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9/23)

9장




그 사람이야.

과거 삼 년 동안이나 그녀를 끔찍하게 지배하고 조종했던 사람의 모습이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저 얼굴은 의미가 없었다.

과거에도 아리엘은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 어떻게?’

어떻게 날 찾은 거지?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거지?

아리엘은 창백해져서 밭은 호흡을 내쉬었다.

하얘진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망토를 뒤집어쓴 형상은 미동도 없이 멀찍이서 아리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망쳐야 돼.’

과거 '그'가 그녀의 심장에 박아넣었던 운디르의 저주가 생생히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도망가야 해. 빨리…….

아리엘이 벌벌 떨리는 걸음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형상이 스륵 앞쪽으로 움직였다.

무서워.

아리엘은 페룬의 눈을 세게 움켜쥐었다.

일촉즉발이었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엘 영애?”

아리엘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반대쪽을 돌아보았다.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성스러운 빛을 내는 듯한 금발 녹안의 소년.

“황태자 전하……?”

위험해.

그녀는 다급히 다시 '그'가 있던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검은 망토를 입은 형상이 잔상을 남기며 스르르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환상처럼.


* * *


“아리엘 영애.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디트리히가 넋이 빠진 것 같은 아리엘을 붙잡으며 말했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으신데요. 아프신 거라면 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지금 너무 혼란스럽고 무서워서 디트리히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가 나를 찾아왔었어.’

하지만 아무리 검은 망토를 쓴 사람이 있던 자리를 바라봐도 '그'는 흔적도 없었다.

‘내가 헛것을 본 건가? 아니면, 잠시 악몽을 꿨던 걸까?’

지금의 '그'는 아리엘에 대해 모른다.

과거 '그'는 그녀가 만들어 판 마정석을 보고 찾아왔었으니까.

이번 생에서 아리엘은 마정석을 팔지 않았고, 딱 하나 만든 마정석도 결계가 쳐진 라카트옐 저택 안에 묻혀있으니 안전했다.

'그'가 지금 그녀를 찾아온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정말로 환상이었나?’

모든 게 다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때 디트리히가 아리엘의 팔을 꽉 붙잡았다.

“영애? 영애!”

팔이 세게 쥐인 느낌 때문에 아리엘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주위가 희뿌옇던 패닉 상태를 벗어나자 걱정스러운 디트리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디트리히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쪽에서 뭔가 무서운 거라도 보셨습니까? 유령이라도 보신 표정인데요.”

아리엘은 한참만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변명했다.

“아니, 그냥……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서요.”

“혼자 계셔서 놀라셨나 보군요.”

아리엘이 느리게 안색을 되찾자 디트리히도 서서히 걱정을 누그러뜨렸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서둘러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제국에 영광을.”

디트리히가 인사는 됐다는 듯 손짓했다.

“붉은 머리카락 때문에 혹시나 했는데…… 이런 우연도 있군요.”

아리엘은 숨을 고르게 내쉬려고 애쓰며 물었다.

“그런데,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

디트리히가 손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목에는 다이아나가 손님들에게 묶어준 것과 똑같은 보라색 리본이 매어져 있었다.

“초대를 받아서요. 폐하께서 보내셨거든요.”

아리엘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아카데미에 계셔야 할 시간…… 아니시던가요?”

“예. 하지만 최근에 황실에 경사가 있어서 잠시 허가를 받아 돌아왔습니다. 아바마마께서 겸사겸사 모니카 가의 행사에 방문하라고 명하셨죠.”

그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설명을 이었다.

“모니카 공작가는 개국 공신 가문이라 황가와 가깝거든요. 원래는 어마마마께서 이 행사에 선물을 내리시지만…… 오늘 몸이 안 좋으셔서 제가 대신 온 겁니다. 왔더니 공작 부인께서 숲을 둘러봐도 좋다고 허락하시기에.”

“네…….”

차분하게 대답했는데 디트리히가 예리하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무서운 느낌은 남아있었지만 꿈에서 깬 뒤처럼 천천히 공포감이 옅어지고 있었다.

“네. 아까는 순간 겁을 먹어서요.”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혼자 계십니까? 시녀는요?”

“사실 시녀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밤을 주웠는데 무거워서 수레를 가지러 갔거든요.”

“그러시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시녀가 올 때까지 잠시 제가 함께 있겠습니다.”

기사도를 발휘하며 디트리히가 말했다.

귀족 영애가 일행과 떨어져 혼자 있는 경우, 주변 남자들은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것이 예의였다.

혼자 있는 동안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아리엘은 마도구도 있고 마법도 쓸 수 있기에 자기 한 몸은 지킬 수 있었지만, 방금 본 불길한 형상 때문에 승낙했다.


* * *


디트리히와 아리엘은 베키가 돌아올 동안 잠시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걸으며 아리엘이 질문했다.

“그런데 황실에 경사라니, 무슨 일이기에 멀리서 돌아오셨나요?”

디트리히가 난감한 듯 웃었다.

“그게, 사촌 동생들이 태어나서요. 아직은 비밀입니다. 아기들 성명식(name ceremony) 때까지는요.”

황실의 친척 아기라니.

정말 경사다.

아리엘의 기분도 조금 밝아졌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려요. 비밀은 잘 지킬게요.”

“감사합니다.”

디트리히는 정중하게 아리엘을 에스코트했다.

작은 장애물을 넘어갈 때에도 팔을 부축해 주거나 치맛단을 신경 써 주었다.

아리엘은 새로 태어난 황실의 아기에 대해 물었다.

“태어난 아기는 딸인가요, 아들인가요?”

“쌍둥이 여동생들입니다. 둘 다 옅은 금발이고요.”

“정말 귀엽겠어요.”

디트리히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금발을 쓸어넘겼다.

“사실 제겐 형제가 없어서, 잘 대해 줄 수 있을지…….”

성력과 지성미를 가득 풍기는 황태자의 입에서 자신 없다는 소리가 나온 것이 아리엘은 신기했다.

‘아무리 영민한 전하라도 아기를 대하는 건 쉽지 않나 봐.’

그렇게 생각하니 디트리히가 조금 친근하게 느껴졌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거닐었다.

디트리히는 걷다가 발견한 예쁜 낙엽을 주워 아리엘에게 건넸다.

그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붉게 물든 색이 아름답네요. 영애의 머리카락 색과 닮은 것 같습니다.”

“……감사해요.”

낙엽을 받아들며 아리엘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

이런 칭찬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예의상이라는 건 알지만 부끄러웠다.

그녀는 웅얼거리며 말했다.

“전하의 동생들은 운이 좋네요. 다정하고 좋은 분이 손위 형제니까요.”

디트리히가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제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처음 뵈었을 때부터 나쁜 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현명하고 상냥하신걸요.”

그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대공자를 이용하겠다는 말을 했는데도요. 그 이후에도 영애께는 매번 불쾌한 말씀을 드렸었죠. 제가 영애를 여러 번 떠본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아리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온 영식이 사실은 황태자였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

제국의 황실은 대대로 라카트옐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친해지려고 했다.

대공가에 새로 들어온 안주인을 황태자가 궁금해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디트리히는 줄곧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대공가의 핏빛 역사에 그녀가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아리엘은 그녀를 걱정하는 척하는 사람들과 정말로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구별할 줄 알았다.

아리엘은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안하시네요?”

그녀가 책망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것을 알아차린 디트리히가 빙긋 미소지었다.

“오늘은 황태자로서 영애를 대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둘은 그 화제는 미뤄두고 다른 이야기를 나눴다.

걸으면서 예쁜 낙엽도 한 무더기 더 주웠다.

디트리히가 꿀빛의 밤나무 잎을 모아주며 말했다.

“황실은 아들이 귀하죠. 라카트옐 가문은 딸이 귀하고요.”

“그런가요?”

“모르셨습니까? 라카트옐에는 대대로 딸이 태어나지 않은지 오래인데요.”

디트리히의 말에 따르면 대공가는 독자로만 이어져 내려와 방계 친척도 없다고 했다.

잠시 예전에 봤던 대공가 계보도를 떠올리던 아리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신기하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니 베키가 멀리서 작은 수레를 끌고 오고 있었다.

디트리히가 아리엘에게 돌아서서 인사했다.

“이만 가보셔야겠군요. 즐거웠습니다.”

“저도 감사했어요.”

그때, 디트리히가 아리엘의 손을 들어올려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아리엘은 굳어버렸다.

“다음에 또 뵙죠.”

그는 숲 안쪽으로 더 들어가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돌아온 베키가 가쁘게 숨을 내쉬며 조잘거렸다.

“죄송해요. 기다리시게 해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대요. 얼른 돌아가요, 아기 마님.”

“응? 응…….”

아리엘은 돌아서며 디트리히가 사라진 방향을 한 번 돌아보았다.

숲 속에서 있었던 일들이 다 꿈같이 느껴졌다.

‘돌아가야지.’

그녀는 주웠던 낙엽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고, 그 중 몇 개만 주머니에 넣었다.

다이아나와 세실에게 낙엽 책갈피를 만들어 선물하면 좋을 것 같았다.


* * *


동물들 덕에 아리엘은 모니카 가 밤 따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의욕을 불태웠던 세실은 정작 밤을 거의 못 땄는데, 이유를 들어보니 아까 아리엘에게 시비를 걸었던 영애 무리를 만났다고 했다.

“그들은 규칙도 어기고 함께 몰려다니고 있더라. 내가 그걸 지적하니 내게 마구 따지고 들더군.”

올곧은 세실이 그렇게 반응한 것은 당연했다.

세실이라고 친한 아리엘과 함께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규칙이라서 참았다.

게다가 그 영애들은 자신들의 손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시녀들만 괴롭히며 들볶아대고 있었다.

무리지어 다니며 머릿수로 상대방을 찍어누르는데 익숙했던 세 영애는 세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화를 냈다.

“심지어는 나에게 손찌검을 하려고까지 했지.”

그 말을 들은 다이아나가 ‘뭐어? 이것들을 그냥!’ 하며 울분을 토했다. 다이아나를 가라앉힌 세실이 말했다.

“하지만 나도 그런 사람들에게 가만히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다이아나가 추궁하듯 묻자 세실이 씩 미소지으며 손날을 세웠다.

