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0장 (10/23)
  • 10장




    짙은 피 냄새가 나는 루시안의 몸이 움찔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그의 어깨를 적셨다.

    유독 라카트옐 남자들의 감정은 그녀에게 자기 것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어째서일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일까?

    아리엘은 말랑한 뺨을 그의 어깨에 묻고 울먹이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루시안은 재앙이 아닌걸요. 적어도…… 적어도 나한테는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거야.”

    “거짓말.”

    딱딱하게 굳은 그가 방어적으로 씹어뱉었다.

    “아냐. 루시안을 만나고 나는 좋은 일만 생겼어요. 많이 아팠는데, 슬펐는데 이젠 안 그래. 그런 루시안이 재앙 같은 거일 리 없어요.”

    “……거짓말.”

    절망한 듯한 루시안의 대답이 귓전에 울렸다.

    그가 그녀를 떨치고 밀어내려는 듯 거칠게 호흡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파괴시킬 듯 폭발 직전이었던 루시안의 기세가 혼란스레 흔들렸다.

    아리엘은 흐느끼며 그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루시안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재앙이 어디 있어요? 다른 사람한테는 다 그래도 나한테는 아니니까…… 제발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요, 루시안, 제발…….”

    마지막 말은 울음에 먹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때, 루시안이 별안간 그녀를 난폭하게 끌어안았다.

    위안을 갈구하는 이의 몸짓이었다.

    “거짓말.”

    너무 세게 안아서 아리엘은 아팠다.

    그가 힘을 조절하지 않고 무작정 누르고 있는 등이나 억지로 눌린 갈비뼈 부위엔 금세 멍이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점점 그에게서 검은 피가 옮아 번지기 시작했지만, 아리엘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더욱 절박하게 루시안을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대로 그녀는 몸을 빼지 않았다.

    오래, 오래도록.


    * * *


    한참 뒤, 루시안의 숨소리가 조용해지자 아리엘은 중얼거렸다.

    “이제…… 괜찮아요? 안 아파요?”

    그에게서 가장 강렬하게 느껴진 건 정신적 고통이었지만,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동안 루시안은 육체적으로도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것도 아마 블루 블러드 문의 영향이겠지.

    그녀의 물음에 루시안은 한참만에 낮게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아, 맞다.

    아리엘은 자신을 지키러 따라온 두 기사를 떠올렸다.

    “헥터랑 랄프가 걱정할 텐데…….”

    “내가 결계를 쳐놔서 못 들어온 거야. 내 흔적을 알아보고 물러갔겠지.”

    아리엘이 바르작거리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하자 루시안이 놔주지 않고 다시 끌어당겼다.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

    적막이 지나가고, 갈라져 더욱 뇌쇄적으로 들리는 목소리로 루시안이 말했다.

    “생일 선물을 줄게. 아리엘라.”

    아리엘은 그의 어깨에 입술을 묻고 웅얼거렸다.

    뭔데요?

    “나.”

    네?

    “언젠가 한 번쯤은 너를 위해 날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지.”

    그렇게 말한 그가 품에서 아리엘을 떼어 내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기억해. 오직 너를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걸.”

    루시안의 말이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려서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리엘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피로 흠뻑 젖은 루시안은 방만한 자세로 벽에 늘어져 기대있었다.

    아리엘은 꼬물꼬물 그 옆에 가서 무릎을 세우고 웅크려 기댔다.

    한참 그를 흘끔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근데요, 루시안.”

    “그래.”

    “책에서 읽었는데요, 진짜 인간을 제물로 먹어요?”

    아리엘은 루시안이 줬던 목걸이를 떠올렸다.

    가느다란 나비 모양 참 아래에 물방울 다이아가 달린 목걸이.

    그는 그녀가 나비를 닮았다고 했었다.

    “혹시 나도…… 먹어치우려고 데려온 거예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데.”

    아앗?!

    루시안이 나른한 목소리로 쿡쿡 웃었다.

    “아직은 먹을 것도 없으니 안심해.”

    잠시 푸른 달이 주는 서늘한 안식이 둘 사이를 찾아왔다.

    아리엘은 자꾸만 내려가는 눈꺼풀을 붙들었다.

    썰매놀이와 목욕으로 지친 어린 몸이 졸리다고 아우성을 쳤다.

    “근데요.”

    “그래.”

    “옷에 묻은 거 누구 피예요?”

    “가고일.”

    “엑.”

    가고일도 엄청 무서운 괴물이라고 들었는데 그걸 막 저렇게 잡았단 말이야?

    아리엘은 눈을 도르르 굴렸다.

    “근데요, 루시안.”

    “어.”

    “왜 아카데미에 있는 거예요?”

    루시안이 야살스럽게 웃었다.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네, 꼬맹이.”

    아리엘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궁금한 걸 어떡해.

    “안 가도…… 아무도 못 막는 거 아녜요?”

    무려 제국의 수호신인 드래곤인데.

    “라카트옐이라는 이름으로 정체를 감추고 사는 대가야. 병신같은 황가가 걱정을 했거든.”

    “무슨 걱정이요?”

    “자기들이 학살당할까 봐. 그래서 라카트옐에게 인간이란 존재를 학습시키려는 거지. 애당초 같잖은 교육 따위로 되는 게 아닌데 말이야.”

    아리엘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학살하지 않았잖아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

    루시안이 삐딱하게 미소지었다.

    “굳이 다 없애야 할 이유를 못 찾았기 때문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사락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너 같은 특별한 존재 때문이기도 하지.”

    아리엘은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에게서 아까처럼 괴로운 기색이 나타나지 않아서 안심이 될 뿐이었다.

    “루시안. 내 생일에 여기 있을 거예요?”

    루시안이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짓궂게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 촛불도 못 끄게 훼방해주지.”

    “칫…….”

    아리엘은 결국 꾸벅꾸벅 졸다가 루시안에게 들려서 방으로 옮겨졌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헥터와 랄프가 안심하며 뒤를 따랐다.

    침대에 누워 따스한 이불에 뺨을 부비며 아리엘은 루시안의 정체를 곱씹었다.

    대공가의 비밀을 알아버렸지만, 그녀는 돌이키고 싶지 않았다.

    지나치게 깊이 관여해버린 것 같아 느낀 아찔함은 잠시뿐이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난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 * *


    눈을 뜨자 생일날 아침이 밝아있었다.

    열 살에서 열한 살이 되는 특별한 날.

    아침부터 저택 안은 맛있는 음식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만찬 때문에 기사단 쪽도 떠들썩했다.

    루시안은 마티어스와 기사단에게 대강 얼굴을 비추고 생일 주인공 옆에 눌러앉았다.

    아리엘은 아침부터 생일 선물을 뜯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이아나의 선물, 세실의 선물, 수잔의 선물.

    황제 부부가 보낸 것, 황태자가 보낸 것.

    수도 저택 사람들이 준 선물, 브루노어…….

    “선물이 너무 많아요.”

    솔직히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특히 마티어스가 쌓아놓은 무더기는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었다.

    큰 마차에 한가득 실어도 자리가 모자랄 것 같았다.

    아리엘이 백 스물한 번째 선물 리본을 푸는 걸 구경하던 루시안이 불쑥 말했다.

    “나도 선물 줘?”

    여기에 더하겠다고? 절대 사양이다.

    “이미 줬잖아요, 어제.”

    “그건 그거고.”

    오만하게 대꾸한 루시안이 선물을 고민하는 듯 수려한 미간을 찌푸렸다.

    아리엘은 재빨리 말했다.

    “돈 드는 건 안 받을래요. 보석도요.”

    루시안이 사납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아리엘은 우물쭈물 말했다.

    “그냥…… 싫어요. 루시안한테 뭐 받는 거…….”

    그녀의 말을 들은 그의 눈빛이 확 타올랐다.

    “마티어스랑 다른 것들 선물은 다 받았잖아. 젠장, 왜 내 건 안 받아?”

    그에게는 나름 인내한 역사가 있었다.

    지난번 나비 목걸이를 선물했을 때도 아리엘이 꼭 저런 표정을 지으면서 ‘이유가 없다면 받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루시안은 아리엘의 턱을 잡아 올리며 으르렁댔다.

    “이유가 뭐야. 말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아리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빨갛게 뺨을 붉힌 그녀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맨날…… 나만 받잖아요. 나는 루시안하고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아요. 받기만 하는 그런 거.”

    그 말이 루시안에게는 어차피 너한테 기대 안 한다는 소리로 들려서 그의 화를 더욱 돋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루시안은 나한테 뭘 줄 의무가 없다니까요.”

    “내가 주고 싶으면 주는 거야.”

    “이건 내 마지막…….”

    아리엘은 뭐라 말하려다가 뾰로통해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

    마지막 자존심이라고요.

    그녀가 아무리 평범한 아내 남편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알았다.

    선물이란 주고받는 것이지 한쪽만 주거나 받는 게 아니다.

    아리엘은 여태 루시안에게 사는 것보다 훨씬 못한 손수건 같은 것만 줬고, 그가 아리엘을 후작가에서 빼내 준 것처럼 좋은 일을 해주지도 못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못 해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녀가 가진 것이 뭐든, 루시안이 이미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못할 테니까.

    그녀도 할 수만 있다면 루시안에게 비싼 선물을 주거나 위험에서 구해주고 지켜주고 싶지만 다 불가능하니 어떡하겠나.

    ‘받지라도 말아야지.’

    더불어 아리엘은 자신이 루시안에게 기대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무언가를 받다 보면 그것에 익숙해지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할까 봐.

    어차피 나중에 이혼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는 건 곤란했다.

    결과적으로 루시안에게만큼은 선물을 받지 않는 게 그나마 마음 편하게 옆에 있을 방법이었다.

    그녀는 팽하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튼 싫어요.”

    “오늘따라 고집을 부리는데.”

    “오,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명령도 하지 말아요.”

    루시안이 진심으로 성가시다는 듯 눈가를 짚었다.

    “이게 정말…….”

    그가 깊이 화난 것 같았기에 아리엘은 선물 몇 개를 들고 다른 방으로 도망쳤다.

    줄행랑이란 건 참 좋은 거야.


    * * *


    결국 아리엘은 선물을 다 풀어보지 못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저택 사람들과 기사단이 모두 모여 축하 만찬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주인공 자리에 앉은 아리엘은 줄줄이 들어오는 황홀한 음식들을 보며 얼이 빠져버렸다.

    레몬 버터에 졸인 새우와 해산물, 로스트 비프 스테이크.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안에 속 재료를 채운 랍스터 요리.

    그리고 허브로 구운 새끼양 통구이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사과나무로 훈연한 닭 요리는 깨물면 안에서 녹은 치즈가 듬뿍 터져 나왔다.

    그 외에도 피칸파이, 리치 오렌지 크림을 넣은 크레이프, 유리볼 한가득 알콜 없는 과일 펀치가 연이어 나왔다.

    어린 아리엘의 생일이니만큼, 초대받은 손님들은 술은 마시지 않고 알콜을 모두 날린 뱅쇼와 과일 펀치로 목을 축이며 음식을 즐겼다.

    핏기가 가시지 않은 비프 스테이크만 썰고 있던 루시안이 아리엘 앞으로 휙 뭔가를 내밀었다.

    물건에서는 짤그렁 하는 소리가 났다.

    “자. 생일 선물.”

    아리엘은 경고하듯이 삐약거렸다.

    “루시안.”

    “네가 뭐라든 난 내 마음대로 해.”

    그리고 그가 자연스레 협박했다.

    “안 받으면 가만 안 둘 거야.”

    아리엘은 마지못해 선물이라는 물체를 내려다보았다.

    루시안이 건넨 것은 열쇠였다.

    “이게 뭐예요?”

    그가 기분 좋은 듯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제국 남부에 있는 별장 열쇠. 샬롱과 땅이 딸려 있지.”

    “으윽…….”

    보석 주지 말라고 했더니 더 심각한 걸 들고 왔잖아.

    하지만 아리엘은 루시안의 협박을 허투루 들을 생각이 없었다.

    ‘안 받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이건 어떻게해서든 나중에 돌려주고 갈 수 있을 것 같으니, 일단 받아두자.

    “받아놓을게요.”

    “써. 안 쓰면 다 부숴버릴 테니까.”

    으이구. 못됐어, 암튼.

    음식이 절반쯤 사라지자 디저트들이 들어왔다.

    라즈베리 크림이 든 샬로트 케잌, 퐁당 쇼콜라, 오페라 케이크와 치즈 퐁듀.

    그중 가장 아리엘의 시선을 끈 것은 딸기 치즈 수플레였다.

    수플레는 여차하면 쉽게 모양이 망가지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러운 디저트인데, 라카트옐의 요리사가 만들어낸 수플레는 완벽했다.

    틀 밖으로 수줍게 부풀어 오른 수플레는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아리엘의 생일을 축하하는 케이크가 들어왔다.

    핑크색 크림이 가득 올려진 꿈같은 설탕 케이크였다.

    수잔이 아리엘의 나이 개수대로 초를 꽂아주었다.

    초에 소담스레 불꽃이 옮겨졌다.

    “소원 비세요, 아기 마님.”

    “소원! 소원!”

    헥터가 신나게 소원을 연호했다.

    아리엘은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가슴 안쪽이 따뜻해지며 간질거렸다.

    아리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생일을 맞아본 적이 없었다.

    생일 축하를 받아 본 적도 없었고, 파티를 연 것도 처음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탄생을 축복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늘의 생일은 작년 생일과 완전히 달랐다.

    작년에는 얼마나 슬프고 외로웠던가.

    죽음에서 되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낯설었고, 또다시 후작가 다락방에 갇혀있다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그때의 그녀는 미래에서 본 기억만을 의지해서 목숨을 걸 결심을 하고 있었다.

    아리엘은 지금이 정말로 행복했다.

    제발 이 행복이 달아나지 않기를.

    그녀는 촛불이 녹기 전에 루시안에게 속삭였다.

    “루시안. 소원 말해봐요. 내가 빌어줄게요.”

    아리엘은 루시안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나름 윙크를 하고 싶었지만 두 눈을 짝짝이로 감았다 뜬 것이 전부였다.

    “요즘 내 소원이 좀 잘 이뤄지거든요.”

    후작가 탈출도, 다르게 살고 싶다는 바람도, 흑발 청안의 사내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다 이뤄졌다.

    윙크 대신 서투르게 눈을 깜박거리는 아리엘을 본 루시안의 입매가 귀엽다는 듯 느릿하게 곡선을 그렸다.

    턱을 괴고 한참 물끄러미 그녀를 보던 루시안이 요염하게 대꾸했다.

    “그럼 소원을 빌어.”

    “……?”

    “내가 끝내 널 삼켜버리지 않게 해달라고.”

    아리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하여간, 진지한 법이 없어.

    난 진지하게 말한 건데.

    그녀는 후, 하고 생일 촛불을 불었다.

    요란한 박수 소리와 폭죽 터지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루시안이 몸을 기울여 아리엘의 이마에 느긋하게 입술을 눌렀다.

    아리엘은 뺨을 붉히며 활짝 웃었다.

    ‘최고의 생일이야.’

    이 순간만큼은 과거의 어떤 괴로운 기억도 아리엘의 행복을 빼앗아갈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드래곤의 신부라는 것조차도 이 따스함을 해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리엘은 대공가에서의 첫 생일을 보냈다.

    이제 여섯 번의 생일이 남아있었다.


    * * *


    4년 후.

    따스한 봄, 정원을 산책하는 소녀의 뒷모습이 보드라운 아지랑이 사이로 지나갔다.

    “아기 마님!”

    누군가의 부르는 소리에 소녀가 양산을 든 채로 뒤를 돌았다.

    허리까지 드리워진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산들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드러냈다.

    조막만한 얼굴에 하얀 눈같이 흰 피부, 투명한 얼굴빛.

    분가루가 묻어날 것 같은 뽀얀 귀 뒤로 보석같이 흘러내리는 스칼렛 레드의 붉은 머리카락.

    바로 열네 살이 된 아리엘이었다.

    그녀를 부른 수잔은 봄 햇빛을 가득 머금은 아리엘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문득 넋을 잃었다.

    그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 아리엘은 대공가에서 네 번째 봄을 맞고 있었다.

    열네 살로 접어든 뒤 그녀는 꽤 많이 달라졌다.

    아기 티를 벗고 소녀가 된 아리엘은 이제 어떤 외양의 여자로 자랄지 명백해 보였다.

    짧고 귀엽던 손가락이나 푸딩처럼 말랑말랑하던 팔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이 곱고 여리여리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아리엘이 마나를 상당히 많이 가진 마법사인 탓에 그녀의 몸은 좀처럼 포동포동해질 수 없었다.

    마나가 소비하는 열량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4세의 아리엘은 여자인 다이아나가 엄지와 검지로 쥐고도 한참 남는 팔목에, 솜털이나 꽃씨에 가까운 체중, 갓난 사슴같이 위태로워 보이는 발목을 갖게 되었다.

    외양만 보자면 ‘물몸’이라는 말과 완벽히 어울렸다.

    ‘물몸’은 마법사들이 물리력이 약한 것을 빗대는 별칭이었는데, 아리엘 또한 유리 도자기처럼 약해 보였으니까.

    그리고 아리엘은 가늘고 약해 보이는 자신의 몸 때문에 슬퍼서 밤잠 못 이루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소녀 중 하나였다.

    그녀가 이토록 서글퍼하는 까닭은 바로 루시안과의 차이 때문이었다.

    “수잔. 나 이번 달에는 얼마나 컸어요?”

    수잔이 웃으며 아리엘의 키를 다시 재 주었다.

    귀여운 아기 마님은 요즘 대공자가 열두 살일 때의 키를 넘어서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어느새 처음 만날 때의 루시안과 같은 나이가 되었지만, 아리엘은 여전히 그때의 그에 비해 너무 작았던 것이다.

    키를 확인한 아리엘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는 다음에 만날 때 또 꼬맹이란 소리를 못 면하겠죠…….”

    “대공자님이 유난히 크신 거라니까요.”

    살뜰히 위로해준 수잔이 간식을 가져오겠다고 나가고 아리엘은 방에 혼자 남았다.

    그녀의 서글픈 시선이 키 표시선을 향했다.

    “루시안은 또 얼마나 컸을까……?”

    루시안은 그녀가 열 살에서 열한 살이 되던 겨울에 다녀간 이후, 1년에 한 번 정도만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아카데미에서 4년을 보내 루시안은 이제 열여덟 살이었다.

    벌써 성년을 맞을 나이가 된 것이다.

    여자의 성년은 17세, 남자의 성년은 18세였다.

    아리엘은 정식으로 성년을 맞을 그를 위해 무슨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올해엔 행사가 많구나.”

    요즘 수도 사교계는 이번 해를 가득 채운 행사들 때문에 가득 흥분해 있었다.

    황태자 디트리히의 짝을 찾기 위한 대규모 무도회가 열릴 예정이고, 매년 변방에서 열리는 제국 사냥대회가 올해는 무려 라카트옐 가문 영지에서 열린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뜬소문은 아니지만.’

    올해 제국 사냥대회가 북부에 있는 대공가 영지에서 열리는 건 사실이었다.

    사냥대회는 여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사교계의 영식과 영애들은 수놓을 손수건을 건네거나, 사냥감을 바칠 상대를 찾아 봄 무도회를 불태울 것이었다.

    지체 높은 아가씨들은 황태자비 자리를 눈독 들일지도 모른다.

    훌륭하게 자란 디트리히 황태자는 뭇 소녀들의 마음을 떨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황제가 후계자인 외아들을 위해 제국 밑의 여러 왕국에서 공주들을 불러모을 거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제국의 귀한 영애들뿐 아니라 왕국의 공주들까지 모아 황태자비 자리에 적합한 여인을 선보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아리엘은 사냥대회에서 멋진 사냥감을 받거나, 대규모 무도회에서 누가 황태자비로 낙점이 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나랑은 별로 상관이 없는 얘기들인걸.’

    라카트옐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아리엘은 비로소 디트리히가 그녀에게 했던 경고들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루시안의 진짜 정체가 대단히 위험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왜 그렇게 걱정하셨는지 알 것도 같아.’

    더불어 디트리히가 왜 자신에게 호기심을 느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아리엘은 거대한 사자들이 어슬렁거리는 우리 속을 멋모르고 돌아다니는 새끼 토끼같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엘은 루시안의 비밀을 알았다고 해서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진짜 가족이라면, 상대에게 어두운 비밀이 있다고 해서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이런 것까지 걱정해주시다니, 황태자 전하께선 지도자로서 좋은 분인 것 같아.’

    디트리히에게는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리엘에게 황태자비 선발대회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좋은 분이니 좋은 분과 맺어지시겠지.’

    그녀는 그저 대공가에서 열릴 사냥대회를 어떻게 하면 잘 치러낼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리지만 집안에 하나뿐인 여주인이니까.

