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마님, 내일부터는 저택을 차근차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실까요?”
마티어스의 집무실을 나서자 노집사 알렌이 정중하게 물어왔다.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를 받지 않고 혼자 구경하며 돌아다니면 저택이 너무 거대해서 길을 잃어버릴 게 분명했다.
대공자비가 자기 집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건 너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게다가 어차피 이 집에서 7년을 지내야 하니 하루라도 빨리 저택에 대해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알겠어요. 잘 부탁드려요, 알렌.”
아리엘이 수줍게 미소지으며 말하자 내내 정중하기만 하던 알렌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예, 마님.”
알렌과 헤어진 아리엘은 수잔과 함께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꽤나 길었는데, 지루하지 않게 수잔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알렌 영감님네 집안은 몇 대째 대공가 일을 맡고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래 전부터 라카트옐 가문을 모셨답니다.”
“와아…… 엄청나네요.”
“대공자님께서도 유일하게 알렌 영감님의 시중만을 받아들이셨지요.”
그랬구나.
아리엘은 새삼 노집사 알렌이 존경스러워졌다.
오랜 시간 한 가문에 충성하는 것도 대단했지만 그 루시안의 신뢰를 얻었다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참, 아까 대공자님을 이름으로 부르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루시안이라고 부른 거요? 어째서요?”
수잔이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대공자님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아주 싫어하시거든요. 대공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분을 이름으로 부르지 못한답니다.”
어라? 하지만 루시안이 나한테는 직접 그렇게 부르라고…….
의외의 사실에 놀란 아리엘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알렌 영감님도 대공자님을 그냥 공자님, 하고 부르지요.”
“그렇군요.”
아리엘은 이유를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이 자기 이름으로 불리는 걸 싫어하는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찌 된 일인지 그녀에게만은 오히려 이름으로 부르라고 시켰지만.
방이 가까워졌는지 수잔이 들뜬 목소리를 냈다.
“아기 마님 방을 꾸미면서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요. 대공자님께 개괄적인 걸 듣긴 했지만 어떻게 장식할지는 다 제가 정했답니다.”
본인의 방도 아닌데 자기 일처럼 정성을 쏟고 기뻐해 주는 수잔의 모습은 아리엘의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난 수잔이 해주는 거라면…… 다 좋아요.”
“어머나.”
수잔이 감동받은 듯이 미소지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더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싶어지는 걸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이윽고 수잔이 어느 방 앞에 멈춰섰다.
루시안의 방처럼 키가 높은 두 쪽 문이 있는 방이었다.
문에는 하얀 바탕에 연한 분홍빛의 문양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밖에서 보아도 어린 소녀의 방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문이었다.
하지만 초콜릿 모양으로 음각된 문의 테두리 선은 금빛으로 칠해져 대공자비다운 기품을 더했다.
“자, 들어가 보세요.”
수잔이 아리엘 앞에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
방 안을 본 아리엘은 문턱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다.
스트로베리색 눈동자가 둥그렇게 잔뜩 커진 것만 그녀가 놀랐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너무 예쁘다.’
안쪽 전체는 꼭 어느 나라 공주님의 방처럼 아기자기하고 소녀스러운 풍으로 꾸며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방 제일 안쪽에 있는 커다란 호박 마차 모양의 침대였다.
따스한 핑크색의 몸체와 눈부시게 하얀 바퀴, 그리고 꿈결 같은 문양이 조각된 옆면.
침대 안쪽에는 크림색의 침구와 연분홍빛의 쿠션들이 보기만 해도 폭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내 방이에요?”
아리엘은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닥에는 거대한 둥그런 러그가 깔려있었다.
무척 부드러운 털로 만들어져서 그 위에서 잠이 들어도 될 것 같았다.
핑크빛 자기로 테두리를 두른 전신 거울이 살짝 위로 기울어져 방 전체를 밝히는 천장의 샹들리에를 비추었다.
아리엘이 쓸 수 있는 높이의 커다란 책상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도자기 갓이 씌워진 금 촛대와 하얀 석고로 만들어진 조그만 아기 천사 모양 장식이 놓여있었다.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아리엘의 말에 수잔이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껏 뒹굴 수 있을 만큼 넓은 소파는 핑크톤의 벨벳 소재였고 윗부분은 세밀하게 짜인 레이스 덮개로 덮여 있었다.
낮잠을 자는 데이 베드에는 천막 모양의 레이스 캐노피가 아늑하게 쳐져있어서 햇볕이 비쳐 들어오는 낮에도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옆, 천장에서부터 줄로 매달린 둥근 의자는 사랑스럽고 안락해 보였다.
하지만 역시 가장 놀라운 건 창문이었다. 창문으로 다가간 아리엘은 크게 발돋움을 해 창을 열어보았다.
“와아.”
접이식으로 되어 있는 4단 유리 창문 바깥으로 정원의 모습이 환히 내려다보였다.
아리엘은 이렇게 커다란 창문이 있는 방을 항상 소망했었다.
달콤한 햇빛과 바람이 가득 들어오는…….
갇혀있던 후작가의 다락방에는 먼지가 가득 끼어 어두침침한 데다 안에서 열 수도 없는 손바닥만한 쪽창뿐이었다.
‘진짜가 아닌 것 같아.’
햇빛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란 아리엘의 창백한 뺨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볕과 바람을 받아 발갛게 물들었다.
* * *
아리엘은 넋을 잃은 채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이곳은 아리엘이 아홉 살까지 살았던 다락방과는 아주 달랐다.
그녀의 다락방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곳이었다.
특히 지금 같은 겨울은 정말로 나기 힘들었다.
침대나 따뜻한 침구도 없이 낡은 누더기나 버리는 이불만 던져줘서, 그것만 덮고 오들오들 떨며 겨울밤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아리엘이 마법으로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없었다면 진즉 얼어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아리엘의 기준에 수잔이 보여준 그녀의 방은 황궁에나 있을 법한 너무나 좋은 방이었다.
“정말…… 기뻐요.”
아리엘은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좋은 방에서 지내게 되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
아리엘의 말을 들은 수잔은 애잔한 표정을 했다.
앞에 있는 어린 소녀가 이런 걸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눈에 빤히 보였다.
게다가 친아버지한테 학대까지 당했으니.
수잔은 그런 곳에서도 저렇게 사랑스럽게 자란 아리엘이 한없이 가엾고 기특하게 느껴졌다.
“마음에 드세요?”
아리엘은 양팔을 하늘로 뻗어 원을 그리며 외쳤다.
“네! 엄청, 엄청요.”
후작가에 살 때 아리엘에게 그녀만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가장 말단 하녀도 자신만의 하녀복이 있고, 제롬의 사냥개들도 자기만의 밥그릇이 있는데 아리엘에겐 없었다.
그녀는 하인들이 다 퍼가고 남은 음식이나, 체구가 작은 하녀의 옷 중 버려질 만한 것들만 받았다.
후작 영애로서는 상상도 못할 대우였다.
심지어 살고있던 다락방조차 원래는 쓸데없이 자리를 차지하는 서적을 치워놓기 위한 장소였다.
그런데 대공가에서는 달랐다.
그녀만을 위한 옷, 그녀만을 위한 음식, 그녀만을 위한 공간.
아리엘은 공주님 방같이 예쁜 장식들보다, 이 모든 게 그녀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에 감동했다.
아마 그녀는 이 방에 소박한 침대와 책상 하나만 놓여있었어도 기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방은 너무나 예쁘기까지 했다.
“분홍색이…… 정말 많아요.”
아리엘은 분홍색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했다.
분홍색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낡은 것, 더러운 것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색깔이니까.
그녀는 폭신한 것도 좋아했다.
엄마의 품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리엘에게 폭신한 것은 무작정 다정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아리엘은 폭신한 슬리퍼를 신으면 슬리퍼가 그녀에게 다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푹신한 침대에 누우면 침대가 다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집의 침대는 나에게 다정해. 이불도 나에게 다정해.
아리엘은 다정한 것들이 정말 좋았다.
온통 분홍빛에 폭신한 것 뿐인 이 방도,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수잔도.
수잔이 상냥하게 설명했다.
“바로 옆옆 방은 제 방이랍니다. 저기에 있는 저 설렁줄을 당기면 제가 달려올 거예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세요. 아셨지요?”
“알겠어요, 수잔.”
붉은 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신뢰를 담아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수잔은 나지막한 탄식을 삼켰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그녀는 아리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럼 우리 다음 일정을 해치워 볼까요?”
“무슨 일인데요?”
아리엘이 둥근 눈을 맑게 뜨고 물었다.
“내일부터는 아기 마님이 집 안을 지나다니시는 걸 모든 사용인들이 보게 될 테니, 조금 더 단정하게 꾸며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말한 수잔은 대공가 전용 미용 하녀를 불러서 아리엘의 머리 길이를 다듬게 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예뻤지만, 너무 길어서 조금 거추장스러웠던 것이다.
미용 하녀가 아리엘의 명치 부근까지 머리를 잘라주었다.
수잔은 그 정도가 딱 예쁘다고 생각해서 멈추게 했다.
“이 정도 길이면 어떤 머리 모양을 해도 귀엽겠어요.”
하녀를 보낸 뒤 수잔은 아리엘을 작은 의자에 앉혀놓고 머리 모양을 만들었다.
낮게 양갈래로 묶거나, 애기 잔머리만 남겨두고 한 갈래로 높이 묶어 리본을 매는 것 모두 예뻤다.
반 묶음이나 링링머리, 올림머리를 해도 귀엽겠지!
여자아이를 돌보는 게 십수년 만인 수잔은 머릿속에 수십 가지의 여자아이의 머리 모양을 떠올리며 즐겁게 미소지었다.
이 집에 어린 사람이라고는 루시안이 전부였는데…… 그나마 루시안은 처음부터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위압적인 상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귀여운 분이 들어오다니.
커다랗고 예쁜 루비가 심장에 와서 꼭 안긴 기분이었다.
한편 아리엘은 누군가가 부드럽게 머리를 만져주는 느낌이 좋아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사락. 사라락.
머리카락이 당기지 않도록 살살 빗어 내리는 작고 규칙적인 소음들.
그리고 제 뒤통수를 어루만져 주는 따뜻한 손길.
아리엘은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누군가가 이렇게 머리를 만져준다면 이렇게 좋은 방이 아니라, 다시 다락방에 돌아간대도 좋아.
이 순간, 아리엘의 마음속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방이 하나 생겼다.
그 방 안에 아리엘은 자신의 마음을 넣어 꼭꼭 감춰두었다.
새로 생긴 방의 이름은 '수잔'이었다.
* * *
다음날 아침.
아리엘은 호박마차 침대 위에서 깨어나 눈을 비볐다.
“하암.”
잠시 몸을 일으켰다가 이불 안이 따뜻해서 다시 기어들어갔다.
이불을 푹 덮고 침대 천장을 바라보자 부드러운 색감으로 그려진 별자리 지도가 보였다.
“까만 양자리, 눈 덮인 산자리, 쌍둥이 석궁 자리…….”
조그만 손가락을 쭉 뻗어 별자리 지도를 따라가던 아리엘의 뱃속에서 꼬르륵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아리엘은 끙차 몸을 일으켜서 겁먹은 손으로 조심스레 설렁줄을 당겨보았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두근두근 긴장되는 마음으로 줄을 보고 있는데 수잔이 방으로 들어왔다.
“일어나셨네요.”
수잔이 아리엘에게 다가와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아기 마님, 잘 주무셨어요?”
“잘 잤어요. 수잔은요?”
“저도 잘 잤지요.”
노래 부르듯 말한 수잔이 부지런히 아리엘 방의 창문 커튼들을 걷어 고정하고 아리엘을 식탁에 앉혀주었다.
아침 식사는 어린 민트잎을 얹은 크림수프와 설탕에 졸인 밤이 콕콕 박힌 빵이었다.
아리엘이 식사를 마치자 수잔은 아기를 대하듯 입 주변을 닦아주었다.
“다 드셨네요. 장해라.”
아리엘은 수줍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맛난 음식만 먹었을 뿐인데 칭찬을 들었다.
후작가에서는 남기면 아주 배가 불렀냐고 혼나고, 다 먹으면 걸신들린 것 같다고 비웃음을 당했었는데.
수잔은 아리엘에게 연하늘색 원피스를 입힌 뒤 하얀 비단 리본을 뒤통수 아래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둘러 예쁘게 묶어주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하얀 리본이 대비되어 아주 사랑스럽고 화사해 보였다.
“이제 알렌 영감님을 부를까요?”
노집사 알렌은 오늘도 꼿꼿한 자세와 특유의 정중한 분위기로 나타났다.
아리엘이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코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도 똑같았다.
“마님을 뵙습니다.”
아직 이런 깍듯한 대우에 적응이 안 되기는 했지만, 아리엘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알렌.”
“라카트옐 저택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머뭇머뭇 수잔과 떨어져서 알렌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짧게 뒤를 돌아보자 수잔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리엘은 걷다가 가끔 알렌을 살짝살짝 올려다보았다.
수잔과 걸을 때와는 달리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노집사 알렌은 너무 정중해서 그 앞에선 수잔한테 하듯 어린아이처럼 굴기 어려웠다.
대신 알렌 앞에 서면 왠지 정말로 그녀가 우아한 대공자비가 된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도…….’
아리엘은 알렌의 발걸음을 보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정중한 와중에도 알렌의 걷는 속도는 어린 아리엘의 보폭을 고려한 듯 매우 느렸다.
건물 중앙 홀으로 나온 알렌이 저택 모양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여기가 중앙입니다. 저택의 모든 길로 통하지요.”
라카트옐 대공저는 십자 모양의 건물에 두 개의 높은 건물이 연결된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쌍둥이같이 생긴 두 개의 높은 건물에는 대공 각하의 집무실을 비롯해서 대공가 일을 맡은 사람들이 일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아리엘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열심히 되새기며 기억해두었다.
