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모든 것이 단 몇 초 안에 벌어졌다.
아리엘이 이상한 마차를 발견하고, 멈칫하고, 마차가 다리의 난간으로 돌진해 들이받기 직전에 거대한 빛이 터져나간 것.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 상황을 제대로 본 건 대공 마티어스 뿐이었다.
아리엘의 마나는 폭주하는 마차를 멈춘 뒤 보호막을 씌워 뒤집히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거센 힘이 터져 나오면서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초토화 되었다.
나무는 뿌리째 뽑혀 뒤집히고, 다리 아래에 있던 강물은 솟구쳐서 다리 위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초유의 사태에 거리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마티어스의 시야에는 힘없이 쓰러지는 작은 소녀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리엘라!”
그는 아리엘의 몸이 마차 바닥에 부딪히지 않게 안아 들었다.
혼비백산한 마부를 밀어내고, 마차와 말을 연결한 고리를 검으로 끊어냈다.
마티어스는 아리엘을 단단히 안은 채 말에 올랐다.
“이랴!”
그가 고삐를 세게 내리치자 포식자의 위협을 느낀 말이 발에 날개 달린 듯 달리기 시작했다.
마티어스는 그 길로 곧장 대공저에 돌아가 아리엘을 안고 휙 뛰어내렸다.
“브루노어! 브루노어와 주치의를 불러와라!”
갑작스레 돌아온 주인의 팔에 늘어져 있는 자그만 아리엘을 본 수잔과 알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수잔은 곧장 여의사 밀러를, 알렌은 브루노어를 불러왔다.
마티어스는 밀러에게 진찰을 보게 한 후 브루노어에게 다리 위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마나를 터트렸다. 반경 10m는 뒤집어졌고.”
브루노어가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정신을 잃은 아리엘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
아리엘의 이마에 손을 얹어 마나의 흐름을 읽은 대마법사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 * *
아리엘이 구한 소녀의 이름은 다이아나 모니카.
모니카 공작가의 하나뿐인 외동딸이었다.
다이아나는 봄 무도회 드레스 위에 쓸, 유행하는 머리 장식을 둘러보려고 나갔다가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새초롬해져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길을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겁이 나서 마부에게 속도를 줄이라고 소리를 쳤으나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호위를 데리고 나올걸.’
가볍게 나온 봄 외출에 호위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게 피곤해서 오늘만 물렸던 참이었다.
막상 위험한 상황에 닥치니 그게 얼마나 철없는 짓이었는지!
다이아나는 어릴 때부터 공작가에서 자랐기에, 웬만한 일엔 당황하지 않는 똑 부러진 소녀였다.
심지어 공녀답게 납치나 협박에 대비한 교육도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감이 좋지 않았다.
납치범들이었다면 지금처럼 위험하게 달릴 게 아니라 그녀를 안전하게 확보해서 몸값을 받아내려고 했을 텐데, 지금 이 상황은…….
‘꼭 날 죽이려는 것 같잖아……!’
공포에 떨며 다이아나는 있는 힘껏 마차 안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짧은 순간, 반대편에서 지나가는 마차의 창문을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던 것도 같다.
창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제발 누구든…… 저 좀 살려주세요!’
다이아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외쳤다.
그리고 미쳐버린 마차가 다리를 들이받고 떨어지기 직전.
그 일이 일어났다.
눈부신 빛이 퍼져나가며 마차가 멈췄다.
콰당. 다이아나는 세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넘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다리 아래에 흐르던 강물이 솟구쳐 마차 위로 쏟아져 내렸다.
신이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다이아나는 죽지 않았다.
현장에서 발견된 그녀는 곧 모니카 공작가로 옮겨졌다.
모니카 공작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이 마차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듣고 한 번 뒤로 넘어갔다가, 딸을 살린 사람이 라카트옐 대공이라는 것을 듣고 한 번 더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딸이 무사히 깨어나자마자 곧장 대공저로 찾아온 참이었다.
원래 대공저에 초대도 받지 않고 찾아오는 것은 대단한 무례였다.
그러나 딸의 은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국의 높디높은 귀족인 그는 한참 만에야 겨우 대공저 안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대공 각하. 모니카 가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모니카 공작은 마티어스 대공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대공의 싸늘한 시선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유감이지만 내가 한 일이 아니다.”
“예?”
“나였다면 공녀가 마차 아래에 깔려 죽든 말든 놔뒀겠지.”
대공이 분노를 억누르는 듯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내가 타고 있던 마차에 대공자비가 함께 타고 있었다. 네 여식은 그 아이가 구한 것이다.”
“하, 하지만 대공자비께서는 상당히 어리시다고 들었는데…… 어찌 그런 일이.”
“그 아이가 대신 다쳤으니까.”
공작은 힉 숨을 삼켰다.
“그럼 대, 대, 대공자비님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낮고 살기 어린 목소리가 모니카 공작에게 떨어졌다.
“모니카 공작, 이제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겠지.”
공작은 벌벌 떨며 대공과 눈을 맞추었다.
마티어스가 사납게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마차 사고를 일으킨 인간을 찾아내라. 네 가문의 인간이든, 정적이든 내 앞에 데려다 놔.”
“알겠습니다.”
“이 일에 대한 대가는 그 뒤에 치르게 될 거다.”
용건을 마친 마티어스가 살벌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돌아가라.”
얼어붙을 듯 냉랭하게 돌아서던 그가 한 마디 덧붙였다.
“또. 이번 일이 새어나가게 했다가는 좌시하지 않겠다.”
중년의 모니카 공작은 말없이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대공에게서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위압감이 느껴져서 집무실을 나와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리엘라 대공자비…….’
공작저로 돌아가며, 모니카 공작은 딸의 목숨을 살린 은인의 이름을 입으로 되뇌었다.
올해 열 살이라는 어린 소녀.
루실리온 후작가와 예전부터 연이 있었는데도 후작 영애인 아리엘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후작은 그녀에 대해 항상 말을 아꼈다.
아리엘이 다쳤으니 루실리온 후작가에도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모니카 공작은 대공의 말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마차 사고를 일으킨 배후를 찾아낼 때였다.
* * *
그 날 저녁.
게이트 여섯 개를 지나쳐 온 대공자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이 대공저로 돌아왔다.
“대공자님!”
돌아오겠다는 전갈도 보내지 않고 폭풍처럼 대륙을 가로질러 온 루시안은 들어서자마자 아리엘을 찾았다.
“꼬맹이는?”
“방에 계십…….”
집사 알렌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알렌은 민첩하게 뒤를 따르며 몇 달 만에 보는 작은 주인의 뒷모습을 살펴보았다.
마법 게이트는 보통 사람이라면 하루에 세 개 정도가 최대치였다.
게이트를 지날 때 체력 소모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동은 마법의 힘으로 되지만 엄청난 거리를 지나쳐 온 피로를 그대로 감당해야 했다.
게이트 세 개 이상의 여행을 할 경우 탈진으로 쓰러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섯 개의 게이트를 반나절 만에 통과해 온 루시안에게서는 한 점의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살기에 가까운 기세만 날카롭게 뻗치고 있을 뿐.
겨우내 소년은 키가 좀 더 크고 선이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검은 머리칼 밑으로 자리 잡은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는 깊은 바다처럼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겨울 폭풍처럼 살이 에이는 얼음 같은 기세가 그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을 바짝 움츠리게 했다.
소년이 지내는 제국립 요하네스 아카데미가 있는 지역은 제국의 최서단, 기후는 한 해의 절반이 겨울인 곳이라 더욱 그에게서 차가운 인상이 풍겨오는 건지도 몰랐다.
루시안은 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손길로 손잡이를 열어젖혔다.
안으로 들어가자 온통 핑크 일색의 소녀스러운 방이 펼쳐졌다.
레이스 캐노피가 쳐진 낮잠 베드에 동그랗게 몸을 만 소녀가 쌕쌕 가쁜 숨소리를 내며 누워있었다.
“대공자님.”
옆을 지키던 브루노어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안은 그를 무시하고 성마른 걸음으로 침대에 다가갔다.
소녀의 뺨은 열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고르지 않게 나는 숨소리가 소녀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왜 이렇게 됐지?”
서릿발 같은 물음이 브루노어에게 떨어졌다.
라카트옐의 정체를 아는 대마법사는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워졌다.
“마나를 한 번에 방출시키셨습니다. 아기 마님께서 마법사이신 건 알고 계셨겠지요.”
“얘가 한 짓 말고. 몸이 왜 이렇냐고 물었어.”
“마나가 터져 나오면서 몸의 에너지 대부분을 집어삼켜서 그렇습니다. 원래도 약하셨던 분인데…….”
말을 잇는 브루노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루시안에게서 흘러나온 기세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브루노어이기에 이 정도라도 버틸 수 있는 거였다.
아리엘의 물수건을 갈러 들어오던 하녀는 문 앞에서 기절해버렸다.
열에 들떠 괴로운지 아리엘이 몸을 뒤채며 신음 소리를 냈다.
“엄마…… 흑, 엄마…….”
아픈 아이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어미를 찾으며 흐느꼈다.
루시안은 망할, 하고 짧게 중얼거리며 제 머리를 세게 쓸어넘겼다.
다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드글드글 끓어올랐다.
“뭐라도 좀 해. 빌어먹을 마법사 새끼야.”
브루노어는 수척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극도의 쇠약 상태라서 체력을 보충해주는 마법약을 드실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방출된 마나는 폭주를 멈추지 않고 육체 에너지를 계속 갉아먹고 있고요.”
루시안이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폭주하고 있는 마나를 진정시켜야 합니다.”
“마나 안정화 정도야 네가 하면 되잖아!”
루시안이 낮은 목소리로 폭발했다.
마나는 절대적으로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였다.
강한 자에게 복종하고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
선천적으로 마나를 타고나지 않은 사람이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이유였다.
검의 경지에 오르며 강해진 마스터에게 마나가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니 대마법사 브루노어 정도의 강한 자라면 조그만 소녀 몸 안의 마나 정도는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브루노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이미 시도해봤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기 마님 몸속의 마나는…… 제 힘으로 되지가 않습니다.”
“제길.”
루시안은 목을 죄고 있는 교복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냈다.
브루노어가 그의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혹시 대공자님께서 해보시겠습니까? 제 힘으로 왜 안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공자님이라면.”
“이봐.”
빙하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브루노어의 말을 멈추게 했다.
“내 마나가 어떤 속성인지 몰라?”
“시도라도 해보시라는 거지요. 대공자님께선 다르시니.”