    이렇듯 제국 사냥대회와 마음만큼 빨리 커주지 않는 키를 제외하면 아리엘에겐 크게 걱정거리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좀 이상했다.

    아리엘은 그녀의 심장이 있는 부분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바깥 창문에서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심장이 울렁거려…….’

    해가 바뀐 뒤부터 가끔 이유 없이 이 근처가 수런거렸다.

    따스하고 달콤한 봄의 향기가 풍길수록 더욱 그랬다.

    이유를 찾아 헤매던 그녀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때가 다가와서인가?”

    아리엘에게 열네 살이라는 시간은 의미가 남달랐다.

    보통 귀족 영애들에게 열네 살이란, 사교계에 데뷔하는 것 때문에 밤잠 설치며 설레하는 나이다.

    하지만 이미 열 살에 성공적으로 데뷔를 마친 아리엘은 보통 영애들과 똑같은 이유로 두근거림을 느끼지 않았다.

    과거의 그녀는 열네 살에 악당의 손에 팔렸다.

    그녀의 친아버지와 친오라비가 악당에게 돈을 받고 그녀를 팔아넘겼고, 아리엘은 괴로운 후작가에서 벗어나 더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졌었다.

    이제 그 일이 벌어졌던 해가 눈앞에 찾아온 것이다.

    ‘아마 심장이 이러는 건 그 때문일 거야. 걱정돼서…….’

    그게 아니라면 봄이 되자마자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일 이유가 없었다.

    똑똑.

    “아기 마님, 들어가겠습니다.”

    심각한 표정을 재빨리 지운 아리엘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잔의 트레이에 담긴 것을 보고 활짝 웃었다.

    “와, 제비꽃 튀김이랑 솔티 비스킷이네요.”

    “많이 드셔야 빨리 자라지요.”

    아리엘은 방긋 미소짓고 포크를 들었다.

    보드레한 제비꽃잎을 묽은 얼음물 반죽에 얇게 묻혀 튀긴 튀김은 향긋한 별미였다.

    ‘맞아, 많이 먹어야지.’

    당장 눈앞에 있는 목표는 루시안의 열두 살 때 키를 따라잡는 일이었다.


    * * *


    아리엘에게 달라진 것은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법 실력은 그동안 무척 많이 성장했다.

    특히 원소 마법은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준에까지 올라 있었다.

    과거에도 아리엘은 열네 살에 마법사 무리에서 가장 강한 공격 마법사가 되었었다.

    마법을 배운지 1년도 채 안 되었었을 때도 그 정도였는데, 4년을 대마법사 밑에서 배운 그녀가 월등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도 다른 마법들-연금 마법이나 이동마법 등-은 배우는 중이었지만 원소 마법은 브루노어가 인정할 만큼 뛰어나게 되었다.

    그녀뿐 아니라 함께 공부한 동기인 히스도 무섭게 성장했다.

    아리엘의 열한 살 생일에 루시안의 정체를 밝혀낸 이후, 히스는 더욱 마법 공부에 힘을 쏟았다.

    재능은 뛰어난데 은근히 뺀질거리는 히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브루노어도 흐뭇해할 정도였다.

    그간 히스의 외양도 많이 바뀌었다.

    갑자기 쑥 자란 키와 아직 완전히 애티를 벗지는 못한 얼굴 사이엔 어색함이 남아있었다.

    귀엽던 얼굴은 꽤 곱상해져서 잘 꾸며놓으면 사교계 소녀들이 꺅꺅거릴 귀공자처럼 보일 것이다.

    ‘워낙 수줍음을 많이 타서 여자들 앞에 나서진 않지만.’

    히스는 변성기를 거치며 목소리가 낮게 변했고 손아귀 힘도 세졌다.

    그래서 아리엘과 함께 있으면 높은 데 있는 걸 꺼내거나 무거운 걸 드는 건 자연스럽게 히스 몫이 되었다.

    똑같이 마법사면서 키도 잘 크고 힘도 세지는 히스가 아리엘은 영 부러웠다.

    ‘근데 요즘 히스는 고민이 있어 보였지.’

    최근 들어 그는 약간 음울해 보였다.

    장난도 잘 안 치고, 자꾸 혼자 있고 싶어 했다.

    게다가 봄에 꽃이 피자 꽃과 아리엘을 번갈아 보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 게 예전엔 안 하던 짓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봐도 ‘넌 이해 못 해’ 하는 표정으로 사라지기 일쑤.

    ‘그래도 놀리면 꼬박꼬박 버럭대는 게 예전의 히스와 똑같아서 안심이야.’

    여전히 아리엘에게 히스는 마냥 남동생같이 여겨졌다.

    어쩌면 그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열다섯 살 즈음에 나타나는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지도 몰랐다.

    히스 생각을 하다 보니 다른 것이 떠올랐다.

    4년 전, 그녀가 루시안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내자, 루시안은 그 비밀을 누구누구가 아는지 알려주었다.

    “알렌과 베르토. 그러니까 대공가의 집사들은 안다는 거죠?”

    “그래.”

    “디트리히 전하와 황제 폐하같이 황족의 직계 남자들도 알고 있고요?”

    “원래는 거기까지만이지.”

    집사와 황족 외에 또 아는 사람이 있냐는 아리엘의 질문에 루시안은 싸늘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브루노어의 이름을 말했다.

    “거기에다가 이젠 브루노어 놈의 손자까지 알게 됐지.”

    아리엘은 아차싶었다.

    루시안은 사람 목숨을 아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비밀을 알아버린 히스를 가만 안 놔두면 어떡하지?

    그녀는 루시안이 히스를 처리할 계획을 세우기 전에 얼른 선수를 쳤다.

    “히스에겐 내가 알아서 잘 얘기할게요. 다른 사람한테 절대 말하면 안된다고.”

    루시안이 긴 속눈썹 그늘을 드리우고 섬뜩한 음성을 냈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라는 기분이 드는데.”

    “차, 착각일 거예요, 루시안.”

    사람 목숨은 살려야죠…….

    아무튼 루시안은 히스를 없애지 않았다.

    언제 변덕을 부리며 해치우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브루노어를 봐서 넘어가 주는 것 같았다.

    아리엘은 예전에 히스에게 받았던 명령권을 쓰며, 히스에게 이 일을 비밀로 부쳐줄 것을 부탁했다.

    마법사들간의 계약으로 받은 명령권은 사용 시 마법적인 효력을 내기 때문에, 그도 함부로 약속을 어길 수 없을 것이었다.

    “……좋아.”

    히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명령권을 받아들었다.

    아리엘은 혹시 이런 날을 대비해서 브루노어가 자신에게 명령권을 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나저나 수잔이나 달튼, 기사단의 헥터도 모른다는 건 정말 신기해.’

    그들은 모두 대공가에서 최소 14년 이상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단순한 헥터는 몰라도 수잔과 달튼은 엄청 꼼꼼한데 알아채지 못하다니.

    생각보다 라카트옐 남자들이 정체를 잘 숨겼던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저 그들의 정체가 너무 엄청나서 보통 사람은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울 뿐.

    아리엘과 히스도 저택 숲에서 와이번 뼈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몰랐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와이번 뼈에 대해서 말하자 루시안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 그거. 마티어스의 윗대가 새끼 와이번을 심심풀이로 길렀다더군.”

    아리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용 마수를 애완동물로 기르다니.

    대체 예전부터 라카트옐 남자들 머릿속은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결론적으로 숲에 묻힌 와이번의 뼈는 알렌에 의해서 비밀스레 치워졌다.


    * * *


    그해 겨울이 지나고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온 뒤, 아리엘은 알렌에게 다시 물었다.

    “알렌. 그런데…… 마티어스님과 루시안 사이가 나쁜 이유, 이젠 말해줄 수 있어요?”

    현재 알렌과 마티어스, 브루노어는 자신이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용기를 내서 물어볼 수 있었다.

    조심스러운 아리엘의 질문에 알렌이 주름진 미소를 지었다.

    “마님은 언제나 대공가의 비밀보다 두 분 주인의 불화에 대해 더 궁금해하셨었지요.”

    한평생 라카트옐에 몸을 바친 알렌마저도 익숙해진 불화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아기 마님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계속 파고들었다.

    따스한 분이었다.

    “그때부터 알았습니다. 언젠가 마님께서 라카트옐의 정체를 알아내 버리실 거라는 걸요.”

    그래서 더 불안했다.

    대공가의 정체를 들춰낸 사람 중 목이 붙어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아리엘 이전의 여주인들 또한 대공가 남자들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들어오기 전 지독히 냉정한 경고 한 마디만을 들었을 뿐이다.

    너는 이 집에서 살아 나가지 못하리라는.

    그러나 알렌은 아리엘을 보며 처음으로 희망을 가졌다.

    작은 주인인 루시안은 아리엘이 정체를 알아냈는데도 그녀를 살려두었다.

    대공가에 충성하지만 아기 마님과 깊이 정든 알렌은 그 사실에 눈물까지 흘렸다.

    ‘드디어 진짜 안주인이 들어오신 거야.’

    말없이 아리엘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근엄한 노집사는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드래곤은 자기 영역을 중시하는 종(種)입니다. 특히 수컷끼리는 한 영역 안에 공존할 수 없지요.”

    아리엘은 분홍빛의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은 부자지간이잖아요.”

    “혈연이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여태 라카트옐 주인님들은 모두 그랬지요. 두 분 사이가 껄끄러운 건 그 때문입니다.”

    “…….”

    석연치 않은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게 다 인가요, 알렌?”

    그녀의 달콤한 붉은빛의 눈동자가 알렌을 똑바로 응시해왔다.

    그것에 압도된 알렌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기는 하지만, 그건 두 주인님 사이의 일이라…….”

    알렌이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아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내막은 들을 수 없더라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마워요.”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일은 있기 마련이니 루시안과 마티어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리엘도 꼭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정체를 알게 된 것조차 의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두 남자 사이의 반감이 근본적으로 뭐 때문인지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두 사람 사이가 좋지 못한 건 슬프지만, 둘 입장도 이해해야겠지.’

    그래도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사이가 좋았으면 하는 생각은 계속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기 마님.”

    문 밖에서 들린 소리 때문에 아리엘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서둘러 “들어와.”라고 말하자, 하녀가 들어와서 그녀에게 은쟁반에 담긴 편지들을 건넸다.

    그녀가 열네 살이 되면서 사교계의 초대가 매일같이 빗발치고 있었으므로 아리엘은 익숙하게 편지 더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하녀가 우물쭈물했다.

    “저어, 아기 마님.”

    “응?”

    “이 중에 아기 마님 친정에서 온 편지가 있던데, 어떡할까요?”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친정?

    친정이라면 루실리온 후작가 말하는 건가?

    ‘그럴 리가.’

    후작가는 그녀가 시집온 뒤 한 번도 연락을 취한 적이 없었다.

    하녀가 곤란한 표정으로 머뭇대는 것도 당연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혀 왕래가 없는 두 가문의 모습을 모두가 보아 왔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아리엘과 후작가가 끈끈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대공가에 올 때 아리엘은 겨우 열 살.

    한창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할 어린 나이였다.

    그런데 후작은 어린 딸을 덜렁 시집보내 놓고 여태 흔한 안부 편지 한 번 보낸 적 없었다.

    평상시에는 물론, 생일 때마저도 얼굴을 보러오지 않았다.

    후작이 아리엘에게 좋은 가족이 아니라는 건 이제 대공가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하녀 샐리는 아리엘이 명령을 하면 즉시 편지를 버리러 가고 싶은 기색이었다.

    아리엘은 잔뜩 난감한 얼굴의 하녀에게 살짝 웃어주었다.

    “괜찮아. 나가 봐도 좋아, 샐리.”

    하녀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아리엘은 편지 더미의 맨 위에 있는 두툼한 서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서신은 청동색의 실링 왁스로 봉해져 있었다.

    봉인에 찍힌 낯익은 인장이 편지가 루실리온 가에서 왔음을 알려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4년 만에 가족들에게 편지가 왔는데 기대감은커녕 불안감만 느껴졌다.

    아리엘은 조심스레 봉인을 떼고 편지를 펼쳐들었다.

    “…….”

    편지를 다 읽은 그녀는 가만히 서신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후작은 정말로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편지의 대부분은 돈 얘기였다.

    후작가가 돈이 필요하니 네 남편에게 좀 얻어내 보라는 요지의.

    아리엘의 친부는 끝까지 그녀를 돈줄로밖에 보지 않는 듯 했다.

    아리엘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부터 이런 후작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편지의 한 부분은 좀 의아했다.

    ‘꼭 이전에도 여러 번 편지를 보냈던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후작은 몇 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 왜 답장을 하지 않냐는 타박을 하고 있었다.

    편지를 보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뉘앙스였다.

    아리엘은 편지를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후작이 눈에 빤한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누군가 편지가 내게 오는 걸 막았나보구나.’

    아마도 그건 마티어스였을 것이다.

    ‘지금은 마티어스님이 외출 중이시니까 우연히 나한테 흘러온 거겠지.’

    아리엘은 풀잎 같은 손목으로 살포시 턱을 괴었다.

    편지를 가로채였으니 기분이 나빠야 할 것 같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루시안은 결혼할 때 분명히 말해주었다.

    이제부터 그녀는 ‘아리엘라 라카트옐’이 될 것이고, 전적으로 대공가 사람이라는 것을.

    심지어 그는 후작에게 아리엘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라는 각서까지 쓰게 했었다.

    그때 그녀가 느꼈던 안도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아리엘과 후작가의 연은 4년 전에 끊어졌었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나에게 이러는 이유는…….’

    돈 때문이겠지.

    생각해보니 기가 막혔다.

    그녀의 결혼 예물로 엄청난 사파이어 광산까지 받았으면서 어떻게 빈궁할 수가 있는 걸까? 아무리 사치와 낭비, 사업 실패가 겹쳐진다 해도 말이다.

    루실리온 후작의 사업이 순탄치 않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사교계에서 수군거리니 알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 상황이 아쉬워지니까 대공가에 손을 벌려볼 생각이었나 보다.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들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아.

    그들 쪽에서 먼저 버린 인연이다.

    자신에게 후작가를 도와줄 의무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에게는 이미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서늘하고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마티어스.

    난폭한데다 제멋대로지만 그녀가 울 때마다 안아주던 루시안.

    그녀를 늘 아기처럼 돌봐주는 수잔.

    그리고 저택 사람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아리엘은 재무관 달튼을 불러 편지를 보여주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을 확인한 달튼이 ‘이게 왜 여기까지……!’란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아리엘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달튼. 이건 마티어스님이 여태까지 하신 것처럼 처리해주세요.”

    “…….”

    편지를 받아든 그가 죄송스럽다는 듯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이전처럼 처리하겠습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기 마님.”

    “네. 고마워요.”

    달튼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아, 달튼. 잠깐만요.”

    나가려던 달튼이 다시 뒤돌아보았다.

    아리엘은 뺨을 붉힌 채 머뭇거렸다.

    편지에 쓰여 있던 몇 문장이 떠올라서였다.

    “그…… 편지는 루시안이 보지 못하게 없애주세요.”

    후작은 편지를 통해 남편에게 아양을 떨어보라느니, 여자처럼 굴며 비위를 맞춰 돈을 얻어내라느니 저속한 말을 써 놓았다.

    그녀는 그런 말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지만 그런 걸 루시안이 보는 건 싫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만은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달튼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나가기 전에 챙겨온 과자를 한아름 주고 떠나갔다.

    얼결에 과자를 받은 아리엘은 불만스레 뺨을 부풀렸다.

    나 참, 다들 아직도 내가 아기인줄 안다니까.

    많이 컸는데도 저택 사람들은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며 어릴 때보다 더 과보호했다.

    아무리 아리엘이 하늘하늘해보여도 마법으로 싸우면 다 이길 수 있는데, 그들은 그녀를 잘 깨지는 유리처럼 여겼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하며.

    “……에휴.”

    아기 취급은 분하지만 그래도 아리엘은 여전히 자신을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저택 식구들이 정말 좋았다.

    어느새 미소를 지은 그녀는 다른 편지들로 손을 뻗었다.


    * * *


    며칠간 저택을 비웠던 마티어스가 돌아왔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그는 아리엘에게 줄 선물을 한가득 가져온 채였다.

    “아리엘.”

    마중 나와 있는 아리엘을 본 그가 서늘한 음색으로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아리엘은 수줍게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마티어스님.”

    그의 큰 손이 아리엘의 조그만 머리를 푹 덮어 쓰다듬었다.

    그리고 마티어스는 아리엘 뒤에 서 있는 달튼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한번 보냈다.

    돌아오면서 그는 이미 후작가에서 온 편지 소식을 들은 터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다시 아리엘을 향했을 때쯤엔 눈빛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뒤에 있는 건 선물이다.”

    선물이요?

    마티어스 외엔 신경도 안 쓰고 있던 아리엘이 빼꼼 뒤를 건너보았다.

    하인 몇 명이 산더미 같은 선물 상자들을 한아름씩 안고 서 있었다. 그녀가 다 들지도 못할만큼 양이 많았다.

    아리엘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렇게 많이 안 사오셔도 되는데…….”

    매번 이렇게 선물을 받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마티어스가 자신을 생각해주는 게 좋기도 했다.

    조그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뺨을 톡 건드렸다.

    “많은 게 싫다면 앞으로는 큰 게 좋겠군.”

    앗, 그게 아닌데!

    아리엘은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 그런 뜻이 아닌 거 다 아시면서……!

    그런 그녀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던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아리엘라, 그러고 보니 네게 줄 것이 한 가지 더 있구나.”

    네? 더요?

    아직 다 풀어보지도 못한 선물 더미를 안기셨으면서, 뭘 또 주시겠다는……?

    아리엘이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동안 마티어스가 품에서 리본으로 묶인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버린 아리엘은 두루마리가 작다는 것에 내심 안도했다.

    ‘그렇게 큰 건 아닌가 봐.’

    뭘까? 두루마리니까 글일까? 아니면 시?

    “풀어 봐라.”

    마티어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허락했다.

    아리엘은 안심한 채 리본을 풀고 두루마리를 펼쳤다가……

    그만 넋이 나가버렸다.

    작은 두루마리 종이에는 짧은 글귀와 함께 황제의 인장이 커다랗게 찍혀있었다.

    “마티어스님, 이건……?”

    긴 흑발을 느슨히 묶은 마티어스가 여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남부 로덴베른의 영지란다.”

    그리고 그가 슬쩍 미소를 띠었다.

    “네가 영주가 되는 거지.”

    ‘…….’

    아리엘은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남부 로덴베른이라면 제국의 보고라고 불리는 땅이 아닌가.

    수도에 올라오는 좋은 산물들은 다 로덴베른에서 난 거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영지 수입도 어마어마하다고…….

    잠깐. 그럼 혹시 그 땅도 라카트옐 소유였던 건가요?

    ‘그리고 내가 영주?!’

    아리엘은 숨을 멈춘 채 증서에 적힌 자신의 이름과 황제의 인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미 도장까지 받아오시다니. 이건 무를 수도 없는 거잖아?

    눈앞이 아찔했다.

    마티어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열네 살이니, 영주 정도는 해야지.”

    아, 열네 살이니까 영주…….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라카트옐 남자들 머릿속은 정말 일반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그럼 내년엔 또 무슨 일이 있다는 건가요…….’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라카트옐의 부와 권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듯했다.

    아리엘은 매년 더해질 자신의 나이가 진심으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 * *


    아리엘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아리엘, 우리 왔어!”

    다이아나와 세실은 여전히 아리엘의 단짝 친구들이었다.

    둘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마음껏 대공가에 놀러올 수 있었다.

    그녀들 또래의 영애들은 대부분 약혼 기간이거나 이미 약혼을 거쳐 결혼 단계를 밟는 중이었다.

    하지만 다이아나와 세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두 소녀는 각각 영지 경영을 공부한다는 것과 검술을 익힌다는 소문이 퍼져 사교계의 뒷담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혼담도 들어오지 않았다.

    ‘모니카 공녀는 왜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어차피 결혼하면 남편이 공작이 될 텐데.

    남편 일에 참견을 하고 싶은 건가?’

    ‘황태자비 후보이기도 하잖아요. 조용히 교양만 길러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하이츠 백작 영애만 하겠어요? 그 집 아들들은 모두 훌륭하던데, 큰 딸이 말썽이에요. 여자아이가 검술이라니.’

    그나마 외동딸을 극진히 사랑하는 다이아나의 부모, 모니카 공작 부부는 다이아나에게 맞는 신랑감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황태자를 제외하고는 공녀 신분에 맞는 미혼 영식이 없었던 탓이었다.

    세실의 가문은 좀 더 상황이 안 좋았다.

