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14/23)

14장




제국 사냥대회가 끝나자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이고, 계절은 금세 가을로 물들었다.

다이아나의 티 파티에 둘러앉은 영애들이 차가 식는 줄도 모르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조금 있으면 자애의 날이네요.”

“정말 기대돼요. 그때만 볼 수 있잖아요, 신전에서 기르는 레아 장미요!”

요즘 사교계 여자들 사이의 가장 큰 화젯거리는 단연코 ‘자애의 날’ 행사였다.

자애의 날은 5년에 한 번, 전 제국이 부모의 사랑을 기리는 절기.

이날이 돌아오면 빛의 신전에서 꽃을 사다가 부모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여신의 자애로움이 부모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빛의 신전에서는 이날만 레아 장미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겹장미를 내놓았다.

또한, 이날엔 사교계의 모든 여자들이 태후에게 꽃을 바치는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저번 자애의 날 때 ‘첫 번째’로 태후 마마께 장미를 바친 분이 누구셨죠?”

“베아트리체 공작 부인이셨대요.”

“맞아요. 사교계 서열대로니까요.”

모두가 꽃을 올리긴 하지만, 태후에게 가장 먼저 꽃을 바치는 역할은 모두의 동경을 받았다.

그 역할은 대대로 사교계 여자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여자가 맡곤 했다.

“공주님이 계셨다면 공주님이 바쳤을 텐데 말이에요.”

“그렇죠.”

황실에 공주가 있다면 서열 1위는 공주가 된다.

하지만 현재 황실엔 공주가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귀부인, 영애들 중 가장 높은 사람이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올해는 새로운 분이 바치시겠네요.”

모두의 시선이 초롱초롱 아리엘을 향했다.

“이젠 라카트옐 대공자비님이 계시니까요!”

지금 사교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누가 뭐라해도 대공자비인 아리엘이었다.

모두가 태후에게 처음으로 꽃을 바칠 수 있게 된 아리엘을 부러워하며 말을 보태는 동안, 아리엘은 지난번 마주쳤던 태후를 떠올렸다.

‘태후 마마, 요즘은 괜찮으실까?’

지난번에 뵈었을 땐 무척 쓸쓸해 보이셨는데…….

그런데 둘러앉은 영애들 중 한 명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그 소식 들으셨나요? 후작가 수양딸이었던 유니스 영애가 궁에 들어갔대요.”

그 이야기를 듣고, 다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서요?”

“후작가 후견인이 없어진 셈이니, 태후 마마께서 대신 후원해주시기로 했다나 봐요.”

어제 미리 소식통에게 이야기를 들은 다이아나는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리엘에게 ‘학대한 가족을 용서하라’며 강요해대던 유니스가 태후마마의 눈에 들다니. 정말 의외야.’

이 일을 의외라고 생각하는 건 다이아나 뿐만이 아니었다.

“태후 마마께서 사교계 영애를 맡으셨다고요? 원래 이런 일은 절대 나서지 않으셨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유니스 영애에게 푹 빠지셨다나봐요.”

“아니, 왜요?”

“잃어버린 공주님 있잖아요. 로잘린드 공주님. 유니스 영애를 보면 공주님이 떠오르신대요.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으신데…… 유니스 영애에게 큰 위로를 받으시나 봐요.”

이야기를 해주던 영애가 부럽다는 듯 말했다.

“귀한 황실 보물부터 태후 마마의 물건까지 모두 유니스 영애에게 선물로 주신대요.”

“유니스 영애는 운도 좋지.”

모든 영애들이 부러움에 탄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시간은 흘러, 자애의 날 바로 전날이 되었다.

아리엘은 오후에 마티어스의 집무실에 찾아갔다.

손에는 오늘 친구들과 나가서 사 온 레아 장미가 꼬옥 들려있었다.

똑똑. 조심스레 노크하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아리엘은 살며시 열린 문틈 사이로 물었다.

“마티어스님. 바쁘세요?”

옆에 있는 달튼의 표정을 보아 바쁜 것 같은데, 마티어스에게선 칼 같은 대답이 떨어졌다.

“아니. 들어와라.”

아리엘은 수줍게 미소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마티어스에게 받아들여지는 이 기분은 언제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아리엘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오자 마티어스가 바로 달튼에게 말했다.

“넌 나가.”

일하다가 갑자기 내쳐지게 된 달튼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예에?”

아리엘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달튼. 전 그냥 뭘 드리러 온 것뿐인걸요……?”

그리고 그녀는 얼른 마티어스에게 다가가, 등 뒤에 숨겨놓았던 레아 장미를 꼬물꼬물 내밀었다.

“그…… 자애의 날이니까. 꽃을 드리고 싶어서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시선을 내리깔며 꽃을 내미는 아리엘을 본 마티어스의 입꼬리가 스륵 올라갔다.

아리엘이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본 달튼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피곤한 것 같았는데, 널 보니 싹 가시는구나.”

마티어스가 흐뭇하게 던진 말에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얼마나 일이 많았으면 피곤하시다는 말씀을 다 하실까?

‘드래곤이 피곤할 정도라면 정말 큰일이야!’

아리엘은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제가…… 제가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그녀는 뽀르르 마티어스 뒤로 가서 조물조물 열심히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새끼 고양이털로 간질이는 것 같은 힘을 느낀 마티어스가 낮게 웃었다.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 시원하세요?”

“그럴 리가.”

대답한 마티어스가 다시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리엘라, 이리 와 봐라.”

아리엘은 낑낑대며 어깨를 주무르다 말고 마티어스 앞으로 다가갔다.

마티어스가 한 팔로 아리엘을 반짝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앗?”

아리엘이 종이 한 장이라도 되는 듯 내려놓은 그가 고개를 슬쩍 내저었다.

“달튼. 인간의 구성 재료가 어떻게 되지? 인간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나?”

순식간에 인간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취급받은 아리엘이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뺨을 붉히며 조그맣게 항의했다.

“마티어스님께는 뭐든 가볍잖아요.”

마티어스가 서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넌 거의 무게가 안 느껴지는데.”

거짓말, 나 많이 무거워졌다고 했는걸요!

울상을 짓는 아리엘의 머리를 마티어스의 큰 손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꽃 고맙구나. 어깨도.”

아리엘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런데 마티어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그러면 곧 자애의 날이고 하니…….”

