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장 (11/23)

11장




황태자비 선발대회에서 사건을 겪은 아리엘을 위해 수잔과 하녀들이 작은 티 파티를 열어주었다.

초대받은 손님은 언제나처럼 다이아나와 세실 뿐이었지만, 이번 파티는 조금 특별했다.

“어떤 파티인데요, 수잔?”

눈까지 비단 천으로 가린 채 유리 온실로 들어간 아리엘은 수잔의 손을 꼭 잡고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다.

수잔은 아리엘에게도 파티의 정체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자아. 다 왔어요, 아기 마님.”

아리엘은 눈을 가렸던 천을 풀고 앞을 보았다.

그리고 조그만 입술 사이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아.”

온실 안에 예쁜 레이스 천으로 캐노피가 처져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는 티 테이블이 우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백합 화병과 함께 가득 차려져 있는 것들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잔이 부드럽게 말했다.

“카나페 티 파티랍니다.”

원래 티 파티에는 차와 함께 2단 혹은 3단 트레이에 티푸드가 함께 나오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 파티는 그 대신 테이블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유리 원판이 놓이고, 그 위에 오밀조밀한 도자기 그릇들이 가득 올라가 있었다.

우유색 그릇들 안에는 각종 잼, 메이플 시럽, 향긋한 오일, 꿀, 크림치즈, 으깨어 생크림을 섞은 단호박 등 스프레드 류가 담겨있었다.

또, 푸른색 그릇 안에는 말린 과일, 치즈, 훈제 햄, 통통한 새우, 예쁘게 썰린 생과일, 연어, 허브잎, 견과류 등의 재료가 나뉘어 담겨있었다.

수잔이 얇고 바삭하게 구운 비스킷이 소담스럽게 담긴 그릇을 중앙에 놓아주었다.

“손님들하고 아기 마님 취향에 맞게 만들어 드셔보세요.”

“…….”

아리엘은 왠지 뭉클해져서 수잔을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수잔. 이런 거, 괜찮은데…….”

수잔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아리엘을 마주 끌어안았다.

“이번에 아기 마님이 잘못되시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아무 상처 없이 무탈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빛의 여신님께 감사 기도도 드렸지요.”

“수잔…….”

어디가 다치거나, 아픈 것도 아닌데 수잔을 걱정시킨 것 같아서 마음이 찌르르 아파왔다.

수잔은 얼른 의자를 빼서 아리엘을 앉힌 뒤 뺨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친구분들과 재미있게 노세요. 아셨지요? 전 그게 제일 행복하니까요.”

“네, 수잔. 재미있게 놀게요.”

아리엘은 수잔의 허리를 다시 한번 더 꼭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으며 웅얼거렸다.

수잔이 자리를 떠난 뒤 친구들이 도착했다.

준비된 티 파티를 본 다이아나와 세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만들어진 카나페를 먹은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친한 친구들과 직접 만들어 먹어보는 건 그들도 처음이었다.

다이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손을 모아쥐었다.

“아, 너무 낭만적이야. 아리엘.”

아기자기한 것을 할 때마다 늘 어색해하는 세실도 얼굴을 붉히며 테이블 가득한 티파티 재료들을 바라보았다.

“서로 만들어 줄 수도 있겠다. 이런 식이라면.”

“그렇겠네. 세실 넌 가끔 천재 같다니까!”

“다이아나 모니카, 경고하는데 네 카나페에 고추 피클이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다면……”

“아, 알았어, 알았다구.”

세 친구는 자리에 앉아 까르르 웃으며 떠들었다.

그리고 찻잔에 티와 각설탕을 넣은 뒤 서로에게 먹일 핑거푸드를 전투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 * *


카나페 티 파티를 마친 후.

아리엘은 접시에 유리 덮개를 얹은 채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친구들과 서로 잔뜩 만들어 준 뒤, 아리엘은 유독 예쁘게 만들어진 것들을 따로 빼 두었다.

‘수잔에게 가져다 줘야지.’

몰래 그런 생각을 하며 뿌듯해하는 그녀를 발견한 사용인들이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짓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놀라며 앞다투어 아리엘의 앞을 막아섰다.

“아기 마님, 어디 가시나요?”

“세상에. 직접 계단을 오르시다니! 위험하셔요.”

“손에 들고 계신 건 뭔가요? 제가 대신 들어 드릴게요.”

“직접 하시는 건 안 돼요, 안 돼.”

들켰다. 아리엘은 카나페 접시를 등 뒤로 숨기며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파티장에서 쓰러졌던 이후로 사용인들은 난리를 피우며 아리엘을 과잉보호하려 했다.

아리엘이 계단을 오르거나, 물건을 드는 사소한 행동마저도 위험한 일로 간주하고 매우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그래서 몰래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었는데……!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며 사용인들이 다가왔다.

“계단은 제가 업고 올라가 드릴게요.”

“접시는 제가 들고요.”

“아기 마님께선 아무것도 하시지 않아도 돼요.”

아리엘은 입술을 꾹 다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미안해요, 다들.

하지만 전 열네 살이라고요.

혼자 계단 정도는 오를 수 있단 말이에요…….

끝내 아리엘은 이동 마법으로 도망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 * *


무사히 도망을 친 아리엘은 수잔의 방으로 찾아갔다.

“수잔, 이거요.”

아리엘이 수줍게 카나페 접시를 내밀자 수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나.”

수잔은 한참을 말없이 아리엘이 만들어온 카나페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물기 어린 웃음소리를 낸 그녀가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매만졌다.

“우리 아기 마님, 손끝이 야무지시기도 하지.”

수잔은 아까워 죽겠다는 듯이 카나페를 하염없이 구경만 했다.

“수잔, 나 초조해지려고 해요.”

아리엘이 조심스레 재촉하자 수잔이 촉촉해진 눈으로 카나페를 딱 한 개만 집어 들었다.

“하나 이상은 못 먹겠네요. 보기만 해도 아깝고 예뻐서.”

그녀는 제일 작은 것으로 한 개만 먹고는 아리엘에게 접시를 돌려주었다.

붉은 루비를 닮은 이 소녀는 애정을 부어주면 그 이상의 애정을 되돌려 주곤 했다.

그런 아리엘을 애틋하게 바라본 수잔이 부드럽게 권유했다.

“대공님께도 가져다 드려보세요. 좋아하실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살짝 망설였다.

“정말, 좋아하실까요?”

나름대로는 예쁘게 만들었지만 마티어스님 앞에 보이기는 왠지 창피한걸요.

하지만 수잔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저도 이렇게 좋은데, 대공님은 얼마나 더 좋으실까요?”

그렇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수잔의 말에 힘입어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집무실로 찾아가는 중이었다.

똑똑.

아리엘이 살며시 노크하자 집무실의 문이 스륵, 저절로 열렸다.

그녀는 문틈으로 고개만 쏙 집어넣었다.

“마티어스님?”

책상 앞에 앉아서 한 손으로 서류를 들고 있던 마티어스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엄한 인상의 서늘한 얼굴이 느슨히 풀어졌다.

“아리엘라.”

아리엘은 무거운 접시를 살짝 마나로 지탱하며 문을 열었다.

마티어스가 혀를 차며 다가오더니 부드럽게 문을 받쳐주었다.

“무거울 텐데.”

자리에 앉은 뒤, 아리엘은 조심스레 눈치를 보았다.

“마티어스님, 혹시 출출하지 않으세요?”

아리엘의 손에 들린 접시를 본 마티어스가 슬쩍 웃으며 입매를 만지작거렸다.

“글쎄. 그런 것도 같고.”

“정말요?”

아리엘은 반색하며 유리 덮개를 열었다.

왠지 의도를 다 읽혀버린 것 같은 기분이지만, 그냥 느낌이겠지?

그런데 덮개를 열고 보니 아까는 예뻐 보였던 카나페가 하나도 안 예뻐 보였다.

아리엘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좀 더 예쁘게 만들걸…….’

어쩌면 마티어스님이 너무 아름다우신 탓에 카나페가 안 예뻐 보이는 걸까?

그녀는 눈에 힘을 주고 열심히 골라, 제일 맛있고 예뻐 보이는 카나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티어스님은 평소에 날것을 안 좋아하시니까, 연어는 안 되고.’

짭짤한 치즈와 숙성 햄, 견과류, 로즈마리잎에 크랜베리가 올라간 카나페를 집은 아리엘은 조심조심 들어 마티어스에게 가지고 갔다.

“드셔보실래요? 제가 만든 거예요.”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마티어스가 잠시 동작을 멈춘 채 그녀를 응시했다.

“네가…… 직접 만든 거라고?”

그는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서늘한 인상의 아름다운 얼굴이 굳어진 채 아리엘과 카나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겨우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네, 요리라고 할 만한 건 아니지만…… 처음으로 만든 거니까…….”

어떡해. 마티어스님이 싫다고 하시면 어떡하지?

그렇게 아리엘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찰나, 마티어스가 스르르 고개를 숙였다.

마티어스의 긴 흑발이 흘러내려 아리엘의 팔목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가 아리엘의 손에서 작은 카나페를 받아먹었다.

“……!”

마티어스가 손으로 받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아리엘은 깜짝 놀랐다.

그녀가 만든 카나페를 입에 넣은 마티어스가 흡족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맛있구나.”

‘아, 다행이다…….’

마티어스가 맛있게 먹어줘서 안심한 아리엘은 고개를 숙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마티어스가 큰 손으로 아리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리엘라, 너는 디저트를 좋아하지.”

그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옆 나라 줴르 왕국에 초콜릿 조각사들이 있다더군.”

“초콜릿 조각사요? 신기해요.”

“초콜릿으로 건물이나 조각상을 만든다던데…….”

마티어스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어떠냐. 그 나라 디저트 장인들을 통째로 사줄까? 너만을 위한 조각들을 만들도록.”

응?

가만히 수줍게 쓰다듬는 손길을 받던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그거 왠지 좀 위험하게 들리는걸요?

일단 사람은 그렇게 막 사올 수 있는 게 아니고…….

아리엘은 뭔가 불길한 마음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라카트옐 남자들이라면 무슨 무서운 짓을 해버릴지 몰라.

“아뇨! 괜찮아요. 그냥 나중에 한 번 구경만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마티어스가 매우 아쉬운 듯 섬세한 미간을 좁혔다.

이미 그는 초콜릿 조각사들을 납치해 와 아리엘을 위한 초콜릿 분수대를 제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숨겨야겠군.

대신 그는 아리엘의 머리를 여러 번 쓰다듬었다.

평소 쓰다듬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이.

아리엘은 수줍은 기분에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카나페를 하나 더 집어 마티어스에게 건넸다.

“조금 더 드세요.”

그때였다.

낮고 첨예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내 입도 비어있는 것 같은데.”

앗?

아리엘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루시안이 마티어스의 집무실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루시안.”

조각 같은 얼굴을 구긴 그가 민첩하게 다가와 아리엘을 마티어스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제 몸에 붙여놓았다.

“내 몫은?”

앉자마자 성마르게 묻는 그의 말에 아리엘은 눈만 깜박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아. 루시안도 먹어요.”

아리엘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어쩌지, 큰일이야. 루시안까지!

이럴 줄 알았다면 진짜 진짜 예쁘게 만들어올 걸 그랬어.

그런데 루시안이 짙은 푸른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되물었다.

“그냥?”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져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냥이 아니면……?

대답 대신 그가 그녀의 손목을 쥐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리엘의 손에는 방금 마티어스에게 건네려고 했던 카나페 하나가 들려있었다.

아리엘의 손을 느긋하게 제 앞으로 끌고 온 루시안이 오만한 눈빛으로 시선을 맞춰왔다.

‘어어…….’

그리고 그가 입으로 그녀의 손에 든 카나페를 베어 물었다.

루시안의 붉은 입술이 비스듬히 비틀렸다.

“이렇게 줘야지.”

마치 그녀가 그에게 먹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루시안의 색기 어린 외모가 더해지자 그 행동은 더할 나위 없이 야살스럽게 보였다.

자의로 한 행동이 아니었음에도 아리엘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루시안은 정말…….’

이렇게 부끄러운 행동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역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요?

“……좋은데.”

루시안이 배부른 맹수처럼 느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날카로워서, 제 입술을 훑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위험해 보였다.

아리엘은 일단 루시안이 그녀의 카나페를 잘 먹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런데 그때 그가 아리엘의 카나페 접시를 소드 마나로 끌어당겨 제 손에 넣었다.

“이만 가지.”

네에?

아리엘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마티어스님께 드리려고 온 건데요?”

그녀의 말을 들은 루시안이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는 모습이 오싹함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로 충분하지 않나? 난 내 아내가 만든 걸 다른 사람이랑 나눌 생각 따위 없는데.”

그때, 가만히 상황을 관조하던 마티어스가 나섰다.

“너야말로 하나로 만족하는 게 낫겠군. 아리엘이 준 것이라면 나도 양보할 수 없으니.”


그가 자신이 아리엘에게 받았던 선물들을 보관한 마법 장식장을 가리켰다.

“보다시피 이것도 박제해서 수집해놓을 생각이라.”

마티어스의 눈빛이 단호하게 빛났다.

“무려 아리엘이 '처음' 만든 요리니까 말이다.”

브루노어가 특수 제작한 마법 장식장에 넣으면, 안에 있는 물건이나 음식이 전혀 상하지 않았다.

‘잠깐,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아리엘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라카트옐의 수집욕은 대대로 유명했다.

하지만 마티어스대에 이르러서는 그 수집욕이 유독 아리엘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마티어스의 장식장 안에는 아리엘이 처음 그린 그림, 처음 접은 종이배, 처음 놓은 자수 등등이 가득 자리 잡은 채였다.

그것을 본 루시안이 베일 듯이 날카로운 살기를 내보냈다.

“다른 것에게 갈 바에야 차라리 태워 없애버리겠어.”

당연하게도, 수집욕이 있는 건 마티어스만이 아니었다.

루시안과 마티어스는 서로 무감하고 차가운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리엘을 위해 시에나 왕국을 멸망시킬 땐 놀랍도록 마음이 맞았던 두 남자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둘에게서 흘러나온 난폭한 기세가 집무실 안을 가득 채우며 어른거렸다.

그사이에 낀 아리엘은 자그만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저기요, 거기 있는 거 다 제가 만든 건데요…….’

그리고 전 이거, 먹으라고 만들어 온 거란 말이에요…….

아리엘은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수집은 금은보화나 귀한 고서적을 하면 되잖아요, 이 바보 라카트옐 남자들.

결국, 그녀는 루시안의 손에서 카나페 접시를 답삭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두 남자 가운데에 서서 또박또박 말했다.

“이, 이건 제가 처음으로 만든 거니까 제 마음대로 할래요.”

두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아리엘은 미간을 꾹 모으고 카나페를 집어들어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입에 각각 물려주었다.

사이좋게, 하나씩.

얼결에 그녀에게서 카나페를 받아먹은 남자들이 공격적인 기세를 움찔 누그러뜨렸다.

아리엘은 조금 안심하며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종긋한 입술이 또랑또랑 말을 내보냈다.

“앞으로 두 분, 뭐 먹을 땐 싸우면 안 돼요. 제가 이 집 안주인으로 있는 한은요.”

루시안이 불만스러운 신음소리를 냈지만, 아리엘은 또 다른 카나페를 들어서 그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서로를 노려보면서도 더 이상 공격적인 기세를 뿜지 않는 둘을 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역시 간식이 최고야.’

간식의 순기능을 하나 더 발견한 아리엘은 기분 좋게 카나페 하나를 자신의 입에 쏙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크림치즈와 향긋한 연어의 맛이 입안에 번졌다.

아리엘의 하얀 뺨에 미소가 어렸다.

‘행복해.’


* * *


다음날 루시안은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18세에 마치는 요하네스 아카데미의 마지막 두 학기는 무척이나 버거운 과정이라고 들었다.

‘과연 그게 루시안에게도 해당이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흘쯤 푹 쉬며 몸을 회복한 아리엘은 외출을 준비했다.

정보 길드인 나잇 워커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열 살에 첫 거래를 한 이후, 그녀는 줄곧 나잇 워커의 우두머리인 카디나 아딘과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대공자비라는 신분 때문에 자주 방문할 수는 없었지만, 아리엘은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아지트를 찾았다.

4년 전에 갓 나잇 워커를 물려받았던 정열적인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 카디나는 이제 어엿한 베테랑이 되어있었다.

평소처럼 호위를 떼어놓고 마도구를 챙겨서 외출하려던 아리엘은 곧 호위 기사들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안 됩니다, 아기 마님. 저희를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예. 밀착 호위를 하라는 명을 받았습죠.”

아무래도 마티어스나 루시안이 그녀의 안전을 걱정해서 호위를 떼놓지 못하게 한 것 같았다.

무도회에서의 일 때문이겠지.

“음, 알겠어요.”

아리엘은 무리하게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정보 길드를 이용한다는 걸 숨기고 싶긴 했지만, 모두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헥터와 랄프는 나잇 워커의 아지트까지 그녀를 안전하게 호위했다.

도착해서 암호를 말한 아리엘은 곧장 카디나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녀가 푹 눌러쓰고 있던 까만 망토를 벗자, 망토 속에서 스칼렛 레드의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과 도자기 같은 흰 피부가 스르르 드러났다.

아리엘을 오랜만에 만난 카디니가 화색을 띠었다.

아리엘도 미소를 지으며 카디나를 바라보았다.

“아리엘님! 마침 뵙고 싶을 때 오셨습니다?”

“무슨 말이야?”

