀가 제 곁을 떠나는 것보다는 그것이 자비로울 테니.

루시안은 휘청거리며 아리엘에게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본 아리엘이 그를 발견했다.

“아.”

그녀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안도감이 가득 퍼져나갔다.

그걸 본 순간 세상 모든 일이 다 상관없게 느껴졌다.

루시안은 아리엘에게 다가가 허겁지겁 그녀를 끌어안았다.

“……루시안?”

갑작스런 그의 행동 때문인지 그녀가 놀란 음성을 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몸을 안자 머리 어디의 끈이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루시안은 아리엘 어깨에 머리를 떨구고 기댔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엘.”

그의 나직한 부름에 품속의 소녀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루시안은 거의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그를 무너뜨린 사랑의 신 앞에 굴복했다.

그래, 이제 내 세상엔 얘밖에 없어.

내 시간은 이 애와 같이 흐르고, 내가 있는 곳은 아리엘이 있는 곳일 거다.

나는 패배했고 승리할 생각도 없어.

루시안은 아득한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아리엘라. 나는 네게 뭐지?”

그의 숨결이 아리엘의 어깨에 닿아 흩어졌다.

“드래곤 따위 말고, 라카트옐이라는 이름도 말고, 대공자라는 지위도 말고, 나라는 남자. 네겐 어떤 존재지?”

실상 정말로 답을 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고해하듯 말하는 아름다운 입술이 형편없이 떨렸다.

“네가 날 원하게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어. 인간들에게 값어치 있는 것들을 안기고, 인간들 눈에 아름다운 나로 널 유혹하며. 근데 점점 더 모르겠어. 수렁 같은 기분이야.”

아리엘을 사랑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는 한 번도 정답을 얻은 적이 없었다.

스스로가 짓씹은 아랫입술에서 피맛이 났다.

“그런데도 너한테 이걸 말하지 않고는 이제 견딜 수가 없어. 꽉 차버렸어. 빌어먹을, 터질 것 같다고.”

정제되지 않은 절망과 분노가 뚝뚝 흐르며 심장을 긁어내렸다.

“한시도 널 떼놓고 싶지 않아. 네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 네가 소중해서 보고 있기만도 아까워 죽겠어.”

루시안이 아리엘의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며 억누른 신음을 냈다.

“이런 게 사랑인가?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게 이런 거야?”

그가 사나운 어조로 스스로의 질문에 답했다.

“그럴 리가 없지. 난 한 번도 인간들 중에 이렇게 미쳐버린 인간을 본 적이 없는걸.”

이내 그는 잠긴 목소리로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 말고는, 내 마음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어.”

루시안은 넓은 어깨를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던 라카트옐이 여자애 표정 하나 확인할 용기가 없어서 비겁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아리엘의 팔을 구명줄처럼 붙잡고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네가 분수를 지키며 살겠다기에 그 분수가 뭔지는 몰라도 그렇게 살아주려고 했어. 라카트옐의 이름과 부, 권력을 모두 버리고 따라가면 네가 받아줄까. 정말 그러려고 했어. 죄다 버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널 부담스럽지 않게 하며…….”

하지만 그녀를 붙잡은 루시안의 손은 끝내 허공으로 흘러내렸다.

“그런데 너는 따라오지도 말라고 했어.”

제 비참한 표정을 숨겨보려는 노력으로 그는 떨리는 손으로 한쪽 얼굴을 쥐어뜯었다.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나는 이미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의 입안에서 모든 단어가 떨리며 어그러져 나왔다.

“널 사랑해. 아리엘라. 제발 날 떠나지 마.”

숫제 애원이 되어버린 고백이었다.

루시안은 고장 난 것처럼 몇 번이나 같은 말을 거듭했다.

가지 마. 사랑해.

그리고 그의 고백을 들은 아리엘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벅차오름 속에서 바닥이 꺼진 듯한 낙하감을 느꼈다.

‘결국 내가 루시안을 밀어내려고 한 시도는 아무 의미도 없었던 거야.’

그를 위해서 홀로 떠나 죽으려고 했던 것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루시안이 자신을 사랑하니까.

