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마침내 아리엘이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기로 한 날이 되었다.
루시안은 그녀의 마법 스승으로 브루노어를 낙점했다.
깊이 생각하고 결정한 건 아닌 듯했다.
그냥 집에 마법사가 있으니 그놈한테 배워라 정도?
근데 집에 있는 마법사가 하필 백 년에 한 번 나온다는 대마법사입니다…….
아리엘은 긴장해서 작은 손을 가슴에 대고 후우우 심호흡을 했다.
‘대마법사님한테 마법을 배우다니. 뭔가 기분이 이상해.’
게다가 당연히 야외로 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업을 방에서 할 거라는 얘기를 듣자 더욱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뭐지? 마법을 배운다면서 실내에 있어도 되는 걸까?’
그리고…….
그녀는 핑크 일색인 자신의 방 소파에 방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똑똑.
“마님. 브루노어입니다.”
수업 시간이 되어 찾아온 브루노어는 혈색이 맑게 돌아온 아리엘의 얼굴을 보고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거의 기력을 회복하신 것 같군요.”
아리엘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브루노어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그간 브루노어가 꼬박꼬박 체력 마법약이며 마나 충전 포션 등을 챙겨주지 않았더라면 회복이 훨씬 더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인사를 들은 브루노어는 고개를 저었다.
“제 덕분이라기보다는…….”
브루노어가 느긋한 맹수처럼 기대있는 루시안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러고는 아리엘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마님께서 운이 좋으셨다고 할 수 있지요.”
“제가 배우는 입장이니까 마님이라고 부르시지 않아도 돼요. 제겐 스승님이시잖아요.”
“그래도 대공자비이시니, 아리엘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요!
호칭을 정한 스승과 제자는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갔다.
브루노어는 아리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보고는 그녀가 마법 이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론부터 익히셔야겠군요.”
“이론…… 이요?”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과거에 그녀가 마법을 배울 때 이론 수업 같은 건 없었다.
‘곧장 실전에 들어가 마법으로 적을 해쳤었는데.’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본 브루노어가 부드럽게 설명해주었다.
“이론을 아셔야 마법을 이해할 수 있지요. 아리엘님의 몸속 마나가 어떤 종류의 마법에 가장 적합한지도 알 수 있고요.”
아리엘은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그녀에게 마법이란 이해하기 이전에 먼저 휘두르는 것이었다.
마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거나,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마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공격마법 말고도…… 나한테 맞는 마법이 있는 걸까?
“배울래요. 알려주세요.”
눈을 반짝이는 아리엘을 보며 브루노어가 미소지었다.
“그럼 마나에 대해서 먼저 알아볼까요.”
브루노어는 이해하기 쉽게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해주었다.
그는 커다란 양피지를 책상에 펼쳐놓고 긴 가로 선을 그렸다.
선의 양 끝에는 화살표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는 선의 중앙에 붉은 점을 그려 긴 선을 반으로 나누었다.
“자. 이 점이 현재입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마나는 크게 두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앞과 뒤. 과거와 미래.
예를 들어볼까요?
치유마법은 다치지 않은 과거로 되돌리고, 공격마법은 미래에 존속할 것을 찢어놓지요.”
아리엘은 손을 들어서 질문을 던졌다.
“소드 마나는요?”
“소드 마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공격마법과 속성이 비슷합니다. 파괴가 목적인 마나죠.”
어쩐지 알 것 같다. 소드 마나의 속성은 약육강식이니까.
“그래서 검기를 두르는 검 자체가 약하면, 소드 마나가 검을 부서뜨려버리기도 합니다. 검이 버티지 못하는 거지요.”
“그렇군요.”
“물론 일반 마나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습니다.”
브루노어가 능숙하게 주제를 넘어갔다.
그가 아리엘에게 물었다.
“아리엘님은 자신의 몸이 약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으시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브루노어?”
대마법사라서 그런가?
아리엘은 과거의 자신이 항상 생각했던 것을 콕 집어내는 브루노어에게 감탄했다.
브루노어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건 모든 마법사가 겪는 일이니까요. 비유를 해볼까요?”
그가 양피지에 사람 모양과 검 모양 그림을 그려 넣은 뒤 둘 사이에 '=' 표시를 그렸다.
“소드 마나의 검과 일반 마나의 몸은 비슷한 겁니다.
검과 몸이 버티는 만큼만 마나를 사용할 수 있지요.”
브루노어가 사람 모양 안에 붉은 마나를 칠했다.
“그런데 몸이 버티지 못하는 한계까지 마법을 쓴다면…….”
펑.
양피지에 그려놓은 사람 모양의 그림이 새까맣게 재가 되어버렸다.
“검 대신 사람이 부서지게 됩니다.”
아리엘의 어깨가 흠칫했다.
그녀의 등에 미약한 소름이 스쳐 지나갔다.
재가 되어버린 사람의 모습이 과거의 그녀와 너무 비슷했으므로.
브루노어가 집게손가락을 들었다.
“그럼 보통 사람과 마법사의 몸은 어떻게 다를까요?”
질문을 던진 그가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보통 사람은 자기가 가진 육체의 힘을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법사는 다르죠.”
“어떻게요?”
“마법사는 자신이 가진 마나와 육체의 힘을 나누어 써야 합니다.”
“아…….”
“마나의 먹이는 열량입니다. 인간과 똑같이요. 다만 마나는 인간의 몸을 통해서 만들어낸 열량을 먹는다는 게 다릅니다.”
알겠다. 그러니까 내가 음식을 먹으면, 내 몸과 마나가 그 에너지를 함께 쓴다는 말이지?
“그래서 마나를 많이 가진 마법사일수록 육체적 힘이 떨어집니다. 저희끼리는 소위 '물몸'이라고 부르는 현상이지요.”
물몸!
그 단어를 듣자 단번에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럼…… 내가 과거에 몸이 약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던 거구나.’
원래 그런 거였다니. 그런 줄도 모르고 매일 자책했었는데.
아리엘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니야. 예전에는 몰라서 그랬지만 이제는 알았잖아.’
알면 또 바꿀 수 있어.
애써 스스로를 다독여 위안했다.
브루노어가 아리엘의 손목 가운데, 맥박 뛰는 곳을 짚으며 말했다.
“문제는 육체가 약해지면 몸 안의 마나가 사람 대신 주인 노릇을 하려고 날뛴다는 겁니다.”
아리엘은 그것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열일곱 살의 몸에서 아홉 살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시험 삼아 마법을 써보았었다.
그때 몸속 마나가 확 역류하며 그녀를 집어삼키려고 했었다.
‘내가 어린 몸으로 돌아와서 더 약해졌기 때문에 그런 거였어.’
브루노어는 이제 수업의 결론을 향해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소드마스터는 소드 마나를 굴복시켜 사용하기 위해 검술을 단련하지요. 보통 사람들도 자기 육체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 육체를 단련하고요.”
아리엘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마법사도 무언가를 단련해야 하나요?”
브루노어가 인자하게 웃어주었다.
“예. 그렇습니다. 마법사는 '마나 컨트롤 능력'을 단련하지요.”
마나를 컨트롤 하는 능력?
브루노어가 상냥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것을 마력(魔力)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이어서 설명해주었다.
“마력은 마나를 자기 몸처럼 움직이게 길들이는 힘이에요. 주인의 의지가 없이는 날뛰지 못하도록 하는 거지요.”
그의 시선이 잠깐 루시안에게 갔다가 떨어졌다.
“뭐, 마력을 기르지 않고 힘으로 누르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보통 마법사들은 안전을 위해 마력을 길러야만 하죠.”
브루노어가 수업을 맺었다.
“아리엘님이 이제부터 저와 하실 것이 이것입니다. 마력을 기르는 것.”
* * *
수업이 끝나고, 아리엘은 브루노어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많이 배웠어요. 브루노어. 고맙습니다.”
브루노어가 빙긋 웃고 말했다.
“첫 수업을 잘 마치셨으니 선물을 하나 드릴까요?”
말한 그가 짧게 주문을 외자 그의 손에 작은 한쪽 귀걸이가 소환되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귀걸이에서 마법의 힘이 느껴졌다.
“보호 마법이 걸려있는 귀걸이입니다. 큰 공격은 막아주지 못하지만 사소한 해로부터는 아리엘님을 지켜줄 겁니다.”
아리엘은 작은 귓볼을 만지작거렸다.
“귀를 뚫어야 하나요?”
브루노어가 고개를 젓고, 아리엘의 오른쪽 귀에 귀걸이를 살짝 가져다 대었다.
파앗.
짧게 불꽃이 튀는 것 같은 느낌 후에 귀걸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아리엘은 깜짝 놀라서 귀를 붙잡았다.
“없어졌어요.”
브루노어가 후후 웃었다.
“남의 눈에 띄면 보호 마법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들키니까요. 투명화 마법도 걸려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겁니다.”
“와아!”
아리엘은 감탄의 소리를 냈다.
마법의 힘을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니, 처음 알았다.
‘마법은 누군가를 해치는 데에만 쓰이는 게 아니구나.’
루시안에게는 마법을 배우는 게 꺼려진다는 듯이 말했지만, 브루노어에게 배운다면 다를 것 같았다.
브루노어는 그녀가 과거에 알았던 마법사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리엘은 앞으로 그에게 배울 것들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선물 고마워요, 브루노어. 그리고…….”
그녀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잘 부탁드려요!”
브루노어는 사랑스러운 어린 소녀를 보며 잠시 든 복잡한 마음을 떨쳐버렸다.
‘이 작은 몸 안에 어마어마한 마나를 가두고 있다는 것이 걱정스럽지만…….’
걱정을 하기보다는 잘 길러주는 게 먼저겠지.
브루노어는 예의를 갖춰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리엘님.”
* * *
오후엔 다이아나가 아리엘에게 놀러왔다.
따뜻해진 바깥 날씨에 나무들엔 점점 싹이 움트고 연두빛 잎사귀들이 돋아나 푸릇푸릇했다.
햇빛이 나뭇잎들 사이를 부드럽게 비추어 빛의 그물이 펼쳐졌다.
아리엘은 다이아나와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 위에 앉아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다이아나는 먼저 데뷔한 '언니'답게 아리엘에게 사교계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리엘, 이게 요즘 수도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꽃 책갈피라는 거야.”
다이아나는 가지고 온 책 사이에 끼워놓은 유리 책갈피를 꺼내 보여주었다.
“수도의 영애들 얘기에 끼려면 이걸 꼭 가지고 있어야 해. 이 얘기뿐이거든. 요즘 영애들은 이런 거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단다.”
“와…….”
아리엘은 다이아나의 책갈피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투명한 유리로 된 책갈피 안에는 말린 꽃이 소담스레 들어가 있었다.
아리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내 또래 여자아이들은 이런 걸 하는구나.’
아리엘은 또래 친구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자친구는 남의 나라 일처럼 먼 이야기였다.
그래서인지 다이아나가 알려주는 소녀들의 이야기는 늘 아리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말린 꽃은 다이아나가 직접 만든 거야?”
“응. 꽃도 내가 직접 골랐어.”
다이아나가 마치 비밀을 말해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꽃을 고른 다음 예쁘게 말리고, 보존 마법을 써서 변색되지 않게 한 다음에 세공 유리 안에 끼우는 거야.”
다이아나의 책갈피에 들어간 꽃은 그녀의 머리색을 물에 풀어놓은 듯한 보랏빛 아이리스 꽃이었다.
“이건 크리스탈 유리인데, 크리스탈 유리와 그냥 유리는 가격 차이가 크지만 크리스탈이 더 투명하고 부딪혀도 맑은 소리가 난단다. 어떤 영애는 유리 안에 펄가루도 넣는대.”
다이아나는 꽃 책갈피에 들어간 꽃이 겹치면 서로 따라 했다고 싸우기도 한다고 알려주었다.
“이런 건 각자의 취향이니까. 나도 누가 내 아이리스 꽃을 똑같이 하면 싫거든.”
“응. 다이아나 건 다이아나랑 잘 어울려. 정말 예뻐.”
아리엘의 칭찬을 들은 다이아나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흠흠 작게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사실, 아리엘 주려고 내가 하나 만들어 왔어.”
다이아나가 작은 벨벳 주머니 속에서 유리 책갈피를 꺼내 아리엘에게 건넸다.
아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책갈피 안에는 핑크색 수국꽃이 예쁘게 들어가 있었다.
꽃다발 모양으로 가지런히.
“핑크색 수국의 꽃말은 소녀의 꿈이래.”
“…….”
아리엘은 가슴에 퍼져나가는 기쁨을 느끼며 책갈피를 꼭 쥐었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여자친구란 건 이런 거구나. 서로 만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너무 기뻐.’
아리엘은 짧은 팔로 다이아나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다이아나. 잘 간직할게.”
다이아나가 허둥대며 말했다.
“그,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닌걸. 그냥 나는 핑크색 수국을 보니 네 생각이 나서…… 아이 참, 이런 건 새침하게 받는 거라구.”
수줍어하는 다이아나를 보며 아리엘은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다이아나도 귀여운 것 같아.
아리엘과 다이아나는 침대에 엎드려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이아나, 나도 책갈피 해보고 싶어. 어떻게 하면 돼?”
“꽃을 말리는 게 제일 먼저야. 꽃을 꺾어서 꽃잎 색이랑 모양이 상하지 않게 말려야 하는 거지.”
꽃을 말리는 것도 기술이 있다면서 다이아나는 열변을 토했다.
“거꾸로 달아서 말려야지 더 예쁘단다.”
다이아나는 꽃을 말린 다음에는 보존 마법을 걸어주는 상점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상점 주인 여자가 마법사거든. 꽃이 상하지 않게 잘 해줘.”
아리엘은 만약에 자신이 말린 꽃을 만든다면 브루노어가 보존 마법을 도와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둘은 정원사 우즈에게 꽃을 부탁해서 매달아 놓고, 남는 꽃을 서로에게 꽂으며 놀았다.
다이아나가 별을 닮은 하얀 꽃을 아리엘의 귀에 꽂아주었다.
“어머나, 귀여워라! 하얀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서 씌우고 싶어!”
어쩜 붉은 머리카락에 흰 꽃이 저렇게 잘 어울릴까?
아리엘도 앙증맞은 손으로 꼬물꼬물 다이아나에게 꽃반지를 끼워주었다.
주변에 다른 영애들이 많았지만, 정말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이런 걸 해본 적 없었던 다이아나는 꽃반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두 소녀는 침대 위에서 깔깔거리며 장난을 쳤다.
늘 적막하던 저택에 울려 퍼지는 소녀의 웃음소리에 사용인들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 * *
대공자 루시안이 제국립 요하네스 아카데미로 돌아갈 날이 이제 겨우 이틀 남았다.
중앙 홀의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창 앞에 앉은 아리엘은 짧은 2주 동안 루시안과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떠올려보았다.
‘세상에.’
경악한 나머지 그녀는 제 하얀 뺨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아내로서 내가 루시안에게 해준 게 하나도 없어!’
자신은 루시안과의 약속을 어겼음에도 용서를 받았고, 이번 일을 계기로 마법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더해서 다이아나라는 친구도 생겼다.
반면에 루시안이 받은 거라고는 고작 과자 부스러기 묻힌 어린애가 건네준 수건뿐이지 않은가.
아리엘은 자신이 받은 것에 비해 그에게 해준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루시안이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내년에나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아리엘은 조그마한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내로서 뭐라도 해줘야겠어.
‘근데, 대체 뭘 해줘야 하는 거지?’
그녀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때, 대공저의 사용인들이 달콤한 과자류가 가득 실린 트레이를 밀며 옆을 지나가다 아리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나, 아기 마님. 여기 계셨군요!”
사용인들은 아기 마님이 조그만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귀여워서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그들은 트레이를 내려서 앞다투어 아리엘에게 과자를 쥐여주었다.
“아기 마님, 이 설탕 아이싱 쿠키 좀 드세요.”
“여기 컵케이크도 있어요.”
“초콜릿 에클레어와 커스터드 슈 중에 뭘 드릴까요?”
양손 가득 과자를 받은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민 중이었는데 갑자기 먹을 게 생겨버렸네.’
루시안한테 먹을 걸 줘야 하나?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루시안은 단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식사 때 디저트가 나오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데다, 맛있는 사탕도 한 개만 먹어보고는 입맛 버렸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단 걸 가져가서 주면 과자 따윈 너나 먹으라며 내쫓길 게 분명해.’
아리엘은 난감한 표정으로 두 손 가득한 과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이, 일단 이 과자들부터 먹고 생각해야지.’
대공가에 들어오기 전보다 조금 느긋해진 건 아리엘에게 생긴 좋은 변화 중 하나였다.
아리엘은 분홍색 설탕 아이싱이 발린 쿠키와 개나리색 버터크림이 듬뿍 올라간 컵케이크를 한 입 크게 깨물었다.
* * *
답은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남편에게 아내가 해줄 수 있는 것 말이야?”
오후에 놀러온 다이아나가 크게 반색하며 되물었다.
어머니인 공작 부인에게 귀족 여자로서의 교육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받은 그녀는 이런 분야에 아주 빠삭했다.
안주인으로서의 태도, 귀족 여자가 집안을 휘어잡는 법, 자기 집 남자들을 쥐락펴락하는 법.
은혜를 갚기로 굳게 다짐한 다이아나는 친구로서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생긴 것이 기뻤다.
‘그 사악하기로 유명한 대공자를 사로잡는 건 쉽지 않겠지만…….’
내 동생 아리엘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불살라서라도!
그녀는 아리엘의 조그만 귀에 소곤소곤 몇 마디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아리엘이 목소리를 낮춰,
“정말 그걸로 되는 거야?”
하고 되물었다.
다이아나가 그렇다고 답해주자, 아리엘은 아랫입술을 꼭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워…….”
“응?”
저도 모르게 새어나가 버린 다이아나의 진심을 들은 아리엘이 영문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잘 됐으면 좋겠다, 아리엘.”
다이아나는 짐짓 인자하게 아리엘을 다독이며 이번 계획의 건투를 빌어주었다.
* * *
처음 셋이 함께 저녁 식사를 했던 이후로 루시안은 저녁마다 다이닝 홀을 찾았다.
아리엘이 바라던 대로 밥 먹으러 오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날 선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앉아, 아리엘이 밥 먹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티어스는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마티어스도 마찬가지였다.
두 남자 사이에는 냉기만 흐를 뿐이었다.
처음에는 이 상황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며칠 지나자, 아리엘도 그럭저럭 적응해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도 디저트까지 잘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이틀 후면 이런 살벌한 저녁 식사도 끝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좀 아쉬운 기분도 들었다.
아리엘은 그녀의 작은 손에 맞는 크기의 나이프로 오렌지 소스를 친 폭립 요리를 시무룩하게 잘랐다.
그때 마티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래 과묵한 데다 루시안과 있는 자리에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그였으므로 아리엘은 깜짝 놀랐다.
“아리엘 네가 있으니 딸이 생긴 것 같구나.”
마티어스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그렇지만 마티어스를 겪어 본 아리엘의 뺨은 발그레해졌다.
딸이라니…….
‘평소엔 이런 걸 말로 잘 안 하시는데.’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선물을 사주는 걸로 대신 하셨지.
오늘은 내가 루시안 가는 것 때문에 풀 죽어 있어서 말씀해주시는 건가?
“얜 당신 딸이 아니야.”
루시안이 따스한 분위기에 얼음물을 끼얹었다.
싸늘한 살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내 아내지.”
마티어스가 무심한 시선으로 루시안을 마주 보았다.
와, 무서워.
아마 저 기세에 압도당하지 않는 건 서로뿐일 거야.
“누가 네게 뭐라고 했나? 내게 딸 같다는 것이지.”
여유롭게 대응한 마티어스는 아리엘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마티어스가 딸처럼 여기고 있다는 말이 가슴 안쪽을 간질간질하게 했다.
둘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본 루시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속에서 독점욕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아리엘을 불렀다.
“너. 이리 와.”
아리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왜요?”
“내 아내니까 내 옆에 앉아.”
아, 그런 건가요?
아리엘은 쉽게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마티어스가 그녀를 막아 세웠다.
“아니다. 아리엘. 내 옆에 그대로 앉아있거라.”
어라?
“하지만, 마티어스님…….”
마티어스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여긴 대공저니까 대공의 말을 들어야지. 안 그런가, 대공자?”
“…….”
루시안이 새파란 한기를 내비치며 마티어스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노골적으로 대치하자 아리엘은 그들에게서 풍기는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항상 둘에게서 미묘하게 느껴지던 그 느낌.
지금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영역 동물의 수컷 개체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마치 우두머리 사자와 젊은 사자 간의 대치 같았다.
‘그래도…… 둘은 아버지와 아들이잖아.’
아리엘은 대공자비로서 두 남자가 싸우는 걸 가만히 두고 보거나, 싸움을 부추길 수 없었다.
그녀는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만 노려보고 있던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시선이 아리엘에게로 향했다.
아리엘은 자신이 생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원래 앉아있던 마티어스 대각선 옆자리도, 루시안의 옆자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의 정확한 중간 자리쯤에 앉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두 남자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란셀 후작 부인 말로는 집 안에서는 안주인 말이 곧 법이래요. 제가 안주인이니까 이 집 안에서는 제 말이 법인 거 맞죠?”
