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그때 아리엘은 갓 열네 살이었다.
아버지 루실리온 후작과 오라비 제롬에게 학대와 착취를 당하다 '그'에게 팔려온 지 몇달 째.
그녀는 몸을 망가뜨려 가면서 공격마법을 배우고 있었다.
배울수록 힘에게 먹히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가 아리엘의 심장에 박아놓은 운디르의 저주 때문이었다.
그것이 있는 한 아리엘은 '그'의 노예였다.
조종당하며 악당인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리엘은 첫 임무를 받았다.
이유나 목적은 알려주지 않았다.
아리엘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의 생명을 인질로 틀어쥐었을 뿐.
그렇게 아리엘은 처음으로 공격마법을 사람에게 썼다.
“…….”
아리엘이 창백해져서 바들바들 떨자 낌새를 알아챈 루시안이 녹스 남작에게 고압적으로 눈짓했다.
“꺼져.”
“예?”
“당장 꺼지라고.”
녹스 남작이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난 뒤에도 아리엘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후작가를 벗어난 뒤로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거의 떠올리지 않고 지내와서 더욱 타격이 컸다.
‘그건 여기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 나는 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야.’
아무리 스스로에게 되뇌어 봐도 온몸의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녹스 남작 한 사람을 봄으로써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모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루시안이 그녀의 턱을 억지로 들어 올려 눈을 맞추었다.
깊이 분노한 목소리가 아리엘의 귓전에 울렸다.
“뭔지 말해.”
말할 수 없었다. 아리엘은 더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루시안은 그대로 그녀의 무릎 아래에 팔을 넣어 아리엘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아리엘이 아직 그의 예복 겉옷을 걸치고 있어서 안기 수월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얗게 질려 쓰러진 아리엘을 보고 웅성거렸다.
루시안은 싸늘하게 그들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지껄이는 것들은 죽이겠다.”
그 즉시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루시안은 빠른 발걸음으로 황궁 홀을 빠져 나왔다.
홀의 입구를 지나자 황제의 시종 중 하나가 따라 나왔다.
“대공자님, 오늘 데뷔하는 사람은 무도회가 끝나기 전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 있…….”
“안 된다고?”
안타깝게도 루시안에게는 아내가 아프다고 설명할 만큼의 인내심이 없었다.
“그럼 무도회를 지금 끝내면 되겠군.”
루시안이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황궁 홀의 옆 건물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건물의 머리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폭발해 날아갔다.
쾅! 콰지직!
지진이 난 것 같은 소리에 무도회 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마 무도회는 당장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봤나? 무도회는 끝났어.”
루시안이 차갑게 시종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표정이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이성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 미친…….
시종은 벌벌 떨며 물러났다.
괴물 아니야?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루시안이 마지막으로 던지듯 말했다.
“수리 비용은 라카트옐 가로 청구하라고 해.”
황궁을 벗어난 루시안은 곧장 라카트옐 저로 향했다.
아리엘은 핏기를 잃고 덜덜 떨고만 있었다.
마침내 저택에 도착하자 루시안은 아리엘을 안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놀란 사용인들이 몰려왔지만 모두 쫓아 보냈다.
그는 아리엘의 몸이 아픈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루시안은 아리엘을 그녀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침대에 내려놔 앉히자 아리엘이 무릎을 감싸 안고 몸을 옹송그렸다.
딱 한 줌.
움츠리자 그녀는 꼭 그 정도 크기로 보였다.
“아리엘라. 뭐냐고 물었어.”
루시안은 참지 못하고 재차 윽박질렀다.
이번에도 소용이 없었다.
익숙한 곳에 돌아온 아리엘은 이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 으윽, 흑…….”
속 안에서 치미는 초조감 때문에 루시안은 거칠게 목에서 타이를 풀어냈다.
지독히 깊은 색의 로얄 사파이어 장식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그는 난폭하게 제 입술을 집어 뜯으며 씹어뱉었다.
“젠장, 여자애가 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알게 뭐냐고.”
성마르게 방 안을 오가던 루시안은 아리엘의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 웅크린 그녀를 자기 품으로 홱 끌어당겼다.
“이리 와.”
의지할 것이 간절히 필요했던 듯, 아리엘이 얕게 떨며 루시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게 안기자 아리엘의 흐느낌 소리가 커졌다.
“흐으, 흑, 흐엉…….”
울음을 잔뜩 눌러 놓았다가 터트린 것 같았다.
품속의 조그만 계집애가 자신 때문에 안심하고 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낀 루시안은 이를 악물었다.
이건 대체…….
그가 혼란스러운 듯 아리엘을 내려다보았다.
“흑, 르히안…….”
아리엘이 울며 파고들자, 루시안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스스로가 하는 행동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인간 같은 짓이었다.
자그맣고 따뜻한 눈물 웅덩이가 생긴 셔츠 안 속으로 심장이 쾅 세게 뛰었다.
쿵, 쿵, 쿵.
무언가 번져나가듯이.
그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아리엘을 자기 품에 기대 주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어린 짐승을 감싸듯 그의 몸 안에 가두어 안았다.
“……뭐가 이렇게 작아.”
루시안이 욕지기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서 안고 있었다.
아리엘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울다가 가까스로 진정했다.
겨우겨우 숨을 골랐을 때쯤엔 작은 눈꺼풀이 퉁퉁 부어 아주 우스운 얼굴이었다.
그녀가 울음을 그친 것을 본 루시안이 손가락으로 아리엘의 눈두덩을 가볍게 쓸며 쿡 웃었다.
“못난이가 됐는데.”
“노, 놀리지 말아요.”
조금 정신을 차린 아리엘이 뺨을 새빨갛게 붉혔다.
가만히 그녀의 발간 콧망울과 눈가를 보고 있던 루시안은 불쑥 고개를 내려 아리엘의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핥았다.
맑은 눈물방울이 붉은 혀 위로 사라지고, 그가 속삭였다.
“짜.”
예전, 아리엘이 이 집에서 쫓겨나는 줄 알고 바보같이 엉엉 울 때의 눈물은 달았었는데.
조그만 몸을 웅크리고 고통스러워하며 흘린 눈물은 짜기만 했다.
루시안은 아리엘의 얼굴에 남은 눈물을 입술로 거둬가며 명령했다.
“난 짠 게 싫어. 그러니까 울지 마.”
젖은 속눈썹을 손등으로 문지른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안 울어요.”
“좋아.”
그가 말하자 아리엘이 지친 듯 그의 품으로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에게 기대서 색색 숨을 내쉬다가 까무룩 잠들어버리는 어린 아내를, 루시안은 기가 막힌 듯 바라보았다.
“……제멋대로 울다 자버리다니. 이건 아내가 아니라 애로군.”
그는 제 품에서 아리엘을 들어 올려 침대에 눕혀주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칠흑같이 깜깜한 곳 안에서도 루시안은 아리엘의 뺨에 난 보송보송한 솜털까지 잘 볼 수 있었다.
괴물이 아니라면 결코 가질 수 없을 감각이었다.
문득 아까 자신의 심장이 냈던 소리가 떠올랐다.
루시안의 붉은 입술이 비틀렸다.
“내게도 그런 게 가능한 것이었던가?”
* * *
다음날.
아리엘은 수잔의 호들갑스러운 걱정을 받으며 주치의 밀러를 만나 진찰을 받았다.
그녀가 아파서 파티를 일찍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이아나와 세실의 걱정 섞인 편지도 속속 도착했다.
아리엘은 진짜로 아팠던 게 아니었으므로 대부분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진짜 문제는 오후에 재무관 달튼이 서신 하나를 움켜쥐고 뛰어 들어온 후에야 시작됐다.
“대공자님! 대공자님!”
아리엘의 침대 옆 의자에 방만한 자세로 기대앉아 있던 루시안이 눈만 까딱 치켜떠 그를 바라보았다.
“닥쳐. 시끄러워.”
그에 굴하지 않고, 달튼이 손을 떨며 서신을 내밀었다.
서신에는 뚜렷한 황금색 황실 인장이 찍혀있었다.
“이, 이게 사실입니까? 청구서에 적힌 게 정말…….”
루시안이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알아서 처리해.”
“뭔데요, 달튼?”
황실에서 온 편지에 호기심이 생긴 아리엘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지금 의사 밀러의 지시대로 얌전히 침대에 머무르고 있었다.
“넌 이런 거 알 거 없어.”
루시안이 그녀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와…… 아내의 도리를 다하라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아리엘은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며 대꾸했다.
“왜 알 게 없어요? 내가 안주인인데.”
안 그래도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듯 달튼이 아리엘 앞에 달려왔다.
“아기 마님. 이것 좀 봐주십시오. 황실에서 보낸 건데…….”
아리엘은 달튼에게서 서신을 받아들고 읽어내려갔다.
서신의 요지는 간단했다.
루시안이 황궁에서 뭘 부쉈으니 그것에 대한 비용을 청구한다는 것.
읽다 말고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게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제 패닉 상태일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루시안. 어제 뭐 부쉈어요?”
서신 쪽으로는 무관심하게 눈길도 안 주던 루시안이 몸을 일으켜 세워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가 삐딱한 어조로 물었다.
“어땠을 것 같아?”
“……부쉈을 것 같아요.”
고민 끝에 아리엘은 정직하게 대답했다.
루시안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마음에 든다는 듯 씩 웃었다.
“잘 알고 있네.”
아리엘은 어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 그런 거예요? 다들 놀랐을…… 히익!”
무심코 아까 읽지 못했던 청구서의 수리 비용을 본 아리엘은 까무러칠 듯 놀랐다.
금액의 숫자가 끝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 이건 천문학적 액수잖아!’
루시안, 대체 뭘 부순 거예요?!
아리엘은 다시 편지 첫머리로 가서 그가 부순 게 뭔지를 확인했다.
“아우레디안…… 궁?”
아리엘이 중얼거리자 달튼이 오열하듯 외쳤다.
“예! 바로 그겁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고대 궁궐, 찬란한 제국 전성기의 유물, 아우레디안 천년 궁!”
루시안이 신랄하게 비웃었다.
“태고의 신비는 무슨.”
“언젠가 꼭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단 말입니다…….”
그의 기세에 꼬리를 내리면서도 달튼은 억울한 눈치였다.
“게다가 하도 오래된 건축물이라서 수리가 아니라 복원일 게 분명합니다.”
루시안의 목소리에 짜증이 깃들었다.
“말이 많군. 지난번처럼 멀리 보내지고 싶은 건가?”
“아닙니다. 제발 그것만은!”
펄쩍 뛴 달튼이 손사래를 쳤다.
“그때 수도 외곽으로 공간 이동을 시키셔서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네가 감히 날 막았잖아. 내가 아내한테 가는걸.”
둘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리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양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자, 잠깐! 잠깐만요.”
달튼과 루시안이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창백하게 질린 채 청구서를 들어 올렸다.
“돈 걱정은…… 아무도 안 하나요?”
그녀는 이런 숫자 단위가 실제로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는데 말이다.
멍하니 눈을 끔벅이며 그녀를 바라보던 달튼이 금액의 존재를 막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아리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역시…… 문제가 있는 거죠?
그때, 달튼이 아까와는 달리 평온하고 차분한 재무관 말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대공가 재정 끝의 끝 단위도 안 바뀔 푼돈이라서요.”
푼돈이요?! 이게, 푼돈?
아리엘은 믿을 수가 없어서 루시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그림같이 미간을 찌푸린 채 오만하게 말했다.
“이제 좀 배웠을 줄 알았는데. 라카트옐에 대해서.”
“하, 하지만…….”
아리엘이 더듬거리자 그가 제멋대로 그녀의 말랑한 뺨을 잡아 늘였다.
“네가 걱정할 것 따윈 없어. 아리엘라 라카트옐.”
그녀는 이제 슬슬, 규모를 짐작할 수조차 없는 라카트옐의 부유함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아리엘이 연회에 갔다가 아파서 일찍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마티어스가 그녀를 찾아왔다.
“괜찮은 건가.”
“네, 마티어스님.”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마티어스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는 아리엘의 이마를 짚으며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녀가 열이 나지도, 안색이 창백하지도 않다는 걸 확인한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
아리엘의 가슴속에서 따뜻한 물방울이 보그르르 솟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그녀는 속눈썹을 내리깔며 옅게 뺨을 붉혔다.
‘걱정해주셨구나.’
누군가 자신을 염려해준다는 게 어색하면서도 기뻤다.
그래서인지, 아프지 않다고 씩씩하게 말하기보다는 조금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누운 침대 주위를 둘러본 마티어스가 중얼거렸다.
“침대에 있는 동안 지루하겠군.”
그리고 그는 달튼에게 준비해 온 것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마티어스의 선물을 확인한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그가 가져온 것은 귀여운 장난감들이었다.
눈과 코에 다이아몬드와 루비가 박힌 곰인형들.
머리맡에 걸어놓고 잘 수 있는 예쁜 깃털 드림캐쳐.
또, 겉에서 보면 물이 찰랑이는 것 같지만 속에는 물이 차 있지 않은 신기한 유리병에 가득 담긴 조개모양 초콜릿도 있었다.
선물을 받은 아리엘은 폭신한 곰인형을 꼭 껴안으며 생각했다.
‘……가끔 보면 마티어스님은 날 너무 아기로 여기시는 것 같아.’
조금 수줍기는 했지만, 아리엘은 그게 싫지 않았다.
마티어스 입장에서 보면 아리엘은 그의 아들보다도 어린 막내딸뻘이니 그렇게 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고 말이다.
그때, 아리엘과 마티어스가 다정하게 시간을 보내는 걸 바라보던 루시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굴 봤으니 이제 나가.”
마티어스를 향한 축객령이었다.
아리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있던 마티어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너야말로 이제 나가는 건 어떻겠냐. 넌 계속 아리엘 옆에 있었으니 이젠 내가 있을 차례다.”
“웃기지 마.”
루시안이 날선 기세를 흘리며 말했다.
“난 계속 여기 있을 거야. 꺼져.”
마티어스가 느리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너만 아리엘 옆에 있으려는 생각은 마라. 애초에 옆에 있으면서 애가 아픈 것도 몰랐다니.”
그가 낮게 혀를 찼다.
하지만 루시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고 오만한 눈으로 마티어스에게 경고했다.
“아리엘 옆에 얼씬거리지 마. 마티어스.”
아리엘은 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놔두면 공방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저, 마티어스님. 루시안.”
두 사람이 동시에 아리엘을 향해 돌아보았다.
아리엘은 두 남자의 다툼을 조금이라도 말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티어스가 말했다.
“아리엘, 어떠냐. 이 녀석보다 내가 옆에 있는 게 더 낫지 않으냐?”
루시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칼같이 반응했다.
“그럴 리가. 당연히 남편인 내가 옆에 있는 게 좋지.”
그리고 그가 위협하는 어조로 물었다.
“말해 봐, 아리엘라. 누가 옆에 있는 편이 더 좋지?”
어, 왠지 내 무덤을 내가 판 것 같은데…….
아리엘은 결국 입술을 앙다물고 단호하게 말해야 했다.
“두 분 다 나가요.”
* * *
의사 밀러가 침대를 떠나도 좋다고 허락하자마자 아리엘은 온실로 나갔다.
얼마 전 숲에서 가져온 어린 프라카티아 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프라카티아 나무는 흙에 민감한 편이라서 옮겨 심을 때 토양을 섞어가면서 천천히 적응시켜야 한다.
요즘 그녀가 루시안의 데뷔탕트 무도회 준비로 바빴던 터라 그 일은 주로 히스가 맡고 있었다.
히스는 큰 화분을 구해와서 프라카티아를 거기에 옮겨 심고, 마나로 살살 달래가며 정원 토양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중이었다.
아리엘이 온실로 들어서자 마티어스가 새로 심어준 커다란 오렌지 나무에서 시원한 향기가 풍겨왔다.
“왔구나! 너 아팠다며?”
히스가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들며 인사했다.
아리엘은 반가움에 활짝 웃었다.
“별로 안 아팠어. 잘 지냈어?”
“나야 뭐.”
코끝을 슥 문지른 히스가 아리엘의 안색을 살폈다.
“얼굴이 하얀 게 아직 아파 보이는데.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히스. 내 걱정했어?”
“거, 걱정은 무슨! 네가 며칠이나 안 나타나니까 나 혼자 프라카티아를 돌봐야 했잖아!”
피. 그전에도 혼자 돌보고 있었으면서.