높은 건물은 마티어스님의 집무실. 높은 건물은 마티어스님의 집무실.
“십자 모양의 건물은 생활공간인데 방향마다 용도가 다릅니다.”
사용인들은 북쪽 관을, 대공가 가족은 남쪽 생활관을 사용한다.
아리엘의 방도 남쪽에 있었다.
“그래서 남관은 안채라고도 불립니다.”
동관과 서관은 손님방으로 사용하는 방들인데 거의 비어있었다.
“십자 모양 건물의 중앙에는 높은 탑이 서 있습니다. 얼음별 탑이라고도 불리지요.”
탑에 이름이 있다는 말에 아리엘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나요?”
알렌 영감이 유식하게 설명해주었다.
노집사 알렌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대공가를 모신만큼 저택과 가문의 역사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얼음별 탑은 대공저의 종루인데, 높이만으로 따지면 수도에서 가장 높은 탑입니다. 심지어 황궁보다도 높지요.”
황궁보다도 높다니.
그런 건물이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게 이제부터 자신의 집이라는 게 가장 놀라웠다.
“물이 얼 만큼 추워지면 이곳의 탑에 가장 먼저 얼음이 맺힌답니다. 멀리서 보면 얼음이 빛나는 게 꼭 별 같다고 하더군요.”
“정말 멋져요.”
아리엘이 말하자 알렌의 표정이 순간 부드러워졌다.
그는 이 저택과 가문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결 긴장감을 내려놓은 그는 어린 마님에게 조금 더 대공가의 부에 대해 자랑하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수도의 대공저고, 영지에 저택이 두 개 더 있습니다.”
“두 개나 더요?”
“예. 세대 분리를 할 때를 대비한 것인데 하나는 수도의 것보다 더 크고, 하나는 조금 작지만 매우 화려합니다. 마님과 대공자님이 성인이 되시면 물려받으실 거예요.”
아마 정말로 그럴 일은 없겠지.
자신이 성인이 되면 루시안과 그녀의 결혼은 끝이 날 테니까.
아리엘은 입을 다물고 작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 저택은 부지가 부족해서 정원이 넓지 않지만, 영지의 저택은 넓은 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정원이 좁은 거…… 라고요?”
아리엘은 이곳의 정원을 이미 보았다.
그녀의 방에서 정원은 매우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얼핏 봐도 절대 좁은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노집사 알렌은 영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영지의 정원은 무척 넓어서 그곳에서 마상 시합을 열거나 사냥 대회를 열기도 하지요.”
어…… 그건 이미 정원이 아니지 않을까요.
아리엘은 대체 대공가 영지가 얼마나 큰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저, 그런데요, 알렌.”
“예. 마님.”
“음…… 저택이 이렇게 넓은데 청소는 다 어떻게 하나요?”
그녀의 천진한 질문을 들은 알렌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꼭 웃음을 참는 것 같은 이상한 표정이었다.
‘어라, 내가 뭘 잘못 물어봤나?’
하지만 아리엘로서는 정말이지 최선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후작가에 살 때 하녀들이 하루종일 이곳저곳을 쓸고 닦는 것을 보았다.
귀족의 저택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갔다.
그런데 수잔에게 듣기로는 대공가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아리엘이 돌아다니는 내내 먼지 쌓인 곳은 한 군데도 보지 못했는데도.
아리엘의 질문을 들은 알렌은 하마터면 품위 없게 웃을 뻔한 자신을 질책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흠. 그건 말이지요…….”
새로 들어온 어린 마님은 진지하고 엄숙한 자신마저도 풀어지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이곳에는 대공가 전담 마법사가 있습니다. 대규모의 집안일은 그분이 맡아서 하시지요.”
“마법사요?”
아리엘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이곳에도 마법사가 있단 말이야?!
* * *
이런 얘기는 루시안에게 들은 적이 없었다.
아리엘이 무척 놀란 기색이자 알렌이 차분히 설명을 해주었다.
“처음부터 그분이 집안일을 하셨던 건 아닙니다. 원래는 황실 수석 대마법사셨는데…….”
아리엘의 턱이 조금 더 아래로 떨어졌다.
무려 황실 수석 대마법사가?
“모종의 사정에 의해서 그만두시고, 객으로 이곳에 머무르시다가 소일거리로…….”
아리엘은 완전히 말을 잃어버렸다.
그, 그럼 루시안은 내가 ‘당신의 마법사가 될게요.’라고 했을 때 무슨 뜻으로 알아들었던 걸까?
혹시 청소 노예 정도로 생각하고 받아준 건 아니겠지?
그래서 ‘네가 강해봤자지’ 하는 눈빛이었던 거고?
지금이라도 청소에 유용한 마법을 배워둬야 하는 건 아닐까.
혼란스러워하는 아리엘의 상황과 상관없이 알렌이 말을 이었다.
“청소뿐 아니라 저택 온도 조절도 그분이 하시지요.”
“온도 조절이요?”
“예. 이 넓은 저택 안이 한 군데도 빠짐없이 훈훈한 것도 다 마법 덕이랍니다.”
그러니까 이 저택은 마법의 힘으로 쾌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넓은 공간에 영향을 미치려면 마나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알고 있는 아리엘은 대공가의 위세에 다시 감탄했다.
“나중에 마법사님도 만나게 되실 겁니다.”
“네에…….”
아리엘은 ‘내가 루시안에게 별 도움이 안 되는 하찮은 마법사면 어쩌지’하는 걱정으로 가득 차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아리엘은 오전 내내 알렌과 저택을 돌아봤지만, 저택이 너무 커서 극히 일부밖에 둘러보지 못했다. 10분의 1이라도 다 봤는지 의문이었다.
알렌이 조끼 주머니에 차고 있던 회중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
“마님 간식 드실 시간입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아.”
아리엘은 속이 출출하던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간식 먹을 시간이어서 그런 거구나.
알렌은 직접 아리엘을 수잔에게 데려다주었다.
“내일은 미술품과 조각들이 있는 동관의 화랑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네! 알렌, 고마워요.”
아리엘이 밝게 인사하자 알렌이 정중하게 목례했다.
“아닙니다. 제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알렌 덕에 많이 알았어요.”
아리엘은 알렌의 주름진 손을 쥐고 뺨을 꼭 기대었다.
“내일 봐요, 알렌.”
아리엘이 수잔의 뒤를 졸졸 따라서 사라진 뒤, 노집사 알렌은 그 자리에 잠깐 멈춰 서 있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대공가 일을 하는 알렌으로서는 평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멈춰있던 노집사 알렌은 물끄러미 자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
어린 소녀의 보드라운 뺨에서 전해진 따뜻한 온기가 손에 남아있었다.
* * *
수잔은 간식으로 고소한 향기가 나는 노란 치즈 쿠키와 우유 한 컵을 차려주었다.
아리엘은 향긋한 치즈 쿠키의 맛을 음미하며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핥았다.
수잔은 우유에 쿠키를 담가 먹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쿠키를 우유에 흠뻑 적신 뒤에 먹으면 더 풍미가 잘 느껴진답니다.”
“……해볼래요.”
아리엘은 노란 쿠키를 우유에 담갔다가 한입 베어 물었다.
그냥 먹을 때는 바삭했는데 적셔서 먹으니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맛있어요!”
수잔이 키득키득 웃은 뒤에 말했다.
“주방장이 요즘 쿠키 굽는 데에 재미를 붙였거든요. 앞으로도 자주 올라올 거예요.”
이렇게 맛있는 쿠키를 자주 먹을 수 있다니.
주방장이 왜 갑자기 쿠키 굽는데 열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엘은 그게 무척이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간식을 다 먹은 다음에 수잔이 아리엘에게 말했다.
“참, 대공님께서 오늘 아기 마님께 대공가 주치의를 보내라고 말씀하셨어요.”
“의사…… 말하는 거예요?”
“그렇지요.”
본능적으로 의사가 무섭다고 느낀 아리엘이 얼른 말했다.
“난 아픈 데가 없는걸요.”
“아파서 부르는 게 아니라, 앞으로 얼마나 더 잘 자라실지 보려고 부르는 거예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수잔이 상냥하게 달랬다.
여전히 무서웠지만, 수잔 덕에 조금 안심한 아리엘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가의 주치의는 삼십 대쯤 된 여자였다.
대공가는 남자들을 위한 남성 의사와 여자들을 위한 여성 의사를 모두 데리고 있었다.
십몇 년간 여주인이라고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을 때조차 그 법칙을 고수했다.
그래서 불려온 여자 주치의는 환자가 없는 몇 년 동안 의학 연구에 힘을 써온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밀러라고 합니다.”
의사 밀러는 절도있게 인사를 건넸다.
다정한 수잔이나 정중한 알렌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무척 전문적이고 이지적인 느낌?
아리엘은 당당한 밀러에게 신뢰가 갔다.
게다가 왕진 가방을 든 밀러는 무척이나 멋져 보였다.
“아리엘이에요. 반가워요.”
“예. 그럼, 진찰을 청하겠습니다.”
밀러는 아리엘을 이 집 안주인이나 어린아이가 아니라 한 명의 환자로 보았다.
아리엘이 어리다고 해서 옆의 수잔에게 아리엘의 몸 상태에 대해 묻지 않았다. 모두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아침의 식욕은 어떠시지요? 소화는 어떠십니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존중받는 기분이라 아리엘은 성실하게 대답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내내 차분하기만 하던 밀러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아리엘의 몸을 보았을 때였다.
“이건…….”
밀러는 아리엘의 온몸에 나 있는 흉터들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수잔이 보기에도 무척 심해 보였던 그 상처 자국들은 의사인 밀러의 눈에 예사로운 상처들로 보이지 않았다.
밀러는 수첩에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상습적인 폭행의 흔적. 성인 남자가 가해한 것으로 추정.
온몸에 멍과 상처가 있음.
머리카락 안쪽 두피에도 딱지가 져 있는 것으로 보아 머리카락을 잡고 세게 끌었던 것 같음.]
밀러는 아리엘에게 팔과 다리, 어깨를 천천히 움직여보도록 했다.
“……다행히 뼈나 관절이 상한 곳은 없군요.”
어렸을 때 관절이 상하면 키가 크지 않는다.
밀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엘은 자신이 만약 이곳으로 와서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벌어졌을 일에 대해 떠올렸다.
아마 자신은 왼쪽 다리를 영영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과거와 똑같이.
아리엘의 흉터를 모두 만져본 밀러가 결론을 지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시기 때문에 잘 드시고 잘 쉬신다면 대부분의 자국은 점점 옅어져 사라질 것 같지만…… 몇 군데는 심하네요. 커도 흉터가 남겠어요.”
밀러의 말에 수잔의 얼굴이 굳어졌다.
의사는 식단이나 운동에 대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해주고, 몸을 튼튼하게 하는 약을 처방해준 다음 돌아갔다.
의사가 돌아간 뒤에 아리엘은 수잔의 눈치를 살폈다.
수잔은 아까부터 왜인지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상냥하게 웃어주지도 않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지도 않았다.
아리엘은 걱정이 되어서 수잔에게 다가갔다.
“수잔, 왜 그래요? 혹시 내가 뭔가…… 잘못했어요?”
치울 것도 없는데 바쁘게 청소하는 시늉을 하던 수잔이 한숨을 내쉬고 아리엘에게 돌아섰다.
그리고 작은 소녀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수잔은 아리엘이 가엾었다.
조금만 분위기가 안 좋아도 바로 어른의 기분을 살피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정에 굶주려서 약간만 예뻐해 주어도 마음을 오롯이 줘 버리는 어린 동물 같았다.
“아기 마님께서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제가 마음이 아파서 그런 거예요.”
“나 때문에요?”
“…….”
수잔은 의사가 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커서도 흉터가 남을 거라는 말.
아리엘이 열심히 짹짹거렸다.
“나는 괜찮아요. 이젠, 아버…… 지랑 마주칠 일도 없고. 다친 데도 거의 안 아프고 괜찮아요.”
수잔은 아리엘의 등을 잠잠히 쓸어주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아기 마님.”
아리엘을 떼어낸 수잔이 소녀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몸에 난 상처는 때로 여기에도 흉터를 남긴답니다. 그리고 이 안에 난 흉터가 훨씬, 훨씬 지우기 힘들지요.”
“수잔…….”
“그러니까 아기 마님. 괜찮다는 말은 세상에서 제일 아껴야 되는 말인 거예요. 아셨지요?”
아리엘은 괜찮다는 말을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직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잔이 그녀를 무척이나 위해주고 있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수잔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을 덜어주고 싶었다.
“응, 그럴게요.”
수잔이 아리엘의 양 뺨에 키스를 쪽쪽 퍼부어 주었다.
“그래도 이렇게 예쁘게 자라주셔서 기특하셔요.”
그리고 수잔은 아리엘의 손을 붙잡았다.
“자아, 그럼 의사 말대로 살이 포동포동 찌는 맛있는 음식들을 드시러 가 볼까요? 저녁 식사는 대공님과 함께하실 텐데, 열량이 높은 것들로 차리게 하지요.”
“나 때문에 그렇게 해도 돼요?”
“그럼요. 원래 저택의 음식은 여주인의 입맛과 취향을 따라가는 거랍니다.”
“아…….”
수잔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 얼른 훌륭한 안주인이 되시려면 맛있는 걸 많이 먹어보시고 경험해보셔야 해요.”
정말 그런가?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쩐지 결론이 ‘좋은 여주인이 되려면 맛있는 걸 많이 먹어야 한다’로 난 것 같은데.
하지만 그녀는 이내 수잔의 따뜻한 손을 마주 잡았다.
여기서라면 어떤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런 식의 일상들이 하루 이틀 이어졌다.
