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장 (15/23)
  • 15장




    진실이 모두 밝혀진 후에도 후작은 아리엘을 인정하지 않고 난동을 부렸다.

    “저것이 내 친딸이라고? 그럴 리가! 잘못된 것입니다, 태후 마마.”

    게거품을 물며 날뛰는 후작을 황실 근위대가 붙잡았다.

    “저런 붉은 머리가, 악마의 마법이나 쓰는 불길한 것이 내 친딸일 리 없어!”

    이번에는 마티어스가 나서서, 달튼을 통해 후작의 죄를 낱낱이 말했다.

    대공가가 조사한 것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정확해 증거가 끝도 없이 나왔다.

    후작과 로잘린드의 결혼은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

    가난한 준귀족의 양딸로 살고 있던 로잘린드는 그녀의 미모를 탐한 후작에 의해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후작은 로잘린드의 양부모를 사고로 위장해 제거했고, 의탁할 데가 없어진 로잘린드를 강제해 아내로 삼았다.

    로잘린드는 비슷한 신분의 기사인 정인이 따로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후작에게 팔려가듯 결혼해야 했다.

    로잘린드는 겉으로는 평온한 결혼생활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날마다 정인과 양부모 생각에 눈물지어야 했다.

    살아생전 그녀의 유일한 위안은 뱃속의 아기, 아리엘이었다.

    “안 돼…….”

    자신의 죄가 나올 때마다 후작의 얼굴은 점점 목이 졸린 듯 파래졌다.

    그리고 달튼은 아리엘의 평판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후작가의 학대도 고발했다.

    후작과 제롬이 아리엘이 열 살이 될 때까지 저질렀던 잘못들이 하나하나 세상 앞에 드러났다.

    대공가 주치의 밀러가 아리엘을 처음 진찰한 뒤 올린 보고서를 본 태후의 눈이 새파란 분노로 불타올랐다.

    “이런, 금수만도 못한……!”

    로잘린드를 억지로 아내 삼은 것부터가 황족 능멸죄였다.

    당장 단두대로 끌려갈 만한 죄목인 것이다.

    게다가 공주 신분인 어린 아리엘을 학대한 것까지 더해지자 후작의 죄는 죽음으로도 다 갚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아리엘에게 편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을…….”

    태후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마티어스에게 말했다.

    “대공, 부탁하겠소. 이 일은 내 직접 벌하게 해주시오.”

    대공가는 그 일을 허락했다.

    자신이 큰 벌을 받게 될 것을 깨달은 후작이 아리엘 쪽을 바라보며 몸부림을 쳤다.

    “나는 대공자비의 친부다! 나를 이렇게 대우했다간 아리엘이 너희를 가만 둘 줄 아느냐! 아리엘! 아비를 위해 뭐라 말 좀 해봐라!”

    소리를 지르며 끌려나가는 후작을 보는 태후의 눈에는 딸과 손녀의 고통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너 같은 것은 아비로서 자격이 없다.”

    후작의 최후는 편할 수 없을 것이 명백했다.


    * * *


    모든 상황이 끝난 후 황실 사람들과 사교계 사람들은 브루노어의 힘으로 수도에 돌아갔다.

    황제는 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아리엘의 신분을 전 제국에 알리겠다고 약속했고, 그 조건으로 라카트옐은 단교 선언을 거두었다.

    돌아가기 전, 다이아나와 세실이 아리엘에게 와서 잘 되었다며 축하를 퍼부어 주었다.

    어릴 적 아리엘이 힘들었던 것을 잘 아는 그들이라, 아리엘이 친어머니를 찾은 것이 더욱 애틋하고 기뻤다.

    또한 아리엘이 후작가 딸이 아니라는 불명예도 벗었으니 이제 더 이상 수군거림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태후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에게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현했다.

    “내 딸 로잘린드를 보게 해주어서 고맙소. 그리고…… 우리 아리엘을 잘 부탁하오.”

    아리엘의 외가(家)로서 말하는 진솔한 부탁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아쉬운지, 태후는 몇 번이나 아리엘의 손을 잡으며 선물한 여름 별궁을 보러 와 달라고 부탁했다.

    “내 남은 날 동안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모두 해주고 싶구나.”

    아리엘은 조그만 목소리로 ‘그럴게요.’하고 태후에게 놀러갈 것을 약속했다.

    한편, 라카트옐 가족은 곧장 수도로 돌아가지 않고 녹스 남작의 초대로 녹스 저택에 하루 묵게 되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대공자비님.”

    아리엘은 다시 녹스 남작을 만나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그의 얼굴을 보는게 두렵지는 않았다.

    과거였다면 이미 죽었을 사람이지만 이제는 살아있으니까.

    저녁 만찬을 마치고 자러 가기 전 라카트옐 가족들만 남자, 마티어스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아주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 아리엘라.”

    전에 없이 묵직한 마티어스의 목소리에 아리엘은 영문도 모른 채 긴장했다.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고, 마무리 되었는데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니.

    “무슨 일인가요, 마티어스님?”

    마티어스가 아주 심각하게 대답했다.

    마치 신성한 의식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소풍 말이다.”

    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동작을 멈추었다.

    잠깐, 제가 방금 소풍이라고 들은 거 맞죠?

    마티어스가 수려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소풍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

    어…… 음…….

    아리엘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저는 그냥, 마티어스님이랑 루시안이 당장이라도 황궁에 쳐들어갈 기세라서 관심을 돌리려고 말한 것뿐이었는데요, 흑흑.

    하지만 낮에 루시안이 했던 말이나 지금 마티어스를 보아 두 남자는 은근히 소풍을 기대하고 있는 듯 했다.

    아리엘은 괜히 마음이 간질거려서 입술을 잘근댔다.

    ‘물론 나도…… 두 사람과 함께라면 좋지만.’

    마티어스가 아리엘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소풍 때 뭘 하고 싶지? 네가 원하는 소풍을 말해봐라.”

    느른하고 고혹적으로 다리를 꼬고 앉은 루시안이 곧장 질문을 이었다.

    “숲을 개조해서 대리석 길을 만들고 호숫가에 연회를 열면 되나?”

    “아니면 사냥 대회 때처럼 거대한 천막을 치고, 요리사와 무희를 불러…….”

    라카트옐 남자들의 '소풍'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들은 아리엘은 펄쩍 뛰었다.

    “아뇨, 아뇨, 아뇨.”

    일단 그런 건 소풍이 아니에요, 마티어스님, 루시안!

    두 사람을 말려야 해, 당장.

    그녀는 마음속으로 가을 소풍에 대한 이미지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열심히 종알종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원하는 소풍은…….”

    아리엘이 말하자, 루시안과 마티어스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마티어스가 은근한 미련이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전부인가? 지나치게 소박한데.”

    아리엘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충분해요.”

    그녀가 방긋 웃자 마티어스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루시안이 유혹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소풍은 누구랑 갈 거지, 아리엘?”

    네? 그거야 물론…….

    “두 사람 모두랑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

    “당연히 아니지.”

    루시안이 색기 어린 눈매를 가볍게 쓸었다.

    아름다운 입술이 서늘하게 말했다.

    “하나만 선택해. 마티어스인지, 나인지.”

    아리엘의 얼굴은 금방 울상으로 바뀌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가족 소풍인데!

    그녀는 온힘을 다해 삐약거렸다.

    “안 돼요. 한 명이라도 빠지면 소풍 안 갈 거예요.”

    “너…….”

    아리엘은 항의하려는 루시안 앞에 얼른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리곤 눈을 꼬옥 감고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요. 아, 안주인의 명령이에요.”

    한참 정적이 흘러서 아리엘을 조심스레 눈을 빼꼼 떴다.

    어라, 두 사람 화났나?

    귀를 쫑긋거리는 토끼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본 두 라카트옐의 표정이 비슷해졌다.

    어떻게 이런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을 수 있지?

    곧 서로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두 남자는 빠르게 얼굴을 바꾸었다.

    마티어스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르며 대답했다.

    “……그래, 안주인의 명령이로군.”

    그렇게 세 라카트옐이 함께 하는 소풍이 예정되었다.


    * * *


    밤이 되자, 루시안이 아리엘을 침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자기도 모르게 내일 소풍에 들떠버린 아리엘의 입가엔 내내 미소가 걸려있었다.

    너무 신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녀가 재잘거렸다.

    “그런데요, 루시안. 거울 호수는 어떻게 생긴 공간일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법사인 아리엘은 거울 호수에 담긴 거대한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안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었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금 떠올려 보아도 신기하기만 했다.

    “호수가 어떻게 진실을 알려줄 수 있는 걸까요?”

    루시안이 그녀를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리엘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자,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마티어스가 네게 말해준 적 있을 텐데.”

    “네? 그게 무슨…….”

    아리엘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나는 거울 호수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는걸요?

    하지만 루시안이 붉은 입술을 벌려 재촉했다.

    “기억해 봐. 드래곤 라키엘이 인간의 몸을 입기 위해 해야만 했던 희생.”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은 똑똑히 기억났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제국 사냥대회 전에, 마티어스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말.

    “드래곤은 인간의 형상 안에 가두기엔 너무 강한 존재지. 그래서 초대 라키엘은 자신의 심장과 두 눈을 뽑아낸 뒤에야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뽑아낸 제 신체 부위를 누구도 찾지 못하도록 없애버렸지. 자기와 자기의 후손들을 영원히 인간의 몸 안에 가두기 위해.”

    드래곤 라키엘은 인간 모습인 '라카트옐'이 되기 위해 자신의 육체 중 일부를 희생했다고 들었다.

    “맞아요. 두 눈과 심장을 뽑아 숨겼다고 했어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루시안이 시리게 웃었다.

    정말이지 넋이 나갈 것같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래. 라키엘의 두 눈 중 하나가 그 호수 아래에 박혀 있어. 인간을 꿰뚫어보았던 심판의 오른눈이지.”

    그가 멀리로 시선을 향했다.

    “거울 호수는 그것 때문에 생겨난 거야.”


    * * *


    “…….”

    아리엘은 할 말을 잃었다.

    ‘초대 암흑 드래곤 라키엘의 눈이 거울 호수 아래 박혀있다고……?’

    순간 숨이 막혔다.

    “그럼, 유니스 모습을 한 마법사가 하려고 했던 짓은…….”

