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13장 (13/23)
  • 13장




    한편 마티어스가 떠난 뒤, 혼자 천막에 남은 아리엘은 초조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전의 삶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걸까?’

    마수가 라카트옐 영지를 습격한 건 분명 과거에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큰일이 일어났다면 아무리 물정에 어두운 그녀라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되돌아와서 미래가 바뀐 건가?’

    하지만 아리엘이 회귀한 뒤 바꾼 일이라고는 그녀 스스로를 가족의 손아귀에서 구한 것뿐이었다.

    그 외에 다이아나의 마차 사고를 막은 것이나, 카디나의 남동생을 구해준 것은 작은 일이었다.

    그중 마수와 관련이 있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다른 일들은 아리엘이 경험했던 과거와 똑같이 흘러갔었다.

    카디나의 남동생은 회귀 전과 똑같이 습격을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왜?’

    분명 과거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대체 뭐가 변수가 된 거지? 뭐가……?

    그 때, 그녀가 있는 천막 문이 열렸다.

    아리엘은 놀라서 퍼뜩 그 쪽을 바라보았다.

    열린 천막 천 사이로 한 남자가 성큼 몸을 들이밀었다.

    ‘……!’

    아리엘은 들어온 사람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청동색 머리카락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젊은 남자.

    “제롬……?”

    그녀의 오빠, 제롬이었다.

    그가 열어젖힌 천막 사이로 바깥의 소란스러움과 공포가 전해져왔다.

    그리고 아리엘의 눈에 마티어스가 그녀의 호위를 맡겼던 기사들이 천막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어떻게 제롬이 기사들을 쓰러트리고 여기에 들어온 거지?

    당황해서 굳어졌던 아리엘의 얼굴은, 제롬 뒤에서 나타난 형상을 보고 이내 새하얗게 질렸다.

    ‘저 사람은……?’

    아리엘은 비명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눌렀다.

    ‘그’를 직접 마주하는 건 거의 4년 만이었다.

    회귀한 뒤에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10살의 가을에 숲에서 그를 봤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이제야 만나는군.”

    검은 망토 아래에서 소름 끼치게 끼긱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리엘이 익숙히 아는 음성이었다.

    ‘정말로 '그'야.’

    아리엘은 울컥 터져 나오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과거 그는 누구보다 잔인하게 그녀의 삶을 이용하고 유린한 이였다.

    그때를 떠올리자 손끝이 주체 못할 정도로 떨려왔다.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아리엘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감정을 누르며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저자가 왜 제롬과 함께 있는 거지?’

    게다가 제롬의 상태는 지금 좀 이상해 보였다.

    제롬은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아리엘 대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 의지를 잃은 사람 같았다.

    아리엘은 입술을 세게 깨물고 '그'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정체를 밝혀. 내 앞에 나타나다니, 뭘 원하는 거지?”

    검은 망토가 기괴하게 고개를 뒤틀며 킥킥거렸다.

    “아.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나의 정체를.”

    “뭐……?”

    “역시 라카트옐이 알려주지 않았나 보지?”

    ‘그’가 늪같이 질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라카트옐의 숙적인 존재다.”

    “……!”

    그의 대답을 들은 아리엘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라카트옐에게 숙적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의 일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라카트옐을 공격하려고 했던 ‘그’의 무리.

    순식간에 생각을 정리한 아리엘은 분노가 담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에게서 날카로운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대공가를 해칠 순 없어.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검은 망토는 길게 찢어진 징그러운 입을 통해 여유롭게 되물었다.

    “과연 그럴까?”

    “직접 보면 알겠지.”

    싸늘하게 말하며, 아리엘이 손에 새까만 공격마법구를 캐스트했다.

    “지금 당장 널 없앨 거니까.”

    “아니, 넌 못해. 이 몸은 허상이거든.”

    ‘그’가 망토자락을 펄럭였다.

    아리엘은 그의 망토자락 뒤가 고스란히 비치는 걸 볼 수 있었다.

    “방금 후작 영식을 여기로 데려오느라 힘을 다 써서 실체가 없지.”

    그 말을 입증하듯 그의 몸이 점점 투명해져 갔다.

    검은 망토가 킥킥대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러니 네 오라비와 한 번 싸워 보거라.”

    네 공포를 가장 잘 자극할 수 있는 상대니까!

    말을 마친 그는 검은 연기가 되어 제롬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흐리멍덩하던 제롬의 눈이 갑자기 번쩍 뜨이더니 아리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그'가 제롬을 조종하고 있어.

    아리엘은 손의 공격 마법구를 빠르게 방어로 전환했다.

    “마나 쉴드!”

    달려들던 제롬이 아리엘의 쉴드에 막혀 낙엽처럼 밀려났다.

    제롬과 아리엘은 덩치 차이가 세 배는 나지만, 제롬은 마법 능력이 없으니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계산을 마친 아리엘은 빠르게 결박 마법을 캐스트 해냈다.

    그런데 그때였다.

    “……!”

    아리엘의 눈에 제롬의 손에서 마나가 뭉쳐지는 것이 보였다.

    자주색으로 어룽거리는 불길한 색깔의 마나였다.

    ‘제롬은 마법사가 아닌데, 어떻게 마나를?’

    아무래도 '그'가 제롬을 조종하면서 제롬이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만든 듯했다.

    마나를 두르자 제롬의 공격은 위협적인 파괴력을 내기 시작했다.

    그가 아리엘을 향해 자줏빛 마나의 구를 무작위로 난사했다.

    하지만 공격의 정확성은 떨어져서 아리엘은 그 공격을 쉽사리 피할 수 있었다.

    한 걸음 물러나 제롬과 거리를 둔 그녀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제롬은 숙주야. '그'는 지금 실체가 없으니 숙주를 잠재우는 게 가장 빠르겠지.’

    그녀는 제롬을 기절시킬 정도의 마법구를 만들었다.

    하지만 자주색 마나를 덧입은 제롬은 놀랍도록 민첩하게 움직이며 아리엘을 공격할 틈을 보고 있었다.

    ‘마법진으로 가둬야겠어.’

    아리엘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마나로 작은 마법진을 여러 개 그렸다.

    그리고 제롬의 공격을 피하는 척 제롬을 그곳으로 유인했다.

    “으아아-!”

    제롬이 짐승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아리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발이 작은 마법진을 밟는 순간, 마법진에서 빛의 고리가 나와 제롬의 팔과 다리에 달라붙었다.

    제롬의 몸은 꽁꽁 묶여 버렸고, 마나를 던질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됐어.’

    아리엘은 제롬에게 날릴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그때였다.

    제롬의 입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쓸모없는 육신으로는 안 되겠군!”

    쇳소리처럼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제롬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빠져나왔다.

    검은 연기가 빠져나간 제롬의 몸은 기절해 축 늘어졌다.

    잠시 소용돌이친 검은 연기가 허공을 향해 솟구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키에엑-!

    천막이 통째로 움켜 들리며 마수가 등장했다.

    책에서만 보았던 용 계열 마수, 가고일이었다.


    * * *


    천막 근처에 있던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악-!”

    아리엘은 경악한 채 가고일을 바라보았다.

    가고일은 용 마수 중 가장 작은데도 키가 30미터가 훌쩍 넘는 거구의 몬스터였다.

    검은 연기가 마수에게 명령했다.

    ‘공격해라!’

    얼어붙어 있던 아리엘은 '그'의 소름 끼치는 음성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에 마티어스님이 없어.’

    가고일 떼가 습격했다고 했으니 한 마리가 아닐 것이다.

    마티어스는 지금 그것들을 상대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눈앞의 마수는 오로지 그녀만을 노리고 있었다.

    뒤에서 다급한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엘 대공자비, 피하십시오!”

    황태자 디트리히는 지금 기사들을 이끌고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는 듯 했다.

    ‘어차피 이 마수는 나만 공격할 거야. 그러니 내가 피해도 소용없어.’

    그리고 이 주위에 사람이 있어선 안 돼.

    마수 가고일이 이곳의 사람들을 다 죽이는 데는 앞발 몇 번 휘두르는 걸로 충분할 테니까.

    ‘마티어스님이 오실 때까지만, 버텨보자.’

    용 마수를 묶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면 돼.

    아리엘은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도망치는 대신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 사이 가고일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앞발을 뻗어 그녀를 낚아채려 했다.

    아리엘은 재빨리 피했지만, 불행히도 옆에서 도망치던 어린아이 하나가 마수의 손에 잡혔다.

    “꺄아아악!”

    붙잡힌 어린아이의 비명이 허공에 흩어졌다.

    아리엘은 곧장 주문을 외웠다.

    “워터 체이스!”

    주문을 외치자 물 원소가 방사형의 그물 모양으로 화려하게 펼쳐졌다.

    그녀는 가볍게 물의 그물을 밟으며 도약해 올라갔다.

    마수가 크르르거리며 아리엘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마수의 머리 높이까지 올라간 그녀는 아이가 붙잡혀있는 가고일의 앞발을 향해 거대한 마법구를 날렸다.

    “윈드 블레이드!”

    키에에-

    바람을 응축해 강렬한 검처럼 휘두르는 기술에 맞은 가고일이 날카롭게 울었다.

    용 마수이기에 마나에 전혀 다치지 않았지만 충격파가 거세서 앞발에서 아이를 놓치고 말았다.

    아리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를 잡아챘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아이를 물의 그물에 던져 땅으로 보내고 워터 체이스 마법을 종료시켰다.

    가고일은 순식간에 인간을 빼앗겨 당황한 듯 보였다.

    ‘마법을 배울 때 전투 연습도 해둬서 다행이야.’

    제자들이 어느 정도 마법의 기본기를 익히자 브루노어는 히스와 아리엘에게 전투 마법을 가르쳤다.

    원소 마법이 주 종목인 아리엘은 바람을 이용한 블레이드, 화염을 이용한 애로우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공격 마법도 익혔지만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던 그녀는 공격 마법을 거의 쓰지 않았다.

    오래 생각에 잠겨있을 틈은 없었다.

    키엑!

    마수가 분노한 듯 울부짖었다.

    아리엘은 곧장 방어 자세를 취했다.

    디트리히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엘 대공자비, 지금 당신이 표적입니다. 도망쳐야 해요!”

    아리엘은 등 뒤에 있는 디트리히에게 외쳤다.

    “전하! 저는 됐으니 사람들을 여기서 피신시키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보기 드물게 디트리히에게서 감정적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말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마티어스님을 불러주세요!”

    말을 마친 뒤, 아리엘은 마수 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마나 쉴드!”

    쉴드를 두른 그녀는 텔레포트로 허공에 이동한 후 마수의 등을 타고 올랐다.

    마수는 감각이 예민하고 인간보다 빠르기 때문에 청각이나 시각 중 하나를 차단해야만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마수의 귀에 워터 드롭을 꽂아 넣은 뒤 주문을 외쳤다.

    “라이트닝 익스플로젼!”

    워터 드롭으로 물에 젖은 곳마다 강한 전류를 일으켜서 마수의 귀를 괴롭게 할 생각이었다.

    캬악-!

    귓전에서 천둥소리를 들은 가고일이 아리엘을 떨어뜨리기 위해 날개를 위협적으로 펄럭였다.

    아리엘은 이를 악물고 버티며 가고일 귀에 소리 마법을 터트려보았다.

    펑!

    마수의 귀가 소리에 반응해서 휙 움직였다.

    아리엘은 가고일이 방금의 공격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도 청각을 방해하는 건 어느정도 효과가 있겠어.’

    그녀는 가고일의 머리에 바람 소리로 혼동 마법을 걸어 놓은 뒤 땅으로 뛰어내렸다.