그가 아리엘 가까이에서 가볍게 턱을 괴었다.

긴 흑발을 지닌 서늘한 인상의 미남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만 나를 마티어스님 말고 다르게 불러 봐라.”

“네?”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다르게 부르라는 말씀이시지……?

마티어스가 제 입매를 슬쩍 어루만졌다.

“글쎄. 황제를 제국의 이것이라고도 하지.”

“어…….”

저기, 이거 수수께끼인가요?

아리엘이 머뭇거리자 마티어스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아니면, 루시안 녀석이 원래 나를 불러야 하는 말이라든지?”

아! 그거라면…….

답을 알 것 같았다. 루시안한테 마티어스님은 아버지잖아.

그런데 나도 그렇게 불러도 되나? 안 되겠지? 아버지 말고, 그럼…….

아리엘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아버…… 님?”

그 말을 들은 마티어스가 시간이 멎은 듯 동작을 멈추었다.

늘상 권태롭기만 한 눈동자가 커지고, 놀란 듯 입술이 굳어졌다.

이내 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마티어스가 옅게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하. 예상은 해봤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분이로군.”

어라, 답이 틀렸나? 아리엘은 걱정스러워졌다.

하지만 곧 마티어스가 심장이 떨어질 만큼 아름답게 웃었기에, 다른 생각들은 다 지워져 버렸다.

마티어스가 옆에서 같이 심장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 달튼에게 말했다.

“달튼.”

“예, 각하.”

“오늘 내가 아버님이란 소리를 들었으니, 대공가 사용인 모두에게 금화 주머니를 내리고, 행정관들 월급을 세 배로 올려라.”

‘네?’

달튼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명령을 곧장 받아적었다.

“예.”

“또, 오늘 저녁은 연회장을 열어서 모두에게 만찬을 베풀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핑크 오팔 광산을 아리엘 명의로 바꿔라. 릴브론 휴양지 성도 아리엘 몫으로 넘기고.”

‘네?!’

아리엘은 갑자기 벌어지는 상황에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아니, 그, 왜? 잠깐만요……!

하지만 마티어스는 아랑곳 않고 폭주했다.

“금고에 있는 서왕국 산 장신구 세트도 모조리 아리엘 금고로 옮겨. 아, 기사단에게도 가야겠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데리고 공간 전이를 했다.

순식간에 기사단 훈련장으로 이동된 아리엘은 기사들의 시선이 단번에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마티어스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내가 아리엘에게 ‘아.버.님.’이란 말을 들었으니, 너희 모두에게 금일봉과 포상휴가를 내리겠다.”

아. 버. 님!

커다란 덩치의 기사단들 머리 위에 글자가 하나하나 떨어지는 듯 했다.

‘아버님?!’

‘주군이 아버님이라니!’

‘아기 마님께서……?’

공포의 ‘라카트옐’과 말랑한 ‘아버님’ 사이의 격차에 충격을 받은 기사단은 금일봉과 포상휴가도 잊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하지만 마티어스의 뒤에서 살짝 고개를 내민 아리엘을 본 순간…….

‘헉, 너무 귀여우셔!’

‘저런 분에게 아버님 소리를 들으면 나 같아도……!’

귀여운 아리엘의 모습에 기사단들은 심장에 큰 통증을 느꼈다.

‘으윽, 내 심장…….’

‘너무 부럽다! 나도, 나도 딸…….’

부러움에 눈이 시퍼레진 기사단을 보고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큰 몸으로 성큼 가려버렸다.

‘내 딸이다.’

마티어스가 모두를 얼려버릴 것 같이 살벌한 눈으로 냉기를 흘렸다.

마티어스에게 가려져 있던 아리엘은 고개를 다시 쏙 뺐다.

이젠 얼굴까지 다 새파랗게 질린 기사단들이 눈을 깔고 숙연한 분위기가 된 것이 보였다.

마치 미친 듯이 무서운 것을 본 듯한 반응이어서, 아리엘은 마티어스가 무슨 표정을 지었길래 저러나 궁금했다.

그녀는 마티어스의 얼굴을 보려고 낑낑 고개를 위로 들었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기사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더욱더 우리 아이를 지키는데 전념하도록.”

바짝 긴장한 기사단은 마티어스의 명령을 듣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 주군!”

다시 마티어스의 집무실로 돌아온 아리엘은 헤롱헤롱 소파에 주저앉았다.

뭔가 폭풍처럼 지나간 것 같아…….

‘그냥 아버님이라고 불렀을 뿐인데.’

겨우 정신을 차린 아리엘은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마티어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그렇게 불러드리는 게 좋으세요?”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이제 너는 내 딸이기도 하니까.”

아리엘의 하얀 뺨이 복숭아처럼 물들었다.

나를…… 딸이라고 하셨어.

그녀의 사랑스럽게 물든 뺨을 지켜보던 마티어스가 슬쩍 웃었다.

“물론 너는 편한 대로 불러도 된다. 난 뭐든 상관없으니.”

“정말요?”

“흠…… 그래도 한 번 부른 건 무르는 게 아니지?”

마티어스가 은근슬쩍 의견을 피력했다.

아리엘은 살짝 웃고 말았다.

그렇게 좋으신가?

그녀는 망설이다가 다시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아버님.”

잠시 또 멈춰있던 마티어스가 다시금 달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튼. 이번에는 아리엘에게-”

아까의 상황이 반복될까 봐 두려워진 아리엘은 다급히 마티어스의 팔에 매달렸다.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마티어스님!


* * *


자애의 날 당일.

데뷔를 한 사교계의 모든 여자들은 레아 장미를 한 송이씩 들고 줄지어서 태후의 접견홀로 들어섰다.

그동안 태후는 옆에 앉은 분홍 머리의 소녀만 바라보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니스가 태후의 귀에 속삭이자 태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그랬느냐? 내 맘에 아주 쏙 드는구나.”

사교계 여자들이 모두 들어오고 난 뒤, 맨 앞줄에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공작 부인들, 공녀 다이아나, 그리고 대공자비 아리엘이었다.

아리엘의 모습을 본 유니스가 슬픈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전 내려갈게요. 제 자리는 저 아래, 뒤편이잖아요.”

그런데 태후가 유니스를 막았다.

“아니. 내려갈 필요 없다, 유니스.”

유니스의 손을 꼭 움켜쥔 태후가 말했다.

“그냥 내 옆에 앉아있거라, 아가.”