능글거리는 카디나의 인사에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카디나가 저렇게 즐거운 표정을 지을 때는 괜찮은 정보를 건졌을 때뿐이었다.

카디나가 사방으로 뻗치는 오렌지빛 머리를 대충 묶고는 자리를 권했다.

“아리엘님에 대해서 지금 소문이 짜하던데요! 정보가 수도 없이 들어왔거든요.”

그녀의 올리브색 눈이 반짝 빛났다.

“세상에, 마법사셨다면서요?”

아, 그거.

무도회에서 마법 능력을 펼쳤을 때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소문이 벌써 다 퍼졌구나.

“그렇게 난리야?”

“제 정보원들이 하나같이 중요 정보 표시를 달아서 보내왔으니까요. 목격자도 많고, 사건도 사건인지라. 지금 가장 뜨거운 정보라고요?”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법사인 건 맞아. 하지만 오늘은 그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야.”

카디나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음…… 그 정보 덮으려고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 오늘은 좀 특별한 의뢰를 넣으려고.”

아리엘은 오늘 정보 길드에 온 목적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올해는 그녀가 열네 살이 된 해였다.

과거의 삶에서는 그녀가 악당 무리에게 팔렸던 해고, 조종당한 채 녹스 남작을 죽이면서 그녀의 삶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한 해였다.

워낙 충격적인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났기에 아리엘은 14세 때의 일들은 꽤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 중 하나를 바꿀 생각이었다.

아리엘의 특별한 의뢰가 뭔지 궁금해진 카디나가 재촉했다.

“무슨 의뢰길래 뜸을 들이십니까?”

아리엘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디나. 한 달쯤 후에 눈 위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찾아와서 정보를 팔라고 할 거야.

의뢰는 받되, 핵심 정보는 숨겨. 그리고 나한테 그 정보가 뭔지 알려줬으면 해. 이게 내 의뢰야.”

“…….”

카디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잇 워커의 우두머리인 카디나는 본능적인 직감이 뛰어났다.

지금껏 그녀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방금 아리엘이 내놓은 의뢰에서 매우 위험한 기운이 풍기고 있다고.

카디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초조하게 두드렸다.

“제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요?”

“설명하기 어려워.”

“그럼, 제가 얻을 수 있는 대가는? 그 흉터를 가진 사내보다 더 큰 금액을 부르실 건가요?”

아리엘은 고요히 고개를 저었다.

“대가는 정보로 치를게. 만약 내 정보가 틀리다면 이 의뢰는 무시해도 좋아.”

카디나는 입맛을 다셨다.

사실 그녀는 돈보다 정보를 더 좋아했다.

이 일은 정보를 탐닉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민하던 카디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어나 볼까요.”

아리엘은 찬찬히 카디나의 얼굴을 살폈다.

항상 쾌활하고 자유분방하며 능글거리는 것 같지만, 그녀의 얼굴엔 어딘가 그늘이 있었다.

아리엘은 심호흡을 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비밀 가옥의 위치를 옮겨야 해. 며칠 안에 습격을 받을 거야.”

“……!”

카디나가 경악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잠시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꽉 쥔 채 서 있던 그녀는 간신히 방 안의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다들…… 나가 봐.”

시종들이 눈치를 보며 나가자, 카디나는 방을 한 바퀴 빙 돌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리엘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제게 비밀 가옥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

아리엘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과거 ‘그’는 나잇 워커를 손에 넣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우두머리를 알아내기 위해 나잇 워커의 정보원들을 여러 명 죽였고, 거짓 정보를 뿌려 내부를 흔들려고 했다.

운 좋게 카디나의 정체를 알아낸 후에는 나잇 워커를 마음대로 휘두를 방법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그’는 카디나의 가족을 잡고 협박했다.

아리엘은 그 일에 끼지 않았지만 분노에 찬 카디나가 가족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걸 몇 번이나 들어서 내막을 알고 있었다.

“남동생이 있는 거 알고 있어. 비밀 가옥은 그 애 때문이겠지.”

아리엘이 조심스레 말하자 카디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과거에 아리엘이 알던대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카디나가 체념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저희 같은 정보상에게 개인적인 정보는 치명적인 약점이죠. 사랑하는 것을 들키면…… 뺏기거나 협박당하기 쉬우니까요.”

카디나가 속한 아딘 가문은 자질이 보이는 고아들을 데려다가 자신들의 사람으로 길러서 세상에 내보내는 집단.

그 아딘 가문에는 금기가 한 가지 있었다.

바로 피가 섞인 친혈육을 만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딘 가문은 가문을 곧 가족으로 여겼다.

그래서 아딘의 딸이나 아들이 친부모나 친형제를 찾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보 길드를 운영하는 카디나는 우연히 친혈육을 찾게 되었다.

아주 어릴 적 헤어진 남동생이었다.

원래의 규칙대로라면 찾았어도 외면해야 했으나, 카디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남동생이 많이 아픈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카디나는 결국 아픈 남동생을 데려다 비밀 가옥에 숨겼다.

충성스러운 부하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카디나는 아리엘이 이 일을 알게 된 것이 라카트옐 대공가의 정보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딘 가문이 알게 되면 전 죽습니다. 동생도 죽겠죠. 습격은…… 아딘 가문입니까?”

“아니, 하지만 위험한 자들이야. 최대한 빨리 남동생을 대피시켜. 그리고…… 내가 말한대로 비밀 가옥이 습격받으면. 내 의뢰를 들어줘.”

“…….”

카디나는 이 의뢰에서 자신이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리엘의 의도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도우려고 한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좋습니다. 속는 셈치고 믿어보죠.”

아리엘은 안도감에 미소지었다.

과거 카디나의 남동생은 ‘그’의 수하들에게 습격을 받아 납치되었었다.

그들은 몸이 약한 소년에게 억지로 미량의 독을 먹였다.

일정 시간마다 해독제를 먹어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독이었다.

남동생의 생명을 볼모로 잡힌 카디나는 ‘그’의 말을 뭐든 들어줘야 했다.

아딘 가문에 알려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아딘 가문은 가장 먼저 카디나와 남동생부터 죽일 테니까.

‘그’는 그때부터 나잇 워커를 마음대로 주무르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했었다.

‘그렇게 놔둘 순 없어.’

아리엘은 지금부터 나잇 워커가 ‘그’의 손에 들어가는 걸 막고, 카디나와 카디나의 남동생을 지옥에서 건질 생각이었다.


* * *


집에 돌아온 아리엘은 수잔이 유리잔에 한 가득 따라온 시원한 딸기 라임 티를 마신 뒤 정원으로 나갔다.

새로 심은 꽃이 만발한 정원을 타박타박 걸으며 아리엘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마법사라는 소문이 그렇게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는데.’

아리엘의 제안을 받아들인 카디나는 서비스 차원으로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들려주었다.

무도회에서 아리엘이 마법을 쓰는 장면을 본 사람은 상당수였다.

그중에는 황실 소속의 마법사들도 있었다.

황실 마법사들은 아리엘의 실력에 깜짝 놀랐다.

원소 마법사는 거의 보기 힘든데다, 고위 클래스 마법인 에켈레네 주문까지 쓸 수 있는 마법사는 더욱 드물기 때문이었다.

이 일이 귀족계에 불어온 바람은 만만치 않았다.

지금까지 제국의 귀족 영애들은 마법 재능을 타고 나도 몰래 숨기며 살았다.

‘마법사 자체가 천대받는 건 아니었지만, 여자아이가 마법을 쓰는 건 좋지 않은 취급을 받았지.’

귀족 영애들의 삶이란 얌전하고 조신하게 집안일이나 배우다가 시집가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귀족 남자들이 마법사 아내를 꺼려했기에 마법 재능은 시집가는 데에 걸림돌이 됐다.

그런데, 다른 가문도 아니고 라카트옐 가의 어린 대공자비가 마법사였던 것이다!

라카트옐 대공가는 제국의 모든 귀족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공가를 우러러보았다.

그래서 어린 소녀인 아리엘이 마법사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귀족들은 감히 그걸 두고 나쁘게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로 마법을 쓰는 여자아이들에 대한 귀족들의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덮어놓고 쉬쉬했다면, 이제는 딸이 마법사임을 숨기지 않으려는 귀족도 생겨나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마법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했지.’

아리엘이 마법사임이 밝혀지자, 예전 ‘안주인 맞이’ 티 파티에 왔던 영애들 중 하나가 이야기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대공가에 갔을 때 아주 아름다운 마법등(lamp)을 본 적이 있어요!’

‘어머, 그럼 그건 대공자비님이 만드신 건가?’

‘세상에, 로맨틱해라. 제 로망이 그런 마법등을 머리맡에 놓고 자는 거랍니다.’

수도에 있는 마도구 상점에는 마법등에 대한 문의가 빗발쳤다.

하지만 마탑의 마법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점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리엘의 마음은 꽤나 복잡해졌다.

‘마법등은 내가 아니라 히스가 만든 건데…….’

히스가 실력을 인정받고, 칭찬받는 건 기쁘지만 그 공을 자신이 대신 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이 일에 대해서 다이아나랑 상의해봐야겠어.’

귀족 사회에 능통한 다이아나라면 분명 해답을 알 것이다.

생각에 빠져 걷던 아리엘은 관상수 사이에서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고 빙긋 웃었다.

“히스.”

정원사 우즈가 잘 다듬어 놓은 관상수 뒤에서, 갈색 머리에 금안을 가진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스가 툴툴대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주위도 안 보고 걸어? 다칠 수도 있잖아.”

아리엘과 히스는 함께 정원 뜰을 거닐기 시작했다.

한참 다른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히스가 불쑥 물었다.

“근데 대체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뭔 일이 있었길래 대공자…… 가 시에나 왕국을 날려버린 거냐고.”

“아, 그게…….”

아리엘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클라리스 공주가 루시안에게 반했던 것, 무도회 마지막 날에 칼을 들고 위협했던 것, 아리엘이 마법을 써서 벗어난 것까지.

그때 돌연 히스가 발걸음을 멈췄다.

“워터 바운드를 했는데도 칼을 든 손만은 움직이는거야. 그래서…… 어, 히스?”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제자리에 멈춰 선 히스가 홱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엔 분노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어? 황궁에는 마법사도 있고, 근위병들도 많잖아.”

“그야…….”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여자애 하나를 못 보호할 수가 있냐고!”

갑자기 흥분한 듯 보이는 히스 때문에 아리엘은 놀란 눈만 깜박거렸다.

“왜 그렇게 화를 내?”

씩씩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히스가 울컥한 듯 대꾸했다.

“몰라서 물어?”

“당연하지.”

“잘못하면 네가 다쳤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거기 내가 있었다면……!”

숨 막힐 듯이 말을 쏟아낸 히스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그녀를 향해 서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더니 이내 휙 돌아서서 도망가버렸다.

아리엘은 타이밍을 놓쳐 그를 붙잡지 못했다.

“히스……?”

그녀는 히스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멍하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방금 뭐였지?

요즘 들어 그가 감정 기복이 심하긴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것 같았다.


* * *


며칠이 지난 뒤 카디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최대한 빠르게 카디나와 만난 아리엘은 그녀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며칠 전 아리엘의 의뢰를 받은 카디나는 반신반의하며 아픈 남동생을 은밀하게 다른 곳으로 옮겼다.

처음 고른 비밀 가옥이 정말 좋은 은신처였기 때문에 속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카디나는 원래의 비밀 가옥 옆에 정보원들을 심어두고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통에 안심하던 차, 일이 벌어졌다.

원래의 비밀 가옥이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은 것이다.

정확히 카디나의 남동생을 노렸던 듯, 괴한들은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후퇴해서 사라졌다.

소식을 들은 카디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었다니…….’

솔직히 반쯤은 아리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미래를 보고 오기라도 한 듯 아리엘의 경고가 맞아떨어지자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아리엘을 앞에 둔 카디나의 눈에 존경심이 떠올랐다.

“역시…… 라카트옐 가의 힘입니까?”

“그건 아니야. 미안하지만 정보의 출처는 말해줄 수 없어.”

“으윽, 궁금해 죽을 지경이지만 일단은 참죠.”

“그럼 내 의뢰를 들어주는 거지?”

카디나가 호쾌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비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눈 위에 흉터가 있는 놈이 오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핵심 정보는 숨기겠습니다.”

자기만 믿으라는 듯 카디나가 가슴께를 툭툭 쳤다.

아리엘은 살짝 미소짓고 말했다.

“혹시 무력이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몰라. 준비해 둬.”

“예, 그러죠.”

카디나는 무력에 대해선 이미 훌륭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아딘 가문 출신들은 언제 어디서든 살아남는 일에 특출났다.

형제자매들 중 암살자 집단도 있으니 무력은 걱정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리엘은 양손을 깍지 끼어 잡았다.

부서질 것 같은 얇고 흰 손가락들이 겹쳐졌다.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 절대 꼬리가 밟혀선 안 되는 일이니까.”

카디나는 아리엘이 맡긴 의뢰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냥 무조건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아리엘님이 하시는 일이니 뭔가 이유가 있겠지.’

아리엘 덕에 남동생과 자신의 목숨을 살린 카디나는 그녀를 믿기로 마음먹었다.

카디나의 표정이 결연하게 바뀌었다.

“좋습니다.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보죠.”


* * *


카디나와의 일을 처리하고 온 아리엘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진짜로…… 그대로 이루어졌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측한 것이었지만, 그대로 일이 벌어지니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끔찍한 과거에서 돌아온 아리엘은 루시안과 만나며 삶을 바꾸었다.

과거 그녀는 지금의 나이인 열네 살까지 후작가 다락방에서 학대를 당하며 가족들에게 착취당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버지에게 맞아서 불구가 되지도 않았고, 자신을 해치면서 마법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열일곱 살에도 열두 살짜리로 보이던 미성숙한 몸은 차근차근 소녀다운 성장 단계를 밟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옆에 있었다.

‘내 삶은 바뀌었지만, 다른 건 안 바뀌었어.’

카디나의 비밀 가옥이 과거와 똑같이 습격받은 걸 보니 변한 것은 자신뿐인 듯했다.

아리엘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를 심란하게 하는 것은 과거에 자신이 라카트옐 가로 침입했던 그 사건이었다.

악당인 ‘그’는 아리엘에게 라카트옐 가의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었다.

‘그건 누구의 의도였을까?’

마법사 무리는 기본적으로 ‘그’의 의지대로 움직였지만 때때로 범죄 청부를 받았다. 무리를 이끄는 데에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때 자신을 라카트옐로 침임시킨 사람이 ‘그’가 아니라면, 청부를 맡긴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라카트옐을 미워하는 사람.

라카트옐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

그리고 지금의 아리엘은 그게 누구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리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루시안에게는 적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가 강한 건 분명하지만, 그를 해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싫었다.

만약 그런 순간이 오면 아리엘은 그의 마법사로서 온 힘을 다해 그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아예 그런 상황 자체가 오지 않았으면 했다.

생각에 빠져서 걷던 아리엘은 툭,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야, ……브루노어?”

콩하고 브루노어에게 들이받은 아리엘은 흰 로브를 입은 브루노어의 인자한 미소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브루노어, 안녕하세요?”

정처 없이 마구 저택 안을 걷다보니 어느새 그녀는 브루노어의 연구실 앞까지 와 있었다.

브루노어는 당황스러워 보이는 아리엘을 자연스럽게 초대했다.

“잠시 차라도 들고 가시죠.”

신기한 물건이 가득한 브루노어의 연구실 안에서 마력 포션이 첨가된 따끈한 블랙체리 차를 젓고 있노라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아리엘은 말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브루노어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브루노어는 내가 이때쯤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당연히 우연이겠지만, 브루노어는 모르는 게 없으니까 가능할 것도 같았다.

자신의 대마법사 스승님은 정말로 아는 게 많았다.

아리엘은 머뭇거리며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브루노어.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저기, 드래곤을 해칠 수 있는 존재가…… 있나요?”

브루노어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람 중에는 없습니다.”

아리엘은 갑자기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그래, 맞아. 루시안은 상처가 나도 금방 낫잖아.

그리고 엄청 강하고.

“사람이 아닌 다른 종족들은 해칠 수 있나요?”

브루노어가 낮게 웃으며 부정했다.

“아리엘님, 드래곤은 지상 최강의 종족입니다. 엘프나 마물도 라카트옐을 죽일 순 없지요.”

“그럼,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은 책에 나와있는 것처럼 무적, 불사(不死)인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브루노어가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혹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나요?”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네. 드래곤을 죽이는 검…… 아닌가요?”

브루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런데 드래곤 슬레이어는 뭘로 만들어질까요? 강도가 높은 철? 마물의 피에도 부식되지 않는 이리듐?”

아리엘은 둘 다 정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브루노어가 천천히 말했다.

“어느 것도 아닙니다. 드래곤을 해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기에 ‘무언가’가 들어가야 하죠.”

“그게 뭔데요?”

브루노어가 강렬한 시선으로 아리엘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드래곤의 일부’입니다.”

‘……!’

브루노어의 말을 들은 아리엘은 깜짝 놀랐다.

그가 허공에 마나로 글씨를 휘갈겼다.

초록빛을 띤 글씨가 춤추듯 그려졌다.


[드래곤은 드래곤으로만 해칠 수 있다.]


브루노어의 목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드래곤은 드래곤으로만 상처 입힐 수 있답니다. 다이아몬드를 제련하는 데에 다이아몬드가 쓰이는 것처럼요.”