이대로 자신이 떠나는 것은 그에게 구원이 아니라 고통이 될 것이다.

‘……별님. 처음부터 소원을 빌지 말 걸 그랬나 봐요.’

사랑을 고백받은 인어공주는 끝내 물거품처럼 눈물을 터트려버렸다.


* * *


아리엘의 몸이 굳어진 것을 느낀 루시안은 그녀의 얼굴로 떨리는 시선을 옮겼다.

붉어진 눈시울, 창백해진 채 다물린 입술.

루시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있는 줄도 모르면서 입을 열었다.

“화내지 마.”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이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나빴다.

“……울지 마.”

루시안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제 고백을 싫어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는 호흡을 헐떡이며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법인 협박을 읊조렸다.

“거절하면…… 다 죽일 거야. 네 소중한 것들 다 부술 거야. 그래도 좋나? 하녀장이랑 네 친구들, 황실의 어린 것들도 다 없애버릴 거야.”

그러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 아니, 아니야. 아무도 안 죽여. 안 건드릴게. 제발 떠나지만 마. 뭐든 다 할게.”

횡설수설하는 꼴이 비참했지만 그런 것을 느낄 틈도 없었다.

그는 넘어지듯 무릎을 꺾고 아리엘의 자비를 호소했다.

“나 봐. 어제같이…… 나는 네가 없으면 많이 아플 거야. 죽을 것처럼 아플 거야, 응? 놔두고 가지 않을 거지?”

아리엘의 눈에서 눈물이 투둑 떨어져 내렸다.

떨어진 눈물이 그녀의 아래에 무릎 꿇은 루시안의 얼굴에 물줄기를 그렸다.

따뜻한 액체를 느낀 그가 발작하듯 놀라서 말했다.

“아냐. 미안. 미안해. 그러니까…….”

결국 그가 흐느끼듯 말했다.

라카트옐이 눈물을 거세당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울고 있을 것만 같은 음성이었다.

“가도 돼. 그냥 따라가게만 해줘. 네가 원하는 대로 살 테니까…….”

그의 말이 끝맺음되지 못한 것은 아리엘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의 목을 와락 안으며 그에게로 무너졌으므로.

아리엘의 몸은 울음 때문에 떨리고 있었고, 그를 끌어안은 팔은 바다에 빠진 사람 마냥 간절했다.

루시안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한참 동안 멈춰있다가 물었다.

“이거…… 무슨 의미야?”

눈물 때문에 아리엘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루시안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억지로 떼어냈다.

“무슨 뜻이야. 어?”

끝이 거절이라면, 지금 베풀어지는 그녀의 따뜻함은 제게 가장 잔인한 무기일 것이었다.

아리엘이 입술을 열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저 가냘픈 몸으로 울며 혼자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면.

그는 정말로 그녀를 해치고 자신을 파괴하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물 틈으로 더듬더듬 흘러나온 아리엘의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2년 전 거울 호수에서…… 나 뭔가를 봤어요.”

아리엘은 젖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속삭였다.

“열일곱 살이 된 내 모습이었죠.”

루시안은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왜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 성년이 되서 계약이 끝나면 날 떠나고 싶어?”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이 다시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야속한 듯 그의 어깨를 작은 주먹으로 내리쳤다.

“루시안 바보. 당신은 정말 바보야.”

아리엘은 천천히,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내가 본 건 내 모습만이 아니었어요. 그 옆에 루시안도 있었어.”

거울 호수가 라카트옐과 반응하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보게 된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자신이 크림슨 하트란 걸 듣고 나서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호수에서 본 것이 그것이었다는 걸.

“나,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지독한 첫사랑에게 끝까지 내어 몰린 아리엘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성년이 되어서도 루시안 곁에 있는 것이었나 봐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생명과 같은 말을 입술에 담았다.

첫사랑에게만 할 수 있는 말.

마지막 사랑에게만 할 수 있는 말.

“사랑해요, 루시안.”


* * *


“…….”

