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붉은 불씨가 은근하게 타올랐다.
아리엘은 지금 한 시간 째 같은 자리에 앉아서 꼬물꼬물 뜨개질바늘을 놀리고 있었다.
털실 뭉치에 아리엘의 관심을 빼앗긴 루시안이 사납게 투덜거렸다.
“바느질 따위, 하지 말랬잖아.”
아리엘은 뜨개질 코가 빠지지 않도록 집중하며 종알종알 대답했다.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거라구요.”
그녀는 남의 마음도 모르는 루시안을 몰래 흘겨보았다.
지금 아리엘이 뜨고 있는 건 루시안에게 선물할 겨울용 핸드 워머였다.
원래는 제일 뜨기 쉬운 목도리를 선물하고 싶었지만 루시안이 절대로 하고 다닐 것 같지 않아서 포기했다.
‘넥타이도 못 견뎌 하는 루시안인걸.’
제국의 끝에 위치한 요하네스 아카데미의 겨울은 혹독하다고 들었다.
손에 끼는 워머라면 검술 연습을 할 때나 평소 생활할 때 춥지 않게 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루시안이 아카데미로 돌아가기까지 며칠 남지 않아서 아리엘은 마음이 급했다.
그런 아리엘의 마음을 모르는 루시안은 바지런히 뜨개바늘을 움직이는 그녀를 놀리듯 말했다.
“그렇게 작은 바늘로 뜨려면 백 년은 떠야 하는 거 아닌가?”
“윽…….”
안 그래도 속도가 느려서 슬픈데.
루시안 정말 미워! 밉다구.
분함을 꾹 참는 아리엘을 보며 루시안이 쿡쿡 웃었다.
그가 옆의 오목한 크리스털 유리 그릇에 담긴 산딸기 절임을 하나 집어 붉은 입술 사이로 삼켰다.
늘 달다고 오만상을 쓰면서도 왜 굳이 먹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똑똑.
아리엘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수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기 마님, 다이아나 공녀님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실까요?”
‘다이아나?’
아리엘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요즘 친구들과 통 못 만났던 터라, 뺨이 순식간에 기쁨으로 달아올랐다.
“내가 나간다고 전해주세요, 수잔.”
“예.”
아리엘은 서둘러 뜨개질감을 작은 바구니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주 앉아있던 루시안에게 말했다.
“루시안, 친구가 왔는데 만나고 올게요.”
루시안이 턱에 손을 짚으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친구는 나 돌아간 뒤에도 만날 수 있잖아.”
“몇 주 동안 얼굴을 못 봤단 말이에요…….”
아리엘은 시무룩하게 말한 뒤 울망울망 그를 바라보았다.
“다녀오면 안 돼요, 네?”
“안…….”
루시안에게서 안된다는 말이 떨어지기 전에 아리엘은 선수를 쳤다.
냉큼 루시안 입에 산딸기 절임을 넣어준 뒤 줄행랑을 친 것이다.
단 걸 먹으면 났던 화도 풀리는 법이라고 했어.
얼결에 입에 붉은 과일을 문 루시안은 팔랑팔랑 달아나는 붉은 뒤통수를 기막히다는 듯 보고 있다가 픽 웃었다.
“가소롭기는.”
그는 늘어져 있던 늘씬한 몸을 일으켰다.
도망을 갔으니 쫓아줘야지 않겠는가.
루시안은 여유롭게 방을 나섰다.
안 그래도 아리엘의 애정을 얻은 모니카 가의 벌레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먼발치에서 몇 번 보긴 했지만, 그의 시야에선 어떤 인간도 다 벌레나 다름없었다.
얼굴을 외울만큼 중요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내 아내에게 나보다 우선시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루시안은 천천히 유리 온실로 향한 아리엘의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다이아나!”
아리엘은 조르르 달려가서 다이아나에게 폭 안겨들었다. 다이아나는 손에 들고 온 핑크색 종이 상자를 놓고 얼른 아리엘을 안아주었다.
“아리엘, 아리엘, 아리엘!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응. 다이아나는?”
“나야 그 파티들 끌려다니느라 뭐. 세실은 오늘 어머니랑 다른 연회에 간 모양이더라고.”
아리엘을 꼭 안아서 빙그르르 돌려준 뒤 내려놓은 다이아나가 우아하게 말했다.
“내가 뭐 사 왔는지 좀 봐.”
“뭔데?”
다이아나가 분홍색 종이 상자를 내밀었다.
“무려 ‘벨라루스’에서 사온 한정판 얼그레이 애플 케이크라고!”
“정말?”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벨라루스는 요즘 수도 영애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탄 고급 케이크 가게였다.
가격이 비싼 대신 맛이 좋고 무척 예뻐서 소녀들의 취향에 쏙 맞았다.
아리엘의 얼굴이 환해지자 다이아나가 살짝 헛기침을 하며 뺨을 붉혔다.
“가끔은 바깥 음식도 좋을 것 같아서. 맛은 너희 집 케이크를 못 따라오지만, 음식은 눈으로도 먹는 거라잖아.”
“고마워, 다이아나!”
‘귀여워!’
귀여워 죽겠어! 못 본 새 더 귀여워졌어!
지긋지긋한 가을 파티들 때문에 한동안 덕질을 못한 다이아나는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세실이 있다면 같이 이 마음을 불태우는건데.’
우정이 시작된 계기는 달랐지만, 아리엘의 귀여움에 빠진 건 세실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세실은 아리엘 금단증상을 보이며 붉은 것만 보면 한숨을 쉬곤 했다.
아리엘이 걱정할까 봐 세실의 그런 증상을 전하진 못하겠지만…….
다이아나는 도도하게 보랏빛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럼 케이크 먹으면서 얘기할까?”
“응!”
불청객이 등장한 건 그때였다.
“여기 있었군. 아리엘라.”
나타난 사람을 본 다이아나는 깜짝 놀랐다.
흑발에 흰 피부, 시원스런 콧날과 붉은 입술을 가진 천상계 외모의 소년이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가 등장만 했을 뿐인데도 눈이 부신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저거, 대공자 루시안 아냐?!
다이아나가 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손짓했다.
그가 짓는 유혹적인 미소 사이로 태생적인 난폭함이 흘러나왔다.
“이리 와. 아까 하던 얘기는 마저 하고 가야지.”
말하면서 그는 냉혹한 눈빛으로 다이아나를 훑어보았다.
그녀를 향한 노골적인 적대감이 느껴졌다.
그의 태도는 짐짓 여유로웠지만, 눈치 빠른 다이아나는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어쩐지 날 견제하러 나온 느낌인데?’
호오라…….
다이아나는 촉을 바짝 세웠다.
‘이거 혹시 질투?!’
다이아나가 생각하기에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매우 과분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늘 아리엘이 백 배는 아깝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루시안이 못마땅한 것과는 별개로, 다이아나는 그가 아리엘에게 어느 정도의 마음이 있는지 궁금하던 터였다.
예쁘고 상냥하고 귀여운 그녀의 천사 아리엘을 훔쳐가 놓고 진심으로 아껴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나쁜 놈이겠는가!
‘좋아. 내가 시험해보겠어.’
무려 아리엘의 첫 친구의 칭호에 빛나는 다이아나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루시안을 째려보았다.
‘어쭙잖은 놈한테 내 아리엘은 못 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리엘을 사이에 두고, 다이아나와 루시안의 눈빛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마주쳤다.
“…….”
정적 끝에 다이아나가 먼저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사뿐히 인사했다.
“제국의 수호자, 라카트옐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성의 없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루시안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앞에 서 있는 보랏빛 머리를 가진 예쁜 소녀가 정말로 하찮은 벌레라도 된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조심스레 루시안을 살피던 아리엘은 생각했다.
‘가끔 이런 루시안을 보면 낯설어 보여.’
이럴 때면 루시안이 무감하고 잔혹한 라카트옐이라는 실감이 난다.
“나한테 와.”
그가 아리엘에게 눈짓했다.
아리엘은 울상을 지으며 루시안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아까 잘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그에게 바짝 다가서서 속삭였다.
“루시안, 도망친 건 나중에 혼날게요. 제 친구한테 겁주지 말고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그가 불쾌한 기색으로 딱딱하게 대꾸했다.
“지금 기세 안 쓰고 있잖아.”
“앞으로도 계속이요.”
“…….”
루시안이 납득하지 못한 얼굴로 비딱하게 다이아나 쪽을 노려보았다.
왜 내가 저 것한테 친절해야 하지?
그때, 떨어진 곳에서 속닥거리는 아리엘과 루시안을 흥미롭게 보고 있던 다이아나가 도발을 시작했다.
“어머나, 아리엘. 사실 내가 시간이 많이 없단다. 금방 가야 하거든.”
그녀는 앙증맞은 벨라루스 케이크 상자를 흔들며 아리엘을 유혹했다.
“얼른 나랑 케이크 먹지 않을래?”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이아나가 금방 가야 한다고?’
말도 안 돼. 이제 겨우 얼굴을 봤는걸.
다이아나의 유혹은 성공적이었다. 아리엘은 뭐에 이끌린 듯 루시안 옆을 벗어나 다이아나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조금이라도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탁.
그런데 루시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리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루시안?”
아리엘이 못 가도록 막은 그가 붙잡은 손목을 은근히 쥐며 말했다.
“먹이를 준다고 무조건 따라가는 건 좋지 않은데.”
그가 아기고양이 발바닥 누르듯 그녀의 손바닥을 엄지로 꾹 눌렀다.
졸지에 먹을 것을 따라간 사람이 된 아리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안 그래요. 난 고양이가 아니라고요! 다이아나가 주는 게 좋은 게 아니라, 다이아나가 좋은 거예요.”
그녀는 간신히 들릴만한 입속말로 말을 이었다.
“다이아나가 좋으니까…… 다이아나가 주는 것도 좋은 거라구요.”
천천히 미간을 찌푸린 루시안이 위협하듯 말했다.
“좋단 말을 참 잘하네.”
“네? 그야, 좋아하니까요.”
그가 느리게 아리엘의 턱을 집어 올리며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남편한테는 그런 말 한 적 없으면서?”
아리엘은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다.
어쩐지 뺨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그녀는 애써 당연하다는 듯 속삭였다.
“그건…… 우리가 계약관계니까요.”
아리엘의 대답을 들은 루시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멀찍이서 보고 있던 다이아나는 자신을 대할 때와 완전히 태도가 다른 루시안을 보며 반쯤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정말로 마음이 있는 것 같긴 한걸?’
남이 자기 몸에 손대는 것을 혐오하기로 유명한 그가 스스럼없이 아리엘에게 닿는 것이나, 아리엘의 말이나 행동에 따라 시시각각 반응이 바뀌는 건 썩 나쁘지 않았다.
곧 이야기를 마친 듯한 아리엘이 뽀르르 다이아나에게 돌아왔다.
“다이아나. 나 왔어.”
“그래.”
사실 다이아나는 그리 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느긋하게 루시안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루시안의 표정은 오싹할만큼 차갑고 무서웠다.
‘흥. 그걸로는 부족해.’
다이아나는 들으라는 듯 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리엘은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자. 여기 내 옆에 앉으렴.”
그녀는 자그만 아리엘을 꼭 껴안고 양 뺨에 뽀뽀를 했다.
그리고 아리엘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둘러앉혔다.
‘어떠냐. 뽀뽀, 껴안기, 어깨에 팔 두르기. 절친 스킨십 3종 세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루시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다이아나는 염장을 지르듯 루시안에게 표표히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내 귀염둥이, 이거 먹고 언니한테 시집올래?”
도발이 먹혔는지 루시안이 스륵 살기를 비쳤다.
다이아나는 살짝 놀라 손을 거뒀다.
‘어머…… 이거 정말 진심으로 보이잖아?’
재밌긴 하지만, 이쯤에서 그만할까.
다이아나는 관대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안에게 말했다.
“대공자님도 와서 함께 케이크를 드시겠어요?”
그녀가 그에게 말을 걸자 아리엘이 루시안 쪽을 돌아보았다.
살기를 스멀스멀 내뿜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눈빛을 바꾸었다.
“……아리엘이나 많이 먹이도록. 살 좀 찌게.”
오, 처음으로 말이 통하네.
다이아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죠.”
루시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온실을 떠났다.
“다이아나, 케이크가 정말 예쁘다.”
친한 친구와 남편 사이의 기 싸움을 알아차리지 못한 아리엘은 벨라루스의 한정판 얼그레이 애플 케이크를 구경하며 즐거워했다.
촉촉한 얼그레이 시트 안에 얇게 생크림이 발리고, 설탕 조림 사과가 듬뿍 들어간 맛있는 케잌이었다.
위에는 고소한 버터 크럼블이 뿌려져 있었다.
다이아나는 토끼처럼 오물오물 케이크를 먹는 아리엘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조금 안심했어.”
“응? 왜?”
다이아나가 우아하게 포크를 케이크에 찔러넣었다.
“그냥. 뭐, 소유욕이 좀 강한 것 같긴 하지만. 너한테만 잘하면 됐지.”
“무슨 얘기야, 다이아나?”
아리엘은 뜬금없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다이아나는 말없이 설탕 조림 사과를 포크로 찍어 아리엘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참, 다이아나. 빨리 가봐야 한다며?”
다이아나가 느긋하게 부채를 폈다.
“생각해보니까 다음 일정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정말?!”
“응. 조금 더 있다 갈게.”
아리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와! 다이아나, 정말 기뻐.”
“얼른 먹어. 생크림은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잖니.”
다이아나는 세심히 크럼블이 많은 쪽을 아리엘에게 골라주며 미소지었다.
속으로는 루시안을 향해 살짝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흉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요, 대공자님.’
아무래도 그는 아내의 동성 친구를 질투해봤자 득 볼 것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잘 모르는 듯했다.
* * *
마침내 루시안이 라카트옐 저택에서 보내는 한 달의 시간이 모두 흐르고 단 하루만이 남았다.
아직 푸른 여름 잎사귀가 남아있는 9월에 돌아왔던 그는, 단풍이 든 10월의 어느 날 짐을 쌌다.
물론 본인이 아니라 알렌이 했지만.
한 달 동안 머물렀던 만큼 챙겨갈 짐이 꽤나 많았다.
루시안은 분주히 짐을 싸는 알렌과 하인들 틈에서 지루한 듯 기대앉아 있었다.
그들이 부피가 큰 짐들을 싹 챙겨서 나가자, 방에는 루시안이 개인적인 물건을 들고 갈 사각형의 여행 가방 하나만 남았다.
그때 살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루시안이 허락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시 똑똑똑 도토리 떨어지는 듯한 노크 소리만 들려왔을 뿐이다.