    ‘마티어스님이 제발 빨리 와 주셨으면.’

    가고일과 아리엘의 체급 차이는 코끼리와 생쥐 같았다.

    물론 힘 차이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가고일은 마법이나 무력이 먹히지 않는 용 마수다.

    시간을 오래 끌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다음은 날개야.’

    아리엘은 가고일의 청각을 묶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날개까지 제약할 계획을 세웠다.

    방금 겪어보니 가고일의 날개는 생각 이상으로 위협적이었다.

    한 번만 펄럭여도 강풍이 생기는 데다, 단단해서 잘못 맞으면 뼈가 모두 부러질 것 같았다.

    그녀는 불꽃의 채찍을 캐스트했다.

    “플레임 로드!”

    한 손에 긴 채찍을 단단히 쥔 아리엘은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화염 채찍으로 가고일의 날개 한쪽을 잡아챘다.

    순간 마수의 날개가 휘청거리며, 가고일의 눈동자가 아리엘을 향했다.

    크르르릉!

    섬뜩하게 으르렁거린 마수는 앞발을 들어 아리엘이 딛고 있는 땅을 내리찍었다.

    아리엘은 텔레포트로 빠르게 피했지만 내리찍힌 땅에는 움푹한 구덩이가 생겼다.

    정면으로 맞았다면 소녀 하나쯤은 가루가 되었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녀가 피하자 더욱 약이 올랐는지 가고일이 연이어 빠르게 아리엘이 움직이는 곳마다 앞발을 휘둘렀다.

    쾅, 쾅, 콰앙!

    텔레포트로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마지막엔 간발의 차로 발톱에 찢길 뻔했다.

    ‘위험했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그녀는 손에 마법구를 발동했다.

    이번에는 얼음의 기운이 서린 물 원소였다.

    “프리즈 드롭!”

    콰지지직!

    고드름 모양의 날카로운 얼음이 마수의 발 주위로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어차피 해칠 수 없으니 잠깐 발을 묶어두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리엘은 얼음덩이에 구속된 가고일이 힘을 주어 발을 뽑아내려는 걸 보면서, 빠르게 주머니에서 씨앗 하나를 던지며 주문을 외웠다.

    “그리너리 차지!”

    아리엘이 주문을 외우자 흙원소가 아몬드형의 씨앗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에 땅을 뚫고 굵은 가시덩굴이 솟구쳐 자라기 시작했다.

    이 마법은 아리엘이 특기로 개발한 것으로, 흙원소와 식물 사이의 연계를 이용한 마법이었다.

    그녀가 던진 씨앗은 고대 가시덩굴 나무의 씨앗.

    흙원소와 완전히 친화된 아리엘만이 자라게 할 수 있는 식물이었다.

    고대 가시덩굴은 마나만 불어넣어 준다면 끝도 없이 자라기 때문에 거대한 몸집의 마수를 구속하는데 적격이었다.

    세 줄기의 덩굴이 서로서로 꼬아가며 마수의 키 높이까지 자랐다.

    마수의 팔다리는 총합이 4개.

    그러나 아리엘이 운용할 수 있는 덩굴은 세 개가 다였다.

    가지고 있는 씨앗은 하나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덩굴에 마나를 강력히 쏟아부으며 마수의 앞발과 뒷다리를 가리켰다.

    “바운드!”

    쉬이익. 덩굴이 돌진하듯 가고일의 세 다리로 달려가 칭칭 감았다.

    키익! 키이이익!

    당황한 가고일이 몸부림을 쳤다.

    ‘해칠 순 없지만 잠시나마 묶어둘 수 있지.’

    아리엘은 화염 채찍을 휘둘러 가고일의 날개를 다시 단단히 묶었다.

    그리곤 이어서 다시 충격파.

    “메테오 스트라이크!”

    그녀가 쓸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마나를 많이 잡아먹는 강력한 마법이었다.

    한 번 발동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흐윽.”

    아리엘은 신음을 삼키며 마법의 운석이 가고일의 머리를 세차게 내리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팔다리와 한쪽 날개를 제압당한 가고일은 하나 남은 앞발을 휘두르며 분노의 소리를 토해냈다.

    크아악!

    아리엘은 재빨리 가고일의 앞발을 피하며 뒤로 뛰어올랐다.

    그 때였다. 마수의 꼬리가 움직인 것은.

    휘리릭- 퍽!

    뒤로 크게 도약한 아리엘은 마수의 꼬리에 정통으로 맞고 바닥으로 세게 내팽개쳐 졌다.

    “흑!”

    쉴드를 둘러놓아서 척추뼈가 부러지는 것만은 막았지만, 잠시 동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기회를 잡은 가고일이 날개를 크게 펴 휘둘렀다.

    날아오르는 힘을 이용해서 다리를 잡고 있는 덩굴을 끊어버리려는 시도였다.

    용 마수의 힘 앞에 가시덩굴은 결국 끊어지기 시작했다.

    우지지직.

    요란하게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가고일을 구속하던 덩굴이 완전히 끊어졌다.

    마수는 곧장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앞발이 쓰러진 아리엘을 향해 날아왔다.

    아리엘의 눈앞은 깜깜해졌다.

    ‘끝인가.’

    가고일의 앞발이 내려오는 짧은 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 순간 그녀는 공포 대신 허망함을 느꼈다.

    ‘이렇게 죽는 거야……?’

    과거의 삶은 그녀가 갓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끝났다.

    17년간 어둡기만 했던 삶이었다.

    마지막 빛처럼 루시안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두 번째 삶에서 지금 그녀의 나이는 열네 살.

    행복의 총량으로 따진다면 지난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은 삶이었다.

    그래서 더욱 포기하고 싶지 않은 생이기도 했다.

    아리엘의 눈앞이 흐려졌다.

    ‘더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욕심인가요?’

    흐릿해진 시야 앞으로 주마등처럼 다른 사람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죽으면 마티어스님은 어떻게 하지?

    ‘네게 과분한 건 없다, 아리엘라.’

    헥터와 랄프, 내 호위들은?

    ‘아기 마님께 가장 큰 걸 잡아다 드립죠!’

    다이아나와 세실, 내 친구들은?

    ‘아리엘, 우리 왔어.’

    수잔과 알렌과 하녀들은?

    ‘귀엽기도 하셔라.’

    ‘마님.’

    ‘아리엘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다른 무엇보다. 남편인 루시안은?

    ‘지금도 가족이잖아. 너와 나는.’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내가 네 것이라고.’

    머릿속에 사람들의 얼굴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호흡이 가빠졌다.

    제발 그들이 슬퍼하거나 자책하지 말아야 할 텐데…….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자, 아리엘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있는 힘껏 마녀를 끌어모았다.

    “엘리멘탈 하울링-!”

    모든 원소의 힘을 모아서 공격하는 마법이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쓴 후에 곧이어 마나를 억지로 끌어 올렸기에 뱃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정통으로 주문을 맞은 가고일이 끼에에엑 거친 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경련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아리엘을 향해 달려드는 움직임은 둔해지지 않았다.

    정말 끝이구나.

    ‘마지막으로…… 루시안 얼굴도 못 봤는데.’

    목구멍에서 울컥 올라오는 피 맛을 느끼며, 아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 * *


    디트리히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면서도 아리엘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전하, 전하께서 가장 먼저 피하셔야 합니다!”

    그를 지키는 황실 호위 기사단이 거의 납치하다시피 그를 잡아끌었지만 디트리히는 아리엘의 전투 장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리엘 대공자비…….”

    가녀리고 연약하게만 보였던 소녀였다.

    대공자가 열여덟 살, 남자의 느낌을 강하게 내기 시작한 후로 그 옆의 아리엘은 더욱 여리고 작아 보이기만 했다.

    그녀의 갓 내린 눈처럼 하얗고 눈부신 피부, 그윽하게 자리한 긴 속눈썹은 무한히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툭 부러질 것 같은 얇은 발목이나 손목, 가녀린 목선은 보는 사람에게 심장이 바짝 졸아붙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녀를 봐왔던 사람들 중 누가 상상했겠는가?

    설사 아리엘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이런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리라.

    투명하게 비쳐 보일 듯한 맑은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이 아찔하게 허공을 수놓으며 마수를 공략해나갔다.

    그녀가 마법구를 캐스트한 후 주문을 외울 때마다 떨어지는 마법은 천재지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위험한 순간마다 빠르게 마수의 공격을 비껴 나가는 움직임은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것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마치, 작지만 파괴력이 어마어마한 전장의 여신 같았다.

    디트리히의 녹색 눈동자에 아리엘의 전투 모습이 선명하게 찍혔다.

    그는 완전히 넋을 잃었다.

    그리고 아리엘이 마수의 일격을 받아 쓰러졌을 때.

    그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를 지키는 것이 의무인 기사단이 디트리히를 막아섰다.

    그들은 놓으라는 디트리히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마수의 섬뜩한 갈고리발톱이 자그마한 소녀의 심장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나갔다.

    “안 돼!”

    그때였다.

    촤아악! 콰직!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바닥에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가해졌다.

    디트리히와 그를 붙잡고 있던 기사단 모두 지진을 만난 듯 휘청였다.

    자욱한 먼지바람이 피어오르고…….

    쿠우우우웅.

    방금까지 아리엘을 공격하고 있던 30미터 높이의 마수가 절반으로 갈라지며 육중하게 내려앉았다.

    홍수라도 난 듯 마수의 검붉은 피가 쏟아져 흘렀다.

    마수가 베어지는 순간,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휙 빠져나와 사라졌다.

    ‘큭, 조금만 더 있었으면 되었는데!’

    갑작스러운 상황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얼이 빠져버렸다.

    그리고 반 갈라진 마수의 시체 사이로, 흰 셔츠를 검붉게 물들인 남자 하나가 느리게 걸어 나왔다.

    그가 등장하자 공기의 흐름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남자의 손에서 피 묻은 검 한 자루가 스릉 떨어졌다.

    대공자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이었다.


    * * *


    거대한 마수를 단숨에 절반으로 베어내며 더운 피를 뒤집어쓴 남자는 지독히도 피의 붉음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대리석처럼 흰 얼굴에 튄 핏방울과 흰 곳보다는 검붉게 젖은 곳이 더 많아진 하얀 셔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은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

    피와 광기의 라카트옐.

    모든 제국민들이 익히 아는 그 수식어가 실체화된 듯한 모습이었다.

    정작 그 모습을 한 루시안은 전혀 라카트옐답지 않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흐트러진 걸음으로 휘청대며 아리엘 앞으로 걸어간 그가 푹 무릎을 꺾었다.

    “아리엘.”

    아리엘은 환청처럼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루시안의 얼굴이 보였다.

    ‘루시안?’

    바로 앞에 있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아리엘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거 꿈인가? 죽고 나서도 꿈을 꿀 수 있는 거였나?

    ‘꿈이라면…….’

    그녀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홀린 듯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지막으로 루시안의 감촉을 기억하고 싶었다.

    아리엘의 작은 손이 피로 얼룩진 루시안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읏.”

    급작스럽게 신음한 그가 두 팔로 와락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뼈가 부서질 것같이 강한 악력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힘에 아리엘은 약하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세게 제 품에 가둬놓은 루시안이 잇새로 내뱉었다.

    “하마터면 널 잃을 뻔 했잖아.”

    단단한 팔이 옥죄는 고통과 루시안의 거친 호흡이 아리엘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때문에 그녀는 현실을 실감했다.

    뭐야. 이상해. 이거 꿈이 아닌 것…….

    갑자기 시야에 초점이 돌아오며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녀를 끌어안은 루시안의 등 뒤로 죽은 가고일의 형상이 보였다.

    ‘아.’

    마수가 죽었어.