단단한 다이아몬드 원석을 보석으로 커팅하는 데에는 철을 사용할 수 없다.

다이아몬드의 엄청난 강도 앞에서 철은 종이처럼 구겨지고 마니까.

그래서 다이아몬드를 커팅하는 데에는 또 다른 다이아몬드 조각이 쓰인다.

“드래곤을 해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길로 통합니다. 같은 드래곤의 육체로 만든 무언가, 그것을 재료로 한 검 같은 게 필요하죠.”

“그런 검이, 남아있나요?”

아리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니요. 드래곤 슬레이어- 드래곤을 죽이는 검은 이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무기로는 드래곤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는 이야기지요.”

“그럼…….”

아리엘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브루노어가 제 말의 잔인함을 안다는 듯 난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남아있는 건 대공님과 대공자님. 두 분뿐입니다.”

즉, 이 뜻이다.

루시안과 마티어스를 해칠 수 있는 건 오직 서로뿐.

마티어스가 루시안을 해치려고 하거나 루시안이 마티어스를 해치려고 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외부의 적이 라카트옐을 해하려고 하는 건 소용없는 짓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라카트옐은 서로만이 서로에게 무기가 된다는 말씀이에요?”

“그렇답니다.”

“아…….”

아리엘은 강렬한 두 가지 감정에 사로잡혔다.

첫번째 감정은 안심이었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서로 해치지 않는 한 그들을 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두 번째 감정은…… 겁이 났다.

마티어스와 루시안 사이는 4년이 흐른 지금도 한결같이 찬바람이 몰아쳤다.

두 남자 모두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아리엘은 할 수만 있다면 둘 사이의 골을 메우고 싶었지만, 조심스러웠다.

‘혹시 그런 일은 없겠지?’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공격한다거나…….

아리엘은 이 일에 대해 반드시 알렌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렌이라면 이 부분에 대해 대답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아리엘은 브루노어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브루노어. 생각이 조금이나마 정리됐어요.”

“다행이군요. 제 기쁨입니다.”

인자하게 인사를 받아준 브루노어가 묘한 말을 덧붙였다.

“아리엘님, 기억하십시오.”

“무엇을요?”

“세상에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많답니다. 때론 생각지도 못한 곳에 퍼즐 조각이 있는 법이지요.”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고명한 스승님이 하시는 말씀인 만큼 아리엘은 그 말을 귀기울여 들었다.

“네, 브루노어. 명심할게요.”

식은 차가 브루노어의 마법으로 다시 따뜻해지고, 브루노어는 아리엘에게 히스 흉을 잔뜩 보며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사춘기인 히스는 감히 할아버지 겸 스승에게 성질을 부린 죄로 마법 문자를 종이 가득 베끼는 마법 빽빽이를 이틀째 쓰고 있는 중이었다.

아리엘은 브루노어의 연구실 책상에 놓인, 히스가 휘갈겨 쓴 빽빽이를 보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푸릇한 잎사귀들이 가득한 봄의 오후가 흘러가고 있었다.


* * *


얼마 후.

아리엘은 놀러 온 다이아나에게 수도에 퍼진 소문에 대한 일을 상의했다.

마법이나 마도구 관련해서 자신의 이름이 유명해졌는데, 그것 때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

이야기를 다 들어준 다이아나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아리엘. 이참에 마도구로 사업을 해보는 건 어때?”

“사업?”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다이아나의 영민한 눈이 반짝 빛났다.

“응. 이번에 아리엘 네가 마도구를 만든다는 소문이 쫙 퍼졌잖아. 여자들 사이에서는 그 마법등 이야기뿐이라고. 왜 그렇다고 생각해?”

“음…….”

아리엘의 눈에도 깨달음이 떠올랐다.

“귀족들이 소비할만한 마도구가 없어서?”

다이아나가 빙그레 웃었다.

“맞아. 똑똑한 우리 아리엘. 마탑에서 나오는 마도구들은 보통 사람이 쓰기엔 무리가 있지.

다루기 위험하고, 기능도 무시무시하잖아. 그나마 안전하게 유통되는 건 디자인이 형편없고.”

다이아나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제국에서 마도구를 취급하는 건 마탑 뿐이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마도구들은 실생활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게다가 마도구는 마법사들이 쓰려고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마나가 없는 보통 사람에게는 반응하지 않는 일도 허다했다.

다이아나가 이어 말했다.

“팬시하고, 예쁘고, 안전한 마도구. 편리한 기능을 갖췄는데, 내 취향까지 과시할 수 있는 마도구라면? 나 같으면 사겠어.”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는 즉석에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아리엘 너에게서 영감을 받았는데, 향기 마법을 담은 잉크나 호신용 반지 같은 거 어때? VIP들에게는 특별한 걸 주문 제작해줄 수도 있을 거야!”

“…….”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귀족들의 허영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물건은 언제나 수요가 있었다.

더구나 이때까지 마법사들의 전유물이었던 마법을 보통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촛불 등잔보다 훨씬 환한 마법등이나, 다이아나 말대로 영애들이 들고다닐 만한 호신용 장신구 같은 건 유용하면서도 예쁘게 만드는 게 가능했다.

잘만 된다면 마도구가 새로운 유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열정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놓던 다이아나가 고민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려운 부분도 남아있어. 사업에는 비용이 필요해. 믿을만한 마법사도 있어야 하고.”

“비용은 괜찮아, 다이아나.”

아리엘은 자신의 금고 안에 있는 사비가 얼마나 있는지를 잠깐 생각해보았다.

정확히 얼마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금액인 것만은 확실했다.

‘내정 예산을 다 못 써서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 놨었지.’

사업을 시작한다면 그 돈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믿는 마법사는 브루노어와 히스뿐이야. 그런데 브루노어는 사정이 있어서…….”

브루노어는 황궁 마법사였다가 쫓겨났으니 다시 사교계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히스는 괜찮았다.

다이아나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히스라면, 네가 말했던 그 마법사 남자애 말하는 거지?”

“응. 맞아.”

부채를 편 다이아나가 살랑살랑 부치며 신중하게 말했다.

“만나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네가 괜찮은 애라고 한다면 그렇겠지.”

아리엘은 미소지으며 다이아나를 꼭 끌어안았다.

“히스한테 한번 말해볼게. 같이 생각해줘서 고마워, 다이아나.”

“흐흠, 흠. 내가 갖고 싶은 사심을 말한 것뿐인걸?”

다이아나는 아리엘의 가느다란 허리를 포옥 마주 안았다.

‘어쩜 내 귀염둥이는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다이아나의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왔다.

4년 동안 매일 키워온 다이아나의 덕심은 이제 평범한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다이아나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아리엘은 방긋 미소지었다.

‘역시 다이아나에게 상의하길 잘했어.’

그런데 히스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 * *


“뭐?”

이야기를 들은 히스는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과 아리엘을 번갈아 손짓하며 물었다.

“너랑, 나랑 같이 하자고?”

아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다이아나, 그리고 히스까지 같이 하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히스?”

히스가 다시 멍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아마도 아리엘의 이야기를 좀 되새겨 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아리엘은 마도구 사업을 하게 된다면 귀족들을 직접 만나야 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말해주었다.

아마 귀족들의 모임에 가거나 귀족 고객과 만나야 할 테니까.

만약 히스가 싫다고 한다면 사업은 시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참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것 같던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귓불을 붉혔다.

“있잖아. 그거 하면, 너랑 같이 다니는 거야?”

“응?”

히스가 툴툴대는 어조로 말했다.

“너랑 무도회나 연회 같은 데도 같이 갈 수 있는 거냐고.”

“아. 물론이지.”

평민이 황실에서 직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마법사가 유일했다.

히스의 마법 실력이 주목받는다면 귀족들은 너도나도 그를 초대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마도구 사업은 아리엘이 후원하는 것으로 할 것이기에 자신도 히스와 함께 초대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히스가 그런 곳에 가고 싶어하는 줄은 몰랐는걸?’

오히려 귀족 문화라면서 싫어하고 꺼릴 줄 알았는데.

땅의 돌부리를 툭툭 차며 생각에 잠겨있던 히스가 이윽고 작게 중얼거렸다.

“……게.”

너무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듣지 못한 아리엘이 되물었다.

“뭐라고? 못 들었어.”

“……다고.”

“히스?”

히스가 새빨개진 얼굴을 들고 속사포로 말했다.

“할게. 한다고. 그 마도구 사업인지 뭔지 너랑 할 거라고.”

다다다 말해놓고 히스가 그녀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당장이라도 아리엘이 관두자고 할까 봐 걱정되는 듯했다.

“아무튼 나, 난 한다고 했다. 무르기 없기야.”

아리엘은 배시시 웃어버렸다.

“안 물러.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시작하려면 준비할 게 엄청 많아. 브루노어랑 마티어스님께도 말씀드려야 하고.”

“알겠어.”

보석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히스는 정원의 바위에 주저앉아서 머리를 감쌌다.

“으으, 나란 놈은…….”

처음 아리엘이 사업 이야기를 꺼냈을 땐 정말 놀랐다.

그는 마도구를 마법사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정말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그가 여태 만들었던 마도구들은 다 아리엘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을 줄은 몰랐다.

‘솔직히 귀족 놈들에게 내 마법을 파는 건 싫어.’

하지만 아리엘과 같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특히 대공자처럼, 그녀와 파트너를 이루어 연회에 가고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 히스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다.

‘무엇보다도…… 옆에서 지켜줄 수 있으니까.’

얼마 전, 대공자가 옆 나라 왕국을 멸망시킨 일이 있었다.

아리엘을 해치려고 한 공주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녀는 그때 다치거나 자칫 잘못했으면 목숨까지도 위험할 뻔했던 듯 했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그 괴물 같은 대공자가 놔두지 않았겠지만.

‘대공자가 없을 때만이라도 내가 아리엘을 지킬 수 있다면…….’

귀족 놈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싫은 건 아리엘이 다치는 것이었다.

자신을 향해 방긋 웃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정말…….”

히스는 괴상한 신음을 내며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마구 헝클었다.


* * *


아리엘의 마도구 사업 이야기를 들은 마티어스는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 해도 된다, 아리엘라.”

은근히 과보호가 심한 마티어스가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리엘은 허락을 받고 활짝 웃었다.

‘이제 마티어스님도 날 다 컸다고 인정해주시나 봐.’

나도 열네 살씩이나 먹었는걸.

아리엘은 나름 나이를 많이 먹은 것이 뿌듯했다.

마티어스의 그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대신 필요한 건 다 내가 해주겠다.”

아리엘은 바로 울상을 지었다.

정말, 마티어스님은 내 맘도 모르고.

그녀는 자기 힘으로 라카트옐 가의 이름을 빛낼만한 일을 하고 싶었다.

대공자비의 일은 집안을 그녀의 취향대로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바깥에서 아리엘이 하는 일들도 대공가의 이름에 영향을 미쳤다.

물론 아리엘이 무엇을 하든 라카트옐의 이름에는 조금의 흠조차 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아리엘은 최대한 똑 부러지게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마티어스님. 전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닌걸요. 다 해주시는 건 안 돼요.”

“…….”

이럴 때 마티어스는 꼭 아리엘이 선물을 안 받겠다고 했을 때의 루시안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근엄하고 서늘해보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게는 어린애지. 그게 이유의 전부라면.”

윽, 이대로는 논리에서 밀리겠어.

“자, 자꾸 그러시면 제가 엄청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버릴 거라고요.”

새끼 고양이 같은 아리엘의 협박에 마티어스가 슬쩍 웃었다.

열여덟 살짜리 아들이 있다고는 믿을 수 없게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아리엘라, 너는 좀 더 의존적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만.”

그리고 그는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

아리엘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이건 반칙이잖아요, 마티어스님.

아리엘은 이제 마티어스어(語)를 곧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티어스가 한 말의 의미는 확실했다.

‘내가 좀 더 해주고 싶으니까.’

이렇게 한없이 다정한 대우를 받을 때면 아리엘은 가슴 속이 가득 차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조금 더 응석 부리듯이 말했다.

“그, 그래도 다 해주시는 건 싫어요.”

마티어스가 고민하는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마침내 그가 한발 물러났다.

“그럼, 이름.”

“네?”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겠지. 널 힘들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들의 이름을 내게 가져오라고.”

아, 그거 살생부…….

“이번에도 힘든 일이 생기면 그 놈들의 이름을 가져와라. 그럼 된다.”

아리엘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 날로 누구 목숨이 사라진다는 걸 뻔히 아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었다.

아리엘은 허락해준 마티어스에게 고마움을 담아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감사해요, 마티어스님.”

만족스럽게 턱을 어루만진 마티어스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간식비로 금괴라도 몇 개 줄까?”

“마티어스님.”

“……알겠다.”


* * *


아리엘은 재무관 달튼과 상의해서 사업에 필요한 돈을 금고에서 찾고, 계획을 세웠다.

아기 마님이 직접 사업을 한다는 것을 들은 달튼은 감격하며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아기 마님, 절세하는 법은요…….”

“아기 마님, 연중 재화 흐름이 가장 많을 때는…….”

“아예 그냥 제가 새끼 재무관 하나를 붙여드릴 테니까…….”

어찌나 의욕이 넘치던지, 끝내 아리엘이 달튼에게서 도망을 쳐야 할 정도였다.

사업을 처음 해보는 아리엘은 다이아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세실은 봄 시즌이 끝나자마자 검 수련을 위해 산에 틀어박혀서, 편지로만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친구의 도움 요청에 곧장 달려온 다이아나가 당당히 외쳤다.

“아리엘! 아이템 아이디어나 인맥은 나한테 맡겨. 모니카 공작가는 발이 넓다고!”

심지어 다이아나는 자기가 갖고 싶은 개성 있는 마도구 목록을 사람 키만한 두루마리에 써가지고 왔다.

“일단은 제일 처음 선보일 마도구를 고르는데 우선이겠다. 어느 상점을 통해서 팔지 정하는 것도.”

“응!”

히스까지 이야기에 낀 뒤 세 사람은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누었다.

처음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던 히스도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며 동참했다.

그리고 다음 달 초, 깜짝 이벤트처럼 마도구가 독점으로 풀렸다.

시작은 마담 헬렌의 의상실에서였다.

헬렌의 의상실은 아리엘 대공자비의 전담 의상실로 이미 유명했지만, 마도구까지 다루면서 엄청난 유명세를 탔다.

첫 제품은 여자 귀족들을 위한 호신용 장신구.

“대공자비님이 후원하는 천재 마법사가 만든 마도구래요!”

“맞아요. 제품 디자인은 대공자비님도 관여하신다던데요?”

“어머, 어머! 주문은 어디서 받는다고요?”

엄청난 고가품인데도 불구하고 마도구 주문은 끊이지 않고 마구 밀어닥쳤다.

‘대공자비를 위험에서 구해준 마도구’로 유명해진, 공격을 튕겨내는 은귀걸이가 가장 많이 팔렸고, 그 외의 것들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독을 감지해주는 자수정 반지.

공격하는 사람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오팔 팔찌.

누르면 커다란 경보음을 내는 가넷 펜던트 목걸이.

귀족 영애들은 너도나도 호신용 마도구를 가지고 다니며 스스로를 보호했다.

성공 소식을 들은 세 사람은 마주 보고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 * *


사업을 시작한 뒤, 히스는 실험품이라고 이것저것을 잔뜩 만들어서 아리엘에게 내밀었다.

“써 봐. 네가 먼저 시험해봐야 좋은지 알 수 있잖아.”

“알겠어. 시험해보고 말해줄게.”

“…….”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잘근거리던 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무 시험만 하지 말고.”

“응?”

그렇게 말한 그는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리엘 방에는 예쁜 마법 샹들리에와, 종이에 쓰고 나면 색이 바뀌는 잉크, 어떤 모양으로 머리를 틀어 올려도 절대 풀리지 않는 머리 장식 빗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

히스의 개발품 중 다이아나가 가장 열광한 건 공간 마법이 걸려 있는 손가방이었다.

“여자들이 얼마나 이것저것 담을 게 많은데! 시녀들한테 들라고 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그렇다고 손가방이 크면 흉하단 말이야.”

열변을 토한 다이아나는 손바닥만한 가방 안에 구두 열두 켤레와 드레스 세 벌이 들어가는 걸 보고서 황홀해했다.

그녀는 아리엘의 손을 꼭 붙잡고 부탁했다.

“아리엘, 이거 팔 때 내 주문번호 1번으로 해주라.”

다이아나가 장담했다.

“이건 엄청난 인기 상품이 될 거야.”


* * *


오랜만에 검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세실과 함께, 아리엘은 수도 상점가로 나들이를 갔다.

세실과 데이트도 하고 호신용 마도구 반응도 볼 겸해서였다.

그동안 아리엘 금단 증상에 시달리던 세실은 아리엘을 보자마자 꼭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보고 싶었다, 아리엘.”

“나도, 나도.”

아리엘이 힘주어 말하자 세실이 흐물흐물해진 얼굴로 아리엘의 손깍지를 끼고 손을 조물거렸다.

“다이아나랑 사업 시작했다며?”

“응. 그래서 많이들 하고 다니는지 보려구.”

세실은 거리에서 본 영애들의 손이나 목에서 찰랑이던 마도구들을 떠올렸다.

“오면서 벌써 몇 명이나 봤다. 일단 가자.”

둘은 신분을 감춰주는 우윳빛 망토를 쓰고 즐겁게 상점가를 거닐었다.

아리엘은 주변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았다.

예전에 비해 거리를 다니는 귀족 영애들이 한결 많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마차를 타지 않으면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영애들이…….’