노크 소리만 들어도 누가 왔는지 뻔했다.
“들어오라고.”
재차 을렀는데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인내심 없는 루시안은 그쪽으로 걸어가 확 문을 열어젖혔다.
“아리…….”
아리엘의 이름을 부르던 그는 문 앞에 선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아리엘이 울음소리를 억지로 참으며 주륵주륵 울고 있었다.
“젠장.”
루시안은 아리엘을 안아 올려서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책상 위에 그녀를 앉힌 그가 아리엘의 어깨를 잡았다.
“누구야.”
우는 걸 달래주기도 전에 울린 새끼부터 물어보는 게 진정 라카트옐 남자의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루시안 방에 들어온 후부터 소리를 참지 않고 흐엉흐엉 울기 시작한 아리엘이 고개를 도리도리했다.
말 안하겠다는 뜻이었다.
“누구냐고. 말해.”
하지만 루시안은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몇 번 더 울린 사람을 말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던 아리엘은 그가 협박조까지 띠자 겨우 이름을 일러바쳤다.
“흐윽……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이요.”
“나?”
기가 막혀 되묻자, 억울한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왜.”
그 순간 아리엘이 울음을 딱 그치고 새액새액 숨만 내쉬었다.
“뭐 때문인지 똑바로 말을,”
“가잖아요!”
아리엘이 불쑥 외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다시 흐앙 울어버린다.
“…….”
루시안은 오늘 두 번째로 말문이 막혔다.
태생이 지배자의 피를 달고 태어난 그에게 이런 경험은 흔치 않았다.
아리엘이 울며 숨까지 쉬느라 할딱거리며 웅얼거렸다.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잖아요…….”
아리엘은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하지 않았다.
보통의 열 살, 아니 지난 생에서 열일곱까지 살았던 아이라면 누구나 만남과 이별을 여러 번 겪게 된다.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주변 사람이든.
아기는 처음엔 공기처럼 당연히 내 옆에 있어 주던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라면서 그 일이 반복될수록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리엘은 아니었다.
그녀는 옆에 사람들이 생긴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그전에는 누구도 옆에 있어 주지 않았고, 아리엘에게 의미 있는 사람도 없었다.
누가 오든 가든 상관없는 나날이었다.
새로 주어진 삶에서 아리엘은 아직 헤어짐을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와 가까워진 사람들 중에서 아리엘 옆을 자꾸만 떠나는 사람은 루시안 뿐이었다.
영영 떠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리엘은 매번 이별이 힘들었다.
오늘도 안 울고 그냥 얘기를 나누려고 왔는데 루시안 방에서 커다란 짐들이 마구 나오는 걸 보고 얼어붙어 버렸다.
그리고 눈물이 터진 것이다.
“…….”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세게 쓸어넘긴 루시안이 아리엘을 달랑 들어서, 텅 비어 열려있는 네모난 여행 가방 안에 앉혔다.
“가지고 갈까?”
흐린 시선으로 자기가 앉아있는 곳을 본 아리엘이 울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루시안의 음성이 거칠어졌다.
“거긴 케이크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나뿐이야. 그래도 갈 거야?”
그게 모두와 다 이별한다는 의미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이별에 익숙하지 않은 아리엘에겐 지금 당장 눈앞의 이별이 가장 무섭고 무거웠다.
그녀는 흐엉흐엉 울며 대답했다.
“네. 갈 거예요.”
케이크 따위는 그녀의 인생에 원래 없었던 거다.
물론 루시안도 원래 없었던 거지만, 이번에는 한 달이나 같이 있었는데…….
지난 삶에선 아프고 고통스러운 학대 속에서도 눈물을 흘릴 줄 몰랐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루시안과 관련되면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지는 걸까?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잔뜩 노려보며 내려다보던 루시안이 별안간 맥 풀린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리엘을 짐에서 훌쩍 들어 올려 빼냈다.
그리고 갓 갈아입은 흰 셔츠 자락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아리엘의 가느다란 팔을 한 손으로 쥔 그가 말했다.
“이렇게 마르고 조그만 건 아내 취급 안 해. 케이크 많이 먹고 포동포동해지면 모를까.”
콧물을 닦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역시 케이크가 문제인 건가요?
루시안이 아리엘의 뒷머리에서 하느작거리는 레이스 리본을 만지며 꽤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있어. 명령이야.”
“…….”
잠시 버티던 아리엘은 결국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춘 루시안이 무슨 꿍꿍이인지 악랄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오늘은 내 방에서 자.”
* * *
분홍색 잠옷으로 갈아입은 아리엘은 베개를 끌어안고 루시안 방으로 찾아갔다.
침대 위, 헤드에 기대앉은 루시안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자나?’
아리엘은 널디 넓은 침대의 끝으로 살그머니 기어들었다.
누워서 눈 감은 루시안을 말똥말똥 구경했다.
‘진짜 예쁘다…….’
익숙해질 때도 됐지 않나 싶은데, 루시안의 외모는 백 번 천 번을 봐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아예 종족이 다른 것 같은걸.
아리엘은 자신이 거울 속에서 본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보통 사람의 외모라면 루시안은 신화 속의 신 정도?’
그때 조각상처럼 멈춰있던 루시안의 아름다운 입술이 열렸다.
소년의 외모에 비해 낮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유가 있어.”
깜짝이야!
루시안이 자는 줄 알았던 아리엘은 화들짝 놀라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얼마 후, 바깥이 조용한 게 이상해서 이불 밖으로 빼꼼 얼굴을 꺼내자 어느새 눈을 뜬 루시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엘은 그가 했던 말을 되짚으며 물었다.
“뭐가요?”
“아카데미 가는 거. 이유가 있다고.”
“……알아요.”
아리엘은 왠지 민망해서 우물쭈물 대답했다.
아무래도 아까 그녀가 루시안이 떠난다고 울고불고했던 것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듯했다.
루시안이 아카데미에 가는 건 의무다.
몸이 아프지 않은 이 나라의 모든 귀족 남성은 14세가 되면 요하네스를 거쳤다.
루시안처럼 튼튼하다 못해 파괴적이기까지 한 소년이 요하네스에 가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알면서도 바보같이 어리광을 부려버린 것이다.
“……안다, 라.”
아리엘의 말을 한 번 되풀이해서 말한 루시안은 작게 자조했다.
어차피 네가 아는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는 천천히 몸을 낮추고 기대앉아 있던 자세를 바꾸었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채 한 팔로 머리를 받쳐 괸다.
아리엘과 루시안의 시선 높이가 줄어들었다.
한참 그녀를 빤히 보기만 하던 그가 화제를 돌려 물었다.
“무슨 색을 좋아하지? 아리엘라.”
“네?”
“호박(amber)이 좋다고 했으니 노란색? 아니면 열 달 전처럼 여전히 분홍색?”
루시안의 마지막 질문에는 재미있다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아리엘은 얼굴을 확 붉혔다.
열 달 전 얘기를 하다니 치사하잖아요!
여전히 아리엘은 분홍색을 정말 정말 좋아했지만, 그동안 다른 좋아하는 색깔도 많이 생겼다.
“매일 매일 달라져요.”
“지금은?”
아리엘은 매혹적으로 묻는 루시안의 짙은 청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홀린 듯 대답했다.
“파란색…….”
그가 픽 웃었다.
“왜?”
“그, 그냥요.”
루시안이 머리를 괴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아리엘의 붉은색 머리카락을 한 손 가득 쥐어 들어 올렸다.
“난 네 색깔이 더 마음에 드는데.”
“거짓말. 루시안이 훨씬 예쁘잖아요.”
아리엘의 항의에 그가 오만하게 대꾸했다.
“이미 내 것인 건 아무 의미 없지.”
와, 그거 좀 분한 말이네요. 그런 외모를 가지고서 의미가 없다니.
루시안이 요염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살아있는 것은 무릇 자신에게 없는 것을 탐하는 법이거든.”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느끼며, 아리엘은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생각이 별똥별처럼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루시안에게 없는 것도 있는 걸까?’
아리엘의 생각에 그는 가지지 못한 것이 그리고 가지지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라카트옐이니까.
그때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어.”
“……?”
아리엘은 루시안 쪽으로 보스락 돌아누웠다. 뭘 물어보려는 거지?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그의 짙은 푸른 눈과 마주치자, 그녀는 숨을 죽였다.
거부할 수 없는 지배자의 눈빛이었다.
“얘기해 봐.”
루시안이 나지막이 명령했다.
“네 모친 이야기.”
아리엘은 잠깐 말을 잃었다.
왜 갑자기 엄마 이야기를 묻는 걸까.
오늘의 루시안은 왜인지 그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 * *
침대의 사각기둥 위에 쳐진 휘장 안에서 아리엘의 목소리가 조용조용 울려 퍼졌다.
“엄마는…… 기억이 없어요. 나 낳다가 돌아가셨대요.”
루시안이 부드럽지만 예리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같이 느꼈던 사람은?”
“없어요.”
“그럼 왜…….”
뭔가를 말하려던 그가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왜 아플 때 엄마를 불렀지?”
아리엘은 처음 듣는 얘기에 놀라 되물었다.
“내가 그랬어요?”
“그래. 지난번 아팠을 때.”
지난번 아팠을 때라면 봄이다.
그녀가 다이아나를 구하려고 무리하며 마나를 폭발시켜 쓰러졌을 때.
그 때문에 루시안이 아카데미에서 돌아왔었지.
하지만 자신이 엄마를 부른 줄은 몰랐다.
아리엘은 더듬더듬 말했다.
“그땐, 아파서 잘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루실리온 가에 살 때 힘든 일이 있으면 엄마를 찾았으니까…… 그 날도 그랬나 봐요.”
후작가에서는 아무도 아리엘을 사랑해주지 않았다.
가족인 아빠와 오라비가 가장 앞장서서 그녀를 학대하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리엘은 생각했었던 것 같다.
엄마가 있었다면, 날 가엾다 해줬을까?
어쩌면 매일 아프게 틀어 잡히는 머리도 상냥하게 쓰다듬어줬겠지.
추워서 떨며 안아주고, 울면 달래주고…….
그땐 애정 한 조각이 너무 간절해서 그녀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조차 애정을 구걸하는 지경이었다.
변덕스러운 하녀들이 기분 내켜서 던져주는 과자 조각에도 저 사람이 나를 조금이라도 좋아 해주는 건 아닐까 두근거리고 기대했었으니까.
상상으로나마 그녀를 사랑해줄 엄마를 바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 꿈을 자주 꿨어요.”
아리엘은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의 형상을 엄마로 만들었던 것 같아요. 슬픈 날이나, 나쁜 꿈을 꾸고 나면 엄마가 꿈에 나와요.”
“나쁜 꿈?”
루시안이 그녀의 말 속에서 한 단어를 집어냈다.
“너, 악몽을 꾸나?”
“…….”
아리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몸의 흉터들은 옅어지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녀는 종종 악몽을 꿨다.
후작에게 쫓기다 계단을 구르거나, 오라비의 개들이 괴물로 변해서 물어뜯으려 하거나, 후작이 손에 든 목걸이가 채찍으로 바뀌거나…….
아리엘의 침묵이 긍정이란 걸 알아차린 루시안이 오싹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몰랐는데.”
그녀는 그걸 아는 사람들을 손에 꼽아보았다.
가장 첫 번째로는 수잔.
아리엘이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면 수잔은 늘 달려와서 그녀가 잠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줬다.
‘드림캐쳐를 선물해주신 걸 보면 마티어스님도 아시는 것 같고…….’
함께 마법 공부를 하다 잠들었을 때 악몽을 꾼 적이 있어서 히스도 대강 눈치는 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루시안은…….
“어?”
아리엘에게 순간 깨달음이 찾아왔다.
왜 루시안만 그녀가 악몽을 꾼다는 것을 몰랐는지.
“루시안이 집에 있을 땐 꾼 적이 없어요.”
그녀가 루시안과 같이 지낸 시간이 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봄에 2주, 가을에 한 달 함께 있었던 기간 동안 아리엘은 단 한 번도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녀는 신기해하며 배시시 웃었다.
“어쩌면 루시안이 나한테 수호신 같은 존재인가 봐요.”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건 납득 못하겠는데.”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아리엘은 확신을 품었다.
과거, 그가 처음 만난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줄 때부터 루시안은 그녀에게 그런 존재였다.
아리엘이 맞다는 표정으로 초롱초롱 그를 바라보자 루시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뭘 보고 믿는 건지.”
그가 괘씸하다는 듯 아리엘의 양 뺨을 눌러 금붕어처럼 만들었다. 부부거리는 그녀를 감상하던 그가 물었다.
“엄마 꿈은? 여전히 꾸나?”
놔줘야 얘기하죠……. 아리엘이 눈빛으로 말하자 루시안이 손을 놓아주었다.
아리엘은 뺨을 어루만진 후에 대답했다.
“요즘은 잘 안 꿔요.”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져서일까?
요즘은 꿈에 엄마가 잘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더라도 예전처럼 선명한 형상이 아니라 희미하게 나타났다.
그 대신 기분 좋은 꿈을 자주 꾸게 됐다.
체리 꼭지를 따는 수잔 옆에서 체리를 받아먹는 꿈.
하녀들과 분수대에서 장난을 치는 꿈.
마티어스가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다이아나나 세실과 함께 산더미같이 쌓인 케이크를 먹는 꿈.
매해 생일마다 울며 부르던 엄마가 없어도, 이제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줄 사람들이 있다.
아리엘은 새삼 루시안 하나로부터 바뀐 그녀의 삶을 느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한 그를 보고 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루시안도…… 기억 못하는 거죠? 어머니.”
그가 무감정하게 대답했다.
“난 그런 거 없어.”
“어? 하지만 분명, 대공비님이 있었다고…… 그분이 어머니 아니에요?”
그가 붉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맞지만, 아니지.”
“……?”
“이제 자.”
루시안이 아리엘의 이불을 움켜잡아 턱까지 올려주었다.
“안 졸린데…….”
“하품을 몇 번이나 한 지는 알고?”
쳇…….
아리엘은 졸리지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재잘재잘 떠들었다.
“루시안, 루시안. 저번에 히스 이동시킨 건 어떻게 한 거예요?”
“마법사들도 그렇게 하지 않나?”
“텔레포트가 아니라 공간 전이술이었잖아요. 그건 엄청 뛰어난 마법사들 아니고서는 못하는 건데.”
루시안이 위압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이해하려고 들지 마. 난 원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네.”
아리엘은 이 집에서 이상한 것을 봤을 때 언제나 그래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것도 라카트옐의 피 때문인가 봐.’
하암. 하품이 연거푸 나왔다.
루시안이 자연스럽게 을러댔다.
“자라니까.”