얼굴이 새빨개지며 과하게 반응하는 히스를 보며 아리엘은 가볍게 키득거렸다.
“알겠어. 이제 나도 돌볼게. 히스가 잘 돌봐서 빨리 적응하고 있는 것 같네.”
히스가 팔짱을 끼고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흙 묻은 손을 탁탁 턴 그가 말했다.
“사실…… 이제 거의 다 됐어.”
“정말? 벌써 땅에 옮겨심어도 될 만큼 적응했다고?”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히스가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흙이 생각보다 잘 맞는 모양이야. 그리고 내가 좀…… 크흠, 이 녀석한테 매달려서 시간을 쏟았거든.”
“와, 히스! 고마워!”
아리엘은 기쁨에 겨워 히스를 껴안았다.
히스가 귓볼을 붉히며 버럭 말했다.
“야, 넌 좀! 너무 스스럼없잖아.”
안은 팔을 풀고 까르르 웃은 아리엘이 나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조만간 정원에 심으러 갈까?”
“그래.”
히스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리엘은 저택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정원 공간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근데 어디에 심지?”
그때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뭘, 어디에, 심는다고?”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사람이 휙 떨어져 내렸다.
온실에서 가장 큰 오렌지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것 같았다.
“루시안?”
그의 형체를 알아본 아리엘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고양잇과 맹수처럼 우아하게 착지한 루시안은 나란히 서 있는 아리엘과 히스를 번갈아 보았다.
조각 같은 그가 슬쩍 얼굴을 찌푸리자 주변 공기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얼어붙었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나 본데.”
루시안이 새파란 살기를 스멀스멀 퍼트리며 히스를 내려다보았다.
아리엘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요,”
“가만히 있어.”
나직한 목소리로 아리엘의 말을 막은 그가 히스에게 눈짓했다.
‘네 놈이 말해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얼어있던 히스가 황급히 변명했다.
“내, 내가, 얘 마법 공부에 필요한 나무 기르는 걸 도와주는 것뿐이야. 내가 하겠다고 한 거야. 얜 아무 잘못 없어.”
“…….”
삐딱한 시선으로 싸늘하게 히스를 바라보던 루시안이 말했다.
“집에도 벌레가 꼬여있는 줄은 몰랐군. ……꺼져.”
그리고 그는 손을 휘저어 히스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버렸다.
갑자기 사라진 히스 때문에 놀란 아리엘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
“놀랄 것 없어. 저택 중앙 홀로 보냈으니까.”
무심한 어조로 루시안이 내뱉었다.
아리엘은 울상을 지으며 외쳤다.
“루시안, 왜 내 말을 먼저 안 듣고……!”
그가 손을 뻗어 아리엘의 턱을 한 손으로 세지 않게 쥐었다.
“저것한테 널 감쌀 기회를 준 거잖아.”
“네?”
턱을 붙잡혀 들린 채 아리엘이 되묻자, 루시안이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위협하듯 말했다.
“사실이 뭐든, 저것이 널 위해 방패막이가 되지 않으면 바로 죽였을 거야.”
“……?!”
그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아리엘의 놀란 표정을 충분히 감상한 루시안이 그녀의 턱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가 배부른 맹수처럼 느긋하게 말했다.
“자. 이제 사실을 말해보실까, 꼬맹이?”
* * *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더듬더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브루노어에게 그녀가 졸라서 히스와 함께 마법 수업을 받게 된 것.
히스가 그 대가로 나머지 공부를 봐주고 있다는 것.
히스에게 브루노어의 숙제를 종종 도움받고 있다는 것도 말했다.
말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루시안에게 이 얘기를 한 번도 한 적 없다는 사실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바보 아리엘. 루시안한테 편지로 이야기했으면 됐잖아.’
그랬으면 오늘처럼 루시안이 자기가 모르는 일이 있다는 것에 화가 나지도 않았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오렌지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시안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누가 그런 짓들을 허락했지?”
아리엘은 그의 눈치를 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시안이요.”
“내가 언제?”
“루시안이 없는 동안은 다 내 권한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루시안이 말 사이를 유연하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발칙하게도 그걸 써먹으셨다?”
아리엘은 다시 울상을 지었다.
울망울망한 루비 눈동자가 애처롭게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싫으세요?”
“어.”
“그냥 히스랑 계속 같이 배우면 안 돼요?”
“…….”
아리엘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일락말락한 것을 본 루시안이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보는 건 반칙이지.
“……저것이 널 보는 눈깔이 마음에 안 들어.”
루시안이 무서운 기세를 잠시 접은 틈을 타서 아리엘은 얼른 말했다.
“히스는 착한 애예요.”
그녀가 히스를 감싸자 그가 이맛살을 좁히며 아리엘을 노려보았다.
“조심해. 너도 마음에 안 들려고 하니까.”
“으…….”
이쯤에서 아리엘은 좀 억울해졌다.
애초에 내가 누구 때문에 마법 공부에 매달렸는데.
그녀는 작은 주먹을 꼭 쥐고 항의했다.
“하, 하지만 루시안이 약한 마법사는 싫다고 했잖아요. 빨리 배우고 싶어서 그런 거란 말이에요.
히스가, 히스가 많이 도와줘서 이만큼 배운 거고…….”
루시안이 별안간 그녀의 양 뺨을 붙들어서 아리엘은 말을 멈췄다.
그의 아름다운 짙은 청색 눈동자와 눈을 맞추자 순간 숨이 멎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생각해서 그런 거라는 건가?”
기세는 여전히 위협적이었지만 그의 눈동자 안에 만족스러움이 엿보였다.
갑자기 그는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이 보였다.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짧게 내뱉었다.
“……그럼 일단은 허락해주지.”
“정말요?”
“그래.”
그는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대꾸했다.
“자기 권한으로 한 일을 번복하는 건 라카트옐이 아니니까.”
말하며 루시안은 아리엘의 뺨을 양옆에서 눌러 그녀의 입술을 금붕어처럼 만들었다.
“우으…… 놔주세요.”
“싫어. 이걸 보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데.”
에휴…… 별수 있나. 내가 익숙해져야지.
아리엘은 포기하고 금붕어 입술을 웅얼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근데요. 루시안은 그럼 실수하면 어떻게 해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 않나 말이다.
루시안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을 텐데.
자기가 한 일을 번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을 해결한다는 걸까?
루시안이 느긋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실수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그는 붉은 입술을 비틀며 악랄하게 선언했다.
“하더라도, 내 결정을 바꾸느니 아예 판을 엎어버리지.”
아…….
아리엘은 순간 살짝 몸을 떨었다.
왠지 그거 수틀리면 나랑 히스를 죽이겠다는 말로 들리는걸요.
말랑거리는 그녀의 뺨을 희롱하며 놀던 루시안이 얼굴을 놔 주었다.
아리엘은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몰래 그를 흘겼다.
내 볼은 장난감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때 루시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허락해주는 대신 조건이 있어.”
아리엘은 움찔 긴장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뭔데요?”
그가 화분에 심긴 아기 프라카티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것만으로도 프라카티아는 겁먹어 잔뜩 움츠러들며 가지를 뒤로 물렸다.
“이 나무쪼가리는 나랑 심으러 가.”
아리엘은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진짜요? 와!”
그녀는 활짝 웃었다.
뾰로통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르르 풀렸다.
루시안이랑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루시안이 일 년 중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다 보니 아리엘은 그와 보내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늘어나는 게 좋았다.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 그녀를 본 루시안이 미간을 찌푸리고 삐딱하게 물었다.
“그놈이랑 가는 것보다 나랑 가는 게 좋아?”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그걸 왜 비교해요?”
하지만 당장은 루시안의 영문 모를 질문보다 기쁨이 더 강렬했다.
그녀는 맑은 종소리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냥, 루시안이랑 가는 게 정말 좋아요!”
루시안의 얼굴에 기막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하. 정말이지 너는…….”
아리엘을 제 옆으로 끌어당긴 그가 히스를 다시 소환해서 눈앞에 데려왔다.
히스는 깜짝 놀란 것 같았고, 아리엘은 안도해서 외쳤다.
“히스!”
히스가 재빨리 아리엘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가 많이 혼났는지 알아보려는 것 같았다.
아리엘은 괜찮다는 표시로 눈을 깜박여 보였다.
“너.”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히스가 루시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중앙 홀로 내동댕이쳐졌다가 다시 멱살 잡혀 소환된 히스는 약간 심사가 꼬인 표정이었다.
하지만 무생물을 보듯 차갑고 잔혹한 루시안의 기세가 월등히 무서워서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브루노어 손자놈이라고?”
“……그래.”
루시안은 자기 때문에 겁에 질린 아기 프라카티아 화분을 히스 앞으로 홱 밀어놓았다.
“이거 제대로 돌봐서 심을 상태로 만들어 놔. 나중에 아리엘라와 내가 심으러 갈 거니까.”
히스가 입술을 꾹 물고 대답했다.
“알겠…… 어. 제대로 돌봐놓지.”
루시안은 그의 옆에 얌전히 붙어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어린 아내를 돌아보았다.
“가자.”
“네, ……꺅!”
고분고분 대답하자마자 아리엘은 루시안의 어깨에 가뿐히 들쳐 매어졌다.
놀라서 잠시 바동거린 그녀는 이내 체념하고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온실을 걸어 나가는 루시안의 뒤에서 히스가 놀람과 저항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들쳐 매여진 채로 히스에게 작은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 나중에 봐.’
두 사람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히스는 털썩 땅에 주저앉았다.
긴장과 함께 다리가 완전히 풀려버렸다.
“뭐야……? 그 괴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난폭하게 공간 이동을 당하던 경험은 정말 끔찍했다.
대공자의 온몸에 둘러진 폭력적인 기세도.
그의 존재감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보란 듯이 아리엘을 들쳐 매고 나가던 그 모습…….
“젠장.”
히스는 주저앉은 채 땅에 주먹을 내리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 * *
“예뻐라. 햇볕에 비치니 꼭 보석 같네요.”
수잔이 브러쉬로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빗어주며 말했다.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아리엘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응? 수잔 뭐라고 했어요?”
“어머. 아기 마님도, 참.”
후후 웃은 수잔이 반짝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아리엘에게 보여주었다.
햇볕이 머리카락에 닿아 화사한 빛을 반사했다.
“점점 예뻐지신다고요.”
“아…….”
아리엘은 쑥스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다시 머리를 빗어주며, 수잔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아기 마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요즘 자꾸만 불러도 못 들으시고…….”
“아니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아리엘은 사락사락 부드러운 빗질이 이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수잔을 걱정시키다니, 왠지 미안하네…….
하지만 요즘은 틈만 나면 자꾸 그때 생각이 난다.
무도회에서 만난 녹스 남작의 얼굴.
아리엘은 다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이번에 녹스 남작을 만남으로서 그녀가 확실히 깨달은 게 있었다.
‘과거의 일과 나는 완전히 상관없어진 게 아니야.’
물론 아리엘의 인생은 바뀌었다.
그녀는 더이상 후작가에서 학대당하지도, 악당에게 돈에 팔리지도 않을 것이다.
라카트옐 대공가의 보호를 받는 한 그녀를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제국에 많지 않으니까.
그리고 아리엘은 절대로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것이었다.
녹스 남작뿐 아니라 그녀가 조종당해서 해쳤던 모든 사람들을.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 걸까?’
그녀는 과거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자신의 삶을 바꿀 정도만 알고 있었다.
악당인 '그'가 왜 하필이면 그녀를 샀는지, 왜 녹스 남작과 몇몇 귀족들을 죽였는지, 왜 마지막에 라카트옐 가를 공격했는지.
아리엘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과거에는 조종당하는 것과 마법을 쓸 때마다 몸이 망가지는 것이 괴로워서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그때 내가 했던 일들의 의미를 알고 싶어.’
그러려면 녹스 남작에 대해서 먼저 알아봐야 했다.
그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으니까.
아리엘은 집중하느라 입술을 쫑긋하게 내밀고 고민했다.
‘내가 따로 정보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마티어스나 루시안에게 말하면 도와주겠지만, 그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왜 정보가 필요한지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그때 아리엘의 머릿속에서 반짝 묘안이 떠올랐다.
‘정보 길드!’
맞아. 정보를 사고파는 길드가 있었지.
과거에 그녀는 정보 길드에 드나든 적이 있었다.
시키는 일만 했기에 자세한 건 모르지만 몇 가지는 알았다.
제국의 수도에 정보 길드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와 접선하는 방법.
거기에 찾아가려면 해결해야 할 게 많았지만, 아리엘은 일단 머릿속에 그 생각을 잘 간직해 두었다.
“아기 마님! 다이아나님과 세실님이 도착하셨대요.”
“정말요?”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리엘의 이마 쪽 머리를 예쁘게 땋아 반묶음 해준 수잔이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얼른 나가보세요. 간식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아리엘은 총총 달려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와 수잔의 뺨에 키스했다.
“고마워요, 수잔.”
* * *
오랜만에 방문하는 세실과 다이아나는 아리엘을 만나자마자 꼭 안아주었다.
둘 다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고 있어서 아리엘은 그들에게 조그만 인형처럼 안겼다.
“귀염둥이! 아픈 건 다 나았다고?”
“응, 응. 다이아나.”
“아리엘. 그간 찾아오고 싶어 혼났다.”
“나도 보고 싶었어, 세실.”
세 친구는 사이좋게 온실로 향해서 티타임을 가졌다.
수잔이 하녀를 통해 내려보낸 디저트들은 소녀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그들은 스프레드 버터를 듬뿍 바른 크루아상을 먹으며 우아하게 복숭아 허니 티를 홀짝였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꿀빛의 머랭 쿠키와 국화꽃꿀이 든 롤케잌도 맛이 기가 막혔다.
다이아나는 약간 흥분해서 지난 무도회 이야기를 꺼냈다.
“아리엘 네가 입은 드레스 형식이 대유행 중이야. 팔과 어깨를 잇는 부분이 시폰으로 감싸진 거!”
그리고 그녀가 새침하게 덧붙였다.
“흥. 다들 그걸 입으면 황태자 전하나 대공자님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세실이 얼굴을 굳혔다.
“그런 가식은 질색이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잖아.”
“내 말이 그 말이야, 세실.”
아리엘은 간만에 두 친구가 의견을 모으는 게 좋아서 미소지었다.
그녀는 누가 자신을 따라하든, 그 의도가 뭐든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이아나가 별안간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래서. 신혼은 잘 즐기고 있니, 아리엘? 대공자님이 잘해주셔?
물론 무도회에서 보기로는 너한테서 눈을 못 떼는 것 같더라마는.”
그 말 뒤로 다이아나의 중얼거림이 덧붙여졌다.
“그 악명 높은 대공자에게서도 의외의 면모가 보였달까…….”
아리엘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히스와 마법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허락해줬던 거나, 그녀가 울 때 안아줬던 것을 생각하면 잘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응. 잘해주시는 것 같아.”
당연히 다이아나가 생각하는 그런 식은 아니지만.
아리엘의 대답을 들은 다이아나와 세실이 서로를 마주보며 발그레하게 볼을 붉혔다.
나이는 두 사람이 훨씬 많아도 둘은 아직 미혼의 영애였고, 아리엘은 어려도 어엿하게 결혼을 한 대공자비였다.
두 사람이 결혼 생활에 대해 자꾸만 궁금해하고 환상을 가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가장 친한 친구의 연애담이니 더 간질간질했다.
다이아나는 애써 상기된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흠, 흠. 너같이 귀여운 애가 아내인데 당연하지. 나라면 아카데미로 안 돌아가고 옆에만 붙어 있으려고 할걸?”
다이아나는 아무리 대공자라도 아리엘에게 안 반하고는 못 배길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아리엘의 연애담에 흐뭇한 것과 별개로 대공자는 영 못마땅했다.
대공자 루시안이 무도회에서 마구 흩뿌려댔던 살기를 생각하면 그녀는 아직도 몸이 떨렸다.
‘그런 무서운 인간이 우리 아리엘 신랑이라니. 내가 아리엘을 더 잘 돌봐줘야겠어.’
다이아나는 눈앞의 크림 복숭아 조각을 노려보며 다짐했다.
“내 얘기만 하지 말고 두 사람 이야기도 해줘.”
아리엘은 친구들 근황이 듣고 싶어서 졸랐다.
다이아나가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당분간은 일정이 꽉 차 있어. 가을 무도회에 불려다녀야 해서. 정말 귀찮다니까.”