    깨달음이 머리를 때렸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지금 들이마시고 있는 공기와, 대기를 가득 채운 축축한 피 냄새, 그리고 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의 몸에서 나는 달콤한 체취까지.

    모두 현실이었다.

    다 끝났다고, 이 행복한 삶과는 이제 작별이라고 생각했는데.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루시안이 날 구해줬구나.’

    가슴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복받쳐 올랐다.

    뜨겁기도 하고 물기 어리기도 한 어떤 것.

    그것을 느끼며 아리엘은 눈을 세게 감았다.

    ‘루시안은 항상 나를 구해주네요.’

    심장이 파닥거렸다.

    루시안의 품 안에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그녀는 그저 안심이 됐다.

    세상 모든 위협이 사라진 것처럼.

    아리엘은 흥분으로 떨고 있는 루시안의 어깨에 뺨을 대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껴안은 만큼 그녀도 그를 꼭 껴안았다.

    지금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 * *


    뒤늦게 현장에 달려온 히스는 아리엘 바로 앞에 죽어있는 마수를 보고 창백하게 질렸다.

    다행히 아리엘은 크게 다친 데 없이 가벼운 타박상만 입은 듯했다.

    히스가 다가가자 그녀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히스.”

    “너…… 너…….”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너 미쳤어! 가고일이 어떤 마수인데 그걸 혼자 덤벼!’

    하고 버럭 소리를 치고 싶은데 핏기 없는 입술을 보자 그런 말이 쑥 들어갔다.

    흘긋 옆을 보자, 대공자가 아리엘 쪽을 날카롭게 주시하며 하인들에게 뭔가 명령을 하고 있었다.

    옆을 나뒹굴고 있는 제롬을 가리키며 무어라 차갑게 지시한 루시안이 아리엘 옆으로 돌아왔다.

    아리엘은 크게 멍든 팔을 히스에게 보여주며 민망한 듯 말했다.

    “나 힐 좀 넣어줄래? 내 마나는 지금 쓰기 좀 힘들어서.”

    원래같으면 몸을 집어삼키려고 날뛰어야 할 마나인데, 아리엘이 대형 마법으로 대폭 소진시켜 놓는 바람에 마나도 날뛰지 않고 있었다.

    히스는 이를 악물고 이리저리 그녀를 살피다가 한 번에 크게 확 치유마법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아리엘의 흰 팔뚝에 생겼던 멍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장면을 왠지 자책하는 듯 어둡게 바라본 루시안이 아리엘을 안아 들었다.

    그의 팔에 안아들리자 긴장이 풀렸다.

    ‘이제 생각은 그만해야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아리엘은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줄곧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 루시안의 품에 안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그녀와 루시안을 알아본 하녀들이 걱정하는 기색 가득한 얼굴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 * *


    아리엘이 저택으로 돌아간 뒤.

    저택의 사용인들과 귀족들이 수없이 공터를 오가며 어수선한 상황을 수습했다.

    그중에 한 사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황태자 디트리히 레온 드 슈테인은 뚫어져라, 그야말로 뚫어질 듯이 마수 가고일의 머리를 응시했다.

    주변의 수하들이 걱정하며 말했다.

    “전하. 이제 들어가셔야 합니다.”

    “놀라셨을 테니 당장 궁의를 불러 진료를 받으시지요.”

    하지만 그는 그들의 말을 모두 흘려넘기며 마수의 머리통 한 부분을 노려보았다.

    마지막에 자신이 본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가고일의 귀가 달린 머리통 옆 부분.

    그곳에는 육안으로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상처를 통해 나온 핏자국이 실 줄기처럼 그어져 있다.

    “말이…… 안 돼.”

    디트리히가 텅 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 저 상처는 대공자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루시안은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용 마수 가고일을 반 토막 냈다. 해치우는 데는 일격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저 작은 상처는.

    ‘아리엘 대공자비가 마지막으로 공격했을 때 생긴 것…….’

    그런데 그게 말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용 마수는 사람이 해칠 수 없는 종족이니까.

    아리엘보다 더 강한 대마법사가 와서 싸웠을 때도 상처 하나 낼 수 없었다.

    라카트옐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소드마스터도 용 마수를 벨 수 없었다.

    이미 수천 년의 역사로 입증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리엘이 마법으로 가한 공격에 가고일은 상처를 입었다.

    그것이 비록 아주 작은 생채기라고 할지라도,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디트리히는 혼란에 빠져 얼굴을 감쌌다.

    깊이 침잠한 목소리가 그가 얼굴을 덮은 손 사이로 새어 나왔다.

    “아리엘 대공자비, 당신은…… 정말 평범한 사람이 맞는 겁니까.”


    * * *


    마수와 싸우느라 체력을 모두 써버린 아리엘은 마법 약을 먹고 깊이 잠이 들었다.

    한참을 석상처럼 그 옆에 앉아있던 루시안이 고개를 든 건 끼이익- 작은 문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마티어스였다.

    노크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온 마티어스가 침대에 누워서 새근새근 자는 아리엘을 한 번 훑어보고는 루시안과 시선을 맞췄다.

    “나가, 무사한 거 확인했으면.”

    루시안이 낮게 일갈했다.

    그의 눈동자는 빙하처럼 차갑고 또 한편 짙은 고통을 담고 있었다.

    마티어스는 나가는 대신 문 옆의 벽에 기대어 섰다.

    두 남자 모두 몸에서 마수의 피를 씻어냈는데도 방 안에는 혈향이 가득했다.

    라카트옐과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이 죽음의 향기일 것이다.

    조용히 서 있던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네가 물었지. 무슨 생각으로 저 애를 집에 들였느냐고.”

    둘 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라카트옐 저택 앞에 쓰러져있던 열 살의 아리엘이 발견됐을 때.

    마티어스는 아리엘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고, 아리엘과 루시안이 계약 결혼을 약속한 그 날 밤에 루시안은 말했다.

    ‘마티어스.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걜 들였는지 모르겠더군.’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린 루시안이 싸늘하게 마티어스를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마티어스가 피로한 듯 잠시 눈가를 짚었다가 손을 뗐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네 놈이야말로 무슨 생각인 거냐.”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이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때도 말했었지. 얘가 내 것이 되겠다고 했다고. 그러니 난 얘를 빼앗기거나 죽게 내버려 둘 생각 따위, 없다고.”

    마티어스가 무덤덤한 어조로 반문했다.

    “그때 했던 말. 지금은 의미가 다르지 않나?”

    “…….”

    루시안의 눈빛이 동요하듯 날카로워졌다.

    침묵하는 루시안을 앞에 두고 마티어스는 몸을 돌렸다.

    마티어스가 나간 뒤 루시안은 누워있는 아리엘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

    그의 서늘한 손끝이 그녀의 눈꺼풀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엉키지도 않는 긴 속눈썹이 지독하게도 예뻤다.

    루시안의 입술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달라졌지.”

    인정하긴 싫지만 마티어스가 옳았다.

    처음 아리엘을 아내로 삼았을 때와 지금, 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계약으로 그녀를 묶어뒀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어찌할 수 없게 빠져 버렸으니까.

    이번 일로 루시안은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은 아리엘 없이는 살 수 없었다.

    마수가 그녀를 죽일 뻔하던 순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 작고 연약한 생명체를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녀는 어느새 자신에게 대책 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루시안은 아리엘의 눈가에 깃털이 내려앉듯 살짝 입을 맞췄다.

    “다시는 널 다치게 안 해.”

    그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해결해야 할 것이 남아있었다.


    * * *


    루시안이 방을 나서자 검은 옷의 사내들이 그에게 절도있게 인사를 했다.

    라카트옐의 숨겨진 수족, 달 그림자였다.

    라카트옐은 공식적으로 거느리는 푸른 사자 기사단 외에도 어둠의 일들을 처리하는 집단을 소유하고 있었다.

    원래는 그냥 혼자 휘젓고 다녔는데 그것 때문에 라카트옐 대공가의 악명이 지나치게 높아지자 황실에서 해결책을 내놓았다.

    달 그림자 집단을 통해 조용히 처리하는 것으로.

    그렇게 라카트옐이 그들을 몇백 년간 굴려 오면서 달 그림자는 뒷세계 어떤 단체보다 무시무시한 집단이 되었다.

    정보 수집, 위험한 임무 등에 특화된 자들이었다.

    맨 앞에 있는 검은 옷의 사내에게 루시안이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것들은 어디 있지?”

    주인의 목소리에 묻은 살기에 긴장하며 사내가 대답했다.

    “후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루시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나머지 하나는?”

    “명하신 대로 해두었습니다.”

    루시안이 벗은 재킷을 집사 베르토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었다.

    루시안이 검은 옷 사내에게 말했다.

    “그리로 간다.”


    * * *


    다음날 오전, 아리엘이 깨어났을 무렵은 아수라장이었던 사냥터가 모두 정리된 후였다.

    “……저건.”

    당연히 마수 가고일의 시체만은 제외하고.

    창밖을 내다보며 아리엘은 쭉 기지개를 켰다.

    어제 마법약을 먹고 푹 잤더니 몸이 가벼웠다.

    ‘어제 일이 꿈같아.’

    책으로만 보던 용 마수를 실제로 본 데다 직접 싸워보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저 밖에 있는 가고일 시체가 아니었다면 아마 못 믿었을 것이다.

    ‘물론…… 루시안이 날 구하러 달려와 준 것도.’

    루시안이 마수를 벤 뒤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을 때 아리엘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마터면 널 잃을 뻔했잖아.’

    잔뜩 억누른 듯 갈라진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떠올린 아리엘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마침 본가의 하녀장이 들어와서 생각이 끊겼다.

    잠옷을 갈아입으며 그녀는 하녀장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어제 일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어제 사망자가 있었니?”

    “아니요. 다행히 부상자만 있고 사망자는 없습니다.”

    “다행이네.”

    마수가 내려오는 건 천재지변이라 라카트옐에게 책임이 없지만 치료 비용은 대공가가 전부 대주기로 했다.

    하녀장의 도움으로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을 빗고 나자 아침 식사가 들어왔다.

    “좋은 밤 되셨나요, 아기 마님?”

    “배고프시죠, 얼른 식사하세요.”

    밝게 인사한 하녀들이 가지고 온 메뉴는 먹기 좋게 부드러운 옥수수 스프였다.

    아리엘의 배에서 꼬르륵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들이 엄마 미소를 지었다.

    “주방에서 새벽부터 아주 곱게 옥수수를 갈았대요. 좋아하시는 음식을 해드리려고요.”

    아리엘은 빨개진 얼굴로 스푼을 잡았다.

    ‘라카트옐 특제 옥수수 스프는 그냥 스프와 다르달까.’

    진한 옥수수의 맛이 그대로 느껴지면서 껍질은 하나도 씹히지 않는 점과 산양젖을 저어 만든 크림이 듬뿍 들어가 무척 부드럽다는 점이 그랬다.

    아리엘이 달콤고소한 스프를 스푼 가득 냠냠 떠먹는 동안 하녀장이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어제저녁 연회는 취소됐었답니다. 사냥대회가 도중에 끝나버려서 잡아 온 사냥감을 어떻게 할지도 혼란스러웠지요.”

    그때 마티어스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이때까지 잡은 사냥감으로 사냥대회의 우승자를 가리기로 하지. 내일 오전에 시상식을 하겠다.”

    그래서 지금 공터에서는 각 가문의 시종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난 시종들은 어제 자신의 주인이 잡은 사냥감을 공터에 끌어다 놓았다.

    곧 있을 사냥대회 시상식을 위해서였다.

    식사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소곤소곤 말했다.

    “시상식 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정화의 능력을 보여주신대요!”