호신술 마도구 덕분에 여자들도 좀 더 자유롭게 외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리엘은 뿌듯함에 배시시 웃었다.

두 소녀는 도중에 수도에서 가장 큰 수제 초콜릿 상점에 들렀다.

예쁜 초콜릿들을 초롱초롱 구경하던 아리엘은 문득 루시안을 떠올렸다.

‘아카데미에 있는 루시안한테 초콜릿을 보낼까?’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루시안은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끄으응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만들어진 초콜릿 대신 초콜릿 재료만을 사서 가게를 나섰다.

부끄러워서 몰래 샀는데 세실은 금방 눈치를 챘는지 웃음을 억지로 참는 기색이었다.

“아리엘, 대공자님께 초콜릿을 만들어 드리려는 거지?”

아리엘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얼른 대답했다.

“이, 이상하게 만들어지면 안 보낼 거야.”

세실이 보기 좋다는 듯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다른 사람들의 연애사엔 전혀 관심 없었지만, 아리엘만큼은 보고 있으면 흐뭇해서 절로 엄마 미소가 나왔다.

“만드는 걸 도와줄까?”

“정말?”

아리엘이 화색을 띠며 되물었다.

세실은 심장이 사르르 녹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엘이 콧잔등에 초콜릿을 묻히고 열심히 만들고 있으면 깨물어 주고 싶겠지…….’

세실은 자신도 어느새 다이아나와 비슷한 수준의 덕질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 * *


아리엘은 다이아나와 세실의 도움으로 꽤 많은 양의 초콜릿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단 것을 싫어하는 마티어스와 루시안 몫의 초콜릿은 따로 특별하게 만들었다.

‘으음, 남는 초콜릿들은 어쩌지?’

다이아나와 세실과는 함께 만들면서 나눠 먹었고, 옆에서 도와준 수잔에게도 줬는데.

만든 초콜릿들을 두고 생각에 잠겨있던 아리엘이 손뼉을 쳤다.

“아. 이건 기사단에 줘야겠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1년 내내 겨울의 마수 토벌을 준비하느라 훈련양이 엄청났다.

“훈련하느라 힘드니까, 단 걸 먹으면 힘이 날 거야.”

그녀는 초콜릿이 녹지 않게 시원한 마법을 건 뒤, 종이처럼 얇은 천에 잘 포장해서 기사단으로 찾아갔다.

아리엘이 도착하자마자 기사단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기 마님!”

“오셨습니까, 아기 마님!”

아리엘 뒤에 있던 헥터와 랄프가 마님께 너무 가까이 오지 말라고 붕붕 손을 휘저었다.

“덩치가 산만한 것들이 몰려드니까 아기 마님이 무서워하시잖아!”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덩치가 큰 헥터가 툴툴거리며 외쳤다.

아리엘은 조그맣게 키득거린 뒤 가져온 초콜릿을 꺼냈다.

“이거, 기사단 주려고 가져왔어요. 혹시 간식이 필요할까 해서요.”

어느새 와글와글 모여든 기사단이 아리엘이 가져온 것을 보려고 서로 난투를 벌였다.

“비켜, 안 보여!”

“너나 비켜!”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나.”

아리엘은 뺨을 붉히며 말했다.

“초콜릿이에요. 직접 만들었는데…….”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무리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들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아리엘의 손만 바라보았다.

‘방금 들은 사람?’

‘나도 들었는데.’

‘그럼 내가 들은 게 환청이 아니야?’

몇 초의 상황판단이 끝난 뒤 기사들 사이에서 짐승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오오오오!”

우리의 레이디가! 우리를 위해!

초콜릿을! 직접! 만드셨대!

아리엘은 놀라서 작게 딸꾹질을 했다.

이, 이렇게 반응이 격할 줄은 몰랐는걸요?

문득 개수가 충분한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나만!”

“나도 하나만!”

“아니 난 반 개만이라도!”

“난 땅에 떨어진 거라도 먹을 수 있어!”

초콜릿 좀비가 되어버린 기사단원들이 우어어 거리며 초콜릿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때 한 기사가 외쳤다.

“이긴 사람한테 몰아주기!”

“좋아!”

“아기 마님의 초콜릿은 나의 것!”

초콜릿에 눈이 먼 기사들이 모두 검을 뽑아 들었다.

“결투다!”

아리엘은 순간 눈앞이 아연해지는 걸 느꼈다.

잠깐만요…… 사이좋게 나눠 먹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요?

그때 아리엘 호위로 있던 헥터와 랄프가 중재에 나섰다.

“이놈들 그만두지 못해!”

이미 자기들끼리 투덕대고 있던 기사단이 잠시 멈춰서 헥터와 랄프 쪽을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안심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다음엔 많이 만들어 올 테니 다 같이 나눠 먹으라고 해야…….’

그때 헥터가 자기 등 뒤에 있는 거대한 대검을 뽑아 땅에 쾅 꽂았다.

험악한 얼굴에 눈동자가 희번덕 빛났다.

“나를 빼놓다니. 나도 참전한다.”

응?

랄프가 레이피어를 뽑으며 이어 말했다.

“이런 거라면 나도 빠질 수 없지. 결투다. 한 사람만 살아남는 거야!”

랄프의 눈도 위험하게 빛났다.

으응?

저기, 헥터, 랄프?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불만을 터트렸다.

“우우, 헥터 대장과 랄프 대장은 소드 마스터이지 않습니까!”

“불공평하다, 불공평하다!”

“아기 마님 호위도 전부 독차지했으면서!”

“소드 마스터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헥터와 랄프는 그 소리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놈들이! 아쉬우면 너네도 소드 마스터 하던가.”

“이건 월권입니다, 월권!”

“권력 남용!”

야유를 퍼부은 기사들이 서둘러 서로에게 장갑을 집어 던졌다.

“일단 우리끼리 싸워!”

“와아아아!”

그렇게, 승자가 전부 차지하는 아기 마님 초콜릿배 토너먼트가 열렸다.

개싸움의 시작이었다.


* * *


그날 오후.

끝내 개싸움을 말리지 못한 아리엘이 저택으로 돌아간 뒤, 기사단에 마티어스가 찾아왔다.

조금 풀어놓은 기세만으로 순식간에 난투극을 멈추게 한 그가 싸늘하게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들이 우리 아이가 만든 초콜릿을 두고 결투 중이라고 들었는데.”

기사들은 싸우던 동작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럴 수가, 대공 각하가 직접 오셨…….’

목소리만 들었는데 섬뜩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그 틈을 천천히 걸어서 지나친 마티어스가 고이 모셔져 있는 초콜릿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우리 아리엘이 준 건가?”

다정한 시선으로 초콜릿을 본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다는 거지.”

여유롭게 뜸을 들이던 그의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잔혹하게 빛났다.

“나도 결투에 참전하겠다.”

헉.

마티어스의 저 눈은 진심이었다.

그 순간 모두가 오싹함을 느끼고 눈을 피했다.

라카트옐과 결투를 하면 최소가 사망이고, 대부분은 시체도 못 남기는 소멸이라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반응을 기다리던 마티어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결투에 나서는 자가 없군. 그럼.”

그는 소드 마나로 초콜릿 주머니를 간단히 손에 넣었다.

정확히 말하면, 간단히 갈취했다.

초콜릿을 얻은 마티어스는 미련 하나 없이 기사단을 떠나갔다.

마침내 마티어스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한 기사단은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받자마자 먹을걸!”

“그러니까 내가 하나씩 나눠 먹자고 했잖아.”

“네가 언제? 처음에 결투하자고 한 게 너였다, 이 자식아.”

중간부터 결투에 들어와서 신나게 다른 기사들을 두드려 패고 있던 대장, 네드가 슬픈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나마 대공자님이 아니셨던 걸 다행으로 여겨라. 대공자님이었다면 우린 들키는 즉시 목숨이 끝났을 테니.”

기사 중 한 명이 어리둥절하게 ‘네?’하고 물었다.

네드가 창백해진 얼굴로 혀를 쯧쯧 찼다.

“손수건 사태 때, 기억 안 나냐?”

네드의 말에 기사단 모두가 새파랗게 질렸다.

4년 전, 아리엘이 기사단의 안전을 기원하며 줬던 손수건은 루시안이 돌아오자마자 회수됐다.

그리고 손수건을 직접 받았던 마스터 3명은 루시안에 의해 죽음의 경계 근처까지 갔다가 돌아왔었다.

네드가 자기 배에 손가락으로 X자를 그리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먹은 초콜릿도 토해내야 했을지 몰라…… 아마 배가 갈려서 토해냈겠지.”

공포 때문에 아무도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았지만, 기사단은 그 말에 뼈저리게 공감했다.


* * *


“이건 마티어스님 거, 이건 루시안 거…….”

아리엘은 마티어스에겐 달지 않은 홍차 초콜릿을, 루시안에게는 다크 초콜릿 안에 쌉싸름한 초코 무스가 든 초콜릿을 선물했다.

초콜릿을 받은 마티어스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입맛에 맞으세요?”

조심스러운 아리엘의 말을 들은 마티어스가 슬몃 웃었다.

“네가 만든 건데 여부가 있나.”


와, 돌려 말하는데도 이렇게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시는 건 마티어스님 재능이야.

아리엘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보다 넌 이런 걸 만들지 않아도 된다.”

아리엘의 뺨을 토닥이며 마티어스가 덧붙였다.

좋지만 너무 위험해.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아, 아니. 초콜릿이 어디가 위험한가요?’

아리엘은 초콜릿이 종이배처럼 금지목록이 되는 건가 싶어서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마티어스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감히 아리엘의 초콜릿을 탐내는 한 무리의 짐승 떼 같았던 기사단 놈들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머릿속에 그 시커먼 놈들과 조그맣고 여리여리한 아리엘이 동시에 그려졌다.

음, 역시 너무 위험하군.

마티어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사단 전부를 해체시키는 건 어떨까.

전부 사라지게 만드는 것도 괜찮겠지.

기사단 전체가 목숨과 일자리를 위협받는 줄 꿈에도 모르는 아리엘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시지?’

이제 마티어스는 아리엘 전용 수집 진열장에 초콜릿을 넣을 생각에 잠겨 흐뭇하게 입가를 매만졌다.

그의 진열장엔 이미 기사들로부터 강탈한 초콜릿도 구석에 잘 넣어져 있었다.

그렇게, 마티어스의 아리엘 한정 과보호와 수집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한편, 루시안 몫의 초콜릿은 아카데미로 보내야 했다.

아리엘은 조심스레 보관 마법을 걸어 초콜릿이 든 상자를 부쳤다.

‘루시안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단 걸 싫어하는 루시안이지만 이번 초콜릿은 정말 정말 안 달게 만들었으니까.

그나저나, 이번에도 지난번 카나페처럼 박제를 하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잠시 위험한 상상을 한 아리엘은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녀는 부디 루시안이 초콜릿을 잘 먹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초콜릿 선물을 받은 루시안이 곧장 답례를 보내왔다.

“어머나, 아기 마님. 나와 보세요.”

그의 답례는 사탕이 가득 담긴 커다란 유리병이었다.

물보라 속에서 태어나는 인어 모양의 유리병 안에 든 사탕은 예쁜 포장 종이에 각각 곱게 싸여 있었다.

무거운 유리병을 가지고 온 기사가 정중하게 말했다.

“대공자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마침 선물이 도착할 때 함께 있었던 세실과 다이아나는 볼을 빨갛게 붉히며 서로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어머어머, 그 무시무시한 대공자님이 사탕이라니!’

‘그분께는 정말 안 어울리지만 흐뭇하다.’

‘세실, 내 입꼬리 좀 내려줘. 광대도 좀 눌러주고.’

아리엘의 하얀 뺨도 발그레해졌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녀도 내심 사탕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

여태 루시안이 준 선물들 중에서 제일 부담 없이 받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공가 나갈 때 이건 안 놔두고 가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루시안이 주는 선물을 받고 행복하다는 마음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날 저녁, 사탕 하나를 열어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이게…… 뭐예요, 루시안?”

아리엘은 사탕 대신 포장지 안에 담긴 것을 보고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잠깐만, 이게 왜 여기서 나와?

거대한 사탕 병 안에 든 건 사탕 포장지를 입은 다이아몬드였다.

하나에 50캐럿은 거뜬히 되는 구슬만한 크기의.

믿을 수가 없어서 몇 개를 더 열어봤는데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 안에 정상적인 사탕은 없는 거야?’

사탕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라고? 이게 다?

아리엘은 창백한 얼굴로 사탕 병을 바라보았다.

달콤한 사탕 수백 개가 갑자기 저택 수백 채로 바뀌어 보이는, 호러틱한 순간이었다.

미쳤나 봐, 루시안.

“……당장 돌려보내야겠어.”

놀란 가슴을 겨우겨우 가라앉힌 아리엘은 사탕병을 다시 잘 싼 다음 루시안에게 돌려보냈다.

물론, 반송된 선물을 받은 루시안이 사탕병과 ‘함께’ 집으로 돌아올 거란 건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 * *


늦은 밤.

아리엘은 기분 좋게 목욕을 하고, 머리카락을 말리며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한잔 가득 마셨다.

수잔이 우유에 딸기즙과 꿀을 듬뿍 넣어줘서 목욕의 피로가 녹아내렸다.

‘좋다…….’

우유 수염까지 핥아낸 아리엘은 수잔에게 칭찬의 뺨키스를 받았다.

“다 드셨네요. 착하셔라. 이제 자러 가셔요.”

“네, 수잔.”

아리엘은 마티어스에게 들러 다소곳이 밤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방에 들어온 아리엘의 발이 멈칫했다.

나갔다 오기 전에는 닫혀있던 창문이 틈을 벌리고 열려있었다.

‘뭐지?’

긴장한 그녀의 눈에 곧 낯익은 형상이 보였다.

벽에 기댄 남자의 늘씬한 형상.

생생히 살아 빛나는 오만한 푸른 눈이 아니라면, 신의 솜씨로 조각한 조각품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아름다운 사내가 그녀의 방에 와 있었다.

“루시…… 안?”

아리엘 쪽으로 시선을 돌린 루시안이 한 손에 들고 있던 물체를 달칵,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유리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음이 났다.

아리엘은 그가 들고 온 물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사탕병.’

불과 며칠 전 그녀가 꽁꽁 싸매어 루시안에게 돌려보낸 인어 모양 사탕병이었다.

유리병을 확인하고 다시 루시안에게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그의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내 선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

루시안이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소리 없이 아리엘을 향해 걸어왔다.

아리엘은 당황해서 물었다.

“언제 왔어요? 어떻게 온 거예요?”

순식간에 지척으로 온 그가 점점 가까이 그녀를 압박하듯 다가왔다.

어어…….

아리엘은 조금씩 뒤로 물러서다가 등이 문에 닿아서 멈추었다.

루시안이 느릿하게 양손으로 문을 짚고, 제 팔 사이에 아리엘을 가두었다.

위압적이고 퇴폐적인, 낮은 목소리가 말했다.

“대답부터. 내 선물이 별로라서, 그래서 돌려보낸 건가?”

무거워진 공기에 숨이 눌렸다.

“지, 지금 그거 물어보려고 집에 온 거예요?”

루시안이 위협하듯 스, 하는 소리를 냈다.

그의 한 손이 아리엘의 뺨을 부드럽게 쥐었다.

“질문 하나에 대답 하나씩. 네가 대답을 해야 나도 답을 하지.”

“그…….”

아리엘은 우물쭈물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다이아몬드를 그렇게 보내놓고.

설마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요?

“전…… 진짜 사탕인줄 알았단 말이에요.”

루시안의 미간이 의아한 듯 서늘하게 찌푸려졌다.

그가 붉은 입술을 벌려 말했다.

“사탕이잖아. 포장지에 싸인 단단한 거.”

다른 건 모르겠고, 루시안이 알고 있는 사탕의 정의가 틀렸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아리엘은 소심하게 골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아몬드는 먹을 수가 없잖아요. 나는, 그냥 사탕이 좋단 말이에요.”

그녀를 잡아먹을 듯 어둡게 바라보고 있던 루시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렵네. 내 아내는.”

아니, 안 어렵거든요!

루시안이 하는 짓이 진짜 어려운 거거든요.

아리엘은 매우 억울해졌다.

그 사이 어쩐지 기운이 느슨해진 그가 짧게 신음하며 제 머리칼을 한 손으로 헤집었다.

“……그럼 어떤 걸 원한다고 말을 했어야지. 그냥 돌려보내면 내가 무슨 상상까지 할 줄 알고.”

상상? 그게 무슨 뜻인가요?

그의 긴 속눈썹이 눈 아래로 깊이 감겼다.

루시안은 자신을 아카데미에서 집까지 몰고 온 불안한 상상들을 곱씹었다.

그녀가 보내온 초콜릿을 보며 그는 지독하게 달콤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단것을 싫어하니까 달지 않게 만들었다는 편지와, 편지 귀퉁이에 머뭇거리듯 찍혀있는 작은 입술 도장도 그의 머릿속을 녹여냈다.

그는 편지 봉투에 찍힌 입술 도장 위로 제 입술을 포개 보았다.

잉크 냄새가 은은히 밴 종이에서 그녀와 같은 감촉이 날 리가 없지만.

문제는 그가 답례로 보낸 선물이 거절당했다는 것이었다.

되돌아온 선물을 본 순간, 루시안은 심연에 빠진 듯 아득해졌다.

아리엘이 자신이 준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까 봐.

만에 하나, 자신을 싫어했을까 봐.