“…….”
“…….”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동시에 침묵했다.
그녀는 생글 웃었다.
“제 법은 이거예요. 두 분이 뭐라고 하셔도 전 여기에 앉을 거예요.”
말을 마친 아리엘은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떡해. 내가 너무 주제넘었나? 둘 다 화를 내면 어떡하지?
“하하하!”
그때 마티어스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은 그가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아리엘. 대공가 일은 다 네 말이 법이지. 우리에 관한 일이라도 말이다.”
겨울같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스르르 풀렸다.
루시안은 여전히 무서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아리엘은 그가 살기를 거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의 웃음을 보고 새파랗게 질려있는 집사에게 마티어스가 명령했다.
“알렌. 아리엘의 식기를 새로 가지고 와라.”
아리엘은 알렌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알렌. 식사는 다 마쳤으니까 디저트 식기만 새로 갖다 줄래요?”
“예, 예, 마님.”
당황한 얼굴을 갈무리한 알렌이 노련하게 디저트 스푼과 포크를 아리엘의 새 자리에 세팅해주었다.
‘이럴 수가. 대공님과 대공자님 사이를 중재해내시다니.’
아리엘을 보는 알렌의 눈빛은 이제 거의 신을 우러러보는 것처럼 바뀌어 있었다.
* * *
“안녕히 주무세요, 마티어스님.”
“그래.”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아리엘은 옷자락을 들어 올리며 마티어스에게 밤 인사를 건넸다.
다이닝 홀을 나서자 루시안이 성큼성큼 따라 나오며 물었다.
“벌써 자러 간다고?”
아리엘은 한 걸음으로 그녀의 두세 걸음 이상을 잡아먹는 루시안의 긴 다리를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일찍 자야 키가 많이 큰다고 했어요.”
“누가 그래?”
아리엘은 확신 가득한 얼굴로 삐약삐약 대답했다.
“수잔이요.”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하는 듯한 아리엘의 당당한 얼굴에 루시안은 픽 웃음을 흘렸다.
“안 자도 커.”
“정말요?”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시안은 그랬어요?”
보통 열네 살짜리들 보다 훨씬 큰 그가 그랬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루시안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거만하게 아리엘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하지만 넌 꼬맹이니까 빨리 자러 가. 명령이야.”
“……네.”
아리엘은 대답만 하고 루시안의 뒤를 졸졸 쫓았다.
중앙 계단까지 이르자 루시안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왜 따라와?”
서늘하게 묻는 그에게 조금 움츠러든 아리엘이 우물쭈물 말했다.
“그게…… 자러 가기 전에 드릴 게 있어서요.”
루시안이 삐뚜름하게 턱을 뒤로 젖혔다.
“뭔데?”
아리엘은 다이아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다이아나는 아내가 남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알려주며, 이게 가장 기본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막상 루시안의 얼굴을 마주하자 어려운 기분만 들었다.
자라면서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을 본 적 없는 그녀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잔뜩 난감해진 아리엘의 얼굴을 본 루시안은 흥미가 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던지듯 말했다.
“줘 봐.”
아리엘이 불에 덴 것처럼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루시안은 살짝 미간을 좁히며 협박했다.
“준비해 왔잖아. 줘 보라고.”
갈팡질팡하던 아리엘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도망치면 루시안에게 잡혀서 달랑 들어 올려지겠지?
한참동안 망설이던 아리엘은 이윽고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리엘은 종종걸음을 쳐 루시안이 짚고 선 계단 난간으로 다가갔다.
루시안은 그의 아내가 주려는 게 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계단을 두 칸, 아니 세 칸쯤 올라 루시안과 눈높이를 맞춘 아리엘이 난간을 사이에 두고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중심을 잃지 않도록 난간을 꼭 짚고, 한껏 발돋움을 한 뒤…….
쪽.
아리엘은 소리나게 루시안의 뺨에 굿나잇 키스를 남겼다.
“잘자요, 루시안.”
소년의 대리석같이 흰 얼굴에 조그만 분홍색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남편에게 굿나잇 키스를 한 꼬마 아내는 얼른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루시안은 굳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내가 실수한 건가?
루시안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다가 열렸다.
“하. 이게 진짜 사람을 들었다 놨다…….”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친 그가 예고없이 아리엘을 확 안아 올려 어깨에 메었다.
“꺅! 루시안!”
놀란 아리엘은 주먹으로 그의 등을 콩콩 두드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루시안은 아리엘은 맨 채 알렌을 불러 말했다.
“하녀장한테 오늘 꼬맹이는 내 방에서 재운다고 해.”
“예에?”
웬만해선 정중한 알렌이 놀라서 되물었다.
“대공자님 방에서 말씀이십니까?”
루시안이 한 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흰 피부에 까만 머리카락, 붉은 입술의 대비가 강한 그가 웃자 악마적 매혹이 느껴졌다.
“설마 내가 이런 어린애한테 발정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겠지.”
그가 대답도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뭐. 부부 합방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와, 루시안 진짜 제멋대로야.
어깨에 둘러메어진 아리엘은 속으로만 말했다.
입을 딱 벌린 알렌을 뒤에 남겨두고 루시안은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기 방 침대에 아리엘을 던져둔 그가 팔짱을 끼고 을렀다.
“빨리 자. 일찍 자야 한다며.”
어이가 없었다.
지금 잠이 올 상황인가요?
뒤늦게 소식을 듣고 온 수잔이 루시안 방에 파티션을 쳐놓고 아리엘을 잠옷 차림으로 갈아입혀 주었다.
수잔은 아리엘이 늘 베고 자는 말랑하고 높지 않은 베개도 가져다준 뒤 돌아갔다.
잘 준비를 마친 아리엘은 넓은 루시안 침대 위에 조그맣게 자리를 차지하고 누웠다.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불을 양손으로 꼭 쥐고 갓 씻고 나온 루시안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늘씬하게 뻗은 소년의 몸이 물기에 젖어 새로 갈아입은 상의에 달라붙었다.
언제봐도 참 예쁜 얼굴과 몸이었다.
루시안은 대강 젖은 머리를 턴 뒤, 벽난로 앞의 긴 의자에 앉았다.
“아직 안 자?”
그가 아리엘에게 말했다.
당연하게도 아리엘은 바뀐 잠자리 때문에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루시안이 옆에 있는 상황은 덤이었다.
그녀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루시안을 응시했다.
“근데 나 왜 데려왔어요?”
그가 오만하게 속눈썹을 팔랑였다.
불가에 비친 그는 훨씬 더 위압적으로 보였다.
“너 자는 거 구경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정말. 그럴 줄 알았어.
* * *
드넓은 방 안은 적막했다.
촛불 대부분이 꺼져서 어두운 공간 속엔 사람 키만큼 높고 커다란 벽난로에서 나무 타는 소리만 생생했다.
그 한복판, 긴 의자에 앉아 물기를 말리는 루시안의 모습은 인간 세상에 잠시 외유를 나온 천사를 연상케했다.
아리엘은 낯선 향기가 나는 루시안의 이불에 얼굴을 반쯤 묻었다.
이러면 목소리가 웅얼웅얼 나겠지?
“저…… 루시안. 루시안은 내가 마티어스님한테 딸처럼 되는 게 싫어요?”
최대한 웅얼거렸는데 루시안이 고개를 홱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한 손으로 아리엘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그런 멍청한 질문이 어디 있어?”
귀도 좋지. 제대로 다 들었나 봐.
아리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멍청한 질문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어차피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루시안은 내가 여동생이고 마티어스님 딸이면 싫을 것 같아요?”
루시안이 아리엘의 얼굴을 놓고 화가 난 얼굴로 호화로운 침대 기둥에 기대어 섰다.
“싫어.”
그렇구나.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루시안에게 거절당하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리엘은 시무룩해져서 다시 꼬물꼬물 이불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루시안은 얘기가 끝나지 않았는지 아리엘의 이불을 휙 잡아당겼다.
그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너, 알고는 있어? 남매끼리는 결혼할 수 없어.”
그거야 알죠. 남매가 되면 결혼할 필요가 없잖아요.
가족이 돼서 매일 행복하게 같이 살 텐데.
하지만 이런 마음을 얘기하는 건 계약 결혼한 사이에 맞지 않을 것이다.
루시안이 점점 기분이 나빠지는 듯 단단히 팔을 엇걸었다.
그에게서 위압적인 기운이 뻗어 나왔다.
“넌 내 아내야.”
명령이자 선전포고 같은 그의 말에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리고 나한테 만약 같은 건 없어.”
루시안이 못 박았다.
“난 아내를 여동생 삼고 싶어 하는 머저리가 아니니까.”
그를 더 건드리면 진짜 화낼 것 같아서 아리엘은 고분고분 “네.” 하고 대답했다.
아리엘이 순순해지자 루시안은 기세를 눌러 가라앉혔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지?”
아리엘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할 때는 왜 떨게 되는 걸까?
“루시안과, 가족이 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루시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리엘은 목을 움츠렸다.
역시 기분 나쁘게 했나?
루시안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이마를 살짝 튕겼다.
아얏.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도 가족이잖아.”
“……!”
아리엘의 둥그런 눈이 더욱 둥그렇게 커졌다.
“가족이요?”
“제국법상 부부는 가족이야. 내가 이런 것부터 가르쳐 줘야 하나?”
마지막 말은 거의 인내심이 바닥난 목소리였다.
아리엘은 입술을 열었다가,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다물었다.
“우리 셋이…… 정말 가족이에요?”
루시안이 짜증을 억누르려는 듯 신음했다.
“……그래, 너랑 나는. 마티어스까지 끼워 넣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
아리엘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가족.
나한테 가족이라고 했어.
피를 나눈 친아버지와 친오빠한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인데.
아버지와 오라비 제롬과의 기억이라곤 아프고 괴로운 것들뿐이었다.
일방적인 증오와 폭력, 하찮은 장난감 취급과 괴롭힘.
게다가 후작가에 지낼 때 하녀, 하인들은 아리엘을 성가신 애물단지로 여겼다.
남는 먹을 것 찌꺼기나 넝마를 던져주면서 사생아 따위가 집안 분위기를 다 망친다며 대놓고 욕을 했었지.
피가 섞이고 어릴 때부터 보아온 사람들은 후작가 사람들이었지만 아리엘은 그들을 진짜 가족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과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후작이 그녀를 착취하다 못해 악당에게 돈을 받고 팔았을 때 아리엘은 가족에 대한 미련을 놓았다.
살기 위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보답받지 못한 애정은 오히려 그녀를 상처입히는 칼날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이곳에 온 뒤 아리엘은 고통으로 얼룩진 가족의 기억들을 차차 지워나갔다.
어른 남자가 손을 뻗는 게 때리려는 의도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루시안이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구는 것도 오라비 제롬의 악의 담긴 행동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정에 고픈 어린 아리엘을 아껴주는 수잔과 사용인들도 결코 남 같지 않게 느껴졌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가족'이란 것의 정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
게다가 루시안이 가족으로 인정해주었다는 사실이 아리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루시안같이 솔직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니까.
비록 계약 때문에 시한이 있는 관계일지라도.
‘기쁘다.’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헤실 웃음을 흘렸다.
루시안은 그 모습을 기막히다는 듯 응시하다가, 누운 아리엘의 양옆에 확 손을 짚어서 그녀를 가두었다.
“루시안?”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의아해진 아리엘이 눈을 깜박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루시안의 눈동자는 어둡게 잠겨 있었다.
“넌 내가 정말로 무섭지 않아? 이상하지도 않아?”
“…….”
왜인지는 몰라도 그가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아리엘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알렌한테 들었어요. 사람들이 개미라면, 루시안과 마티어스님은 사자라고요.
사자니까 무서워야 정상이겠지만…… 나는 루시안이 똑같이 사람으로만 보이는걸요. 그러니까 무섭지 않아요.”
루시안이 한 단어를 되씹어 뱉었다.
“사람……. 글쎄, 내가 진짜 사람일까?”
순간 아리엘은 그의 짙은 청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빛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루시안이 검집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의 입술이 파멸로 유혹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잘 봐.”
그대로 루시안은 검을 제 팔에 그어 넣었다.
꺅! 루시안?!
아리엘의 비명은 루시안의 손에 의해 그대로 막혀버렸다.
아리엘이 소리를 지를 것을 예측이라도 한 듯 그는 곧장 입부터 막았다.
아리엘은 몸부림을 쳤지만, 힘 차이 때문에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쉿.”
나직하게 위협하는 루시안의 팔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뚝뚝 흘러내렸다.
아리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저대로 두면 피를 많이 쏟아서 죽을 거야. 아니면 적어도 팔을 못 쓰게 될 거야!’
루시안이 얼마나 깊이 검을 그어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처가 심상치 않았다. 가장 안쪽 혈관까지 잘린 것 같았다.
달튼이 우스갯소리로 미친 대공자님이라고 했을 때 전혀 믿지 않았었는데.
눈앞에서 보니 알 것 같았다.
자기 스스로를 해치다니, 루시안은 미친 게 확실해!
‘빨리 지혈을 하지 않으면…….’
“읍, 읍읍!”
다급한 마음에 아리엘은 그의 옷자락을 마구 잡아당겼다.
루시안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리엘의 손을 떼어내 침대에 잡아 눌렀다.
“가만히 있어.”
무력해지자 아리엘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그냥 무섭다고 할걸.
무서워 죽겠다고, 루시안은 너무너무 이상하다고 할걸.
‘이제 겨우 가족이란 말을 들었는데…… 루시안이 없어지면 어떡하지?’
안 돼. 안 돼.
아리엘은 고개를 저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가 울기 시작하자 루시안이 멈칫하며 입을 막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루시안의 손 사이로 아리엘의 흐느낌 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의 힘이 풀렸으니 의사를 불러야 하는데, 목에 덩어리 같은 것이 꽉 막혀 우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흐윽, 흐으윽…… 루시, 루시안…….”
“눈 떠.”
루시안이 명령했다.
아리엘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보라고? 그리고 그를 겁내라고?
겁이 나긴 했다. 그를 잃을까 봐. 그가 팔을 영영 못 쓰게 될까 봐.
루시안이 아리엘의 어깨를 붙잡고 으르렁거리며 다시 명령했다.
“눈 떠서, 제대로 봐.”
루시안이 이런 목소리를 낼 때는 거부할 수 없었다.
반항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지배자의 목소리.
아리엘은 그렁그렁한 눈물 사이로 겨우 눈을 떴다.
루시안이 검으로 그었던 팔을 그녀의 눈앞에 가지고 왔다.
“……!”
순간 아리엘의 울음이 딱 그쳤다.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깊은 검상이 나 피가 철철 흐르던 그의 팔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루시안이 다시 검을 가져와 아주 얕게 손가락을 그었다.
아리엘은 그것마저도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눈을 떴을 때 저절로 스르르 아무는 상처를 보고 숨을 멈추었다.
루시안이 비뚜름하게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이래도, 내가 사람으로 보이나?”
그때 아리엘이 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루시안이 반사적으로 팔을 뒤로 뺐지만 이미 아리엘이 매달린 후였다.
아리엘은 정신없이 그의 팔을 더듬으며 사라진 상처를 확인했다.
‘없어.’
상처가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게다가 루시안의 몸에서 흘러나와 팔을 적셨던 피는 이불에 떨어진 것 외에는 모두 다시 몸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처럼 말끔했다.
아리엘은 고개를 바짝 쳐들고 루시안에게 말했다.
“다른 팔도 줘 보세요.”
루시안은 뭐에 떠밀리듯 다른 팔을 내밀었다.
다른 팔까지 상처 하나 없음을 확인한 아리엘은 상처가 났던 팔을 껴안았다.
제 팔을 온힘 다해 가만히 안고 있는 아리엘을 루시안이 불렀다.
“꼬맹이.”
툭. 투둑.
루시안은 맨살에 닿는 따뜻한 액체에 흠칫했다.
아리엘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아롱져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 흐느끼던 것에 비교도 안 될만큼 펑펑.
“흐윽…… 나아, 나아서, 다행이에요.”
말끝마다 아리엘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피 대신 그의 팔을 적셨다.
“다시는…… 그러지…… 흑…….”
“…….”
루시안은 한참 굳어있다가, 한 손으로 세게 마른세수를 했다.
“너…….”
나 참. 겁주려고 한 짓이 하나도 통하질 않는군.
크림슨 하트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이것이 특별히 이러는 건가.
루시안은 아리엘이 눈물을 다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인내심이 없는 그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윽고 아리엘이 완전히 울음을 그치자 그는 설렁줄을 당겨 집사를 불렀다.
들어온 알렌이 조용히 방 입구에 섰다. 루시안은 고갯짓으로 이불을 가리켰다.
“이것 치워. 더러워졌으니.”
다가온 알렌이 능숙하게 이불을 개켜 안다가 핏자국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노집사는 울어서 발개진 아기 마님의 눈가와 이불의 핏자국을 번갈아 보았다.
그것을 본 루시안이 눈썹을 휙 치켜세웠다.
“내 피야.”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알렌이 대답했다.
“예.”
“나가.”
“……예.”
알렌은 이불을 내어가고, 다시 깨끗한 흰 이불을 가지고 와 내려놓은 뒤 나갔다.
집사가 사라진 뒤 방에 내려앉은 적막을 깬 건 루시안이었다.
“라카트옐 남자들이 사자인 이유는.”
말을 시작하긴 했지만 루시안에게는 누군가를 이해시키는 재능이 없었다. 더불어 돌려 말하는 재주도 없었고.
그래서 그는 얕지만, 진실을 선택했다.
“핏속에 더 우월한 존재가 흐르기 때문이야.”
울다 기진맥진한 아리엘이 눈동자만 도르르 굴려 그를 올려보았다.
달콤한 루비색의 눈동자가 그를 담았다.
“그래서 라카트옐에게는 인간의 자아가 생기지 않아. 인간을 동족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거지.”
그가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대신 우리에게는 인간과 다른 '에고'(ego)가 있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라카트옐을 포식자로 인식하게 만드는 에고(ego).
“그건…….”
뭔가 더 설명을 이어보려던 루시안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말하니까 기분이 나빠졌어.”
“네?”
아리엘은 영문을 몰라서 눈을 깜박였다.
루시안이 아리엘의 하얗고 말랑말랑한 뺨을 한 손으로 마구 조몰락거렸다.
“머, 머하느 거에어…….”
“기분 보충.”
“……?”
루시안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러면 기분이 좀 나아지거든.”
우으…… 정말 못 말려.
그나저나 한바탕 울었더니 눈이 피곤해져서 그런지 졸음이 몰려왔다.
원래 아리엘이 잠들 시간을 심각하게 지난 시간이기도 했다.
아리엘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가물가물 졸기 시작했다.
루시안이 뺨을 만지던 손을 떼자, 가까스로 버티던 머리가 베개 위로 툭 떨어졌다.
잠은 금방 소녀를 집어 삼켜버렸다.
“…….”
루시안은 어린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말간 얼굴. 핏줄이 비쳐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흰 피부.
감겨있는 두 눈. 길고 빼곡한 속눈썹 끝에는 아직 눈물방울이 맺혀있다.
손을 내려 조그만 코끝을 튕기자 잠결에 얼굴을 찌푸리며 뒤척거린다.
루시안은 픽 웃음을 흘렸다.
더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지만 내버려 두었다.
괴롭히고는 싶은데, 깨우고는 싶지 않은 이상한 감정.
“내일인가.”
그는 중얼거렸다.
얼마 만이지. 라카트옐 저택을 떠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든 지가.
그는 팔꿈치를 대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다.
아까 아리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여동생이 되고 싶다고?”
쿡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망할 마티어스 자식이 이것을 잘도 귀애했던 모양이지.
그는 다정한 손길로 잠든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속삭였다.
“너한테는 유감이지만 마티어스에게는 딸이 생길 수 없어. 그리고.”
그의 눈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만일 네가 내 형제였다면 우리는 나머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웠을 거다.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결국 넌 내 손에 죽었겠지.”
이불 밖으로 아리엘의 가느다란 목과 연약한 팔이 보였다.
루시안은 자조하듯 웃었다.
푸른 달빛에 비친 소년은 잔혹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어쩌면 결과는 같으려나.”
그는 아리엘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내 손 안에서 마침내 안전할 수는 없을 테니.”
그렇게 말한 그는 아리엘의 뺨에 깊은 입맞춤을 남겼다.
그들의 두 번째 동침의 밤이 지나고 있었다.
* * *
루시안이 떠나는 당일이 되었다.
오전에 출발하기로 된 루시안은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날 채비를 했다.
루시안의 침대에서 쿨쿨 자고 있던 아리엘도 덩달아 깰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이 일어난 걸 본 루시안은 그녀를 안아 들어서 수잔에게 데려갔다.
수잔이 비몽사몽을 헤매는 아리엘을 보고 그에게 꾸짖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도련님.”
“얘 제대로 입혀서 나한테 데려와. 할 일이 있으니까.”