그 모습을 본 사교계 여자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일어났다.

태후가 올라앉은 상석 바로 옆에 유니스를 앉히는 건 예법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유니스보다 높은 사람들이 아래에 서 있는 지금은 더더욱.

“유니스 영애를 총애하신다는 건 들었지만, 이건 무슨 일이죠……?”

“이건 마치 공주 신분처럼 대우해주시는 거잖아요.”

이례적인 일에 다들 당황하는 사이, 황실 의전관이 말했다.

“아리엘라 라카트옐 대공자비님, 꽃을 들고 나와주십시오.”

아리엘은 레아 장미를 들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상석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태후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잠깐. 꽃을 받기 전에 모두에게 발표할 것이 있다.”

꽃을 들고나오던 아리엘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아리엘을 내려다보는 태후의 시선은 차갑고 온기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대공자비가 이 자리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레이디겠지. 하지만 여기에 내 핏줄이 있다면?”

핏줄이란 단어를 강조한 태후가 스스로의 질문에 답했다.

“그 아이가 신분이 가장 높다 여겨져야 마땅하지.”

다들 태후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궁금해서 숨을 죽였다.

태후가 자신의 시녀를 불렀다.

“물건을 가지고 오거라.”

시녀가 태후에게 남색 벨벳 상자를 가지고 와 바쳤다.

태후가 상자를 열자, 안에서 금으로 세공된 고상하고 예쁜 티아라 하나가 나왔다.

“40년 전에 잃어버린 내 사랑스러운 딸, 로잘린드 공주의 물건이다. 나는 언젠가 로잘린드가 돌아오거나, 그 아이에게 자식이 있다면 이것을 물려줄 생각이었어.”

그리고 태후는 다정한 손짓으로 유니스를 불렀다.

“유니스, 아가. 이 앞으로 나오련.”

분홍 머리의 소녀가 입가에 짙은 미소를 그리고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모두들 여기 있는 유니스 영애를 잘 알 것이다. 루실리온 후작가의 수양딸이었지만 불행히도 후원자를 잃어 내가 거두었지.”

애틋한 시선으로 소녀를 바라본 태후가 말했다.

“유니스를 볼 때마다 너무나 내 딸 로잘린드가 떠올랐거든. 모든 것이 로잘린드와 닮아서 나도 놀랄 정도였다.”

태후가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진실을 알게 되었지. 가엾게도 로잘린드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입에서 폭탄선언이 나왔다.

“내 딸이 남긴 유일한 손녀가 바로 유니스였다는 것을!”


* * *


접견 홀에 사람들의 숨죽인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황실에서 몇십년간 찾아 헤맨 로잘린드 공주를 찾았다니!’

‘게다가 로잘린드 공주에게 딸이 있었다고……?’

모두가 이 어마어마한 발표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태후가 무언가에 취한 듯 몽롱한 목소리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유니스의 모친, 내 딸 로잘린드는 자신이 공주였다는 사실도 모른 채 준귀족의 딸로 살고 있었다.”

태후가 슬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루실리온 후작과 결혼해 후작 부인이 되었지. 바로, 블랑쉐 후작 부인이었어.”

‘……!’

블랑쉐 후작 부인?

아리엘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그녀의 어머니 이름에 깜짝 놀랐다.

블랑쉐 후작 부인은 그녀의 친모였던 것이다.

“세간에는 아리엘 대공자비가 후작 부인의 친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진짜 딸은 유니스였지.”

태후가 아리엘을 향해 쌀쌀맞은 시선을 던졌다.

“대공자비는 유니스 대용으로 데려온 아이였다고 하더군.”

모두가 태후의 말에 경악했다.

제국 사교계를 뒤집어놓을만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거야?’

‘태후 마마 말씀 대로라면…….’

아리엘은 후작 영애도, 귀족도 아닌 존재.

유니스의 대용품 밖에는 되지 않는 사람으로 전락한 것이다.

‘예전 소문이 진짜였다니. 후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했잖아요.’

‘후작가에서 열 살까지 숨겨서 기른 것도, 친딸 대용이라서 그랬나봐요.’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귀족 여자들의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

태후가 아리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말했다.

“대공자비. 네가 후작가에서 행복하고 부유하게 살 동안, 우리 유니스는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고생하며 자랐다. 네가 대공가의 눈에 띈 것도 유니스 대신이었지.”

태후는 마치 아리엘이 유니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아리엘은 그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는 후작가에서 단 한순간도 행복해본 적이 없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돌릴 순 없지만, 이제부터라도 유니스가 누리지 못한 것들을 내가 해주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태후가 아리엘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너는 네가 유니스 대신 누리고 산 것에 감사하며 살도록 해라.”

아리엘은 충격을 받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태후의 말이 마음 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내가 유니스 대신 누리고 산 거라고……? 감사해야 한다고?

태후는 이어서 사람들 쪽으로 몸을 돌려 말했다.

“자, 이제 다들 알았겠지? 누가 내게 '첫번째'로 꽃을 줄 자격이 있는지.”

태후가 시녀의 손에서 티아라를 받아, 유니스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 유니스의 손에 들린 레아 장미를 받아 들었다.

“모두들 축하해다오. 내가 잃어버린 손녀를 찾은 것을!”

태후가 어딘지 작위적인,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곧 유니스가 정식 황족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공주인 유니스를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말도록.”


* * *


마침내 꽃을 바치는 식이 끝났다.

세실과 다이아나, 란셀 후작 부인 등 아리엘과 가까운 사람들은 재빨리 모여 아리엘을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

“아리엘, 괜찮니?”

다이아나가 먼저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태후 마마께서 이러실 분이 아닌데, 정말 너무하셨어!”

아리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세실도 말했다.

“그래. 꼭 이런 식으로 공개하셔야 했는지 모르겠다. 아리엘 잘못이 어디 있다고.”

란셀 후작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부터 태후 마마께서 이상해지셨다고 말이 많긴 했지만…… 인자하시고 현명하셨던 분이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하신 건지 모르겠네요.”

아리엘을 충격 받은 마음을 추스리려 애쓰며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내가 정말 후작가의 친딸이 아니었다니.

후작가엔 더 이상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자신이 정말로 후작의 친딸이 아니었다는 것은 아리엘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럼 나는 왜 학대받은 거지? 대체 왜…….’

후작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던 주먹이 떠올랐다.