“하지만 마지막 날 밤인데…….”
“자.”
“네.”
아리엘은 시무룩하게 눈을 감았다.
옆에서 느껴지는 루시안의 기척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꼬맹이니까 자장가가 필요한가?”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말했다.
“네. 불러주세요.”
루시안이 혀를 차고 그녀의 눈 위를 쓸어 감게 만들었다.
“눈 감아.”
그의 뜨거운 손이 아리엘의 눈 위를 덮자 시야가 훨씬 깜깜해졌다.
아리엘의 가슴은 기대감으로 두근두근했다.
루시안이 노래 부르는 거 정말 상상이 안 가. 찻잔이랑 손편지만큼이나…….
그리고 그의 자장가가 들려왔다.
수잔이 익숙하게 불러주던 자장가가 아니었다.
어떤 악기보다 더 아름다운 음성이 아리엘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가사가 없는 허밍.
어쩐지 슬프고 어둡게 들리는 곡조.
뱃사람들을 파멸시켰다던 세이렌의 노래가 이런 거였을까?
‘더 듣고 싶은데…….’
머지않아 아리엘은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 * *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아리엘은 루시안의 출발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나 이제 맬 줄 알아요.”
아리엘은 루시안의 넥타이를 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셔츠 커프스 단추를 잠그던 그가 흘끗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안 해.”
“…….”
아리엘은 넥타이를 쥐고 있던 손을 시무룩하게 떨어뜨렸다.
휴우, 괜히 연습했나 봐…….
그런데 나머지 옷을 다 입은 루시안이 불쑥 그녀 앞에 다가왔다.
아리엘 근처 의자에 걸터앉으며 눈썹을 치켜세운다.
“한 번 해보든가.”
변덕쟁이같으니.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하지만 아리엘의 입꼬리는 샐쪽하니 올라갔다.
이번에야말로 솜씨를 발휘할 수 있게 됐어.
그녀는 낑낑대며 교복 넥타이를 둘러준 뒤 배운 대로 매듭을 지었다.
예쁘게 묶고 촘촘하게 당겨 고정시킨 다음 뿌듯하게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짠! 봤죠. 나 이제 잘하죠.
그가 픽 웃었다.
“알렌이 기절하겠군.”
그의 말대로, 루시안을 데리러 들어온 알렌은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있는 루시안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대, 대, 대공자님…… 목에…….”
“나가.”
알렌이 들어온 그대로 뒷걸음질을 쳐 나갔다. 시선은 루시안의 목에 고정한 채였다.
아리엘은 마차까지 루시안을 배웅하러 나갔다.
사용인들이 마차에 짐을 싣는 동안 그녀는 열심히 떴던 핸드 워머를 선물했다.
“루시안, 이거요.”
그녀는 그의 손에 워머가 든 양가죽 주머니를 떠넘겼다.
루시안이 ‘뭐야?’ 하며 곧장 풀어보려고 해서 얼른 막았다.
“안 돼요! 가서 풀어보세요.”
“싫어.”
단칼에 그녀의 간청을 잘라낸 그가 선물을 풀었다.
아리엘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으으, 창피한데…….”
사실 잘 짠 핸드 워머는 아니었다.
오른쪽은 괜찮은데, 왼쪽 것의 크기가 조금 작았다.
짜는 도중에 코가 하나 빠졌는데 고칠 시간이 없어서 급히 마무리한 탓이었다.
선물을 확인하고 쿡쿡 웃은 루시안이 말했다.
“이것도 아내 노릇의 일종인가?”
“……네.”
그가 선물을 움켜쥐고 그 위에 입술을 묻는 시늉을 했다.
소년이라기엔 지나친 색기가 흘러나왔다.
“뭐가 됐든. 내 거라니까 마음에 드는군.”
다행이다. 아리엘은 휴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물하기라는 큰일을 해치운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루시안에게 물었다.
“저, 루시안. 다음엔 언제 돌아와요?”
그녀는 나름 기대하고 있었다.
결혼식 다음 날 그가 떠날 때, 1년 후에 돌아오겠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때로부터 1년이면, 세달 후 1월에 볼 수 있겠네!
하지만 루시안의 대답은 달랐다.
“다음 해 9월에. 일이 좀 복잡해져서.”
아리엘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1월엔 못 와요?”
“그래.”
“…….”
그럼 내 생일은 같이 못 보내겠구나. 아리엘은 왠지 아쉬워서 고개를 떨구었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짐 다 실었다.”
그녀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기색인 걸 알아챈 루시안이 아리엘의 코를 잡으며 말했다.
“이번엔 울지 마.”
아리엘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꽁알꽁알 말대꾸를 했다.
“안 울거든요. 루시안 가자마자 친구들 다 불러서 오래오래 놀 거거든요.”
그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방문 금지 명령을 내리고 가길 바라는 거야?”
“윽…….”
루시안이 아리엘의 조그만 코를 놓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명령.”
“네?”
“나 말고 다른 것들에겐 좀 더 못된 사람이 되도록 해.”
으응? 못된 사람이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받은 아리엘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넌 너무 착해 빠져서 탈이니까.”
그녀의 반대편 뺨에도 마저 키스한 그가 굽혔던 몸을 폈다.
“간다.”
루시안이 마차에 오르자 준비를 마친 행렬이 대공가를 떠났다.
아리엘은 얼결에 손을 흔들며 그를 전송했다.
마차가 멀찍이 바깥 대문까지 가는 걸 본 그녀는 스르르 손을 내렸다.
‘못된 사람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리엘은 작은 주먹을 꼬옥 쥐었다.
‘이 집을 바꾸라고 했던 루시안의 명령은 계속 지켜볼게요.’
루시안이 없는 동안 마티어스님과의 문제를 알아내서, 두 사람 사이를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고민해볼 거예요.
멀어지는 루시안을 보며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한편, 마차를 타고 가던 루시안은 흰 목을 뒤로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는 어제부터 억눌러놓은 기세를 느슨히 풀어헤쳤다.
아리엘에게 그의 기세가 치명적이진 않다지만, 어리고 약한 그녀를 제 방에서 재우기 위해서는 힘을 적당히 가둬놓을 필요가 있었다.
답답한 듯 조각 같은 얼굴을 찌푸린 그가 습관처럼 손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려다가 멈췄다.
이깟 천 쪼가리를 꼬물꼬물 공들여 매던 그의 꼬마 아내가 떠올라서다.
“……못 말리겠군.”
루시안은 넥타이를 풀려던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마음먹었다.
아주 오랜만에, 인내심이란 것을 발휘해보기로.
* * *
루시안이 아카데미로 돌아간 뒤 아리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녀가 요즘 마티어스와 루시안 주변 사람에게 은근슬쩍 둘 사이에 대해 물어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이가 나쁜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돌이켜보면 자신이 여기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가족에 대해 너무 몰랐던 감이 있었다.
마티어스와 루시안 부자 사이가 나쁘다는 것도 히스를 통해 처음 들었고, 아무에게도 그 이유를 물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화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주제넘을 만큼 아픈 사정이 있을 수도 있어.’
제 가족에 관해 말 못 할 사정을 가지고 있는 아리엘은 이 일에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물어보기로 했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신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첫 번째는 하녀장 수잔이었다.
“수잔,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은 왜 서로 사이가 안 좋나요?”
아리엘의 목욕 시중을 들어주던 수잔이 동작을 멈추고 대리석 욕조의 조각상 위에 팔을 얹었다.
“우리 아기 마님께서 그게 궁금해지셨군요.”
수잔의 목소리는 따스한 물처럼 너그러웠지만 조금 슬프게 들렸다.
수잔이 다시 손을 움직여 목욕물에 라벤더 오일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사실은…… 저도 잘 모른답니다. 두 분 주인님들 사이는 워낙 오래전부터 좋지 않았어서요.”
“언제부터였는데요?”
잠시 침묵한 수잔이 한숨 쉬듯 대답했다.
“대공자님은, 목도 못 가누는 아기 때부터 대공님을 꺼리셨어요.”
짧은 순간, 수잔은 부쩍 나이 든 것처럼 보였다.
“아기들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어른들은 모르지요. 대공자님께서 이유를 누군가에게 말씀해주신 일도 없고요.”
“14년 동안 한 번도요?”
“네. 슬프지만 한 번도요.”
“…….”
아리엘은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루시안을 봐 온 수잔도 모른다면 도대체 누가 안단 말일까?
아리엘의 심각한 얼굴을 본 수잔이 작은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춰주었다.
서글픈 표정은 어느새 가신 채였다.
“그래서 전 아기 마님이 오신 게 참 감사하고 행복하답니다. 아리엘님이 오신 후부터는 두 분이 전보다 서로를 덜 미워하시게 된 것 같거든요.”
정말인가요?
그 전의 두 사람을 본 적이 없는 아리엘로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수잔의 말이라면 진짜일 것이다. 진짜였으면 좋겠는데…….
그때 수잔이 물속에 손을 넣어, 아리엘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간지럽혔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리엘은 비명을 지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꺅, 수잔!”
수잔이 어린애 겁주듯 말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대머리 되실지도 몰라요. 아기 마님.”
“대, 대머리요……?”
“머리카락이 숭숭 빠진다고요.”
무서운 얘기하듯 말한 수잔이 따뜻하고 향긋한 목욕물을 아리엘의 어깨에 끼얹어주었다.
복잡한 생각이 다 잊혀지는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럼 마저 씻고 나갈까요?”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리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잔에게 질문했던 일은 이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리엘은 재무관 달튼을 찾아갔다.
달튼은 늘 마티어스 옆을 지키니까 뭔가를 알 수도 있었다.
아리엘이 오랜만에 찾아가자 달튼은 또 책상 서랍에서 과자를 산더미처럼 꺼내서 그녀 앞에 쌓아주었다.
아리엘은 과자의 유혹을 꾹 참으며 물었다.
“달튼. 혹시 마티어스님과 루시안 사이가 나쁜 이유를 알아요?”
“예?”
예상 밖의 질문이었는지 달튼이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나긴 몇 초가 지난 뒤 그가 깨달은 듯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 그렇군요. 아기 마님께서는 그런 의문을 품으실 만도 합니다. 저희로서는 너무 익숙해진 일이라, 아기 마님께서 궁금해하실 거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무려 14년이었다.
루시안은 마티어스를 줄곧 혐오했고, 마티어스는 그런 루시안을 내버려 두며 그들 사이 관계를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저택의 모든 사람들은 10년 넘게 변하지 않는 두 주인에게 익숙해졌다.
그들은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사용인 주제에 주인들 싸움에 끼어들 수도 없으니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두 분 주인님은 분명 전생에 철천지원수였을 거야.’
왜, 전생에 원수면 부모 자식으로 태어난다하지 않아?
아무튼, 두 사람은 곁에서 보기에 좀 기묘한 부자 관계였다.
갓난아기 때부터 아버지를 거부하는 루시안만 기묘한 건 아니었다.
마티어스는 루시안을 후계자로 인정하고 라카트옐 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주었지만 내치다시피 무심했다.
물론 달튼도 그 이유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재무관 달튼에게서도 그럴듯한 답을 듣지 못한 아리엘은 풀이 죽은 채 집무실을 나왔다.
손에는 과자가 한가득 들린 채였다.
마침 지나던 노집사 알렌이 아리엘이 아슬아슬 들고 있는 과자 더미를 얼른 대신 받아들었다.
“이런. 마님. 사람을 시키시지 않고요.”
아리엘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알렌과 눈을 맞췄다.
“알렌?”
“예. 마님.”
그래, 맞아. 알렌이 남아있었지!
아리엘은 알렌 옆에 얼른 붙어섰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알렌. 내 방까지 잠깐 같이 걸을까요?”
“물론입니다, 마님.”
알렌이 정중하게 에스코트식으로 인사했다.
증손녀와 할아버지같은 모습의 두 사람은 천천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사실 달튼에게 뭘 좀 물어보고 나오는 길이에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게…….”
아리엘은 머뭇거렸다. 이 질문은 할 때마다 매번 용기가 필요했다.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이 사이가 나쁜 이유를요.”
알렌이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걸음을 멈춘 아리엘은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알렌은 그 답을 알고 있나요?”
평소 아리엘에게 매우 약한, 아니 온 세상에서 아리엘에게만 약한 이 엄격하고 진지한 노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그가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마님. 그건 그저 두 분 사이의 일일 뿐입니다. 걱정하실 부분도 아니고요.”
“……알고 있단 말이네요.”
알렌이 깊이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저는 라카트옐을 모시는 집사입니다. 라카트옐 간의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지요. 부디 용서하십시오.”
“…….”
아리엘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고, 알렌을 용서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알렌의 이런 반응은 조금 놀라웠다.
조심스럽지만 완연하게 선을 긋는 느낌.
‘알렌이 이럴 때는 라카트옐의 정체와 관련 있는 일뿐이었는데?’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이것도 정체와 연관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정체를 알아야 해결 방법을 알 수 있는 건가?
그녀는 아직도 허리를 굽히고 있는 알렌을 서둘러 일으켰다.
“알렌, 괜찮아요.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면 억지로 캐낼 생각은 없어요.”
알렌이 죄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리엘은 방긋 웃고 살며시 그의 팔짱을 꼈다.
“방까지는 다른 얘기하면서 가요, 우리.”
눈에 띄게 조용해진 알렌을 보며 아리엘은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네. 알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 * *
아리엘은 한 달간 소홀했던 마법 공부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 히스와 따로 알아보던 것에 대해서도 다시 조사를 시작했다.
라카트옐 저택 숲에서 발견한 와이번 뼈의 비밀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아리엘과 히스는 이때까지 알아낸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그러니까, 뼈가 묻혀있었던 곳의 예전 땅 주인이 누구였다고?”
“라카트옐.”
“언제부터?”
“몇 천 년 전부터.”
“히엑.”
히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놀랐다.
“그럼 여기가 몇천 년 동안 라카트옐 땅이었단 말이야?”
“응. 책에서 봤는데, 제국의 수도를 정할 때 라카트옐의 집터 주변으로 정했대.”
실제 역사책에 그렇게 나와있었다.
제국의 시조 알리곤 왕이 수도를 정할 때 라카트옐 저택과 왕궁은 멀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서 수도가 이곳에 정해졌다고.
히스가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가 말했다.
“그럼 와이번 뼈를 묻어놓은 건 대공가에 관련된 사람이었다는 거네.”
“……응.”
아리엘은 라카트옐 남자들의 사고방식이라면 그런 짓을 벌였을 수도 있다고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발견된 게 다름 아닌 와이번의 뼈인 만큼, 아니라는 쪽에 더 가능성을 두고 있었다.
그래. 암만 라카트옐이라도 용 마수의 뼈를 집 마당에 묻어놓을 리가 없잖아.