늦잠에 길들여진 아리엘은 졸면서 씻고, 아침을 먹고, 하늘색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하늘색 바탕에 은실로 섬세한 자수가 들어가 있고 소맷단엔 하얗고 긴 레이스가 달려있어 움직일 때마다 산들거리는 사랑스러운 드레스였다.
사뿐사뿐 걸어서 루시안의 방으로 가자 요하네스 교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
“와아.”
아리엘은 처음 보는 루시안의 교복 차림에 탄성을 질렀다.
은은한 마력이 흐르는 듯한 검은 교복 망토는 깃이 목 끝까지 올라오게 높았다.
그럼에도 루시안의 희고 길게 뻗은 목이 깃 너머로 드러나 있었다.
목깃과 망토 깃에는 매듭을 꼬아놓은 형태의 은실 바이어스가 들어갔고, 어깨 쪽에 화려한 은색 자수로 아카데미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망토 앞섶은 여러 개의 백금 체인 줄로 연결되어 화려함을 더했다.
망토 안쪽으로는 우아한 두 줄 여밈의 검은 겉옷, 그 위에는 푸른 검띠가 매였다.
눈부시게 흰 셔츠 상의의 목 부분은 단추가 단정치 않게 풀려 있었다.
루시안은 생략한 조끼를 짐 위에 던져넣었다.
“루시안. 교복 입고 가는 거예요?”
“도중에 갈아입는 건 귀찮으니까.”
오늘만큼은 루시안의 귀찮음이 반갑다. 그 덕에 교복 차림도 볼 수 있으니.
아리엘은 볼을 붉혔다.
‘멋있다.’
교복이 예쁜 걸까, 루시안이 입어서 교복도 예뻐 보이는 걸까?
아리엘은 결국 교복도 예쁘고, 예쁜 루시안이 입어서 더 예뻐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근데 목에 매는 건 어디 있어요?”
아리엘은 루시안의 차림에서 빠진 부분을 찾아냈다.
그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타이는 성가셔. 안 해.”
그러고 보니 지난번부터 그가 목에 뭘 매는 걸 유독 싫어하긴 했다.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교복인데.
“똑바로 안 입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라카트옐에게 안 되는 것 따윈 없어.”
루시안이 오만하게 대꾸했다.
“딴소리 말고 이리 와. 할 말이 있으니까.”
그가 손짓으로 아리엘을 가까이 불렀다. 그녀가 다가가자 루시안이 그녀의 머리에 있는 흰 리본을 슬쩍 건드렸다.
“그간 집 안을 좀 살펴봤지.”
떠올리니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찬다.
“나 없는 동안 얌전히도 살았더군. 여길 다 뒤집어서 엉망으로 만들어놓길 바랐는데.”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 아내가 집을 엉망으로 만들길 원하는 남편도 있을까?
루시안이 손끝으로 천천히 아리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좋아. 명령을 하겠어.”
그가 도발하듯 위압적으로 속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가 없는 동안 집을 네 식대로 다 뜯어고치고 규칙도 바꿔 놔.”
“지, 집을요? 왜요?”
루시안의 붉은 입술에 씩 악마 같은 미소가 걸렸다.
“이제부터 네가 하는 게 곧 라카트옐의 전통이 될 테니까. 난 그게 아주 마음에 들거든.”
“하지만…… 제가 그렇게 해도 되나요?”
아리엘은 영 그 명령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저택을 뜯어고치고 바꾸라니……
어린 그녀가 그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고.
루시안이 그녀의 말랑한 뺨을 쿡 찔렀다.
“넌 내 아내야.”
그가 손가락으로 아리엘과 자신을 번갈아 가며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서 오만함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니 라카트옐이 곧 너고, 네가 하는 게 모두 라카트옐이다.”
그가 뚜벅뚜벅 걸어가 설렁줄을 당겼다. 그리고 뒤를 돌아 아리엘을 보며 말했다.
“잘 모르겠으면 지금부터 봐.”
루시안의 방으로 알렌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대공자님.”
“짐 가지고 나가. 그리고 사용인들 모두 중앙 홀에 모이게 해. 한 명이라도 빠지면 빠진 것을 죽일 거야.”
“예.”
정중하게 대답한 알렌이 나간 뒤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손을 뻗었다.
“가자.”
아리엘은 그의 손 위에 작은 손을 올렸다.
손이 닿기가 무섭게 루시안은 그녀를 잡아채 안아 들었다.
“앗, 루시안……! 제, 제 발로 걸을 수 있는데요.”
“네 짧은 다리까지 배려해 줄 시간 없어.”
그가 요염하게 웃었다.
“내 인내심은 더욱 없고.”
* * *
루시안은 중앙 홀에 내려가기 직전에 아리엘을 내려주었다.
두 사람이 계단을 걸어 내려가자 몇십 명의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공자님, 대공자비님.”
저택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일하는 사람들이 턱없이 적어 보였는데, 이렇게 다 모아놓고 보니까 무척 많은 것 같았다.
그중에는 아리엘이 만나보지 못했던 사용인들도 더러 있었다.
아마 야간 일 담당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겠지.
얼어붙을 듯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 내가 없는 동안 내 권한은 다 내 아내 것인 것.”
기세를 개방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목소리에서는 압제자의 느낌이 묻어났다.
사용인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내 아내가 뭘 시키든 무조건 복종해. 대공자비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날 거역하는 걸로 간주하고 살려두지 않겠다.”
이미 다들 그러고 있는데요, 루시안.
아리엘은 공포에 덜덜 떨고 있는 사용인들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이제 무서워서라도 더 그녀의 말을 잘 들어주게 생겼다.
루시안이 고압적으로 목소리를 내리눌렀다.
“대답.”
군기가 바짝 든 사용인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명심하겠습니다, 대공자님!”
흉폭한 작은 주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을 싸늘하게 한 번 둘러본 루시안이 아리엘을 이끌었다.
“이제 배웅해.”
아리엘과 루시안은 걸어서 현관까지 나섰다.
루시안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으려고 종종걸음을 치던 그녀는 속삭이듯 물었다.
“루시안. 이랬다가 내가 잘못된 명령을 했는데도 아무도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어떡해요?”
루시안이 발걸음을 멈춰섰다.
그의 짙은 청색 눈이 아리엘을 내려다보았다.
“아리엘라 라카트옐. 라카트옐 사전에 잘못된 명령이란 없어. 설사 그게 잘못된 거라면,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세상의 기준을 부숴버리면 되는 거야.”
“…….”
대단한 우월감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이 하니 그 말 또한 너무나 그럴듯하게 들렸다.
어느새 둘은 그가 타고 갈 마차 앞까지 도착했다.
구름 떼 같은 사용인들이 빙 돌아 나오는 다른 길로 이 앞까지 나와서 인사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들에게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인 대공자는 마차에 오르기 위해 뒤돌아섰다가, 이내 몸을 돌려 그의 아내에게 다가왔다.
루시안이 아리엘을 향해 꽤나 무도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네?”
“아까부터 그 작은 주머니 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거. 나 주려고 가지고 나온 거잖아.”
아리엘은 입을 딱 벌렸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성미에 안 맞게 기다렸더니. 끝까지 안 줄 작정이었어?”
“그건 아니지만…….”
아리엘은 울상을 지으며 주머니 속에 든 것을 꼬옥 쥐었다.
안 주는 게 아니라 못 주는 건데.
다이아나 말을 듣고 준비하긴 했으나 선물하기에 너무 볼품없어서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안 예뻐서…….”
루시안의 아름다움에 천만 분의 일도 어울리지 않아서 도저히 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예쁜 것을 논하기 전에 모양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루시안의 위협이 떨어졌다.
“빨리.”
아리엘은 억지로 인형 빼앗기는 아이처럼 미적미적 주머니 속에서 선물을 끄집어냈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조그만 두 손에 식은땀이 찼다.
루시안은 분명 이걸 싫어할 거야. 당장 버리라고 할지도 몰라.
그 와중에 희망을 잡고 싶은지, 얼마전에 다이아나가 해줬던 말이 귓전에 웅웅 울렸다.
“남자들이란 모양이 좀 떨어지더라도 직접 만든 선물에 환장하는 족속들이란다. 그러면서 지들은 꼭 선물을 가게에서 사 온단 말이야. 흥.”
코웃음을 친 다이아나가 검지 손가락을 딱 세우며 말했다.
“아무튼! 마음이 담겼든, 안 담겼든 담겼다고 상대가 믿게 하는 게 중요해. 달리 뭐가 있겠니?”
다이아나가 곱게 손질된 손톱 끝으로 무언가를 톡 짚었다.
“이런 것뿐이지.”
다이아나가 짚은 것은 아리엘의 책상 위에 있던 자수 교본.
아리엘은 요즘 기본 꽃을 수놓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달콤하게 속살거렸다.
“직접 만든 선물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을걸.”
그리하여 이렇게 된 것이었다.
아리엘에게 예법을 가르치는 란셀 후작 부인은 대공자비 정도의 지위라면 자수를 빼어나게 익히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마저도 간단한 교양 자수와 이름자 수놓는 법, 가문 문양 수놓는 법은 철저하게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리엘은 이제 겨우 초급 단계였지만 다이아나의 말을 듣고 후작 부인을 졸라 루시안의 이름을 수놓는 법을 속성으로 배웠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하얀 손수건에 수놓아진 짙은 청색실의 자수는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인지 'ㄹㅜ시ㅇㅏㄴ ㄷㅔ츠ㅁㅗㄴ드 어쩌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애초에 머릿속에 그렸던 금테는 1도 두르지 못했다.
란셀 후작 부인은 스승으로서 깊은 참회의 숨을 내쉬며 내년쯤에는 선물을 드릴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해주었다.
“여기…….”
선물을 꺼낸 아리엘은 내놓지 않으려는 듯 있는 힘껏 손수건을 쥐었지만 루시안에 의해 쉽게 빼앗겨 버렸다.
“…….”
손수건과 그 위의 기상천외한 자수를 본 루시안이 쿡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리엘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도, 돌려주세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거예요.”
하지만 루시안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손수건 위에 수놓인 엉망진창의 글씨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서툰 모양새로 올록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제 이름자가 썩 기분 좋게 손끝을 자극했다.
“이런 발칙한 생각은 또 언제 했지.”
그가 손을 튕기자 손수건이 그의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장 되돌려 받을 줄 알았던 아리엘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뜨였다.
“가져가실 거예요?”
“당연하지. 난 한 번 내 손에 들어온 건 넘기지 않아.”
안 되는데……! 아리엘은 저 손수건이 루시안의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졌을 때 그가 당할 수치를 생각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몸을 기울인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먹고 빨리 크기나 해, 꼬맹이. ……망할 바느질 따위 안 해도 되니까.”
고개를 들며 그가 아리엘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느리게 입맞춤을 마친 루시안이 유연한 동작으로 마차에 올랐다.
“간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대공자님!”
사용인들이 우렁차게 배웅 인사를 했다.
아리엘은 멍하니 서서 루시안을 태운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시야에서 점처럼 작아진 후에야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루시안.”
이제 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허전했다.
‘처음 헤어질 때처럼 울지도 않았는데…….’
그때보다 더 기분이 이상한 것 같았다.
* * *
루시안이 떠난 뒤, 알렌은 아리엘에게 두 명의 기사를 소개시켜 주었다.
“마님. 이제부터 마님을 호위할 기사들입니다. 대공자님께서 푸른 사자 기사단 중 특별히 선별하신 이들이지요.”
“호위요?”
아리엘은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예. 이제 마님께서도 외부인과 만나실 테니 호위가 필요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런 거라면…….
아리엘은 루시안과 나눴던 말들을 기억했다.
그는 라카트옐의 이름을 대단히 자존하고 있었고 아리엘도 그 안에 포함시켰다.
‘그래. 명색이 대공자비인데 호위도 없이 다니면 남편인 루시안의 위신이 떨어지겠지.’
특히 외부인들에게는.
쉽게 수긍한 아리엘은 기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작은 주군의 아내이기에 기사들이 먼저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기사식으로, 주먹 쥔 한 손으로 가슴을 짚으며.
“처음 뵙겠습니다. 아기 마님.”
낯선 이들이라 조금 어려웠지만, 아리엘은 제대로 고개를 들고 인사했다.
“반가워요. 음…… 이름이 어떻게 되죠?”
두 기사 중 체구가 작고 날렵한 사내가 먼저 대답했다.
“랄프입니다. 푸른 사자 기사단 1군에 있습니다.”
그는 꼭 요정처럼 몸이 가벼워 보였다.
성인 남자인데도 소년처럼 호리호리하고 체구가 작았다.
가지고 있는 검도 얇고 가벼운 것 같았다.
“잘 부탁해요, 랄프.”
아리엘은 가볍게 인사하고 다른 쪽 사내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랄프와는 달리 덩치가 무척이나 크고 근육이 우람했다.
키도 커서 몸이 거의 집채만하게 보였다.
골목에서 무뢰한들과 마주쳐도 그가 있으면 싸움 없이 상황이 끝날 것 같은 외모였다.
그런데…….
‘어라? 아는 얼굴인데.’
아리엘이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덩치 큰 사내가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대검을 땅에 푹 꽂았다.
대검이 꽂힌 주변 땅이 움푹 파였다.
그가 검을 짚고 험악한 얼굴로 씩 웃으며 인사했다.
“헥터라고 불러주십쇼.”
헥터.
이름을 듣고, 아리엘은 그가 루시안과 그녀의 첫날밤의 원흉임을 깨달았다.
루시안에게 술을 먹인 장본인.
‘다시 만나면 꼭 노려봐 주려고 했는데.’
그러나 호쾌하게 미소짓는 그의 얼굴을 보자 그런 기분이 사라졌다.
왠지 미워할 수 없는 느낌의 사람이었다.
루시안이 직접 고른 사람이라면 믿을 만할 사람이기도 할 거고.
아리엘은 결국 그에게 살짝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헥터. 잘 부탁해요.”
인사를 마친 그녀는 두 사람이 기사단 제복 위에 달고 있는 작은 표식을 발견하고 물었다.
“그런데 그 뱃지는 뭔가요?”
키가 작은 랄프가 몸을 숙여 아리엘이 표식을 좀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었다.
V모양과 거꾸로V 모양이 겹쳐져 있는 모양의 뱃지였다.
손질에 힘을 쓴 듯 광이 나게 잘 닦여있었다.
“이건 소드마스터라는 증표입니다. 언제나 상대에게 마스터임을 고지하는 게 기사의 법도거든요. 결투를 대비해서 말입니다.”
어, 그러고 보니 루시안 방에도 비슷한 뱃지가 막 굴러다니는 것 같았는데…….
‘앗!’
생각을 이어가던 아리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두 사람 다 소드마스터라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아기 마님.”
“…….”
아리엘은 말을 잃었다. 그녀가 듣기로 소드마스터는 제국에 채 열 명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소드마스터 한 명이 최소 만 명의 군사와 맞먹는다고 하니, 그 수가 적은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그들 중 두 명이 마티어스와 루시안이라는 것은 아리엘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근데 푸른 사자 기사단에 두 명이 더 있었단 말이야?
제국에서 열 명도 안 되는 소드마스터가 라카트옐 가에만 네 명……?
아리엘의 놀라움을 오해했는지 랄프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말고도 기사단을 지킬 인력은 충분하니까요. 네드라고 마스터가 한 명 더 있거든요.”
네 명 아니고 다섯 명?!
그녀는 놀란 토끼처럼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제국 소드마스터가 절반 넘게 여기 있는 거예요? 바로 우리 집에?
하지만 그렇게 말한 랄프의 표정은 전혀 특별하다는 기색 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이건 그렇게 평이한 얼굴로 말할만큼 보통 일이 아니지 않을까요, 랄프…….
아리엘은 새삼 라카트옐의 위상을 실감했다.
대공가의 이름이 높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제국을 다 쓸어버릴 수도 있는 군사력인 거잖아.
일단 가진 힘 자체부터가 다른걸.
‘나…… 이런 집에 시집온 거였구나.’
놀란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아리엘은 그녀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기사에게 다시 시선을 올렸다.
루시안이 그녀를 위해 붙여준 사람들이었다.
비록 루시안의 체면을 위해, 그의 소유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붙여준 호위일지라도 기분이 간질간질 부풀어 올랐다.
‘이런 건 처음인 것 같아. 날 지켜주는 사람이 있는 거.’
아리엘은 누군가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과거에 악당 무리에 있을 때 그녀도 '그'를 호위하곤 했었으니까.
호위받는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려면 신경 써야할 것이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인지 더욱 그녀는 호위 기사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아리엘은 두 사람을 향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우리 잘 지내봐요. 헥터, 랄프.”
내밀어진 조그만 소녀의 손에 두 기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
“…….”
둘은 이전에 아리엘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냥 ‘그 악마 같은 대공자님이 세상에나 결혼을 하셨다더라.’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호위를 명령받았을 때에도 별생각 없이 명을 받들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루시안의 아내란, 그야말로 루시안을 성별만 여자로 바꿔놓은 것 같은 형상이었다.
무섭고 제멋대로며 잔혹한 느낌의.
그런 소녀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 대공자와 결혼을 할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막상 직접 만나본 대공자비님은…….
랄프와 헥터의 짧은 눈맞춤에 수많은 대화가 지나갔다.
‘대공자님이랑 완전 다르신데?’
‘녹을 것 같이 달콤하게 생기셨는데?’
‘차갑긴커녕 따뜻해서 말랑말랑해지는데?’
무엇보다…….
‘엄청 귀여우신데?’
그들은 쑥스러움에 머리를 긁적이며 아리엘과 번갈아 가며 악수를 나누었다.
모시는 분과 악수를 나누는 경험은 그들로서도 처음이었다.
라카트옐 가문을 섬긴다는 건 늘상 마티어스나 루시안의 위압적인 느낌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주군에게 복종하는 것에 익숙한 기사들에게 라카트옐 남자들의 위압적인 면모는 싫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강한 주인을 섬긴다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막 편하고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의 아기 마님은 위압적이긴커녕, 작고 귀여워서 보호하고 싶은 본능이 저절로 샘솟는 분이었다.
그들의 기사도 정신이 불타올랐다.
‘지켜드리고 싶다!’
대공자비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네놈들을 없애버리겠다고 했던 대공자의 협박에 아리엘의 사랑스러움까지 더해지자, 두 기사는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아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솜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해드려야지……!’
봄 아지랑이처럼 미소짓고 돌아서는 아리엘 뒤에서, 기사들은 결심하듯 각자의 검을 불끈 쥐었다.
* * *
호위가 붙는다는 건 낯선 경험이었다.
기사 헥터와 랄프는 아리엘이 어디에 가든, 심지어 그게 그냥 집안 복도를 거니는 거라고 해도 따라다녔다.
그걸 사소하거나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소드마스터답게 기척도 거의 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신경이 쓰였던 아리엘도 시간이 지나자 그들을 의식하지 않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예법 수업이 끝난 뒤 노는 시간이 되자 아리엘은 바람을 쐬러 앞뜰로 나섰다.
라카트옐 저택의 정원은 너무 넓어서 그녀는 거의 건물 바로 앞의 작은 뜰에서만 놀았다.
그곳에는 조경수와 검은 자갈이 깔린 산책길이 있었는데, 그 옆을 지나쳐 돌아가면 루시안이 수련을 했던 연무장이 있었다.
그 반경을 넘어가면 물이 반짝거리는 연못도 있고, 연못을 가로지르는 석조 다리도 있고, 연못을 둘러싼 작은 숲도 보였다.
숲을 지나면 푸른 사자 기사단이 머무는 기사단 건물이 있었다.
‘이게 다 라카트옐 가의 소유라니.’
아리엘은 여기 정원은 너무 좁다고 했던 알렌의 말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무장 반대편 길에는 흰 자갈이 깔린 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로맨틱한 장미 아치와 조경수로 만든 미로 정원을 볼 수 있었다.
미로 정원 옆에는 마티어스가 그녀를 위해 짓고 있는 커다란 유리 온실이 있고, 온실 앞에는 화려한 3층 분수대가 위치했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공터에는 예술 작품 같은 흰 석상들이 놓여있었다.
알렌은 검은 자갈이 깔린 곳을 블랙 가든, 흰 자갈이 깔린 곳을 화이트 가든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블랙 가든은 바깥주인님들을 위한 공간이고 화이트 가든은 안주인님을 위한 공간이지요.”
건물 앞에서 보면 검은 자갈이 깔린 깔끔한 블랙 가든만 보이지만, 건물 뒤로 깊숙이 들어가면 화사한 화이트 가든이 드러난다.
건물 뒤쪽에 화이트 가든을 둔 것은 안주인에 대한 배려와 보호로 보였다.
기사단 건물 쪽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데다 외부에서도 들여다보기 어려운 구조니까.
이렇듯 정원이 넓다 보니 어린 아리엘은 앞뜰에서 노는 걸로도 충분했다.
뜰로 나간 아리엘은 정원사 우즈가 다듬어놓은 조경수들을 구경하며 산책을 했다.
헥터와 랄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아리엘은 뒤를 돌아서서 둘에게 말을 걸었다.