“그러다 더 다치면 어떡할 거야.”
루시안의 기세 때문에 서 있던 브루노어의 무릎이 꺾였다. 지독한 중압감이었다.
“해보시지 않는…… 것보다는…… 낫…… 윽.”
루시안이 환멸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마티어스는. 그가 해보지 않았어?”
“대공자님께서 돌아오시면 결정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꺼져. 여기서 나가.”
루시안은 방 안의 사람들을 죄다 물렸다.
방 안에 그와 그의 어린 아내만 남자 루시안은 한없이 연약한 육체를 가진 소녀를 어두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가 조금만 실수해도 아리엘은 죽을 것이다.
한순간에, 돌이킬 틈도 없이.
루시안은 천천히 아리엘의 심장이 뛰는 왼편 쇄골 아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린 몸이 감당하기에 거대한 마나가 몸 안을 헤집으며 날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루시안은 억눌러 놓았던 기세를 조금 개방했다.
브루노어가 느꼈던 것은 그가 가진 힘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억지로 묶어둔 힘을 개방하자, 아리엘 몸속의 마나가 그것을 느끼고 움찔했다.
루시안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위협했다.
“가만히 있어.”
그는 제 손안으로 아리엘 몸속 마나의 일부를 빨아들였다.
최상위 포식자의 손길에 복종한 마나가 고분고분 딸려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리엘이 제대로 회복한다면 마나는 저절로 보충될 테니 루시안은 최대한 마나를 흡수하는데 집중했다.
방금까지 아리엘의 몸속에 흐르던 것이라서 그런지 난폭하고 차가운 그의 마나와는 달리 솜털처럼 보드랍고 따뜻했다.
루시안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이딴 것한테 잡아먹혀서 이런 꼴이란 말이지.”
마나를 빨아들이자 끙끙 앓던 아리엘의 표정이 조금 편해졌다.
고통스러운 듯 몸을 바짝 둥글게 말고 있던 것도 스르르 풀어졌다.
하지만 아리엘의 몸속에서 돌고 있는 마나까지 얌전해진 건 아니었다.
아리엘은 루시안과 달리 지극히 연약했고, 마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아리엘의 몸속에 남아 있는 마나가 제멋대로 날뛰며 소녀의 생체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성가시긴.
루시안은 짜증스럽게 마나에게 살기를 비쳤다.
그는 아리엘의 몸에 닿는 면적을 좀 더 넓게하기 위해 침대 위에 앉았다.
쇄골 아래에 손만 얹고 있던 것을 떼고 한 팔로 아리엘의 몸에 둘러 안았다.
이제부터 할 것은 정말로 위험했다.
스스로의 곤두선 기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널 내 손으로 죽인다면.”
루시안은 이를 사려 물었다.
그 이후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다 손가락으로 뺨을 눌러보았다.
말랑한 감촉이 손에 닿았다.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삐딱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전에 잡았을 때랑은 조금 다른데.
그는 이제 기세를 조금 더 개방할 생각이었다.
아리엘 몸속의 마나가 공포를 못 이겨 폭주한다면 소녀의 숨은 끊어질 것이다.
하지만 겁먹어 잠잠해진다면…….
그는 수숫대 인형같이 가냘픈 아리엘의 몸을 바짝 끌어당겨 안은 뒤 기세를 개방했다.
기절한 몸인데도 아리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바뀌었다.
“이번만 버텨. 꼬맹이.”
루시안은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포식자의 기운에 아리엘의 마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루시안은 짧게 내뱉었다.
얌전해져라. 당장.
쉬익. 순간 역류하던 마나가 단번에 흐름을 바꾸었다.
거꾸로 치솟던 것이 정방향으로 돌아오며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아리엘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온 것은 그 후였다.
“…….”
루시안은 제 힘에 고분고분해진 아리엘의 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마법사 브루노어의 마력은 결코 낮잡아 볼 수준이 아니다.
그런데 브루노어의 힘에는 끄덕하지 않더니, 자신의 힘에는 순순히 반응한다?
“하. 넌 진짜 어떻게 된 게…….”
그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루시안은 곧장 설렁줄을 당겨 브루노어를 불렀다.
오만한 목소리가 명령했다.
“체력 마법약 가지고 와.”
* * *
아리엘은 포근한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몸이 약간 무거웠지만 몽롱한 상태에서는 그것마저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우음…….”
한 팔을 머리 위로 펴며 살짝 기지개를 켜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깼나?”
“……!”
아리엘은 바로 눈을 번쩍 떴다.
루시안!
잠이 깨면서 그 전의 상황이 모조리 떠올랐다.
여자애를 구하기 위해 마법을 썼었다.
‘난 루시안과의 계약을 어겼어.’
아리엘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며 다시 자는 척을 했다.
방금까지는 포근하고 따뜻해서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땅 아래로 꺼져버린 것 같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애초에 이 집에 들어온 건 루시안과의 계약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건 절대적으로 그녀 쪽이 절박해서 이뤄진 계약이었고.
근데 약속을 어겼으니…….
‘쫓겨나는 걸까? 다시 후작가로 보내질까?’
그렇다면 영원히 이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리엘은 거의 죽은 척에 가까운 잠든 척을 했다.
뒤집어쓴 이불 바깥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하고 일어나. 아리엘라 라카트옐.”
으윽. 들켰어. 계속 이러고 있으면 더 화낼지도 몰라.
아리엘은 더 고집부리지 않고 빼꼼 이불을 내렸다.
화난 얼굴의 루시안이 침대 옆 협탁에 걸터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시안.”
작게 부르자 그가 요염하게 눈을 내리깔아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린 듯한 붉은 입술에서 마침내 그 말이 흘러나왔다.
“약속, 어겼더군.”
아리엘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변명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 마법을 써버린 건 분명히 그녀의 잘못이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네…… 어기고 말았어요. 죄송해요.”
“그럼 대가가 있을 거란 것도 알겠지.”
속으로 '이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 집에서 나가야 하는 걸까?
이제 수잔도, 마티어스님도, 우즈나 홀슨도…… 달튼과 알렌도 영영 못 보게 되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둥글고 커다란 눈망울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소리없이 뚝뚝 떨어졌다.
아리엘은 발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여기…… 흑,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
루시안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악당이라도 된 기분이군.
이 여자애에게 자신이 악당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막상 이런 반응을 보이니 기분이 나빴다.
언제는 제 삶이 내 것이라는 데도 괜찮다고 오롯이 믿는 눈빛을 보내더니.
심지어 마나는 다른 사람 말은 듣지 않고 내 말만 듣는 주제에.
내가 저를 쫓아낼까 봐 저렇게 무서워서 떠는 건가?
이기적이고 오만한 심사가 확 뒤틀렸다.
다른 것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너만은 아니지.
말이 저절로 거칠게 나왔다.
“눈물 그쳐.”
유감스럽게도 그는 전혀 몰랐다.
어린애의 눈물이라는 건 그치라고 다그칠수록 더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흐윽, 저도 안 울고 싶, 흐윽, 으아앙……!”
아리엘은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루시안이 울지 말라고 하는 게 무서워서 참아보려고 했는데, 그와도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설움이 복받쳤다.
루시안이 걸터앉았던 곳에서 내려와서 침대 옆을 빙 둘러 걸었다.
아리엘은 우느라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한두 번 더 침대 옆을 서성이던 그가 다시 을렀다.
“그만 울라니까.”
“흑, 흐으, 그, 그게 안 돼요…… 흐윽.”
“젠장.”
루시안이 아리엘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고정시켰다.
아리엘은 정신없이 울다가 그의 청색 눈과 마주쳐서 순간적으로 울음을 그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뱉은 그가 아리엘의 눈가로 입술을 내렸다.
붉고 뜨거운 것이 아리엘의 눈물을 훑고 지나갔다.
이건 왜 눈물도 단 거야?
루시안은 하얀 뺨에 얼룩진 눈물을 느리게 입술로 핥아냈다.
울던 소리가 잦아드는 게 썩 마음에 들었다.
아리엘은 루시안의 행동에 놀랐지만, 얌전히 그의 입술이 지나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수잔이 입 맞춰 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좀 더 뜨겁고 간지러웠다.
어쩐지 불안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아리엘이 천천히 울음을 그치자 루시안은 뺨을 놓아주었다.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난 말이야. 약속을 어기는 인간이 싫어.”
“히끅.”
간헐적인 딸꾹질 소리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나와의 약속을 어긴 인간들은 다 죽었지. 지금이라도 난 널 죽일 수 있어.”
아리엘은 딸꾹질을 하며 생각했다.
쫓겨나는 게 아니라 죽는 거였구나.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근데 너는 안 죽일 거다. 죽이기 싫으니까. 그래서 용서하는 거야.”
훌쩍. 아리엘은 눈물을 슥슥 닦아냈다.
용서해서 죽이지 않는 게 보통 아닌가? 죽이고 싶지 않아서 용서한다는 건 뭔가 이상해.
근데…….
‘용서요?’
아리엘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쩐지 논리가 괴상하지만 용서란 얘기가 나온 이상 희망이 생겼다.
“안 죽여요?”
“안 죽여.”
“그, 그럼 저 이 집에서 안 나가도 돼요? 계약 파기 아니에요?”
“아냐.”
짧게 대꾸한 그가 아리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오만하게 말했다.
“난 계약을 파기하고 싶으면 말 같은 거 안 해. 상대를 없애지.”
아…… 안 죽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지도, 쫓겨나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리엘의 눈에 다시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루시안의 얼굴이 굳었다.
“왜 이렇게 울지? 그 작은 몸에서 눈물이 더 나올 게 있나?”
“안 울게요! 안 울어요!”
아리엘은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세게 눈물을 닦은 자리의 피부가 발개졌다.
루시안이 머리를 짚었다.
“약해 빠져 가지곤. 대체 네 몸은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그가 손을 뻗어서 아리엘의 손목을 쥐었다. 설탕 인형처럼 얇았다.
“잘 먹은 거 맞아? 대꼬챙이 같은 건 하나도 안 달라졌잖아.”
“잘 먹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아리엘은 얼른 나서서 주장했다.
하루 세끼에다가 오후 간식과 티, 저녁 정찬 후 디저트, 자기 전 우유까지 먹고 있는데!
하지만 루시안은 별로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그가 아리엘의 손목 대신 턱을 잡았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볼살을 건드려보고는 떨어져 나갔다.
루시안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좋아. 오늘부로 마법 금지를 풀겠다.”