    명문 무가임에도 하이츠 백작 부부와 오빠들은 세실을 매우 수치스러워했다.

    그들은 세실을 허겁지겁 감추고 세실 아래의 여동생 베릴만 자신들의 딸이고 동생인 양 사교계에 데리고 다녔다.

    오빠들은 무가 출신이란 이름을 달고 당당히 기사 시험을 치르는데, 세실은 재능을 갖고 태어나 아무리 검을 익혀도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세실이 기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자, 백작가에서는 세실을 거의 내놓은 자식처럼 여겼다.

    다이아나와 세실은 주변 영애들이 결혼하는 걸 부러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귀족의 결혼은 가문끼리의 정략이다.

    두 영애는 자신의 재능을 핍박하는 남자와 결혼하느니 각각 책, 검과 결혼하겠다고 할 소녀들이었다.

    아리엘은 자주 친구들을 대공저에 초대해서 어울렸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그녀는 세상이 넓어지는 걸 느꼈다.

    다이아나나 세실도 마찬가지였다.

    높디높은 공작가의 딸이지만 공작은 될 수 없는 다이아나.

    이름난 무가의 딸이지만 기사가 될 수 없는 세실.

    뛰어난 마법 재능을 가지고도 이용만 당했던 과거를 가진 아리엘.

    세 명은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친구들이었다.

    오늘도 세 소녀는 대공가 소응접실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의 주제는 곧 열릴 대규모 황실 무도회였다.

    다이아나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얼마나 기대를 하시는지 몰라. 내가 아무리 황태자 전하에게 관심없다고 말씀을 드려도…….”

    별안간 그녀가 부채로 테이블을 탁 내리쳤다.

    “난 공녀로서 황태자 전하를 미래의 주군으로 보지, 남편감으로 보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다이아나의 부모님은 은근히 다이아나가 황태자비가 되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아리엘은 화난 다이아나를 토닥토닥 위로해주었다.

    다이아나는 모니카 공작가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대단한 소녀였다.

    황태자비 자리가 아무리 높아도 그녀에게는 공작 후계자 자리가 더 중요했다.

    아리엘과 함께 다이아나를 위로하며 세실이 말했다.

    “다이아나. 걱정 마라. 이번에는 공주들도 온다니 괜찮을 거다. 다른 영애들도 많고.”

    다이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무도회에 너희랑 같이 가는 거라 다행이야.”

    “맞아, 다이아나.”

    이번 황실 무도회에는 사교계의 모든 영애들이 초청됐다.

    세실은 물론이고, 아리엘도 대공자비로서 참석하게 되었다.

    ‘빠지고 싶다고 하면 빠질 순 있겠지만, 루시안 체면이 있으니까.’

    아리엘은 여태 사교 행사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라카트옐 가에게 필요한 행사는 반드시 참석해왔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였다.

    곧 열릴 황궁 무도회는 황태자 디트리히를 위한 것이지만, 올해 성년을 맞는 18세의 귀족 영식들도 모두 초청받았다.

    당연히 루시안도 초대받았고 아리엘은 루시안과 함께 참석하게 된 것이다.

    ‘마담 헬렌이 엄청 좋아했지.’

    아리엘의 의상을 담당하는 헬렌은 참석 소식을 듣자마자 흥분하며 하루에 하나씩 드레스 디자인을 보내왔다.

    다 예뻐서 그 중에 고르려면 무척 힘들 것 같았다.

    ‘무도회는 관심 없지만 루시안을 볼 수 있는 건 조금 좋은 것 같아.’

    속으로 중얼거린 아리엘은 루시안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하며 오늘도 우유를 마시고 자야겠다고 다짐했다.

    세 소녀는 맛있는 화이트 초콜릿 케이크와 차를 즐기며 무도회에서는 그냥 셋이 함께 놀자고 까르르거리다 헤어졌다.

    곧 있을 황실 무도회에서 얼마나 거대한 사건들이 벌어질지는 상상도 못한 채.


    * * *


    4년 전의 그 생일 이후 아리엘은 브루노어와 종종 라카트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마법사 브루노어는 명성에 걸맞게 학식이 깊었다.

    당연히 드래곤의 존재에 대한 것도 많이 알았다.

    그의 말로는 라카트옐 가로 들어온 후에 알게 된 것들이라고 했다.

    아리엘은 바람 마법으로 분홍색 꽃잎이 공중에서 춤추게 하며 물었다.

    “있잖아요, 브루노어. 그런데 라카트옐의 피는 옅어지지 않나요?”

    그녀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최초의 암흑 드래곤 라키엘은 온전한 드래곤이었더라도, 그 이후에 태어난 그의 후손들은 인간과 혼혈이다.

    처음엔 용혈이 짙었겠지만 몇천 년간 후대로 내려오면서 피가 희석돼서 옅어져야 하는 게 정상인 것이다.

    브루노어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양 손으로 손깍지를 끼었다.

    “아리엘님 말씀이 맞습니다. 보통의 혼혈은 그런 식이죠. 하지만 용의 피는 다릅니다.”

    “어떤 점에서요?”

    브루노어가 어떻게 설명할지 조금 고민을 하다가 허공에 두 개의 물방울을 띄웠다.

    한쪽은 투명한 색, 다른 한쪽은 아주 진한 검정색이었다.

    “용의 피는 완벽한 우성 인자예요. 어떤 종족의 피와 섞여도-그러니까 엘프나 인간 같은- 그 후손의 피는 완벽한 용의 피가 됩니다. 절대 강자 쪽으로 유전이 기울어져 버리는 거죠.”

    그렇게 말한 브루노어가 두 물방울을 공중에서 섞었다.

    투명한 물방울과 검은 물방울이 반반 섞였지만 합쳐진 물방울은 새카만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검게 물든 물방울을 보니 용의 피를 물려받은 라카트옐에 대해 좀 더 잘 이해가 되었다.

    브루노어는 늘 시각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유전자도 엄마 쪽은 전혀 형질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약한 쪽은 따르지 않으니까요.”

    “…….”

    그러니까 엄마가 어떤 종족이든, 어떤 외모를 가졌든 절대로 엄마 쪽을 닮을 수는 없다는 거구나.

    그녀의 머릿속에 루시안과 마티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카만 흑발, 짙은 푸른색의 눈, 숨이 막히게 아름다운 외모.

    둘은 누구도 혈연관계를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뚜렷하게 닮았지만, 루시안의 외모 그 어디에서도 전 대공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브루노어가 결론을 지어 말했다.

    아리엘이 처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세대를 내려와도 용의 피는 옅어지지 않습니다.”

    아리엘은 생각에 잠겼다.

    브루노어의 말대로라면 루시안의 아기는 루시안만 닮을 것이다.

    곧장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다.

    ‘예쁘겠다.’

    엄청 예쁘고 귀여울 게 분명했다.

    나라를 무너뜨릴만한 미모의 아기일 것이다.

    물론 성격까지 닮는다면 마냥 귀엽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만…….

    아리엘은 루시안을 닮은 아기 생각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브루노어에게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브루노어. 예전에 루시안한테 ‘에고(ego)’라는 말을 들은 적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브루노어가 조금 놀란 듯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헛기침을 하고 변명하듯 말했다.

    “대공자님께서 그런 얘기까지 다 하셨는지는 몰랐습니다. 정말이지…….”

    아리엘은 웃으며 대신 말했다.

    “부주의하죠. 여태 안 들키고 산 게 신기하다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브루노어가 이어서 ‘에고’에 대해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그건 드래곤의 정체성, 역사, 유대감, 본능 모두를 아우르는 총체입니다.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거죠.”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잘 감이 오지 않았다.

    “그게 왜 필요한 건데요?”

    브루노어가 나긋하게 손을 휘젓자 아리엘이 흩날리던 꽃잎이 한순간에 그의 손 안에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사람에게는 사회가 있지요? 이렇게 모여 사는.”

    “네.”

    “사람은 사회를 통해 배워요. 자기가 누군지, 인간의 역사는 어떤지.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유대감을 느끼죠.”

    맞는 말이다.

    만약 광활한 우주에 인간이 딱 한 명이라면 자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천년 전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회를 통해 알 수 있죠. 천년 전에도 나 같은 사람이 있었고, 똑같은 것들을 느꼈다는 걸. 그래서 사람들과 공감하고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답니다. 그런데…….”

    아리엘은 빠르게 요점을 잡아냈다.

    “드래곤은 그 역할을 해줄 사회가 없다는 거죠?”

    그녀가 마나를 발동하자 브루노어의 손에 가득하던 꽃잎은 흩어지고 딱 한 장만 남았다.

    외로운 하나의 꽃잎.

    브루노어가 못 말린다는 듯 웃고 대답했다.

    “네. 영리하시군요. 드래곤은 최상위 생명체. 사회가 없으니 물려 내려오는 에고를 통해 동족과 유대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군요…….”

    아리엘의 호기심은 끝나지 않았다.

    “그건 인간과 많이 다른가요?”

    브루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드래곤은 지능이나 감정이 인간의 차원과 완전히 다르거든요. 예를 들어볼까요?”

    그가 손을 내밀어 종이 한 장을 소환했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이 종이처럼 평면이라고 한다면, 라카트옐이 느끼는 감정은 입체지요.”

    브루노어가 종이를 반으로 접어 ㄴ모양으로 세웠다.

    평면과 입체.

    “……라카트옐 쪽이 한 단계 높다는 거네요.”

    “그렇죠.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주파수라고 할까요.”

    그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이 세상엔 라카트옐이 인간 대 인간처럼 진짜 희로애락을 느낄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브루노어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분들은 인간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죠. 사랑이나 애정 같은 것도요.”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굉장히…… 외롭겠네요.”

    브루노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생각하고, 연민하는 건 아리엘님뿐이실 겁니다.”

    “그런가요?”

    “보통 사람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거든요. 아리엘님은 생각이 독특하시죠.”

    독특하다니.

    좀 당황스러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브루노어가 말한 독특함은 좋은 의미를 담은 것 같았다.

    “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두렵지 않아요. 밉지도 않고요.”

    그리고 그녀는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안 그러면 히스의 이상한 행동들을 어떻게 넘어가겠어요?”

    “예? 하하하하!”

    아리엘의 말을 들은 브루노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도 최근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히스의 상태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브루노어가 다 웃고 나서 아리엘은 농담기를 거두었다.

    “브루노어. 히스요, 괜찮은 거죠? 말 못할 고민이 있어 보여요.”

    그가 물끄러미 아리엘을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리엘님께서 해결해주실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 건 맞고요?”

    “청춘이지요, 뭐.”

    “네에?”

    브루노어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히스랑 청춘이 무슨 상관인 거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탐내도 좋은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어른이 된다면요.”

    “…….”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그가 히스를 위해 기다려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나도 기다려 줘야겠지.

    아리엘은 살풋 웃으며 말했다.

    “브루노어는 참 많은 걸 아시네요.”

    “제가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가령…….”

    그는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신의 안정화 마법이 통하지 않던 아리엘의 마나…….

    “예를 들기 어렵군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으니까요.”

    아리엘은 종소리처럼 웃음 지었다.

    “브루노어가요? 말도 안 돼요.”

    그녀는 브루노어가 지나치게 겸손하다고 생각하며 그와 헤어졌다.

    줄곧 가지고 놀던 꽃잎은 잔디에 흩뿌려놓았다.

    풀잎 같은 걸음걸이로 저택에 돌아가는 그녀의 뒤, 나무 뒤에 숨어있던 히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변성기를 거치고 있는 소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왜 내 걱정은 하고 난리야…… 사람 심란하게.”


    * * *


    황궁 무도회를 위해 루시안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열네 살이 되었으니까, 아리엘은 계단까지 뛰어나가지 않고 현관에서 루시안을 맞기로 했다.

    루시안의 마차가 도착하고,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조금 초조해졌다.

    지난 가을에 보고 거의 반 년 만에 보는 루시안이었다.

    그녀 뒤에서 작은 주인을 맞을 준비를 하던 알렌이 아리엘에게 말했다.

    “좀 더 멀리 나가보시지요. 도련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아, 아니에요. 이젠 철없는 어린애가 아닌걸요.”

    그녀는 나름 도도하게 말했지만 실제로 나온 목소리는 앳되기만 해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 사이 순식간에 계단을 올라 현관에 이른 루시안이 활짝 열린 거대한 유리문으로 들어왔다.

    “아, 루시안.”

    아리엘은 활짝 웃으며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뭐야? 이 남자…… 누구야?

    눈앞의 남자는 그녀가 알던 루시안이 아니었다.

    아리엘은 진심으로 당황스러워져서 주춤 물러났다.

    그녀의 반응을 보고 심기가 상한 듯, 아리엘 한참 위에 있는 그의 고개가 비딱해졌다.

    ‘반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열여덟 살이 된 루시안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이제 그의 키는 거의 마티어스와 비슷했다.

    작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커서 그가 계속 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용인 남자들 틈에서 머리 하나 반은 우뚝 솟을 만큼 크면서도 몸의 균형은 눈부시도록 완벽했다.

    늘씬한 자태도 여전했다.

    그를 달라보이게 만드는 건 확 자란 키만이 아니었다.

    성년을 맞은 루시안은 그 전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특유의 오만한 느낌에 더해진 강한 수컷의 기운.

    그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순간 페로몬에 취한 것 같은 몽롱한 효과를 냈다.

    그를 마주한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입이 붙고 몸이 얼어붙어서 움직일 수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하루하루 근사함을 갱신하고 있는 루시안의 얼굴은 신이나 악마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눈앞에서 홀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육체가 담고 있는 강함이 아름다움의 옷을 입고 압도적인 매혹으로 돌변했던 것이다.

    그 전의 루시안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누구든 굴복하게 만들었던 난폭한 기세는 모든 것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취하는 유혹으로 바뀌어있었다.

    지금의 루시안은 말 그대로 지독히도 아름답고 위험한, 괴물이었다.

    ‘루시안 아닌 것 같아.’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목에 있는 것처럼 파닥파닥 큰 소리로 뛰었다.

    긴장으로 손끝이 굳어졌다.

    그녀가 알던 소년은 낯선 느낌을 풍기는 남자가 되어 나타났다.

    그를 직접 보고 나니 루시안보다 더 키가 크고 싶어 안달했던 게 아무 의미 없이 느껴졌다.

    아예 처음 존재부터 다른걸.

    종족으로서도, 성별로서도.

    “아리엘라.”

    그가 듣기 좋게 낮아진 중저음의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엘은 깜짝 놀라며 어깨를 옴찔거렸다.

    “와, 왔어요, 루시안…….”

    루시안이 불쑥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오자 두근거리는 심장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루시안이 아리엘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려는 듯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아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읏…… 못 견디겠어.’

    그녀는 루시안의 입술이 닿기 직전에 화닥닥 물러났다.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피곤하죠?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이따 저녁 때 봐요.”

    그리고 아리엘은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도망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행동이었다.

    노집사 알렌과 함께 현관에 남겨진 루시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내 아내가 왜 저러지?”

    작은 주인 내외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알렌은 허허 웃었다.

    “소녀의 마음이랄까요.”

    역시나 루시안은 그 따위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바로 소매 커프스를 비틀어 풀어내며 으르렁거렸다.

    “당장 잡아와야겠어.”

    돌아왔는데 입술 한 번 못 대게 피해버린 작은 동물이 매우 괘씸했다.

    그런데 알렌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를 막아섰다.

    “잠시 놔두십시오.”

    “왜?”

    “어차피 무도회에 함께 가실 텐데, 시간은 많지 않으십니까.”

    지금 붙잡아오면 역효과만 날 거라는 알렌의 말에 루시안은 잡으러 가는 걸 관두었다.

    알렌의 말대로 시간은 많았다.

    한편, 멀리멀리 도망쳐서 자기 방에 틀어박힌 아리엘은 침대에 몸을 던지고 팔다리를 마구 바동거렸다.

    “미쳤어, 미쳤어, 아리엘.”

    도망은 왜 가? 도망가면 후환이 더 무섭다는 걸 뻔히 알면서.

    이제 루시안 얼굴을 어떻게 본담?

    왜 아까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루시안이 돌아온 것뿐인데.

    그녀의 귓가엔 심장 뛰는 소리만 대답하듯 콩닥콩닥 울리고 있었다.


    * * *


    이번 황궁 무도회는 3일 동안 이뤄지는 대규모 무도회였다.

    의상실의 마담 헬렌은 아리엘을 위해 세 벌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었다.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모두 다른 드레스를 입을 수 있도록.

    첫날 아리엘이 입을 드레스는 에메랄드색이었다.

    헬렌은 아리엘의 한줌도 안 되게 가냘픈 체구를 살려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디자인의 드레스를 만들어냈다.

    연약해보이지만, 붉은색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해주는 에메랄드 드레스가 색채를 더해 생기를 불어넣었다.

    아리엘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기 마님, 정말 예쁘세요!”

    “공주님들보다 훨씬 시선을 끄시겠어요.”

    “안나, 나 호흡곤란 온 거 봤니?”

    호들갑을 떠는 하녀들 앞에서 뺨을 붉힌 아리엘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저택 중앙 홀의 나선형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아래에서 루시안이 등을 보인 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리엘은 심호흡을 했다.

    루시안에게 도망친 후로 좀 시간이 지나자 용기가 되돌아왔다.

    몰라보게 컸어도 루시안은 루시안.

    괜히 긴장할 것 없다.

    그때 아리엘의 기척을 느낀 루시안이 뒤돌아섰다.

    곱게 꾸민 그녀를 본 그의 눈이 살짝 커지는가 싶더니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읏.’

    아리엘은 움찔했다.

    인내심 없는 루시안을 기다리게 했을 때는 항상 그에게 귀를 잡힌 토끼마냥 달랑 들어 올려지곤 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본 그가 한 발자국 계단 쪽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예쁘게 차려입었는데 그렇게 되고 싶진…….’

    그때 긴장한 아리엘의 발이 드레스 안쪽 자락을 밟았다.

    계단의 끝에서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했다.

    “……!”

    앗, 넘어진다……!

    타악.

    몸이 확 앞으로 기울어짐과 동시에 나지막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들려왔다.

    다음 순간 아리엘은 계단 아래로 넘어지는 대신 단단한 무언가에게 온 몸을 기대고 있었다.

    “조심해야지.”

    손에 닿는 단단하고 탄력 있는 몸과 코끝에 감도는 박하향 같은 체향이 그녀를 잡아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게 했다.

    아리엘이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빼려하자 루시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아리엘의 생체 신호가 위험을 감지한 듯 조여들었다.

    “비틀거리는 게 꼭 새끼 사슴 같은데. 도망가려는 것도 그렇고.”

    그가 자신의 품에 아리엘을 꾹 누르며 말했다.

    “이건 못 다한 환영 인사인가?”

    “놔, 놔줘요, 루시안…….”

    “불안해서 안 되겠는데.”

    루시안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려 계단 아래로 내려주었다.

    안전한 바닥에 닿자마자 아리엘은 새빨개져서 루시안의 품을 벗어났다.

    아까 계단을 내려오면서 되찾았던 용기는 흔적도 없었다.

    ‘몰라보게 컸어도 루시안은 루시안’은 무슨.

    방금 닿았던 단단한 몸부터가 다른데.

    “늦겠어요. 빨리 가요.”

    그녀는 허둥거리며 저택을 나섰다.

    피하는 듯한 아리엘의 태도에 루시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자신이 드래곤이라고 정체를 밝힐 때도 경계 따윈 안 하던 아리엘이, 내외할 나이가 되어서 자연스레 자신을 경계할 거란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다.

    마차에 오르면서 아리엘은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사슴이면 사슴이지, 새끼 사슴은 또 뭐야…….’


    * * *


    계단에서의 사건 때문에 마차 안에서도 데면데면한 분위기는 계속됐다.

    아리엘의 입 안은 바짝 말랐다.

    결코 좁다고는 할 수 없는 마차 안이지만 밀폐된 공간에 루시안과 둘만 있는 상황 때문이었다.

    게다가 루시안의 눈은 아까부터 그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아리엘의 시선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황궁에 거의 도착할 때쯤이 되자 루시안의 인내심은 완전히 바닥났다.

    그가 잇새로 위협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꼬맹이 너, 한 번만 더 내 눈 피하면…….”

    윽, 또 꼬맹이.

    아리엘은 위협당하고 있는 것도 잊고 울상을 지었다.

    ‘난 루시안이 변한 모습에 깜짝 놀랐는데, 루시안 눈에는 내가 아직도 열 살짜리로 보이는 걸까?’

    그때보다 덩치 차이나 키 차이가 더욱 확연해졌으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분한 기분이었다.

    루시안은 늘 그녀를 어린애, 꼬맹이, 애완동물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 듯 했다.

    어엿한 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싶은 아리엘에게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애초에 인간이 아닌 그에게 그런 걸 바라는 게 무리긴 했다.