그 생각이 들자 잠시도 아카데미에 머무를 수 없었다.

원래 우월한 태생을 가진 그는 거절당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그를 거절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눈앞의 이 조그만 소녀를 제외하면.

루시안은 아리엘의 뺨을 쥐었던 손을 떼고 그녀의 얼굴 윤곽을 어루만졌다.

그의 잇새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망할 놈의 진짜 사탕도 줄 테니까…… 내가 주는 거 받아.”

그가 제멋대로 밀어붙이는 통에 아리엘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지나간 뒤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왔어요?”

“일이 있어서.”

루시안은 짧게 답했다.

그 '일'이 아리엘 본인이라는 건 그녀만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아리엘의 하얀 뺨을 잡아서 말랑하게 늘렸다.

“으. 루시안.”

꾸중하듯 노려보는 아리엘을 보자 붉은 입술 사이로 낮은 웃음이 샜다.

“꿀이랑 우유 냄새가 나네. 아리엘라.”

“앗, 정말요?”

당황해서 눈을 도르르 굴리는 그녀를 보며 루시안은 쿡쿡 웃었다.

기왕 이렇게 온 거. 며칠 머물다 가야겠군.

그는 자신이 아카데미를 비움으로서 생길 수 있는 복잡한 일들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해버렸다.


* * *


한편, 갑작스레 돌아온 작은 주인 때문에 대공저는 밤늦게 떠들썩해졌다.

노집사 알렌이 구슬땀을 흘리며 이리저리 뛰는 동안, 혼자 방안에 남은 아리엘은 침대에 앉아 한숨을 폭 내쉬었다.

문득 침대 옆 협탁에 올려진 사탕병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아리엘은 고개를 세차게 도리도리 저어, 내용물을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저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사탕이다.

저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사탕이다.

‘일단 포장지만 벗기지 않으면 겉으로는 사탕처럼 보이니까…….’

5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몇백 개가 침실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사탕 몇백 개가 훨씬 마음이 편했다.

루시안이나 마티어스는 엄청나게 부유해서인지 금전 감각이 보통 사람과 달랐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사치의 극치라고 생각할 만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앞으로 루시안에게 선물을 보낼 땐 하나를 보내도 조심, 또 조심해야지.’

아리엘은 두 주먹을 꼭 움켜쥐고 서글프게 결심했다.


* * *


히스의 마도구가 유명해지자, 귀족들은 파티에 그를 초대하기 시작했다.

히스는 브루노어가 황실 마법사로 지낼 때 예법을 배운 적이 있어서 알렌이 가르쳐주는 파티 매너를 금방 익혔다.

문제는 춤이었다.

파티나 무도회에 초대를 받으면 춤출 일이 생길 텐데 평민인 히스는 사교댄스를 전혀 출 줄 몰랐다.

이대로라면 파티에 가도 망신만 당할 게 뻔했다.

“특훈이다, 히스.”

알렌은 엄격하게 히스를 가르쳐 남자 파트 댄스를 다 외우게 했다.

겨우 춤을 다 외운 히스는 다이아나와 아리엘 앞에서 춤 동작을 선보였다.

집에 돌아온 후 아리엘 옆에서 좀처럼 떨어지는 법이 없는 루시안도 아리엘 옆에 느른하게 기대앉아 있었다.

근처에 다른 인간이 있는 걸 성가셔하는 그였지만 여기저기 뽈뽈 돌아다니는 아리엘 옆에 있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기세로 싹 다 쫓아내고 싶지만…….

그는 춤동작을 선보이고 있는 히스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음악과 함께 히스가 한 곡을 다 추고 나자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다이아나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했다.

“너…… 의외로 몸치였구나.”

아리엘도 반박할 수 없었다.

히스는 춤 동작을 외우기만 했지 전혀 춤같이 추지 못했다.

삐걱거리는 목각인형 같은 몸짓이었다.

히스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항의했다.

“호, 혼자서 춰서 그래!”

그 말을 들은 다이아나와 집사 알렌이 동시에 반박했다.

“아닐걸.”

“아닐 거다.”

“…….”

히스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본인도 자기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속상한 것 같았다.

‘일단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

히스의 동작이 삐걱거리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춤을 출 때는 힘을 적당히 풀고 부드럽게 움직여야 하는데 뻣뻣하게만 몸을 놀리니 잘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시선은 딴 데 가 있고.’

동작을 외운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히스는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듯 저 뒤편만 노려보며 움직였다.

외운 것을 따라가기 급급해서 몸의 리듬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상태였다.

흐음, 아리엘은 폭신한 쿠션을 껴안고 쿠션에 턱을 묻으며 고민에 빠졌다.

‘어쩌지? 히스는 춤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때 고뇌하는 표정으로 서 있던 알렌이 입을 열었다.

“모름지기 춤이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법이지요.”

춤의 본질은 교감.

혼자 추는 게 아니라 두 명이 함께 추는 것이니 호흡을 맞추려면 교감이 필요했다.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시를 보는 것만큼 좋은 배움이 없었다.

알렌이 루시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두 분 주인님께서 춤 시범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권태롭게 늘어져 기대있던 루시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에게서 냉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것을 위해서?”

루시안이 딱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봄날의 공기가 한겨울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알렌이 얼른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섰다.

“루시안.”

아리엘이 조그맣게 부르며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의 시선이 옆에 앉은 아리엘을 향했다가, 촉촉한 루비같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냉기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한참동안 그녀를 빤히 응시하던 루시안이 마침내 대답했다.

“……좋아.”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엘 앞에 섰다.

아리엘의 달콤한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루시안이 붉은 입술 끝을 매혹적으로 비틀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춤을 신청하는 몸짓이었다.

“자.”

아리엘은 얼결에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어라, 우리 정말 춤추는 건가요?

루시안이 그녀를 방의 중앙으로 이끌었다. 아리엘은 일단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알렌이 서둘러 현악단을 향해 눈짓했다. 악단이 눈치 빠르게 음악 연주를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사교 댄스의 기본인 왈츠의 박자에 맞추어 아리엘과 루시안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밝은 낮에 저택 응접실에서 이러고 있으려니 괜히 부끄러웠다.

여유롭게 그녀를 리드하던 루시안이 긴장한 아리엘의 팔 위에서 손끝 장단을 느리게 두드렸다.

“힘 좀 빼.”

앗, 들켰나.

아리엘은 눈을 깜박였다.

“시범인데 못 추면 안 되지.”

루시안이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얼굴을 눈앞에서 마주하자, 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봐.”

그의 말에 아리엘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아까 봤잖아요.”

“그거 말고. 내 눈을 마주쳐야지.”

그가 아리엘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추게 했다.

눈을 마주치고, 힘을 빼고 나니 제법 시범이 될 만큼 자연스러운 동작이 나왔다.

‘이러고 있으니까 예전 생각이 나네.’

춤을 배운지 얼마 안 되어 루시안과 췄을 때는 서투르고 긴장해서 그의 발을 여러 번 밟았었다.

그때마다 재미있다는 듯 짙게 그려지던 그의 웃음.

그 장면을 떠올리자 심장께가 간질간질했다.

구경하던 알렌과 다이아나도 어느새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흡족해 보였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루시안은 제 팔 안에 있는 꼬맹이 아내의 집중해서 꼭 다문 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른 사람과 춤을 추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서늘해졌다.

생각에 잠긴 그의 표정이 딱딱해졌는지 아리엘이 조그만 입술로 종알종알 타박했다.

“루시안, 무서운 표정 지으면 안 돼요.”

아리엘이 웃으라는 뜻으로 입꼬리를 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도 루시안이 안 웃으니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그의 입술에서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웃음을 본 아리엘의 뺨이 옅게 붉어졌다.

“……그렇게 웃어야 예쁘죠.”

“안 웃어도 예뻐.”

“윽, 그건 그렇지만…….”

루시안이 느긋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아리엘은 콩닥거리는 맥박을 애써 무시하며 스텝에 집중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바깥에서는 벚꽃이 휘날렸다.

대응접실 밖의 거대한 벚나무가 무수한 꽃잎을 비처럼 퍼부어 내리고 있었다.

“…….”

두근, 두근.

히스는 지금 자신의 심장 소리가 바깥으로 들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개구장이 시절부터 어울렸던 아리엘인데, 아름답게 춤을 추는 그녀는 왜 이렇게도 낯선지.

몇백, 몇천 번이나 보았던 그녀의 미소인데, 다른 남자에게 향한 건 왜 이렇게도 다른지.

커지는 심장소리와는 반대로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열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히스는 봄이 원망스러웠다.

아리엘을 보면 간질간질하고 쑥스럽던 마음이 불쑥불쑥 우울함으로 돌변했다.

왜 꽃은 저렇게 예쁜가.

왜 아리엘은 저렇게 예쁜가.

만발한 꽃들과 쌍을 짓는 동물들을 보면서 한숨만 늘어갔다.

속이 답답한데 이유는 모르겠고.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조금 알 것 같았다.

‘아, 이제 알겠다.’

히스는 깨달았다.

내가 이 소녀를 좋아하나 보다.

아리엘과 루시안의 춤은 알렌이 음악을 멈추게 할 때까지 오래오래 이어졌다.

그리고 아리엘을 향한 히스의 눈빛을 본 다이아나는 부채 끝으로 턱을 쓸었다.

“흐응…… 이거 봐라?”


* * *


루시안이 아카데미로 돌아간 뒤 며칠 후, 아리엘과 히스는 온 초대장들 중 하나를 골라서 사교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 파티를 추천한 다이아나의 말로는 그곳에 굵직한 인사들이 많이 올 거라고 했다.

아리엘이 사업 비용을 다 대고 있어서 투자금은 필요 없었지만, 여러 귀족들과 미리 안면을 트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은 수도에서만 사업을 하고 있으니.’

아리엘과 히스의 마도구 사업은 수도에서만 이뤄지고 있었다.

사업을 제국 전체로 퍼트리려면 지방 영지를 가진 귀족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쉬운 쪽은 귀족들 쪽이니까.

요즘 제국은 수도에서 유행하는 마도구 때문에 떠들썩했다.

마도구 하나 사겠다고 지방에서 여행을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인기가 이 정도니, 지방 귀족들은 빨리 자기 영지가 있는 곳에도 마도구 가게가 생겼으면 했다.

아리엘과 히스는 오늘의 인기를 독차지할 손님이었다.

아리엘과 히스가 파티장에 들어서자, 그들을 초대한 네이선 백작이 격렬하게 환영했다.

“오! 어서오십시오, 대공자비님. 와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이쪽은 마도구 사업을 함께하는 마법사 히스클리프예요.”

귀족들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히스는 무뚝뚝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네이선 백작님.”

“아니 이렇게 젊은 마법사였다니. 하하하! 반갑네.”

아직 서툴지만 히스는 아리엘을 제법 잘 에스코트했다.

의젓한 히스의 모습을 보며 아리엘은 빙긋 웃었다.

‘마냥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기특하네, 히스.’

자신보다 한 살 많다고 히스가 어른인 척 으스댈 때면 아리엘은 늘 속으로 재미있어했었다.

그녀는 과거에 열일곱 살까지 산 경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처음 오는 파티에서 대담하게 행동하는 히스의 모습은 흐뭇하기만 했다.

파티장 안에서 히스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는 짧고 불퉁한 말투를 썼지만 매너를 어기진 않았다.

열심히 교육시킨 집사 알렌의 수고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역시, 천재라서 그런지 말투가 특별하네요.”

히스가 대마법사의 손자라는 것을 들은 귀족들은 그의 퉁명스러운 말투까지도 매력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천재를 알아보시고 투자하신 대공자비님의 안목도 대단해요!”

여자 귀족들은 아리엘 옆으로 몰려들어서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열광적인 반응이었다.

열심히 연습한 춤을 춰 볼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한바탕 복잡한 가운데 있는데, 무리에 있던 여자 중 한 명이 아리엘을 향해 은밀한 눈짓을 보냈다.

“……?”

아리엘은 가만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평범한 차림의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아리엘에게 귓속말을 했다.

“붉은 그림자 베일을 찾으셨었죠?”

아! 아리엘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그림자 베일은 아리엘이 정보 길드 나잇 워커의 아지트에 들어갈 때 썼던 암호였다.

‘이 사람, 나잇 워커의 정보원이구나.’

여자가 소매에서 작은 종이쪽지를 꺼내서 아리엘의 손에 쥐여주었다.

빠르고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리고 여자는 옆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언제 거기 있었느냐는 듯 사라져버렸다.

쪽지를 읽기 위해 아리엘은 파우더룸에 다녀오겠다고 히스에게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비밀스러운 곳까지 와서 쪽지를 펴자 안에 쓰여진 글귀가 보였다.

카디나의 글씨였다.


[눈 위에 흉터 있는 사내가 찾아왔었습니다.

말씀대로 의뢰는 받았습니다. 그가 원하는 정보는…….]


아리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눈에 흉터가 있는 사내는 과거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마법사 무리에서도 행동 대장 격이어서 이런 일을 도맡아 하곤 했었다.

그런 그가 맡긴 정보라면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과거에 조종당하며 했던 행동들의 의미를.

아리엘은 자신이 어떤 일에 이용당한 건지 알고 싶었다.


[그가 원하는 정보는 ‘루실리온 후작가’에 대한 겁니다.

핵심 정보인 아리엘님에 대한 정보는 빼고 전달했습니다.]


쪽지를 다 읽은 뒤 아리엘은 불 원소를 이용해 쪽지를 태워 없앴다.

머릿속에 의문이 떠돌았다.

‘마법사 무리가 후작가 정보를 원했다고? 어째서지?’

루실리온 후작가는 아리엘의 친정이었다.

그것 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없었다.

‘역시…… 그때처럼 나를 손에 넣으려고?’

아리엘은 다 타버린 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난 이미 대공가 사람이야.’

과거의 아리엘은 후작에게 딸 취급을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후작은 돈만 준다면 신분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녀를 팔아넘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아리엘을 사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승낙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리엘은 무려 라카트옐 가의 안주인이었다.

과거처럼 노예로 부릴 수도 없을뿐더러,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자기편에 끌어들이기엔 위험부담이 큰 존재였다.

‘당연히 내가 그들과 손잡을 이유도 없고.’

마법사 무리가 후작가 정보를 요청한 이유는 묘연하기만 했다.

그나마 카디나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빼고 넘긴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것 같아, 아리엘은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히스는 여전히 파티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떤 귀족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아리엘은 종종걸음을 치며 히스에게 다가갔다.

다시 시끌벅적한 파티가 시작되었다.


* * *


같은 시각.

쾅!

루실리온 후작가의 응접실의 탁자에 술잔이 거세게 내리쳐졌다.

술에 취한 채 소파에 기댄 후작이 성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계집애를 그렇게 치우는 게 아니었어…….”

그는 후회가 돼 미칠 것 같았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서 후작은 짙은 갈색의 음료를 유리잔에 콸콸 쏟아부은 뒤 쭉 들이켰다.

“그것만 집에 놔뒀어도 내가 부자가 되었을 텐데……!”

사교계에서 아리엘에 대한 소문이 들릴 때마다 후작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술을 퍼마셨다.

처음 그 비루먹은 계집애를 대공자비랍시고 팔아치웠을 때는 흡족했었다.

“잘해야 어디 지방의 늙고 돈푼 좀 있는 놈에게 팔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후작의 생각에, 출신도 모르는 천한 아리엘에겐 그마저도 분수에 넘치는 자리였다.

아리엘의 모친인 블랑쉐 후작 부인은 이름 없는 준귀족의 양딸이었다.

게다가 아리엘의 아비는 누구인지도 모를 천것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대공가가 그런 벌레 먹은 과일 같은 것을 마음에 들어할 줄이야.

뜻밖의 월척이라 기분이 들뜬 게 잘못이었다.

“사파이어 광산에 눈이 멀어 성급히 넘겨줘 버린 것이 실수였어.”

사치와 도박으로 몇 년 만에 광산을 날리고 나니 다시금 아리엘이 아쉬워졌다.

특히 요즘들어 아리엘이 마법 재능으로 유명해지자 더욱 후회가 됐다.

자신이 악마의 재능이라고 미워하긴 했지만, 그걸로 저렇게 돈을 벌 수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노다지를 놓쳤어, 내가…….”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짓눌렀다.

처음에 형편이 어려워졌을 땐 아리엘에게 곧장 편지를 썼다.

‘자기도 키워준 은혜를 안다면 애비가 도와달라는데 거절하진 못하겠지.’

친딸도 아닌 걸 자신이 얼마나 살뜰히 보살피고 돌봐줬던가.

10년씩이나 등 따시고 배부르게, 아가씨 소리 듣게 하며 길러줬다.

자기 방도 주고, 좋은 집에 시집도 보내주지 않았나.

‘대공과 대공자가 그것에게 준 것들만 해도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그 중 몇 개쯤 빼돌려 아비를 돕는 건 당연한 도리가 아닌가.

그런데 아리엘에게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내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감히……!”

후작은 자신이 아리엘을 학대했던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10년간 아리엘을 끔찍한 다락방에 가두고, 굶기며 눈에 보일 때마다 아이가 기절할 정도로 폭력을 휘둘렀던 건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아버지, 진정해요. 손님도 있는데.”

아카데미에서 사고를 쳐서 근신 처분을 받고 잠시 집에 와 있는 제롬이 술을 홀짝이며 씩 웃었다.

그제야 후작은 벌게진 눈을 들어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검은 망토를 입고 있는 사내는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후작은 사내에게서 풍기는 꺼림칙한 기분 때문에 콧잔등을 문질렀다.