    마수의 피는 땅을 오염시킨다.

    그 이유는 마수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락에 물든 동물이 마수로 변한 것이기에 그것의 피는 땅을 죽게 만들었다.

    검게 변하고 생명체가 살 수 없게 된다.

    영원히 곤충도, 식물도 깃들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땅에 빛의 축복인 성력을 불어넣는 것이 ‘정화’였다.

    제국에서 성력을 가진 사람은 직계 황족들뿐.

    그래서 이번 일에서는 황태자가 나서려는 모양이었다.

    ‘성력은 어떤 모습일까?’

    디트리히의 여름 잎사귀 같은 녹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되지만 실제로 보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궁금하다.’

    아리엘은 스푼을 물고 생각했다.


    * * *


    디트리히의 손에서 연한 연두색 빛이 흘러나와 검게 죽은 땅에 스며들었다.

    성력을 내보내는 데 집중하고 있던 디트리히는 먼발치에 서 있는 아리엘을 발견했다.

    ‘아리엘 대공자비.’

    녹색 눈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어제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밤새 깨어있으면서 디트리히는 기억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수만 권의 책이 그의 머릿속에 또렷이 들어있었다.

    ‘인간이 용 마수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었나?’

    아니. 그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알기로 아리엘은 보통의 인간이었다.

    가고일과 싸울 정도로 강한 마법사지만, 칼에 베이면 피가 나고 아파서 앓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

    그런데 자꾸 예전에 루시안이 경고했던 말이 맴돌았다.

    ‘아리엘은 다르다. 너 같은 것이 상상하지도 못할 방식으로 다르지.’

    무슨 뜻이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이 아주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 루시안에게 직접 물어보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일단 티를 내지 말아야겠군.’


    디트리히는 자신만 아는 비밀로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문득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면서 아리엘을 끌어안던 루시안이 떠올랐다.

    그때만큼은 그는 포식자로 보이지 않았다.

    강자의 여유가 완전히 깨진 모습.

    디트리히는 입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라카트옐이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존재던가……?”

    파앗-!

    이윽고 성력을 불어넣던 디트리히가 손을 거두자 땅에서 강한 빛이 나왔다.

    모두가 눈부셔하며 눈을 가렸다.

    그리고 다시 그 땅을 보았을 땐…….

    ‘와!’

    정말로 오염된 땅이 갈색빛의 평범한 흙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정화됐다!”

    “황태자 전하 만세! 만세!”

    함께 구경하던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아리엘도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반짝였다.

    ‘와, 정말 신기하다.’

    그리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아리엘만 빤히 주시하고 있던 루시안이 눈썹을 천천히 치켜올렸다.


    * * *


    디트리히의 땅 정화식 후에는 사냥대회 결산이 있었다.

    귀족 남자들은 모두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레이디에게 사냥감을 바쳤다.

    손수건을 받은 답례를 하는 것이다.

    그들 중 가장 크고 값진 사냥감을 잡은 남자가 우승자, 가장 많은 사냥감을 받은 여자가 올해의 레이디가 된다.

    가만히 서 있던 아리엘도 푸른 사자 기사단이 가져온 사냥감을 받았다.

    “아기 마님, 제가 잡은 겁니다.”

    “제 것도 있습니다.”

    “제 사냥감도 받아주십시오!”

    어? 어어? 근데 좀 많다?

    ‘잠깐, 이 사람들 아예 숲 동물 씨를 말릴 생각으로 사냥한 거 아니야?’

    아리엘은 그녀 앞에 수북이 쌓인 동물들을 보며 심각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소드 마스터인 헥터와 랄프가 가져왔을 때는 모두가 입을 딱 벌렸다.

    헥터는 엄청난 크기의 불곰을, 랄프는 사납기로 유명한 검독수리를 잡아 바쳤다.

    아리엘이 말없이 곰과 독수리를 번갈아 보자 랄프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냥감이 작아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랄프, 독수리가 2미터가 넘잖아요!’

    헥터는 신이 나서 외쳤다.

    “둘 다 머리를 잘라 박제를 해드립지요. 곰 머리는 박제하고 가죽은 깔개하고! 이 독수리는 잘생긴 게 딱 박제 감입니다.”

    그 말을 하는 헥터가 너무 어린애처럼 신나 보여서 아리엘은 꾸중도 하지 못했다.

    ‘숲의 포식자들을 이렇게 잡아버려도 되는 걸까…….’

    왜 고민은 항상 내 몫인 건가요?

    그때 인파 사이를 가르고 히스가 등장했다.

    히스는 공중부양 마법으로 커다란 사냥감을 옮겨 오는 중이었다.

    특유의 퉁명스러운 얼굴로 다가온 그가 아리엘 앞에 사냥감 뭉치를 툭 내려놓았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손수건 답례야.”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그의 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아직 근처에 있던 헥터가 히스의 사냥감을 보고 호탕하게 외쳤다.

    “야! 이거 은빛 늑대들 아냐. 아주 사나운 놈들인데!”

    은빛 늑대라는 말에 주변이 웅성웅성해졌다.

    은빛 늑대는 깊은 숲에 살며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 때문에 사냥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 늑대 무리를 히스는 아예 떼로 잡아버린 것이다.

    은빛 늑대의 털은 여자들 겨울옷의 최고급 재료이기 때문에 영애들에게서 부러움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리엘은 일단 히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손수건의 답례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한 선물이었다.

    “고마워, 히스.”

    감사 인사를 받은 히스는 얼굴이 빨개졌다가, 뒤늦게 중얼거렸다.

    “이딴 거 잡고 있을 시간에 빨리 돌아와서 널 도왔어야 했어.”

    “아니야. 네가 가고일하고 싸우다 다치는 건 싫은걸.”

    아리엘은 힘주어 그 말을 부정했다.

    히스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나도 그럴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응? 그거야…….

    “당연히 히스도 그렇겠지.”

    “너 내 말 제대로 알아들은…….”

    답답한 듯 뭔가를 말하던 히스의 목소리는 곧 다른 소리에 묻혀버렸다.

    “황태자 전하시다!”

    “와, 저게 뭐야?”

    디트리히가 근처에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일단 히스가 하던 말에 집중했다.

    “무슨 말이야, 히스?”

    이를 꽉 깨물고 있던 히스가 갑자기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더니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어?”

    “나중에 봐.”

    히스가 우울한 기색으로 돌아서 사라졌다.

    아리엘은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갸웃했다.

    ‘한동안 안 그러더니. 괜찮은 건가?’

    한편 멀리멀리 떨어진 곳까지 도망친 히스는 나무뿌리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둥치에 뒤통수를 쿵쿵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난 정말 바보 멍청이 해삼 말미잘이야.”


    * * *


    다음으로 아리엘을 방문한 사람은 디트리히였다.

    디트리히 또한 손수건의 답례로 사냥감을 가져 왔다고 말했다.

    그가 사냥감을 바치자 주변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디트리히의 사냥감은 그만큼 우아한 생명체였다.

    “수컷 엘피 사슴이야. 엘프의 사슴이라고도 하는!”

    엘피 사슴은 엘프를 사슴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이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개체 수가 적어서 희귀하기까지 했다.

    숨이 끊겨 누운 모습에서도 그 우아함이 느껴졌다.

    아리엘은 어쩔 줄 모르다가 감사를 표했다.

    디트리히가 왠지 뿌듯한 얼굴로 밝게 웃었다.

    골든 블론드에 보석 같은 녹안을 가진 미남이 웃는 모습은 파괴력이 상당해서, 주변 소녀들이 모두 심장을 부여잡았다.

    아리엘은 다소곳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땅을 정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얼굴을 붉힌 디트리히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라카트옐의 영토지만 어쨌든 제국에 속한 땅. 제 의무인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레 미소가 나왔다.

    ‘뭔가 황태자 전하와 어울리는 능력인 것 같아.’

    마침내 사냥대회의 우승자를 가리는 시간이 왔다.


    * * *


    우승자를 가리는 과정은 길었다.

    사냥감이 얼마나 큰지, 잡기 까다로운지, 희귀한지가 모두 심사 대상이었다.

    그중 디트리히와 히스가 잡은 상등품의 사냥감은 꽤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큰 맹수를 잡았지만 흔한 동물인 헥터의 불곰과 랄프의 검독수리는 안타깝게도 후보에서 탈락됐다.

    그렇게 한참 이어진 논의 끝에, 결국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이번 제국 사냥대회의 우승은 디트리히 레온 드 슈테인 전하와, 마법사 히스클리프입니다!”

    히스와 디트리히가 공동으로 우승해 버린 것이다.

    아리엘은 상을 받는 두 남자를 보며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원하던 우승이었음에도 둘 다 전혀 기뻐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이상하게 둘이 붙여놓으면 유치해지는 느낌이야.’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던 둘은 딱딱하게 악수를 하고 단상 위를 내려갔다.

    다음 순서는 ‘올해의 레이디’ 선정이었다.

    사냥대회의 가장 큰 재미는 이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고 두근두근 결과를 기다렸다.

    “이번 사냥대회에서 가장 많은 사냥감을 받으신 레이디는……!”

    사회자가 발표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갑작스레 낮은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단 한 마디인데도 모인 사람들을 압도해버리는 아우라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서 위험할 정도로 우월한 외양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응? 루시안?

    “아직 내 거 안 셌잖아.”

    루시안이 느긋한 걸음으로 앞에 나섰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사회자를 맡은 쾰른 백작이 눈에 띄게 입술을 떨며 되물었다.

    “예?”

    그 물음을 깔끔히 무시한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사냥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들려있지 않았다.

    아리엘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사냥 못 한 거 아니었나?’

    그도 그럴 것이 어제 가장 숲 깊숙이 들어간 그가 사냥을 포기하고 돌아온 건 아리엘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루시안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가 여유롭게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자석에 끌린 듯 그의 턱짓을 따라갔다.

    “저건!”

    그곳에는 루시안이 죽인 거대한 가고일의 시체가 분홍색 리본을 묶고 누워있었다.

    아리엘은 머리를 짚었다.

    ‘대체 저기에 리본은 언제 두른 거야?!’

    루시안이 악마적인 마력이 풍기는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받아.”

    “네?”

    “네 거라고.”

    어…… 마수요?

    자기 멋대로 길이 30미터의 사냥감을 아리엘에게 넘긴 루시안이 사회자에게 오만하게 눈짓했다.

    “내 것까지 포함해서 발표해.”

    사회자는 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연신 바지에 문지르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하나를 더하든 아니든 어차피 결과는 같았다.

    “오, 올해의 레이디는…….”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리엘라 라카트옐 대공자비이십니다!”

    와-!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고막이 터질 듯 큰 소리였다.

    아리엘은 끔찍하게 안 어울리는 분홍색 리본을 달고 있는 거대한 마수와 루시안을 한참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카트옐 남자들이 특이한 건 알고 있었지만, 마수에 리본을 묶어서 주다니.

    언제 말릴 새도 없이 리본을 묶은 걸까?

    리본을 두르는 루시안의 모습을 상상한 아리엘은 살짝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서 있는 아리엘 옆으로 다이아나와 세실, 다른 영애들이 꺄꺄거리며 모여들었다.

    “대공자비님, 축하드려요!”

    “아마 사냥대회에서 마수가 사냥감으로 올라온 건 처음일걸요.”

    “멋져요!”

    영애들의 과도한 사랑을 받으며 아리엘은 단상 위로 밀려 올라갔다.

    사회자가 그녀에게 벨벳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올해의 레이디에게 황제 폐하께서 내리시는 선물입니다.”

    라카트옐 영지에서 열렸다지만 제국 사냥대회는 황실이 명령해서 여는 축제.