    ‘라카트옐은 인간에게 동족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하니까 나한테도 마찬가지겠지.’

    계약 결혼을 했다고 해서 아리엘만 특별히 인간으로 보이는 건 아닐 테니까.

    드래곤 입장에선 그녀나 다른 사람들이나 다 똑같이 벌레로 보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많이 컸고, 이제 숙녀 태가 난다고 그랬는데.’

    아리엘은 분노의 힘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녀가 눈을 잘 마주치자, 루시안이 천천히 위협하는 기세를 거뒀다.

    “이제 마음에 드는군.”

    마차가 황궁에 도착하고 무도회가 열리는 연회장으로 들어가자 루시안을 본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멈췄다.

    그가 걷는 곳마다 결빙 마법이 일어나는 것처럼 공기의 흐름이 멎었다.

    아리엘은 그제야 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그것 봐,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조용해진 틈에 황태자 디트리히가 인파를 가르고 다가와 인사했다.

    오늘의 주인공답게 그는 무척 멋진 모습이었다.

    화사한 금발과 흰 제복은 그림처럼 어울리고, 성스러운 것 같은 녹색 눈은 샹들리에 빛을 담고 반짝였다.

    “왔군, 대공자. 그리고…….”

    부드럽게 인사하던 디트리히의 눈이 커졌다.

    “대공자비……?”

    아리엘은 드레스 자락을 사뿐히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제국에 영광을.”

    눈에 띄게 놀란 기색을 지워낸 디트리히가 살짝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거, 못 알아볼 뻔했군요. 못 뵌 사이 정말 아름다워지셨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요.”

    아리엘은 열심히 배웠던 대로 사교 인사에 답했다.

    실제로 소년티를 벗은 디트리히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모든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하등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루시안의 미모만 아니었더라도, 디트리히는 온 나라에서 가장 미모가 뛰어난 소년이 되었을 것이다.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희가 영광이죠.”

    너무 압도적으로 아름다워서 옆에 있을 때 두근거리고 진정이 안되었던 루시안에 비하면 디트리히와 대화를 나누는 건 편안했다.

    아리엘은 짧은 대화동안 란셀 후작 부인에게 배운 예법대로 작은 미소를 띤 채 황태자를 대했다.

    그리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루시안의 표정은 매초마다 자비를 잃어가고 있었다.

    한편 아리엘에게 스스럼없이 웃어주며 대화를 나누는 디트리히를 본 사교계는 술렁거렸다.

    황태자 디트리히가 14세에 사교계에 나온 이후, 그는 누구에게도 저런 반짝이는 표정을 지은 적 없었다.

    ‘늘 정중하고 다정하시지만 어쩐지 선을 긋는 느낌이랄까.’

    ‘맞아. 다른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본인이 다가가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았는데.’

    그때 수군대는 사람들의 말이 딱 멈췄다.

    대공자 루시안이 인사치레 중인 황태자와 대공자비 사이로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아리엘의 어깨를 당겨 안은 루시안이 디트리히에게 고압적으로 턱짓했다.

    “인사는 됐으니 이제 꺼져.”

    떨어져 있어서 대화 내용이 들리지 않는 사교계 사람들은 애가 탔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질투다.

    아내가 다른 사람과 대화 나누는 걸 대공자가 질투한다!

    지켜보던 구경꾼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머 어머, 라카트옐한테도 저런 모습이?

    정작 아리엘은 당황해서 루시안의 허리를 쿡 찔렀다.

    루시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협박을 내뱉었다.

    “지난번처럼 내 아내에게 춤 신청을 했다간. 아우레디안 궁 대신 널 부숴버릴 거야.”

    그리고 그는 아리엘을 이끌고 그 자리를 떠났다.

    황족과 대화하다가 먼저 자리를 뜨는 건 심각한 무례였지만, 루시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루시안은 끊임없이 바닥을 보이는 인내심 때문에 흉포해졌다.

    이유는 하나였다.

    옆에 있는 콩알만한 그의 아내가 줄곧 그의 속을 긁고 있는 것.

    돌아온 자신을 보자마자 꽁무니를 빼질 않나, 뭐 잘못한 사람처럼 눈을 피하질 않나.

    그래놓고 다른 남자 앞에서는 잘도 웃고.

    아리엘 입장에서는 예의바르게 대화를 나눈 것뿐이었지만 루시안에게 그것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그의 태생적인 오만함과 이기심이 심히 비틀렸다.

    왜 내가 다른 것들을 경계해야 하는 거지?

    이 땅 위에 그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수컷은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는 아래에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정작 이 조그만 것은 나만 밀어내고 있는 것 같은데.

    루시안은 속에서 끓는 소유욕과 독점욕을 억지로 누르며 아리엘의 어깨를 꽉 쥐었다.

    감히 도망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이.


    * * *


    대규모 황실 무도회는 소문대로 대단했다.

    사교계 사람들이 다 모이자 황궁의 시종이 초청받은 왕국의 공주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세일 왕국의 타니아 공주 입장하십니다!”

    “에브랜 왕국의 오시리아 공주 입장하십니다!”

    각 왕국에서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고 보낸 공주들인만큼 모두 아름다웠다.

    그들은 왕국 출신임에도 제국의 최신 유행 드레스와 장신구로 꾸미고 있었다.

    줄줄이 들어오는 예쁜 여자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던 아리엘은 문득 옆에 있는 루시안을 몰래 힐끔 살폈다.

    ‘혹시……?’

    예쁜 공주님들이 가득하고, 주변 모든 여자들이 그를 힐끔거리고 있으니 루시안도 조금은 동요하고 있진 않을까?

    하지만 루시안은 나무토막을 보는 듯 무감정한 시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예쁜 여자든 잘생긴 남자든 그에게는 똑같이 벌레나 다름없게 여겨지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녀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아리엘은 혼자서 배시시 웃었다.

    그때 루시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 웃네.”

    깜짝이야! 훔쳐보던 걸 들킨 건가?

    아리엘은 확 뺨을 붉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아리엘의 얼굴에 다가왔다.

    “아깐 얼굴도 안 보여주더니.”

    “저, 저리 좀 가 봐요.”

    루시안 땜에 숨을 못 쉬겠으니까.

    “싫은데.”

    “으…….”

    내 얼굴 좀 보겠다고 날 죽일 셈인가요?

    아리엘이 울망울망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묘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앞에서는 이제 마지막 공주를 호명하고 있었다.

    저 앞에 선 디트리히는 아직 별 의욕이 없어보였다.

    “시에나 왕국의 클라리스 공주 입장하십니다!”

    시에나 왕국?

    시에나 왕국은 제국 아래에 있는 왕국들 중 세력이 가장 컸다.

    왕국령에서 나는 것들이 많아 부유한 나라였다.

    당연히 라카트옐을 가진 제국과는 상대도 안 되지만, 군사력도 꽤 강했다.

    온천으로 유명한 관광지도 여럿 있었다.

    제국은 다른 곳보다 시에나 왕국에게 좀 더 잘해주곤 했다.

    그곳에서 보낸 공주, 클라리스는 올해 열일곱으로 딱 성년이 된 나이였다.

    윤기가 흐르는 백금발의 머리카락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아름다운 얼굴.

    성숙한 체형까지 완벽한 미인상이었다.

    ‘예쁘시다. 숙녀 같아.’

    클라리스 공주가 등장하자 장내는 눈에 띄게 웅성거렸다.

    ‘아름답군요.’ ‘출신도 고귀하고요.’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도회가 시작되자 사교계 귀족들 틈으로 공주들이 섞여들었다.

    파트너가 없는 디트리히가 오프닝댄스를 미루어서 아리엘과 루시안이 첫 춤을 열었다.

    평소보다 긴장한 아리엘은 드레스 아래로 루시안의 발을 몇 번이나 밟았다.

    밟힐 때마다 루시안이 재미있다는 듯 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기 때문에 밟는 횟수는 더욱 늘어났다.

    가까이에서 그런 얼굴이 웃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겨우 춤을 마친 아리엘은 쉰다는 핑계로 여자 친구들에게 도망을 갔다.

    다이아나와 세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방 올게요.”

    한편, 아리엘이 호다닥 자리를 떠나는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시에나 왕국의 클라리스 공주였다.


    * * *


    클라리스 공주는 부유한 왕국에서 응석받이 막내딸로 태어난 덕에 못 가져본 것이 없었다.

    자라난 뒤에는 그녀의 미모 또한 무기가 되었다.

    무슨 보석이든 그녀가 말만 하면 갖다 바치는 사람들이 넘쳤고, 어떤 남자의 사랑과 관심도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었다.

    제국에서 무도회 초청장이 왔을 때도 클라리스는 자신만만했다.

    “흥, 내게 반하지 않을 남자는 없어. 그게 제국의 황태자라고 해도 말이야!”

    주변에서 경솔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다독였지만 교만한 클라리스의 귀에 충고는 들리지 않았다.

    당당하게 제국 무도회에 입성한 그녀는 황태자를 보고 꽤 흥미가 돋는 걸 느꼈다.

    잘생겼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확실히 동화책에 나올 것 같은 왕자님이었다.

    황태자를 꼬셔서 미래의 황후가 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드는 찰나였다.

    그때 운명처럼, 그녀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녀의 미모를 싹 무시한 채 서 있는 암흑 같은 흑발의 젊은 남자.

    설화 석고같은 흰 피부와 긴 속눈썹, 오만함의 극치인 푸른 눈동자가 클라리스의 눈을 확 뜨이게 했다.

    ‘세상에, 저렇게 생긴 사람이 있었다니!’

    내가 꿈에 그리던 남자잖아!

    저 남자가 누구냐는 그녀의 질문에 사람들은 라카트옐 대공자라는 답을 주었다.

    신분이 높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폐하에게 저 남자를 내게 달라고 해야겠어!’

    시에나 왕국에게 우호적인 황실은 클라리스에게 제국에서 따로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하라고 했었다.

    클라리스는 바로 결정을 내렸다.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을 가지기로.


    * * *


    공주들을 소개하는 데만 한세월 걸린 첫날의 무도회는 가볍게 예열하는 분위기로 끝이 났다.

    다음날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리엘에게 의상실 헬렌이 들이닥쳤다.

    둘째 날 무도회에 참석하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했다.

    “대공자비님. 새 드레스를 가져왔습니다!”

    아리엘은 몰랐지만 어제 그녀가 입은 드레스와 장신구는 벌써부터 유행하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의상실은 무도회에 참석하는 귀족가의 시녀들에게 비밀스레 부탁해서 대공자비의 의상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밤을 새워서 비슷한 스타일의 드레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제국 최신 유행은 여기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으음, 헬렌…….”

    아리엘은 졸린 눈을 비비고 헬렌이 들고 있는 새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무도회 두 번째 날을 위해 그녀가 준비한 드레스는 아쿠아마린색의 보석 드레스였다.

    어제의 에메랄드 드레스가 우아했다면 오늘의 아쿠아마린 드레스는 청순하고 투명한 느낌이다.

    아리엘이 움직일 때마다 치맛단의 세로 주름마다 촘촘히 박힌 물색의 보석이 반짝거리며 하늘색 빛의 산란을 만들어냈다.

    머리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순은의 화관 장식을 하고 은빛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얇은 팔찌를 했다.

    다 차려입은 아리엘을 본 헬렌은 확신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아리엘님이 되실 게 분명해.’


    * * *


    둘째 날 오프닝 댄스는 디트리히와 그의 고모들 중 하나인 헤스티아 공주였다.

    헤스티아는 다른 왕국에 시집 가 살고 있었는데, 이번 대규모 무도회를 맞아 잠시 돌아왔다.

    그 덕에 디트리히는 여자 친척과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 특히 여자에 관련된 행동을 감시하는 주변인들은 은근히 실망했지만 디트리히는 안도했다.

    황실 후계자로서 하루 빨리 결혼해 후사를 보는 것이 의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식석상에서만 화기애애하고 평소 땐 냉랭한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여인과 결혼해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어쩌면, 한 소녀만 제외하고.

    춤을 추면서 디트리히는 멀찍이 서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에게 가끔 시선을 던졌다.

    못 본 사이 그녀는 심장이 쿵 떨어질 만큼 아름다운 소녀가 되어있었다.

    오늘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연회장 안의 모든 사람들의 감탄을 부를 만큼 사랑스럽게 반짝거렸다.

    어떤 공주도 그 빛과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리엘은 열 살의 조그만 소녀일 적부터 그를 놀라게 했었으니까.

    처음 그녀를 만날 땐 의무감이 전부였다.

    황실 후계자로서 라카트옐의 새 가족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둬야 한다는 책임감.

    열 살 대공자비의 데뷔 무도회에 몰래 참석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디트리히의 아버지인 황제는 황가가 라카트옐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져서 황실의 힘을 늘리길 바랐다.

    태고의 어둠 그 자체인 라카트옐의 정체와 그들이 제국의 수호자로서 희생하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디트리히는 늘 그것에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황태자로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라카트옐을 이용하고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파고들기 쉬운 대공자비 쪽을 공략하는 것 말이다.

    물론, 역대 라카트옐 중 가장 소드 마나를 많이 가진 대공자 루시안의 아내가 누구인지 궁금한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만나본 아리엘은 진심으로 그에게서 흥미를 이끌어냈다.

    ‘저는 그를 이용하려는 축이랄까요.’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걸요. 진짜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 안 해요.’

    열 살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디트리히는 그 순간 제 속내를 꿰뚫린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이용하려는 상대에게 ‘내가 널 이용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건 그 사람이 스스로를 방어할 기회를 주는 거잖아요.’

    마치 그가 라카트옐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들여다본 듯한 말이었다.

    그의 속내를 간파한 아리엘의 안목과 그녀의 보석 같은 미소는 디트리히를 매혹시켰다.

    그 뒤에도 만날 때마다 그녀는 계속 그를 놀라게 했다.

    디트리히의 머릿속에 라카트옐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만큼 아리엘도 늘어났다.

    어쩌면, 원래 목적이었던 라카트옐 남자들보다 더욱 관심이 커져 버렸는지도 몰랐다.

    “조카님.”

    그때 파트너인 고모 헤스티아가 디트리히의 상념을 방해했다.

    헤스티아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긴 한 모양이네?”

    “아닙니다, 고모님.”

    디트리히는 얼른 황태자다운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이미 심증을 잡은 헤스티아는 더욱 집요하게 물었다.

    “누구야? 신분이 좀 낮아도 내가 폐하를 잘 구슬려볼게. 정 안되면 정부로 들이면 되잖아. 어느 가문 영애야?”

    “정말 아니라니까요.”

    부드럽게 대답하며 디트리히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부라니.

    아내와 애인을 따로 두라는 말인가.

    황실의 그런 점에 진절머리가 난 디트리히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리엘을 그 대상으로 대입하자 더 불쾌해졌다.

    오늘도 오프닝 댄스부터 기분이 이 상태니 전혀 의욕이 나지 않았다.

    디트리히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프닝 댄스가 끝나고 댄스홀이 열리자 귀족들과 각 왕국 공주들이 홀을 가득 채웠다.

    아리엘은 안색이 좋지 않은 디트리히를 살짝 살펴보았다.

    그의 앞에는 춤 상대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전하께서도 고생하시네.’

    몸집이 작은 그녀는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기 위해 루시안에게 더욱 바짝 붙어 섰다.

    그때 누군가가 아리엘과 루시안이 서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다.

    제국 사교계에 루시안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은 아주 드물었다.

    “안녕하세요, 루시안님!”

    아리엘은 눈앞에 등장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백금발의 미녀, 클라리스 공주가 제 시녀들과 수행원들을 데리고 와 있었던 것이다.

    클라리스는 왕국의 공주지만 제국의 대공과는 하늘과 땅만큼 격이 달랐다.

    왕국의 왕족은 제국에서 공작 가문 정도의 지위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클라리스 공주가 루시안에게 존대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화려한 미소를 지으며 클라리스가 도톰한 입술을 당겼다.

    “루시안님?”

    마치 클라리스가 온 걸 방금 발견했다는 듯 루시안이 서늘하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누가 내 이름을 입에 담아도 된다고 허락했지?”

    그가 오만하게 냉소했다.

    “내가 허락한 건 내 아내뿐일 텐데.”

    “그게, 루시안님…….”

    곧바로 루시안이 얼음처럼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대공자.”

    “네?”

    “귀가 없나? 대공자님이라고 부르라는 거다.”

    약간 당황한 클라리스의 미소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방금 들은 폭언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클라리스는 과장되게 호호 웃으며 애교 있게 말했다.

    “어머, 단호하셔라. 대공자님. 저와 춤추지 않으시겠어요?”

    아직도 거기 있었냐는 듯 차가운 루시안의 시선이 잠깐 그녀에게 내려왔다가 사라졌다.

    그가 오싹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기세를 눌러놓으니 별 벌레가 다 끼어드는군.”

    “네……?”

    “하아.”

    성질을 가득 담아 한숨을 내뱉은 루시안이 클라리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서 손에 만져질 만큼 생생한 살기가 뻗쳐나왔다.

    그 위압감에 눌린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금세 보랏빛으로 바뀌었다.

    “넌 방금 내 아내에게 인사하지 않았지.”

    “그, 그…… 못 봤…….”

    이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클라리스가 헐레벌떡 변명을 늘어놓았다.

    루시안이 사형선고라도 내리는 것 같은 잔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뿐 아니라 눈도 없었던 모양이지?”

    “루시안.”

    아리엘은 얼른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그리고 눈빛으로 말했다.

    ‘그만해요.’

    루시안이 제 옷자락을 잡은 아리엘의 손을 잡아채 당겼다.

    얼결에 아리엘은 그와 손을 잡은 형상이 되었다.

    그가 매우 인내하는 듯한 목소리로 클라리스에게 명령했다.

    “내 아내에게 인사해라. 당장.”

    순간 클라리스의 얼굴에 자존심 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남자에게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이 반대 상황이었다고!’

    남자들은 다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썼다.

    필요하다면 자기 아내나 약혼자를 모욕 주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클라리스는 언제나 그런 상황을 즐겼다.

    그런데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하다니…….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일단 클라리스는 아리엘 쪽으로 몸을 돌려 인사했다.

    그녀의 흰 이가 빠득 갈렸다.

    “안녕…… 하세요.”

    인사를 받은 아리엘은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상냥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클라리스님. 인사하러 와주시다니 정말 사려 깊으시네요.”

    하필 루시안한테 인사를 온 게 불운이었지만요…….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대뜸 위협을 당한 클라리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런 마음을 담아 눈빛을 보냈다.

    죄송해요. 얼른 도망가세요.

    “공주님, 가시지요.”

    클라리스를 수행해 온 사람들이 황급히 상전을 모시고 사라졌다.

    그들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아리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을 채 다 쉬기도 전에 루시안이 아리엘을 댄스 홀로 이끌었다.

    “이리 와. 춤추게.”

    어느새 그는 기세를 개방한 상태였다.

    아리엘과 루시안이 바퀴벌레처럼 물러나는 사람들을 가르고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클라리스는 멀찍이서 부들부들 떨었다.

    “저깟 년이 감히 날 동정해?!”

    모욕은 루시안에게 당했음에도, 클라리스는 아리엘에 대한 엇나간 증오로 불탔다.

    그녀는 자신이 반한 루시안에게 여전히 도취되어 있었다.

    “저 붉은 머리 계집만 없었더라도……!”

    클라리스는 손톱이 파고들도록 자신의 주먹을 꽉 쥐었다.


    * * *


    아리엘은 루시안과 춤을 추고 있었다.

    사실 춤이라기보다는 그냥 몸을 붙이고 춤추는 것처럼 간단한 스텝만 밟고 있는 거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얘기 나누기 딱 좋은 환경이다.

    그녀는 루시안의 팔 사이에서 타박하듯 속삭였다.

    “루시안, 그렇게 공주님을 모욕주면 안 돼요.”

    “알 게 뭐야.”

    잠시 침묵하던 루시안이 불쑥 물었다.

    “왜 그것을 구해줬지?”

    응?

    “설마…… 진짜 죽일 생각이었어요?”

    “당연한 거 아닌가.”

    “그, 그냥 인사를 깜빡한 것뿐이잖아요.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면 안 돼요.”

    루시안이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클라리스 공주를 죽이려고 했던 게 온 마음을 다한 진심임을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

    어휴, 정말이지. 생명 존중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니까.

    “루시안, 다음부터는…….”

    “너.”

    아리엘의 말을 자른 그가 훅 파고 들어왔다.

    루시안의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강렬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넌 전혀 신경 쓰지 않는군.”

    “네?”

    루시안은 대리석같이 희고 곧은 이마를 일그러뜨렸다.