아리엘은 둥그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요?”
“그래. 대신 마법을 배워.”
마법을 배우라고요?
아리엘은 조금 움츠러들었다.
과거에 마법을 배울 때의 고통은 그녀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마법을 처음 배울 때 얼마나 아팠던가.
피를 가장 많이 토했던 것도 초반이었다.
“안 배워도…….”
루시안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내 마법사가 되겠다고 했잖아. 난 내 것이 약한 건 질색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배워.”
아리엘은 핑크빛의 조그만 입술을 잘근거렸다.
강해지려면 또 엄청 아프고 힘들겠지?
‘그래도 여기 있을 수 있잖아. 여기에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알겠어요.”
대답한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루시안.”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몸을 움직였다.
“간다.”
어어?
“잠시만요.”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덥석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뒤돌아서던 루시안이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야.”
아리엘은 순간 움찔했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봐서, 진짜인가 하고.”
루시안이 다가와서 그녀의 침대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아리엘의 뺨을 아프게 잡고 흔들었다.
“자. 진짜 네 남편이야. 알겠어?”
“아았어여.”
아리엘은 손을 뻗어서 루시안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보았다.
와, 정말이네. 그때 그 좋은 감촉.
루시안은 어이가 없어졌다.
이게 날 만지다니. 겁도 없이.
한술 더 떠 아리엘은 침대에 앉은 루시안 옆으로 엉덩이를 옮겨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그의 팔에 머리를 폭 기대었다.
헤실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 루시안이다.”
루시안이 돌아왔어. 1년 뒤에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루시안의 표정은 이제 어이없음을 넘어서서 당혹을 담고 있었다.
매양 까칠하고 오만한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하지만 아리엘의 몸에 아직 남은 약기운은 금세 그녀를 다시 졸음으로 밀어 넣었다.
“졸려요.”
“자.”
“싫어요…….”
마지막 대답이 무색하게 아리엘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늘한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 * *
한참 아리엘의 옆에 앉아있던 루시안은 밤에 마티어스를 찾아갔다.
평소엔 지독히 대공저 안에만 박혀 사는 주제에 어디에 나갔다 들어 왔는지 마티어스는 겉옷을 벗어 걸고 있었다.
루시안은 부친이라는 존재에 느껴지는 혐오감을 누르고 차갑게 말했다.
“말해.”
“뭘 말이냐.”
“저게 나랑 한 약속까지 어기고 구한 것. 사고 낸 새끼도.”
마티어스가 잠잠히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말하면?”
“죽일 거야.”
묶고 있던 긴 흑발을 풀어낸 마티어스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털었다.
공기 중에 혈향이 묻어났다.
“사고 낸 새끼 죽이고 오는 길이다.”
“…….”
태초 이래 처음으로 두 부자의 마음이 맞은 순간이었다.
루시안은 자신과 소름 끼치도록 닮은 외양의 마티어스를 응시하다가, 손을 한 번 휘둘러 마티어스의 집무실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놓았다.
와지끈. 콰쾅. 와장창.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와 부옇게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루시안이 싸늘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다치지 않게 막았어야지. 내 보복에는 당신도 포함이야.”
지금 마티어스의 목을 비틀 수 없다는 게 증오스러울 뿐이다.
망할 놈의, 성년 따위.
루시안은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가려다가 무언가를 보고 멈춰섰다.
이건 또 뭐야.
벽 쪽에 붙어있는 마티어스의 유리 진열장 선반에 핑크색 종이로 접은 종이배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어둡고 삭막한 이 공간에 지나치게 안 어울리는 모습으로.
“…….”
이내 핑크 종이배의 출처를 유추해낸 루시안이 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쾅.
문이 세게 닫히며 떨어져 바닥에 뒹굴었다.
방 안에는 진열장 하나와 핑크색 종이배만 홀로 부서지지 않고 멀쩡히 남아 있었다.
* * *
다음날 깨어난 아리엘은 요란스런 치레를 받으며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꽤 오래 기절해있었다는 것과 많이 아팠다는 것을 전해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나를 방출시켜서였다는 것도.
설명해주는 브루노어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원래 그런 거 아닌가?’
과거의 그녀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마법을 쓰고 나면 항상 정신을 잃고 며칠간 고열에 시달렸었다.
처음 마법사 무리에 들어가서 마법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아리엘은 밤마다 끙끙 앓았다.
먹은 것은 죄다 토하고 열에 시달리고 걸핏하면 픽픽 쓰러졌다.
그런데 그 때는 주변의 그 누구도 아리엘의 증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는 아리엘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아리엘도 그 말을 믿었다. 그녀가 부족해서 이렇게 아픈 거라고.
나중에 마법을 잘 다루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이 부족한 탓에 마법을 쓴 후폭풍이 심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고통을 당연하게 여겼다.
어떻게 해결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법사인 브루노어를 비롯해서 이 집 사람들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모두가 이 상황을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나같이 호들갑을 떨며 아리엘의 몸 상태를 걱정했다.
브루노어는 시간을 엄격하게 맞춰서 약을 가지고 왔다.
주황색의 걸쭉하고 쓴 시럽 형태의 약이었다.
“아기 마님의 체력을 회복해주는 마법 약입니다. 몸이 마나를 지탱하는데 도움을 주지요.”
아리엘은 쓴 시럽약 한 스푼을 먹고 상으로 수잔에게 설탕 과자를 받았다.
그녀가 아프자, 수잔은 무척이나 물러져서 평소보다 단 것을 더욱 많이 주었다.
주방장 홀슨은 보양식이라면서 약초맛이 물씬 나는 고기 스튜를 매 끼니마다 올렸다.
스튜에는 특이한 모양의 뼈와 고기가 들어있었는데 아리엘은 아무리 들여다 봐도 그 모양과 비슷한 동물을 상상해낼 수 없었다.
음…… 굳이 비슷한 것을 떠올려보자면 책에서 본 드레이크?
아리엘이 깨어난 뒤 그녀를 찾아 온 마티어스는 무뚝뚝하게 괜찮냐고 묻고는 말없이 한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왠지 원 없이 쓰다듬는 것 같아서 아리엘은 얌전히 손길을 받고만 있었다.
마티어스의 손은 크고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하녀들도 만나는 사람마다 아리엘의 손을 붙들고 눈물을 그렁댔다.
“큰일 나시는 줄 알았어요. 아기 마님.”
“맞아요. 대공님께 안겨 들어오실 때 핏기라곤 하나도 없으셔서…….”
이렇게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아리엘이 아픈 게 큰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자, 그녀는 좀 얼떨떨해졌다.
마법을 쓴 후 앓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었던 걸까?
과거와 관련이 되어있어서 누구한테 물어볼 순 없었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픈 걸 참는 게 정상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해가 질 무렵에서야 드디어 방 안에 홀로 있게 된 아리엘은 마차 사고가 났던 순간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 여자애는 어떻게 되었을까.’
보라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타고있던 마차가 추락하는 것은 그녀가 막았지만, 어쩌면 마법에 휩쓸려 다쳤을 수도 있었다.
소식을 알고 싶은데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마차가 이상했었지.’
마차는 분명 뭔가에 조종당하고 있었다. 마차를 모는 마부의 눈도 흐릿했고.
아무래도 마법으로 한 짓 같았다.
‘대체 뭐였을까?’
아리엘이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방의 창문이 휙 열렸다.
열린 창에서 루시안이 재규어같이 유연한 동작으로 넘어 들어왔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제멋대로 난입한 루시안이 깨어있는 아리엘을 보고 느른하게 말했다.
서늘한 바람이 함께 끼쳐 커튼이 흔들렸다.
잠깐…… 그 창문, 안에서 잠겨 있었는데 어떻게 연 건가요?
‘아냐, 됐어.’
아리엘은 루시안의 행동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처음 만남부터 그에게는 이해 가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알렌 말대로 루시안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 뭐.’
지금 아리엘에게는 그런 것보다 루시안이 곧장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금방 돌아갈 수도 있는데, 꼭 그녀 때문에 머무르는 것 같아서.
“아카데미로 돌아가셨을 줄 알았어요.”
조그맣게 말하자 루시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날 대체 어디까지 악당으로 만들 셈이야? 안 그래도 아내가 쓰러졌다는 얘기를 타지에서 들어서 기분 더러웠는데.”
그렇게 말하면 꼭 날 걱정했다는 얘기로 들리잖아요, 루시안.
“내 것을 건드리는 건 가만두고 볼 수 없지.”
그럼 그렇지. 자기 소유물을 건드리는 게 싫다는 거였구나. 난 루시안 소유의 마법사니까.
새삼스레 그런 것에 실망감이 들지는 않았다.
원래부터 루시안과 그녀는 그런 관계였으니 말이다.
아리엘은 석양이 내려앉은 창가에 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진짜 예쁘다…….’
흑요석처럼 새까만 그의 흑발 아래에는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물주가 아름다움이란 단어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인간이 담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최고치를 시험하고자 만들어 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소년과 남자 사이의 시기에만 드러나는 미완성된 얼굴선조차 모성 본능을 자극했다.
한 점 티도 없는 하얀 피부와 시원하게 뻗은 콧날은 대리석 조각상을 떠올리게 했다.
붉은 입술은 악랄한 색기를 담고 있었고, 오만하게 긴 속눈썹은 분위기를 더해 위압적이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아름다운 건.’
그가 가진 짙은 청색의 눈동자였다.
루시안의 눈은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어떤 마력을 담고 있었다.
그의 눈을 본 사람들은 모두 유혹당해 파멸하거나, 겁에 질려 도망칠 것이다.
심연의 어두움에 끝도 없는 깊이의 바다를 섞으면 저런 색이 나올까?
“너.”
갑자기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깜짝이야. 너무 빤히 보고 있었나?
“마법 금지를 풀어주는 대신 다른 명령을 해야겠어.”
아리엘은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켰다.
“무슨 명령이요?”
루시안이 그녀를 응시했다.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가 압박하듯 아리엘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다시는, 다른 것을 구하려고 하지 마.”
아. 보라색 머리의 소녀를 구했던 일을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넌 너만 알면 돼. 아리엘라.”
그가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
고분고분하게 네 하고 대답하고 싶게 만드는 지배자의 목소리.
“네가 너 외에 알아야 할 건 오직 나뿐이야.”
“남편…… 이니까요?”
루시안이 흡족한 듯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그래. 그러니 다른 벌레들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마.”
그가 유혹적으로 들릴만큼 달콤하게 덧붙였다.
