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악!”
비명과 함께 열여섯 살의 아리엘은 꿈에서 깨어났다.
“하아, 하아…….”
그녀의 잠옷과 머리카락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이게 무슨 꿈이지? 분명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았는데…….’
꿈의 내용이 흐릿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벌벌 떨며 상체를 일으켰다.
기억이 명확하진 않지만 꿈에서 타락을 본 것 같았다.
악몽을 꾼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럴 때 루시안이 있었다면…….
그녀가 열네 살이던 가을에 마수 전쟁에 나간 루시안은 지금까지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금방 끝나리라 생각했던 마수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엘은 손으로 제 양어깨를 감싸며 방금 꾼 꿈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그때,
“……윽.”
갑자기 가슴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심장이 뛰고 있는 바로 그 자리였다.
아리엘은 그 고통이 뭔지 알아내 보려고 했지만, 통증은 눈 깜빡할 사이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16세 생일날의 일이었다.
* * *
라카트옐 대공가 저택에서 여섯 번의 생일을 보낸 아리엘은 이제 열여섯 살이었다.
우윳빛의 투명한 피부와 복숭아같은 뺨, 보석으로 빚은 것 같은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
곧 만개할 꽃봉오리에 물이 차오르듯, 사랑스러운 생기를 머금은 소녀로 자라난 것이다.
요즘 들어 부쩍 감성적인 하녀장 수잔은 아리엘을 보며 눈물을 찍어내곤 했다.
‘유모들이 자신이 키운 아가씨가 시집갈 때쯤 되면 그렇게 눈물을 흘린다는데…….’
수잔 자신이 요즘 꼭 그 모양새였다.
“첫해에 오셨을 때는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지요. 정말 예쁘게 커 주셨어요, 아기 마님.”
비쩍 마르고 조그맣던 열 살 소녀가 이제 아가씨로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게 자랐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가녀린 몸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건강에도 문제가 없었다.
올해 초에 아리엘이 달거리를 시작한 뒤로는, 늦은 월경을 걱정하던 주치의 밀러의 얼굴에도 수심이 완전히 걷혔다.
‘6년간 많은 게 달라졌지.’
수잔은 애틋한 눈으로 아리엘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많은 것이 바뀌는 동안 바뀌지 않은 것도 있었다.
“식사 시간이에요, 아기 마님!”
바로 아리엘을 잘 먹여야 한다는 그녀의 집념이었다.
수잔은 여전히 매일같이 눈에 불을 켜고 아리엘의 식단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주방장 홀슨이 기대하는 표정으로 아리엘 앞에 다이닝 세팅을 했다.
“아기 마님, 통통한 오리로 만든 콩피요리입니다. 버터를 넣은 만다린 글레이즈도 있고요. 진하게 끓인 소고기 스튜도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홀슨.”
아리엘은 나이프로 바삭하고 쫄깃한 오리고기의 표면을 썰었다.
한 조각 잘라서 나이프로 소스를 바른 뒤 입에 쏙 넣자 감동이 밀려왔다.
‘정말 맛있어.’
라카트옐 가의 요리사들이 얼마나 그녀의 입맛을 사로잡았던지, 아리엘은 대공가 요리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디저트로는 티라미수 롤케잌이 나왔다.
포근하게 구운 화이트 시트에 커피 시럽을 촉촉히 바르고 부드러운 크림치즈를 듬뿍 넣어 시트를 말아준 뒤, 위에만 코코아 가루를 뿌린 디저트였다.
디저트까지 깨끗이 해치운 아리엘은 화이트 가든으로 나가 산책을 했다.
햇살이 정원의 하얀 조각상들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한참 걷다가 모닥불 가든을 지나 블랙 가든까지 온 그녀는 이제는 거대한 나무가 된 아기 프라카티아 나무 아래에 멈추었다.
“페더 윈드.”
아리엘은 마법으로 깃털 해먹을 만든 뒤, 그 위에 풀썩 등을 대고 누웠다.
나뭇잎들 사이로 빛의 그물이 내려와 그녀를 감싸주었다.
아리엘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청량한 공기가 그녀의 폐를 가득 채웠다.
“……하아.”
루시안을 못 본 지가 벌써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는 금방 돌아와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그와 이렇게 오래 헤어져 있을 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국경을 둘러싸고 끈질기게 이어진 마수 전쟁이 일주일 전에 막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영웅이 된 루시안은 이제 기사단과 함께 승전식을 치르며 수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전에도 푸른 사자 기사단의 위상은 대륙 최강이었지만, 이번 마수 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이름이 드높아졌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제국의 검으로서의 명예를 공고히 했다.
제국에 있는 모든 기사 지망생들이 푸른 갈기를 가진 사자 문양을 동경하게 되었다.
한편, 그렇게 루시안이 떠나 있는 동안, 아리엘은 그의 빈자리를 잊기 위해 아주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먼저, 할마마마와 많은 시간을 보냈지.’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엘과 태후는 점차 가까워졌다.
태후는 날마다 아리엘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더니 이젠 다이아나도 혀를 내두를만한 손녀 덕후가 되어 있었다.
아리엘은 태후에게 선물 받은 여름 별궁으로 놀러가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여름 별궁은 매우 아름다웠고, 아리엘이 언제든 놀러올 수 있도록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황실 보물고를 털어서 채운 각종 진귀한 보물들과 예쁜 것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태후는 디저트를 좋아하는 아리엘을 위해 황실 수석 파티쉐까지 데려다 놓았다.
‘그러고 보니 디저트라면…….’
아리엘은 지난해 황실 파티쉐 선발 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작년 봄.
창작 디저트 주제를 발표하는 태후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자, 여기 있는 내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아리엘을 보고 영감을 떠올려 디저트를 만들어 내라.”
네? 하, 할마마마?
사전에 얘기를 듣지 못한 아리엘은 그 자리에서 뺨을 붉히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그 날 나온 대부분은 딸기, 복숭아, 사과를 이용한 디저트들이었다.
입에서 녹는 바삭바삭한 버터 쿠키를 꽃다발 모양으로 굽고, 그 안에 우유 크림과 생딸기를 가득 채운 딸기 부케.
복숭아 크림을 산처럼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슈가 파우더를 솔솔 뿌린 복숭아 몽블랑.
슈크림 파이를 동그랗게 굽고, 그 안을 졸인 사과와 커스타드로 채운 후, 겉에 붉은 설탕 시럽을 연하게 발라서 진짜 사과 모양으로 만든 슈크림.
슈에는 사과처럼 초콜릿 꼭지도 달려있었다.
태후가 파티쉐들에게 선언했다.
“우리 아리엘의 마음에 드는 디저트를 만든 사람에겐 작위를 내리겠다!”
마침내 아리엘이 디저트를 고르자, 태후는 그 디저트들에 '아리엘라'라는 이름을 붙이고 우승 파티쉐에게 작위를 내렸다.
뒤늦게 이야기를 들은 다이아나와 세실이 그 디저트들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해서 아리엘은 여름별궁에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디저트를 먹었다.
“어머, 이건 그려야 해!”
그림을 잘 그리는 시녀를 데리고 온 다이아나는 흥분한 표정으로 '아리엘 디저트'의 모습을 베껴 그리게 했다.
“귀여운 널 닮아서인지 대공가 디저트를 제외하고 제일 맛있다, 아리엘.”
세실은 농담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팔불출 말을 해서 아리엘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
태후는 그 해부터 황실 연회 때 아리엘 디저트를 내도록 명령했다.
공주 이름을 딴 디저트가 황실 연회에 나온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떠들썩했던 지난 디저트 사건을 회상하던 아리엘은 그녀가 별궁에 갈 때마다 놀러 오는 사고뭉치들을 떠올리고 빙긋 웃었다.
‘맞아, 귀여운 사촌 동생들도 생겼지.’
새로 생긴 건 할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사촌 오라버니인 황태자 디트리히와 꼬마 쌍둥이 동생들도 생겼다.
아리엘이 열 살일 때 태어났던 쌍둥이 사촌들은 이제 여섯 살이었다.
아리엘의 이모인 비비안느 공주가 낳은 뒤, 부모 손이 아니라 황궁 유모들 손에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금발의 꼬마 쌍둥이들은 아리엘에게 혀 짧은 소리로 누냐, 누냐하고 매달리는 일이 잦았다.
“누나가 아니라 언니라고 불러야지요.”
유모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쳐주어도 사과머리를 한 여자 쌍둥이들은 고집스레 아리엘을 누나라고 불렀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니 아리엘은 그들이 누나라고 부르도록 놔두었다.
꼬마들은 황궁 생활이 영 심심한지 아리엘이 놀러 올 때면 무척이나 좋아했다.
아리엘은 그들을 위한 마도구 장난감을 만들어주며 놀아주었다.
‘음, 그동안 마도구 사업도 엄청 커지게 되었지.’
다이아나의 제안으로 가볍게 시작했던 아리엘의 마도구 사업은 이제 제국을 대표하는 사업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호신 마도구, 클렌징 스크롤북, 이동 펜던트에 이어 아리엘이 내놓은 마도구들은 연이어 히트를 쳤다.
특히 그중에서 공간 마법이 걸린 미니백은 유행을 넘어 아예 스테디로 자리잡았다.
손바닥만한 미니백 안에 드레스가 열두 벌도 더 들어가는 걸 본 귀족 여자들이 그날로 마도구와 사랑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아리엘의 전용 의상실인 마담 헬렌의 의상실에서는 미니백의 디자인을 여러 가지로 만들어 제국의 영애들을 홀려놓았다.
이제 제국의 귀족 여자들 중에선 그걸 가지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그간 아리엘은 귀족계의 돈을 말 그대로 쓸어 담다시피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이것저것 많이 했고.’
아리엘은 사업을 통해 번 돈으로 라카트옐의 대공자비 금고에서 꺼내 썼던 돈을 다 채워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폭력을 당한 소녀들을 후원하는 재단 '수잔나'를 더욱 확장해서 예술계 후원도 새로 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남는 돈으로는 정보 길드 나잇 워커의 지분을 샀지.’
아리엘은 이제 길드장 카디나의 손님이 아니라 어엿한 실세였다.
그녀가 나잇 워커로 찾아가면 간부들이 모두 인사를 했고, 더 이상 그녀가 원하는 정보에 대해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아리엘의 마법 실력도 더 늘었다.
이제 아리엘은 인페르노, 블리자드 등 고위 마법도 구동할 수 있었다.
원소 마법에 있어서만큼은 대마법사 브루노어를 넘어선 경지에 이르렀다.
루시안과 다시 만났을 때 루시안을 지켜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며 기다린 루시안이 돌아온단 소식을 들은 아리엘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드디어 루시안을 볼 수 있겠네.’
루시안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려던 아리엘은 고민 끝에 마음을 바꿔 먹었다.
‘아냐. 또 집에서 기다리기만 할 거야, 아리엘?’
열 살 꼬마 신부일 때부터 아리엘은 집에서 루시안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만나러 갈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서 열여섯 살의 아리엘은 결심했다.
더는 기다리지 않고 루시안을 찾아가기로!
* * *
미간을 찌푸린 마티어스가 긴 다리로 집무실을 서성였다.
조각 같은 입매가 단단히 다물려 평소보다 더욱 서늘한 인상을 풍겼다.
마침내 발걸음을 멈춘 그가 아리엘을 향해 물었다.
“정말로 루시안 녀석을 만나러 가겠다는 거냐.”
소파에 앉은 채 마티어스를 올려다보고 있던 아리엘이 말했다.
“안 될까요……?”
아무리 방어벽이 단단한 사람이라도 녹일 만큼 달콤한 빛깔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마티어스를 향했다.
철벽같던 마티어스의 표정이 스륵 풀렸다.
아리엘은 애타게 한 번 더 물었다.
“안 돼요?”
마티어스가 미간을 구겼다.
왜 저 눈을 보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
결국, 낮게 신음한 그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 허락해주시는 거죠?”
“…….”
대답 없는 마티어스의 표정에서 아리엘은 이미 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감사합니다, 마티어스님!”
그를 꼭 끌어안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티어스가 툴툴거렸다.
“그 녀석더러 빨리 돌아오라고 하면 될 일이다, 아리엘라, 번거롭게 갈 필요 없어.”
또, 또, 마티어스 어(語)로 말씀하시네.
그냥 걱정된다고 말씀하시면 될걸.
아리엘은 껴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작게 웃었다.
“저 라카트옐 영지랑 수도 말고는 돌아다닌 곳이 거의 없잖아요. 예전부터 다른 곳도 구경하고 싶었어요.”
“구경이 하고 싶으면 내가 그 지역을 떼어다가 네 앞에 갖다 놓으마.”
“……마티어스님.”
꾸중하듯 그를 부른 뒤, 아리엘은 마티어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라카트옐 남자들이 하는 말은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별하기 힘들다니까.
여기서 가장 무서운 점은, ‘그렇게 해주세요.’ 하면 진짜로 해버릴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만큼의 재력과 힘이 있으니까.
마티어스를 껴안은 팔을 푼 아리엘은 그를 올려다보며 조곤조곤 말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갔다가, 금방 루시안이랑 같이 돌아올 테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 방긋 미소지었다.
지금 아리엘이 가려는 곳은 루시안이 거쳐 오다 머무르게 될 중부 네른빌 영지였다.
서프라이즈로 가는 것이기에 루시안에게도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깜짝 놀래켜 줘야지.’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여행 행렬을 단출하게 만들었다.
소수의 호위들만 따라오고, 마차도 없이 흑마 반카를 타고 이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행으로 힘들 수 있는 점은 그녀가 마법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기에 걱정은 없었다.
* * *
출발하는 날이 되자 마티어스는 수도의 게이트까지 동행해 아리엘을 배웅했다.
“어린애에겐 용돈이 필요할 테지.”
그녀가 애써 마다하는데도 마티어스는 금화 주머니를 반카의 목에 걸어주었다.
아리엘은 딱 봐도 마차 세 대 값은 족히 돼 보이는 금화들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 마티어스님.”
그녀가 안절부절 못하자 마티어스가 긴 흑발을 쓸어넘기며 슬쩍 웃었다.
몇 년을 봐도 심장에 무리가 가는 미소였다.
“필요만으로 돈을 쓰는 건 라카트옐이 아니다.”
“하지만…….”
“넌 루시안의 아내고, 내 딸이기도 하지. 뭐든 원하는 걸 해.”
게이트까지 가는 동안 그들은 부녀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출발할 때가 다가오자 아리엘은 말에 올라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선물 사서 돌아올게요, 마티어스님.”
그때, 마티어스가 어딘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아리엘라, 요즘은 심장 쪽이 아픈 일은 없는 건가?”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여섯 생일날 처음 아팠던 이후로 그녀는 가끔 왼쪽 가슴에서 통증을 느꼈다.
주치의인 밀러가 아무 병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리엘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마티어스는 자주 이렇게 그녀를 걱정하곤 했다.
아리엘은 심각해 보이는 마티어스의 표정을 보고 살짝 미소지었다.
걱정도 많으시다니까.
“전 괜찮아요, 마티어스님.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서 그의 미간을 살며시 펴 주었다.
“다녀올게요.”
마티어스의 뺨에 키스한 아리엘은 반카를 몰아 마법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푸르스름한 마나의 벽을 통과하자 물의 벽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외부의 소리가 희미해졌다.
“출발합니다!”
게이트 마법사의 신호와 함께, 게이트의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작동하며 환한 빛을 뿜었다.
쉬이이익-!
수만가지의 색깔을 가진 빛이 눈앞에 있는 마나의 벽을 따라 위로 솟구치며 흐르기 시작했다.
공간이 비틀리며, 부서진 시간의 가루가 몸 사이사이에 스며들었다.
순간,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마법 게이트를 처음 타는 사람들이 가장 신기해하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렇게 게이트 세 번 만에, 아리엘은 네른빌 영지에 도착해 있었다.
* * *
그 날 루시안은 네른빌 영지에서 유명한 물건들을 보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역사를 가진 액세서리부터 장미 수정과 다이아몬드로 만든 보석 꽃다발.
네른빌 장인 거리에서만 한정 수량으로 나오는 눈꽃 레이스 장갑 같은 것들.
성격에 맞지도 않는 승전식을 치르며 느리게 돌아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돌아가서 아리엘에게 안겨 줄 선물 구하기.
지나는 곳마다 모두 쓸어 담았음에도 성에 차지 않았다.
하루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그의 꼬마 아내가 마음에 들어할만한 걸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루시안은 서늘한 기세를 풍기며 폭풍처럼 진지로 돌아왔다.
그의 걸음마다 뒤에 의전으로 따라붙은 기사 무리가 함께 움직였다.
‘돌아가면 일단 성을 하나 지어야겠군. 거기에 다른 것들을 채우고…….’
그런 생각에 몰두하며 걸어들어오던 중이었다.
루시안은 자신의 막사 앞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검은 후드를 입고 있는 작은 형체.
그가 등장하자마자 그 형체가 후드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루시안은 머리를 세게 맞은 듯이 걸음을 멈춰버렸다.
진지를 지키고 있던 푸른 사자 기사단장 네드가 소리쳤다.
“대공자비님이 오셨습니다!”
척.
모시는 레이디가 왔다는 소식에 루시안 뒤에 열 맞추어 서 있던 푸른 사자 기사단이 일제히 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공자비님!”
의전으로 붙어있던 황실 기사단도 곧장 기사의 예를 취했다.
후드를 벗은 아리엘이 루시안을 보고 해사하게 웃었다.
“루시안!”
그의 이름을 입안에 머금자, 아릿할 정도의 기쁨이 느껴졌다.
아리엘은 심장이 콩닥거리는 걸 느꼈다.
오랜만에 본 루시안의 모습은 너무 눈부시고 완벽했다.
2년이 지나는 동안 그는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다.
수십 수백 명의 기사들 틈에서 홀로 우뚝 솟은 자태, 날카롭게 뻗어서 끝에는 묘한 색기를 머금은 눈매.
햇빛마저도 저 혼자 받고 있는 듯 선명한 이목구비가 단숨에 시선을 빼앗았다.
너무 반가워서 저절로 무방비하게 얼굴이 환해졌다.
그런데 그를 부른 순간, 그녀를 발견한 루시안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어?’
놀란 듯 벌어진 그의 붉은 입술과, 뜨인 채 멈춰버린 눈동자가 심상치 않았다.
당황한 아리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왜 저런 표정이지, 루시안?’
내가 온 게 그렇게 놀라운가?
깜짝 놀라게 하려고 찾아온 건 맞지만, 저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는데.
아리엘이 그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응시하던 루시안이 갑작스레 휙 고개를 옆으로 치웠다.
‘어어……?’
아리엘은 수많은 사람들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루시…… 안?
입술에서 채 나오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의 행동은 너무나 뚜렷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나 외면한 거예요?’
기분 좋은 두근거림으로 콩닥대던 심장이 망치로 내리치듯 쾅쾅 뛰기 시작했다.
* * *
한편 황급히 고개를 돌린 루시안의 표정을 본 기사들은 경악했다.
‘힉! 지금 주군…… 얼굴 빨개진 거?’
어릴 때부터 루시안을 봐온 푸른 사자 기사단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황실 기사단에겐 푸른 사자 기사단보다 더욱 큰 충격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그 괴물 대공자님이 저런 무너진 표정을 짓다니……!’
전쟁터에서 산채만한 마수들을 얼음 같은 무표정으로 없애던 그 라카트옐 맞나?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루시안이 기사들에게 오만하게 명령했다.
“돌아서라.”
얼빠진 표정의 기사들이 동시에 눈을 내리깔며 돌아섰다.
놀란 것과 별개로 명령에는 복종해야 했다.
그 사이 아리엘은 창백해진 얼굴로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루시안의 반응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화났나? 내가……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심장이 먹먹했다.
나는 루시안이 보고 싶어서, 더 참고 기다리기 힘들어서 온 건데…….
자신과 달리 루시안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섭섭하고, 슬프고, 여태 기대하면서 열심히 달려온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루시안…….”
아리엘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루시안이 눈에 띄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그녀를 저지했다.
“잠깐 거기 있어. 가까이, 오지 말고.”
충격 때문에 아리엘은 얼어붙었다.
아예 가까이도 못 가게 하는 거야……?
붙박인 듯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루시안이 출정 동안 부렸던 총괄 하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아내가 머물 곳을 준비하라고 하고, 아리엘라를 안내해.”
루시안이 뭐라 협박을 덧붙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얼굴을 본 하인이 화들짝 놀라면서 명을 받았다.
“예.”
총괄 하인이 아리엘에게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기 마님.”
아리엘은 그 소리도 못 들은 채 멍하니 루시안만을 바라봤다.
“마님……?”
하인이 아리엘을 다시 부르자, 아리엘은 그제서야 하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자신을 보지 않고 있는 루시안을 확인한 아리엘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녀는 쓸쓸히 돌아서서 숙소로 향했다.
아리엘이 하인의 안내를 받아 사라진 뒤,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하고 있던 루시안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성마르게 쓸며 중얼거렸다.
“꼬맹이…….”
열여섯 살이 된 아리엘은 헤어질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키가 조금 컸을 뿐, 희고 말랑해 보이는 뺨도, 아기처럼 긴 속눈썹도 앳된 목소리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달랐다.
열여섯 살이 된 아리엘은 사랑스러운 걸 넘어서 있었다.
루시안은 낮게 신음하며 제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뭘 먹고 저렇게 예뻐진 거야.”
손 바깥으로 보이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대공자비의 숙소는 막사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공간이었다.
막사 안에 휘장이 달린 침대며, 각종 가구들, 카페트, 하녀를 부르는 설렁줄까지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 공간에 들어온 아리엘은 조그만 몸을 웅크리고 침대 구석에 앉았다.
루시안이 자신을 외면하던 장면이 계속 떠올라 목이 메었다.
“그동안 잘 지냈냐고도 안 물어봤어. 어떻게 왔냐고도 안 물어보고…….”
차라리 화가 났으면 화를 내지.
몸을 작은 공처럼 단단히 만 아리엘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남편이 아카데미에 간 것도 아니고, 전쟁에 나간 거였다.
아무리 루시안이 라카트옐이라고 해도 그녀는 하루도 걱정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계속 보낸 편지에 답장도 안 해주고…….
“나는 달려가서 안기고 싶었는데.”
속마음을 솔직하게 중얼거리자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에게 달려가서 안기고, 루시안의 얼굴을 만져보고, 다친 데는 없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서늘한 그의 체향이나 단단한 팔, 낮은 목소리도 그리웠다.
괜히 그와 계속 붙어있었던 기사들이 부럽고 질투 났다.
전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집에 남아있는 나는 다 잊어버린 건가?
‘나도 잘 싸울 수 있었는데. 루시안 바로 옆에서 지켜줄 수 있었단 말이야.’
서러운 마음으로 앉아있던 그녀는 루시안 대신 베개를 주먹으로 콩콩 내리쳤다.
루시안은 바보야.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바보 드래곤! 바보 용!
그러다 문득 동작을 멈췄다.
아리엘의 손이 스르르 제 가슴께에 얹어졌다.
‘그런데 나……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거지?’
가슴이 먹먹하고 응어리진 듯 답답했다.
별일도 아니잖아, 아리엘.
내가 갑자기 와서 놀랐을 수도 있고, 여행한 내가 피곤할까 봐 빨리 들여 보내준 걸 수도 있잖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괜찮지가 않지?
그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 이상한 일이었다.
아리엘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나 정말, 루시안을 많이 좋아하나 봐.”