생생히 떠오르는 트라우마때문에 아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용품으로 데려왔다면서 왜 어린 나를 그토록 때리고, 굶기고…….’

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학대를 받으면서도 그들에게 애정을 구걸했던 것인데.

유니스를 감싸며 자신을 원망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던 태후가 떠올랐다.

‘태후 마마…….’

태후의 말과 달리 아리엘은 유니스 대신 누린 게 없었다.

오히려 모진 학대와 착취만 당했을 뿐이었다.

대공가와 인연을 만든 것도, 후작가 덕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탈출해서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그녀는 후작과 유니스 사이에서 희생된 피해자일 뿐이었다.

핏기를 잃은 아리엘의 얼굴을 본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걱정이 쏟아졌다.

한참만에 아리엘은 겨우 작게 입을 열 수 있었다.

“나는…… 괜찮아요.”

그 때, 휴게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등장한 사람은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 유니스였다.

“대공자비. 여기 있었군요!”

허락도 없이 들어온 유니스가 아리엘에게 다가와서 동정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괜찮아요, 아리엘. 저는 대공자비를 대용품따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제 것을 모두 가로챈 것에 대해서 원망도 하지 않아요.”

유니스가 밝은 웃음을 머금었다.

“전 이제라도 모든게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족해요. 그러니 천한 출생이 밝혀졌다고해서 너무 슬퍼하지 말았으면 해요. 공주인 제가, 대공자비를 여전히 가족으로 생각하니까요!”

그녀가 아리엘에게 행복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자매 같은 존재잖아요?”

다들 할 말이 많았지만, 황실의 실세인 태후가 감싸고 도는 유니스에게 쏘아붙이기엔 난감한 상황이었다.

유니스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아뇨, 우리가 상관없는 사이인 건 달라지지 않아요, 유니스 영애. 부디 태후 마마를 잘 모셔주길 바랄게요.”

아리엘의 태도에 흔들림이 없자 유니스의 미소에 균열이 갔다.

굳어진 표정으로 서 있던 유니스는 이내 자리를 떠나버렸다.


* * *


그날 이후로 사교계에는 일파만파 소식이 퍼져나갔다.

태후가 그리워하던 로잘린드 공주의 딸이 유니스라는 것과, 아리엘과 유니스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태후 마마가 날마다 황제 폐하께 유니스 영애를 당장 공주로 봉해야 한다고 재촉하신다며?”

“시일이 걸리는 걸 매우 가슴 아파 하신대.”

황실의 일원을 받아들이는 문제라 절차가 복잡했다.

생각만큼 빨리 공주가 될 수 없자, 유니스는 초조해졌다.

주인에게 받은 임무를 수행하려면 반드시 황족이 되어야 했다.

“할마마마.”

유니스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부르자 태후가 몽롱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 그래. 내 손녀 유니스.”

“저는 언제쯤 공주가 될 수 있나요?”

태후가 마음이 아픈 듯 유니스의 손을 잡았다.

“빨리 해주마. 시간이 좀 걸린단다, 아가.”

유니스가 태후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내며 말했다.

“저를 아무도 공주로 취급해주지 않으니 유니스는 많이 속상해요.”

태후가 쩔쩔매며 대답했다.

“아가, 속상해 말거라. 누가 뭐래도 넌 내 손녀야.”

한참 새침한 표정을 짓고있던 유니스가 슬며시 태후의 손을 잡았다.

“그럼, 말해주실 수 있나요? 저를 정말로 황족으로 생각하신다면 가족의 비밀을 알려주세요.”

“비밀?”

유니스가 목소리를 낮춰 속살거렸다.

“초대 드래곤 라키엘의 두 눈이 어디 있는지는 대공가와 황족만 알고 있다면서요.”

“그건…….”

“제게도 알려주세요, 네?”

태후가 갑자기 두통을 느끼는 듯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 안 되는데…….”

태후는 유니스가 라키엘의 눈에 대해서 캐묻기만 하면 거부감을 느끼는지, 제정신을 차리려고 애쓰곤 했다.

여태 몇 번이나 실패해온 유니스는 이번엔 태후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더 강하게 태후를 흔들기 시작했다.

“어서요. 할마마마. 그럼 저도 안심이 될 것 같아요.”

유니스가 달큰하게 속삭이며 태후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잠시 또렷해지는 것 같던 태후의 눈이 다시 흐려지며 천천히 입이 열렸다.

“그것은…….”


* * *


한편, 자애의 날 행사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된 마티어스는 그 날로 곧장 라카트옐은 아리엘의 출신에 전혀 상관하지 않음을 공표했다.


[아리엘라 대공자비는 어떤 조건과도 상관없이 대공가 소속이며, 라카트옐의 일원이다.

이날 이후로 대공자비의 출생에 대해 입을 놀리는 자는 라카트옐의 이름으로 응징하겠다.]


공표를 들은 사교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목이 붙어있고 싶은 사람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 후 마티어스는 즉시 황실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게 라카트옐의 전쟁 선포와 다르지 않다는 걸 아는 황제는 기겁했지만, 대공가는 응답하지 않았다.

역시나 소식을 들은 대공자 루시안은 즉시 아카데미를 떠나 집으로 귀환했다.

그는 돌아오는 동안 아리엘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상처 받았겠지.’

물기 어린 아리엘의 진홍색 눈동자, 발개진 눈가, 상처받은게 고스란히 드러난 표정.

그런 상상이 자신에게 이렇게 끔찍한 감정을 느끼게 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카데미에서 폭풍처럼 집으로 돌아온 루시안이 서늘하게 말했다.

“다 죽여줄까. 황실 정도 뒤엎어버리는 건 아무것도 아냐. 네 마음이 상했다면.”

아름다운 얼굴에 살벌한 빛을 가둔 채, 그가 아리엘에게 선언했다.

“다 없애고 아예 새로운 제국을 세워주지.”

당황스러운지 순진한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를 보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아리엘은 놀라서 눈만 깜박이다가 어깨를 살짝 떨구었다.

“…….”

자애의 날에 있었던 일은 그녀에게도 큰 충격이고, 상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실에 피바람이 부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아리엘은 마티어스가 지난번에 해준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 가족의 사정에 대해 알게 된다고 해도 네가 달라지는 건 아니야. 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는 것도 아니지.’

그래서 그녀는 당장이라도 황실을 치러 갈 기세인 마티어스와 루시안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다.”