아침이면 수잔이 뺨에 키스해주고, 낮에는 집사 알렌과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안내를 받았다.
밤엔 무뚝뚝한 대공 마티어스와 저녁 식사를 같이했다.
마티어스는 식단이 아리엘 위주로 바뀐 것을 보고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이들의 식사는 아무 말도 않는 마티어스와 먼저 말을 꺼낼 용기가 없는 아리엘로 인해 무척이나 조용했다.
그래도 아리엘은 아침이나 점심과 달리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좋았다.
“오늘은 뭘 했지?”
깜짝이야!
아리엘은 놀라서 들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뜨릴 뻔 했다.
마티어스가 식사 중에 말을 건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한 달만에 처음이다.
“저요?”
“너한테 물었다만.”
마티어스의 어조는 마치 매일 일상을 물어왔던 것처럼 태연했다.
아리엘은 눈을 깜박깜박 거리다가 일단 입을 열었다.
긴장한 나머지 테이블 아래로 조그만 손을 조물거렸다.
“오늘은 드디어 저택 사람들을 소개받았어요.”
그동안은 수잔, 알렌 외의 사람들은 만나지 않았다.
지나다니다 마주치면 인사를 받긴 했지만 정식으로 모두 앞에 선 건 아니었다.
수잔 말로는 너무 갑자기 결정된 결혼이라서 아리엘이 저택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아리엘은 알고 있었다.
비쩍 마르고 볼품없는 데다, 보이는 곳에도 여기저기 상처 자국이 있는 그녀를 배려한 것이라는 것을.
아리엘은 한 달 동안 열심히 먹어서 홀쭉했던 뺨이 조금 차올라 있었고 손이나 얼굴에 있는 상처 자국들도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하녀장 수잔과 총괄 집사 알렌을 대동하고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정식으로, 이 집의 작은 여주인으로서.
아리엘은 손가락을 꼽으며 만난 사람들을 떠올렸다.
수잔은 몇 명 안된다고 했지만, 저택이 워낙 크다보니 적은 수는 아니었다.
“정원사 우즈와 인사했고, 주방장 홀슨도 만났어요. 안채 전담 하녀들과도 인사했고요. 베키, 샐리, 안나.”
아리엘은 수잔과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하녀들에게 제대로 하대를 했다.
여주인다운 말투를 쓰는 건 어려웠지만 아무도 아리엘이 어리다고 무시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다들 라카트옐이라는 이름을 무척이나 우러러보는 것 같았지.’
아리엘은 라카트옐의 아내이니 그 존경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턱을 짚고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마티어스가 입을 열었다.
“또, 한 일.”
“또요?”
음…… 아리엘은 조그만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을 해내기 위해 집중했더니 입도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아. 오늘은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이라.”
아리엘은 요즘 낮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직 밖이 추워서 나가서 놀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수잔이 물감과 그림 도구를 포함해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작은 놀이감들을 가져다주었다.
그중에서도 처음 접해보는 색색의 물감들이 신기해서 아리엘은 그림 그리는데 재미를 붙인 상태였다.
대단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건 마법을 쓰는 것과 조금 비슷한 면이 있었다.
루시안과의 약속 때문에 마법은 쓸 수 없으니까 그림이라도…….
아리엘은 망설이다 물었다.
“보여드릴까요?”
거절할 줄 알았는데 마티어스가 순순히 허락했다.
수잔이 오늘 아리엘이 그린 그림들을 모두 가져다주었다.
마티어스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그림을 몇 장 넘겨보았다.
아리엘은 식탁 의자에서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보여드릴까요, 먼저 말을 꺼낸 건 그녀지만 막상 마티어스가 그림을 구경하자 창피하고 불안했다.
못 그렸다고 하시면 어떡하지?
잘 그리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괜히 부끄러울 것 같았다.
“이 그림, 마음에 드는군.”
그가 그림 한 장을 골라냈다.
아리엘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티어스는 잘 그렸다, 못 그렸다고 말하지 않고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아리엘은 기쁜 마음으로 물었다.
“가지실래요?”
마티어스가 종이 너머로 그녀를 넘겨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막 넘겨도 되겠어?”
아리엘이 ‘네!’ 하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무뚝뚝하게 확언했다.
“내가 이 그림을 곧 5천만 데날짜리로 만들 텐데.”
데날은 제국의 화폐 단위였다.
* * *
오, 오천만 데날이요?!
아리엘은 1데날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방금 마티어스가 부른 금액이 엄청난 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제가 막 그린 그림이 왜 갑자기 그런 가격이 되어버리는 거죠?
아리엘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질 좋은 종이에 질 좋은 안료로 그려지긴 했지만 그린 사람이 겨우 열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게다가 낙서하듯 그린 거라 좋게 봐주어도 자유분방하다는 점 외에는 특징을 찾기 어려웠다.
마티어스가 옆의 알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렌. 만년필.”
“예, 대공님.”
알렌이 조끼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뽑아 마티어스에게 공손히 바쳤다.
마티어스의 손을 잠시 거친 만년필이 아리엘 쪽을 향했다.
“자.”
‘……?’
아리엘은 영문을 몰라하며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이 그린 그림 하단을 가리켰다.
“네 이름을 써라.”
아리엘은 얼결에 만년필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흑연같이 새까맣고 날렵한 몸체를 가진 만년필이 생각보다 무겁다는 것에 놀랐다.
[아리엘라 라카트옐]
조심스럽게 이름을 써넣자 마티어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그리고 그는 아리엘의 그림을 알렌에게 넘겨주었다.
“제대로 액자에 끼워 넣어 놔.”
알렌이 그림을 소중하게 받들고 나간 뒤 마티어스가 아리엘에게 말했다.
“한 달만 맡았다가 돌려주지. 네 손에 돌아와 있을 때쯤엔 오천만 데날 이상의 가치를 증명하는 증서와 함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어떻게요?
아리엘은 커다란 두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그런 아리엘을 보던 마티어스가 제 입매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슬쩍 스친 미소가 너무 빠르게 사라져서 아리엘은 다시 두 눈만 깜박거렸다.
방금…… 무척 굉장한 것을 본 것 같았는데?
“이 집에서 나가는 건 모두 그만한 가치가 있거든.”
아리엘은 나중에 꼭 달튼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어스가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아리엘라.”
“네?”
느리게 팔꿈치를 식탁에 댄 그가 말했다.
“지금 수도에선 온통 네 얘기뿐이다. 한 달째인데도 소문이 사그라들 기미가 없지. 널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애태우는 사교계 인간들이 넘쳐난다.”
아리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거대하고 안락한 대공저 안에 살고 있다보니 바깥의 사람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티어스가 나른하게 긴 흑발을 쓸어 넘겼다.
“널 내보내기엔 아직 이르고…… 그림 정도면 적당하겠지.”
‘아.’
아리엘은 상황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해 무슨 소문이 퍼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수도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에 반쯤 미쳐 있을 것이다.
루실리온 후작가에서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열 살짜리 영애가 베일에 싸인 대공가에 시집을 간 거니까.
그야말로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떠들기 좋아하는 사교계 귀족들이 환장할 만한 화젯거리임에는 확실했다.
마티어스가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놈들한테는 그림 한 장 던져주고 자기들끼리 개싸움을 벌이게 하지. 어떠냐?”
“……좋아요.”
아리엘도 자기들 호기심 좀 채우겠다고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려 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줄 생각따윈 없었다.
그녀의 그림 한 장으로는 아리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무성한 추측과 잡다한 해석만 낳겠지.
아리엘이 승낙하자 마티어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허공에 잠시 머물러 있던 커다란 손이 내려와 아리엘의 하얀 뺨을 살짝 토닥였다.
어쩐지 귀여움을 받은 것 같아서 아리엘은 발그레하게 볼을 붉혔다.
그가 식사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나며 말했다.
“후식까지는 함께 못하겠군. 일정이 있어서.”
“네에…….”
어쩐지 아쉬운 기분에 아리엘은 말꼬리를 흐렸다.
한 달 만에 마티어스와 겨우 대화다운 대화를 했는데 너무 빨리 끝나버린 것 같았다.
나가려던 마티어스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아리엘의 다른 그림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의 차갑고 무심한 눈동자가 부드러운 흡족함을 담았다.
“이건 내가 갖지. 소장품으로.”
마티어스의 소장품이라는 말에 아리엘의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왜인지 그림이 오천만 데날짜리가 되는 것보다 마티어스가 받아준 것이 더 기쁘게 느껴졌다.
그림을 가지고 나가면서 마티어스는 기분 좋은 사자처럼 알렌에게 명령했다.
“내 방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놔.”
* * *
아리엘이 만년필로 서명한 그림은 노집사 알렌의 손으로 넘어가 귀중하게 액자에 끼워졌다.
대공가의 창고에는 액자 하나의 값어치만으로도 수도의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만큼 값비싼 액자도 있었다.
하지만 아리엘의 그림은 고급스럽지만 단순한 고딕풍의 액자에 담겨졌다. 액자보다 그림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림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전달받은 달튼은 흰 장갑을 끼고 작은 안경알을 통해 신중하게 그림을 바라보았다.
“…….”
한참만에 그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도통 뭘 그리신 건지 모르겠는걸.’
그림의 형체만 놓고 보자면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인 게 확실했다.
색채 배합은 꽤 그럴 듯하지만.
이 그림이 표현하는 바를 유추해보려고 애쓰던 달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아리엘님이 그리신 건데 판단은 필요 없지.’
아리엘도 이제 라카트옐 사람이 되었으니 그녀에 대한 판단은 거두는 게 현명했다.
제국의 속담 중 [라카트옐이 하는 일은 판단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 이 말이 만들어질 땐 ‘라카트옐이 일하는 방식이 어떻든 결과만은 완벽하다’는 신뢰의 의미로 쓰였는데…….
수천년이 흘러내려 오면서 지금은 그 뜻이 많이 바뀌었다.
‘라카트옐은 자기를 판단하는 자를 살려두지 않는다’라든지, ‘라카트옐이 시키는 건 생각하지말고 그냥 복종해라’라든지……?
음, 조금 위압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아무튼, 라카트옐이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달튼은 아리엘의 그림을 고이 포장해 얼마 뒤에 열릴 황실 자선 연회의 기증품으로 보냈다.
각 귀족 가문에서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자랑하듯 내놓는 곳이다.
이곳에서 아리엘의 그림은 첫 선을 보이게 될 예정이었다.
* * *
집사 알렌과 한 달쯤 저택 곳곳을 돌아보고 나자 드디어 아리엘은 저택에서 헤매지 않을 정도로 길을 익히게 되었다.
‘오늘은 달튼에게 한 번 찾아가 봐야지.’
그간 궁금한 것이 많이 쌓였는데, 수잔에게 터놓고 물어보자니 걱정할 것 같고 마티어스에게 묻자니 괜히 어려웠다.
아리엘은 수잔의 손길에 안온하게 머리카락을 맡기며 달튼에게 가보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으음, 그런데 왜 누군가 머리를 만져주면 졸린 걸까……?
수잔은 부드럽게 엉킨 곳을 풀어낸 다음, 솜씨좋게 양옆 머리카락을 땋아 반묶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스티치가 들어간 까만 실크 리본을 예쁘게 매어주었다.
“어쩜, 우리 아기 마님 숙녀 같으시네요!”
아리엘은 살며시 몸을 외로 꼬았다.
이런 칭찬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자. 놀다 오세요.”
수잔이 부드럽게 등을 떠밀었다.
아리엘은 타박타박 방을 나섰다. 달튼이 일하는 방은 마티어스의 집무실과 가까웠다.
그 말은, 꽤나 오래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넓은 저택을 아리엘의 짧은 다리로 종종 걸어서는 얼마나 걸릴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이동 마법이 절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루시안은 나한테 왜 마법을 쓰지 말라고 했을까?’
자신이 멀리 가 있으니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한 걸까?
‘어차피…… 이젠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쓰고 싶지 않은걸.’
마음속으로 생각한 아리엘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과거 후작의 손에 의해 불구가 되었던 왼쪽 다리는 지금은 멀쩡했다.
‘그 땐 걷기만 해도 너무 아팠었는데…….’
루시안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 들여준 덕분에 다리를 잃지도, 그 집에 갇혀있지도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루시안을 위한 게 아니라면 마법을 쓰지 않을 거야.’
다짐한 아리엘은 씩씩하게 아장아장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동 마법따위 쓰지 않아도, 잘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으니까.
달튼이 일하는 방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자 놀란 얼굴의 그가 아리엘을 맞았다.
“아기 마님.”
“안녕하세요, 달튼?”
“어쩐 일…… 아니, 일단 들어오십시오.”
상전을 바깥에 세워둘 수 없었던 달튼은 얼른 아리엘을 안으로 들였다.
아리엘은 안으로 들어가서 소파에 앉았다.
푹신.
“와, 달튼. 이 소파 엄청 푹신푹신해요!”
그녀의 방에 있는 소파도 폭신했지만, 이 방의 것은 어른용이라 훨씬 크고 들어있는 솜의 양이 많았다.
아리엘이 신기한 듯 말하며 그를 올려다보자, 달튼은 순간 귀여운 아기 고양이가 떠올라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헉, 너무 귀여우셔서 심장 아파…….’
그는 자신의 서랍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잠깐만 뭐 드릴 만한 게…….”
달튼은 자신의 서랍 안쪽에서 각종 단 과자들을 잔뜩 찾아냈다.
그리고 그걸 모두 아리엘에게 안겨주었다.
“드십시오, 아기 마님.”
“어…… 이걸 다요?”
3박 4일을 과자만 먹는대도 다 못 먹을 양인데?
하지만 주는 사람이 무척 기뻐 보였으므로 아리엘은 순순히 과자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과자 하나를 오물오물 먹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온 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예요, 달튼.”