그렇게 말을 뱉어놓고 보니 갑자기 자신의 말이 다른 의미로 들려서, 아리엘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하, 하지만 사실인걸.
루시안은 내 생각도 안하고, 편지도 안 보냈고, 오랜만에 만나고도 그냥 들여보냈잖아.
역시 루시안보다 내가 훨씬 더 좋아하는 것 같아.
“…….”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아리엘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좋아해……? 내가, 루시안을?’
그녀에게 루시안은 특별한 존재였다.
삶의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
누구보다 강하면서 가여운 존재.
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롭게 아름다운 피조물.
그래서 여태까지는 한 번도 그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말로는 남편과 아내라고 했으면서도.
하지만 루시안의 행동 하나에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다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 루시안을 좋아하고 있었나 봐.’
아리엘은 새빨개진 채 방금까지 때리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루시안은 날 보려고 하지도 않는데, 어떡하지?’
* * *
아리엘이 잠시 쉬고 난 뒤, 그녀의 막사에 반가운 얼굴들이 찾아왔다.
“헥터, 랄프!”
아리엘은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호위 기사들에게 떠들썩한 인사를 받았다.
“아기 마님,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두 사람도 잘 지냈어요? 다친 데는 없고요?”
루시안과 함께 마수 전쟁에 나갔던 그들은 아리엘을 만났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 마님 호위로 지내다가 매일 시커먼 기사들과 마수만 보고 살려니 너무나 힘들었었다.
랄프가 제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고 난 뒤 말했다.
“저희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기사단도 마찬가지고요.”
헥터가 우렁우렁 크게 울리는 소리로 말했다.
“다 아기 마님 덕분입지요.”
오랜만에 듣는 헥터의 큰 목소리에 아리엘이 깜짝 놀라자, 랄프가 서둘러 헥터를 책망했다.
“너 때문에 아기 마님이 놀라셨잖아.”
“아이고. 제가 한동안 전쟁터에만 있다보니 아직 목청이 조절 안됐나 봅니다.”
아까보단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큰 목소리로 헥터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오신 거 보고 깜짝 놀랐습죠. 그리고 그 다음에 대공자님의 얼빠진 표정을 보고 더 놀랐…….”
헥터가 씨익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걸 랄프가 옆구리를 찌르며 막았다.
그러는 랄프의 입가에도 감추기 어려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조용히 해.”
“왜.”
두 호위는 서로 쿡쿡 찌르며 흐뭇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작은 주군에게서 그런 표정을 보게 될 날이 있을 줄이야!
아마 그 순간 거기 있는 모든 기사들은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피와 광기의 라카트옐이, 냉혹하고 잔인한 괴물 대공자가, 예쁜 아가씨로 자란 아내를 보고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으니까.
마수 전쟁동안 루시안을 옆에서 모신 하인이 그 표정을 보고 소스라치는 것을 헥터와 랄프는 똑똑이 보았다.
하지만 웃음을 참는 호위들을 본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루시안은…… 내가 별로 안 반가운 것처럼 보이던걸요?”
그 말을 들은 헥터와 랄프가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요. 전쟁 내내 아기 마님 편지만 붙잡고 사셨는데요.”
“편지요?”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헥터가 싱글벙글 웃으며 열심히 고자질을 했다.
“편지가 든 상자를 아예 끼고 사셨습죠.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도 매일 아기 마님 선물을 쓸어 담으셔서, 선물 마차만 몇 대인지, 참!”
아리엘은 점점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편지 답장은 안 하면서 상자는 끼고 살고, 찾아온 자신은 외면했으면서 선물은 잔뜩 샀다고?
그녀는 약간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까 나 보고 루시안이 화난 거 아니었어요?”
이제야 아리엘의 말을 알아들은 헥터와 랄프가 놀란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가 동시에 빙그레 웃었다.
랄프가 아리엘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저희 한 번 믿어보세요, 아기 마님. 대공자님이 화나셨을 리가 없으니까요.”
아리엘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가 일단락 난 뒤, 헥터가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저희 계속 아기 마님 호위 할 수 있는 것 맞습죠? 혹시 다른 놈이 이미 자리를 꿰찼다거나.”
물음에 이어서 헥터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꿰찼어도 무력으로 내쫓을 거지만.”
제국 최고의 기사단인 푸른 사자 기사단이 섬기는 레이디는 단 한 명, 대공자비 아리엘뿐이었다.
하지만 그 레이디를 가까이 모실 수 있는 특권은 오직 호위 기사 뿐.
푸른 사자 기사단의 기사들은 모두 호위 기사 자리를 동경했다.
헥터와 랄프가 자신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리엘의 호위를 맡았던 다른 기사들을 경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코뿔소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것 같은 덩치의 헥터가 아리엘 앞에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그래도 아기 마님 호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출정하려니 마음이 안 좋았습죠.”
가만히 있던 랄프의 얼굴에도 후회가 드리웠다.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났으니…….”
그렇게 말한 두 기사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아리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간 호위 기사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저희를 벌해주십시오!”
응? 헥터, 랄프?
아리엘은 놀라서 입을 뻐끔거렸다.
“마, 마수 때문에 떠나 있었던 거잖아요. 괜찮아요.”
하지만 두 호위는 막무가내였다.
출정하느라 아리엘 옆을 급히 떠난 게 큰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는 듯했다.
당연히 그녀는 호위들을 벌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헥터와 랄프가 여태까지 섬긴 건 극단적인 라카트옐 가 남자들이 아닌가.
그들에겐 이런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어휴…… 어쩔 수 없지.’
아리엘은 무릎을 꿇는 바람에 낮아진 헥터와 랄프의 머리를 쓰담쓰담해주었다.
호위들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자. 이게 벌이에요. 벌 다 받으면 계속 내 호위해주는 거예요, 알았죠?”
헥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아리엘은 작게 웃음지었다.
“정말이에요.”
“아기 마님……!”
랄프가 울컥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리엘은 그녀의 기사들이 진정할 때까지 달래주기 위해 다시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싸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 하는 거지?”
아리엘이 뒤를 돌아보자, 언제 가까이 왔는지 모를 루시안이 서 있었다.
* * *
사파이어같은 깊은 푸른 눈이 아득한 깊이를 자랑하며 아리엘을 담아냈다.
“루시안?”
스무 살이 된 그는 다시 봐도 지독히 아름다운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를 보자, 아리엘의 맥박이 두근두근 요동치며 빨라졌다.
루시안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냉랭하게 굴까 봐 겁이 나서 얼른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가 다가와 호위들을 느리게 훑어보았다.
“내 아내가 왜 너희들 머리에 손을 대고 있는지 모르겠군.”
루시안의 목소리가 무서워서 아리엘은 얼결에 호위들 대신 대답했다.
“지금…… 벌 주는 중이라서요.”
루시안이 수려한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이딴 벌이 어디 있어?”
그렇게 말한 그가 호위들에게 고요히 시선을 보냈다.
헥터와 랄프가 움찔 움츠러들었다.
루시안이 그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느리게 말했다.
“하지 마. 이것들 벌은 내가 줄 테니.”
“아, 안 돼요.”
아리엘은 얼른 몸으로 호위들을 막아섰다.
루시안이 벌을 주면 유혈이 낭자할 텐데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게다가 헥터랑 랄프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냥 장난이었단 말이야.
일단 막아서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루시안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뭔가를 눌러 참는 듯한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벌이라면 나한테 해.”
네?
뜻밖의 말을 들은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말을 듣고서는 도저히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쓰, 쓰다듬어 달라고요?
당황한 그녀는 뺨을 붉히며 대꾸했다.
“루시안은…… 벌 받을 짓 안 했잖아요…….”
오히려 제국의 영웅인걸요.
그러자 루시안의 눈동자에 끓는 것 같은 감정이 잠시 비쳤다.
“지금부터 하면 되나?”
아리엘의 본능이 소리쳤다.
안 돼.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결국 아리엘은 헥터와 랄프를 달래주는 걸 그만두었다.
루시안이 짧게 턱짓을 하자 호위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이제 상황이 종료된 건가 싶었는데 루시안의 뇌쇄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한테도 해.”
아리엘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정말로 쓰다듬으라고?
그녀가 가만히 있자 그가 재촉하듯 속삭였다.
“어서.”
“아, 알았어요.”
아리엘은 긴장하며 루시안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가 팔을 다 뻗어도 그의 머리에는 미치지 못했다.
“너무 높은데…….”
루시안이 유려한 턱선을 보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낮춰주면 되는 건가? 아니면 높여줄까?”
“높여요? 어떻게…… 꺅!”
다가온 그가 아리엘을 번쩍 안아 올렸다.
한 팔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들어 올리자, 어느새 아리엘은 루시안을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내, 내려줘요.”
“이젠 안 높잖아. 내 머리.”
그가 유혹하듯 긴 속눈썹을 움직였다.
순간 그것에 홀려버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루시안의 칠흑 같은 흑발로 시선을 옮겼다.
“…….”
아리엘은 천천히 루시안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그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머리카락이 스치고, 청량하면서도 묘한 색기를 풍기는 향기가 끼쳐왔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자극했다.
읏, 난 몰라…….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
루시안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리엘의 가냘픈 손이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에게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렀다.
“……좋다.”
아리엘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아깐 말도 안 걸었으면서, 이런 표정 짓는 건 반칙이잖아.’
그녀의 손길 아래서 안식을 찾은 듯 눈을 감은 루시안 때문에 마음이 수런댔다.
‘루시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궁금증이 비눗방울처럼 보글보글 피어났다.
루시안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루시안을…… 조, 좋아하는 것 같은데.’
드래곤 입장에서 자신은 이성이 아니라 애완 고양이정도가 아닐까?
자신은 루시안을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이런 게 짝사랑이라는 걸까?’
그때, 루시안이 낮게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나, 네게 벌 받을 짓 이미 했잖아.”
놀란 아리엘의 손이 멈추었다.
“무슨 짓이요?”
루시안이 아리엘을 올려다보며 나른하게 대답했다.
“네 편지에 답을 못했으니까.”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루시안의 퇴폐적인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지. 직접 안부를 보여주는 편이 낫다고.”
그랬구나…….
답장을 보내지 않은 이유를 들으니 순식간에 서운함이 사라졌다.
안심이 되자, 아리엘은 참지 못하고 질문을 해버렸다.
“그럼 아까는, 아까는 왜 외면했어요?”
루시안의 눈썹이 거친 곡선을 그리며 치켜 올라갔다.
“외면? 내가?”
아까 자신의 행동을 떠올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리엘에게서 고개를 돌린 건 그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처음엔 꿈인 줄 알았거든.”
루시안은 조금 전 아리엘을 처음 마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가 유혹적으로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외면 따위가 가능할 리가.”
그 말을 듣자 아리엘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아, 정말이었어.
헥터랑 랄프 말대로 나한테 화난 게 아니었어.
그녀는 괜히 속앓이 한 게 분해서 루시안 품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내려갈래요.”
하지만 그는 놔주는 대신 한 팔로 받치고 있던 그녀를 가뿐히 양팔로 안아 들었다.
“앗!”
“도망가면 못 쓰지.”
그렇게 말한 그가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에게서 뭔가를 발견한 듯한 기색이었다.
“잠깐, 너…….”
루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의 숨결이 드레스 너머로 느껴졌다.
아리엘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얼어붙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스스 소름이 올라왔다.
“루, 루시안?”
그녀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그녀의 목덜미 근처에 느릿하게 코끝을 부딪혔다.
“너, 체향이 바뀌었어.”
체, 체, 체향이요? 그게 무슨 소린가요?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아리엘은 루시안의 어깨를 힘껏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나 준 그가 당혹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그게 이런…… 거였나.”
영문 모를 반응을 보이는 그를 내버려 두고 아리엘은 얼른 그의 품을 벗어났다.
바로 앞에 있는 루시안의 얼굴로부터 오는 자극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낮게 숨을 고른 그가 말했다.
“좋아. 이제 식사하러 가지, 꼬맹이.”
아리엘은 얼른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항의했다.
“꼬맹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이제 열여섯 살이라고요.”
“그럼 새끼 고양이.”
“……정말.”
못된 말만 한다니까.
아리엘은 앞장선 그의 뒤통수를 힘껏 노려보았다.
* * *
“그럼, 이제 끝난 거예요?”
저녁을 먹고 대공자비 숙소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아리엘이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이 느슨히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전쟁은. 국경 결계석을 내 마나로 강화해놨으니 100년은 무사할 거야.”
그가 의자의 팔걸이에 손가락을 느리게 두드렸다.
“다만, 타락 놈과의 싸움이 끝난 건 아니지.”
아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루시안이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그녀도 타락에 대해서 꽤 많이 알아보았다.
‘타락은 태초부터 있었던 악의 힘이라고 했었지.’
타락은 라카트옐같이 대단한 힘은 없었다.
대신 다른 것들을 물들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가장 위험한 능력이었다.
타락은 무시무시한 마수를 조종하고, 힘센 인간들을 미혹해서 제 세력을 넓혔다.
아리엘이 회귀 전에 속해있었던 마법사 무리만 해도, 타락에게 물들어 충성을 맹세한 인간들이었다.
“타락이 원하는 게 대체 뭐죠?”
그녀가 묻자 루시안이 완벽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카오스(chaos).”
손가락을 뻗은 그가 막사 안의 등잔불을 소드 마나로 이지러뜨렸다.
주홍빛의 따스한 기름불이 소드마나 때문에 푸른 불꽃으로 튀어 올랐다.
“타락은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걸 원해. 그리고 그것을 막는 라카트옐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거지.”
라카트옐만 없다면 타락을 막을 세력은 없으니까.
비딱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덧붙였다.
아리엘은 조심스레 물었다.
“타락을 아예 없애는 방법은 없나요?”
루시안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건 안개 같은 존재야. 어디든 있고 어디든 스며들 수 있지. 실체가 없으니 없앨 방법이 없어.”
아리엘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럼 타락을 막고, 복수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는 걸까?
“정말로 방법이 없어요?”
“…….”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본 루시안이 낮게 입을 열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어.”
아리엘의 마음이 희망으로 부풀었다.
“그게 뭔데요?”
“시기가 있지.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시기.”
“아직은 아닌 거예요?”
“그래.”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대답한 루시안이 한 번 더 강조하듯 말했다.
“아직 아니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는.”
끝의 말은 마치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단호했다.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까지는 싸워야 하겠네요.”
“……맞아.”
루시안이 긴장을 늦추며 우월한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힘들고 더러운 일은 다 내가 할 테니까.”
그의 말에 아리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왜 또 그런 말을 해요? 나도 지킬 거야. 싸울 거야. 라카트옐을 위해서.
그나저나 이렇게 루시안과 마주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루시안 목소리 듣기 좋아.’
낮은 루시안의 목소리는 밤의 어둠처럼 깊고 아름다웠다.
아리엘은 그의 목소리가 계속 듣고 싶어서 자꾸만 그에게 말을 걸었다.
편지로 이미 다 말한 것 같은데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렇게 대화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루시안이 자신의 막사로 돌아갈 때가 되자 아리엘은 아쉬움을 느꼈다.
‘뭔가…… 루시안이랑 떨어지기 싫다.’
그도 자러 가야 할 시간이라는 건 아는데, 왠지 선뜻 ‘잘자요’하고 손을 흔들기 망설여졌다.
아리엘은 그런 마음을 꾹꾹 참다가, 결국 루시안이 일어날 때쯤 입 밖으로 말해버렸다.
“루시안,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요?”
루시안의 얼굴이 놀란 듯 굳었다.
“뭐?”
그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내 꼬마 아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내가 환청을 들은 건가?
하지만 놀라서 바라본 아리엘의 얼굴은 순진무구하기만 했다.
그것조차도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지만.
루시안이 멈칫하자 아리엘이 얼른 말했다.
“그게-”
“안 돼.”
그는 행여 자신이 고개라도 끄덕일까 봐 빠르게 대답했다.
역시나 아리엘은 그가 안된다고 하는 이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예전에는 여러번…….”
“예전이랑은 달라. 안 돼.”
단호하게 거절당한 아리엘은 입술을 꾹 다물고 서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뭐예요, 어릴 땐 자기 방에서 막 재웠으면서. 몇 번이나 데리고 잘 잤었으면서…….”
루시안은 안 되겠다 싶어 아리엘을 어깨에 둘러메고 침대에 데려다 놓았다.
“간다.”
그러자 아리엘이 얼른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어, 잠깐만요!”
아쉽다는 듯 긴 속눈썹을 애처롭게 내리깐 그녀가 조그맣게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살포시 다가온 아리엘이 한껏 발돋음을 한 채 고개를 끝까지 꺾었다.
루시안이 잠시 굳어있는 사이, 결국 키가 모자라서 폴짝 뛰어오른 그녀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쪽.
“굿나잇.”
뽀뽀를 하고 뿌듯하게 웃는 그녀를 본 루시안의 눈에 순간 초점이 어긋났다.
그의 짙은 청색 눈동자가 그녀를 사로잡듯 시선을 얽었다.
명백한 포식자의 눈이었다.
“…….”
한편 루시안이 가만히 멈춰있자 의아해진 아리엘은 조심스레 그를 살펴보았다.
대리석같은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는 것 외에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 그래요, 루시안?”
그녀의 물음에도 그는 더욱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리엘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디 아파요?”
아님 뽀뽀한 게 싫었던 걸까?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손을 위로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혹시 열이 있나……?”
아리엘의 따끈한 손이 닿자 루시안이 흠칫 물러났다.
이내 그가 시선을 거두며 억눌린 듯한 신음 소리를 흘렸다.
“……젠장, 아리엘라.”
“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목이 타는 듯 루시안이 제 붉은 입술을 짓씹었다.
“자꾸 자극하지마, 너.”
그가 깊게 눈을 감으며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날 믿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방금 내 행동이 너무 주제넘었나요?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금방 수긍했다.
“알겠어요. 화 풀어요.”
아리엘은 방긋방긋 웃으며 그를 달랬다.
“화? 내가 지금 화내는 걸로 보이나?”
루시안이 기막히다는 듯 낮게 물었다.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화가 난 게 아니면요?”
“내가 네게…….”
루시안이 뭔가 말을 할 듯 입을 열다가 오만한 심기가 뒤틀린 표정으로 침묵했다.
아리엘은 어서 대답해보라는 듯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는 선득한 눈빛으로 매섭게 마주보기만 할 뿐, 끝내 다른 답을 내놓지 않았다.
거봐, 화낸 거 맞지.
매우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아리엘은 그를 향해 혀를 쏙 내밀고 침대로 도망갔다.
“진짜 잘 자요, 루시안.”
아리엘의 막사를 나선 루시안은 긴 다리로 순식간에 제 막사까지 걸어왔다.
막사로 들어가려다 멈춘 그가 제 머리를 세게 헝클었다.
젠장.
“왜 저렇게 요망한 거야?”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내 병아리가 언제 저렇게 발칙하게 큰 거지?
의도 따위는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요망함에 정신이 남아나질 않았다.
유혹을 해야 하는데 유혹을 당하고 앉았다니.
귓전에 제 심장 소리가 울렸다.
쿵, 쿵, 쿵.
이 소리를 듣는 건 2년 만이었다.
“……하.”
루시안은 신음처럼 한숨을 쉬고 픽 웃어버렸다.
그의 심장이, 드디어 바로 제 곁에 있었다.
* * *
라카트옐 대공자가 수도로 돌아오자 황제는 승전을 기념하는 대규모 무도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마티어스와 루시안 둘 모두가 참석하기로 결정됐고, 푸른 사자 기사단도 초청받았다.
아리엘의 친구 세실은 푸른 사자 기사단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곧장 기사단 건물을 찾았다.
몇 년간 동고동락하며 훈련했던 세실과 기사들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세실의 스승인 소드 마스터 네드는 그녀를 거의 수제자처럼 키웠었다.
모여있는 기사 무리를 본 세실이 가장 먼저 네드에게 달려갔다.
“스승님!”
세실을 본 기사들과 네드가 손을 흔들었다.
“어, 세실! 잘 지냈냐.”
“오랜만이다.”
“그간 수련은 게을리 안 했고?”
달려가 네드와 마주한 세실은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안부를 물었다.
“괜찮았습니까? 다친 곳은 없고요?”
네드는 대답 대신 세실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이어서 세실은 차례대로 기사들과 반가움을 나누었다.
푸른 사자 기사단원들 중에는 귀족이 많이 없었다.
더러 섞여있긴 했지만, 실력 위주로 기사를 뽑다 보니 평민이나 준귀족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세실과 그들은 이미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을 가지고 있었다.
기사단과 회포를 푼 후, 네드와 둘이서만 연무장에 남게 되자, 세실이 정중하게 대련을 청했다.
“오랜만에 저와 대련 한 번 해주시죠.”
네드는 씩 웃으며 바스타드 소드를 뺐다.
“얼마든지. 실력 줄었으면 혼난다.”
둘은 연무장 중앙으로 이동해 서로에게 인사를 했다.
몇십 차례 검격이 오가고, 늘 그렇듯이 승자는 마스터인 네드였다.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세실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전 멀었네요, 스승님.”
하지만 네드는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2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세실이 이렇게 많이 성장했을 줄이야.
‘이거 잘하면…… 내 눈으로 최초의 여자 소드 마스터를 보게 될지도.’
그는 검을 정리하며 애써 감탄한 티를 감추었다.
네드는 원래 제자들에게 칭찬이 아주 인색한 스승이었다.
하도 가차없이 기사 지망생들을 쫓아내서 악명도 자자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세실에게 이 말만큼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실 하이츠. 진심으로 물어보는 건데, 푸른 사자 기사단에 들어올 생각 없냐?”
칭찬 한마디 안 섞고 말했는데도 세실의 눈이 둥그레졌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제국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거기에 들어오라는 건 그녀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제 검술이 뛰어납니까?”
“한참 모자라지, 네 말대로. 하지만 너보다 모자란 놈이 천지야.”
세실은 활짝 웃었다가, 문득 제 상황을 깨닫고 천천히 미소를 지웠다.
네드가 설득하듯 덧붙여 말했다.
“주군들은 네가 여자라고 해서 못 들어오게 하실 분들이 아니야. 오히려 실력이 없는 놈들을 쫓아내시겠지.”
“알아요.”
“물론 네가 우리 아기 마님과 가까우니 친분으로 들어왔단 소리를 듣겠지만…… 기사는 네 오랜 꿈이잖냐.”
세실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드는 그제야 문제를 알아차렸다.
“아직도 백작님과 백작 부인께서 허락 안하시는구나?”
세실의 가족들이 그녀가 검술을 배우는 걸 반대하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허락 정도가 아니죠. 아마 이야기를 들으시면 호적에서 파고, 용서 안하실 걸요. 그리고…….”
세실은 빙긋 웃으며 기사단 연무장과 건물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최고의 기사단이니까요. 여자가 친분으로 입단했다는 소문으로 명예를 떨어뜨릴 순 없죠.”
그녀가 단단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의 앞에서 제가 여기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인 뒤에. 그때 당당히 들어오고 싶어요.”
그럼 아버지, 어머니도 인정해주실 테니까.
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세실의 그런 면을 더욱 아끼고 높이 샀다.
자신이 가르친 수제자는 실력뿐만 아니라 긍지도 드높았다.
기사가 그 정도 기개와 명예는 있어야지. 암.
흐뭇함을 무뚝뚝하게 숨기며 네드가 말했다.
“그래, 기사답게 당당하게 말이지.”
“네.”
네드가 빙긋 웃었다.
세실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검을 들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 판 더?”