하지만 두 남자의 차가운 눈은 어떻게 해서든 아리엘의 마음이 상했던 것에 복수를 하고 싶은 듯 했다.

아리엘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목에 걸려있는 말을 겨우 꺼냈다.

“전 그냥…… 제 친부모가 누군지 알고 싶어요. 후작가가 왜 굳이 절 데려와서 학대했는지도요.”

그녀의 고개가 폭 숙여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아리엘은 꾹 눌러 참았다.

“나도…… 엄마가 누군지 알고 싶어요.”

루시안이 위험한 기세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찾아줄게.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찾아주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있게 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가 붉은 입술 끝을 비틀었다.

“하지만 황실 것들을 가만 놔두진 않아.”

마티어스가 바로 말을 받았다.

“당연하다.”

팔짱을 낀 채 나란히 선 마티어스와 루시안에게서 살기가 풀풀 풍겼다.

아리엘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윽. 오랜만에 두 사람 무서워…….’

그냥 놔뒀다간 오늘이라도 황실 사람들을 다 죽이려 들 기세였다.

아리엘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이, 이렇게 되면 저도 어쩔 수 없잖아요. 전 피를 보고 싶진 않단 말이에요…….

그녀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옷자락을 한 손씩 꼬옥 붙잡았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울망울망 둘을 올려다보았다.

“전 그런 거 싫어요. 황실과 싸우지 말아요, 네?”

아리엘이 울먹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자 살기등등하던 라카트옐 부자의 얼굴이 슬쩍 풀어졌다.

그녀는 조금 더 그들에게 다가가서 자그맣게 졸랐다.

“루시안도 돌아왔으니 기분 전환하게 저랑 소풍가요.”

전쟁 말고 소풍 안 될까요?

“소풍?”

약간 구미가 당기는 듯 두 부자의 표정이 좀 더 느슨해졌다.

아리엘은 최후의 방법으로 호소하듯 바라보며 물었다.

“안 돼요?”

“…….”

“정말 안 돼요? 마티어스님, 루시안…….”

이름 공격에 사르르 녹아버린 두 남자는 결국 기세를 꺾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야.”

“황실 것들은 운이 좋군.”

하지만 루시안이 곧장 유혹적이고 불길한 미소를 머금었다.

“소풍을 포함해서, 모든걸 확실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어…… 그거 혹시 위험한 건 아니죠?

왠지 그게 전쟁보다 더 무서울수도 있을 것 같단 착각이 들었다.


* * *


라카트옐과 혹여 내전이라도 벌이게 될까 두려워진 황제는 직접 대공저로 행차했다.

그러나 황제가 행차했는데도 대공저 사용인들의 태도는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아리엘이 황궁에서 당한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공 마티어스는 시간이 지나도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제가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대공자 루시안이 느긋한 포식자 같은 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어두운 기세가 아름다운 외모 뒤로 스멀거리는 것 같았다.

느긋해보였던 것은 착각이었다.

그는 지금 누구라도 이 자리에서 어둠으로 삼켜 없애버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대, 대공자, 이게 무슨 일인가. 단교라니.”

겁먹어 말을 더듬는 황제 앞에, 루시안이 빈 두루마리 문서 하나를 던져 놓았다.

“증거.”

그는 굳이 황제에게 예우를 차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모두 앞에서 발표한대로, 아리엘라가 후작부부 사이의 아이가 아니라는 증거를 가져 와. 더불어 그 벌레가 공주의 딸이란 증거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황제에게 루시안이 서늘하게 물었다.

“후작가 딸과 결혼한 당사자니까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겠지?”

그리고 루시안은 제 집 응접실에서 우아하게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럼 황실과의 단교를 다시 생각해보지.”

이렇게 라카트옐이 공식적으로 황실에 해명을 요구하자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루시안의 요구는 흠잡을 데 없었다.

태후가 직접 사교계 앞에서 발표한 일이니, 그것에 증거를 가져오라는 건 당연했다.

결국 태후와 유니스, 황실과 라카트옐이 모두 참석한 청문회가 열렸다.

아리엘의 양옆에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버티고 서 있었다.

황실 법관이 라카트옐의 눈치를 보며 태후에게 말했다.

“태후 마마, 증거를 제시해 주십시오.”

증거를 제시해야 함에도 태후의 얼굴은 아주 당당했다.

상석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태후가 입을 열었다.

“증거는 이 목걸이요.”

그녀의 손이 유니스의 목에 걸린, 금빛 열쇠 목걸이를 향했다.

“이 목걸이는 내가 어린 로잘린드에게 걸어준 물건이지. 로잘린드와 함께 사라졌었소.”

태후가 설명을 이어갔다.

사냥 대회에서 유니스를 만난 그녀는 로잘린드를 너무나 떠올리게 하는 유니스를 데려와 총애했다.

그러던 어느날, 태후는 유니스가 가진 목걸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목걸이가 어떻게 너에게……? 어디서 난 물건이냐, 유니스?”

유니스는 목걸이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물건이라고 대답했다.

사냥대회에서 끌려가기 전- 후작은 사실 아리엘이 아니라 유니스가 자신의 친딸이라고 고백했고, 아내의 유품이라며 유니스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태후는 유니스의 열쇠 목걸이를 가져와 자신의 보석함에 맞춰보았다.

“이 자리에서 보여줄 수도 있소. 보석함을 가져오거라.”

시녀가 비단 보에 올려진 보석함을 가져왔다.

태후는 유니스의 목걸이에서 열쇠를 빼내어, 보석함의 열쇠 구멍에 넣고 돌렸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보석함이 열렸다.

태후의 얼굴이 자신만만해졌다.

“이 보석함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수 잠금이 되어있소. 한 몸인 열쇠가 아니라면 절대 열리지 않소. 나도 무려 30년 넘게 열지 못했다오.”

그녀가 모두에게 주장했다.

“그래서 나는 유니스가 내 딸 로잘린드가 남긴 하나뿐인 손녀라는 걸 알게 됐소.”

태후가 유니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이래도 유니스가 내 손녀가 아니란 말이오? 유니스가 내 손녀라면, 대공자비가 내 손녀가 아닌 것은 증명되지.”

황실 법관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태후 마마. 하지만 증인이 필요합니다. 유니스 영애가 다른 곳에서 열쇠를 가져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태후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물론 증인도 있소.”