토끼처럼 과자를 먹는 아리엘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고 있던 달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예, 물어보십시오.”
“루시안이,”
“딸꾹.”
아리엘이 운만 떼었는데 달튼이 갑자기 딸꾹질을 했다.
“……?”
그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을 보니 어디가 아픈 건지도 몰랐다.
“달튼? 괜찮아요?”
“예? 아, 예…… 그, 갑자기 대공자님 성함을 말씀하셔서 놀랐습니다.”
“루시안 말하는 거예요?”
“딸꾹.”
아리엘에게서 다시 그의 이름이 나오자 달튼이 또다시 딸꾹질을 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리엘은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수잔이 루시안은 이름으로 불리는 걸 싫어한다고 했었지.
“그…… 루시, 아니 대공자님이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해서 그래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은 달튼이 말했다.
“예. 그분을 이름으로 부른 사람들은…….”
떠올리기 싫은 무언가를 떠올려버린 듯 달튼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튼 저택 안에서 대공자님 성함은 마치 금기어처럼 되어 있거든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 뭐 그런 건가.
하지만 아리엘은 루시안에게 직접 허락, 아니 명령을 받았으니 말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아리엘은 원래 물어보려던 질문을 했다.
“달튼, 루시안이 간 아카데미 말이에요. 어떤 곳이에요?”
사실은 아카데미에 방학이 있는지가 가장 궁금했지만, 아카데미 그 자체에도 흥미가 있었다.
어찌됐든 남편…… 이 간 곳이니까.
달튼은 코끝에 걸쳐놓은 작은 안경을 추어올렸다.
“제국립 요하네스 아카데미 말씀이시군요.”
그는 제국에 하나뿐인 거대한 귀족 학교인 요하네스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요하네스는 14세에서 18세까지의 황, 귀족 영식들이 다니는 학교입니다. 귀족 영식들에게는 무척이나 필수적인 코스라고 할 수 있죠. 황태자 전하께서도 다니고 계시답니다.”
“음, 여자아이들을 위한 학교는 없나요?”
“몇십 년째 논의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국의 여성들은 사교계에 나가는 것 정도의 대외 활동만 가능했다.
그래서 여자 아이들은 아카데미에 가서 교육받는 대신, 가정 교사에게 기초적인 것을 배웠다.
자기 힘으로 공부해 의사가 된 밀러는 여자로선 매우 특수한 케이스였다.
달튼은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설명했다.
“요하네스는 검술과 사교술, 예술 등을 폭넓게 가르칩니다. 그 중 대공자님은 검술 특기로 입학하셨고요.”
“검술을요?”
“예. 대공자님께서는 이미 아홉 살때부터 소드 마스터시거든요. 제국 최연소이셨지요.”
아리엘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최연소 소드 마스터.
아리엘은 마법사들의 무리에 살 때 소드 마스터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었다.
마나를 몸에 가지고 태어난 마법사들과는 달리, 소드 마스터는 검의 일정 지경에 오르면 검에 마나를 모이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후천적인 마나 사용자인 셈이다.
“루시안…… 대단하네요.”
“예. 라카트옐 대공가는 대대로 소드 마스터를 배출해왔지만 대공자님은 특히 빠르셨지요.”
그 후로도 달튼은 여러가지를 설명해주었다.
아리엘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직접 물어보았다.
“루시안은 1년 후에나 돌아온다고 했어요. 정말로 그때까지 안 오나요?”
달튼이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혹시 아기 마님, 대공자님이 안 계셔서 서운하십니까?”
달튼의 질문에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어…… 아내니까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집에 있는 사람들 중에 대공자님께서 집에 계셨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사람은 알렌 영감님과 아기 마님뿐일 겁니다.”
어째서?
루시안은 혹시 집에서 박대 받고있는 걸까?
“대공자님은 저희에게 대공님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두려운 분입니다.”
“왜요?”
“알렌 영감님과 저택 증축된 곳은 다 보셨겠지요?”
“네, 봤어요.”
“그 증축을 하게 만든 분이 대공자님이세요. 저택을 자주 부수셔서 증, 개축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분의 특기이자 취미가 파괴라서요.”
남편의 특기와 취미가 파괴…….
아리엘은 어쩐지 엄청난 사실을 들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라카트옐 가문 남자들은 특유의 위압감이 있어서 아랫사람들이 범접하기 힘들거든요.”
아. 그건 알아요.
아리엘은 과거에 만났던 흑발 청안의 사내에게서 느꼈던 위압감을 떠올렸다.
후작가에 아버지를 만나러 갔을 때의 루시안에게도 잠시 느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저희는 대공자님이 떠나시기 전에 아기 마님께 애정표현을 하실 때 다들 헛것을 본 줄 알았답니다.”
아리엘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때의 이마 키스가 떠올라서였다.
“순간 저희는 대공자님의 모습을 한 악마가 아닌가 생각했지요. 아니 아니, 둘은 같은 거니까 대공자님의 모습을 한 천사?”
어째서 달튼 머릿속의 루시안은 줄곧 악마인 거지요.
달튼이 조금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아마 알렌 영감님도 그런 광경은 처음 보았을 겁니다. 그 루시안님이 결혼을 하신 걸로도 모자라 그 루시안님이 아기 마님께 입맞춤을 하시다니. 그 루시안님이요!”
그 루시안님이 세 번이나 들어갔어요, 달튼.
평소에 부르지 못하는 이름을 한풀이하듯 부르는 건가요?
아리엘은 대체 평소에 루시안이 어땠길래 사람들이 이런 반응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바탕 열변을 토해낸 달튼이 물었다.
“더 궁금한 건 없으신 가요?”
“아, 있어요!”
아리엘은 그녀에 대해 사교계가 시끄러운 것과 그림에 대해 물어 보았다.
“나에 대한 소문이 많이 돌고 있대요. 그게 뭔가요?”
달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대공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까?”
“네.”
아리엘이 대답하자 달튼은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눈앞의 소녀는 분명 너무나 어리고 천진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주인인 대공 각하가 이 소녀에게 대외적인 것에 대해 말을 했다는 건…….
‘어린 마님을 믿으신다는 뜻이겠지.’
주인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달튼에게는 이견이 없었다.
그는 진지하게 아리엘을 마주보았다.
“아기 마님께선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신 거지요?”
“네. 나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말씀해드리겠습니다.”
* * *
달튼은 차근차근 루시안의 소문이 일으킨 파장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루시안이 소문을 퍼트리라고 했다는 부분은 깔끔하게 걸러냈다.
“처음엔 아기 마님의 옛 소문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정도였지요.”
“옛 소문이라면…….”
아리엘에게 병이 있거나 흉측한 외모 때문에 후작이 그녀를 내보이지 않는다는 소문일 것이다.
“그런데 후작저에서 아기 마님 몫의 물건이 나오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사실은 아기 마님이 후작님께 무척이나 사랑받는 딸이었다고 퍼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전해갔다.
아리엘이 사실은 누구나 한 번 보면 반해버릴 만큼 아름다운 아이라서 후작이 숨겨 길렀다는 것부터, 대공이 어릴 적부터 며느리감으로 점찍어 놓아서 외부에 노출이 되지 않았다는 것까지.
게다가 라카트옐 대공가의 재무관인 달튼이 은근슬쩍 공작하기까지 했으니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제국의 엄청난 부와 권력이 대공가에 몰려있는 만큼 대공가 후계자인 루시안의 혼사를 둘러싼 관심은 엄청났다.
그중에서도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아리엘은 소문의 온상지였다.
“루실리온 후작께서 아기 마님에 대해 계속 함구하고 계신 것도 소문이 부풀어지는 데에 한몫했지요.”
사실 후작은 루시안의 협박 때문에 조용히 있는 것이지만.
“그러던 와중에 결혼 예물이 힐튼의 사파이어 광산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더욱 사교계가 불타올랐습니다.”
달튼이 한 박자 쉬고 이어 말했다.
“대공가에서 그만큼 귀하게 여길만한 아기 마님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고요.”
아리엘은 조금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린 그림이 그렇게 비싸지는 건가요? 사람들의 호기심 때문에?”
달튼이 고개를 저었다.
“현시점에서 그것도 하나의 요인이 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공가에서 물건의 가격을 올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거든요.”
“어떻게요?”
“대공가가 가진 힘으로 자원을 독점해서 가격을 올릴 수도 있고, 대공가가 직접 투자를 해서 그 대상의 몸값을 올리기도 하지요.”
힘과 권력이 있는 자가 투자를 하는 것에 사람들은 개미처럼 몰리는 법이다.
아리엘은 여전히 어떤 과정으로 그녀의 그림이 오천만 데날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원리만큼은 이해했다.
“이제 알겠어요. 고마워요, 달튼.”
아리엘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달튼의 방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에 과자를 하나씩 집어 먹으면서 복도를 가로질렀다.
지나던 길에 하녀 샐리와 안나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기 마님. 어머. 리본이 달랑거리시는데요.”
“아이. 귀여우셔라.”
얼마 전 정식으로 소개를 받은 이후로 저택의 사용인들은 아리엘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전에는 알렌과 돌아다니면 머리를 숙여 인사만 하는 정도였는데.
아리엘은 누군가의 관심을 얻는다는 것이 수줍으면서도 기뻐서 그들이 말을 걸면 살짝 웃어주곤 했다.
그때 정원에서 관상수를 다듬고 있던 과묵한 정원사 우즈가 창문을 통해 아리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앙증맞은 새빨간 열매가 맺힌 나뭇가지였다.
동그랗고 작은 붉은 것이 조록조록 달렸고, 나무의 가시 같은 것이 없게 잘 손질된 모양이었다.
“우즈?”
가지를 받아든 아리엘이 어리둥절하게 부르자, 그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황급히 창에서 멀어졌다.
아리엘은 나뭇가지를 구경하며 즐겁게 방으로 돌아왔다.
나뭇가지를 수잔에게 보여주자 수잔이 빙그레 웃었다.
“우즈가 드리던가요?”
“네. 근데 이게 뭔지는 안 알려줬어요.”
수잔이 거의 풀어져서 달랑거리는 아리엘의 머리 리본을 다시 매어주며 말했다.
“이건 윈터 베리 나뭇가지예요.”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아니요, 관상용이랍니다. 무척 예쁘지요?”
“네.”
수잔이 아리엘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주었다.
“2월의 첫 윈터 베리 나뭇가지를 받은 아가씨에게는 행운이 있다는 말이 있지요.”
와아…….
아리엘은 예쁜 빨간 열매가 맺힌 가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럼 우즈는 나한테 좋은 일이 생기라고 이걸 준 거네요!”
“그렇지 않을까요?”
아리엘은 나뭇가지를 조심스레 화병에 꽂아놓고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우즈에게 가서 고맙다고 말하고 올게요!”
뽀르르 달려나가는 아리엘 뒤에서 수잔이 외쳤다.
“뛰지 말고 가세요! 넘어져요!”
아리엘은 아까의 창문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나무에 가위질을 하고있는 우즈를 보았다.
낑낑대며 창문을 연 그녀는 우즈에게 손을 흔들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우즈가 모자의 챙을 뒤로 당겨 그녀를 바라보았다.
“행운 고마워요, 우즈!”
아리엘은 삐약삐약 외쳤다.
목소리가 닿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우즈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리엘은 함박 웃음을 머금었다.
벌써 행운을 받은 것처럼 텅 비었던 마음이 차곡차곡 차올라가고 있었다.
* * *
그날 밤, 아리엘은 목욕을 하고 나와서 수잔이 건네는 슈가파우더를 뿌린 따끈한 우유를 마셨다.
“달아요. 맛있어요.”
“후후. 아기 마님 또래 때는 단 것이 가장 맛있는 법이지요.”
사실은 열일곱 살까지 살았었는데…….
어린아이의 몸에 있다보니 아이의 입맛이 익숙해졌다.
지난 삶에서 거의 맛있는 것을 접하지 못한 것도 아리엘이 달콤한 맛을 좋아하는데 한몫을 했다.
후작가에서 탄 귀리죽같은 것으로만 겨우 연명하던 그녀는 마법사 무리에 들어간 뒤에 몸이 망가져서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건 멀건 스프뿐이었었다.
그러니 지금 먹는 것들이 아리엘에겐 처음 접하는 맛있는 음식들인 셈이었다.
그녀는 혀를 데지 않기 위해 호호 불어가며 달콤한 우유를 홀짝거렸다.
수잔은 아리엘의 체온이 식지 않도록 두꺼운 타올로 젖은 머리를 부드럽게 비벼 말려주었다.
노래를 부르는 듯한 수잔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기 마님의 머리색은 참 예뻐요. 얼굴도 하나하나 안 예쁜 데가 없으시고요.”
호록거리며 우유를 들이키던 아리엘은 그 말을 듣고 자그만 손으로 컵을 꽉 쥐었다.
요즘 집안 사람들에게 매일같이 듣는 칭찬이고, 들을 때마다 마음이 간질거리지만……
이번만큼은 기쁘지가 않았다.
“저, 수잔.”
“네.”
“나는 수잔이 정말 좋으니까요, 무슨 말을 해도 기분 상하지 않을 거예요.”
“아기 마님……?”
머리를 말려주던 수잔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아리엘은 황급히 덧붙였다.
“그, 그리고 수잔이 나를 좋아해 준다는 것도 알아요. 처음엔 믿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믿어요. 그래서…… 나는…… 수잔이 하는 말은 다 믿고 싶어요.”
“아리엘님.”
수잔이 낮게 아리엘을 불렀다.
아리엘은 뒤를 돌아 수잔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말해야 했다.
아리엘은 눈을 꾹 감았다.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려 나왔다.
“나, 내 머리색이 특이하고 이상하다는 거 알아요. 얼굴도 추하게 생겼지요. 알고 있는데…… 수잔도 샐리도 베키도 다 날 보고 예쁘다고만 해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한테 거짓말하는 건 싫어요.”