    루시안이 짧고 서늘하게 대답했다.

    “드래곤의 눈을 타락으로 변질시키려 한 거지.”

    아리엘의 입술이 놀람으로 벌어졌다. 루시안이 퇴폐적인 저음으로 설명을 이었다.

    “타락 자체로는 라카트옐을 해칠 수 없어. 하지만 그 눈을 타락으로 오염시킬 순 있지.”

    그의 입매가 가볍게 비틀렸다.

    “오염된 눈은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고.”

    아리엘은 막힌 숨을 간신히 내쉬며 물었다.

    “라카트옐을, 해칠 무기로요?”

    “그래.”

    아리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과거, 타락을 추종하는 자들은 모두 그 검은 기운에 물들어 '그'의 도구가 되었었다.

    ‘드래곤의 눈을…… 그들처럼 도구로 만들려 했다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시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결계석이 나. 바다 밑에서 소금 결정이 맺히는 것처럼 서서히. 오염이 되면 결계석이 호수에서 더 이상 생기지 못하겠지.”

    루시안이 짙은 청색 눈동자로 아리엘을 내려다보았다.

    “그 결계석의 이름은…….”

    아리엘의 입술 사이에서 홀린 듯 대답이 튀어나왔다.

    “……에덴 스톤.”

    그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똑똑하네, 내 아내.”

    아리엘은 에덴 스톤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녹스 영지에서 생산되는 별볼일 없는 광물.

    라카트옐 대공가가 충성스러운 가신을 위해 사들여주는 물건.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진짜 에덴 스톤을 설명해주진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루시안이 품 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달칵 열었다.

    “보여줄까?”

    그의 크고 미려한 손 안에서, 감춰진 비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얼핏 보면 석영같이 생긴 연푸른색의 보석이었다.

    ‘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

    다만 그것에서는 차가운 한기같은 연기가 끊임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책에서는 이런 연기가 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없었다.

    ‘에덴 스톤에 대한 진실은 반의 반도 알려지지 않았구나.’

    놀랍지도 않았다.

    라카트옐과 관련이 있는 건 어떤 것이든 그랬으니까.

    아리엘은 가만히 그 보석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루시안의 손 위에 있는 에덴 스톤을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림없다는 듯 그가 우아하게 손을 물렸다.

    “화상 입어. 네가 만지기엔 너무 차갑거든.”

    그가 보란 듯이 보석을 가까운 유리창에 가지고 갔다.

    에덴 스톤이 가까이 지나간 창문에 하얀 서리가 무성하게 피어났다.

    “……!”

    아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루시안이 비딱하게 웃었다.

    과연 라카트옐이 아니라면 결코 쥘 수 없을 물건일 것이 분명했다.

    에덴 스톤을 갈무리 해 넣은 루시안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결계석은 동식물이 타락에 물드는 걸 막아주지.”

    아리엘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에덴 스톤이 마수가 생겨나는 걸 막는다는 거구나.

    어느새 아리엘이 묵을 방 앞까지 도착한 루시안이 저택 복도를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녹스 남작가는 이 호수를 지키는 결계 파수꾼이야.”

    그 때였다.

    아리엘의 머릿속에서 여러 개의 퍼즐이 촤르륵 맞춰진 것은.

    “……아.”

    과거 '그'에 의해 죽음을 맞은 녹스 남작.

    그 녹스 남작의 영지에 있는 거울 호수.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무 권력도 힘도 없는 녹스 남작이 과거에 왜 죽었는지.

    ‘그는 라카트옐의 비밀을 수호하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래서 타락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리라.

    퍼즐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아리엘의 심각한 표정을 본 루시안이 그녀의 하얀 뺨을 잡았다.

    “아야, 르이안.”

    뺨이 흰빵처럼 말랑하게 늘어나는 감각을 느낀 루시안은 아리엘의 뺨을 확 베어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 정말 내일 소풍에 마티어스까지 포함해야겠어?”

    그가 불퉁하게 물었다.

    뺨이 잡힌 채 눈을 글썽이던 아리엘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루시안은 바보야. 난 두 사람 모두랑 가는 게 좋은데.

    결국 그녀는 최후의 보루로 협박 카드를 꺼내놓았다.

    “자꾸 그러면, 두 분만 다녀오라고 할 거예요?”

    그의 오만한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위압적으로 제 눈썹을 내리누르던 루시안이 끝내 어린 아내에게 굴복했다.

    “……셋이 낫겠군.”


    * * *


    다음 날은 가을치고도 따스한 날씨였다.

    소풍 준비는 남자들이 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리엘은 준비할 게 없었다.

    양산을 쓰고, 나들이용 복숭아색 케이프 드레스를 입은 아리엘은 반카와 당근으로 놀이를 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오후쯤 되자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소풍 갈 준비를 마쳤는지 말을 끌고 왔다.

    오후의 나른한 햇빛 속에서 루시안과 마티어스의 모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두 남자가 무언가를 같이 하는 걸 보는 건 아리엘도 처음이었다.

    두 라카트옐 남자들도 뭔가를 같이 하는 게 처음인 것이 확실했다.

    그 증거로 둘의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아리엘은 그 속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둘 다 표정이 어색하잖아요.’

    아리엘은 속으론 웃음이 터졌지만 밖으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힘껏 참았다.

    “이리 와.”

    아리엘을 번쩍 안아 반카 위에 태워준 루시안이 자신도 우아하게 말 위에 올랐다.

    바짝 붙은 게 의식돼서 몸을 꼼지락거리자 루시안이 한 팔로 아리엘의 허리를 단단히 고정했다.

    그가 슬쩍 위협했다.

    “움직이면 위험해.”

    “바, 반카는 나 절대 안 떨어뜨려요.”

    항의하자 루시안에게서 낮고 뇌쇄적인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떨어뜨릴 수도 있잖아.”

    그건 그래. 루시안이랑 있으면 늘 상황이 스펙타클해지니까.

    아리엘은 깊이 납득하며 루시안의 팔 안으로 파고들었다.

    마티어스와 루시안, 아리엘을 태운 말들이 빠르지 않은 속도로 걷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소풍 장소인 호숫가까지 갈 수 있는 속도였다.

    단풍이 가득 물든 갈색빛의 붉은 숲은 포근한 향기가 났다.

    호숫가에 도착하자 아리엘의 눈이 반짝였다.

    어제도 봤지만, 제대로 구경하니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말에서 내린 뒤 아리엘은 신나서 물었다.

    “마티어스님, 마티어스님은 여기 많이 와보셨어요?”

    마티어스가 바람결에 흐트러진 흑발 머리를 넘기며 대답했다.

    “필요한 일이니 왔었지.”

    “그럼 루시안은요?”

    루시안을 향해 묻자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렸다.

    “마찬가지야.”

    아리엘은 하얀뺨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두분 다 놀러온 건 처음이네요!”

    순간 루시안과 마티어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리엘은 둘과 나란히 호숫가를 거닐었다.

    햇볕에 바싹 바른 붉은 낙엽이 기분 좋게 바삭바삭 밟혔다.

    한참 산책을 한 뒤, 마티어스는 준비할 것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아리엘은 루시안이 지켜보는 가운데 호숫가로 다가갔다.

    호숫물은 신기하게도 바람이 불어도 물결이 치지 않고 그대로 거울 같은 표면을 유지했다.

    ‘역시 드래곤의 힘이 들어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그녀는 루시안이 다른 곳을 보는 동안 몰래 호숫물에 손을 담가보았다.

    물은 아주 차갑고 마력을 액체로 바꿔놓은 것처럼 농도가 짙게 느껴졌다.

    아리엘이 호수에 담근 손을 빼려는 순간이었다.

    ‘앗.’

    그녀의 머릿속에 별안간 어떤 이미지가 팟 떠올랐다.

    아리엘은 깜짝 놀라 불에 덴 듯 호수에서 손을 뺐다.

    방금 뭐였지?

    그때, 루시안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가자.”

    그녀는 어느새 다가온 루시안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루시안이 아리엘의 뺨에 손등을 대었다.

    “차갑군.”

    그가 갑자기 아리엘을 확 안아들었다.

    “꺅.”

    아리엘은 놀라서 작은 소리를 냈다.

    루시안이 긴 다리로 걸어 순식간에 마티어스가 있는 곳으로 아리엘을 데려갔다.

    가을 저녁이라 오후는 순식간에 가고 석양이 빠르게 지고 있었다.

    그리고 붉은 햇살 아래, 마티어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아리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안에게 새끼고양이처럼 안겨들린 채임에도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모닥불이 작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저것도 물론, 작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녀는 어제 두 남자와의 대화를 회상했다.

    어떤 소풍을 원하냐는 마티어스의 질문에 아리엘은 책에서 본 소풍을 떠올렸었다.

    “제가 원하는 가을 소풍은, 낮에 나가서 호숫가를 거닐며 구경하다가 낙엽이 깔린 길을 걷는 거예요.”

    그러니까 숲에 대리석 길을 까는 건 절대 안 된다고, 그녀는 루시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에 낙엽이 없는 곳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거죠.”

    “모닥불? 봉화정도의 크기면 되나?”

    봉화?! 아냐, 안 돼!

    아리엘이 라카트옐 영지에서 본 봉화는 거의 저택의 성채 높이만했다.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그녀는 작은 팔을 벌려서 열심히 허공에 모양을 그렸다.

    “그냥 요만큼 정도의 따뜻한 모닥불이요.”

    “모닥불…….”

    “그 앞에 가족들이랑 둘러앉아서, 맛있는 음식을 구워 먹는 거예요.”

    그러자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사슴과 멧돼지 통구이 정도면…….”

    아리엘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눈망울이 되었다.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음, 감자나 버터옥수수 같은 거요.”

    그녀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안이 야릇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맛있게 먹고, 쌀쌀해지면 담요를 두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별 구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거죠.”

    아리엘은 책으로 배운 소풍을 열심히 두 드래곤에게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마치자, 마티어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던 것이다.

    “그게 전부인가? 지나치게 소박한데.”

    하지만 다행히도 어제의 대화 덕분인지 모닥불은 10인용 정도의 크기였다.

    충분히 따뜻하지만 너무 크진 않았다.

    “에취.”

    아리엘이 작게 재채기를 하자 루시안이 낮게 혀를 차더니 아리엘에게 그의 재킷을 벗어 둘러주었다.