“히스. 사람의 힘으로는 와이번을 잡을 수 없다고 했지?”
“그래. 책에서 확실히 봤다고.”
히스는 와이번을 다룬 몇 안 되는 고서를 샅샅이 뒤졌었다.
“와이번의 천적, 와이번을 죽일 수 있는 존재를 찾았는데…… 인간은 없어. 인간의 마법이나 무력으로는 용 계열의 마수를 잡을 수 없다더라.”
“천적은 뭔데……?”
“상위 괴물이라고만 나와 있었어. 더 이상 정보가 없던데.”
아리엘은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흐음…… 브루노어에게 물어봐야 하나?”
제 할아버지의 이름을 들은 히스가 펄쩍 뛰었다.
“안 돼! 할배는 우리가 이런 거 조사하고 있다는 거 알면 혼낼걸.”
“왜?”
“나한테 맨날 이 집에 대해 알려고 들지 말라고 한단 말이야.”
“브루노어가?”
아리엘은 금시초문이었다. 불쑥 이런 의문이 들었다.
‘혹시 브루노어도 이 집 비밀을 아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그는 마티어스와 루시안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도 알지 모른다.
아리엘은 브루노어의 이름을 조심스레 마음속에 새겨넣었다.
히스가 허탈한 듯이 책상 위에 엎드렸다.
“와이번이 라카트옐과 엮여있다니…….”
그가 중얼거렸다.
“간만에 흥미로운 걸 찾았는데 여기서 막혀버렸네.”
엎드린 채 히스가 아리엘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너도 라카트옐이니까 네가 정해. 계속 파볼 거면 파보고, 아님 말고.”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 좀 해볼게.”
“그래.”
히스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갈색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고마워. 히스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알아내지 못했을 거야.”
“너, 너 때문에 한 거 아니거든!”
히스가 발끈했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손길이 싫지만은 않은 듯 떨쳐내지 않았다.
“내 흥미로 한 거고, 또, 둘이면 더 나으니까 그런 거라고!”
“알았어.”
“너, 오해하지 마라. 착각도 하지 마.”
“알았다니까.”
아리엘은 큭큭 웃고 히스의 보드라운 머릿결을 계속 쓰다듬었다.
히스는 언제 발끈했냐는 듯 금세 수그러들어서 가만히 쓰다듬을 받고 있었다.
‘히스는 위협하는 체하는 작은 강아지같아.’
아리엘의 손길을 받고 있는 소년의 귓불이 새빨개진 건, 소년만 아는 비밀이었을 것이다.
* * *
며칠 생각해보던 아리엘은 히스를 빼놓고 브루노어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순진한 얼굴로 와이번의 천적에 대해 물었다.
“도서관 책에는 없어서요.”
와이번의 독은 연금술에 사용되는 독이니까 이 정도 질문은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질문을 들은 브루노어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꼭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리엘은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역시, 히스를 두고 오길 잘했어.’
잘못해서 들키면 혼나는 쪽은 그녀가 아니라 히스니까 조심해야 했다.
아리엘의 속내를 살피듯 들여다보던 브루노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더 알고 싶으시면 기록고에 가보시지요, 아리엘님.”
“기록고요?”
“예. 왕관 인장이 찍힌 열쇠를 갖고 있지 않으십니까?”
“아…….”
마티어스에게 받은 네 개의 열쇠 중 하나.
그중에는 기록고 열쇠도 있었다.
브루노어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거기에 더 많은 정보가 있을 겁니다. 고대 금서나 흑마법에 관련된,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 마수에 대한 책도 있을 것 같군요.”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라카트옐 분들은 대대로 수집욕이 있으셔서요.”
아리엘은 집안 그득한 사치품들이나 휘황찬란한 보물고, 별채 창고 등을 떠올렸다.
어쩜, 책도 모아놨나 봐. 살며시 웃음이 났다.
“그런 것 같네요.”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마워요, 브루노어. 참고할게요.”
“명색이 스승인데 당연하지요.”
아리엘은 타박타박 브루노어의 방을 빠져 나왔다.
‘그럼 기록고에 가봐야 하나?’
하지만 거기에는 라카트옐의 비밀들도 있을 텐데.
마티어스가 무슨 생각으로 열쇠를 몽땅 맡긴 것인지 아리엘은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비밀을 허락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저 안주인으로서 관리를 하라는 뜻인지.
‘조금만 더 고민해보자.’
아리엘은 일단 이 일을 보류해두기로 했다.
지금은 다른 할 일도 쌓여있었다.
* * *
아리엘은 정보를 의뢰할 정보 길드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루시안이 녹스 남작을 보호해주기로 약속했지만, 아리엘은 과거에 악당 무리가 왜 녹스 남작을 제거했는지 그 이유를 아직 알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 일까지 루시안과 마티어스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내 스스로 찾아내고 싶어.’
그래서 아리엘은 가문의 힘을 빌리는 대신 정보 길드를 이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직접 의뢰를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리엘이 외출하면 그녀를 늘 호위해주는 헥터와 랄프도 따라올 것이었다.
아리엘은 이 일을 비밀에 부치고 싶었기 때문에 호위를 데려가는 건 안 될 말이었다.
라카트옐 가에 충성하는 기사들 입장에선 루시안에게 아리엘의 행동을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마티어스를 찾아갔다.
“마티어스님?”
아리엘은 살짝 열린 문틈으로 작은 머리통을 쏙 집어넣어서 안을 살폈다.
그런데 오늘따라 마티어스가 조금 바빠 보였다.
늘 그 혼자거나 기껏해야 달튼만 있던 마티어스의 집무실 안에, 못 보던 행정관들이 여러 명 있었다.
마티어스도 평소와 달리 긴 흑발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려 묶은 채 서류뭉치를 넘기는 중이었다.
금욕적인 느낌의 조각 같은 미남이 일하는 모습에는 끼어들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방해되려나?’
하지만 그 순간 마티어스와 눈이 딱 마주쳐서 도망칠 기회를 잃고 말았다.
마티어스가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안에 있던 대여섯 명의 행정관들이 마티어스의 움직임에 깜짝 놀라며 아리엘 쪽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마티어스의 무서움을 참고 긴장하며 일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에게 다가온 마티어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왜 문 앞에서 그러고 있지? 들어와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바빠 보이셔서요.”
“…….”
그의 눈이 조용히 행정관들을 향했다. 다섯 사람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다들 꺼져.”
행정관들은 일제히 입을 합죽이처럼 다물고 뒷걸음으로 줄행랑을 쳤다.
어지간히도 공포스러웠던 듯했다.
아리엘을 안으로 들인 마티어스가 그녀를 들어 올려 높은 소파에 앉혀주었다.
“무슨 일이지?”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책상을 둘러보았다. 서류 더미가 가득 올려져 있었다.
“바쁘신 거 아니에요?”
“그다지. 네 얘기를 들을 만큼은 여유롭다.”
아리엘은 배시시 웃었다. 무뚝뚝한 그의 말 속에 숨은 자상함에 기분이 간질간질해졌다.
“사실 허락해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서요.”
아리엘은 외출할 건데 호위를 놓고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대공자비라는 것이 들키지 않도록 망토로 신분을 숨기고 가겠다는 것도.
마티어스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위험할 텐데.”
“그동안 저도 마법을 많이 익혔어요. 브루노어가 준 보호 마법 귀걸이도 있고요.”
“루시안 녀석이 공격 마법을 금했다고 들었다.”
“원소 마법으로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는 걸요, 마티어스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리엘은 이제 불, 물, 바람, 흙 원소들을 꽤나 잘 다룰 수 있었다.
메테오나 블리자드, 인페르노 같은 고위 마법은 아직 어려워도, 원소 마법으로 자신을 지킬 정도는 되었다.
흙먼지를 일으켜 상대를 교란하고 도망치거나, 불로 작은 장벽을 만들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거나, 에어 쉴드로 공격을 막을 수도 있다.
그녀가 설명했지만 마티어스는 쉽게 허락해줄 기미가 아니었다.
“마법사는 물리 공격에 약하지. 게다가 너는 작고 어리다.”
그가 퍽 단호하게 말했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내가 해주마.”
아리엘은 그녀를 보호하려고 하는 마티어스에게 감동을 받았지만, 이번 일은 스스로 하고 싶었다.
아리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에요.”
“…….”
마티어스는 혼을 낼 것처럼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리엘은 어깨를 움츠리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침묵하던 그가 말없이 돌아서서 달튼을 불렀다.
옆 방에 있던 달튼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명을 받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공 각하.”
“금고에서 '페룬의 눈들'을 가져와.”
“예.”
달튼은 빠르게 사라졌다가 금세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보석함이 들려있었다.
마티어스는 그것을 받아 들어 열고, 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어 아리엘에게 내밀었다.
“자. 받아라. 이걸 걸고 나가면 혼자 가는 걸 허락 하지.”
혼날 줄로만 알았던 아리엘의 심장은 콩닥콩닥했다.
“이게…… 뭔가요?”
옆에 서 있던 달튼이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이건 마도구입니다. 아기 마님.”
“마도구요?”
“예. 일종의 호출기 같은 건데, 소유자가 위험에 처했을 때 펜던트를 누르면 마법진이 발동합니다.”
아리엘은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요?”
“마법진이 이 마도구의 다른 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소환해주지요.”
달튼이 보석함 안에 있는 똑같은 모양의 목걸이들을 가리켰다.
“고대에 아홉 마법사 형제가 서로를 부르기 위해 만든 마도구라고 합니다.”
“와아…….”
마티어스가 목걸이를 아리엘의 목에 걸어주었다.
“다른 쌍은 헥터와 랄프에게 주마. 네가 미처 작동하지 못한다고 해도, 너에게 위험이 생기면 알아서 작동할 거다.”
아리엘은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져보았다.
목걸이는 심플한 은 줄 끝에 둥근 모양의 묘안석이 끼워진 펜던트가 달려있었다.
마도구는 지난 생에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마력이 강한 고대 마도구는 처음이었다.
마티어스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막기보다는 안전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준 것이다.
목걸이를 준 마티어스가 무뚝뚝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위험한 짓은 하지 말 거라.”
“네!”
아리엘은 폴짝 뛰어 마티어스의 허리를 껴안았다.
“감사해요, 마티어스님!”
마티어스가 굳은 듯하다가 조심스레 그녀의 등을 토닥했다.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비쳤다.
“……그래.”
* * *
아리엘은 얼굴을 모두 가릴 만큼 큰 후드가 달린 긴 망토를 입고, 안에는 귀족 영애들이 흔히 입는 모양의 나들이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외출할 때 마차 대신 말을 탔다.
마티어스의 권유 때문이었다.
마티어스는 목걸이만으로는 안심이 안 됐는지 말을 권했다.
“루시안 말을 데려가거라.”
“네?”
아리엘은 승마에 서툴렀다.
아직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데다, 루시안과 함께 타 본 이후로 혼자 말을 타본 적이 없었다.
“루시안 녀석이 널 위해서 제 말을 놓고 갔더군.”
“아, 네…….”
아리엘은 하마터면 자신을 죽일 뻔하고, 자신 덕에 목숨을 건진 흑마 반카를 떠올렸다.
루시안이 아카데미로 떠난 뒤, 아리엘은 그가 자신을 위해 자기 말을 두고 갔다는 걸 전해 들었다.
승마 연습을 하라는 뜻이었던 것 같지만 요즘 바빠서 연습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루시안과 피크닉에 갔던 기억 때문에 몇 번 찾아갔다가 아리엘은 반카와 듬뿍 정이 들었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놈이 널 잘 따른다지.”
“네. 하지만 타 본 적은 한 번뿐이에요.”
“그것이라면 여차했을 때 네 주변 것들을 때려눕히고 널 데리고 도망칠 능력이 있으니 괜찮을 거다.”
엇, 반카가 그 정도인가요?!
날뛰는 반카 모습을 한 번 밖에 못 본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리엘은 몰랐다.
사실 흑마 반카가 루시안을 만나기 전, 폭력적인 뒷발굽질로 유명한 말이었음을.
물론 그 뿐 아니라 제국의 말 중 가장 빠른 속도와 길들이기만 하면 주인에게 완벽히 맞출 수 있는 능력으로도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아리엘이 우려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두 번째 승마는 어렵지 않았다.
아리엘은 여전히 서툴렀지만 반카가 매우 상냥하고 관대하게 그녀를 태우고 움직여준 덕이었다.
아리엘은 고삐를 잡고 몇 번 움직여보다가 이내 감을 잡았다.
“그럼 출발할까, 반카?”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 조금은 든든한 기분이었다.
* * *
오늘 아리엘이 찾아갈 곳은 제국 최대의 비밀조직 정보 길드, 나잇 워커였다.
과거 그녀를 샀던 악당 '그'는 나잇 워커를 자주 이용했다.
나잇 워커는 어떤 정보 길드보다 비밀 보장이 확실하고 일처리가 뛰어났다.
사람의 신상 정보를 의뢰하면 정확히 알아온다.
지방 영지의 비리 조사를 완벽히 해낸다.
귀족들의 성적 취향, 사교계의 비밀스러운 인맥, 추문…….
제국 전체에 정보원을 가지고 있는 나잇 워커가 알아내지 못하는 건 없었다.
심지어 정보부를 가진 황실도 가끔은 나잇 워커에 의뢰를 넣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들은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직원들은 자신이 나잇 워커를 위해 일하는 것을 알지만, 다른 조직원이나 수뇌부는 알지 못하는 식이다.
그래서 나잇 워커의 우두머리는 베일에 싸여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들의 우두머리를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는 의뢰를 위해 여러 번 그곳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있고 난 뒤에 우두머리와 직접 얼굴을 맞대는 기회가 있었다.
‘원래라면 이 지역의 하위 조직원을 찾아서 의뢰를 넣어야 하지.’
그 경우에는 의뢰가 오래 걸린다.
고위 귀족들은 이미 안면을 터놓은 높은 단계의 조직원에게 청탁을 넣었다.
하지만 오늘 아리엘은 그들의 아지트로 직접 찾아가 우두머리를 만날 생각이었다.
대공자비라는 신분을 사용하지 않고 빠르게 의뢰를 넣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 * *
수도의 번화한 거리 안쪽으로 복잡하게 들어가면 나잇 워커의 비밀 본거지가 있다.
그곳은 겉으로 보기엔 그냥 평범한 잡화점으로 보이지만, 정보원들이 정보를 물고 드나드는 창구였다.
잡화점 내부에는 숨겨진 거대한 공간이 있는데, 우두머리는 그곳에 머물며 쓸만한 정보를 검토한다.
그 숨겨진 공간까지 안내받으려면 특별한 암호가 필요했다.