“헥터, 랄프. 두 사람이 쓰는 검은 신기하게 생긴 것 같아요.”
헥터가 험상궂게 웃고 거대한 대검을 손으로 툭툭 쳤다.
보통 성인 남자 몸집만한 크기의 검이었다.
“그렇죠. 제 검은 다른 검을 썰어버리는 검. 기사의 검이 아니니까요.”
“그러면요?”
“전 용병 출신이거든요. 그때 들었던 검입죠.”
용병……. 그래서인지 헥터의 검법은 절도 있다기보다는 거친 생존형이었다.
“랄프는요?”
랄프가 나서서 제 검을 아리엘 앞에 가지고 왔다.
랄프의 검은 길고 얇은 검으로, 손잡이와 검집에 섬세한 세공이 되어 있었다.
“레이피어입니다.”
레이피어는 헥터의 무시무시한 대검에 비해서 매우 연약해 보였다.
아리엘은 이런 검으로 어떻게 싸우는지 궁금해졌다.
‘헥터의 검으로 내리치면 깨져버릴 것 같은데……?’
그렇지만 랄프 또한 마스터다.
연약해 보이는 것은 반드시 발톱을 숨기고 있는 법이니, 이 얇은 것에도 비밀이 숨어있을게 분명했다.
아리엘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혹시 두 사람이 검 쓰는 걸 보여줄 수 있나요?”
헥터와 랄프가 서로를 마주 보고 씩 웃었다.
“보여드릴까요?”
* * *
아리엘과 기사들은 검은 자갈길을 따라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아리엘이 비단 차양이 곱게 쳐진 곳에 앉자, 두 기사가 연무장 중간에서 마주 섰다.
랄프의 입에서 ‘시작.’이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어마어마하게 도약한 두 기사는 허공에서 카강-! 칼을 맞대며 대련을 시작했다.
아리엘이 랄프의 검에 대해서 생각했던 바는 맞아 떨어졌다.
랄프의 검은 얇은 대신 무척이나 유연했다.
그 유연함으로 헥터의 거대한 힘을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고 역이용하거나 되받아쳤다.
랄프가 구사하는 검법 또한 놀라웠다.
그는 자신의 작은 체구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했다.
부족한 힘은 유연함으로, 작은 체구는 상대 쪽으로 빠르게 파고드는 것으로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냈다.
공격도 날카롭고 정확했다.
반면 헥터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그의 검술은 무척 거칠었고 예의 따위는 생략한 검투사의 검이었다.
육중한 대검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무서운 파괴력을 뿜어냈다.
대검이 닿는 땅마다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지고 검이 움직일 때마다 먼지바람이 일어났다.
코뿔소 떼처럼 돌진해 한 번에 쓸어버리는 헥터의 검술은, 잘못 스치기만 해도 몸이 가루가 되어버릴 것처럼 위력이 대단했다.
둘은 정반대의 검술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호각을 유지했다.
헥터가 사납고 예의를 모르는 검투사라면 랄프는 부드럽고 우아한 궁정 검사.
최근 브루노어에게 다른 사람의 마나를 읽는 법을 배운 아리엘은 두 사람의 검술 이외에도 소드 마나의 흐름을 보았다.
그렇게 보니 더욱 흥미진진했다.
대련은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아리엘은 그녀에게 돌아오는 기사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정말 대단했어요, 헥터, 랄프!”
땀을 닦으며 걸어오던 헥터와 랄프는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얼굴을 붉히며 크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모시는 주인에게 칭찬을 받아본 게 언제였더라?
마티어스나 루시안이 그들의 실력을 칭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라카트옐 남자들은 인간 이상의 속력과 힘을 가졌다.
소드마스터라도 그들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아기 마님에게서 칭찬을 받자, 그들의 마음속에는 좀 다른 형태의 충성심이 솟아났다.
‘잘 모셔서 인정받고 싶다.’
주인에게 인정받는 것은 기사의 크나큰 긍지였다.
어련해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라카트옐의 기사들은 그 대신 강한 주인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큰 충성심을 바치고 있었다.
그런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까지 느끼게 해주는 주인이라니!
게다가 신기하게도 아리엘은 기사들을 꺼리지 않았다.
원래 어린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소드마스터에게 감도는 소드 마나를 무서워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두려워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아기 마님은 무서워하시지도 않고…….’
아리엘은 루시안과 마티어스에게 익숙해진 상태니 그들의 기세 정도로 무서울 리 없었지만, 기사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기사들이 다가오자 아리엘이 홍조를 띤 뺨으로 말했다.
“둘 다 멋졌어요.”
헥터가 다시 요란하게 헛기침을 했다. 랄프는 얼굴을 붉히며 허둥지둥 대답했다.
“기쁘셨다니 다행입니다. 저희는 서로를 상대하는 것보다 적과 맞설 때 더 좋은 조합이긴 하지만요.”
“그런가요?”
“예.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거든요.”
헥터가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솔직히 전장에서 등을 맡기기에 이 녀석만큼 괜찮은 상대는 없죠.”
“인정하긴 싫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아, 두 사람은 콤비 같은 거구나. 랄프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대공자님과 삼대련할 때 헥터 녀석이 없었으면 저는 지금쯤 살아있지 못했을 겁니다.”
“루시안과요?”
“헉.”
기사 두 명이 동시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왜 그러나요?”
“그, 그, 그 성함을 말하시기에.”
“아.”
아리엘은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보았다.
그녀가 루시안의 이름을 그대로 불렀을 때 수잔도, 알렌도, 달튼도 놀랐었지.
심지어 마티어스마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루시안이 그렇게 부르라고 했거든요.”
“…….”
“…….”
헥터와 랄프가 경악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껌벅거렸다.
아리엘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루시안, 대체 이름을 부른 사람들한테 무슨 짓을 했던 건가요?
“삼대련을 한 줄은 몰랐어요. 헥터와 대련하는 건 본 적 있지만.”
랄프가 손사래를 쳤다.
“대련이라뇨. 그건 정식 대련이 아닙니다.”
“그럼요?”
“그냥 몸풀기하신 거죠. 헥터가 우리 중에 힘이 제일 세서 수련 상대로 쓰시는 것뿐이랍니다. 그분 힘으로 성에 찰 사람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검기도 두르고 하던데요.”
헥터가 씨익 웃었다.
“그 정돈 어린애 장난입죠. 그분께서 진짜로 하시면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을걸요.”
이어진 랄프의 설명을 듣자 아리엘은 그제야 좀 이해가 되었다.
루시안은 최연소 소드마스터일 뿐 아니라 제국 최고의 소드마스터였다.
모두가 어린 나이에 그런 경지를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루시안은 가능하다는 걸 증명해냈다.
“보통 대련 때는 삼대련이나 사대련을 합니다. 저, 헥터, 네드 세 명이 한 팀이 돼서 대공자님을 상대하는 거죠. 사대련쯤 되어야 겨우 버틸만 합니다.”
“삼대련 할 때 랄프 너 죽을 뻔했잖아. 진짜 아슬아슬했지.”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뒷덜미가 쭈뼛 선다니까.”
혼자서 소드마스터 세 명을 상대할 수 있다니. 루시안 정말 대단하다…….
“어릴 때부터 뵈었지만 대공자님은 정말…….”
헥터가 말꼬리를 늘이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괴물이 따로 없다니까요.”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어릴 때의 루시안을 알아요?”
“예. 용병질 접고 여기 들어온 지가 13년째니까 그분이 아기였을 때부터 봤습죠.”
어릴 때부터 봐와서 루시안이 헥터와 가까운가 보구나.
아리엘은 다음엔 헥터에게 루시안의 어린 시절을 물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 * *
“자, 아기 마님. 식사 시간이에요.”
수잔이 음식을 가득 담은 트레이를 밀고 들어오며 밝게 말했다.
빨리 살이 쪄야 한다며 매일 음식을 듬뿍 주던 수잔은 아리엘이 쓰러진 이후로 식단을 전격 교체했다.
이유는 마법사 브루노어가 한 조언 때문이었다.
“아기 마님은 대사량이 높은 다람쥐와 비슷한 신체이십니다. 자주, 많이, 고열량으로 먹어야 하는 거지요.”
“활동을 안 하셔도 그런가요?”
“예. 따로 운동을 하시지 않아도 마나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살이 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수잔의 특제 고영양 식단이었다.
오리 가슴살 구이, 진한 데미그라스 소스를 부은 완자, 레몬 크림을 넣은 새우 파스타, 오렌지크림, 구운 사과…….
점심치고는 거창한 메뉴들이었다. 열 살짜리 소녀가 먹기에 부담스러운 양이기도 했다.
“아기 마님은 좀 더 살이 찌셔야 한다니까요.”
수잔은 아리엘이 식사하기 편하도록 스칼렛 레드의 붉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포니테일로 묶어주었다.
“예쁘시기도 하지.”
뺨에 입을 맞춰준 수잔은 비프롤과 조개 스프까지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아리엘은 뭐부터 먹을지 고민하다가 포크로 통통한 새우 살을 콕 찍어 입에 넣었다.
달짝지근한 육즙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아리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맛있다.”
그녀는 레몬크림을 듬뿍 묻힌 면을 돌돌돌 말아서 와앙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와. 진짜 맛있어. 홀슨, 최고예요.
‘예전에는 어떻게 굶으면서 버텼던 걸까?’
후작저에서 지낼 땐 식사를 거르는 것이 일상이었다.
준다 해도 때를 한참 지나서 식어 빠진 죽 한 그릇만 겨우 던져주었었지.
요즘 그녀의 식성을 생각해보면 그때의 상황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브루노어 말대로 아리엘은 먹어도 잘 살이 찌지 않았다.
처음 대공저에 왔을 때의 앙상한 꼴은 벗어났지만, 보통 아이답게 포동포동해지질 않았던 것이다.
영문을 모르고 열심히 먹인 수잔이 좌절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럴 수가! 겨우 0.5kg 느시다니. 아아, 드신 것이 대체 다 어디로 간 걸까요?”
수잔은 아리엘이 살이 찌지 않더라도 다 키가 크려고 뼈로 가고 있을 거라며 열심히 스스로를 다독였었다.
그러나 브루노어의 말을 듣고 나서는 작전을 바꾸었다.
세 끼를 다 푸짐하게 늘리고 간식 횟수를 한 번 더 늘리는 등 아리엘을 조금이라도 살찌게 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잔이 열심히 먹인 덕에 살은 안쪘어도 식성이 좋아진 아리엘은 맛있는 음식들을 배부르게 먹으며 체력을 키웠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브루노어에게 마법을 배우는 시간이 이어졌다.
어느 정도 마법 이론을 익힌 아리엘은 마력을 차츰 늘려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사람의 마나를 감지하는 법, 빛의 구를 켜는 법 등 기본적인 마법을 익혔다.
과거의 경험이 있는 아리엘은 당연히 그런 것을 숨 쉬듯 쉽게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브루노어가 보기에는 그게 엄청 놀라운 일인 듯했다.
“마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이 시작 단계를 가장 어려워하는데…… 아리엘님은 특별한 경우시군요!”
감탄을 숨기지 않으며 그가 칭찬했다.
과거를 얘기할 수 없는 아리엘은 괜히 더 부끄러워졌다.
“그럼 이제 마나를 뭉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브루노어가 아리엘의 두 손바닥을 아래에서부터 받쳐 들었다.
“먼저 눈을 감고, 좋아하는 것 하나를 떠올려보세요.”
아리엘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은 뒤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
수잔, 마티어스님, 루시안, 다이아나.
하나만 생각하려고 했는데 너무 많았다.
“못 정하겠어요.”
“그럼, 좋아하는 동물은 어떤가요?”
동물? 음…… 아리엘은 다시 집중했다.
‘털이 복슬복슬하고, 작고, 하얗고, 귀여운…….’
아! 토끼!
하얗고 귀여운 토끼가 떠올랐다.
아리엘이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브루노어가 설명을 이었다.
“손으로 마나를 내보내며 그 모양을 떠올리시는 겁니다. 그리고 눈덩이처럼 거기에 계속 마나를 덧씌워 뭉치는 거지요.”
아리엘에게는 역시나 쉬운 일이었다.
그녀의 작은 손바닥에서 나온 하얀 마나는 꽃잎처럼 휘날리며 토끼 모양을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구슬만 하던 모양이 아리엘이 마나를 불어넣을수록 커졌다.
결국엔 실제 토끼 크기만한 마나가 손안에 만들어졌다.
“와아…….”
아리엘은 마나로 모양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눈을 깜박였다.
왜 과거엔 이런 생각을 못 해봤을까?
그땐 마나를 크게, 세게 만드는 데만 집중했었다. 좀 더 잘 공격하기 위해.
무언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아리엘은 브루노어에게 마법을 배운 뒤에서야 깨달았다.
한편 브루노어는 마나를 토끼 모양으로 뭉치며 웃음 짓는 아리엘을 보며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뭐지…… 이 소녀는.’
한 번에 성공해내다니.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자신을 자꾸만 놀라게 한다.
브루노어는 아리엘이 자신을 어디까지 놀라게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 * *
며칠 후.
“오늘은 좀 다른 것을 해볼까 합니다.”
수업에 들어온 브루노어의 손에는 마도구가 들려있었다.
회중시계 모양으로 생긴 마도구에는 시침이나 분침 대신 자수정침과 토파즈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뭔가요, 브루노어?”
브루노어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제가 직접 발명한 마도구입니다.”
“어떻게 쓰는 거지요?”
브루노어가 자기 손에 시계 모양 마도구를 쥐고 아리엘의 손목에 시계줄을 감아주었다.
“이걸 몸에 닿게 한 채 마법을 쓰면, 그 사람의 마나가 어떤 마법에 가장 잘 반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
‘나한테 가장 적합한 마법을 찾아주려고 하는 거구나.’
아리엘은 기대감으로 뺨을 붉혔다.
드디어 나도 내게 맞는 마법을 알 수 있는 걸까?
아리엘은 이론 수업 시간에 배운 마법 종류를 떠올렸다.
첫째, 연금 마법.
마법약이나 마도구를 만드는데 쓰이는 마법이었다.
물질에 마나를 흘려넣고, 마나가 깃든 물질을 다뤄야 하기에 그쪽으로 감수성이 높아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약물을 제작할 수 있는 마법사는 흔하지만, 마도구를 제작할 수 있는 마법사는 몇 명 없다고 했지.
둘째, 치유마법.
동물이나 사람의 다친 곳을 회복시키는 마법으로, 매우 섬세한 마나 운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셋째, 공격마법.
파괴를 목적으로 무언가를 찢거나 베거나 거세게 타격하는 마법으로, 과거의 아리엘에게는 무척 익숙한 마법이었다.
넷째, 원소 마법.
불, 물, 공기, 흙의 네 가지 원소를 다루는 마법으로, 원소와의 친화도가 높은 경우에만 사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마나로 인위적인 불이나 바람을 일으킨다면, 원소 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마나를 소모하지 않고 불, 물, 바람 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이동마법, 방어마법, 정화마법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마력이 강해지면 주문이나 마법진을 통해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위의 큰 네 가지 마법이 두꺼운 사전이라면 나머지 마법들은 한 권짜리 책이랄까?
‘다루는 범위와 깊이가 다른 거였었지…….’
마법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기대감에 차 있던 아리엘의 얼굴에 이내 걱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혹시…… 내게 맞는 마법이 공격마법이면 어떡하지?’
과거, 마법사 무리에게서 공격마법에 재능이 있단 이야기를 들었었던 아리엘은 더 이상 남을 해치는 공격마법은 배우고 싶지 않았다.
“아리엘님?”
“네?”
브루노어의 목소리에 순간 정신을 차린 아리엘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겁먹은 것을 알아차렸는지, 브루노어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그가 아리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리엘은 조심스레 브루노어의 손을 잡았다.
브루노어가 다른 쪽 손가락을 빙글 돌리자, 후웅 하는 부드러운 바람이 스치며 주위의 풍광이 바뀌었다.
분홍색의 빛으로 가득한 이공간이었다.
아리엘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브루노어! 여기가 어딘가요?”
“방과 연결된 다른 차원의 공간입니다. 시험 장소라고나 할까요?”
여유롭게 말한 그가 시계에 그려진 눈금을 확인하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자, 그럼 시작해보지요.”
브루노어는 쥐고 있던 시계 모양 마도구를 톡톡 쳤다.
그리고 마도구를 향해 고대 룬 언어로 노래하듯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큰 줄기가 되는 네 갈래의 마법 중 그대는 어느 길을 걸을 것인가.”
그러자 꼼짝도 하지 않던 마도구의 보석침들이 움직이며 작동되기 시작했다.
보석의 단단함은 땅이 만드는 것.
하지만 보석에게 고유의 색깔을 선물하는 것은 마나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브루노어는 보석 속의 마나가 반응하는 정도를 재어 각 사람의 마법 성향을 알아내곤 했다.
브루노어가 아리엘을 독려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알려드리는 주문만 따라 하시면 됩니다. 주문을 외우시면 마도구가 길을 알려줄 거랍니다.”
그는 아리엘에게 네 개의 주문을 가르쳐주었다.
“레플리카, 세인티, 오벨라루스, 네이브렐.”
주문을 말하기 전 아리엘은 눈을 꼭 감고 마음으로 기도했다.
‘제발 공격마법만 아니길. 제발 공격마법만은 아니길.’
이윽고 그녀는 마른 입술을 핥고 첫 마디를 입 밖으로 냈다.
연금 마법에 해당하는 주문이었다.
“레플리카.”
소녀의 입술에서 주문이 나오자 이공간 안에 여러 개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마도구의 주인인 브루노어만 볼 수 있는 파동이었다.
브루노어는 손에 쥔 마도구가 진동하며 떨리는 것을 느꼈다.
마도구의 토파즈침과 자수정침이 아리엘의 마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토파즈침이 휙 돌아가며 빛을 발했다.
브루노어는 신음을 삼켰다.
‘……놀랍도록 높은 수치로 반응하고 있군.’
손자인 히스 녀석에게 시험할 때도 격렬하게 반응했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심했다.
토파즈가 뿜는 빛 때문에 눈이 멀 것 같았다.
브루노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히스만한 천재 마법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히스가 우쭐해질까 봐 그걸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지만.
‘그런데 이건…….’
천재의 영역을 벗어났다.
브루노어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아리엘은 치유마법 주문, ‘세인티’를 끝내고 공격마법의 주문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벨라-”
그리고 그 순간.
파앗.
엄청난 파동이 이공간 안에 일어났다.
브루노어조차 잠시 눈을 찌푸릴 만큼 거센 바람이 불었다.
브루노어는 아리엘이 다른 마법보다 공격마법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격마법이라니…….’
그가 당황하는 사이 아리엘이 순식간에 원소 마법의 주문을 말했다.
“네이브렐.”
그 순간 자수정침이 강한 빛을 발하며 커다란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땅까지 함께 움직이며 울음을 토했다.
쿠구구구궁.
브루노어는 마나를 불어넣은 손으로 마도구를 잡았다.
위험한 정도의 파동이 분홍색 이공간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아리엘님의 손에서 시곗줄을 풀어내야 해!’
머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이 행동을 막았다.
브루노어는 아리엘의 능력을 끝까지 보기 위해 끝내 시곗줄을 풀지 않았다.
한계까지 내몰린 마도구에 쩌적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분홍빛의 이공간도 수많은 파편으로 깨지며 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파직-!'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마도구가 부서지면서.
“아리엘님. 시험이 끝났습니다.”
아리엘은 눈을 떴다.
어느새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처음부터 그 방을 떠나지도 않았다는 듯.
* * *
안색이 창백해진 브루노어가 시곗줄을 풀어주었다.
아리엘은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게 없는지 궁금해졌다.
브루노어는 깨진 마도구를 아리엘 몰래 로브 소매 속 마법 공간에 치워버리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 시간부터는 원소 마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리엘은 눈을 깜박거렸다.
“제게 맞는 마법이 설마…… 원소 마법인 건가요?”
“예. 다른 마법들도 소질이 있으시지만요.”
말도 안 돼. 아리엘은 믿을 수가 없었다.
‘공격마법이 아니야?’
아니었던 거야?
브루노어를 똑바로 바라봤지만, 그에게 거짓의 기색은 없었다.
세상에. 아리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양 뺨을 붙잡았다.
‘공격마법이 아니었어. 그걸 또 겪지 않아도 돼!’
이게 사실이라면 너무나 기뻤다.
“그럼-”
그녀가 입을 여는 찰나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쪽으로 꽈당 넘어졌다.
그리고 대뜸 브루노어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 이놈, 히스! 텔레포트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했지!”
방 안으로 넘어진 건 브루노어의 제자, 히스였다.
얼결에 히스를 붙잡은 랄프는 아리엘의 허락을 받고 소년을 놓아주었다.
넘어지며 부딪힌 엉덩이를 문지르던 갈색 머리의 소년이 외쳤다.
“할아버지, 이 방 뭐예요? 이 방 안으로는 텔레포트가 안 돼요. 좌표가 안 찍히는데요?”
브루노어의 관자놀이에 불끈 힘줄이 돋았다.