뒤에서 수잔의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용기를 짜내어 말하긴 했지만, 그 한숨에 더럭 겁이 났다.
혹시 수잔이 나한테 실망했으면 어떡하지?
수잔이 부드럽게 아리엘을 돌려 앉혔다.
아리엘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수잔은 조그만 어깨를 옹송그린 소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소녀가 머뭇머뭇 그녀에게 팔을 둘러 안았다.
“아기 마님. 누가 아기 마님에게 이상하게 생겼다고 했었나요?”
아리엘이 어미 품에 안긴 새끼처럼 수잔의 품에 파고들며 웅얼거렸다.
“……아버지가요. 오라버니도요.”
수잔은 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아기 마님한테 예쁘다, 귀엽다고 할 때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셨던 거군요.”
“……네.”
어쩜 수잔은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요?
수잔이 마음을 알아주자 아리엘은 그간 참았던 말을 더듬더듬 풀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내가 주인마님이라서 그렇게 말해주는 거라고 생각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왠지 슬펐구요.”
말을 하던 중에 울컥 목이 메었다.
“근데 수잔이 너무 좋은 사람이니까…… 나한테 엄청 잘해주고 나한테만 너그러우니까. 그래서 수잔은 일부러 속이려고 하는게 아니라 정말로 마음의 눈이 예뻐서 날 그렇게 보는 거라고…….”
아무리 그렇게 생각을 해도 마음속의 돌덩이는 없어지지 않았다.
“근데 수잔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다 날 보고 예쁘다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다들 정말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에요.”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수잔의 옷을 적셨다.
“이러다가 수잔의 말도 못 믿게 되면 어떡하나 무서웠어요.”
“그랬군요…….”
수잔이 토닥토닥 아리엘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아리엘은 꼭꼭 눌러 담아놨던 서러움까지 터져서 흐느끼며 울었다.
수잔은 아리엘이 우는 내내 계속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규칙적으로 토닥토닥 안심시켜주듯 두드리는 수잔의 손길에 아리엘의 울음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수잔이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루시안님이 아기 마님과 결혼하신다고 했을 때 저는 깜짝 놀랐답니다.”
“내가…… 이렇게 생겨서요?”
“아니요.”
수잔이 우느라 땀에 젖은 아리엘의 이마를 사르르 쓸어주었다.
아리엘이 고개를 들자 수잔이 말했다.
“제 눈을 한 번 보세요. 제 눈동자에 아기 마님 모습이 비치는게 보이시나요?”
“보여요.”
“어떻게 생겼나요?”
아리엘은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묘사했다.
“머리카락이 빨갛고…… 눈동자도 붉은색이고…… 피부는 석고처럼 창백하고…….”
“자아, 그만.”
부드럽게 아리엘의 말을 멈춘 수잔이 아까 낮에 우즈가 꺾어준 윈터베리 가지를 가리켰다.
서양호랑가시나무에서 난 붉은 열매는 화병에 고이 장식되어 있었다.
“아기 마님, 저 열매의 색이 어떻지요?”
“빨개요.”
“어때요, 예쁜가요?”
“응. 너무 예뻐요.”
솔직한 대답에 수잔은 빙그레 웃었다.
“아기 마님의 머리카락색은 이 열매의 빛깔보다 더 아름다워요. 스칼렛 레드지요.”
“스칼렛…… 레드?”
“네. 정말로 아름다운 붉은색만 가질 수 있는 이름이랍니다.”
아리엘은 멍하게 입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스칼렛 레드…….
“그리고 아기 마님의 눈동자는 꼭 루비같아요. 예쁜 보석 말이에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요.”
수잔이 아리엘의 가느다란 팔을 들어 올려 옷소매를 조금 걷었다.
“아기 마님의 이 피부를 좀 보아요. 희고, 부드럽고, 촉촉하지요. 분명 자랄수록 더 곱고 보드라워질 거예요.”
아리엘의 팔 안쪽 살갗에 살며시 입 맞춘 수잔이 말했다.
“백설같이 흰 피부를 가지셨으니, 눈이 오면 아기 마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아리엘은 혼란스러워서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하얘서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지 않아요. 하얀 피부를 얻고 싶어서 이런저런 방법을 찾는 영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주 축복받은 거죠.”
“축복이요……?”
수잔은 아리엘의 양뺨을 어루만졌다.
“그래요. 아기 마님은 정말 축복받은 미모를 갖고 계세요. 잘 모르긴 몰라도, 아기 마님 부친이나 오라버니보다 훨씬 아름다우실 거여요. 마음도, 외모도.”
아리엘은 확인받듯 한 번 더 물었다.
“정말로 내가 예뻐요, 수잔? 수잔 눈에만 예쁜 거 아니고?”
수잔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기 마님, 세상의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아기 마님이 사랑스러운 외모라고 할 거예요. 재무관 달튼님이나 하녀들이 흐물흐물해진 거 못 보셨나요?”
수잔은 안 그런 척 하지만 이미 팔불출이 다 된 집사 알렌 영감 얘기까지 하려다가 관두었다.
노인을 너무 놀리는 것도 나쁘겠지.
“아기 마님이 예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에 두 사람뿐이고, 아기 마님은 그 분들이랑만 살아서 자신이 예쁜 걸 몰랐던 거지요.”
“그런…… 그런 거예요, 정말?”
수잔은 젖은 눈으로 자신의 옷을 꼬옥 붙잡고 묻는 아리엘에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말이에요, 아기 마님.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수잔은 아리엘을 분홍색 전신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자기 모습이 비치자 아리엘은 겁먹은 표정부터 지었다.
“똑바로 보세요. 아기 마님. 이제부터 잘 기억해두는 거예요.”
“……뭘요?”
수잔은 거울에 비친 아리엘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이렇게 생긴 게 아름다운 거예요. 다른 기준은 없어요. 아기 마님의 모습이 곧 예쁜 것인 거예요.”
“내가 가진 모습이 곧 예쁜 거…….”
“그래요. 자신의 기준은 항상 그래야 한답니다. 그래야 세상의 기준에 내가 안 맞더라도, 거기에 지지 않고 내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아리엘은 홀린 듯 거울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동안은 거울이 있어도 자주 들여다보지 않았다.
수잔이 예쁜 리본을 묶어주거나 옷을 입혀주어도 거울에 비쳐보고 싶지 않았다.
예쁜 것들을 걸친 추한 자신을 보는 게 슬퍼서였다.
그런데 수잔의 말을 듣고 거울을 보니 붉은 머리카락이 처음으로 예뻐 보였다.
설탕에 녹인 딸기처럼 맑은 붉은색인 눈동자도 마음에 들었다.
눈처럼 창백하게 하얀 피부도 부끄럽지 않았다.
설사 바깥 사람들이 그녀의 외모를 두고 놀려댄다 해도 ‘나는 이게 가장 마음에 들어’ 하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붉은 머리가 아니라 아버지를 닮은 청동색 머리카락이었으면 후작가에서만 살다가 루시안도, 수잔도, 마티어스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살며시 기대보았다.
아리엘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오롯이 마음에 들었다.
* * *
아리엘은 빨개진 눈을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여느때 같으면 입을 맞춰준 뒤 불을 끄고 나갔을 수잔이 옆에 앉아서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자장가를 듣는 게 좋아서 아리엘이 눈을 말똥말똥 뜨자 수잔이 웃으면서 배를 토닥여주었다.
“아기 마님. 제가 두 분 결혼에 놀란 건 아기 마님 때문이 아니라 대공자님 때문이에요.”
“왜요?”
수잔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대공자님은 어리시지만, 누구보다도 단호하고 칼 같은 분이시지요. 그런 그분이 얼마 전까진 대공님께 이 가문의 대를 끊겠다고까지 말씀하셨거든요.”
“대를 끊는다고요?”
“그러니까,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갖지 않겠다 하신 거지요.”
“어째서요?”
수잔이 후후 웃었다.
“저는 일개 하녀장이니 잘 모른답니다. 하지만 아기 마님의 모습을 본 뒤에는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요. 그 분의 심경이 갑자기 변하신 이유를요.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분이라면 대공자님도 어쩔 수 없었겠구나, 하고요.”
“……수잔, 나 또 울 것 같아요.”
“안 돼요. 잠들기 전에 울면 내일 왕방울 개구리가 될 거예요.”
짐짓 진지하게 협박한 수잔이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아기 마님이 오셨을 때 저는 정말로 기뻤어요. 그것만 알아주세요.”
아리엘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수잔이 즐겁게 말했다.
“나중에 제대로 결혼식을 하실 때는 제가 최고로 예쁘게 해드릴 거예요. 이 스칼렛 레드의 머리카락은 하얀 웨딩드레스와 무척 잘 어울리겠지요.”
그 앞에서 루시안과 그녀가 계약결혼을 했다는 걸 말하기는 어려웠다.
수잔 손으로 웨딩드레스를 입을 일은 없을 거라는 것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수잔은 내 다른 조건을 보지 않고 그냥 나를 좋아해주는 구나.
안온해. 따뜻해.
“잘자요, 아기 마님.”
달콤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을 느끼며 아리엘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침대에서 울지 않았는데도 다음날 아리엘의 눈은 퉁퉁 부어 왕눈이 개구리같이 되었다.
‘으으 창피해.’
부끄러워서 밖으로 놀러 나가지 않고 방에만 있었는데…….
벌컥.
점심 먹는 중에 마티어스가 방으로 들이닥쳤다.
마티어스 뒤에 집사 알렌이 서 있는 걸로 봐서 그에게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수잔이 바빠서 아리엘의 식사를 차리는 걸 알렌에게 맡기고 간 탓이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눈이 부은 걸 확인하더니 느리게 팔짱을 꼈다.
“왜 울었지.”
아리엘은 잘 떠지지 않는 눈만 꼼빡거렸다.
어제 일을 다 설명하기엔 지금 입 안에 칠면조 샌드위치가 가득 들어있어서 난감했다.
아리엘이 대답이 없자 마티어스가 방 안을 쭉 둘러보았다.
“장난감이 부족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역시나 샌드위치가 말을 막았다.
마티어스가 샌드위치로 볼록한 아리엘의 뺨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역시 어린애에겐 장난감이 부족해.”
그 말만 남기고 마티어스는 다시 나가버렸다.
아리엘이 칠면조 샌드위치를 다 삼켰을 쯤에는 이미 복도에서도 사라지고 없었다.
오후쯤엔 아리엘이 울었다는 소식이 저택 전체에 다 퍼졌는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아리엘 방에 다녀갔다.
주방장 홀슨은 아리엘이 좋아하는 특제 자두 푸딩을 듬뿍해서 솥째로 올려보냈고, 하녀들은 예쁜 비단실 매듭을 가져와 아리엘의 창가에 줄줄이 걸어주었다.
심지어 웬만해선 1층을 떠나지 않는 정원사 우즈까지 찾아왔다.
과묵한 우즈는 아무 말 없이 아리엘의 방에 튼튼하고 예쁜 나무 그네를 설치해주고, 화병에 꽂힌 윈터베리를 한 번 본 뒤 자리를 떠났다.
아리엘은 새 나무 그네에 앉아서 발장구를 치다가 물었다.
“다들 왜 이러는 걸까요, 수잔?”
내가 한 번 운 게 무슨 대수라구요.
겨울 시즌에 네 번 있는 커튼 교체 때문에 오늘 하루종일 바빴던 수잔이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다들 아기 마님 걱정을 하는 거예요. 보통 아기 마님 또래는 부모님을 떠나서 한 달이나 다른 집에 있다보면 향수병에 걸리거든요.”
“하지만 난 아버지랑 오라버니 안 보고 싶은걸요.”
“다른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니까요. 그리고 안다고 해도, 어린 마님이 이 집에서 지내는 걸 힘들어할까봐 걱정할 수도 있고요.”
아리엘은 전혀 생각지 못한 수잔의 말에 놀랐다.
이렇게 따뜻하고, 배부르고, 좋은 사람들이 옆에 있는데 어떻게 라카트옐 저택을 싫어할 수 있을까?
아리엘은 그리워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향수병 자체를 겪지 못했다.
오히려 이곳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가면 여기를 그리워하게 될 것 같았다.
“아기 마님이 이곳에 잘 적응하고 여기에서 행복하시길 바래서 모두들 저러는 거랍니다. 물론 대공님께서 저러시는 건 처음 보지만요.”
설명해준 수잔은 아리엘 방의 바깥쪽 커튼을 상아색으로 바꾸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기 마님은 좀 더 어린애답게 구실 필요가 있어요. 누군가 좋은 걸 주면 왜 주지? 내가 받을 자격이 있나? 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 좋다. 하고만 여기시고요.”
아리엘이 벙쪄있자 수잔이 장난스레 웃었다.
“오늘같은 상황에 보통 아이였다면 더 어리광을 피울 거라고요. 이 기회에 원하던 걸 해달라고 조르겠지요.”
그렇지만 난 이미 필요한 게 다 있는걸요?
아리엘은 고개만 갸웃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주변의 생각이 다르다는 건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집사 알렌은 루시안이 아기일 적에 울음을 달랬다던 거대한 독수리 박제를 꺼내 와서 아리엘이 가지고 놀도록 해주었다.
아리엘은 독수리를 보는 게 처음이라 신기해하며 윤기나는 깃털과 단단한 부리를 구경했다.
이걸 보고 울음을 터트리는 게 아니라 울음을 그쳤다는 아기 루시안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루시안을 떠올려 볼 수 있어서 무척이나 즐거웠다.
재무관 달튼은 아름다운 삽화가 그려진 새 양피지 그림책을 한 질 선물해 주었다.
아리엘은 신이 나서 텅텅 비어있는 책꽂이에 책들을 가지런히 꽂아놓았다.