“내가 이겼지.”

그렇게 실랑이를 하느라 시간을 보낸 세실의 밤 주머니는 아쉽게도 홀쭉했던 것이다.

친구가 3:1로 싸워 이겼다는 말을 들은 아리엘과 다이아나는 말없이 동시에 세실의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밤 개수를 집계하는 왁자지껄한 시간이 지나고 아리엘은 상을 받았다.

규칙도 모두 지켰고 시간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문제가 전혀 없었다.

다이아나가 기뻐 죽겠다는 얼굴로 속삭였다.

“역시 널 참가시키길 잘했어. 아리엘 네가 아니면 세실이 꼭 이번 상품을 받았으면 했거든!”

모니카 공작 부인이 아리엘에게 유리 상자에 든 상품을 건넸다.

선물을 본 아리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매년 선물이 귀한 것이었단 건 알지만 이건…….

다른 영애와 부인들도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유리 상자 안에 든 것은 예술적으로 조각된 상아로 감싸인 귀한 보석함이었다.

여태까지의 상품에 비할 바가 아닌 값비싼 물건이었던 것이다.

‘아, 저게 내 것이었어야 했어!’

밤 따기 대회에서 상을 받지 못한 영애들이 큰 소리로 탄식했다.

아리엘은 머뭇거렸다.

이렇게 귀한 물건을 그냥 받아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상이라고는 하지만…….

그때, 상품을 건네준 모니카 공작 부인이 아리엘에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다정히 말했다.

“결혼할 때는 어머니들이 보통 이런 보석함을 딸에게 준답니다. 대공자비님은 제 딸의 친구분이니 제 딸이기도 하지요. 친어머니만은 못하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준비했으니 받아주세요.”

“…….”

아리엘은 이제야 다이아나가 대회에 참가하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상품에 아리엘과 세실을 향한 사심을 꽉꽉 담았으니 당연히 꼭 참가해줬으면 했던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가 없는 아리엘 입장에서는 살뜰한 모니카 공작 부인의 마음이 더욱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코끝이 찡해진 채 선물을 받아들었다.

“감사해요, 공작 부인.”

옆에서 다이아나가 살짝 끼어들어 말했다.

“네가 1등 안했으면 슬펐을 뻔 했어.”

아리엘과 다이아나는 세실이 기다리는 자리로 돌아갔다.

행복한 눈빛의 다이아나가 아리엘과 보석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3:1 싸움의 피로를 디저트로 풀고있던 세실도 아리엘이 상 받은 것을 흐뭇해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1등에게는 상품 말고도 좋은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이아나가 박수를 짝 쳤다.

“그래! 1등한테는 남편 복이 많다고 했었지.”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혼의 영애에게만 해당되는 거잖아?”

다이아나가 아리엘의 어깨에 다정히 팔을 둘렀다.

“뭐 어때. 그래도 기분은 좋잖니?”

크게 상관하진 않았지만 친구들이 기뻐하니 아리엘도 좋았다.

아리엘은 우승을 축하하며 베키에게 엄지 손가락을 살짝 들어주었다.

베키는 감동한 얼굴로 양손을 맞잡았다.

다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아리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편 복이라…….’

제멋대로에 오만하고, 상당히 자기중심적인데다 자비따위는 없고, 매사 삐딱하고 사악한 남편이지만 루시안을 떠올리자 따뜻한 기분이 몸을 감쌌다.

‘맞아. 루시안을 만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행운이었으니까.’

루시안 덕분에 그녀의 삶은 예정된 비극에서 크게 비껴났다.

속설 같은 거 신경 안 쓴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배시시 미소가 나왔다.

어쩌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 * *


11월이 되자,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마티어스가 아리엘에게 말했다.

“겨울이 시작되면 우리는 영지로 갈 거다.”

아리엘은 열심히 먹고있던 큐브 스테이크를 내려놓은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저도 데려가시나요?”

“물론이지. 네가 안주인이니까.”

마티어스가 긴 흑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알렌이 좀 더 설명해주었다.

영지로 함께 가는 이들은 아리엘을 시중들 수잔, 마수를 토벌할 푸른 사자 기사단과 마티어스, 힐러 역할을 해줄 마법사 브루노어였다.

집을 한동안 비워야 하는 브루노어는 돌아올 때까지 저택의 쾌적함을 유지해줄 집안일 마법을 설치하고 다니는 중이었다.

영지로 갈 때는 마법 게이트를 이용해서 이동하고,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북부에 있는 라카트옐 영지는 그만큼 멀고 험준한 곳에 있었다.

“가면 언제 돌아오나요?”

“아마도 겨울이 끝날 쯤에.”

간단히 답해준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이곳에 친구들이 있지. 떨어지는 것이 아쉽겠군.”

당연히 다이아나와 세실을 한동안 못 보는 건 서운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에게는 루시안과 약속한대로 대공자비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의무가 있었다.

“영지에 가는 것도 기대되는걸요. 친구들과는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으면 돼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아리엘은 라카트옐 영지가 궁금했다.

얼마 전에 모니카 영지에 다녀온 이후로 더욱 그랬다.

마티어스는 때때로 영지에 다녀온다고 저택을 비울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리엘은 영지가 어떤 곳일지 상상하곤 했었다.

그녀는 마티어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지는 어떤 곳인가요, 마티어스님?”

들뜬 아리엘을 본 마티어스가 의자 등받이에 깊이 기대며 설핏 웃었다.

“라카트옐에게는 편한 곳이지. 매우 추운 곳이고.”

추운 곳…… 그렇구나.

아리엘은 후작가 다락방에 살 때 추운 걸 정말 무서워했지만, 대공가에 와서 보낸 첫 계절이 겨울이었기에 겨울 자체는 싫지 않았다.

황량한 겨울이라도 영지에 직접 가볼 수 있는건 설레는 일이었다.

우아하게 식사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난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뺨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네 겨울이 지루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무뚝뚝한 말투와 달리 그의 손길은 귀여운 것을 어루만지듯 부드러웠다. 아리엘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어스와 함께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그 날 이후, 그녀는 동쪽 생활관에 걸려있는 대공가 영지 저택의 풍경 그림을 보며 그곳을 상상했다.

알렌 말로는 수도 저택보다도 크다는데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수도 저택이 이렇게 큰데 더 큰 저택이 있다니.’

겨울 내내 저택만 탐험하다가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티어스가 출발 날짜를 정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하녀장 수잔과 집사 알렌 영감은 짐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최소한의 사람들만 가는데도 겨울을 나는 거라 챙길 것이 많았다.

특히 기사단 쪽은 전투 준비를 해야해서 더욱 채비를 단단히 하는 것 같았다.

한편 기사단의 힐러로서 함께 가게 된 대마법사 브루노어는 손자이자 제자인 히스를 데려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히스에게 그동안 설거지 마법을 마스터하라는 엄중한 숙제를 내렸는데, 그것 때문에 삐친 히스는 일주일동안이나 브루노어와 말을 하지 않았다.

“할배 미워!”

명색이 대마법사 지망생인데 하찮아 보이는 설거지나 하고 있는 게 분한 것 같았다.

아리엘은 히스를 달래기 위해 자주 편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히스도 새로 발명해낸 마도구가 있거나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내면 꼭 편지 보내줘.”

그제서야 히스는 조금 마음을 푸는 눈치였다.

정말이지, 어린애를 달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무언가를 내밀며 툭 말을 내뱉었다.

“거기 되게 춥대. 이거나 가져가든가, 흥.”

히스가 아리엘에게 건넨 것은 귀여운 램프 모양으로 생긴 마법 손난로였다.

얼마 전부터 낑낑대며 뭔가를 연구하더니 이걸 만들려고 그랬나보다.

“고마워, 히스. 잘 쓸게.”

멀찍이에서 브루노어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면서 브루노어와만 걷게 된 아리엘은 그에게 물어보았다.

“브루노어. 그런데 왜 히스에게 설거지 마법만 숙제로 낸 건가요?”

정갈한 흰 마법사 로브를 입은 브루노어가 빙긋 웃었다.

“아리엘님 말씀은, 히스 녀석이 싫어할 걸 가장 잘 아는 제가 왜 하필 그랬냐는 말씀이시죠?”

“……네.”

브루노어가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는 듯이 흐음,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힘이란 것은 말입니다. 가진 힘이 커질수록 그걸 가지고 사람을 다치게 하는 데에만 쓰기 쉽답니다. 히스는 본성이 나쁜 애는 아니지요. 하지만 미래에 그 애가 가지게 될 힘이 과연 좋은 방향으로만 쓰일까요?”

아리엘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히스는 분명 힘을 가진 뒤 복수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다 안다는 듯 브루노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저는 그 애에게 가르치고 싶은 겁니다. 힘으로 사람을 돕는 법을, 사람을 기쁘게 하는 법을요.”

“아…….”

아리엘은 마음이 찡해졌다.

매일 투닥거려도 역시 브루노어는 누구보다 히스를 아끼는구나.

그런데 브루노어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브루노어……?!”

“아리엘님께는 정말 감사한 점이 많습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스승님에게 인사를 받은 아리엘은 당황해서 안절부절했다.

브루노어가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가르치려고 아무리 애써도 쉽지 않았었는데, 아리엘님을 만난 후로 히스 녀석의 마나가 많이 밝고 맑아졌습니다.”

“…….”

히스가?

“무언가를 아끼는 마음이 그 애를 자라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브루노어가 의미심장하게 아리엘을 보며 미소지었다.

아리엘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뺨을 붉혔다.

브루노어는 히스가 그녀를 아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 저야말로 히스에게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걸요. 히스와 동기가 된 건 정말 다행이에요.”

말한 그녀는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영지로 출발하기까지는 이제 꼭 사흘만 남아있었다.


* * *


한 달동안 아리엘이 내정 예산을 지출한 내역서를 재무관 달튼이 가지고 왔다.

어떻게든 예산을 다 써보려고 했던 아리엘은 매달 무참히 실패하는 중이었다.

열심히 집을 꾸미고 파티 때도 최선을 다해 돈을 썼는데, 마티어스가 준 예산이 너무 어마어마했던 탓이다.