    상 또한 황제가 직접 내렸다.

    마수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황제 부부가 아리엘에게 직접 선물을 건넸다.

    몇천 년 만의 마수 출현에 황제 부부는 물론, 태후를 비롯한 황실 사람들 몇몇이 오늘 도착한 터였다.

    아리엘이 보석이 담긴 상자를 갖고 내려오자 다이아나와 세실이 꽃다발을 안겨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축하해. 다들 너한테 감동받았어.”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리엘.”

    아리엘은 친구들의 영문 모를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감동받았다니?”

    다이아나와 세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거봐, 세실. 아리엘은 모를 거랬지?”

    세실이 아리엘에게 설명했다.

    “아리엘. 어제 네가 가고일과 싸우는 걸 본 사람들은 다 네 얘기뿐이다.”

    “하지만…… 마수를 해치운 건 내가 아니라 루시안인걸.”

    “대공자님의 힘도 물론 대단했지. 하지만 원래 마수를 잡는 라카트옐과 넌 다르다.”

    다이아나가 아리엘의 뺨을 꾹 잡아 늘렸다.

    “맞아. 이길 수도 없을 게 뻔한데 맞섰잖아. 네 덕분에 목숨을 구한 사람이 한두 명인 줄 아니?”

    다이아나의 말에는 전혀 과장이 없었다.

    아리엘이 작고 여린 체구로 무시무시한 가고일에게 겁 없이 달려드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가 가고일의 손과 발을 묶어둔 덕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었다.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건 아리엘 덕이었다.

    “아이,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서 보관해놨어야 했는데!”

    “그리고 후대에 길이길이 남기는 거지.”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다이아나와 세실 뒤로 영애들 몇이 앞다투어 아리엘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어제 싸우시는 거 보고 반했어요.”

    “너무 멋지셨어요. 덕분에 살았어요.”

    어떤 영애들은 다이아나와 세실을 붙잡고 이야기했다.

    “모니카 공녀님, 저도 대공자비님 응원 모임을 함께 하면 안 될까요?”

    “감히 우정은 꿈도 못 꾸지만 먼 발치에서라도 흠모하고 싶어요.”

    어느새 생겨버린 팬클럽을 지켜보던 다이아나가 부채를 탁 소리나게 접었다.

    “다들 내 앞으로 줄을 서 봐요.”

    영애들이 와글와글 다이아나에게 몰려들었다.

    다이아나가 고고한 목소리로 팬클럽의 원칙을 읊었다.

    열댓 개의 머리통이 끄덕끄덕을 반복했다.

    “따라하세요. 첫째. 다른 사람 응원 모임엔 들지 않는다.”

    “들지 않는다.”

    “둘째. 대공자비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노력한다.”

    “셋째…….”

    ‘다이아나, 그거 뭔가 위험한 모임은 아니지?’

    그녀를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너무 낯선 나머지 아리엘은 다이아나와 세실이 시선을 끈 틈에 살짝 빠져나왔다.

    “휴…….”

    내가 마법으로 너무 시선을 끌었나.

    그때 나무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났다.

    “저기…… 대공자비님.”

    나무 뒤에서 나온 사람은 아리엘 또래의 소녀였다.

    귀족 영애 같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시선도 바닥을 보고 있어서 내성적으로 보였다.

    아리엘은 상냥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영애?”

    “이거…… 받아주세요.”

    소녀가 내민 것을 본 아리엘은 깜짝 놀랐다.

    갈색 털을 가진 작은 여우가 소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영애?”

    “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직접 잡은 거예요.”

    소녀는 여전히 아리엘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말했다.

    “사실 어제 몰래 사냥터에 들어갔었어요. 대공자비님께 사냥감을 바치고 싶었거든요.”

    “어째서…….”

    생각보다 심지 곧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세상에 내보내 주신 게 대공자비님이시니까요.”

    이어진 그녀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저는 필리아. 열여섯 살이랍니다. 하지만 올해가 되어서야 데뷔했죠. 그 이유는…….”

    소녀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제가 대공자비님처럼 마법사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가족들은 제가 마법사인 걸 어떻게든 숨기려고 했어요. 제가 마법을 억지로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 사교계 데뷔도 시켜주지 않겠다고 하셨죠.”

    그런데 올해 봄, 아리엘이 황궁 무도회에서 마법사임을 밝히자 귀족계의 인식이 달라졌다.

    마법을 쓸 줄 아는 여자아이들은 더 이상 천대받지 않았다.

    “그 후로 부모님은 전처럼 절 부끄러워하지 않으세요. 심지어 마법을 배우도록 마법책이나 도구도 사주시고요.”

    소녀가 부끄러운 듯 자신의 치맛자락을 세게 쥐었다.

    “또래들과 모이는 사교 모임이나 사냥대회에 올 수 있게 된 것도 다 대공자비님 덕분이에요.”

    아리엘에게 여우를 내민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제 보잘것없는 마법으로 잡을 수 있는 건 이게 최선이었어요. 부끄럽지만…… 받아주세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아리엘은 여우를 받았다.

    “고마워요, 필리아.”

    필리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언젠가 대공자비님처럼 강한 마법사가 되고 싶어요. 목표 없이 살았는데, 목표가 생겼어요.”

    그 말을 끝으로 필리아는 황급히 사라졌다.

    그녀가 오래 자리를 비우면 가족들이 걱정할 거라는 말과 함께.

    아리엘은 작은 여우를 보며 가슴으로 밀려드는 감동을 느꼈다.

    ‘기쁘다.’

    이상할 만큼 행복한 기분이었다.


    * * *


    사람들과 떨어진 구석진 풀숲.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손거울을 들고 속삭이고 있었다.

    유니스가 거울을 향해 말했다.

    “주인님,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리엘을 납치하려다가 실패했으니 후작가의 말로는 뻔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후작가의 수양딸로 들어온 유니스의 위치는 상당히 애매해져버렸다.

    음침하고 스산한 목소리가 거울을 통해 유니스에게 대답했다.

    “후작은 이미 내 손에 들어와 있다. 후작 영식은 버려. 후작만으로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을 거다.”

    유니스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후작가가 끝났으니, 제 임무는 어떡하지요?”

    “네겐 다음 임무를 주겠다.”

    끼긱거리는 목소리가 흡족한 듯 말을 이었다.

    “붉은 머리가 원래 가졌어야 할 모든 것을 빼앗아라. 가족의 사랑, 출생의 고결함까지 모두!”

    손거울을 통해, 금빛 열쇠가 달린 목걸이가 유니스에게 전해졌다.

    '그'가 명령했다.

    “황실 사람에게 접근해. 네 쓸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명령을 들은 유니스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 * *


    사냥대회가 끝난 후는 낮부터 밤까지 축제가 이어졌다.

    저택의 가장 큰 무도회 홀인 다이아몬드 홀이 열렸고, 춤곡이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음악과 불빛은 귀와 눈이 멀 정도로 화려했다.

    자신을 걱정했던 친구들을 만나 안심을 시켜준 아리엘은 라카트옐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사람들 틈을 도도도 지났다.

    그러다 그녀는 풍성한 하얀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노부인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실례했단 의미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지나치려는데,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잘린드?”

    ‘……?’

    아리엘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 눈앞의 노부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태후 마마.’

    태후는 거의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아서 정식으로 만난 적은 없지만, 황실 파티에 몇 번 참여하다 보니 얼굴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로잘린드라면, 그 잃어버린 공주님?’

    문득 든 생각을 뒤로 미루며 아리엘은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제국에 영광을. 안녕하셨어요, 태후 마마.”

    아리엘이 인사를 하자 태후가 정신을 차린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 내가 실례를 했구나, 대공자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태후의 주름진 얼굴이 뭉클한 표정을 담았다.

    “너를 보는데 왜 로잘린드가 떠올랐는지 모르겠구나.

    그 아이는 아기일 적에 잃어버렸는데.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인자한 태후의 얼굴이 쓸쓸해졌다.

    “그 애도 살아있다면…… 지금쯤 너만 한 딸이 있을 나이일 텐데.”

    아리엘은 마음이 아파 보이는 태후를 보며, 자신의 가슴 속도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태후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위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밖에는.

    애달픈 눈으로 아리엘을 잠시 응시하던 태후가 이내 감정을 추슬렀다.

    “고맙구나. 이제 가보렴. 저기, 라카트옐 대공이 너를 찾는구나.”

    아리엘이 인사하고 돌아간 뒤, 태후는 마티어스와 다정하게 춤추는 아리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태후를 불렀다.

    “태후 마마?”

    뒤를 돌아보자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가 서 있었다.

    못 보던 영애였다.

    태후가 꺼림칙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유니스가 빙긋 웃었다.

    “마마, 어떤가요. 제가 마마의 따님을 닮지 않았나요?”

    그 말을 들은 태후의 눈이 미혹된 듯 몽롱해졌다.


    * * *


    아리엘은 마티어스와 첫 춤을 춘 후에 곧이어 루시안에게 붙잡혔다.

    “나랑 춰. 이제.”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예의상 첫 춤은 췄으니까 디저트 먹으러 가고 싶은데.’

    하지만 루시안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겠지?

    하여간 질투가 심한 라카트옐 남자들 때문에 아리엘 발만 고생이었다.

    루시안과 춤을 추다가 아리엘은 살짝 눈을 찡그렸다.

    ‘구두가 아프네.’

    새로 신은 구두가 큰지 발이 아팠다.

    아리엘은 꼼지락거리다 발뒤꿈치를 조금 들었다.

    까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디뎌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화악.

    아리엘의 허리를 감싼 루시안이 그녀를 가뿐히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발등 위에 올려놓았다.

    “루시안?”

    “가만히 있어.”

    위협하는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아리엘을 발 위에 올려놓은 채 루시안은 그 전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발등에 솜털만 한 무게도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발 아파하는 걸 눈치챈 건가?’

    당연히 루시안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은근 신경이 쓰였다.

    그가 리드하는 대로 춤을 추다가 아리엘은 작게 물었다.

    “루시안. 루시안은 왜 이렇게 춤을 잘 춰요?”

    예전부터 느낀 건데 그는 춤에 능숙했다.

    ‘루시안 성격에 춤 선생 아래서 차근차근 배웠을 것 같진 않은데 말야…….’

    “루시안도 배우고 연습한 거예요?”

    아리엘의 질문이 아주 엉뚱하다는 듯 그가 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연습? 그런 거 안 해.”

    “그럼 그냥 되는 거예요?”

    “그래.”

    그녀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딨어요.”

    루시안이 아리엘의 등을 받쳐 넘겨준 뒤에 오만하게 말했다.

    “라카트옐이 뭔가를 배우는 건 보통 인간과 달라.”

    “달라요?”

    “눈으로 보면 익혀지거든.”

    에엑?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죠?

    “원래 그래. 그리고 필요한 지식은 에고에서 꺼내올 수도 있지.”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에고에서 꺼내 온다고?

    “라카트옐의 에고(ego) 속에는 선대들의 모든 지식과 경험이 담겨있어. 예를 들어 100년 전의 사교 댄스를 춰야 한다면 그 경험을 불러와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지.”

    “와, 신기해요.”

    아리엘은 눈을 반짝였다.

    “그럼 남이 하는 걸 보기만 해도 능력이 딱딱 생기고, 이미 선대 라카트옐이 배워놓은 건 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이쯤 되면 루시안이 할 수 있는 일이 몇천 가지일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아니, 몇만 가지라고 해야 하나?

    잔뜩 신이 나서 초롱초롱 그를 보던 아리엘은 문득 마티어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버렸다.

    ‘드래곤은 에고가 없으면 살아남지 못해.’

    ‘아…….’