“그렇구나…… 세실은?”
“나도 검 수련과 무도회 때문에 정신이 없다. 오라버니 무도회 파트너를 해야하거든. 막내 여동생은 아직 데뷔를 안 해서 말이야.”
둘 다 귀족계에 속해 있으니 봄 가을 시즌에 불려다니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무에서 자유로운 건 라카트옐 대공가 정도였다.
다이아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리엘은 무도회 안 오니? 대공자님 떼 놓고 우리끼리 무도회에서 만나면 재미있을 텐데.”
아리엘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자꾸만 녹스 남작의 얼굴이 떠올라서 무도회에 갈 수 없었다.
“나는 당분간은 못 갈 것 같아.”
친구들과 자주 못 만날 것 같다는 생각에 아리엘이 시무룩해지자 다이아나와 세실이 서둘러 말했다.
“괜찮아. 우리가 자주 연락하고 놀러올게.”
“그래. 아리엘 네가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든 일정을 취소하겠다.”
“고마워, 다들.”
다이아나는 아리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
“있잖아. 지난 번 네가 티 파티 때 장식했던 마법등 기억 나?”
“응.”
“그거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아. 마탑에서 만든 건 전혀 예쁘지가 않거든. 너희 집 것처럼 색색깔의 빛을 내지도 못하고.”
“그래. 나도 라카트옐 가의 마법등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는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났다.”
와. 그거 히스가 만든 건데!
아리엘은 히스의 실력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서 기뻐졌다.
“전해줘서 고마워. 히스가 진짜 좋아할거야.”
두 친구는 아리엘에게 들어서 히스에 대해 얼마쯤 알고 있었다.
대마법사 브루노어의 손자이자, 아리엘과 함께 마법을 배우는 평민 남자아이라는 것 정도?
아리엘이 기뻐하자 다이아나가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뭐야, 아리엘. 가끔 보면 너 그 애랑 굉장히 친해보이는데?”
“마법을 배우다보니 히스랑은 통하는 게 많거든.”
“흐응…… 그 뿐?”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뜻이야, 다이아나?”
다이아나가 지긋이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그 친구랑 너무 가까이 지내면 대공자님이 싫어하시지 않니?”
“어? 어떻게 알았어?”
부채를 살랑거리며 다이아나가 도도한 척을 했다.
“뻔하지. 질투하는 거야. 아무리 열한 살짜리라도 남자애잖아. 원래 남편들은 자기 여자 주변에 남자가 있는 걸 못 견딘단다.”
“질투?”
아리엘은 깜짝 놀라 되물은 뒤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돼. 루시안이…….”
그 때 발그레하게 볼을 붉힌 세실이 근엄하게 반응했다.
“다이아나. 대공자님과 아리엘 사이에는 부부 간의 깊은 믿음이 있으니 더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으아. 세실이 한 술 더 뜨잖아?
아리엘이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자 다이아나가 부채를 탁 접었다.
“어머, 세실. 그런 게 아니야. 남자는 그런 생물이 아니라구.”
두 사람은 언제 죽이 맞았느냐는 듯이 티격태격대기 시작했다.
“네가 틀렸다. 다이아나. 두 사람 사이에 진실한 사랑이 있으면 남자인 친구 정도는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아.”
“그렇지 않다니까 그러네. 남자는 무조건 다른 남자를 경계한다고.”
아리엘은 어린애들처럼 아웅다웅하는 둘을 보며 조금 난감해졌다.
‘둘 다 틀렸는데…….’
루시안이 히스에게 질투를 한다니 그것보다 우스운 건 없다.
두 남자 모두 나하고 그런 관계가 아닌걸?
하지만 친구들에게 그런 해명을 할 수는 없었다.
아리엘은 고개를 숙이고 하염없이 달콤한 복숭아 티만 저을 뿐이었다.
* * *
친구들이 돌아간 후 온실에서 쉬고 있는 아리엘에게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방금 그것들이 네 친구라는 것들인가?”
“루시안.”
온실의 긴 벤치에 기대서 나른하게 오후 햇살을 쬐고 있던 아리엘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는 루시안과 있는 게 좋지만, 노곤노곤할 때는 예외였다.
루시안은 그녀를 너무 쉽게 긴장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아리엘은 나른함을 떨치기 위해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네. 둘 다 정말 좋은 친구들이에요.”
“…….”
불만스럽게 침묵한 루시안이 티 테이블의 흰 의자 하나를 난폭하게 꿰차고 앉았다.
“그래서 저것들하고만 차를 마시는 건가?”
“네?”
“나랑도 마셔.”
“……?”
아리엘이 영 어리둥절한 표정이자 그가 협박하듯 내뱉었다.
“저것들이랑은 먹었잖아.”
“아, 알겠어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가끔 루시안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어.
아리엘은 수잔에게 다시 홍차와 티 푸드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수잔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빙그레 웃었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두 번째니까 아기 마님 디저트는 가벼운 걸로요.”
그렇게 아리엘은 그날의 두 번째 티 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 * *
하얀 테이블 위에 홍차 잔 두 개와 예쁘게 썰린 과일이 가지런히 놓인 접시가 올려졌다.
하녀들이 능숙한 솜씨로 번개같이 티 테이블을 세팅한 뒤 사라지자 어색한 침묵이 그 자리를 메웠다.
여태 아리엘과 루시안은 이런 간지러운 사교 시간을 나눈 적이 전혀 없었다.
첫만남에 대뜸 청혼을 한 당돌한 신부에, 내일이 결혼식이라는 걸 신부에게도 말해주지 않은 미친 신랑이다.
아리엘은 루시안이 손편지를 읽는 걸 상상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그가 차와 대화를 음미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일단 마시기로 했으니까…….’
아리엘은 묵직한 도자기 찻주전자를 두 손으로 조심조심 들어서 찻잔에 붉은 홍차를 따랐다.
쌉싸름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그녀는 루시안의 찻잔에도 차를 따라주었다.
“식기 전에 마셔요, 루시안.”
루시안은 자기 몫의 홍차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비스듬히 다리를 꼬았다.
“왜 인간들은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가 묘한 색기를 풍기는 눈물점 자리를 손으로 쓸며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아리엘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란셀 후작 부인에게 분명 그렇게 배웠다.
그래서 쓰디 쓴 홍차도 억지로 마시면서 사람들과 티 타임을 가지는걸?
사실 아리엘은 아직 홍차 맛을 제대로 느끼기엔 너무 어렸다.
하지만 그녀는 명색이 대공자비.
어리다는 이유로 차가 쓰다며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대로 아내 노릇을 하기로 루시안과 계약했으니까, 쓴 맛도 익숙해져야지.’
아리엘은 루시안 앞에서도 그런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찻잔을 들고 홍차를 입에 머금었다.
‘으, 써라.’
하지만 참아야지.
갓 내린 눈처럼 희고 앳된 얼굴이 쓴 맛을 견디는 걸 잠깐 보고있던 루시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리엘이 말릴 새도 없이 그녀의 찻잔에 각설탕을 풍덩 빠뜨렸다.
설탕 집게는 싹 무시하고 소드 마나를 사용해서.
뜨거운 차 안에 들어간 각설탕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앗-!”
자신의 의젓함이 설탕과 함께 녹아 사라지는 걸 본 아리엘이 외쳤다.
루시안은 옆에 있는 밀크포트에서 우유도 듬뿍 부어넣었다.
붉고 투명하고 쓰던 홍차는 금세 달콤하고 부드러운 밀크티로 변해버렸다.
잔뜩 울상을 짓는 아리엘에게 루시안이 오만하게 명령했다.
“마셔.”
“……네.”
아리엘은 세상 슬픈 얼굴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기도 모르게 사르르 행복한 미소를 지어 버렸다.
“맛있어요.”
루시안이 제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악랄하게 웃었다.
“역시 어린애 입맛.”
“윽…….”
그 말에 아리엘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하자 그의 붉은 입술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루시안이 상당히 일방적이게 명령했다.
“앞으로 그냥 홍차는 금지다.”
“네?”
“열네 살이 될 때까지는 우유를 넣어먹어.”
“하지만 그러면…….”
그러면 대공자비로서의 체면은 어디로 가는 거죠?
루시안이 타락한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자연스레 협박했다.
“계약 조항. 너는 내 말에 무조건 따르기로 했지.”
계약을 들고 나오자 아리엘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이건 나한테 너무 유리한 명령 아닌가?
강제로 차에 우유와 설탕을 타 먹을 수 있게 되다니.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그녀는 일단 대답했다.
“……알았어요.”
“좋아.”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 루시안이 우아하게 자기 찻잔을 집어들었다.
와. 루시안도 마신다.
아리엘은 쓴 차를 들이키는 그를 살며시 훔쳐보며 달콤한 밀크티를 홀짝거렸다.
밀크티가 기분좋게 달아서, 그리고 루시안이 차를 마시는 모습이 신기해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역시 단 건 안 먹네.’
루시안은 티 테이블 위의 단 디저트들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아리엘 몫으로 동그랗게 썰린 멜론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티 푸드는 플럼 케이크나 초콜릿같이 강한 단맛을 가진 디저트 종류였다.
그는 쓴 차만 들이키면서 밀크티에 푹 빠진 아리엘을 구경했다.
뜨거운 밀크티를 호호 불어 조금씩 먹는 그녀를 보며 루시안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할짝거리는 게 고양이 같아.”
으…… 또 놀린다.
이래도 루시안이 나를 그런 식으로 본다고, 다이아나?
‘이건 잘해야 애완 고양이 아니면…….’
아리엘의 생각은 갑자기 입술 위에 닿은 루시안의 손길에 놀라 멈춰버렸다.
그녀의 입술 위를 느릿하게 손으로 훑은 그가 피식 웃었다.
“우유 수염이나 묻히고.”
창피함에 아리엘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애 취급만 한단 말이야…….’
루시안이 붉은 혀를 내어 제 손에 묻은 우유거품을 핥았다.
아리엘이 할 땐 분명히 새끼 고양이가 우유 접시를 핥는 것 같이 무해하던 동작이, 그가 하니 상당히 위험해보였다.
아리엘의 얼굴은 완전히 새빨개져버렸다.
어느새 찻잔을 싹 비운 그가 냅킨으로 아무렇게나 입을 닦고 화제를 옮겼다.
“집 안을 싹 바꿨더군.”
* * *
“……?”
잠시 눈을 깜박거리던 아리엘은 이내 깨달았다.
‘아. 지난 번에 했던 명령에 대한 이야기구나.’
지난 번에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 루시안은 아리엘에게 이렇게 요구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집을 네 식대로 다 뜯어고치고 규칙도 바꿔 놔.’
그리고 아리엘은 그 명령에 따라 착실하게 대공저를 바꿔놓았다.
사시사철 똑같은 무채색의 회색 커튼에 따스한 색깔을 넣고, 무늬없는 흰 식기를 화사한 꽃무늬로 채웠다.
정원에는 새로 심은 예쁜 정원수들이 가득해졌다.
내정 예산이 그녀의 개인 금고로 들어가는 걸 막기위해 필사적으로 돈을 썼더니 격에 떨어지지 않게 집을 꾸밀 수 있었다.
‘그러고도 아직 예산이 한참 남아서 걱정이지만…….’
아무튼 루시안에게 달라졌다는 인상을 남겼다니 다행이다.
아리엘은 약간 뿌듯해져서 미소지었다.
그 때 루시안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내 방은 조금도 안 바뀌었더군.”
아리엘은 얼른 대답했다.
“루시안 방은 손 안 댔어요! 집을 꾸미는 건 대공자비로서의 일이지만, 루시안 방은 루시안 거니까…… 바꾸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애초에 그가 그녀에게 바꾸라고 한 건 이 저택이지 그 자신이 아니다.
아리엘은 허락을 받은 뒤 마티어스 주변 환경까지 바꿨으면서도 루시안의 것에는 절대 손대지 않았다.
진짜 아내였다면 대공자비가 대공자 방을 새로 꾸미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계약 아내였다.
아리엘은 거기까지는 자신이 욕심낼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아리엘의 대답을 들은 루시안이 잡아먹을 것같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삽시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리엘은 꼴깍 침을 삼켰다.
‘왜, 왜 저렇게 기분이 나빠보이지? 내가 뭐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뭐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집도 많이 바꾸었고, 혹시 몰라 그의 물건에 손대지도 않았는데.
한참 그렇게 노려보던 루시안이 잇새로 누른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좋아. 집을 다 바꿨으니 이제 뭘 더 바꾸고 싶지?”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리엘을 응시했다.
그녀가 온 집안을 바꿨으면서도 자신만 쏙 빼놓는 것이, 루시안은 아주 거슬렸다.
마치 그와 그녀는 계약이 아니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말이다.
‘나라고 대답해.’
루시안은 명령하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잔뜩 겁먹은 어린 아내에게서 나온 대답은 완전히 뜻밖이었다.
“그건…… 비밀이에요!”
아리엘은 오들오들 떨며 소리쳤다.
루시안이 넘겨짚은 것처럼, 그녀에게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한 다음 계획이 있었다.
라카트옐 대공가에 온 뒤로 줄곧 생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어.’
그에게 말하면 아무 소용없어지는 계획이니까.
아리엘은 다른 어떤 것보다, 마티어스와 루시안 사이의 관계를 바꿔보고 싶었다.
강하고 아름다운 두 부자는 사이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이걸 바꿔보려면 왜 그렇게 사이가 나쁜 건지 알아야 하는데 그녀는 그것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아리엘은 이 생각을 마음 속에만 품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비밀이야.’
아리엘의 대답을 들은 루시안이 어이를 상실한 듯 속눈썹을 치켜떴다.
“감히 나한테, 비밀이라고?”
“……네.”
“…….”
한참 그녀를 훑어보던 루시안이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넘겼다.
“유감이군.”
“뭐가요?”
“널 고문해서 실토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게.”
“그, 그게 왜 유감이에요?!”
아리엘은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기겁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그녀의 반응에 루시안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기울며 지는 오렌지빛 태양이 유리 온실 안을 가득 채우며 그를 비추었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흰 피부, 홀릴 듯한 마력을 지닌 푸른 눈.
곧은 콧날과 악마같이 붉은 입술.
그리고 그 아래로 뻗은 희고 긴 목선.
석양에 비친 루시안은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치명적이게 아름다웠다.
방금까지 그의 말에 질겁했음에도, 아리엘의 심장은 루시안을 보고 콩닥 뛰었다.
‘뭐, 뭐야…….’
그녀는 얼른 밀크티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심장 소리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했다.
‘역시 루시안 외모는 너무 위험해.’
* * *
다음날.
노집사 알렌은 달튼에게 전해받은 서류를 루시안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대공자님. 알렌입니다.”
“들어와.”
그 자신의 미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엄청나게 호화로운 방에 늘어져 있는 반나신의 소년이 그를 맞았다.
루시안은 느지막히 씻은 듯 아직 젖은 몸과 머리카락으로 긴 의자에 기대앉아있었다.
윗옷을 걸치지 않아 물기 어린 소년의 흰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체에게 유혹이자 공포인 그 아름다운 모습에도 알렌은 꿋꿋이 자기 임무를 다했다.
라카트옐 가를 대대로 모시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익숙해져야 할 모습이었다.
“재무관이 넘긴 서류입니다. 녹스 남작에 대한 모든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루시안이 손만 까닥여 서류를 받아들었다.
서류 뭉치는 납작했다.
북부 변방의 작은 영지를 가진 녹스 남작은 조사할 내용도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라카트옐 가의 정보망은 별 것 없는 중에도 녹스 남작의 머리카락 개수까지 알아내 왔을 것이다.
손의 물기를 마나로 대강 말린 뒤 서류를 넘기는 소년의 얼굴에 벽난로 불꽃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찰나 그의 눈동자 안에도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다.
“…….”
서류를 츠르륵 넘기며 죄다 확인한 루시안은 녹스 남작이 아리엘과 아무런 접점도 없음을 알아차렸다.
하나도 없다.
두 사람은 이전에 만난 적이 없었다.
하물며 아리엘의 친정인 루실리온 후작가와도 인연이 없다.
녹스 남작은 원하든 원치않든 아리엘에게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시안은 불쾌한 듯 혀를 찼다.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었다면 바로 죽여버렸을 텐데.
접점이 없으니 내막을 알 때까지는 살려두는 수밖에.