    이어서 마티어스가 담요를 아리엘의 무릎에 덮어줬다.

    “저 별로 안 추워요.”

    그녀가 삐약삐약 주장했지만 라카트옐 남자들에게 그 말은 통하지 않았다.

    기분좋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모닥불 앞에 곧 음식들이 잔뜩 준비되었다.

    “와아.”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구울 재료가 가득했다.

    스테이크용 소고기와 파인애플, 먹음직스러운 구운 야채를 꿴 꼬치구이.

    허브를 치고 버터조각과 함께 굽는 랍스터 구이.

    고기가 익는 동안 구워 먹을 수 있는 달콤한 사과 구이와 반으로 잘라 꿀을 뿌린 자몽구이도 있었다.

    열심히 뽈뽈거리며 소풍을 즐긴 아리엘의 배가 꼬르륵 울었다.

    “얼른 먹어요, 우리.”

    그녀는 에피타이저인 과일 구이가 익는 동안 열심히 꼬치구이 재료를 쏙쏙 나무에 꿰었다.

    루시안 건 고기를 덜 익혀야 하니까 빨리 익는 재료들이랑 꽂고, 마티어스님 것은 한참 구울 수 있도록 안 타는 재료랑 꽂아야지.

    어느새 과일 구이에서 달콤한 향기가 진하게 풍겨왔다.

    충분히 구워진 만다린 오렌지를 든 루시안이 희고 긴 손가락으로 껍질을 벗겼다.

    그 모습을 본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루시안, 소드 마나 안 써요?”

    그가 뚱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럼 소멸돼 버리잖아.”

    어, 그건 그렇지만…….

    “원래 절대 직접 손 안 쓰잖아요?”

    루시안이 붉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재미있다는 듯 웃은 그가 아리엘의 입술 앞에 오렌지 속살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강조하듯 말했다.

    “그래, 안 쓰지. 죽어도.”

    아리엘은 의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 제 입 앞에 있는 이 손은 뭐죠? 손 절대 안 쓴다면서.

    “아.”

    루시안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건드리며 말했다.

    얼결에 오렌지를 냠, 하고 받아먹자, 촉촉하게 익은 만다린 오렌지 속살이 입안에서 달콤하게 부서졌다.

    ‘맛있다…….’

    구우니까 오렌지의 즙이 뜨겁고 더 달았다.

    그녀의 오물거리는 입을 빤히 보던 루시안이 쿡 웃었다.

    위험한 미색에 아리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오렌지즙으로 얼룩진 루시안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손에 다 묻었잖아요. 이리 줘봐요.”

    닦아줄게요 하고 덧붙이며 그녀는 루시안의 손을 잡아서 당겼다.

    그리고 옆에 놓인 수건에 물 원소 마법을 걸어 적신 후, 그의 손을 꼬물꼬물 닦아주기 시작했다.

    즙이 묻은 부분을 하나하나 닦다 보니 문득 감탄이 나왔다.

    ‘루시안 손 진짜 크다.’

    아리엘은 몰래 자기 손을 펴서 비교해보았다.

    ‘내 손보다 훨씬 크네.’

    성년을 맞은 루시안은 어느새 마티어스와 키가 비슷해졌고, 그만큼 손도 커졌다.

    키가 저렇게 크니까 손도 당연히 크겠지만…….

    ‘남자 손이 왜 이렇게 예쁜 거야…….’

    아리엘은 혼자 뾰로통하게 생각했다.

    루시안의 손등에는 푸른 핏줄이 조각상같이 아름답게 도드라져 있었다.

    ‘또 손가락은 어떻고.’

    그의 긴 손가락은 깃펜을 잡든, 검을 잡든, 아님 지금처럼 과일 즙을 묻히든 지독하게 나쁜 상상력을 자극하는 퇴폐미를 풍겼다.

    ‘앗, 이렇게 조물거리고만 있으면 안 되는데.’

    감탄하느라 닦는 손길을 늦추었던 아리엘은 서둘러 다시 손을 놀렸다.

    그때, 뒤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

    뒤를 돌아보자 방울 토마토를 터트리는 바람에 손이 더러워진 마티어스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 마티어스님?”

    마티어스가 난감한 듯 눈썹을 움직였다.

    “이런, 묻어 버렸군. 꼬치가 다 익어서 빼 주려다보니.”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완벽해보이는 마티어스님도 실수를 하시는구나.’

    안하던 일을 하시려니까 그런가봐.

    하여간 칠칠치 못하다니까, 라카트옐 남자들.

    아리엘은 왠지 모르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느끼며 마티어스의 손도 낑낑대며 열심히 닦아주었다.

    그것에 집중하느라 그녀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시선이 날카롭게 마주치고, 마티어스가 슬쩍 승리의 미소를 짓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

    “자, 아리엘라.”

    마티어스가 꼬치에서 빼낸 스테이크 조각을 아리엘의 입에 넣어주었다.

    무심코 고기를 받아먹은 아리엘은 당황해버렸다.

    “참, 마티어스님. 손이 또 더러워지신걸요.”

    그녀는 조그만 미간을 모으고 마티어스의 손을 닦아줬다.

    하지만 마티어스는 아리엘에게 또 다시 구운 파인애플과 방울토마토를 집어 주었다.

    아리엘은 양 뺨이 가득해진 채 혼미함을 느꼈다.

    잠깐, 무한 반복인가요, 이거?

    “계속 내가 주고 네가 먹으면 되겠구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마티어스님…….”

    완전히 저한테만 좋은 일이잖아요?

    그 의문에 대답하듯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대신 네가 내 손을 닦아주니까 말이다.”

    그…… 그런가?

    그런데 루시안 쪽에서 ‘와직’하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지?

    아리엘은 기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얌전히 구워지고 있던 허브 버터 랍스터를 한 손으로 으깨버린 루시안이 살벌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손에 뜨거운 기름과 허브 소스가 가득 흐르고 있었다.

    “아리엘라, 내 손이 더 심각해 보이지 않아?”

    아리엘은 울상을 지으며 루시안에게로 달려갔다.

    정말. 왜 이러는 걸까요, 루시안은.

    달려오는 아리엘을 보며 루시안은 마티어스에게 승리의 웃음을 더 비딱하게 돌려주었다.


    * * *


    “맛있어요…….”

    버터와 허브 솔트를 뿌려 익힌 랍스터구이는 입에서 살살 녹았다.

    비록 하나는 루시안의 손에 희생됐지만, 남은 랍스터구이만으로도 세 사람이 먹기에 충분했다.

    버터를 촉촉하게 머금은 랍스터 속살이 쉴 틈 없이 아리엘의 접시 위에 올랐다.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경쟁적으로 랍스터를 까서 아리엘에게 건넸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그들의 손을 닦아주는 건 오롯이 아리엘의 몫이었다.

    그녀는 작은 머리통을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하지만 아리엘의 입가에는 조그만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유니스 일로 자신도 모르게 마음 고생을 한 후라서 그런지, 마티어스와 루시안과 이렇게 함께 있는 시간이 아리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많이 마음이 아프고 트라우마가 컸던 모양이었다.

    그런 일을 겪은 자신을 위해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소풍을 준비해준 것 같아서 아리엘의 마음은 간질간질하고 기뻤다.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정말 좋다.’

    보통 사람에겐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위압감에 질식할 것 같은 라카트옐 남자들이지만…….

    아리엘에겐 이 두 사람 옆에서보다 더 따뜻했던 기억이 없었다.

    스테이크 과일 꼬치구이와 랍스터 구이를 다 먹고 나자, 하늘 끝에 희미하게 남은 석양마저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어슴푸레한 호숫가에 모닥불 주위만 둥글게 밝고 따스했다.

    그 때, 마티어스가 옆에 있던 커다란 바구니를 열고 뭔가를 꺼내놓았다.

    아리엘은 호기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또 뭔가요?

    마티어스가 모닥불 주위에 둘러져있는 돌들 틈 사이로 긴 나뭇가지를 줄 세워 비스듬히 기대 놓았다.

    그러자 루시안이 거기에 간식거리들을 꽂아 굽기 시작했다.

    아기 궁둥이처럼 말랑한 마시멜로와 속이 꽉 찬 소시지였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이건…….’

    어제 아리엘이 열심히 설명했던 모닥불 소풍과 매우 비슷해 보였다.

    순식간에 마무리를 지은 두 라카트옐은 이게 맞는지 가늠해보는 것 같았다.

    마치 ‘제대로 된건가?’라는 눈빛이어서 아리엘은 포스스 웃음이 났다.

    아리엘의 웃음을 보고서야 두 남자의 심각한 표정이 풀렸다.

    모닥불 가에는 이제 통통한 소세지와 마시멜로가 막대에 꽂혀 구워지고 있었다.

    아리엘은 양손으로 뺨을 괴고 표면이 살짝 지글거리는 소세지와 마시멜로를 보며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티어스가 말했다.

    “이거 괜찮구나. 집에 모닥불 가든을 만들어주마.”

    모닥불 가든?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것도 있나요?

    지금의 그녀는 이 일이 유리 온실 뺨치는 대형 공사가 될 거란 걸 예측하지 못했다.


    * * *


    마티어스가 디저트를 가져오겠다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리엘은 루시안 쪽을 힐끔거렸다.

    “저…… 루시안, 안 추워요?”

    아리엘에게 겉옷을 벗어준 루시안은 흰 셔츠 위에 검 띠와 연결한 하네스만 걸친 차림이었다.

    가을밤이라 쌀쌀해서 아리엘은 걱정이 앞섰다.

    “추우면 옷 돌려줄까요? 나 담요 걸치면 돼요.”

    춥냐는 물음에 어이없다는 듯 슬쩍 눈썹을 치켜든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기온 따위는 날 춥게 못…….”

    말을 잇던 와중 그가 돌연 짙은 청색의 눈을 빛냈다.

    그리곤 장막 같은 제 속눈썹을 천천히 유혹적으로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본 아리엘의 심장이 콩닥콩닥, 주인의 의지를 배신하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맞아, 추워.”

    아리엘은 허둥지둥 그의 재킷을 벗었다.

    “그럼 얼른 입어요.”

    나른한 눈빛으로 그 재킷을 받아든 루시안은 제 어깨에 성의 없이 옷을 걸쳐놓았다.