그녀가 뒤의 휘장과 연결된 줄을 당겨, 휘장을 걷어냈다.

휘장 뒤에 있던 사내의 모습이 모두 앞에 드러났다.

“바로 이 자요.”

사내의 얼굴을 본 사람들이 모두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놀랐다.

“……헉!”

등장한 남자가 바로, 추방된 것으로 알려진 루실리온 후작이었기 때문이었다.


* * *


후작의 얼굴을 확인한 루시안이 사납게 입매를 비틀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그린 듯한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쥐새끼가 저기로 숨어들었군.”

아리엘 또한 후작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어떻게, 아버지가?’

하지만 후작을 잘 아는 그녀는 금세 납득했다.

후작은 얼마든지 추방당하는 길목에서 도망칠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태후가 당당하게 후작에게 외쳤다.

“루실리온 후작. 증언하게.”

라카트옐을 본 후작이 슬금슬금 루시안의 눈을 피하며 앞으로 나섰다.

“태후 마마와 유니스의 말이 모두 맞습니다.”

그가 비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열쇠 목걸이는 제 아내가 유일하게 남긴 유품입니다. 아리엘은 친딸이 아니니 주지 않았죠. 하지만 친딸인 유니스에겐 주었습니다. 죽은 아내가 잃어버린 공주님인 건 꿈에도 몰랐고요.”

그가 유니스를 향해 열심히 눈짓했다.

마치 유니스가 자신을 살릴 구명줄이나 되는 듯이.

“이제라도 태후 마마의 손녀를 찾아드려서 다행입니다. 제 공이 컸죠.”

그 때, 고요히 듣고만 있던 루시안이 신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아리엘의 친부모는?”

그의 낮은 목소리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흡수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후작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후작이 눈치를 보더니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냥 어느 빈민가의…….”

“아직 살아있나?”

날카롭고 차가운 질문에 후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 그건 잘 모르겠…….”

경멸하듯 후작을 내려다본 루시안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태생적인 카리스마를 머금은 그의 아름다운 입술이 말했다.

“좋아. 이 모든 걸 명명백백히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

지지부진한 청문회가 답답했던 태후가 반색했다.

“그게 뭔가, 대공자?”

루시안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라카트옐에게는 보물이 있지. 녹스 영지에 있는 [거울 호수] 말이야.”

그가 입을 열자 황제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대, 대, 대공자. 그것은……!”

황제는 라카트옐이 아리엘을 위해 '그것'까지도 꺼내 들었단 사실에 경악했다.

대체…… 대공가가 대공자비를 얼마나 아끼는 거지?

황제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루시안의 붉은 입술이 오만하게 말했다.

“거울 호수의 물은 진실을 드러내는 힘이 있으니, 모든 걸 밝힐 수 있겠군.”

그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증인은 많을수록 좋지 않겠나?”

결국 자애의 날에 그 자리에 있던 사교계 여자들 모두가 증인으로 소환됐다.

아리엘의 친구인 다이아나와 세실도 그 중에 있었다.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모인 사람들을 브루노어의 특수 게이트로 한 번에 녹스 영지까지 이동시켰다.

도착한 뒤 정신을 못차리고 어지러움을 느끼던 사람들은 녹스 영지의 거울 호수가 눈앞에 펼쳐지자 탄성을 참지 못했다.

“오오……!”

그들 앞에 세상에 다시는 없을 아름다운 절경이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거울 호수의 주변은 마치 이세계의 공간인 것처럼 신비한 분위기가 풍겼다.

호수의 표면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것처럼 잔잔했다.

하늘과 풍경이 그대로 비쳐서, 호수 안에 다른 세상이 담겨 있는 것 같아보였다.

마치 다른 세계와 여기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같이 보이는 호수.

‘예쁘다.’

아리엘 또한 잠시 넋을 잃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라카트옐의 소유물이 무척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의 영지 안에까지 소유물이 있는 줄은 몰랐다.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시안을 바라보자, 그가 뇌쇄적이게 입꼬리를 올렸다.

“소풍 장소가 마음에 들어?”

응? 소풍? 우리 여기에 소풍 온 거였나요?

문득 루시안이 소풍과 진실 찾기 둘 다를 할 수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을 호숫가로 데려간 루시안이 손끝으로 소드 마나를 뽑아 호수의 물을 마법구처럼 허공에 띄웠다.

묘한 마력이 느껴지는 물의 구가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곧, 루시안의 우아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거울 호수의 물은 특별한 능력이 있지.”

오싹한 위압감을 온 몸에 두른 채 루시안이 천천히 말했다.

“호숫물에 누군가의 얼굴을 비추면, 그 사람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루시안이 눈짓하자 녹스 남작가 하인들이 거대한 거울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것을 호숫가에 가지고 가자, 호수에 비치는 것을 모두가 함께 볼 수 있게 되었다.

황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거울 호수의 존재는 여태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었다.

게다가 거울 호수가 가진 능력은 라카트옐이 원하지 않는 한 누구도 감히 사용할 수 없었다.

제국을 건국한 초대 황제 이후로 아마 이 호수를 직접 본 황제는 없었을 것이다.

상황의 급박함과 상관없이 황제는 무척이나 흥분된 상태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루시안이 장막 같은 긴 속눈썹을 권태롭게 움직이며 말했다.

“시작하지. 그럼…….”

그의 짙은 청색 눈동자가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유니스를 향했다. 푸른 눈이 위험한 이채를 띠고 서늘한 살기를 흘려 보냈다.

루시안의 시선이 유니스를 지나쳐 그 옆의 백발 노부인, 태후에게 향했다.

“오랜 시간 딸을 기다려 온 사람부터.”


* * *


태후가 떨리는 표정으로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호숫가로 걸어왔다.

거울 같은 호수의 표면에 백발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올린 태후의 모습이 비쳤다.

태후가 회한에 빠진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내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내 딸 로잘린드의 얼굴이 보고 싶다. 생전의 모습이 보고 싶어.”

태후가 간절히 말하자, 그에 응답하듯 호수의 표면에서 은은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점 환해지더니 호숫물에 비친 태후의 모습을 지워내고 대신 다른 형상을 표면에 떠올렸다.

“……헉!”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람들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이제 호수 표면에 떠오른 모습은 백발의 나이든 여인이 아니었다.

화사한 금발 머리를 가진 젊은 여인.

