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장 (12/23)
  • 12장




    매년 여름에 열리는 제국 사냥대회.

    이 사냥대회는 제국의 부국강병을 기원하기 위해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여름 별자리 에오스프로스가 뜰 때쯤 열린다.

    수도와 멀리 떨어진 지방 영지를 돌아가면서 열리는데, 황제뿐 아니라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과 이름난 기사들이 참가하기 때문에 인기가 드높았다.

    라카트옐 대공가 영지가 있는 북부에서 열리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북부 숲은 어느 곳보다 사냥감이 많지만 그만큼 사나운 짐승도 많기 때문에 황실이 대부분 다른 지역을 골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고 돌아 결국 라카트옐 영지에서 열지 않으면 안 될 순서가 왔다.

    대공가 안주인인 아리엘은 봄부터 틈틈이 사냥대회 준비를 도왔다.

    대부분 본가의 집사 베르토가 다 준비했지만, 그녀도 몇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예를 들면, 여름밤에 야외 만찬장을 밝힐 마법등을 설치하는 문제나 디저트 종류를 정하는 것 등등 말이다.

    그리고 대회 열흘 전부터는 미리 가서 대회장과 손님방들을 살펴볼 예정이었다.

    이번 여행에는 히스도 동행했다.

    마법 담당인 브루노어가 자신은 늙어서 게이트를 타면 관절이 쑤신다고 엄살을 떨었기 때문이었다.

    여행 가방을 가득 싼 아리엘은 수잔의 전송을 받으며 현관 계단을 내려갔다.

    “응?”

    그런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마차가 두 대였다.

    아리엘은 마차 두 대를 번갈아 보다가 깨달았다.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이 마차를 따로 쓰잖아?’

    그리고 두 남자는 각각 마차 앞에 서서 아리엘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불길함을 느꼈다.

    ‘혹시 나더러 고르라거나…….’

    그녀가 가까이 가기가 무섭게 루시안이 협박하듯 말했다.

    “아리엘. 둘 중 누구랑 탈 건지 선택해.”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

    아리엘은 마티어스 쪽을 바라보았다.

    마티어스는 당연히 나랑 타는 거 아니냐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마티어스님도 양보하실 생각이 없나 봐.’

    가족이 겨우 세 명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아리엘은 두 사람을 달래듯이 말했다.

    “그냥 다 같이 타면 안 돼요?”

    “안 돼.”

    루시안이 숨 쉴 틈도 없이 곧장 대꾸했다.

    아, 안 되는 거구나.

    그녀가 고민에 빠지자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서로를 노려보며 말을 주고받았다.

    “나와 아리엘 사이에 끼어들지 마. 마티어스.”

    “긴 여행인데 네 녀석이랑 있으면 불편하기만 하겠지.”

    두 남자 사이에 파지직 불꽃이 튀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마차 한 대가 부서져서 못 쓰게 될 지경이었다.

    아리엘은 한숨을 폭 쉰 뒤 결정을 내렸다.

    “갈 때는 루시안이랑, 올 때는 마티어스님이랑 탈게요.”

    “그딴 게 어딨어?”

    루시안이 독점욕을 드러내며 거칠게 되물었다.

    어휴, 저 성질머리.

    아리엘은 그를 혼내듯 노려봐준 뒤, 마티어스에게 다가가 까치발을 들고 뺨에 입을 맞췄다.

    까치발을 들어도 키가 닿지 않아 마티어스가 슬쩍 고개를 숙여줬다.

    “이따가 봬요.”

    “……그래.”

    역시나 불만스러운 표정이던 마티어스가 그녀의 볼 키스를 받고 스르르 얼굴을 풀었다.

    루시안은 마음에 안 든단 얼굴로 곧장 아리엘의 허리를 잡아챘다.

    그녀를 제 마차에 태운 그가 으르렁거렸다.

    “누가 마티어스한테 입 맞추랬어?”

    아리엘은 허리에 손을 얹고 새침하게 대답했다.

    “질투 나면 루시안도 마티어스님한테 뽀뽀하든가요. 루시안 아빠잖아요.”

    “지금 내가 마티어스 놈한테 하고 싶어서 이러는 것 같아?”

    “그럼 왜요?”

    “아무한테나 입 맞추지 마.”

    “아무나가 아니잖아요.”

    “특히 마티어스한테는 하지 마.”

    흥. 진짜 유치해, 루시안.

    아리엘은 소심하게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그때 그가 위협하듯 낮게 말했다.

    “나한테는 네가 먼저 입 맞춘 적이 거의 없었지.”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던가?’

    그러고 보니 루시안과 있을 땐 대부분 그가 먼저 이마나 뺨에 키스했다.

    자신이 먼저 한 건 굿나잇 키스 때 한 번뿐이었던 것 같고……?

    아리엘이 당황하자 그가 오만하게 웃었다.

    완벽한 입매가 비딱하게 비틀어질 때면 늘 그는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이제 보니 내가 받을 빚이 많은 데. 무려 4년 치 입맞춤이라고, 아리엘라.”

    말도 안 돼, 순 억지야.

    그러면서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4년 치면 대체 몇 번인 거야?

    멋대로 키스 빚을 지운 루시안은 그제야 맘이 풀렸는지 느긋하게 마차 좌석에 기대앉았다.

    답답한 듯 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낸 그가 요염하게 말했다.

    “빨리 안 당겨 앉으면 4년 치 지금부터 받는다.”

    “앉을게요!”

    협박범은 나빠.

    아리엘은 서둘러 좌석 깊숙이 앉아서 애꿎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영지에 도착한 뒤 며칠이 바쁘게 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드디어 제국 사냥대회 전날이 다가왔다.

    전국의 귀족들이 몰려와 라카트옐 영지는 마차와 사람들로 북적였다.

    본가의 집사 베르토는 이런 일이 익숙한 듯 귀족들에게 숙소를 배정하고, 말들을 마장으로 보냈다.

    라카트옐 본성과 별채들이 사람들로 가득 차 환한 창문들이 불야성을 이뤘다.

    마티어스와 아리엘은 대공의 서재에서 내일 사냥대회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냥대회 첫날은 가볍게 토끼 사냥으로 시작하는 게 보통이었다.

    여름철에 엄청나게 번식하는 토끼는 주변 마을의 농작물에 피해를 입혔다.

    그 수를 줄이기 위해 전통적으로 사냥대회 첫날은 토끼 사냥을 했다.

    “내일은 루시안 녀석이 감독할 테니 별로 신경 쓸 것 없을 거다.”

    첫날만큼은 주최자가 참여할 수 없었다.

    올해는 라카트옐 가에서 연 사냥대회니까 마티어스, 루시안, 아리엘은 사냥터에 들어갈 수 없는 셈이었다.

    물론 사냥 둘째 날부터는 남자들은 참여할 수 있었다.

    아리엘은 시무룩하게 생각했다.

    ‘나도 토끼 사냥하고 싶다. 토끼들 다 나한테 올 텐데.’

    원소 마법사는 자연 친화력이 높아서 동물들을 부를 수 있었다.

    아리엘은 토끼들을 잔뜩 모아놓고 귀를 살짝 잡아서 자루에 쏙쏙 집어넣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에게 자랑도 해보고…….’

    두 남자의 놀란 얼굴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리곤 토끼들은 뒤로 몰래 놓아주는 거야. 고맙다고 당근도 몇 개 주고.

    그럼 좋을 텐데.

    아리엘은 토끼들한테 당근을 물려서 보내는 걸 생각하며 배시시 웃었다.

    달튼이 와서 무언가를 이야기하자 마티어스는 아리엘의 머리를 짧게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자거라.”

    “네. 마티어스님.”

    아리엘은 발돋움을 해 마티어스에게 굿나잇 키스를 했다.

    마티어스가 우아하게 슬몃 웃고 아리엘의 뺨을 토닥였다.

    여름 별자리가 창밖에 선명하게 떠있는 밤이었다.


    * * *


    대마법사 브루노어가 며칠 전 예측한 대로 사냥대회 첫날은 쾌청하게 맑았다.

    대회에 출전하는 남자들은 숲 입구에 모여 서 있고 여자들은 히스가 시원한 바람 마법을 걸어 둔 천막 안에 앉았다.

    “세상에, 이 천막 안은 가을처럼 시원하네요.”

    “마법의 힘이래요.”

    귀부인들이 모여앉아 감탄을 연발했다.

    수도에 있는 라카트옐 대공저는 브루노어가 마법으로 실내 온도를 조절했다.

    봄부터 겨울까지 저택 안은 늘 춥지도 덥지도 않은 좋은 온도였다.

    하지만 브루노어가 없는 영지의 저택에선 엄청난 노동력으로 실내 온도를 맞추었다.

    그래서 본가 저택에는 사용인의 수가 무척 많았다.

    겨울에는 각 방마다 두꺼운 장작으로 벽난로를 활활 지피고, 벽이나 카페트가 눅눅해지지 않도록 환기를 해준다.

    그러나 끓는 듯한 여름에는 지붕에 찬물을 끼얹는 것 외엔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손님들이 오는데 더위에 지치게 할 순 없지.’

    고심하던 아리엘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사냥대회 때문에 몰려든 수많은 귀족들의 방마다 냉기 바람 마법을 걸어 주는 건 마나 낭비였다.

    대신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쉬는 홀이나, 지금의 천막 같은 곳에 냉기 바람 마법을 걸기로 했다.