올해가 지나면 다 그녀의 개인 금고로 들어갈 운명인 돈의 액수를 보며, 아리엘은 울적하게 조그만 턱을 괴었다.

‘0이 몇 개야…….’

그녀는 이런 식으로 자기 재산이 불어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아리엘이 시무룩해하자 달튼이 위로했다.

“영지 저택에도 손 볼 데가 있을 겁니다.”

아리엘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거기 손 다 봐도 남을 것 같으니까 그렇죠.

대체 이 돈, 다 쓸 방법이 있긴 한 건가요?

내역서에 서명을 하고 넘겨준 아리엘은 달튼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달튼. 녹스 영지에서 들여오는 물건 중에 '에덴 스톤'은 왜 사는 거예요?”

“아, 그거 말씀이십니까.”

달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지었다.

“라카트옐 같이 오래된 가문은 그냥 투자 목적으로 이것저것 사다 쌓아놓곤 합니다. 나중에 값이 뛰기도 하거든요. 음, 여기까지는 재무관의 입장이고요. 사실 이유는 없답니다. 그냥 사주는 거죠.”

“그냥요?”

“예. 녹스 가문은 오랫동안 그 지역을 정직하게 잘 다스리고, 대공가에 충성하고 있으니까요. 녹스 영지는 부유한 지역이 아니니까 가치없는 것일지라도 사줘서 도움을 주는 거죠.”

“그렇구나…….”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이었지만 달튼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리엘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 * *


마침내 북부 영지로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마티어스와 함께 마차에 탄 아리엘은 수도의 마법 게이트에 들어서자 눈을 크게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법 게이트는 제국의 주요 지역마다 있어서 재력만 있다면 제국 전역을 쉽게 여행할 수 있었다.

게이트를 통과하기 전 마티어스가 아리엘에게 말했다.

“게이트를 지나고 나면 좀 힘들거다.”

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건 그만큼의 거리를 마법으로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몸에는 피로가 쌓였다.

처음엔 잔뜩 들떴던 아리엘도 게이트를 두 개 지날 때쯤엔 지쳐서 헤롱헤롱했다.

“이리 와라.”

혀를 찬 마티어스가 그녀를 자기 옆으로 데려와 기대게 해 주었다.

헤헤. 기분 좋다.

아리엘은 결국 마티어스의 무릎을 베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는 영지에 도착한 후였다.

아침에 출발했는데 게이트를 통해 움직이니 해가 질 때쯤에 영지에 도착했다.

아리엘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그녀의 등에서 남자 재킷이 스르르 떨어졌다.

“일어났군. 다 왔다.”

마티어스는 셔츠 차림이었다.

아리엘은 포근하게 그녀를 덮었던 재킷이 그의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면서 춥지 않았던 건 마티어스님 덕분이었구나.’

무뚝뚝한 마티어스의 배려는 수줍으면서도 기뻤다.

영지의 바깥 창살 대문이 끼이익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리자 라카트옐 본가 저택이 눈앞에 펼쳐졌다.

방금 잠에서 깨어 얼떨떨하던 아리엘은 저택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알렌이 했던 말이 고스란히 실감되는 크기였다.

‘엄청 크잖아!’

황궁에 두 번 가봤는데 여기 저택은 황궁보다 큰 것 같았다.

거기에 딸린 정원도 말도 못하게 넓었다.

아리엘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마차 안에서 두리번거리는 동안 마차는 착실히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중년 정도 나이의 남자가 나와서 마티어스와 아리엘이 탄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낯선 사람이라서 아리엘은 마티어스 옆에 좀 더 붙었다.

마티어스는 아리엘을 가볍게 안아 들어올려 함께 내렸다.

그 모습을 본 중년의 남자가 헛것을 본 듯한 표정으로 멍해졌다.

마티어스가 무심하게 그를 아리엘에게 소개했다.

“아리엘, 이쪽은 베르토. 알렌 가문의 수석 집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기 마님. 베르토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베르토.”

집사 베르토는 노집사 알렌의 아들로서 본가 저택을 관리하고 있었다.

아리엘은 알렌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긴장을 풀었다.

‘알렌이랑 닮은 것 같아.’

마티어스가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저녁 준비는.”

“아! 되어있습니다. 주인님.”

황급히 말한 베르토가 사용인들에게 짐을 내리라고 명령하며 아리엘과 마티어스를 안으로 모셨다.

식당까지 가면서 베르토는 아리엘을 살짝 살펴보았다.

아버지인 알렌에게 워낙 서신으로 이야길 많이 들어서 실제로 봤을 때는 신기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아기 마님은 생각보다 훨씬 작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스칼렛 레드의 진홍색 머리카락, 눈처럼 새하얀 피부, 따스하고 달콤한 눈동자.

차갑고 난폭한 느낌의 라카트옐 남자들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주는 소녀였다.

하지만 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녀를 대하는 마티어스의 태도였다.

처음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믿지 않았다.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이 모두 새 아기 마님에게 푹 빠졌다니.

베르토가 아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절대, 결단코 그럴 수 있는 분들이 아니었다.

라카트옐에게 보통의 인간들은 모두 벌레로 보이는데 어떻게 아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마차에서 어린 소녀를 안아내리는 마티어스의 태도는 막내딸을 얻은 아빠마냥 다정했다.

베르토의 충격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아리엘이 피곤해보이자 마티어스는 그녀를 반짝 안아올려 주었다.

아리엘은 얼른 말했다.

“앗, 마티어스님, 저 내려주셔도 돼요.”

“여행 때문에 피곤했을 테니 안 돼.”

내려달라는 아리엘의 말을 간단히 거절한 마티어스는 성큼성큼 식당으로 향했다.

본가 저택이 낯선 아리엘과는 달리 그는 굉장히 자연스러워보였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딸처럼 안고 가는 걸 본 사용인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들 눈으로만 시선을 주고받았다.

‘방금 내가 본 게 맞지? 대공님이…….’

‘나도 봤어.’

아기 마님이 몰고 온 봄바람이 본가 저택 안을 채우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듯 했다.


* * *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다음날부터 마티어스와 기사단은 마수 토벌 준비에 온 힘을 쏟았다.

헥터와 랄프가 출정해야 해서 아리엘 호위는 전투에 나가지 않는 기사들이 돌아가면서 맡았다.

아리엘은 수잔과 방에 콕 틀어박혀서 열심히 손수건에 수를 놓았다.

‘미신일 뿐이란 건 알지만…….’

염원을 담은 손수건을 지니면 무사히 돌아온다는 걸 들은 이상,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녀가 작은 손으로 꼬물꼬물 수를 놓는 걸 수잔이 도와주었다.

아리엘은 짙은 푸른색의 실로 라카트옐 가문의 문장인 사자를 새겼다.

“무서운 사자, 무서운 사자…….”

“아기 마님. 사자를 무섭게 수놓고 싶으신 거예요?”

“앗. 방금 그거 제가 소리내서 말했어요?”

수잔이 후후 웃었다.

“다 들렸다고요. 우리 아기 마님이 왜 무서운 사자를 수놓고 싶으실까?”

“그게…….”

아리엘은 빨갛게 볼을 붉혔다.

“무서운 사자랑 같이 가시면 더 잘 싸우실까 해서요. 그럼 안 다치실 테니까.”

“귀여우시기도 하지.”

수잔이 아리엘을 꼭 안아주었다.

수잔에게서는 늘 햇볕에 말린 이불 같은 좋은 냄새가 났다.

아리엘은 놀지도 않고 열심히 수를 놓았다.

그런데 아무리 머릿속으로 '무서운 사자'를 외우며 바늘을 놀려도 이상하게 완성된 수의 모양은…….

크와앙.

“……이건 아기 사자네요.”

완성된 손수건을 본 수잔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수건 위에 비단실로 그려진 그림은 무시무시한 어른 사자가 아니라 순둥한 새끼 사자였다.

그것도 엄청 귀여운.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에요, 수잔.”

아리엘은 끄응 손수건을 노려보았다.

계속 노려보면 아기 사자가 어른 사자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듯이.

“그래도 대공님은 기뻐하실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저번에 루시안한테 줬을 땐 막 비웃었는걸요.”

“그래도 염원을 담으셨잖아요. 그냥 손수건 보다는 효험이 강할 것 같은데, 드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렇긴 해요.”

아리엘은 시간이 오래 걸린 마티어스의 손수건을 잘 보관해놓고 기사단 몫의 손수건도 만들었다.

물론 기사들 한 명 한 명 다 수를 놓아줄 수는 없으니 각 팀의 리더인 헥터, 랄프, 네드에게 줄 손수건이었다.

아리엘은 손수건 구석에 파란색으로 작은 방패 모양을 새겼다.

방패는 사자처럼 어렵지 않아서 금방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완성한 손수건을 주기 위해 기사단의 훈련장으로 찾아갔다.

훈련장에는 막사가 많이 쳐져있고, 식량과 무기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오가는 기사들 틈에서 아리엘은 쉽게 헥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헥터는 덩치가 워낙 커서 사람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어떻게 불러야 하지 생각하며 기웃거리는데 헥터 쪽에서 아리엘을 먼저 발견하고 외쳤다.

“어, 아기 마님!”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려퍼졌다.

훈련장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다 들을 만큼 큰 목소리였다.

한 순간에 수십 개의 눈동자가 아리엘에게 모여들었다.

껌뻑, 껌뻑, 껌뻑.

왁자지껄 시끄럽던 훈련장이 단번에 적막해졌다.


* * *


아리엘은 그녀를 보고 쥐죽은 듯 고요해진 기사들 때문에 당황했다.

왜들 이러지?

저기, 제가 뭐 잘못했나요?

그때 어떤 기사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마님? 대장이 방금 아기 마님이라고 했지?”

한 명이 물꼬를 트자 다들 얼빠진 표정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분이 말로만 듣던 대공자비님…….”

“대공님이 꽁꽁 숨겨두고 절대 안 보여주시던…….”

“화아, 엄청 귀여우셔.”

“가까이서 뵙고 싶어…….”

어느새 아리엘 주변으로 기사들이 잔뜩 모여들었다.

라카트옐 대공가에는 여주인이 귀했다.