여인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고, 품 안에는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를 보듬어 안고 있었다.

아, 정말 아름다운 분이다.

평생 저 여인을 엄마라고 믿으며 살았음에도, 아리엘은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금발 머리 여자의 모습을 본 태후가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로잘린드다. 틀림없는 내 로잘린드야! 다른 건 몰라도 내 딸만은 알아보지.”

딸의 모습이 혹여 사라질까, 호수 표면에 가까이 가지도 못한 채 주저앉은 태후가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아름답게 컸는데,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먼저 가다니…….”

그 모습을 본 아리엘은 마음에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내 친부모님도 나를 보면 저렇게 알아보실까? 틀림없는 내 딸이라고…….’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는 태후를 결국 시녀들이 말려서 데리고 일어났다.

루시안이 서늘하게 말했다.

“딸의 얼굴을 보았으니, 딸이 안고 있었던 아이의 얼굴도 보고 싶겠지.”

그의 눈이 위압적인 기세를 품고 유니스를 향했다.

벌레 한 마리를 내려다보는 듯한 무감하고 자비없는 시선이었다.

“이제 새로 등장한 자칭 공주 차례로군.”

유니스가 호수 앞으로 다가갔다.

분홍머리 소녀의 얼굴은 눈에 띄게 납빛이었고, 입술은 기묘하게 굳어있었다.

마음을 추스른 태후가 다정히 유니스에게 말했다.

“내 아가, 너는 네 부모의 얼굴만 보기 원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알았지?”

호수에 분홍 머리 소녀의 얼굴이 비쳤다.

그러나 유니스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루시안은 유니스가 한 손에 쥐고 있는 작은 약병의 마개를 몰래 열려는 것을 손쉽게 감지해냈다.

“저는…… 부모님의…….”

일부러 더듬더듬 꺼내는 유니스의 말을 루시안이 조소하듯 잘랐다.

“아. 그런데 내가 거울 호수의 능력에 대해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이 있지.”

그가 사람들을 여유롭게 둘러보았다. 악마적인 마력을 품은 목소리가 말했다.

“거울 호수의 물은 직접 닿으면 그 사람의 본 모습을 보여주거든.”

그 말을 들은 유니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더 이상 숨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보랏빛 유리병의 마개를 열어젖혔다.

하지만 루시안의 우아한 동작이 훨씬 더 빨랐다.

“이렇게 말이지.”

어느새 소드 마나로 호수의 물을 허공에 띄운 그가 호숫물을 유니스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촤악-!

동시에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크아아아악-!”

유니스의 비명은 소녀의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름끼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소녀의 몸이 뒤틀리며 점점 부풀어 올랐다.

그녀가 입고 있던 분홍색 색채는 구정물처럼 녹아내렸고 순진해보이는 눈동자는 기괴하게 튀어나왔다.

모든 사람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물이 유니스의 몸을 모두 훑고 흘러내렸을 쯤엔.

“……그게 네 본 모습이로군.”

그 자리엔 유니스 대신 역겨운 모습의 마법사가 서 있었다.

“꺄아악!”

태후와 황실 사람들, 사교계 사람들이 모두 새된 비명을 질렀다.

유니스에게서 빼앗은 유리병의 마개를 열어본 루시안이 향기를 맡고 입매를 비틀었다.

“미혹향으로 모두를 속일 작정이었다라…….”

루시안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나로, 보라색 유리병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런 게 라카트옐에게 통할 것 같나?”

별것 아닌 동작이었지만 루시안에게서 첨예한 분노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포식자의 기세에 억눌린 마법사가 이를 갈았다.

“내 정체를 드러냈다고 달라질 건 없을 거다. 어차피 주인님께 받은 내 임무는 이 호수를 오염시키는 것이니까……!”

마법사가 순식간에 타락의 기운이 가득한 검은 액체 덩어리로 몸을 바꾸었다.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 호숫물로 뛰어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마법사가 변한 검은 액체 덩어리가 호수의 표면에 닿는 순간-

파앗!

검은 덩어리는 호수를 감싼 장벽같은 것에 거세게 부딪히며 원래 자리로 튕겨나왔다.

액체 덩어리가 된 마법사가 흘러내리는 입을 벌리며 크아악 울부짖었다.

어느새 루시안의 손에는 검이 소환되어 있었다.

“내가 아직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싸늘하게 내뱉어진 루시안의 말은 살과 뼈를 하나하나를 발라낼 듯 위험함을 담고 있었다.

사냥 대회 직후에 그는 녹스 남작을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수하의 보고를 받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타락이 거울 호수를 노리고 있다는 걸.

물론 유니스라는 더러운 벌레 하나가 기어들어온 것까진 알지 못했다.

라카트옐의 숙적인 만큼, 타락은 제 정체를 숨기는데 아주 능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호수에 미리 결계를 쳐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스릉.

소드 마나에 휩싸인 루시안의 검이 쓰러져 있는 마법사를 베자, 마법사는 검은 재로 산산히 부서져 사라졌다.

“……아아.”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태후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 * *


“할마 마마.”

가까이 있던 황태자 디트리히가 태후를 부축했다.

“머리가…… 내 머리가…….”

태후는 유니스에게 미혹당한 것에서 풀려나며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유니스를 만난 후로 일어났던 일들이 모두 흐릿하고, 호수에서 봤던 로잘린드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이성이 명징하게 돌아오면서 태후는 자신이 했던 이상한 행동들을 하나하나 되새길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유니스와 로잘린드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 유니스가 자신이 로잘린드와 닮았다고 말하면,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또 유니스가 대공자비가 자신의 것을 모두 빼앗아 갔다고 속삭이면,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옳은 것 같이 여겨졌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유니스가 사악한 마술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태후의 마음을 조종해 왔던 것이다.

한편, 유니스의 본모습을 모두 앞에 드러내고 제거까지 마친 루시안은 느리게 후작을 향해 돌아섰다.

아까부터 후작은 벌벌 떨며 땅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후작. 유니스가 분명 친딸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째서 그것의 본모습이 추악한 마법사인거지?”

후작이 비굴하게 무릎걸음으로 아리엘 뒤로 숨으려 했다.

“그, 그것은…… 그렇게 말해야 산다고 그러기에…….”

오만한 냉소를 지은 루시안이 난폭함이 어른거리는 어조로 물었다.