    아리엘이 장소를 정하면 히스가 마법을 거는 식이었다.

    “시원해! 이 안에 있으니 살 것 같군.”

    난생처음으로 하인의 부채질 없이도 시원함을 누리게 된 귀족들은 아예 대공가 영지에 눌러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개념 냉방에 놀란 건 황태자 디트리히도 마찬가지였다.

    황실에도 마법사가 있었지만, 사람을 살기 좋게 만들어주는 마법은 거의 쓰지 않았다.

    황실 마법사 무리는 제국의 군대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디트리히는 마법을 이런 곳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천막 안을 둘러보며 시종에게 말했다.

    “놀랍군. 이런 마법이 여러 곳에 보급되면 더할 나위 없겠어.”

    마지막으로 아리엘은 몇 가지를 둘러보기 위해 헥터, 랄프와 함께 천막을 나섰다.

    그런 그녀의 눈에 낯익은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제롬과 아버지?’

    4년 만이었다. 후작가의 가족들과 맞닥뜨린 것은.

    그들을 발견한 아리엘의 체온이 삽시간에 식었다.

    후작과 제롬은 흰색에 검은 얼룩무늬가 있는 말 앞에 서서 말을 품평하듯 살펴보고 있었다.

    후작은 아리엘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었다.

    고작 4년이 지났을 뿐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름을 잔뜩 발라 청동색 머리를 완전히 뒤로 넘긴 뚱뚱한 제롬은 놀랄 만큼 자라있었다.

    올해 열일곱이던가?

    제롬을 보자, 아리엘은 순간 제롬의 개에 쫓기던 열 살의 무력한 어린아이가 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손이 떨렸다.

    사냥개가 짖는 환청이 귓전에 들려왔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수잔의 말이 맞았다.

    몸에 생긴 흉터보다 마음에 생긴 흉터가 훨씬 지우기 어렵다는 말.

    아리엘의 마음 깊숙이에는 아직도 후작가에서 학대당할 때의 상처와 트라우마가 남아있었다.

    강아지를 좋아하면서도, 만지거나 가까이 다가가는 건 여전히 무서우니까.

    아리엘은 떨림이 이는 손을 꼭 쥐고 속으로 되뇌었다.

    ‘아버지와 제롬은 이제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야.’

    친정이라지만 명목상일뿐.

    실제로는 그녀에 대해 아무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난 이제 라카트옐 사람이고,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

    그동안 그녀는 가족들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만큼 열심히 마법을 배웠고 사업도 시작했다.

    주변에 그녀를 아껴주는 사람들도 정말 많이 생겼다.

    그렇게 아리엘이 작게 숨을 고르며 트라우마를 진정시키려 하는 사이, 후작과 제롬 사이에 누군가가 사뿐히 끼어들었다.

    “아버지, 오라버니.”

    끼어든 사람은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많아야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예쁘고 순수하게 생긴 소녀.

    분홍색 머리의 소녀를 발견한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후작가가 친척 소녀를 데뷔시키기 위해 수양딸로 삼아 데려온다던 이야기.

    ‘저 소녀가 그 친척 소녀……?’

    ‘믿기 어렵지만 정말로 후작가가 저 친척 소녀를 후원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제롬이 후원을 한다니…… 어떻게 된 일이지?’

    루실리온 후작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소녀 쪽을 바라보던 아리엘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제 후작가 일은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리엘은 담담하게 발걸음을 돌려 천막으로 돌아갔다.


    * * *


    한편 사냥대회를 위해 준비하고 있던 황태자 디트리히는 히스와 마주쳤다.

    둘은 만난 적이 없었지만, 디트리히를 안내해주던 대공가 집사 덕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제국의 황태자라고?’

    히스는 눈앞에 서 있는 금발의 훤칠한 미남을 당혹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황태자 쪽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히스클리프. 요즘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라지? 반갑네.”

    금실로 뽑아놓은 듯한 환한 골드 블론드에 잎새 같은 녹색 눈동자. 고귀함과 기품을 장식처럼 두른 사내였다.

    온몸에서 예의와 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나와는 상극이지.’

    히스는 조금 삐딱한 마음으로 황태자를 감상했다.

    절대로 방금 그가 집사에게 아리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 아니다.

    한편 디트리히도 애매한 눈빛으로 히스를 관찰하고 있었다.

    초콜릿색의 머리카락에 황금빛이 도는 눈동자.

    호리호리한 체형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소년이 눈앞에 있었다.

    ‘이 사람이 아리엘 대공자비의 소꿉친구…….’

    사교계에는 히스가 아리엘의 후원을 받는 마법사라고만 알려져 있었지만, 디트리히는 두 사람이 마법 동기이자 소꿉친구임을 알고 있었다.

    아리엘 옆에 오랜 시간 머문 소년이라 그런지 왠지 모를 경계심이 들었다.

    디트리히는 짐짓 편안한 어조로 집사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사냥대회에서 내가 잡은 것은 대공자비께 드리도록 하겠네. 그렇게 전해드리게.”

    ‘뭐?!’

    히스는 놀라서 황태자를 보았다.

    ‘방금 아주 불순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평민들 사이에는 좋은 사냥감을 잡으면 마음이 있는 여자한테 주는 풍습이 있었다.

    히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정작 집사 베르토는 그 말을 별 의미 없이 받아들였다.

    보통 사냥대회에서 남자가 잡은 사냥감은 자신의 여자 가족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여자 가족이 함께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묵고 있는 곳의 여주인에게 바치는 게 관례였다.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디트리히가 성스러운 느낌이 나는 얼굴로 화사하게 웃었다.

    “고맙네.”

    어어, 저놈 봐라?

    히스는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의 직감이 말했다.

    ‘이제 보니 흑심을 갖고 다가온 놈이었잖아!’

    히스는 황태자를 빤히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잘됐군요. 저도 오늘 사냥대회에 참가하는데 ‘전하’의 ‘실력’을 ‘꼭’ 보고 싶습니다.”

    디트리히와 히스의 눈빛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마주쳤다.

    “…….”

    디트리히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히스 또한 아리엘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저 마법사가 소꿉친구란 핑계로 아리엘 영애 옆을 맴도는 모양이군.’

    디트리히의 입술이 가볍게 올라갔다.

    “좋아. 자네 실력도 기대하지. 히스클리프.”


    * * *


    대회가 시작하기 전, 남자들은 각자 자신이 사냥감을 바칠 여자에게 손수건을 받아갔다.

    제국에서는 사냥을 할 때 선물 받은 손수건을 지니고 있으면 행운이 따른다는 속설이 있었다.

    아리엘은 당연히 마티어스와 루시안 것만 준비해놓았는데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제게도 행운의 손수건을 주겠습니까, 아리엘 대공자비?”

    가장 먼저 아리엘을 찾아와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손수건을 청하는 디트리히부터,

    “호, 혹시 내 것도 있냐? 꼭 필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말은 저렇지만 손수건을 받고 싶은 티를 팍팍 내는 히스까지.

    여분의 손수건이 없던 아리엘은 난감해하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저는 루시안과 마티어스님 드릴 것만 가지고 있는지라.”

    잠시 고민하던 아리엘은 손님용으로 준비된 손수건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냈다.

    “혹, 손님용으로 준비해둔 것이라도 괜찮으시다면 가져가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손수건이 있어야 안심하고 사냥에 임할 수 있으니까요.”

    사냥대회를 주최한 게 라카트옐이었으므로 아리엘은 하녀들에게 예비용 손수건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녀들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디트리히와 히스에게 건네주었다.

    아무 수도 놓이지 않은 평범한 흰색 손수건을 받았음에도 디트리히와 히스의 얼굴이 기분 좋게 풀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엘은 살짝 웃고 말았다.

    뭐야, 손수건이 그렇게 좋나?

    다 미신이라는 거 알면서.

    ‘둘 다 애들 같아.’

    그 사이 히스와 디트리히는 아리엘 몰래 서로의 손수건을 불쾌하게 노려보았다.

    한편, 세 사람이 천막 입구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바깥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대공자 루시안이었다.

    루시안은 두 남자와 대화하고 있는 아리엘을 보며 새파란 살기를 눌렀다.

    당장이라도 옆의 두 놈을 없애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대체.”

    루시안의 섬뜩할만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벌레보다 못한 것들이 감히 내 아내 주위를 맴돌아?”

    게다가 손수건까지 받아갔다.

    그는 디트리히와 히스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찢어발길 듯 노려보았다.

    받아간 손수건이 하녀들이 건네준 손님용 손수건이라는 사실 따위는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숲에 들어가자마자 저것들부터 없애야겠군.”

    손수건 따위, 소드 마나로 태워버리면 그만이니 성가실 것도 없다.

    그는 속 안에서 요동치는 분노를 누르며 아리엘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날카로운 눈빛은 사라진 채였다.

    그가 유혹하듯 낮은 목소리로 아리엘을 불렀다.

    “아리엘라.”

    그를 본 아리엘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루시안.”

    조금 전 후작과 제롬을 본 영향인지 아리엘은 루시안을 보자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등장과 동시에 옆의 두 남자의 표정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루시안은 그들에게 경고하듯 난폭한 기세를 내뿜고는 아리엘에게 가까이 갔다.

    “줘.”

    “응? 뭘요?”

    루시안이 매혹적으로 속눈썹을 치켜떴다.

    “내 손수건.”

    “아.”

    아리엘은 작은 비단 주머니에서 루시안 몫의 손수건을 꼬물꼬물 꺼내주었다.