그리고 마티어스는…….
마티어스가 자리를 떠난 지 몇 시간 만에 아리엘 방에는 커다란 장난감들이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아.”
과거 열일곱 살까지 살았기에 어린 아이용 장난감같은 것엔 그다지 관심이 없던 아리엘조차 놀랄만한 물건들이었다.
‘이건 장난감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인 것 같은데?’
마티어스가 선물한 장난감은 커다란 인형의 집과 방주 모양 장난감이었다.
방주 모양 장난감은 정말 대단했다.
부드럽게 사포질한 붉은 나뭇결에 하나하나 정성스레 옻칠을 해서 만든 나무 장난감이었는데, 배 안의 방끼리 맞추어서 조립을 할 수 있었다.
놀라운 건 방끼리 어떻게 조합해도 마지막 모양은 배 모양이 된다는 것이었다. 커다란 함선, 이층짜리 탑선, 안락한 방주…….
심지어 송진을 발라 마감해 실제로 물에 띄울 수도 있었다.
인형의 집은 더욱 감탄을 자아냈다.
인형의 집은 라카트옐 저택을 그대로 축소해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무척이나 화려하고 정교했다.
가구나 집 안의 구조도 거의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공저 지붕에 얹힌 푸른벽돌이 인형의 집에서는 사파이어고, 얼음별 탑 꼭대기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다는 점 정도?
저택을 반으로 쪼개서 열자, 안에서 사람 모양 목각인형들이 앉아있거나 서 있거나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리엘은 그 중에서 가장 조그만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인형을 보고 활짝 웃었다.
‘이거 나네!’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 인형을 보고는 살짝 뺨을 붉혔다.
“루시안…….”
두 인형을 얌전히 붙여놓은 아리엘은 기분이 좋아졌다.
예쁜 인형의 집은 들여다보고만 있어도 백 개의 이야기를 지어내며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이건 라카트옐 저택이니까.
아리엘은 자기 키의 3분의 2쯤이나 되는 커다란 인형의 집을 꼬옥 껴안았다.
이게 있다면 이혼해서 이 저택을 떠나더라도 계속 기억할 수 있겠지.
아리엘은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선물을 구경했다.
어른들이 가져도 손색이 없을 만큼 대단한 것들이었다.
두 장난감 모두 제작한 장인의 이름자가 필기체로 새겨져 있었다.
“마음에 드나?”
아리엘이 장난감을 구경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티어스가 물었다.
아리엘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마티어스에게로 뽀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마티어스의 다리를 한아름 껴안았다.
“네.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마티어스님.”
아리엘의 키는 너무 작고 마티어스는 너무 커서 아리엘은 겨우 그의 반토막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허리를 껴안을 수조차 없었다.
마티어스가 그녀의 머리를 매우 쓰다듬고 싶다는 얼굴로 끙 소리를 냈다.
“이게 끝이 아닌데.”
“네에?!”
아리엘이 놀라자 마티어스가 미간을 좁히며 서늘하게 웃었다.
“창밖을 봐라.”
아리엘은 도도도 달려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원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탈만한 화사한 나들이 마차와 하얀 조랑말들이 서 있었다.
“마티어스님! 저게…….”
“네 거다. 봄이 되면 놀이 마차로 써.”
“…….”
아리엘은 어쩔 줄 몰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좋은데 무서웠다. 이런 선물들이 그녀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마티어스가 차분하고 서늘하게 아리엘을 내려다보았다.
“너한테 과분한 건 하나도 없다. 아리엘라.”
그리고 그는 아직도 많이 남은 놀이 공간을 바라보았다.
“참, 알렌 말로는 독수리 박제를 가지고 놀았다면서. 박제도 몇 개 해줄까?”
아리엘은 펄쩍 뛰었다.
박제는 신기하긴 했지만 좀 무섭기도 했다.
“아뇨, 그건…… 진짜 동물로 만드는 건 아직…….”
“그럼 실제 크기 인형으로 해주지.”
그렇게 커다란 사슴모양 인형과 재규어 모양 인형. 토끼와 양 모양 인형이 방 한편에 세워졌다.
진짜 동물과 똑같이 생긴데다 똑같은 털 감촉을 가진 사치스러운 인형들이었다.
‘너무 많은데…….’
아리엘의 머릿속은 오늘 하루종일 받은 선물 때문에 헤롱헤롱해졌다.
그래도 다들 그녀를 신경써준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이따가 저녁 시간에 보자며 방을 나서던 마티어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에게서 은근한 미련이 느껴졌다.
“유리 온실도 몇 개 해줄까?”
아니. 정말로 이젠 괜찮은 것 같아요, 대공님.
* * *
스스로의 외모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한 아리엘은 부지런히 저택을 돌아다니며 저택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무거운 금 태엽이 움직이는 소리는 듣기 좋구나.’
중앙 홀에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 앞에 앉아 초침이 지나는 소리를 하염없이 들으며 기억해두기도 하고,
‘아, 사자 석상의 눈에 박힌 보석이 달라.’
층마다 있는 석조 분수끼리 다른 모양을 찾아내 보기도 했다.
하루는 사슴모양 인형을 복도에서 가지고 놀다가 사슴 등에 탄 채 깜빡 잠이 들었는데,
“으음……?”
깨어 보니 그녀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숨을 죽이며 구경을 하고 있어서 어리둥절했던 일도 있었다.
저택을 알아가고 내 집으로 삼는 것은 아리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예전의 아리엘은 한 번도 집이란 것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태어나고 자란 루실리온 후작가는 악몽 같은 곳이었고, 팔려가서 머물게 된 마법사 무리의 거처는 매일 피를 토했던 곳으로만 기억에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공가 저택은 달랐다.
아리엘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보금자리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었다.
갓 빤 담요에서 나는 햇볕 냄새.
하녀들이 방망이로 도담도담 두드려 푹신하게 부풀려준 거위깃털 이불.
잠결에 시야에서 녹아드는 레이스 캐노피.
비틀비틀 일어나다가 폭 넘어져도 그녀를 받아 안아주는 부드러운 털 양탄자나 비몽사몽할 때 받는 수잔의 입맞춤.
아리엘은 그것들을 차곡차곡 집이라는 단어에 담아 놓았다.
호의와 애정을 가득 가지고 대해주는 대공가 사람들도 함께.
사실 아리엘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하녀장 수잔과 집사 알렌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15년 넘게 혼자 저녁 식사를 고수하던 대공 마티어스가 저녁 테이블에 아리엘의 자리를 마련하라고 했을 때부터 저택 내부는 조용하게 발칵 뒤집혔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용인이 10년은 훌쩍 넘게 이곳에서 일해온 터라 그 파급력은 더욱 대단했다.
“대공님께서 며느님되시는 아기 마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신대!”
“세상에!”
라카트옐 저는 오래된 가문의 저택답게 유서 깊고 고풍스러웠다.
하지만 그 대신 어둡고 조용하며 침체된 분위기 또한 짙게 깔려있었다.
워낙 비밀이 많은 가문이라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도 대부분 말수가 적고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리엘이 들어온 후, 그런 사용인들마저도 놀라 숨죽인 소리를 지르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겸상을 하시는 걸까?”
“아기 마님 식사는 제대로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난 대공님 그림자만 봐도 오금이 저리던데.”
“아직 어리신 분이니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아.”
라카트옐 가 남자들의 위압감에 대해 잘 알고있는 사용인들은 어린 아기 마님이 겪어야 할 무서운 저녁 테이블에 진심으로 가슴 아파했다.
그런데…….
“새로 오신 아기 마님말이야, 대공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셨다더라.”
그 부분이 사용인들에게는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
“심지어 하녀장님 말씀으로는 대공님이 아기 마님 식단에 맞추셨다는데?”
이 부분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마티어스 주인님이 얼마나 무섭고 냉정하신 분인데.”
“맞아. 당연히 따로 준비하라고 하셨겠지.”
하지만 곧 마티어스가 매일 아리엘과 함께 저녁을 먹고, 아리엘 위주의 식단에 아무 불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저택은 큰 충격에 빠졌다.
사용인들은 낮에 어린 대공자비가 집사와 함께 눈앞을 지나가면 숨을 멈추고 바라보기 바빴다.
그리고 주방에 모여서 열심히 찬양을 늘어놓았다.
“이야, 루시안님과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시던데요. 분위기부터가.”
“맞아요. 정말 달콤하고 귀여운 아가씨에요!”
그들은 악마나 다름없는 작은 주인님 옆에 저런 귀여운 존재가 깃들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들었어, 그 얘기? 작은 주인님이 아기 마님께 첫눈에 반해서 청혼하셨다는 거.”
“난 대공자님이 어린 마님께 입맞춤하시는 것도 봤어. 순간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니까!”
피, 전쟁, 광기로 악명이 드높은 라카트옐 남자와 결혼을 한 것도 모자라 두려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가족으로 인정받다니.
오랜 시간 마티어스와 루시안 라카트옐의 모습을 봐 온 사용인들에게 아리엘은 천지개벽을 만든 위대한 존재였다.
뿐만 아니라 아리엘의 외모는 모두를 꿀단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스칼렛 레드의 사랑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고, 백설같이 희고 투명한 얼굴은 보호본능을 불러일으켰다.
사르르 녹을 것 같은 스트로베리색의 둥근 눈동자는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는 사람도 화를 풀게 할 만큼 달콤한 모양이었다.
앙증맞은 콧망울이나 보송보송한 뺨, 종긋한 핑크빛 입술도 귀여웠다.
또래에 비해 월등히 작은 키와 몸집 때문에 말투에 비해 어려보이는 것도 귀여움에 한 몫을 했다.
아리엘은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모두는 얼음뿐인 라카트옐 저택에 부는 따스한 바람을 이런 식으로 납득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귀여운 분이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야…….”
아리엘만 모르는 일들이 저택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 * *
며칠 뒤.
귀족계에서 유명한 사교 모임의 주도자인 베아트리체 공작 부인의 모임 날이었다.
모임에 참석한 귀부인들은 오늘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어디서 소문이 샜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공가에서 아리엘의 그림을 자선 경매 기증품으로 내 놓았다는 말이 돌았던 것이다.
그들은 귀부인들답게 모두 목소리를 낮춰 소근소근 떠들어댔다.
“소문 들으셨나요? 루실리온 후작 영애, 아니 라카트옐 대공자비의 그림이요.”
“그럼요. 내일 열릴 황실 빈민구제 자선 연회에 내놓을 거라잖아요.”
“어떤 그림일까요?”
한 귀부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비밀스레 말했다.
“제가 사돈의 친구의 팔촌의 지인에게 들었는데……. 대공자비의 교양이 상당하대요.”
“그럼 그림도 뛰어나겠네요.”
“그러니까 대공님 마음에 쏙 들어 며느리가 된 게 아니겠어요?”
“어머나, 정말 궁금해지네요.”
목소리는 낮고 속삭이는 투였지만 말을 나누는 귀족부인들의 눈동자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요즘 사교계에는 아리엘에 대한 과장된 소문이 흘러 넘쳤다.
그 가운데 그녀에 관한 나쁜 이야기들은 아직 수면 아래에 묻혀있었다.
아리엘이 루실리온 후작가의 청동색이 아니라 붉은색 머리카락이라는 것과 후작의 친딸이 아닐수도 있다는 하녀발 뜬소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당장 라카트옐 대공이 마음에 들어 며느리로 들이고, 최연소 소드마스터인 소문의 대공자가 첫눈에 반했다는 소녀가 미친 듯이 궁금한 지경이었으니까.
‘분명 엄청난 소녀일 거야.’
그 라카트옐 가에서 마음에 들어하고, 사파이어 광산을 예물로 내놓고, 열 살이 되자마자 뺏길까 걱정된 듯 후다닥 결혼시켜버린 것을 보면 분명해!
귀족들의 머릿속에서 아리엘은 한없이 대단해졌다.
물론 그들 중에 아리엘을 실제로 만나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황실이 주최한 빈민구제 연회 날이 찾아왔다.
연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붐볐다.
심지어 몸이 약한 귀부인들조차도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가며 나왔을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리엘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고 이제 절정에 달해있었다.
연회의 기증품을 맡은 캐터벨 백작이 라카트옐의 문장이 찍힌 봉투를 집어들었다.
“라카트옐 대공가에서 내놓으신 물건입니다. 첫번째로는 대공자비님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그림을. 다음으로는…….”
글자를 읽으려던 백작의 목이 턱 막혔다.
“세, 세이렌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내놓으셨군요……!”
“헉!”
수런거리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숨막히는 소리만 낸 뒤 멈춰있었다.
세이렌의 눈물이라면…….
다이아몬드들 중에서도 희귀한 블루 다이아몬드가 커다랗게 한 줄로 박힌 어마어마한 물건이 아닌가!
세이렌의 눈물은 오늘 귀족들이 내놓은 물건들을 다 합쳐도 사지 못할 만큼 값비싼 목걸이였다.
살아생전 그것을 구경이라도 한 번 해보고 싶어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귀중한 걸 자선 연회에 아무렇지 않게 턱 던져주는 대공가의 부에 대해 놀라고, 그 다음에는 다른 것에 경악했다.
잠깐만. 이거…… 순서가?
이런 물품을 내놓을 때는 더 귀중한 것을 앞에, 덜 귀중한 것을 뒤에 두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그 세이렌의 눈물 앞 순서에 다른 게 있었다.
바로 대공자비의 그림.
‘이건 블루 다이아몬드보다 그 그림의 가치가 높다는 의미인가?!’
귀족들은 모두 경악하며 천으로 가려진 그림을 바라보았다.
캐터벨 백작이 떨리는 손으로 천을 내렸다.
장내에 모인 자들은 빛에 눈이 부신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림을 영접했다.
“오오……!”