세실의 눈이 반짝거리며 타올랐다.
“스승님만 괜찮으시다면야.”
둘의 검이 다시 허공을 가르며 부딪쳤다.
당시까지만 해도 네드는 세실이 곧 대형 사고를 칠 예정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 * *
이번 승전식 무도회는 특별했다.
황제는 이번 파티에 수도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참석하도록 명했고, 황후가 직접 파티 주최를 맡았다.
마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루시안에 대한 예우였다.
게다가 이번 파티에는 황실 소속 화가들과 조각가들도 초대받아, 루시안과 푸른 사자 기사단을 구현하도록 했다.
“하지만 진짜 재미있는 점은 이제부터야.”
파티에 대해 전해주러 온 다이아나가 열변을 토했다.
“1부땐 가면무도회를 하고, 2부땐 무려 기사들 토너먼트를 연다고. 올 사교계 최고의 행사가 될 거야!”
이어서 다이아나는 가면무도회를 이용해 어떻게 사교계 공작을 할지 신나게 이야기해주었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똥말똥 친구를 바라보았다.
데뷔를 한 후에 사교계 행사에 자주 참여하지 않은 그녀로서는 다이아나가 해주는 이야기가 신기하기만 했다.
귀여운 아리엘의 모습에 줄줄 녹아내린 다이아나가 아리엘을 답싹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결론은…….”
다이아나의 보랏빛 눈동자에 위험한 욕망이 번뜩였다.
“내가 네 가면을 만들어주면 안 될까? 맞춤 제작으로!”
다이아나의 아리엘 덕질은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 * *
가면무도회를 맞아 황후로부터 특별한 마도구 주문이 들어왔다.
바로, 목소리를 다른 사람처럼 바꿔주는 기능이 있는 마법 물약이었다.
아리엘과 히스가 발명한 이 마법 물약은 악용되지 않도록 황궁 파티장에서만 쓰기로 정해졌다.
한편, 마법 물약이 담길 잔을 디자인하고 황후에게 선보이는 것은 영광스럽게도 마담 헬렌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 대공자비님 드레스는 어떡하지요?”
헬렌은 새로 맡은 일보다 아리엘 드레스를 더욱 걱정했다.
아리엘은 괜찮다며 헬렌을 다독였다.
결국, 헬렌을 통해 소개 받은 다른 의상실이 드레스를 가지고 대공가를 방문하게 되었다.
방문한 사람은 땅딸막한 키에 분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화려한 화장을 한 디자이너였다.
“샬럿입니다. 대공자비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뒤따라온 여자들에게 박수를 딱딱쳤다.
“모두 가지고 들어와!”
샬럿이 열몇 벌 내외의 드레스를 가지고 올 거라고 생각했던 아리엘은 줄지어 들어오는 행렬에 깜짝 놀랐다.
잠깐, 이게 다 뭐야?
샬럿이 가져온 드레스는 족히 수백 벌은 되어 보였다.
일단 알렌을 시켜 드레스룸으로 안내하긴 했지만 아리엘은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 많은 양을…….
‘이 중 하나쯤은 네 취향이겠지, 이런 건가?’
하지만 드레스들은 모두 아름다웠고, 그중 하나도 대충 만든 것이 없었다.
화려한 디자인부터 수수한 것, 최신 유행부터 클래식한 것까지.
온갖 디자인들이 다 있었다. 소재와 장식도 각양각색이었다.
넓은 그녀의 드레스룸에 발 들일 틈 없이 가득 진열된 드레스들을 보자 눈이 즐겁기는 했다.
“와…….”
구경하는 재미가 있기는 하네.
헬렌이 맞춤으로 만들어주는 드레스는 항상 아리엘의 마음에 쏙 들었지만, 이렇게 새로운 디자인들을 많이 보는 건 또 신선한 경험이었다.
“마음에 드시는 걸로 골라 입어보세요.”
샬럿이 설레는 눈빛으로 권했다.
아리엘은 가장 먼저 눈에 띈 샴페인 색 드레스를 골랐다.
그리고 백설공주의 사과 같은 붉은 새틴 드레스, 아이스블루의 시폰 드레스, 라인이 예쁜 네이비색 자수 드레스까지.
‘몇 벌만 입어보면 되겠지?’
커튼 뒤로 들어가자, 하녀들이 솜씨 좋게 아리엘에게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거울을 보기 위해 커튼 바깥으로 나오는데…….
“앗!”
눈앞에 루시안이 있었다.
아리엘은 놀라서 다시 커튼 안으로 들어갈 뻔했다.
“어, 언제 왔어요, 루시안?”
“방금.”
짧게 대답한 그가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천천히 훑었다.
종내에는 아리엘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힐 만큼 빤히.
하지만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매우 단호했다.
“이건 안 되겠군.”
어, 안 되나…….
아리엘은 안 어울리나 싶어 시무룩해졌다.
그때 루시안이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노출이 너무 심해.”
노출?
아리엘은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입은 샴페인색 드레스는 전혀 노출이 심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그냥 등 쪽이 약간 파였을 뿐인데?
“하지만…… 이거 맘에 들었는걸요.”
“안 돼.”
루시안이 저항하기 어려운 말투로 말했다.
허스키하게 낮아진 목소리가 뒷덜미를 쭈뼛하게 했다.
“다른 놈들이 볼 거잖아.”
그가 다가와서 한 손으로 아리엘의 허리를 감쌌다.
사교댄스를 출 때의 자세였다.
숨을 멎게 하는 그의 얼굴이 한결 가까워졌다.
루, 루시안. 이런 식의 자극은 심장에 매우 곤란한데요.
혹시 얼굴 설득이 잘 통한다는 거 알고 이러는 건…… 아니죠?
그녀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그가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아. 내가, 네 살갗을 보는 인간들의 눈알을 죄 뽑아 발치에 굴러다니게 하고 싶다면-”
으으으으, 알겠어요!
아리엘은 루시안을 밀치고 얼른 커튼 뒤로 도망쳤다.
* * *
아리엘은 골라놓은 드레스들을 차례로 입고 나왔다.
눈치 빠른 마담 샬럿이 살갗이 많이 드러나는 것은 제외하고 몇 벌을 더 권했기에 그것도 입어보았다.
사락사락.
드레스 천 스치는 소리가 조용히 드레스룸을 채웠다.
얇은 커튼 너머에 있을 루시안이 은근히 의식되어 자꾸만 호흡이 가빠졌다.
‘왜 이렇게 긴장되지.’
고작 드레스를 보여주려는 것뿐인데. 친구들이나 수잔하고는 수백 번 했던 일이잖아.
‘……저 눈빛.’
이게 다 루시안 눈빛 때문이야.
사람을 유혹해서 파멸로 몰고가는 아름다운 악마 같은.
그의 눈빛을 받고 서 있다 보면 다른 것은 다 잊고 그에게만 신경을 빼앗기고 만다.
등 뒤에서 하녀들이 능숙하게 드레스 끈을 묶어 마무리하고, 줄을 당겨 커튼을 열었다.
‘이번엔 파인 데도 없으니까 괜찮다고 하겠지?’
아리엘은 기대감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입는 족족 매번 빤히 살펴보다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 후보였던 붉은 새틴 드레스.
“안 돼. 눈 달린 것들이라면 다들 쳐다볼 거야.”
오팔이 자잘하게 뿌려진 상큼한 레몬색의 미니 드레스.
“너무 귀여…, 절대 안 돼.”
화려한 은사 자수가 들어간 네이비색 드레스.
“미쳤군. 당장 다른 거 입어.”
아이스 블루색 시폰이 겹겹이 싸인 드레스까지.
“안 돼. 내 속 뒤집어지는 꼴 보려고?”
결국 심기가 상한 듯 그가 샬럿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이런 거 말고는 없나?”
안 그래도 루시안의 기세에 눌려있던 마담 샬럿과 의상실 하녀들이 그의 퇴짜에 전전긍긍하는 것이 보였다.
아리엘은 속으로 안절부절 못 했다.
‘내 눈엔 다 좋은데…….’
루시안 눈에는 별로인가?
대체 뭘 기준으로 안 된다고 하는 건가요?
아리엘은 속으로만 발을 동동 구르며 다시 커튼 뒤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마담이 새로 꺼내온 드레스를 입었다.
스르르륵.
또다시 커튼이 젖혀지자,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루시안의 시선이 아리엘에게 향했다.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손에 밴 땀이 느껴졌지만, 드레스의 소재가 매끄러워서 그냥 미끄러지기만 했다.
“…….”
한참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루시안이 한쪽 엄지로 제 입술을 누르듯 문질렀다.
붉은 입술이 이지러지는 모습이 아주 색정적인 상상을 돋구었다.
“이것도 예쁘군.”
그가 심각한 어조로 내뱉었다.
마담 샬럿이 양손을 맞잡고 열심히 바람을 잡았다.
“예, 너무 아름다우시지요? 어쩜 피부가 백옥같으셔서 안 받는 색이 없으셔요. 붉은색은 사랑스러우시고, 샴페인 골드는 우아하고 따스해 보이시죠. 지금 입고 계신 연보라색 드레스는…….”
샬럿의 말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듯, 루시안이 다시 한번 반복해 말했다.
“다 예뻐.”
예쁘다고요?
아리엘은 심장이 콩닥거렸지만, 얼른 표정을 숨겼다.
조용히 해, 심장아.
기분이 들뜨는 대로 넋놓고 있으면 안된다구.
루시안은 자기가 저렇게 아름다우면서, 나더러 예쁘다니.
시력이 정상인 걸까?
루시안은 아리엘의 얼굴에서 그 생각을 고스란히 읽어냈다.
그의 말을 전혀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는 서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왜 안 믿지?”
“뭐, 뭐를요?”
“내가 한 말.”
“안 믿긴 누가…… 믿어요.”
그러자 루시안이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고 손가락으로 뭉근히 맥 뛰는 곳을 어루만졌다.
“거짓말인데. 박동이 이렇게 파닥이는 걸 보니.”
그, 그건 거짓말 때문만이 아닐 텐데요…….
루시안이 노골적으로 사나운 눈빛을 했다.
“예전엔 믿었었잖아. 예쁘다는 말.”
아리엘은 슬그머니 힘을 주어 그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걸까?
그러자 루시안의 기세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아리엘은 왠지 조금 불안해졌다.
그가 위험한 기세를 스멀스멀 내뿜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 눈이 널 제대로 보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겠군.”
그리곤 샬럿을 향해 고압적으로 눈짓했다.
“다 사겠다.”
네? 루시안?
아리엘은 놀라서 입만 벌렸다.
“저, 전부 말씀이십니까?”
샬럿이 경악한 투로 물었다.
루시안이 싸늘하게 미간을 좁혔다.
“드레스를 모두 사겠다고 했을 텐데.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말귀를 빨리 알아들은 샬럿이 허둥지둥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예! 대공자님.”
샬럿이 주문을 처리하려고 도망치듯 자리를 비우자, 아리엘은 얼른 루시안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루시안, 뭐하는 거예요.”
난감해 죽을 지경이었다.
드레스가 몇백 벌인데…… 저게 다 얼마야?
아니, 평생 저 옷들을 한 번씩이라도 다 입어볼 순 있는 건가?
곤란함에 물든 아리엘의 얼굴을 잠자코 보던 그가 오만하게 입매를 비틀며 물었다.
“옷이 마음에 안 들어?”
“그건 아니지만…….”
그가 아리엘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리며 교묘히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내 것을 사는 것은 남편의 권리야.”
아리엘은 어찌할 줄을 몰라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많은 선물은…… 부담스러운데.
하지만 루시안이 저렇게 나올 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건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결국 아리엘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드레스룸이 가득 채워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선 루시안은 무척이나 흡족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
무도회 당일, 다이아나는 깜짝 놀랄만큼 아름다운 눈 가면을 가지고 아리엘을 찾아왔다.
“짜잔! 이거 봐. 예쁘지? 장인이 한 땀, 한 땀 덧대 만든 가면이란다. 너한테 정말 잘 어울릴 거야!”
오늘 입고 올 드레스와도!
아리엘은 자신보다 더 신난 것처럼 보이는 다이아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루시안이 사들인 산더미같은 드레스 중에 그녀가 입고 가기로 한 것은 플라워 자수가 들어간 연보랏빛의 드레스였다.
그리고 다이아나가 선물한 가면도 아리엘의 드레스와 똑같이 연한 바이올렛 색으로 이루어져 었었다.
가면 한쪽에는 청순한 꽃장식이 자리했고, 그 위에는 보석으로 만든 나비가 올라갔다.
“고마워, 다이아나. 너무 예쁘다.”
“그렇지? 그리고 난 이걸 쓸 거야!”
야망에 불타는 눈으로 다이아나가 자기 가면을 꺼내 들었다.
엄청나게 화려한 공작새 가면이었다.
높이가 족히 1미터는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쓰니, 과해 보이지 않고 화려함이 배가 되었다.
“무도회장에서 다이아나는 찾을 수 있겠다.”
“그럼. 네가 나 잘 찾으라고 이렇게 엄청난 걸 쓰는 건데.”
아리엘에게 가면을 전해준 다이아나는 이따 파티장에서 보자며 돌아갔다.
다이아나가 돌아간 뒤엔 알렌이 와서 아리엘에게 보석함을 전해주었다.
“대공자님께서 오늘 쓰실 장신구를 보내셨습니다.”
“고마워요, 알렌.”
별생각 없이 보석함을 열어본 아리엘은 깜짝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했다.
잠깐만, 말도 안 돼.
“알렌, 이거……?”
알렌이 드물게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주인님도 참 팔불출이시지,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예. 오로라 그린 다이아몬드 세트입니다. 대륙에서 딱 하나 있는.”
아리엘은 말문이 막힌 채 멍하니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를 바라보았다.
오로라 그린 다이아몬드는 연한 청록빛을 띤 아주 희귀한 보석이었다.
여태 발견된, 장신구를 만들만한 크기의 오로라 그린 다이아는 이 세트 안에 모두 들어가 있었다.
한 마디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비싼 물건이었다.
‘안 돼, 나 이거 못 해요. 제발.’
아리엘은 도와달란 눈으로 알렌을 바라봤지만, 알렌은 흐뭇한 얼굴로 그녀에게 웃어줄 뿐이었다.
“오늘 입으실 드레스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랬겠죠. 루시안이 생각이나 했겠어요…… 국보급 보석을 장신구로 쓸 내가 느낄 압박감을. 엉엉.
아리엘은 알렌을 내보낸 뒤, 나머지 준비를 이어갔다.
협탁 위에 놓인 다이아몬드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하지만 결국 장신구를 꺼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말았다.
떨리는 손으로 액세서리를 꺼내자, 비취색 다이아몬드가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영롱한 빛을 반사했다.
“어휴…….”
오로라 그린 귀걸이와 목걸이는 정말 예뻤다.
아리엘의 머리카락색과도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안하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안하고 나가면 또 루시안이 왜 내가 준 걸 안했냐고 무섭게 굴겠지?
자기가 주는 선물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루시안 바보!’
그녀는 한숨을 폭폭 내쉬며 액세서리를 착용했다. 내 팔자야.
채비를 마치고 마지막 점검을 하는데,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야. 히스.”
“히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예복 차림을 한 히스가 들어왔다.
전신 거울 앞에 서 있던 아리엘은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열일곱 살이 된 히스는 키가 많이 자랐다.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곱상해서, 다이아나 말로는 사교계 소녀들 마음을 꽤나 흔들고 있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성큼 들어오던 히스가 아리엘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
가만히 멈춰선 그의 얼굴에는 얼빠진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리엘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너…….”
“나 뭐?”
무슨 생각을 했는지 히스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요란하게 헛기침을 한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 너 오늘 엄청…… 신경 썼네.”
아리엘은 빙긋 웃었다.
이건 히스 식으로 따지면 예쁘다는 말이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오늘 입은 플라워 자수의 연보랏빛 드레스와 오로라 그린 다이아몬드 장신구는 아름다웠다.
“고마워, 히스도 예쁘다.”
빈말이 아니라, 무도회에 가기 위해 말쑥하게 예복을 차려입은 히스는 제법 멋졌다.
잡티 없이 깨끗한 피부에 헝클어진 다갈색 머리카락, 오묘한 금안.
곱상하지만 왠지 반항기가 흐르는 이목구비.
‘이렇게 보니까 영애들이 왜 히스를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은걸.’
시선을 피한 그가 주머니에서 핀 하나를 꺼내 아리엘에게 건넸다.
“자, 드레스 안쪽 단에 달아.”
아리엘은 핀을 받아 들어 살펴보았다.
유리처럼 투명하고 얇은 핀이었다.
핀에서 은은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게 뭔데?”
“치맛자락이 끌리지 않도록 해주는 마도구.”
무뚝뚝하게 대답한 히스가 몸을 숙여, 아리엘의 드레스에 핀을 달아주었다.
그러자, 드레스 아랫자락의 무게가 사라지면서 바람 마법이 치맛단을 사르르 스쳤다.
“와…….”
히스는 천재가 아닐까?
길고 풍성한 드레스는 아름다운 대신 걷기에 불편했다.
하지만 이 핀을 달면 문제없겠는데?
마도구에 감탄한 아리엘의 뺨이 상기되었다.
“끌리지만 않는 게 아니라 드레스 밟을 일도 없겠다.”
“땅이나 발에 닿을 것 같으면 드레스가 스스로 피할 거야. 그렇게 마법을 걸어뒀으니까.”
“고마워. 히스 밖에 없어.”
하여간 말만 퉁명스럽지, 속은 무른 편이라니까.
아리엘은 칭찬하듯 히스의 머리카락을 쓰담쓰담했다.
평소 같으면 애취급이라고 펄쩍 뛰었을 히스가 웬일로 조용했다.
쉬이 읽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이제 내려가야지. 무도회에 늦겠어.”
아리엘은 시계를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참을성 없는 루시안을 기다리게 했다간 무슨 꼴을 볼지 몰라.
“히스, 가자.”
그녀가 문손잡이를 잡고 뒤에 있는 히스를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히스가 뒤에서 아리엘의 손을 붙잡았다.
* * *
‘미친 짓이야.’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리엘과 함께 보낸 시간으로만 따지면 남자들 중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고, 그만큼 히스는 그녀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았다.
하지만 한해, 한해 지나갈수록 그것만으로 만족하기 어려워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친구나 동기라는 말이 싫어진 건.
어쩌면 마음을 자각하기 한참 전, 그녀에게 어린애 취급을 받기 싫어했던 때부터였을까.
그런데 이제는 싫다 못해 힘에 겨웠다.
퉁명스러운 말투와 무뚝뚝한 태도로 애써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구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함께 여행에서 돌아와 나란히 서 있는 아리엘과 대공자를 보았을 때 히스는 차마 그 광경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섰다.
오늘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른 남자 옆에 설 아리엘을 생각하니 저절로 몸이 나갔다.
붙잡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내 옆에 서 있어 달라고.
“히스……?”
손목을 붙잡힌 아리엘이 깜짝 놀라서 그를 불렀다.
히스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잡았던 손을 놓아버렸다.
스스로의 행동에 당황한 듯 그가 한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미안, 그냥…….”
아리엘은 히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붉게 물든 귓가와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표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른 히스의 기류에 덜컥 걱정이 앞섰다.
“왜 그래. 괜찮은 거야?”
그녀는 한 발자국 그에게 다가갔다.
‘어릴 때의 히스는 감정이 얼굴에 금방금방 드러나서 알기 쉬웠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아졌다.
아리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힘든 일이라도 있는 거면 말해줘.”
하지만 히스는 목울대를 일렁이며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널 좋아해서 착해지고 싶었던 내가, 너 때문에 나쁜 사람이 돼버릴 것 같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대공자에게서 아리엘을 빼앗아 오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싶어진다고.
그는 가보겠다고 중얼거린 뒤 도망치듯 사라졌다.
‘무슨 일이지, 히스…….’
아리엘은 그가 사라진 곳을 한참 보고 있다가 방문을 나섰다.
* * *
현관으로 내려가자 마차 앞에 서 있는 루시안이 보였다.
위로 슬쩍 젖히고 있는 고개 때문인지 흰 목덜미 선이 그대로 드러나서, 그는 지독하게 퇴폐적으로 보였다.
너무 아름다운 모습이라 다가가기 망설여질 정도였다.
“루시안.”
조그맣게 부르자, 그가 아리엘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
아리엘은 불안한 기분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드레스 피팅 때 루시안이 예쁘다고 말했던 플라워 자수의 연보라색 드레스를 골랐는데, 그와 비교하니 한없이 안 예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림같이 아름다운 루시안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네?”
영문을 몰라 되묻자, 그가 입술 사이로 나른하게 말을 흘렸다.
“나한테 지금 이러는 거.”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뭘 어쨌길래요?
잠시간 그녀를 태워버릴 것처럼 강렬하게 바라본 루시안이 입속말을 했다.
“큰일인데. 가기 싫어졌어.”
그 목소리를 들은 아리엘은 펄쩍 뛰었다.
루시안의 승전 무도회인데, 주인공이 무도회에 안 가면 어떡해!
그녀는 혹시 루시안이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봐 얼른 마차로 다가갔다.
“빨리 타요.”
긴 드레스 자락을 쥐고 마차에 오르려는데 루시안이 마차 앞을 느리게 막아섰다.
“잠깐, 아리엘라.”
낮게 깔린 루시안의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그가 제 한 손을 펴고 스르륵 힘을 풀었다.
다음 순간 아리엘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루시안에게서 흘러나온 새카만 소드 마나가 기묘한 모양으로 모여들다가 결정을 이루어 보석으로 바뀌었다.
마무리를 하려는 듯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자, 검푸른 보석 위로 흰색의 문양이 수 놓였다.
순결한 눈꽃이 핀 흑요석 같은 모습이었다.
‘루시안의 마정석…….’
넋을 팔고 있는 사이 그에게 손목을 잡혔다.
그가 아리엘의 양 손목을 커다란 한 손으로 쥐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되자 긴장감이 훅 올라갔다.
“루시안…….”
그가 뇌쇄적인 음성으로 속삭였다.
“인간들은 그러더군. 이런 걸 걸어주는 이유는 속박하기 위해서라고.”
못 보는 사이 얇은 플라티나 팔찌에 끼워진 그의 마정석이 아리엘의 손목에 찰랑 걸렸다.
“선물.”
아리엘은 잠시 숨을 멈췄다.
착용하고 있는 오로라 그린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더 값어치 높은 물건이 그녀의 손목에 걸려있었다.
누가 감히 드래곤의 소드 마나로 장신구를 만들 생각을 하겠는가?
루시안의 마정석으로 만든 팔찌는 꼭 그처럼 우월해 보이는 것과 동시에 매혹적이었다.
차가운 스톤에서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내 허락없인 빼지 마.”
낮게 말한 그가 그녀 손목 안쪽의 여린 살갗에 입술을 눌렀다.
보란 듯이 그녀와 눈을 맞춘 채.
닿은 곳이 전류가 스친 듯 아릿했다.
아리엘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이제 가지.”
루시안의 입술이 손목에서 떨어진 뒤, 아리엘은 정신이 너무 혼미해서 잠시 멈추어 서 있었다.
그사이에 준비를 마친 마티어스가 등장했다.
단정하고 금욕적인 인상의 미남자가 검은 제복을 갖춰 입은 모습은 보기만 해도 근사함을 자아냈다.
“아리엘라.”