    다른 손수건과 달리 은은히 물든 연핑크색이고, 아리엘이 직접 금실로 테두리를 수놓은 점이 다른 것과 달랐다.

    자기 몫을 챙긴 루시안이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앞섶 주머니에 느리게 분홍색 손수건을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관능적이어서 아리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뭐야, 무슨 남자가 분홍색도 저렇게 잘 어울려.’

    다이아나가 늘 외치는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나, 그에 굴하지 않고 세실이 꿋꿋이 주장하는 ‘패션의 완성은 몸매’.

    루시안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진 남자였다.

    그 증거로, 디트리히의 맑고 성스러운 얼굴과 히스의 불퉁하면서도 반듯한 이목구비를 몰래 훔쳐보던 여자들이 루시안의 등장과 동시에 넋이 나가서 대놓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루시안의 관심은 그의 꼬맹이 아내에게 손수건을 받은 남자들뿐이었다.

    아리엘을 향해 붉은 입술을 끌어올린 루시안이 얼어붙은 황태자와 애송이 마법사를 번갈아 본 뒤 싸늘하게 말했다.

    “참. 내일 사냥대회는 나도 나가지.”

    포식자 같은 그의 눈빛이 경멸하듯 말했다.

    ‘오늘 실컷 즐겨라. 내일 너희 몫은 없을 테니.’

    축포와 함께, 제국 사냥대회의 서막이 올랐다.


    * * *


    여자들이 있는 천막으로 돌아온 아리엘은 귀족 영애들이 누군가를 중심으로 와글와글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리엘을 기다리고 있던 다이아나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리엘.”

    “다이아나.”

    반갑게 서로의 이름을 부른 뒤, 아리엘이 소곤소곤 물었다.

    “왜 다들 저기에 모여있어?”

    “그게…….”

    다이아나가 설명하기 위해 막 입을 여는 참이었다.

    “아, 대공자비님!”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사람이 갑작스레 앞으로 나서며 아리엘에게 말을 걸었다.

    아리엘은 그 사람이 누군지 곧장 알아보았다.

    분홍색 머리카락에 순수한 인상.

    ‘후작가의 그 친척 소녀?’

    행복한 미소를 활짝 지으며, 소녀가 아리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대공자비님. 듣던 대로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시네요.”

    소녀는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아리엘의 손을 덥석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이아나가 우아하게 부채를 뻗어 가볍게 분홍 머리 소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영애. 사교계에서는 서로 소개가 끝나고, 인사를 마친 뒤에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거랍니다.”

    다이아나는 은근히 아리엘을 보호하듯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말도 없이 갑자기 대공자비님 몸에 손을 대려 하다니, 예의가 아니에요.”

    다이아나의 나직한 지적에 분홍 머리 소녀의 눈동자가 서러운 듯 금방 촉촉해졌다.

    “어, 어머…… 전 몰랐어요. 저는 그저 너무 반가워서…… 지방에서만 지내서 공녀님만큼 예법에 철저하질 못했네요. 죄송해요.”

    다이아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상하네. 지방 사교계에서도 이렇게 행동하면 무례한 짓일 텐데.

    왜 교묘히 날 예민한 사람처럼 만드는 것 같지?

    감정을 갈무리한 듯한 소녀가 아리엘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소개가 늦었어요. 전 이번에 대공자비님의 친정댁에 수양딸로 들어온 유니스라고 해요.”

    밝게 자신을 소개한 유니스가 이어 말했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제 대공자비님과 저는 한 가족이잖아요. 그렇죠?”

    “…….”

    아리엘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 이미 결혼해서 라카트옐 집안 사람이 된 걸요. 후작가 일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있어요.”

    “아…….”

    유니스의 표정이 슬픈 듯 흐려졌다.

    뭐라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대공자비님, 잠시 단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아리엘은 미소를 지었다.

    “대화는 괜찮지만, 다이아나는 제 친구예요. 함께 있어도 상관없을 것 같네요.”

    둘만의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유니스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활짝 웃었다.

    “괜찮아요. 제가 대공자비님께 따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것이니까요.”

    세 명의 소녀는 자리를 옮겼다.

    조용한 곳에 오자, 유니스가 안쓰러운 눈으로 아리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공자비님…… 이야기는 들었어요. 어릴 적에 가족과 다투고 결혼해서 집을 나오셨다면서요.”

    그 말을 들은 다이아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부터 고쳐줘야 할지 모르겠는 말이네.’

    아리엘과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면서, 다이아나는 이제 아리엘의 친정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가족과 싸우고 집을 나왔다니. 학대를 당한 뒤 버려졌다면 모를까!’

    하지만 유니스는 정말로 슬픈 듯 눈가를 붉혔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잘못하신 건 알아요.”

    유니스가 아리엘에게 호소하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행동이 서툴러서지, 마음까지 그러신 건 아니었을 거예요.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얼마나 대공자비님을 사랑하시는데요.”

    분홍색 머리칼의 소녀가 마치 기도하듯 제 양손을 맞잡았다.

    “계속 이렇게 서로 안 보고 사는 건 너무 슬픈 일 아닌가요? 섭섭한 일이 있으셨더라도…… 이제 그만 덮고, 용서해드리세요. 가족이잖아요.”

    유니스의 말을 듣고 있던 다이아나가 참다못해 나섰다.

    “유니스 영애. 대공자비님은 대공가에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계세요. 이런 식의 말은 정말 무례하군요.”

    이쯤 되었으면 꺾일 만도 한데 유니스는 굴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에요, 공녀님. 낳아주신 부모님인걸요. 피를 나눈 가족과 떨어져 사는데 대공자비님께서 정말 행복하실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은근히 다이아나와 아리엘을 나쁜 사람인 것처럼 탓하는 듯한 말이었다.

    완전체네, 이거.

    다이아나는 진심으로 기가 막혔다.

    끝내 유니스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공녀님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시면서, 어린 대공자비님께선 낯선 시댁에서 혈혈단신 사시도록 내버려 두시다니요. 진정한 친구라면, 화해하도록 돕는 게 옳지 않을까요?”

    이젠 이간질까지?

    유니스는 마치 정말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충고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사실 대공자비님께서도 가족이 얼마나 그리우셨겠어요. 후작가와 대공자비님이 앞으로도 서로 소원하다면, 저는 너무나 슬플 거예요.”

    다이아나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저게 사정도 모르면서……!’

    그때 아리엘이 단호하게 나섰다.

    “유니스 영애. 더는 영애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남은 시간 동안 영애가 사냥대회를 즐겁게 보내길 바랄게요.”

    그리고 아리엘은 다이아나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대공자비님…….”

    두 소녀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유니스는 아리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말고 천천히 가련한 표정을 지워냈다.

    분홍색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묘한 표정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허공에 대고 누군가에게 말을 했다.

    “주인님. 손을 대는 것 정도로는 불가능할 듯합니다. 몸에 보호 마법이 둘러져 있더군요.”

    이내 무슨 대답이라도 들려온 양, 유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인님.”


    * * *


    자리를 떠난 다이아나와 아리엘은 천막으로 돌아가는 대신 주변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나오자마자 다이아나가 씩씩대며 물었다.

    “아리엘, 괜찮니?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저녁엔 마티어스님이랑 산책을 해야지, 이런 생각에 빠져있던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뭐가?”

    “유니스 영애 말이야. 이상한 말을 잔뜩 늘어놨잖아.”

    “아…….”

    아리엘은 작게 웃었다.

    유니스에 대해선 놀라울 만큼 신경이 안 쓰여서 딴생각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당연하지. 나랑 후작가는 이제 상관없는걸. 유니스 영애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다이아나는 여전히 속이 상한지 말끝을 흐렸다.

    “기분 풀어, 다이아나.”

    아리엘은 웃으며 다이아나의 어깨에 머리를 폭 기댔다.

    그러자 다이아나의 표정이 금방 녹아내렸다.

    “아이참, 내 귀염둥이는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화도 못 내게.”

    사실 다이아나는 사교계에서 기른 말솜씨로 유니스 말의 허점을 조목조목 지적해주려고 했지만, 아리엘이 아예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행동했기에 그쯤에서 물러난 것이었다.

    한 번만 더 그래 봐, 내 아리엘에게!

    친구와 함께 걸으며, 아리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과거의 나였다면 신경이 쓰였을 수도 있겠지.’

    회귀하기 전의 아리엘은 가족의 사랑에 무척이나 목마른 아이였다.

    그녀에게 아버지와 오라비의 사랑은 너무나 간절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과 다른 자신의 외모를 미워했고, 가족과 닮기 위해 뭐든지 했다.

    맞고 학대를 당할 때조차 정말로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믿었다.

    ‘심지어 팔리고 나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었어.’

    후작과 제롬이 돈 몇 푼에 아리엘을 마법사 무리에 넘겨버렸던 날.

    아리엘은 마지막으로 처절하게 울며 매달렸다.

    “제발 보내지 말아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저를 버리지만 마세요…….”

    하지만 후작은 개를 발로 차 내쫓듯 아리엘을 떨쳐냈다.

    “아버지! 아버지! 오라버니……! 제발요……!”

    결국, 아리엘은 '그'의 수하들의 손에 의해 질질 끌려나갔다.

    그 날 일로 그녀는 자신이 후작과 제롬에게 가족이 아니란 걸 확실히 깨달았었다.

    ‘하지만…… 과거의 나였다면 유니스 영애의 말에 흔들렸을지도 몰라.’