그 날은 제국 역사상 자선금 판돈이 가장 크게 오간 날이었다.
귀족들은 단체 최면에라도 빠진 듯 가격을 올렸다.
“천만 데날!”
“천 오백만 데날!”
“질 수 없지. 이 천 오백!”
아리엘에게는 흔한 '그림 1'이었지만 지금은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최고에 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림이 블루 다이아몬드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달라보였다.
그림이 어떻든, 대공이 블루 다이아몬드보다 값지다고 선언한 이상 무조건 그림의 가치는 다이아몬드 이상이었다.
귀족들은 너도나도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제쳐놓고 아리엘의 그림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저건 내가 사겠소.”
“저희 백작가에서 두 배를 내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그 자리에 참석해있던 황제는 라카트옐 가에서 벌인 기행에 껄껄 웃고는 한 마디를 던졌다.
“가장 많은 자선금을 낸 자가 가져갈 것이오.”
그 날 낙찰받은 자는 정확히 5천만 데날을 내고 그림을 가져갔다.
그림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귀족들은 그림에 대해서 떠들어대기를 그치지 않았다.
“아, 그 그림은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는 듯 했어요.”
“어머. 저도 똑같이 느꼈어요.”
“그렇다면 저 그림의 의도는 세계 평화이겠군요!”
아리엘이 이 일련의 과정을 알았다면 무척이나 황당해했을 것이다.
그녀의 의도는 그렇게 심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 그림은 두 귀족 가문들의 손을 더 거쳐서 7천만 데날의 값어치를 가지게 되었다.
한 달 뒤에 마티어스가 그림을 다시 사 아리엘에게 돌려줄 때엔 8천만 데날의 증서와 함께였다.
그림에 담긴 의도는 심플했다.
세계 평화를 의도했다고 칭송받았던 그 그림에게 원작가인 아리엘이 붙인 이름은 이것이었다.
수잔의 설탕통.
* * *
하얀 레이스 테이블매트가 깔린 위에 눈부신 도자기 트레이가 사뿐히 놓였다.
트레이엔 갓 구운 팬케이크와 시럽 단지, 작은 버터 조각이 올려진 접시들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냠.
아리엘은 포크로 팬케이크를 찍어 황금빛 시럽이 흐르지 않게 재빨리 조그만 입속에 집어넣었다.
아, 폭신해.
아침에 일어나서 달콤한 메이플 시럽을 뿌리고 버터를 한 조각 올린 팬케이크를 듬뿍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해졌다.
“알렌을 만나러 갔다 올게요.”
아리엘은 노집사 알렌과 보내는 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늦은 오전에 조금 한가해진 알렌과 천천히 걸으면서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웠다.
알렌만큼 이 집에 대해, 그리고 이 집 사람들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리엘은 차근차근 하나씩 라카트옐 가문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배워가고 있었다.
“알렌. 그런데 라카트옐 가문은 언제부터 있었나요?”
“예. 그건 말이지요, 마님.”
알렌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늘 어딘가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래서 아리엘은 그가 나이 많은 할아버지인데도 불구하고 조금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라카트옐 가문은 제국 이전의 제국, 그보다 더 전의 국가에서부터 존재해왔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지요.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가문의 직계 남자들만 알 수 있어서 저도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엄청 오래됐다는 거네……!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가요?”
“모두가 필요로 하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라카트옐 가는 전통적으로 '수호자' 직위를 고수해왔습니다.”
수호자요?
아리엘이 눈빛으로 묻자 알렌이 설명을 이어갔다.
“북부는 제국 전체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사람이 살만큼 녹록한 곳이 못 됩니다.”
제국의 북쪽에는 거대한 산맥이 있었다.
이 산맥과 이어진 북부의 광활한 땅은 오래전부터 라카트옐 가문의 것이었다.
그리고 북부 산맥을 이루는 고대 숲과 험준한 바위산에서는 마수가 자주 출현했다.
산맥에 가치 높은 광맥이 많은데도 사람들이 쉬이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라카트옐 가문은 이 척박한 영지를 소유하면서 마수로부터 제국을 지켜왔습니다. 그 덕에 제국은 광산을 만들 수 있었지요. 거기에서 나오는 광물로 부흥해 현재에 이르렀고요.”
우와, 완전히 공신 가문인 거구나.
아리엘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황가에서 수호자의 직위를 다른 가문에 맡길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라카트옐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황가는 거슬릴 것 같은데요.”
알렌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렇게 어린 분이 그런 것까지 예측하시다니…….
“마님께서는 정말로 영민하시군요.”
그가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라카트옐을 대체할 수 있는 가문은 없습니다. 북방의 마수를 다른 가문에게 맡기면 모두 전멸해 돌아오니까요.”
“그럼…….”
“예. 라카트옐 피를 이은 남자분들은 보통 이상으로 강하십니다. 한 명이 일당 천, 만을 하시거든요. 마수 토벌시에도 푸른 사자 기사단만 데려가시지요.”
황제 입장에서 라카트옐은 거슬리는 존재였지만, 수호자가 없이는 제국 존망 자체가 위험해지기에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 황가도 라카트옐의 공을 인정해주며 황가 아래 두는 것을 선택했다.
“라카트옐은 친황가이자,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황가를 위협하지 않고 황위 다툼에서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대공 위를 받았지요.”
대공 가문은 귀족들 중 유일하게 가문 자치권이 있었다.
대공령이 제국의 속국인 왕국들과 맞먹기 때문에 소국의 왕과 같은 대접을 해주는 것이다.
“가문 자치권은 어떤 건가요?”
“가문의 비밀을 가질 수 있는 권리. 그리고 가문의 일에 황가가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권리입니다.”
아리엘은 감탄했다.
과거에도 라카트옐 가문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알고 나니 더 대단했다.
제국에서 대공가의 존재감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것이었구나.
“저기, 알렌.”
“예. 마님.”
“가문의 비밀이란 건 뭔가요?”
아리엘이 묻자 알렌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아리엘은 아차하고 얼른 말을 덧붙였다.
“혹시 곤란한 질문이었다면 미안해요.”
대공자비라고는 해도 그녀는 어차피 성인이 되면 루시안과 이혼해 이곳을 나가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니 황가조차 함부로 캐낼 수 없는 비밀을 알려달라고 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었다.
섣불리 비밀을 알았다가 마티어스나 루시안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아리엘은 또박또박 차분하게 말했다.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알렌. 난 이만 가볼게요. 오늘도 고마웠어요.”
“……예. 살펴서 돌아가십시오. 마님.”
알렌과 헤어진 아리엘은 타박타박 방으로 돌아왔다.
라카트옐 가문의 비밀에 대해서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아리엘 자신도 미래를 겪고 돌아왔다는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오래된 가문에 비밀이 없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겠지.
그리고 라카트옐 가는 광기로 악명 높은 가문이었다.
드러난 것이 그 정도라면, 감춰진 것은 오죽할까.
선조 때부터 숨겨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하암.”
‘열심히 걸었더니 졸리다.’
아리엘은 낮잠 베드에 폴싹 쓰러져 복슬복슬하고 동그란 분홍색 쿠션에 머리를 기댔다.
어린 소녀는 금세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 * *
이 집에 들어온 지 두 달째.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아리엘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작은 한숨에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이 리본처럼 한들한들 흔들렸다.
‘길을 잃었어.’
오늘은 알렌과 멀리 동관 끝 발코니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관 끝에는 과거 황실의 공주님이 손님으로 묵었던 방이 있었는데, 방과 연결된 발코니에 대리석 버드 배쓰가 있었다.
사치품을 잘 모르는 아리엘이 물이 고여있는 오목하고 우아한 석조물에 대해 묻자 알렌이 정중하게 설명해 주었다.
“여기에 머무시던 공주님께서 새를 좋아하셨거든요. 그래서 새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새들이 물을 마시다 물장난을 칠 수 있는 버드 배쓰가 있는 거랍니다.”
와. 봄이 되면 여기서 새들이 물장구치는 걸 볼 수 있는 걸까?
아리엘은 기대감으로 뺨을 붉혔다.
그리곤 물에 손가락을 담가봤다가 차가워서 재빨리 손을 빼냈다.
아이다운 천진한 미소가 양뺨 가득 자리했다.
노집사 알렌은 그 모습을 보고 심장에 찌르르 흐르는 감정을 느꼈다.
마님을 두고 귀여우시다느니 하는 아랫것들의 경망한 언행을 단속하는데 힘쓰고 있는 그였지만…….
정말로 어린 마님은 달콤한 빛깔의 루비를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같이 사랑스러웠다.
그가 주인 마티어스와 루시안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충심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공주님의 방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
아리엘은 바쁜 알렌을 배려해 혼자 돌아가기로 했다.
“동관은 개축한 지 오래되어 복잡하니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마님.”
“아니에요. 이제 길을 거의 다 익힌걸요. 혼자 연습도 해보고 싶구요.”
그렇게 홀로 길을 나선 아리엘은, 남관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낯선 곳을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지…… 아까부터 계속 똑같은 곳인 것 같은데.”
그때였다.
“아, 아프다고요!”
“조용히 해라. 이놈아! 네 놈이 똑바로 했다면 맞을 일도 없겠구나!”
아리엘의 귀에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
그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종종걸음을 쳐 다가갔다.
저택의 사용인을 마주친 거라면 행운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물어봐야지.’
아리엘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문 앞에서 서서 수잔이 하던 것처럼 따라서 똑똑 노크했다.
하지만 안에서는 더 큰 소리들이 들려올 뿐이었다.
‘……노크 소리가 안 들리나?’
조금 고민하던 아리엘은 문을 살며시 밀었다.
문 안쪽에는 사제복 같은 흰 로브를 입은 중년 남자 한 명과 아리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왁왁거리며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
놀랍게도 방 안의 모든 가구가 공중에 둥실거리며 떠 있었다.
* * *
잠시 놀랐지만, 아리엘은 금세 침착해졌다.
‘마법이구나.’
어린 나이긴 했지만, 그녀도 과거에 마법사였다.
그것도 고위 클래스의 공격 마법사.
다른 마법을 보고 쉽게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방 안에 있던 두 사람은 아리엘을 보고 싸우던 것을 멈추고 굳어버렸다.
둥둥 떠 있던 가구들이 천천히 땅에 내려앉았다.
“너, 넌 누구냐!”
어린 쪽이 한 박자 느리게 소리쳤다.
아리엘은 일단 이 집의 정식 안주인답게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루시안 대공자님과 결혼한 아리엘이라고 해요.”
“뭐라고? 결혼?”
얼빠진 질문과 동시에 소년의 머리통 위로 막대기가 떨어졌다.
따악 경쾌한 소리를 내며.
“이놈! 대공자비님께 건방지게!”
“아얏! 할아버지!”
소년은 머리통을 부여잡고 통통 발을 굴렀다.
어지간히 아픈 모양이었다.
나이 많은 쪽이 아리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대공자비님. 저는 이 집의 마법사 브루노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그가 아리엘에게 보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흉흉한 기세로 옆의 소년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 한심한 손주 놈이자 조수인 히스고요.”
자신들을 소개한 브루노어가 아리엘을 신중하게 살피며 물었다.
“아까의 광경,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조금은 놀랐어요.”
솔직하게 인정한 아리엘이 앳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렌에게 미리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더 놀랐을 거예요. 제가 안 놀란 게 서운하셨다면요.”
브루노어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대담한 분이시군요.”
그가 빙긋 미소지었다.
“안 놀라셨다니 다행입니다.”
“뭘 하고 계셨던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아리엘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가 자기 머리를 탁 쳤다.
“아! 이 녀석에게 청소 스킬을 가르치고 있었지요. 물건이 상하지 않게 들어 올린 후 치우도록…….”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건을 들어 올리는 마법은 꽤 어려웠다. 무게가 무거운 물건일수록 마나도 많이 들고.
청소를 위해서라면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브루노어가 크흠흠 헛기침을 했다.
“물론 저는 흡입 마법으로 청소를 합니다만…….”
“그러니까 그냥 골탕 먹이려고 시킨 거잖아요!”
“입 다물어, 이놈아! 이게 다 널 교육시키기 위한 참된 마음이다!”
투닥거리는 조손을 본 아리엘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소녀의 웃음소리를 들은 두 남자가 싸우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엘이 브루노어를 향해 말했다.
“이곳 관리를 도와주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황궁 대마법사셨다는 것도요.”
“허, 그거 쑥스럽군요. 지금은 그냥 손자 녀석이나 가르치며 이곳에서 소일거리나 하는 은퇴 마법사에 불과한데요.”
아리엘은 그게 모두 겸양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과거 마법사 무리에서 지낼 때 마법사들에게서 대마법사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마법사는 마법사 만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탁월한 마법사였다.
그러니까 한 백 년에 한두 명 정도 나오는 사람이었다.
“음하하, 들었냐? 우리 할아버지는 초 천재 마법사다. 그리고 나도 초 천재…… 아얏!”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아리엘에게 자랑을 해대던 갈색 머리 소년은 또 머리에 꿀밤을 맞았다.
“우씨, 할아버지!”
“스승님이라고 하랬지!”
“때리지 좀 마세요! 아씨 마법사가 무슨 이렇게 무력을 행사해. 대체 왜 내가 이 계집애한테 말할 때마다 얻어 맞…… 우읍.”
브루노어가 뭘 한 건지는 몰라도 소년의 입이 저절로 꽁꽁 잠겨버렸다.
혹시 저게 침묵 마법인가?
아리엘을 향해 돌아선 브루노어가 머리를 숙였다.
“손자 녀석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작은 손으로 손사래를 친 아리엘은 본래의 목적을 깨닫고 말했다.
“참, 제가 지금 길을 잃어서 헤매고 있었는데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흰 로브를 입은 브루노어가 저택 지도를 소환하려다가 멈칫했다.