그는 아리엘 앞에서 보이던 인자함은 벗어던지고 성큼성큼 걸어가 히스의 머리에 쾅 딱밤을 놓았다.
“당연히! 여긴! 아기 마님 방이니까!”
말끝마다 딱밤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여자분 방에 디스펠(주문 무효) 마법이 안 걸려 있을 줄 알았느냐? 넌 기본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수업 중이니까 당장 돌아가!”
히스가 딱밤 맞은 머리를 감싸며 빽 외쳤다.
“못 돌아가! 안 돌아가! 할아버지는 맨날 나한테 자습만 시키고!”
“네 놈은 자습할 때 가장 능률이 오르는 놈이잖냐! 옆에 차고 앉아서 가르치면 오만 발광을 다 하면서! 그리고 스승님이라고 부르랬지!”
“아, 자습도 한두 번이지!”
두 조손은 잠시 아리엘 앞인 것도 잊고 왁왁거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 브루노어?”
순간 싸우는 소리가 그치고 두 쌍의 눈동자가 아리엘을 향했다.
정신을 차린 브루노어가 다급하게 크흠흠 기침을 했다.
하지만 히스는 브루노어에게 대들던 것도 잊고 아리엘을 노려보았다.
억울함과 미움을 담은 눈이었다.
아리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내가 히스의 할아버지를 빼앗은 건 아닐까?’
그녀는 늘 후작이 예뻐하는 오라비 제롬을 부러워했기 때문에 저런 눈을 하는 히스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리엘은 브루노어를 보며 말했다.
“……브루노어. 히스도 마법을 배운다고 했잖아요. 히스가 괜찮다면 같이 수업을 받아도 되나요? 저보다 일찍 배웠으니 제가 배울 점도 있을 거고요.”
브루노어가 조금 심각한 얼굴을 했다.
“안 됩니다, 아리엘님. 대공자님께서 아주, 매우, 몹시 싫어하실 겁니다.”
윽, 그 생각을 못 했네.
그러나 아리엘은 금방 계책을 떠올려냈다.
“루시안이 떠나기 전에 그랬어요. 자기가 없는 동안 루시안 권한은 다 내 거라고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돌아왔을 때 물어보고, 싫다고 하면 그때 얼른 바꾸면 되지 않을까요?”
아리엘은 히스 쪽을 바라보았다.
“히스 생각은 어때?”
히스가 바짝 약오른 표정으로 외쳤다.
“흥! 내가 너보다 훨씬 잘하는데 왜 같이 수업을 들어야 해?”
그리고 소년은 브루노어의 주먹에 또 딱밤을 맞았다.
으으…… 어쩌면 마나를 실어 때리는 건지도 몰라.
다 늙은 할아버지 주먹이 이렇게 아플 리가 없잖아?
히스가 입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브루노어는 손자놈의 뒤통수를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자기가 우물 안 개구리인 줄도 모르고…….’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원래 마법이란 옆에 자극제가 있으면 더욱 성장 속도가 빠르다.
‘그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자극제가 되어줄지도 모르지.’
마침내 결정한 브루노어는 아리엘에게 말했다.
“마티어스님께는 제가 허락을 구해보지요. 히스 이 녀석! 어서 아리엘님께 같이 수업받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려라.”
“아, 싫다고요!”
브루노어의 눈빛이 번뜩 빛났다.
“계속 자습할 테냐?”
“……윽.”
히스의 눈에 반항기가 한풀 꺾였다.
자존심과 지겨운 자습 사이에서 한참 갈등하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에잇, 좋아, 좋다고!”
히스가 아리엘을 휙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가 불쌍해서 껴주는 건 용납 못해! 내가 정당하게 대가를 치르고 들어오겠어.”
마법사 세계에서는 은혜와 원수 갚는 것이 정확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다.’
마법사 밑에서 자란 히스에게는 당연한 사고방식이었다.
히스에게 뭘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아리엘은 히스의 생각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녀는 고민 끝에 대가를 말했다.
“그럼…… 히스가 가장 잘하는 마법을 나에게 가르쳐 줘.”
“뭐?”
“나는 배울 수 있어서 좋고, 히스는 가르치면서 한 번 더 익힐 수 있으니까 좋잖아.”
“…….”
생각 외의 관대한 제안이었는지 히스가 브루노어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브루노어는 어떤 글씨가 적힌 종이 세 장을 만든 뒤 마법사 저울을 꺼내서 무게를 달았다.
“좋아, 이 정도는 아리엘님께 드려야 계산이 맞겠구나.”
브루노어가 종이 세 장을 아리엘 손에 쥐여주었다.
종이에는 '명령권'이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이 녀석을 무조건적으로 사용하실 수 있는 명령권입니다. 원래 마법사가 대가를 치르겠다고 하면 이런 걸 뜯어내셔야 하는 법이지요.”
“내 할아버지 맞아?”
히스는 불만스러운 눈치였지만 순순히 대가를 받아들였다.
당장 명령권을 어디에 써야 할지는 몰랐던 아리엘은 명령권을 잘 보관해 두기로 했다.
똑똑.
“아기 마님, 수잔입니다.”
마침 수업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엘은 브루노어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히스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다음 수업 때 봐, 히스!”
* * *
며칠 동안은 호위에 적응하고 마법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는 바람에 아리엘은 루시안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맞다. 루시안이 하라고 한 게 있었지.’
그녀는 루시안이 내주고 간 숙제를 떠올렸다.
‘내가 없는 동안 집을 네 식대로 다 뜯어고치고 규칙도 바꿔 놔.’
그러고는 그게 그에게 아주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도 말했었다.
대체 왜? 아리엘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서 뭔가 바꾸는 걸 아주 싫어하지 않나?
원래 내가 하던 방식대로 맞춰라.
귀찮게 하지 말고 네가 적응해라.
이런 반응이 정상일 텐데…….
적어도 아리엘이 지금까지 겪은 바에 따르면 그랬다.
과거 그녀가 처음 마법사 무리에 들어갔을 때, 주위 마법사들이 그랬었으니까.
‘계집애 하나를 특별히 챙겨줄 수 없으니 네가 우리 규칙에 맞추라고 했었지.’
한 단체의 규칙이 바뀐다는 것은 이전의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루시안 본인마저도.
아리엘이 바꾼 규칙을 루시안이 안 지키면 대공자비의 권위가 안 설 테니까 말이다.
아리엘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어쨌든, 약속한 거니까 지켜야지.’
그러려면 먼저 집 주인인 마티어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 마티어스와 만난 아리엘은 디저트를 먹을 때쯤 입을 열었다.
“저…… 마티어스님.”
“그래.”
마티어스가 고개를 들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표정은 무심했지만, 아리엘은 그가 관심을 가지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혹시, 제가 이 집 장식 같은 거 몇 개를 바꿔도 되나요?”
가만히 듣고 있던 마티어스가 상체를 뒤로 기울여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짙은 청색의 눈이 아리엘을 향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된다. 네가 안주인이니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건가?”
“아뇨!”
아리엘은 빠르게 부정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조금 바꿔보고 싶어서요.”
마티어스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턱을 매만졌다.
그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네 뜻대로 해라. 달튼을 통해 필요한 걸 준비해주지.”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달튼은 대경실색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생각했다.
‘아니, 변화를 그렇게도 싫어하시던 대공님이 집 안을 바꾸라고 아기 마님께 내정 예산을 주시겠다니!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귀족 가문의 내정 예산이란 안주인에게 배정되는 비용이었다.
저택을 관리하고, 사용인을 쓰고, 다른 귀족들과 사교활동을 하는 데에 쓰이는 모든 경비는 내정 예산에서 나왔다.
그러다 보니 가문이 한미하고 재력이 적을수록 안주인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반면 권력있고 부유한 가문의 안주인들은 풍부한 내정 예산으로 집안을 다스릴 수 있었다.
각 가문의 내정 예산은 원래 극비사항이었지만, 안주인의 권위를 나타냈기 때문에 자랑하듯 슬쩍 이야기를 흘리는 귀부인도 있었다.
파티의 규모나 본인의 치장을 통해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귀부인들끼리 서열을 정할 때 내정 예산은 중요한 척도가 됐다.
많이 받는 귀부인은 부러움의 대상이 됐고, 적게 받는 이는 무시를 당했다.
보통 집안에 안주인이 두 명 이상일 경우엔 더 경험 많은 귀부인이 예산을 주로 관리했다.
그러나 라카트옐 대공가에는 아리엘대신 관리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대공자비보다 높은 지위인 대공비가 없었으니까.
사실 대공비가 있었다 한들 내정 예산을 집안 환경 바꾸는 데 쓸 수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공께서는 뭔가 바뀌는 걸 무척 성가셔하시니까.’
마티어스는 변화를 매우 싫어했다.
그를 모시는 사용인들은 청소하면서 집 안 장식품 하나 건드리는 것도 조심스러워했다.
위치가 바뀌면 대공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티어스는 일상도 규칙적으로 살면서 일정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패턴 따위는 아예 만들지 않고 종잡을 수 없이 행동하는 대공자 루시안과는 정반대의 성향이었다.
그런데 그 철벽 마티어스 대공이 나이 어린 열 살짜리 며느리에게 안살림 비용을 준다?
그것도 집안을 바꾸라고?
달튼은 이게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대공님이 아기 마님을 보통 귀애하시는 게 아니야.’
그는 이 집 남자들이 사랑스러운 스칼렛 레드빛 소녀에게 점점 길들여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꾸는 걸 허락하실 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아기 마님께 내정 예산을 어느 정도 드려야 하는지, 달튼은 고민이 되었다.
그저 그런 백작가나 자작가 정도의 살림이라면 내정 예산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라카트옐 가는 무려 제국 유일의 대공가였다.
‘지금 살림에 쓰이는 비용만 해도 다른 사람이 알면 기절할 만큼 어마어마하지.’
그리고 그 비용 정도는 라카트옐의 거대한 부(富)에 개미 눈물만큼의 영향도 주지 못했다.
대공이 아리엘에게 그 돈을 쥐여준다는 건 제국 귀부인들 중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을 권력을 준다는 것과 같았다.
신중하게 결정하기 위해 달튼은 마티어스에게 한 번 더 찾아가서 물었다.
“저…… 대공 각하. 아기 마님께 어느 정도의 비용을 드리면 될까요?”
마티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푸르스름한 살기를 내뿜었다.
“그딴 걸 물으려고 내 시간을 뺏는 건가.”
달튼은 공포에 떨며 목을 움츠렸다.
상전의 심기를 미리미리 알아차려야 하는 건 라카트옐 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숙명이었다.
마티어스가 불쾌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당연히 내정 예산 전부지. 뭘 묻는 거야?”
달튼은 말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방을 나왔다.
전부, 전부란 말씀이지…….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할 일 목록의 제일 위에 ‘내정 예산 처리’를 추가했다.
* * *
다음날 오전.
“달튼.”
아리엘은 달튼이 가져다준 문서에 쓰인 글씨들을 보고 그를 불렀다.
“이게…… 다 뭔가요?”
나는 분명 장식 몇 개를 바꾸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왜 이런 게 내 이름 앞으로 와 있는 거죠?
방금 설명을 들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달튼이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주었다.
“대공님께서 아기 마님께 안주인 몫의 모든 예산을 배정하셨습니다.”
원래라면 대공비 몫, 대공자비 몫 두 개로 나눠져야 할 예산이 통째로 아리엘에게 떨어진 것이다.
아리엘이 충격에 말을 잃으려는 찰나, 달튼이 황급히 말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어리신 아기 마님께서 안살림의 짐을 지는 건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그럼요?”
“지금처럼 하녀장이 살림을 도맡아 하되, 기본적으로 집안 유지에 드는 비용 외에는 모두 아기 마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는 겁니다.”
“아…….”
아리엘은 퍽 안심했다.
집안 유지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들 테니까 이 중에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얼마 없을 거야.
그럼 소소하게 조금씩 바꿔봐야지.
“유지 비용을 제외하면 얼마인데요?”
달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어떤 숫자를 말했다.
아리엘은 편안하게 듣고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숫자가 그렇게 되는 거지요?!
아리엘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만약에 돈을 안 쓰면 어떻게 되나요?”
“자연스럽게 아기 마님 몫의 금고로 들어갑니다. 일종의 사비나 용돈이랄까요.”
이게 아닌데. 안 쓰면 내 돈이 된다는 거잖아!
“안 쓴 돈은 그냥 라카트옐 재정으로 돌아가면 안 되는 건가요?”
“다른 가문들에서는 그렇게도 하곤 합니다만, 라카트옐 가는 아닙니다. 한 번 배정한 예산은 되돌리지 않는 게 원칙이라서요.”
“…….”
말도 안 돼.
아리엘은 여기서 돈을 가지고 나갈 생각이 없었다.
물론 루시안과 이혼한 뒤에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없었지만.
‘돈이 없어서 굶는 건 싫어. 그래도…….’
이 결혼은 절대적으로 그녀에게 유리한 계약이었다.
주고받는 게 정확한 결혼이었다면 모를까, 그녀가 얻은 게 많은 상황에서 뒷주머니까지 찰 생각은 없었다.
‘그 이후의 생계는 마법으로 유지하면 될 테니까.’
고로, 그녀는 딱히 돈이 필요 없었다.
안 그래도 루시안에게 받은 게 많은데 돈까지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예산을 써야 하나?’
예산을 쓴다면 자신이 아닌, 이 집을 위해 쓰는 거니까 루시안과의 계약도 지킬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는 아리엘에게 달튼이 말했다.
“아기 마님. 일단 사인을.”
아리엘은 얼떨결에 달튼이 내민 내정 예산 결재 서류에 이름을 적어버렸다.
서명된 서류를 받은 달튼이 안도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엘은 그에게 물었다.
“달튼. 예산을 다음 년도로 넘기는 건 안 되나요?”
“달마다 넘기는 건 가능하지만, 다음 해로 넘기는 건 불가능합니다. 마님.”
아, 알겠다.
아리엘은 앳된 얼굴에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 금액을 꼭 일 년 안에 다 써야 하는 거네요.”
달튼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이 금액 말씀이십니까?”
“네. 이거 일 년 예산이잖아요.”
그 말을 들은 그가 미소지으며 상냥하게 대꾸했다.
최대한 아리엘의 생각을 부정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일 년 치는 여기에 열두 배를 하시면 됩니다.”
“네?”
“이 금액은 한 달 치 예산이거든요.”
* * *
“…….”
드디어 아리엘은 완전히 말을 잃었다.
달튼이 나가기 전에 공단으로 만든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것도 대공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모두 아기 마님 소유니 부담 없이 사용하십시오.”
그녀는 넋이 나간 채로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묵직한 열쇠 몇 개가 들어있었다.
이건 또 뭘까?
아리엘은 열쇠에 대해서는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달튼과 헤어졌다.
지금도 어질어질한데, 열쇠의 정체까지 알게 되면 오늘 밤 잠을 못 자게 될지도 몰랐다.
방에 혼자 남은 그녀는 침대에 폭 쓰러졌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마구 바동거렸다.
‘으으, 루시안 바보 멍청이 해삼 말미잘!’
루시안이 그 명령을 내리지만 않았더라도!
아리엘은 ‘마티어스님도 미워!’하고 몇 번 외친 후,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아…….”
내 나이에 저런 돈이라니 정말 너무하잖아.
회귀 전에도 저 돈의 천만 분의 일도 가져본 적 없었다고.
“이제 어쩌지?”
아리엘은 반쯤 울먹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집안일이라 다이아나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한참 침대를 구르며 고민하던 그녀는 퍼뜩 깨달았다.
이 문제를 상의할만한 사람이 한 사람 존재한다는 것을.
“……수잔.”
조력자는 참으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 * *
라카트옐 대공저의 하녀장 수잔은 무려 20년간 이 집에서 일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하는 일은 이 드넓은 저택을 최고의 상태로 관리하는 일.
대공가에 오랫동안 안주인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여주인과 함께 해야할 일을 모두 도맡아 하고 있었다.
한때나마 여주인이 있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전 대공비는 집안 관리에 관심을 쏟을만큼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대공자 루시안을 낳자마자 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이제 그분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네.’
오래전부터 대공가에는 전 안주인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어 전 대공비가 낳은 루시안조차 마티어스만 닮고, 어머니 쪽의 외모는 전혀 물려받지 않았다.
‘라카트옐 가문의 유전이 강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우리 아리엘님을 닮은 아기가 태어난다면 무척이나 귀여울 텐데…….
무심코 그렇게 생각한 수잔은 ‘아리엘님도 아직 아기인데 내가 무슨 주책맞은 상상이람!’ 하며 스스로를 혼냈다.
아기 마님이 들어오신 뒤, 대공님과 대공자님 모두가 너무 달라지시는 바람에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았다.
“벌써 점심 준비해 드릴 시간이 다 됐네.”
수잔은 하녀들에게 일거리를 나눠주고 아리엘이 먹을 점심 식사를 챙겼다.
방으로 들어서자 달콤한 루비 사탕 같은 소녀가 조르르 달려와 그녀에게 매달렸다.
조그만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가득 띠고.
“수잔, 큰일 났어요!”
그 얼굴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수잔은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아리엘을 보며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기 마님?”
작은 루비 새가 삐약거렸다.
“내가 내정 예산을 받았어요. 열쇠들도 잔뜩요!”
수잔은 아리엘이 어제 재무관에게 대강 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트레이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스튜 그릇을 내려놓으며 후후 웃었다.
“안주인이라면 다들 하시는 거지요.”
아리엘이 울망울망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수잔은 아리엘을 부드럽게 보듬어 안아주었다.
어느새 수잔의 품에 익숙해진 아리엘이 그녀를 마주 안았다.
수잔은 아리엘의 사랑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건강해진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을 스쳤다.
“아기 마님께선 걱정하실 거 하나도 없답니다. 그 돈으로는 하고 싶은 것만 하면 되시는 거예요.”
“하고 싶은 거요?”
“네. 예쁜 옷을 사고 싶으면 사고, 세공인을 불러 친구에게 줄 선물을 주문할 수 있지요. 좋아하는 꽃을 정원에 가득 심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아리엘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건 다 절 위해 쓰는 거잖아요. 이건 대공가의 살림비인데.”
수잔이 아리엘의 이마에 쪽쪽 입을 맞췄다.
“우리 아기 마님은 착하시기도 하지! 하지만 이걸 잘 알아두셔야 해요.”
“뭐를요?”
수잔은 양손으로 아리엘의 얼굴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아기 마님은 이제 대공자비시지요?”
“네.”
“대공자비는 라카트옐 가문의 얼굴 같은 거예요.”
수잔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아기 마님을 위해서 쓰는 것이, 곧 대공가 안살림에 쓰이는 거지요. 둘은 같은 거예요.”
“…….”
‘어, 어쩐지 설득될 것만 같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잔이 말하면 그게 뭐든 믿게 되어버린다.
수잔이 얼마나 대공가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자신을 얼마나 아껴주는지 알고 있어서일까?
수잔이 아리엘의 어깨를 부드럽게 이끌어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시지 말고 점심 먼저 드세요. 걱정이 많으면 키가 안 큰답니다.”
아리엘은 고분고분 냅킨을 무릎에 깔고, 스푼을 집어 들었다.
그녀 앞에 따끈한 스튜와 핑크색 딸기 크림치즈, 쫄깃한 빵이 먼저 놓여졌다.
크림치즈를 스푼에 살짝 묻혀 핥자, 은은한 딸기맛이 퍼지며 새콤달콤한 과육이 부드러운 치즈와 함께 느껴졌다.
한 마디로,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아리엘은 나이프로 크림치즈를 양껏 듬뿍 퍼냈다.
빵 위에 두껍게 바르고 크게 한 입 깨물었다.
맛있어…….
근심이 싹 날아가는 기분이다.
수잔이 호두와 피칸을 주재료로 구운 파이를 큼직하게 잘라 덜어주었다.
파이 바닥이 부순 쿠키와 버터로 이루어져 달콤했다.
아리엘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맛있게 점심 식사를 마친 아리엘은 수잔에게 열쇠 꾸러미를 보여주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했으니까.
“근데요, 수잔. 이 열쇠들은 다 뭐예요?”
수잔이 열쇠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더니 대답했다.
“이건 안창고 열쇠랍니다.
이 독수리 날개 문양이 박힌 것이 무기고 열쇠예요. 보검들이 있지요.
기다랗고 물고기 모양 손잡이인 것이 살림고고요.
거기 맨 아래 용 무늬 금박이 씌워진 것이 보물고, 왕관 인장이 찍힌 게 기록고 열쇠랍니다.”
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분명 아까 달튼이 이거 다 내 소유라고, 마음대로 쓰라고 했는데?’
가까스로 상황을 이해한 아리엘은 입을 딱 벌렸다.
잠깐. 잠깐만.
그럼 마티어스님이 나한테 대공가의 무기, 살림살이, 보물, 기록물…… 그걸 다 맡기신 거란 말이야?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리엘은 작게 신음하며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푹 가렸다.
“…….”
이쯤 되자, 그녀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만 당신의 아내로 살게 해주세요.’