    어쩌면 에고 안에는 드래곤이 인간으로서 숨쉬기, 심장 뛰기 같은 것마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숨도 잘 쉬지 못하고 죽어가던 어린 루시안을 상상하자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허리를 안았다.

    곧장 루시안에게서 의아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야, 너.”

    아리엘은 속으로만 대답했다.

    ‘그냥요. 안아주고 싶어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던 나에게 손 내밀어줬던 건 당신이니까.

    나도 당신의 그 시절에 안아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천천히 춤의 템포를 바꾸면서 가만히 있던 루시안이 불쑥 말했다.

    “좋은데.”

    “네?”

    “네가 날 불쌍하게 여기는 거.”

    아리엘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도 읽을 줄 알아요?”

    루시안이 쿡 웃었다.

    “네가 그런 눈으로 봤잖아.”

    “미, 미안해요. 티 안 내려고 했는데.”

    그가 당황한 아리엘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심연 같은 푸른 눈과 아찔하게 아름다운 얼굴이 가까워졌다.

    “난 좋다고 했어. 네 동정을 얻는 거.”

    그 말을 그렇게 유혹적이게 할 일인가?

    그녀는 새빨개진 채 꼼짝도 못하고 숨을 죽였다.

    그가 낮게 입속말을 했다.

    “아…… 이런 거 정말 이상한데.”

    루시안이 아리엘의 턱을 놓고 그 손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나가자.”

    아리엘은 그의 손에 이끌려서 총총 다이아몬드 홀을 벗어났다.

    홀을 나오자 루시안이 그녀의 발에서 구두를 빼앗고 훌쩍 안아 들었다.

    “앗? 루시안.”

    그는 대답하지 않고 순식간에 어딘가로 향했다.

    뭐야, 나 납치당하는 거예요?

    품에 안긴 채 어버버하고 있으니까 어느새 저택 탑의 꼭대기에 와 있었다.

    루시안이 나직이 말했다.

    “눈 감아.”

    “왜요?”

    “난 괜찮지만 넌 아닐 테니까.”

    비딱하게 웃으며 대답한 그가 그녀의 눈 위를 덮어 눈을 감게 만들었다.

    눈앞이 어두워진 순간 확 도약하는 느낌이 났다.

    “꺅!”

    사뿐.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아리엘은 탑의 지붕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도로 눈을 감았다.

    아찔한 높이였다. 땅보다는 하늘에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어둠에 묻힌 주위는 실제보다 더 공포심을 주었다.

    그때 루시안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리엘.”

    아리엘은 그 손에 꽉 매달리며 대답했다.

    “네, 네?”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떨어지게 안 하니까 눈 떠.”

    루시안은 지붕의 경사면에 기대어 누우며 아리엘을 끌어당겼다.

    덩달아 눕게 된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떠 보았다.

    “와……!”

    푸르스름한 여름 밤하늘에 쏟아질 듯한 별들이 가득 수놓아져 있었다.

    “별 예쁘다…….”

    방금까지는 높은 게 무서웠던 것도 잊고 아리엘은 별 구경에 넋을 잃었다.

    ‘이렇게 높은 데 올라오니까 하늘하고 나뿐인 것 같아.’

    물론 루시안이 함께 있다는 사실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잡힌 손목에서 열기가 전해오고 있으니.

    아득한 높이의 탑 지붕에 누워서 무섭지 않은 건 어쩌면 그것 때문일까?

    한참 별을 구경하던 아리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루시안.”

    그녀는 조그만 입을 열었다가 다시 꾹 다물었다가, 결국 머뭇머뭇 물었다.

    “혹시…… 루실리온 가 사람들이 어딨는지 알아요? 오늘 안 보이던데.”

    루시안에게만은 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물어본 사람마다 다 모른다고 했으니.

    본가의 하녀장도, 푸른 사자 기사단도, 심지어 집사들도 고개를 저었다.

    ‘제롬이 나를 공격하다가 기절한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녀가 살그머니 루시안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느긋하게 음절을 끌며 대답했다.

    “후작과 후작 영식은 황실에 죄를 저질러서 끌려갔어.”

    “죄요?”

    “그래. 후작가가 영지에서 나오는 돈을 착복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네에?”

    아리엘은 몸을 일으켰다.

    루시안의 시선이 나른하게 그녀를 따라왔다.

    “다행인 건 이제라도 잡았다는 거지.”

    “…….”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리엘이 아는 후작과 제롬은 돈에 욕심이 많고 탐욕스러웠다.

    황실에 바쳐야 할 돈을 빼돌리고 있었다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애초에 도박 빚에 쫓기고 있었다고 했으니…….

    ‘하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그런 죄가 밝혀졌다고 해도, 수도로 돌아간 뒤가 아니라 여기서 끌려갔단 말이야?

    그녀는 의아한 기분으로 물었다.

    “그럼 후작가는요?”

    “후작과 후작 영식이 없으니 네 것이지.”

    오만하게 선고한 루시안이 나직이 덧붙였다.

    “둘을 조용히 추방하고, 가문은 유지할 수 있게 됐거든. 네 위신이 있으니.”

    그의 음성에서 쎄한 느낌이 가득 풍겼다.

    몸을 일으킨 루시안이 아리엘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온 그가 말했다.

    “기억하지? 부숴서 주겠다고 했잖아. 약속을 지킬 때야.”

    아리엘의 머릿속엔 4년 전 루시안이 했던 말이 또렷이 울려 퍼졌다.

    후작가 가보 목걸이를 빼앗아주며.

    ‘나중에 루실리온 후작가를 통째로 부숴 줄 테니 잘 가지고 있어.’

    그녀의 팔에 소름이 올라왔다.

    확실한 거 하나는 알겠다. 이 일에 루시안이 개입되어 있다는 거.

    제국 법상 딸이 가문을 계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집안 남자들이 모두 죽거나 없어지면 딸이라도 임시로 가주가 될 수 있다.

    지금 아리엘의 상황은 완벽했다.

    후작가에 남은 직계 자손은 아리엘뿐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상황을 만든 것이 분명한 남자가 매혹적으로 말했다.

    “그거 가지고 하고 싶은 대로 갖고 놀아.”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아리엘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아버지와 제롬은 정확히 어떻게 되나요?”

    “타국의 노역장으로 보내질 예정이라고 하더군. 왜. 싫은가?”

    아리엘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후작과 제롬이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게 싫을 리가 없었다.

    그 사실에 아리엘이 느낄 수 있는 건 안도감뿐이었다.

    “아니요. 좋아요. 다시는 안 볼 수 있겠다 싶어서.”

    “그래.”

    루시안이 만족스럽게 입매를 비틀었다.

    그와 마티어스가 오랜 시간에 걸쳐 후작가 두 놈과 아리엘을 학대했던 사용인들을 서서히 망가뜨려 왔다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사라진 후작을 끝까지 추적해 처리할 예정이라는 것도.

    그렇게 빤히 아리엘을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그런데 후작가 작은 쓰레기가 어제 이상한 말을 하더군.”

    “작은 쓰레기라면…… 제롬 말인가요?”

    “그것들이 사냥대회 도중에 네게 찾아왔었다면서. 편지로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아리엘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제롬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그가 당장 루시안 손에 죽지 않은게 행운이었다.

    “그런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

    아리엘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으므로.

    이건 자신의 일이었다. 자신의 문제고. 루시안이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정말 사실은…….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아리엘은 기어드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고백했다.

    더 이상 뭐라 다르게 설명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루시안이 몰랐으면 했어요.”

    “…….”

    루시안이 강렬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받는 뺨이 뚫어질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의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 그가 낮고 위압적이게 입을 열었다.

    “잘 들어, 아리엘라. 네 수치는 내 거야. 그것까지도, 내 거라고.”

    아리엘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약함, 수치, 치부까지 모두 내 소유인데 내가 몰랐으면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분명 혼나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강한 부분, 돈이 될만한 부분만 골라서 가지려고 했던 가족들이나 악당 무리와 전혀 달라서일까.

    집착이 가득한 말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이 신경 쓰이는 듯, 루시안의 손이 아리엘의 작은 어깨를 감쌌다.

    “내 옆에만 있어. 라카트옐이 네 수치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한참만에 아리엘이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안의 입술이 뇌리에 새겨지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비딱하게 머금었다.

    그 미소를 본 아리엘의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장난치듯 매만진 루시안이 아리엘을 끌어안은 채 지붕에 다시 누웠다.

    한참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별똥별만 무수히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 * *


    내려오는 길은 올라올 때만큼 무섭지 않았다.

    루시안이 그냥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려는 걸 아리엘이 극구 반대해서 계단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갖고 있는 마법 클러치에 발 아픈 구두를 넣고, 그 안에 넣어뒀던 편한 구두를 꺼내 신었다.

    ‘이게 이제야 생각날 게 뭐람.’

    두 사람의 고요한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탑 안.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타박타박 계단을 내려가던 아리엘은 줄곧 망설이다 꺼내지 못한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저, 루시안. 라카트옐에게도 적이 있나요?”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의 얼굴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는 아리엘의 손목을 잡아끌고 탑 계단 옆에 있는 성벽 테라스로 나갔다.

    아리엘의 어깨를 붙잡은 그가 다소 성마르게 물었다.

    “그런 얘기는 어디에서 들었지?”

    아리엘은 갈등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마수가 습격하기 전에 누군가가 찾아왔었어요. 그리고…… 자신이 라카트옐의 숙적이라고 말했어요.”

    그녀는 루시안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게 누구인지 알아요?”

    그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되뇌었다.

    “……널 찾아왔었다고.”

    아리엘은 그에게 앞뒤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마수가 습격해서 마티어스가 상대하러 나간 사이 혼자 남았던 것.

    그때 '그'가 천막 앞을 지키던 기사들을 쓰러뜨리고 침입했던 것.

    그녀에게 늘어놓았던 말들까지.

    아리엘이 이야기를 마치자,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시안이 숨을 내쉬었다.

    마치 더 나쁜 상상이라도 했었다는 듯이.

    마침내 아리엘의 어깨에서 손을 거둔 그가 한참만에 대답했다.

    “……그래, 라카트옐에게도 숙적이 있어.”

    아리엘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드래곤에게도 숙적이 있다니.

    “그 자의 정체가, 뭐길래요?”

    어둠 속에서 루시안의 퇴폐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너는 이미 답을 아는 거나 마찬가지야. 신화를 들어봤을 테니.”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신화를 안다면 '그'의 정체를 알 수 있다고요?

    “암흑 드래곤 라키엘이 왜 이 땅에 내려왔었는지 알고 있지.”

    아리엘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되짚었다.

    “네. 타락에 물든 마수를 베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그녀는 순간 동작을 멈췄다.

    그럼, 혹시……?

    아리엘의 눈빛을 본 루시안이 제 머리를 짧게 헝클었다.

    뇌쇄적으로 제 속눈썹을 밀어올린 그가 푸른 안광을 내는 눈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것은 '타락'이야.”

    땅을 더러운 것으로 물들이는 근원.

    “…….”

    아리엘은 숨을 멈춘 채 서 있었다.

    드디어 이해가 갔다.

    어째서 '그'가 추종하는 무리를 제 뜻으로 쉽게 물들일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마수에게 명령을 할 수 있었는지도.

    “이리 와, 아리엘라.”

    루시안이 천천히 그녀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자신보다 한참 낮은 아리엘과 시선을 맞춘 그가 설명했다.

    “땅에 내려오기 전 라키엘은 어둠 그 자체로서만 존재했지. 그러나 땅에 사는 것들이 타락에 물들어 마수가 되자, 직접 내려와 정리를 해야 할 필요가 생겼어.”