“네가 구하면 내가 죽여버릴 테니.”
음? 잠시만요 그건…….
악마같이 속삭인 소년은 몸을 일으키며 표정을 바꾸었다.
“또 하나.”
이어지는 말에 아리엘은 바짝 긴장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팔짱을 낀 루시안이 까칠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종이배.”
“네?”
“배 접은 거 내놔.”
응? 이렇게나 뜬금없이?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느닷없이 종이배를 달라니. 루시안은 무슨 생각인걸까?
조금 더 고민해 볼 새도 없이 그가 채근했다.
“빨리.”
그녀는 루시안을 이해하는 것을 관두었다.
맥락 없는 게 한두 번이어야지.
“지금 접어드릴게요.”
“핑크색으로.”
“……네? 네.”
아리엘은 침대 근처에 있는 색종이 뭉치로 손을 뻗었다.
며칠 전에 정원사 우즈에게 종이배 접는 법을 배운 그녀는 신이 나서 여러 개의 종이배를 접었다.
그것을 본 저택 사람들은 너도나도 하나씩 그것을 받아갔었다.
‘뭐, 루시안한테도 못 접어줄 건 없지.’
남편이기도 하니까.
아리엘이 낑낑대며 종이배를 접는 동안 루시안은 삐딱하게 서서 고사리 같은 손이 움직이는 것을 구경했다.
왜 저딴 것이 가지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져야 했다.
그는 지금껏 가지겠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그것을 손에 넣는 인간이었다.
가지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부수고 싶다는 욕망이 항상 더 강한 편이긴했지만.
“여기요, 루시안.”
마침내 루시안의 손에 아리엘이 접은 핑크색 종이배가 들어왔다.
일단 제 손에 넣고 나자 그다음이 거슬렸다.
“이제부터 종이배는 금지다.”
“네에?”
한껏 억울한 눈망울이 그를 향했다.
세상에, 종이배를 접어줬더니 금지를 당했어.
루시안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만들고 싶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단, 나 외에 다른 사람한테 주는 건 금지다.”
“아아…… 네.”
접는 것 자체를 금하지는 않는다는 말에 아리엘은 안도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제 안의 독점욕을 충족시킨 루시안은 만족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 *
대공자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이 저택에 머무르는 기간은 2주일로 정해졌다.
원래는 게이트를 통과하는 시간 사흘을 제외하고 열흘의 휴가를 받은 것이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게이트를 하루 만에 통과할 수 있었기에 휴가는 2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아리엘은 처음으로 남편이 저택에서 뭘 하고 지내는지 그의 일상을 곁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다리로 걸어 다니느라 한계가 있는 아리엘과 달리 루시안의 행동반경은 굉장히 넓었다.
루시안에게는 이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저택이 하나도 버겁지 않은 것 같았다.
어린아이답게 아침 늦게 일어난 아리엘은 둥그런 빵의 속을 파서 만든 빵 그릇에 담긴 따뜻한 스프를 먹고 나서 루시안이 연무장에서 검 수련하는 것을 구경했다.
아직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야외에 나가진 못했다.
그런 아리엘을 위해 수잔은 연무장이 잘 보이는 곳 창가에 아담한 흔들의자와 폭신한 깔개를 놓아주었다.
아리엘은 그곳에 앉아서 양손으로 턱을 괴고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의 검은 롱소드로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리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거…… 로열 아이언 검인 것 같은데?’
마법사 무리에 있을 때 저런 강철이 마법약의 재료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광산에서 흔하게 나는 일반 철과 달리 푸른 빛을 띠는 로열 아이언은 무척 희귀한 재료여서 가루 형태로 조금씩 거래되곤 했다.
그래서 그걸 덩어리 채 녹여 검으로 사용한다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재력이 있는 사람이 지상에 존재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제 남편입니다…….
심지어 루시안의 검은 훈련용이었다.
훈련용 검은 어린 검사들이 자랄 때마다 계속 교체를 해줘야 하는 검. 그야말로 거쳐가는 검이라 할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야, 대공가는?’
처음엔 궁금했는데 점점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아졌다.
알면 알수록 실감이 되긴 커녕 더 놀라기만 할 뿐이니.
루시안의 훈련 상대는 결혼식 날 잠시 보았던 덩치 큰 기사였다.
아리엘은 그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루시안한테 술을 먹였던 사람이 저 사람이지, 아마?’
지나가다 만나면 한 번 노려봐 줘야지.
그녀는 연습하듯 눈에 힘을 주었다.
그나저나 기사의 덩치가 지나치게 산채만 했다.
아무리 루시안이 최연소 소드 마스터라지만 체급 차이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또래보다는 훤칠하게 크다해도 루시안은 열네 살의 소년에 불과했다.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몸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저런 근육질의 어른 남자와 검을 맞대면 힘이 부치지 않을까?
아리엘의 걱정이 무색하게 루시안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살짝 땀에 젖은 그의 앞머리 끝이 무겁게 찰랑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가볍게 도약해서 기사의 대검을 내리쳤다.
까강- 강철끼리 닿는 순간 불꽃이 튀며 날카로운 소음이 났다.
루시안의 공격을 받은 기사의 발이 지이이익 뒤로 밀려났다.
‘어째…… 힘에서 밀리는 것 같지 않네.’
소드 마스터라서 그런가?
아리엘은 마법사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검사나 소드마스터에 대한 건 잘 몰랐다.
그래서 인간 몸의 완력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루시안의 힘을 보며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소년에게 힘에서 밀린 덩치 큰 기사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검에 검기를 둘렀다.
아리엘은 눈을 크게 뜨며 창문에 붙어 섰다.
‘저게 검기구나!’
검기, 혹은 소드 마나.
일정 이상의 검의 지경에 오른 사람들에게만 복종하는 고고한 마나.
기사의 검에는 검붉은 빛의 마나가 둘러져 있었다.
이글이글 일렁이는 모습이 꼭 불타는 것 같았다.
루시안의 검도 검기를 뿜어냈다.
그의 머리카락처럼 새카맣고, 짙은 청색 눈동자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검기였다.
뻗어 나오는 모양이 얼음 결정처럼 날카로웠다.
‘소드 마나 신기하다…….’
아리엘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더 신기한 일은 검기를 두른 검끼리 맞부딪쳤을 때 일어났다.
두 검이 닿는 순간, 쾅 소리가 나며 공기의 파동이 원 모양으로 거세게 밀려났다.
주변의 흙먼지가 그 기세에 밀려 회오리가 일고, 풀과 나무가 찢겨나갈 듯 휘청였다.
검기가 없는 대련이 연습이라면 지금은 완전히 실전인 느낌이었다.
아리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창문에 붙어 서서 마스터들의 대련을 구경했다.
검술이란 것은 자연스레 사람의 시선을 빼앗아가는 매력이 있었다.
대련은 루시안의 승리로 끝났다.
덩치 큰 기사가 ‘진짜 살기를 뿜으시다니.’ 하면서 크게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를 대하는 루시안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달리 꽤나 격의 없었다.
‘하긴. 그 루시안에게 술을 먹인 사람이라면…….’
아리엘은 아마도 저 기사가 루시안과 가까운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루시안의 검술 연습이 끝났을 무렵, 아리엘은 깨끗한 수건 한 장을 챙겨서 저택 입구을 향해 종종 걸음으로 내려갔다.
닦을 천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는지 루시안이 땀에 젖은 머리를 그냥 터는 것을 보아서였다.
‘아내니까 이 정도는 해야 되겠지?’
현관 안쪽으로 루시안이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리엘은 얼른 그에게 다가가 수건을 내밀었다.
“루시안. 이거요.”
눈앞의 수건을 본 루시안이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검을 들어서일까?
그의 눈동자에는 가라앉지 않은 폭력성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야생의 맹수같은 느낌?
그가 픽 웃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벌써부터 아내 노릇을 하려는 건가?”
어…… 그걸 하라고 명령한 사람은 루시안인데요.
수건을 받아든 그가 대충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뒤 아리엘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다가와 아리엘의 입가를 쓸어냈다.
“읏?”
후드득. 작은 부스러기 같은 것이 입가에서 떨어졌다.
루시안이 가소로운 새끼 고양이를 가지고 노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내 수건 챙기기 전에 과자 부스러기 먼저 털어. 꼬맹이.”
으윽. 아리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계약대로 아내 노릇 좀 해보려고 했는데 완전히 애 취급받아 버렸다.
창피해.
빨개진 아리엘을 보고 쿡쿡 웃은 루시안은 건성으로 땀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내며 제 방으로 사라졌다.
아리엘은 바로 거울 있는 곳으로 가서 얼굴의 과자 부스러기를 깨끗이 정리했다.
‘검술 구경을 하면서 먹었던 버터 쿠키가 화근이었어.’
설탕이 솔솔 뿌려지고 가운데에 빨간 라즈베리잼이 듬뿍 든 버터 쿠키를 먹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입가에 부스러기가 묻는 게 예사였다.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까…….’
아리엘은 푸욱 고개를 숙였다.
그때 뒤에서 달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기 마님.”
“네?”
뒤를 돌아보며 대답하자 달튼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아기 마님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예.”
그럴 리가. 나한테 손님이라니요?
“대공님께서 들여보내셨습니다. 안으로 모실까요?”
아, 마티어스님이 허락하신 거라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티어스가 들여보낸 손님이라면 아리엘이 만나도 해될 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 꼭 만나봐야 하는 사람일지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에서 만날게요. 그리로 올려 보내주세요.”
도도도 계단을 오르면서 아리엘은 생각했다.
‘근데 손님이 누굴까?’
외부로부터 자신을 꽁꽁 숨기고 있는 마티어스가 허락한 손님이라니.
누구일지 무척 궁금했다.
* * *
똑똑.
문 바깥에서 알렌이 조용하게 손님이 드셨음을 고했다.
“들어와요.”
긴장을 감추며, 아리엘은 란셀 후작 부인에게 배운 대로 테이블에 얌전히 앉은 채 손님을 맞았다.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낯선 사람이 들어섰다.
“아. 당신은…….”
아리엘은 한 눈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들어온 사람이 아리엘을 보고 멈칫했다가 드레스 자락을 곱게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드레스를 들어 올리는 손이 창백하고 바들바들 떨렸다.
“안녕하세요, 대공자비님. 저는 모니카 공작가의 장녀, 다이아나 모니카라고 합니다.”
아리엘의 손님은 그녀가 마차에서 구한 보랏빛 머리카락의 귀족 소녀였다.