아리엘은 과거의 기억에 의존해 꼬불꼬불한 수도 번화가 안을 찾아 들어갔다.
‘반카를 데려오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조그만 몸집의 그녀가 이렇게 북적북적한 거리를 걸으면 여기저기 치이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늠름한 반카를 타고 있는 덕에 사람들은 아리엘을 자연스레 피해 주었다.
마침내 아리엘은 나잇 워커의 비밀 아지트에 도착했다.
정말로 평범해 보이는 가게였다.
“다 왔어, 반카.”
반카가 아리엘이 내릴 수 있도록 네 다리를 굽혀주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내려서 말을 가게 앞에 묶었다.
반카를 훔치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묶은 밧줄에 살짝 혼동 마법을 걸어놓았다.
물론 반카 성격에 누군가 흑심을 갖고 접근한다면 대번에 뒷발로 차버리겠지만 아리엘은 아직 그걸 몰랐다.
나무문에 달린 종을 딸랑 울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 좋게 생긴 잡화점 주인이 그녀를 맞았다.
“어서 옵쇼! 뭘 드릴까요?”
아리엘은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가게 안에는 지금 다른 손님이 없었다.
암호를 말할 기회였다.
잡화점 주인이 망토를 푹 뒤집어쓴 그녀를 빠르게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조그만 체구가 위협적이지 않은데도 수상쩍게 느끼는 것이다.
“필요하신 게 뭔지 말씀해주시면 찾아드립지요.”
그녀는 앳된 목소리를 최대한 낮게 깔며 말했다.
“청금석 날개, 달의 뿔, 어둠의 장막. 이 셋을 구할 수 있나?”
“예?”
잡화점 주인은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저희 가게에 그런 건 없는데요, 손님.”
‘여기까지는 똑같네.’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태연하게 다음 암호를 말했다.
“그럼 붉은 그림자 베일은?”
“…….”
잡화점 주인의 낯빛이 천천히 바뀌었다.
그는 사람 좋은 주인장의 가면을 벗고 날카로운 눈을 번뜩였다.
“누구냐.”
“내가 찾는 물건은 안에 있는 모양인데.”
“네 신분과 이름을 밝혀라……!”
“날 너희 길드 마스터에게 안내해.”
이를 악문 주인이 가게 문을 잠근 뒤,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쪽지를 쥐여 보냈다.
곧 가게 안쪽 창고에서 복면을 쓴 사내 하나가 나왔다.
“마스터가 보자고 하신다. 그분이 널 못 알아보신다면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거다.”
아리엘은 묵묵히 그를 따랐다.
그녀가 알고 있는, 직접 우두머리와 접선할 수 있는 암호는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는 암호였다.
과거에도 그랬으니 현재도 비슷할 것이다.
나잇 워커의 우두머리는 자신이 암호를 알려준 사람이 아닌 아리엘이 알고 있는 것이 의아할 테지만.
아리엘은 안쪽 아지트로 안내받았다.
조명이 어두운 복도는 비밀조직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조용하고 민첩했다.
가장 안쪽 방에 들어가자, 자욱한 담배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폐쇄적이고 퇴폐적인 느낌이 풍기는 방이었다.
방 가운데에 놓인 책상.
그리고 그 옆의 커다란 팔걸이 의자에는 풍채 좋은 사내가 앉아있었다.
우두머리다.
어린 소녀 시종이 사내의 시중을 맡아 잔에 갈색빛 액체를 따랐다.
아리엘을 데리고 들어온 복면 사내가 말했다.
“이 자입니다.”
풍채좋은 사내가 나가보라는 턱짓을 했다.
복면 사내는 깍듯이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독한 술로 보이는 갈색 액체를 한 모금 마신 사내가 아리엘에게 말을 걸었다.
“후드를 벗어라.”
아리엘은 후드를 젖혀 얼굴을 보였다.
그녀를 신중히 들여다보던 사내가 얼굴을 찌푸렸다.
“넌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데.”
그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단검을 느리게 빼들었다.
“너를 보낸 주인의 이름과 신분을 밝히든, 여기서 죽든. 선택해라.”
아리엘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난 주인이 없어. 내가 찾아온 거야.”
“그렇다면 암호는 어떻게 알았지?”
우두머리 사내가 칼을 든 채 아리엘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검이 아리엘의 목으로 겨누어졌다.
“네 신분을 밝혀.”
“…….”
아리엘은 목에 걸린 호출 마도구를 손안에 꼭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나왔다.
“내 신분을 알아내는 건 너희 몫이지.”
그리고 그녀는 뒤에서 조용히 사내의 술잔을 채우는 소녀 시종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 그런가, 아딘의 딸 카디나?”
두건을 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녀가 고개를 들고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아리엘 바로 앞의 우두머리 사내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감히 나잇 워커의 우두머리인 날 무시하고 벙어리 하녀 따위에게 말을 걸어?”
그의 칼이 바로 목 옆까지 들어왔다.
날카로운 살기가 목덜미를 오싹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소녀 시종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진짜 우두머리는 저쪽이잖아.”
손안에 쥔 마도구가 아리엘의 위험을 감지하고 흥분으로 떠는 것이 느껴졌다.
여차하면 마도구는 바로 헥터와 랄프를 소환해낼 것이다.
그녀는 숨 막힐 것 같은 살기와 방 안을 가득 채운 팽팽한 긴장감을 견디며 소녀 시종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푸하하하!”
갑자기 두건을 쓴 소녀 시종이 허리를 꺾으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녀 시종이 두건을 휙 벗어 던지자 그 안에서 여름의 태양 같은 오렌지빛의 번개 머리가 튀어나왔다.
까무잡잡한 얼굴로 씨익 웃은 소녀가 말했다.
“너, 담이 좀 큰 애구나?”
드디어 만났다.
나잇 워커의 진짜 우두머리.
길드 마스터 '카디나 아딘'을.
* * *
올해 열여섯 살인 카디나 아딘의 출생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딘 가문의 딸이었다.
아딘 가문은 가문이되, 가문이 아닌 특이한 집단이었다.
아딘 가문의 일원들은 서로 혈연관계가 아니었다.
아딘 가 사람들은 재능있는 어린아이들을 데려와 혹독하게 가르치며 길렀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을 통과한 아이들에게만 '딸'과 '아들'의 칭호를 주었다.
아딘의 딸 또는 아딘의 아들이 된 아이들은 세상으로 나가 뛰어난 상인이 되기도 하고, 용병이나 암살자가 되기도 하고, 발명가와 학자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무얼 하고 살아도 상관없지만 아딘 가문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가문을 위해 딸과 아들 노릇을 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아딘 가문에서는 마법 인장을 아이들의 몸에 찍었다.
인장이 새겨진 한, 가문을 배반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중의 한 명이었던 고아 소녀 카디나가 재능을 인정받은 일은 이것이었다.
백년 전 아딘 가문의 딸이 만든 정보 길드, ‘나잇 워커’를 잇는 것.
고작 열여섯 살에 중책을 맡을 정도로 카디나의 능력은 뛰어났다.
완벽한 일처리와 더불어,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성격은 부하들을 다루는 데에 잘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카디나에게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겨우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조그만 꼬마 여자애가 찾아와 예사롭지 않은 행동으로 그녀를 당황시키는 일 말이다.
카디나는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 안을 휘휘 손으로 저었다.
“야. 창문 열어. 냄새 좀 빠지게. 나 참, 무게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
방금까지 아리엘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풍채좋은 사내가 검을 치우고 눈짓했다.
“대장.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창문 죄다 열고 이 친구는 내 방으로 들여. 먹을 것 좀 가져오고. 아이씨, 아까 따른 비싼 술 너 혼자 다 처먹었냐?!”
“진짜처럼 하라고 하셨잖습니까.”
아리엘은 순식간에 상관과 부하가 바뀐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단 일이 잘 풀린 것 같기는 했다. 길드 마스터를 만났으니.
그녀는 또 다른 방으로 안내받았다.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온 카디나는 안고 온 빵 바구니를 아리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빵 하나를 집어 들고 아무렇게나 먹으며 말을 걸었다.
“너 혼자 왔던데? 웬 험악한 까만 말이랑.”
“응. 혼자 왔어.”
“너같이 쪼그맣고 깜찍한 애가 혼자 다니면 나쁜 사람이 잡아간다고 부모님이 말 안 해주시든?”
“반카가 있으니까 괜찮아.”
“그으래……?”
말꼬리를 끌며 능글맞게 씩 웃은 카디나가 말했다.
“지금 나한테 죽으면 어떡하려고? 주인이 보낸 것도 아니라면서.”
아리엘은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눈앞에 있는 소녀는 언뜻 장난꾸러기 같지만, 엄연히 이 정보 길드의 수장이었다.
그냥 던지는 말 한마디도 호락호락하게 들어서는 안된다.
아리엘은 천천히 대답했다.
“못 죽일 거 알고 있어. 너희는 정보 길드지, 암살자들이 아니잖아. 내가 너희한테 필요한 정보를 가진 이상 죽일 수 없겠지.”
카디나가 다시 우렁우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어하는 반응이었다.
“네가 가진, 우리한테 필요한 정보가 뭔데?”
아리엘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난 이 아지트도 알고, 암호도 알고, 네 정체도 알아. 그런데 너희는 아직 내 이름조차 모르지. 나에 대해 알기 전까지는 살려뒀을 거잖아. 그리고 네 정체에 대해 아는 사람이 더 있는지도 궁금할 테고.”
“흐음…… 맞는 말이긴 하네.”
카디나는 진심으로 이 조그만 여자아이에게 감탄했다.
어린 게 제법이잖아.
소속 없으면 영입하고 싶을 정돈데?
그때 방문으로 누군가 들어와 카디나에게 쪽지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오렌지빛 머리의 카디나는 내용을 읽고 힐끗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카디나의 올리브색 눈동자가 이채를 띠고 빛났다.
“요즘 내 상상력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야.”
그녀는 벌떡 일어나 과장된 포즈로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아리엘라 라카트옐 '대공자비'님.”
‘빠르다.’
아리엘이 여기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10분 남짓이다.
그동안 나잇 워커는 정보를 모아 그녀의 신분을 밝혀냈다.
일처리는 역시 확실한 곳이었다.
아리엘의 그런 생각이 읽혔는지 카디나가 싱긋 웃었다.
“이런 일은 저희 같은 쥐새끼들에게 특화되어 있거든요.”
그녀는 대공자비라는 신분에 기죽은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인간은 자기보다 하찮은 것들 앞에서는 자기 본성을 숨기지 않지요. 그 하찮은 것들이 보고 들은 게 자기를 파멸시킬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게 저희가 하는 일이고요.”
카디나가 제 양손을 깍지끼며 맞잡았다.
“자. 그럼 얘기해보시죠. 라카트옐의 이름을 가지신 분이 이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아리엘은 차분히 대답했다.
“정보가 필요해서 찾아왔어.”
카디나는 쉽게 믿지 않았다.
“가문의 정보망이 있는데 어째서요? 라카트옐 가라면 뭐든 뼛속까지 해체해서 알아올 텐데요.”
아리엘은 조근조근 말했다.
“이건 개인적인 일이니까.”
“…….”
카디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럼, 라카트옐 가가 조사한 게 아닙니까?”
“뭘 말이야?”
“아지트 위치. 직통으로 내게 올라오는 암호. 이걸 아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예요. 특히 내가 길드 마스터인 걸 아는 사람은 다섯 명도 안 되죠.”
“…….”
아리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과거에 그녀가 나잇 워커와 거래를 할 때는 지금으로부터 4-5년이 지난 후였다.
그때는 카디나가 우두머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알아내는 게 쉬운 건 아니었지만.
과거 마법사 무리의 '그'는 우두머리인 카디나를 알아내기 위해 여러 사람을 죽였다.
그럼에도 운이 좋아 겨우 알아냈었다.
아리엘은 지금 대처를 잘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라카트옐에서 조사한 건 아니야.”
“그럼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리엘은 카디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극소수를 단속 잘해야겠네.”
카디나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
“흐음…… 쉬운 분은 아니시군요.”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카디나가 책상을 퉁 치며 말했다.
“좋습니다. 지불하실 능력만 있다면 의뢰를 받아들이죠. 알고 싶으신 정보가 뭡니까?”
아리엘은 심호흡을 하고 대답했다.
“녹스 남작. 그에 대해 알고 싶어.”
그녀가 녹스 남작의 이름을 말하자 카디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거 곤란한데요. 그 정보는 지금 계약 기간에 걸려있어서요.”
계약 기간.
아리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귀족들 중에서는 자기에 대한 정보를 팔지 못하도록 돈을 주고 계약을 걸어놓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계약은 해마다 더 비싸게 갱신해야하기 때문에 아주 부유한 가문 외에는 유지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기간이지?”
카디나가 의미심장하게 손가락 두 개를 펴들었다.
2개월일까? 아니면 2년?
“200년이요.”
“……?!”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디나가 몸을 뒤로 빼고 팔짱을 낀 뒤 아리엘을 마주 보았다.
“최근에 녹스 남작의 정보를 사 간 사람이 있거든요.”
아리엘의 등줄기에는 소름이 쫙 돋았다.
대체 누가……?
‘혹시 '그'가 벌써 움직이고 있는 건가?’
* * *
아리엘은 가까스로 놀란 티를 내지 않으며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카디나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의뢰주가 누군지에 대한 정보는 안 팝니다. 대공자비님께서 그 사람을 알아내서 정보 의뢰를 한다면 탈탈! 털어드리겠지만요.”
간단히 대답한 카디나는 혼잣말하듯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대공가 영지 귀퉁이에서 물건 납품하는 것 외엔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최근에 두 건이나 의뢰를 받았으니 녹스 남작에 대한 감상을 수정해야겠는걸요?”
아리엘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물었다.
“그럼 녹스 남작에 대한 정보는 전혀 구할 수 없는 건가?”
“민감한 정보들 말고라면 괜찮습니다. 누구나 알아낼 수 있는 기본적인 정보는 계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든요. 그 정도라도 사시겠습니까?”
카디나는 3급, 2급, 1급, 그리고 특급 정보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잠시 고민한 아리엘은 승낙했다.
“일단은. 난 이제 알아보기 시작하는 단계니까.”
“좋습니다. 그럼 거래 성립!”
카디나가 호쾌하게 말하며 부하를 불렀다.
“녹스 남작에 대한 정보를 챙겨 와. 이 분이 오늘 갖고 돌아가실 거니까. 3급으로.”
“예. 마스터.”
부하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리엘은 카디나를 살펴보았다.
과거에 만났을 때는 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열적인 오렌지빛 머리카락이라든지, 능글거리는 말투, 호탕한 일처리.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 카디나가 입을 열었다.