산 채로 굳어버린 조각상처럼 멈춘 채 한참 아리엘을 뜯어보던 루시안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절망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역시 꿈이었어. 내가 타락 놈의 사술에라도 걸린 건가?”

아리엘은 울면서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루시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네가 날…….”

아리엘은 그저 도리질을 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뚫어질 듯이 보던 루시안이 갑자기 와락 아리엘을 끌어안았다.

“꿈이라도 상관없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꿈이라면…… 이 꿈속에서 죽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여태까지의 냉전을 벌충하듯 정신없이 아리엘의 이마, 콧등, 눈가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아리엘은 입맞춤 세례를 받으며 눈물 섞인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꿈일 리가 없었다.

그녀는 꿈에서라도 루시안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꿈이 아니야? 정말로?”

그가 입맞춤 사이에 속삭이듯 물었다.

아리엘은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네.”

루시안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느리게 어루만졌다. 터져서 상처가 났던 그 자리였다.

왜 여태 몰랐을까.

사랑이 제 마음속에 어리석음을 심었던 게 분명했다.

어쩌면 이미 보았던 것인데.

던져버린 마정석 팔찌를 그녀가 다시 찾으러 나갔던 날부터, 느꼈던 것인데.

다쳐도 좋다고 방 안으로 발을 들이던 아리엘의 눈에서.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자신의 말에 화가 난 그녀의 목소리에서.

입맞춤을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매달리던 그녀의 팔과 돋움발에서.

다 나타났던 것인데.

그의 손길을 따라 아리엘의 조그만 입술이 이지러졌다.

그 말랑한 감촉을 떠올리자 목 안쪽에서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루시안은 아리엘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며 말했다.

“입 맞추고 싶어.”

아리엘의 뺨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물색없이 간청했다.

“입 맞추게 해줘.”

마수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적 앞에서도 침착하던 소녀는 어쩔 줄을 모르며 시선을 피했다.

부끄러운지 작은 귓볼와 가느다란 목덜미까지 달아올라 있었다.

루시안이 천천히 이마를 떼고 고개를 낮췄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머물고, 그가 가만히 제 입술을 축였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온 붉은 입술은 아직도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원하는 그의 갈망이 숨결에 묻어났다.

아리엘은 더 견디지 못하고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기세로, 루시안의 입술이 부드럽게 닿아왔다.

이러다 터져버리면 어쩌지 싶을 만큼 아리엘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숭배하는 신에게 입 맞추듯 루시안은 한참 동안 가볍게 입술만 맞대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에선 가느다란 숨이 오갔다.

“이런 건…… 모르겠어. 처음이야.”

루시안은 감당하기 어려운 이 감정이 두려울 정도였다.

이 애는 아무 힘도 없으면서 어떻게 날 이토록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거지?

그는 혼란스러움을 담아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따뜻한 분홍빛 입술에 입술을 누르자 모든 것이 다 잊혀졌다.

루시안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아리엘의 얼굴을 감싸 쥐고 탐닉하기 시작했다.

제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열고 목마른 사람처럼 파고들었다.

아리엘을 원하지 않는 것은 그에게 죄악이나 다름없었다.

아리엘은 루시안의 입맞춤을 받으며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눗방울 같은 것이 가슴속에 보글보글 차올랐다.

그 느낌은 갈수록 거세지다가 몸이 붕 뜨는 것 마냥 간지러워졌다.

속 안에 오묘한 열이 번졌다.

그녀는 그 감각을 참지 못해서 루시안의 옷자락만 꽉 잡았다.

‘어쩌면…….’

어쩌면 저는 이날을 위해 태어났는지도 몰라요.

그 모든 괴로움이, 지금을 위해 필요했는지도 몰라요.

이렇게 될 걸 미리 알았다면…….

아버지한테 맞을 때 울지 않았을 거예요.

타락 무리에게 끌려다닐 때도 절망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을 다시 만날 거란 것만 알았다면요.

과거에 당신이 내민 손을 잡았을 때부터.

어쩌면 처음 당신이 떠나던 날, 내 이마에 입을 맞췄을 때부터.

당신은 내 빛이었어요. 루시안.

아리엘의 눈꼬리에서 도르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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