올해 1월, 아리엘은 그녀를 아버지의 손에서 구명해줄 유일한 가문, 피와 광기의 역사로 유명한 라카트옐의 대공자에게 열 살의 나이로 청혼했다.
그런데 왜…….
그해 봄, 그 집 곳간 열쇠가 손에 떨어지는지.
* * *
한참동안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끙끙거리던 아리엘은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안 그래도 분이 묻어날 것처럼 하얀 아리엘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자, 수잔은 바로 따뜻한 코코아를 가지고 와서 그녀를 달랬다.
“우리 아기 마님, 놀라셨군요? 괜찮답니다. 자, 이것 좀 마셔보세요.”
시나몬 가루가 들어간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자 뱃속이 따뜻해지면서 조금 안정이 되었다.
수잔이 사근사근하게 아리엘의 등과 어깨를 쓸어주며 말했다.
“제가 주로 드나드는 곳은 살림고지요. 봄이 될 때 커튼을 싹 다 새로 바꿨던 거 기억나세요?”
“네, 기억나요.”
그 날은 꽃샘추위 때문에 아직 쌀쌀한 2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수잔과 하녀, 하인들이 아침부터 커튼과 벽지를 바꾸고 소파와 이불 천, 테이블보를 새것으로 교체했다.
겨울엔 얌전히 놔두었던 외부 분수대까지 단장했다.
겨울보다 얇은 천의 커튼, 깔끔한 흰 벽지.
햇볕 냄새가 나는 깨끗한 소파 덮개와 테이블보.
디자인은 겨울과 같았지만 봄을 맞아 바꾸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새로 다는 커튼이나 벽지, 장식들이 있는 곳이 살림고예요. 어때요. 별거 아니지요?”
“…….”
수잔의 말에 아리엘은 조금 용기가 났다.
그래. 살림고 정도라면.
나머지 보관고엔 안 들어가 보면 되잖아.
수잔이 웃으며 아리엘의 뺨을 어루만졌다.
“점심도 잘 드셨으니 저랑 살림고에 가보실래요? 살림고는 별채에 있답니다.”
수잔의 부드러운 애정을 느낄 때마다 아리엘은 늘 따스함과 간질간질함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만 살짝 끄덕여 가고 싶다는 뜻을 표현했다.
“좋아요. 가서 실컷 구경하고 놀다 오자고요.”
둘은 사이좋게 손을 잡고, 물고기 모양 손잡이가 달린 열쇠를 든 채 방을 나섰다.
아리엘은 나가기 전에 마법으로 조그마한 이공간을 연 뒤 그곳에 나머지 열쇠들을 안전하게 넣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 * *
별채 나들이의 동행으로 하녀 베키와 안나가 따라왔다.
하녀들 중 어린 축인 두 사람은 잔뜩 흥분해서 호들갑을 떨었다.
“저, 여기 구경 처음 와 봐요. 대공자비님 덕에 와볼 수 있게 되다니.”
“맞아, 맞아. 저도요. 너무 기대돼요.”
아리엘도 사실 별채 건물을 멀리서 본 적은 있었지만, 안에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이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는 데다, 그곳 외에도 알아가야 할 곳이 많아서 그동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별채 건물은 눈부신 흰 벽으로 둘러싸이고, 고아한 민트색의 문이 무척 높은 건물이었다.
문지기에게 열쇠를 보여주고 들어가자 사람 키 세 배만한 높이의 원목 문이 그들을 맞았다.
‘건물이 높아서 3층짜리는 되는 줄 알았는데. 층 없이 통째로 쓰는 곳이었구나.’
문에는 물고기 모양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아리엘이 가진 열쇠를 넣어서 돌리자 자물쇠가 꼭 맞게 돌아가며 달칵 열렸다.
끼익.
거대한 문이 열리면서, 실내로부터 빛이 환하게 쏟아져 나왔다.
아리엘은 눈이 부셔서 소매로 살짝 눈을 가렸다 떼었다.
엄청난 규모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높은 살림고 천장을 바라보며 아리엘이 말했다.
“와……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어요.”
살림고의 천장은 지붕 대신 유리로 이뤄져 있었다.
유리를 통과한 햇빛이 온 보관고 안을 가득 채우며 실내를 환하게 만들었다.
수잔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젠 여기가 모자라서 보관고를 또 짓고 있지요. 그곳 열쇠 모양은 아기 마님 뜻대로 제작할 거랍니다.”
하녀 두 명이 신나서 재잘거렸다.
“아기 마님, 인어 모양은 어떠세요?”
“얘도, 마님께서 직접 정하셔야 진짜 의미가 있지.”
“어머. 그렇지, 참.”
보관고 안에는 사람이 지나다닐만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거대한 선반장들이 빼곡히 세워져 있었다.
선반장 사이사이 벽에는 화려한 등잔이 있어서 밤에 조명 역할을 할 것 같았다.
수잔의 안내를 따라 타박타박, 첫번째 선반장 구역으로 들어선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흡. 숨이 조그만 목구멍에서 탁 막혔다.
“…….”
아까 수잔이 한 말은 거짓말인 게 분명했다.
이 살림고는 절대, 절대, 절대 별거 아닌 공간이 아니었다.
라카트옐의 숨겨진 부가 모두 이 안에 잠들어 있었으니까.
별채 안의 풍경은 몇 달간 라카트옐의 호화로움에 익숙해진 아리엘을 다시 놀라게 할 정도였다.
가장 손이 잘 닿는 곳에는 유리가 끼워져 안이 들여다보이는 그릇장들이 있었다.
늘 티 하나없이 깔끔한 흰 식기만 올라와서, 아리엘은 대공가에 다른 그릇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앤티크 그릇장 안에는 지금껏 보지못한 화려한 그릇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아리엘의 발걸음은 첫 그릇장 앞에서 멈춰버렸다.
수잔이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대를 이어가며 물려받은 그릇들이랍니다. 각 시대마다 최고의 그릇장인들이 만들어서 지금도 견고하고 고급스럽지요.”
하녀들이 뺨을 붉히며 소곤거렸다.
“아기 마님, 이 그릇들 너무 아름다워요. 그렇지 않으세요?”
“이렇게 비싼 그릇들은 깰까 봐 만지지도 못하겠어요.”
첫 그릇장에는 코발트블루 안료로 문양을 그린 도자기 그릇들이 놓여있었다.
같은 디자인의 접시, 찻잔과 찻잔 받침, 도자기 주전자, 화병, 핑거볼, 케이크 받침대 등이 한 세트로 그릇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래 미닫이 장 안에는 접시 몇백 개가 함께 들어있었다.
“엄청 많네요.”
“연회 손님 접대용이라 갯수가 넉넉한 거랍니다.”
다음 그릇장 안에는 화사한 꽃무늬가 그려진 디자인, 그 다음은 광택 있는 검은 식기에 은으로 문양을 그린 것.
그 다음에는 레이스처럼 로맨틱하게 조각된 테두리를 가진 디자인, 다음엔 황금 무늬가 새겨진 것…….
수십 종류의 그릇들이 사용되지 않고 그릇장 안에 모셔져 있었다.
수잔이 조금 아쉬운 듯 웃었다.
“대공가에는 오랫동안 손님을 접대할 일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제 아기 마님이 계시니 달라지겠지요.”
그릇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있던 하녀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이런 그릇들로 연회를 하면, 아아, 얼마나 멋질까! 웬만한 귀족 부인들의 코는 납작해질걸요.”
“부러워서 그 자리에서 기절할지도 몰라. 이게 다 아기 마님 소유라니…… 설레요!”
하녀 중 하나가 아리엘이 좋아할 것 같다면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이것 보세요, 아기 마님. 너무 예쁘죠?”
안나가 가리킨 그릇장 안에는 분홍색의 아기자기한 도자기 그릇들이 들어있었다.
색은 파스텔톤이지만 디자인은 유치하지 않고 세련됐다.
그려진 꽃무늬도 과하지 않고 소녀스러운 정도였다.
분홍색을 좋아하는 아리엘은 이 그릇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예쁘다…… 다음에 이 그릇에 식사해도 돼요, 수잔?”
뒤따라오던 수잔의 입이 미소로 함박 벌어졌다.
“당연하지요! 아기 마님 들어오시고, 이 그릇들을 쓰고 싶어서 얼마나 근질근질했다고요.”
예쁜 핑크색 그릇들을 지나치자 금속 그릇이 나왔다.
금식기와 등잔, 촛대는 순금으로 만들어져 무겁고 화려했다.
은식기들은 주로 접시와 커트러리(포크, 나이프류의 식기)였는데 양이 무척 방대했다.
하녀들은 입을 벌리고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금세공 좀 봐…… 눈이 멀 것 같아요.”
“이 은을 다 녹이면 바다가 될지도 몰라. 그렇지?”
수잔이 아리엘에게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은식기는 섬세해서 마법으로 닦을 수 없지요. 브루노어님도 못하신다니까요.”
그래서 은식기 닦는 날이면 하녀, 하인들 우는 소리가 2층까지 들릴 지경이라고 수잔이 농담을 했다.
……농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양이 많았다.
식기의 디자인과 맞추어 천 냅킨들도 몇백 장씩 고이 접혀있었다.
무늬, 용도, 두께별로 다르게 분류돼 있어서 손님이 오면 세트로 꺼내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잔이 비밀을 말해주는 것처럼 소곤거렸다.
“여기 보관고 전체에는 보관마법이 걸려 있답니다. 이 안에 있는 건 아무것도 변색 되지 않지요. 역시나 은식기는 예외지만요.”
“그렇군요.”
아리엘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보관마법이라니. 신기해라.
나도 분발해야지!
그나저나 슬슬 다리가 아픈데, 아직 10분의 1도 보지 못한 것 같다.
아리엘은 그 다음 구역들을 슬쩍 내다보았다.
커튼, 벽지, 침구, 카페트, 거울, 샹들리에…….
‘어지러워라.’
그녀가 알아야 할 라카트옐의 부유함은 정말 끝도 없었다.
* * *
그 날 아리엘은 별채 전체의 반의 반쯤만 구경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수잔은 하녀들에게 아리엘이 좋아했던 분홍색 도자기 그릇들을 손질하도록 명한 뒤, 먼저 보냈다.
수잔과 아리엘 둘만 남자, 수잔은 좀 더 자상한 말투로 돌아왔다.
하녀장인 수잔은 하녀들 앞에서 아기 마님을 높여주기 위해 조금 더 높은 존칭을 사용하곤 했다.
“힘드시지요?”
“조금요.”
수잔이 빙그레 웃고 말했다.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식료품 창고랍니다. 각종 말린 재료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숙성된 치즈 덩이들이 선반에 가득하지요. 그득한 과일청과 피클 통들은 또 어떻고요.”
아리엘은 배시시 웃었다.
수잔의 말을 들으니 꼭 식료품 창고가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녀도 그곳을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수잔이 다정하게 아리엘을 이끌며 말했다.
“아, 이렇게 마님과 오손도손 안살림 꾸리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어요. 이 집엔 여주인님이 오랫동안 없으셨으니까요.”
아리엘은 문득 자신이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문 앞에서 기절한 그녀가 깨어났을 때 본 방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어두웠다.
어둡고 침체된 분위기는 사실 저택 전체에 내려앉아 있었다.
하녀, 하인들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지나다니며 일만 했고, 넓디넓은 저택은 버려진 듯 휑한 느낌을 주었다.
‘하긴, 마티어스님이나 루시안이 집에 신경을 쓸 것 같진 않으니.’
그리고 두 남자 성격에 저택을 밝은 분위기로 만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용인들에게 겁이나 안 주면 다행인걸.
안주인이 있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수잔이 그 자리를 메우며 저택을 잘 관리해왔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리엘은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여태까지 수잔이 잘해오고 있었는데 내가 할 일이 있을까?’
아니, 해도 되는 걸까?
그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수잔이 걸음을 멈추고 아리엘 앞에 섰다.
“아기 마님, 지금 걱정하셨죠? 내가 뭔가를 해도 되는 걸까 하고요.”
“정말…… 수잔은 내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예요?”
“후후. 글쎄요. 저랑 아기 마님 사이가 천생연분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수잔은 눈앞의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 사랑스러운 어린 마님은 자신이 이 저택에 불러온 봄바람을 아직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기 마님. 하녀장인 제가 하는 일은 여기를 깨끗하게 하고, 트집 잡히지 않도록 돌보는 일이에요. 하지만 마님의 일은 다르답니다.”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내 일은 달라요?”
“그럼요. 안마님 일은 본인 취향으로 이 집을 바꿔나가는 것이거든요. 이제 대공가도 아기 마님에 맞춰 점점 집안 분위기가 바뀌겠지요.”
“바뀐…… 다고요?”
아리엘은 조그만 입술을 뻐끔거렸다.
루시안이 집을 다 뜯어고쳐 놓으라고 했을 때는 그냥 고약한 장난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꾼다는 게……
수잔 말대로 이 집 자체에 아리엘의 손길을 타게 하는 거라면.
아리엘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내가, 이 집 분위기를 바꿀 수 있어요?”
그런 엄청난 일을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거예요?
수잔이 몸을 굽혀 아리엘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미 바뀌고 있는 걸요.”
“……!”
몸을 일으킨 수잔이 밝은 어조로 말했다.
“중요한 건 '누가' 하느냐니까요. 이 저택이 아무리 깨끗하고 세련돼도 안주인 없는 집에 불과하죠. 하지만 마님의 손길이 닿으면…….”
휘리릭. 수잔이 요술 지팡이를 휘두르는 시늉을 냈다.
“그게 어떤 모양이든, 안주인의 취향이 들어간 특색있는 집이 되는 거예요. 둘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게다가 여긴 대공저라고요. 아기 마님이 어떻게 꾸미시든 다른 사람들은 평가할 수 없어요.”
아리엘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라카트옐은 판단 받지 않는다.”
수잔이 활짝 웃어주었다.
“맞아요. 잘 알고 계시네요.”
아리엘과 수잔은 마주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아리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뭘 하든, 라카트옐 가는 판단 받지 않을 거야.
그럼 됐지!
방으로 돌아온 아리엘은 호박 마차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에 누우니 폭신폭신해서 녹을 것만 같았다.
“아, 좋다. 정말 좋다.”
아리엘은 뒹구르르 조그만 몸을 굴린 뒤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 예산을 쓸 일이 있기나 할까?’
집에 호화품이 저렇게나 많은데, 저것만 써도 죽을 때까지 다 못 쓰지 않을까.
“하암.”
하품이 나왔다. 아리엘은 두 손을 머리에 괴고 눈을 감았다.
일단은 피곤하니까 좀 자고 생각해봐야겠어.
그녀는 포근히 내려오는 봄 햇살을 받으며 낮잠에 빠져들었다.
* * *
저택을 바꾸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아리엘은 며칠에 걸쳐 별채 살림고를 모두 둘러보았다.
그리고 수잔에게 다음 커튼 교체하는 시기를 물었다.
“원래라면 4월 말에 한 번 바꾸기로 되어있지요.”
“얼마 안 남았네요?”
“그렇죠.”
아리엘은 생긋 웃었다.
“그럼 다음에는 커튼이랑 벽지를 바꿔주세요. 지금도 깔끔하고 좋지만 봄이니까, 좀 더 화사하고 따뜻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수잔이 가지고 다니는 가죽 수첩에 재빨리 아리엘의 말을 적어넣었다.
“식기는 작약(peony) 무늬가 중앙에 들어간 흰 식기로요. 이걸로 6월까지 쓸게요.”
받아적던 수잔이 빙그레 웃었다.
“작약이 조금 빨리 피었다 생각하니 낭만적이네요.”
아리엘은 그 뒤에도 몇 가지를 부탁했다.
화이트 가든의 장미 아치는 흰 장미로 장식하고, 저택 앞 정원은 화사한 색감의 꽃들을 심어달라고.
모두 받아적은 수잔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아기 마님, 센스가 훌륭하시군요.”
“센스요?”
“네. 안목이란 건 많이 볼수록 자라나는 거지만, 센스는 타고나는 거지요. 아기 마님은 정말 라카트옐 가의 축복이에요.”
아리엘은 쑥스러워서 뺨을 붉혔다.
그녀는 이곳에 와서 타고난 마법도, 외모도, 센스도 모두 사랑받고 있었다.
붉은 머리와 마나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늘 저주스러운 취급만 받았던 후작가에서와 달리.
수잔이 아리엘의 머리 모양을 만져주었다.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어 한줄기만 땋은 뒤 머리띠처럼 정수리 쪽으로 둘러 고정했다.
“조금 있다가 의상실 헬렌이 방문할 거예요. 아기 마님 옷을 더 맞추려고요.”
다이아나와 대화를 하다 보니 여자들의 패션에 대해 조금 알게 된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나 말로는 초봄 옷, 봄옷, 늦봄 옷, 초여름 옷이 다 다르다고 했다.
봄에 초봄 옷을 입거나, 늦봄에 초여름 옷을 입으면 절대 안 된다고도 말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아리엘은 다이아나에게 물었다.
“두께가 문제인 거야, 다이아나?”
그러면 내가 마법으로 두께만 조절하면…… 까지 말하고 아리엘은 다이아나의 연설을 들어야 했다.
“아리엘. 두께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 우린 여름에도 코르셋을 껴입고, 겨울에도 오프 숄더(어깨를 드러내는 모양) 드레스를 입잖니?!”
“그럼 뭐가 문제……?”
“당연히 미묘한 계절감 때문이지. 초봄은 화사하게, 봄은 따뜻한 느낌으로, 늦봄은 청순하게, 초여름은 청량한 느낌! 이걸 어기면 끝장이야.”
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어 다이아나.
아리엘은 옷은 계절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마음속에 잘 새겨두었다.
‘그럼 옷장에 있는 봄 드레스는 이제 못 입으려나?’
다이아나를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입을 일이 없어서 별로 못 입었었는데.
마티어스가 막 입으라고 사준 파티 드레스는 입을 일이 없어 옷장에 그냥 고이 걸려 있었다.
아리엘은 작게 웃었다.
‘마티어스님도 참…… 그런 드레스를 어떻게 막 입는다고.’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자신을 어리다고 무시한 의상실 주인을, 마티어스가 똑같이 여겨준 셈이니까.
아리엘은 마티어스가 드레스 가격보다 그녀의 감정을 훨씬 중요시해준 것 같아서 기뻤다.
헬렌이 도착하자, 아리엘은 다시 치수를 재고 헬렌이 디자인해 온 장신구를 착용해보면서 바빠졌다.
“대공자비님, 살이 전혀 안 찌셨네요.”
“몸무게는 늘었다고 했는데?”
“허리둘레가 오히려 줄어드셨답니다. 혹시 키가 조금 자라셔서 늘어난 게 아닐는지…….”
아리엘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많이 먹고 있는데, 마나와 열량을 나누어 쓰려니까 살이 전혀 안 찐다.
늘어난 몸무게도 고작 0.5kg이었다.
그마저도 그 날 수제 자몽청을 탄 에이드가 너무 맛있어서 잔뜩 마셔서 늘었던 게 아닐까?
아니면 머리카락이 자라서 늘어난 거거나.
아리엘의 시무룩한 기색을 눈치챈 헬렌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마담 헬렌 녹스. 옷을 만드는 사람의 의무가 뭐지?’
입으시는 분의 체형을 보완하고 만족하실만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잖아!
옷을 만드는 사람은 모델의 체형을 가지고 불평해서는 안된다.
그건 자기 실력 부족을 뜻하는 말 밖에는 되지 않으니까.
입는 사람을 위한 옷.
그것이 헬렌의 신조였다.
헬렌은 아리엘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대공자비님. 체형은 옷으로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마른 체형도 가녀림, 우아함이라는 무기가 있어요. 걱정하시지 않아도 되어요.”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헬렌을 믿어.”
신뢰는 디자이너에게 큰 자산이었다.
헬렌은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아리엘을 위해 디자인해 온 옷들을 하나하나 내보였다.
“올 봄부터 여름까지는 꽃 자수가 유행이에요.”
보통은 드레스의 가슴과 배 부분인 앞판에만 자수를 놓지만, 헬렌은 소매 디테일까지 넣었다.
헬렌이 디자인한 장신구들도 다 아리엘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중에서도 소녀스러운 아기자기함을 한껏 살린 레이스에 리본을 겹치고 중앙에 둥근 청록색 보석을 매단 목장식은 아리엘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그림처럼 소화하는 아리엘을 보며 헬렌은 감격을 삼켰다.
“정말 예쁘시네요. 대공자비님!”
시중에서 구한 레이스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서 처음부터 레이스를 직접 뜨느라 고생했는데 보람이 있었다.
‘저렇게 예쁘시니, 조금 더 자라시면 사교계를 휩쓰실 게 분명해.’
사람들은 아름다운 사람이 입는 것에 열광한다.
게다가 그게 높은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엘은 신분, 미모, 옷 소화력 삼박자를 다 갖춘 소녀였다.
돈이나 명예보다 영감을 중시하는 헬렌에게는 누구보다 좋은 뮤즈이고 말이다.
오늘도 헬렌의 열정은 조용히, 더더욱 불타올랐다.