    그때의 그녀는 애정에 너무 굶주려 있었기에, 유니스처럼 가족애에 호소하면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내가 잘못했다는 듯이 말한다면 그렇게 믿었을 테고.’

    그리고 용서해야만 한다고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정말 그렇게 해야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라카트옐 가에서 수잔과 다른 사람들에게 진짜 사랑을 받아본 아리엘은 이제 사랑이 아닌 것을 구별할 줄 알았다.

    ‘유니스 영애의 걱정은 겉으로는 옳게 들려도…….’

    자신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아리엘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이아나. 아까 다른 영애들이 왜 유니스 영애를 둘러싸고 있었던 거야?”

    아리엘이 묻자 다이아나가 부채를 펴서 입을 가린 뒤 소곤소곤 대답해주었다.

    “유니스 영애가 여기 도착할 때 비싼 마차를 타고 등장했거든. 입고 있는 드레스나 장신구도 무척 비싼 것들이고. 한미한 지방 출신의 영애를, 후작가에서 공주님처럼 모셔온 거지.”

    “그래?”

    가벼운 아리엘의 반문에도 다이아나는 주먹을 꽉 쥐고 투덜댔다.

    “안 그래도 후작님과 후작 영식이 수양딸에게 푹 빠졌다는 소문이 파다해.”

    그러니까 제국 사냥대회같이 큰 자리에서 데뷔시키겠다고 데려온 거 아니겠냐고! 덧붙인 다이아나가 신랄하게 내뱉었다.

    “다들 그 팔자 편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해서 난리인 거지.”

    아리엘은 궁금했던 게 해소돼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이아나의 드레스 자락을 당기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다이아나. 세실을 찾아봐야지.”

    “맞다, 세실! 세실 얘는 또 천막에 안 왔었잖아. 분명 다른데 숨어있겠지?”

    세실은 영애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를 부담스러워해서 매번 혼자 구석진 곳에 틀어박혀 있곤 했다.

    한결같은 세실 때문에 까르르 웃은 두 소녀는 서둘러 친구를 찾으러 나섰다.


    * * *


    한편, 숲에 들어간 히스와 디트리히는 서로를 견제하느라 붙어 다니며 사냥을 했다.

    히스는 백마의 갈기를 휘날리며 말을 모는 디트리히를 불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태자라고 해서 샌님일 줄만 알았더니.’

    이제 보니 순 내숭이었다.

    디트리히는 승마 실력이 뛰어났고, 말 위에서 활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그가 가볍게 화살로 쏴 잡은 토끼가 말안장에 가득 실려 있었다.

    히스는 질세라 광역 미혹 마법을 발동했다.

    마법진이 쫙 펼쳐지자 근방의 토끼들이 헤롱거리며 쓰러졌다.

    마법으로 간단히 토끼들을 주워 담으며 히스는 디트리히를 향해 도발하는 눈빛을 보냈다.

    어떠냐. 너 같은 흑심 품은 놈한테 우승을 뺏길 것 같아?

    ‘제법이네.’

    디트리히는 히스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마법사들은 원래 몸이 약했다.

    물몸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히스클리프라는 이 소년 마법사는 체력이 꽤 좋으면서도 머리를 쓸 줄 알았다.

    그래서 더욱 거슬렸다.

    히스와 디트리히에게 서로는 아리엘 옆을 얼쩡거리는 파렴치한일 뿐이었다.

    한 차례씩 서로의 실력을 본 그들은 두 갈래 길이 나오자 냉기를 풀풀 풍기며 멀어졌다.

    “이따가 뵙죠. 황,태,자, 전하.”

    “나야말로 그대가 얼마나 많이 잡아올 지 기대하겠다.”

    둘 다 저놈에게만은 우승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하.”

    루시안은 그 모습을, 숲 중앙의 거대한 나무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레 놈들이 흥분제라도 맞은 듯이 구는군.”

    그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히스와 디트리히가 옷깃에 매어 놓은 아리엘의 손수건이 화르르 잿가루가 되었다.

    조금만 힘을 더 줘서 두 벌레 놈까지 재로 만들면 매우 좋을 텐데 아리엘이 사냥대회가 무사히 끝났으면 한다고 종알거린 것이 마음에 걸려서 두고 보는 중이었다.

    루시안은 냉혹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의 꼬맹이 아내는 매번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로서는 없애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었다.

    “숲을 통째로 날려버리면 간단하겠지만.”

    섬뜩하게 말한 그의 눈길이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

    헐떡거리며 말 위에 겨우 붙어 있는 뚱뚱한 몸집의 남자였다.

    “제롬, 루실리온.”

    그 이름이 제 아름다운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듯 루시안의 얼굴은 지극히 오만해 보였다.

    제롬은 흥분한 사냥개들을 끌고다니며 사냥을 하고 있었다.

    토끼 피 냄새에 침을 흘리며 날뛰는 개들을 본 루시안의 눈이 차가운 빛을 띠었다.

    “루실리온 가(家)라…….”

    무얼 생각했는지 그가 붉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얼음 같은 바람이 분 것 같았다.


    * * *


    둥, 둥, 둥.

    첫날의 토끼 사냥이 끝났다.

    큰 북소리가 나자 사냥한 토끼를 든 귀족 남자들이 숲에서 빠져 나왔다.

    사냥의 흥분으로 불그레해진 얼굴들이었다.

    아리엘은 친구들과 앉아있다가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디트리히와 히스가 다가왔다.

    사냥을 마친 후여서인지 둘 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꼴이었다.

    “아리엘 대공자비. 받아주십시오.”

    디트리히가 싱긋 웃으며 커다란 자루를 내밀었다.

    질세라 히스도 자기가 든 자루를 아리엘 앞에 내려놓으며 툴툴댔다.

    “내가 잡은 거야. 별 건 아니지만.”

    두 남자가 잡아 온 토끼는 얼핏 보아도 굉장히 많았다.

    아마 우승은 둘 중에 한 명이 될 것 같았다.

    디트리히와 히스가 싹쓸이한 탓에 주변 남자들의 손은 가볍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엘은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아무리 대회라도 이건 민폐 수준이잖아!

    “어쩌다 이렇게 많이 잡은 거예요?”

    그러자 두 남자가 동시에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많이 잡은 거예요?”

    그러자 두 남자가 동시에 서로를 노려보았다.

    디트리히가 먼저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히스클리프에게 사냥 실력을 보여주기로 했으니까요.”

    “저야말로 제 마법 실력을 제대로 보여드린 것 같은데요.”

    히스가 겁도 없이 대꾸했다.

    둘 사이에 짜증스러운 눈빛이 오갔다.

    ‘이놈 마음에 안 들어!’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오늘 처음 만났는데 왜 벌써 사이가 안 좋은 거지?’

    대회 때문인가? 경쟁심 때문에?

    알 수는 없었지만, 아리엘은 일단 하녀를 시켜 그들에게 수건을 건넸다.

    “일단 옷부터 정돈하시는 게 낫겠어요, 전하. 히스클리프도.”

    그제야 흙투성이인 자기 모습을 깨달은 디트리히가 얼굴을 붉혔다.

    아리엘에게 사냥감을 준 그는 황급히 시종과 함께 사라졌다.

    디트리히가 자리를 떠나자 히스의 표정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히스, 너도 흙 닦으러 가.”

    아리엘은 그에게도 수건을 쥐여주며 채근했다.

    하지만 히스는 제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히스?”

    머뭇거리던 그가 귓불을 새빨갛게 붉히고 말했다.

    “너 때문에 대회 나간 거야.”

    말을 마친 히스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그가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꼬리가 있는 것만 같았다.

    아리엘은 작게 웃었다.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어린애 같다니까.

    “참 잘했어요, 히스 어린이.”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니까.”

    곧장 투덜거렸지만, 히스는 칭찬을 받고 나서야 흙먼지를 닦으러 간이 천막으로 사라졌다.

    두 남자를 보내놓고 나서 남은 토끼 자루를 내려다보던 아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토끼들은 과했다.

    “……경쟁이라니. 둘 다 다르게 보이네.”

    떨떠름한 아리엘의 표정과는 달리, 아기 마님이 사냥감을 듬뿍 선물 받은 걸 본 하녀들은 마냥 기분이 좋은 듯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올해의 레이디는 우리 아리엘님일 거라고 했지.”

    “흰토끼로만 모아서 목도리를 해드릴까? 아, 설레라!”

    아리엘은 세실과 함께 정원에 있는 기사 석상이 들고 있는 보검을 보러가기로 했기에 이만 돌아섰다.

    그때, 숲 입구 쪽에서 여자들의 낮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 * *


    여자들이 비명을 지른 이유는 숲 입구에서 공터로 돌아오는 한 남자의 모습 때문이었다.

    들어온 남자는 다리를 다친 상태였다.

    아리엘은 일그러진 얼굴의 청동색 머리 남자를 알아보았다.

    ‘제롬.’

    제롬이 자기 시종을 불러서 토끼 자루와 말고삐를 넘겼다.

    시종이 쩔쩔매며 물었다.

    “도련님, 다리는 어쩌다…….”

    “데려간 사냥개들한테 공격당했어. 그러다 말에서 떨어졌고.”

    찢어진 바지 사이로 드러난 그의 장딴지에는 말에서 떨어지면서 생긴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

    “개들도 다 잃어버렸다고. 대체 사냥개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시종의 머리를 세게 후려친 그가 절룩이며 걸어서 수통으로 다가갔다.