“대공자비님은 좀 이상한 분이시네요.”
아리엘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디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잇 워커의 마스터가 어린 여자라는 걸 알면 보통 놀라거나 못 미더워하는데. 그런 기색도 없으시고.”
아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못 미더워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안심인걸.”
“예?”
카디나가 숨김없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리엘은 나직이 이야기했다.
“여자애가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분명 힘들었을 거야. 남들보다 배는 노력했겠지. 여자라서, 어린애라서 그렇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분명 약한 티도 내지 못했을 거야. 난 알아.”
과거 그녀가 그랬으니까.
아리엘은 과거 자신이 마법사 무리에서 겪었던 일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카디나가 얼마나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할지 예상할 수 있어. 오히려 믿음직스러워.”
“…….”
당황스러운 얼굴로 아리엘의 말을 듣고 있던 카디나가 제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웃었다.
“하핫, 대공자비님 같은 분께서 이해하신다고 하니 귀엽기만 한걸요?”
아리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이해해. 나라도 어린 귀족 여자애가 이해한다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테니까.”
자신은 과거에 겪은 일이 있어서 카디나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곱게 자란 귀족 영애가 평민의 삶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격이니 상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당연했다.
“…….”
카디나는 아리엘에게 끊임없이 놀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코딱지만한 계집애가 칼 앞에서도 꿈쩍 않는 게 신기했는데, 보면 볼수록 하는 말들이 자신을 놀라게 했다.
“……한때 대공자비님에 대한 정보 의뢰가 빗발쳤었죠. 흥미로울 정도로 아무것도 구할 수 없었지만요.”
카디나의 말을 들은 아리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랬겠지.’
그녀가 루시안과 결혼했을 때 사교계는 발칵 뒤집어졌었다.
분명 귀족들은 아리엘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눈이 벌개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실리온 후작가에선 나름대로 철저히 그녀에 대한 정보를 막아왔다.
아리엘이 데뷔한 후로는 조금씩 하녀발 소문이 풀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전에는 없었을 것이다.
안주인이 없는 후작가를 후작은 공포로 다스렸으니까.
카디나가 손끝을 후 불며 말을 이었다.
“특급 정보엔 몇 개 들어온 게 있었지만 신뢰도가 낮은 정보였습니다. 특급 정보에 지불할 능력이 되는 사람도 없었고요. 그래서 묻어뒀었습니다.”
아리엘은 귀를 쫑긋 세웠다.
“지금 그 정보는 유효해? 살 수 있어?”
아리엘은 과거에 연관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비용이 들더라도 자신에 대한 정보에 계약을 걸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카디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것도 계약이 걸려있습니다. 무려 1000년.”
“……!”
처, 천 년?
그러려면 대체 금액이 얼마나 필요한 거야?!
“사실상 소각하라는 명령에 가깝죠.”
“대체 누가…….”
“그건 기밀이라서 말씀 못해드립니다.”
아리엘은 머리가 아파지는 걸 느꼈다.
녹스 남작도, 그녀에 대한 정보도 누군가 선수를 쳤다.
4년이나 빨리 움직였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그때 카디나의 부하가 들어와 아리엘에게 문서철을 넘겼다.
“참.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말씀하시죠.”
“내가 이 정보를 요청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쳐줘.”
카디나가 고개를 기우뚱하며 말했다.
“음, 그건 금액이 더 드는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나는 내 행적이 드러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똑 부러지게 대답한 아리엘은 카디나에게 정보값을 지불하고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봐. 카디나 아딘.”
아리엘은 악수를 청하듯 조그만 손을 뻗었다.
잠시 망설이던 카디나는 그 손을 굳게 잡아 흔들었다.
“또 뵙길 바라죠.”
나잇 워커의 아지트를 벗어난 아리엘은 얌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반카를 풀어주고 물을 마시게 해준 뒤, 말에 올라탔다.
“돌아가자, 반카.”
아리엘이 떠나는 모습을 비밀 창문으로 보고 있던 카디나는 아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여자애가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분명 힘들었을 거야. 남들보다 배는 노력했겠지. 난 알아.’
‘오히려 믿음직스러워.’
그녀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인걸.”
왠지 흥분으로 몸이 떨렸다.
저분 옆에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뒤에서 카디나가 먹다 만 빵을 치우고 있던 부하가 말했다.
“대장. 뭐하고 계십니까?”
카디나는 아리엘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럼 나가볼까?”
“어디를요?”
“어디긴 어디야.”
그녀는 단검의 칼등을 손으로 매만지며 살벌하게 말했다.
“우리 쪽 정보가 샌 곳을 족치러 가야지.”
카디나에겐 자신이 길드 마스터라는 정보가 어느 쥐구멍으로 새어나갔는지 밝히는 게 급선무였다.
* * *
녹스 남작에 대한 정보는 큰 수확이 없었다.
녹스 남작은 누구에게 원한을 살 만큼 야심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냥 북부에 작은 영지를 가진 평범한 하위 귀족일 뿐이었다.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북부 땅을 가진 그는 대공가 영지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역할을 했다.
그마저도 무두질한 가죽이나 1차 가공한 연철 같은 흔한 것들이었다.
아리엘은 그가 대공가에 납품하는 자질구레한 물건들 목록을 쭉 읽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에덴 스톤?”
어라, 이걸 왜……?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녀가 알기로 '에덴 스톤'이라 불리는 이것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쓸모없는 광물이었다.
연푸른색이라는 걸 제외하면 석영과 똑같아 보인다고 들었다.
하지만 유리보다도 약해 잘 깨지기 때문에, 보석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었다.
또한, 그 안에 마나를 담는 것이 불가능해서 마법 시약 재료로도 사용되지 않았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 광물에 대해 아리엘이 알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이었다.
히스와 고서적들을 뒤지다 보니 이런 저런 잡지식들을 많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필요한 데가 있나?’
그녀는 모르지만, 에덴 스톤도 나름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리엘은 녹스 남작에 대한 서류를 고이 접고 이공간을 열어 서류를 넣어놓았다.
많이 건진 건 없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걸 알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해졌다.
‘달튼을 통해서 에덴 스톤에 대한 것만 좀 더 알아보면 되겠어.’
마음이 가벼워진 아리엘은 수잔이 만들어준 복숭아 밀푀유를 포크로 잘라 냠, 조그만 입에 가득 넣었다.
‘달콤해.’
이런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루시안 때문에 조금 슬플 정도로 사르르 녹는 맛이었다.
* * *
아리엘이 외출에서 무사히 돌아오고 난 뒤 헥터와 랄프는 뒤늦게 그 날의 감상을 말했다.
헥터는 산더미만한 덩치로 삐진 척을 하며 놀리듯 물었다.
“아기 마님, 저희 떼어 놓고 놀러 갔다 오신 건 재미있으셨습니까?”
“헥터. 마님께 무례하다.”
랄프가 헥터를 흘기며 말했다. 아리엘은 전혀 다른 두 호위기사의 태도가 즐거워서 배시시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랄프. 헥터가 격식을 차리는 게 더 이상한걸요.”
“그렇긴 합니다만…….”
랄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사실 아기 마님 출타하셨을 때 헥터 녀석이 거의 초긴장 상태였거든요. 누군가 건드리거나 무슨 소리가 나면 벌떡 일어나서 칼을 휘둘러 댔답니다. 호출이 안 왔는데도요.”
“정말이에요?”
아리엘은 헥터가 사방으로 검을 휘두르며 경계하는 모습이 그려져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헥터가 뒤늦게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눈앞에 계시는 분을 지키는 건 자신 있는데, 보이지 않으시니 어째 불안한 것이…….”
아리엘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써주는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루시안의 명령 때문이라지만 그들이 있어 든든한 것이 사실이었다.
“고마워요. 두 사람 다.”
헥터와 랄프가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남발하면서 인사를 받았다.
“크흠,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당연한 일을 한 것인데요.”
“크흠흠. 랄프놈 말이 맞습죠. 사실 아기 마님 호위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고…….”
어른 남자 두 명이 부끄러움 타는 모습은 정말 진귀한 광경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헛기침 행렬이 끝나고, 헥터와 랄프는 푸른 사자 기사단의 겨울에 대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매해 겨울에 마수 토벌을 간다고 했다.
“겨울이면 라카트옐 주인님들과 푸른 사자 기사단은 북쪽 산맥으로 이동합니다. 북부에 영지가 있으니 거기서 정비를 하고, 토벌을 나가죠.”
아리엘도 들은 적이 있었다.
라카트옐 대공가가 '제국의 수호자'로 불리는 이유는 마수 토벌 때문이었다.
토벌이란 북부 산맥의 마수들을 사냥해 제국 영토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마수 한 마리가 마을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도 있기에 이 일은 굉장히 중요했다.
“그런데 왜 겨울에 가나요?”
아리엘의 물음에 랄프가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겨울이 그나마 마수를 상대하기 쉬운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번식철이나 더울 땐 배로 흉폭해 지거든요.”
“하지만, 겨울에는 기사들도 힘들잖아요.”
아리엘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본 랄프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그래도 겨울이 기사들 사망률이 제일 적습니다. 마수들이 날뛰면 정말 힘들어 지니까요.”
헥터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니 여기 훈련이 눈알 빠지게 빡센 거지.”
랄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엘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저희의 훈련은 겨울을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푸른 사자 기사단을 '겨울 기사단'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겨울이 고되긴 하지만 저희의 계절이기도 하죠.”
아리엘은 푸른 사자 기사단의 깃발을 떠올렸다.
로열 블루색 휘장에 황금실로 화려한 사자 얼굴이 그려진 방패가 수놓아져 있는 모양.
겨울 기사단에 잘 어울리는 깃발인 것 같다.
아리엘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두 호위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근데 이번 겨울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북쪽 산에 아기 마님도 같이 가시나?”
“그렇지 않을까. 주군도 가시고, 우리도 가야 하니까. 다음 달 쯤에 명령이 내려오겠지.”
“작년엔 너무 일찍 끝나서 해 바뀌기 전에 돌아왔었잖아.”
“이번엔 작은 주군이 못 오시니까 전력이 모자라겠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리엘이 물었다.
“루시안도 토벌에 나갔어요?”
헥터가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라카트옐이시니까요. 아홉 살에 소드 마스터 칭호 다신 후로는 함께 가셨습죠.”
아리엘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아홉 살이면 지금 그녀의 나이보다도 어렸다.
무시무시한 마수들이 있는 곳에 어린 루시안이 갔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위, 위험한 곳이라고…….”
랄프가 얼른 나서서 말했다.
“라카트옐에게는 위험한 곳이 아닙니다. 두 분 주군 모두 인간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시니까요. 대공자님은 첫해부터 놀이라도 하듯 마수를 학살하셨죠.”
헥터가 껄껄 웃었다.
“맞습니다. 저희 기사단이 하위 마수들을 상대하는 동안 두 주군께서는 안쪽으로 들어가셔서 더 큰 놈들을 해치우시지요.”
헥터와 랄프는 아리엘의 걱정을 덜기 위해 마수 사냥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북쪽 산은 고대 숲으로 나무와 풀들이 상상 이상으로 크고, 동물들도 그만큼 크다고 했다.
“민들레가 사람 키 만하죠. 겨울쥐 마수가 송아지만하고.”
푸른 사자 기사단은 보통 소드 마스터 셋- 헥터, 랄프, 네드 -를 중심으로 세 개의 팀을 짜서 움직였다.
북부 산맥 중턱까지는 작은 크기부터 중간 크기의 마수들이 나오는데 이것을 기사단이 토벌했다.
“저희는 중턱 이상 못 들어갑니다. 그 이상에 있는 놈들은 인간의 상대가 안 되니까요. 주군들은 중턱 이상으로 들어가 사냥을 하시는데, 저희 중 아무도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헥터가 씨익 웃었다.
“항상 피를 범벅으로 묻히고 나오시니까 상상을 할 뿐입죠. 소름 끼치는 마수 비명도 들리고.”
랄프가 상냥하게 말했다.
“기사가 열 명 달려들어 겨우 죽이는 하급 마수들도 주군들은 검 한 번으로 죽이니, 그 위에는 더 힘센 것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 번도 다쳐서 오신 적이 없으시죠.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아기 마님.”
“맞습니다. 고위 마수들도 라카트옐에게 꼼짝 못하는데요.”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위험한 곳에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이 가는 건 싫어요…….”
헥터와 랄프가 슬며시 미소지었다.
“라카트옐 안위 걱정을 해주는 건 세상에 아기 마님뿐이실 겁니다.”
“그래서 주군들이 아기 마님께 꼼짝 못하시나 봐.”
헥터의 익살스러운 말에 아리엘도 결국 웃고 말았다.
* * *
호위들과 이야기를 마친 아리엘은 히스와 마법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끝난 뒤 히스에게 라카트옐의 마수 토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자, 히스가 생각을 정리하듯 물었다.
“네 말은, 산맥 중턱 위에 엄청 무시무시한 것들이 살고있는 것 같다는 거지?”
“응. 거기 있는 것들은 기사단이 못 죽인대. 올해에는 마티어스님 혼자 들어가셔야 한댔어.”
히스가 묘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한참 그렇게 있던 그가 조용히 입을 뗐다.
“있잖아. 예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무슨 얘기?”
“마수 말이야. 마수는 세상에 있는 생물이 악에 물들어 생겨나는 거래. 그 증거로 마수들은 실제 동물들의 모양과 비슷하잖아?”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는 보통 독수리형 마수, 족제비형 마수, 구렁이형 마수 등 실제 동물을 크고 흉측하게 키워놓은 모양이라고 들었다.
“태고로부터 존재한 악이 인간을 타락시키고 동물을 마수로 변하게 했다고 해.”
히스가 말을 이었다.
“근데 그 중에서…… 와이번이나 드레이크 같은, 용 계열 마수들은 동물이 변한 것이 아니래.”
“그러면?”
히스가 무서운 얘기하듯 표정을 진지하게 했다.
“그것들은 동물이 아니라, 어둠이 타락해 생긴 것들이라지.”
“어둠?”
“그래. 세상의 시초 얘기 몰라?”
세상의 시초. 아리엘도 이제 기억이 났다.
그녀가 배운 제국의 역사에는 세상의 시초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나와 있었다.
“어둠과 빛 설화 말이지?”
“그래.”
태초에 어둠과 빛은 공존하며 세계의 균형을 맞추었다.
빛은 인간과 동식물 등 많은 것들을 낳았고, 어둠은 부수고 파괴하며 죽였다.
각자 자기가 맡은 일을 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빛이 낳은 것들이 타락하기 시작했다.