* * *
요즘 다이아나와 아리엘은 편지를 주고받는 것에 푹 빠져있었다.
[친애하는 아리엘에게.
아리엘, 이 잉크색 좀 봐. 특이하지?
이건 ‘노을 지는 여름의 바이올렛’이라는 색깔이란다.
요즘 영애들은 편지를 쓸 때 색깔 잉크로 쓰는 걸 좋아해.
솔직히 색깔 잉크는 이름만 그럴 듯하지 별거 아닌데.
다 상술이라며 난 속으로는 비웃는 마음이었지만, 이 색깔을 보고는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안 살 수가 없었단다.
너만은 나를 책망하지 않기를!
그럼 또 편지할게. 이만 총총.]
오늘은 편지 대신 직접 만나는 날이었다.
봄 무도회 시즌이 시작되어서 다이아나는 최근 좀 바쁜 편이었다.
아리엘도 저택 분위기를 바꾸는 계획에 열심이라 둘이 직접 만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둘은 만나면 잠시도 쉬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아쉬운 얼굴로 헤어지곤 했다.
오늘 다이아나는 어제 갔던 티 파티에서 들은 시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들 봄이라고 사랑 시만 읊어대지 뭐니! 아주 지겨워 죽겠어. 그러면서 어느 영애가 어느 영식과 약혼을 했다더라, 누구 영식이 누구 영애에게 고백을 했다더라…….”
시가 좋은 게 아니라 연애 소문이 좋은 거겠지. 하고 다이아나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시집에 있는 다른 시를 읊었단다. 사랑하고 전혀 상관없는.”
단호히 말한 다이아나가 자기가 읊은 시의 제목을 말해주었다.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야.”
도도한 표정의 보라색 머리 소녀가 조용히 시를 외웠다.
“정말 멋진 시다, 다이아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란다. 난 이 구절이 가장 좋아.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뭔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니?”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배우고,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해 나가고 있는 그녀의 마음에도 와 닿는 시였다.
다이아나가 서글프게 말했다.
“난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생각해. 나도 혹시 가문을 계승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제국에서는 오직 남자만 가문을 계승할 수 있었다.
여자가 가문을 계승하는 방법은 자기보다 낮은 가문의 차남 이하와 결혼하는 방법뿐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가문을 계승하는 게 아니라 남편을 통해 잇는 것이었다.
다이아나는 모니카 공작가의 외동딸이었다.
아들이 없기 때문에 유일한 상속자이지만, 여자이기에 가문을 계승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황태자비 후보로 여러 번 거론되고 있었다.
하나뿐인 직계 장녀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신분이 낮은 남편을 통해서 가문을 잇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렇게 될 경우에 공작 작위는 다이아나 대신 친척들 중 피가 가까운 사람이 이어갈 것이다.
다이아나는 그게 싫었다.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니카 가의 직계가 끊어진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열다섯 소녀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이아나…….”
아리엘은 조그만 손으로 다이아나의 손을 토닥거려 그녀를 위로했다.
조금 후, 기분이 풀린 다이아나가 콧물을 훌쩍이며 고고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황태자비가 될지도 모른다고 부러워하지만, 나는 사랑 같은 건 관심 없어. 누구와 결혼을 하든 그건 가문과 가문 사이의 거래일 뿐인걸.”
그리고 다이아나는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기, 아리엘은 이미…… 결혼했잖아. 아리엘도 그런 거 아니야? 후작가와 대공가 사이의…….”
아리엘은 다이아나가 뭘 묻는지 알 수 있었다.
귀족들 사이의 결혼은 대부분 정략적으로 이루어진다.
처음부터 거래로 시작하는 것이다.
아리엘과 루시안 또한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가문과 가문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사이의 계약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하지만 발설하지 않기로 루시안과 약속했기에 그런 얘기는 할 수 없었다.
“그, 그런 건 아니야…….”
다이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그럼…… 정말로 소문처럼 대공자님이 첫눈에 반해서 청혼?”
“…….”
아리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다이아나는 혼자 결론을 내리고 펄쩍 뛰었다.
“세상에, 세상에나!”
연애 소문은 싫어하는 다이아나도 절친한 친구의 연애담에는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난번에 굿나잇 키스 때도 좋아하셨어?”
아리엘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좋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화를 내진 않았어.”
사교계 소문에 환한 다이아나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대공자 루시안은 자기 몸에 타인이 닿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리엘이 뽀뽀를 했는데 화를 내지 않았다고?
“어쩜 좋아. 대공자님이 널 진짜로 좋아하나 봐.”
그런 거 아닌데…….
아리엘은 어디서부터 해명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저, 다이아나, 이건 비밀이니까…….”
“알아. 절대로 바깥에서 말하지 않을게. 난 한 번 한 말을 지키는 여자라고!”
흥분으로 눈을 빛내며 다이아나가 말했다.
잔뜩 설레하는 다이아나를 보며 아리엘은 고개를 숙이고 울상을 지었다.
‘오해지만 어쩔 수 없겠지. 루시안과의 계약을 말할 수는 없으니까.’
사실 그녀와 루시안은 정략혼이나 다름없는 관계였다.
서로가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사이.
자신이 주는 건 적고, 받는 건 많다는 게 아리엘의 고민이긴 하지만 말이다.
‘루시안이 가족이라고 말해주긴 했지만, 그건 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만인걸.’
그에게 가족이라는 말을 들어서 기뻤지만 계속 그같은 안락함을 바랄 수는 없었다.
그것에 매달릴수록 라카트옐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만큼 공허함도 커질 테니까.
아리엘은 이 이상으로 더는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특히 루시안에 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자 살짝 미소가 새어 나왔다.
‘뭐, 그 루시안에게 기대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하지만.’
생각을 정리한 아리엘은 다시 다이아나와 재잘대며 즐거운 오후를 보내기 시작했다.
* * *
대마법사 브루노어의 가르침 아래, 아리엘의 마법 실력은 빠르게 향상됐다.
과거에는 몰랐지만, 그녀는 원소 마법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아리엘은 불, 물, 흙, 공기의 네 원소와 금방 친해지고 그들의 변화를 잘 감지해냈다.
‘브루노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며 연습하라고 했지.’
그녀는 브루노어의 말대로 마나를 빚어 좋아하는 모양을 만들어냈다.
원소 마법을 배운 뒤에는 불이나 물 같은 원소로도 모양을 만들 수 있었다.
아리엘은 정원 분수대에 흐르는 물로 달리는 말 모양을 만들어 보았다.
몽글몽글한 생크림으로 토끼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생크림 토끼가 마나의 힘으로 폴짝폴짝 뛰면, 지나가던 하녀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어머나, 멋져라!”
“아기 마님, 이거 너무 귀여워요!”
어쩜, 귀여운 분이 귀여운 걸 만드셨어.
얼굴에 홍조를 띤 하녀들이 꺅꺅거렸다.
저택에 마법사가 있지만, 공공연히 참(眞)주부로 불리고 있는 대마법사 브루노어는 집안일 마법에만 열심이지 눈에 띄는 마법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리엘은 이제 마법을 배워가고 있는 학생.
연습을 위해서라도 생활 곳곳에서 다양한 마법을 쓰며 친화력을 높여야 했다.
하얀 갈기를 흩날리는 말 모양, 핑크빛 귀를 가진 토끼 모양, 구름모양의 머랭쿠키 모양.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던 아리엘이 손안에서 물의 구슬을 굴리다가 퐁퐁 띄우며 공중에서 방울을 터트렸다.
하녀들은 박수를 치며 감탄했고, 아리엘은 수줍게 미소지었다.
과거엔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녀의 마법이 사람들을 웃게 할 수 있다니.
예전과 달리 마법 실력이 늘어가는 게 두렵지 않고 기대되었다.
‘무엇보다…… 전혀 아프지 않아.’
그게 가장 신기했다.
브루노어 밑에서 배운다고 할지라도, 마법을 쓰면 당연히 몸이 상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브루노어는 아리엘의 몸이 상하는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어린 몸이 버텨낼 수 있을 만큼의 마력이 자라난 후에 한 단계씩 높여주는 방식을 사용했다.
덕분에 아리엘은 한 번도 피를 토하거나 쓰러지는 일 없이 수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브루노어와의 마법 수업이 끝나고 나면, 아리엘은 히스와 마법을 더 공부했다.
히스가 가르쳐주기로 약속한 특기 마법은 연금 마법.
히스는 물건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에 아주 뛰어났다.
촛대에 마법을 걸어서 직접 들지 않고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게 한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그들이 나머지 공부를 하는 시간은 때마침 간식 시간이라, 둘은 달콤한 베이커리들을 잔뜩 해치우며 시간을 보냈다.
늘 퉁명스러운 히스가 초코 머핀을 크게 베어 물며 말했다.
“방 인테리어가 바뀌었네?”
“아, 응.”
아리엘은 히스와 함께 앉아있는 작은 서재를 쭉 둘러보았다.
4월 말이 지나면서 저택의 커튼과 벽지, 가구 배치가 달라져 있었다.
화사한 은사 무늬가 들어간 상아색 커튼은 빛을 통과시켜 방 안을 따스하고 우아하게 보이게 했다.
또, 가구 배치는 최대한 공간이 탁 트인 느낌이 나도록 했다.
사용인들이 모두 ‘집안이 환해진 것 같아요, 아기 마님!’ 하며 좋아 해줘서 그녀도 기분이 좋았다.
가장 긴장된 순간은 마티어스 앞에서였다.
아리엘은 나중에서야 마티어스가 저택을 바꾸는 걸 오랫동안 금지해왔었다는 사실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택이 싹 바뀐 것을 본 마티어스는 전혀 화난 기색이 없었다.
그는 어딘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아리엘을 내려다보다가 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아리엘라.”
오히려 그는 아리엘이 바꾼 것들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곧바로 달튼을 불러 앞으로는 아리엘이 바꿔놓는 대로 자기 집무실을 관리하라고 말한 데다, 행정관들이 쓰는 집무 공간까지 싹 다 아리엘 스타일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어떠냐. 바꾼 게 더 낫지 않나?”
심지어 마티어스는 아리엘 앞에 행정관들을 직접 불러다가 캐묻기까지 했다.
무시무시한 대공 앞에 불려온 행정관들은 영문도 모르고 바뀐 것들을 찬양해댔다.
대답을 모두 들은 마티어스는 서늘하게 미소지으며 한 번 더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생각을 떠올린 아리엘은 헤실거리며 웃으며 물었다.
“바꾸기로 했어. 히스가 보기엔 어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
툴툴거리며 대꾸한 히스는 아리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팩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뭐, 나쁘진 않네. 그 전엔 마물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저택이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어.”
“아니. 그 정도였어.”
히스의 단호함에 아리엘이 항의했다.
“하지만, 내가 시집오기 전에 살던 데보다 훨씬 좋았는데.”
“……대체 넌 어디에 살았던 거야?”
투덜거린 히스는 환하게 바뀐 방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이제 네가 대공자비 노릇을 하는 거야?”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지?”
“너같이 조그만 애가 누군가의 아내라니. 귀족 나리들 생각은 대체 읽을 수가 없어.”
아리엘은 히스의 말 안에서 귀족에 대한 반감을 느꼈다.
히스가 비난하듯 말했다.
“평민들은 적어도 성년이 된 다음에 결혼한단 말야.”
“…….”
아리엘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도 귀족들이 아이들을 일찍 결혼시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아이들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거래하듯 결혼시키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년까지 기다렸다면 나는 후작가에서 이미…….”
아리엘이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히스가 ‘뭐라고?’하고 되물었다.
후작가에서의 삶을 상상한 것만으로 아리엘의 기분은 늪에 빠진 것처럼 가라앉았다.
학대당하고, 착취당하고, 결국 버려지는 인생.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눈에 띄게 조용해지자 히스는 힐끔힐끔 아리엘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까지는 웃고 있었는데…… 왜 저러는 거지?’
혹시 나 때문에 화났나?
그냥 나는…… 쟤가 이런 악랄하고 무시무시한 집안과 결혼했다는 게 별로라서 그렇게 말한 것뿐인데.
저렇게 작은 애를 혼자 여기에 던져놓은 쟤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안절부절못하던 히스는 자신의 갈색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 후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나랑 정원 너머 숲에 갈래? 가서…… 음…….”
가서 뭐 하자고 하지? 기분을 풀어줄만한 게…….
“마법……! 마법 보여줄게.”
아리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히스에게 화난 게 아니었기 때문에 풀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히스가 갑자기 왜 나가자는지는 몰라도, 아리엘은 숲에 가자는 그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원치 않게 떠올려버린 후작가에서의 기억을 잊기 위해서라도.
“그래, 갈래. 마법도 보여줘.”
둘은 나란히 작은 서재를 빠져 나왔다.
* * *
공부를 안 하고 놀러 가는 걸 브루노어에게 들키면 히스가 혼날 것이기에 둘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아리엘과 히스는 몰래 저택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 헤맸다.
그래도 아리엘보다 좀 더 오래 이 저택에서 지내왔던 히스가 앞장을 섰다.
“이리로 와. 저쪽 뒤에 나가는 통로가 있어.”
“잘 아네, 히스?”
“몇 번 간식을 얻으러 와본 적이 있거든.”
자랑스럽게 말한 히스가 도둑고양이처럼 빠르게 어느 문틈 사이로 쏙 들어갔다.
아리엘은 치맛자락을 들고 종종걸음을 치며 따라갔다.
호위기사인 헥터와 랄프가 기척을 숨긴 채 그들의 뒤를 따랐다.
히스가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식료품 창고였다.
아리엘은 왜 여기에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는지 바로 이해했다.
‘음식 재료가 들어와야 하니까 문이 있는 거구나.’
그러니까, 일종의 뒷문이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식료품 창고가 왜 이렇게 큰 거야?
빨리 저택을 벗어나려던 원래의 계획은 하녀, 하인들이 자리를 비운 식료품 창고를 보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와! 히스, 여기 좀 봐!”
아리엘은 식료품 창고의 광경에 푹 빠져버렸다.
수잔이 묘사해준 건 극히 일부분이었다.
안의 풍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이전에 드나든 적이 있다던 히스조차 식료품 창고를 가득 채운 음식 냄새에 넋을 잃었다.
이제 열 살, 열한 살 된 어린애들을 꼬시기 딱 좋은 냄새였다.
아리엘과 히스는 식료품 창고를 구경하기 바빠졌다.
고급 찻잎이 가득 든 수십 개의 나무통들과 요리용 술이 담긴 목이 긴 잠금 병들.
각종 맵싸름한 향신료는 유리병에 담겨 가죽 마개로 잘 막혀있었다.
수잔 말대로 과일청과 피클, 치즈 덩이도 가득했다.
설탕 당근이라고도 부르는 파스닙이 가득 담긴 그물자루도 걸려 있었다.
아리엘은 신선한 버터 조각과 영양이 풍부한 양젖이 든 항아리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에 꼴깍 침을 삼켰다.
우유를 젓고 있는 나무통에는 부드러운 크림이 몽글몽글 떠올라 있었다.
히스도 높은 천장에 걸려 있는 소시지와 훈제 고기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훈제 고기에는 고기를 얇게 저밀 수 있는 칼이 꽂혀있었다.
모두 아는 맛이라서 더 먹고 싶었다.
그리고 한 편에는 빵수레가 있었다.
식사용 곡물빵과 달콤한 디저트빵들이 그득 쌓여있고, 김이 식지 않도록 얇은 천으로 덮여있었다.
아리엘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선반에는 서로 색깔과 향, 맛이 다른 소금이 일곱 종류나 있었다.
하얗고 눈부신 설탕 단지와 각설탕을 넣어 둔 종이봉투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시럽들은 엉덩이가 팡파짐한 병에 얌전히 들어있었다.
아리엘은 나무 궤짝 중 하나를 낑낑거리며 열어보았다.
“와!”
궤짝 안에는 벌집째로 숙성된 꿀이 듬뿍 들어있었다.
귀퉁이를 조금 잘라서 입에 넣자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아리엘은 꿀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벌집을 오물거리며 부르르 떨었다.
“진짜 맛있다.”
음식들이 하나같이 유혹적이었지만, 결국 아리엘과 히스가 한마음으로 모인 곳은 바로 태피(카라멜같은 말랑한 캔디류)가 끓고 있는 거대한 무쇠솥 앞이었다.
태피를 만들려면 재료를 솥에 넣고 눋지 않도록 계속 저어줘야 했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브루노어의 마법이 걸려 있는지 주걱이 저절로 태피를 젓고 있었다.
아리엘과 히스는 새 주걱을 찾아서 태피를 한 주걱 가득 뜬 뒤 나눠 먹었다.
갈색의 끈적끈적하고 달콤한 태피가 둘의 입가에 온통 묻었다.
항상 퉁명스러운 히스 때문에 평소에 그리 살가운 관계가 아닌데도, 둘은 서로의 입가를 보며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네 얼굴 지금 진짜 웃겨.”
“히스 얼굴도 만만치 않거든.”
“좀 더 먹을래?”
“응!”
아리엘보다 키가 큰 히스가 주걱으로 태피를 떠주었다.
둘은 번갈아 가며 태피 주걱을 핥아 먹었다.
그때, 문 쪽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이 왔나 봐.”
“빨리 나가자.”
히스와 아리엘은 다람쥐처럼 날쌔게 식량창고를 빠져 나왔다.
태피가 다 굳기 전에 먹은 것 말고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도망치게 된다.
여전히 입가엔 태피 범벅이라 얼굴이 우스웠다.
저택 바깥으로 나와 화이트 가든 입구쯤에서 멈춘 아리엘과 히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깔깔 웃었다.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추고, 히스가 말했다.
“넌 왠지 귀족 같지가 않아.”
“그래?”
“응.”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 예법 많이 익혀서 제법 숙녀다워졌다고 했는데. 아니었나?
히스가 퉁명스레 덧붙였다.
“칭찬이야.”
“칭찬?”
“그…… 할아버지랑 궁에서 살 때. 귀족 나부랭이는 다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렇게 말한 그가 아리엘을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넌……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아리엘은 말없이 싱긋 웃었다.
과거의 그녀는 귀족도, 평민도 아닌 삶을 살았다.
귀족으로 태어났으나 후작가의 핏줄이 아니라며 하녀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고, 마법사 무리에 들어간 후에는 평민 마법사들 틈에서 지냈다.
히스가 본 귀족들의 이기심, 거만함, 평민들을 하찮게 여기는 마음 같은 건 아리엘에게 존재할 수 없었다.
“칭찬 고마워, 히스.”
귀족 같지 않다는 건 분명 히스가 아리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일 것이다.
그녀는 히스가 귀족들을 싫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리엘도 과거에 ‘그’의 수하로서 귀족들을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분을 전혀 밝히지 않다 보니, 귀족들이 그녀를 낮게 보고 함부로 대한 적이 많았다.
어린 계집애라고 무시하며 모욕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히스도 마찬가지였겠지.
‘대마법사 브루노어의 손자라고 해도 히스는 평민이니까.’
황궁 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힘든 일을 많이 겪었을 거다.
‘무엇보다 뛰어난 마법사인 할아버지가 낮은 취급을 당하는 것이 가장 슬펐을 거야.’
황실 마법사는 웬만한 귀족보다 부유하고 권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높은 귀족들 앞에서는 존댓말을 쓰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어린 히스가 분함을 느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리엘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히스. 브루노어는 대마법사인데 왜 이곳에 있는 거야? 황실 마법사였었다고 했잖아?”
히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잘 몰라. 할아버지가 말을 안 해줬거든. 하지만 분명 귀족놈들 때문에 황궁을 나온 걸 거야.”
소년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내가 할아버지보다 더 큰 대마법사가 돼서, 반드시 그 나쁜 놈들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들고 말겠어.”
“그렇구나…….”
아리엘은 히스가 귀족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하찮게 대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히스같이 겉으로만 툴툴대는 착한 성품의 아이라면, 분명 저 미움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가지는 않을 거다.
히스에게는 브루노어라는 길잡이도 있고.
아리엘은 히스의 어깨로 손을 뻗어서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래. 히스라면 꼭 대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야. 어린데도 이렇게 마법을 잘하잖아.”
가만히 아리엘의 손길을 받고 있던 히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가 황급히 아리엘의 손을 밀어냈다.
“어, 어린애 취급하지 마.”
어린애 취급 아니고 위로인데.
그나저나 가까이서 보니 히스도 꽤 예쁘장하게 생겼다.
다갈색 머리카락에 또렷한 금안. 외꺼풀 진 눈도 반듯하다.
아리엘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히스는 귀엽네.”
히스가 파르륵 떨며 과하게 반응했다.
“뭐?! 웃기지 마! 네, 네가 더 어린 주제에 날 무시하다니!”
어째서 귀엽다는 게 무시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먼저 펄펄 뛴 주제에 입술을 꽉 깨물고 안절부절못하던 히스가 휙 돌아섰다.
“빨리 돌아가자. 늦었어. 숲은 다음에 가.”
아리엘은 군말 없이 히스 뒤를 따라 저택으로 향하는 돌길을 걸었다.
앞서 걸어가는 히스의 귀가 석양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라카트옐 가의 바뀐 인테리어에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건 오랜만에 놀러 온 다이아나였다.