공녀 다이아나는 눈매가 살짝 위로 치켜올라가 새초롬하고 도도한 인상을 풍기는 영애였다.
실제로 다이아나는 무척이나 콧대 높은 아가씨였다.
공작가의 금지옥엽 공녀로 태어난 그녀는 겨우 열다섯인데도 아름다운 미모로 유명했다.
게다가 세 공작가 중 황태자 또래의 딸을 가진 가문은 모니카 가 뿐이었기에 황태자의 신붓감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다.
정작 그녀는 황태자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도한 그녀의 자존심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 처참하게 부서졌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도, 공녀라는 신분도, 그녀를 며느리감으로 여기던 황제 폐하도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지는 못했다.
다이아나를 구한 건 그녀보다 훨씬 어린 한 여자아이의 용기였다.
다이아나는 아버지를 통해 자신을 구한 것이 어린 대공자비이며, 그녀를 구하면서 대공자비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모니카 공작은 다이아나에게 신신당부했다.
“당분간 넌 절대로 대공 각하와 대공자님 눈에 띄지 말아라.”
“……아버지.”
“여태까지 라카트옐을 건드린 사람은 황족이어도 무사하지 못했어. 사죄와 감사는 아비가 하마. 널 살렸으니 아비는 어떤 대가도 치를 각오가 되어있다.”
그렇게 말하는 모니카 공작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있었다.
다이아나는 아버지가 큰 각오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이아나가 탄 마차를 사고로 몰아간 건 모니카 공작에게 원한을 품은 자였다.
이미 그는 조용히 처리되었지만, 모니카 가는 하늘 같은 대공가에 제대로 된 사죄를 해야 했다.
모니카 가의 싸움에 휩쓸려 대공자비까지 다친 셈이었으니 말이다.
다이아나도 라카트옐 대공가의 악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대공가는 자신에게 피해를 준 대상에게 앞뒤를 따지지 않고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역사상 어찌나 많은 사례가 있었던지, 제국에서는 그런 대공가를 '응징하는 라카트옐'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자존심 센 다이아나는 아버지 뒤에만 숨어있을 수 없었다.
직접 대공자비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자비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 몰래 이곳을 찾아왔다.
그녀로서는 거의 목숨을 건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들어오십시오.”
당연히 문 앞에서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티어스 대공은 다이아나를 집 안에 들여놓았다.
저택 안은 가끔 드나들었던 황궁보다 더 호화로웠다.
그리고 대공자비의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갔을 때.
다이아나는 겨우 여덟 살 남짓으로 보이는 소녀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너무 작잖아!’
상상 속의 대공자비는 어리지만 엄청난 오오라를 가진 마법사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만난 아리엘은 반짝이는 루비같은 머리카락에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생긴 조그마한 소녀였다.
심하게 놀랐음에도 다이아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드레스를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손이 떨렸다.
“안녕하세요, 대공자비님. 저는 모니카 공작가의 장녀, 다이아나 모니카라고 합니다.”
아리엘은 다이아나가 반가웠다.
자신이 구한 소녀가 궁금하던 차였는데 직접 찾아와주다니.
아리엘은 다이아나가 다친 데는 없는지 살펴보았다.
‘마법이 제대로 작동했었나 봐.’
다이아나는 다친 데 없이 건강해 보였다. 그런데…….
‘잠깐. 모니카 공작가라고?’
아리엘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많이 들어본 가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사교계 데뷔조차 하지 않았던 그녀는 여러 귀족 가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모니카 공작가에 대한 것만은 알고 있었다.
‘루실리온 후작가와 모니카 공작가는 긴밀했으니까.’
두 가문은 협력 가문이었다.
후작은 모니카 공작과 함께 상단 사업을 하면서 공작에게 매우 굽신거렸다.
아리엘이 후작가를 탈출할 때 방문했던 사람도 모니카 공작 부부가 아니던가.
‘그리고…….’
아리엘은 기억해 내버렸다.
희미한 과거의 기억들 중 하나를.
‘다이아나 모니카는 죽었었어.’
생각해보니 바로 이 시기쯤의 일이었다.
모니카 공작 슬하의 외동딸이 마차 사고로 급작스레 죽고, 공작 부부는 슬픔에 빠져 영지로 내려가 버렸다.
그것 때문에 후작이 상당히 성가셔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바꾼 걸까?’
과거 이 시기에 아리엘은 여전히 후작가 다락방에 갇혀있는 신세였다.
그녀와 다이아나의 운명은 전혀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그녀가 다이아나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아리엘은 지금껏 자신에게 미래를 바꿀 만한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달라진 점은 없었다.
자신은 회귀하기 전의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므로.
앞으로도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것 말고 다른 일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죽지 않고 살아있는 다이아나를 눈앞에서 보자 마음에 잔잔한 파도가 쳤다.
‘내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삶도 바꿨어.’
죽을 뻔한 사람을 살렸다.
신분 높은 공녀를 구해서가 아니라 앞길이 창창한 어린 소녀의 목숨을 살렸다는 기쁨이 크게 다가왔다.
“반가워요, 다이아나.”
아리엘은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앞에 선 다이아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갑자기 아리엘의 발치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공자비님,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저희 가문을 대표해서 사죄드립니다.”
네……?!
다짜고짜 무릎을 꿇은 다이아나 때문에 아리엘은 깜짝 놀랐다.
“다이아나?!”
그녀는 다이아나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다이아나는 막무가내였다.
“저를 구하시다가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은인이세요.
저도 공녀로 자라왔기에, 높은 위치에 계신 대공자비님께서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압니다. 정말 감사해요.
대공자비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죽었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이 반드시 은혜를 갚을 테니 가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했다.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이니 제가 대가를 치를게요. 제발 저희 가문을 향한 대공가의 진노를 가라앉혀 주세요.”
아리엘은 다이아나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다 무슨 말이지……?
그 순간 그녀에게 떠오른 것은 루시안의 말이었다.
‘다른 벌레들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마. 네가 구하면 내가 죽여버릴 테니.’
혹시 그게 이런 의미였나?
루시안의 소유물인 자신이 남을 구하다가 다치면,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
아리엘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워졌다.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루시안 것인 것은 맞다.
하지만 눈앞의 소녀를 구한 것은 분명 아리엘 자신의 의지였다.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가를 치르는 건 싫었다.
생각 끝에 아리엘은 입을 열었다.
“다이아나.”
“……네?”
“다이아나를 구하겠다고 선택한 건 나예요. 그러니 다이아나와 모니카 가는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응징하는 라카트옐은…….”
응징하는 라카트옐?
아리엘은 처음 들어보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곧 잊어버렸다.
그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다이아나의 손을 꼭 잡았다.
“마티어스님과 루시안은 좋은 분들이에요.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라카트옐 남자들의 사고방식이 상당히 거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리엘은 마티어스와 루시안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이유 없이 남을 해칠 사람들이 아닌걸.’
사실 아리엘이 모르고 있을 뿐, 라카트옐 남자들은 이유 없이도 쉽게 사람을 해치곤 하는 족속이었다.
다이아나는 당연히 라카트옐이 좋은 사람이라는 아리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악명이 너무 높았다.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한 다이아나의 눈을 보며 아리엘은 결연하게 삐약삐약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잘 말씀드려 볼게요. 이건 내 일이기도 한걸요.”
이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한다는 아리엘의 말에 다이아나는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자선 연회 이후, 대공과 대공자가 새로 들어온 대공자비에게 푹 빠져있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쫙 퍼져 있었다.
그러니 아리엘이 직접 나서준다면 해결이 될 것 같았다.
“대, 대공자비님…….”
목숨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자신을 위해 나서주겠다는 아리엘의 말에 감격한 다이아나는 평소의 도도한 태도를 잃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반드시 이 은혜를 갚을 거야.’
자존심 센 다이아나는 그냥 도움을 받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다.
그녀는 언젠가 이 은혜를 꼭 갚겠다고 다짐했다.
안심한 다이아나는 처음으로 남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평소의 다이아나가 봤다면 ‘세상에, 교양 없게도!’ 하고 외쳤을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겨우 열다섯 소녀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이아나가 울자 아리엘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다가 설렁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아리엘이 알기로 울음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간식을 준비해줘. 제일 달고 맛있는 걸로.”
* * *
“앉아요, 다이아나.”
아리엘은 분홍색 소파에 다이아나를 앉혔다.
테이블에는 동그랗게 썬 생딸기 조각을 띄운 딸기 홍차와 하얀 생크림이 탐스럽게 올라간 큼직한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올려져 있었다.
상큼한 딸기 티를 사이에 둔 두 소녀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
“…….”
레이스로 짠 화사한 티 코스터 위에 놓인 찻잔들은 굳건하게 움직일 줄 몰랐다.
딸기 티가 가득 담긴 찻주전자에서 모락모락 오르는 김을 보고 있던 아리엘은 마침내 입을 뗐다.
“저…… 다이아나. 혹시 사고 때 다친 데는 없나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내리뜨고 있던 다이아나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전혀 없답니다. 대공자비님.”
그리고 다시 대화가 끊겼다.
아리엘은 울상을 감추며 말했다.
“다과를 들까요. 차가 식을 거예요.”
“네……? 네.”
한바탕 울고 난 다이아나는 자신의 수치스럽고 추레한 짓거리에 대해 매우 자책하고 있었다.
찾아올 때의 기백은 다 사라지고 남은 건 발갛게 부은 두 눈두덩이뿐이다.
공녀 체면에 이런 몰골이라니!
훨씬 어린 대공자비님은 저토록 침착하신데.
그 와중에도 몸에 익힌 다도 기술은 완벽해서 다이아나는 기계적으로 우아하게 차를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아리엘은 감탄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팔도 짧고 손가락도 짧은 그녀는 저렇게 우아하게 차를 마셔보지 못했다.
과거 열일곱 살까지 살았다지만, 귀족 영애의 세계에 대해서만큼은 아리엘은 아는 게 없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다이아나는 대단히 기품있는 숙녀로 보였다.
뒤늦게 자신이 자책하느라 무례하게 침묵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다이아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럼…… 마법사이신거죠?”
아리엘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숨기고 싶은 일이었지만 이미 다이아나가 직접 마법을 겪은 이상 솔직한 편이 나았다.
“맞아요. 하지만 잘하지는 못해요. 마법이 완벽했다면, 나도 다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도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걸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꼭 은혜를 갚고 싶어요.”
아리엘은 도리도리 머리를 저었다.