    여기까지는 아리엘도 아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의 이야기는 더욱 깊고 어두운 곳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드래곤의 형상을 입고 내려왔지. 그리고 타락을 없애려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실패했어.

    타락은 그렇게 한 번 몸을 피했지. 크게 힘을 잃었던 듯하지만.”

    없애는데… 실패했다고?

    아리엘의 조그만 얼굴이 굳어졌다.

    “그 후 라키엘은 제국의 건국을 돕고, 빌어먹게도…… 제 몸의 일부를 뽑아내 시간과 공간 속에 흩어놓고 인간이 되었어. 그의 후손이 라카트옐인 거고.”

    루시안의 입술 끝이 서늘하게 비틀렸다.

    “그렇게…… 지금까지도 타락의 숙적은 라카트옐이 된 거지.”

    아리엘은 이야기를 풀어내 놓고 가라앉은 눈으로 서 있는 루시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나간 역사 같은 건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다른 것이었다.

    “나는, 루시안이 다치는 건 싫어요.”

    그녀는 자꾸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애써 끄집어내기 위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루시안이 강한 건 알지만, 정말로 세다는 것도 알지만, 위험한 건 싫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루시안이 침묵하며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곤 갑작스레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놀란 아리엘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가 뇌쇄적인 어조로 물었다.

    “지금 내 걱정하는 건가?”

    윽,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에요?

    아리엘의 얼굴이 완전히 붉어졌다.

    “……당연하죠.”

    그러자, 신화를 그려놓은 벽화에나 볼 법한 얼굴로 루시안이 느리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한 줌 모아쥐고 입을 맞추었다.

    “걱정 마. 내가 다칠 일 따윈 절대 없으니.”

    아리엘은 빨라지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생각이 서서히 정리되었다.

    ‘이제부터 내가 아는 미래는 없어.’

    마수 이후로 모든 게 바뀌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정보였던 녹스 남작과 나잇 워커는 이미 해결됐다.

    아리엘이 기억하는 마지막은 라카트옐이 공격받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숙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의 공격이 이해 가.’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자신이 루시안 옆에 있으니까.

    나도 내 가족을 지킬 거야.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을 지켜줄 거야.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펑! 펑펑펑!

    야외 만찬장이 있는 호수 쪽에서 불꽃놀이가 크게 터졌다.

    황실에서 특별히 준비한 불꽃놀이였다.

    아름다운 빛의 가루가 동심원 모양으로 하늘을 수놓았다.

    “와……!”

    아리엘은 폭죽의 향연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름다운 불꽃에 매혹된 그녀는 테라스 난간에 몸을 걸쳤다.

    “루시안, 저거 봐요.”

    상기된 얼굴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그녀의 옆에서, 루시안은 아리엘의 조그만 몸을 가두듯 한 팔로 감싸고 난간을 짚었다.

    “예뻐요.”

    불꽃의 아름다움 같은 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 풍경을 담고 초롱초롱 빛나는 아리엘의 눈은 사랑스러웠다.

    “…….”

    루시안은 품 안에 들어가고도 한참 남는 그의 어린 아내를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리엘이 위험할 일은 없어야겠지.’

    이 소녀보다 소중한 존재는 그에게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루시안은 손을 뻗어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너 이제 큰일 났어.”

    불꽃놀이에 넋을 놓고 있던 그녀가 옆을 돌아보았다.

    “네? 왜요?”

    무심코 묻고는 그와 지나치게 가깝다는 걸 알아챈 아리엘은 움찔하며 물러났다.

    루시안의 손이 서늘하게 그녀의 뺨 윤곽을 훑었다.

    내가 깨달아버렸거든. 너 없인 살 수 없다는걸.

    아리엘의 뺨을 꾹 잡아 늘린 그가 삐딱하게 말했다.

    “너 너무 작은데. 빨리 커, 꼬맹이.”

    영문 모를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던 아리엘은 꼬맹이란 말에 발끈했다.

    ‘또 꼬맹이라고 했어!’

    그녀가 심통 난 표정을 짓자 루시안이 쿡쿡 웃으며 자기 머리를 흩뜨렸다.

    “나중엔 이렇게 안 부르면 무서울걸.”

    아니. 절대 그럴 일 없거든요.

    “그거 내 나름대로의 제동 장치라서.”

    “……?”

    무슨 소리지?

    루시안이 악랄하게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면 달아나고 싶어질 거야.”

    그의 말 절반쯤은 펑펑 터지는 폭죽 소리에 묻혔다.

    불꽃놀이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아리엘과 루시안은 함께 하늘 가득 퍼지는 폭죽을 구경했다.

    꿈속에 있는 듯 아름다웠다.

    ‘좋다…….’

    불꽃놀이의 아름다움을 빌려 그녀는 살짝 루시안의 어깨에 기대었다.

    두근, 두근, 두근.

    빠른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기댄 루시안의 몸에서 들리는 것일 리가 없으니, 자신에게서 들리는 것이었을 것이다.


    * * *


    사냥대회와 여름 축제가 끝난 뒤에 손님들은 각자 수도나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리엘이 손을 흔들자, 다이아나와 새로 결성한 팬클럽이 난리를 치며 함께 손을 흔들었다.

    “꺄! 아리엘님이 날 보셨어!”

    “날 보신 거거든!”

    “비켜 봐. 내 얼굴 보여드리게!”

    다이아나는 엄격한 시험을 통해 팬클럽 회원을 선발했다.

    이미 그들은 정기 모임 날짜도 정한 듯했다.

    한편, 라카트옐 가족은 며칠 더 영지에 머무르면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드넓은 본가에는 놀 것이 참 많았다.

    반카를 타고 얕은 호숫가를 빙 돌며 달리고 나면 말발굽에 튀어오른 물 때문에 옷이 흠뻑 젖으며 시원해졌다.

    실컷 놀고 실내로 들어와서 먹는 애플 망고 스무디는 피로를 몽땅 가져갔다.

    뒤뜰의 미로 정원에서 숨바꼭질을 할 때면 하루 반나절이 후딱 가버렸다.

    하지만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건 역시 브루노어의 '가고일 해체 쇼'였다.

    “뭐! 마수 가고일의 시체가 일곱 구?”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해치운 가고일 떼의 소식을 들은 브루노어는 누구보다 빠르게 영지로 날아왔다.

    “뭐예요, 할아버지! 언젠 관절염 때문에 게이트 못 타겠다더니!”

    그 대신으로 영지에 와 있던 히스는 잔뜩 불평하다가 브루노어의 지팡이에게 딱밤을 얻어맞았다.

    도착한 브루노어는 마법의 저울과 손질칼을 꺼내 가고일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용 마수는 살아있을 땐 칼이 들지 않지만 죽고 나면 해체할 수 있었다.

    와이번의 발톱과 송곳니를 잘라 독을 뽑아낼 수 있는 것도 그런 원리였다.

    가죽을 싹 벗긴 후에는 더 쉬웠다.

    “가고일 꼬리는 전설의 보양식이지요.”

    일곱 개의 꼬리를 자른 그가 한 번 먹을 양만큼을 나누어서 토막 낸 뒤에 마법으로 차차착 냉각 보관을 했다.

    ‘살림꾼!’

    구경하던 본가의 살림 하녀들이 모두 기립 박수를 쳤다.

    아리엘은 그제야 4년 전 자신이 처음 쓰러졌을 때 먹었던 드레이크를 닮은 보양식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브루노어는 가고일의 눈동자, 척추비늘, 발톱상아 같은 레전드급 마법 재료를 분리해냈다.

    전설의 보검이나 마도구를 만들 때 미량으로 사용되는 재료들이었다.

    재료를 마법 저울에 달자 천문학적인 가치가 나왔다.

    브루노어는 재료를 싹 가루화 시킨 후에 아리엘과 히스에게 나누어 주었다.

    ‘스승님!’

    이번에는 아리엘과 히스가 기립 박수를 칠 차례였다.

    두 사람은 손을 모아잡고 감동을 나누었다.

    마법 재료를 가지고 신나 하는 아리엘을 본 루시안은 의아해하며 말했다.

    “필요하면 나한테 가져다 달라고 하면 됐잖아? 얼마든지 갖다줬을 텐데.”

    아리엘은 세 마리 째에서 탈진해 쉬고 있는 브루노어를 바라보며 소곤댔다.

    “해체하는 게 힘드니까 괜찮아요.”

    어쩐지 루시안에게 부탁하면 엄청난 양을 잡아 와서 해체해 내라고 브루노어를 쥐어짤 것 같으니까.

    “해체는 나도 할 수 있어.”

    “정말요?”

    “썰면 되는 거잖아.”

    간단하지.

    오만하게 말한 루시안이 가고일 하나를 들어다가 소드 마나를 흩뿌렸다.

    뼈와 살을 손상없이 깔끔하게 분리해내는 과정이었다.

    아리엘은 기대하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

    허공에서 소드 마나에 의해 춤추던 가고일 덩어리는 땅에 떨어졌을 때쯤엔 완전히 소멸해 재가 되어 있었다.

    응? 그건 무조건 다 파괴하는 거잖아요?

    방금 그 거대한 가고일을 싹 태워버린 무시무시한 루시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생각보다 쉽지 않군.”

    뭘 해주는 것도.

    아리엘은 포기하고 서글프게 입을 다물었다.

    귀한 마법 재료가 사라졌어, 흑흑.

    그렇게 며칠 신나게 논 아리엘은 다음 마도구 사업 아이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호신 마도구'와 '화장을 지워주는 마법 스크롤북'은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으니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할 때였다.

    “이 다음은 뭘 만들지?”

    아리엘은 한 손으로 조그만 턱을 괴었다.

    고민하느라 머리를 감싼 그녀를 지켜보던 히스가 불쑥 말했다.

    “이동 마법진 어때?”

    아리엘은 고개를 들었다.

    “이동 마법?”

    “그래. 보통 사람들은 텔레포트를 할 수 없잖아.”

    잠자코 듣던 아리엘이 박수를 짝 쳤다.

    “아,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게끔 이동 마법진을 상품화 하자는 거지?”

    “맞아.”

    아리엘은 곧장 계획을 세웠다.

    “그럼 마법진을 어떻게 사용하게 만드느냐가 문제겠네.”

    그녀는 즉석에서 아이디어를 냈다.

    “마법진을 펜던트에 필요한 만큼 충전할 수 있도록 하면 어때?”

    “그거 좋다.”

    그렇게 개발된 마도구가 바로 '이동 펜던트'였다.

    이 펜던트는 평범해 보이지만, 마도구 상점에서 마법진을 충전하면 평범한 사람도 이동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마법 게이트처럼 거대한 거리는 불가능하지만, 수도 내의 짧은 거리 정도는 급할 때 언제든 사용할 수 있어.”

    “물론 비용은 비싸지만.”

    아리엘과 히스의 설명을 들은 다이아나는 무척 기뻐하며 찬성했다.

    “딱 내가 원하던 거야!”

    그리고 시범 제품 하나를 써보더니 마음을 홀딱 빼앗겨 선주문을 가득 넣었다.

    “새로 생긴 대공자비 응원 모임 멤버들하고 함께 쓰려고.”

    덕질엔 기동력이 생명이거든.

    무슨 말인지 아리엘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무튼 히스와 아리엘은 이동 펜던트를 수량만큼 제작했다.

    이제 만든 제품을 수도로 올려보내는 일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마도구 세 번째 제품이 출시됐다는 소문에 마담 헬렌의 의상실은 아예 마비가 되어버렸다.

    새벽부터 줄을 선 귀족들과 가문의 집사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리고 이동 펜던트가 출시된 직후부터, 사교계에서는 물론 제국 전체가 이 놀라운 이동 마법에 홀딱 빠져버렸다.