자연스럽게 아리엘 옆으로 다가선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에스코트하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리엘은 얼결에 그의 손 위에 작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때, 마티어스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이게 뭐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루시안이 방금 걸어준 마정석 팔찌였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아리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마티어스가 설명을 요구하듯 루시안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 시선을 받은 루시안이 서늘하게 호전적인 눈빛을 되돌렸다.
한참만에 마티어스가 마뜩찮다는 듯 낮게 혀를 찼다.
“……성년도 안 된 아이에게.”
제 권리를 주장하다니.
마티어스의 입속으로 뒤의 말은 삼켜졌다.
루시안의 기세가 응집된 마정석을 아리엘에게 걸어놓는다는 건 다른 수컷의 접근을 차단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마치 짝에게 제 체취를 묻혀 다른 이성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았다.
실제로 이 마정석 팔찌 때문에 인간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아리엘에게 다가가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를 느낄 것이다.
마티어스는 아직 미성년인 아리엘에게 소유욕을 부리는 루시안이 못마땅해, 가둬놨던 제 기세를 풀었다.
두 남자가 서로를 향해 차가운 기세를 흘리기 시작하자 아리엘은 정신을 차렸다.
“마티어스님, 루시안. 얼른 가요.”
그녀는 양손으로 그들의 옷자락을 살며시 움켜쥐고 마차 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둘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같이?”
준비된 마차가 한 대 뿐이라 당연히 셋이 같이 탈거라고 생각했던 아리엘은 눈을 깜빡였다.
“그런 거 아니었어요?”
대번에 두 사람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럴 리가.”
고개를 기웃해 뒤를 보니 노집사 알렌의 당황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알렌이 마차를 두 대 준비하도록 명했는데, 중간에서 하인이 깜빡하고 전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황을 깨달은 아리엘은 두 사람을 달래듯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마차가 넓으니까 그냥 같이 타요, 네?”
열 명도 더 탈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하지만 두 남자는 대답 대신 절대 싫다는 듯이 서로를 노려볼 뿐이었다.
으으, 라카트옐 남자들…… 애들 같아. 유치해!
결국 아리엘은 양손을 허리에 얹고 삐약삐약 협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도 혼자 타고 갈 거예요.”
진지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알렌에게 말했다.
“알렌, 마차를 세 대 준비해주세요.”
그러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동시에 알렌을 막았다.
“안 돼.”
“거부한다.”
그리고 그들은 아리엘에게 바짝 다가섰다.
“넌 나랑 타야지.”
“넌 나와 가야지.”
실랑이 끝에, 셋이 타는 것보다 아리엘이 혼자 타는 게 더 싫었던 라카트옐 남자들은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널찍한 마차 안에서 가장 먼 자리에 각각 나누어 앉은 두 남자는 쌩하니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창밖만 바라보았다.
어휴. 떨어져 있을 때는 은근히 서로를 생각하면서, 마주치기만 하면 이렇다니까.
아리엘은 고개를 살래살래 젓다말고 몰래 미소 지었다.
뭐, 그래도 같이 타게 됐으니까.
그들의 가운데에 앉은 아리엘은 창밖에서 인사를 하는 알렌을 향해 살짝 윙크를 했다.
셋이 타는데 성공했어요, 알렌!
“크흡, 마님……!”
처음으로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이 한 마차를 타는 장면을 목격한 알렌은 입을 틀어막고 감격했다.
그렇게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마차 여행 끝에 마침내.
라카트옐 가족은 승전 무도회가 열린 황궁의 파티 홀 앞에 도착했다.
* * *
승전 무도회가 열리는 홀에 입장하기 전에 아리엘은 다이아나와 만났다.
“아리엘!”
“다이아나!”
몇십 년간 보지 못한 가족을 만난 듯이 반가워하며 팔짝팔짝 뛸 기세인 두 친구의 모습에 루시안의 고개가 비딱해졌다.
하지만 다이아나에게 루시안의 반응은 안중에 없었다.
눈앞에 이렇게 예쁜 아리엘이 있는데!
“아리엘, 오늘 정말 너무너무 예쁘다. 우리 아리엘은 요즘 하루가 다르게 예뻐진다니까.”
다이아나가 차려입은 아리엘의 귀여운 자태를 눈에 꼭꼭 저장하며 말했다.
“다이아나가 훨씬 예쁜걸.”
아리엘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게 꾸민 다이아나를 보며 감탄했다.
“다이아나는 정말 멋있고 예뻐.”
최고로 사랑하는 아리엘의 말에 다이아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물거렸다.
사교계에서 차갑고 도도하다는 평을 듣는 평소의 모니카 공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 귀염둥이는 어쩜 이렇게 잘 컸을까.
누가 훔쳐가면 어쩌려고!
그러다 다이아나는 아리엘을 이미 훔쳐간 거나 다름없는 대공자를 지그시 노려봤다.
루시안이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에도 다이아나는 꿈쩍하지 않았다.
흥, 나는 아리엘의 소오-중한 친구다 이거예요.
다이아나가 아리엘을 꼭 껴안자, 루시안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대공자님, 대공자비님과 잠시 파우더룸에 들려도 되겠지요? 아시겠지만 숙녀들은 신경 쓸 부분이 많답니다.”
상냥한 목소리로 말한 다이아나가 아리엘의 손을 잡아끌었다.
대공자가 아리엘을 보내기 못마땅해하는 걸 은근히 즐기는 다이아나였다.
루시안을 일별하고 아리엘에게 자상하게 팔짱을 낀 다이아나는 뒤늦게 오로라 그린 다이아몬드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헉. 아리엘, 이거, 이거 정말…… 그거야?”
아리엘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나의 얼굴이 황홀한 듯 풀어졌다.
“어머 이 빛깔 좀 봐. 정말 오로라를 품은 것 같잖아…… 커팅도 이 세상 기술이 아니다. 세공마저 기가 막히고…….”
한참 혼잣말을 늘어놓던 다이아나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아니 근데, 대공자님은 정신이 나갔다니? 이런 귀한 건 특별한 날에 공개적으로 선물해야지. 모두가 알도록.”
다이아나,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
드래곤인 루시안에게 이런 건 발에 채이는 돌멩이 같은 존재거든…….
아리엘은 작게 웃으며 친구를 달랬다.
“난 다른 사람들이 몰라서 좋은걸.”
“무슨 소리야! 세상 사람 모두한테 자랑해도 모자랄 판에!”
몇 마디 더 꿍얼거린 다이아나의 시선이 마침내 아리엘의 팔찌에 멎었다.
“아리엘? 이건…….”
아리엘은 뭐라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이미 눈치를 챈 듯 가까이에서 팔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거 라카트옐의 마정석이야?”
“……응.”
다이아나가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세상에. 소드 마나로도 마정석을 만드는 게 가능해?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아리엘조차도 오늘 루시안이 보여주기 전까진 본 적이 없었으니 다이아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예전에 소드 마나에 대해 공부할 때 마정석에 대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소드 마나로는 마정석을 만들기 어렵다고 했었어. 애초에 남을 베기 위한 마나라서 뭉쳐지지 않는다고.’
엄청나게 농도가 짙다면 검 위로 만져질 정도는 가능하다고 했지만…….
‘마정석은 역시 루시안이라서 가능했던 건가 봐.’
신기한 듯 한참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다이아나가 흐뭇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예쁘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우리 아리엘 짝이 되려면.”
그러고는 음흉한 표정으로 아리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대공자 부부의 관계는 보는 사람이 더욱 간질간질했다.
“대공자님 돌아오신 후에 둘이 순조로운 모양이네?”
“응?”
“꽤 오래 떨어져 있었잖아. 오랜만에 보면 어색하거나 그럴 법도 한데, 대공자님이 널 보는 시선을 보니…… 타 죽겠는데?”
다이아나가 눈짓으로 뒤편에 있는 루시안을 가리켰다.
루시안이 꿰뚫어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아리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
아리엘의 뺨은 속절없이 붉어졌다.
‘안 그래도 손목에서 계속 루시안의 존재가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한데.’
팔찌 안쪽으로 입맞춤 받은 부분이 화인이라도 찍힌 듯 계속 화끈거렸다.
기분 탓인지, 그가 자신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열심히 얼굴을 식혔다.
파우더룸에 들어가자, 영애들의 시선이 아리엘에게 몰려들었다.
그들의 시선이 아리엘의 가느다란 몸과 예술적인 플라워 자수가 들어간 연보랏빛 드레스를 탐욕스럽게 훑었다.
“저 드레스는 어디 의상실 것이지?”
“목걸이의 녹푸른빛 보석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저게 뭐죠?”
모두가 아리엘의 모습에 집중하는 사이, 그들 틈에 서 있는 여자 한 명은 가면 뒤로 불안한 시선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리엘과 다이아나가 소곤거리는 소리들을 뒤로 하고 걸어가자, 황궁 시녀가 무도회 홀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쪽으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아리엘은 우윳빛이 섞인 바이올렛 드레스의 자락을 가볍게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 홀에는 사람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복잡하니까 먼저 루시안을 찾고 내려갈까?’
그녀는 계단 난간 너머로 루시안이 어디 있는지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흑.”
갑자기 심장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심장의 조직들이 끊어지듯 고통이 밀려왔다.
난간을 붙잡고 버텨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결국 무릎을 꺾고 계단에 주저앉았다.
찰나 동안 이명이 들릴 정도로 심한 아픔이었다.
“아…… 윽.”
“아리엘! 왜 그래? 괜찮니?”
놀란 다이아나가 아리엘을 부축했다.
잠시간 그녀를 지배하던 통증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금세 사라졌다.
아리엘은 가쁘게 숨을 내쉬며 고통이 느껴졌던 곳에 손을 얹었다.
“……하아, 하아.”
왜 자꾸만 이런 통증이 찾아오는 거지?
통증이 사라졌는데도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과거, 그녀가 죽었던 시기가 째깍째깍 초침을 세며 되돌아오고 있었다.
* * *
계단을 내려온 아리엘은 주위를 둘러보며 루시안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키가 엄청 커서 눈에 잘 띌 텐데, 대체 어디 있는 거지?
한참을 두리번거린 뒤에야 그녀는 루시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서 휘장이 쳐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기세를 가두지 않고 제멋대로 풀어놓아, 북적이는 홀 안에서도 그의 주위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불쑥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루시안…… 너무 멋있다.’
넓은 어깨와 탄력 있는 허리로 내려오는 늘씬한 선, 예복으로 모두 덮고 있음에도 그가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잘 짜인 근육들.
조형이 완벽한 루시안의 몸은 보기만 해도 은근한 상상을 자극했다.
그리고 옆모습만 보이는 그의 얼굴은 숨이 멎을 듯 아름다웠다.
일부가 가려져 있으니 더욱 보는 사람의 애를 타게 했다.
항상 얼마간 찌푸려져 있는 미간과 그 아래에 오만하게 드리운 속눈썹.
세상의 어떤 보석도 흉내 낼 수 없는 빛깔의 짙은 푸른색 눈. 야살스러운 눈물점.
흰 피부와 검은 머리칼, 붉은 입술의 조화가 지독히도 관능적이었다.
루시안에게 곧장 다가가려던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기둥 뒤로 숨어버렸다.
두근거려서 잠깐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왜 하필 저런 미모를 갖고 있어서…… 사람을 숨도 못 쉬게 한담.’
루시안이 조금만 덜 예쁘다면 이 짝사랑도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그녀는 속으로 조금 투덜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쥐고 휙 끌어당겼다.
앗, 하는 순간 아리엘은 기둥 반대편에서 루시안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뭐, 뭐야, 언제 온……?’
아리엘은 눈만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팔을 쥐었던 그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와 손목을 붙잡았다.
“왜 숨었지?”
그가 엄지로 아리엘의 손목 안쪽을 은근히 압박했다.
“설마하니…… 내 눈을 피해 숨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리는 없고.”
손목에서 뭉근히 퍼지는 야릇한 기분에 아리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안이 재촉하듯 손목을 슬쩍 문질렀다.
“대답은?”
아리엘은 더 참지 못하고 더듬대며 입을 열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요. 루시안이 너무 자, 잘생겨서.”
반쪽만 드러난 그의 눈매가 설핏 굳었다.
불시의 습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
루시안은 그 순간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았다.
그녀의 눈에 자신이 매혹적이게 비친다는 말에 머리가 마비될 듯 달콤했다가, 아리엘이 자신 외에 다른 인간들의 아름다움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이성의 끈이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또 잘생긴 인간이 누구지?
아리엘 눈에 잘생겨 보이는 건 다 없애야 하는데.
아, 일단 인간들이 잘생겼다고 했던 놈들 얼굴부터 뭉개놔야겠군.
아니, 아예 사내놈들 얼굴을 다 갈아버리면…….
잠깐 사이 살기를 띠는 루시안을 본 아리엘은 그의 옷깃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루시안, 무슨 생각해요?”
“인간들 얼굴 부숴놓을 생각.”
“……네?!”
대체 이 남자 생각은 어떤 방향으로 튀는 거야? 무서워 죽겠네.
아리엘은 그의 등을 콩콩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 무서운 생각하지 말고 얼른 음료 있는 데로 가요.”
그녀가 사근사근 재촉하자 루시안이 살기를 스르륵 누그러뜨렸다.
그가 숨 막히는 미모로 웃는 바람에, 아리엘은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가지.”
말을 마친 그가 아리엘의 손목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 * *
황제는 대공자 루시안을 크게 치하하며 유니콘의 후예라고 불리는 명마들을 잔뜩 선물했다.
“라카트옐의 무예는 제국의 홍복이고, 보물…….”
앞에 선 루시안이 권태로움을 숨기지 않으며 그 치하를 듣고 있는 동안, 아리엘은 겨우 숨을 몰아쉬며 긴장을 풀었다.
‘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려서인지, 루시안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신경 쓰였다.
예전에는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것들도 이젠 하나하나 의식돼서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긴장 상태였다.
그때, 그런 아리엘의 눈에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가 보였다.
“……!”
그녀가 서 있는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휘장 뒤에 예닐곱 살쯤 먹은 아이 두 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미르, 미카?’
진짜라면 큰일이야!
* * *
미카엘라와 미르셀라는 아리엘의 쌍둥이 사촌 여동생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여섯 살이기 때문에 사교계 행사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이 일이 태후의 귀에 들어가면 쌍둥이들의 유모는 크게 혼날 것이 분명했다.
‘이 사고뭉치들,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아리엘은 작게 한숨을 쉬며 살금살금 휘장 뒤로 이동했다.
휘장을 살짝 들추자 짧은 머리카락을 이마에서부터 잡아 사과 꼭지처럼 묶은 쌍둥이들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명화 속에 나오는 아기 천사 같은 얼굴 한 쌍이 눈앞에 있었다.
한 명은 꿀색의 허니블론드, 한명은 크림색에 가까운 백금발.
드레스를 입혀놓긴 했지만, 어린아이들이라서인지 선머슴 같았다.
“누냐.”
“아리엘 누냐.”
아무리 언니라고 말을 해주어도 소용이 없다니까.
‘아무래도 황제 폐하가 쌍둥이들의 어머니인 비비안님에게 누나라고 부르는 걸 여러 번 들어서 그런가 봐.’
아리엘은 쌍둥이들을 최대한 조용히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그들의 손을 꼭 붙잡았다.
“미르셀라, 미카엘라.”
평소엔 미르, 미카 하고 애칭을 부르는 아리엘이 풀네임을 부르자, 쌍둥이들이 눈치를 보며 얼른 그녀의 드레스 자락에 매달렸다.
“혼내지 마. 누냐 보고 싶어서 왔어.”
“누냐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 커서 누냐랑 결혼할 거야.”
아기들이 귀여움 공격을 퍼붓자, 아리엘의 마음은 조금 약해졌다.
나랑 결혼 한대, 너무 귀여워.
사촌지간끼리는 결혼 못한다고 말해줘야 하지만 귀여워서 살짝 웃음이 났다.
맨날 주변 사람들한테 아기 취급만 받던 아리엘은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에게 약한 편이었다.
자신을 졸졸 따르는 미르와 미카에게 약한 아리엘을 보고, 태후와 시녀들이 웃으며 애기가 애를 본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미르. 미카. 여기 있다가 들키면 할마마마가 이놈, 하실 거야. 얼른 유모한테 돌아가.”
“시져. 나 누냐 옆에 있을 거야.”
쌍둥이들이 아리엘의 드레스 자락을 껴안고 가지 못하게 막았다.
음…… 어쩌지?
뭘로 이 꼬꼬마들을 구슬러야 할까?
아리엘은 휘장 바깥 눈치를 살짝 본 뒤 쌍둥이들 앞에 마법을 구동했다.
테이블에 마련되어 있는 디저트를 몰래 소환하는 마법이었다.
아리엘이 주문을 외우자, 미니 쇼콜라 마들렌과 삼각형 모양의 도톰한 황치즈쿠키가 아이들 앞에 뿅 나타났다.
“와!”
두 아이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리엘은 둘의 입에 과자를 차례차례 넣어준 뒤 말했다.
“자, 이거 먹고 들어가는 거야. 알겠지?”
“시져. 우리도 누냐랑 춤출 거야.”
그때, 어디선가 루시안의 요염하고 냉혹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달라붙는 것 같은데.”
아리엘은 딸꾹질을 할만큼 놀랐다.
“루시안……?”
히익. 쌍둥이들이 무서워하며 아리엘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루시안이 불쾌한 듯 그들을 노려 본 뒤, 긴말 않고 옆의 시종에게 까딱 손짓했다.
“데리고 가.”
“예, 예!”
퍼렇게 공포에 질린 시종이 쌍둥이들을 번쩍 들어 데리고 허둥지둥 사라졌다.
아리엘은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말리지도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나랑 같이 있었다고 여섯 살 꼬맹이들을 억지로 데려가라고 하다니.
“착한 애들을 왜 겁주고 그래요, 루시안.”
“착하다고?”
루시안이 나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나쁘다고 하는 편이 저것들한테 나을걸.”
그가 짙은 유혹을 띤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안 들었거든. 감히 너와 결혼하겠다는 것도, 너와 춤추겠다는 것도.”
루시안이 악마가 부추기는 것처럼 아리엘에게 속삭였다.
“이참에 치워버릴까.”
아리엘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또, 또 저런다, 무섭게.
그녀는 루시안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으며 종알거렸다.
“쉿, 그런 말 하면 못써요.”
그에게 멋대로 손을 댔다는 걸 알아차린 건, 행동을 저지른 직후였다.
‘앗.’
루시안이 조용히 속눈썹을 내리깔아 제 입술 위에 얹힌 아리엘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눈을 올려 빤히 직시해왔다.
“…….”
그의 짙은 청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이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그녀의 손가락 아래 눌린 붉은빛 입술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루시안의 눈에 어떤 감정이 강렬하게 스쳤다 사라졌다.
침묵 끝에, 그가 낮은 침음을 내며 시선을 피했다.
그가 먼저 시선을 뗀 건 처음이라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루시안이 왜 저러지?’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그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저 어린 것들은 오늘만 봐주겠어.”
뭐야, 또 왜 이렇게 순순한 건데?
아리엘은 묘한 기분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요즘 들어 루시안이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화를 내다가도 달래면 곧잘 가라앉히고.
그렇다고 착해진 건 아닌 것 같은 게, 다른 무서운 짓들은 그대로란 말이야.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 여덟 쌍씩 서세요!”
분위기를 띄우려는지 황실에서는 젊은 남녀를 중앙으로 밀어 넣었다.
단체 춤곡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얼결에 홀로 밀려 나간 아리엘은 얼른 루시안을 붙잡고 섰다.
곧 빠른 템포의 음악이 시작되었다.
아리엘은 루시안과 동작을 이어갔다.
루시안은 춤을 출 때 상대를 완전히 리드하는 타입이었다.
그의 앞에서 춤을 잘 추고, 못 추고는 의미가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춤을 어떻게 추든 간에 그가 완벽하게 리드할 테니까.
‘사실은 얼굴만 보고 있어도 춤이 금방 끝나버리지만.’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붙잡아 들어 올리는 동작에서는 그가 너무 쉽게 자신을 들어 올려서 스스로가 종이 인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리엘을 바닥에 가뿐히 내려놓으며, 루시안이 고개를 낮춰 위협하듯 말했다.
“역시 그 드레스 못 입게 하길 잘했지.”
아리엘은 그가 말하는 게 등이 파였던 샴페인색 드레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요?”
“왜일 것 같아?”
뜨끈한 그의 손이 허리에 닿는 느낌과 함께 그 반문을 들으니 뺨이 확 붉어졌다.
그렇게 아리엘과 루시안이 춤을 추고 있는 사이.
다이아나는 춤이 끝나면 아리엘 옆을 떠나지 않을 계획을 잔뜩 세웠다.
‘휴, 내 귀염둥이를 대공자에게 뺏겼으니 그동안 사교활동과 공작을 좀 하고…….’
그 후엔 빨리 아리엘 옆에 가서 아리엘과 함께 가면무도회를 즐기는 거지!
다이아나는 자신이 세운 완벽한 계획에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대공자라도 아리엘을 독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파티장 안을 누비며 사교활동을 하던 다이아나는 낯선 귀부인 한 명과 우연히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부인.”
다이아나는 눈을 돋워 귀부인을 자세히 살폈지만, 가면을 쓰고 있는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상하네.’
수도 사교계 인물들이 초대받은 가면무도회에서 가면은 여흥일 뿐, 서로의 정체는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다이아나 모니카가 누구인가.
그녀는 자타공인 제국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그러므로 다이아나가 이 파티장 안에서 모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귀부인은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이런 사람도 있었던가?’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가면무도회 중에 대놓고 이름을 물어보는 건 실례였다.
“파티가 참 아름답지 않나요?”
다이아나는 무난한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자 가면을 쓴 귀부인이 당황한 듯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 그, 그렇네요.”
다이아나는 귀부인의 손이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들처럼 거칠어 보인다는 점에 다시 한번 이상함을 느꼈다.
귀부인은 몇 마디 횡설수설하더니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고개를 갸웃한 다이아나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뭔가 개운치 않은데…….”
* * *
춤이 끝나자, 황제가 준비한 특별 행사가 시작됐다.
황실 기사단을 지망하는 기사 지망생들의 토너먼트 경기였다.
황실은 무도회 홀 안쪽의 넓은 공간을 토너먼트 경기장으로 만들고, 단을 쌓아 귀빈들 자리를 높은 곳에 만들었다.
경기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아리엘의 오른쪽에는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왼쪽에는 다이아나가 앉았다.
아리엘은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세실이 안 보이네.”
“맞아. 이때쯤에 만나기로 했는데.”
다이아나가 부채를 살랑이며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이래서 길치는 안 돼. 우리 있는데 못 찾고 또 아무 데나 앉은 거 아니야? 저번에도 그랬잖아.”
아리엘이 마도구 사업을 시작했을 무렵 큰 행사를 연 적이 있었다.
당연히 세실도 초대했는데, 심각한 길치인 그녀는 끝내 아리엘과 다이아나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앉아있었다.
세실은 항상 다니던 길이 아니면 자주 길을 헤매곤 했던 것이다.
다이아나가 그날 실컷 놀리자 세실은, ‘나도 익숙한 길은 잘 다닌다!’ 고 항의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때 일을 떠올린 두 소녀는 작게 키득거린 뒤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장 쪽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우리 자리는 알고 있으니까 곧 오겠지. 일단 구경하고 있자.”
“응, 다이아나.”
주변을 둘러보자, 많은 영애들이 기대 가득한 얼굴로 경기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역시, 제국 행사의 꽃은 잘생긴 기사님들의 시합이지!”