여주인이 있은 지가 15년 전이고, 그 전 대공비는 기사단에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리고 아리엘은 다름 아닌 악랄하기로 유명한 대공자의 아내였다.

성격 파탄자인 루시안이 결혼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기사단은 아리엘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감탄했다.

‘아기 마님은 대공님이랑 매일 저녁 식사 하신대!’

‘우오오!’

‘대공자님을 무서워하지도 않으신대!’

‘우오오오!’

기사들은 짐승 떼 같은 소리를 내며 아리엘의 활약(?)에 열광했다.

물론 처음에는 대부분이 믿지 않았었다.

‘거짓말. 그걸 누가 믿냐?’

‘아니야. 랄프 대장이 그랬다고.’

‘엥? 랄프 대장이?’

‘헥터 대장은 몰라도, 랄프 대장은 거짓말 안하잖아.’

평소 기사들 사이에서 인망이 두터운 랄프 덕분에, 아리엘에 대한 소문은 신뢰도가 훌쩍 높아졌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이들은 아리엘의 실물을 보게 된 것이다.

우글우글 몰려든 덩치 큰 기사들은 작은 인형만한 아리엘을 둘러싸고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했다.

“아기 마님.”

“아기 마님!”

기사들이 앞다투어 아리엘에게 기사의 맹세를 하기 시작했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오롯이 대공가 소유인 기사단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대공가의 여자는 기사의 맹세를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레이디였다.

모실 레이디에 목말라있던 기사들에게 아리엘은 한줄기 빛과 다름없었다.

아리엘은 갑자기 밀려드는 기사의 맹세며 그녀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 때문에 딸꾹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기사들을 마구 헤치고 다가온 랄프가 아리엘을 구해주었다.

“물러나라. 아기 마님이 무서워하시잖아!”

기사들이 아쉬움 가득하게 몇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랄프가 민망한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놈들이 기사의 맹세를 못한지 너무 오래돼서요……. 그런데 어쩐 일로 귀한 걸음을 옮기셨습니까?”

아리엘은 기사들 틈에서 수줍음을 타지 않으려고 애쓰며 수놓은 손수건을 꺼냈다.

“곧 토벌을 가니까, 기사단에 손수건을 주고 싶어서요.”

“우오오오오!”

어디서 짐승 소리가 또 울려 퍼졌다.

헥터가 울부짖은 기사들의 뒤통수를 때리며 다가왔다.

“시꺼 이놈들아! 아기 마님 오셨습니까.”

아리엘은 꼼지락거리며 헥터와 랄프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염원을 담은 손수건을 지니면 전투에서 무사하대요. 팀 대표로 주는 거예요. 모두 무사히 돌아오라고.”

“…….”

랄프와 헥터가 서로 마주보았다.

이런 걸 받을 줄 상상도 못했단 얼굴이었다.

황송함에 두 기사의 귀가 시뻘개졌다.

“가, 감사합니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그들의 레이디가 손수건을 주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수를 발견한 헥터가 헤벌쭉하며 말했다.

“방패를 새기셨군요. 하긴, 라카트옐의 문장에 방패가 있습죠!”

허억. 들었어?

우리의 레이디가 우리를 위해 방패 자수를 놓으셨대.

기사들은 감히 가까이오진 못하고 모두 목을 빼고 손수건을 구경하려고 자기들끼리 난투를 벌였다.

아리엘은 뒤늦게 도착한 네드에게도 손수건을 건넸다.

평소 훈련이 엄격하기로 악명 높은 네드조차 꼬마 레이디가 건넨 손수건 앞에서 얼굴을 붉혔다.

하여간 15년 넘게 손수건 쪼가리 한 장 못 받아본 티를 온 기사단이 냈다.

우오오 거리는 기사들에게 무사히 다녀오란 인사를 한 아리엘은 이제 마티어스에게 향했다.

사자가 수놓인 손수건을 꼭 쥔 채였다.


* * *


아리엘이 쭈뼛쭈뼛 내미는 손수건을 받은 마티어스는 새겨진 자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꿀꺽.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초조하게 마티어스를 살폈다.

‘사자 모양이라는 것만 알아봐 주시면 좋겠는데…….’

이윽고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이건 새끼 고양이군.”

‘못 알아보셨어!’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널 새긴 건가?”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댓발 내밀고 외쳤다.

“아니라구요! 사자인데…….”

흑…… 망했어.

서글퍼하는 아리엘을 보던 마티어스가 픽 웃었다.

“그래. 사자구나.”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무심한듯 쓰다듬었다.

“고맙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목소리가 울먹이는 것처럼 나왔다.

마티어스가 한 팔로 아리엘을 안아주었다.

“네 생일 전까지는 돌아오마.”

그녀의 생일까지는 한 달이 남아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 거기 계신다는 건가요?

고대 숲과 바위산이 엄청 넓고 크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한 달이라니.

마티어스가 손수건을 품속에 넣었다.

아리엘은 저 아기 사자가 마티어스를 지켜주기를 마지막으로 빌었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아리엘의 전송을 받으며 출정했다.

처음으로 레이디가 해주는 전송을 받은 기사들은 다들 기세가 올라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리엘의 눈에도 기사들에게선 공포나 죽음의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들 라카트옐을 믿고, 라카트옐의 기사인 걸 긍지로 여기는구나.’

그녀는 기사들의 행렬에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주었다.

기다림은 그녀의 몫으로 남아있었다.


* * *


한편 노집사 알렌 영감의 아들, 본가 집사 베르토는 며칠 지나지 않아 아리엘에게 완전히 흐물흐물해졌다.

그는 기사단과 마티어스가 떠나고 텅 빈 집에 혼자 남은 여주인을 위해 저택을 떠들썩하게 만들어주었다.

영지에서 잡힌 사슴으로 훌륭한 요리를 해주거나 늑대 썰매를 태워주겠다 성화를 부렸다.

베르토와 살뜰한 수잔 덕에 아리엘은 외로움을 많이 느끼지 않았다.

그녀도 나름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브루노어가 내 준 마법 숙제도 하고, 친구들에게 편지도 열심히 썼다.

수도의 친구들과 수도 저택의 사람들은 아리엘의 생일을 함께 보내지 못하게 된 걸 매우 아쉬워했다.

그 대신 그들은 게이트를 통해 미리 선물을 바리바리 보내왔다.

“선물은 생일날 한 번에 풀어볼래요.”

선물이 뭘지 정말 궁금했지만 아리엘은 마티어스가 돌아온 다음으로 모든 행복한 일을 미뤄놓았다.

마티어스와 기사단이 무사히 돌아온 뒤, 가벼운 마음으로 행복을 만끽할 생각이었다.

수잔은 한 달 전부터 아리엘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케이크와 장식을 정하고 기사단을 초대해 연회를 할 홀을 꾸몄다.

브루노어의 숙제를 다 해치워버리고 할 일이 없었던 아리엘도 수잔의 성화에 못이겨 파티 홀에 자주 들렀다.

어차피 산더미같이 남은 내정 예산을 써야해서 집안을 둘러보고 꾸밀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을 하면서 아리엘은 본가 저택의 사용인들과도 많이 가까워졌다.

본가의 사용인들은 수도 저택의 사용인들처럼 아리엘에게 푹 빠지는 단계를 차근차근 밟고 있었다.


* * *


저녁이 되어 혼자 방에 들어온 아리엘은 새로 온 편지가 없나 확인하고, 깃펜을 들었다.

‘루시안에게 보낼 편지를 써야지.’

올해 생일에는 루시안과 함께 보낼 수 없었다.

본가의 사용인들은 지나는 자리마다 파괴시키는 작은 주인이 올해는 오지 않는다는 것에 상당히 안도한 눈치였지만…….

아리엘은 연말인데 루시안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대신 편지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깃펜에 로열 블루색 잉크를 콕콕 묻혀 편지지에 갖다대었다.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 대공자님께.]


“아냐아냐. 이건 너무 딱딱하잖아.”

마법으로 편지지를 깨끗하게 되돌린 아리엘은 다시 편지의 서두를 적었다.


[제국의 수호자, 얼음별 탑의 주인, 응징하며 판단받지 않는 라카트옐…….]

“으음. 이건 너무 거창하고.”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하던 아리엘은 결국 평범한 인삿말을 적어넣었다.


[친애하는 루시안에게.]


그녀는 시시콜콜한 일상들을 편지에 썼다.

편지가 자꾸만 길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루시안은 첫머리랑 끝만 읽고 버릴 텐데, 뭐.

아리엘이 아는 루시안이라면 첫머리에서 보낸 사람을 확인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용건을 확인한 뒤 편지를 던져놓을 것이다.

실제로 저번 가을에 그에게 날아온 편지들이 봉인도 안 떼인 채 불에 던져지는 걸 수도 없이 보았다.

그가 돌아간 뒤 있었던 일들을 꼼꼼히 적어내려가다보니 모니카 령에서 있었던 일까지 흘러갔다.

아리엘의 깃펜이 우뚝 멈추었다.

‘검은 망토를 쓴 남자…….’

디트리히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형상이 도망가지 않았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그녀는 자신이 본 게 환상인지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날 느꼈던 공포만큼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설사 그 날 내가 본 것이 헛것이라고 해도 '그'는 이 땅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고 있겠지. 자신을 도울 마법사 무리를 모으며.’

아리엘은 과거 3년이나 무리에 속해있었음에도 '그'의 정체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의 얼굴, 나이, 이름과 신분 모두를 철저히 숨겼다.

그런데도 마법사 무리가 그를 따랐던 것은 '그'가 가진 묘한 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뜻에 주변 사람들을 물들이는 재능이 있었다.

어떻게 가능한지는 몰라도 마법사 무리는 '그'의 어두운 뜻을 쉽게 추종했다.

‘상당히 위험한 능력이었지.’

아리엘은 그 능력에 지배당하지 않았다.

심장에 운디르의 저주가 박혀 고통당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지킬 수 있었다.

'그'는 아리엘의 마음이 끝끝내 자신의 뜻에 물들지 않는 것을 기분 나빠했었다.

‘아직은 그들이 활동을 시작할 때가 안 됐어. 아무 단서가 없으니 찾을 수도 없고.’