그때 창밖에서 맑은 풍경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안은 머리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고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알렌이 서둘러 그의 몸에 가운을 걸쳐주었다.
창으로 내려다보자 아래 정원에서 헥터, 랄프와 함께 꽃을 꺾으며 노는 아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작은 소녀의 품에는 꽃이 한 아름 안겨있었고, 아리엘의 뺨은 생기있게 발그레해져 사랑스러웠다.
“아기 마님. 이것 좀 보십시오.”
“와, 랄프! 어떻게 잡았어요?”
몸놀림이 잽싼 랄프가 소드마스터답게 한 손으로 잠자리를 잡아 아리엘에게 보여주었다.
덩치가 집채만한 헥터는 잠자리를 쫓아버리거나 죽이지 않고는 좀처럼 잡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날개를 오래 잡고 있으면 안 좋대요.”
아리엘이 말하자 랄프가 부드럽게 잠자리를 놓아주었다.
놓인 잠자리가 어리둥절하게 지그재그로 날다가, 아리엘을 보고 그녀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아리엘이 손을 뻗자 이끌린 듯 그녀의 손끝에 살포시 앉는다.
까르르, 아리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잠자리는 인사하는 것처럼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떠나갔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있던 알렌은 조심스레 루시안에게 말했다.
“가서 함께 어울리시지요.”
“감히 상관하지 마.”
즉시 사나운 대꾸가 떨어졌다.
알렌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루시안이 창가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느리게 창문에 손을 대었다.
다시 꽃을 모으며 즐거워하는 아리엘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뗐다.
“……그냥 보는 게 좋아.”
알렌은 놀란 듯 루시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내려가면 잠자리 잡기 같은 건 못하겠지. 미물이 날 피하는 건 당연하니까.”
그가 자조하듯 날카롭게 웃었다.
“지금도 내가 기세를 가두고 있지 않으면 반경 내에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거다.
그러니…….”
루시안은 좀 더 편하게 아리엘을 지켜보려는 듯 창틀에 걸터앉았다.
“저대로 내버려 둬.”
“…….”
알렌은 가슴 속에서 벅차오르는 흐뭇함을 느꼈다.
때론 증손자같이 애틋하고, 평소엔 지극히 어려운 상전인 작은 주인에게서도 변화가 느껴졌다.
루시안은 잔인하게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것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던 냉혹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녀에게 고정된 그의 눈빛은 잔혹함과는 달라 보였다.
새삼 노집사는 아리엘이 이 집에 들어온 1년 사이에 남자 느낌이 물씬 나게 바뀐 루시안을 훑어보았다.
소년은 키가 훌쩍 크고 날로 미색을 더해가면서도 점점 강한 수컷의 느낌을 덧입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면 나라 한두 개쯤은 손쉽게 무너뜨릴만한 남자가 될 것이다.
알렌은 아홉 달 전 루시안의 결혼식에서 보았던 두 소년소녀의 모습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결혼이란 참 놀라운 것이로구나.
소년은 남자가 되고, 비쩍 마르고 병든 새끼병아리 같던 소녀는 반짝이는 붉은 보석처럼 예쁘고 건강해졌다.
알렌은 지금의 이 행복이 오래 이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똑똑.
노집사의 상념을 깨며, 루시안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달튼입니다.”
“뭐야.”
루시안이 그를 안으로 들이지도 않고 싸늘하게 물었다.
달튼이 대답을 하지 않자 인내심 없이 마나로 문을 홱 열어젖힌다.
“대답 안 해?”
문 앞에 서 있는 재무관은 꽤나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황태자 디트리히 레온 드 슈테인 전하께서 방문하셨답니다.”
* * *
황태자의 이름을 들은 루시안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표정에도 아름다움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참 경이로운 미모였다.
“그것이 왜 찾아왔는데?”
“마물 토벌 건으로 황제 폐하의 전언을 가지고 오셨답니다.”
황족이 신하에게 직접 전언을 가지고 오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
그러니 이건 황가에서 라카트옐을 두려워하면서도 굉장히 존중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황제의 전언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루시안은 귀찮다는 듯 느슨히 턱을 치켜들었다.
“꺼지라고 해.”
재무관 달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저더러 반역죄로 죽으라시는 겁니까?
그는 애써 침착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대공님이 오늘 아침에 영지 시찰을 떠나셔서, 전언을 받을 분은 대공자님 밖에 안 계십니다.”
루시안이 그를 빤히 보다가 오만하게 대꾸했다.
“아리엘 귀에 안 들어가게 얌전히 돌아가면 살려는 주겠다고 해.”
“대공자니임!”
루시안은 짜증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시끄러워. 전언이나 받아놓고 쫓아내.”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달튼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라카트옐 가의 재무관이자 법무관이자 행정처리인으로 오래 살아온 그는 황족들이 대공가 핏줄에게 비굴할만큼 쩔쩔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황제나 황후, 황자와 황녀들도 예외없이 라카트옐을 상전 모시듯 했다.
‘이번 일도 분명 별문제 없이 넘어가겠지.’
그게 라카트옐이 지닌 힘이니까.
조금 더 루시안을 설득해보려던 그는 포기하고 뒤돌아섰다.
운이 나빠서 황제의 전언을 가지고 온 황태자가 저택 안에 발도 못 들이고 쫓겨났다는 소문이 퍼지더라도 이곳에는 아무런 타격도 없을 것이다.
그 때 루시안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아니. 마음이 바뀌었어. 그것을 집 안에 들여놔.”
“정말입니까?”
달튼은 놀라서 뒤돌아섰다.
루시안이 하얀 셔츠에 성의 없이 팔을 꿰며 고갯짓을 했다.
“그래. 대신 꼬맹이는 모르게.”
“대공자비님 몰래 모시라는 말씀이십니까?”
“…….”
루시안이 두 번 말하게 하면 죽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달튼은 허겁지겁 명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뒷문 쪽 소응접실로 모시죠.”
“좋아.”
뒤돌아서며 루시안이 비딱하게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제 발로 기어들어오다니.”
지난 번 데뷔 무도회에서 디트리히가 아리엘에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저는 아리엘 영애께 관심이 있습니다.’
루시안에게서 주변 사람의 뒷머리를 쭈뼛하게 만드는 냉기가 스쳤다.
“모든 헛소리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그 말을 들은 달튼은 자신이 황태자를 들이라고 권한 게 큰 잘못은 아니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왜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황태자에게 매우 미안해졌다.
* * *
아리엘이 황태자 디트리히의 방문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정원에서 헥터, 랄프와 함께 마음에 쏙 드는 꽃다발을 만든 그녀는 1층 응접실 화병이 비어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거기에 꽂아놔야지.’
수잔이 매달아준 리본은 바람을 맞아 느슨해졌고 손에서는 가을 풀내음이 났지만, 기분이 좋았다.
아리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소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소응접실의 유리 창살 문을 열고 나오는 두 사람과 마주쳤던 것이다.
“어, 루시안? ……황태자 전하?”
놀란 것은 아리엘뿐이 아니었다.
간발의 차이로 아리엘을 막지 못한 달튼은 대경실색했고, 루시안은 그런 그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황태자 디트리히는 놀란 눈으로 아리엘을 살폈다.
꽃다발을 한아름 든 어린 소녀는 자연스럽고 생기 넘쳐 보였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과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사랑스러웠다.
손님 앞에 서는 제대로 된 차림새가 아니라 꾸밈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낸 모습이라 더 따스함을 주었다.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눈이 동그래진 채 두 소년을 번갈아 보는 아리엘에게 디트리히가 먼저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아리엘라 대공자비. 잠시 폐하의 전언을 전달하느라 들렀습니다.”
“제국에 축복을. 안녕하셨어요.”
아리엘도 황급히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루시안이 그녀 옆자리를 꿰차며 그녀에게서 자연스럽게 꽃다발을 가로채 갔다.
그가 꽃향기를 슬쩍 맡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손님은 이제 돌아가는 참이야.”
아리엘은 상황을 파악하느라 눈동자를 굴렸다.
아무래도 디트리히는 오늘 루시안의 손님이었던 모양이다.
“오신 줄 몰랐어요. 알았다면 먼저 인사드리러 왔을 텐데.”
“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대공자에게 간단히 전달만 하러 온 거니까요.”
디트리히의 말투는 상냥했지만, 그의 안색은 창백하고 좋지 않아 보였다.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예쁜 녹색 눈동자가 지쳐 보였다.
‘어디 아프신 걸까?’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자그맣게 속삭였다.
“루시안. 전하께 다과는 뭘 드렸어요?”
“안 줬는데.”
루시안이 자기가 왜 그래야 하냐는 듯한 말투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디트리히가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잠시 머무르는 객인걸요.”
하지만 아리엘의 눈앞은 아찔해졌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제국의 황태자가 대공가에 와서 차 한 잔도 대접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건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이건 안주인의 명예가 걸린…….’
아니, 그 전에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걸려있었다.
평민 여염집에서도 손님이 오면 다과를 대접하는 게 예의인데, 일국의 황태자를 그냥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아리엘은 황급히 짧은 양팔을 벌리고 디트리히의 앞을 막아섰다.
“아, 안 돼요. 용건이 끝나셨더라도 대공가에 오셨으니 차 한 잔은 드시고 가셔야죠.”
“뭐?”
루시안이 기가 막힌 투로 내뱉었지만, 아리엘은 옆을 지나는 하녀를 불러 귓속말로 말했다.
“베키, 이 분을 대응접실로 모셔줘. 그리고 수잔에게 다과를 준비해달라고 전해.”
“예, 아기 마님.”
아리엘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디트리히에게 말했다.
“먼저 준비했어야 했는데. 바쁘시지 않다면 부디 잠시 차를 들며 머물러주시겠어요?”
디트리히가 못마땅한 듯 난폭하게 눈을 빛내는 루시안을 힐끗 본 뒤 빙긋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살아 나가고 싶다면 예의가 없어야 할 텐데.”
“루시안.”
혼내듯 루시안의 이름을 부른 아리엘은 하녀에게 황태자를 안내해주라는 눈짓을 보냈다.
하녀 베키가 눈치 빠르게 디트리히를 데리고 사라졌다.
디트리히가 간 후 둘만 남자 루시안은 아리엘의 가느다란 팔을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왜 저것한테 네 시간을 내줘?”
이 사람이 정말……
아리엘은 뺨을 잔뜩 부풀렸다.
몰라서 묻는 걸까?
당연히 루시안하고 한 계약 때문이죠.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기로 한.
그녀는 앳된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난 루시안 아내고, 대공자비잖아요. 안주인으로서 절대 손님을 그냥 보내면 안 된다고 배웠단 말이에요.”
꽃다발을 묶으려고 가지고 있던 리본까지도 루시안의 손에 톡 떠맡긴 아리엘은 쌩 뒤돌아섰다.
“루시안은 좀 있다가 와요.”
손님을 적적하게 하면 안된다고 했던 란셀 후작 부인의 말이 귓전에 울려왔다.
빨리 가 봐야겠어.
아리엘은 서둘러 대응접실로 향했다.
“…….”
“…….”
아리엘이 떠난 자리에는 루시안과 달튼만이 남아서 꼬여버린 상황을 느끼고 있었다.
루시안이 부글부글 끓는 표정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
“대체 저 꼬맹이한테 누가 안주인 자리를 준 거야?”
달튼이 대답했다.
“대공님이랑 대공자님이요.”
“…….”
평소같으면 달튼의 멱살부터 움켜잡았을 루시안이지만 지금 그는 자기 자신에게 더 어이가 없는 것 같았다.
“내 덫에 걸린 기분이군. 처음이야, 이런 느낌.”
잇새로 내뱉은 그는 화를 식히려는 듯 바깥으로 통하는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아리엘이 사라진 쪽을 한 번 뒤돌아본 그는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제길. 그것이랑 같이 있을 텐데.”
* * *
황태자 디트리히가 안내받은 대응접실은 중후하고 무거운 원목 나무로 이루어진 방이었다.
거대한 응접실의 한 군데도 빠짐없이 깊은 사치스러움이 묻어났다.
처음으로 라카트옐 가에 방문하는 것인 디트리히는 가볍게 응접실을 둘러본 뒤 아리엘에게 말했다.
“집이 아름답군요. 안은 대공자비께서 꾸미신 겁니까?”
“네. 꽃병이랑, 몇 가지는요.”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황후께서도 오스비안 풍의 화병을 좋아하십니다.”
“그렇다고 황후 마마의 높으신 안목과 제 안목을 똑같이 여기시면 안 돼요.”
손님을 적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시작한 대화지만 디트리히가 알아봐주니 대화 자체도 즐거웠다.
디트리히는 기품있는 왕자님답게 예술이나 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무척 머리가 좋고 똑똑해, 대화 주제가 뭐든 식견이 있었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다과가 들어와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디트리히가 연녹색의 녹차를 한 모금 넘기고 미소지었다.
“영애를 뵐 수 있다니 기쁘군요. 자주 놀러 와야겠습니다.”
아리엘도 방긋 마주 미소지었다.
“저도 좋아요. 루시안의 아카데미 친구들이 오는 일이 거의 없거든요.”
내심 루시안이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던 그녀는 디트리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디트리히가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대공자는 보통 도사린 맹수처럼 조용히 지냅니다.”
도사린 맹수……
예사롭지 않은 표현인데요.
문득 걱정된 아리엘은 조심스레 질문했다.
“저기, 루시안이 괴롭히는 사람…… 같은 건 없죠?”
디트리히가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골드 블론드의 화려한 금발이 흰빛을 내며 흔들렸다.
“그를 자극하지 않는다면 특별히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가 맑은 녹안을 아리엘에게 고정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떤 남자든 그의 옆에 있으면 괴로울 겁니다.”
“어째서요?”
“대공자의 우월함이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자근자근 짓밟거든요.”
성스러운 기운을 두른 소년이 그렇게 말하니까 더없이 진실되게 들렸다.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그, 그런 식이라면…… 제 걱정은 필요없겠네요.”
“예. 아 참, 영애…….”
아리엘은 문득 디트리히가 어느새 그녀를 자연스럽게 '영애'라고 칭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전하.”
“예?”
“제가 지난 번에 영애라는 호칭은 삼가 달라고 부탁드렸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아…….”
디트리히가 스스로도 놀란 듯 말을 멈추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어리셔서 결혼하셨다는게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군요.”
아리엘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당장 주변 사람들만 해도 자신을 '대공가 안주인'으로는 여겨주지만, '결혼할만큼 자란 여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고작 열 살일 뿐이니까.
디트리히가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제 주위의 일찍 결혼한 사람들은 아직 영애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하던데. 아리엘 영애께서는 아닙니까?”
“……”
아리엘은 조금 망설였다. 영애 대접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그녀는 디트리히가 '아리엘 영애'라고 부르는 표현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어린애가 아니라 레이디로 존중받는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대공자비로서의 자신도 좋았다.
이 삶은 그녀가 선택해서 바꾼 삶이었다.
“아니에요. 대공자비로 불러주세요.”
그리고 곧 루시안도 올 텐테, 루시안이 그 호칭을 들으면 살인이 날지도 몰랐다.
디트리히와 둘만 있을 때 영애라는 호칭을 듣는 것은 별 상관없지만…….
‘루시안은 자신의 영역에 대단히 민감하니까.’
디트리히가 의외라는 듯 아리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그가 검 한 번 쥐어본 적 없을 것 같이 깨끗한 양손을 깍지끼어 잡았다.
그의 눈동자에 예리한 빛이 지나갔다.
“하지만, 몇 년 내로 다시 영애라는 호칭을 듣게 되실 텐데요.”
“……무슨 뜻이시죠?”
디트리히가 차분히 미소지었다.
“루시안과 이혼하실 거 압니다. 계약이란 것은 그런 거니까요.”
아리엘은 말문이 막혀서 입을 꾹 다물었다.
대체 이 사람은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서부터 추리해내는 걸까?
그녀는 간신히 놀란 티를 감추고 삐약삐약 말했다.
“먼저 결혼한 사람으로서 충고드리자면, 결혼이란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답니다. 넘겨짚으시는 건 잘못이에요.”
디트리히가 성스러운 느낌이 나는 미소를 싱긋 지었다.
“그러셔도 두 사람 사이는 믿지 않습니다.”
정말. 왜 이렇게 똑똑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믿는데.
아리엘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디트리히가 찻잔을 들었다가 달그락 내려놓았다.