영애들이 꺄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하이츠 백작가 영식이 두 명이나 나온다며?”
하이츠 영식이라면 세실의 오빠들이었다.
“그러니까. 둘째는 재능이 뛰어나고, 셋째는 다섯 살 때부터 검을 들었대.”
“어머, 설레라. 첫째 영식은 이미 기사로 승승장구하고 있다지?”
기사 지망생들이 줄을 맞춰서 나왔다.
“저기 하이츠 영식들이 있네.”
수많은 기사 지망생들 중에서 세실의 두 오빠를 찾는 건 아주 쉬웠다.
세실과 똑같은 물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딱 두 명뿐이었으니까.
“아, 경기 시작한다.”
경기가 시작하자 흥분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누가 우승할까?”
“당연히 하이츠 가 영식 중 한 명이겠지! 이름난 무가잖아.”
주변에서는 대부분 세실 오빠들의 우승을 점치고 있었다.
“예비 시험에서도 두 영식이 1, 2위를 했다지 뭐야.”
토너먼트 경기에는 예비 시험을 통과한 소수의 기사 지망생들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종 관문인 토너먼트로 실력을 겨뤄, 순서대로 입단 성적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뿐일까?
여기서 우승을 하면 그 자리에서 곧장 기사 서임을 받고, 황실 기사단 중 최고인 근위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럼 둘 중 하나가 오늘 근위대 뱃지를 달겠네.”
하이츠 백작가는 유서 깊은 무가였기 때문에 모두들 거는 기대가 컸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하이츠 영식들의 활약이 될 게 확실해 보였다.
* * *
이변은 뜻밖에도 중반부에서 일어났다.
흥미진진한 토너먼트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이츠가(家) 둘째, 셋째 영식이 매 경기를 휩쓸며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결승에서 하이츠가 형제가 만날 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이츠가 셋째, 란셀 하이츠가 패배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호리호리한 체형의 이름 없는 사내에게.
딱 보기에도 상대가 안 돼 보여서 아무도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란셀 하이츠는 당연히 뛰어나게 잘 싸웠다.
문제는 그 사내였다.
이름 없는 사내의 실력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패배한 란셀 하이츠는 바닥에 뻗은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름 없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수런거리는 관중석에서 사람들의 경악이 느껴졌다.
“말도 안 돼. 셋째 영식은 웬만한 경력 기사들과 겨뤄도 될 정도랬는데!”
“그렇다면 상대가 엄청나게 강한 건가?”
모두들 이름 없는 남자에게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문은 한 가지였다.
‘저 사람이 대체 누구야?’
조용히 뒤돌아선 늘씬한 체구의 사내는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결 상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아아아!”
관중들은 혜성처럼 등장한 실력자를 향해 환호성을 퍼부었다.
이기지 못할 것 같았던 사람이 우승 후보자를 꺾고 올라갔다.
사람들은 이 연극 같은 상황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소문에 관심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이름 없는 사내의 이름을 알아냈는지 외쳐대기 시작했다.
“라니츠! 라니츠!”
하지만 관객들 사이에서 유심히 투구 사내의 검술을 관찰하던 아리엘은 순간 뭔가를 깨닫고 말았다.
‘저 사람, 설마……!’
이제야 모든 퍼즐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약속 시간이 한참 넘도록 오지 않던 세실.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도 알려지지 않은 검사, 라니츠.
아리엘이 오랜 시간 봐왔던 세실의 검술과 똑같은 검술.
아리엘은 투구를 쓴 사내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세실, 남장을 하고 대회에 참여한 거야?’
* * *
한편 토너먼트의 반대편 라인에선 검술 천재로 유명한 하이츠 가의 둘째 영식, 에드윈이 파죽지세로 올라오고 있었다.
결국, 투구 머리 사내와 하이츠 둘째 영식은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흥분은 더욱 커졌다.
“리벤지 매치네! 일찍 탈락한 동생의 복수를 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에드윈 하이츠는 천재야. 하이츠 가에서 가장 재능을 많이 물려받았다고.”
시합이 시작되기 전, 투구 머리 사내와 에드윈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에드윈의 눈에는 승리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반면 사내는 묘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경기 시작!”
깃발이 올라가고 시합이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에드윈은 화려한 기술들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챙! 챙챙!
칼과 칼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경기장 가득 울려퍼졌다.
과연 결승전다운 긴장감이었다.
투구를 쓴 사내는 아까와는 반대로 방어에 힘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은 역시, 하며 수군거렸다.
“저 사내도 뛰어나지만, 그래도 에드윈에겐 못 당하는군!”
하지만 아리엘 생각은 달랐다.
에드윈과는 달리 사내의 호흡은 전혀 흔들리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까지는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 본 건지도 몰라.’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사내가 훌쩍 뒤로 뛰어오르며 거리를 벌렸다.
가만히 가라앉아있던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채앵-!
사내의 공격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에드윈과 자신 사이의 공간으로 뛰어들며 판도를 바꾸었다.
챙챙챙! 챙챙!
“와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관중들은 놀라서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유자재로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사내의 동작은 사람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주도권을 빼앗긴 에드윈이 이를 악물었다.
“크윽, 내가 쉽게 밀릴 줄 알고!”
전통 있는 무가에서 재능을 갖고 태어나 평생 천재 소리를 들었던 자신이었다.
저런 별 볼일 없는 놈에게 질 순 없었다.
에드윈은 눈을 부릅뜨고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검을 맞부딪칠수록 눈앞의 사내가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게 느껴졌다.
등과 팔뚝에 자꾸만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대체 이런 놈이 어디서 나타난 거지?’
사내의 검술은 어느 가문에게서도 본 적 없는 검술이었다.
가벼우면서도 파괴력있고, 빠르면서도 정확한.
하지만 에드윈을 가장 소름 끼치게 하는 것은 그 검술에서 묘하게 하이츠 가문의 검술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아들로만 물려 내려오는 바로 그 호흡법과 스텝이.
에드윈은 더욱 바짝 정신을 차렸다.
그는 지금껏 또래의 남자에게 한 번도 검술로 진 적이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내가 질 리 없어!’
에드윈은 허공으로 도약하면서 자신의 필살기인 광검술을 펼쳤다.
빛처럼 빠르게 검을 휘둘러 상대가 실제 공격 방향을 혼동하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겨우 기사 지망생 주제에 이 기술을 막을 수는 없겠지.
“받아라!”
에드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승리를 예감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는 곧바로 사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어?”
에드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끼기기긱!
검끼리 마찰하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이 부딪힐 때 잠깐, 가까이에서 사내의 미소가 보인 것 같았다.
그리고 에드윈은 깨달았다.
자신의 공격이 철저히 가로막혔음을.
‘이걸 막았다고?!’
에드윈이 넋을 놓은 사이 그의 검은 튕겨 나가 저 멀리 땅에 박혀 있었고, 사내의 검이 그의 목에 닿아 있었다.
잠시 동안 경기장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모두가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진짜 천재는 에드윈이 아니라, 저 라니츠라는 사내라는 것.
“와아아아-!”
정적은 잠시 동안이었다.
이내 장내는 사내를 응원하는 우렁찬 외침으로 가득 찼다.
대회를 지켜본 사람들 중 아무도 그의 우승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올해 황실 근위대의 뱃지를 달 사람은 저 사람이야!”
“세상에, 너무 멋진 검술이었어요.”
그의 경기를 유심히 지켜보았던 근위기사 단장이 내려와 말했다.
“하하하! 올해는 뛰어난 인재가 있군.”
호탕하게 웃으며 사내의 어깨를 두드린 단장이 말했다.
“라니츠. 처음 듣는 이름인데. 아버지가 누구신가? 기사라면 내가 알지도 모르겠는걸.”
관중들의 시선이 사내의 입술로 모여들었다.
관중들의 시선이 사내의 입술로 모여들었다.
모두가 천재를 길러낸 아버지와 스승을 궁금해 했다.
그때 사내가 한 손을 들고 모두 앞에 나섰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소년의 목소리처럼 맑고 높았다.
놀라운 실력을 가진 우승자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목소리에 다들 당황하는 찰나였다.
투구 머리 사내에게서 폭탄 같은 선언이 터졌다.
“제 진짜 이름은 라니츠가 아닙니다.”
……?!
순식간에 상황이 심각해졌다.
본디 황실 기사단 토너먼트는 준귀족 이상만 참가할 수 있다.
기사단장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평민이 신분을 속이고 참가했다는 건가?”
라니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백작가의 자제. 하지만 정식으로 대회에 참여할 수 없어서 이렇게 신분을 감추게 된 겁니다.”
단장이 안달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서 가문과 본래 이름을 밝히게!”
“저는…….”
사내가 관중석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아리엘과 다이아나가 앉아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역시나 관중석에 앉아있는 하이츠 백작을 눈에 담았다.
이윽고 그의 말문이 열렸다.
“제 성은 하이츠입니다.”
……!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하이츠? 하이츠라고? 백작가에 다른 아들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사생아?
모두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에드윈이 분개하며 나섰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순간, 사내가 손을 들어 에드윈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머리에 쓴 투구를 벗었다.
투구 안에서 물색의 긴 머리채가 출렁이며 흘러내렸다.
“제 이름은 세실 하이츠. 하이츠 가의 장녀(女)입니다.”
그 순간 장내는 물을 끼얹어 맞은 듯 조용해졌다.
* * *
지척에서 여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두 오라비 란셀과 에드윈은 충격에 빠졌다.
곧 뛰어 내려온 하이츠 백작도 가까이에서 세실의 얼굴을 확인하고 파랗게 질려 굳어버렸다.
“세실.”
이미 모두가 듣고, 보아버린 상황이었다.
이제 귀족 사회 모두가 알게 되었다.
검을 배운다는 하이츠 가의 괴짜 장녀가 황실 기사단 토너먼트에서 오빠들을 꺾고 우승했다는 사실을.
당황한 근위 기사단장이 세실과 하이츠 백작을 번갈아 보았다.
“저…… 그, 그러니까 영애는 왜 토너먼트에 참가한 거지?”
세실에게서 또박또박 대답이 떨어졌다.
“기사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기사단장은 그가 본 어떤 기사 지망생보다 세실의 눈빛이 살아있다는 걸 느꼈다.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사람은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사가 되게 해주십시오.”
기사단장은 난감해졌다.
토너먼트 우승자가 기사 서임을 받는 건 맞았다.
단, 그 우승자가 여자만 아니라면.
솔직히 말해 그는 라니츠가 평민 남자였다 해도 입단시켰을 것이다.
워낙 실력이 뛰어났으니까.
아들이 없는 기사 가문에 양자로 입적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자가 기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결국, 그는 아까운 입맛을 다시며 결정을 내렸다.
“여자는 기사가 될 수 없네.”
기사단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이츠 백작이 세실의 팔을 낚아챘다.
“아버-”
세실이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철썩!
하이츠 백작이 세실에게 손을 휘둘렀다.
모두 앞에서 거세게 뺨을 맞은 세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거냐!”
백작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세실의 맞은 뺨이 금방 붉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아버…… 지?”
매번 기사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무시한 아버지였다.
여자는 검술을 아무리 배워도 남자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남자들을 뛰어넘는 실력을 입증했으니 조금은 다르게 봐 줄 줄 알았다.
똑같이 하이츠 가문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까 조금쯤은.
‘자랑스러워 해주실 줄 알았는데…….’
세실은 충격 때문에 숨을 헐떡였다.
“세실, 얼른 아버지께 잘못을 빌어라.”
오늘 경기에 참여하지 않은 첫째 오빠가 꾸짖듯 말했다.
“란셀과 에드윈에게도 사과해. 너 하나 때문에 오빠들에게 이 무슨 망신이냐.”
백작이 억지로 화를 누른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이제 사람들이 우리 가문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고작 계집애한테도 진 남자들이라고 기억할 거 아니야!”
하이츠 백작이 씩씩거리며 벌게진 얼굴을 문질렀다.
“애당초 왜 말도 없이 토너먼트에 참여해서는…….”
세실은 눈을 천천히 들었다.
“미리 알렸다면요?”
“당연히 못 나가게 막았겠지. 네 혼사가 다 막히니까!”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결국 아버지는 재능이 얼마나 뛰어 나든, 얼마나 강하든 딸인 자신이 기사가 되는 걸 반대했을 거라는 얘기였다.
말로는 네가 남자들보다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해놓고.
‘나는 가족들에게 내 실력을 입증하고 싶었을 뿐인데…….’
하이츠 백작이 세실을 세게 잡아끌었다.
“잔말 말고 따라 나와라.”
그 모습을 본 아리엘과 다이아나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세실이 질질 끌려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자리에 앉아 보고 있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따라 나가기에는 세실의 가족일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장내가 혼란한 틈을 타, 가면을 쓴 낯선 귀부인이 아리엘에게 접근한 것은 그때였다.
‘어? 저 부인은……?’
다이아나는 미간을 살짝 모았다.
아까 마주쳤던 그 귀부인이 틀림없었다.
귀부인의 손에는 파티장 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음료 잔이 들려있었다.
꺼림칙한 기분에 다이아나가 움찔하는 순간, 귀부인이 아리엘의 드레스 자락에 음료 잔 속의 액체를 끼얹었다.
다이아나가 크게 비명을 질렀다.
“꺅! 이게 뭐하는 짓……!”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아리엘에게 끼얹어진 음료는 바닥으로 흘러내려 원형의 마법진을 이루었다.
“아리엘라!”
옆에 있던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손을 뻗는 찰나-
아리엘은 마법진에 의해 이동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쨍그랑.
그리고 아리엘에게 음료를 부은 가면 여인은 잔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루시안은 곧장 아리엘에게 음료를 끼얹고 쓰러진 가면 여인의 목을 붙잡았다.
응집된 분노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이를 갈며 새어 나왔다.
“대답해라. 아리엘을 어디로 이동시킨 거지?”
“큭, 저는 모, 모르…….”
더듬거리는 여자에게서 가면을 벗겨내자 황궁에서 일하는 하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녀임을 알아본 다이아나가 입을 열어 추궁을 하려 할 때였다.
벌벌 떨던 하녀의 눈동자와 입술이 검게 물들었다.
다이아나는 경악해 물러났다.
“무슨……?”
갑작스레 축 늘어진 하녀가 손쓸 틈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하녀를 사주한 자가 미리 그녀의 몸속에 독을 심어놓았던 듯했다.
콰앙-!
파티장의 문이 열리고 바깥을 지키고 있어야 할 근위대 기사들이 떼로 난입해 들어온 것을 그때였다.
“뭐 하는 짓인가!”
기겁한 황제가 외쳤지만 근위 기사들에게 그 외침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들의 눈은 모두 탁하고 초점이 없었다.
게다가 움직임은 마치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같았다.
근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아악!”
“꺄아악!”
근위 기사들이 무기를 들고 위협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안에 모인 사람들은 무방비한 상태였다.
황궁 무도회에는 무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외인 것은 라카트옐 뿐.
마티어스가 먼저 검을 소환하고 앞으로 나섰다.
“여긴 내가 맡지. 루시안 너는 아리엘을 찾아라.”
마티어스가 꼭두각시 근위병들을 막는 동안, 루시안은 소드 마나로 앞을 막는 것들을 날려버리며 회장을 빠져나갔다.
한편, 내부에 있던 사람들 중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있었다.
바로 토너먼트에 참가했던 기사 지망생들이었다.
그 중 세실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검을 들었다.
난입한 근위병들은 다 정식으로 서임을 받은 기사들이었기에, 사실 기사 지망생들은 그들에게 실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토너먼트에서 활약한 지망생들이 꼭두각시 근위 기사들에게 당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세실은 소드 마스터인 네드 밑에서 오랫동안 훈련받아왔기에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검을 휘둘러 근위병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폐하, 황후 마마! 이리로 피하십시오! 여성분들, 이리로!”
세실은 근위 기사들을 가뿐히 쓰러뜨리며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의 지도에 따라 사람들이 한군데로 모여들었다.
세실 하이츠의 활약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한편, 마법진에 의해 강제로 이동된 아리엘은 어두침침한 풀숲에 떨어졌다.
“성공이다. 공격해!”
그녀가 떨어지자,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 무리가 아리엘을 향해 무차별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다급하게 방어 주문을 외쳤다.
“에이션트 쉴드!”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쉴드에 막혀, 공격 마법구가 스르륵 흩어졌다.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이런 짓을 벌일만한 상대는 ‘그’뿐이야.’
라카트옐의 숙적, 타락.
마수 전쟁을 일으킨 걸로도 모자라 승전 무도회까지 침입하다니.
대체 라카트옐을 언제까지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는 거지?
아리엘의 가슴속에 분노가 솟아올랐다.
라카트옐은 안 돼.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은 반드시 내가 지킬 거야!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마법사 무리를 눈에 담았다.
과거, 아리엘이 무리에 속해있을 때 보았던 타락한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어린 아리엘에게 무리하게 공격 마법을 쓰게 해 그녀를 차례차례 망가뜨렸었다.
그러면서도 다 네가 약해서 그런 것이라고 속이며 착취했었지.
아리엘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아.’
그녀는 쉴드를 해제하고, 텔레포트를 이용해 그들과 멀리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손에 거대한 마법구를 만들었다.
당신들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과거의 당신들을 알아.
당신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스크롤 그라운드!”
아리엘은 손에 만든 마법구를 마법사들을 향해 흩어 날렸다.
콰콰쾅-!
원소 마법의 힘으로 땅이 요동치면서 마법사들의 공격 축이 흔들렸다.
아리엘은 그 틈을 타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화염 마법의 창을 마법사들에게 내리꽂았다.
마법사들 몇이 힘을 잃고 나가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리엘은 기회를 봐서 루시안과 마티어스에게 돌아가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여기가 어디지?’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주변의 사물을 바로 캐치해냈다.
‘황궁 안, 외진 숲이구나. 멀리 오지 않았어.’
애초에 작은 음료수 잔에 담을 수 있을 만큼의 마법진으론 멀리 오게 만들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마법사들에게서 톱날처럼 날카롭고 시커먼 공격 마법구가 날아왔다.
“윈드 블래스트.”
그녀는 바람 마법을 발동해 그 마법구들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용암이 떨어지는 인페르노 마법으로 마법사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쯤이면 됐어. 이제 추격을 따돌리고…….’
콰앙.
그때, 엄청난 충격파가 아리엘을 덮쳤다.
아리엘은 뼈가 부서질 듯한 충격을 느끼며 땅으로 추락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보니 거대한 검은 기운이 그녀를 지면에 내리누른 채 사슬처럼 엮고 있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가시처럼 몸을 파고들었다.
아파, 너무 아파.
참고 싶어도 저절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벗어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마나의 구를 만들려는데, 길고 음산한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망토 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얼굴.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기운.
‘'그'야. 타락이야.’
아리엘은 방금의 충격파가 타락의 능력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뒤틀어진 마름모꼴의 불길한 보석이었다.
저건…….
‘운디르의 저주!’
과거 그녀의 삶을 산산조각냈던 저주의 보석이었다.
아리엘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끔찍한 과거의 잔상에 몸이 떨렸다.
싫어. 안 돼. 저것만은.
타락은 저것을 아리엘의 심장에 심은 뒤 그녀를 자기 뜻에 완전히 물들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아리엘을 억지로 조종하는데 사용했었다.
‘제발……!’
운디르의 저주를 손에 쥔 타락이 다가왔다.
타락의 망토 사이로 길게 파인 기괴한 입이 드러났다.
“드디어.”
그는 지금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 소름 끼치는 웃음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찢어 올렸다.
그리고 결박된 아리엘에게 운디르의 저주를 꽂아 넣기 위해 그것을 치켜들었다.
아리엘은 사지가 찢기는 고통을 견디며 반항했다.
“아아악……!”
고통 때문에 눈물이 엉망으로 흘러나와 시야를 방해했다.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운디르의 저주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머릿속이 새까만 절망으로 잠식됐다.
절망 속에서 거센 의문이 소용돌이쳤다.
‘왜 나지?’
전혀 모르겠어.
왜 나에게 이토록 집착하는 거야?
나는 그냥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과거에도 지금도 나에게 접근했지.
과거의 나는 라카트옐과 전혀 상관없는 존재였는데도.
대체 내가 뭐기에?
내가 무슨 가치가 있어서?
운디르의 저주가 그녀의 가슴에 닿기 직전, 외부로부터 큰 소음이 났다.
아리엘에게만 집중하고 있던 타락이 민첩하게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마법사들을 베고 있는 듯 검이 움직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광기로 가득 찬 기세가 폭주하듯이 밀려들었다.
기세의 주인을 알아챘는지, 검은 망토 속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어떻게 벌써……!”
그리고 타락의 시선이 아리엘의 손목으로 향했다.
루시안이 걸어준 마정석 팔찌가 있는 쪽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곤 신음하는 듯한 끼긱 소리를 낸 타락이 휙 망토를 휘둘러 허공으로 솟구쳤다.
마치 기세의 주인과 마주치는 것을 기피하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아리엘에게 타는 듯한 고통을 주며 그녀를 결박하고 있던 검은 기운도 서서히 흩어졌다.
“아리엘.”
들려오는 건 루시안의 목소리였다.
아리엘은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그쪽을 간신히 바라보았다.
* * *
타락은 간발의 차로 놓쳤지만, 주위의 마법사들을 모두 해치운 루시안은 폭주하고 있던 기세를 가라앉히며 다급히 아리엘을 안아 일으켰다.
“너, 다친 데는……!”
루시안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그녀의 얼굴을 더듬으며 살폈다.
작은 얼굴에 엉긴 눈물을 보자, 아리엘을 위해 겨우 억누른 살기와 광기가 되살아나 그의 눈에 일렁였다.
아리엘이 주위를 보려는 듯 고개를 돌리는 걸 그가 억지로 막았다.
“보지 마.”
주변에는 마법사 무리가 산산조각 난 채 흩어져 있었다.
아리엘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아니었다.
그녀를 위해 죽인 것들이라 할지라도.
아리엘이 호흡을 할딱거리며 가냘프게 속삭였다.
“나 어떻게, 찾았, 어요……?”
루시안은 옅게 신음을 내뱉고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눌렀다.
“마정석, 마정석 팔찌로.”
“아…….”
마정석의 주인은 제가 만든 마정석의 위치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아리엘이 아기 프라카티아 나무를 파냈던 자리에 그녀의 마정석을 묻어놓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자리를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아리엘이 갑자기 흑, 숨을 들이쉬며 몸을 웅크렸다.
“……아파, 아파요.”
그녀가 식은땀을 흘리며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그 순간, 루시안은 가슴에 칼을 맞은 듯 아찔해졌다.
후두둑.
아리엘이 기침과 함께 뱉어낸 건 한 줌의 붉은 액체였다.
선명한 색의 피.
그는 뚝뚝 끊어지는 단어들을 간신히 뱉어냈다.
“잠깐, 피가, 아니…….”
평생 피에 무뎌지고 무감해진 삶이었지만 이 피는 아니었다.
아리엘의 피만은.
콜록거리며 남은 피를 뱉어낸 아리엘이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주변의 소음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녀는 결국 까무룩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파티장 쪽의 소란을 정리하고 온 마티어스와 히스가 루시안의 기세를 쫓아 도착했다.
“아리엘!”
“아리엘라.”
그리고 아리엘의 연보랏빛 드레스를 적신 피를 본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 * *
아리엘이 급하게 옮겨진 곳은 황궁 안의 여름 별궁이었다.