    “아직도 추운데.”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떡하지? 그럼…….

    그때, 그가 제 재킷 한쪽을 들추며 유혹적으로 말했다.

    “네가 따뜻하게 해줘.”

    순식간에 아리엘의 뺨이 붉어졌다.

    루시안은 아무것도 아닌 말을 묘하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그런데 저 재킷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가면…….

    ‘너무 붙어있게 되는 거 아니야?’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던 루시안이 경계 많은 토끼를 꾀듯 느른하게 말했다.

    “어서, 감기 걸리기 전에.”

    모닥불 불빛이 어른거리며 루시안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비추었다.

    불가에 비친 위험한 미색이 아리엘을 홀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가서 루시안의 재킷 안으로 쏙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가 인내심 없이 아리엘을 제게 바짝 끌어당겼다.

    ‘응? 그런데…….’

    루시안의 재킷 안에 감싸인 그녀는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뭐야, 루시안이 내 몸보다 훨씬 따뜻하잖아요.’

    꼭 난로 같아.

    항의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몸이 따스해지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헤헤, 좋다…… 아리엘은 몰래 헤실헤실 웃었다.

    “이제 따뜻해요?”

    재킷 자락 밖으로 꼼지락꼼지락 목을 빼고 묻자 루시안이 비딱하게 웃었다.

    “훨씬.”

    와, 내가 드래곤을 따뜻하게 했어!

    뭔가 자랑스러운 기분으로 아리엘은 동동 발장구를 쳤다.

    루시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부터 귓가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뜻밖의 행동에 아리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

    이렇게 그가 자신을 만질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혹시나 내가 이 남자한테 특별한 건 아닐까, 하는.

    ‘다른 사람한테는 손도 못 대게 하면서 내가 만지는 건 안 혼내고.’

    또, 다른 인간에게 손대는 걸 혐오하면서 그녀를 만지는 건 꽤 좋아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딱히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착각하면 안 되는데. 나만 특별하다고…….’

    루시안은 인간에게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했으니까.

    그에게 직접 들은 말이었다.

    자신은 인간이고, 루시안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건 소유욕 이상은 아닐 것이다.

    한참 만에 그녀는 입을 열어 물었다.

    “있잖아요, 루시안. 거울 호수랑 루시안이 반응하면 뭐가 보이나요?”

    루시안이 의외라는 듯 대꾸했다.

    “그런 의문을 가질 줄은 몰랐는데.”

    “원래 라키엘의 눈이었으니까, 루시안이나 마티어스님은 뭔가 특별한 걸 보게 되지 않을까 해서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루시안이 입술을 벌렸다가 닫았다.

    “나는…….”

    그가 사파이어같은 푸른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걸 보게 되지.”

    진정으로 바라는 것?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안한테도 그런 게 있을까?

    혹시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쉽사리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내가 아까 본 건 뭐였을까?’

    낮에 호숫물을 만졌을 때, 어떤 장면이 갑작스레 눈앞에 보였었다.

    한참 고민하던 아리엘은 마시멜로 하나에 불이 붙어서 타는 바람에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앗. 루시안, 불!”

    아리엘은 얼른 마법을 구동했다.

    “실버 스프링.”

    은빛의 물 원소 마법이 구동되자 마시멜로에 붙은 불은 금세 꺼졌다.

    하지만 새카맣게 타버린 마시멜로는 다시 살려낼 수 없었다.

    아리엘이 시무룩해 하자, 루시안이 소드 마나로 타버린 마시멜로를 모닥불 밑의 재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리엘이 모르는 사이 새까매진 고기 꼬치도 몸으로 슬쩍 가려 숨기며 같이 재 속에 묻었다.

    증거를 완벽히 인멸하는 루시안의 솜씨에 아리엘은 결국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그녀는 마시멜로가 타지 않도록 열심히 꼬치를 돌려주며 물었다.

    “근데요, 루시안. 눈 하나는 거울 호수에 있는데 나머지 한 눈은 어디 있어요?”

    루시안이 여유롭게 낮은 웃음 소리를 냈다.

    “그것도 역시 숨겨져 있어.”

    “심장도요?”

    잠시 침묵하던 그가 아리엘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래.”

    둘의 대화는 돌아온 마티어스로 인해 끊어졌다.

    마티어스가 오자마자 아리엘을 담요로 둘둘 싸서 루시안의 재킷 안에서 빼내 갔기 때문이었다.

    “앗, 마티어스님!”

    털 담요에 돌돌 말린 채 들어 올려진 아리엘은 놀라서 바둥거렸다.

    아리엘을 루시안에게서 멀찍이 옮겨 앉힌 마티어스가 딱딱하게 말했다.

    “아리엘라는 아직 어리다.”

    느리게 팔짱을 낀 마티어스가 루시안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어떻게 봐도 아직 애기야. 그러니 집적대지 마라.”

    재킷을 한쪽 어깨에만 걸친 상태의 루시안이 방만한 시선으로 마티어스의 눈빛을 되받았다.

    “아리엘은 내 아내이기도 할 텐데.”

    마티어스가 서늘하게 대꾸했다.

    “이 이상 집적대면 아무리 너라도 얘기가 달라지겠지.”

    아들에게 단호하게 선언한 그가 아리엘 쪽으로 돌아섰다.

    “아리엘, 절대 저 녀석에게 넘어가선 안된다. 알겠지?”

    넘어가요?

    아리엘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시 아까 재킷 같이 덮은 것 때문인가?’

    그녀는 돌돌 싸인 담요 속에서 낑낑 움직이며 말했다.

    “하지만, 마티어스님. 루시안이 춥다고 했는데…….”

    그녀의 말을 들은 마티어스가 어이없다는 듯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오만한 눈빛으로 앉아있던 루시안이 슬쩍 제 머리를 헝클며 시선을 돌렸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담요를 정리해주었다.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네 나이 땐 크는 게 일이지. 그냥 이렇게 우리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그가 핫초코가 가득 담긴 잔을 아리엘의 손에 쥐여주었다.

    짙은 초콜릿 음료를 본 아리엘의 뺨이 상기됐다.

    “핫초코…….”

    두 남자는 초콜릿 음료에 입도 대지 않았지만, 아리엘은 모두의 잔에 불 원소 마법을 걸어서 음료가 식지 않도록 만들었다.

    “우리 짠 해요, 짠.”

    아리엘의 말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핫초코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서로의 잔에는 닿지 않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리엘은 키득거리며 그들의 잔에 한 번씩 잔을 부딪쳤다.

    하얀 마시멜로를 불에 가져다 대자 갈색으로 녹진녹진 녹아내리며 달콤한 향기가 진동했다.

    익어서 겉이 살짝 그을고 껍질이 갈라진 소시지는 짭쪼롬하고 육즙이 한껏 배어 나왔다.

    마시멜로를 한 입 베어 물고 뜨거운 핫초코 컵을 손에 쥐자 행복이 밀려왔다.

    ‘행복해.’

    마티어스가 흡족하게 아리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런 걸 해야 어린애가 자라는 거다.”

    아리엘은 노곤하게 방긋방긋 웃다가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마티어스님, 자꾸만 어디서 그런 상식을 가져오시는 건가요?


    * * *


    다음날,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침실에서 눈을 뜬 아리엘은 기분 좋게 뒹구르르 움직였다.

    ‘오늘 집에 가겠네.’

    녹스 영지에서 생긴 추억들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미소가 새어 나왔다.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마음속에 상처를 끌어안고 있었지만, 끝내 친부모와 혈육들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라카트옐 가족들과 소풍도 즐겼다.

    이제 가을이 지나면 루시안도 졸업하니까, 완전히 집에 오겠지?

    ‘좋다.’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연한 에메랄드색 망토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침실을 나섰다.

    망토를 고정한 은색 리본이 목 부근에서 하늘하늘 흔들렸다.

    아리엘은 돌아갈 채비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때,

    “어?”

    빠르게 말을 몰아 녹스 저택 정문을 통과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리엘의 눈에 들어왔다.

    맨 앞에서 말을 달리는 사람을 알아본 그녀는 서둘러 현관으로 나갔다.

    다급하게 말에서 뛰어내리던 사람이 아리엘을 보고 멈칫했다.

    잎새 같은 색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디트리히 전하.”

    아리엘은 총총 그에게 다가갔다.

    바람에 흐트러진 골든 블론드를 정리하며 황태자 디트리히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공자비.”

    “어쩐 일이세요? 기별도 없이 이렇게 급하게…….”

    갑자기 아리엘과 마주친 것에 당혹한 듯 보이던 그가 쓰게 웃었다.

    “대공과 대공자를 만나야 해서요. 긴히 전할 말이 있는지라.”

    “아…….”

    대답하고 나서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렸다.

    이번에 아리엘의 친모가 로잘린드 공주로 밝혀지면서 두 사람이 사촌지간이라는 사실을 서로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기에 오늘따라 표정이 어두우시지?’

    늘 반짝이던 디트리히는 오늘 어쩐지 야위어 보였고, 녹음 같은 눈동자도 퍽 고통스러워 보였다.

    디트리히는 복잡하게 수런대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랑스러운 소녀는 결국 그의 사촌 누이로 밝혀졌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상대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수백, 수천 번 되뇌었는데도 막상 아리엘을 마주하자 마음이 괴로웠다.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임을 오래전부터 예감하고 있었음에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다른 이의 아내였으니까.’

    이제는 홀로 하는 짝사랑마저도 옳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영원히 자신의 연심은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아리엘을 동경하고, 그녀에게 감탄하고, 그녀를 염려하는 것조차도 이제는 오라비의 자리에서만 할 수 있었다.

    아니, 오라비의 자리라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려나.

    어지러운 마음을 감추고 디트리히는 아리엘에게 웃어주었다.

    “이제 아리엘라 라고 불러야겠군요.”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살짝 놀라서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친오빠 제롬에게 한 번도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었다.

    사촌 오빠이긴 하지만, 친혈육이 이름을 불러주자 어색하고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전…….”

    호칭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머뭇거리자 디트리히가 부드럽게 막았다.

    “다음에요. 아직 오라버니란 소리까지 듣기는 좀 어려울 것 같으니.”

    마침 아리엘을 찾아 나온 루시안이 디트리히를 보고 사납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디트리히는 자신을 급하게 여기로 달려오게 한 소식을 떠올렸다.