“사실 전 아리엘 영애가 아깝습니다.”
“네……?”
“영애는 분명 따스하고 좋은 분이죠.”
그가 조용히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여태까지 대공가 여인들은 일찍 죽었습니다. 떠도는 말처럼 저주 따위가 아니라 통계가 그렇습니다.
저는…… 영애가 이른 나이에 이슬처럼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
디트리히의 말은 아리엘의 데뷔탕트 때 실비아를 비롯한 여자들 무리가 악담하듯 퍼부었던 말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에게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말하는 디트리히에게서는 악의를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은 꼭 진심같이 들렸다.
디트리히가 진지하게 말했다.
“대공자에게서 도망갈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도망가시라는 겁니다.”
도망가라고.
그 순간 아리엘은 루시안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진짜 겁이 많다면 날 보고 도망쳤어야지. 결혼하자고 조를 게 아니라.’
어째서 둘 다 내가 루시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혼란을 느끼던 그녀는 어쩐지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난 루시안에게 오지 않았더라면 열일곱 생일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걸.’
그것도 너덜너덜하게 엉망이 된 채 스러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루시안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이든 아리엘은 잃을 게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목숨마저도.
아리엘은 디트리히를 마주 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디트리히가 진심으로 놀란 듯 침묵했다.
잠시 후 입을 연 그는 감탄한 어조였다.
“영애는 늘 저를 놀라게 합니다.”
경의를 표하듯 색소가 옅은 금빛 속눈썹을 잠시 내리깐 그가 말했다.
“하지만. 기억해주세요. 저는 당신에게 다른 문을 열어주고 싶습니다. 다치지 않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문 말입니다.”
아리엘은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손바닥 안이 땀으로 촉촉했다.
“저에게는 필요 없는 문일 거예요. 하지만 여쭈고 싶어요. 왜 저에게 그런 관용을 베푸시려 하는 거죠?”
디트리히가 옅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순식간에 주위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미소였다.
“지난번에 제가 한 말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씀을?”
디트리히가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저에게 오는 방법도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
아리엘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이 분이 지금, 지난번에 내게 관심이 있다고 했던 말을 꺼낸 건가?
그때 쾅. 하고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아리엘은 이제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루시안.”
응접실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루시안이 황태자와 그녀가 마주 앉은 테이블에 비스듬히 걸터 앉아 아리엘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하여간 착해빠져가지고는.”
나직이 으르렁거린 루시안이 디트리히에게 시선을 돌렸다.
섬찟한 기세가 말과 함께 흘러나왔다.
“차 다 들었나?”
“거의 다 마신 참이다.”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편안한 말투를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디트리히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말했다.
“객을 전송하는 건 남자 몫이야. 들어가 봐.”
“네.”
아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디트리히에게 인사한 뒤, 총총 방을 나섰다.
나가면서 문득 걱정이 되었다.
‘혹시 나랑 황태자 전하 대화를 다 들은 건 아니겠지?’
들었다면 루시안 성격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 입장에서야 알쏭달쏭한 이야기만 하는 디트리히가 딱히 꺼려지진 않았지만…… 루시안은 다르니까.
‘괜찮아야 할 텐데…….’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 * *
대공저를 나서면서 디트리히는 발걸음을 멈추고 루시안에게 돌아섰다.
으리으리한 대공가 현관 계단 저 멀리에 그를 수행해 온 수행단과 마차 행렬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아있었다.
아리엘이 사라진 후 루시안의 기세는 매우 날카로워서 디트리히가 숨을 쉴 때마다 폐와 심장에 주기적으로 고통이 찾아왔다.
그런 루시안에게 먼저 말을 꺼낸다는 건 디트리히에게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대공가 여인들이 예외 없이 일찍 죽는 건 당연했지.”
루시안이 오만하고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디트리히는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항상 곧 죽을 여인만 집에 들였으니까. 안 그런가?”
황태자 디트리히는 황가의 핏줄이자 차기 황제가 될 사람이기에 라카트옐 가의 정체를 알고있었다.
대대로 황위를 이을 직계 남자 황족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이었다.
그래서 디트리히는 눈앞의 지독히도 강하고 아름다운 또래의 소년이 지금, 끔찍이도 두려웠다.
“라카트옐은 1년도 못 살 병든 귀족 여인을 데려오거나, 당장 단두대에 가야할 반역 가문의 딸만을 데려와 대공비로 앉혔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예견된 자기 수명보다는 조금 더 살고 죽었지.”
디트리히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잖아. 너의 대공자비는 아프지도, 반역한 가문도 아니야. 그런 소녀를 죽일 셈인가?”
“…….”
루시안의 푸른 눈이 심연의 바다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
처음 소응접실에서 자기 것에 감히 손대지 말라고 난폭하게 경고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이윽고 루시안이 입술을 열어 말했다.
“그래. 아리엘은 다르다.”
디트리히는 루시안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뭐? 지금 라카트옐이…… 일개 소녀에게 ‘다르다’ 고 말한 건가?
충격을 충분히 느낄 틈도 없이 디트리히는 루시안에 의해 멱살이 틀어잡혀 들어 올려졌다.
루시안은 손을 쓰지 않은 채 소드 마나로만 디트리히를 공중에 잡아채 두었다.
숨이 막힌 디트리히에게서 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윽…….”
어느새 가까이 온 루시안의 냉혹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울렸다.
“하지만 너 같은 것이 상상하지도 못할 방식으로 다르지.”
그의 기세가 점점 디트리히의 숨통을 죄어들었다. 디트리히는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그러니 한 번만 더 내 아내에게 관심 운운했다가는. 네 죽음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친 루시안이 던지듯 디트리히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의 붉은 입술이 악랄하게 비틀렸다.
“네 말 한마디로 제국 전체가 연좌제로 소멸하는 걸 보고 싶다면 모를까.”
소름 끼치도록 자연스럽게 협박한 그가 개를 쫓아내듯 문 바깥쪽으로 턱짓했다.
디트리히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루시안이 손으로 딱 소리를 내 디트리히를 수행해 온 황실 수행단을 소환했다.
무심하게 뒤돌아선 그가 디트리히에게 말했다.
“꺼져. 그리고 다신 놀러 오지 마.”
* * *
루시안이 디트리히를 보내고 돌아왔을 무렵, 아리엘은 앞뜰 정원에 마티어스가 놓아준 나무 그네에 앉아있었다.
정원에 있는 나무 그네는 지붕이 달린 벤치 모양의 로맨틱한 디자인이었다.
아리엘을 발견한 루시안이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그네 위 가로대에 손을 짚은 그가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밀어줄까?”
“정말요?”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시안이 이런 제안을 하다니.
그네를 밀어달라는 게 아니라, 밀어준다고?
그녀가 입술만 뻐금거리자 루시안이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날 못 믿어?”
그가 손을 까딱여 마나로 그네의 등을 밀자, 아리엘의 몸이 그네와 함께 가뿐히 둥실 밀려 올라갔다.
“와! 재밌어요.”
아리엘은 키득거리며 그네 팔걸이를 붙잡았다.
루시안이 흡족한 듯 다시 손을 튕겨주었다.
“꺅.”
이번에는 그네가 훨씬 더 빠르게 움직였다.
아리엘은 높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반응하듯 그네가 계속 빨라졌다.
어 근데…….
이거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잠깐…… 루시안!”
아리엘이 겁먹은 목소리로 루시안을 부르자 그네가 공중에서 뚝 움직임을 멈췄다.
“왜.”
“너무 빨라서…… 어지러워요.”
루시안이 전혀 이해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네에서 힘을 거뒀다.
그네는 다시 얌전히 앞뒤로 흔들리며 잠잠해졌다.
“얼마나 약해 빠졌길래 이 정도에 어지러워?”
으…… 루시안은 평생 다른 사람들 이해 못할 거야.
아리엘은 그가 그네를 더 밀어주겠다고 하기 전에 얼른 그녀가 앉은 벤치 그네 옆자리를 두드렸다.
“같이 앉아요, 루시안.”
“…….”
비딱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던 루시안이 우아한 동작으로 몸을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아리엘은 느리게 발장구를 치며, 요람같이 흔들리는 그네의 움직임을 느꼈다.
루시안이 앉아주니 그네 위가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가지고 있던 주머니를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헥터가 찾아줬어요.”
그녀가 그에게 보여준 것은 동그란 모양으로 굳은 송진이었다.
그네 팔걸이에 팔꿈치를 짚고 기대어 있던 루시안이 흘끗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호박(amber)이 되기에는 한참 오랜 시간이 남았지만, 제법 영롱한 주황 빛깔을 띤 송진 덩이 안에 꽃잎 한 장이 생생히 갇혀있었다.
아리엘은 즐겁게 재잘거렸다.
“이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호박이 된대요. 예쁘죠.”
“호박이 좋아?”
루시안이 요염한 말투로 물었다.
아리엘이 눈을 깜박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자 그가 재차 물었다.
“방들을 호박으로만 둘러서 만들어줄까? 바닥부터 천장까지, 호박방으로.”
아리엘의 조그만 분홍빛 입술이 뾰로통해졌다.
“……루시안 바보. 그 안에는 꽃잎이 안 들어있잖아요.”
루시안이 흐음, 소리를 내며 한 손으로 제 턱선을 어루만졌다.
“까다롭네. 내 아내는.”
아리엘은 그의 희고 긴 손가락이 예쁜 얼굴 위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부끄러워져서 얼른 눈을 돌렸다.
“있잖아요. 헥터한테 루시안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
루시안이 무심하게 되물었다.
“루시안에게 아기 때가 있었다니 상상이 안 돼요.”
말하고 아리엘은 작게 키득거렸다.
일찍 먼저 태어나서 루시안 아기 시절을 못 본게 정말 아쉬웠다.
그 정도로 루시안은 처음부터 소년 모습을 하고 태어난 신이나 천사 같았다.
그가 아리엘의 말랑한 뺨을 손가락으로 잡았다놓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난 네가 자란 모습이 더 상상 안 돼. 대체 언제 크는 거야?”
“시, 시간이 지나야 크죠.”
루시안이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손에 걸며 희롱했다.
“크고 있긴 해?”
윽…… 아리엘은 빨리 흐르지 않는 시간을 원망하며 뺨을 잔뜩 부풀렸다.
“헥터는 사람마다 크는 속도가 다 다르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이 나지막하게 쿡쿡거렸다.
“아, 그래. 확실히 헥터 녀석이라면 자라는데 시간이 필요했겠군.”
아마도 헥터의 산채같이 어마어마한 덩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심지어 루시안은 고목나무와 매미같은 헥터와 아리엘의 덩치 차이를 좀 재미있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라…… 기분이 별로 안 나빠 보이네?’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평소 루시안은 그녀가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잔이나 하녀들 이야기를 해도 불쾌해 했다.
지난 무도회 때는 아리엘이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만 해도, “내 앞에서 다른 것들 이야기 꺼내지 마.”라며 오만상을 다 쓰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헥터 이야기를 할 때는 그다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 것 같다.
‘알콜에 면역이 없다면서 헥터가 억지로 준 술도 마셨었고…….’
그때만 해도 아리엘은 루시안이 술을 반강제로 먹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를 겪어보니 루시안이 봐 주지 않았다면 헥터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헥터는 여러 면에서 루시안에게 예외로 여겨지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리엘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음…… 루시안한테 헥터는 중요한 사람인가 봐요.”
루시안이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무관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다른 것들에 비해서는.”
“어째서요?”
호기심을 비치는 그녀를 보며 루시안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라카트옐은 인간에게 어떤 감흥도 느끼지 않아. 어떤 인간이든 평등하게 하찮지. 하지만 아무리 개미를 하찮게 여기는 사자라도, 자기 목숨을 건진 개미라면?”
스스로에게 질문하듯 말끝을 올린 루시안이 그림같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기억하겠지. 그와 나는 그런 거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헥터가 루시안을 살려준 적이 있어요?”
찰나 그의 눈빛에 고통에 가까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랬구나…….”
아리엘은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멈추었다.
사실 그 일에 대해서 더 물어보고 싶었다.
루시안이 왜 죽을 뻔했는지, 헥터는 살려주고도 어떻게 스스로는 모를 수가 있는지.
하지만 루시안이 아주 잠시 내비친 표정 때문일까.
그녀는 왠지 선뜻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아리엘은 루시안 쪽으로 조금 당겨 앉아 위로하듯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루시안의 심장 소리가 두근두근 또렷이 들려왔다.
이런데도 왜 루시안은 자기에게 심장이 없다고 말하는걸까?
“…….”
아리엘은 그의 가슴에 기댄 채 오늘 일을 되새겼다.
그녀는 여태 루시안 옆에 있으면서 그가 다른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확연히 느껴왔다.
대부분 루시안은 대공저 밖 인간들을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 대했다.
공기나 먼지 정도로 무관심하게 여긴다고 할까.
하지만 아리엘이 느끼기에 두 사람만은 예외였다.
첫 번째로는 호위기사 헥터, 두 번째로는 황태자 디트리히.
둘을 대할 때면 루시안의 태도는 조금 달라졌다.
모든 것을 당연스럽게 제 발 아래로 두는 그가 그 두 사람은 유난히 성가시게 여기는 듯 했다.
디트리히가 아리엘의 차 대접을 받겠다고 할 때 곧장 기세를 개방해 쫓아내지 않은 것만 봐도 그랬다.
‘당연히 헥터는 은인이고, 황태자 전하는 신분이 더 높으니까 그렇겠지만…….’
왠지 중요한 이유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야…….
그녀는 루시안의 가슴에 기댄 채 웅얼거리며 말했다.
“루시안.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
“알렌이 그랬어요. 라카트옐이라도 개미의 우두머리하고는 대화한다고요. 루시안, 그거 혹시…… 황태자 전하 얘기인 거예요?”
그는 한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의아해진 아리엘은 루시안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루시안?”
루시안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아리엘은 흠칫했다.
역시 내가 너무 주제넘었나?
그래서 화가 난 걸까?
아리엘이 막 어깨를 움츠리려는 순간 그가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움켜쥐고 휙 들어 올렸다.
“아리엘라 라카트옐.”
아리엘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루시안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네 예리함이 왜 나에게까지 닿지 않는지 모르겠어.”
그가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네 본능은 경고하지 않는 건가? 경계하라고. 나를 멀리하라고.”
“…….”
아리엘은 숨을 죽인 채 눈만 깜박거렸다.
루시안은 그녀가 겁먹고 물러서기를 기대하는 듯 무서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리엘이 도망갈 생각 없이 가만히 있자 그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이건 겁이 없는 건지…….”
신음같이 내뱉은 그가 아리엘의 얼굴에서 거칠게 손을 떼고 물러났다.
그리고 먹이를 어디서부터 먹을까 고민하는 듯한 시선으로 한참 그녀를 뜯어보았다.
아리엘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한동안 탐색하듯 보기만 하던 루시안이 이윽고 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듯 감쌌다.
긴장한 아리엘은 뜨거운 그의 손이 닿는 감각에 살짝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앗……?”
루시안이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읏…… 루시안. ……루시안!”
순식간에 머리가 엉망이 된 아리엘은 낑낑거리며 소리쳤다.
루시안은 벌을 주는 것처럼 짓궂고 집요하게 그녀의 머리를 흐트러뜨려 놓았다.
아리엘은 몸을 바동거리며 그의 손을 피하다가 포기하고 억울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정말…….”
수잔이 곱게 빗어준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이 정수리에서 헝클어져 몽글몽글해져 있었다.
그것을 본 루시안이 무서운 표정을 거두고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픽 웃었다.
아리엘은 수습 불가한 머리카락을 시무룩하게 감싸 쥐었다.
“이게 뭐예요…….”
악마처럼 웃은 루시안이 퇴폐적이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들어가.”
“네에?”
“네 몸 체온이 떨어진 게 여기까지 느껴지니까. 그리고 그게 난 아주, 못마땅하거든.”
말한 그는 아리엘을 그네에서 달랑 들어올려 내렸다.
종이 인형을 들 듯 가벼운 손놀림이었다.
루시안은 바깥에 더 있다가 들어갈 기색이라 아리엘은 머뭇거렸다.
“루시안은…… 같이 안 들어가요?”
그가 흥미로운 기색으로 되물었다.
“머리 헝클어진 걸로 부족해?”
“아뇨!”
아리엘은 후다닥 도망치며 외쳤다.