피를 토한 뒤 갑작스레 열이 펄펄 끓어서 멀리 데려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공가 주치의 밀러가 불려왔고, 태후가 황궁 의원들도 모두 불러왔다.
아리엘이 앓는 동안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녀 옆을 지켰다.
아리엘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하루가 꼬박 지난 다음날 해질녘쯤이었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는 중에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피를 토한 거야. 또 열은 왜 아직 가라앉질 않는 거고! 원인을 모른다니, 아무 원인이 없이 이럴 수가 있나?”
억누른 듯한, 그러나 격앙된 목소리.
“심장에 통증도 몇 번이나 있었다면서 그것도 원인이 없다니. 말이 되질 않잖아!”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어라.”
“그쪽이나 나가.”
“밖에서 기세 좀 가라앉혀. 애한테 안 좋다.”
희미하게 두런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린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니 목에서 갈증이 느껴졌다.
아리엘은 살짝 뒤척이며 낑낑거렸다.
그러자 근처에서 다가오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리엘라.”
마티어스의 목소리.
그 뒤로 이마에 닿는 서늘하고 큰 손.
아리엘이 기운 없이 콜록거리자 마티어스가 그녀를 살짝 일으켜 세운 뒤 물잔을 입술에 대 주었다.
“마티어스님.”
아직도 열이 끓는지 마티어스의 손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미지근한 체온에 이마를 맡겼다.
아프니까 마음이 약해져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녀가 가만히 그의 손에 머리를 부비자 마티어스가 나직이 한숨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 괜찮으냐?”
아리엘은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은 아직도 아프지만 정신을 잃기 전만큼은 아니었다.
“네가 깨어나지 못해서 루시안 녀석이 걱정을 많이 했다. 나도 마찬가지고.”
마티어스는 낮은 목소리로 이번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황궁 무도회 안에 타락이 매수한 하녀가 가면을 쓰고 들어와 있었더군. 네게 음료를 엎지른 여자 말이다. 때맞춰 나나, 루시안 녀석의 발을 묶기 위해 근위 기사들에게 조종 마법을 걸어두었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기척에 밝은 라카트옐조차도 속일만큼 타락은 이번 일에 공을 들여 철저히 준비했다.
그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아리엘라 라카트옐.
아리엘은 입술을 달싹이다 작게 말을 꺼냈다.
“타락이 저를 납치하려 했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노리고 있었어요.”
전투라면 얼마든지 해낼 자신이 있었다.
아리엘은 라카트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운디르의 저주를 박은 채 조종당하는 것만은…….
끔찍하고 무서웠다.
과거의 자신이 그 상태로 라카트옐 대공가를 공격했었기 때문이었다.
내려깐 그녀의 눈에 맑은 액체가 고였다가 툭 떨어졌다.
“타락이 어째서, 저를 노린 걸까요?”
그녀의 눈물을 본 마티어스가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아리엘의 머리를 조심히 감싸며 제게로 끌어당겼다.
“쉬, 괜찮다. 아리엘라.”
아리엘을 안아준 그가 눈을 힘주어 감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에게 이야기해줘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 * *
마티어스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그건…… 글쎄. 우리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도 모든 게 처음이니.”
그가 가볍게 아리엘의 눈가를 훑어 눈물을 닦아냈다.
“드래곤의 에고에는 방대한 세월이 들어있지. 하지만 이런 일은 없었어.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게다.”
마티어스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리엘. 초대 드래곤이 숨겼다고 했던 세 가지, 기억나니?”
마티어스에게 머리를 기댄 채, 아리엘이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네, 두 눈과 심장이요.”
“그래, 라키엘은 두 눈을 뽑은 뒤 [공간] 속에 숨겼다. 그리고 심장은 [시간] 속에 숨겼지.”
아리엘의 속눈썹에 남은 눈물까지 닦아준 마티어스가 말을 이었다.
“라카트옐은 오랫동안 그것들을 찾아 헤맸어. 타락이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끝내 두 눈을 찾아냈다.”
마티어스가 자조하듯 웃었다.
“몇천 년의 시간을 가진 우리가, 제국 안을 샅샅이 뒤진다면 못 찾아낼 것이 있을까.”
아리엘은 마티어스나 루시안과 닮은 선대 라카트옐이 거울 호수 속에서 드래곤의 눈을 찾아내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오랜 시간 헤매고 또 헤매다가 찾아냈을 것이다.
자신들의 일부를.
마티어스의 낮은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하지만 심장만은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짙은 그림자가 묻어났다.
“그래…… 라키엘이 말 그대로 [시간] 속에 숨겼다면, 얼만큼의 시간 후에 심장이 나타날지조차 알 수 없었지.”
기약 없는 기다림.
그들의 허무하고 괴로운 시간들이 느껴져서 아리엘은 다시 울컥했다.
“우리는 기다렸지. 오랜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포기했어. 나는 내 대에서 이 가문을 끝내려 했고, 루시안 녀석도 마찬가지였지. 그런데…… 심장이 나타난 거다. 우리 앞에.”
그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6년 전 겨울, 대공저 앞에 쓰러진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
아리엘은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마티어스에게 기댔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말이 목에서 막혀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말씀은…….”
마티어스의 푸른 눈이 아리엘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래, 아리엘라. 네가 그 심장이란다. 우리가 오랜 세월 찾아 헤맸던 라키엘의 마지막 조각. 크림슨 하트.”
* * *
아리엘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크림슨 하트라니.
내가 라키엘이 숨겨둔 드래곤의 심장이었다고……?
어떻게 그런……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걸까?
그때,
과거에 겪었던 일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차례로 그녀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의문스러웠던 타락의 행동과 사건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타락이 나를 원했던 거야.
‘나를 조종해서 라카트옐을 해칠 무기로 쓰려고…….’
예전에 브루노어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드래곤은 드래곤의 일부로만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과거에 그녀를 대공가로 침입시켰던 것도, 이번 생에서 여러 번 그녀를 손에 넣으려고 한 것도.
다 그걸 원해서였던 것이다.
라카트옐을 해칠 무기.
드래곤의 심장, 크림슨 하트를.
아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마티어스가 그녀의 조그만 손 위에 큰 손을 덮었다.
“무서워 마라. 절대 그놈들이 널 해치지 못하게 할 테니.”
아리엘은 작게 도리질을 쳤다.
물론 자신이 크림슨 하트라는 사실에 충격받긴 했지만 그녀가 두려워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을 해칠 수도 있는 자신의 존재가 무서웠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두려웠다.
오랜 시간동안 입안에서만 말을 굴리던 아리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마티어스님.”
“그래.”
“저는…… 라카트옐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아리엘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마티어스가 시선을 떨구는 아리엘의 시야에 맞춰 천천히 몸을 숙였다.
“전 무기잖아요. 위험한데 왜 집에 들이셨나요?”
단지 적에게 빼앗겨서는 안 될 존재였다면, 그냥 거울 호수처럼 먼 곳에 두고 지키기만 해도 되었을 텐데.
“어째서 집에 들이고…… 제게 그렇게 잘해주셨나요?”
오래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왜…… 저에게 웃어주셨나요?
왜 저를 아껴주셨죠?
어째서 그렇게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나요?
인간에게는 감정을 느낄 수도 없다면서…….
아리엘이 약한 목소리로 묻자, 잠시 침묵하던 마티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여러 번 들어왔겠지. 라카트옐은 감정이란 걸 느낄 수 없다고.”
마티어스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옳다. 인간에게는 느낄 수 없어. 하지만 너만은 예외다.”
‘……!’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숨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마티어스의 짙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마티어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인간이지만, 동시에 크림슨 하트이기도 하니까.”
아리엘은 여전히 숨을 멈춘 채 가만히 있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감정이라는 게 어떤 건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우리가 네게 뭔가를 느낀다는 것이지. 너로부터 오는 따스함, 온기 같은 것들을.”
마티어스가 이것만은 확실하다는 듯 눌러 말했다.
“너는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다. 아마도 우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 테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리엘은 마티어스를 신뢰했다.
머리로 판단하기 이전에 마음으로 믿고 있었다.
그가 바위처럼 단단하게 말을 맺었다.
“아리엘라. 너는 영원히 우리의 약점이자, 사랑스러운 존재일 거다.”
마티어스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오래전부터 아리엘의 마음속에 살던 작은 얼음 조각 하나가 파삭 깨지며 녹아내렸다.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이 내게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불안하고 무섭던 마음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그라졌다.
대공자비라는 자리가 아니라면 자신은 이 사람들에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여태 그녀의 머리 한구석에 작게 존재하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마티어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리엘은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번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럼…… 7년이 다 지나도, 루시안과의 결혼이 끝나도…….’
이들에게 내가 아무 의미 없는 존재는 아닌 거구나.
상관없어지지…… 않겠구나.
아리엘의 뺨에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마티어스가 흠칫 놀라며 그녀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초대 드래곤이 숨겨놓은 심장이라는 사실마저도 지금만큼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자신에게 진실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
소리없이 흐르기만 하던 눈물이 점차 흐느낌으로 변하고, 종내에는 어린아이 같은 서러운 울음으로 바뀔 때까지.
마티어스는 말없이 아리엘의 앞을 지켜주며 고요히 서 있었다.
* * *
아리엘은 며칠 만에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신이 피를 토했었다는 건 알았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과거엔 거의 매일 겪었던 일인걸.’
루시안의 닦달에 주치의 밀러와 브루노어가 불려와 검사했는데도 역시 몸에는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조그만 게 피를 토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다시 살펴봐.”
아리엘은 다시 검사해보라고 무섭게 다그치는 루시안을 열심히 말렸다.
“나 괜찮아요, 루시안.”
하지만 아리엘이 짹짹거리며 말리는데도 루시안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브루노어가 조심스럽게 소견을 꺼내놓았다.
“아무래도 인페르노 마법을 쓰신 게 원인인 듯합니다.”
화염 마법 중 가장 고등 마법인 인페르노는 마나가 많이 닳는 범위 마법 중의 하나였다.
“그 마법을 쓰다 보니 몸이 무리해서 그런 증상이 나타나신 게 아닐까 싶은데요. 몸에 다른 이상은 확실히 없으시니…….”
아리엘의 몸을 아무리 검사해보아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주치의 밀러도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게 굳은 얼굴로 듣고 있던 루시안이 신음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리엘의 양 뺨을 감싸 쥐고 말했다.
“아리엘라. 다신 그 마법 쓰지 마.”
아리엘은 심각한 얼굴의 그를 보며 머리를 갸웃했다.
‘루시안, 많이 놀랐나? 하긴, 사람이 피 토하는 걸 바로 눈앞에서 봤으니…….’
끝내 루시안은 아리엘이 쾌차했는데도 불구하고 며칠이나 그녀를 어린애마냥 들고 다녔다.
그때마다 아리엘은 부끄러워서 매번 최선을 다해 반항했다.
대공자비의 위엄은요? 마님으로서의 내 위엄은 어떡하고요?
“내려줘요, 루시안. 내려달라니까요.”
“싫어. 안심이 안 돼.”
아, 정말!
루시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리엘을 안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저택의 사용인들은 함박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자 어깨 위에 병아리!’
어휴…….
결국 아리엘은 위엄을 지키는 건 다 틀렸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포기해야 했다.
* * *
한편, 좋은 소식도 있었다.
바로 세실이 정식 기사 작위를 받게 된 것이다.
세실은 무도회 날 조종당하는 근위대 기사들이 난입했을 때 그들을 제압하며 눈부시게 활약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세실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위급한 상황에서 세실 덕에 목숨을 건진 황제는 그 자리에서 직접 그녀를 불러 말했다.
“영애의 활약은 치하받아 마땅하다.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세실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믿기지 않는 황제의 말에 그녀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아주 어릴 적 오빠들을 따라 처음 목검을 잡았을 때부터 세실의 소원은 늘 똑같았다.
정식으로 서임 받은 기사가 되는 것.
하지만 그녀가 토너먼트에서 우승하기까지 했는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소망이었다.
‘이걸 소원으로 말해도 되는 걸까?’
세실이 흔들리는 눈으로 단상 위를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태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마치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려는 듯이.
그 순간, 기사가 되기 위해 훈련하고 또 훈련해왔던 지난날들이 세실의 눈앞을 지나갔다.
세실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그리고 황제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기사가 되는 것뿐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말을 마친 뒤 세실은 질끈 눈을 감았다.
한 가지만을 가슴에 품고 달려온 자신의 꿈이 실현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때, 여전히 세실이 기사가 되는 걸 결사반대하는 세실의 아버지가 나섰다.
“화, 황제 폐하. 황공하오나 여기사는 법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흐음.”
황제는 고민된다는 듯 손가락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그때, 옆에 있던 태후가 황제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했다.
태후의 말을 듣고 하이츠 백작과 세실을 번갈아 바라본 황제가 잠시 후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
“맞네. 하지만 토너먼트 우승자가 기사로 임명받는 건 법에 존재하지. 세실 영애는 토너먼트 우승자고.”
황제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황제인 나와 황족들, 많은 귀족들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는가.”
“그, 그건…….”
하이츠 백작의 말문이 막혔다.
황제가 다시 세실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떤가, 세실 하이츠 영애? 제국의 부름에 응하겠나?”
세실은 이를 악물고 서 있다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거추장스러운 망토 자락을 들어 올린 그녀는 태후와 황제, 황후 앞에 기사 식으로 무릎을 꿇었다.
망토 자락을 잡은 손이 떨렸다. 반면 입술에서는 놀랍도록 또렷한 말이 흘러나왔다.
“제국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이츠 가 식구들은 모두 입을 벌린 채 경악한 표정이었다.
“세실, 무슨 망측한 말이냐. 당장 취소하고 용서를 빌어라.”
황제는 세실을 윽박지르는 하이츠 가 사람들을 앞으로 불렀다.
하이츠 백작과 세실의 세 오빠, 그리고 세실까지 황제 앞에 서게 되었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세실의 오빠들을 한 명씩 훑었다.
“안톤 하이츠. 에드윈 하이츠. 란셀 하이츠.”
천천히 세 영식의 이름을 부른 황제가 마지막으로 백작을 보았다.
황제 또한 세실이 아비에게 뺨을 맞으며 끌려가는 것을 지켜본 사람 중 하나였다.
“하이츠 가문은 유서 깊은 무가지만, 황제에게 직접 서임 의식을 받은 적은 없었지. 그렇지 않나, 백작?”
“그, 그렇습니다.”
“그럼 하이츠 가문에서 짐에게 직접 서임 받는 기사가 나온다면 어떻겠는가?”
“그건…… 정말 한없이 영광스러운 영예이오나…….”
황제가 허옇게 질린 하이츠 백작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자랑스러워하게, 백작. 오늘 그 위대한 기사가 탄생할 테니.”
마침내 황제가 세실을 불렀다.
“세실 하이츠. 검을 들고 나오라.”
세실은 검을 들고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망토를 끌며 나와 세실의 검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세실 하이츠의 기사 서임식을 거행하겠다!”
황제가 세실을 응시하며 말했다.
“세실 하이츠. 기사의 맹세를 하라.”
세실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두방망이질 쳤다.
오빠들 옆에서 귀동냥으로 익힌 뒤에 하도 거듭해, 잠꼬대를 하면서도 외울 수 있는 기사의 맹세였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검을 받들고 힘주어 맹세를 시작했다.
“기사도를 지켜 약자를 보호하고, 자신을 갈고 닦아 빛내며, 눈을 감는 날까지 정의로운 도리를 지키겠습니다.”
선명한 세실의 눈빛을 본 황제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세실의 머리와 어깨에 차례로 검이 내려앉았다.
“빛의 여신과 수호룡의 이름으로 세실 하이츠를 기사에 임명하노라.”
맹세의 의식이 모두 끝나자, 황제가 세실의 어깨를 짚었다.
“그대에게 기사의 이름을 허락한다. 세실 경.”
세실 경.
세실은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은 기사의 호칭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것을 힘주어 참았다.
그런 세실의 옆에서 하이츠 백작과 영식들은 혼이 나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제국 최초의 여기사가 탄생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거미 알에서 나비가 태어나거나, 쥐의 새끼가 곰인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태후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세실 경에게 지금 즉시 보직을 내리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황제?”
황제가 자신의 손에 들린 국왕의 홀을 태후에게 건넸다.
“어마마마의 뜻대로 하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태후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세실 하이츠를 근위대 기사로 임명하고, 특별히 미르셀라와 미카엘라 쌍둥이의 직속 호위를 맡기겠다.”
“……!”
그 말이 미친 파급력은 대단했다.
여자가 기사로 임명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황족의 직속 호위를 맡다니?!
모두가 헉 소리를 내며 놀랐다.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세실의 동공도 마구 흔들렸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되물었다.
“정말 제가 그 임무를 맡아도 되겠습니까?”
태후가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엘에게 세실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던 태후는 이미 세실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근위대의 뱃지를 달아주기 위해 세실을 가까이로 부른 태후는 낮은 목소리로 세실에게 말했다.
“……쌍둥이들에게는 감춰야 할 것이 있어. 그래서 비밀을 지켜주면서 호위할 사람이 필요하지. 경이라면 이 일을 쉽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믿네.”
비밀?
멈칫했던 세실은 곧장 또박또박 답했다.
“물론입니다!”
“좋아. 그리고 황궁에서 실력과 명예를 쌓은 후 푸른 사자 기사단으로 가도록 해. 꿈을 펼치게, 세실 경.”
작은 목소리로 말을 맺은 태후가 세실에게 근위대 뱃지를 내려주었다.
세실은 자신의 근위대 뱃지를 보며 뛰는 가슴을 세게 눌렀다.
그렇게 세실 하이츠는 제국 최초의 여기사가 되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리엘은 다이아나와 부둥켜안고 꺅꺅거리며 외쳤다.
‘세실 멋있어!’
어디 기사 문학 로망스에서나 나올 법한 스토리가 아닌가.
남몰래 키워온 실력으로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하고, 여성 최초로 기사 작위를 받은 검사라니.
‘할마마마 최고!’
두 친구는 지체하지 않고 세실의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
세실이 곧 쌍둥이들 호위를 위해 황궁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세 사람은 대공가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밤을 샐 수 있는 '파자마 파티'를 하기로 했다.
물론, 5단 트레이에 가득 쌓인 디저트와…….
창고에서 아리엘이 몰래 가지고 온 빈티지 와인 한 병과 함께.
* * *
파자마 파티가 열린 아리엘의 방은 여전히 공주풍의 분홍색이 가득한 방이었다.
파스텔톤의 가구와 레이스 은사 커튼, 보석줄이 달린 샹들리에.
동화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이 환상적인 분위기도 여전했다.
그 방 한편에는 마티어스가 선물했던 라카트옐 저택 모양 인형의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공가는 여전히 아리엘을 아기처럼 생각해서, 그녀는 저택에서 영원히 시집보내지 않을 막내딸 취급을 받고 있었다.
파자마 파티를 하기 위해 바닥에는 뒹굴 수 있는 보드라운 털 러그가 넓게 깔렸고, 기댈 수 있는 쿠션이 잔뜩 준비됐다.
멋지게 근위대 기사 제복을 입은 세실이 도착하자마자, 아리엘은 세실에게 달려가 그녀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세실, 세실! 정말 잘했어. 네가 자랑스러워.”
그 말을 들은 세실은 가슴이 부서질 듯 뭉클해졌다.
다른 어떤 말보다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잘했어. 자랑스러워. 힘내. 내가 널 응원할게.
비록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들과 여동생에게는 듣지 못했을지라도,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세실에겐 있었다.
“아리엘…….”
이어 다이아나도 세실을 안아주며 새침하게 말했다. 왠지 목소리가 약간 젖어 있었다.
“세실 너…… 좀 멋있더라? 5초쯤 내 이상형이었어.”
결국, 세 사람은 깔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각자 잠옷으로 갈아입고 난 뒤에 세 친구는 분홍색 털 러그 위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깊은 밤이 찾아왔다.
세실이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실 내 최종 목표는 푸른 사자 기사단이다. 하지만 곧장 들어가면 아리엘의 명예에 누가 될 거야.”
세실은 자신이 친분으로 푸른 사자 기사단에 들어갔다는 눈총을 받는 것보다, 아리엘이 사사롭게 친구를 기사단에 넣어줬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싫었다.
“그러니 황궁에서 더 실력을 키우고 올게.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하도록.”
세실이 아리엘의 조그만 손을 받쳐들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때까지 기다려 줘. 내 레이디.”
세실…….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의 눈이 울망울망하게 바뀌는 순간이었다.
옆에서 입을 꾹 틀어막고 있던 다이아나가 갑자기 으아앙 울음을 터트렸다.
“이게 뭐야. 안 울려고 했는데! 너무 감동적이잖아!”
깜짝 놀란 세실과 아리엘은 얼른 다이아나를 달랬다.
여태 삼총사의 맏언니 노릇을 톡톡히 해왔던 다이아나였지만 지금은 어린애처럼 둘에게 안겼다.
항상 도도한 다이아나도 오늘만큼은 감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세실이 노력해온 것을 지켜본 것이 수년이었다.
그런데 당당히 기사가 돼서 이런 아름다운 기사의 맹세를 하는 걸 보게 되다니.
‘게다가 그 맹세를 받는 게 내 귀염둥이라니!’
그렇게 한참을 울고 코가 빨개진 다이아나는 훌쩍거리며 민망함에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분위기를 풀어보려는지 세실이 제안했다.
“베, 베개 싸움할 사람?”
“나, 나!”
아리엘은 손을 들며 발딱 일어났다.
눈이 조금 부은 다이아나도 결연한 표정으로 베개를 집어 들었다.
* * *
베개 싸움은 세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세 사람이 든 것은 명백히 가로 세로 길이와 무게가 똑같은 흰색의 베개였다.
하지만 휘두르는 사람이 너무 달랐다.
세실이 휘두르는 베개는 마치 마나가 실린 검 같았고, 파괴력이 어마어마했다.
아리엘은 그나마 쉴드 마법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다이아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세실은 아리엘에겐 거의 베개 속 거위털만큼의 힘만 쓰며 헛방망이를 휘둘렀기 때문에, 다이아나만 전적으로 얻어맞았다.
퍼억.
다이아나는 세실의 베개 한 방을 맞자마자 부웅 날아가 푹신한 쿠션 더미에 넘어졌다.
“와…….”
세실 녀석, 힘 정말 세다.
새삼 정식 기사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끝내 베개 싸움의 승자는 세실이 차지했다.
“이익…… 이대로 끝낼 순 없어!”
하지만 그것은 다이아나의 호승심을 건드리는 결과를 낳았다.
다이아나는 말발로도, 두뇌로도 어디 가서 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교계의 여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게다가 절친이라지만, 동갑에 성격이 정반대인 다이아나와 세실은 앙숙 같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좋아, 세실. 이번에야말로 널 무너뜨리고 말 거야.”
……?
아리엘이 고개를 갸웃하자마자 다이아나가 호기롭게 말했다.
“결투를 신청하겠어, 세실 하이츠 경!”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착용하고 온 비단 장갑을 세실에게 던졌다.
“받아들이지.”
세실이 여유롭게 승낙하자, 다이아나는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 쿵 올려놓으며 선언했다.
“대결이야. 이번엔…… 이걸로!”
다이아나가 올려놓은 것은 아리엘이 주방에서 몰래 갖고 올라온 와인병이었다.
“주량 승부다, 세실.”
* * *
맹세코 아리엘이 꺼내온 건 와인 창고에 쌓여있던 아무 와인병이었다.