    바야흐로 그 해 제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엄청난 혁명이었다.


    * * *


    여름 휴가가 끝나고 아리엘도 수도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마차 가득 짐을 싣고 사용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등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한 가지만 빼고.

    “돌아갈 땐 마티어스님하고 마차를 타기로 했잖아요.”

    “알 게 뭐야. 당장 타.”

    “안 돼요.”

    “여태 펜던트인지를 만든다고 내 옆을 계속 떠나있었으면서, 내 마차에도 안 타겠다고?”

    루시안이 아리엘을 놔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루시안에게 달랑 들려서 마차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대공자비란 언제나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됐다.

    그런 아리엘을 삐약거리는 병아리가 날개를 바동거리는 것마냥 바라보던 루시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티어스 마차에는 달튼 놈도 타고 있어. 너까지 탈 셈이야?”

    “상관없어요. ……앗!”

    최대한 우아하게 도망을 치려던 아리엘은 루시안이 뒤에서 한 팔로 허리를 감아 낚아채는 바람에 실패했다.

    루시안이 그대로 그녀를 자신의 마차에 태워버렸다.

    아리엘은 울상을 지었다.

    마티어스님, 제가 약속을 못 지킨 건 제 의도가 아니에요!

    아리엘은 소심한 불만의 표시로 마차 좌석에서 루시안과 가장 멀리 떨어진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뭐야. 왜 거기 앉아?”

    “……그냥요.”

    아리엘은 천장에 시선을 두면서 대답했다.

    루시안은 너무 예뻐서 얼굴을 보면 화난 것도 사라져버릴 테니까.

    루시안에게서 흐음,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말했다.

    “거기 안 앉는 게 좋을 텐데.”

    낮게 중얼거린 그가 긴 다리를 꼬고 마차 좌석에 기대앉았다.

    당장 잡아다 옆에 앉힐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그녀는 조금 안심했다.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는 규칙적인 소음만 계속 이어졌다.

    덜컹, 덜컹, 덜컹.

    라카트옐 영지가 워낙 커서 마법 게이트까지 가는 길은 제법 길었다.

    줄곧 창밖만 보던 아리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은 왠지 루시안하고 둘만 있는 게 힘들어.’

    같이 있으면 가슴 속에 보글보글한 거품이 차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숨이 가쁜 것 같기도 했다.

    오늘 기를 쓰고 마티어스의 마차에 타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밀폐된 공간에서 둘만 있는걸 견디기 어려웠다.

    ‘근데 루시안 쪽이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이럴 리가 없는데…….

    그녀는 힐끔 루시안이 앉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달콤한 스트로베리 색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아.”

    마차 창가에 앉은 그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그의 머리가 조금씩 흔들렸다.

    “잠들었네.”

    출발한 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되었으니 잠들 만도 했다.

    “…….”

    아리엘은 긴장을 풀고 루시안이 잠든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밤의 달빛 아래서 뿐 아니라 낮의 태양 아래에서도 참 지독하게 예쁜 얼굴이었다.

    머리카락 색과 같은 짙은 눈썹과 빼곡하고 긴 속눈썹, 흰 피부와 그에 대조되는 붉은 입술.

    베일 듯한 콧날과 관능적인 턱선.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몸에 어떤 피가 흐르면 저렇게 생길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살그머니 일어나서 루시안에게 다가갔다. 그가 깨어있을 땐 안 나던 용기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자 심장이 더욱 콩닥거렸다.

    악마에게 홀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져봐도 되나……?”

    깨지 않을 정도만 살짝 만지면 되겠지?

    아리엘은 새까만 그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살 넘겨서 이마가 드러나게 만들었다.

    ‘뭐야. 이마도 예쁘게 생겼어.’

    이 정도면 부럽고 치사하다고 말하기도 입 아프다.

    그녀는 손을 대지 않고 그의 얼굴 윤곽을 조심스럽게 덧그렸다.

    눈썹 뼈, 눈두덩, 턱까지 내려오는 얼굴선, 콧대, 그리고…….

    얕은 숨결이 느껴지는 입술에까지 손이 다다르자 강렬한 유혹이 찾아왔다.

    ‘눌러보고 싶다.’

    꼬꼬마 시절 결혼 첫날 밤에 만져보았던, 그때와 똑같은 느낌일까? 말랑하고 뜨거운 감촉.

    루시안의 붉은 입술의 감촉이 떠오르자 아리엘을 자신도 모르게 뺨을 발그레 붉혔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지금 루시안에게 엄청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몰래 지켜보다 들키면 또 놀리겠지?

    그녀는 얼른 몸을 뒤로 빼고 도망을 쳤다. 아니, 치려고 했다.

    덥석.

    몸을 뒤로 물리자마자 곧장 손목이 잡혔다.

    언제 뜬 건지 모를 짙은 청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컹했다.

    지금 루시안의 눈동자는 아주 어두워 보였다.


    * * *


    ‘무슨 생각인 거냐.’

    얼마 전 마티어스가 했던 질문이 루시안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는 가볍게 힘을 줘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리엘이 휙 딸려 들어와 그의 무릎 위에 앉혀졌다.

    공기 같은 걸로 만들어졌는지 의심될 정도로 황당한 무게였다.

    가까이에서 말간 얼굴을 보니 생각이 더욱 확실해졌다.

    ‘이 앨 어떻게 하고 싶냐고?’

    이렇게 계속 옆에 두고 싶다.

    누구도 못 보게 가둬서 혼자만 보고 싶다.

    독점욕 가득한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얘는 날 어떻게 느끼지?

    난 여태 얘가 날 좋아하게 만들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는 탁해진 목소리를 누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내 감촉이 별로 좋지 않아?”

    아리엘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다가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니요. 놔줘요, 루시안.”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쥐고 있는 힘은 늦춰지지 않았다.

    나른한 목소리만 뇌쇄적으로 감돌았다.

    “곤란하네. 멋대로 와서 만지더니 이젠 놔달라?”

    쉽게 그녀를 붙잡아둔 루시안이 다른 쪽 손을 아리엘의 얼굴에 가져갔다.

    그녀가 했던 것처럼 천천히 윤곽만 훑으며 내려간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아리엘의 솜털이 일어나는 게 흡족했다.

    어차피 그녀에겐 포식자에게 보이는 반응에 불과하겠지만.

    지금 아리엘은 딱 그 모습이었다.

    불꽃이 아름다워 보여서 뜨거운 줄도 모르고 손을 대 보려는 어린아이.

    ‘정작 불꽃이 가까이 오면 두려워할 거면서.’

    얄궂지 않은가.

    차오르는 호흡, 빠르게 뛰는 심장, 긴장으로 수축된 몸, 붉어지는 얼굴.

    이 모든 게 이성에게 긴장하는 게 아닌, 소녀의 몸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공포 반응일 거라는 게.

    그는 그녀의 분홍빛의 작은 입술을 엄지로 쓸어보았다.

    아리엘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하게 달콤했다.

    “마티어스 놈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군.”

    어쨌거나 이 마음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었으니.

    한편 아리엘은 루시안이 한 말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정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나 루시안이 이런 말 하는 거 처음 봐!

    항상 마티어스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나쁜 말만 했었는데.

    이러다 화해하는 날이 오는 건…….

    그러다 그녀는 조그만 미간을 찌푸렸다.

    “참, 놈이 뭐예요. 아빠한테!”

    루시안이 픽 웃고는 오만하게 되물었다.

    “감히 날 혼내는 건가, 지금?”

    “그건 아니지만…….”

    그가 슬쩍 무릎을 흔들었다.

    무릎 위에 앉아있던 아리엘의 몸도 휘청 흔들렸다.

    “꺅.”

    아리엘은 루시안의 팔을 잡으며 매달렸다.

    루시안이 유혹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금 내 무릎 위에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는 거야?”

    “어?”

    방금 깨달은 것처럼 그녀가 놀라며 뺨을 붉혔다.

    “넌 사자 아가리에 들어가도 다른 얘기로 정신을 빼놓으면 먹히는 줄도 모르겠어.”

    “안 그래요.”

    아리엘은 곧장 반박했다.

    “근데 그 무시무시한 비유는 뭐예요…….”

    루시안이 쿡쿡 웃으며 그녀의 머리통에 턱을 올려놓았다.

    아리엘의 심장이 반응하듯 콩닥거렸다.

    잠시 뒤, 머리 위로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언제요?”

    “마수가 죽은 다음에. 네가, 내 얼굴을 만졌을 때.”

    왜 갑자기 그런 걸 묻지?

    고개를 들어 루시안의 눈을 보자 그가 아리엘의 눈가를 손가락 등으로 슬쩍 쓸었다.

    “울고 있었잖아.”

    “봐, 봤어요?”

    너무 놀라서 말이 더듬거리며 나왔다.

    ‘어떡해, 창피해.’

    그녀는 뺨을 붉힌 채 입만 뻐끔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꿈인 줄 알고…….”

    지난번 삶처럼 마지막 순간에 보는 것이 루시안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슬프면서도 기뻤던 것 같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루시안이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벌레들이 네게 사냥감을 잔뜩 물어왔더군.”

    아리엘을 빤히 보던 그가 한참 만에 툭 던지듯 말했다.

    “다른 놈들이랑 얘기하지 마.”

    “네?”

    “아는 척도 하지 마.”

    “하지만…….”

    그가 경고하듯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매혹적인 기운을 의도적으로 내뿜으며 말했다.

    “내 말 들어.”

    ……뭐야. 꼭 질투하는 남자처럼.

    괜히 하얀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루시안이 애틋한 느낌이 날 정도로 살짝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난 성력도, 치유력도 없지. 오직 파괴하는 힘뿐이야.”

    그가 보기 드물게 날 서고 위태로운 표정을 지었다.

    애타 하는 것도 같고, 불안해하는 것도 같은.

    “그래도 복수하거나 죽이는 건 자신 있어. 금은보화도 나보다 많은 인간은 없지. 잘만 쓰면 난 괜찮은 무기가 되어줄 수 있어. 어때?”

    아리엘은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욱신거렸다.

    “……왜 그런 말을 해요?”

    꼭 자기를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난 루시안한테 성력이나 치유력 없다고 뭐라고 한 적 없는데. 루시안 돈도 안 필요하고요. 그래서 옆에 있는 거 아니에요.”

    그에게서 부족함을 느낀 적 없었다.

    그가 없었다면 그녀의 두 번째 인생도 없었을 테니.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들은 루시안이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아.”

    루시안은 숨이 목에서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나한테서 바라는 게 없어?

    힘도, 권력도, 돈도, 하물며 복수도 바라지 않는다고?

    아리엘이 그에게서 뭔가를 원해서 옆에 있는 거라면, 그게 사라질 때까지는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옆에 있는 거면?

    결국 마음대로 떠날 수 있다는 거잖아.

    얼마든지 힘으로 붙잡아 둘 수 있지만 그러면 지금처럼 웃어주지 않겠지.

    망가져 버린 채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겠지.

    안 그래, 아리엘라?

    그는 눈을 감고 아리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 네가 나에게서 원하는 게 없다면.

    루시안이 조용히 긴 속눈썹을 밀어 올리며 눈을 떴다.

    나를 원하게 만드는 수밖에.

    덜커덩. 끼익-

    마차 밖에서 게이트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다 왔나 봐요.”

    아리엘은 이때다 싶어 재빨리 루시안의 무릎 위를 벗어났다.

    그리고 얼굴을 식히기 위해 얼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시안이 진득한 집착이 담긴 눈으로 반대편에 앉은 아리엘을 응시했다.

    쨍한 벌레 우는 소리와 함께, 무더운 여름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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