뒤에서 루시안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택 안까지 전속력으로 달려 들어온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앙 계단 난간에 기대어 섰다.
“…….”
아리엘은 숨을 고르며, 헥터 이야기를 하던 루시안의 장난기 어린 표정과 디트리히를 몹시 거슬려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 모습들도 있구나…….’
그녀의 입술에 배싯 미소가 새어 나왔다.
달린 직후여서인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쩐지 오늘은 루시안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된 기분이 들어.’
* * *
그 날은 날씨가 올해 가을 들어 가장 쾌청하고 맑았다.
하늘은 조각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햇살은 적당히 따뜻했다.
일 년 내내 집에만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당장 피크닉 바구니를 챙겨 나들이를 나가고 싶어질만큼 달콤한 날씨.
그런 날 아침에 눈을 뜬 아리엘은 그녀의 방 창문으로 날씨를 내다보며 잔뜩 들떴다.
아침식사를 가지고 온 수잔이 웃으며 얼른 식탁에 앉으시라고 말할 정도였다.
“수잔. 저기 호수 좀 봐요. 물새들이 와서 헤엄을 치고 있어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의 표면은 꼭 보석 같았다.
아리엘은 창가에 앉아 턱을 고이고 기분좋게 햇볕을 쬐었다.
수잔이 창가로 아침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이따 닭고기 햄을 넣은 샌드위치를 싸 드릴 테니 밖에 놀러 갔다 오세요.”
“그럴까요?”
“대공자님하고 같이 나가셔도 되구요.”
수잔의 마지막 말은 장난스러웠다.
아리엘은 루시안과 소풍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살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는 보들보들한 스크램블 에그와 토마토 카프리제, 버터향이 물씬 풍기는 부드러운 브리오슈였다.
아리엘은 스푼으로 고소한 스크램블 에그를 한 입 떠먹었다.
혀에 닿자마자 녹듯 사라져버리는 계란 요리는 아침 식사로 일품이었다.
주방장 홀슨은 항상 거품처럼 사르르 녹는 계란 요리를 만들어주곤 했다.
‘샌드위치에 계란도 넣어달라고 해야지.’
가운데가 볼록 솟아올라 있는 촉촉한 브리오슈를 베어물며 아리엘은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그런데 그녀가 아침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루시안이 들이닥쳤다.
“준비하고 나와.”
“네? 왜요?”
아리엘이 놀라서 묻자 루시안이 몰라서 묻느냐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기억 안 나?”
제, 제가 약속을 했던가요?
아리엘은 자신이 루시안과 오늘 외출하기로 한 적이 있는지 기억해내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루시안. 우리 어디 가요?”
“…….”
괘씸하단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루시안이 마디마다 끊어가며 대답했다.
“그 나무쪼가리, 심으러 가기로, 했잖아.”
으응?
‘그게 오늘이라고는 안 했잖아요?’
아리엘은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그녀의 하얀 뺨을 누르며 사납게 을렀다.
“빨리 준비해.”
아리엘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이 나가자 옆에서 식기를 정리하고 있던 수잔이 웃으며 노래부르듯 말했다.
“어머나. 샌드위치를 두 배로 싸야겠네요.”
“응. 많이 싸줘요, 수잔.”
수잔의 눈동자가 의욕적으로 빛났다.
“그리고 나들이 복장 예쁘게 꾸며드릴게요.”
* * *
라카트옐 저택의 정원은 하도 넓어서 피크닉을 굳이 교외까지 나갈 필요가 없었다.
정원 안에 호수도 있고, 작은 숲도 있고, 관상수가 아름다운 뒤뜰이나 잔디밭도 있으니 말이다.
아리엘과 루시안이 아기 프라카티아를 들고 걷는 동안 하녀인 안나가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뒤를 따랐다.
천이 덮인 피크닉 바구니 안에서 수잔이 직접 만든 청포도 주스병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주스 병에는 브루노어가 결빙 마법을 걸어놓아 내내 시원할 것이다.
피크닉 테이블과 의자를 든 헥터와 랄프도 멀찍이서 따라왔다.
루시안은 블랙 가든 쪽 공터로 향했다.
블랙 가든은 검은 돌길이 깔려있는데, 가까운 연무장부터 쭉 따라가다보면 검을 든 사람 모양의 석상들이 나온다.
거기서 더 들어가면 고목 나무가 우거진 공터가 나타났다.
화이트 가든처럼 아름다운 분수대나 아기자기한 장미 아치 같은 건 없지만, 담쟁이 덩굴과 이끼가 뒤덮인 검은 석조 문이나 무너진 성벽터 같은 것들이 고풍스럽고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근데 나무 심을만한 데가 있으려나?’
아리엘은 루시안의 손에 잡혀서 잔뜩 겁먹은 아기 프라카티아 나무를 힐끔거렸다.
지금은 조그마해서 어디에든 심을 수 있지만 곧 커질 텐데 괜찮을까?
그녀가 갸웃거리는데 루시안이 한 자리를 짚었다.
“저 정도면 되겠군.”
아름다운 고목들 사이로 들어가자 큰 나무 하나 자랄만한 공간이 나타났다.
아리엘은 그걸 보고 방긋 미소지었다.
“좋아요.”
여기라면 조용하고 저택이랑도 아주 멀진 않아서 자주 와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엘은 마나로 땅을 파고 조심조심 나무를 옮겨심었다.
나무가 새 땅에 적응해야하기 때문에 겁만 주는 루시안은 잠시 떨어져 있었다.
“착하지.”
아리엘은 마나를 불어넣어서 살살 달래가며 프라카티아를 옮겨심고 흙을 덮어준 뒤 토닥토닥 두드렸다.
가을 바람이 아리엘의 얼굴에 송글 맺힌 땀을 금방 가져가 버렸다.
그녀가 나무를 다 심자 루시안이 다가와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가 요염하게 아리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심은 나무가 잘 자라려면 주변 나무들 가지치기를 좀 해야겠는데.”
“가지치기요?”
정원사 우즈가 하는 그런 거 말인가요?
아리엘은 우즈가 자유자재로 다루는 나무용 가위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때 루시안이 위험한 예감이 드는 표정을 짓더니 훌쩍 땅에서 도약했다.
그가 공중에서 가볍게 검을 뽑는 것이 보였다.
“루시안?”
“잠깐 눈 감아.”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리엘과 루시안 주변에 회오리바람같은 거센 바람이 쐐액 일었다.
“앗.”
아리엘은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수잔이 예쁘게 씌워준 하얀 나들이 모자가 휙 날아갔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동시에 콰지지직-! 엄청난 굉음이 주위를 감쌌다.
바람이 잠잠해졌을 때야 아리엘은 겨우 눈을 떴다.
바람이 일었던 중심에 고고히 서 있는 루시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흙먼지 하나 앉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아까와는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
아리엘이 심은 아기 프라카티아 나무 주위의 고목나무들이 싹 베여서 넘어져 있었다.
적어도 반경 30미터 안의 나무는 다 날아간 것 같았다.
헉?!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루시안이 든 검 주위에 둘린 푸르스름한 소드 마나를 보았다.
‘지, 지금 검기로 이걸 다 벤 거야?’
루시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비딱하게 웃었다.
천진해보일 지경인 잔인함이었다.
“가지치기를 했으니. 네 나무는 아주 크게 자랄 거야.”
아리엘은 어이가 없어서 숨이 탁 막혔다.
이게 무슨 가지치기예요!
식물 말살이지!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루시안에게 희생당한 나무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루시안이 베인 나무들을 마나로 대강 한 데 쌓아놓고 아리엘에게 다가왔다.
아리엘을 주욱 훑어본 그가 말했다.
“모자가 없어졌네.”
“어? 내 모자…….”
아리엘은 놀라서 보닛 모자가 있던 곳을 손으로 짚었다.
사르륵 붉은 머리카락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어떡해. 잃어버렸나 봐.’
루시안이 우아하게 턱짓을 했다.
“저기 저거 아닌가?”
그가 가리킨 곳은 저 멀리에 서 있는 나무의 가지였다.
낮은 쪽 가지에 하얀 모자가 하늘색 리본을 휘날리며 걸려있었다.
“맞아요!”
아리엘은 그쪽으로 종종 달려갔다.
루시안이 그녀의 두세 발짝을 느긋하게 한 걸음에 따라잡으며 그 뒤를 따랐다.
마침내 모자가 걸린 나무에 도착한 아리엘은 모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쭉 뻗은 짧은 팔이 모자의 리본을 쥐기 위해 바둥거렸다.
닿을 듯 안 닿을 듯, 약 오르는 위치였다.
아리엘은 폴짝 뛰어서 리본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딱 한 끝이 닿지 않았다.
‘흑. 이럴 땐 어린 몸이 정말 싫어.’
과거에도 나이에 비해 매우 왜소하고 네다섯 살은 어려보이는 키였지만 지금은 정말 너무 조그마한 것 같다.
뒤 따라온 루시안이 나무 밑에서 폴짝대는 아리엘을 우스운 듯 내려다보았다.
아리엘의 얼굴은 딸기처럼 새빨개졌다.
‘모자 꺼내달라고 하면 또 놀리겠지?’
절대로 루시안한테 부탁 안 할 거야.
내 힘으로 꺼낼 수 있다구!
그녀는 더욱 발돋움을 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모자 끈을 잡아채려는 순간…….
쑤욱.
아리엘의 손끝에 살짝 닿는 높이였던 모자가 갑자기 30센치미터 위로 솟구쳤다.
“어? ……으, 루시안!”
가볍게 모자를 집어 든 루시안이 제 손에서 모자를 빙글 돌렸다.
내가 잡을 수 있었는데!
아리엘은 그녀에게서 모자를 가로챈 루시안에게 잔뜩 인상을 썼다.
그래봤자 그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을 걸 알아서 더 서러웠다.
“주세요.”
루시안이 잡아보라는 듯 모자를 내려주었다.
도발에 걸려든 아리엘은 그에게 폴짝 달려들었다.
하지만 루시안이 슥 다시 모자를 올려서 허공만 잡았을 뿐이었다.
어휴, 정말……
아리엘이 그를 노려보자 그가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리엘라. 묻고 싶은 게 있어.”
“……?”
루시안의 손이 아리엘의 턱 끝을 들어올렸다.
“내가 있는데, 왜 안 써먹어?”
묻는 그의 눈이 짙은 푸른색으로 잔혹하게 빛났다.
“내가 못 미더워?”
아리엘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루시안이 목소리를 좀 더 낮추며 협박하듯 물었다.
“그럼?”
“그, 그건…… 루시안이 자꾸만 놀리니까…… 창피해서.”
말하다가 결국 아리엘의 얼굴은 다시 한 번 빨개져 버렸다.
대답을 끌어낸 루시안은 천사마저 타락시킬 것 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씩 웃었다.
“네 반응이 재미있으니 어쩔 도리가 있나.”
그가 모자를 든 손을 내려 하늘색 리본으로 아리엘의 뺨을 간지럽혔다.
아리엘이 간지러워서 움츠러 드는데, 그녀의 머리에 폭 모자가 내려앉았다.
“어?”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에게 모자를 도로 씌워준 루시안이 불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시 안 날아가게 끈 잘 매.”
말을 마친 그는 프라카티아 나무 옆에 놓인 간이용 피크닉 테이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아리엘은 보닛 모자 아래의 끈을 전투태세로 꽉 묶었다.
평범하게 나들이를 나온 거라면 살짝만 묶어도 되겠지만, 루시안과 나왔으니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
리본을 묶는데 루시안이 모자를 폭 눌러 씌워주던 감촉이 떠올랐다.
콩닥. 심장이 작게 뛰었다.
‘어라? 왜 이러지?’
잠시 고민하던 아리엘은 이내 납득할만한 결론을 내렸다.
이건 루시안의 유해한 미모 때문이거나, 모자를 돌려받은 기쁨 때문인 게 분명해.
그녀는 스스로가 내린 결론에 만족하며 루시안이 앉아있는 피크닉 테이블 쪽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 * *
간이용 피크닉 테이블과 의자에 앉은 루시안과 아리엘은 하녀 안나에게서 피크닉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이제들 꺼져.”
루시안이 가볍게 손을 휘저어 사람들을 물렸다.
그는 안나는 물론 매일 아리엘과 바짝 붙어다니던 호위 헥터와 랄프도 돌려보냈다.
안나는 ‘어머, 두 분이 오붓하게 소풍을 즐기시려나봐.’ 하는 흐뭇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디트리히 앞에서는 엄청 무섭게 호위하던 헥터와 랄프도 루시안이 아리엘 옆에 있자 걱정하는 기색없이 순순히 명을 받았다.
아리엘은 아쉽게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루시안과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루시안, 음료수 마실래요?”
그녀는 재잘대며 거대한 피크닉 바구니를 열었다.
바구니에는 목을 축일 수 있는 청포도 주스와 각종 간식이 들어있었다.
차갑게 식힌 닭고기 햄이 겹겹이 들어있는 샌드위치는 물론, 메이플 시럽에 조린 밤조림과 커다란 체리크림파이가 한가득.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사브레 쿠키가 듬뿍 담긴 유리뚜껑 달린 접시도 있었다.
아리엘은 청포도 주스의 코르크 마개를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인지 가을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었다.
‘뜨겁네…….’
모자를 쓴 그녀는 괜찮지만 루시안의 흰 피부에 햇볕이 그대로 내려앉는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차양도 가지고 올 걸 그랬나봐.’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는 자기 손에 들린 청포도 주스 병이 어느새 루시안의 손에 넘어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입으로 병을 따 마개를 던진 루시안이 우아하게 병 째로 주스를 들이켰다.
소년의 흰 목이 액체를 넘기며 뇌쇄적으로 움직였다.
아리엘은 눈부신 햇볕만을 노려보며 고민하다가 양손으로 손뼉을 딱 쳤다.
‘아, 그러면 되겠다.’
그녀는 생긋 미소지으며 루시안에게 말했다.
“루시안, 내 마법 보여줄까요?”
그가 음료를 들이키다 말고 아리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공격마법은 금지야.”
“그, 그런거 아니에요!”
뭐 귀에는 뭐만 들린다더니.
라카트옐 머릿속에는 공격이나 파괴같은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아리엘은 자신의 말을 당장 증명하기 위해 발딱 일어났다.
그녀가 지금 루시안에게 보여줄 마법은 원소 마법 중 하나였다.
‘음, 일단 여기를 잠깐 치우고…….’
그녀는 먼저 공간 마법을 발동해, 피크닉 테이블과 음식들을 이공간에 옮겨두었다.
잔디 위에 있던 것들은 언제 그 자리에 있었느냐는 듯 깨끗이 자취를 감췄다.
물건들이 사라지자 루시안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거기에 나도 넣을 수 있는 건가?”
“넣을 순 있지만…… 루시안은 계속 여기에 있을 게 아니잖아요.”
아리엘이 지금 할 수 있는 공간 마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떤 장소에서 이공간을 열 수는 있지만, 그 이공간을 가지고 이동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아리엘 방에서 연 이공간은 방 안에서만 쓸 수 있고, 여기에서 연 이공간은 여기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루시안을 가둬 놓으면…….
‘그 다음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이공간이 산산이 박살나는 걸 보게 될 게 뻔했다.
아리엘은 공간 마법을 마무리하고 아기 프라카티아 나무로 다가갔다.
루시안이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대되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자 아리엘은 괜히 긴장해서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리본을 꺼내어 조심스레 프라카티아의 맨 위 가지에 묶었다.
아기 나무를 기억하기 위한 의식이다.
아리엘은 몸에 흐르는 마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땅을 둘러싸고있는 흙 원소들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나무가 뿌리를 박고있는 흙을 통해 말을 걸자 프라카티아가 편안하게 그녀를 받아들이는게 느껴졌다.
아리엘은 정신을 바짝 집중했다.
‘네게 허락된 빛을 시간으로 되돌려, 명하노니.’
큰 나무로 자라줘.
그녀가 순간에 마나를 불어넣자, 프라카티아 나무에서 환하게 빛이 났다.
그리고 아리엘의 무릎 높이만큼 자그마 했던 나무가 점점 빛으로 솟구치며 자라기 시작했다.
나무는 순식간에 줄기를 솟아 올리고 가지를 무성히 뻗으며 하늘을 타고 올랐다.
나무가 차지하는 공간이 늘어나면서, 바로 옆에 서 있던 아리엘은 땅과 함께 밀려났다.