대공가엔 술을 즐기는 사람이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선물로 들어온 빈티지 와인들은 와인 창고에서 고요히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어떤 걸 가져가야 하지?’
아리엘은 살펴보다가 똑같은 병이 가장 많이 쌓여있는 것 중 하나를 살그머니 들고 올라온 참이었다.
그런데, 와인 오프너를 들고 씩씩거리며 와인병을 따려던 다이아나가 손을 우뚝 멈췄다.
“자, 잠깐만. 아리엘, 이거 뜯어도 되는 거야?”
“응? 수잔에게 살짝 물어봤는데 된다고 하던걸?”
다이아나가 입을 딱 벌렸다.
“말도 안 돼. 이, 이, 이거…… 263년 전에 단 열두 병만 생산해서 아직도 전설로 회자되는 와인인데?”
어어?
그럼 장식장에 얌전히 쌓여있었던 나머지 아홉 병은…….
다이아나가 자기 뺨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단 열두 병 만들어진걸, 두 병 빼고 다 모아놨단 말이야?”
라카트옐가 수집욕은 대대로 유명했다지만…… 도대체 대공가 콜렉션의 끝은 어디인가.
끝내 다이아나는 아리엘이 가져온 와인을 뜯지 못하고 포기했다.
“이런 전설을 뜯는 건 범죄야. 이거 말고 내가 선물로 가져온 거 마시자.”
세 친구는 다이아나가 가져온 고급 와인을 열고, 맛있는 디저트와 함께 먹기 시작했다.
베리가 듬뿍 올라간 진한 초콜릿 케이크와 떠먹는 산딸기 무스.
레몬즙, 생크림과 다진 과일을 넣은 크림치즈 디핑과 크래커.
각기 필링이 다른 트러플 초콜릿.
다이아나와 세실은 양심껏 아리엘에게는 술 대신 체리 주스를 밀어주었다.
“우리 애기는 이런 독한 술 먹는 거 아냐.”
아리엘은 아기 취급하는 친구들에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야, 나도 먹을 수 있어!”
주먹을 꼭 쥔 아리엘의 모습에 세실과 다이아나는 완전히 녹아버렸다.
으으, 너무 귀여워!
아리엘의 흰 밀빵 같은 뺨에 둥그렇고 촉촉한 눈망울로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을뿐더러, 지나치게 귀엽기까지 했다.
그들은 흐물흐물 웃으며 아리엘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오구오구 그랬쪄요?”
“몇 살만 더 먹으면 뭐든 다 해주겠다, 아리엘.”
다이아나와 세실은 주량 대결을 하기 위해 규칙을 정했다.
“정확히 한 잔씩 먹다가 먼저 쓰러지는 사람이 지는 거야.”
고개를 끄덕인 세실이 규칙을 추가했다.
“좋아. 그리고 이기는 사람이 오늘 아리엘 옆에서 자는 권리를 얻는 거다.”
응?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왜 갑자기 그렇게 되는 건데?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다이아나는 이미 승부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절대 질 수 없어…….”
“나야말로 질 수 없다. 궁에 들어가기 전에 꼭 아리엘 옆에서 자야 하니까.”
모든 영애들이 선망하는 사교계의 여왕인 다이아나.
그리고 모든 영애들이 동경하는 최초의 여기사, 세실.
두 사람이 아리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격돌하고 있었다.
“한잔 더.”
“나도!”
어느새 맛난 디저트들은 아리엘 앞에만 쌓여있고, 둘은 대결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아리엘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대결을 구경했다.
‘괜찮은 걸까, 세실, 다이아나…….’
저러다가 내일 못 일어나면 어떡하지?
그녀는 친구들의 몸을 위해 열심히 산딸기 무스를 떠서 그들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유, 이쁜 것!”
꼬박꼬박 무스를 받아먹던 다이아나가 아리엘을 답싹 끌어안아 마구 뽀뽀를 퍼부었다.
“내 귀염둥이는 여기도! 이쁘고! 저기도! 이쁘고! 사랑해!”
“다, 다이아나? 갑자기 뽀뽀를?”
혹시 취했나?
아리엘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 연지 자국을 찍은 다이아나가 불길하게 웃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세실에게 다가갔다.
“세실 너어,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지? 에잇, 이리 와!”
다이아나는 세실이 막을 틈도 없이 세실에게도 마구 뽀뽀를 했다.
“으윽, 다이아나. 저리 가라! 징그럽게.”
“징그럽다고 하면 더 할 건데? 오호홋!”
쪽쪽쪽!
‘……뽀뽀 귀신이다.’
아리엘은 취한 다이아나가 귀여워서 키득키득 웃어버렸다.
웃음소리가 들리자 다이아나가 다시 타깃을 바꾸었다.
“아리엘 너 다시 이리 와!”
“앗, 다이아나, 살려줘!”
다이아나의 뽀뽀 세례를 받으며, 아리엘은 세실을 힐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세실은 안 취했나?
“세실, 세실은 괜찮아?”
세실이 고개를 기웃했다.
“나? 난 안 취했다. 전혀 안 취했지. 원래 안 취하거든. 안 취했어.”
음…… 똑같은 말을 여러 번 하는 거 보니까 취한 거 같은데.
아리엘은 조심스레 다시 물어보았다.
“정말 괜찮은 거야?”
“응. 안 취했다. 전-혀 안 취했어. 안 취했고 말고. 이거 봐. 멀쩡하잖아.”
세실이 약간 나사 풀린 듯한 웃음을 짓더니 얼굴의 뽀뽀 자국을 문질러 닦았다.
‘세실, 완전히 헛손질인데…….’
설마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건가…….
‘뭐야, 엄청 취한 상태잖아!’
그렇게 주량 대결은 다이아나의 뽀뽀와 세실의 ‘안취했어’ 반복으로 막을 내렸다.
끝까지 버티다 거의 동시에 쓰러진 둘에게 아리엘은 조심조심 이불을 덮어 주었다.
“에휴.”
한숨을 폭 쉬고 잠든 친구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리엘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내 친구들 귀여워.’
주스만 마신 아리엘은 잠이 오지 않아서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 좀 쐬고 들어가야지.’
아리엘은 남관 중앙 테라스에 가서 테라스 문을 젖혔다.
그리고…….
“어? 루시안?”
그녀는 테라스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은 남편과 마주했다.
* * *
아리엘은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루시안. 뭐하는 거예요, 위험하게.”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 루시안을 테라스 난간 안쪽으로 낑낑 당겼다.
아리엘이 놀라서 허둥대자 루시안에게서 나른한 웃음 소리가 픽 새어 나왔다.
“떨어져도 안 죽는다니까.”
“그래도…….”
그래도 무서운데.
장난이라도 싫고, 농담이라도 싫어.
루시안이 다치거나 죽는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단 말이에요.
속으로만 말하며 그녀는 루시안의 팔을 더욱 꼭 잡았다.
“…….”
루시안은 불안한 듯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아리엘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넌 정말, 나를.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이 괴물을.
인간으로 여겨주는구나.
그런 것을 받는 느낌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아리엘을 빤히 보던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루시안은 표정을 굳힌 채 아리엘의 턱을 들어 올렸다.
“너. 이 입술 자국 뭐야?”
입술 자국?
아리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뺨을 만졌다.
그러다 금방 자국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 다이아나가 뽀뽀한 자국.’
다이아나는 아직 화장을 한 상태였기에 아리엘의 얼굴에는 연지 자국이 많이 생겨 버렸다.
물론 세실 얼굴에도 한 가득이었다.
아리엘은 눈을 깜박이다가 떠밀리듯 대답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친구들하고 놀다가요.”
루시안이 차가운 눈빛으로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그것들은 살고 싶지 않은 건가?”
아리엘은 화들짝 놀랐다.
앗, 다이아나가 위험해!
그녀는 얼른 루시안 팔을 껴안고 속사포로 말했다.
“뽀, 뽀뽀쯤이야 친구 사이니까 괜찮잖아요.”
루시안이 눈썹을 느리게 치켜올리며 살기를 띠었다.
“아니. 괜찮지 않은데.”
“당장 지울게요!”
아리엘은 서둘러 클렌징 마법을 발동해 얼굴의 연지 자국을 지웠다.
얼굴이 깨끗해지자 루시안의 표정이 미세하게 누그러졌다.
아리엘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휴 내쉬었다.
‘하마터면 다이아나가 죽을 뻔했어…….’
그때, 루시안의 손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다이아나의 연지 자국이 있던 자리에 그가 집착하듯 엄지를 눌러 쓸었다.
뚫어져라 보는 시선과 진득한 손길에 아리엘은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뭐, 뭐예요……?”
루시안이 낮게 혀를 차며 대답했다.
“남편으로서의 권리 행사.”
그리고 그가 뇌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국도 남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곤란하군.”
아리엘은 얼굴이 빨개진 채 속삭였다.
“루시안이 입술 연지를 바를 순 없잖아요. 바를 필요가 없이 색깔도 예, 예쁘고…….”
그가 새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제 붉은 입술 한쪽을 깨물었다.
“자국 내는 방법이 그것만 있는 건 아니지.”
‘……?’
무슨 소리지? 뭔가 위험하게 들리는데.
하지만 루시안은 딱히 다른 낌새 없이 그녀의 얼굴을 만지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와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있자니 아리엘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녀는 조용히 속눈썹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루시안을 좋아한다는 걸 루시안이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크림슨 하트에게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는 하지만,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잖아.
나를…… 여자라고 생각하긴 하는 걸까……?
다이아나나 세실은 루시안이 드래곤의 소유욕을 부리는 걸 애정이라고 착각해서 설레했지만, 아리엘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욕심을 냈다가, 지금의 행복마저 깨지면 어떡해.’
마음을 깨달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은 짝사랑만으로 괜찮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여태까지는 이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는데…….’
루시안이 자신을 좋아할 가능성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라카트옐은 인간에게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걸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라카트옐이 자신에게만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자, 가슴이 작은 희망으로 두근거렸다.
‘내가 크림슨 하트였다는 사실이 아직도 완전히 믿기지 않는걸…….’
한참 만지작거리던 루시안의 손이 떨어지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예전에 줬던 보석 달걀. 아직 가지고 있어?”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안이 선물 준 것에 대해 물어보는 건 처음 봐!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열성적이게 말했다.
“당연하죠. 루시안이 전쟁 가 있는 동안 자주 꺼내봤어요. 전쟁터에서 그런 건 어떻게 구했어요?”
루시안이 아리엘의 코끝을 가볍게 누르며 오만하게 대꾸했다.
“라카트옐에게 불가능은 없지.”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아리엘에게 선물했던 보석 달걀, 그 안에 숨겨놓은 걸 줄 날도 머지않았다.
‘유혹이고 나발이고 걷어치우고 이젠 던져보고 싶어졌으니까.’
지난번, 아리엘이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 앞에서 아프다는 말을 꾹 참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결심했다.
어둠 속에서 난간에 살포시 기대 선 아리엘을 보며 루시안은 입을 열었다.
“아리엘라. 할 말이 있어.”
달콤한 스트로베리빛의 눈동자가 그를 오롯이 담았다.
“뭔데요?”
“우리 계약에 관한 거야.”
루시안의 말을 들은 아리엘은 긴장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계약에 대해 할 말……?’
그 이야기를 듣자 덜컥 겁부터 났다.
그들의 계약 결혼이 끝날 때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시안이 그에 대해 뭘 말하고 싶은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혹시 끝내고 싶다고 하면, 나는 어떡해야 하지?
그러나 루시안은 어둠에 잠긴 주위를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아니고. 조만간.”
아리엘은 눈을 깜박이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바보같이 안심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별똥별 하나가 꼬리를 길게 그으며 떨어졌다.
“앗, 별똥별!”
아리엘은 별을 가리키며 루시안에게 외쳤다.
“저거 봐요, 루시안. 별똥별이에요. 소원 빌어야 되는데.”
그녀는 작은 두 손을 모으고 얼른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무언가를 잃는 건 무섭지만, 소원을 빌 때만큼은 조금쯤 욕심을 부려도 괜찮겠지요?
저 앞으로는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단 하나만 욕심내게 해주세요.
‘루시안이 저를…….’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소원을 온 맘 다해 취소할 날이 곧 닥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아리엘은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 * *
어두운 건물 안, 쥐새끼 같은 그림자 하나가 숨어들었다.
감시를 피해 세계수가 새겨진 육중한 문짝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 그림자는 마주한 풍경에 압도된 듯 잠시 얼어붙었다.
문 안의 거대한 공간.
그 공간의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봉인 마법진.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는 봉인진은 수도의 게이트 마법진보다 광대했다.
그 크기와 그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적인 마력의 기운은, 태고의 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성함을 느끼게 했다.
기운에 눌린 듯 멈춰있던 것도 잠시.
다시 몸을 움직인 그림자는 이내 마법진을 이루고 있는 열두 개의 축에 차례로 제물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져온 칼로 제 팔을 그은 뒤 그 위에 피를 짜내어 떨어뜨렸다.
“ᛇᛒᛈᛟᚫᛦᛃᛄ.”
그림자 남자가 기묘한 주문을 외우자 마법진의 빛이 일그러지며 축에 놓인 제물을 삼키기 시작했다.
“크으윽…….”
마법진에 피와 생기를 빨리는 듯 그림자 남자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한참 후, 빛을 내던 마법진은 그 빛을 잃고 흔적만 남긴 채 힘을 잃었다.
봉인진의 빛이 꺼지자 그림자는 품속의 둥근 거울을 꺼내 말했다.
“주인님. 봉인을 마침내……!”
거울 반대편에서 끽끽거리는 기괴한 목소리가 흡족한 듯 말했다.
“오랜 시간 들인 공이 빛을 발하는군. 수고했다. 지체하지 말고 [수호의 왼눈]을 훔쳐.”
그렇게 대답한 타락은 거울을 망토 자락에 넣은 뒤, 높은 단 위에 앉은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델른 국왕 전하.”
노인의 머리에는 국왕의 왕관이 비뚜름히 씌워져 있었고 눈에는 탐욕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노인의 정체는 바로 제국 옆에 위치한 왕국, 오델른의 국왕이었다.
타락의 목소리가 유혹하듯이 말했다.
“언제까지 제국 아래에서 왕국으로 사실 겁니까. 라카트옐이 없다면 제국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계속해봐라.”
“라카트옐만 손에 넣는다면 제국은 당신 것이 될 것입니다.”
늙은 국왕이 못마땅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라카트옐은 괴물이야. 어떻게 그들을 얻는단 말인가?”
국왕의 마음이 이미 넘어갔다는 걸 알아차린 타락이 소름 끼치게 웃었다.
“괴물에게도 약점은 있는 법이지요.”
솔깃한 국왕이 구부러진 고개를 들었다.
“약점?”
타락이 비밀을 말해주듯 속삭였다.
“라카트옐 대공과 대공자가 어린 대공자비를 몹시 아낀다는 소문을 들으셨겠지요.”
국왕이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난리도 그런 난리법석이 없으니 당연히 소문이 내 귀까지 흘러올 수밖에.”
대륙 전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나.
그리곤 잠시 침묵한 국왕이 눈을 뱀처럼 빛냈다.
“그럼 그 약점이란 게…….”
타락이 찢어진 입을 고개를 숙여 가리며 말했다.
“예, 바로 그 붉은 머리의 대공자비입니다.”
대공자비만 납치해 사로잡으면…….
“그것으로 라카트옐이라는 괴물을 길들일 수 있지요. 라카트옐은 어쩔 수 없이 이쪽 편이 될 겁니다.”
늙은 국왕의 눈빛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그게 쉽지만은 않을 텐데……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검은 망토를 입은 타락은 국왕에게 제안하듯 손을 내밀었다.
“제가 정보를 드리지요. 그 정보를 이용해 대공자비를 손에 넣으십시오.”
국왕이 클클클 웃음을 터뜨렸다.
“좋네. 그럼 내 자식들을 만나 보도록 해. 라카트옐의 목줄을 잡고 내 앞에 가져오는 아이가 내 후계가 되어 다음 왕좌를 이을 것이다!”
같은 시각.
마법진이 있는 방에서 빠져나온 그림자 사내는 거대한 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무 주위에는 나무를 지키는 수많은 기사들이 있었다.
그림자 사내는 작은 크리스탈 병을 열어 그 안에 담긴 액체를 바닥에 부었다.
그러자, 스르르륵-
액체가 바닥에 닿은 곳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스며든 검은 연기는 나무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과 잠복한 자들까지 모두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결국, 나무까지 접근한 그림자 사내는 나무의 뿌리가 시작되는 곳에 박힌 푸른 보석을 빼내어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 * *
다음 날.
황태자 디트리히와 전령들이 급히 대공가를 방문했다.
항상 정갈한 골든블론드의 금발이 흐트러진 채로 디트리히는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그들이 대공가 정문을 들어섰을 쯤엔, 이미 똑같은 소식을 가지고 온 달그림자 단원의 보고가 마티어스와 루시안에게 올라간 후였다.
“라키엘의 왼눈이 사라졌다고.”
싸늘하게 식은 루시안의 목소리에 디트리히는 등줄기가 오싹해짐을 느꼈다. 지배자 종족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 것이었다.
루시안의 눈이 그를 꿰뚫어 들여다보듯 날카롭게 응시했다.
“위치는 어떻게 발각된 거지?”
우리 정체를 아는 건 너와 황제뿐일 텐데. 그가 낮게 일갈했다.
라카트옐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아는 건 대대로 황족 직계 남자들뿐이었다.
디트리히는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그래. 하지만 드래곤의 눈이 숨겨진 곳을 아는 사람은 더 있으니.”
“황후와 태후 말이지.”
직계 황족 남자와 결혼한 퍼스트 레이디들은 결혼할 때 그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들은 라카트옐과 드래곤을 동일시하지 못할 뿐, 드래곤의 눈이 숨겨진 곳은 알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혼인 서약에서 피의 맹약으로 비밀을 묶어버려서 발설할 수 없어.”
“…….”
루시안이 지루하단 눈빛으로 그를 훑었다.
라카트옐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반드시 무서운 일이 터지곤 했으므로 디트리히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우린 유니스를 의심하고 있어. 태후 마마께서 기억력 마법약을 드시고 떠올리신 바로는 유니스가 눈의 위치를 캐물었다더군.”
“그래서.”
“태후 마마가 넘어가지 않으시니 황후께도 접근해 미혹술을 걸어 힌트를 얻은 모양이야.”
루시안이 긴 손끝으로 눈꺼풀 위를 나른하게 쓸었다.
“수호목은?”
“수호목에는 이상이 없어.”
디트리히가 힘을 주어 말했다.
심판의 오른눈이 거울 호수 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왼쪽 눈 또한 거대한 힘에게 보호받고 있었다.
바로 신비한 힘을 가진 수호목(木)에 의해서였다.
“수호목이 건재한 이상, 눈을 오염시키지 못해.”
디트리히의 말에 루시안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훔쳐가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아직 모르겠지.”
라키엘의 왼쪽 눈을 훔쳐가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타락으로 물들여 무기로 쓰는 것이 불가능했다.
수호목의 힘이 그것을 보호하고 있는 한은.
공을 들여 훔쳤으나 무기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보호하는 힘에 대해 알게 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적들의 다음 행동이 뚜렷하게 예측이 되었다.
타락의 다음 목표는 분명 그 훔친 눈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
그것을 위해 수호목을 해치려 할 것이었다.
성력을 품은 디트리히의 녹안이 결연하게 빛났다.
“그러니 수호목을 지켜야 해. 곧 그들이 수호목을 해치러 올 테니까. 만약 수호목마저 잃는다면…….”
루시안이 상대의 말을 자르며 냉혹하게 뇌까렸다.
“타락의 손에 나를 벨 수 있는 무기가 쥐어지겠지.”
* * *
마티어스에게서 라키엘의 왼눈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아리엘은 곧장 루시안에게 달려갔다.
마침 돌아가는 디트리히와 잠시 인사를 나눈 그녀는 서둘러 루시안을 찾았다.
“루시안!”
그렇게 루시안과 딱 마주치자, 아리엘은 얼른 그를 붙잡고 입을 열었다.
“루시안, 라키엘의 눈이…….”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붉은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달려온 건가?”
“당연하죠, 그게…….”
루시안은 호소하듯 자신에게 바짝 다가선 아리엘을 기분 좋게 내려다보다 대답했다.
“뺏기지 않을 거니까 걱정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그걸로, 루시안이나 마티어스님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데…….”
걱정이 잔뜩 담긴 조그만 얼굴을 관찰하던 루시안의 미간이 오만하게 좁혀졌다.
“……이쯤 되니 망할 놈의 잃어버린 눈이 부러워지는데.”
네가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다니.
“나도 위험해져야겠어.”
진심인 것처럼 서늘하게 말하는 루시안을 보며 아리엘은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루시안!
정말 라카트옐 남자들 머릿속은 어떻게 생긴 거야?
놀라는 그녀를 본 루시안이 우월한 아름다움을 흘리며 픽 웃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좀 더 가벼워졌다.
루시안과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아리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왼쪽 눈은, 어디 있었던 거예요?”
그가 눈썹을 비딱하게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제국립 요하네스 아카데미에.”
“아카데미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거울 호수처럼 굉장히 험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귀족과 황족 소년들이 바글바글한 아카데미에 드래곤의 눈이 있었다니?
루시안이 느릿하게 말했다.
“예전에 내가 말했었지. 아카데미에 가는 이유가 있다고.”
아리엘은 기억을 더듬어 그의 말을 떠올렸다.
열 살의 꼬마였던 그녀가 아카데미로 떠나는 루시안 때문에 울음을 터뜨렸을 때, 그가 했던 말.
‘이유가 있어.’
‘아카데미 가는 거. 이유가 있다고.’
그땐 그저 귀족 남자는 아카데미에 의무적으로 가야 한다는 제국법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그럼…… 거기 있는 눈 때문에 가 있어야 했던 거예요?”
“그래.”
루시안이 비스듬히 그녀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지긋지긋하게도, 봉인진 때문에. 내 마나가 필요했으니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 말없이 서 있던 아리엘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제 봉인이 풀려버렸으니, 어떡해요?”
루시안이 아주 낮은 소리로 쿡쿡 웃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하지만 레온 오라버니 말로는-”
그때 갑자기 루시안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아리엘은 의아해져서 그를 돌아보았다.
“루시안……?”
왜지? 무슨 문제 있나?
심각한 문제인가?
아리엘이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키는데 루시안이 서늘하게 말했다.
“그게, 언제부터 너한테서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듣고 있는 거지?”
응?
“누구 마음대로 오라비야?”
네에?
아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어붙자 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당장 가서 그놈을 끌고 와야겠군.”
어어. 안 돼요, 루시안!
아리엘은 얼결에 그의 팔짱을 껴 붙잡았다.
이미 황궁에 돌아간 사람을 왜 갑자기 데려와요. 그것도 그런 이상한 이유로!
아리엘이 그의 팔짱을 꼭 끼자, 당장이라도 디트리히를 잡아 오려던 루시안의 기세가 슬쩍 허물어졌다.
……맙소사. 어디서 이런 귀여운 게 나온 거지.
동그란 머리통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가 이번엔 그녀를 향해 딱딱하게 말했다.
“누가 그것한테 오빠라고 하라고 했어.”
‘……?’
당황한 아리엘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하, 하지만…… 진짜 사촌 오라버니고…….”
오라버니를 오라버니라고 했을 뿐인걸요.
맹세코 진실만 말했는데도 루시안의 반응은 살벌하기만 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 아니, 이름도 안 돼. 황태자라고 불러. 아니다. 아예 그놈을 부르지 마.”