    기분이 아주 더러웠는데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까의 여자가 자신에게 춤을 신청했는데, 그의 아내인 아리엘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늘 그는 저 멀리에서 가끔 아리엘을 향하는 디트리히의 시선이 거슬려서 족히 백 번쯤 그를 죽여 버릴 뻔했다.

    디트리히뿐 아니라 수컷이라는 성별을 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리엘을 볼 때마다 그는 쉽게 살인 충동을 느꼈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무감각한 드래곤인 루시안에게 이 모든 것은 처음이었다.

    인간에게든, 다른 어떤 것에든 감정을 아예 느끼지 못하던 그는 오직 아리엘을 통해서만 이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느끼는 감정의 강렬함은 시시각각 그의 뇌리에 깊숙이 조각처럼 새겨졌다.

    루시안은 지금 그가 느끼는 게 집착인지, 소유욕인지, 다른 것인지 모르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아리엘이 엮이면 인간들이 천 배쯤 더 죽이고 싶다는 것.

    그런데 정작 그녀는 그에게 다가오는 인간 여자들에게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깨닫자마자 속이 확 뒤틀렸다.

    아리엘은 늘 그를 계약 상대, 고용주, 기대할 것 없는 폭한으로 여겼다.

    결국 그는 악당이니까 그녀의 인식이 딱히 틀린 건 없다.

    그걸 알면서도 그의 마음은 그걸 용납하지 못했다.

    루시안은 충동적으로 아리엘의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가져갔다.

    입맞춤보다는 확 깨물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도장이라도 찍어야 좀 진정될 것 같았다.

    한편 아리엘은 다른 생각에 잠겨있었다.

    ‘일단 사람 목숨은 살렸는데…….’

    피의 무도회가 될 위기를 넘기고 나자, 다른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클라리스와 루시안이 나란히 서 있었던 모습.

    딱 루시안과 비슷한 나이대의 클라리스는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아름다웠다.

    성숙한 몸매를 드러내는 드레스, 도톰하고 유혹적인 입술.

    적당히 살이 올라 포동포동한 팔뚝과 찰랑이는 백금발 머리카락.

    물론 루시안의 미모가 너무 우월했기에 클라리스는 태양 옆에 있는 희미한 촛불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그래도 선남선녀 같았어.’

    아리엘은 시무룩하게 자신의 희고 마른 팔목과 작은 손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때, 루시안의 한 손이 스르르 그녀의 뒤통수를 감쌌다.

    ‘앗?’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한 아리엘의 몸이 긴장으로 수축했다.

    그가 아리엘의 이마에 키스하려는 듯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어어…….’

    이마 뽀뽀쯤이야 그 전에도 루시안이 소유권 표시하듯 했던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냥 접촉.

    키우는 토끼나 다람쥐에게도 할 수 있는 것.

    그런데 그녀의 몸은 반사적으로 움찔 뒤로 물러났다.

    심장이 풍랑 만난 배처럼 확 날뛰었다.

    귀 끝이 달아오를 만큼 부끄럽고 긴장됐다.

    루시안은 어떨지 몰라도, 그녀는 더 이상 그게 편안하지 않았다.

    아리엘이 피하자, 루시안의 동작이 뚝 멈췄다.

    “…….”

    둘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나의 춤곡이 끝났다.

    둘 사이의 기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다이아나가 재빨리 다가왔다.

    “대공자님. 잠시 대공자비님 좀 빌려갈게요.”

    아리엘은 다이아나의 손에 허깨비처럼 끌려갔다.

    그녀가 피했을 때, 찰나 루시안이 보였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왜 그런 얼굴을……?’

    지독히 상처받은 듯한 표정.

    아리엘의 심장마저 욱신거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기분이 아득했다.

    늘 애 취급만 해놓고, 항상 애완동물한테 하듯 입 맞춰 놓고.

    어째서 루시안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건가요?

    다이아나가 아리엘을 빼돌리는데도 그는 석상처럼 선 채 잡지 않았다.


    * * *


    클라리스 공주는 지금 독기를 가득 품은 상태였다.

    무도회 첫날 한눈에 반한 남자가 라카트옐 대공자인 것까지는 좋았다.

    라카트옐의 이름과 위세는 워낙 유명해서 클라리스도 들어본 적 있었으니까.

    그녀는 대공자와 결혼을 시켜달라고 황가에 조를 생각이었다.

    시에나 왕국은 힘이 있으니 황제는 그녀의 소원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그러던 중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뭐?! 대공자가 이미 결혼했다고?”

    뺨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그럴 순 없어.

    나와 대공자는 운명이야. 운명이라고!

    “대체 아내라는 계집이 누군데?”

    그녀에게 소식을 물어다주는 시녀가 가리킨 곳에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대공자와 나란히 서 있었다.

    시녀가 속닥거렸다.

    “후작 영애랍니다. 친정은 그저 그렇대요.”

    “몇 살이나 먹었대? 열둘? 열셋?”

    “열네 살이랍니다.”

    “흥.”

    클라리스는 가자미 눈을 뜨고 아리엘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가녀리고 작아서 어린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여자태가 났다.

    “더 자라면 제법 봐줄만 할 것 같지만, 지금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잖아?”

    관찰해보니 대공자와 그렇게 알콩달콩한 사이도 아닌 것 같았다.

    스킨십을 하거나 서로를 향해 꿀 떨어지게 웃는 일이 별로 없었다.

    “정략결혼이 그럼 그렇지. 내 루시안님은 억지로 저 계집애랑 사는 게 분명해.”

    그렇담 내가 구해줘야지!

    클라리스는 자신만만해졌다.

    그녀는 여태까지 남자들을 유혹해 파혼시킨 적이 수두룩했다.

    자신이 대공자를 유혹하면 저 어린 계집애 따위는 금방 밀려나 이혼당할 게 뻔했다.

    둘째 날, 그녀는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가장 비싼 드레스와 장신구로 한껏 꾸미고 대공자에게 접근했다.

    “안녕하세요, 루시안님.”

    자연스레 아리엘을 무시하고 대공자에게만 인사를 건넸다.

    뚜렷한 유혹의 신호였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망신을 당하고 면전에서 쫓겨나기까지 한 것이다.

    옆에서 시녀들이 호들갑스럽게 그녀를 위로했다.

    클라리스가 성질을 내기 시작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대공자님은 체면을 중요시하시나 봐요. 공주님께서 대공자비가 되시면 공주님께도 저렇게 해주실 거예요.”

    “맞아요. 지금 대공자비랑은 입맞춤도 안하던 걸요? 아마 욕구불만 상태여서 더 까칠하신 걸 거예요.”

    얼굴이 시뻘게져서 화를 내던 클라리스는 조금 화를 가라앉혔다.

    “너희 말이 일리가 있구나. 그럼 그 붉은 머리 계집부터 공략해야겠어.”

    “어떻게 하시게요?”

    “멍청하기는. 어떡하긴 뭘 어떡해? 떨궈내야지.”

    클라리스는 아리엘이 혼자 있는 타이밍을 잡기 위해 온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파우더룸에서였다.


    * * *


    아리엘은 파우더룸 의자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를 데리고 나와준 다이아나가 혹시 대공자님과 싸웠냐고 물어봐서 아니라고 대답하긴 했는데 좀 혼란스러웠다.

    루시안의 그 표정…… 뭐였지?

    그리고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그러고 보니 넌 전혀 신경 쓰지 않는군.’

    내가 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지?

    옆에서 함께 있어주던 다이아나가 황후의 부름을 받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다이아나는 아리엘을 혼자 둘 수 없다면서 세실을 불러오겠다고 했다.

    세실이 오기 전 혼자 앉아서 계속 고민 중인데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누구실까. 대공자비님 아니세요?”

    아리엘은 퍼뜩 고개를 들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클라리스 공주가 뒤에 여자들 몇 명을 달고 서 있었다.

    수행원으로 따라온 왕국의 귀족 여자들인 것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 클라리스님.”

    아리엘은 일단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클라리스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팔장을 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볼품없네.”

    “네?”

    “결혼한 지가 벌써 4년째라면서요? 첫날밤은 치르셨나 모르겠네.”

    클라리스의 도톰한 입술이 치켜 올라갔다.

    “보아하니 아직 월경도 안하는 어린애 같은데 그럴 리가 없겠지.”

    클라리스가 말하자 그녀 뒤에 서 있던 여자들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아리엘은 표정을 굳혔다.

    모욕을 당한 상황인 걸 모를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하지만, 왜?’

    그녀는 클라리스가 왜 자신에게 모욕을 주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리엘이 생각하기에 타당한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루시안에게 당한 모욕을 만만한 자신에게 갚아주려 한다는 것.

    그러나 아리엘은 부당한 모욕을 가만히 참고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차분하고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 일이라면 루시안이 심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시에나 왕국의 체통도 생각하셔야지요.”

    “뭐, 뭐?”

    비웃는 기색이 가득하던 클라리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바뀌었다.

    어린 아리엘이 자신의 공격에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이 분통 터진 것이다.

    클라리스는 상대방이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수치스러워할지 잘 파악하곤 했다.

    그렇기에 여태까지 그녀가 말로 공격을 할 때 이렇게 침착한 여자는 없었다.

    다들 울거나 화를 내거나 얼굴을 붉히며 패배했었는데!

    클라리스는 이를 앙다물며 날카롭게 말했다.

    “말귀를 잘 못 알아듣나 봐? 너한테 대공자님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너 같은 어린애가 아내랍시고 옆에 있으니 그분이 괴로워하는 거야!”

    이미 클라리스의 뇌내망상 속에서는 루시안이 자신을 붙잡으며 제발 저 끔찍한 아내에게서 구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아리엘은 전혀 흥분하지 않고 클라리스에게 또박또박 대꾸했다.

    “제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는군요. 하지만 나이란 건 노력해서 바꿀 수 없는 부분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얻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 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무시하다니. 어리석군요.”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아리엘 때문에 클라리스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히려 수치심을 느낀 건 클라리스 쪽이었다.

    “뭐? 내가 어리석다고? 네까짓 게 뭔데 그런 말을 해!”

    아리엘은 끊임없이 무례를 범하는 클라리스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금세 판단이 섰다.

    ‘이런 무례를 그냥 넘어가면 안 돼.’

    그녀도 라카트옐이었다.

    라카트옐의 성을 가진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은 대공가의 위상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였다.

    아리엘은 파우더룸 입구를 지키는 황궁 시녀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본 클라리스가 시뻘게진 얼굴로 따지고 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야비하게 남편에게 고자질이라도 할 셈이니?”

    아리엘은 대답을 하지 않고 시녀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공주께서 파우더룸 안이 불쾌하신가 보구나.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시게 그만 나가실 수 있게 도와드리렴.”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황궁 시녀가 대공자비인 아리엘의 명령을 곧장 받들어 클라리스에게 말했다.

    “문은 이쪽입니다, 공주님.”

    돌려 말했지만 마치 불청객을 쫓아내는 듯한 대우였다.

    파우더룸에서 신분이 더 높은 자가 더 낮은 자를 내보내는 것.

    자신이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취급을 받자 클라리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더구나 아리엘의 시선은 그녀를 향해있지조차 않았다.

    눈앞에서 아리엘에게 깨끗하게 무시당한 클라리스가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지, 지금 날 여기서 끌어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감히 네가?”

    아리엘은 클라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앳된 목소리에 눈높이도 낮았지만, 아리엘은 똑바로 클라리스를 바라보았다.

    “클라리스님의 논리대로 해드리려는 겁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나이를 제대로 먹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이……!”

    뒤에서 클라리스의 일행이 말리려는 시늉을 했지만 클라리스는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렸다.

    “내가 가만 놔둘 줄 알아?”

    클라리스는 앞으로 뛰쳐 나와 아리엘의 어깨를 밀쳤다.

    센 힘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충격에 아리엘은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

    넘어지는 그녀를 본 클라리스와 무리가 다시 큰 소리로 비웃어댔다.

    “저 꼴 좀 봐! 종이 인형도 아니고. 오호호!”

    풀잎 같은 체구를 가진 아리엘의 몸은 물리적인 공격에 약했다.

    루시안이 평소에 헥터와 랄프를 붙여놓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놀란 황궁 시녀가 아리엘을 부축했다.

    아리엘이 주먹을 꼭 쥐고 몸을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세상에, 아리엘!”

    경악한 듯한 다이아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이아나의 옆에는 세실과 황후가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다이아나와 세실이 달려와서 얼른 아리엘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함께 온 황후는 아리엘 앞에 있던 클라리스 무리를 노려보았다.

    “공주. 이게 무슨 짓인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혼자서 넘어져 있는 아리엘과 깔깔거리고 있던 여자들 무리.

    어린 대공자비가 혼자 있다가 괴롭힘을 당한 게 분명했다.

    라카트옐의 눈치를 봐야 하는 황후는 이 상황을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다.

    “시에나 왕국에서 온 공주라기에 품위있는 모습을 기대했건만. 이런 천박한 짓을 벌이다니!”

    “화, 황후 마마…… 그게 아니라.”

    한편 클라리스는 기가 막혔다.

    황후가 나타났을 때 그녀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황제와 황후는 시에나 왕국의 공주인 자신에게 관대했다.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게 뻔했다.

    그런데 황후가 곧장 화를 내는 것이다.

    대공자비가 아니라 자신에게.

    “마마, 제 이야기도 들어주십…….”

    황후가 클라리스의 변명은 듣지도 않고 돌아섰다.

    “대공자비, 괜찮소?”

    “네. 괜찮습니다, 마마.”

    아리엘은 차분히 대답했지만, 황후는 자기 일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이 일이 라카트옐 남자들 귀에 들어가는 즉시 이 무도회는 끝장이 날테니까.

    제국 최대의 외교 행사가 결딴날 상황인 것이다.

    황후는 얼어붙어 있는 클라리스 무리를 향해 서릿발처럼 명했다.

    “뭣들하고 섰나. 당장 여기서 사라져! 내 이번 일은 잊지 않고 꼭 왕국에 알려 공주의 잘못을 묻겠네.”

    클라리스는 분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일단 제국의 황후가 명령한 이상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짜증 나! 왜 하필 이때 저 계집이 넘어져가지고…….’

    밖으로 나온 클라리스는 화풀이로 제 수행원들의 뺨을 때렸다.

    “너희들이 똑바로 못해서 나만 혼이 났잖아. 당장 변명을 했어야지!”

    씩씩거린 그녀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이제보니 일부러 자빠진 거였어. 영악한 것 같으니. 황후 마마가 올 걸 다 계산하고 한 짓이었다고!”

    미친 여자처럼 화를 내던 클라리스는 수행원 하나의 입술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때린 후 손을 멈췄다.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지.”

    그녀는 옆을 지나가던 제국의 귀족 영애 하나를 붙잡아 세웠다.

    클라리스의 도톰한 입술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말씀 좀 물어볼게요. 대공자비에 대해 뭐 아는 거 있나요?”

    위험한 얘기면 위험한 얘기일수록 좋답니다.


    * * *


    자신 대신 황후가 나서서 화를 냈기 때문에 아리엘은 클라리스의 무례를 더 따지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클라리스가 마치 루시안을 위하는 듯 말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대체 왜 그런 거지?

    루시안은 공주를 함부로 대하기만 했는데.

    황후가 돌아가고 난 뒤, 다이아나와 세실이 참았다는 듯 물었다.

    “아리엘. 어떻게 된 거야? 얘기 좀 해 봐.”

    “그래. 그 막돼먹은 공주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이 친구들에게라면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리엘은 감정을 싣지 않고 짧게 설명했다.

    그런데 다이아나와 세실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했다.

    “뭐어?! 클라리스 공주가 그렇게 말했다고?”

    아리엘이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이아나가 바락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개념 상실한 공주가! 이거 완전히 그거잖아.”

    “그거?”

    “그래, 그거!”

    “그게…… 뭔데?”

    다이아나가 입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외쳤다.

    “남자 뺏으려는 불륜 꿈나무!”

    ……?

    아리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자를 빼앗아?

    다이아나와 세실이 보기 드물게 한 목소리로 클라리스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내 있는 남자에게 눈독을 들인 거잖아. 미친 거 아니야!”

    “네 말이 맞다, 다이아나. 불순한 마음을 품은 걸로도 모자라 아리엘에게 폭력을 행사하다니. 정말 뻔뻔하군.”

    아리엘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럼…… 클라리스 공주가 이런 짓을 한 게 루시안을 좋아해서라는 거야?”

    다이아나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확실해. 100퍼센트야. 그 여자가 대공자님께 홀랑 반해서 꼬리친 거라고!”

    “…….”

    아리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충격이었지만, 곧 다른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그녀와 루시안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녀에겐 다른 여자가 루시안을 좋아한다고 해서 화낼 권리가 없었다.

    그런 건 그들의 계약 조건에 나와 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무언가가 그녀의 가슴 속 안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조용해진 아리엘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세실이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께 가보는 건 어때?”


    * * *


    같은 시각, 클라리스 공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루시안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제국 사교계도 역시 왕국 사교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조금만 파헤쳐보면 추문이 줄줄줄 나오는 것을.

    자신에게 화를 내던 황후의 태도를 보고 나니 루시안이 더욱 탐났다.

    ‘별 것 아닌 계집애에게 황후 마마가 쩔쩔매길래 뭔가 있는 줄 알았더니, 대공자비라서잖아?’

    그럼 그 자리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어.

    아, 대공자님과 난 운명이니까 원래 내 것이나 마찬가지인건가?

    홀로 오만한 기운을 내뿜으며 연회장 벽에 기대 서 있는 대공자는 아까보다 몇 배는 매혹적이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수심을 담은 듯한 눈동자가 클라리스의 마음을 줄줄 녹였다.

    ‘저런 남자도 있는 법이지. 방어기제가 높은 남자랄까? 하지만 일단 남자라면 육탄 공세에는 못 버텨.’

    그의 마음을 녹인 뒤에 대공자비에 대한 추문을 속삭여주면 금방 자신에게 넘어올 것이다.

    클라리스는 혀로 입술을 적시고는 목소리 가득 유혹을 담아 그를 불렀다.

    “대공자님.”

    그리고 그녀는 루시안에게 바짝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클라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된 느낌이었다.

    그때 루시안의 시선이 민감하게 클라리스 뒤편 먼 쪽으로 향했다.

    벽에 기대고 있던 몸도 확 일으켜 세웠다.

    클라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편에 붉은 머리카락의 계집애가 서 있었다.

    클라리스는 이를 악물며 억지로 웃음 지었다.

    “아이, 대공자니임.”

    클라리스는 아리엘에게 보란 듯이 루시안의 팔에 풍만한 몸을 붙였다.

    얼빠진 듯한 대공자비의 얼굴을 보자 킥 웃음이 나왔다.

    그 장면을 본 아리엘의 얼굴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이 떠올랐다.


    * * *


    몇 분 전.

    모니카 공녀가 아리엘을 데려간 후, 루시안은 한쪽 벽에 기대서서 아리엘이 사라진 쪽만 노려보았다.

    아리엘의 친구라는 것들은 제법 영민해서 여자들이 화장을 고치거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금남의 구역으로 아리엘을 빼돌렸다.

    성질대로라면 바로 난입해 들어가겠는데 아까 그녀가 자신을 피했던 것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루시안은 내내 아리엘이 사라진 문 쪽만 뚫어져라 보고있는 중이었다.

    아리엘이 흠칫하며 그를 거부하던 장면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공주가 그에게 접근했다.

    그가 기세를 펼치고 있는 걸 아리엘이 불편해해서 거둬놓았는데, 그 부작용이었다.

    “대공자님.”

    루시안은 눈앞의 공주가 아리엘을 무시했던 게 떠오르자 불쾌해졌다.

    불쑥 피를 보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아예 그쪽으로의 관심을 차단해버렸다.

    안 그래도 아리엘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는 판에 눈앞에서 사람을 썰어버리면 더 싫어할 게 분명했다.

    죽이면 안 된다고 했지.

    하여간 착해 빠져서는.

    그의 아내는 쓸데없이 선량해서 아무리 못되어지라고 명령해도 그렇게 되질 않았다.

    그때 파우더룸과 통해있는 문이 열리고 아리엘이 나왔다.

    루시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문 앞에서 하이츠 백작가의 딸과 손을 흔들며 헤어진 그녀가 자신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리엘 쪽으로 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걸어오던 아리엘과 루시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백금발색 털을 가진 벌레가 그에게 몸을 붙인 것은 그때였다.

    “아이, 대공자니임.”

    무슨 의도인지 빤한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루시안은 그 행동에 더러운 혐오감 이상을 느낄 수 없었다.

    개미가 팔에 타고 오르는 것에 흥분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까.

    애초에 그는 인간 여자를 암컷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인간들 사이에서 아무리 매력적인 여자도 그의 눈에는 지네나 지렁이 같은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역겨워서 털어내고 싶은.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아리엘의 표정이 루시안의 머리를 쾅 마비시켰다.