    아리엘은 차분하게 본가 사용인을 불렀다.

    “루실리온 후작 영식이 부상을 입었으니 의원을 보내 도와드려.”

    “예, 아기 마님.”

    짧게 명령을 마친 아리엘이 그 자리를 떠나려는 참이었다.

    “세상에, 오라버니!”

    분홍 머리의 소녀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유니스.”

    방금까지 화가 나 있던 제롬의 얼굴이 유니스를 발견하자마자 흐리멍덩하게 바뀌었다.

    눈의 초점도 탁하게 흩어졌다.

    제롬의 상처를 본 유니스가 커다란 눈에 눈물을 고인 채 난리를 피웠다.

    “어쩌다 이렇게 다치셨어요. 제가 부축해드릴게요. 얼른 들어가요, 오라버니.”

    제롬의 얼굴에 부자연스럽고 멍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유니스가 제롬을 부축해 막사 안으로 들여보냈다.

    함께 들어가는가 싶더니 유니스가 뒤돌아 나왔다.

    분홍 머리의 소녀가 향한 곳은 아리엘 쪽이었다.

    “대공자비님!”

    유니스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아리엘에게 달려왔다.

    아리엘과 유니스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몰려들었다.

    세실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리엘과 새로 들인 수양딸을 두고 쓸데없는 관심들이 많군.’

    달려온 유니스가 아리엘에게 손에 든 자루를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대공자비님.”

    아리엘이 뭐냐고 묻기도 전에 유니스가 슬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가 제게 준 토끼예요. 제가 받은 것이지만, 대공자비님이 너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유니스가 굉장히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대공자비님께서도 오빠가 주는 사냥감을 얼마나 받고 싶으셨겠어요…… 다른 사람이 주는 백 마리보다 가족이 주는 한 마리가 낫죠.”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세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지, 이 영애는. 아리엘이 달라고 하지도 않은 걸 주면서 동정하듯 굴고 있잖아.’

    아리엘은 담담하게 유니스에게 대답했다.

    “유니스 영애. 저는 제롬의 사냥감이 필요 없어요. 받고 싶지도 않고요.”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유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존심 세우지 않으셔도 돼요, 대공자비님. 이건 정말 순수한 호의니까요.”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영애.”

    아리엘은 그 말을 나긋하고 똑 부러지게 끊어낸 뒤 돌아섰다.

    그때 유니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오라버니가 다치셨어요. 한번 와서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저로도 충분하다고 하시지만…… 친동생이 함께 있어 준다면 오라버니가 좋아하실 거예요.”

    “아뇨.”

    아리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후작가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어요.”

    유니스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차올랐다.

    “가족이 다쳤는데……! 아무리 그래도 한 번쯤은 찾아와 주실 수…….”

    세실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보통 고단수가 아니네. 이런 식으로 아리엘을 비난하다니.’

    흐느끼던 유니스는 이내 몸을 돌려 제롬이 있는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아리엘과 세실만 남겨지자 주변에서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작가가 친딸보다 수양딸을 더 아낀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수양딸이 저렇게 가족에게 애틋한 걸 보니 맞는 것 같아요.”

    “설마, 대공자비님이 후작가 핏줄이 아니라는 소문이 사실인 건 아니겠죠?”

    아리엘은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돌아섰다.

    깃털보다 가벼운 사교계 사람들의 말 때문에 마음 상해본 적 없었다.

    저런 쑥덕거림은 유니스가 없어도 몇 번이나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녀에게는 조금도 타격을 줄 수 없었다.

    한편, 천막으로 돌아간 유니스는 의자에 기대앉아 신음하는 제롬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혼자 중얼거렸다.

    “이 정도 가지고는 유인을 할 수 없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 대공자비님.


    * * *


    아리엘과 유니스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여름의 긴 해가 저물어가며 주위를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죽은 토끼를 든 인간 남자들이 모두 숲을 나간 걸 확인한 루시안은 공터로 돌아왔다.

    대회가 끝나서 왁자지껄했던 공터는 그의 등장과 함께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대공자 루시안은 그런 상황이 익숙한 듯 모인 사람들을 싸늘하게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여름에도 냉혹한 한겨울 바람을 두르고 다니는 듯했다.

    적막한 가운데 멀리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나저나 대공자님은 아실까? 대공자비님 출생 말이야.’

    아리엘 이야기가 들리자, 루시안의 신경은 저절로 그쪽으로 기울었다.

    ‘모르시겠지. 소문이 사실이라면 대공가에 시집가야 했던 건 대공자비님이 아니라 유니스 영애인 거잖아.’

    ‘하긴, 이제 유니스 영애가 루실리온 후작 영애니까.’

    ‘호호, 조용히 해. 들으실라.’

    숨죽인 까르르 웃는 소리.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을 만큼 멀고 작은 소리였지만, 루시안에게는 바로 옆에서 말한 듯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귓속말로 떠들던 소리가 조용해졌다.

    “…….”

    루시안이 느리게 주위를 둘러보자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시선을 바닥으로 처박았다.

    “감히.”

    조각으로 깎은 듯 아름다운 그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내 아내를 입에 올리는 것들이 있는 모양인데.”

    루시안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서 있는 사람 모두가 몸을 떨었다.

    라카트옐의 응징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때로는 그냥 심기를 거스르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맞을 수 있었다.

    “만약 그 말이 내 아내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처음 말을 꺼낸 인간부터 한 번이라도 입에 올린 인간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말하는 그의 음성에는 경고가 짙게 배어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순간 깨달았다.

    루실리온 후작가의 소문 따위는 대공자비에게 어떤 타격도 줄 수 없음을.

    그것을 대공가가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두려움에 굳어버린 인간들 틈을 지나친 루시안은 곧장 아리엘의 방으로 향했다.

    아리엘이 저 벌레들의 속닥거림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자 뜨거운 것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분명 상처받았겠지.’

    당장이라도 돌아가 모인 인간들을 없애고, 그들의 흔적마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괴물이 아니라고 한 유일한 존재니까.

    그러니 아리엘 앞에서 괴물처럼 굴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목을 죄고 있는 셔츠 단추를 죄 잡아 뜯었다.

    주인의 뒤틀린 심기 때문에 값비싼 다이아몬드 단추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빠른 발걸음으로 아리엘 방문 앞에 도착한 루시안은 안쪽에서 느껴지는 작은 기척에 자신의 기세를 잠재웠다.

    루시안은 문을 두드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엘.”

    방 안에 있던 아리엘은 노크 소리에 놀라 문 쪽을 바라보았다.


    * * *


    아리엘은 지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잘 만들어진 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세실이 대공가 보검을 보고 무척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아리엘, 이건 값어치를 매길 수조차 없는 위대한 검이다. 감동스러워.”

    세실은 보검을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듯 즐거워하다가 아리엘에게 뽀뽀를 마구 퍼부었다.

    어린애처럼 상기된 표정의 세실을 떠올린 아리엘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세실 귀여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아리엘.”

    ‘어라, 루시안?’

    아리엘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쉬러 들어온 참이라 그녀는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잠깐, 나 지금 머리랑 옷이……?’

    자신의 풀려있는 머리 장식과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확인한 아리엘은 침대에서 내려오며 다급히 외쳤다.

    “잠시만요.”

    인내심 없는 루시안이 언제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녀는 후다닥 머리와 옷을 매만졌다.

    이런 모습을 들킨다면 또 '새끼 고양이가 그루밍하는 건가'하며 놀리겠지?

    한편, 아리엘의 방문이 열리지 않자, 바깥에 있던 루시안의 표정은 서서히 일그러졌다.

    왜 빨리 안 열지.

    안에서 들리는 분주한 기척이 오늘따라 불안했다.

    “설마 울고 있던 건 아니겠지.”

    아리엘이 울었다면, 그녀가 자신에게 괴물이라고 하더라도 바깥의 인간들의 숨을 다 끊어놓을 것이다.

    자비 없는 생각을 곱씹으며 그가 문손잡이를 움켜쥐는 순간이었다.

    안에서 바쁘게 뽈뽈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리엘이 빼꼼 문을 열었다.

    “루시…….”

    벌컥.

    루시안은 참을성 없게 문을 확 젖히고 들어가서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앗……?”

    뭐야, 왜 이래요?

    아리엘은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움켜쥔 루시안이 뭔가를 확인하듯 샅샅이 아리엘의 얼굴을 살폈다.

    ‘……읏.’

    그 노골적인 시선에 아리엘의 뺨이 붉어졌다.

    지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푸른 눈이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건, 그녀의 호흡을 매우 방해했다.

    그녀는 바동바동 몸부림을 치며 말했다.

    “놔줘요.”

    그러자 곧장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떨어졌다.

    “힘들어서 쉬러 들어가겠다고 했다며.”

    응? 그게 뭐가 문제죠?

    아리엘은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거렸다.

    이거 혹시…… 또 이불에 돌돌 싸여서 방 밖으로 못 나가게 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녀는 여태까지 당했던 과보호를 떠올리며 열심히 주장했다.

    “힘든 게 아니라, 그냥 쉬고 싶어서요. 나 정말 괜찮아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

    한참 동안 아리엘을 빤히 바라보던 루시안이 마침내 낮게 중얼거렸다.

    “괜찮은 척 하는 게 제법이네.”

    쓸데없이 착해 빠져서는.