    그가 품속에서 황제의 전언이 적힌 두루마리를 꺼내 루시안에게 건넸다.

    “급한 전갈이다. 대공자.”


    * * *


    아리엘이 마티어스를 부르러 간 사이, 응접실로 안내받은 디트리히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국경이 무너졌다. 에덴 스톤이 모두 파괴됐어.”

    결계석인 에덴 스톤이 파괴되면 마수의 침입이 가능해진다.

    더불어 새로이 마수가 생겨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듣는 루시안의 눈에서 온기가 서늘하게 식어 사라졌다.

    “국경 숲 지대에서 닥치는대로 마수들이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야.”

    디트리히의 설명에 루시안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에덴 스톤은 아주 강력한 타락의 힘으로만 부수는 게 가능했다.

    “……그놈이 강해졌군.”

    디트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은 확실해. 라키엘이 처음 베었던 이후, 몇천 년간 타락은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지.”

    그런데 제국 사냥대회를 기점으로 타락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수 가고일 떼의 습격과 유니스 사건까지.

    그리고 이제 국경을 지키던 에덴 스톤에도 문제가 생겼다.

    루시안은 깊게 눈을 감았다.

    “라카트옐은 오래 기다렸다. 그만큼 타락도 오래 때를 기다렸어.”

    짧게 고개를 끄덕인 디트리히가 황제의 전언을 마저 전했다.

    “당장 대공과 대공자 네가 나서줘야 할 것 같다. 마수가 몰려들고 있는 한, 일반 기사단으로는 막는 게 불가능해.”

    “내가 가지.”

    대답을 기다릴 틈도 없이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대공은?”

    디트리히가 묻자 루시안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둘다는 안 돼. 아리엘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니까. 나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가 기대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서 오싹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마티어스는 아리엘을 지키라고 해. 내가 빠르게 처리하고 돌아올 테니.”

    아리엘이 마티어스를 불러오자 디트리히가 그들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루시안이 국경으로 가기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푸른 사자 기사단도 함께 출정시키지.”

    디트리히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황실 마법사 군단과 황실 기사단도 지원을 나갈 겁니다, 대공.”

    루시안은 빠르게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녹스 영지에서 곧장 국경으로 떠나야 했다.

    워프를 돕기 위해 디트리히가 데려온 마법사들이 게이트 대신 마력을 모아 루시안을 이동시켜 주기로 했다.

    떠나기 전,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돌아섰다.

    별일 아니라는 듯 그가 오만하게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아리엘라. 마티어스 옆에 잘 붙어 있어. ……안전하게.”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뭔가 질척하고 진득한 미련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아리엘이 얼어붙은 채 가만히 서 있자 그가 그녀의 얼굴을 느리게 어루만졌다.

    고개를 기울인 루시안이 그녀를 갑작스럽게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뭔가 더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는 듯 팔을 거두고 돌아섰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대공, 대공자비.”

    디트리히가 앞서 걸어가는 루시안 뒤를 따르며 조용히 인사했다.

    황실 마법사들이 힘을 모아 마력을 쏟아붓자, 거대한 이동 마법진이 열렸다.

    마법진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루시안의 뒷모습이 그림자처럼 어두웠다.

    ‘어, 이대로 가버리면…….’

    루시안의 모습이 사라질 때쯤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다.

    “루시-”

    하지만 조그마한 그녀의 부름은 마법진이 발동됨과 동시에 묻혀버렸다.

    파앗!

    밝은 빛과 함께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루시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리엘은 망연해졌다.

    “루시안.”

    상황이 좋지 않고, 마수가 쳐들어왔으니 당장 루시안이 필요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루시안이 사라진 방향으로 뻗어졌던 조그만 손이 툭 아래로 떨궈졌다.

    그렇게 황망히 루시안이 국경으로 떠난 후.

    제국 전역으로 국경에서 일어난 마수 전쟁 소식이 퍼져나갔다.

    루시안의 뒤를 이어 라카트옐 가의 푸른 사자 기사단은 일부만 남고 모두 빠르게 출발했다.

    아리엘의 호위였던 소드마스터 헥터와 랄프도 국경으로 떠났다.

    루시안과 푸른 사자 기사단이 최전방에서 중급 이상 마수를 상대하는 사이, 황실 마법사들과 제국 기사단이 하급 마수를 상대하기로 한 것이다.

    “마티어스님. 저도 가게 해주세요.”

    그 소식을 들은 아리엘이 마티어스에게 간절하게 말해봤지만, 허락은 받지 못했다.

    “아리엘라, 넌 고작 열네 살이야. 너무 어리지. 기사단도 성년 이하는 뽑지 않는다.”

    “하지만 저도…… 저도 싸울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루시안을 지켜주기로 약속했었는걸요.

    그녀는 조그맣게 울먹이며 말했다.

    마티어스의 큰 손이 아리엘의 머리를 덮듯이 감쌌다.

    “안다. 하지만 네가 더 강하고, 더 나이를 먹었더라도 보내고 싶지 않구나. 네가 조금이라도 다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고 싶지 않으니.”

    그렇게 한 계절이 흘렀다.


    * * *


    12월, 한 해의 끝자락.

    겨울이 된 후에도 마티어스와 아리엘은 북부 영지로 가지 않고 겨울 내내 수도에 머물렀다.

    루시안 쪽에서는 승전보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결계석이 파괴된 여파가 커서 여전히 국경은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리고 가장 문제는…….

    “편지에 답이 안 와요!”

    아리엘은 두 주먹을 꼭 쥐고 침대를 콩콩 내리쳤다.

    그런 그녀를 본 수잔이 부드럽게 웃으며 커튼 줄을 매듭지어놓고 곁에 앉았다.

    “대공자님이 계속 편지 답장을 안하시는 거군요.”

    “네…….”

    아리엘은 속상한 마음에 고개를 떨구었다.

    루시안이 떠난 후로 그녀는 며칠에 한 번씩 꼬박꼬박 편지를 썼다.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써넣은 후, 편지 봉투에 실링 왁스를 붓고, 그 위에 말린 꽃가지를 얹은 후 라카트옐 인장을 꾹 찍었다.

    ‘이러면 편지를 받았을 때 은은하게 꽃향기가 나겠지?’

    배달되는 동안 상하지 말라고 2중 3중으로 보호 마법까지 꽁꽁 걸어서 보냈는데……!

    보낸 편지가 열 통이 넘도록 루시안에게서는 답장 한 장이 없었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연전연승이었고, 루시안에게 혹시라도 피해가 있었다면 소식이 없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아리엘의 작은 어깨가 내려갔다.

    수잔이 저런, 하면서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쩌면 편지에 입술 도장을 안 찍어 보내서 답장이 안 오는 게 아닐까요, 아기 마님?”

    “뽀, 뽀뽀도 했는걸요.”

    억울한 마음에 얼른 대답하고 나자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수잔이 귀엽다는 듯 아리엘의 이마에 쪽쪽 입을 맞춰주었다.

    “그럼 분명 답장을 못 하시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아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루시안은 편지에 답장 같은 걸 하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그곳은 전장이니 시간을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루시안은 인간의 감정을 모른다고 했으니 기다리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시무룩해진 아리엘을 달래기 위해 수잔이 말을 꺼냈다.

    “곧 친구분들이 오시면 모닥불 가든에서 따뜻한 크림 스프를 드시는 게 어때요? 바삭바삭한 크루통도 듬뿍 넣어드릴게요.”

    모닥불 가든과 크림 스프 이야기에 아리엘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가을 소풍 이후, 마티어스는 몇 백 명을 동원해 유리 온실보다 더 큰 모닥불 가든을 만들어 선물했다.

    모닥불 가든은 화이트 가든과 블랙 가든의 중앙에 설치되어서 두 정원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가든의 중앙에는 거대한 벽돌 벽난로가 들어가 항시 타오르고, 벽난로 주위를 상아색 석조로 된 파고라(기둥과 대들보로 이뤄진 형태)가 아치처럼 둘러쌌다.

    아름다운 파고라 안쪽에는 적색 융털 양탄자가 깔려있었고, 안락한 소파와 키 낮은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쿠션이 올라간 목재 의자들과 부드러운 양털 가죽 해먹도 있었다.

    그뿐일까?

    모닥불 가든 안에는 실제 촛불과 비슷한 색감의 마법등이 설치됐다.

    섬세한 공예를 넣은 둥근 유리 안에 마법등이 들어가 가든 안은 항상 밝고 따스한 분위기를 냈다.

    가장 놀라운 건, 이 모닥불 가든에 걸린 마법이었다.

    ‘분명 겨울 야외인데 가든 안으로 들어가면 춥지 않으니까.’

    유리 온실처럼 실내가 아닌데도 모닥불 가든은 항상 훈훈했다.

    가든 밖은 눈이 함빡 내린 겨울이어도 가든 안으로만 들어가면 벽 난롯가처럼 따스해지는 것이다.

    이런 마법을 만들기 위해 브루노어는 한 달간 이 일에만 집중해야 했다.

    모닥불 가든이 완성된 후, 마티어스는 그 안에 초콜릿 분수를 놓아 주었다.

    ‘어린애는 단것을 많이 먹어야지.’

    아리엘과 친구들은 여태 몇 번이나 초콜릿 분수 앞에서 퐁듀를 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스프를 마시며 오후를 보내는 건 멋진 일일 것이다.

    넓은 양손 머그잔에 스프를 가득 담고, 그 위에 먹음직스럽게 구운 빵조각 크루통을 띄운 크림 스프는 아리엘이 좋아하는 겨울 별미였다.

    자신을 생각하는 수잔의 마음이 느껴져서 아리엘은 수잔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좋아요, 수잔.”


    * * *


    일년의 가장 큰 절기 중 하나인 12월 에드벨 절기가 돌아왔다.

    에드벨은 세상의 모든 생명 탄생을 축복하는 의미의 절기로, 그 날에는 큰 나무에 달걀 장식을 했다.

    그리고 달걀로 만든 음식을 가득 차려 가족들과 나눠 먹곤 했다.

    루시안이 떠난 후로 줄곧 조용하게 지내던 아리엘도 에드벨 절기만큼은 조금 의욕을 냈다.

    ‘처음인걸. 가족과 에드벨을 보내는 건.’

    에드벨 절기는 12월인데 라카트옐의 특성상 12월은 함께 지내기 어려웠다.