게다가 지금의 아리엘이 섣불리 그의 정체를 캐는 것은 아주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다가 역으로 정체를 들킬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리엘은 절대로 다시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쓰던 편지를 놓아두고 융단 침대커튼이 드리워진 침대에 몸을 누였다.

푹신한 이불이 그녀를 포옥 감쌌다.

눈을 감으며 아리엘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검은 망토 얘기는 편지에서 빼야겠어. 디트리히 전하 얘기도.”

그런 생각을 하자, 디트리히 이야기를 듣고 오만하게 화를 내는 루시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렇게 말하겠지.

‘그것이 널 에스코트했다고? 대체 누구 맘대로?’

루시안의 생생한 목소리를 상상해버린 아리엘은 누운 채 작게 웃고 말았다.


* * *


북부 산맥, 고대 숲.

기사 여럿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시선을 끌자, 족제비 형상을 한 마수가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기다란 몸뚱이로 방향을 바꾸었다.

“키야아-!”

흰털을 가진 족제비 마수는 길이가 족히 10미터는 되었다.

온 몸으로 땅을 내리칠 때마다 땅이 울리는 것이, 설산의 야수 예티를 떠오르게 했다.

게다가 날쌘 움직임과 사나운 이빨 때문에 처치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족제비 마수를 맡은 네드 팀은 유인과 공격을 반복하며 힘든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유인을 맡은 기사들이 거대한 고대 나무들 사이를 움직였다.

독이 바짝 오른 족제비 마수가 몸통으로 나무를 치자 굵은 둥치가 산산조각이 났다.

대장인 소드마스터 네드가 옆 나무의 가지를 밟고 뛰어올라 검기를 세운 검을 휘둘렀다.

“키엑!”

공격이 들어갔지만 마수가 재빨리 몸을 틀어 간신히 겉가죽을 베었을 뿐이다.

피를 보고 화가 난 마수는 꼬리를 휘둘러 기사들 몇을 날려버렸다.

네드가 까득 이를 갈았다.

“올라타야겠다. 엄호해!”

네드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네드가 족제비 마수의 이빨을 피하면서 유연하게 마수의 등에 올라타는 장면은 모든 기사의 감탄을 자아냈다.

다른 기사들은 석궁을 쏘며 네드가 무사히 머리까지 도달하도록 엄호했다.

“좋아. 한 번에 끝낸다. 다들 깔리지 않게 물러서라!”

검에 소드 마나를 최대한 불어넣으며 네드가 소리쳤다.

혼자 공격하는 건 위험했지만 더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목을 베어야 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대장님! 나방 몬스터가!”

날개를 펴면 3미터는 되는 나방 마수가 떼를 지어 나타났다.

나방 마수는 날개에서 독가루를 뿌리기 때문에 근처에 있으면 위험했다.

“대장, 지원 요청을 해야합니다!”

“일단 피하십시오!”

하지만 이대로 다 잡은 족제비 마수를 놓칠 순 없었다.

네드는 족제비 마수의 목에 있는 힘을 다해 검을 찔러넣으면서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끼에에엑!

소름끼치는 비명을 내며 족제비 마수가 마구 몸부림을 쳤다.

마지막으로 한 명의 목숨이라도 빼앗아 가겠다는 듯 마수가 날카로운 손톱을 착지하는 네드에게 휘저었다.

‘위험하다!’

눈앞이 아찔했다.

푸른 사자 기사단으로 산다는 건 매년 목숨의 위협과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의 순간 앞에서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네드가 방어 자세로 바꾸는데, 쿠웅-! 족제비 마수의 앞다리가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뒤이어 족제비 마수의 몸도 쓰러졌다.

“어이, 이봐 네드! 형님 왔다.”

“헥터!”

족제비 마수를 벤 헥터가 피가 묻은 대검을 털어내며 다가왔다.

반대편에서 랄프의 팀이 나방 마수들을 거대한 그물에 몰아넣고 죽이고 있었다.

알아서 전력 지원을 온 모양이었다.

헥터가 네드의 목에 억센 팔을 두르며 킬킬거렸다.

“너무 무모한 거 아니냐, 너?”

“깔끔하게 머리를 벴어야 했는데.”

옷을 털며 네드가 투덜거렸다.

족제비 마수에게 박힌 검을 빼내고 팀을 모아 재정비를 하는데, 헥터가 마수를 뒤적이는 모습이 보였다.

“뭐해?”

“가죽이 쓸만한가 하고.”

“털이 별로던데. 거칠어.”

그동안 나방을 다 해치운 랄프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족제비 잡았어?”

“어. 지독했지.”

“꼴이 말이 아니네.”

“너야말로. 독가루 다 뒤집어 쓴 것처럼 너덜너덜하구만.”

세 마스터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랄프가 독가루가 닿아 녹아버린 방어구를 벗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아기 마님께 손수건도 받았는데, 우리도 답례해야 하는 거 아니야?”

헥터가 씨익 웃었다.

“괜찮은 거 하나 잡아서 가죽 벗겨 가자.”

“좋은 생각이다.”

네드는 털이 거칠거칠한 족제비 마수를 아쉬운 눈으로 보며 입맛을 쩍 다셨다.

저게 마수가 아니라 진짜 흰북방족제비였으면 그럴 듯한 장갑 감이 되었을 텐데…….

그렇게 기사단의 목표가 생존에서 사냥으로 바뀌자, 기사들의 기세는 더욱 올라갔다.

반대편 정찰 기사가 외쳤다.

“그리핀입니다! 그리핀이 나타났습니다!”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그리핀은 고대 숲에서 만날 수 있는 최악의 마수였다.

보통 때였다면 욕설이라도 내뱉었겠지만,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빛났다.

헥터가 물었다.

“야, 저거 가죽 괜찮냐?”

얇은 레이피어를 우아하게 닦아낸 랄프가 답했다.

“몸통 쪽은 쓸만하지.”

“좋아. 그럼 저걸로 하자!”

세 팀은 동시에 그리핀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한편, 바위산 쪽.

고대 숲을 넘어가면 만년설이 항상 쌓인 거대한 바위산이 드러난다.

산맥의 중턱 이후는 나무가 살 수 없는 혹독한 환경이라 오직 얼음과 바위뿐이었다.

중반까지는 기사단과 함께 움직이던 마티어스는 중턱 이후로는 홀로 바위산에 올랐다.

쉽게 마수 몇 마리를 베어넘기고 등성이를 오르던 중,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고위 마수들이 밀집해 있는 곳에 피 웅덩이가 가득했다.

웅덩이 진 시커먼 피 옆에는 피를 흘리며 죽어간 용 계열 마수들이 토막 난 채 흩어져 있었다.

제국에는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와이번이나 드레이크, 가고일 등의 마수는 아직 바위산에 살고 있다.

마티어스는 끔찍하게 죽어있는 마수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뇌수와 장기가 흘러나온 가고일, 배가 갈려 거꾸로 꽂힌 드레이크…… 썰어놓은 것이 너무나 잔인했다.

보통의 인간이 봤다면 구역질부터 했을 광경이었다.

바위산과 얼음에 피가 고이고 흘러 주위가 온통 시뻘갰다.

하지만 마티어스의 서늘한 표정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조각 같은 입술이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곧 블루 블러드 문이 뜰 때던가.”


* * *


마티어스가 약속한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기사단이 돌아온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저택 사람들과 아리엘의 호위 기사들은 딱히 걱정하는 기미가 없었지만, 아리엘은 눈에 띄게 한숨이 늘었다.

‘역시 푸른 사자를 더 무섭게 새겼어야 했어.’

그랬으면 좀 더 빨리 돌아오셨을지도 모르잖아.

날짜가 지나면서 아리엘의 생일도 코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생일 연회 준비로 바쁜 사용인들과 달리 그녀는 마티어스의 귀환을 걱정하느라 좀처럼 생일 파티 준비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대로 마티어스와 기사단이 돌아오지 않은 채 생일이 오면 기쁜 마음으로 축하받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생일까지는 돌아온다는 마티어스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졸아붙는 기분이었다.

생일을 이틀 남긴 날, 아리엘이 아침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자 수잔이 안쓰러운 듯 뺨을 어루만졌다.

“아기 마님. 이러다 갑자기 짠 하고 돌아오실 거예요. 얼른 드세요.”

“네, 수잔…….”

아리엘의 불안을 달래줄 것을 찾아 헤매던 집사 베르토는 매일 수도에서 편지가 오는지 기웃거렸다.

친구들한테서 편지가 오면 아리엘이 잠시 웃음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기다리는데 다행히 편지 한 개가 와 있었다.

베르토는 뛸 듯이 기뻐하며 편지를 움켜쥐고 달렸다.

“아기 마님, 마님께 편지가 왔습니다!”

따뜻한 호박 크림 스프를 떠먹던 아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한테서요?”

베르토가 겉봉에 쓰인 '보내는 사람' 이름을 읽었다.

“히스라고 적혀있는데요.”

“히스?!”

아리엘은 깜짝 놀라서 먹던 스프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 온 뒤 그녀는 히스에게 여러번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한 번도 답장이 없었다.

알렌에게 안부 편지를 하면서 히스 얘기를 살짝 끼워넣어 물어봤는데, 요즘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다는 답변만 받을 수 있었다.

아리엘은 히스가 새로 연구하는 것에 빠져서 답장할 시간이 없는가보다 생각했다.

베르토가 건네준 편지는 꽤 두툼했다.

그녀는 빨리 편지를 읽으러 가기 위해 스푼을 고쳐잡았다.

‘얼른 먹고 내 방으로 올라가야지.’

아리엘이 호박 스프와 크림치즈 바게트를 열심히 먹기 시작하자 수잔이 베르토를 향해 잘했다는 눈빛을 보냈다.

편지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간 아리엘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책상에 앉았다.

‘히스가 편지에 무슨 내용을 적었을까?’

분명히 새로 발명한 마도구 얘기가 있을 거야.

또…… 내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썼을 거고, 혼자 있으니 홀가분하고 좋다고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겠지?

“봉투 나이프가 어디 있더라…….”

아리엘은 편지의 봉인을 뜯을 때 쓰는 칼을 찾느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찾았다.

그녀가 막 봉투에 칼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아기 마님! 나와 보세요!”