악 때문에 인간은 서로를 해치고 혼돈해졌고, 동물과 식물은 순리를 거슬러 변해버렸다.
“변한 동물과 식물이 마수가 된 거지. 그리고 그것을 제어하기 위해 어둠이 나섰어. 어둠은 자기의 일부를 떼어 내보내 마수를 제거하도록 했지. 그게 바로 용 계열 마수라는 거야.”
‘처음 듣는 얘기야.’
아리엘은 자신이 역사책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녀는 히스를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둠에게서 떨어져 나온 일부도 결국 타락해 버린 거야. 그들은 모든 마수들의 위에 군림하게 됐지만, 세상을 망가뜨려 불균형을 가져오는 건 똑같았어.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그들을 제어할 수 없었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서 결국 어둠이 직접 내려와서 그들을 가둬버렸대. 아주아주 추운 얼음산에.”
“…….”
이야기를 마친 히스와 아리엘은 잠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히스. 왜 이 이야기를 꺼낸 거야?”
히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괴물들을 산에 가둔 어둠 이야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 아니야? 홀로 마수를 토벌하는 라카트옐 가문 말이야.”
아리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둠과 빛 이야기는 신화일 뿐이잖아, 히스.”
“알아. 나도 내가 엉뚱한 얘길 하고 있다는 거. 하지만…… 기분이 이상한걸.”
조용하게 앉아있던 두 사람은 각자 마법약 재료를 챙겨서 일어났다.
아리엘이 주섬주섬 책을 챙기는 걸 히스가 도와주었다.
“이 책은 뭐야?”
히스가 마법 책들 틈에 끼어있는 책 한 권을 가리켰다.
“아. 그거……”
아리엘은 살짝 뺨을 붉히며 대답했다.
“소드 마나에 대해 궁금해서, 그냥.”
그녀가 읽고있는 책은 라카트옐 도서관에서 찾은 [소드 마나의 기원]이라는 책이었다.
마법을 배우고 있으니 소드 마나에 대해서도 궁금해진 것이지만, 사실 루시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읽기 시작한 거였다.
다행히도 히스는 그것까지 눈치채진 못한 것 같았다.
“그래? 자, 여기. 아, 잠깐만.”
책을 모아서 건네주려던 히스가 갑자기 마법으로 끈을 소환해 휘리릭 책 무더기를 묶었다.
그리고 끈의 매듭 부분을 아리엘에게 건네주었다.
“들어 봐.”
아리엘은 어리둥절해 하며 책을 건네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가벼워!”
히스가 코끝을 엄지로 쓸며 말했다.
“엣헴. 대마법사 히스님이 만든 마법의 노끈이지. 너 같이 비리비리한 애들이 무거운 거 들 때 쓰면 무게가 훨씬 줄어든다.”
“와, 진짜 좋다.”
아리엘은 두꺼운 마법책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노끈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이거 나 주려고 만든 거야?”
얼굴이 새빨개진 히스가 펄쩍 뛰었다.
“우, 웃기지 마, 너 때문에 만들었을 리가 있냐! 그냥 너는…… 어, 그래. 내가 만든 걸 시험해보는 사람이라고!”
“알았어. 그래도 고마워, 히스.”
아리엘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말은 좀 퉁명스럽게 해도 히스가 그녀를 퍽 생각해준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둘은 각자 공부하면서 와이번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게 있으면 서로에게 알려주기로 약속하며 헤어졌다.
* * *
아리엘은 며칠 전 다이아나에게 초청장 하나를 받고 설레어 밤잠을 설쳤다.
사교계 모임 초대는 모두 정중히 거절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예외였다.
다름 아닌 모니카 가가 주최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초정장을 직접 가지고 온 다이아나가 발그레한 뺨으로 행사를 설명해주었다.
“밤 따기 행사야.”
모니카 공작가는 수도 근처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모니카 가의 영지에는 커다란 밤나무 숲이 있는데, 매우 맛있고 실한 밤이 열리기로 유명했다.
모니카 공작 부인은 매해 사교계의 모든 여자들을 초청해 밤 따기 행사를 열었다.
함께 모여서 밤으로 만든 디저트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삼삼오오 밤나무 낙엽 숲을 거닐기도 하는 고상한 행사였다.
“하지만 행사의 백미는 밤 따기 대회지.”
밤 따기 대회는 주로 미혼의 영애들이 많이 참가했다.
고운 얼굴과 손이 볕에 타는 걸 싫어하는 귀족 영애들이 드레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열정적이게 밤을 찾아헤매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상이 있거든.”
밤 따기 대회에서 가장 많은 밤을 따 온 사람은 모니카 공작 부인이 직접 고른 선물을 받았다.
어느 해에는 보석 목걸이, 어느 해에는 다기 세트, 또 어느 해에는 장인이 만든 비단 양산.
공작 부인이 내리는 선물이니만큼 선물들은 혼수품으로 가져가도 될 만큼 비싸고 좋은 물건들이었다.
귀족 영애라지만 사교계에는 그런 사치품을 구경도 못해본 영애들이 수두룩하다.
과연 경쟁심을 불태울 만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건 아니란다.”
다이아나의 말에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왜?”
다이아나가 후후 웃으며 설명했다.
“모니카 령에서 밤 따기 대회 1등을 한 미혼의 영애는 남편 복이 좋다는 속설이 있거든.”
“정말로 그래?”
아리엘은 호기심 가득하게 물었다.
다이아나가 우아하게 부채를 펴들었다.
“실제로 우리 어머니가 처녀일 적 이 대회에서 1등을 하셨거든. 그러다 아버지를 만나셨단다. 두 분은 아직도 금슬이 좋으셔.”
“와…….”
설명을 끝낸 다이아나가 아리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리엘, 올 거지? 제발 올 거라고 말해줘.”
아리엘은 사교계 모임에 갈 예정이 전혀 없었지만, 다이아나의 부탁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럼. 갈게.”
“아! 역시 친구가 최고야!”
매해 친하지도 않은 영애들과 무리지어 앉아서 지루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냈던 다이아나는 아리엘의 승낙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세실도 온대?”
“응, 응. 고 새침데기가, 결국 올 거면서 되게 빼는 거 있지!”
다이아나가 쌍심지를 켜고 말했다.
“거짓말도 잘 못하는 주제에 나는 무가의 어쩌고 하면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아리엘은 키득키득 웃었다.
가을 시즌 내내 사교 행사로 진을 뺀 세실이 영애들이 모이는 자리를 피하고 싶은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세실이랑 함께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러니까. 걔는 내 맘도 모르고.”
초청장을 건네준 다이아나가 규칙을 알려주었다.
“밤 따기 대회에 참가할 때는 시녀 한 명을 데려와야 해. 자기 시녀랑 한 팀이 되어서 하는 거거든.”
귀족 영애들이 밤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주운 밤을 들거나, 자질구레한 시중을 들 시녀가 필요한 건 당연했다.
이 정도 규칙이 없다면 어떤 어머니도 딸을 대회에 참가시키지 않을 것이다.
“대신 호위해주는 남자는 따라 들어올 수 없단다. 대신 밤을 따준다거나…… 하여간 워낙 부정부패가 많아서 말이야.”
대신 밤나무 숲이 안전하도록 며칠 전부터 정리를 해둔다고 했다.
연약한 영애들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글쎄 재작년엔 말이야…….”
한참동안 밤 따기 대회에 관해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눈 다이아나와 아리엘은 크림 펌킨 파이 하나를 거의 해치웠다.
파이 껍질에 계란 노른자와 시럽을 발라 구운 아주 부드럽고 향긋한 파이였다.
안에 든 호박 필링도 진하고 달콤했다.
무심결에 파이를 마구 먹어 치워버린 다이아나는 행복한 표정을 짓다가 화들짝 놀랐다.
“내, 내가 방금 파이를 네 조각이나 먹은 거야?!”
보라색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다이아나가 절망했다.
“행사 때 입으려고 맞춘 드레스 허리가 안 맞을 거야! 아냐, 호박은 붓기를 빼는데 좋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괜찮을…….”
매사에 도도하고 새침한 공녀인 다이아나는 귀여운 아리엘과 달콤한 디저트에 매우 약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생크림이 이만큼이나 들었는데!”
펌킨 파이를 먹기 전으로 되돌리려면 얼마나 더 코르셋을 졸라매야할 지 계산해보던 다이아나는 아리엘의 얼굴을 보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리엘은 조그만 입안에 파이가 가득 차 있는 바람에 위로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있었다.
‘귀여워…….’
아리엘의 볼록한 뺨은 다이아나가 늘어날 체중을 잊게 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오구오구 우리 애기, 많이 먹어.
다이아나는 눈물을 훔치며 마지막 남은 파이 한 조각을 아리엘의 접시에 얹어주었다.
* * *
모니카 가의 행사에 방문할 때 아리엘을 따라갈 시녀는 베키로 정해졌다.
베키는 열여섯 살로, 대공가에 있는 하녀들 중 가장 아리엘 또래에 가까웠다.
시녀가 정해지자 수잔은 베키를 란셀 후작 부인에게 맡겨 예법을 가르쳤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리한 베키는 란셀 후작 부인의 교육 아래 눈부시게 성장했다.
아가씨를 모시는 시녀 역할에 어찌나 몰두했던지, 베키는 아리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공주님처럼 떠받들었다.
“아기 마님, 펜을 집어드릴까요? 잉크는 무슨 색으로 가져올까요? 주스가 너무 차갑지 않으세요? 발밑에 쿠션을 깔아드릴게요.”
오죽하면 아리엘이 집에서는 괜찮으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마침내 행사 당일.
아리엘은 호화롭고 커다란 마차를 타고 모니카 영지로 출발했다.
시녀 베키와 호위 헥터, 랄프가 함께 했다.
모니카 영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도착해서 안내를 받아 들어가자 호스트인 다이아나와 모니카 공작 부인이 보였다.
도도하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다이아나는 아리엘을 보고 표정이 활짝 피었고, 공작 부인도 미소지었다.
“대공자비님.”
“모니카 공작 부인. 안녕하셨어요.”
다이아나의 어머니인 모니카 공작 부인은 몸을 굽혀 조그만 아리엘의 양 뺨에 인사하듯 입을 맞추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가문의 기쁨이에요.”
모니카 공작 부부는 다이아나를 사고에서 구해준 아리엘을 은인처럼 여기며 정중히 대해 주곤 했다.
“다이아나. 대공자비님을 자리로 모셔드리렴.”
“네. 어머니.”
다이아나가 기뻐하며 아리엘에게 다가왔다.
“왔구나. 얼마나 기다렸다고! 자, 팔목에 이걸 묶어.”
다이아나는 아리엘의 손목에 보라색 비단 리본을 매어주었다.
“이게 뭐야, 다이아나?”
“초대받은 손님임을 알려주는 표식이란다. 얼른 이리 와. 세실은 일찍 와서 벌써 들어갔어.”
아리엘은 다이아나의 손에 이끌려 커다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행사가 이뤄지는 밤나무 숲 앞에는 가을볕을 가려주는 천막과 우아하게 꾸며진 테이블이 가득 놓여 있었다.
아리엘이 들어서자 안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영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가을 내내 사교 모임에 전혀 보이지 않았던 아리엘이 이곳에 온 게 놀라운 듯했다.
저번에 대공가 티 파티에 초대받았던 영애들 몇 명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하는 그들의 모습에 안심한 다이아나는 아리엘의 손을 꼭 잡아주고 어머니께 되돌아갔다.
“이따 봐.”
“응.”
아리엘은 낯이 익은 영애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대부분의 영애들은 아리엘에게 호기심 어린 표정을 던졌다.
하지만 호의 섞인 시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리엘이 가을 데뷔 무도회 때 황태자와 첫 춤을 추고, 남편인 대공자와 연이어 춤을 춘 것 때문에 은근히 질투하는 영애들이 있었던 것이다.
‘대공자님을 훔쳐간 걸로도 모자라 황태자 전하의 관심까지 가져가다니. 도둑고양이 같으니라고!’
그전에는 언감생심 꿈에도 못 꾸던 대공자였고, 다들 루시안의 폭력적인 소문을 듣고 무서워했었다.
하지만 막상 아리엘이 결혼해서 잘 지내는 것 같자, 몇몇 영애들의 마음 속에는 욕심이 생겨났다.
‘이럴 줄 알았다면 우리 가문에서 먼저 청혼을 넣을걸.’
숨이 막힐 만큼 잘생긴 데다 부유하고 권력도 강한 대공자가 탐이 나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겐 행운을 먼저 차지해버린 아리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황태자 디트리히.
황태자의 첫 춤 상대가 되고 싶어서 꿈꾸었던 영애들이 몇 명이었던가!
디트리히가 아리엘에게 첫 춤 신청을 함으로서 그 영애들의 기분은 와장창 부서져 버렸다.
그 이후에 황태자와 춤을 출 기회가 있었지만, 첫 춤만큼 주목받는 주인공 자리는 아니었다.
가문이 좋아서 아리엘에 이어 디트리히와 춤을 출 수 있었던 세 명의 영애는 대놓고 아리엘을 흘겨보았다.
“저 기고만장한 모습 좀 봐요. 나이도 어린 주제에 사교계에 일찍 들어와서 설쳐대는 꼴이라니.”
기고만장하지도 않고, 그럴 틈도 없었던 아리엘이 들었다면 억울했을 모함이었다.
“흥. 어쩌다 운 좋게 대공자비 자리를 꿰찼는지는 몰라도, 저 결혼이 얼마나 가겠어요?”
“맞아요. 어린애라 볼품이 없어서 금방 소박맞을걸요.”
뒤에서 신나게 헐뜯던 그들은 아리엘이 그들 곁을 지나치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을 걸었다.
“어머나. 아리엘라 대공자비님. 얼마만에 뵙는지 모르겠네요.”
앞길을 가로막힌 아리엘은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영애를 바라보았다.
잘 모르는 영애들이지만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세 영애가 호들갑스레 말했다.
“저번 가을 무도회 때 안색이 안 좋으셔서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맞아요. 역시 사교계는 어린애들에게는 무리예요. 안 그런가요?”
“호호호! 어머니 치마폭에서 보호받을 나이니까요.”
영애들은 은근슬쩍 아리엘이 어리고 미숙하다며 깎아내리는 말을 했다.
하지만 아리엘은 개의치 않고 그녀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왔는데도 별로 달라진 게 없네요. 그런데…… 세 분 영애들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아리엘의 말투가 상냥했음에도 세 영애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아리엘은 그녀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이름도 모르는데, 자기들만 실컷 아리엘을 의식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영애는 애써 목을 빳빳이 세우며 자기 이름들을 말했다.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인 뒤 사르르 무해하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세 분의 드레스가 참 아름답네요. 모두 같은 곳에서 맞추신 건가요?”