    ‘마티어스님과 루시안, 기사단까지 모두 북부 산맥에 토벌을 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매해 있는 듯, 없는 듯 지나쳤던 에드벨 절기였다.

    하지만 올해는 마티어스가 북부 토벌을 가지 않아서 아리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모처럼 마티어스님도 같이 계신 에드벨 절기니까 함께 따뜻하게 보냈으면 좋겠어요.”

    아리엘의 말을 들은 노집사 알렌이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띠며 허리를 굽혔다.

    수잔도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웃었다.

    “모두들 좋아하겠군요. 아기 마님께서 계시니 라카트옐에서 에드벨 절기도 크게 치러보고.”

    아리엘이 기운을 차리자 저택 사용인들은 모두가 기뻐 날뛰며 집안을 장식해대기 시작했다.

    빛이 나는 마나 물감으로 칠한 달걀 장식들이 복도마다 걸리고, 커다란 가문비나무를 잘라와 달걀 장식을 걸었다.

    그런 와중, 아리엘은 결심을 했다.

    ‘국경에 나가 있는 루시안이랑 기사단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

    에드벨 절기로 전 제국이 축제 분위기인데, 매일 마수의 공격을 막아야 하는 전장터는 삭막할 게 분명했다.

    “뭔가 기사들과 루시안이 좋아할 만한 게 없을까요?”

    아리엘은 수잔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아리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빗겨주고 있던 수잔이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이런 건 어떨까요?”

    아리엘은 궁금함에 수잔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기대로 눈을 반짝거리는 아리엘을 보며 후후 웃은 수잔이 소곤소곤 말했다.

    “사실 전쟁터에는 단 것이 잘 없지요. 기사들 중에서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도 토벌만 나가면 단 것을 보내달라고 한대요.

    토벌 때 푸른 사자 기사단에게 평소보다 영양가가 매우 좋은 음식만 잔뜩 공급해주는데도 말이지요.”

    영지 쪽 본가 사람들에게 들었답니다.

    수잔이 아리엘에게 눈을 찡긋했다.

    와! 수잔은 뭐든지 다 아는 요술 상자나 지혜의 책 같아요!

    한참 수잔과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눈 아리엘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맛있는 쿠키를 구워서 보내줘야겠어!’

    그런데 무슨 쿠키를 보낸다지?

    에드벨 절기니까 달걀 모양 쿠키? 아니면 계란 과자?

    끄으응 고민하던 아리엘의 머릿속에 좋은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랐다.

    ‘맞아.’

    에드벨은 모든 생명 탄생을 축복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탄생을 상징하는 달걀을 장식하거나 요리로 먹는 거고.

    그리고 바로 그 달걀에서 태어나는건…….

    ‘병아리!’

    그렇게 아리엘이 구울 쿠키는 병아리 쿠키로 정해졌다.


    * * *


    쿠키를 굽기로 한 아리엘은 가장 먼저 주방장 홀슨을 포섭했다.

    마냥 어리게 느껴지는 아기 마님이 쿠키를 굽겠다고 나서자 홀슨은 안절부절 못했다.

    “제가 다 구워 드리면 안 될까요, 아기 마님?”

    쿠키 반죽을 밀고 쿠키를 굽기엔 아리엘이 너무 연약해 보였다.

    물론 아리엘이 쿠키를 만들다가 털끝 하나라도 다치면 마티어스가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리엘은 열심히 졸랐다.

    “안 돼요. 홀슨은 다른 음식하기에도 바쁘잖아요. 그리고…….”

    아리엘의 뺨이 살그머니 붉어졌다.

    “내가 루시안에게 직접 만들어주고 싶단 말이에요…….”

    홀슨의 입꼬리가 헤벌쭉 올라갔다.

    무서운 대공자님 옆에 어쩜 이렇게 귀여운 분이 들어오셨을까?

    할 수 없이 그는 아리엘에게 쿠키 굽는 법을 가르쳐주고 말았다.

    “일단 반죽부터 할까요?”

    홀슨이 시키는 대로 버터와 밀가루, 달걀을 넣은 반죽을 꼬물꼬물 만든 뒤 병아리 모양 틀에 찍어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구우면 되나요, 홀슨?”

    “그러믄요.”

    병아리 모양 쿠키 한 판이 먹음직스레 구워지는 동안, 아리엘과 홀슨은 쿠키 위에 바를 달콤한 아이싱을 만들었다.

    병아리 색깔의 연노랑색 아이싱 위에는 초콜릿칩으로 부리와 눈을 그릴 예정이었다.

    쿠키를 한 김 식히고 아이싱을 바르자 병아리 쿠키가 거의 완성됐다.

    아리엘은 쿠키 한 판 중 딱 한 개만 연노랑색 아이싱 대신 핑크색 아이싱을 발랐다.

    홀슨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물었다.

    “그건 뭔가요, 아기 마님?”

    “이, 이건…….”

    아리엘은 부끄러움에 입술을 잘근거렸다.

    “루시안한테만 줄 쿠키예요.”

    뭔가 그가 자신을 떠올릴 만한 걸 넣고 싶은데, 색깔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핑크색 아이싱이 얹어진 쿠키라면 자신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리고 편지에 답장을 보내주지 않을까?

    아이싱이 발린 병아리 쿠키 위에 초콜릿으로 열심히 눈과 부리를 콕콕 찍어주고 ‘완성!’을 외치는 순간이었다.

    벌컥.

    갑자기 주방의 문이 거세게 열리더니 마티어스가 걸어 들어왔다.

    아리엘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

    “마티어스님?!”


    * * *


    아리엘이 쿠키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은 빠르게 집무실에 있는 마티어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들이닥쳐 아리엘이 들고 있는 짤주머니를 자연스럽게 빼앗은 그가 흉흉한 기세로 말했다.

    “아리엘라, 누가 너에게 이런 위험하고 수고스러운 일을 시켰지?”

    마티어스의 서늘한 시선이 홀슨을 향했다.

    “주방장인가?”

    아리엘은 화들짝 놀라며 조그만 몸으로 홀슨을 막아섰다.

    물론 풍채가 당당한 홀슨의 몸은 반의 반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거대한 제 덩치를 최대한 오므려 아리엘의 조그만 그림자에 숨으려 애썼다.

    “제가 부탁한 거예요. 기사단이랑 루시안에게 에드벨 쿠키를 보내주려고…….”

    마티어스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네가 다칠 수도 있다.”

    으응? 다치고 싶어도 다칠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인걸요?

    아리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밀가루와 버터와 달걀. 그리고 설탕.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

    해로운 건 하나도 없고 맛있는 것만 있는데?

    하지만 마티어스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쿠키가 구워지는 뜨거운 화덕과 끝이 날카로운 쿠키 틀을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위험해.”

    주방 어디에도 마수같이 위험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마티어스님도 정말…… 과보호시라니까.’

    그러고 보니 마티어스에게도 쿠키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리엘은 자신이 구운 쿠키 한 판을 들고 방긋 웃으며 자랑을 했다.

    “이거 보세요, 마티어스님.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병아리 쿠키를 들고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아리엘을 본 마티어스의 얼굴이 일순간 느슨해졌다.

    그가 아리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널 닮았구나.”

    네? 어디가요?

    아리엘은 쿠키 판에 오종종 모여있는 병아리 쿠키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제 모습이 꼭 햇병아리 같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빤히 보여서, 마티어스는 아리엘을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기사단 전체가 먹을 것까지 네가 만드는 건 안 된다.”

    “어, 그래도…….”

    마티어스가 단정한 낯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굽고, 넌 위험하지 않게 ‘눈코입’만 붙인다면 허락하마.”

    그렇게 아리엘이 직접 구운 핸드 메이드 쿠키는 한정판이 되고 말았다.

    아리엘은 홀슨이 구워준 귀여운 병아리 쿠키들에 열심히 눈과 부리를 달았다.

    초코칩만 콕콕 올리면 되는 쉬운 작업이었지만 눈코입을 예쁘게 배치하려다 보니 꽤 정성이 들어갔다.

    “다 됐어요!”

    쿠키가 완성되자, 아리엘은 수잔과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기사단에게 줄 쿠키들을 꼼꼼하게 포장했다.

    루시안 것에는 자신이 직접 구운 쿠키만 넣었다.

    분홍색 아이싱이 올라간 병아리 쿠키도 끼워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루시안 것을 빼고 남은 아리엘 메이드 쿠키는 몽땅 마티어스 손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보내는 편지에 신신당부를 덧붙였다.


    [루시안 것만 내가 직접 구웠어요. 기사들 몫 빼앗으면 안 돼요!]


    자나깨나 라카트옐 조심이지.

    아리엘은 써놓은 편지를 다시 읽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 *


    라카트옐의 에드벨 절기는 예상과 달리 적적하지 않았다.

    태후가 에드벨만큼은 손녀를 보고 싶다고 해서 마티어스가 대공저로 태후와 아리엘의 친구들, 그들의 가족까지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다이아나는 모니카 공작 부부와 함께 왔고, 혼자 온 세실은 훈련을 함께 하며 친해진 대공가 기사들과 어울렸다.

    몸이 좋지 않았던 태후는 아리엘을 되찾은 후로 놀랍도록 건강을 회복해서 모두의 축하를 받았다.

    “자, 아리엘. 할마마마, 해보렴.”

    그리고 요즘 태후는 아리엘에게 할머니 소리를 듣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아리엘은 호칭을 바꿔 부르려다가 부끄러워서 매번 실패하곤 했다.

    한 번도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존재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

    할머니인 태후가 좋으면서도 왠지 ‘할마마마’라는 호칭 앞에만 서면 낯가리는 아이처럼 쭈뼛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태후와 함께 온 황태자 디트리히가 이쪽을 씁쓸하게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역시 원래 있던 손자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걸까? 태후 마마께서 나에게 마음을 쏟으시는 게.’

    예쁨 받는 손자 입장이라면 질투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잠시 그녀와 태후 사이를 바라보던 디트리히가 아리엘에게 말을 건넸다.

    “아리엘라, 할마마마께서 듣고 싶어 하시는데 불러드리면 어떨까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아리엘은 태후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전하께선 괜찮으신가요?”

    아리엘의 질문에 디트리히가 갑작스레 동요하며 헛기침을 했다.