수잔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창밖이 시끌시끌해지는 느낌이 났다.

아리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설마?’

그녀는 창문으로 뽀르르 달려가 내려다보았다.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저택으로 푸른 사자 기사단의 깃발이 들어오고 있었다.

‘기사단이 돌아왔어!’

아리엘은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수잔이 아리엘에게 외투를 입혀주며 웃었다.

“제 말이 맞지요? 갑자기 짠하고 돌아오실 거라고.”

“수잔은 천재인가 봐요.”

계단을 뛰어내려가 현관까지 도착하자 멀찍이서 기사단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맨 앞에는 마티어스가 깜짝 놀랄 만큼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마티어스님!”

아리엘은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다른 곳을 보고있던 마티어스가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참지 못하고 아리엘은 현관을 지나쳐 마티어스에게로 뛰어갔다.

수잔이 입혀준 분홍색 털 망토가 겨울 바람에 팔랑였다.

마티어스는 아리엘이 당도하자마자 그녀를 안아올렸다.

“꺄아.”

마티어스가 안아올려 한바퀴 휙 돌려주자 아리엘은 놀람과 기쁨이 뒤섞인 소리를 냈다.

마티어스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다녀왔다.”

“정말로 제 생일 전에 돌아오셨네요!”

“약속했으니까.”

함께 달려나온 베르토가 얼른 주인의 물건들을 받아들며 말했다.

“아기 마님께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셨답니다. 며칠은 식사도 잘 못 하셨지요.”

마티어스가 미려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잘 못 지냈던 건가?”

“아니에요. 재미있게 잘 지냈어요.”

아리엘은 짧은 팔로 마티어스를 꼭 한 번 안은 다음 그의 팔에서 내렸다.

피곤할 텐데 그녀까지 안겨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마티어스가 부드럽게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사단이 네게 선물을 준비했더군.”

“정말요?”

아리엘은 마티어스 뒤에 서 있는 세 명의 소드마스터들을 빼꼼 바라보았다.

좀 친한 헥터와 랄프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아기 마님!”

아리엘은 헥터와 랄프, 네드에게 총총 다가갔다.

“다친 데는 없어요? 다들 무사한 거예요?”

랄프가 싱긋 웃어보였다.

“예! 염원을 넣은 손수건을 주신 덕에 멀쩡합니다.”

“올해는 한 명도 안 잃었습죠! 다 아기 마님 덕분입니다.”

헥터가 바위만한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대답했다.

부상자들을 챙겨달라고 집사에게 말한 네드가 아리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손수건에 대한 답례로 아기 마님께 바칠 가죽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머나.”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그래도 되는데.

네드가 곱게 천으로 감싸 묶은 꾸러미를 베르토에게 넘겼다.

아리엘이 직접 들기엔 너무 큰 꾸러미였다.

헥터가 신이 나서 외쳤다.

“저게 바로 그리핀의 등가죽인데, 이게 무겁지도 않고 보드라우면서 따뜻하답니다.”

아리엘은 입을 딱 벌렸다.

‘그리핀?’

헥터 방금 그리핀이라고 한 거예요? 진짜 그리핀?!

아리엘의 놀라움과는 상관없이 기사단은 모두 뿌듯한 얼굴이었다.

섬기는 레이디에게 괜찮은 것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이 기뻐보였다.

아리엘은 책에서 본 무시무시한 마수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미소지었다.

“다들 고마워요.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요.”

“우오오!”

뒷줄에서 다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기사들 목소리가 들렸다.

마티어스가 잠깐 뒷줄을 서늘하게 본 뒤 아리엘을 이끌었다.

“이만 들어가자. 날이 추우니.”

“네, 마티어스님!”

아리엘은 활짝 웃으며 마티어스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갔다.

어떤 생일선물을 받는다해도 지금만큼 기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 *


마티어스는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왔고, 기사단은 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부상자도 마법사 브루노어가 치유 마법을 써서 위험한 상처는 여며놓았다.

쉬면서 회복하면 깨끗이 나을 것이었다.

헥터와 랄프는 부하 기사를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것에 행복해하며 아리엘의 호위로 복귀했다.

이제 라카트옐 가에 남은 건 대공자비 아리엘의 생일을 거창하게 축하하는 것 뿐이었다.

마티어스는 돌아오자마자 딱히 피로도 풀지 않고 장인을 줄줄이 불러 미리 주문해둔 물건들을 찾았다.

몇 가지는 수도에서 공수해왔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마티어스는 본가의 사용인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아리엘에게 말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꺼내서 가지거라. 네가 수도 저택에서 썼던 열쇠와 여기 보관고 자물쇠는 한 몸이니.”

본가인만큼 영지 저택에 있는 보관고-보물고, 무기고, 살림고, 기록고-들은 수도 저택의 것과 비교도 안 되게 컸다.

유서깊은 보물들과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진귀한 것들이 가득한 곳이 이곳의 보관고였다.

그런데 마티어스가 그 모든 걸 아리엘에게 허락해주는 것을 본 본가의 사용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 서 있던 수잔만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하녀장님. 주인님이 방금…….”

“쉿. 자네들은 작은 주인께서 변하신 걸 봤어야 해. 그럼 저 정도로 놀라지 않았을 거다.”

대공 마티어스는 절대로 녹록한 주인이 아니었다.

안주인 없는 집을 14년 동안 다스리면서 그가 보인 모습은 냉정 그 자체였다.

사용인들에게 후한 보수를 주는 대신 실수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사정을 봐주는 일도 없었다.

사람이라면 가질 법한 동정이나 연민, 기분 좋은 웃음, 슬픔 같은 것은 라카트옐 남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어렵고 무서운 주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라카트옐 남자들이 저 작은 소녀 한 명 때문에 변하다니.

사용인들은 사랑스러운 어린 마님이 만들어낸 마법에 감탄을 그칠 수가 없었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일은 밀린 일을 해야해서 내가 저택을 비워야 한다.”

“돌아오시자마자 곧장요?”

“그래. 하지만 내일 모레, 네 생일 날에는 돌아올 거야. 네가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와 있을 거다.”

“네에…….”

기사단은 토벌을 마치고 쉬고 있는데, 마티어스는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아리엘의 마음을 모두 읽은 듯 마티어스가 그녀의 뺨을 토닥였다.

“내일은 날이 좋을 것 같으니 늑대 썰매라도 타며 놀거라.”


* * *


아리엘의 생일 전날.

마티어스는 아예 새벽에 저택을 떠났고, 그가 예견한대로 날씨는 쾌청하고 맑았다.

시리게 파란 겨울 하늘이 구름 한 점없이 펼쳐진 날이었다.

아기 마님의 생일이 하루 남았으니 저택 안은 장식이 싹 바뀌었다.

월계수 모양의 은촛대가 복도와 방마다 걸리고, 흰 겨우살이 나뭇가지로 만든 장식물이 계단과 홀을 장식했다.

흰 겨우살이 나뭇가지에는 수정을 가득 매달아서 촛불 빛을 받을 때마다 얼음이 맺힌 것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붉은 열매가 탐스럽게 달린 리스가 촛대 아래에 걸리고 향기 가득한 꽃들도 가득 장식되었다.

겨울 분위기가 물씬 나면서도 화사한 축하의 느낌이 가득했다.

아리엘은 기사단에 들러 선물받은 그리핀의 가죽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네드와 헥터, 랄프는 그리핀을 잡을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 놈 날개에 맞았는데 눈앞에 별이 번쩍하지 뭡니까. 곧장 정신 안 차렸으면 앞발에 깔려서 황천길 안녕? 할 뻔 했다니까요.”

“나방 독을 그 놈한테 쓰자고 한 건 좋은 생각이었어. 움직임이 둔해졌잖아.”

“안 그랬음 못 잡았지.”

기사단과 즐겁게 이야기를 마친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권유대로 늑대 썰매를 타러갔다.

그동안 집사 베르토가 여러번 권했지만 한 번도 타지 않았었다.

날씨가 맑은 만큼 추워서 수잔은 거의 둥근 공처럼 아리엘을 껴입혀서 바깥에 내보냈다.

얼음이 보석처럼 언 호수는 썰매를 타기 좋은 곳이었다.

아리엘은 시간 가는줄 모르고 하루종일 썰매에 빠졌다.

해가 짧은 겨울이라 늦은 오후가 되자 석양이 내렸다.

걱정된 수잔이 데리러와서야 아리엘은 저택으로 돌아갔다.

‘루시안에게 보낼 편지에 이 이야기도 꼭 써야지! 늑대 썰매가 정말 재미있었다고.’

저택으로 돌아가서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자 하루의 피로가 몰려왔다.

수잔이 헤롱거리는 아리엘을 보며 못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피곤하실 테니까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꿀 섞은 우유를 가져다드릴게요.”

“알았어요, 수잔.”

“내일 만찬 기대하시고요.”

드디어 생일이 내일이었다.

“아기 마님은 하루종일 선물만 풀어봐야 하실지도 몰라요. 중앙 홀 대리석 조각상 아래 쌓인 선물 더미 보셨지요?”

원래는 친구들에게서 온 선물들을 하나 둘 씩 쌓아놓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선물을 보태고, 마티어스가 선물을 더해서 산더미같이 되었다.

아리엘은 수잔의 농담에 키득키득 웃었다.

“너무 설레요.”

“원래 생일 전날에는 그런 거랍니다. 특히 아기 마님처럼 어린 분은 당연히 더 그렇죠.”

말쑥하게 씻기고 말려준 수잔이 아리엘이 잠들도록 이마에 키스하고 나가주었다.

“내일 잠에서 깨면 생일이 되어있으실 거예요.”

아리엘은 방 침대에 누워 두근거리는 기분을 즐겼다.

내일은 마티어스도 일을 마치고 함께 있어줄 테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준 선물도 옆에 있고…….

그때 아리엘은 이틀간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맞다, 히스가 편지를 보내왔었지.”

히스의 편지를 뜯어보려던 참에 마티어스와 기사단이 돌아와서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리엘은 히스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히스 편지 하나만 읽고 자는 건 괜찮겠지?”

분명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적혀있을 것이다.

아리엘은 침대에서 뽀르르 기어나와 양털로 만든 보드라운 방울카디건을 걸치고 책상 위에 앉았다.