“그래, 내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고?”

검은 망토 아래에서 쇠못을 긋는 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황이 어려우시다면 제가 힘을 보태드리지요.”

“어떻게?”

검은 망토 사내가 죽은 물고기처럼 희고 끈적해 보이는 손으로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후작의 응접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사뿐사뿐 들어왔다.

“아마 이 아이가 도움이 될 겁니다.”

들어온 사람을 본 후작과 후작 영식의 충혈된 눈이 천천히 초점을 잃으며 흐려졌다.

그들의 입가에 홀린 듯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잠시 후, 후작저를 나서는 검은 망토의 인영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망토 아래에서 소름끼치는 비웃음 소리가 났다.

“어리석은 것. 제 친딸도 못 알아보고 붉은 머리를 돈 몇 푼에 팔아넘기다니.”

그가 제 망토를 한 번 펄럭이자, 그 자리에는 언제 사람이 있었냐는 듯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 *


파티에는 히스 뿐 아니라 다이아나도 종종 함께 참석했다.

여자들끼리만 모이는, 베아트리체 부인의 모임에 다녀온 아리엘과 다이아나는 대공가 정원에서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도구 반응이 장난 아니야. 다음에 출시되는 건 뭐냐고 질문을 백 번 넘게 들었다니까!”

사실 아리엘과 다이아나는 다음 상품 구상을 이미 끝내놓은 상태였다.

“그래도 난 시치미를 뚝 뗐지. 아직 그럴 예정은 없다고.”

마도구 사업의 다음 아이템은 '화장을 지워주는 마법 스크롤 북'이었다.

이 물건은 스크롤을 찢기만 하면 얼굴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이게 나오면 다들 안 사고는 못 배길걸? 화장은 원래 할 때보다 지울 때 더 힘들거든.”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웃으며 깃털 부채를 살살 부치던 다이아나가 갑자기 손뼉을 딱 쳤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얘기 들었어?”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얘기?”

다이아나가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췄다.

“아까 살짝 들었는데, 태후께서 위독하시다더라.”

“태후께서?”

지금 황실에는 황제와 황후 위로 태후가 살아있었다.

자질이 부족한 지금 황제가 국정을 그럭저럭 이끌어 가는 데에는 태후의 노력이 크다고 들었다.

아리엘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과거에 태후께서 돌아가셨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매일 학대당하며 조종당했던 아리엘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었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한 것 같지만.’

생각에 잠겨있는 아리엘의 귀에 다이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강하셨던 분이 아프신 이유는 하나뿐이지…….”

“뭔데, 다이아나?”

다이아나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딸에 대한 그리움.”

두 소녀는 걷다가 연하늘색 돔형지붕의 가제보(정원에 설치하는 서양식 정자)에 앉았다.

“이건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하도 오래전 일이라 요즘은 거의 묻혀있는 이야긴데…….”

다이아나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태후 마마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이 있는 거, 알지?”

“응. 폐하와 공주님 두 분. 공주님들은 외국에 계시잖아.”

아유, 우리 귀염둥이는 기억력도 좋지.

아리엘의 뺨을 행복한 표정으로 조물거리며, 다이아나가 이어 말했다.

“근데 사실 공주님이 한 분 더 있으셨대. 로잘린드 공주님이라고. 엄청 사랑을 받으셨는데 어릴 때 잃어버려서 아직도 못 찾으셨다지.”

그런 일이…….

아리엘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세월이 오래 지나 사교계에서도 잊혀진 일이었기에, 그녀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다이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계셨다면 우리 부모님 세대 정도 되었을 텐데. 안타까워.”

아리엘의 가슴도 찌르르 아파왔다.

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이런 사연에 마음이 아팠다.

“로잘린드 공주님은 어떤 분이셨대?”

“탐스러운 금발에 아주 아름다운 분이셨대. 온 황실이 나섰는데도 수십년동안 못 찾았으니 태후 마마께서 상심이 크셨던 모양이야.”

“아…….”

분위기가 슬퍼지자 다이아나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미안, 슬픈 얘기만 해서. 재밌는 얘기도 하나 있는데 들어볼래?”

“뭔데?”

다이아나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 있지? 그분이 어릴 적에, 고모 되시는 공주님들에게 매일 여장을 당했대.”

“뭐어? 정말?”

아리엘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트리히 전하가 여장이라니?

“그렇다니까! 아기가 예쁘다고 여덟 살까지 드레스를 입혔다더라. 내가 황궁에서 직접 들은 얘기야.”

아리엘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린 사촌 여동생들을 대하기 어려워하는 디트리히가 이해가 되었다.

다이아나와 아리엘은 그 후로도 다른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잃어버린 공주님…….’

하지만 왜인지 그 이야기가 계속 아리엘의 가슴에 맴돌고 있었다.


* * *


사업에 열중하면서 봄이 훌쩍 지나갔다.

한 시즌이 지나자, 마담 헬렌은 마도구를 판 비용을 아리엘에게 들고 왔다.

손님을 상대하는 헬렌의 수고비를 제외한 돈이었다.

마도구가 워낙에 고가품이다 보니 엄청난 거금이 아리엘의 손에 쥐어졌다.

엄마, 내가 처음으로 돈을 벌었어요.

처음으로 남에게 착취당하지 않고 돈을 번 아리엘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꾹 누르고 돈의 용도를 구분했다.

“이건 다이아나와 히스 몫, 이건 마탑에 줄 재룟값, 금고에 다시 돌려놓을 돈…….”

재무관 달튼이 도와준 덕분에 아리엘은 재정 정리를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사용처를 구분한 뒤에도 아리엘의 몫으로 떨어진 금액은 상당했다.

물론 그녀의 금고에 라카트옐 가문이 쏟아부어 둔 돈이 워낙 많아서 그 정도는 푼돈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이라 아리엘은 뿌듯했다.

수잔에게도 당장 가서 말해주고 싶었다.

‘수잔, 내가 돈을 벌었어요!’

그러면 수잔은 웃어주겠지?

‘어머나, 우리 아기 마님이 돈도 버시고. 참 장하세요.’

언제나 그랬듯 칭찬을 퍼부어 줄 수잔이 생각나서 아리엘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헤실헤실 웃고 있는 그녀에게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세요?”

어느새 들어온 수잔이 한아름 안고 있던 이불보를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매일 볕을 쬐어준 뒤 폭신폭신 부풀린 이불에서는 달큰한 햇볕 내음이 풍겼다.

“수잔.”

아리엘은 어리광부리듯 조그맣게 수잔을 불렀다.

솜씨 좋게 이불을 착착 정리한 수잔이 다가와서 아리엘의 뺨에 키스를 했다.

“우리 귀여운 아기 마님, 맛있는 거라도 갖다 드릴까요?”

아리엘은 수잔의 키스를 받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방금까지 토피넛 모카케잌이랑 잼 바른 스콘 잔뜩 먹었잖아요, 나.”

“그건 오후의 첫 번째 간식이었지요.”

수잔이 짐짓 엄격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리엘을 조금이라도 살찌우기 위해 매일같이 디저트들을 부지런히 갖다 날랐다.

오늘 간식인 초콜릿칩이 오독오독 씹히는 모카 케잌엔 크림이 두툼하게 샌드되어 있었다.

아리엘이 간식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것을 확인한 수잔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두 번째랑 세 번째 간식은 뭘 드실래요?”

아리엘은 수잔의 팔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

“간식 말고, 수잔이랑 이렇게 있을래요.”

수잔이 어머, 하며 미소지었다.

하녀장의 하루는 늘 바빴지만 사랑스러운 아기 마님 옆에 머무르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

수잔과 나란히 소파에 앉은 아리엘은 꼬물꼬물 서류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거 봐요, 수잔. 내가…… 처음으로 번 돈이에요.”

상상 속에서는 되게 자랑스럽게 내밀 수 있었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부끄러워서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서류를 본 수잔이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아리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너무 기특하셔요. 아기 마님은 아직 사랑만 받아도 괜찮을 나이신데…….”

그녀는 손을 내려 아리엘의 희고 가는 손을 쥐었다.

“이렇게 조그만 손으로 어떻게 이런 멋진 일을 해내셨대요?”

수잔이 아리엘의 손에 쪽쪽 뽀뽀를 해주었다.

아리엘은 괜히 어쩔 줄 몰라 수잔에게 파고들었다.

“수잔,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요?”

수잔이 아리엘을 보듬어주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고생하셨으니 아기 마님 쓰실 예쁜 드레스나 장신구를 사세요. 그거 구경하면서 눈 호강하는 게 제겐 제일 큰 선물이지요.”

“그런 거 말구요, 수잔.”

아리엘이 조금 더 보챘지만, 수잔은 웃기만 할 뿐 끝내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해주지 않았다.

폭신한 침대에 푹 파묻혀서, 수잔이 가져다준 밤 라떼를 홀짝이던 아리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랐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긴 하지만!’

아리엘은 얼른 일어나서 뽀르르 재무관 달튼을 부르러 갔다.


* * *


“예, 아기 마님.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한달음에 달려온 달튼은 마치 인사치레처럼 아리엘에게 쿠키 상자를 가득 안겨주었다.

아리엘은 쿠키 상자를 몇 개나 안고 비틀거렸다.

“이…… 일단 이 쿠키 상자 쌓는 것부터 도와주세요.”

아리엘은 왜 매번 달튼이 그녀에게 맛있는 과자를 못 줘서 안달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달튼은 쿠키 상자에 둘러싸인 아기 마님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흐물흐물 웃었다.

자리에 앉은 아리엘은 그녀 몫으로 떨어진 금액을 달튼에게 보여주었다.

“계속 생각해왔던 게 있는데요.”

달튼이 긴장하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이 돈으로 후원 재단을 만들고 싶어요.”

“어떤 후원 재단을 말씀하십니까?”

아리엘의 분홍빛 입술이 살짝 호를 그렸다.

“폭력을 당한 여자아이들을 돕고,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소녀들을 후원하는 재단이었으면 해요.”

“예.”

라카트옐이 하는 일이니 달튼은 토를 달지 않고 즉시 명을 받았다.

아리엘은 힘없고 어렸던 자신처럼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라카트옐 이름으로 자선 사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라카트옐 남자들은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나 자비가 아예 없었다.

‘인간이 아닌 인외의 존재니까 당연한 거겠지.’

또, 대공가는 워낙 악명이 높아서 아무도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선금을 받았다가 잘못 사용하면 ‘응징하는 라카트옐’에게 혼쭐이 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아리엘은 사업에서 나온 그녀 개인의 수익으로 후원을 결정했다.

서류 몇 장을 슥슥 처리하던 달튼이 물었다.

“그런데, 재단 이름은 어떻게 할까요?”

이제 아리엘이 떠올린 아이디어를 내놓을 차례였다.

아리엘은 학대받은 열 살 소녀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생겼던 작은 방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것으로 꼭꼭 숨겨놓고 몰래 혼자만 들여다보았던 그 방은, 이제 가득 차서 넘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아리엘은 조금이라도 수잔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후원 재단은 수잔 이름을 따서 ‘수잔나’ 재단으로 짓고 싶어요.”

달튼이 한 점 고민도 없이 서류에 이름을 적었다. 그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눈 깜빡할 사이 재단이 생겨나고, 증서까지 생기자 아리엘은 발갛게 뺨을 붉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잔이 기뻐했으면 좋겠다.’


* * *


얼마 뒤, 그 일을 알게 된 수잔은 놀란 눈으로 서 있다가 끝내 살짝 눈물을 비쳤다.

그리고 그녀는 아리엘이 준 후원 증서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 보았다.

“아기 마님…… 이런 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우리 아기마님께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셨을까.”

수잔은 아리엘을 꼭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멈추어 있었다.

아리엘은 수잔의 품에서 꼼지락대며 수잔을 마주 끌어안았다.

수잔에게 폭 안긴 아리엘은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수잔나 재단의 후원 증서는 액자에 잘 걸린 채로 수잔 방의 침대 머리맡에 장식되었다.


* * *


그렇게 후원금까지 떼어놨는데도 아리엘에겐 돈이 남았다.

원하던 일을 다 했는데도 쓸 돈이 남다니.

이건 완벽히 개인 용돈인 셈이었다.

가슴이 설레었다.

무려 그녀가 처음으로 번 돈이었다.

아리엘은 두 손으로 하얗고 말랑한 뺨을 괴고 즐거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쓰지? 뭘 할까?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아리엘의 눈이 반짝 떠졌다.

“아. 루시안에게 선물을 할까?”


* * *


아리엘은 여태 루시안에게 선물을 사서 준 적이 없었다.

그녀가 가진 돈은 다 라카트옐 가의 돈인 데다, 루시안은 천문학적 액수도 푼돈으로 여기는 엄청난 부자였다.

그런 그에게 돈으로 뭔가를 사준다는 건 정말 의미 없는 짓이었다.

‘에이션트급 보석을 방 안에 막 굴리는 게 루시안인걸.’

평생 못 가져본 것이 없는 그에게 웬만한 선물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리엘은 처음 선물했던 괴상한 이름 자수 손수건 이후로도 계속 직접 만든 선물을 주었다.

이상하게도 루시안 것을 만들기만 하면 실수를 해서 늘 그의 쿡쿡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분명 연습할 땐 잘 됐었다구.’

입술을 시무룩하게 내민 아리엘은 다시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예산으로는 루시안이 선물했던 것처럼 비싼 보석이나 별장을 사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그녀의 주변에 보석들이 장난감처럼 굴러다니게 하고, 매해 그녀의 드레스를 몇백 벌씩 맞추며, 몇 번 못 쓸 물건들까지 장인이 만든 것만을 사들이게 했다.

틈나는 대로 살롱, 땅, 별장, 호수, 화원 등을 사들여 소유권을 슬쩍 넘겨놓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아리엘은 나중에 복잡해질 뿐이므로 대부분의 선물은 거절하거나 돌려주었고, 대공자비로서의 체면을 떨어뜨리지 않을 한도 내에서만 받았다.

이런 상황이니 작은 선물 하나 사는 데에도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라카트옐 남자의 눈에 차는 선물이 있기나 할까?

“무슨 선물을 하면 좋지?”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아리엘은 결국 편지지와 깃펜을 들었다.


[친애하는 루시안…….]


처음 편지를 썼을 때 루시안이 답장 대신 꽃과 함께 직접 들이닥쳤던 것 때문에, 그 후로 아리엘은 편지가 몹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규칙을 당당히 무시하고 아카데미를 나와서 수도에 난입한 루시안 덕에 심장이 쫄깃해서 남아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물 받고 싶은 게 있냐는 것 정도는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아리엘은 사각사각 깃펜 소리를 내며 편지를 썼다.


[루시안,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면 갖고 싶은 것이나 수도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


편지를 쓰다 말고 아리엘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이러면 선물 받았을 때 깜짝 놀라면서 기쁘지가 않잖아.”

역시 그냥 내가 골라서 보내야겠어.

그녀는 쓰다 만 편지를 꼭꼭 구겨서 버렸다.

남자 선물 같은 걸 골라본 적이 없었으므로, 아리엘은 결국 알렌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저어, 알렌…….”

“예, 마님.”

방금까지 깐깐하게 하인들을 지휘하던 알렌이 더없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아리엘을 향해 돌아섰다.

아리엘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알렌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루시안에게 선물을 보내고 싶어서요. 같이 골라줄래요?”

그 순간 알렌의 입꼬리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라카트옐 남자들이 특유의 고압적인 기세로 상대를 무장해제 시킨다면, 아기 마님은 특유의 따스함으로 상대를 녹여버리곤 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요.”

승낙한 알렌은 흐뭇한 표정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작은 주인님의 선물을 가장 먼저 챙겨주시는군.’

늙은이 주책이 슬그머니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

아기 마님은 아직 어리시지만, 현 대공자 부부는 역대 대공가의 어떤 부부보다 서로 가까웠다.

일단 아기 마님이 대공가 남자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게다가 대공가 남자들이 안주인을 옆에 두고, 이름을 부르고,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알렌은 아기 마님을 향한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마음이 얼마나 특별한지 매일 곱씹어도 모자라지 않았다.

‘아기 마님도 작은 주인님을 남편으로서 조금은 신경 쓰시는 건가?’

마티어스보다도 루시안의 선물을 먼저 챙기는 아리엘을 보고 알렌은 희망을 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작은 주인님께 보낸 후에 큰 주인님께도 선물을 하실 겁니까?”

아리엘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루시안한테 보내고 나서 골라보려고요.”

“그러시군요.”

알렌은 가슴 속이 잔뜩 부푸는 것을 느꼈다. 라카트옐을 모신 이후 이런 기쁨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

그때 아리엘이 갑작스레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시선이 아련하게 먼 하늘로 향했다.

“마티어스님은 점잖으셔서 첫 번째로 선물을 못 받는다고 해도 화내지 않으실 테니까요. 루시안은 그런 거 못 참잖아요.”

“…….”

더 미친 분 먼저 챙겨준다 이 말씀이신가…….

알렌은 이 흐뭇한 광경이 철저한 불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슬픈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 * *


알렌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는데도 ‘루시안 선물 고르기’는 험난하기만 했다.

아리엘이 처음 생각했던 대로 루시안에게는 없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벌에 저택 한 채가 왔다 갔다 할 만한 옷.

아름답다기보다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고대 보석이 박힌 장신구.

이름있는 장인들이 만든 시계와 커프스 단추.

로열 아이언으로 만든 검…….