    “쿨럭, 그게 무슨……!”

    그녀는 당황해서 얼른 대답했다.

    “제가 전하와 태후 마마의 애정을 나누어 가져도 괜찮으시냐는 말씀이었어요.”

    “당연히 괜찮습니다.”

    디트리히는 붉어진 얼굴을 겨우 가라앉히며 손사래를 쳤다.

    혹여 아직 정리하지 못한 마음을 들켰을까 봐 놀랐는데, 아리엘의 의도가 한없이 순수했다는 걸 깨닫자 부끄러워졌다.

    그는 태후와 아리엘이 가까워지는 걸 누구보다 응원하고 있었다.

    다만, 두 사람 사이가 혈연인 것이 아직도 못내 씁쓸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대 오라비이니, 전하라고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디트리히라고 부르세요.”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황태자 전하를 그렇게 불러도 되나?

    그녀의 갈등을 읽은 듯, 디트리히가 성스러운 빛깔의 녹색 눈을 휘며 웃었다.

    “아니면 레온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흑역사를 떠올린 아리엘의 뺨이 붉어졌다.

    과거 아리엘은 그 이름만 듣고 그를 ‘레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귀족 영식으로 착각한 적이 있었다.

    디트리히가 자신이 귀족 자제라고 말한 적이 없었음에도 의심없이 그렇게 생각해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 채 조그맣게 대답했다.

    “네, 레온…… 오라버니.”

    오라버니란 호칭을 들은 디트리히의 눈이 놀란 듯이 커졌다.

    디트리히는 막연하게 오라버니라고 불리면 마음이 아플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들어보니 오라버니라는 호칭이 싫지 않았다.

    분명히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아픈데, 한편으론 새로 듣게 된 호칭이 왜 이렇게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아리엘이 디트리히를 오라비라 부른 것을 들은 태후가 아리엘의 손을 꼭 움켜쥐며 말했다.

    “그래, 아가, 레온이 네 오라비이면 나는 어떻게 불러야 하지?”

    어쩐지 질투하는 듯한 태후의 말에 아리엘은 살짝 웃어버렸다.

    그리고 여태까지 망설였던 것을 꾹 누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할마마마.”

    아리엘의 목소리를 들은 태후가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일레인.”

    늘 곁에 두는 측근 시녀장을 부른 그녀가 큰 소리로 선언했다.

    “오늘을 내 생일로 지정하겠다.”

    “예에?”

    태후가 황홀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내가 아리엘의 할머니로 다시 태어난 날이니.”

    그 일로 한바탕 떠들썩한 소동이 일었다.

    디트리히는 조용히 레몬수를 한 모금 넘겼다.

    아리엘은 그에게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그녀를 향한 마음은 더없이 소중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에게 진짜 오라버니가 되어주어야 할 때였다.


    * * *


    파티는 밝고 즐거웠다.

    그래서 환하게 웃는 사람들과 눈을 맞출 때마다 아리엘은 쓸쓸한 기분을 애써 뒤로 밀어놓았다.

    과거가 끔찍했던 아리엘로서는 지금보다 더 좋은 상황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으므로.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선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 같은 날 루시안이 옆에 있다면…….’

    루시안을 생각하자 그녀의 작은 심장이 쿡 찌르듯 아릿하게 아파왔다.

    ‘……그리워.’

    마티어스만큼 커진 키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선.

    흑요석으로 빚은 듯한 흑발.

    새카맣고 빼곡한 속눈썹 아래 뇌쇄적인 눈물점.

    추락한 신으로 오인할 만큼 완벽한 얼굴이 그려내는 오만한 표정.

    그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갑자기 놀랍도록 보고 싶어졌다.

    아리엘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구었다.

    “…….”

    쓸쓸해 보이는 아리엘의 모습을 멀찍이서 보고있던 히스는 샴페인 테이블에서 잔을 들어 연거푸 마셨다.

    가까이 가고 싶어서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잔을 깨끗하게 비운 히스가 다음 잔으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탁. 어디에서인지 부채가 튀어나와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아야.”

    히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이아나였다.

    “역시 내 감이 맞았어.”

    “뭐……?”

    멍청하게 들릴 걸 알면서도 히스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마도구 사업을 함께 하면서 히스와 다이아나는 이미 호칭 정리를 마친 뒤였다.

    다이아나는 처음부터 히스에게 공대를 받길 거부했다.

    이야기를 나눌 때 히스가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면 아리엘이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이아나는 아리엘의 소꿉친구인 히스가 매우 거슬렸다.

    ‘내 아리엘과 나보다 친한 건 가만둘 수 없어!’

    그래서 다이아나는 히스가 격의 없이 말하도록 너그럽게 허락하며 아리엘 앞에서 이미지 관리를 한 뒤, 히스가 아리엘에게 친한 척 굴 때마다 사정없이 괴롭히며 즐거운 훼방 라이프를 즐겼다.

    격의를 벗어던지자 사교계와는 달리 아주 노골적인 훼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덕에 다이아나와 히스 사이는 여태 연적 관계나 다름없는 나쁜 사이로 발전했다.

    다이아나는 대답 없이 그를 부채 끝으로 쿡쿡 밀어서 기둥 뒤로 데려갔다.

    “윽, 지금 뭐 하는 거야?”

    히스는 다이아나의 부채를 뿌리치려고 애썼다.

    하지만 샴페인을 연이어 마셨더니 잘 피해지지가 않았다.

    사람들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히스를 데려간 다이아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빤히 그를 노려보았다.

    “……뭐, 할 말 있으면 빨리해.”

    히스는 평소처럼 까칠하게 대꾸하려고 했지만, 가라앉은 목소리는 스스로에게조차 음울하게 들렸다.

    팔짱을 낀 다이아나가 그를 위아래로 훑은 뒤, 물었다.

    “좋아하니?”

    “풉! 캑, 쿨럭! 쿨럭!”

    이건 너무 돌직구잖아!

    정신없이 기침을 한 히스의 얼굴이 벌개졌다.

    마음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들킨 거지?

    마치 그의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다이아나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티를 어지간히 내야 안 들키지.”

    “내가 언제 티를 냈다고 그래?”

    히스가 버럭 성을 내자, 다이아나가 흐응, 하며 한쪽 입꼬리로만 웃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건 맞다 이거지?”

    “…….”

    사교계를 손안에 주무르는 다이아나에게 히스를 공략하는 것 따위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아, 아, 아니거든!”

    히스는 일단 부정하고 보았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소중한 연심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어머, 인정할 용기도 없는 거야? 하찮아라.”

    다이아나가 곧장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히스는 발끈해서 낮게 소리쳤다.

    “누가 용기가 없대! 난 그냥……!”

    “그냥 뭐?”

    “그냥…… 아, 정말.”

    그는 괴로워하며 자신의 숱 많은 다갈색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왜 이렇게 말이 꼬이는 거지? 이게 다 샴페인 때문이다.

    한참 동안 머리를 헤집던 그는 결국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해도 다른 사람한테는 말 안 해.”

    하지만 다이아나는 이미 그의 표정에서 답을 읽어낸 것 같았다.

    히스는 패배자가 된 기분으로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내가 어쩌겠어? 어차피 아리엘은 날 남자로도 안 보는걸.”

    히스는 순식간에 우울해져서 고개를 떨궜다.

    그런 그를 잠자코 보고 있던 다이아나가 부채로 톡톡 손톱 끝을 두드리며 말했다.

    “흐음…… 제대로 고백하고 깔끔하게 차이는 건 어때?”

    이 여자는 분명 짝사랑 안 해봤어.

    그러니까 저런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히스는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돼. 아직…… 조금만 더.”

    “흑심을 품고 옆에 있겠다?”

    정곡이 푹 찔렸다.

    히스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런 거 아냐. 내가 조금만 더 높은 경지에 오르면…… 그때 멋진 모습으로 말하고 싶어.”

    사실은 그때까지만이라도, 아리엘이 그에게 지어주는 미소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새삼 깨달아졌다.

    맞다. 다이아나 모니카는 아리엘의 단짝 친구였다. 그것도 완전 광신도 수준의!

    ‘내가 좋아한다는 걸 아리엘한테 다 말해버리면 어떡하지?’

    덜컥 겁이 났다.

    히스는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저기, 그때까지는…….”

    “비밀은 지켜줄게.”

    “응?”

    그가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이자, 다이아나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아리엘은 사람을 잘 보는 편이니까 넌 나쁜 사람은 아니지. 나도 그 애가 소꿉친구를 잃는 건 싫거든.”

    그리고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히스의 턱 아래에 들이댔다.

    “하지만 쓸데없이 내 아리엘에게 찝쩍거리면 죽어! 그 앤 이미 결혼했단 말이야!”

    “……알아.”

    히스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어휴, 어쩌겠니. 이거 마시고 들어가 잠이나 자렴.”

    주먹을 거둔 다이아나가 그에게 불쑥 샴페인을 내밀었다.

    이놈의 샴페인 탓에 연심을 들켰다고 생각한 히스는 잔을 거절했다.

    “됐어. 이렇게 쓴 걸 대체 왜 먹는 거야?”

    다이아나가 픽 웃었다.

    “네가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못 봐서 그래.”

    “…….”

    히스는 힘없이 아리엘 쪽을 바라보았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에게 뭔가 커다란 선물을 건네는 것이 보였다.

    얼른 쓸쓸한 표정을 지우고 미소 짓는 아리엘을 보자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 * *


    사람들과 함께 하는 파티 시간이 끝나고, 마티어스와 아리엘 단둘만 남았다.

    마티어스는 아리엘을 위해 준비한 에드벨 절기 선물을 건넸다.

    “와. 이게 뭐예요, 마티어스님?”

    마티어스가 선물한 건 초콜릿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역작 디저트였다.

    커다란 달걀 모양의 초콜릿이 아리엘 앞에 놓여 있었다.

    그 위로 따뜻한 화이트 초콜릿을 붓자, 비눗방울처럼 얇은 초콜릿 막이 녹아내리면서 화이트 초콜릿과 다크 초콜릿이 마블링을 이루었다.

    달걀 모양의 초콜릿 안에 있는 것은 또 다른 초콜릿 달걀이었다.

    “네 나이 수 만큼의 초콜릿 에그란다.”

    초콜릿 층은 14겹으로 이뤄져 있었다.