히스의 편지는 그녀의 책상 위에 봉투칼과 함께 얌전히 놓여있었다.

아리엘은 두껍게 실링되어 있는 봉인을 자르고 편지를 열었다.

히스의 삐뚤삐뚤한 글씨가 곧장 눈에 들어왔다.


[아리엘에게.]


글씨 좀 봐. 귀여워.

아리엘은 빙그레 웃고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그런데 내용을 읽는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게…… 뭐야……?”

생일 축하일 거라고 생각했던 히스의 편지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 * *


[아리엘에게.

아리엘. 이 편지가 언제 도착할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꼭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너랑 할아버지가 영지로 떠나고 나서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찾았어.

블루 블러드 문이라고 알아?

푸른 달 말이야.]


푸른 달.

물론 아리엘도 알고 있었다.

그걸 블루 블러드 문이라고 부르는지는 몰랐지만.

어느 달의 보름이면 엄청나게 크고 밝은 보름달이 떴는데, 그 달은 기묘하게도 금빛이 아니라 요사스러운 푸른색이라 블루문이라고 불렀다.


[그 책에 뭔가가 나와있었어. 읽어 봐.]


히스는 손으로 급히 베껴 쓴 책의 사본을 편지에 붙여놓았다.


<블루 블러드 문은 1년에 4번 그 모습을 보인다.

윤년이 낀 해에는 한 차례 더 뜬다.

푸른빛으로 물들어 빛나는 커다란 보름달의 형상이며 '드래곤의 달'이라고도 부른다.>


붙여놓은 사본 아래 히스의 편지가 이어졌다.


[왜 '드래곤의 달'이라고 불리는지 궁금해서 좀 더 찾아봤지.

자료가 너무 없어서 할배의 서재까지 털었어.

그때까지는 그냥 재미였고, 너한테 새로 발견할 걸 알려주려는 생각에 들떠 있었어.

블루 블러드란 예전부터 귀족을 이르는 말이잖아.

푸른 피. 평민과는 다른 우월한 피.

유래를 찾아보니까, 노동을 하지 않은 귀족의 하얀 살갗 아래로 푸른 핏줄이 비쳐서 그렇게 부르게 됐다지.

그런데 그 뿐이 아니었어.

과거 귀족이라는 계층이 생기기 전에도 블루 블러드는 존재했다는 거야.

그때는 귀족이 아니라 인간의 상위 종족을 의미했대.

인간의 형상을 할 수 있는 우월한 종족.

그건…… 제국 역사에서 드래곤밖에 없었어.

건국 신화에 나오는 암흑의 드래곤말야.

그래서 '블루 블러드 문=드래곤의 달'이 성립된 거지.

그런데 아리엘. 왜 드래곤을 블루 블러드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알아?

책에 나와 있었어.

푸른 달은 드래곤의 피를 흥분시킨대.

드래곤은 푸른 달이 뜰 때마다 흉폭해져서 학살을 자행했고, 푸른 달에 비춰진 피는 붉게 보이지 않았지.

검푸르게 보였을 뿐이야.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블루문을 블루 블러드 문이라고 불렀어.

넌 대체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겠지.

다음장으로 넘겨 봐. 이유를 알게 될 테니.]


아리엘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히스의 글씨체는 급박하고 거칠었지만, 내용은 오랫동안 신경 써 다듬은 듯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한 달 동안 히스는 대체 무엇을 알아낸 것일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의 다음 장을 넘겼다.


[나는 그저 블루 블러드 문이 뜨는 날짜를 알고 싶었어.

하지만 너도 알잖아.

나같은 평민은 제국력 달력을 보기 어려운 거.]


히스의 말이 맞았다.

평민들도 쓰는 7일 달력은 흔히 구할 수 있는 반면,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꼼꼼히 기록해놓은 제국력 달력은 아주 귀했다.

황실과 고위 귀족 가문들에나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지도 방에 있는 대공가 달력을 생각해냈어.

당연히 문은 잠겨있었지만 달력만 보고 얼른 나올 생각이었지.

들어가서 벽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달력을 구경했어.

1년치 달력이 꼼꼼히 그려져 있더군.

나는 블루 블러드 문이 뜨는 날짜를 확인하고, 그 날짜를 손바닥에 베껴적었지.

너한테 알려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달력 옆에 놓인 검은 가죽 덮개가 씌워진 서류가 내 눈길을 끌었어.

호기심에 들여다보니 라카트옐 가주들이 저택을 비울 때 기록해두는 장부더라고.

귀족 나부랭이들은 참 피곤하게 산다 싶었지.

몇월 며칠에 외출했고, 며칠에 귀가했고를 기록하다니 말야.

근데…….

갑자기 깨달음이 머리를 때렸어.

내 손바닥에 적힌 날짜들과 마티어스 대공님이 올해 저택을 비우셨던 날짜가 정확히 일치하는 거야.

뒷머리가 쭈뼛섰지만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어.

그런데 전년도 장부와 달력을 넘겨봤더니 그것도…… 맞아 떨어졌어.

대공님은 늘 영지에 가신다는 이유로 수도 저택을 비우셨었지.

나는 가장 근래에 언제 블루 블러드 문이 뜨는지 찾아봤어.

확실히 하고 싶었으니까.]


편지의 두 번째 장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그녀가 서둘러 마지막 장을 펼치자 그곳에는 몇 줄 되지 않는 글줄이 급하게 마무리 짓듯 적혀있었다.


[아리엘, 곧 블루 블러드 문이 뜰 거야.

네 생일 전날 저녁이 되면.

이미 영지에 계신데 그 날도 대공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쩌면 라카트옐의 정체는……

그것일지도 몰라.

넌 똑똑하니까 내 말을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부디 몸 조심해.

-너의…… 동료 히스가.]


아리엘은 창백해진 채 히스의 편지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히스가 무슨 말을 하는거지?

“마티어스님…….”

그러고보니 마티어스님이 오늘 하루종일 자리를 비우셨었지.

문득 여린 팔의 살갗에 섬찟 소름이 일어났다.

히스의 말은 해석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는 제국 건국 역사에 기록된 암흑의 드래곤 이야기가 혹시 라카트옐과 관련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다.

평소에 덜렁대는 히스인데도 꼼꼼하게 정리해놓은 것을 보니 그가 그렇게 추측하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다만 아리엘은 완전히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드래곤이란 것이 무언가.

드래곤은 정확히 말하면 생물이 아니었다.

마력의 근원, 측량할 수 없는 마나의 응집체, 모든 살아 숨쉬는 것을 초월한 존재.

그것은 그냥 오래된 전설에 불과했다.

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가, 타락한 마수들을 베러 땅에 내려온 어둠과 만나 손을 잡고 함께 건국을 한 이야기.

그렇게 어둠의 본체인 암흑의 드래곤은 제국의 수호신이 되었다.

갑자기 그것이 그녀와 결혼한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의 아버지와 관련이 있을 리가 없었다.

‘확인, 확인해 봐야겠어.’

아리엘은 자야 할 시간이라는 것도 잊고 히스가 선물해 준 램프 손난로를 집어들었다.

마법 손난로에는 어둠을 밝히는 기능도 있었다.

주머니에는 라카트옐 가의 보관고 네 곳을 열 수 있는 열쇠꾸러미가 들어있었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복도로 뛰어나가자 뒤를 따르는 랄프와 헥터의 조용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리엘은 곧장 기록고로 향했다.

왕관 인장이 찍힌 열쇠를 세게 쥐고서.


* * *


사실 북부 영지로 출발하기 전, 아리엘은 왕관 인장이 찍힌 열쇠를 쓴 적이 있었다.

수도 저택의 숲에 묻힌 와이번 뼈에 대해서 조사하다가 큰마음을 먹고 기록고에 들어가 본 것이다.

기록고에는 과연 엄청난 양의 가죽 정장된 책과 기록물들이 있었다.

그녀는 한참 다른 책들에 정신을 팔다가 드디어 고대 괴물들에 대한 내용이 있을 법한 책장으로 다가갔다.

“……어라?”

그런데 그 책장은 깨끗이 비어있었다.

괜찮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줄 알았던 아리엘은 조금 실망하며 돌아갔다.

대신 다른 책들을 듬뿍 가져와 읽었으므로 큰 허탈감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히스의 편지를 받고 나니 그 책장이 비어있었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아리엘은 어두운 복도를 총총총 걸었다.

밤을 맞은 고성(古城)같은 거대한 저택은 희미한 벽난로 소리와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 외에는 죽은 듯이 적막했다.

이윽고 본가 저택의 기록고에 도달한 그녀는 손에 쥔 왕관 인장 열쇠를 자물쇠에 가져다 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철컥.

꼭 맞는 열쇠를 만난 듯 자물쇠가 덜커덩 열렸다.

묵직한 쇠 자물쇠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해서 아리엘은 흠칫 놀랐다.

끼이이, 기름 먹은 문의 경첩이 미세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아리엘은 숨이 턱에 닿은 사람처럼 가슴을 달싹이며 기록고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들어가기 전 랄프와 헥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 페룬의 눈 가지고 있으니까…… 이 앞에서 잠시만 기다려줘요.”

호위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고 조용히 물러났다.

아리엘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것 같았다.

아리엘은 혼자서 기록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등잔에 불을 켤 수도 있었지만 램프만 들고, 서고 안쪽으로 향했다.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자 상당히 오래된 앤틱 원목 책장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곳에 꽂힌 책들.

“……있다.”

수도 저택의 기록고에 없었던 책들이 이곳에 모두 있었다.

아리엘이 찾아 헤맸던 고대의 괴물을 다룬 책부터, 드래곤에 대한 것까지.

아리엘은 그곳에 꽂힌 책들 중 건국 시조인 암흑의 드래곤에 대한 책 몇 권을 떨리는 손으로 꺼내들었다.

램프를 가까이 가져다대고 책을 펼쳤다.

책은 깨끗이 관리되고 있었지만 종이 사이사이에 미세하게 앉은 먼지들을 후후 불어내야했다.

두껍고 무거운 책을 넘기자 드래곤의 역사와 잉크로 들어간 드래곤 삽화가 드러났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새카만 색으로 어둡게 타오르는 몸.