“뭘 바라고 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요. 감사한 일이 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요.”
“…….”
아리엘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그녀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 안달이 난 다이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이아나가 마음에 들었다.
‘무서웠을 텐데 여기까지 직접 찾아 왔으니까.’
심지어 공작 몰래 왔다고 했다.
학대당하던 자신이 집이란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했듯, 집에서 사랑받는 다이아나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에도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만큼 가문과 가족들을 사랑한다는 거겠지.
‘……친해지고 싶어.’
또래 여자아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본 적 없던 아리엘에겐 소녀의 우정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대공저의 사람들이 어울려주고 마티어스도 틈틈이 놀아주고 있었지만, 또래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아리엘은 주저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저는 친구가 없어요. 형제도 오빠밖에 없었고요. 그러니까…….”
아리엘의 얼굴이 빨개졌다.
붉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꽁꽁 숨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다이아나, 저랑 친구 하지 않겠어요?”
다이아나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졌다.
대공자비가 공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건 얼마든지 많았다.
사교계 인맥이 되라고 할 수도 있었고, 수족같이 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고작 친구가 되자고?
계산적이고 철저한 귀족으로 자란 다이아나는 아리엘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이아나에겐 친구가 없었다.
친구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사랑하는 가족 하나면 충분했다.
가문 바깥의 사람들은 모두 적이거나, 동맹 관계일 뿐이었다.
사교계 모임에서 만나는 또래 영애들과는 평판을 위해 적당히 어울려주는 것뿐.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겉으로야 친구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입에 담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소녀 앞에서 어떻게 똑같이 할 수 있을까.
진심을 담아 친구가 되자고 말하는 어리고 사랑스러운 소녀 앞에서.
다이아나는 아리엘이 쉽게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 순수한 그녀의 모습에 더욱더 반해버렸다.
그녀는 울컥하는 심정을 누르며 간신히 대답했다.
“부족한 저를…… 친구로 받아주신다면요.”
아리엘은 활짝 미소지었다.
와, 나한테도 친구가 생겼어!
“친구니까 우리 편하게 말해요, 다이아나.”
책에서 보기로 친구끼리는 서로 높여 부르지 않고 마음으로 존중하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제 신분이 더 낮은데…….”
“하지만 다이아나가 더 숙녀에 가깝잖아요. 저보다 다섯 살이 많으니 제게는 언니인걸요.”
‘언니라고!’
다이아나는 속으로 비명처럼 외쳤다.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외동인 다이아나는 언제나 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나이가 좀 찬 후로는 포기한 바람이었다.
‘친구뿐만 아니라 동생까지 생기는 걸까……?’
사교계의 겉치레가 아닌, 난생처음 만난 순수한 우정에 다이아나의 가슴은 한없이 감동했다.
“그, 그러면…… 아리엘라.”
다이아나가 조심스레 말을 놓자 아리엘이 활짝 미소지었다.
“아리엘이라고 불러줘. 다이아나.”
천진하고 귀여운 아리엘의 미소에 다이아나는 사르르 녹아버렸다.
겉으로는 도도해 보였지만, 다이아나는 귀여운 것에 무척이나 약했다.
다이아나는 아리엘의 손을 살포시 쥐었다.
보라색 머리와 어울리는 그녀의 자안이 불타올랐다.
“나, 언니가 꼭 되어보고 싶었어.”
* * *
당장 소멸시켜도 시원치 않을 모니카 가의 벌레가 제 발로 이곳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루시안은 곧장 아리엘의 방을 찾았다.
그리고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안에서 들리는 소녀들의 재잘거림은 명백히…….
절친끼리의 것이었다.
“하?”
죽이려고 왔더니 감히 먹잇감 따위랑 친해져 있어?
그는 한 번도 발휘해 본 적 없는 인내심이란 것을 영혼의 밑바닥에서 끄집어내야 했다.
“대체 내가 한 말은 어디로 들어먹은 거야.”
루시안은 당장 문고리를 잡아채려고 손을 뻗었다.
그때.
까르르. 안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엘의 것이었다.
“……젠장.”
그는 방으로 들어가 다이아나의 목숨을 거두는 대신 휙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콰직. 쿠궁. 콰지직.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소녀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석조물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다.
* * *
한편 수상쩍게 생각했던 마차 사고의 배후를 들은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니카 공작님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벌인 짓이었다고?’
그래서 외동딸인 다이아나를 해치려고 한 걸까…….
내막을 알게 되었는데도 뭔가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혹시 몰라 다이아나에게 사고 당시의 상황을 물어보았지만 잔뜩 겁에 질려있던 다이아나는 기억나는 게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아리엘은 일단 이 일을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기로 했다.
다행인 일도 있었다.
“친구?”
아리엘의 몸 상태를 물어보러 왔던 마티어스는 뜻밖의 소식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네. 모니카 가의 다이아나 공녀예요.”
“…….”
마티어스는 친구 같은 게 왜 필요한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의 말을 들은 그는 바로 모니카 공작에게 전갈을 보내, 네가 하는 어쭙잖은 보답이나 사죄 따위는 되었다고 단언했다.
마티어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필요 없으니 은혜 갚지 마.’였다.
아리엘은 몰랐지만 마티어스가 공작에게 전한 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는 아리엘의 친정인 후작가와의 관계를 끊으라 명령했다.
사업 자금줄인 공작가의 지원이 끊긴다면 루실리온 후작은 매우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모니카 공작은 대공이 그런 명령을 내린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무 토도 달지 않고 마티어스의 명령을 따랐다.
상황이 정리되자 아리엘은 조심스레 물었다.
“저, 마티어스님. 제 친구 다이아나가 이 집으로 놀러와도 될까요?”
그 말을 들은 마티어스가 얼굴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싫으신가……?
아리엘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안 되나요?”
마티어스의 침묵이 길어지자 노집사 알렌은 눈치를 살피며 끼어들 틈을 보았다.
그는 외부인이 라카트옐 저에 들어오는 것에 마티어스가 얼마나 민감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기 마님에게 처음으로 생긴 친구인만큼, 알렌은 자신이라도 나서서 허락을 구해볼 생각이었다.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차에 마티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놀러와도 된다. 하녀장에게도 말해놓지.”
마티어스의 허락에 아리엘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정작 그 말을 듣고 정말로 놀란 것은 알렌이었다.
‘큰 주인님이 외부인 출입을 허락하셨어?!’
“감사해요, 마티어스님.”
아리엘은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녀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마티어스가 뒤이어 작게 중얼거린 말도 거의 듣지 못했다.
“흠, 인간 어린아이의 정서엔 친구가 좋다고 했으니까.”
“네?”
“……그냥 혼잣말이다.”
그렇구나. 아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친구를 초대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배시시 웃었다.
아리엘이 미처 듣지 못한 마티어스의 혼잣말을 들은 알렌의 얼굴엔 주름진 미소가 가득 번졌다.
‘세상에. 얼마 전에 하녀장 수잔을 불러 한참 뭔가를 물어보시더니 저런 이야기였나.’
그렇게 다이아나는 제국에서 유일하게 아리엘의 병문안을 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 * *
다이아나라는 새 친구가 생긴 후에도 아리엘의 일상은 평온하게 굴러갔다.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아리엘의 요즘 최대 고민거리는 바로 약 먹기였다.
아리엘이 마나를 폭발시키고 심하게 아팠던 이후, 브루노어는 매일같이 찾아와 직접 약을 챙겨주었다.
처음에는 체력을 보충해주는 약만 주었는데, 아리엘이 조금 기력을 회복한 후에는 마나를 길들이는데 도움을 주는 약이라면서 몇 가지를 더 먹였다.
대체 이 약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리엘은 그저 쓰디쓴 약을 먹는 게 고되기만 했다.
그리고 그 고된 시간에 늘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었다.
“꼬맹이. 약.”
바로 루시안이었다.
“…….”
아리엘은 약 먹기 싫단 말도 못하고 눈만 도르륵 굴렸다.
조그만 미간이 심각하게 찌푸려졌다.
루시안은 얼굴에 ‘먹기 싫어요’가 쓰여 있는 아리엘을 보며 삐딱하게 웃었다.
“그럼 레몬 샤베트는?”
“와, 먹을래요!”
낚시에 답삭 걸리는 아리엘을 루시안은 월척처럼 건져 올렸다.
“약 먹으면 주지.”
“으…….”
아리엘은 시무룩해졌다.
곱게 간 얼음에 상큼한 과일즙을 섞은 뒤 차가운 우유와 꿀을 한 스푼 더한 샤베트는 정말 신기한 디저트였다.
마법 외에는 얼음을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얼음의 가격은 같은 무게의 은 가격과 비슷했다.
얼음을 보관하겠다고 사시사철 마법사를 쓸 여력이 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황궁과 대공가 정도일까?
나머지 귀족들은 황제가 얼음을 내려주면 조금씩 맛보는 정도였다.
당연히 과거의 아리엘도 얼음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공가에 온 뒤, 봄이 되자 종종 그녀의 간식에 샤베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얼음 디저트를 처음 맛본 아리엘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그 새콤한 맛에 홀딱 반해버렸다.
수잔과 하녀들은 그런 그녀를 매우 귀여워하며 자주 만들어주었다.
아삭거리는 백도를 얹은 복숭아 샤베트와 꿀과 어우러져 상큼 달콤한 레몬 샤베트는 아리엘이 제일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약을 먹지 않으면 못 먹는다니!
아리엘은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협박하시는 거예요?”
루시안이 서늘하게 위협했다.
“잊었나? 내가 네 남편인 동안은 내 명령을 듣기로 한 거.”
그래, 계약에서의 '을'이 무슨 힘이 있겠어.
할 수 없이 아리엘은 눈을 꼭 감고 끈적한 물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으윽. 써.
희고 조그마한 얼굴이 오만상으로 찌푸려졌다.
이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쓴맛이 아니잖아.
시거나 달거나 다른 맛이 좀 날 법도 한데 이 약들은 오로지 쓰기만 했다.
루시안은 아리엘이 잔뜩 찡그린 얼굴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 턱을 괴고 입매를 끌어올렸다.
이건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단 말이야.
아리엘은 약을 꿀꺽 삼킨 뒤 허둥지둥 고약한 맛을 지워줄 달콤한 것을 찾았다.
약을 먹을 때마다 수잔이 하나씩 꺼내주는 사탕이 그득 담긴 유리병이 책장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리엘은 얼른 달려가 유리병으로 손을 뻗었다.
앗, 손이 안 닿아.