    아리엘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뭐야, 이 벌레가 나랑 있는 걸 보고 저러는 건가?

    아리엘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루시안은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듯이 멈춰있던 아리엘이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아래로 떨궜을 때는……

    “하……?”

    좋아졌던 기분이 금세 지옥까지 치달아 내렸다.

    옆의 벌레는 그가 뿌리치지 않는 걸 좋은 신호라 여겼는지 끈적한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대공자비가 꽤 예쁘장하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저런 조그만 계집애 따위 눈에 차지도 않으시잖아요? 추문도 엄청나던데. 제가 황제께 청해서 이혼시켜드리겠어요.”

    루시안은 이것을 떨쳐내는데 손을 써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벌레를 떨궈내듯 소드 마나로 클라리스를 던져버렸다.

    엄청난 힘에 밀려난 클라리스는 “꺄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스꽝스런 꼴로 엎어졌다.

    무도회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클라리스가 루시안에게 엉기다 밀쳐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공개 망신의 현장이었다.

    “경고하지. 한 번만 더 내게 접근하면 숨통을 끊어놓겠다.”

    빙하처럼 싸늘하고 잔혹하게 말한 루시안은 곧장 아리엘에게로 다가갔다.

    아리엘은 그가 그 벌레를 떨쳐내는 것도 보지 못하고 뒤를 돌아서 사람들 틈을 지나고 있었다.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는 작은 소녀를 따라잡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아리엘은 웅성이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며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속상해하는 거야? 루시안이랑 나는 그냥 계약 관계일 뿐인데.’

    그의 상처받은 표정을 봤을 때의 충격, 클라리스가 루시안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느꼈던 뻐근함이 한순간에 터져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과거, 후작가에서 학대받고 고통당했던 시간을 지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지 겨우 몇 년.

    좋은 사람들에게서 따뜻한 감정을 배운지도 오래되지 않은 아리엘이 이런 생소한 감정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건 당연했다.

    그녀가 테라스 문을 막 밀치려는 순간이었다.

    타악. 아리엘은 뜨거운 손에 팔을 잡혀 홱 당겨졌다.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루시안. 그녀의 남편.

    아리엘의 팔을 움켜쥔 그가 테라스 문을 열고 아리엘을 테라스로 끌어들인 뒤 문을 쾅 닫았다.

    “너 뭐야.”

    루시안이 양손으로 아리엘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그는 이성이 확 증발하는 것을 느꼈다.

    “거기서 왜 가만히 있어. 왜 과시 안 해. 내가 네 남편이란 걸 왜 보여주려고 하지 않냐고!”

    그가 거친 목소리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손에 잡힌 아리엘은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을 루시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리엘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의 어깨를 잡은 루시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딴 놈이라도 있어?”

    “네?!”

    아리엘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그녀가 고개를 든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루시안이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시선을 맞췄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지닌 짙은 푸른색 눈.

    그 눈이 아리엘의 호흡을 멈추게 했다.

    더 이상은 피할 곳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말해.”

    한참만에 그녀는 겨우겨우 입술을 뗐다.

    “……루시안이랑, 나는…… 계약 관계니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정말로 그러기 싫었는데 말끝에 떨리는 소리가 묻어나왔다.

    그녀를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보고 있던 루시안이 아리엘의 어깨를 놓고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잊었나?”

    루시안이 몸을 숙여 아리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까이 가져왔다.

    그의 숨결이 위험하게 끼쳐왔다.

    “아내 도리를 똑바로 하라고 했었지.”

    목소리가 낮아서 소름 끼치게 퇴폐적으로 들렸다.

    그가 오만한 눈빛으로 명령했다.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내가, 네 것이라고.”

    아리엘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이 그녀의 목덜미, 맥박 뛰는 곳으로 내려왔다.

    포식자에게 잡힌 작은 동물처럼 그녀의 맥박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리엘은 가슴만 달싹거리며 소리없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가까이 있는 그의 얼굴과 루시안이 한 말이 뒤섞여 헷갈렸다.

    ‘이건 명령인 걸까?’

    하지만 뭔가…… 느낌이 다른걸.

    루시안이 위압적으로 턱짓을 했다.

    “대답.”

    “……알겠, 어요.”

    드문드문 끊어지는 아리엘의 대답을 들은 루시안이 그녀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그가 난간에 기대어 손으로 흑발을 성마르게 쓸어넘겼다.

    밤과 어우러진 그 모습은 아찔하게 아름다웠다.

    그가 바닥난 인내심을 명료하게 드러내며 말했다.

    “벌레 따위에게 발정하는 취미는 없어. 그러니 감히 날 의심하지 마.”

    아리엘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하나요?

    꼭 나한테 변명이라도 하는 듯이.

    더한 문제는 그 말에 안심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아리엘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분명 그의 말에 안심을 했는데도, 아리엘의 심장은 두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뭐지, 이상해.’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물빛의 드레스 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천천히 날카로운 기세를 억눌러 가라앉힌 루시안이 낮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게서…… 다시는 돌아서지 마.”

    방금까지의 위압적인 태도는 사라지고, 이상한 절박함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렇게, 무도회 둘째 날의 저녁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무도회 두 번째 날의 마지막 순서는 황태자 디트리히의 연설이었다.

    애당초 이 무도회의 목적은 황태자비를 선보기 위한 것.

    이틀이나 여자들과 춤을 추고 어울렸으니 황태자 쪽에서도 슬쩍 마음을 비치는 것이 예의였다.

    모든 공주들과 귀족 영애들의 시선이 한데 모인 가운데 디트리히가 입을 열었다.

    “다들 궁금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여기 모인 여성분들 가운데 제 마음을 이끈 분이 계신 지를요.”

    그의 말에 연회장 안 여자들의 얼굴이 황홀함에 흐물흐물 풀어졌다.

    순금을 녹여 뽑아낸 듯한 금발과 여름의 녹음 같은 녹색 눈, 고상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이목구비.

    디트리히 레온 드 슈테인은 제국 미혼 남자 중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오히려 라카트옐 대공가는 오랜 세월 쌓아온 악명과 황실도 범접하지 못하는 위세 때문에 ‘오르지 못할 나무’로 여겨졌다.

    황실은 라카트옐과 비교해서 적당히 자비로운 이미지였다.

    디트리히가 모든 소녀들의 다리를 풀리게 할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답부터 하자면, 예. 이 중에 계십니다.”

    미혼 여자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디트리히와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눠봤거나 춤을 춘 영애, 공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이 자리에서 디트리히의 선택을 받는 단꿈에 부풀었다.

    디트리히가 진중하게 미소짓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비 자리는 미래의 황후 자리. 제국의 어머니가 될 사람이어야 하기에…… 저는 좀 더 신중하고 싶습니다.”

    그의 시선이 잠깐 다른 쪽으로 향했다.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있는 곳.

    아까 작은 소동이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아리엘은 괜찮아 보였다.

    그녀 옆에 무심하게 서서 접근금지 기세를 내뿜는 루시안을 본 디트리히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는 여전히 루시안이 아리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루시안은 인외의 존재고, 아리엘은 인간이니까.

    하지만 대공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리엘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가슴의 통증은 그 때문일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 디트리히가 싱그럽게 웃었다.

    그는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다.

    “그럼, 남은 무도회 기간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한편 수치스러운 꼴을 당한 뒤 구석에 처박혀 있던 클라리스 공주는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이를 갈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대공자 대신 황태자를 유혹해 체면을 세워보려는 마음이 들자마자 깨달아버린 것이다.

    디트리히의 시선이 향하는 곳도 아리엘이라는 것을.

    “분해, 분하다고. 찢어 죽여버리고 싶어!”

    특히 자신을 매몰차게 내쳤던 루시안이 아리엘과는 제법 다정하게 붙어있는 것을 보니 더욱 열등감이 끓어올랐다.

    “가만 안 둬…….”

    그런데 구석진 곳에 있는 그녀에게 누군가가 접근해왔다.

    “공주님?”

    “뭐야?!”

    잔뜩 화가 난 클라리스는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며 대꾸했다.

    그녀가 돌아본 곳에는 검은 망토를 쓴 사람이 서 있었다.

    묘하게 검고 끈적이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누구야?”

    “대공자비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무, 물론이지. 그런데 넌 누구냐니까!”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이 웃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쇠끼리 긁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웃음이었다.

    “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저 붉은 머리의 대공자비를 미워하는 사람은 당신만이 아니라는 거지요.”

    클라리스의 귀가 솔깃해졌다.

    검은 망토의 사람이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클라리스의 눈동자가 약간 몽롱해졌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서 악의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내가 못 가진다면 그 계집도 행복해질 수 없어.”


    * * *


    무도회 셋째 날 아침, 드레스를 준비하러 온 헬렌에 이어 친구들이 방문했다.

    친구들은 어제 클라리스와 있었던 일 때문에 아리엘을 더욱 신경 써주었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며, 아리엘은 조심스레 어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털어놓았다.

    클라리스와 루시안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상했었다는 것.

    아리엘의 이야기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두 친구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귀여워, 아리엘! 드디어 질투라는 감정을 깨달았구나!”

    응?

    “흠, 흠. 나는 네 그런 솔직한 점을 좋아한다, 아리엘. 질투는 전혀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야.”

    으응?

    ‘질투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할 틈도 없이 다이아나가 아리엘을 와락 끌어안았다.

    “당연한 거야, 아리엘. 네 남편이잖아? 네 거라고. 사람이라면 자기 걸 누가 탐내면 기분이 나쁘지.”

    잠깐, 잠깐만.

    루시안이 내 거라니, 말도 안 돼.

    아리엘과 루시안 사이의 계약은 반대였다.

    그가 그녀를 구해주는 대신, 아리엘은 그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아리엘과 루시안의 계약 결혼을 모르는 친구들은 열렬하기만 했다.

    “아, 설레라. 내 귀염둥이가 드디어 다른 여자 질투도 하고.”

    “아리엘 얘기만 들었는데 심장이 두근거린다. 대공자님이 단호하게 그 여자를 밀쳐낼 때도 감탄했었지.”

    “…….”

    아리엘은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 뺨을 붉힌 친구들이 귀엽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그냥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어제 루시안이 했던 말이 자꾸만 마음속에 맴돌았다.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내가 네 것이라고.’

    질투라는 단어가 가슴 한구석을 콕콕 찌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셋째날 아리엘이 입은 드레스는 복숭아꽃을 연상시키는 연한 분홍색 드레스였다.

    분홍색 치맛단 위에는 투명한 베일 천이 살포시 덧대어졌고, 베일 위에 섬세한 장인의 레이스로 문양이 들어갔다.

    루시안은 이번 파티에 하고 가라면서 핑크 다이아몬드가 박힌 티아라 장식을 선물했다.

    루시안이 준 티아라를 본 의상실 헬렌은 숨이 막혀서 거의 기절 상태가 되었다.

    핑크 다이아몬드는 매우 희귀한 보석이고, 티끌만한 조각이라도 장신구에 끼우면 수도의 저택 한두 채가 왔다 갔다 할 만큼 값비쌌다.

    그런데 아리엘의 티아라에 박힌 메인 핑크 다이아몬드는 크기가 클 뿐 아니라 색감과 투명도가 완벽했다.

    헬렌은 헐떡이며 물었다.

    “제, 제, 제가 보고 있는 게 설마 세계에 딱 하나뿐이라는 70캐럿짜리 ‘세렌디피티’인 건 아니지요?”

    “음, 아마 아닐 거야.”

    아리엘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루시안은 그런 말은 해주지 않았다.

    그냥 안 받으면 안 될 것 같은 눈빛으로 상자째 내밀었을 뿐.

    아리엘 생각에 그렇게 귀한 다이아몬드라면 한 마디쯤 해주는 게 당연했다.

    ‘내가 파티에서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하지만 헬렌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슬슬 아리엘의 등골도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루시안이 줄 때 마지못해 일단 받아놓은 건데……

    정말 ‘세렌디피티’면 어떡하지?

    당연히 이혼할 때 다 놔두고 갈 거긴 하지만, 이런 장신구를 하고 밖에 나갈 생각을 하니 손이 떨렸다.

    익숙해졌다고 생각은 해도 라카트옐 남자들이 벌이는 일의 대부분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규모인 것이 허다했다.

    더구나 라카트옐 남자들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표본 같지 않던가.

    “헬렌.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너무나 불길해진 아리엘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곧장 루시안의 방으로 찾아갔다.

    침대에 비딱하게 걸터앉은 루시안은 알렌을 내쫓기 직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렌이 백여 종의 넥 브로치를 들고 고르시라며 서 있었던 것이다.

    넥 브로치는 타이 대신 셔츠 위로 다는 장식이었다.

    그녀를 본 루시안이 마침 잘됐다는 듯 알렌에게 섬뜩한 눈빛을 보냈다.

    “꺼져.”

    알렌이 간절한 표정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루시안의 예복 장신구를 고르는 게 알렌의 수명을 깎아 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휴. 어쩔 수 없지.’

    아리엘은 미소지으며 알렌의 손에서 브로치 뭉치를 받아들었다.

    “내가 할게요, 알렌.”

    알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의 눈빛을 보낸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나갔다.

    아리엘은 침대에 앉아있는 루시안에게 다가가서 셔츠 위에 넥 브로치를 대주었다.

    브로치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지만 어떤 보석도 루시안의 흰 얼굴과 붉은 입술만큼 눈에 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길거리의 자갈 하나를 가져다 장신구로 써도 가장 고귀한 보석을 달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개연성이 있었다.

    “좀 더 가까이 와서 해.”

    루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아리엘을 와락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까워진 거리때문에 아리엘의 뺨은 저절로 붉어졌다.

    그녀는 반항하듯 몸을 뒤로 뺐다.

    “머, 멀리에서도 할 수 있어요.”

    “집사도 그렇게 멀리서는 안 했어.”

    아리엘은 루시안 얼굴을 안 보기 위해 브로치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그가 물었다.

    “왜 왔지?”

    “아, 맞다.”

    아리엘은 그제야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 기억해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발 우려가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저기, 루시안이 준 티아라요. 거기 장식된 다이아몬드…… 혹시 그거 이름이 세렌디피티예요?”

    “어.”

    응?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정말로 세렌디피티라고요?”

    “그래.”

    “…….”

    아리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루시안?

    하얗게 질린 그녀를 본 루시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그거…… 엄청 비싼 거라고.”

    “상관없잖아.”

    아니, 상관있는데요. 매우!

    “나, 나 오늘 그거 안 하고 갈래요.”

    “왜?”

    “파티 가서 망가지거나 잃어버리면 어떡해요. 책임 못 질 건 하는 거 아니랬어요.”

    그가 불편한 심기를 가감없이 드러냈다.

    “네가 책임을 왜 져?”

    ‘그야, 받은 거 다 놓고 가야 하니까요!’

    아리엘은 속으로만 대꾸했다.

    루시안이 아리엘의 허리를 확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의 몸이 커져서 그런지 안정감이 느껴졌다.

    “앗.”

    “잘 들어, 아리엘라.”

    그가 아리엘의 귓전에 낮게 말했다.

    “내가 준 건 네 거다. 네가 쓰든, 팔든, 버리든, 말 새끼한테 달아주든 다 네 맘이라고. 하물며 잃어버리는 거?”

    루시안이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도로 찾아달라면 어떻게 해서든 찾아주지.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

    이, 이건 반칙이야.

    아리엘은 코앞에까지 온 루시안의 얼굴 때문에 더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루시안은 자기 얼굴의 파괴력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제 내 브로치나 골라. 네가 고르는 걸로 하고 갈 테니까.”

    “네에?!”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었다.

    아리엘은 백여 종이나 되는 넥 브로치를 보며 잔뜩 울상을 지었다.


    * * *


    티아라에 박힌 보석이 세렌디피티라는 걸 알게 된 헬렌은 흥분하며 아리엘의 매무새를 만져주었다.

    웬만해서는 강심장인 헬렌이 떨리다고 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 보석임은 분명했다.

    아리엘은 마차에서 루시안에게만 보여주고, 연회장에는 티아라를 벗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대공자비 자리 때문에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그녀는 원래 남에게 주목받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야속한 루시안은 옆에 있기만 해도 시선을 끄는 사람이라 그녀가 수수해봤자 별 쓸모가 없었다.

    ‘그래도 헬렌이랑 다른 사람들이 예쁘게 꾸며줬는데 망치는 건 실례겠지.’

    아리엘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보석을 알아보고 아리엘에게 한 마디씩 건넸다.

    그렇게 서른 명쯤 지나치고 나니 무도회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인데도 벌써 지친 기분이었다.

    인간들이 계속 쳐다보는 것에 짜증이 난 루시안이 기세를 내뿜어서 겨우 사태가 진정됐다.

    하지만 이미 사교계는 아리엘의 티아라뿐 아니라 드레스에 열광하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리엘이 오늘 입은 분홍색 드레스는 오프숄더 형식으로, 가느다란 어깨선과 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가 평소 입었던 것보다는 많지만 또래들의 드레스에 비해 노출이 심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리엘 나이대에서도 성숙한 소녀들은 과감한 디자인을 입곤 했다.

    드러난 아리엘의 어깨와 팔을 보는 영애들마다 감탄의 신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살을 빼도 전 저렇게 여리여리해질 수 없겠죠?”

    “대공자비님 허리 좀 봐요. 내 손으로 잡아도 한줌에 잡히겠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아리엘의 체형은 헬렌의 솜씨 아래 더욱 여성스럽고 사랑스럽게 드러났다.

    칭찬을 많이 듣자 아리엘은 문득 조금 궁금해졌다.

    ‘루시안은 어떻게 생각할까?’

    인간 여자를 동족으로 보지 않는다지만, 다른 면에서는 루시안도 미적 감각이 뛰어났다.

    그가 선물하는 보석이나, 그의 방 인테리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드레스가 예쁘다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민망해서 직접 물어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와 춤을 출 때가 되자 아리엘은 어김없이 긴장해서 시선을 피했다.

    잠시 인내하던 루시안이 혀를 차며 말했다.

    “날 봐.”

    아리엘은 겨우겨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시선을 마주하고 춤을 추자 온몸이 간질간질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오늘따라 춤이 안 꼬여서 기분이 더 붕 뜨는 것 같았다.

    ‘루시안 미모는 진짜 위험한 것 같아…….’

    보통 때는 아리엘이 버벅거리면 재미있어하기만 했던 루시안도 오늘은 오만하고 고고한 눈빛이었다.

    아리엘과 루시안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춤을 추는 장면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주변에서 춤을 추던 커플들은 뒤로 물러났고, 웅성웅성 떠들던 무리들은 대화를 멈췄다.

    심지어 시종장과 귓속말을 나누던 황제도 하던 말을 멈추고 대공자 부부의 춤을 구경했다.

    이윽고 춤이 끝나자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춤에 집중했던 아리엘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루시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루시안, 나 잠깐 쉬다 와도 돼요?”

    “안…….”

    안된다고 말하려던 그가 아리엘의 얼굴빛을 보고 허락해주었다.

    “다녀와.”

    아리엘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귀부인들이 가득 모여앉은 휴식 공간으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서도 여전히 멍한 아리엘을 본 귀부인들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대공자비께서 신랑과 춤을 추신 다음 얼이 빠지셨는데요?”

    “어쩜. 그렇게 황홀했나요, 귀여운 대공자비님?”

    “워낙 잘생긴 신랑이시니 그렇겠지요. 내가 저 나이였던 때가 벌써 20년 전이네요. 그리워라.”

    장난스럽지만 유쾌하고 따스한 귀부인들이었다.

    그들은 아리엘의 목을 축여준다면서 도수 낮은 샴페인을 권했다.

    제국 사교계는 데뷔만 했다면 미성년자들도 파티 때 샴페인을 마실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술을 거절했을 아리엘이지만 지금은 좀 목이 타서 그 잔을 받아들었다.

    목구멍 안을 화끈하게 만드는 액체가 흘러 들어가자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금세 뺨이 발그레해진 아리엘이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귀부인들은 서로 웃음을 주고받으며 짓궂게 어린 신부를 부추겼다.

    “남편 험담 좀 해봐요.”


    * * *


    쉬러 간다던 아리엘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루시안은 귀부인들이 잔뜩 모여있는 휴게 공간으로 그녀를 찾으러 갔다.

    “어머나. 대공자님이 오셨어.”

    “직접 찾으러 오시다니. 우린 얼른 빠져드리자.”

    아리엘로 추정되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무리가 그를 보고 와글와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가운데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보였다.

    역시나 귀부인들이 둘러싸고 있던 사람의 정체는 아리엘이었다.

    “아, 루시안!”

    아리엘은 아까 하얗게 질렸던 안색과 정반대로 발그레하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지?