“유니스란 것이 후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군. 그렇다면 후작 부인이 낳은 아기는 누구지?”

후작이 정신없이 외쳤다.

“저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다 협박을 받아서 말한 것뿐입니다……!”

아리엘은 그녀의 뒤에서 매달리는 후작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호숫가로 다가갔다.

호수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들 때까지.

호수는 아리엘이 가진 스칼렛 레드의 사랑스러운 붉은 머리카락과 투명하고 눈같이 흰 피부, 달콤한 빛깔의 눈동자까지 그대로 담아냈다.

아리엘은 그 앞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해서 그녀는 불행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에게는 마티어스가 있고, 수잔이 있고, 루시안도 있었다.

그러나 알고 싶었다.

천민의 딸이라고 해도 좋았다.

모든 걸 알게 되어야만, 후작가에서 받았던 상처와 트라우마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내게는 돌아갈 곳이 있어.’

그 사실이 아리엘을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게 만들었다.

아리엘의 분홍빛 입술이 나직이 말했다.

“내 친부모님을 알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호수가 다시금 은은한 빛으로 휩싸였다.

점점 환해진 빛이 아리엘의 모습 대신 다른 형상을 표면에 비춰주었다.

“이럴 수가……!”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놀라는 소리를 들은 아리엘은 천천히 눈을 떠 보았다.

“아.”

나지막한 탄성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호수가 비춰주고 있는 모습은 두 남녀였다.

한 명은 청동색 머리카락을 가진 후작,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로잘린드 공주님이시다!”

모여있던 사람들이 외쳤다.

아리엘의 친어머니로 떠오른 사람은 분명, 아까 모두가 보았던 얼굴이었다.

화려한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로잘린드 공주.

아리엘은 떨리는 눈빛으로 친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 아름다운 분이 내 엄마라니…….

호수에 비친 로잘린드가 아리엘에게 웃어주듯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엄마.”

언제나 꿈 속에서만 희미하게 보았던 엄마였다.

꿈 속 엄마는 항상 다정해서, 아비에게 맞고 오라비에게 괴롭힘을 당한 날에도, 한 끼도 먹지 못해 배고픔에 지쳐 잠든 날에도, 추워서 오들오들 떨며 겨우 잠든 날에도 꿈속에서만은 행복했었다.

대공가의 사람들과 수잔이 그 다정한 자리를 채워준 후로 꿈은 점점 희미해졌지만, 이제 그 작은 자리는 '그리움'으로 남아있었다.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나에게 저렇게 웃어주셨겠지?’

아리엘은 촉촉해진 눈으로 살풋 웃었다.

자신이 후작의 친딸이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히 밝혀진 것도 후련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을 본 것만큼 행복한 일은 아니었다.

멀찍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가슴 속이 따스하게 차올랐다.

이제 끔찍했던 루실리온 후작가와 영영 작별이었다.


* * *


라카트옐과 황실, 그리고 사교계 앞에서 아리엘의 출생이 확실히 밝혀졌다.

이제 오늘 이후로 아리엘의 출생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아리엘의 친모로 호수에 떠오른 로잘린드를 본 태후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미혹에 빠져서 내 손녀를 알아보지 못했구나. 저 악한 것에게 사로잡혀 네게 상처를 주었어…….”

황실에선 가장 높은 신분인 태후가 아리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이 바보 같은 할머니를 용서해줄 수 있겠니……?”

태후의 눈엔 후회와 슬픔, 그리고 진실된 미안함이 가득했다.

태후가 유니스에게 미혹되었던 것을 알게 된 아리엘은 전에 태후가 했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리엘은 천천히 자신도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그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태후의 주름진 두 손을 자신의 작은 두 손으로 꼭 잡아 주었다.

“아리엘…….”

태후가 아리엘에게 다가와 작은 소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흐느끼는 태후에게 얌전히 안겨있던 아리엘은 조심스레 태후를 마주 안았다.

태후에게 아리엘은 잃어버린 딸인 로잘린드가 남긴 유일하고 소중한 아이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리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엘의 가슴 속에도 죽은 엄마의 유일한 부모가 잔잔히 스며들었다.

한참 참회와 감동의 눈물을 쏟아낸 태후가 아리엘을 놓아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는 로잘린드를 떠올리게 했지. 너 자체로도 너무나 사랑스럽게 잘 커주었고.”

그리고 그녀는 명철한 눈으로 모두에게 말했다.

“내 딸, 로잘린드의 유일한 자식인 아리엘라 대공자비에게 공주의 작위를 내리려 하오.”

황실 사람들 모두가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므로, 유니스 때와 달리 탁상공론은 필요없었다.

이게 라카트옐과의 관계를 회복할 마지막 기회란걸 알아차린 황제가 발빠르게 나섰다.

“제국의 황제, 나 우레노스 아힌 드 슈테인이 승인한다. 오늘부터 아리엘라 라카트옐은 공주의 딸 자격으로, 황실의 공주가 될 것이다.”

이제 아리엘의 신분은 대공자비일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태후의 손녀이자, 황제의 조카, 차기 황제의 사촌동생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높고 고귀한 레이디가 된 것이다.

태후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조심스레 말했다.

“아리엘, 내가 네 황실 명을 지어줘도 괜찮겠느냐?”

아리엘은 머뭇거리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태후의 애정을 받는 게 어색했지만 혈육의 사랑을 받는다는게 조금 간질간질 기쁘기도 했다.

태후가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넌 로잘린드를 닮았지만, 또한 아름다운 붉은 보석같구나. 장미가 피워낸 루비지…….”

잠시 고민하던 태후가 이윽고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아낸 듯 환히 웃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말했다.

“아리엘 공주의 황실 명은 '아리엘라 로벨린 데 슈테인'이오.”

“승인합니다.”

태후가 로잘린드의 티아라를 아리엘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리고 유니스가 받았던 모든 자신의 물건을 포함해, 유품인 열쇠 목걸이와 보석함도 선물해주었다.

“내 딸을 위해 지은 여름 별궁을 네게 주마. 황궁에는 항상 네 자리가 있을 것이다.”

모인 사람들이 홀린 듯 우렁찬 박수를 쳤다.

모두의 앞에서 아리엘은 태후에게 지난번 첫번째로 바치지 못했던 레아 장미를 올렸다.

“고맙구나…… 내 아가.”

태후는 아리엘이 주는 꽃을 받으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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