“…….”
아리엘은 벙찐 채 서 있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대화를 나누나요?
루시안이 그녀를 잡아먹을 듯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그런 호칭 없잖아.”
잠깐,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녀는 억울해져서 삐약삐약 외쳤다.
“루시안은 루시안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럼…… 그럼 대공자님이라고 불러요?”
“절대 안 돼.”
짙은 눈썹을 치켜올린 그가 위협적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말도 있잖아.”
다른 말?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무슨 말이요?”
그러자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있던 루시안의 귀 끝이 갑자기 눈에 띄게 붉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이윽고 턱을 세게 다물고 시선을 피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남편이나 신랑 같은 말.”
앗.
예기치 못한 공격을 당한 아리엘의 얼굴은 완전히 새빨개지고 말았다.
어렸을 때라면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짝사랑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떻게 그런 낯간지러운 호칭을 마주 보고 말할 수 있을까?
“그, 그, 그런 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는 결국 자기 방으로 줄행랑을 쳐버리고 말았다.
방에 도착한 아리엘은 심호흡을 하며 가슴에 두 손을 모아 얹었다.
파닥파닥 나비 날갯짓 같은 고동소리가 가슴 안을 울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화끈거렸다.
‘루시안 요즘 정말 이상해. 그런 말을 하다니.’
이러니까 자꾸 기대를 하게 되는 거다.
하기로 했던 말이 혹시나 계약을 끝내자는 이야기가 아닐까 봐…….
아리엘이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낯선 편지 한 통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저건 뭐지?”
하녀들이 가져다 놨다고 하기엔 이상했다.
대공가 하녀들은 아리엘이 원하는 편지만 고를 수 있도록 항상 은쟁반에 직접 편지를 가져왔으니까.
책상으로 다가간 아리엘은 편지의 겉봉을 살펴보았다.
“보낸 사람도 적혀 있지 않고…….”
꺼림칙한 기분에 편지를 열어보지 않고, 버리기 위해 집어든 그 순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
뱃속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리엘은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 방에 있는 전신 거울 안에 검은 망토를 쓴 형상이 어른거리며 떠올라 있었다.
“당신은……!”
* * *
아리엘은 곧장 손에 공격 마법구를 생성했다.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지난번, 타락이 그녀를 검은 기운으로 묶어두고 운디르의 저주를 심으려고 했을 때가 생생했다.
그러자 검은 망토가 가볍게 손을 올려 보였다.
“아, 긴장하지 말거라. 오늘은 대화를 나누러 온 것뿐이니.”
라카트옐이 네 방에 걸어둔 결계 때문에 이런 식으로밖엔 만날 수 없지만-
그가 친근한 어조로 끼긱대며 말을 이었다.
벌어지는 입이 소름 끼치게 기괴하고 징그러웠다.
“지금 네가 그 마법구를 내게 던진다 해도 거울만 깨질 뿐, 날 해칠 순 없을 거다.”
물론 나도 너를 해칠 수 없고.
그가 아쉬운 듯 덧붙였다.
“그러니 서로 얘기나 나누자는 거지. 시간은 별로 없지만 말이야.”
아리엘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과 나눌 대화 따윈 없어.”
그러자 거울 속에서 타락이 손에 든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신비로운 푸른빛이 감도는 둥근 보석이었다.
“내가 이걸 갖고 있는데도?”
그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었음에도, 아리엘은 그 보석을 알아보았다.
보석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라카트옐이 가진 고유의 기세와 똑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말이 흘러나왔다.
“드래곤의 왼쪽 눈.”
타락이 맞다는 듯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걸 돌려받고 싶지 않나?”
타락의 손은 허옇고 불투명한 형체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끔찍한 손이 여유로운 손길로 푸른 보석을 감싸 쥐었다.
보석의 빛이 검은 망토깃 사이로 위태하게 일렁거렸다.
그게 마치 루시안처럼 느껴져서 아리엘의 뱃속이 죄어들었다.
타락이 쇠가 스치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마 아직도 네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리고 순진한 크림슨 하트야.”
아리엘은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타락이 끼긱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 라카트옐이 네게 그 이야기는 해준 모양이구나. 하지만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군. 내가 한 번 맞춰볼까?”
그가 길고 끈적해 보이는 희뿌연 색의 손가락을 하나 치켜들었다.
“초대 드래곤이 숨겨놓은 두 눈과 심장 이야기?”
이어서 그가 두 번째 손가락을 폈다.
“라카트옐이 크림슨 하트를 바로 알아볼 수 있다는 것?”
마침내 타락이 손가락 세 개를 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냈다.
“라카트옐이 고통에서 해방돼 완전한 드래곤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그것도 네게 말해주었나?”
아리엘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순간 그녀가 멈칫하는 것을 알아챈 타락이 끔찍한 입을 찢어 올렸다.
“역시 끝까지는 말하지 않았군.”
“…….”
“그래, 끝까지 말한다면 네가 자신들 옆에 머무를 리가 없을 테니. 오히려 그들과 원수가 될 테지.”
아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 난 절대로 라카트옐을 배신하지 않아.”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비밀이 많을지라도 그들은 후작이나 타락의 손에서 매번 자신을 구해주었으니까.
아리엘이 또렷하게 말하자 타락이 고개를 기울였다.
“과연 그럴까? 네 '목숨'이 달린 일이어도?”
“그게 무슨…….”
타락이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같은 편이란다. 대공자가 죽으면 나와 네가 살고, 대공자가 살면 나와 너는 죽게 되지.”
“거짓말.”
아리엘은 단호히 그의 말을 끊어냈다.
“당신이 하는 말은 한마디도 믿지 않아.”
타락이 쯧쯧 혀를 찼다.
“이번만은 믿는 게 좋을 거다, 아이야. 곧 꽃피울 삶을 두고 죽고 싶지는 않겠지?”
그가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듯이 속삭였다.
“넌 살고 싶을 거야. 하지만 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아리엘은 거울을 깨뜨려서라도 그를 쫓아내기 위해 마법구를 키웠다.
하지만 그때, 그녀의 귓가에 타락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네 심장 통증.”
“……!”
아리엘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의 심장 통증은 아주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저자가 어떻게…….
“그 통증이 왜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타락이 그녀를 만지려는 듯 거울 속에서 손을 뻗었다.
아리엘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타락이 손을 물리며 말했다.
“네 집에 있는 대마법사 놈에게 크림슨 하트에 대해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게다. 그러고 나면 너는 내 편이 되고 싶어질 테지.”
그가 라키엘의 눈인 푸른 보석을 흔들어 보였다.
“네가 나에게 온다면 이깟 눈쯤은 돌려주지.”
아리엘은 작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꽉 붙들며 말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어.”
타락이 낮은 소리로 소름 끼치게 웃었다.
“운명을 받아들여라. 넌 라카트옐을 죽이기 위해 태어났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타락은 거울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리엘이 잡았던 편지 또한 저절로 재가 되어 흩어졌다.
“아…….”
긴장이 풀린 아리엘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드라운 양탄자의 감촉만이 여기가 여전히 자신의 방이라는 걸 실감하게 했다.
아리엘은 심장이 뛰는 자리에 손을 올렸다.
“내 심장 통증을 타락이 어떻게 아는 거지……?”
지독한 불안감이 그녀에게 엄습했다.
아리엘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루노어는 내가 [크림슨 하트]라는 사실을 몰라.’
그렇다면 브루노어가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크림슨 하트'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리엘은 곧장 저택에 있는 브루노어의 방으로 달려갔다.
* * *
“아리엘님, 어쩐 일이십니까? 얼굴은 왜 또 그리 창백하시고요.”
아리엘은 평소와 다름없이 인자한 얼굴로 자신을 맞는 브루노어를 떨리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아리엘이 들어오지 않고 계속 문 앞에 서 있자 브루노어가 천천히 눈빛을 바꾸었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있으신 표정이군요.”
브루노어가 한숨을 쉬며 작게 웃었다.
“항상 그러셨지요.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처음엔 혼자서 열심히 고민하시다가, 끝내 저에게 와서 반짝이는 눈으로 물어보셨죠.”
그리고 아리엘이 그런 눈으로 물어보면 누구든 안 알려주고는 배길 수가 없는 심정이 되었다.
브루노어도 마찬가지였다.
대마법사라고 할지라도 이 붉은 머리의 사랑스러운 소녀 앞에서는 무장해제가 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길 바랐다.
그에게는 죽는 날까지 지켜야 할 비밀이 한 가지 있었으므로.
“브루노어. 뭐든 솔직히 말해줄 수 있나요?”
그녀의 질문을 들은 브루노어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리엘은 브루노어가 있는 방 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진실에 가까워지기 위한 발걸음을 뗐다.
“크림슨 하트에 대해 아는 걸 말해주세요, 브루노어.”
* * *
“……!”
'크림슨 하트'라는 말을 들은 브루노어가 심하게 놀라는 걸 보고, 아리엘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맙소사. 아리엘님, 그건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아리엘은 조그만 목소리로 솔직히 대답했다.
자신이 크림슨 하트라는 것만 제외하고.
“마티어스님이 말씀해주셨어요. 드래곤이 숨겨놓은 심장의 이름이 크림슨 하트라고요.”
“그런,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브루노어는 라카트옐이 직접 알려줬다는 말에 적잖이 안심하는 듯했다.
아리엘은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브루노어는…… 어떻게 알게 된 거죠?”
하지만 브루노어는 그 이상은 말해줄 수 없다는 듯 힘겹게 물러났다.
짧은 새에 그는 부쩍 나이 든 것처럼 보였다.
“저도 그 이상은 모릅니다.”
“브루노어.”
아리엘이 호소하듯 그를 부르자, 브루노어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안다 해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겐…… 하나뿐인 혈육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요.”
혈육이라면…… 히스?
히스의 목숨?
아리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말하면 히스가 목숨을 잃게 되나요?”
“정확히는 대공님과 대공자님께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했으니까요.”
“누구랑요?”
브루노어가 재차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부터가 지켜야 할 비밀인 듯했다.
아리엘은 주먹을 꼭 쥐었다.
“제발 말씀해주세요, 브루노어.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에게는 브루노어가 알려줬단 걸 말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브루노어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아리엘은 브루노어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타락이 라카트옐을 노리고 있어요. 라카트옐을 지키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해요.”
그녀의 심장의 통증에 대해 타락이 알고 있다면, 그것이 라카트옐의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반드시 원인을 알아내야 했다.
한참의 설득 끝에 아리엘을 이기지 못한 브루노어는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제 은인이나 다름없는 라카트옐을 지키기 위해서니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하지만 약속해주십시오.”
그는 히스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며 끝까지 당부했다.
“제가 알려드리는 사실을 대공님과 대공자님께 말씀드리면 히스 녀석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두 분께서는 아시면 안 되는 일입니다.
아리엘 님만 알고 계시겠다고 맹세해주십시오. 히스 녀석의 목숨을 걸고.”
아리엘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던 그가 비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오만했던 한 마법사의 이야기입니다.”
* * *
브루노어가 자신의 양손을 맞잡고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최고의 마법사였던 제가 왜 황궁에서 쫓겨났는지, 그 이야기를 드릴 때가 왔군요.”
아리엘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히스에게 들었어요. 나쁜 귀족들에게 밉보여서였다고…….”
하지만 브루노어는 단호히 부정했다.
“히스 녀석이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후회로 얼룩진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그때의 저는.……지식에 미쳐있는 오만한 마법사였습니다. 대마법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힘만을 추구했죠. 더 큰 힘, 더 근원에 가까운 힘…….”
브루노어의 눈이 잠시 번뜩였다.
찰나지만 아리엘은 그 눈빛에서 젊은 시절의 브루노어가 가졌던 야망을 엿본 듯했다.
“그렇게 지식을 파고, 파다가 건드려서는 안 될 차원에 닿아버렸던 겁니다.”
그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지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
“저는 신의 세계라고 불리우는 무한의 차원에서 표류했고…….”
의식을 잃은 채 그곳에서 부유하며 방황했습니다.
그 무한의 차원에 갇혀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돌다가, 우연히 저를 그곳에서 빠져나오게 해줄 구원자를 만났죠.”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아리엘은 덩달아 긴장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괴로운 듯 브루노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만난 존재는…… 태고의 어둠이었습니다.”
태고의 어둠……!
아리엘이 놀라서 얼어붙자 브루노어가 확인을 시켜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드래곤 라키엘의 본체이자, 빛의 여신과 동등한 어둠의 신.”
아리엘은 등줄기를 스치는 소름에 미약하게 떨었다.
새삼 브루노어가 파고들었던 깊이를 깨닫자 두려움이 앞섰다.
“그의 의식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저는 라카트옐의 정체와, 알아서는 안 될 비밀들을 알게 되었지요.”
아리엘은 깜짝 놀랐다.
이때까지 그녀는 마티어스나 루시안이 브루노어에게 정체를 말해줬기 때문에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태고의 어둠인, 라키엘의 의식이라니?
브루노어의 이야기가 조곤조곤 이어졌다.
“어둠은 제가 알아낸 비밀을, 자기의 후손인 라카트옐이 알지 못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리엘은 더 이상 놀랄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라카트옐조차 모르는 비밀을 알게 됐다는 건가요, 브루노어……?
“그래서 제가 라카트옐에게 비밀을 말하지 못하도록, 제게 남은 마지막 혈육을 걸고 피의 맹세를 시켰지요.”
아…….
이제야 브루노어가 그것을 끝끝내 감추려 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히스의 목숨이 비밀의 담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저는 무한의 차원에서 죽을 뻔한 목숨을 건지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황실은 이미 제가 라카트옐의 정체를 캐냈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가 허탈한 웃음을 머금었다.
“라카트옐의 정체를 알아버렸기에, 이제 저는 황실에 의해 죽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리엘은 루시안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라카트옐의 정체는 대공가의 집사들과 황족 직계 남자들만이 안다고 했다.
그리고-
‘원래는 거기까지만이지. 하지만 브루노어 놈도 알고 있어.’
원래 알아야 할 사람이 아닌 사람이 국가적 비밀을 알게 되었다면…….
‘당연히 살아남기 어려울 거야.'’
그런데 브루노어는 어떻게 살아남았던 걸까?
브루노어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저뿐이었다면 목숨이 아깝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제 옆에는…… 히스 녀석이 있었지요. 일찍이 부모를 잃은 가여운 아이가요.”
브루노어가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히스 녀석을 잘 돌보지 못했었죠. 제가 탐구하는 것들에만 미쳐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차원 너머에서 제 모든 지식과 탐구했던 것들이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지 알게 되고 나니…… 옆에 있던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후회를 참으려는 듯 자신의 긴 로브 자락을 세게 쥐었다.
“저는 제 잘못으로 인해 어린 손자까지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미칠 것 같았습니다.”
아리엘은 숨을 멈추었다.
“왜…… 어째서 히스까지?”
브루노어가 낮게 대답했다.
“황실이 제게 물은 죄는 반역죄였으니까요.”
아…….
반역죄를 저지르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혈족에게까지 죄를 물어 처형하는 게 제국법이었다.
“반역죄의 대가를 알고 계시겠지요. 결국 저의 죄는 그 아이의 목숨까지 빼앗아가는 죄였던 것입니다.”
아리엘은 어린 히스가 처형당해 죽을 뻔했다는 것에 아찔함을 느꼈다.
“그럼 어떻게 된…….”
브루노어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때 마티어스 대공께서 저와 히스를 살려주셨던 겁니다. 그 대신 저는 대공령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게 되었지요.”
한숨처럼 웃은 그가 중얼거리며 덧붙였다.
“어쩌면 그분께서는 단순히 집안일을 시킬 마법사가 필요하셨는지도요.”
“히스는, 히스도 이 사실을 아나요?”
“비밀을 지켜야 하기에 히스 녀석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모르겠지요.”
브루노어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서 저는 히스가 대공가에 대해 아는 것을 꺼렸습니다. 파고들지 못하게 했죠. 저처럼 비밀을 알아버릴까 봐……. 전 그 애를 지키고 싶었으니까요.”
그가 다시 고개를 들고 아리엘을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리엘 님과 그 녀석은 결국 비밀에 가까워지더군요. 그리고 끝내 6년 전 겨울, 라카트옐의 정체를 알아내 버렸지요.”
아리엘은 그때를 떠올렸다.
그녀와 히스는 대공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모아 라카트옐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밝혀냈었다.
“다행히도 히스 녀석은 라카트옐에게 죽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랬던 거군요…….”
힘을 추구하다가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어리석은 마법사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을 맺었다.
아리엘은 브루노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브루노어가 크림슨 하트에 대해 알아낸 것은 뭔가요?”
“…….”
그는 깊이 미간을 좁힌 채 침묵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무겁게 닫혔던 브루노어의 입이 열렸다.
“크림슨 하트가 어느 날 인간의 몸에 깃들어 나타날 것이라는 것.”
그가 머리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두 눈과 크림슨 하트를 흡수한 라카트옐은 다시 태고의 어둠 그 자체, 라키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브루노어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깊이 감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진짜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던 비밀은-”
과거에 느꼈던 공포가 떠오르는 듯, 그의 얼굴은 핏기를 잃은 채 창백해졌다.
“크림슨 하트. 그것에 관련된 예언이었습니다.”
* * *
브루노어의 이야기는 거기서 다시 시작되었다.
“기억하십니까? 예전에 아리엘님께서 물으셨죠. 드래곤을 해칠 수 있는 존재가 있느냐고요. 저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한 마디를 덧붙였었죠. 때론 생각지도 못한 곳에 퍼즐 조각이 있는 법이라고.”
아리엘도 그때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브루노어가 고개를 들어 아리엘과 눈을 마주쳤다.
“그건 크림슨 하트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퍼즐 조각이 모든 것을 바꿔놓고는 하지요.”
브루노어가 아리엘과 눈을 맞추며 입을 뗐다.
불현듯 아리엘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을 들을 것 같은 예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막을 틈도 없이 브루노어에게서 말이 흘러나왔다.
“어둠의 신이 말한 예언은 총 네 마디. 이것이었습니다.”
첫번째.
[크림슨 하트는 어느날 인간의 몸에 깃들어 나타날 것이다.]
두 번째.
[심장을 품은 크림슨 하트는 성년이 되는 날 죽을 것이고, 비로소 심장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세 번째.
[크림슨 하트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마지막 라카트옐을 죽여야 한다.]
네 번째.
[라카트옐을 죽일 수 있는 것은 크림슨 하트뿐이다.]
마법 언어로 예언을 읊어준 브루노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라카트옐도 들은 적 없는 것이지요. 이것을 알리게 되면 히스가 희생될 테니까요.”
아리엘은 이미 완전히 굳어버린 채 숨도 쉬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오해했는지 브루노어가 서둘러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는 한, 크림슨 하트는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몇천 년쯤 후에 나타날지도 모르지요…… 아리엘님. 아리엘님……?”
거기서부터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아리엘은 이미 모든 것을 정확히 이해해버렸으니까.
절대적인 신의 예언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크림슨 하트인 자신은 17세가 되면 죽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으므로.
한 번의 생을 거쳐 시간을 되돌아온 자신이 모든 것을 바꾸어도, 바뀌지 않을 단 한 가지.
‘나는 죽게 될 거야.’
머리가 어지럽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
어릴 적, 달튼이 선물해준 동화책 속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물속에 살던 인어 공주님은 땅 위의 왕자님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 * *
.
.
.
소원 취소할게요, 별님.
루시안이 절대 저를 사랑하지 않게 해주세요.
* * *
방으로 돌아온 아리엘은 문에 기대어 서 있다가 천천히 주저앉았다.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제 갓 열여섯 살이 된 어린 소녀가 쉽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버거운 진실이었다.
문 앞에 작게 옹크려 앉은 아리엘은 다시금 예언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첫번째.
[크림슨 하트는 어느날 인간의 몸에 깃들어 나타날 것이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첫 번째 예언 성취.
그리고 그녀는 과거와 현재의 삶에서 모두 라카트옐과 만났다. 마치 예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하듯.
두 번째.
[심장을 품은 크림슨 하트는 성년이 되는 날 죽을 것이고, 비로소 심장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크림슨하트는 17세가 될 때 반드시 죽게 된다.
그리고 아리엘이 죽은 뒤에야, 그녀가 품은 크림슨 하트는 원래의 주인인 라카트옐에게 돌아갈 수 있다.
‘……퍼즐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
그게 나였던 거야.
아리엘은 깊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브루노어가 해준 말대로라면-’
두 눈과 심장을 되찾은 라카트옐은 완전한 드래곤 라키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아리엘은 힘없이 웃었다.
‘적어도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이 블루문 때마다 겪는 고통은, 사라지겠구나.’
더 이상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좋았다.
다행이야.
마법을 연구해서 라카트옐의 고통을 없앨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미리 방법을 알게 됐으니.
아리엘은 팔을 뻗어 제 몸을 감쌌다.
‘이제…… 마티어스님은 더 이상 푸른달이 뜰 때마다 집을 비우시지 않아도 되겠네.’
원래 여기저기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니까, 그러니까…… 정말 잘된 일이야.
‘집에서 기다리는 날 위해 귀찮게 선물 같은 거 사오시지 않아도 되고, 나 혼자 저녁 식사를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실 필요도 없어.’
또, 루시안은 살의에 물들어서 마수를 베러 갈 필요도 없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혼자 외롭게 그 시간을 버텨낼 필요도 없고…….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하며 힘들어할 일도 더는 없을 거고…….
더 좋아질 이유는 백 가지도 더 댈 수 있었다.
아리엘은 입술을 달싹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기쁘다. 진짜로.”
아리엘은 라카트옐을 그 고통에서 풀어줄 수만 있다면 뭐든 내놓을 수 있었다.
설사 그게 자신의 생명이라고 해도.
세 번째와 네 번째.
[크림슨 하트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마지막 라카트옐을 죽여야 한다.]
[라카트옐을 죽일 수 있는 것은 크림슨 하트뿐이다.]
‘마지막 라카트옐이라 함은 루시안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크림슨 하트인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루시안이 죽어야 한다는 뜻이다.
“…….”
아리엘은 작게 웃어버렸다.
‘겨우 이거였어, 타락? 나와 같은 편이라는 게.’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라카트옐을 배신하고 떠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자신이 살기 위해 루시안을 죽이는 선택지 따윈 그녀에게 없었다.
그녀는 결코 자신이 살기 위해 루시안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죽게 할 생각이 없는데, 죽일 수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러니 네 번째 예언은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자신은 결코 그를 죽이는 무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나와 루시안 둘 중에 한 명만 살 수 있다면…….’
그건 루시안이 되어야 했다.
그녀를 지옥에서 건져준 구원자.
심장을 되돌려받고 유배에서 벗어나 드래곤 라키엘로 돌아갈 수 있는 존재.
예언을 성취할 마지막 라카트옐이니까.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리엘은 웅크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앞으로 몇 개월 안 남았구나.’
이곳에서 보낸 여섯 번의 생일. 여섯 번의 계절.
그게 전부인 것이다.
남은 것은 마지막 여름, 마지막 가을, 그리고 마지막 겨울…….
창밖으로 봄의 마지막 꽃이 흩날리며 떨어졌다.
아리엘은 멍하니 그 예쁜 꽃송이들을 바라보았다.
“…….”
무릎 아래로 힘없이 손목이 늘어졌다.
루시안, 나는 당신을 위해 태어났나 봐요.
하지만 당신 곁에 오래 머무르는 건 허락받지 못했나 봐.
<5권 끝. 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