    루시안은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 발자국 다가간 순간, 그의 예민한 감각은 그녀에게서 낯선 향기를 감지해냈다.

    “……샴페인?”

    루시안은 기가 막혀서 신음을 내뱉었다.

    술이라니.

    꼬맹이 아내가 벌이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한 짓이었다.

    곧장 아리엘을 데려가려던 그는 몽롱한 표정으로 헤헤 웃는 그녀를 보고 의욕을 잃었다.

    루시안은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넘긴 뒤 아리엘 옆에 털썩 앉았다.

    “하, 이걸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상황이야 뻔했다.

    귀여운 소녀가 순진한 얼굴로 앉아있으니, 놀리고 싶어 술을 권했겠지.

    저 새끼 사슴 같은 체구로는 샴페인 반 잔만 마셔도 취했을 거고.

    루시안은 실로 오랜만에 이마를 짚었다.

    그는 하느작거리며 소파에 기대는 아리엘에게 인내심을 눌러 담아 물었다.

    “아리엘라. 왜 술을 입에 댔지?”

    “으음. 얘기 하느라요.”

    다행히 발음까지 상하진 않는 걸 보니 그 여자들도 양심은 있었나보다.

    술을 많이 먹인 것 같진 않았다.

    기껏해야 한두 잔?

    루시안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무슨 얘기를 했길래 안 하던 짓을?”

    “아, 그게…….”

    아리엘이 기분좋게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내용만 빼놓고 듣자면 ‘아주 맛있는 케이크를 먹었어요!’와 별다를 것 없는 어조였다.

    “남편 욕을 했어요!”

    “……?”

    아리엘이 험담할 남편이라면 자신밖에 없었다.

    내 욕을 했다고?

    루시안은 자신이 지금 화를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샴페인 기운을 빌려 아리엘이 평소보다 당당하게 주장했다.

    “남편 욕은 원래 다 하는 거래요.”

    “그래서, 너도 했나?”

    “네.”

    “하아…….”

    루시안은 난폭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욕을 했다는 걸 남편에게 들키지 말란 얘기는 못 들었어?”

    “음, 들었어요.”

    “근데.”

    아리엘이 평소와 달리 아주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부부 사이에는 속이는 게 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요.”

    “…….”

    이걸 상대로 화를 내는 게 더 멍청이 같겠군.

    루시안은 턱을 괴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샴페인 탓인지 지금의 그녀는 잘 웃고 당돌하게 대꾸도 잘하는 것 같았다.

    요즘은 그만 보면 도망가거나 눈을 피해서 이런 모습은 잘 볼 수 없었다.

    루시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떻게 보면 기회인가.”

    그는 아리엘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꾹 눌러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우우, 하는 소리를 내면서 아리엘의 입술이 빠끔거렸다.

    루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체 뭐라고 욕을 했기에 이실직고야?”

    아리엘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뺨을 잡은 손을 놓아주자 웅얼웅얼 하소연을 했다.

    “그러니까요. 왜 다들 이해를 못했을까요. 저는 욕을 했는데 다들 맞장구를 안 쳐줬어요. 다른 사람들이 얘기할 땐 맞장구 쳐줬으면서.”

    “뭐라고 했는데?”

    잔뜩 억울한지 아리엘이 분홍빛 입술을 꼭 다물었다.

    “남편이…… 남편이 너무 애기 취급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좋을 때라잖아요. 나한테는 심각한 문제였는데!”

    그녀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미치겠네.

    루시안은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이건 대체 뭘 믿고 이렇게 귀여운 거야?

    나 없인 술을 못 마시도록 명령이라도 하고 가야겠군.

    쿡쿡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은 그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린애 취급하는 게 불만인가?”

    “다, 당연하죠.”

    슬슬 몽롱함이 가시고 있는지 아리엘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루시안의 손이 사락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포식자의 손길을 따라 아리엘 뺨의 솜털이 보스스 일어났다.

    “그럼 어떻게 취급해줬으면 좋겠지?”

    아리엘의 눈동자에 동공 지진이 났다.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니까 말문이 막혔다.

    “어, 그, 그러니까…….”

    루시안이 그녀가 앉은 뒤편으로 손을 짚고 느릿하게 상체를 기울였다.

    박하향과 닮은 체향이 끼치며, 그의 얼굴이 아리엘에게 가까워졌다.

    대리석같은 흰 피부와 짙은 푸른 눈, 빼곡하고 긴 속눈썹이 지척에서 마력을 뿜어냈다.

    이성을 마비시킬만한 미모가 가까이 오자 아리엘의 생각은 완전히 정지되어 버렸다.

    키스할 듯 다가온 그의 붉은 입술이 요염하게 말했다.

    “이렇게?”

    아리엘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그녀는 얼른 루시안의 가슴을 밀쳐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내! 제대로 아내 취급을 해달라구요. 애가 아니라…….”

    살짝 밀려나 준 루시안이 위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보통의 남편들이 아내랑 뭘 하는지는 알고?”

    그야…….

    루시안의 말뜻을 알아차린 아리엘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완전히 새빨개졌다.

    악랄하게 씩 웃은 그가 아리엘의 말랑한 뺨을 잡았다.

    “한참 더 크고 나서 아내 취급해달라는 얘길 하라고.”

    잡은 뺨을 세지 않게 흔든 루시안이 뺨을 놓아주었다.

    그의 몸이 물러나자 아리엘은 겨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정말…… 밉다니까.’

    루시안 때문에 샴페인 기운이 다 날아가 버렸다.

    몸에 기운이 좀 없긴 했지만, 정신은 제대로 돌아왔다.

    “바람 쐴래요…….”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루시안이 따라오려는 듯 움직였다.

    어차피 잡힐 테지만, 새빨간 얼굴을 식히기 위해서라도 아리엘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종종걸음을 쳐서 휘장으로 가려진 큰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루시안에게 다가온 디트리히 덕분에 그녀를 따라오던 루시안의 발걸음이 지체됐다.

    아리엘이 휘장 커튼을 걷으려는 순간이었다.

    촤악!

    커튼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와서 무언가를 휘둘렀다.

    정면에 있던 아리엘은 그녀의 얼굴에 뜨끈한 것이 스치는 걸 느꼈다.

    주위에 있던 여자들이 놀라며 높은 비명을 질렀다.

    “악!”

    “카, 칼이야!”

    “대공자비님!”

    휘장 커튼 안에서 나온 사람의 정체는 클라리스 공주였다.

    그녀의 손에는 섬뜩하게 날선 단도가 들려있었다.

    뒷머리가 쭈뼛 섰다.

    아리엘은 방금 자신의 얼굴을 스친 게 저 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황급히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분명 칼날에 닿은 것 같은데 고통이 없었다.

    저 날선 칼에 스쳤다면 그럴 리가 없는데, 피도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클라리스 공주가 증오로 활활 타는 눈으로 외쳤다.

    “어떻게……? 분명 베었는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오른쪽 귓불에 손을 올렸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브루노어의 보호 마법이 걸린 은귀걸이가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오른쪽 귀에서 느껴지던 마법의 기운이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걸.

    즉, 브루노어의 보호 마법이 방금의 습격에서 아리엘을 지킨 것이다.

    클라리스는 숨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공주는 곧장 아리엘에게 다시 달려들어서 그녀를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네년이 다 빼앗아갔어…… 죽어!”

    한 손으로 아리엘의 목을 누르며 클라리스가 칼을 들이밀었다.


    * * *


    디트리히는 가을에 있을 제국 사냥대회에 대해 전할 말이 있어 루시안을 찾아왔다.

    “대공자.”

    아리엘이 자리를 떠난 김에 접근한 것은,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루시안이 대꾸했다.

    “서면으로 보내. 말 섞는 거 성가시니까.”

    “용건이 아리엘라 대공자비에게 있는데.”

    아리엘 이름이 나오자마자 루시안이 서늘한 눈으로 디트리히를 노려보았다.

    눈동자 안에 노골적인 불쾌함이 깃들었다.

    “내 아내 이름. 입에 올리지 마.”

    디트리히가 잠시 착각할 정도의 강렬함이었다.

    ‘진짜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

    드래곤이라는, 신에 가까운 종족에게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이 없었다.

    그 증거로 디트리히를 보는 루시안의 눈빛은 냉혹하기만 했다.

    핑크색 드레스 자락을 쥐고 종종 멀어지는 아리엘의 뒤통수를 흘긋 본 루시안이 오싹할만큼 차갑게 말했다.

    “용건. 짧게 해라.”

    하지만 디트리히는 용건을 말하지 못했다.

    여자들이 모인 곳에서 비명소리가 났고, 그 중심에 아리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란이 벌어지자마자 루시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디트리히도 그의 뒤를 따랐다.

    눈에 보인 것은 칼을 든 채 아리엘의 목을 누르고 있는 광기 어린 클라리스 공주였다.

    “네년이 다 빼앗아갔어…… 죽어!”

    그 순간, 루시안의 머릿속에서 이성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눈앞의 광경에 경악한 디트리히는 곧장 앞으로 나섰다.

    “클라리스 공주! 그 칼 내려놓으십시오.”

    클라리스가 고개를 쳐들고 디트리히와 루시안을 보았다.

    모두가 아름답다고 칭송했던 그녀의 얼굴에는 악의만 남아있었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클라리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대공자님! 어떤가요. 이 계집이 죽은 다음에도 아내가 있다며 날 밀어낼 수 있을까요? 네?”

    클라리스가 아리엘의 목에 칼을 수직으로 대었다.

    살짝만 움직여도 날카로운 단도가 아리엘의 살갗에 파고들 것이다.

    클라리스 공주가 움직인 것과 동시에, 루시안이 광역으로 기세를 발산했다.

    쾅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루시안 주위의 모든 인간과 물체가 튕겨 나갔다.

    엄청난 힘이었다.

    날아가지 않은 건 아리엘과 아리엘을 인질로 삼은 클라리스 뿐.

    클라리스의 단검이 아리엘에게 너무 가까워서, 아리엘이 다칠까 봐 섣불리 클라리스까지 날려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루시안은 뚜벅뚜벅 가까이 가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주변에는 손에 잡힐 것같이 실체적인 분노의 기운이 일렁거렸다.

    지금의 그는 기세만으로 사람을 죽여버릴 듯했다.

    무표정한 조각 같은 얼굴에 살기만이 첨예하게 흘러내렸다.

    튕겨 나간 디트리히는 루시안이 완전히 핀이 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대공자, 잠깐……!”

    아리엘은 루시안의 검을 후우웅- 감싸는 소드마나를 느꼈다.

    마나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그녀는 지금부터 그가 뭘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한 번 본 적이 있었으니까.

    ‘큰일이야!’

    그녀와 루시안이 아기 프라카티아 나무를 심을 때 반경 30미터 주위의 굵은 고목들을 한 번에 말살해버린 게 바로 저 범위 마법이었다.

    소드 마나로만 발동되는 파괴력.

    ‘안 돼. 그걸 쓰면 여기 있는 사람은 다 죽을 거야.’

    숨이 막혔다.

    지금 그녀에게는 루시안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아리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전에 내가 빠져나가야 해.’

    아리엘은 여태까지 자신이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것을 사교계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감춰야 한다는 건 중요치 않았다.

    그보다는 클라리스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그리고 루시안의 학살을 막는 것이 중요했다.

    “윈드 캐스트!”

    아리엘은 곧장 마법을 발동시켰다.

    바람 원소가 그녀를 감싸면서 클라리스를 밀어냈다.

    빠르게 일어난 아리엘은 다른 마법으로 쉽게 클라리스를 구속했다.

    “워터 바운드!”

    클라리스의 온몸이 물 원소들로 묶였다.

    아리엘이 마법을 구동하는 것을 본 루시안이 검에 실어 넣던 소드 마나의 속도를 흠칫 늦추었다.

    ‘됐어!’

    아리엘이 안심하려는 찰나, 클라리스가 칼을 든 손을 끼긱끼긱 움직여 치켜들었다.

    “……!”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마법이 제대로 들어갔는데 어떻게?

    순간, 그녀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클라리스가 칼을 쥐고 있는 손을 검은빛의 마나가 감싸고 있었다.

    클라리스의 손이 그대로 칼을 휘둘러 아리엘을 그으려고 했다.

    이상하게도 원래 노렸던 목이 아니라 얼굴 쪽이었다.

    ‘이상해. 지금 공주는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게 아닌 것 같…….’

    아리엘은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주문을 날렸다.

    신성 마법의 일종으로, 저주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마법이었다.

    대신 이 마법에는 무효화 한 저주만큼의 충격이 되돌아온다는 부작용이 있었다.

    “에켈레네!”

    그 순간 클라리스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의 손은 검게 물들며 기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경련하는 손에서 칼이 떨어진 뒤, 클라리스가 검게 변한 손을 붙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몸에서 많은 양의 마나를 뽑아낸 아리엘은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되돌린 저주의 충격이 고스란히 그녀의 몸으로 되돌아왔다.

    클라리스의 손에서 칼이 떨어지자마자 황태자 디트리히가 황궁의 경비병들을 불렀다.

    클라리스 공주와 그녀의 수행원들은 황궁 병사들에 의해 감옥으로 끌려갔다.

    공주가 라카트옐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만으로도 명분은 충분했다.

    황제는 절대로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었다.


    * * *


    무도회 마지막 날은 기어이 난장판이 되었다.

    연회장은 루시안의 힘 때문에 초토화가 됐고, 사교계는 대공자비가 마법사였다는 사실에 놀라 웅성거렸다.

    클라리스가 짐짝처럼 끌려간 뒤 디트리히는 황급히 아리엘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대공자비, 괜찮습니까? 일어날 수 있겠어요?”

    디트리히의 손이 다 내밀어지기도 전에 루시안이 아리엘을 번쩍 안아 들었다.

    “끼어들지 마.”

    검이 뽑힐 때 나는 쇳소리처럼 섬뜩한 목소리로 그가 경고했다.

    루시안은 아리엘을 안고 파티 손님들이 쉴 수 있도록 마련해놓은 게스트룸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아까부터 그는 이성이 바닥 난 상태였다.

    품에 아리엘이 있지만 않았어도 주변 것들을 물리는 대신 죽였을 것이다.

    결계를 쳐 인간들을 죄다 내쫓은 루시안은 곧장 아리엘을 내려놓고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아리엘은 루시안의 품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아, 하아…….”

    가뜩이나 몸이 약한 그녀에게 에켈레네 마법의 타격은 꽤나 심각했다.

    이제 마력이 늘어나서 웬만한 마법에는 끄떡도 없지만, 육체에 타격을 주는 마법만큼은 늘 힘들었다.

    몸이 충격을 받아 약해지면 그녀 안에 있는 거대한 마나가 몸을 집어삼키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아리엘은 눈을 질끈 감고 몸속을 헤집는 마나의 거센 움직임을 견뎠다.

    “……젠장.”

    루시안은 아리엘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을 알고 있었다.

    네 해 전, 다이아나를 구하다가 그녀 몸 안의 마나가 폭주했을 때, 루시안은 그것을 가라앉힌 적이 있었다.

    그의 몸 안에 있는 포식자의 마나를 아리엘의 몸 안에 밀어 넣는 것만으로도 아리엘의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루시안은 아리엘을 안아 든 자세 그대로 소파에 앉아, 아리엘이 좀 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도록 그의 가슴에 기대게 했다.

    “아리엘라.”

    그녀를 부르는 루시안의 낮은 목소리에 아리엘이 숨을 쌕쌕 내쉬며 겨우 눈을 떴다.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푸른 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속 마나의 흐름이 격렬한 와중에도 루시안의 마력적인 눈은 시선을 앗아갔다.

    “잠시만 참아.”

    루시안은 한 손으로 아리엘의 머리를 감싸고, 다른 팔론 그녀의 등을 바짝 끌어안아 자신의 몸에 붙였다.

    자신과 닿는 면적을 최대한 늘리기 위함이었다.

    그의 커다란 손 안에 아리엘의 조그맣고 가냘픈 몸이 단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닿은 곳을 통해 제 마나를 흘려 넣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낯선 느낌에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루, 루시안……?’

    하지만 그녀는 루시안이 뭘 하고 있는지 곧 알아차렸다.

    그녀의 몸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은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불꽃 같은 느낌이 드는 마나였다.

    너무 뜨거워서인지 너무 차가워서인지 알 수 없는, 타는 듯한 감각이 아리엘의 몸 안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이 흘러들어오자 아리엘의 몸 안은 금방 편해졌다.

    숨쉬기가 쉬워지고, 어지러움이 가라앉았다.

    샴페인을 마신 후에 줄곧 목구멍 근처를 따끔거리게 했던 갈증도 눈 녹듯 사라졌다.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루시안의 옷자락을 잡고 미약하게 끌어당겼다.

    그녀의 등을 감싼 손에 슬쩍 악력이 더해졌다.

    거대한 마나의 물결이 훅 밀려 들어온 뒤, 흘러들어오던 마나가 멈추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아리엘에게 루시안이 한 번 짧게 이마 키스를 하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아리엘은 혼란스러워서 자신의 목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왜, 왜……?”

    방금 뭐였지?

    루시안의 마나가 몸에 들어오자마자 고통이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는…… 분명, 뭔가 끌어당기는 듯한 전류가 느껴졌었는데.

    “놀랄 거 없어. 내 마나로 네 걸 안정시킨 거니까.”

    루시안이 살짝 쉰 듯한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리고 열을 재려는 것처럼 제 입술이 닿았던 아리엘의 이마에 스륵 손을 얹었다.

    “닿아야 마나를 넘겨줄 수 있거든.”

    그 목소리를 들은 아리엘은 방금 스스로의 행동을 떠올리고 화악 얼굴을 붉혔다.

    루시안이 마나를 넣어줄 때 그의 옷깃을 끌어당겼던 것…….

    새빨갛게 물든 뺨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는 한참 만에 개미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마 뽀뽀도요?”

    루시안이 짙은 푸른색 눈동자로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가 대답했다.

    “아니. 그건 저번에 피한 값.”


    * * *


    루시안이 아리엘을 안아 들고 사라진 뒤, 디트리히는 혼란스러운 연회장 안을 수습했다.

    귀족들을 돌려보내고 다친 사람들은 황궁 의사에게 보였다.

    정리가 다 끝나고 나서 그는 주저앉듯 의자에 몸을 기대앉았다.

    황궁 시종 데일이 디트리히에게 황급히 차가운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디트리히는 음료를 거절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아찔했던 좀 전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루시안이 이성을 잃고 끔찍한 기세로 주위를 날려버릴 때.

    루시안의 정체를 아는 디트리히는 그가 힘을 개방하면 사람들이 다칠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런데 그 짧은 틈에 아리엘이 나섰다.

    대공자비 아리엘이 마법사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황궁의 정보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루시안을 가로막아냈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하마터면 그녀가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디트리히는 알 수 있었다.

    아리엘이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루시안을 막아 세웠다는 걸.

    “정말…….”

    가려진 손 사이로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순간, 그녀가 사람들을 지켰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화가 나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미쳤습니까? 목숨이 여러 개라도 돼요?’

    아리엘을 붙잡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것 때문에 디트리히는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일국의 황태자인 자신이, 이미 결혼해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소녀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감정을 잘 숨기는 그도 지금만큼은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시종 데일은 많이 놀란 듯한 황태자를 걱정스럽게 살폈다.

    하지만 그는 디트리히가 가린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졌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바야흐로, 긴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 * *


    아리엘과 루시안은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루시안은 내내 아리엘을 안아 든 자세였다.

    마차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마차의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루시안의 옆모습을 요요히 비추었다.

    “아리엘라.”

    한동안의 침묵이 지난 후 루시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셔츠를 풀어헤친 그의 모습은 상당히 퇴폐적이었다.

    “어째서 아까 내가 그 공주를 죽이게 내버려 두지 않았지?”

    “……그건.”

    정확히 말하자면 공주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걱정한 거였지만, 아리엘이 루시안을 막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광역 검술을 쓰려는 걸 느끼자마자 아리엘은 마법을 써서 위기에서 빠져 나왔다.

    자신이 마법사라는 비밀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면서까지 선수를 친 것이다.

    짧은 순간이라 자신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명확하지는 않았다.

    그저 루시안이 사람들을 죽이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루시안이 쓰려던 그 검술은 견고한 나무둥치도 무자비하게 썰어버리는 기술이다.

    거기에 사람이 맞았다면…… 음,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루시안에게…… 구해달라고 의지하고 싶지 않았어.’

    아리엘은 마법사였다.

    그것도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마나를 지닌.

    그런 자신이 혼자 헤쳐나갈 수 있는 일을 그에게 의지하는 건 스스로 용납하기 어려웠다.

    ‘이런 얘기를 해봤자 루시안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는 항상 아리엘이 선물을 꺼리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가진 게 많은 그가, 가진 게 하나도 없는 아리엘이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작은 자존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아리엘은 설명 대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여 그녀를 탐색하듯 내려다보던 루시안이 붉은 입술을 뗐다.