이 모든 것이 다 루시안에게는 발에 채이는 돌멩이같이 흔하고 값어치 없는 물건들이었다.

아리엘은 시무룩하게 물었다.

“이미 갖고 있는 걸 선물하는 건 의미 없지 않을까요, 알렌?”

알렌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충성스러운 집사인 그는 지금껏 루시안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왔다.

안타깝게도 그의 노력이 맺은 결실은 비극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사랑스러운 아기 마님을 위해 한 가지 정도는 빼놓을걸…….

결국,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편지를 보냈다.


[뭐 갖고 싶어요?]


그리고 며칠 뒤에 루시안에게서 답장이 왔다.

뜨악할만큼 고급진 종이에 제멋대로 휘갈겨진 오만한 한 문장.


[너. 너를 보내.]


어, 어째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은 거야?

루시안의 글은 그의 말투와 똑같아서 환청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

알렌과 함께 편지를 뜯어본 아리엘은 얼굴을 붉혔다.

알렌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못 본 척을 해주었다.

‘뭐야, 나를 어떻게 보내? 안 되는 것만 요구하고…… 루시안 바보.’

요하네스 아카데미는 남자 귀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금녀의 구역이었다.

아리엘이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게 규칙이었으니까.

아리엘은 결국 선물은 못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떨궜다.

그때 알렌이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박수를 딱 쳤다.

“찾았습니다!”

“네?”

“작은 주인님이 원하시는 것이면서도 저희에게 가능한 것!”

“정말요? 뭔데요?”

알렌이 뜸을 들이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초상화를 보내는 겁니다.”

초상화?

아리엘이 어리둥절해하자, 알렌이 얼굴을 환하게 빛내며 말했다.

“원래는 성년에 맞추어 초상화를 그리는 게 보통이지만, 그냥 취미로 초상화 작업을 하는 영애들도 있지요.”

무슨 생각인지 알렌은 싱글벙글했다.

“화가에게 의뢰해서 초상화를 보내드리면 대공자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알렌의 열띤 반응에 아리엘은 어쩐지 설득되어버렸다.

정말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만들어진 물건을 사서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정말 초상화를 보내볼까……?’


* * *


고민 끝에 아리엘이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결정을 내리자, 온 저택이 떠들썩해졌다.

그리고 그 일은 당장 마티어스의 귀에 들어갔다.

“제국 최고의 초상화가를 데려와라.”

마티어스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초상화가의 일정을 한 달간 통째로 선점했다.

거의 납치되다시피 대공가에 온 화가는 곧장 초상화 작업에 들어갔다.

“어디에서, 어떤 구도로 그리면 될까요?”

아리엘은 그냥 평범한 초상화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중 가장 관여를 하고 있는 건 마티어스였다.

“아무래도 낮이 환하니 예쁘겠지.”

“예. 그, 그럼 낮으로…….”

“아리엘은 밤에도 예쁘니 밤에도 하나 더 그려라.”

“예? 예…….”

초상화가는 무시무시한 대공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열심히 화폭 귀퉁이에 적어넣었다.

‘낮에 한 장, 밤에 한 장…….’

“실내에서 그릴까요, 야외에서 그릴까요?”

“햇볕에 오래 앉아있어야 하니 실내가 낫겠지.”

“예. 아무래도 실내로…….”

“하지만 야외도 예쁠 것 같으니 차양을 치고 하나 더 그려.”

‘실내에서 한 장, 야외에서 한 장…….’

그렇게 시작된 마티어스의 주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자세를 여러 가지로 그려.”

“내 방에 걸 초상화는 가장 큰 화폭에 그려라.”

“드레스 별로 한 장씩 그려.”

“일출부터 일몰까지 시간대별로 한 장씩…….”

“아리엘이 피곤하니 배경은 아예 네 상상으로 그리고…….”

마티어스는 마지막으로 화가에게 확실하게 못 박았다.

“그리고, 이걸 그린다고 우리 아이가 놀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할 거다.”

그 말은 곧 화가의 귀엔, ‘피곤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다 네가 알아서 해.’로 무시무시하게 해석되어 들렸다.

아리엘이 조금이라도 피곤해하면 죽음의 칸타타가 시작될 판이었다.

그렇게 졸지에 그림 노예가 된 화가는 울먹이며 자신이 총 그려야 할 초상화의 개수를 셈해보았다.

치사량에 가까운 양이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생각했다.

‘이걸 끝으로 은퇴해야겠구나…….’

한편 알렌은 루시안 선물용 초상화가 그려질 방을 꾸미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상화를 그릴 때는 의자, 옆에 놓는 오브젝트,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의 양까지 완벽해야 하지!’

아기 마님의 초상화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울 수 있도록 알렌은 단을 쌓고, 그 위에 비단 천을 덮고, 아름다운 의자와 휘장을 준비했다.

그리고 창에는 아주 얇고 투명한 천을 커튼으로 쳐서 햇볕이 부드럽게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그 방에 앉은 아리엘을 본 수잔과 하녀들은 눈물까지 왈칵 쏟으며 너무 예쁘다고 난리를 쳤다.

“진작 초상화를 그려서 여기저기에 전시해놓을 걸 그랬나 봐요!”

“이참에 아예 백 장쯤 그리시는 건 어떤가요? 포즈를 다 다르게 해서요!”

아리엘은 자신을 제외하고 들떠서 난리가 난 저택 사람들이 의아하기만 했다.

‘아니, 그냥 초상화일 뿐인데…… 어째서죠?’

하지만 저택 사람들 입장은 달랐다.

독점욕이 강한 대공가 남자들 때문에 사용인들은 아리엘에 관련된 물건 하나도 소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초상화라면 얘기가 달랐다.

비록 개인 소장을 할 순 없겠지만, 저택에 걸고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건 초상화가 유일했다.

당연히 그들로서는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도 다들 이렇게 좋아하니까…….’

결국, 주변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긴 아리엘은 결국 각종 포즈로 초상화를 잔뜩 그리게 되었다.

아름다운 피사체를 그리게 된 화가는 구슬땀을 흘리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더구나 대상이 대공자비님이시니 더욱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르게 그렸다가는 당장 목을 날려버릴 것 같은 기세로, 대공이 항상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티어스는 이미 초상화 하나를 챙겨 자신의 집무실에 커다랗게 걸어놓고 매일 흡족해하는 중이었다.

“다…… 끝났…… 습…….”

그림을 모두 완성한 초상화가는 모든 것을 하얗게 불태운 표정이었다.

“와.”

알렌의 노고 덕에 초상화는 아리엘의 마음에도 쏙 들게 그려졌다.

그녀는 완성된 초상화들 중에 주변인들이 가장 예쁘다고 하는 하나를 골랐다.

‘실물보다 예쁘게 나온 것 같긴 해.’

그녀는 초상화를 알렌에게 맡겨 포장하고, 루시안에게 선물이라는 편지를 써서 실링을 했다.

그리고 남이 안 볼 때 몰래…….

쪽.

아내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편지 겉봉에 입술 도장을 찍었다.

입술에 별다른 걸 바르지 않아서 편지 봉투엔 아무 자국도 남지 않았다.

‘루시안도 모르겠지? 크크.’

그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약간의 불길함이 느껴졌지만 괜찮았다.

‘설마 저번처럼 편지 보냈다고 아카데미에서 뛰쳐나오겠어?’

아리엘은 몰래 웃으며 게이트를 통해 편지와 선물을 부쳤다.


* * *


루시안에게 선물을 보낸 뒤,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선물을 골랐다.

이미 마티어스는 아리엘의 초상화를 받은 뒤였지만, 아리엘은 뭔가 따로 골라주고 싶었다.

‘내가 처음 번 돈이니까…….’

마침내 그녀가 고른 선물은 마티어스의 집무실 벽에 걸 수 있는 화려한 태피스트리였다.

마티어스의 집무실은 겉으로는 호화로웠지만, 내부는 무척 삭막했다.

주변이 바뀌는 걸 싫어하는 마티어스가 방 주인이다 보니 장식품을 최소화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리엘은 이제 알고 있었다.

마티어스가 단지 변화를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렌의 설명에 의하면 드래곤은 영역 동물이었다.

자기 영역 안을 외부인이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드래곤의 영역은 공간이 되기도 하고, 때론 시간이나 물건, 사람이 되기도 했다.

당연히 대공가 저택은 마티어스의 영역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 자신의 집 안을 건드리는 걸 싫어했던 것이었다.

그 말을 해주며 알렌은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마님께만은 두 주인님이 영역 안쪽을 허락하신 거지요. 그러니 저택을 바꾸도록 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

아리엘은 왠지 수줍은 기분에 살짝 뺨을 붉혔다.

알렌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건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마티어스는 원래 집무실 안의 장식품 하나도 바꾸지 못하게 했는데 아리엘이 온 뒤로는 달랐다.

그녀가 계절마다 커튼과 벽지를 바꿔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집무실 진열장에 장식품을 바꿔도 괜찮았다.

저택 사람들은 이걸 기적이라고 불렀다.

특별히 한 게 없는 아리엘은 그냥 민망하기만 했다.

‘왜 허락해주셨는지도 모르겠는 걸?’

아무튼 그녀는 장인에게 푸른 사자 기사단의 문양을 새긴 태피스트리를 주문한 뒤, 아래에 마티어스의 풀네임을 직접 수놓았다.


[마티어스 엘윈 라카트옐.]


선물을 받은 마티어스는 당장 태피스트리를 벽에 걸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집 안의 행정관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소집해서 회의를 열었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달튼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

“이것 좀 봐라.”

“아, 이거…… 대공가의 문장이네요! 그림이 엄청 섬세하고 아름답습니다.”

“…….”

마티어스가 마음에 안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눈이 안 좋나 보군.”

짜증스럽게 내뱉은 그가 다음 행정관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너, 네가 말해봐라. 어떤지.”

모두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대공 각하가 어떤 답을 원하시는 것 같은데 그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숨 막히는 공포가 그들의 숨을 턱턱 막았다.

다음으로 지목받은 행정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태피스트리를 샅샅이 훑었다.

“어…… 재질이 훌륭하고, 푸른 사자가 그림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고…….”

“다음.”

마티어스가 차갑게 말을 끊었다.

그런 식으로 두 명이 더 지나가자 마티어스는 당장 누구 하나를 죽일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따위 눈들을 가지고 어떻게 일을 하는 거지? 형편없군.”

행정관들은 일제히 벌벌 떨었다.

‘무서워……!’

대체 왜 이러시는 거람?

회의한다고 불러놓고 갑자기 태피스트리 구경을 시키시다니.

마티어스가 뭘 원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당장 정답이 안 나오면 행정관들의 눈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그때 달튼이 재빨리 말했다.

“아. 오른쪽 아래에 대공 각하의 존함이 새겨져 있군요!”

그제서야 마티어스가 눈에 힘을 풀었다.

평소의 권태로운 표정으로 돌아간 그가 슬쩍 미소를 띠었다.

“그래. 아리엘라가 직접 새긴 거다.”

“아기 마님께서요?”

“나에게 주려고 직접 수놓았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직접.”

마티어스의 눈빛이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얼른 칭찬해.’

드디어 정답을 깨달은 행정관들은 영혼의 밑바닥까지 긁어서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 어쩐지 사자보다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은 글씨인데도 엄청난 존재감입니다!”

“대공자비님께서 직접 수까지 놓으시다니 정말 정성이 듬뿍 들어갔군요!”

마티어스가 수려한 흑발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있다면 그래야지. 계속해라.”

집무실 안에 있던 모든 행정관들이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설마 저거 자랑하려고 부르셨던 건가?’

무감정한 대공님에게서 상상하지도 못한 팔불출 모습이었다.

그들은 더욱 열심히 아리엘의 자수를 찬양했다.

실컷 찬양을 듣고 흡족해진 마티어스가 대강 그들에게 서류철을 나눠줬다.

“일이다. 알아서 검토하도록.”

서류 뭉치를 든 채 내쫓기듯 나오며 행정관들은 생각했다.

‘회의는 이용당했어…….’

일은 핑계였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은 그들이었다.


* * *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마티어스와 아리엘은 저택 호숫가로 산책을 나갔다.

유난히 하늘이 맑아서 별이 가득 펼쳐진 밤이었다.

밤에 호숫가까지 산책을 나오는 건 드문 일이라 아리엘은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바쁜 마티어스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함께 산책해준다는 걸 알기에 더 기뻤다.

타닥타닥 돌길을 걷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리엘의 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걷던 마티어스가 말했다.

“곧 있으면 푸른 달이 뜨겠지.”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밤하늘에 거의 다 찬 황금빛 달이 떠 있었다.

마티어스의 말대로 며칠만 더 있으면 ‘블루 블러드 문’. 즉 푸른 만월의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마티어스가 귀여운 것을 만지듯 아리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틀 정도 집을 비울 거다. 매번 미안하구나.”

아리엘은 배시시 웃었다.

나도 이제 다 컸는데, 매번 이렇게 어린애 취급이시라니까.

그녀는 마티어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장난스레 말했다.

“오실 때 ‘메리어즈’에서 맛있는 케이크를 사다주세요. 그럼 혼자 저녁을 먹게 만든 건 넘어가 드릴게요.”

마티어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예 케이크 담당 파티쉐를 사오면?”

아니, 그건 좀…….

하하, 라카트옐 남자들은 너무 극단적이라니까.

아리엘은 이미 이 집 남자들을 정상적으로 설득하는 걸 포기한 뒤였다.

라카트옐 남자들은 인간의 관점으로 ‘그러면 안 돼요’, 하고 말하면 왜 안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뭐, 인간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만.

“안 돼요. 저번 초콜릿 분수대처럼 장인들을 데려오시면 저 화낼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강조하듯 열심히 덧붙였다.

“저는 우리집 홀슨이 만드는 케이크가 더 좋아요.”

아리엘에게 뭔가 해줄 기회를 놓친 마티어스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했다.

“케이크는 사오마.”

다시 산책이 이어졌다.

아리엘은 달을 보며 멀리 떨어져 있을 루시안을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내가 보낸 선물이 도착했으려나?’

게이트로 보내긴 했지만 그림이라 특별 배달을 해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며칠은 더 걸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곧 블루 블러드 문이 뜨면 루시안도 영향을 받겠구나.’

4년 전 생일에 봤던 루시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낯설게 변한 눈빛, 온몸에 뒤집어쓴 피, 고통에 잠식된 얼굴.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마티어스님.”

“그래.”

“블루 블러드 문이 뜨면, 많이 힘든가요?”

마티어스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게 왜 궁금하지?”

“……책에서 읽었어요. 푸른 달이 드래곤의 피를 흥분시킨다고요. 하지만 그때 루시안은…… 단순히 흥분상태라기엔 많이 고통스러워 보였거든요.”

그녀의 말을 들은 마티어스는 멀리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나쁜 기억이 떠오른 사람처럼 그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그래. 지독한 고통이지.”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딘지 아득하게 들렸다.

마티어스가 나직이 물었다.

“아리엘. 왜 푸른 달이 라카트옐에게 고통을 주는지 아느냐?”

“……아니요.”

“라카트옐이 인간의 껍데기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마티어스가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드래곤은 인간의 형상 안에 가두기엔 너무 강한 존재지. 그래서 초대 라키엘은 자신의 심장과 두 눈을 뽑아낸 뒤에야 인간으로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낮은 한숨과 함께, 그의 말이 계속됐다.

“그리고 뽑아낸 제 신체 부위를 누구도 찾지 못하도록 없애버렸지. 자신과 제 후손들을 영원히 인간의 몸 안에 가두기 위해.”

아리엘은 소름 때문에 몸이 잘게 떨려오는 걸 느꼈다.

몇 천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인데, 마티어스는 꼭 어제 일을 얘기하듯 담담했다.

“라카트옐이 타락에 물든 마수들을 제거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가 자신의 아름다운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그렇게 라카트옐은 갇혀서 다시는 암흑의 드래곤, 라키엘의 육신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블루 블러드 문이 뜨면…….”

그가 탄식하듯 웃었다.

“라카트옐의 피는 옛날처럼 태고의 용에 가까워진다. 힘이 폭주하면서 인간의 껍데기가 괴로워하는 거다. 온몸이 뜯겨나가는 듯한, 세포 하나하나가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

“마티어스님…….”

“살육을 위한 큰 힘의 대가. 인간들은 이런 걸 업이라고 하더구나.”

“마티…….”

아리엘은 그를 부르다 말고 목이 메어 말을 맺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엔 눈물이 한가득 고여있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그냥 달이 뜰 때마다 폭력성이 극대화되는 게 아니었다.

매번 끔찍한 고통을 버텨내야 하는 거였다.

그리고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니.

가엾어서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

어째서 나는…… 라카트옐에만 관련되면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걸까?

달빛을 받은 하얀 뺨 위로 툭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리엘의 눈물을 본 마티어스가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리엘.”

“싫어요, 그런 거.”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제국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마수를 죽이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라카트옐만 살육의 업보를 받아야 해요? 업이 있다면 다 같이 받아야죠. 왜 그렇게 아픈 일을 혼자서…….”

후손들을 인간의 몸에 가둬버린 초대 용 라키엘이 미웠다.

만날 수만 있다면 혼내주고 싶었다.

“그럼 라카트옐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마티어스가 그녀 앞에 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큰 손이 아리엘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냈다.

“……넌 정말 나를 속절없이 만드는군.”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마티어스의 커다란 손이 그를 위해 울어주는 소녀의 작은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이 순간에도 야속한 달은 계속 푸른 달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 * *


밤이 가장 깊고 어두울 시각.