그냥 그림인데도 살아움직이는 듯 섬뜩한 느낌을 주는 눈동자.

정말로 어둠이 땅에 내려왔다면 이런 형상일 것 같았다.

아리엘은 조그만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으며 훑어내렸다.

“땅에 내려온 어둠은 드래곤의 몸을 입었다. 드래곤의 육체 말고는 어둠을 형상화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지상에서 가장 강한 생명체에게 인간의 우두머리는 손을 내밀었다.

드래곤이 대륙을 측량해 나누어 기초를 닦았고, 인간은 나라를 세웠다.

여기까지가 아리엘이 배운 역사책의 내용이었다.

어린 아이들 동화처럼 짧게 스치듯 지나가는 신화 부분.

하지만 이 책에는 그 외의 내용이 있었다.


[드래곤이 태생적인 드래곤 피어를 내뿜으면 인간과 동물들은 모두 두려움에 고개를 조아렸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그의 발 아래에 복종했다.

드래곤은 인간이 상처를 낼 수 없으며, 상처가 나더라도 자연적으로 사라지고, 그의 피는 대지를 죽게 하기 때문에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에게는 와이번의 독도 듣지 않고 드레이크의 브레스도 소용이 없으며 가고일의 물리력도 드래곤을 이기지는 못한다.

대적할 자가 없는 용 마수들의 천적은 드래곤 뿐이다.

시간조차 드래곤을 죽이는데에는 역부족이다.

암흑의 드래곤의 이름은 라키엘. 그의 불멸은…….]


아리엘은 발치에 책을 툭 떨어뜨렸다.

퉁 하는 무거운 소리가 났다.

만약.

만약에 그녀가 히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를 읽고 신기하고 재미있어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싹튼 직감은 여태 그녀가 보았던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기이한 점에 닿아버렸다.

‘10년 전과 외양이 똑같다던 마티어스님.’

‘피를 내도 순식간에 아물던 루시안의 팔.’

‘인간의 힘으로는 잡을 수 없는 마수를 토벌하는 라카트옐. 선천적인 소드 마나…….’

태생적인 드래곤 피어는 라카트옐이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소드 마나와 닮은 점이 있었다.

소드 마나란 본디 강한 힘에 복종하는 마나다.

인간이라면 아주 강해져서 무력의 경지에 올라야만 소드 마나를 복속시킬 수 있다.

연약한 아기로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건 절대 불가능이다.

그런데 루시안은 태어날 때부터 소드 마나를 가지고 태어났다.

존재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아기일 때부터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이제 그녀의 심장은 걷잡을 수도 없을만큼 뛰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조각조각난 기억이 아리엘의 머릿속으로 한꺼번에 쏟아져내렸다.

황족인 디트리히가 했던 말.

‘놀라운 분이라고 생각했죠. 영애는 대공자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으니까요.’

‘루시안이 무엇인지 알면서 옆에 계시는지 궁금하군요.’

알렌이 했던 말.

‘라카트옐이 사자라면, 인간은 개미지요.’

루시안의 말.

‘라카트옐 남자들이 사자인 이유는. 피에 더 우월한 존재가 흐르기 때문이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들.

‘라카트옐에게는 인간의 자아가 생기지 않아. 인간을 동족으로 인식하지 못하는거지. 대신 우리에게는 인간과 다른 '에고'(ego)가 있어.’

암흑 드래곤의 이름은 라키엘이라고 했다.

라키엘. 라키엘. 라키엘…… 라카트옐?

“……!”

아리엘은 온 몸을 떨며 새어나오는 신음을 막았다.

맥박이 나비날개처럼 파닥파닥 뛰었다.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 떨어졌다.

‘라카트옐의 정체가…… 이거?’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정말로?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이…… 드래곤이라고?”

그때였다.

지독히도 겨울의 밤과 어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결국 알아버렸네.”

아리엘은 소스라칠 듯 놀라며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기록고의 기다란 창문이 열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휙 들이쳤다.

창 밖에는 시릴 듯한 푸른 달이 하늘을 가득히 채우며 떠 있었다.

완연한 보름달.

블루 블러드 문.

그리고 그 환한 달빛을 후광으로 받은 사람의 그림자가 창문에 걸터앉아 있었다.

뒤에서 비치는 빛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가 내뿜는 존재감은 끔찍이도 거대했다.

눈빛만으로도, 목소리만으로도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그것은 저 생명체에게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푸른 달빛을 두른 사람의 실루엣은 확연히 남자의 것이었다.

짧은 머리카락과 퇴폐적이게 느껴질만큼 늘씬하게 뻗은 몸. 흐트러진 자세까지.

아리엘은 포식자 앞에 붙들린 하찮은 먹잇감처럼 얼어붙었다.

달빛을 받은 유리 창문이 역광으로 그의 몸을 비추었다.

붉지 않은, 검푸르게 보이는 시커먼 피가 그의 흰 목덜미와 상의를 엉망으로 적시고 있었다.

그의 손도 피에 젖어 검기만 했다.

저렇게 피를 뒤집어쓰고 그녀 앞에 나타날 만한 사람을 아리엘은 모른다.

그러나 아리엘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루시…… 안?”

그녀를 지옥에서 구해준 그녀의 남편.

분명 익숙한 사람인데…… 달랐다.

눈빛이 낯설었다.

먹잇감보듯 아리엘을 노려보고 있는 루시안의 눈은 아주 위험해보였고, 기세를 마음대로 풀어놓아 느른했다.

루시안의 기세를 오롯이 느낀 아리엘은 숨통이 콱 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여태 그녀가 그의 옆에서 보았던 기세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것은 온전히 파괴하기 위한, 죽이기 위한, 짓밟기 위한 힘이었다.

“루시안…… 루시안이 지금 어떻게?”

온 몸에 전율이 일면서 심장이 북소리처럼 쾅쾅 뛰었다.

도망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

죽을 거야. 먹힐 거야. 살아남지 못할 거야.

본능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냈다.

혈관에 피가 빠르게 돌며 숨이 가빠왔다.

창턱에 앉아있던 그가 가뿐히 뛰어내렸다.

아리엘의 머릿속에 꼭 1년 전, 갓 열 살이 된 그녀가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가득 찬 보름달.

얼어붙을 듯한 겨울.

칼바람을 두르고 창문에서 걸어들어오는 소년.

방 안에 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

모든 것이 똑같다.

소리도 내지 않고 바닥에 착지한 그가 아리엘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아리엘은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물러나고 나서 오히려 놀란 것은 그녀 쪽이었다.

루시안에게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엘은 그의 붉은 입술이 비틀리며 웃는 모습을 똑똑히 상상할 수 있었다.

1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것이다.

그때의 아리엘이 그에게 다가갔다면, 지금은 물러났다는 것.

소름끼치게 아름답고 요염한. 그러나 당장이라도 그녀를 찢어발겨 그 피를 취할 듯 위험한 목소리가 말했다.

“생일 축하해, 아리엘라. 드디어 내가 무서워진 건가?”

아리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동그랗게 뭉쳐져 목구멍 안에 걸린 기분이었다.

드래곤.

땅에 있는 생명 중 그것이 두렵지 않은 것이 있을까?

무섭지 않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루시안의 눈빛은 명백히 아리엘의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목소리를 짜냈다.

“아, 안 무서…….”

“거짓말.”

그가 한치도 믿지 않는다는 듯 곧바로 말을 끊어냈다.

“떨고 있잖아.”

루시안이 사냥감을 덮치기 직전의 맹수처럼 느릿하게 아리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아리엘이 물러나지 않자 루시안은 재미있어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몸을 숙여 뺨과 뺨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더운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아리엘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무서워.’

루시안의 숨결이 아리엘의 뺨을 간질였다.

“그러게 나쁜 아이가 되라고 했을 텐데.”

그의 숨결은 달콤했지만 동시에 죽음의 냄새를 풍겼다.

“도망가야 한다고 했을 때 들었어야지. 처음부터 나를 꺼리고 피했어야지. 내가 밀어냈을 때…… 물러났어야지.”

점점 이성을 잃고 있는 포식자의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졌다.

아리엘은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잘못해도 자신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루시안과 인간 대 인간으로 아는 사이였다는 것은 이 순간 의미가 없었다.

인간이 아닌 그의 정체를 알아버린 이상, 인간의 자비를 요구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물며 비밀을 들추어버린 장본인으로서는 더더욱.

지금 그들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이런 것들뿐이다.

약자와 강자.

사냥감과 사냥꾼.

하찮은 미물과 거대한 괴물.

아리엘에게서 조금 물러난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환하게 뜬 블루 블러드 문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피가 튄 흰 얼굴은 놀라울 만큼 피와 잘 어울렸다.

“그래, 맞아. 그게 나야.”

루시안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어졌다.

“흑암의 용의 피가 흐르는 자. 땅에 유배 와 갇혀버린 어둠.”

“지상에 살아 존재하는 가장 끔찍한 재앙.”

폭발할 듯한 기운이 서고 안을 넘실거렸다.

그는 한 겹 씌워놓았던 껍데기를 벗으며, 불안정하고 분노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리엘은 문득 그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이 순간에 그런 걸 느낀다면 이상할까?

성큼 다가온 루시안이 그녀를 우악스레 틀어쥐었다.

“이제 넌 도망가고 싶겠지. 하지만 벗어날 수 없을 거야. 날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 지독한 고통에서 날 해방시킬 것은 존재치 않아. 그러니, 널 구해줄 사람은 없어.”

그의 난폭한 시선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했다.

“대답해 봐.”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마치 울부짖고 있는 듯했다.

“이제 넌 어쩔 거지?”

“…….”

아리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심장이 욱신대며 아팠다.

말이 되지 않았다.

두려우면서도 이토록 슬프다니.

루시안이 가엾었다.

어떤 무기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비늘 아래에 깊숙이 상처받은 존재가 웅크려있었다.

이제 너는 어쩔 거냐는 그 말이 꼭 구해달라는 말로 들린다면, 내 자만일까요?

그녀는 몸을 움직였다.

루시안이 뿜어내는 기세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바스러질 듯 아팠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다가가 가느다란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3권 끝.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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