    가끔 아리엘이 이렇듯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할 때면 루시안은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의 선물을 거절할 때나, 아리엘 자신한테 들어가는 돈을 걱정할 때.

    그에겐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웃을 때.

    그녀는 이미 그의 소유였다.

    그녀의 미약한 힘으로는 절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럴 때면 조금도 갖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제길.’

    당장 이 가냘픈 어깨를 틀어쥐고 그렇게 나와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싶은 마음과, 제발 그러지 말라 애원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솟아났다.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애원이라니.

    그의 몸에 흐르는 지고의 높은 피에게 애원 같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어찌할 바를 모른 그는 아리엘의 얼굴을 붙잡았던 손을 놓고, 그녀를 제 품에 끌어당겼다.

    아리엘의 조그만 머리가 그의 가슴에 콩하고 부딪혔다.

    “……?”

    얼결에 루시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안긴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루시안이 왜 이러지?

    그녀가 꼼지락거리자 루시안이 아리엘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잠깐만 이러고 있어.”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아리엘은 시키는 대로 얌전히 그에게 기댔다.

    ‘오늘따라 루시안이 이상한걸…….’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녀는 손을 뻗어 루시안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왜인지 손에 닿은 그의 귀 끝이 열이라도 있는 듯 뜨거운 것 같았다.


    * * *


    사냥대회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정신없겠지.’

    제국 사냥대회는 두 번째 날이 본 대회나 다름없었다.

    두 번째 날은 깊은 숲까지 들어가 가장 크고 값진 사냥감을 잡아 오는 사람이 우승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냥감을 받는 레이디가 그 해의 레이디로 칭송받는다.

    어제부터 으르렁거리던 히스와 디트리히는 이미 서로에게 출사표를 던진 것 같았고,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도 기대와 흥분에 가득 젖어있었다.

    심지어 아리엘의 호위인 헥터와 랄프도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명색이 푸른 사자 기사단인데 라카트옐에서 하는 대회에서 공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기 마님께 사냥감을 바치고 싶습죠!”

    사냥을 가고 싶어서 안달하는 그들에게 차마 안된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리엘은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기왕 잡아 올 거면 회색곰 이상으로 잡아 와야 해요.”

    “그, 그럼 가도 됩니까?”

    덩치는 산만한 헥터가 어린애처럼 몸을 들썩였다.

    아리엘은 후후 웃고 말았다.

    “네. 기대할게요.”

    호위들이 자리를 비운 틈에는 마티어스와 함께 있기로 했다.

    루시안이 대공가 대표로 나가서 마티어스는 참가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걱정이 한가득이던 헥터와 랄프도 마티어스 옆에 있겠다는 아리엘의 말에 크게 안심했다.

    “대공 각하라면 믿을 수 있습죠. 주군 옆에 있으면 안전하실 겁니다.”

    아리엘도 마티어스와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건 좋았다.

    어제는 내내 친구들과 어울렸으니까.

    그녀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 차림을 정돈했다.

    상아색 레이스 드레스에 하늘색 비단 리본을 허리 뒤로 묶자, 시녀들이 꺅꺅대며 얼굴을 붉혔다.

    “너무 예뻐요, 아기 마님.”

    “매일 레이스 드레스만 입어 주시면 안 되나요?”

    “머리엔 네 줄 진주 장식을 해드리자! 드레스랑 어울리게.”

    단장을 마친 아리엘은 루시안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루시안의 방 앞에 사용인들이 여럿 쩔쩔매고 서 있었다.

    아리엘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베르토?”

    집사 베르토가 얼른 아리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기 마님.”

    “왜 다들 안 들어가고 여기에 있나요?”

    베르토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작은 주인님께서…….”

    베르토의 이야기를 들은 아리엘은 눈만 깜박였다.

    “그러니까 루시안이 시중을 안 받겠다고 물려서 다들 이러고 있는 거라고요?”

    “예, 원래 가끔 이러시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심하신 터라…….”

    사정을 들은 아리엘은 한숨을 폭 내쉬며 소곤거렸다.

    “……이리 주세요.”

    그녀는 베르토가 들고 있던 사냥복 셔츠와 재킷을 받아들고 조심스레 문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가서 문을 닫자, 창가에 서 있던 루시안이 곧장 위협하듯 말했다.

    “들어오지 말라고 했…….”

    “꺅.”

    그를 본 아리엘은 작게 비명을 지르며 얼른 뒤로 돌아섰다.

    ‘버, 버, 벗고 있잖아, 루시안!’

    물론 상체만이지만, 그는 지금 반라 상태였다.

    유려한 목선과 연결된 쇄골과 넓은 어깨.

    그 아래로 아름답게 조형된 근육으로 덮인 조각 같은 상체.

    늘씬하고 단단해 보이는 허리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어떡해.’

    얼결에 그 모습을 봐 버린 아리엘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달아올랐다.

    어릴 때 그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내외할 나이가 되고 나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한참 동안 아리엘이 뒤를 돈 채로 눈을 꼭 감고 서 있자 뒤에서 픽, 새는 듯한 웃음소리가 났다.

    “그러니까 들어오지 말랄 때 말을 들었어야지, 꼬맹이.”

    아리엘은 목소리를 바들바들 떨며 물었다.

    “왜, 왜 다른 사람을 안 들였어요?”

    “거슬려서.”

    그가 짧고 오만하게 대꾸했다.

    “오늘따라 인간들이 거슬려서, 죽여 버릴까 봐.”

    ‘…….’

    이유가 생명존중이라니 뭐라고 혼낼 수도 없었다.

    과연 진짜 목숨을 존중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새 아리엘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온 루시안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말했다.

    “그리고.”

    달콤한 그의 숨결이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루시안의 팔이 그녀를 뒤에서 안듯이 감싸자, 아리엘은 긴장해서 바짝 움츠러들었다.

    그 사이, 루시안의 손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셔츠를 느리게 빼내어 갔다.

    “내가 걸칠 걸 네가 들고 있는 것 같은데.”

    으으, 루시안 너무 유해해!

    아리엘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뒤편에서 루시안이 셔츠를 입는 천 소리가 사각사각 났다.

    “이제 봐도 돼.”

    아리엘은 안심해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바로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아, 아직 다 안 입었잖아요!”

    루시안의 셔츠는 아직 잠그지 않아서 앞이 열려있었다.

    그가 앞섶 단추를 잠그며,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봐도 된다고 했지 다 입었다고는 안 했어.”

    으윽. 아리엘은 주먹을 꾹 쥐었다.

    때려주고 싶어, 루시안!

    여유롭게 사냥복 재킷까지 가져간 그가 아리엘의 뺨을 한 번 잡고 흔들었다.

    “그리고 너, 자꾸 다른 것들 대신 이러는 거 그만둬.”

    가끔 드래곤의 피는 라카트옐의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었다.

    원래도 우월한 능력이지만 그럴 때면 유난히 민감해져서 쉽게 다른 것들이 거슬리곤 했다.

    물론 아리엘을 본 순간 그런 것은 다 상관없게 되어버렸지만.

    그의 말을 들은 아리엘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루시안이 삐딱하게 안 굴면 저도 안 이러죠.”

    그가 옷을 다 입은 걸 확인한 아리엘은 문밖으로 얼굴을 내놓고 말했다.

    “이제 괜찮으니까 다들 물러가세요.”

    잠시 안쪽 눈치를 살피던 베르토가 사용인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안심과 아리엘을 향한 감탄이 가득했다.

    루시안이 아리엘의 머리를 꾹 눌렀다.

    “꼬맹이 주제에.”

    아리엘은 그를 몰래 흘겨봐주었다.

    아직도 그의 반라를 본 것 때문에 얼굴이 뜨거웠다.

    “늦겠어요. 얼른 나가요.”

    아리엘이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그녀의 손목을 루시안이 스륵 낚아챘다.

    “잠시.”

    “……?”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짙어졌다.

    지독히 아름다운 악마가 짓는 미소 같았다.

    “자.”

    루시안이 제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네?”

    아리엘이 의아하게 눈만 굴리자, 그가 자신의 뺨에 댄 손가락을 톡톡 쳤다.

    아.

    그의 뜻을 알아들은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뽀뽀하라고, 설마?

    그녀가 머뭇거리자 루시안이 자연스럽게 협박했다.

    “4년치 입맞춤 빚. 잊었어?”

    “윽…….”

    결국, 그녀는 한껏 발돋움을 해 그의 뺨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입맞춤을 받은 루시안이 매혹적으로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새가 쪼는 것 같아.”

    억울함 가득한 눈을 한 아리엘이 물었다.

    “빚 하나는 없어진 거 맞죠?”

    끝내 루시안은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 * *


    사냥대회가 시작할 때가 오자 아리엘은 참가자들을 전송하러 나갔다.

    여기저기에서 각자 자신의 남편, 남동생, 오빠, 약혼자의 성공적인 사냥을 바라는 인사들이 오갔다.

    아리엘도 루시안을 배웅하기 위해 그 앞에 서 있었다.

    흑마 반카를 몰고 나온 루시안이 등장하자 주변의 시선이 확 모였다.

    사냥용 제복을 차려입은 그는 신의 조각품처럼 완벽했다.

    그의 근사함에 취한 여자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우아하게 말에 오른 루시안이 서늘한 눈매를 빛내며 아리엘을 불렀다.

    “아리엘라.”

    그리고 그는 아리엘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아리엘은 반카의 옆구리로 바짝 다가갔다.