    “내가 명령했었지. 다시는 다른 것들을 구하려 하지 말라고.”

    그가 자비라고는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가 구하면, 내가 친히 죽여버리겠다고.”

    아리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루시안은 정말로 진심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피에 굶주려 있었고, 잔혹함은 완벽히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약속을 지킨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 순간, 아리엘은 그가 클라리스를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 * *


    저택에 도착하자 이미 연락을 받은 수잔이 뛰어 나왔다.

    뒤이어 알렌도 허연 머리를 날리며 쫓아 나왔다.

    많이 걱정을 한 듯 수잔과 알렌의 낯빛이 창백했다.

    두 사람은 아리엘을 안고 있던 루시안에겐 관심도 주지 않고 아리엘만을 소중하게 보듬은 채 방으로 휭 데리고 올라갔다.

    ‘작은 주인님은 다쳤을 리 없어.’ 라는 믿음과 신뢰가 듬뿍 담긴 뒷모습들이었다.

    아리엘이 수잔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방에 들어왔을 때, 루시안은 그녀의 방 창문틀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곧 다시 외출할 사람처럼 계속 제복 차림이었다.

    루시안이 목에서 떼어낸 넥 브로치를 탁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아리엘이 골라준 청보석 브로치였다.

    “여기 두고 가지. 내일 되찾아갈 거니까 네가 갖고 있어.”

    “왜요, 루시안?”

    “지금 나갔다 올 거거든.”

    고개를 끄덕인 아리엘은 브로치를 서랍에 잘 넣어둔 뒤 침대로 기어 들어가 누웠다.

    루시안이 잔인할 정도로 아름답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잘 자, 아리엘라.”

    그가 오만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자고 일어나면 널 다치게 한 것의 최후를 듣게 될 테니.”

    루시안이 지하세계에서 막 나온 악마 같은 눈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밤은 그의 시간이었다.

    그의 눈 옆에 있는 작은 눈물점이 꼭 핏자국처럼 보였다.

    파란만장한 하루에 완전히 지쳐버린 아리엘은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지난밤 시에나 왕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 * *


    ‘네? 멸망이요?’

    제국 역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시에나 왕국은 완전히 폐허로 돌아갔다.

    왕국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 국가들은 제국의 용신을 분노하게 한 시에나 왕국이 전설 속 괴물에게 당했다고 떠들어댔다.

    시에나 왕국령의 건물들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완벽히 무너졌다.

    누군가는 불벼락이 내렸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천둥이 내리꽂혔다고도 했다.

    제국은 은근히 거슬리던 시에나 왕국이 멸망한 것을 기뻐했다.

    황제는 라카트옐의 분노에 눈치를 보며 왕국령을 통째로 대공가에 넘겨주었다.

    한편 제국에 와 있던 클라리스 공주와 그의 수행원들은 모두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어차피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었다.

    아침 일찍 병문안을 온 친구들이 그 이야기를 아리엘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나선, 다이아나부터 걱정을 쏟아놓았다.

    “아리엘, 정말 걱정했어. 네 걱정에 어젯밤부터 하나도 뭘 못 먹겠더라.”

    마침 다이아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그녀는 상황이 끝난 뒤에야 전말을 전해 듣고 뒷목을 잡았다.

    ‘감히 내 아리엘을 건드리다니!’

    자신의 귀여운 아리엘이 위험에 처했었다는 사실에 불같이 화를 낸 다이아나는 오전이 되자마자 세실과 함께 서둘러 아리엘을 보러왔던 것이다.

    “맞아, 아리엘. 네가 쓰러져서 대공자님이 널 데리고 가실 때 쫓아가고 싶어서 혼났다.”

    물론 괜찮아 보여서 조금 안심하긴 했지만.

    평소 고지식한 세실이 중얼거렸다.

    “아리엘, 어디 다친 데는 없다고 듣긴 했는데…… 정말 괜찮은 거야?”

    사실 몸이 거의 회복된 아리엘은 친구들의 걱정에 고개를 끄덕끄덕 해주었다.

    “응, 다친 데도 없었고 지금은 다 괜찮아.”

    우리 귀염둥이!

    아리엘이 어제 마법을 써서 빠져나왔다는 건 이미 들었지만, 다이아나는 아리엘에게 또 듣고 싶다고 졸랐다.

    ‘우리 귀염둥이가 직접 말해주는 걸 듣고 싶은걸!’

    다이아나의 머릿속에선 이미 아리엘은 대마법사의 활약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작고 예쁜 아리엘이 상대를 물리치기까지 했다잖아?

    심지어 세실도 눈을 초롱초롱한 채 들을 준비가 만반이었다.

    아리엘은 두 사람의 눈빛 공격에 어제 있었던 일을 최대한 상세히 설명하려 노력했다.


    * * *


    아리엘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다시 왕국 멸망 소식을 전해주던 다이아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원소 복수설’을 내세웠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천재지변이 일어났다니. 아리엘, 네가 원소 마법사니까 원소들이 대신 복수를 해준 게 아닐까?”

    음…… 다이아나, 복수는 맞는데 원소들이 아니야.

    설명하자면 길지만 드래곤인데…….

    반면 세실은 심각하게 ‘인과응보설’을 주장했다.

    “천벌을 받은 거다. 시에나 왕국은 오래전부터 소수 민족을 노예로 삼아왔다더군. 게다가 아리엘도 해치려 했지. 행한 대로 돌려받은 거다.”

    세실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행한대로 받았다는 건 좀 무리가 있었다.

    ‘루시안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아리엘은 그가 클라리스만 응징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라카트옐답게, 복수의 범위를 자신만의 기준으로 정했다.

    ‘문제는 그게 왕국 단위라서 그렇죠…….’

    심지어 어제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던 마티어스도 소식을 듣고 밤에 집을 비웠다고 들었다.

    큰 주인님께서 매우 화가 나신 듯했다던 알렌의 말로 미루어, 마티어스가 어디에 갔었는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리엘은 조그만 입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응징하는 라카트옐’이 뭔지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된 느낌이었다.

    복수의 신이나 응징의 신이 있다면 라카트옐과 닮지 않았을까.

    하룻밤 사이에 왕국 하나를 멸망시키다니, 실제로 가진 힘이 얼마나 되는 거야?

    ‘루시안이나 마티어스님과 적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같은 편일 때는 엄청 든든하지만 적이 된다면 정말 절망스러울 것이다.

    아리엘은 과거에 한 번 루시안의 반대편에 서 본 적이 있기에 알고 있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포식자와 마주쳤을 때의 그 두려움과 무력감을.

    아리엘은 루시안을 만나기 전에는 그 느낌을 ‘그’에게 받았었다.

    자신의 심장에 저주의 보석을 박아넣었던 정체를 모르는 악당.

    조종을 당할 때면 항상 무섭고 혼란스럽고 지독한 무력감이 느껴졌었다.

    ‘조종…….’

    문득 아리엘은 에켈레네 주문에 맞은 클라리스 공주의 손이 검게 변했던 것을 떠올렸다.

    ‘왜 클라리스 공주의 손이 그렇게 된 걸까?’

    그녀는 잠시동안 조종당하는 것처럼 움직였었다.

    그녀의 눈이 노리는 건 아리엘의 목이었지만, 손만은 아리엘의 얼굴 쪽으로 움직였다.

    뭔가에 조종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리엘은 이 일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4년 전 다이아나를 구했을 때, 마차를 이상하게 몰고 있던 마부에게서 느꼈던 느낌이랑 비슷해.’

    하지만 단지 느낌일 뿐 그녀는 클라리스가 조종당했다는 걸 증명할 수 없었다.

    클라리스가 아리엘에게 원래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아리엘? 듣고 있어?”

    “응?”

    아리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다이아나와 세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대공자님 말이야. 화 많이 내셨지? 네가 위협당해서.”

    “그래. 널 딱 안아 들고 가시는 모습에서 아내를 지켜주지 못한 분노가 느껴졌다.”

    윽, 지켜주지 못한 분노라니…….

    가끔 보면 그녀의 친구들은 자기 결혼 아니라고 낯뜨거운 말을 참 잘했다.

    하지만 루시안이 손수 왕국을 파괴해서 멸망시켰다는 것을 아는 아리엘은 차마 그가 화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화가 나긴 했던 거겠지……? 내가 위험했어서.’

    그리고 루시안은 나를 안고…….

    루시안이 그의 마나를 흘려 넣어줬던 걸 떠올린 아리엘은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실시간으로 토마토가 된 그녀를 본 다이아나와 세실이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어머, 내 귀염둥이 아리엘. 얼굴이 빨간데. 대공자님과 무슨 일이 있었구나?”

    “다이아나. 친구의 연애사를 캐묻는 건 성숙하지 못한 짓이다.”

    “얘 좀 봐. 이런 건 물어봐 주는 게 예의란 말이야!”

    “그건 네 생각일 뿐이다.”

    평소처럼 투닥투닥대는 친구들 틈에서 아리엘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일이 가능할 줄 몰랐어.’

    파괴만이 목적인 루시안의 마나가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왔을 때는 뜻밖에도…….

    갈증 끝에 마시는 물이나, 지쳤을 때 입술에 닿은 꿀처럼 달았다.

    문득 그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몸 안으로 밀려들던, 차가운 동시에 뜨겁던 그의 마나.

    손가락 끝이 간질간질해졌다.

    아리엘은 뺨을 식히기 위해 레몬 아이스티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 * *


    무너진 석조가 가득한 폐허 속, 어느 건물.

    빛이 한 줌조차 들지 않는 건물 안은 몇 개의 초로 간신히 사방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의 흔적이 없이 냉랭하기만 한 건물의 복도를 한 사내가 걸어가고 있었다.

    목적지인 문 앞에 당도한 사내가 삐그덕 문을 열고, 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더욱 뼛속까지 시린 공기와 퀴퀴한 냄새가 떠돌았다.

    그리고 그곳에, 검은 망토를 입은 형체 하나가 앉아있었다.

    “주인님.”

    그 형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사내가 말했다.

    “실패했답니다. 숙주가 폭주를 하는 바람에…….”

    검은 망토의 형체에게서 끽끽거리는 듯한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멍청한 탐욕 덩어리가 그럼 그렇지. 죽이면 안 된다고 분명 말했는데도…….”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주인의 목소리에 사내가 쩔쩔매며 말했다.

    “하지만 새롭게 알아낸 사실이 있습니다.”

    “새로운 사실?”

    “예. 목표물이…… 마법사랍니다. 저주도 마법으로 튕겨냈다고 하고요.”

    “마법사…….”

    검은 망토는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듣기 싫은 목소리가 끼긱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렇단 말이지…… 역시 내 예상대로야.”

    그는 자신의 수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음 목표는 알고 있겠지?”

    “예, 주인님.”

    사내가 붉게 충혈된 눈을 번뜩였다.

    “정보 길드, 나잇 워커를 손에 넣겠습니다.”


    * * *


    왕국 하나를 통째로 멸망시키고 돌아온 루시안은 점심 무렵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식당에 나타났다.

    돌아오는 길에 황궁에 들러서 시에나 왕국령을 라카트옐에게 양도한다는 황제의 칙서까지 받아, 주머니에 넣고 오는 길이었다.

    알렌의 시중으로 손을 씻고, 점심 테이블 위에 놓인 먹기 좋게 썰린 오렌지 조각을 집어든 그는 피곤한 기색 하나 없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포만감 가득한 맹수처럼 느슨해서 밝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뇌쇄적인 느낌을 풍겼다.

    “꼬맹이는?”

    그의 물음에 옆에 있던 알렌이 서둘러 대답했다.

    “아기 마님께서는 침실에서 친구분들과 담소 중이십니다.”

    “그럼 헥터와 랄프 좀 불러와.”

    “예.”

    곧 아리엘의 호위를 맡고있는 헥터와 랄프가 명을 받고 루시안 앞에 왔다.

    랄프가 긴장된 눈으로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별말 없이 핏빛처럼 붉은 루비 오렌지만 먹고 있던 루시안이 우아한 동작으로 다리를 꼬았다.

    “오늘부터 아리엘 호위 등급을 최고로 높인다.”

    루시안의 목소리에 담긴 살기에 두 기사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헥터가 대검의 손잡이를 꽉 쥐며 물었다.

    그나마 루시안에게 뭔가를 되물을 수 있는 존재는 기사 중 헥터가 유일했다.

    “아기 마님께서 위험하신 겁니까?”

    “…….”

    루시안은 대답 없이 무도회 마지막 날을 회상했다.

    백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벌레가 겁도 없이 아리엘에게 칼을 들이댔던 것.

    그의 기세가 좀 더 날카로워졌다.

    루시안은 검은색으로 물든 공주의 손에서 더러운 기운을 명확히 느꼈다.

    드래곤의 피를 가진 그의 눈에는 저주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누군가가 공주의 증오심을 이용했음을 알았다.

    그는 루비 오렌지에서 떨어진 붉은 과즙을 응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되었든 확실한 건, 누군가 아리엘을 해치려고 했다는 사실이었다.

    ‘짚이는 곳이 없는 것도 아니지.’

    이 세계에는 라카트옐의 숙적 또한 분명 존재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뿐 아니라 왕국까지 쳐부순 것은 본보기였다.

    아리엘을 해칠 수 있는 잠재적인 모든 세력에 대한 경고.

    밝히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루시안은 달튼을 통해 시에나 왕국의 멸망이 그와 상관이 있음을 제국 전체에 흘리도록 했다.

    그녀를 건드리면 라카트옐이 어디까지 나설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루시안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는 헥터와 랄프에게 서늘하게 시선을 주었다.

    “너희 목숨을 걸어. 단 한시도 눈을 떼지 마라.”


    * * *


    친구들을 전송한 아리엘은 루시안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문 안쪽을 빼꼼 들여다보자, 식당 상석의 의자에 앉아있는 루시안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리엘을 발견한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짙은 푸른색 빛을 발했다.

    어라, 하는 사이에 가까이 다가온 그가 아리엘을 문 안으로 채어 반짝 안아올렸다.

    “앗, 루시안.”

    아리엘은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놀라 루시안의 옷깃을 붙잡았다.

    “놀랐잖아요…….”

    식당 테이블 위에 느긋하게 그녀를 올려놓으며, 루시안이 대꾸했다.

    “내가 있는 걸 알면서도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건 나더러 데리고 들어가란 뜻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입을 살짝 벌렸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하면 저런 식의 해석이 가능한 거야?

    황당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루시안이 픽 웃었다.

    순간이지만 핏속까지 황홀함이 퍼지게 하는 미모의 미소였다.

    “자, 가져. 네 거다.”

    그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아리엘의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루시안이 꺼내놓은 것은 둥글게 말려 붉은 끈으로 묶인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게 그를 마주보았다.

    원래 양피지는 중요하거나 오래 보관해야 할 문서에 쓰는 건데.

    이건 뭔가요?

    풀어보라는 말 대신, 루시안이 듣기 좋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에나 왕국령을 네게 넘긴다는 황제의 칙서야.”

    네에?!

    “그거, 라카트옐 가문에 내린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게 왜 제 것이 되나요?

    아리엘의 눈은 한껏 억울해서 울망울망해졌다.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루시안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아리엘과 눈을 맞췄다.

    “너 주려고 받아온 거야. 그게 아니면 뭐 하러 황궁까지 가서 가져왔겠어?”

    그렇게 말한 그의 손이 아리엘의 귓바퀴를 타고 스르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오만한 목소리가 귓전에 매혹적으로 울렸다.

    “내가 전리품을 바칠 사람은 하나뿐인데.”

    아리엘은 루시안의 손이 움직이는 곳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각에 살짝 어깨를 떨었다.

    밤새 파괴를 일삼느라 피곤해서일까?

    지금의 루시안은 묘하게 나른하고 다정한 느낌이었다.

    그가 소드 마나를 뽑아 붉은 끈을 풀었다.

    양피지 두루마리가 말렸던 반대 방향으로 펴지며 안에 말려있던 물체를 툭 떨어트렸다.

    에메랄드빛 보석이 박힌 인장 반지였다.

    아리엘의 엄지에 끼워도 헐렁할 것 같이 커다란 왕의 반지.

    시에나 왕국의 국새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그 아래, 황제의 친필로 적힌 칙서에는 또렷하게 '아리엘라 라카트옐' 이라는 이름이 쓰여있었다.

    루시안이 그녀의 이름을 손끝으로 스치며 말했다.

    “쓸 만할 거야. 내가 다 무너뜨려서 새로 꾸미는데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

    그의 말투는 어지럽힌 장난감 몇 개 정리하듯 가벼웠다.

    아리엘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와, 왕국이 무슨 인형의 집인가요?

    나라 하나를 통째로 다시 꾸미게.

    ‘스케일이 어디까지인 거야…….’

    루시안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외곽의 온천 성들은 놔뒀어. 마침 그때쯤 투항을 하기에. 그게 제법 좋다더군. 다 네 것이야.”

    말끝에 그가 유혹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붉은 입술이 관능적인 곡선을 그려냈다.

    “…….”

    할 말은 많은데, 묘하게 ‘나 잘하지 않았냐’는 듯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루시안을 보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루시안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하룻밤 안에 왕국을 멸망시켜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담?

    그리고 이 칙서랑 반지는……

    너무 어마어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는걸.

    물론 지금 그녀가 받지 않겠다고 해봤자 소용은 없겠지만 말이다.

    ‘어휴…….’

    결국 아리엘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루시안의 손길에 얌전히 머리를 맡겼다.


    * * *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아예 몸 전체를 몇 겹으로…….”

    마티어스의 서늘하고 무뚝뚝한 목소리와 브루노어의 목소리가 섞여서 울려 퍼졌다.

    그 중간에 앉아있는 아리엘은 양손으로 턱을 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에휴…….”

    지금 마티어스는 어젯밤 왕국을 멸망시키는데 일조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옷자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그는 곧장 브루노어를 불러 이 일에 착수했다.

    일명 '아리엘 보호용 특별 마법 제작'.

    브루노어를 불러들인 마티어스는 아리엘을 중간에 앉혀놓고 브루노어에게 무리한 것들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11겹 보호 레이어를 둘러라.”

    “보호 횟수에 제한이 없는 귀걸이를 만들어내라.”

    “페룬의 눈에도 투명화 마법을 걸어서 항상 착용할 수 있게 해.”

    ‘페, 페룬의 눈에 말입니까?’

    대마법사 브루노어는 대공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페룬의 눈은 고대 마도구 중 매우 정교한 종류라 투명 마법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금지된 마법이라도 불러들여서 만들어. 아니면 내가 직접 하겠다.”

    브루노어는 다시 식은땀을 흘렸다.

    그 파괴적이고 거대한 힘을 오래되고 정교한 마도구에 쏟으시겠다고요?

    마티어스가 직접 나서면 귀한 고대 마도구는 산산조각 날 것이 분명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이걸 해제하고 저걸 걸고 어떻게든 하면 되겠지…….

    브루노어는 눈물을 삼켰다.

    “마티어스님, 마티어스님.”

    보다 못한 아리엘이 마티어스를 불렀다.

    “그렇게 많이는 없어도 돼요. 정말 괜찮아요. 저 잘 싸워요.”

    마티어스는 어느 지역의 햇병아리가 잘 싸운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끝내 햇병아리의 설득은 먹히지 않았다.

    수잔은 아리엘에게 아팠으니 더 많이 드셔야 한다며 식량고를 모조리 털어 맛있는 음식들을 가지고 왔다.

    수많은 일거리에 파묻혀 사는 달튼도 잠시 시간을 내서는 아리엘에게 찾아와 과자를 산더미처럼 주고 황급히 사라졌다.

    “일이 아주 밀려서요. 그게 다 대공자님이 왕국을 가져오신 덕분에…….”

    알렌도 아리엘의 괜찮아진 얼굴을 보고서야 일을 하러 발걸음을 떼었다.

    “오늘 하루는 푹 쉬십시오, 아기 마님.”

    그 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던 마티어스가 서늘하게 잘라 말했다.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다 나을 때까진 침대를 벗어나선 안 된다, 아리엘라.”

    결국 아리엘은 몸이 다 나았다는 판단이 날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침대 위에 롤케이크처럼 이불로 꽁꽁 싸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수잔과 하녀들도 아리엘을 롤케이크로 만드는데 공범이었기 때문에 아리엘은 한동안 침대 밖으론 발끝도 못 디디게 되었다.

    “이제 정말 다 나았어요!”

    사실은 루시안이 마나를 진정시켜줘서 거의 나았었는걸요.

    아리엘이 정말 괜찮아졌다는 주치의와 브루노어의 말에도, 마티어스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겨우 아리엘의 침대 밖 행차를 허락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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