    각 초콜릿 막은 아주 얇고, 어디에서도 먹어본 적 없는 특별한 맛이 났다.

    열네 번째 초콜릿 에그까지 열어본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감사해요, 마티어스님.”

    행복했다.

    잠시 들었던 쓸쓸한 기분이 흐려질만큼.

    그녀의 머리를 잠자코 쓰다듬어주던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아직 감사 인사를 듣기엔 이른데.”

    “네?”

    “자.”

    마티어스가 손끝을 움직여 소드 마나로 마지막 초콜릿 달걀을 건드렸다.

    그러자 마지막 초콜릿 달걀이 거품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

    보석으로 만든 에드벨 달걀이 놓여 있었다.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답고, 값어치를 셈하기도 어려울 보석들이 빼곡히 박힌.

    “이건…….”

    마티어스가 저음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시안 녀석이 보낸 거다. 이번에는 꼭 먹는 초콜릿과 함께 전달해야 한다고 협박했다더군.”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예전 다이아몬드 사탕이 생각나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바보 루시안. 그냥 먹는 것만 달라니까요…….

    웃음이 멈췄을 쯤에 그녀의 눈엔 글썽 눈물이 맺혀있었다.

    아리엘은 개미만한 목소리로 솔직하게 고백했다.

    “……루시안이 그리워요.”

    “그래, 그 녀석도 아마 그럴 거다.”

    아리엘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마음속은 지금 기쁨과 슬픔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라카트옐은 인간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들었다. 하지만……


    ‘가끔 저는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티어스님.’

    마티어스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때, 저더러 다 괜찮다고 해주실 때, 절 딸처럼 아끼고 보호해주실 때…….

    그녀는 입술을 아프게 꾹 깨물었다.

    루시안이 위로하며 안아줬을 때, 구해줬을 때, 이렇게 자신을 기억하고 선물을 줄 때…….

    아리엘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그녀의 나이만큼 겹겹이 싸였던 초콜릿 달걀과 그 속에 자리한 보석 달걀을 바라보았다.

    라카트옐 가족들을 향한 마음이 자라날수록 아리엘의 두려움도 커졌다.

    인간에게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종족이 라카트옐이니까.

    하지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기대하게 됐다.

    ‘차라리 가족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면, 기대도 하지 않았을 텐데…….’

    아리엘은 자기 혼자만 라카트옐 가족을 사랑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후작과 제롬을 사랑했을 때도 그랬는걸.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냥 가족이니까 마음을 주었던 거다.

    그런데 라카트옐 가족과 있으면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그들이 보여주는 미소가 좋았다.

    좀 더 보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좀 더 함께하고 싶어.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아프면 같이 아프고 싶고, 위험한 일이라도 돕고 싶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왜 이렇게 저에게 잘해주나요?’

    왜 잘해줘서, 나를 자꾸만 흔들어 놓나요?

    바보 같은 난 이제 라카트옐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어버렸는데.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들만 아릿하게 마음속을 맴도는 밤이었다.


    * * *


    칼바람이 부는 국경.

    에드벨 절기 날이 되자, 푸른 사자 기사단이 머무는 진영에는 대공자비가 보낸 쿠키가 도착했다.

    선물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기사들은 보호 마법이 걸린 상자를 열어보고 포효했다.

    “우오오오, 쿠키다!”

    “우오오, 아기 마님!”

    헥터와 랄프, 네드를 중심으로 한 험악한 기사단이 안 어울리는 귀여운 병아리 쿠키를 들고 감격으로 날뛰는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포착됐다.

    ‘귀여워!’

    ‘아기 마님 닮았어!’

    ‘병아리야, 병아리!’

    모시는 레이디가 내려주신 쿠키를 받은 기사단은 단 한 사람도 쿠키를 먹지 않고 황실 마법사들에게 달려갔다.

    “마법사님, 이것 좀 보존 마법을!”

    “저도, 저도!”

    “한 천 년은 상하지 않도록!”

    전쟁터에서 에드벨 절기를 맞아서 우울해 있던 마법사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물었다.

    “이걸 왜……?”

    기사단들이 단체로 눈을 번뜩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건 오늘부터 저희의 가보입니다.”

    우리 레이디께서 주신 걸 뺏기지 않고 가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신들이 알아?

    기사들의 부담스런 눈빛을 본 마법사들은 군말 않고 쿠키에 보존 마법을 걸어주었다.

    그들은 푸른 사자 기사단 덕에 목숨을 건진 적이 많았기 때문에 마나를 아끼지 않고 팍팍 쏟아부었다.

    그렇게, 황실 마법사들을 통해 대공자비가 푸른 사자 기사단에게 쿠키를 보냈다는 소문이 황실 기사단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뭐? 대공자비님이 푸른 사자 기사단에게?”

    역시나 우울함이 최고치를 찍고 있었던 황실 기사단은 우글우글 몰려나와 그 병아리 쿠키 좀 나눠달라고 푸른 사자 기사단에게 난리를 쳤다.

    “조금만 나눠주시오! 기사된 도리로 인정을 베풉시다, 예?”

    “무슨 소리! 이건 우리 가보다!”

    “구경이라도 시켜 줘! 이런 날에 귀여운 거라도 보지 않으면 탈영할 판이라고!”

    “우리 아기 마님 건 안 돼!”

    옥신각신했지만 결국 푸른 사자 기사단은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쿠키를 꺼냈다.

    물론, 한 조각도 나눠주지 않고 구경만 시켜줬다.

    “자, 이거 봐라. 우리 레이디가 보내주신 쿠키다.”

    “으어억, 부러워!”

    황실 기사단은 푸른 기사단을 부러워하며 슬피 울부짖었다.

    그들은 질투에 손수건을 물어뜯고, 부러움에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다음 날, 황실 기사단에도 상자들이 도착했다.

    아리엘라 ‘공주’의 선물이었다.

    상자를 열어보자, 황실 공주님으로서 아리엘이 보낸 쿠키가 들어있었다.

    비록 대공가에서 만든 병아리 쿠키는 아니었지만, 난생처음 ‘공주님’에게 쿠키를 하사받은 황실 기사단은 뒤집어졌다.

    “공주님! 우리 공주님!”

    그리하여 황실 기사단도 마법사들에게 달려가 쿠키에 보존 마법을 걸고, 가보로 모시게 되었다.


    * * *


    차가운 북풍조차 소리를 죽일 것 같은 루시안의 막사에도 아리엘의 쿠키 선물이 도착했다.

    마수의 피를 닦는 시종들의 시중을 권태로운 얼굴로 받고 있던 그에게 본가에서 선물이 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제 나가.”

    소식을 듣자마자 루시안은 사람들을 죄다 물렸다.

    아리엘의 보호 마법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상자가 그의 손아귀 안에 들어왔다.

    “……아리엘.”

    삭막하고 잔혹한 눈동자가 느슨해졌다.

    달칵.

    희고 긴 손으로 상자를 열자 곱게 포장된 쿠키가 보였다.

    그리고-

    삐약.

    당장이라도 짹짹거리는 소리를 낼 것 같은 병아리 떼가 그 안에 있었다.

    생각지 못한 병아리 공격을 받은 루시안은 붉은 입술 틈으로 바람이 새는 듯 웃었다.

    샛노란색의 병아리 틈에 유독 눈에 띄는 쿠키 하나가 보였다.

    달콤한 붉은빛의 핑크색 병아리였다.

    그것을 본 루시안이 미소가 짙어졌다.

    “……꼬맹이.”

    루시안의 희고 긴 손이 분홍색 병아리 쿠키를 쿡 눌렀다.

    쿠키 아래에는 아리엘의 필체로 짧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루시안 것만 내가 직접 구웠어요. 기사들 몫 빼앗으면 안 돼요!]


    그 아래로 수줍은 글씨 한 줄이 이어졌다.


    [해피 에드벨, 루시안.]


    편지를 읽은 그는 흡족하게 병아리 떼를 바라보았다.

    그 조그만 손으로 이것들을 직접 만들었을 생각을 하니 한없이 말랑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인간들의 절기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걸 받을 수 있다면, 챙길 만도 하군.”

    자신이 보낸 보석 달걀을 받고 아리엘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했다.

    그 달걀을 깨뜨려 볼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겠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를 테니.

    짧은 편지를 몇 번이나 읽으며 고요히 앉아있던 그는 이윽고 책상 위의 커다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금박이 우아하게 들어간 마호가니 상자 안에는 아리엘이 이때까지 꼬박꼬박 보낸 편지가 모두 보관되어 있었다.

    편지들 위에는 텅 빈 양피지 종이가 올려져 있었다.

    “…….”

    몇 번이나 답장을 쓰려고 했지만 결국 쓰지 못했다.

    한 글자라도 적었다간 국경 따위 내팽개치고 돌아가 버릴 것 같아서.

    이곳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타락은 강해졌고, 결계석이 부서진 곳마다 마수가 창궐하고 있었다.

    한두 마리 죽이는 것으로는 소용없었다.

    끊임없이 몰아치듯 들이닥치고 있으니.

    루시안은 건조한 눈빛으로 느른히 마른세수를 했다.

    “처음으로, 마티어스의 존재가 감사하게 느껴지는군.”

    아리엘을 믿고 맡길만한 존재가 하나는 있으니.

    그렇게 야속한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 * *


    해가 두 번 바뀐 후.

    불타버린 제단 아래의 지하실에 불길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검은 망토를 쓴 타락이 잔에 담긴 붉은 액체를 둥글게 흔들었다.

    “오래 걸렸다. 유니스가 알아낸 반쪽짜리 정보로 드래곤의 눈을 찾아내는 것.”

    비늘로 뒤덮인 것 같은 손톱이 유리잔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것을 공략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까지.”

    타락의 옆에 있던 수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주인님. 상대가 만만치 않습니다. 여태 라카트옐과 관련된 계획은 모두 실패했지요. 마치 붉은 머리가 미래를 알고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검은 망토는 손을 휘저어 수하의 말을 막았다.

    “상관없다. 얼마나 발악하든 그것들에게 예정된 건 비극뿐이야.”

    그렇게 말한 타락이 끼긱거리며 웃다가 이내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쇠로 쇠를 긁는 듯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은 망토 사이로 시커먼 눈이 빛났다.

    “어차피 붉은 머리는 곧 죽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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