    불길하고 요염하게 눈썹을 치켜올린 그가 몸을 숙여 한 팔로 아리엘을 반짝 안아 올렸다.

    “앗.”

    놀라는 그녀의 이마에 뜨거운 입술이 낙인처럼 내려앉았다.

    아리엘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녀의 발이 다시 땅에 살포시 닿아있었다.

    루시안이 비딱한 웃음을 지었다.

    “다녀오지.”

    주위에서 그들 부부를 지켜보고 있던 귀족 영애들이 몸을 배배 꼬며 비명 소리를 참았다.

    그들 눈에는 대공자 부부의 모습이 퍽 로맨틱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리엘은 루시안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문지르며 뺨을 붉혔다.

    ‘뭐야…… 자기 멋대로.’

    펑! 펑!

    마법 축포와 함께, 사냥대회가 시작됐다.

    신호탄이 터지자마자 루시안은 무서운 기세로 말을 몰아 제일 먼저 숲으로 달려 들어갔다.

    귀족 남자들이 우르르 루시안의 뒤를 따라 숲으로 사라졌다.

    루시안 전송을 마친 그녀는 마티어스가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대공자비님!”

    고개를 돌려보자,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아리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니스 영애?’

    그리고 유니스의 양옆에는…….

    놀랍게도 루실리온 후작과 제롬이 서 있었다.

    그들을 본 아리엘의 작은 얼굴이 굳어졌다.

    유니스는 후작과 제롬의 팔짱을 한쪽씩 끼고 그들을 아리엘 쪽으로 이끌고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가까이에서 후작과 제롬을 마주하게 된 아리엘은 잠시 숨이 막혀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릴 적의 트라우마가 생생히 살아나면서 온몸에 오한이 돌았다.

    아리엘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유니스가 반가워하며 말했다.

    “역시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게 맞을 것 같았어요.”

    아리엘은 작게 숨을 고르고 눈을 떴다.

    그녀는 최대한 앳된 목소리를 감추며 또박또박 말했다.

    “유니스 영애,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유니스가 악의라고는 없는 무해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제 의도를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대공자비님. 저는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진심을 보여드리고 싶은 것뿐이니까요.”

    제 가슴에 두 손을 포개어 얹은 유니스가 호소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께서 대공자비님께 사과하고 싶으시대요. 이렇게 직접 오시기까지 했잖아요.”

    그녀가 후작과 제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버지, 오라버니. 얼른 대공자비님께 사과하세요. 네?”

    아리엘은 더 이상 듣지 않고 돌아서려고 했다.

    후작과 제롬이 뉘우치고 있지 않다는 건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그들이 아리엘에게 사과를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후작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그래, 아리엘. 미안하구나.”

    아리엘은 얼어붙은 채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후작의 얼굴이 맞았다.

    후작이 비굴한 어조로 말했다.

    “예전에는 아비가 너에게 무심했지. 아내를 잃은 슬픔에 빠져서 그랬단다. 하지만 다 예전 일이지 않니. 우리 과거는 이만 잊자꾸나.”

    그는 말 잘 듣는 개처럼 유니스의 말에 따라 아리엘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옆에 선 제롬도 입을 열었다.

    “아버지 말씀이 맞다, 동생아. 어릴 때 내가 쳤던 장난 때문에 아직까지 토라져 있는 건 아니지? 다 네가 귀여워서 그런 거야. 관심의 표현이었어. 이제 앞으로 잘해주면 되지 않겠냐?”

    하지만 후작과 제롬의 사과를 듣는 아리엘의 마음은 흔들리기는커녕 더욱 차갑게 식어 내렸다.

    “…….”

    한때는 이런 말들을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었다.

    표현이 잘못되었을 뿐, 사실 아버지와 제롬의 마음속에는 딸과 여동생을 아끼는 마음이 조금쯤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아리엘은 그게 헛된 꿈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알고 있었다.

    더불어 저들의 사과도 진심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는 그냥 뒤돌아서는 대신 후작과 제롬의 얼굴을 똑똑히 눈에 담았다.

    “루실리온 후작님. 그리고 후작 영식.”

    아리엘의 부름에 후작과 제롬이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당신들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들과 나 사이의 미래는 없답니다.”

    아리엘은 담담한 어조로 사실을 짚어주었다.

    “난 당신들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관심도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이 과거에 내게 했던 짓이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녀는 차분하게 그들에게 일깨워주었다.

    “나는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았고,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알았다면 이제 돌아가 주세요.”

    아리엘의 말을 들은 후작과 제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잘라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듯했다.

    과거의 그녀처럼, 조금만 자기들 쪽에서 손을 내밀면 애정을 구걸하며 사과를 받아들일 거라고 착각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들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는 차에, 유니스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리엘을 향한 원망과 애잔함이 담겨 있었다.

    “낳아주신 아버지가 사과를 하시는데도 받아주지 않으시다니……! 어쩌면 제가 대공자비님의 인품을 잘못 본 걸까요?”

    아리엘은 유니스를 향해 차분하게 대답했다.

    “영애. 한 번만 더 나와 후작가를 관여시키려고 한다면 주인 자격으로 영애와 루실리온 가를 라카트옐 영지에서 내보내겠어요. 알아두길 바라요.”

    그녀의 말에 유니스가 억울한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리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던 유니스는 후작과 제롬의 팔에 끼고 있던 팔짱을 내팽개치고 허공에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붉은 머리를 빼돌리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주인님.”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에 소름 끼치게 끽끽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괜찮다.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가능할 거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음침하게 웃었다.

    “이번엔 내가 직접 갈 테니 말이다.”

    유니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인님.”


    * * *


    후작가 사람들을 잘라낸 아리엘은 마티어스가 있는 천막으로 돌아갔다.

    “오셨습니까, 아기 마님.”

    아리엘이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밝게 인사를 건넨 달튼이 다시 대화로 돌아갔다.

    마티어스는 달튼과 뭔가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아리엘은 의자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그녀의 몸은 워낙 가냘파서 양팔로 무릎을 감싸고 앉았는데도 의자의 좁은 공간이 넉넉했다.

    “…….”

    후작과 제롬을 마주한 것 때문에 아직도 아리엘의 얼굴은 핏기가 가신 상태였다.

    제대로 잘라낸 후인데도 마음이 수런거렸다.

    후작가 사람들의 거짓 사과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이제 아리엘에게는 조금의 의미도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다른 생각이었다.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은 어떻게 생각할까. 내 가족들에 대해서…….’

    지금 그녀의 성은 라카트옐이지만 17세가 되면 자동으로 그 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리엘은 다시 루실리온이라는 성을 쓰게 될 것이다. 후작과, 제롬과 똑같이.

    후작가에서 태어나 호적에 오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과 같은 패밀리 네임을 쓰는 가족들이 저런 사람들이라는 것이 암담했다.

    가족 때문에 루시안이나 마티어스를 실망시키기 싫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아리엘은 대공자비라는 엄청난 지위, 금고에 쌓인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한 번도 그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루시안과의 계약 기간 동안만 가지고 있다가 돌려줄 것으로 여겼기에 지위와 돈에 의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마티어스나 루시안과의 관계는…… 그렇게 쉽게 여길 수가 없었다.

    “아리엘…… 아리엘?”

    아리엘은 상념을 떨치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달튼은 천막 안에 없고 마티어스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

    “네?”

    아리엘은 둥근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힘이 빠진 것처럼 작게 대답했다.

    “아, 네…….”

    마티어스가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이리 가까이 와라.”

    그녀는 무뚝뚝한 듯 다정한 마티어스의 목소리에 왠지 울컥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열 살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마티어스의 옆자리에 앉자, 그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고, 왜 표정이 안 좋냐고 캐묻지 않고 그저 부드럽게.

    아리엘은 가만히 마티어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한참 동안 그의 손길을 받고 있노라니 마음속 응어리가 하나둘 풀리는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티어스가 울림이 있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리엘라. 그러고 보니 나와 루시안이 사이가 안 좋은 이유를 말해준 적이 없는 것 같구나.”


    * * *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떼고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티어스님.”

    마티어스는 자조하는 것처럼 쓰게 웃었다.

    “예전부터 궁금했겠지. 집사나 하녀장에게 물어봤을 거란 것도 안다.”

    “…….”

    침묵하던 아리엘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알렌은,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이 드래곤의 혈통을 가져서 그렇다고 했어요. 영역 동물의 피 때문에 그런 거라고요.”

    마티어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는 게 있기 때문이지.”

    이어진 그의 말에 아리엘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녀석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

    그가 오래전 일을 떠올리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길고 아름다운 흑발 머리가 폭포수처럼 마티어스의 어깨너머로 떨어졌다.

    “나는 루시안을 죽이려고 했다. 그것도 녀석이 완전히 무력한 상태일 때.”

    어째서, 라는 단어가 아리엘의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마티어스가 고개를 들고 형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갓 태어난 라카트옐이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단다.”

    그가 자신의 관자놀이에 집게손가락을 가져다 누르며 말했다.

    “[각인]이지.”

    각인. 아리엘도 아는 개념이었다.

    새끼 오리는 알에서 깨어나서 처음 본 생명체를 어미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 생명체에게서 모든 것을 습득하게 된다. 그게 각인이었다.

    “'에고'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거다. 드래곤의 에고는 인간의 영혼과 비슷해.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면 인간이 될 수 없듯, 드래곤도 마찬가지다.

    에고가 없으면 살아남지 못해.”