그녀의 마나에 반응한 흙원소들이 옆에서 부드럽게 어린 소녀를 받쳐 안전한 곳까지 밀어주었다.
“하아, 하아…….”
이윽고 아리엘이 가쁜 숨을 내쉬며 마법을 멈추었다.
나무를 둘러싼 빛이 마지막으로 화악 퍼지고 사라졌다.
아리엘은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보았다.
“와…….”
아기였던 프라카티아 나무는 아리엘이 다섯 아름은 안아야 한 바퀴를 두를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로 자라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잔뜩 꺾어도 맨 꼭대기까지 볼 수 없었다.
프라카티아가 드리운 나무 그늘이 그녀와 루시안 주위의 땅에 가득 닿았다.
“됐다!”
이전에 몇 번 연습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제대로 생명을 자라게 해 본 건 처음이었다.
아리엘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를 껴안았다.
그녀가 묶어놓은 리본이 한없이 높은 끝에서 한들한들 흔들렸다.
루시안이 천천히 걸어와 아리엘과 닮은 기운을 내뿜는 나무에 손을 짚었다.
그의 아래에서 아리엘이 뛸 듯이 즐거운 표정으로 외쳤다.
“봤죠, 루시안? 봤죠?”
그가 픽 웃었다.
“그래. 이제 진짜 고목 나무에 매미로군.”
루시안이 놀려도 아리엘은 마냥 즐거웠다.
그녀는 상쾌한 나무 그늘 아래에 다시 피크닉 테이블과 의자를 불러왔다.
“배고파 죽을 것 같아요.”
나무 하나를 키우느라 마나를 잔뜩 사용했더니 허기가 밀려왔다.
정작 검기로 나무 몇십 개를 잘라낸 루시안은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었지만.
아리엘은 피크닉 바구니에서 음식을 꺼냈다.
큼지막한 닭고기 샌드위치와 체리파이 중 뭐부터 공략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생크림의 유혹에 굴복해서 체리파이를 선택했다.
“루시안도 얼른 먹어요.”
그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샌드위치를 끌어당겨 가져갔다.
얌. 아리엘은 생크림이 소복히 얹힌 파이를 포크로 떠 먹었다.
체리 과육이 입안에서 톡 터지며 상큼하고 진한 달콤함을 선사했다.
루시안은 성의없게 샌드위치를 잘라 입에 넣으며, 행복한 표정으로 체리파이를 먹는 아리엘을 구경했다.
아리엘은 오로지 먹을 것에만 몰두해서 은포크를 부지런히 놀렸다.
체리를 오물거리던 아리엘이 루시안의 시선을 알아챈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루시안이 왠지 느슨히 풀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엘은 당황해서 그를 마주보았다.
“왜요……?”
“뭐가.”
“뭐 묻었어요? 나 또 크림 묻혔어요?”
아리엘은 황급히 입 주변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얼마나 열심히 먹었는지 크림은 커녕 부스러기도 묻어있지 않았다.
루시안이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넌 네가 크림을 묻혀야만 내가 먹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
잠깐. 방금 뭐라고?
뭘 먹어치워요? 나를?
아리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이 들은 말을 되새겼다.
‘노,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
아무리 피와 광기의 역사로 가득한 라카트옐 가라고 할지라도 사람을 먹어치웠단 얘기는 못 들어봤다.
‘근데 나만 못들은 걸 수도 있고, 대공가가 숨긴 걸수도 있잖아.’
아리엘의 조그만 얼굴은 금세 심각해졌다.
역시 자꾸 잘 먹고 빨리 크라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생각을 이어가던 그녀의 눈앞에 루시안이 손으로 딱 소리를 내 주의를 끌었다.
“딴생각.”
“보였어요?”
“너무 티 나는 거 아닌가?”
그래. 내가 무슨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아리엘은 스스로의 상상력을 꾸짖으며 다시 음식으로 눈을 돌렸다.
밤조림 병을 열자 메이플 시럽이 덧입혀져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밤 조각들이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아리엘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밤조림을 스푼으로 떠냈다.
밤조림은 요즘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입 안에 넣으면 밤이 쫀득하게 부서지며 안쪽까지 밴 은은한 시럽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맛있게 밤조림을 먹자 구경만 하던 루시안이 슥 손을 뻗었다.
다가온 그의 손이 밤조림 하나를 집어갔다.
그의 붉은 입술이 밤조림을 물고, 시럽이 묻은 손가락을 핥았다.
아리엘은 먹던 것도 잊고 홀린 것처럼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와. 루시안은 먹을 때도 예쁘구나…….
그때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달아.”
“맛있죠?”
아리엘은 기대감을 가지고 물었다.
루시안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설탕덩어리를 어떻게 먹는 거야?”
설탕 덩어리라니!
이건 밤조림에 대한 모욕이었다.
밤조림의 단맛은 대부분 밤 본연의 맛이고, 설탕이 아니라 메이플 시럽이라구요.
루시안이 밤조림 병을 아리엘 앞으로 휙 밀었다.
“네가 다 먹어.”
아리엘은 시무룩하게 밤조림 병을 끌어안았다.
단 걸 싫어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것도 싫어할 줄이야.
그녀는 슬퍼하며 밤조림을 몽땅 먹어치웠다.
서러워하며 밤조림을 해치우는 그녀를 루시안이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꼬물꼬물 간식을 거의 다 먹은 아리엘은 포만감에 하품을 한 번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루시안, 저것 좀 봐요!”
아리엘이 가리킨 곳은 블랙 가든 안에 있는 연못이었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곳과 연못은 꽤 떨어져 있었지만 아리엘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갈기까지 새까만 검은 말 한 마리가 연못에서 한가롭게 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아리엘은 눈을 반짝거리며 말을 구경했다.
검은 말은 키가 크고 힘이 세 보였다.
험악하게 생긴 것 같지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아름다운 갈기를 보면 절로 감탄이 나왔다.
“말이 너무 멋있어요.”
루시안이 미간을 무섭게 찌푸렸다.
“저게 멋있다고?”
기분이 상한 듯한 그의 반응에 의아해진 아리엘이 물었다.
“마티어스 님이 타는 말이에요?”
“내 말인데.”
“루시안 거구나…….”
아니 근데 왜 자기 말이 멋있다는 게 싫은거지?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말 이름이 뭐예요?”
루시안이 긴 속눈썹을 위압적으로 내리깔았다.
“그딴게 어딨어? 그냥 말이지.”
“세상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잖아요.”
……루시안을 주인으로 만난 가엾은 말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름 지어주고 싶다.’
그래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엘은 일단 고민해 보았다.
루시안의 아름다운 말은 온몸이 다 까맸다.
갈기와 몸, 발굽과 눈동자까지 모두.
가장 순수한 검정…….
“반카 어때요?”
“반카?”
반카 블랙은 모든 빛을 다 수렴해 먹어치우는,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색이라고 들었다.
반카는 라카트옐이 수호하는 북부 산맥에서만 채취되는 희귀한 광물의 이름이었다.
아리엘은 루시안이 혹여나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시안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제 나에 대한 것도 바꾸기 시작하는 건가.”
“네?”
그가 오만한 어조로 대답했다.
“허락하지. 네 마음대로 해.”
“정말요?”
“이제 저것의 이름은 반카야.”
아리엘은 활짝 웃었다.
루시안의 말 이름을 그녀가 직접 지어주다니.
왠지 특권을 얻은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반카를 타면 기분이 어때요? 전 말을 한 번도 못 타봤거든요.”
그녀의 말을 들은 루시안이 흥미롭다는 기색을 띄웠다.
“태워줄까?”
“네!”
아리엘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외쳤다.
낮게 웃은 루시안이 턱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잘 봐.”
그가 휙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물가에서 느긋하게 물을 마시던 말의 귀가 쫑긋 일어섰다.
루시안이 한 번 더 휘파람을 불자 주인을 발견한 말이 루시안 쪽으로 경쾌하게 걸어왔다.
다가온 말의 콧잔등을 루시안이 짧게 쓰다듬었다.
험악한 외양과는 달리 반카는 얌전하고 유순한 말인 것 같았다.
아리엘은 살며시 다가가서 말의 갈기를 만져보았다.
푸르륵.
주인 아닌 인간의 손길에 말이 예민하게 성질을 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물러났다.
“미안.”
루시안이 ‘스’하는 낮고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검은 말이 얌전해졌다.
아무래도 주인에게만 얌전한 말인 것 같다.
루시안은 아리엘을 먼저 말 위에 태워주었다.
그가 사과 하나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간단히 그녀를 집어 들어 말 위에 올렸다.
아리엘은 갑자기 껑충 높아진 눈높이에 깜짝 놀랐다.
게다가 그녀를 앉힌 말이 숨을 쉬고 움직이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서 더 불안했다.
‘무서워……! 말이 이렇게 큰 동물이었나?’
눈을 꼭 감고 말 등에 바짝 몸을 붙인 그녀를 보고 루시안이 혀를 찼다.
“몸을 세워야지.”
“아, 아, 아는데…… 여기서 못 떨어지겠어요.”
아리엘은 말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 등에 더욱 꼭 붙었다.
몸을 붙이지 않으면 떨어질 것 같았다.
루시안이 비딱한 어조로 말했다.
“친히 말고삐를 잡으려고 했더니. 내가 같이 안 타면 앞도 못볼 판이군.”
말 등에 새끼 원숭이처럼 붙어있는 와중에도 아리엘은 퍽 안심했다.
루시안이 같이 타주면 좀 나을 것 같다.
루시안이 고삐를 놓고 말 위에 오를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히히힝!”
주인이 손에서 고삐를 놓자마자 검은 말 반카가 번쩍 앞발을 쳐들며 날뛰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인이 루시안이어서 여태 한 번도 기를 펴지 못했던 순종 혈통마 반카는 만만하고 말랑한 어린 인간이 등에 타자 한껏 기세등등해졌다.
그렇다. 반카는 원래 미친 말로 유명한 말이었던 것이다.
성질이 고약한 탓에 루시안 밖에는 길들이지 못하는 말이 바로 반카였다.
“꺄악!”
아리엘은 비명을 지르며 온 힘을 다해 말에게 매달렸다.
미친 말 반카는 아리엘을 납치한 채, 쏜살같이 탈주를 시도했다.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비극을 조금도 예감하지 못한 채.
* * *
제국 최고의 혈통마인 반카의 질주는 빨랐다.
아리엘은 위태하게 말을 껴안은 채 안간힘을 써 버텼다.
하지만 그녀의 가느다란 팔에서 나오는 힘은 워낙 약해서 그것마저 곧 놓쳐버릴 판이었다.
이렇게까지 속력이 빠르지 않았다면, 아리엘도 마법을 사용해 볼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겁에 질린 그녀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있었다.
‘누가 좀 도와줘. 살려주세요.’
한편 자신의 말이 아리엘을 채가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한 루시안은 순간 핀이 확 나가는 걸 경험했다.
“……하?!”
가소로움을 넘어 황당함까지 느낀 그는 당장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이미 반카와 아리엘의 모습은 저 멀리로 멀어져 있었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그가 지금 당장이라도 기세를 개방한다면, 저 멀리에 있는 건방진 흑마 새끼 따위는 그 자리에서 멈추게 할 수 있으니까.
애초에 땅 위에 있는 것들이 두려워하고 굴복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그의 기세였다.
아니면 그냥 깔끔하게 따라잡아서 베어 죽여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질주하는 말 새끼가 갑자기 멈춰버리면 그 위에 타고 있는 아리엘이 튕겨져 나가 다칠 가능성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쓸데없이 너무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웠다.
“제길……!”
루시안은 도약을 반복하며 말을 따라잡았다.
초월적인 육체를 타고난 그에게는 숨쉬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가까이 가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 등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리엘이 보였다.
루시안은 그녀에게 소리쳤다.
“아리엘라!”
‘루시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와중에서도, 아리엘의 귓가에는 루시안이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루시안, 루시안, 나 너무 무서워요.’
하지만 도와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떼기만 해도 말 위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눈을 꼭 감은 그녀에게 루시안의 목소리가 명령하듯 말했다.
“잡아줄 테니까 손 놔.”
아리엘은 말 등에 묻은 고개를 빠르게 도리도리 저었다.
‘불가능해요, 그건!’
지금 그녀의 몸은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팔을 풀고 싶어도, 생존 욕구 때문에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너무 무서워서 커다란 눈에 눈물만 가득 고였다.
루시안이 옆에서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나 믿고, 놔!”
‘……믿으라고?’
그 순간 아리엘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피투성이에 엉망인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주던 청년이 된 루시안.
‘도와주지. 잡아.’
그것은 제안이라기보다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가까웠지만, 아리엘은 그 말을 믿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것을 떠올리자 그녀의 가슴에서 뜨거운 느낌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온 힘이 몰려있던 팔에서 힘이 탁 풀렸다.
한계까지 버티고 있던 가냘픈 팔이 말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꺅!”
팔을 놓자마자 아리엘의 몸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등에서 거세게 미끄러졌다.
말이 워낙 빨리 달리고 있었기에 떨어진 그녀는 낙엽 조각처럼 확 솟구치며 날아갔다.
바람이 칼처럼 날카롭게 어린 뺨 옆을 베며 지났다.
‘루시안!’
아리엘은 추락을 예감하면서 눈을 꽉 감았다.
루시안은 아리엘이 팔을 놓는 걸 보고 있다가 곧장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늘씬한 몸의 탄력으로 아리엘 쪽으로 도약한 그는,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며 말 위에서 거칠게 튕겨 나간 아리엘을 잡아챘다.
“잡았다.”
그가 허공에서 가뿐히 그녀를 안아 들자 잔뜩 움츠리고 있던 아리엘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어?”
“꽉 잡아.”
명령하며, 루시안은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를 한 번 밟아 반동을 준 뒤 표범처럼 우아하게 착지했다.
타앗.
땅에 내려앉자마자 루시안은 품에서 아리엘을 내려놓고 상태를 확인했다.
뺨에 눈물 자국이 있는 것과 입술이 파랗게 질린 걸 제외하면 긁히거나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았다.
“괜찮나?”
그 일은 동시에 일어났다.
루시안이 괜찮냐고 묻는 것과 아리엘이 그의 품으로 뛰어들며 안긴 것은.
조그만 계집애가 달려드는 힘이라고 해봤자 깃털 같은 것이지만 루시안은 뒤로 밀려서 잔디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리…….”
“죽는 줄 알았어요…….”
아리엘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고개를 묻었다.
작은 심장이 나비처럼 파닥파닥 뛰는 게 루시안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욱신.
루시안은 그의 심장에 갑작스레 찾아오는 고통에 놀라 굳어버렸다.
이게 뭐야? 이런 건 대체…….
아리엘이 그의 품에서 안식을 찾듯 스르르 긴장을 놓았다.
“…….”
루시안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아리엘이 그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놀란 호흡과 심장은 가라앉았지만 상기된 뺨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채였다.
뭐라고 말을 꺼내고 싶은 듯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며 들썩였다.
아직도 눈에는 눈물이 맺혀 달콤한 붉은색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이윽고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루시안.”
“……그래.”
딸꾹질하듯 히끅 숨을 들이쉰 그녀가 말했다.
“이제 알겠어요.”
“뭘.”
“루시안이 어떻게 창문에서 뛰어내리는지.”
“뭐……?”
황당하다는 듯 아리엘을 바라보던 루시안은 결국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햇빛이 가장 위험한 포식자의 유혹적인 모습을 비추며 부서져 내렸다.
그가 참기 어렵다는 듯 쿡쿡거리며 말했다.
“방금 죽다 살아났으면서,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
아리엘은 루시안의 품에서 그가 웃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그가 이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았다.
너무 아름다워.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심장이 아주 유해한 것을 보았다는 듯 마구 두방망이질쳤다.
루시안의 웃는 모습이 그녀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아.’
미래를 보지 않았는데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장면을 평생 동안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도.
그리고 언제 어디서 떠올리게 되더라도, 그녀는 이 기억 때문에 미소짓게 될 것이다.
아리엘은 루시안의 웃음을 자신의 마음 속 방 깊은 곳에 고이 간직해두었다.
* * *
한바탕 웃은 루시안과 진정이 된 아리엘은 일어나서 흙이 묻은 옷을 털었다.