달빛도 숨을 죽인 푸른 밤이 요하네스 아카데미가 세워진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기숙사 중에서도 한 건물은 유독 빛 한 점 새어 나오지 않고 어둠에 잠겨있었다.

아카데미 소속 시종은 저녁마다 각 기숙사를 돌며 학생들에게 온 물품을 배달했다.

남자 귀족들과 황족들로 이루어진 이 아카데미에 오는 물품은 거의 값진 군것질거리나 금화가 든 용돈 주머니였다.

평범한 일과인데 시종이 잔뜩 긴장한 이유는 오늘 라카트옐 대공자에게 물건을 배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포장된 큰 액자를 조심조심 들고 루시안이 혼자 지내는 기숙사 동까지 간 그는, 심호흡을 스무 번쯤 하고서야 도어 노커를 움직여 소리를 냈다.

“대공자님. 본가에서 물건이 왔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겨우 말했는데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좀 더 세게 노커를 두드렸다.

다른 학생들은 기숙사 건물을 같이 쓰는 반면, 라카트옐 대공자는 한 건물을 혼자서 쓰고 있었다.

한 층만 혼자서 쓰는 황태자 디트리히가 검소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온 건물에 들릴만큼 열심히 노크를 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뭐지, 안 계시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냥 가려는 순간, 바람에 밀려났는지 바깥문이 삐그덕 열렸다.

“……?”

그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없었다.

시종은 아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 있다가 걸리면 그 날이 장례식이겠지.’

라카트옐 대공자에 대한 소문은 아주 흉흉했다.

그의 기숙사 지하에 고문을 위한 밀실이 따로 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는 서둘러 포장된 액자를 아주 조심스럽게 문 안쪽에 세워놓았다.

대공자와 만나지 않고 배달을 할 수 있는 건 아주 행운이었다.

배달을 마친 시종은 걸음아 날 살려라 문을 빠져 나왔다.

문을 꼭 닫아놓고 줄행랑을 치던 그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잘못 들었나?’

기숙사 안에 있는 대공자의 방.

그 안을 달빛이 언뜻 비추었다.

블루 블러드 문의 빛이 비춘 곳엔 핏방울이 검붉게 바닥을 물들이며 번져있었다.

널찍한 침대 위에 처참하게 찢어진 베개가 깃털을 날리고, 엉킨 침구엔 피가 엉망으로 묻어있다.

누군가 찢어발긴 듯한 카페트와 커튼에도 핏자국이 가득했다.

흰 이불이 바닥을 향해 늘어진 곳에는 옆 협탁에서 떨어진 유리 장식품이 산산조각 나 사방에 깔려있었다.

그 옆에 신음을 뱉으며 쓰러져 있는 것은 대공자 루시안이었다.

깨진 유리가 박힌 등에서 나온 피가 셔츠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지만, 그는 그 고통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흐윽……! 큭…….”

예술적으로 빚어진 붉은 입술이 괴로운 숨을 토해냈다.

찢어진 셔츠 틈으로 파고든 그의 손톱이 제 살을 파고들어 상처를 냈다.

살점마저 긁혀 나올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고 싶을 만큼 지독한 고통.

고통스럽게 몸을 뒤트는 그를 창밖의 푸른 달이 조롱하듯 비추고 있었다.


* * *


새벽녘, 달이 지고 나서야 루시안의 고통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끓던 피가 식고 주위의 모든 생명체를 살육하고자 하는 욕망이 흐려졌다.

느리게 몸을 일으켜 자신을 살펴보자, 피범벅이 된 옷과 피가 가득한 손이 보였다.

“…….”

성년이 가까워져 올수록, 그가 강해질수록 푸른 달이 주는 고통은 더욱 커졌다.

달이 뜨기 전까지는 폭력성이 날뛰어서 마수 사냥을 다녀오거나 산에 처박혀 모든 생명체의 씨를 말려야만 했다.

그리고 달이 뜬 밤이면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에서 혼자 고통을 삭이는 것이다.

루시안은 너덜너덜해진 셔츠를 벗었다. 조각 같은 상체가 드러났다.

피를 흘렸던 살갗은 자연적으로 치유되어 상처의 흔적 없이 매끄러웠다.

깨진 유리를 버적버적 밟으며 일어난 그는 비틀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비참함이 핏속을 떠돌았다.

“하, 인간들은 잘도 눈물을 흘리던데.”

라카트옐은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아무리 아파도, 어떤 감정을 느껴도 울 수 없었다.

라카트옐이 흘리도록 허락된 것은 오직 피뿐, 눈물은 아니었다.

유리에 찔린 맨발이 걸음마다 피로 족적을 남겼다.

그는 몇 시간 전 찾아왔던 인간의 기척을 기억하고 문으로 다가갔다.

깜깜한 가운데서도 그의 눈은 쉽게 문에 세워진 액자를 발견했다.

“이건 뭐야.”

그는 손끝을 까닥여 포장지를 찢어내고 안의 것을 꺼냈다. 묵직한 액자는 루시안의 손안으로 홱 빨려 들어왔다.

“…….”

잠시간 그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짙은 청안으로 액자에 끼워진 그림을 바라보았다.

“……흐으.”

마침내 그가 우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어진 것은 광소(狂笑)였다.

한차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은 그가 중얼거리듯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아리엘…… 아리엘라.”

액자 안에 담겨 창가에 비스듬히 앉은 그녀에게 봄의 햇살이 가득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달콤하기 그지없어 당장 삼켜버리고 싶은 형상.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캄캄한데, 그림 안의 그녀에게서 태양이 비쳐나오는 듯했다.

열망이 핏속을 다시금 달구며 타올랐다.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뜨거움이 아니라 갈망하게 만드는 뜨거움이다.

“이건 아니야.”

죽이고 싶은 욕망.

죽고 싶은 욕망.

두 가지가 전부인 삶이었다.

그런데 대체 이 감정은 뭔지.

“내 피 때문인지, 너 때문인지…….”

먹잇감에 불과한 너를 왜 이토록 원하는지.

그는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사람처럼 말을 내뱉었다.

“다 죽여버릴까, 아리엘. 어차피 널 찾으려고 살려놨던 것들인데. 이미 널 찾았으니 다 죽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러면…….

바닥에 주저앉은 루시안은 쿡쿡 웃다가 대리석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얼음같이 차가운 대리석이 벗은 등에 닿았다.

팔로 얼굴을 가린 그가 신음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보고 싶어.”

액자 속의 아리엘이 고요히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초상화가 도착한 다음 날, 대공자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은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게이트를 여섯 개나 넘어 도착한 그는 예정에 없는 난입으로 저택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건 아리엘이었다.

‘편지만 보내면 돌아오는 건 뭐야, 무서워!’

그러고 보니 4년 전 생일 때에도 루시안에게 편지를 보내려다가 그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못 보내지 않았던가.

내가 편지 쓰는 것을 감지해내는 감각이라도 있나?

화이트 가든에 있다가 루시안이 돌아왔단 이야기를 듣고 봉변을 당한 아리엘은 서둘러 저택 안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집사 알렌이 그녀를 보고 얼른 귀띔을 해주었다.

그도 얼마나 놀랐는지 늘 깔끔하게 빗어넘긴 알렌의 백발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돌아오시자마자 마님 방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알렌.”

아리엘은 드레스 자락을 들고 총총 계단을 올랐다.

이동 마법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루시안을 보기 전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는 워낙 다른 사람의 정신을 뒤흔드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으니까.

일단 얼굴부터가 말야.

분홍색 문양이 있는 우윳빛 문을 열고 들어가자 루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방, 그는 그늘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반대편 벽을 느른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가장 깊은 밤의 어둠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흑발과 석양빛을 받아도 색이 바래지 않는 선연한 푸른 눈.

방 안을 가득 채운 햇빛이 그를 둘러싸자 그의 외양은 일견 신을 조각해놓은 것 같이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루시안?”

아리엘이 그에게 다가갔지만, 루시안의 시선은 여전히 반대편 벽에 고정돼 있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내 초상화?’

이번에 루시안에게 보낸 것 말고도 아리엘은 작업한 초상화 중 하나를 방에 걸어둔 상태였다.

그때 루시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게 어떻게 너야?”

“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시안의 눈동자 안에는 섬뜩한 불쾌감이 가득했다.

“너랑 전혀 다르잖아. 그린 놈 이름 불러. 당장 죽일 테니.”

“…….”

아리엘은 뾰로통하게 입술을 모았다.

맘에 안 드는 놈 이름 부르라는 건 부자 유전이야 뭐야.

오자마자 할 말이 그거밖에 없나요?

그녀는 팩 고개를 돌렸다.

“실물보다 잘 그려진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요.”

원래 초상화는 실물보다 좀 더 예쁘게 그려야 기분도 좋고 그런 건데…… 미워.

그런데 루시안이 그녀의 얼굴을 한 손으로 덥석 붙잡아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뭐라는 거지? 저 쓰레기 같은 그림의 어디가 널 닮았다는 거야.”

응?

실물보다 너무 예쁘게 그려져서 화내는 거 아니에요……?

그가 강렬한 시선으로 아리엘을 샅샅이 훑었다.

“네 머리카락 색도 저 그림 같은 색이 아니고…… 눈동자도, 피부도, 속눈썹도, 귀도, 입술도 다 다르게 생겼잖아.”

아리엘은 눈만 깜박거리며 듣고 있다가 붉어지는 얼굴을 느끼고 얼른 발버둥을 쳤다.

“아, 알았으니까 놔 줘요.”

그녀가 손으로 밀쳐내려는 걸 루시안이 쉽게 막았다.

그는 잡아챈 아리엘의 손을 느긋하게 잡아올려 손가락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면서 빤히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는 그가 너무 야살스럽고 요염해서 아리엘의 얼굴은 확 달아올랐다.

루시안이 먹음직스런 만찬 앞에 앉은 사람처럼 흡족하게 속삭였다.

“……넌 씹어 먹어버리고 싶은데. 저 그림은 전혀 그 느낌이 없다고.”

새빨개진 아리엘은 꼼짝도 못하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왜, 왜 이렇게 뭐랄까…… 야한 거야?

‘어딘가 야윈 것도 같고……?’

그가 할짝거리며 손끝을 핥을 때에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팍 루시안을 밀어낸 아리엘이 외쳤다.

“먹는 거 아니라구요! 바보!”

아리엘은 루시안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콩콩 내리쳤다.

루시안이 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좋은데.”

“네?”

“더 때려 봐.”

“뭐라고요? ……앗.”

그가 아리엘을 확 끌어당겨 안았다.

아리엘은 루시안 품속에서 납작해져서 웅얼거렸다.

“읏, 숨막…….”

“더 안 때릴 거면 안기든가.”

뭐야, 정말 자기 맘대로야…….

세게 안고 있다가 놓아준 루시안은 아까보다 만족스러워 보였다.

숨을 할딱이며 품에서 놓여난 아리엘은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근데, 어떻게 왔어요?”

루시안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악랄하게 대답했다.

“제국 사냥대회 참가하러.”

“아직 보름이나 남았는데?”

그가 오만하게 혀를 찼다.

“아리엘라. 힘과 권력이 왜 있다고 생각해? 쓰라고 있는 거지.”

그 말은 힘과 권력을 남용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루시안?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리엘 탓을 했다.

“네 잘못이야. 네가 얼토당토않은 초상화를 보내니까 열 받아서 올수 밖에 없었던 거 아냐.”

와…… 불리하면 남 탓이야.

하지만 아리엘은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도 초상화보다 내가 낫다니까 기분은 좋네요.

속으로만 말하며 그녀는 루시안과 식당으로 내려갔다.


* * *


그날 밤, 아리엘은 루시안 방에 있는 표범 가죽이 깔린 긴 의자에 앉아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업 얘기, 친구들 얘기. 마도구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 얘기까지 하자 해도해도 끝이 없었다.

이야기에 히스 얘기가 몇 마디 들어가자, 느슨한 자세로 아리엘의 이야기를 듣던 루시안의 눈매가 오싹하게 가늘어졌다.

“내 얘기도 좀 물어보지?”

“……아.”

혼자서 재잘재잘 얘기하고 있던 아리엘은 조금 미안해졌다.

그녀는 허리를 똑바로 하고 경청하는 자세를 잡은 뒤 물었다.

“흠, 흠. 루시안은 어떻게 지냈어요?”

이쪽은 나름 진지한데 루시안은 유희를 하듯 나른하게 되물었다.

“어땠을 것 같아?”

“……얘기해준다는 거 아니었어요?”

슬쩍 웃은 그가 그녀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야 평소 같았지. 귀찮게 구는 것들을 두엇 잡았고, 그 참에 신축되고 있는 건물이 다시 돌조각으로 돌아갔고.”

아리엘의 입이 벌어졌다. 사람을 혼내주는데 건물이 산산조각 나면 어떡해?

그녀는 최소가 사망이었을 인간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루시안이 손가락으로 융단 휘장이 드리워진 침대 머리를 톡톡 두드린 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롬 루실리온 소식을 들었지.”

뜻밖의 이름에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안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오라버니를요?”

“그래.”

짧게 대답한 그가 무심한 듯 말했다.

“이번 사냥대회에 후작과 함께 참석한다더군. 후작가에서 먼 친척 하나를 데려와 데뷔시킨다던데.”

“아…….”

아리엘은 눈을 깜박이며 놀란 티를 감추었다.

‘친척 아이를 데뷔시킨다니?’

사실 그런 게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귀족계에서는 형편이 어려운 친척의 데뷔를 위해 넉넉한 집에서 후원을 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만약 자질이 있다면 수양딸로 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제롬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걸.’

후작과 제롬은 그녀가 아는 누구보다도 잔악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편지에서 읽기로는 사업이 잘 안 풀려, 형편이 좋지 않다고 했었다.

둘 다 무슨 생각인 거지……?

아리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루시안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날카롭게 그녀를 살피는게 느껴졌다.

그가 묘하게 긴장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신경이 쓰이나?”

아리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과거와 달리 그녀는 가족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이번 일은 과거 그녀가 ‘그’에게 팔려간 뒤의 시점이라, 과거와 그대로인지 알 수 없어서 걱정스러운 것뿐이었다.

“이제 상관없는 사람인데요. 편지 왔던 것도 다 무시했고요.”

“편지가 왔었어?”

맞다. 루시안은 모르지……?

아리엘은 서둘러 수습했다.

“왔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마티어스님이 별거 아니라고 치우셨고요. 루시안은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래.”

루시안은 천천히 말하며 픽 웃었다.

아리엘이 가족들에게 연연하지 않는 걸 보니 기분이 흡족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쓰레기같은 그것들에게 애정이 있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내가 머지않아 짓밟아 놓을 테니까.’

루시안의 눈이 잔혹한 이채를 띠었다.

그나저나 편지…….

‘그래, 그랬었지.’

아리엘은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생각인 것 같지만, 이미 그는 아카데미에서 아리엘에게 온 편지에 대해 모두 보고받은 상태였다.

‘명을 단축시키는군.’

루실리온 후작가가 아리엘에게 한 짓을 알면서도 후작가를 여태 쳐부수지 않은 것은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아리엘의 '위신'을 위해서.

아직 어린 아리엘이 사교계에서 뒷말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남편이 친정을 부서뜨린다면 분명 구설수에 오를 테니까.

‘물론 멋대로 말하는 입들을 모두 죽이면 깔끔하겠지만…….’

루시안은 서늘하게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의 선량한 아내는 벌레들을 죽이는 데에 굉장히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입을 벙긋하는 것들마다 죽인다면 조용히 처리하긴 어려워질 것이다.

그럼 아리엘의 귀에도 들어갈 테고.

하지만 후작가를 가만히 놔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루시안의 계획은 지금 이 순간에도 차근차근 하나씩 진행되고 있었다.

‘천천히 망가뜨려 자멸하게 하려고 했더니.’

감히 그런 편지를 보냈다라…….

루시안은 오싹한 냉소를 띠었다.

그가 조용하자, 얼른 화제를 돌리려는 듯 초조한 아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또 무슨 일 없었어요?”

다른 일 없었냐고 말한 다음에서야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있었을 일을 떠올렸다.

블루 블러드 문이 떴던 게 고작 며칠 전이었다.

“……아.”

지금 대단히 오만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앉아있는 루시안이 끔찍한 고통을 겪은 게 얼마 전이라는 뜻이었다.

아리엘은 머뭇머뭇 덧붙였다.

“그, 푸른 달 떴을 때…… 힘들었죠. 많이 아팠어요?”

루시안은 아리엘의 눈동자 안에 있는 동정을 곧장 알아보았다.

다른 인간이 그에게 감히 동정심을 갖는다면 당장 고통스럽게 죽여줄 테지만 아리엘이 그러는 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새벽녘에 그녀를 갈구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는 짐짓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심각했지.”

그의 대답에 아리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마티어스에게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모를까, 라카트옐이 가진 힘의 대가가 뭔지 알고 나자 루시안이 가엾고 안타까웠다.

금세 울상을 담는 조그마한 얼굴을 보며 루시안은 만족스러움을 받아 챙겼다.

저 얼굴이 계속 곁에 있다면 아픈 것 따위는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의 입에서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아, 네 목만이라도 떼서 갖고 다닐까.”

잠깐. 왜 말이 그렇게 돼요?

아리엘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녀가 굳자 루시안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님, 내 목만 두고 갈까?”

아뇨! 싫어! 아리엘은 탄식했다.

이 남자는 사고방식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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