    마티어스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갓 태어난 드래곤에게 에고를 선사하는 방법은 부친의 각인뿐.

    하지만 나는 그 애가 태어났을 때 각인하기를 거부했다.”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각인.

    마티어스가 그것을 거부했다면 루시안을 죽게 내버려 뒀다는 말과 같았다.

    “비겁한 짓이었지. 끝내 후회할 선택이었고. 그러나 그 당시의 내게는 나름의 이유랄 것이 있었다.

    애초에 루시안이 생긴 것조차 내 의도가 아니었지.”

    아리엘은 소름이 올라온 자신의 팔을 꾹 잡았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의문이 마음을 떠돌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살아있잖아요?’

    그에 대답하듯 마티어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린 루시안 녀석은 각인을 하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애를 낳은 여자의 장례식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서 있었지.”

    전 대공비의 장례식 날!

    아리엘의 머릿속에 헥터가 해줬던 그 날의 이야기가 파편처럼 지나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캄캄한 날이었지요.’

    ‘저택에 사람은 없고 으스스한 바람 소리만 들렸습죠.’

    ‘우연히 안쪽 깊은 방으로 들어갔는데 아기가 있었습니다.’

    ‘근데 숨소리도 거칠고 곧 숨넘어갈 것처럼 아파 보이지 뭡니까. 주변에는 아기를 챙기는 사람도 없고요.’

    마티어스가 고통스러운 듯 이마를 문질렀다.

    “나는 저택 안에서 꺼져가는 녀석의 생명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루시안은 죽기 직전이었지. 그런데…….”

    그가 아리엘과 눈을 마주쳤다.

    “그 녀석은 살아남았다.”

    “루시안은 스스로 각인했어. 인간 중 가장 강한 존재, 소드마스터인 헥터를 매개체로 해서 말이다.”

    아리엘은 기억 속에서 헥터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아기를 들여다보니까 저와 눈을 딱 마주치는데 순간 등골이 오싹하면서 기가 쫙 빨리는 느낌이 났습죠. 그리고 진짜 이상한 일이 벌어졌는데…….’

    ‘갑자기 대공자님 눈동자 색이 바뀐 겁니다. 탁한 하늘색에서, 맑고 진한 푸른색으로요!’

    그때 그럼, 그게…….

    마티어스가 확신을 주듯 말했다.

    “혼자서 해냈으니 각인이라기보다는 [각성]이란 말이 맞겠지. 루시안은 홀로 에고를 각성해서 살아남았다.”

    아리엘은 퍼즐 조각이 하나하나 맞아들어가는 걸 느꼈다.

    예전에 루시안과 헥터에 대해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루시안한테 헥터는 중요한 사람인가 봐요.’

    ‘다른 것들에 비해서는.’

    ‘어째서요?’

    ‘라카트옐은 인간에게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아. 어떤 인간이든 평등하게 하찮지. 하지만 아무리 개미를 하찮게 여기는 사자라도, 자기 목숨을 건진 개미라면? 기억하겠지. 그와 나는 그런 거다.’

    ‘헥터가 루시안을 살려준 적이 있어요?’

    ‘그래. 그도 모르는 사이에.’

    헥터는 그 날 자신이 뭘 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주위에 있는 가장 강한 생명체를 매개로 드래곤의 에고를 각성해냈고,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은인이라고…….’

    마티어스는 아리엘의 얼굴에 깨달음의 빛이 떠오르는 걸 하나하나 관찰하다가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각성했기에 루시안은 보통의 라카트옐보다 훨씬 강해졌지.

    초대 암흑 드래곤 라키엘이 인간을 매개체로 해서 그 형상을 입은 것처럼 되었으니까.”

    낮은 목소리로 그가 덧붙였다.

    “대신 영영 나와의 연결은 끊어지게 되었다.”

    자책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녀석의 피에 흐르는 나를 느낄 수 있지만, 루시안은 나를 피붙이로 느낄 수 없어. 나는 용의 피 외에는 그 녀석에게 물려준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마티어스가 한숨을 쉬는 것처럼 나직이 말했다.

    “역대 라카트옐 중 가장 드래곤과 가까운 존재. 그게 루시안이다.”

    아리엘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물었다.

    “이제 의문이 좀 풀렸느냐?”

    그녀는 목에 걸린 것같은 덩어리를 겨우 삼키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왜…… 왜 각인하지 않으셨어요?”

    마티어스는 잠시 괴로운 듯 미간을 좁혔다가 평소의 서늘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아리엘을 향해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라카트옐로 사는 것이 끔찍했으니까. 블루 블러드 문이 뜰 때마다 고통이 찾아오는 것, 마수를 베고 또 베지 않으면 가라앉지 않는 피의 갈망,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내 아들에게까지 가길 바라지 않았다.”

    “…….”

    아리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를 더 가여워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자기 아들을 외면해서까지 이 고통의 굴레를 끊고 싶었을까?

    그리고 무력할 때 버림받아 죽어가고 있던 루시안은 또 얼마나 외롭고 아팠을까.

    눈물이 고인 눈으로 마티어스를 바라보자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리엘라.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와 루시안에게 실망했니?”

    아리엘은 입술을 꼭 깨물고 도리질을 쳤다.

    “아뇨, 그럴,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 아픔을 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제가 어떻게 실망할 수 있겠어요.”

    마티어스가 조용히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와 루시안 녀석도 마찬가지다.”

    아리엘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네?”

    마티어스가 유리 도자기를 만지듯 그녀의 뺨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우리도 네 가족에 대해 그렇다는 거다.”

    아리엘은 짧게 숨을 멈췄다.

    “루실리온 후작가의 사정에 대해 알게 된다고 해도 네가 달라지는 건 아니야. 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는 것도 아니지. 너는 조금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어.”

    “…….”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라카트옐의 어마어마한 비밀을 날 것 그대로 듣고 난 직후라서 더욱 마티어스의 말이 와 닿았다.

    “네가 가족 일을 숨기고 싶은 마음도 이해한다. 숨기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그래도 나와 루시안을 불안해하지는 말아라.”

    아리엘은 결국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날 위해 이 얘기를 해주시려고 비밀까지 꺼내신 건가?

    ‘불안할 때 그렇게 말해주는 건…… 반칙인데.’

    조그만 가슴 안이 뜨뜻해졌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그녀는 손을 꼭 말아 쥐고 참으려 애썼다.

    그런데 그 때, 묵묵히 아리엘을 보고 있던 마티어스가 불쑥 몸을 움직였다.

    곁에 있던 아리엘은 마티어스가 굳은 것을 느끼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리엘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웬 일로 베르토가 기척도 내지 않고 뛰어 들어왔다.

    “대공님, 큰일 났습니다! 밖에……!”

    그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마수가, 가고일 떼가 습격을!”

    마티어스가 놀라운 반응 속도로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 멀리에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가고일이라고?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가고일은 날개가 달린 네발 마수로, 용 계열 마수 중 하나다.

    와이번처럼 독이 있지는 않지만 무리 지어 다니며 공격해 파괴력이 엄청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아리엘이 배운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용 마수가 인간의 영토까지 내려온 건 까마득한 몇천 년 전.

    과거 그녀가 겪었던 삶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뭔가 잘못됐어.’

    미래가 바뀌었다.

    곧장 나가려던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돌아본 뒤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엘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꼼짝 말고 있어라.”

    그리고는 밖의 기사들에게 냉기 서린 음성을 냈다.

    “아리엘을 목숨처럼 지켜라.”

    그 말을 마친 마티어스는 베르토와 함께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람의 힘으로는 용 계열 마수를 공격하는게 불가능했기에, 마티어스가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용 마수는 마법, 무력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오직 라카트옐의 힘으로만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아리엘은 두 손을 모아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 * *


    가장 먼저 출발한 루시안은 누구보다 먼저 숲 깊숙이에 도착했다.

    그는 이 숲에서 가장 큰 사냥감을 찾을 때까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루시안은 흑마를 난폭하게 몰며 포식자의 기세를 내보냈다.

    이 숲에서 가장 큰 맹수도 그에게는 생쥐 한 마리보다 못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가장 큰 것. 아리엘을 올해의 레이디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

    그녀의 곁을 맴도는 수컷들 중 그가 가장 우월하다는 걸 증명해줄 만한 것.

    힘에 굴복하는 인간 남자들에게 두려움과 경고를 확실히 줄 수 있는 것을 잡아갈 것이다.

    그들이 감히 아리엘 옆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한참 숲 안쪽으로, 안쪽으로만 계속 내리달리던 루시안은 문득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예민한 그의 감각에 뭔가 이상한 기운이 감지됐다.

    “마수?”

    보통의 짐승에게선 타락의 더러운 기운을 느낄 수 없다.

    지금 느껴지는 건 분명 음침하고 더러운 마수의 기운이었다.

    루시안은 오만함이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성마르게 쓸며 씹어뱉었다.

    “그럴 리가.”

    라카트옐이 마수 사냥을 하는 고대 숲과 북쪽 바위산은 지금 사냥대회가 열린 영지 숲과 한참 떨어져 있었다.

    겨울도 아닌 여름에 마수가 내려올 리 없었다.

    아니, 나와 마티어스가 이곳에 있는 한 마수가 감히…….

    그 때 숲 바깥 멀리서 희미한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루시안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아리엘!’

    그의 손이 흑마 반카의 고삐를 세게 내리쳤다.

    반카는 주인의 뜻에 따라 날듯이 그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4권 끝.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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