아리엘은 바둥거리며 사탕을 향해 짧은 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발돋움을 끝까지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때 그녀의 뒤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리엘의 손이 닿지 않던 사탕병을 손쉽게 거머쥔 루시안이 사탕병을 허공으로 휙 들어 올렸다.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줄까?”
이거 약 올리는 건가요?
쓴맛 때문에 아리엘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빨리 주세요.”
아리엘이 다급하게 손짓을 하자 루시안이 흐음 소리를 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나한테 매달리면 무슨 기분이 드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그는 툭 말을 던졌다.
“손.”
얼결에 아리엘이 한 손을 내밀자, 루시안이 이맛살을 좁혔다.
“두 손.”
아리엘이 조그만 양손을 붙여서 내밀었다.
루시안은 무신경하게 사탕을 한 주먹 꺼내서 아리엘의 손 위에 와르르 쏟아놓았다.
아리엘은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어어, 나 이렇게 많이 먹어도 되나?
이거 원래 수잔이 딱 하나씩만 주는 건데.
고민하고 있는데, 루시안이 두 손 가득 사탕을 쥐고 있는 아리엘의 손에서 사탕 하나를 집었다.
그의 붉은 입술 속으로 달콤한 것이 사라졌다.
하나를 더 집은 그가 아리엘의 입술 앞에 사탕을 가져다 댔다.
그리곤 협박하는 것처럼 말했다.
“아.”
에잇 모르겠다. 아리엘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아.”
그녀의 입안에 사탕이 도르륵 떨어졌다.
오물오물 사탕을 입에서 굴리자 약의 쓴맛이 금세 달아났다.
휴, 이제 좀 살겠네.
아리엘이 금단의 사탕을 다 먹어치우는 동안 루시안은 벽에 반쯤 기대 누워 아리엘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며 가지고 놀았다.
루시안의 집게손가락이 아리엘의 조그만 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새끼 고양이 발바닥을 누르는 듯한 동작이었다.
한참 만지작거리던 그가 불쑥 말했다.
“인간 애들은 다 이런가? 이렇게 말랑거리고, 부드럽고.”
너도 인간 애거든요, 루시안.
대답할 말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사탕을 입안 가득 물고 있는 아리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긴, 같은 인간 애라지만 루시안은 벌써부터 아이 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의 흰 손등에 도드라진 핏줄이나 힘을 줄 때 드러나는 잔근육들은 그가 남자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러고 보니…… 난 성년이 지난 루시안의 모습도 봤었지.
완연한 남자가 된 루시안은 지금처럼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때의 그는 지금보다도 훨씬 위험하고, 잔인한 눈을 하고 있었다.
신이 내려준 저 미색이 잔혹함과 광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십 수명의 자기편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도 건조하고 싸늘하기만 했던 시선이 떠올랐다.
그와 마주했던 아리엘은, 그 안에 숨겨진 지극히 고독하고 오만한 짐승을 훔쳐본 듯 오싹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처음 만난 그의 손을 잡았는지도.’
아리엘 또한 당시에 그랬으니까.
그녀는 외로웠고,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감정이랄만한 것은 다 메말라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과 닮은 그의 모습에 이끌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리엘은 이제 알고 있었다.
과거의 조우에서 그녀의 후드를 벗긴 루시안이 멈칫했던 게, 그녀가 이상하게 생겨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아리엘은 방만하게 늘어진 자세로 기댄 루시안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있잖아요, 루시안.”
그가 말없이 긴 속눈썹만 치떠 시선을 맞추었다. 왜 부르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정말로 예뻐요?”
루시안이 까칠함이 묻어나오는 턱짓을 했다.
“왜 그걸 나에게 묻지?”
아리엘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음, 왠지 루시안은 진짜로 솔직하게 답해줄 것 같아서요.”
“…….”
루시안은 묘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그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에겐 가장 아름다운 사람과 가장 추한 사람이 똑같았다.
인간을 미물인 개미로 비유한다면, 그의 존재는 사자였다.
개미는 개미들 중에서 아름다운 개체와 그렇지 않은 개체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자가 개미를 본다면?
사자에게는 아름다운 개미가 의미가 없다.
루시안의 경우도 비슷했다.
우월한 존재인 그는 하등한 인간의 미추를 판단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외양이 보통 사람들에게 몹시 매혹적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피는 그를 지상의 어떤 인간보다 뛰어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결국 그에게 인간의 외모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아리엘만은…….
“넌 예뻐.”
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아리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정말요?”
“그래.”
아리엘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루시안이 이상하다는 듯 비스듬하게 턱을 기울였다.
“내가 널 예쁘다고 하는데 왜 좋아하지?”
그렇게 당연한 걸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잖아요, 루시안.
예쁘다고 하는데 싫은 사람도 있나요?
루시안의 눈 안에 싸늘한 어두움이 깔렸다.
“넌 무서워해야지. 겁을 내도 좋아. 내가 너한테 관심이 생기는 건 네게 좋은 일이 아니니까.”
“어, 어째서요?”
그가 조소하듯 쿡 웃고 내뱉었다.
“라카트옐에게는 심장이 없거든.”
“……?”
아리엘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서 루시안의 가슴에 귀를 대어보았다.
“소리가 나는데요?”
그것도 쿵쿵. 예쁜 소리가.
루시안의 손이 올라와 아리엘의 스칼렛 레드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심장 말고, 다른 거야.”
말한 그가 아리엘의 머리를 제 가슴팍에 눌러 안으며 낮게 말했다.
“그러니까 아리엘라. 네가 똑똑하다면 너는 나한테서 도망칠 궁리를 해야 해. 물론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진 않겠지만 말이야.”
아리엘은 버둥거리며 루시안의 손을 벗어났다.
그리고 앳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도망, 안 가요!”
“뭐?”
“심장이 없어도 루시안 곁에 있을 거예요.”
아리엘은 위험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는 루시안에게 말했다.
“난 루시안의 마법사잖아요.”
“…….”
그녀를 집어삼킬 듯 바라보던 루시안이 낮게 신음하며 자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넌 정말…….”
“루시안? ……앗!”
그가 아리엘의 머리에도 손을 뻗어서 마구 헝클어놓았다.
뭐 하는 짓이에요. 기껏 좋은 말을 해줬더니!
아리엘은 속으로만 씩씩거리며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수잔이 예쁘게 묶어준 리본을 걱정하며 거울로 달려가는 그녀를 보던 루시안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위험한데.”
* * *
첫 방문 이후로 다이아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리엘의 병문안을 왔다.
마법약 덕분에 아리엘의 회복이 빨라서, 병문안이라기보다는 놀러 온 것에 가까웠다.
때마침 오늘은 헬렌의 의상실에서 보낸 드레스가 도착한 참이었다.
아리엘의 드레스와 장식들을 본 다이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다 유행하는 것들인데 질리지 않게 세련됐네. 잘 맞췄다, 아리엘!”
다이아나는 아리엘에게 요즘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아이템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진주줄에 카메오 장식 목걸이는 계속 유행 중이야. 진주의 품질에 따라서 가격이 확 달라지지. 치맛단 주름은 리본 주름에서 3단 주름으로 바뀌는 추세고.”
헬렌에게 의상의 기본에 대해 배웠던 아리엘은 다이아나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헬렌에게 들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옷을 만드는 사람과 입는 사람의 관점 차이겠지?’
“얼른 입어 봐. 드레스는 입어 봐야 안단 말이야.”
다이아나가 상자를 열고 드레스를 감싼 보드라운 흰 천을 걷어내 주었다.
아리엘은 다이아나의 성화에 못 이겨 드레스를 하나씩 입어보았다.
앙증맞은 드레스를 입은 아리엘을 본 다이아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정말이지 너무 귀여워!’
꼭 안아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다이아나는 덕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너무 예뻐. 이대로 초상화 그려놓고 싶다, 아리엘.”
내 방에 크게 걸어놓게.
아리엘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다이아나의 눈빛은 진심 같았다.
내가 정말…… 예쁜가?
그녀는 거울로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해주는 연한 청록색 드레스가 거울을 통해 보였다.
광택이 없는 소재로 보아 무도회용이 아니라 실내 티파티용 드레스임을 알 수 있었다.
스스로의 모습을 본 아리엘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예쁘다…….’
드레스가 마음에 쏙 들었다. 헬렌의 솜씨는 정말 엄청났다.
너무 마른 아리엘의 몸을 패티코트나 다른 것으로 보완하지 않고 가녀림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디자인했다.
그래서인지 마른 몸이 볼품없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보석 장식이며 치마 주름도 아리엘의 외모를 고려하지 않은 게 없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한참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리엘에게 다이아나가 황홀한 시선을 던졌다.
‘역시 귀여운 게 제일이지. 최고야! 짜릿해!’
다이아나의 덕질 라이프는 이제 시작이었다.
* * *
몸이 어느정도 회복되자 아리엘은 방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다시 다이닝 홀에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매끼 마다 고기 식단이 올라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마티어스는 아리엘이 고기를 먹지 않아서 약하고 조그맣다는 결론을 내린 듯했다.
오늘 저녁 메뉴도 황금빛으로 익힌 거대한 양다리 로스트와 버터 빵이었다.
평소처럼 마티어스와 함께 식사를 하는 건 기분 좋았다.
하지만 보통 때와는 달리 조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아리엘은 음식을 점검하고 시중을 드는 집사 알렌에게 물어보았다.
“루시안은 안 오나요?”
알렌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대공자님께서는 방에서 따로 드시겠답니다.”
“네에…….”
아리엘의 시무룩한 얼굴을 걱정으로 해석했는지 알렌이 덧붙였다.
“늘 그렇게 해오셨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데.
아리엘은 루시안이 집으로 돌아와서까지 혼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게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물론 루시안 자신은 그렇게 생각할 것 같지 않지만.
‘한번 말해볼까? 같이 저녁 먹자고.’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엘은 야들야들한 양고기 조각을 쏙 입에 넣었다.
식사를 마친 뒤 아리엘은 루시안의 방으로 찾아갔다.
거대한 두 쪽 문 앞에서 망설이던 그녀는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저절로 난폭하게 홱 열렸다.
“……?!”
저번에 마티어스님 방에 갔을 때에도 이랬는데.
문이 어떻게 저절로 열리는 거야?
아리엘은 안으로 들어가며 루시안에게 말했다.
“문이 갑자기 열렸어요, 루시안.”
“내가 열었어.”
“손도 안 대고요?”
루시안이 손끝을 가볍게 튕겨 문을 다시 닫았다.