“네? 무, 무슨…….”
세 명의 영애가 황급히 서로의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방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모양이 똑같아서요. 세 분이 사이가 참 좋으신가 보네요.”
그들은 자기 드레스를 내려다보고 더욱 얼굴을 붉혔다.
세 명 모두 팔과 가슴 부분이 시폰으로 연결된 형식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로 아리엘이 지난 가을 무도회 때 입었던 드레스 형식이었다.
자신들이 아리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드레스까지 흉내 내 입었다는 걸 지적받은 세 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급히 인사하고 물러났다.
“어머, 그럼 전 이만…….”
“저도 머리가 아파서…….”
그들이 꼬리를 내리자 주변에서 다른 영애들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엘은 천천히 자기 자리로 향했다.
그러다 뒤쪽 출입구에서 들어오는 세실을 발견했다.
아리엘과 세실은 동시에 서로를 보고 활짝 웃었다.
둘은 빠르게 서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세실, 보고 싶었어!”
“나도 무척 보고 싶었다. 잘 지냈던 거지?”
아리엘과 세실은 같은 자리에 앉아서 못다한 얘기로 수다꽃을 피웠다.
다이아나도 함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호스트인 그녀는 바쁜 것 같았다.
한참 서로의 근황을 묻던 중에 세실이 아리엘의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오늘 로즈쿼츠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장미 수정 원석 펜던트 위에 반짝이는 작은 루비 장식이 달려 영롱해보이는 목걸이였다.
“목걸이가 잘 어울린다, 아리엘.”
“고마워.”
아리엘은 수줍음을 타며 대답했다.
세실은 요즘 다이아나에게 소녀 대화 특훈을 받고 있었다.
여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세실을 위해 다이아나는 장신구나 옷 칭찬을 하는 법을 가장 먼저 가르쳤다.
아리엘은 그런 친구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몇 마디 더 칭찬을 건넨 세실이 물었다.
“그런데 아리엘. 지난번에 했던 나비 목걸이도 무척 예뻤는데 그건 이제 안 하는 거야?”
“아, 그거…….”
아리엘은 루시안이 선물했던 나비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기억해냈다.
그 목걸이는 아리엘이 가진 목걸이 중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그녀는 무도회 날 이후로 그걸 한 번도 걸지 않았다.
아리엘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냥. 어쩌다 보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세실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소중해서 그런 거겠지. 남편에게 선물 받은 물건이니까.”
그, 그런 거 아닌데…… 아리엘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간 다시…… 돌려줘야 하니까 그런 건데.’
루시안이 명령해서 받긴 했지만, 그의 선물은 전혀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원하는대로 걸고 다니기 어려웠다.
하지만 친구의 오해를 풀려면 설명해야 할 게 너무 많았으므로 아리엘은 그냥 배시시 웃고 말았다.
물론 그 귀여운 미소를 본 세실의 오해가 더욱 커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손님들이 모두 입장하고 뒤늦게 들어온 다이아나가 아리엘의 귀에 속삭였다.
“아까 누가 시비 걸었다며?”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여긴 우리 하녀들이 많잖아. 내가 무슨 일 생기면 다 보고하라고 해놨거든. 괜찮은 거야?”
“응. 아무 일도 없었어.”
다이아나가 아리엘에게 시비를 걸었던 세 영애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못된 것들. 그런다고 자기들이 더 돋보일 줄 알고? 감히 내 귀염둥이에게…… 저런 이상한 애들 때문에 영애들이 싸잡아 욕을 먹는 거야.”
자리에 앉은 다이아나가 화를 식히려는 듯 부채를 팔랑였다.
“기분 풀자. 이제 곧 모니카 가 특제 가을 디저트가 나올 거니까!”
다이아나의 입꼬리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디저트는 대공가 것이 최고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다이아나지만, 오늘만큼은 친구들을 깜짝 놀래켜 주고 싶었다.
모니카 가의 행사를 위해 솜씨 좋은 디저트 장인을 데려와 만든 디저트들은 그야말로 황홀했다.
굵게 부순 아몬드를 낙엽처럼 뿌린 진한 초콜릿 케이크.
둥글게 썰어 바삭하게 말린 오렌지와 사과를 층층이 쌓아 홍차 시럽을 뿌려 낸 디저트.
버터에 구운 무화과와 복숭아를 곁들인 캐러멜 푸딩.
사과를 얇게 저민 뒤 설탕에 절인 것을 장미 모양으로 한가득 얹은 애플 타르트.
차와 잘 어울리는 단호박 스콘.
하지만 역시 메인은 마롱크림을 산처럼 올린 밤 디저트, 몽블랑이었다.
화려한 디저트의 향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디저트들은 매우 예뻤다.
눈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 같았다.
아직 입에 넣지 않았는데도 달콤한 기분이 온 몸을 사로잡았다.
아리엘과 친구들은 즐거워하며 맛있는 가을 디저트들을 즐겼다.
특히 황금빛의 애플 타르트는 아리엘의 입맛에 꼭 맞았다.
“이거 진짜 맛있다, 다이아나.”
“내가 이걸 디저트 목록에 넣자고 어머니께 졸랐단다. 잘했지?”
차와 대화를 나누는 파티 분위기는 밝고 즐거웠다.
음식이 반 정도 사라졌을 때쯤, 모니카 공작 부인이 밤 따기 대회가 곧 시작함을 알렸다.
“참가할 영애나 부인들은 모여주세요.”
십대의 어린 영애들부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부인들이 들뜬 얼굴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아리엘과 세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엘의 시녀 베키와 세실의 시녀 또한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다이아나는 호스트라서 참여할 수가 없겠군.”
“그렇네.”
아리엘과 세실은 어머니나 할머니 뻘의 부인들과 홀로 남을 다이아나가 마음에 걸렸다.
다이아나가 집안일 뿐 아니라 영지 경영을 배우고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는 바람에, 사교계의 어른 여자들은 요즘 만나기만 하면 다이아나에게 훈계를 건넸다.
이런 식으로.
“가문을 잇지도 못하는 공녀가 경영을 배우다니요? 결혼해서 남편에게 맡겨야지요.”
“어른들 말이니 기분 나빠 말고 새겨들으세요, 공녀.”
오늘도 줄곧 다이아나의 뒤통수를 따라다니는 은근한 시선을 느낀 아리엘은 다이아나의 소매를 살짝 붙들고 귓속말을 했다.
“다이아나. 내가 옆에 있을까? 나는 상 안 받아도 되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다이아나가 펄쩍 뛰었다.
“안 돼, 아리엘. 절대 안 돼. 너랑 세실은 꼭 이 대회에 참가해야 해.”
“으응……?”
그렇게까지 필사적인 대회인 줄은 몰랐는걸?
그래도 어쨌든 다이아나가 간곡히 원하니 참여하는 게 도리인 것 같았다.
다이아나는 모인 모든 영애, 부인들에게 안내했다.
“한 시간 후에 이 자리로 돌아오시는 겁니다. 가장 많은 밤을 가지고 돌아오는 분께는 모니카 집안의 특별한 상이 준비되어 있어요.”
말끝에 다이아나가 다른 사람들 몰래, 아리엘과 세실에게 윙크를 했다.
친구의 응원을 받은 두 소녀는 밤나무 숲에 들어섰다.
물론 시녀 한 명을 데리고 호위는 놔둔 채였다.
아리엘은 여전히 지난 번 마티어스에게 받은 마도구, 페룬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헥터와 랄프를 떼어 놓고 가는데에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한동안 세실과 함께 걷던 아리엘은 갈래길에서 세실과 헤어져야 했다.
세실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 다니는 게 규칙이라서 같이 못 다니는 게 서운하다.”
“그러게. 밤 많이 많이 따 와, 세실.”
“아리엘도.”
멀어지는 세실에게 손키스를 보낸 아리엘은 시녀 베키를 데리고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밤 따기 대회의 시작이었다.
* * *
다른 영애들과는 달리 아리엘은 우승에 큰 관심이 없었다.
모니카 공작 부인이 준비한 선물은 분명 훌륭하겠지만, 그것보다는 다이아나가 꼭 와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기에 온 것이니까.
그리고 우승한 미혼 영애에겐 남편 복이 많다는 속설도 그녀에게는 상관없게 느껴졌다.
‘난 이미 루시안과 결혼했으니까.’
아리엘은 산책하듯 즐겁게 걸으며 베키와 이야기를 나눴다.
베키는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밤이 눈에 보이는 족족 자루에 담고 있었다.
“베키는 이기고 싶나 보구나.”
“그럼요. 우리 마님이 우승하셨음 하는 건 다들 똑같을걸요? 상 받게 해드리고 싶어요!”
베키의 마음이 고마워진 아리엘은 소매를 걷었다.
“그럼 나도 조금 노력해볼까?”
밤을 줍는 건 무척 재미있는 일이었다.
탐스러운 밤송이 안에서 굴러떨어진 밤도 있었고, 밤송이를 막대기로 벗겨야 나오는 밤도 있었다.
다람쥐처럼 열심히 모으다 보니 작은 자루가 제법 묵직해졌다.
뽈뽈거리며 움직이다가 뺨이 발갛게 상기된 아리엘은 잠깐 쉬기로 했다.
과거에 비해선 훨씬 건강해졌지만 그녀는 원래 몸이 약한 편이었다.
‘무리해서 수잔한테 혼나기는 싫으니까.’
쉬면서 아리엘은 커다란 밤나무에 등을 기댔다.
베키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여전히 밤 줍기 삼매경이었다.
가을을 맞은 모니카 령의 밤나무 숲은 무척 아름다웠다.
숲의 여기저기에 잘 닦인 오솔길과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
키가 작고 큰 밤나무들에 달린 탐스런 밤송이들.
아리엘은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가을 낙엽 냄새가 밴 숲의 공기가 그녀의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좋다.’
평소 정원을 산책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가을 숲의 기운에 함빡 젖어 들던 아리엘은 고목 밤나무에 기대고 있는 몸을 통해 살짝 마나를 흘려보냈다.
파앗.
눈을 감고 있는데도 나무들의 잎맥과 줄기, 뿌리를 따라 이어진 숲의 광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와…….’
새삼 그동안 마법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리엘이 마나를 좀 더 흘려보내자 숲속의 작은 동물들이 근처를 기웃거리며 다가왔다.
작은 토끼 가족, 들쥐, 이름 모를 예쁜 새들.
아리엘이 흙 원소 마법으로 살짝 땅 위에 온기를 불어넣,자 따뜻함을 느낀 동물들이 그녀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주운 밤 중 몇 개를 자루에서 꺼내 동물들에게 하나씩 물려주었다.
“먹어. 베키한텐 비밀이야.”
베키가 근처로 다가오자 동물들은 언제 모여들었었냐는 듯 빠르게 떠나버렸다.
아리엘은 양손 가득 밤을 주워온 베키가 자루에 밤을 쏟아 넣는 걸 도와주었다.
“베키, 좀 일찍 돌아갈까? 돌아가면서 더 줍자.”
“네, 아기 마님! 우리 1등할 수 있을까요?”
“글쎄. 안 되면 내가 밤 대신 자루에 들어갈까?”
아리엘의 장난스러운 말에 베키가 키득키득 웃었다.
“아기 마님은 너무 가벼우셔서 1등 못하실 거예요.”
아리엘과 베키가 돌아가려고 방향을 바꾸는 때였다.
바스락, 바스락.
언제 왔는지 토끼 몇 마리가 입에 밤을 물고 아리엘의 발치를 맴돌았다. 베키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어머, 토끼네요! 이렇게 가까이까지 오다니 웬일일까?”
그때 토끼들이 물고 있던 밤을 아리엘 앞에 토독 떨어뜨렸다.
“어라? 왜…….”
놀랄 새도 없이, 새 두 마리가 포르르 날아들어서 아리엘 발 앞에 밤을 대여섯 개 떨어뜨리고 갔다.
그다음에는 다람쥐가, 그다음에는 다른 새들이, 들쥐 가족이…….
베키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는 사이 아리엘의 발치에는 동물들이 물어온 밤이 산더미처럼 수북이 쌓였다.
“나 주는 거야?”
아리엘이 물었지만, 동물들은 대답없이 그녀의 조그만 발에 애정 어리게 머리를 비비고 사라졌다.
베키가 겨우겨우 벌어진 입을 다물고 말했다.
“아, 아기 마님…… 상 받으실 수 있겠어요!”
아리엘은 얼떨떨하게 쌓인 밤 무더기를 바라보았다.
베키 말대로 여자 두 명이 한 시간 동안 주울 수 있는 것보다 넘치는 양이었다.
“어머나,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베키가 팔을 걷어붙이고 자루에 밤을 쓸어 담았다.
자루가 꽉 차고도 한참 남았다.
“아기 마님, 잠시 여기 계세요. 제가 얼른 달려가서 손수레라도 가져올게요.”
잔뜩 흥분한 베키가 아리엘이 앉아서 쉴 자리를 만들어 준 뒤, 숲 바깥쪽으로 뛰어갔다.
둘은 숲 깊숙이까지 들어오지 않았으니 금방 다녀올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신나게 뛰어가는 베키의 뒷모습을 보던 아리엘은 살짝 웃었다. 어휴.
“저렇게 좋을까…….”
그녀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베키가 지금은 꼭 동생 같았다.
그렇게 혼자 남은 아리엘은 자리에 앉아서 한참 밤 무더기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생각해볼수록 기분이 말랑말랑해졌다.
“신기하긴 하네, 동물들이…….”
그녀는 제 동그란 양 뺨을 감쌌다.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원소 마법을 배운 뒤 유난히 동물들이 그녀를 잘 따르고 친근하게 대해 주긴 했지만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그만큼 좋은 마나의 색을 띠게 된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했다.
아리엘은 실바람이 낙엽을 가지고 노는 것을 기분 좋게 구경하며 베키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섬찟한 느낌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꼭 사람의 인기척 같으면서도 오싹한 기운이었다.
아리엘은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뒤를 돌았다.
그녀의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아까는 심심치 않게 보이던 새나 다람쥐마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스산했다.
‘뭐지……?’
혹여나 자신이 놓친 것이 있을까 봐 아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시선을 주위로 빙 돌렸다.
그만큼 불길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소매 주머니 속에 있는 페룬의 눈을 꼭 쥐었다.
한참 뒤를 살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아리엘은 다시 원래 보고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비명이 목구멍에서 얼어붙었다.
“……!”
아리엘과 스무 걸음쯤 떨어진 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지금 이 숲을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을 귀족 영애 중 한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을 완전히 가린 검은 망토.
남자의 형상.
소름끼치게도 아리엘은 그 사람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확신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