아리엘을 구한 뒤 바로 루시안이 기세를 개방했기 때문에, 흑마 반카는 지척에 말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자신을 배반한 말을 본 루시안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갑게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흑마에게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느렸지만, 그의 흉흉한 기세를 느낀 반카는 지옥이 걸어오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반카의 코앞까지 간 루시안이 검집에서 스릉 검을 뽑아 들었다.
말은 주인의 눈동자 안에서 잔혹하게 빛나는 살기를 보았다.
지배자의 기세에 눌린 흑마는 반항하거나 도망칠 의지조차 느끼지 못했다.
'응징하는 라카트옐'은 어른과 아이,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는다.
루시안은 말을 죽이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루시안이 순식간에 검을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안 돼요!”
말과 루시안의 검 사이로 붉은 보석 같은 형체가 뛰어들었다.
루시안은 빠르게 검을 뒤로 치우며 사납게 물었다.
“무슨 짓이야?”
“죽이지 말아요!”
처음 루시안이 말에게 다가갈 때만 해도 아리엘은 불길함을 느끼지 못했다.
방금까지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그녀와 마주보며 웃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루시안이 검을 빼 들 때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왜 검을……?’
그리고 그가 검을 치켜들었을 때에야 깨달았다.
루시안이 반카를 이 자리에서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숨을 쌕쌕 몰아쉬며 말 앞을 가로막아선 아리엘에게 루시안은 싸늘하게 물었다.
“왜 막는 거지? 이게 널 다치게 할 뻔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 안에서는 자비 같은 것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리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다쳤어요. 루시안이 날 구해줬잖아요.”
“상관없어. 내 소질은 원래 구하는 것보다 죽이는 쪽이거든.”
루시안이 아리엘을 가볍게 밀어내고 다시 흑마를 향해 검을 들었다.
안 돼!
아리엘은 얼른 다시 끼어들며 외쳤다.
“그, 그래도 안 돼요!”
그가 삐딱하게 멈춰 서서 물었다.
“왜?”
왜 죽이지 말아야 하냐고?
그렇게 당연한 걸 물으니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아리엘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얘는 말이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동물.”
“알 게 뭐야.”
‘전혀 안 먹히잖아.’
이쯤 되자 아리엘은 보통의 상식으로 그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할 수 없이 말의 목을 껴안으며 애원했다.
“싫어요. 죽이지 마세요. 내가 싫으니까요.”
“…….”
“얘는 내가 이 집에 와서 처음 이름 붙인 거란 말이에요.”
“…….”
아리엘이 울먹이자 루시안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한편 반카는 자신을 위해 주인을 막아준 소녀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길지 않은 마생(馬生)에서 늘 자신을 길들이려고 하는 인간들만 만난 반카는 만만하게 봤던 어린 소녀의 용기에 강하게 이끌렸다.
반카는 자신의 얼굴을 잡은 아리엘의 손을 부드럽게 핥았다.
그러자 루시안이 칼같이 반응했다.
“내 것에 혀 대지 마.”
반카는 얌전히 물러나서 아리엘에게 격렬히 꼬리를 흔들었다.
아리엘은 이때다 싶어 눈을 반짝이며 주장했다.
“이것 봐요. 얌전하고 귀엽잖아요.”
루시안은 반카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이놈이 이러는 거 난 오늘 처음 보는데.”
히힝…….
반카는 시무룩하게 아리엘 뒤로 몸을 숨겼다.
덩치가 산 만한 말이 조그만 여자애 뒤에 숨겨질 리는 없지만 말이다.
“……하.”
미간을 잔뜩 구기며 한참 아리엘과 말을 번갈아 보던 루시안이 마침내 검을 치웠다.
상황이 매우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이었지만 살기는 거두어졌다.
‘살려주려나 봐.’
아리엘은 안심해서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루시안이 그녀에게 다가와 한 팔로 그녀를 휙 안아 들었다.
앗?
아리엘이 놀랄 틈도 없이 그가 훌쩍 말 위로 뛰어올랐다.
한번 말에게 데인 아리엘은 눈부터 질끈 감았다.
“루, 루, 루시안! 내려줘요.”
“태워달라며.”
그건 아까 얘기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루시안에게 반항하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난 안 떨어뜨려.”
아리엘을 앞에 태우고 말 위에 앉은 그가 한 팔로 그녀를 안고 한 손으로만 고삐를 잡았다.
갈기를 쓸어내리는 루시안의 손길에 반카는 바짝 긴장했다.
손길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똑바로 안하면 죽는다.’는.
“이랴!”
루시안이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차자 반카가 리듬감 있게 걷기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규칙적인 움직임이 계속되고 루시안의 팔이 단단하게 받치고 있자, 아리엘은 점점 처음의 무서움을 잊었다.
그녀는 빼꼼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리며 지나갔다.
주변 풍경도 휙휙 지나갔다.
“와.”
너무…… 좋다.
아리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말을 직접 탄다는 건 마차를 타는 것과는 달랐다.
마법으로 이동하는 것과도 완전히 달랐다.
날개가 돋친 것처럼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가쁜 숨과 함께 감탄 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리엘의 긴장이 풀린 걸 느낀 루시안이 말 옆구리를 조금 더 세게 찼다.
말이 점점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이미 풍경과 바람에 반해버린 아리엘은 더 이상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이 위에서 보는 풍경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즐거워.’
루시안이 뒤에 있으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대담해졌다.
반카가 빠르게 달리기 시작하자 아리엘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방울 소리처럼 맑고 영롱한 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졌다.
다리를 지나, 라카트옐 저택의 호수까지 간 루시안이 워- 하고 말을 멈췄다.
먼저 내려간 그가 아리엘을 안아 내렸다.
“어때?”
“너무너무 좋았어요!”
환하게 웃은 아리엘은 반카의 콧등을 쓰다듬어주었다.
폭주하는 반카를 경험해본 그녀는 말이 이번에 정말 부드럽게 뛰어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 반카.”
“푸르르르.”
반카가 쑥스러운 듯 투레질을 했다.
아리엘은 루시안이 도와주는 대로 조심조심 말고삐를 끌어 호숫가 말뚝에 반카를 묶었다.
반카는 호숫물로 넉넉히 목을 축였다.
햇살이 가득 쏟아져 내리는 맑고 따뜻한 초가을의 호수는 아름다웠다.
맑은 호수 위에 물새 몇 마리가 잠수했다 올라오기를 반복하고, 수면이 햇빛을 반사시키며 반짝였다.
호수에는 노를 저어 움직이는 아담한 나무배가 묶여있었다.
아리엘이 배를 신기한 듯 보자, 루시안이 협박하듯 물었다.
“배 탈까?”
“타도 돼요?”
“당연하지. 내 건데.”
태평하게 말한 그가 아리엘의 뺨을 잡아늘였다.
“그리고 내 건 다 네 거라고 말했을 텐데.”
“아았어여…….”
“좋아.”
아리엘은 루시안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나무배에 올랐다.
‘알렌이 여기 호수에 괴물이 산다고 농담을 했었는데, 그게 진짜는 아니겠지?’
평소 알렌이 얼마나 농담을 안 하는지를 생각해볼 때, 진짜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공가 호수라면 괴물이 살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녀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듯 루시안이 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물 안엔 괴물 같은 거 없어.”
“정말요?”
“괴물은 너랑 있지.”
뜻모를 말을 한 루시안이 아리엘을 제대로 앉혀준 뒤 노를 잡았다.
아리엘은 그가 직접 노를 젓는다는 사실에 놀라 빤히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뱃전에 기댄 뒤 한 번 크게 노를 저었다.
배가 스르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곧장 노를 놓았다.
“……?”
아리엘이 의아한 눈으로 보자 루시안이 픽 웃었다.
그리고 그는 손끝을 휙 움직여 소드 마나를 뽑아냈다.
주인에게 난폭하게 끌려나온 소드 마나는 얌전히 아리엘과 루시안이 탄 배를 젓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아리엘은 너무나 한결같은 루시안을 보고 오히려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노를 젓는 건 정말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한참동안 소드 마나가 젓는 노 아래, 푸른 호수 물을 지켜보던 그녀는 손으로 작은 뺨을 괴고 물었다.
“그런데, 정말 여기엔 괴물 없어요?”
아리엘이 묻자 루시안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지금은.”
응? 그 말은…….
“예전에는 있었던 거예요?”
“두세 마리쯤.”
그의 대답을 들은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요?!”
그가 반항적으로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숨이 멎을 듯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그의 입이 열렸다.
“이젠 없어. 내가 죽였거든.”
와, 무서워.
분명 농담이겠지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말하니까 진짜처럼 들리는걸…….
때때로 루시안의 잔혹함은 그의 미색과 어우러져서 몇 배 더 섬뜩한 효과를 내곤 했다.
배가 유유자적 호수 위를 떠도는 동안, 아리엘은 물 원소들을 불러내 함께 놀았다.
아리엘이 마법을 배우며 가장 먼저 친해진 물 원소들은 통통 튀며 아리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아리엘에게 친근하게 엉겨대며 애정 표현을 퍼부었다.
아리엘이 원소 마법을 익힐수록 원소들은 아리엘에게 꿀이라도 발린 듯 좋아하며 주위를 맴돌곤 했다.
“간지러워. 앗. 드레스 젖었다.”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물 원소들이 거는 장난을 받아주었다.
물 원소들은 물을 흩뿌려 공중에 예쁜 무지개를 만들어 주었다.
어쩐지 그 모습을 불만스럽게 보고 있던 루시안이 슬쩍 기세를 세우며 원소들을 노려보았다.
원소들은 모두 겁을 먹고 와르르 모여 도망가버렸다.
재밌게 놀던 아리엘은 입을 쑥 내밀었다.
“루시안. 애들이 무서워하잖아요.”
루시안이 오만하게 대꾸했다.
“저것들은 원래 날 무서워하도록 창조됐어.”
아리엘 놀이를 당당히 훼방 놓은 그는 소드 마나로 아리엘의 얼굴에 물을 튕겼다.
“그러니까 나한테 집중해.”
“어휴, 루시안…….”
아리엘은 팔로 물이 묻은 얼굴을 훔치며 항의하듯 웅얼거렸다.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비딱한 자세로 기대앉아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나무배를 멈추었다.
아리엘은 배가 호수 중앙에 멈춰서는 걸 느끼고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주위가 고요해지고 잔잔한 물결마저 멈추는 듯했다.
루시안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아리엘은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에게 뭔가를 물어볼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루시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말해 봐.”
“뭘…… 요?”
그가 위험한 눈빛으로 말했다.
“녹스 남작. 그 새끼보고 왜 놀랐는지.”
* * *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은 이성이나 논리보다 그가 내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최근 녹스 남작을 죽이고 싶은 걸 여러 번 참고 넘겼다.
만에 하나 녹스 남작이 아리엘에게 중요한 사람일 가능성 때문이었다.
처음 있는 일인만큼 그것은 그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녹스 남작을 보자마자 하얗게 질리던 아리엘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그 불쾌감은 흉폭하게 쌓여갔다.
그렇게 참으면서 남작을 죽이고 싶은 루시안의 충동은 이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말해 봐. 녹스 남작. 그 새끼보고 왜 놀랐는지.”
루시안은 그렇게 말한 뒤, 제 물음이 아리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날카롭게 지켜보았다.
“……!”
아리엘은 놀란 나머지 완전히 굳어버렸다.
‘루시안이…… 왜 갑자기 이걸 물어보는 거지?’
루시안은 여태 그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아리엘은 그녀가 무도회에서 패닉에 빠진 것이 녹스 남작 때문이라는 걸 루시안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봤을 땐 그냥 아픈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가 괜찮아진 후에는 그냥 흐지부지 넘어간 줄 알았다.
물론 루시안의 집착과 집요함에 대해 잘 몰라서 한 생각이었다.
그는 잊지 않고 있었고, 지금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리엘의 입술이 가냘프게 달싹였다.
“그건…….”
그건 녹스 남작이 아리엘이 처음으로 죽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공격 마법을 사람에게 써 본 건 처음이었고, 그것에 맞은 사람이 처참히 죽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본 것도 처음이었다.
아리엘은 그때, 피 묻은 손을 벌벌 떨며 헛구역질을 하다가 끝내 오열하며 주저앉았었다.
그때의 두려움이 다시 기억나자, 아리엘의 입술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루시안에게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조종당하며 손에 피를 묻혔던 이야기, 죽을 만큼 망가지면서 이용당했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조차도 잊고 싶은 시간들이었으니까.
아리엘은 몸을 떨며 팔로 자기 어깨를 감쌌다.
‘어, 어떡하지?’
회귀했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는 그 일을 루시안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번 삶에 녹스 남작과 그녀는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다.
그와의 인연을 설명하려면 아리엘은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다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리엘은 떨리는 손끝을 꼭 붙들었다.
“…….”
루시안은 그의 질문에 반응하는 아리엘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당장 그 질문이 준 고통을 뿌리까지 파내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알아낸 다음에 행동을 취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녀가 계속 대답을 하지 못하자, 루시안이 상체를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달콤한 숨결이 유혹하듯 아리엘에게 닿았다.
“네가 설명하지 못하겠다면 그냥 죽여줄게.”
어쩌면 그편이 더 나을 것이다.
녹스 남작이 그녀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루시안은 기꺼이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의향이 있었다.
그의 청안이 잔혹한 빛을 담았다.
“…….”
아리엘은 양손으로 조그만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진퇴양난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녀는 녹스 남작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아직 모른다.
과거에 마법사 무리가 그녀를 이용해 남작을 죽인 이유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남작이 무도회에서의 일 때문에 죽는 건 싫어.’
적어도 아리엘이 패닉에 빠졌던 건 그의 잘못이 아니니까.
루시안이 그녀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은 더 싫었다.
‘그 사람을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어.’
뿐만 아니라 그녀는 과거 일들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녹스 남작을 조사해 볼 생각이었다.
녹스 남작이 죽는다면 첫 실마리를 잃게 되는 셈이다.
아리엘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그…….”
그녀는 목소리를 간신히 짜내어 대답했다.
“그가 죽는 것을 봤어요.”
루시안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실을 다 말할 수도 없었다.
아리엘은 그녀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의 진실을 내어놓았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루시안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리엘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작의 얼굴을 본 순간에…… 갑자기 그런 장면이 떠올랐어요.”
“…….”
“왜였는지는 몰라요. 죽이지 마세요.”
루시안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가 말을 내뱉었다.
“설명이 부족해.”
“하지만 더 잘 설명할 방법을 모르겠는 걸요…….”
아리엘은 반쯤 울먹이며 대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루시안이 남작을 죽일 생각인지 궁금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루시안이 그를 없애려 한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아.’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만약에 루시안이 남작이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루시안의 뜻을 거스르고 남작을 죽일 사람이 있을까?
아리엘은 지금까지 라카트옐의 힘에 대해서 봐 왔다.
물론 그녀가 아는 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고, 앞으로도 배워야 할 게 많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라카트옐의 반대편에 서는 건, 제국의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대공가는 같은 편에 있어도 무섭지만, 적이 되면 공포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혹시 루시안이라면 4년 후에 녹스 남작이 죽는 걸 막을 수 있을지도 몰라.’
과거에는 조종당하는 열네 살의 그녀가 공격 마법으로 녹스 남작을 해쳤었다.
하지만 아리엘이 이번 삶에서 그를 해치지 않기로 결정한 이상, 그 일이 정확히 그때에 반복될진 모르는 일이었다.
‘막을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걸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걸까?
아리엘은 루시안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시선을 내리깐 채 더듬더듬 말했다.
“저, 루시안. 그 사람이 죽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나요? 녹스 남작이 지금 죽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루시안이 천천히 그녀의 속내를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내가 그것을 살려두길 바라나?”
“……네.”
잠깐 침묵한 그가 낮게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그리고 그는 조금 더 몸을 굽혀 아리엘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 값은 지금 받지.”
가까이 다가온 루시안의 입술이 아리엘의 이마에 소리를 내며 짧게 부딪쳤다.
촉.
아리엘은 어리둥절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에게 입맞춘 루시안이 붉은 입술로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바라는 건 뭐든 그대로 될 거야, 아리엘라 라카트옐.”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손등으로 이마를 감싸며 뺨을 붉혔다.
도장이 찍힌 기분이었다.
악마와 계약을 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이제 뱃놀이를 마저 하도록 할까.”
나른하게 말하며 루시안이 짧게 손가락을 튕겼다.
멈춰있던 나무배는 다시 유유자적 물살을 가르며, 아름다운 가을 호수 위를 유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