오만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드 마나가 있는데 왜 직접 손을 써?”
아하. 소드 마나로 여는 거구나.
검에 두르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건가?
하긴 그냥 마나로도 물건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무슨 일로 왔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루시안이 아리엘에게 몸을 굽혔다.
그리고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쥐고 얼굴로 가까이 가져갔다. 입을 맞추려는 것처럼.
다음 순간 그의 그림 같은 입매가 서늘하게 말했다.
“온몸에 버터 냄새는 잔뜩 묻혀 가지고.”
“……!”
아리엘은 빨개진 얼굴로 얼른 루시안의 손에서 머리카락을 빼앗았다.
어떡해. 저녁 식사로 나온 버터 빵 때문인가 봐.
버터를 큰 조각째로 뜨거운 빵 사이에 넣으면 버터가 녹으면서 빵 전체로 퍼지는데, 식기 전에 먹으면 황홀함을 맛볼 수 있었다.
그걸 먹느라 또 여기저기 묻힌 걸까?
아리엘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에 감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여기 오기 전에 손과 얼굴은 깨끗이 씻고 왔으니 버터 향기가 난다면 머리뿐일 텐데, 머리에서도 버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루시안이 삐딱하게 웃었다.
“난 감각이 뛰어나거든.”
그렇게 말한 그는 아리엘을 달랑 들어다가 침대 언저리에 던져놓았다.
그리곤 책상에 흐트러진 자세로 걸터앉아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밤에 돌아다니다니. 꼬맹이가 밤에 다니면 위험하다는 얘기도 못 들었나?”
“꼬, 꼬맹이 아니라구요.”
아리엘은 어쩐지 발끈해서 얼른 대꾸했다.
말하고 보니 민망해서 다른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여긴 집인데…… 위험할 게 뭐가 있어요?”
루시안이 험악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있잖아.”
“……?”
고개를 갸웃한 아리엘이 둥근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루시안이 나한테 왜 위험해요?”
“…….”
짧게 침묵한 루시안은 그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고 물었다.
“용건은?”
아리엘은 이제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짝 쳤다.
“맞다. 저녁 먹었어요, 루시안?”
“대강.”
“왜 다이닝 홀에서 나랑 같이 안 먹어요?”
루시안이 눈썹을 느리게 치켜세웠다.
“네가 마티어스랑 먹잖아.”
“루시안도 와서 같이 먹으면 되죠.”
그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비쳤다.
조각 같은 얼굴에 싸늘함이 내려앉았다.
“나더러 마티어스 자식과 한 상에 앉으라는 건가?”
정상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어도…… 아빠한테 이 자식 저 자식 하다니.
패륜아 같아요, 루시안.
“그, 그냥 밥만 먹는 건데도요?”
그가 서릿발같이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싫어.”
이럴 줄은 알았지만…… 아리엘은 아쉬움을 감추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냥 네가 나랑 먹어.”
“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루시안이 새파랗게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요염하게 말했다.
“마티어스 버리고 나한테 와서 저녁 먹으라고.”
당황한 아리엘이 ‘그건…….’ 이라고 더듬거리자 그의 조각같은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왜. 싫어?”
그가 웃음을 거뒀을 뿐인데 등골이 오싹해졌다.
두려움을 느낀 아리엘은 재빨리 대답했다.
“아뇨!”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하지만 저는 두 사람이랑 다 같이 먹고 싶은걸요.”
“안 돼.”
루시안이 더 볼 것도 없단 듯 단칼에 잘라냈다.
“……안 돼요?”
“안 돼. 난 내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아.”
아리엘은 큰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며 “정말 안 돼요?” 다시 한번 물었다.
루시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안 돼.”
안 되는 거네.
그럼 내가 루시안이랑 저녁을 먹으면 마티어스님은 혼자가 되는 건가?
반대로 마티어스님과 먹으면 루시안이 혼자가 되고?
아 뭐야 잘 모르겠어. 복잡해.
도대체 어쩌다가 제가 사이 나쁜 아빠와 아들 사이에 껴버리게 된 거죠?
아리엘은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아리엘이 고민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루시안은 그녀를 휙 집어 들어 방 밖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내일부터다.”
탁. 문이 닫혔다.
* * *
다음 날 저녁 식사 시간.
다이닝 홀의 문이 쾅 거세게 열렸다.
기세를 가두지 않고 쳐들어온 루시안 때문에 안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알렌이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루시안은 척척 걸어들어와 마티어스 옆자리에 있는 아리엘을 휙 들어 올렸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내 걸 납치하다니. 죽고 싶나, 마티어스?”
루시안 진짜 화났나 봐!
아리엘은 허공에 매달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은 서로를 노려보며 멈춰있었다.
일의 사단은 아까 마주친 마티어스였다.
마티어스와 마주친 아리엘은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하지 못할 것 같다고 알렸다.
그러자, 조용히 듣고 있던 마티어스가 입을 떼었다.
“그 녀석이 시켰구나.”
어……
반은 맞고 반은 아니었다.
루시안이 시킨 거긴 하지만, 아리엘도 루시안이 집에 있는 짧은 며칠 동안 그가 혼자 식사를 하는 건 바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마티어스는 아리엘이 미처 뭐라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아주 안정적으로.
무뚝뚝한 마티어스의 목소리에 루시안의 느낌과 비슷한 오만함이 묻어났다.
“데려갈 수 있다면 직접 와서 데려가라고 해라.”
그대로 아리엘은 자기 집에서 납치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라카트옐 전(戰)이 펼쳐진 것이다.
‘엄청난 압박감.’
방금까지 편안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한 공간에 라카트옐이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났을 뿐인데.
아리엘은 두 라카트옐 남자가 한 공간에 있는 광경을 처음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로따로 봤을 땐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하나도 안 닮은 것 같아. 둘 다 무서워.’
그녀 앞에서는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이렇게까지 날을 세운 적이 없어서 그동안 잊고 있었다.
이 남자들이 대륙의 수호자. 피와 광기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러운 라카트옐 가의 혈통이라는 것을.
아리엘은 소리없이 눈만 도르르르 굴렸다.
안주인으로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풀어야 했다.
‘마티어스님은 점잖으시니까 루시안을 달래는 게 낫겠지?’
생각을 끝낸 아리엘은 허공에 매달린 채로 조심스럽게 루시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루시안, 루시안.”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여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루시안의 시선이 잠시 아리엘에게 향했다.
매달려 있는 자신의 상황을 어필하고 싶었지만, 그녀를 내려놓으면 바로 둘이 검을 뽑을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아리엘은 조그맣게 말했다.
“밥부터 먹고 얘기하면 안 돼요? 나 배고픈데.”
순간 루시안의 표정이 어이없다는 빛을 담았다.
“넌 지금…….”
그래요. 저도 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요.
이 상황에 밥 타령이라니.
하지만 밥이라도 안 먹으면 싸울 거잖아요. 흑흑.
한참동안 마티어스를 싸늘하게 노려본 루시안이 아리엘을 의자에 툭 내려놓았다.
곧장 나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맞은편 의자를 거칠게 빼고 앉았다.
“밥 먹어.”
아리엘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루시안이 윽박지르듯 말했다.
“나와의 약속을 한 번 더 어길 셈이야?”
“아니에요. 먹을게요.”
아리엘은 빠르게 순응했다.
먹고 체하더라도, 먹어야지.
루시안이 기세를 누르자 정신을 차린 알렌이 다급히 루시안 몫의 음식도 준비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알렌은 지금 혼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무려 14년 만에 처음으로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이 겸상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십몇 년 동안 애를 써도 안 됐던 일이, 아기 마님 들어오신 지 백 일만에 이뤄졌다.
‘이건 기적이야.’
그는 이 일을 이뤄낸 아기 마님을 영웅 보듯이 바라보았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라카트옐 가의 식사가 시작되었다.
오늘 저녁은 살짝 볶은 아스파라거스와 향이 무척 좋은 버섯 가니쉬를 곁들인 쇠고기 스테이크였다.
레드 와인을 끓여 만든 소스를 끼얹어서 고기가 속까지 촉촉했다.
하지만 스테이크를 받은 루시안은 흘긋 들여다보고는 접시를 내던지며 말했다.
“내 스테이크는 레어로 다시 해와. 최대한 덜 익혀서.”
“예, 대공자님.”
알렌이 서둘러 스테이크 접시를 거두어갔다.
루시안은 그동안 럼(술의 일종)이 들어가지 않은 에그노그로 식전주를 삼았다.
겉만 그을려 익힌 쇠고기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살벌하게 써는 루시안의 얼굴을 아리엘은 살금살금 훔쳐보았다.
‘식성이 마티어스님과 극과 극이네.’
마티어스는 모든 고기를 익스트림 웰던으로 먹었다.
고기에 조금이라도 핏기가 남아있으면 돌려보냈다.
고기를 거의 익히지 않고 먹는 루시안의 취향과는 완전히 달랐다.
“…….”
“…….”
화기애애해야 할 가족의 식탁에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아리엘은 속에서 얹힐 것 같은 기분으로 소고기를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었다.
‘정말 사이가 안 좋나 봐. 둘 다 이렇게 냉기를 풍기는 건 처음이야.’
내가 괜히 루시안한테 같이 밥을 먹자고 했던 걸까?
아리엘은 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얼굴 대신 그들의 접시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 근데…….’
아리엘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두 사람의 접시를 살폈다.
두 접시 다 고기는 차근차근 성실하게 줄어가고 있는데 유독 한 가지만은 전혀 줄어들고 있지 않았다.
‘당근.’
깨물면 달콤한 맛이 물씬 나는 당근 조각들이 포크에 계속 밀려서 접시 가장자리로 모여있었다.
‘둘 다 당근 골라내고 있네?’
마티어스와만 식사하면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둘 다 보니까 알겠다.
“저기.”
아리엘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두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당근 안 드세요?”
그때였다. 마티어스와 루시안이 동시에 입을 연 것은.
“난 당근 못 먹어.”
“난 당근 안 먹어.”
그리고 긴 침묵이 다이닝 홀을 채웠다.
“…….”
아리엘은 풋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역시 둘은 부자(父子)인가봐.
이런 면에서 닮은 점이 있다니.
‘귀여워라.’
방금까지만 해도 분위기 때문에 체할 것 같았는데, 밥맛이 돌아왔다.
아깐 아무 맛도 나지 않던 소고기가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아리엘은 한층 더 굳어버린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얌얌 맛있게 식사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1권 끝.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