“아리엘, 실내가 너무 예뻐졌다!”
다이아나는 아리엘이 고른 화병들을 구경하다가, 투명한 다이아몬드 커튼줄에 정신이 팔렸다가, 새로 바꾼 커튼의 은사가 얼마나 고급인지를 흥분하며 이야기했다.
“우리 어머니랑 나는 취향이 너무 달라서 인테리어가 맨날 불만이란 말야.”
“공작 부인께서는 어떤 취향이신데?”
“우리 어머니는 심플, 깔끔에 꽂히신 지 20년이야. 그래서 우리 집은 예쁜 게 하나도 없어.”
투덜거린 다이아나는 티푸드 접시로 나온 작약 식기를 보고 한 번 더 뒤로 넘어갔다.
“아, 아, 아리엘…… 이거 유리사쥬드 산 도자기 그릇 아니야?! 우리 할머니가, 그러니까 전대 공작 부인께서 이거 구하려고 백방 애썼는데 못 구하셨거든. 이 무늬는 제국에 딱 두 벌 남아있댔는데!”
하나는 황궁에 있다고 들었는데 나머지 하나가 여기 있었구나…….
다이아나는 황홀한 시선으로 그릇을 바라보았다.
유리사쥬드 산 도자기는 바닥에 패대기를 쳐도 깨지지 않고 특수한 유약을 발라서 도자기의 흰색이 다른 것들보다 한층 눈부신 걸로 유명했다.
아리엘은 지나칠 정도로 감탄하는 다이아나 때문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냥 집에 있는 그릇을 꺼낸 것뿐인데…….’
하지만 다이아나가 열띤 반응을 보여주니 기뻤다.
내가 조금은…… 라카트옐의 분위기를 바꾼 걸까?
디저트로 나온 생크림 카스테라를 푹푹 떠먹으며 다이아나는 한탄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봄 시즌엔 정말 모임이 많아. 티 파티, 실내 파티, 정원 파티, 자수 모임…….”
제국의 세 공작가 자식들 중 아직 미혼인 영애는 다이아나가 유일하다 보니 그녀는 여러 자리에 불려 다녔다.
“나도 대공가에 태어났으면 피곤한 모임들 안 가도 됐을 텐데.”
아리엘의 귀가 솔깃했다.
저택에만 있다 보니, 외부에서 대공가에 대해 하는 말은 듣기 어려웠다.
그만큼 다이아나가 해주는 말이 귀중하기도 했고.
아리엘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대공가는 보통 모임에 안 나가?”
“그건 아니야. 하지만 원하는 모임만 가도 되고,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안 해도 타격은 없어. 사실상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지.”
“그래?”
“응. 아마 황제 폐하도 부러워하실걸? 황가만큼 권력이 막대한데 의무나 제약은 없으니까.”
“…….”
공작가 여식인 다이아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믿을만한 이야기겠지.
아리엘은 새삼 라카트옐 가문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제국의 수호자로서, 마수로부터 제국을 보호하는 일을 하니까. 그런 권리를 누리는 것도 당연해.”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다이아나는 자기 접시를 내려다보고 꺅 비명을 질렀다.
“다 먹었잖아! 요즘 체중 관리 중이었는데! 어쩜 좋아!”
말하면서 마구 떠먹다 보니 어느새 다이아나의 생크림 카스테라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렇게 많이 먹으면 안 되는데…… 지난달에도 안 맞는 드레스가 몇 벌이나 생겨서 다 추려냈다고.”
다이아나는 모임 스트레스를 디저트로 풀다가 이렇게 되었다며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흑…… 하지만 아리엘네 디저트는 정말 최고인걸. 집에서 과자를 좀 덜 먹더라도 여기선 먹어야 해. 나 참, 아리엘은 어떻게 나보다 많이 먹으면서 살이 안 찌는 거야?”
다이아나가 생크림 카스테라 하나를 해치우는 동안 아리엘은 두 개를 없앴다.
그런데도 살이 전혀 안 찌다니!
다이아나는 불가사의한 아리엘의 가느다란 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부러운 눈빛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흐물흐물해진 시선으로 아리엘의 귀여움을 뜯어보았다.
‘생크림을 입에 묻힌 것도 귀엽잖아…….’
생크림이 아리엘의 입술 위에 콧수염처럼 묻어있었다.
다이아나는 그 귀여움을 실컷 감상하며 기분 좋게 차를 홀짝거렸다.
‘아, 아리엘의 귀여움을 나만 보기는 너무 아까워.’
지긋지긋한 모임들도 아리엘과 함께 다니면 훨씬 재미있을 텐데.
하지만 아리엘은 고작 열 살이었다.
보통 영애들이 열네 살에 데뷔하는 걸 감안하면 너무나 어린 나이.
제국법에서는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열네 살이 되지 않아도 사교계 데뷔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열넷 전에 데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린 나이에 데뷔했다가 사교계에서 실수라도 하면 친정 가문과 시댁 가문 모두가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똑똑한 아리엘이 보통 열 살짜리들처럼 어리게 행동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 악귀 같은 인간들한테서 하루라도 더 아리엘을 지켜줘야 해.’
아쉬움을 삼킨 다이아나는 자상한 언니답게 아리엘 입가의 생크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 * *
5월이 되자, 제국의 황실에서는 3년 만의 봄 황궁 무도회를 연다는 공포를 했다.
이번 시즌 최대의 이벤트가 열리는 셈이었다.
봄 드레스를 이미 수벌 맞췄던 영애들은 새 드레스가 필요하다고 부모를 졸라댔고, 귀부인들도 모이면 황궁 무도회 이야기로 수다 꽃을 피웠다.
수도에서 조용한 곳은 바깥소식에 무관심한 라카트옐 대공저 뿐이었다.
아리엘은 다이아나를 통해 무도회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갈 것이 아니라서, 친구인 다이아나가 재미있게 다녀오길 바랐을 뿐이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예법 선생인 란셀 후작 부인이 아리엘에게 데뷔에 대해 물은 다음부터였다.
“아리엘님은 언제쯤 사교계에 데뷔하실 계획이신가요?”
사교계의 법도를 잘 모르는 아리엘은 데뷔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란셀 후작 부인이 세심하게 답해주었다.
“보통 제국의 영애, 영식들은 14세가 되면 데뷔를 합니다.
사교계에 ‘어느 집안의 몇째 자식 누구입니다’하고 소개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때부터는 남편감, 아내감을 물색할 수 있답니다.”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물었다.
“그럼 14세가 되기 전까지는 뭘 하나요?”
“걸음마 할 적부터 가까운 가문 아이들과 어울린답니다.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조금 더 자라면 소모임을 갖고요.”
음. 다이아나가 하는 자수회, 시 낭송회, 티 모임같은 거 말이겠지?
아리엘은 아버지인 후작이 감금해 놓았던 탓에 그런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다이아나나 그녀의 오라비인 제롬은 그 과정을 거쳐왔을 것이다.
“대공자님도 이번 가을에 데뷔탕트를 치르실 예정이겠지요.”
“루시안이요?”
“그렇답니다. 이 나이대의 귀족 영식들은 대부분 요하네스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으니 아카데미가 허락하는 시기에만 나올 수 있죠. 그게 가을 시즌이고요. 모두가 함께 데뷔를 치르는 거지요.”
그렇구나…… 루시안은 열네 살, 데뷔할 나이지.
란셀 후작 부인이 기대감을 감추는 어조로 말했다.
“올해 가을 데뷔탕트는 화려할 거예요. 라카트옐 대공자님에, 황태자 전하까지 데뷔하시니까요.”
황태자 전하요?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황태자 전하도 루시안과 같은 나이였던가?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황태자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게 많이 없었다.
제국의 황실 핏줄에는 대대로 성력이 흐른다.
자손들 중 빛의 축복을 받아 성력을 타고 난 사람이 후계자가 되는 게 보통이었다.
‘황태자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겠지.’
성력이란 정화의 능력으로, 땅과 물이 오염되었을 때 직접 정화를 시킬 수 있었다.
아리엘이 황실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그 정도.
그 밖에 특별히 황태자에 대해 기억나는 건 없었다.
‘기억나는 게 없으면…… 크게 상관없겠지?’
적어도 나쁜 사건은 없었다는 얘기니까.
란셀 후작 부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영식들과 달리 영애들은 봄에 데뷔를 하는게 보통이랍니다. 그리고 결혼을 한 영애, 영식은 14세가 되지 않아도 데뷔할 수 있도록 되어있지요.”
“어째서인가요?”
후작 부인이 살짝 미소지었다.
“결혼을 한다는 건, 사회에서 어른으로 대접받는다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어른이라…….
아리엘은 조그만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그녀는 열일곱 살이 되었어도 어린애 같은 외양이었다.
키가 작고 말라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녀를 열 서너 살쯤으로 보았다.
그래서인지 아리엘은 자신이 다 자란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후작 부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데뷔에 대해서는 일단 마티어스님께 여쭤볼게요. 감사해요.”
* * *
수업이 끝난 뒤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기척을 낮추고 따라오는 헥터와 랄프에게서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대강 들어보자면,
‘대공님께 가시는 건가 봐.’
‘으윽. 대공님 근처는 숨 막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집무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어, 아기 마님 오셨습니까.”
뜻밖에도 아리엘을 맞은 사람은 재무관 달튼이었다.
아리엘은 달튼에게 물었다.
“마티어스님은 안 계신가요?”
“예. 하지만 들어오십시오. 금방 돌아오실 건데, 아기 마님을 그냥 돌려보냈다고 하면 경을 치실 거라서요.”
아리엘은 달튼의 농담에 소리 내어 웃었다.
마티어스님은 말투가 좀 무뚝뚝하시긴 해도 그렇게 무서운 분은 아닌걸요.
물론 마티어스의 진짜 모습이 달튼의 말대로라는 건 아리엘만 모르는 일이었다.
안으로 안내받은 아리엘은 집무실 소파에 앉았다.
달튼은 곧장 주방에 산더미 같은 양의 간식을 부탁했다.
“아기 마님, 차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버터 바닐라 티? 아니면 레몬 라임티로 드릴까요?”
“나오는 간식하고 어울리는 걸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달튼은 간식 부탁을 끝낸 뒤 다시 돌아와 마티어스의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공님은 잠시 황궁에 가셨습니다. 원래는 귀찮다고 절대 안 가시는데 이번에는 웬일로 직접 가셨는지 모르겠네요.”
멀리 가신 건 아니었구나.
아리엘의 기분이 좋아졌다.
간식도 곧 올라와서 그녀의 앞에 가득 놓였다.
바사삭한 크림 밀푀유, 쫀득한 초콜릿 마카롱, 계란 노른자와 설탕시럽에 튀겨낸 카스테라.
티는 상큼한 레몬 라임티였다.
시원하게 식힌 티가 가득 담긴 투명한 유리 티팟 안에는 라임 잎과 둥글게 썬 레몬 조각이 떠 있었다.
디저트가 달고 무거우니 티는 상큼한 걸로 준 것 같았다.
아리엘은 레몬 라임 티를 홀짝이며 크림 밀푀유를 조심스레 깨물었다.
“와. 맛있다.”
밀푀유의 바삭한 층층 사이에 있는 크림과 제철 과일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간식을 반쯤 해치우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마티어스가 들어섰다.
“아리엘.”
“마티어스님!”
아리엘은 얼른 입가의 카스테라 부스러기를 털고 마티어스에게 달려가 인사했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번쩍 안아 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데.”
“앗. 방금까지 간식을 먹었거든요.”
아리엘을 든 팔을 움직여 그녀의 무게를 가늠해본 마티어스가 말했다.
“그래. 넌 좀 더 먹어야겠군.”
아리엘을 간식 앞에 다시 내려놓은 그가 달튼이 치워놓은 책상 위에 앉았다.
달튼은 눈치 빠르게 마티어스에게 차를 따라서 건넸다.
아리엘과 똑같은 레몬 라임 티는 아니었다.
집무실에 원래 있던 도자기 티팟에서 따른 차였는데 아까 듣기로 ‘드라이 와인 티’라고 했던 것 같다.
마티어스가 차를 들이켜며 아리엘에게 물었다.
“그래, 놀러 온 건가?”
“음, 아뇨. 여쭤볼 게 있어서 왔어요.”
“…….”
마티어스의 얼굴이 얼핏 굳어졌다.
그가 달튼 쪽으로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달튼. 하녀장한테 말해서 아리엘 일정 좀 비워.”
“예?”
“애가 놀지도 못하잖아.”
어라. 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지?
아리엘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저 많이 놀고 있어요.”
늦잠자고, 잔뜩 먹고, 다이아나와 수다 떨고, 히스와 장난도 치고, 수잔이나 하녀들과 술래잡기도 하고, 브루노어와 수업할 때도 마법으로 노는데요?
하지만 마티어스는 여전히 마땅찮은 표정이었다.
“놀러 온 게 아니라면서.”
아리엘은 눈을 깜박거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혹시 내가 여기에 놀러온 게 아니라서 그러시는 건가?
마티어스님과는 놀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아리엘은 헤헤 웃었다.
“처음엔 그랬지만 지금은 놀고 있잖아요. 여기 너무 편하고 좋은걸요.”
그녀는 집무실 소파에 조그마한 몸을 있는 힘껏 푹 기대며 말했다.
그러자 마티어스의 표정이 조금 덜 무서워졌다.
“……뭘 물어보려고 왔지?”
“저랑 이 디저트 다 먹어주시면 말씀드릴게요.”
아리엘은 조금 어리광을 부렸다.
마티어스의 굳은 표정이 스르르 풀어졌다.
그가 천천히 걸어와 아리엘 맞은편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긴 흑발 머리를 우아하게 넘긴 마티어스가 모카 크림이 든 웨이퍼 스틱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러면 되는 건가?”
“네.”
아리엘은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어스님이 나랑 놀아주시려고 과자를 드신다니!
아리엘은 아까 먹다 만 카스테라를 포크로 떠먹었다.
몰랐는데 카스테라 안에 자몽 필링이 들어있어서 상큼함이 더해졌다.
“마티어스님, 황궁엔 왜 가셨던 거예요?”
“음, 황제 놈이 이 집 보물을 하나 보여달라기에. 안된다고 하고 오는 길이다.”
어…… 그렇구나. 황제 폐하한테 안된다고 하셨구나…….
아리엘은 당황한 나머지 티를 확 들이키다가 캘록캘록 기침을 했다.
“되게 중요한 보물이었나 봐요.”
“…….”
마티어스가 말없이 아리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입매를 올리며 답했다.
“그래. 무척이나.”
뭔지 궁금하네.
하지만, 물어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자신은 이미 이 집 보물들을 너무 많이 본 상태였으니까.
과자의 산이 야금야금 사라진 후에, 아리엘은 본래 하려고 했던 질문을 꺼냈다.
“저…… 마티어스님. 제 사교계 데뷔는 언제인가요?”
조각 같은 얼굴로 인상을 쓰며 달디단 과자를 노려보고 있던 마티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건 어째서 묻지?”
“그게…….”
아리엘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란셀 후작 부인이 물어봐서요. 결혼한 사람은 나이가 어려도 데뷔할 수 있대요.”
마티어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넌 안 해도 돼.”
아리엘은 배시시 미소지었다.
“제가 어리니까요?”
“그래.”
“…….”
마티어스가 그녀에게 어리니까 괜찮다고 말해줄 때면 정말 응석받이 대공녀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 어릴 때조차 한 번도 부모에게 그런 취급을 받아보지 못한 아리엘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대한 것이 낯설면서도 간질간질하게 좋았다.
그녀가 대공가에 오기 전의 세상은 그녀에게 각박하고 매몰차며 더없이 잔인했으니까.
아리엘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걱정되는 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루시안이 이번 가을에 데뷔한다고 들었어요. 결혼한 남자가 혼자 공식 석상에 나가면 모양이 안 좋대요.”
아리엘이 데뷔하지 않으면 루시안은 모든 행사에 혼자 나가야 할 것이다.
마티어스가 단호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든 그딴 인간들 모임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루시안 녀석은 모양새 따위를 신경 쓸 만큼 낮고 하찮지 않아.”
그가 서늘하게 덧붙였다.
“네가 데뷔를 거치지 않고 어느 날 불쑥 연회에 간다고 해도 널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없고.”
“…….”
아리엘은 마티어스 어(語)를 잘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뭘 하든 내 의사를 존중해주시겠다는 뜻이구나.’
어떤 경우든 대공가가 책임지고 보호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거고.
‘마티어스님은 참 자상하셔.’
늘 반대하듯이 무뚝뚝하게 말씀하시는 게 습관이라 주변 사람들이 마티어스님의 자상함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정말 이런 아빠 밑에서 자랐다면 세상에서 가장 버릇없는 아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에게도 다이아나와 후작 부인 외의 귀족 여자들을 만나는 건 두렵고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루시안에게 아내 노릇을 제대로 하겠다고 했는걸.’
공식 석상에 함께 나가는 것도 그 의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차피 열네 살이 되면 데뷔를 안할 수 없을 거고, 자신이 숨어만 있으면 분명 루시안이 나쁜 소리를 듣게 될 것이 뻔하니까.
아리엘은 루시안이 자신 때문에 험담을 듣는 건 싫었다.
그리고 루시안의 성격을 고려해보건대, 험담을 한 무리가 그 뒤에도 살아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역시…… 내가 나가는 편이 낫겠어.’
아리엘 자신이 사교계에서 겪게 될 일들은 그저 자신의 몫일 뿐이었다.
계약 결혼을 할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라, 어떤 일이 생기든 그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루시안이 험담을 듣게 된다면 사람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걸 무시할 수야 없지…….’
아리엘은 결정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번에 데뷔해도 될까요?”
마티어스가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아리엘은 고개를 조금 떨구며 말했다.
“걱정하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앞으로 계속 겪어야 할 일이라면 빨리 익숙해지고 싶어요.”
어른스럽게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병아리마냥 삐약삐약 앳되어서 조금도 어른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이리 와라.”
아리엘은 일어나서 마티어스에게 다가갔다.
마티어스가 큰 손으로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리엘은 마티어스 앞에 살며시 앉았다.
마티어스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넌 뭐든 할 수 있다. 그리고 네 선택의 책임은 다 대공가가 질 것이다.”
그가 보기 좋게 뻗은 목울대를 움직이며 말했다.
“다만, 하나 약속해라.”
아리엘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가면 쓸데없는 말을 하는 인간들이 있을 거다.”
아리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런 말에 신경 쓰지 말라고 이런 말을 해주시나 보다.
마티어스가 말했다.
“그놈들의 이름을 잘 기억해둬.”
“네?”
“그리고 나한테 그대로 말해주면 된다.”
“……네?”
잠깐. 이거 뭔가 살생부 느낌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라’가 아니라 ‘나한테 말하라’니.
아리엘은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진짜 라카트옐 남자들 머릿속은 어떻게 생긴 거야?!
역시나 험담을 듣더라도 제 선에서 거르는 편이 많은 이들의 목숨에 이로울 것 같았다.
“그럴…… 게요.”
마티어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나도 같이 참석하마.”
“정말요?”
아리엘은 어른스러운 태도도 잊고 활짝 웃었다.
“잠시만, 각하……?”
경악한 듯한 표정을 짓는 달튼에게 서늘히 눈길을 준 마티어스가 말을 끝마쳤다.
“에스코트할 어른이 필요할 테니까.”
* * *
무도회에 마티어스와 함께 간다는 것 때문에 잔뜩 뺨이 상기된 아리엘이 자기 방으로 돌아간 후, 달튼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툭 떨어트렸다.
“대, 대, 대공 각하. 방금 하신 말씀은……?”
마티어스가 성가시다는 듯 달튼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못 들은 거 아니니 귀찮게 굴지 마.”
달튼은 기절초풍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공 각하가 무도회에 가신다고? 아기 마님 에스코트를 하러?
그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가, 각하께서 봄 무도회에 마지막으로 나가신 게 언제였죠? 제 기억으로는 13년 전에 딱 한 번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것도 대공자님 성명식 때문이었고, 그 후로는 귀찮다고 절대 안 가셨지 않습니까.”
마티어스가 권태롭게 대꾸했다.
“그게 뭐. 13년 동안 귀찮았어.”
“지금은요?”
“지금은 아리엘이 있잖아.”
“…….”
달튼은 할 말을 잃고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이 분이 아기 마님께 완전 빠져버리신 게 분명해.
“아무튼, 가겠다고 황제한테 보내.”
“……예.”
달튼은 천지가 개벽하나보다 생각하고 명령을 따랐다.
황실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그가 말했다.
“어찌 됐든 황제 폐하께서 무척 좋아하시겠네요. 매년 공식 석상에 좀 나와달라고 애원을 하셨는데.”
“쓸데없는 짓거리지.”
“새 대공비님을 맞으시라는 성화도…….”
“건방지기는.”
쯧. 혀를 찬 마티어스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오랜 세월 권태로이 누워있던 사자가 몸을 일으키는 듯한 동작이었다.
“제대로 준비해. 내가 직접 움직인다는 게 어떤 건지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