“걸어서 돌아가시려면 고단하실 텐데 그냥 이동시켜드릴까요?”
“음, 아니에요. 길을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브루노어가 손자 히스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왔다.
“히스 네 이놈. 마님께 길을 알려드리고 오거라. 늙은 할애비는 마나가 쇠잔해서…….”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는 쇠잔한 사람답지 않게 손자에게 눈을 부라렸다.
“꼭 존댓말하고. 허튼짓하면 알지? 침묵 열흘 형이다.”
“아, 알았다고요!”
소년은 버럭 소리를 치고 아리엘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따라와! ……요.”
아리엘은 브루노어에게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반가웠어요, 브루노어.”
“살펴 가십시오.”
브루노어가 인사하며 악수를 청하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리엘은 작은 손을 내밀어 브루노어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순간 그가 멈칫했지만, 아리엘이 이상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히스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탕탕 발소리를 냈다.
“빨리 가자! 요.”
* * *
돌아가는 길.
퉁명스러운 태도의 소년에게 안내받는 건 썩 즐거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리엘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수잔이 자장가로 종종 불러주는 곡조 중 하나였다.
루시안이 떠난 뒤 두 달 동안 또래라고는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아리엘은 새로 만난 또래인 히스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빨리 와! ……요.”
히스는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되지도 않는 존댓말을 해댔다.
“귀찮아 죽겠네, 하여간…… 요. 할배가 노망이 난 게 분명해. ……요. 왜 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요.”
노망이니 뭐니 해도 할아버지가 무섭기는 한 모양이다.
‘귀엽네.’
아리엘은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히스, 그냥 편하게 말해도 좋아.”
“뭐라고?! 요?”
“브루노어는 가문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지만 너는 브루노어의 손자일 뿐이잖아. 사용인이 아니니까.”
“하지만 귀족한테는 존대를 써야 한다고 그랬어! ……요.”
아리엘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내가 괜찮으니까 괜찮아.”
미심쩍은 듯 그녀를 노려보던 히스가 턱 팔짱을 꼈다.
“흥! 좋아.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귀족 나부랭이들은 전부 마음에 안 들어. 나같은 초 천재 마법사가 존댓말이라니 분통 터졌다구.”
“히스도 마법사구나.”
“당연하지. 내가 왜 그 괴팍한 대마법사 밑에서 구르고 있는데. 더 위대한 마법사가 되려고 그러는 거란 말이야.”
말 한마디를 붙이면 신나서 여러 마디로 되돌린다.
아리엘은 문득 히스도 이 집에서 또래를 전혀 만나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참 브루노어의 학대 아닌 학대에 대해 떠들던 히스가 물었다.
“근데 너 대공자비라고 했지?”
“응.”
“몇 살인데?”
“열 살.”
“힉. 말도 안 돼. 너 같은 게 무슨.”
“…….”
히스의 반응에 아리엘은 시무룩해졌다.
두 달 사이에 몸무게도 늘고 키도 조금 컸는데…….
매번 몸무게를 잴 때마다 일부러 우유와 간식을 잔뜩 먹고 저울에 오르는데도 수잔은 늘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한참 멀었어요, 하면서.
“정말 열 살이야. 그러는 히스는 몇 살인데?”
히스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은 갈색 머리 소년은 제 가슴을 팡팡 쳤다.
“나? 이 형님은 무려 열한 살이시다!”
풉.
아리엘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히스도 어리긴 마찬가지잖아.
지금은 아리엘의 나이가 더 적긴 하지만, 그녀는 과거에 나름 열일곱 살까지 살았던 경험이 있었다.
열네 살 소년임에도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던 루시안과는 달리 히스는 그냥 보통 남자아이 같았다.
“너, 너, 나를 그렇게 귀엽다는 눈으로 쳐다보지 마. 기분 나빠! 넌 나보다도 어리잖아!”
히스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중앙 통로에 도착했다.
지금부터는 아리엘도 혼자 방을 찾아갈 수 있었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히스.”
아리엘은 인사한 뒤 돌아섰다.
브루노어와 히스를 또 만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마티어스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뒤돌아선 그녀의 귓가에 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대공님이랑 가깝다며?”
아리엘은 얼른 뒤를 돌아섰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도 아직 확신이 잘 안 서는 부분인데.
“흥. 어려도 난 마법사야. 이 집에서 벌어지는 일쯤은 알고 있다고.”
“아…….”
“뭐야, 그 태평한 대답은.”
히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짜증스레 구시렁거린 소년이 말을 이었다.
“너, 대공이랑 가까운 거 대공자한테 티 내지 않는 게 좋아.”
“왜?”
“왜냐니. 당연히…… 잠깐. 너, 몰랐어?”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뭘 몰랐냐는 거지?
히스가 나름 진지한 표정을 담았다.
“대공이랑 대공자 두 사람, 사이가 엄청 나빠. 너 같이 쬐그만 애 하나쯤은 그 사이에서 등 터져 죽기 십상이라고.”
아리엘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마티어스님과 루시안 사이가 나쁘다고? 두 사람은 가족인데?
물론 아리엘과 후작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마티어스도, 루시안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히스가 아씨, 하며 자기 머리를 막 헝클어뜨렸다.
“아무튼 난 경고했다.”
그렇게 말한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 사라져버렸다.
아리엘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방으로 되돌아왔다.
수잔이 간식으로 피스타치오가 콕콕 박힌 머핀와 꿀을 섞은 따뜻한 우유를 가져왔다.
아리엘은 조그만 턱을 양손으로 괴었다.
‘둘 사이가 나쁘다니…… 처음 알았어. 왜 사이가 나쁜 걸까?’
두 라카트옐 사이가 나쁜 이유를 수잔이나 알렌에게 물어보자니 망설여졌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수잔과 알렌의 주인이자 상전이니까.
아리엘은 포근포근한 머핀의 머리부분을 와앙 깨물었다.
‘맛있다…….’
향긋하고 달콤한 머핀의 맛이 입안 가득 퍼지자 무거운 생각들이 녹아내렸다.
‘나중에 루시안이나 마티어스님에게 물어봐야지.’
생각을 정리한 아리엘은 우유에 가라앉은 꿀을 나무스푼으로 휘젓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
히스와 아리엘을 내보낸 브루노어는 그제야 창백해진 얼굴을 들었다.
그는 조그마한 붉은 머리 소녀의 손이 닿았던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것은…….”
무해해보이고 가냘픈 아이의 흰 손을 통해 느껴진 것은 어마어마한 마나였다.
브루노어는 직감적으로 아리엘이 평범한 소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대마법사인 그 정도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직감이었다.
‘과연 라카트옐이라 이건가. 들이는 사람 중에 아무도 평범한 이가 없으니.’
생각해보니 어린 여자아이가 육중한 가구들이 방 안을 떠다니는 것을 봤다면 적어도 비명은 질렀어야 정상이었다.
크게 동요한 기색이 없던 작은 얼굴을 떠올리자 소녀가 마법사라는 것이 확신으로 다가왔다.
‘마법 현상들에 노출된 적이 많거나, 적어도 몇 번은 있는 거겠군.’
브루노어는 새로 들어온 어린 마님에 대해 깊은 흥미를 느꼈다.
원래 마법사라는 것은 끊임없는 탐구욕으로 금자탑에 오르는 족속이다.
그 탓에 황궁 대마법사 직위를 잃고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브루노어는 아리엘의 달콤하고 밝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이 집의 폭군인 대공자 루시안과는 무척이나 다른 눈이었다.
‘하지만 마나의 기운은 매우 비슷한걸.’
기묘한 일이었다.
소드 마나를 지닌 루시안과 선천적 마나를 가진 아리엘의 마나가 비슷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브루노어는 자신의 흰색 마법사 로브를 정돈했다.
‘조만간 대공님의 집무실을 찾아가 봐야겠군.’
* * *
아리엘은 기다란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식전 음료와 에피타이저를 기다렸다.
마티어스가 집을 비웠기 때문에 오늘 저녁 정찬은 아리엘 혼자서 먹어야 했다.
전채 요리는 아리엘의 한입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에그타르트와 반 잔의 크랜베리 주스였다.
그녀는 윗면이 카라멜색으로 먹음직스럽게 그을린 에그타르트를 포크로 쪼개며 시무룩한 얼굴로 알렌에게 말을 걸었다.
“마티어스님은 오늘 아예 돌아오시지 않나요?”
한 팔에 흰 천을 두르고 아리엘의 잔에 크랜베리 주스를 따르던 알렌이 대답했다.
“예. 영지에 일이 생겨서 오후에 게이트를 타고 가셨습니다. 모레에 돌아오실 겁니다.”
“나쁜 일은 아니지요?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마님. 매년 서너 번씩 생기는 사소한 일이니 염려 마십시오.”
“네…….”
아리엘은 그녀 앞으로 펼쳐진 긴 식탁을 바라보았다.
식탁은 서른 명은 앉아도 될 만큼 크고 길었다.
하지만 마티어스와 함께 식사를 할 때는 이렇게 넓어 보이지 않았는데.
아리엘은 산미가 톡 쏘는 크랜베리 주스를 마신 뒤 냅킨이 무릎에서 흘러내리지 않도록 얌전히 덮었다.
마티어스가 없는 허전함을 지우기 위해 아리엘은 알렌과 대화를 나누었다.
“알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마님.”
“라카트옐 가문과 교류하는 가문이 있나요?”
보통 귀족 가문들은 정치적 성향이나 사업 관계 때문에 두세 가문 정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결혼 전 아리엘의 가문이었던 루실리온 후작가 또한 모니카 공작가, 베빌런 자작가와 연이 있었다.
아리엘이 이것을 아는 것은 후작이 다른 가문 사람을 초대할 때마다 아리엘에게 얌전히 처박혀 있으라고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후작은 매번 초대한 손님이 방문할 때마다 아들인 제롬과 함께 나갔다.
그래서 아리엘은 대공가와 교류하는 가문이 있다면 루시안의 아내인 그녀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리엘의 질문을 들은 알렌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협력 가문은 없습니다, 마님.”
어라?
“정말 없어요?”
“예. 마님께서 만들고자 하신다면 앞으로는 생기겠지만, 현재는 없습니다.”
어떤 가문도 혼자서 존재하기란 어려웠다.
귀족계 물정을 잘 모르는 아리엘도 그쯤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대공가에는 협력 가문이 없는 건가요?”
알렌이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 뒤를 약간 끌면서 말했다.
“……교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아리엘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깜박거렸다.
그것을 본 알렌이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설명 드려야 할까요. 대공가가 다른 가문과 교류하지 않는 것은, 사자가 개미와 친해질 필요를 못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사자와 개미요?”
“예. 개미의 지도자 정도와는 대강 대화해주겠지만 그 외에는 딱히 소통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
음,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대공가는 사자고, 다른 귀족들은 개미라는 거지?
알렌은 대공가를 설명할 때 이런 식으로 비유해서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라카트옐은 사람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인 것처럼.
단순히 라카트옐 가의 문양이 '불꽃 갈기를 가진 푸른 사자'니까 대공가를 사자라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개미들의 지도자가 설마 황제 폐하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리엘은 충실하게 식사 시중을 드는 알렌을 바라보았다.
얇게 저민 겨울 훈제 햄과 두툼하게 썰린 흰 치즈 조각이 아리엘의 접시 위에 놓였다.
아리엘은 식기를 달그락 내려놓았다.
“알렌, 라카트옐이 왜 다른 귀족들과 똑같이 개미가 아니라 사자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순간 알렌의 손이 흠칫했다.
아리엘은 자신이 핵심을 찔렀음을 알 수 있었다.
개미들의 지도자가 황제 폐하라면, 라카트옐의 비밀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엄청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리엘은 대공가의 어두운 비밀을 파헤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싶었다.
‘내 주제에 넘치게 알 필요는 없어.’
그래도 몰라야 하는 것이 뭔지 알아야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것 같았다.
알렌이 무례함을 무릅쓰고 침묵하자 아리엘은 질문을 바꾸었다.
“라카트옐 남자들에게는 위압감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건 왜 있는 건가요?”
이번에는 알렌이 깍듯하게 대답을 올렸다.
“예, 마님. 그것은 검을 익힌 자라면 알 수 있는 개념입니다. '소드 마나'라고 혹시 아시는지요.”
“아니요. 처음 들어요.”
마나라는 말로 유추해보건대 마법에 관련된 것 같았다.
그러나 아리엘은 마법 이론 지식이 전혀 없었다.
과거의 그녀는 실전 위주의 마법만 익혔고 누구도 그녀에게 이론을 가르쳐주지 않았었으므로.
“소드 마나는 검기(劍氣)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이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소드 마스터라고 합니다.”
아!
소드 마스터는 아리엘도 알고 있었다.
선천적 마나 사용자인 마법사와 달리, 후천적으로 마나를 다룬다고 했지.
“그러니까 소드마스터가 쓰는 마나는 일반 마나와 다르다는 거네요?”
“예, 그렇습니다.”
“그걸 소드 마나라고 부르는 거고요.”
“맞습니다.”
알렌이 설명을 이었다.
“소드 마스터는 자신이 가진 소드 마나로 공격이나 방어를 할 수 있습니다. 마나를 방출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기세라고 하지요.”
“그 기세가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라카트옐 고유의 위압감이라고 하는 건가요? 라카트옐 말고도 소드 마스터는 있을 텐데요.”
“그건…….”
아리엘은 멈칫하는 알렌의 태도에서 정답을 찾아냈다.
아하.
“……그게 라카트옐이 개미가 아니라 사자인 이유와 관련이 있는 거군요.”
알렌은 내심 놀랐다.
어린 분이 유추해 내기에 간단한 내용은 결코 아니었다.
‘통찰력이 대단하시군.’
그는 존경심을 담아 아리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마님.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라카트옐 가문 남자들은 검을 익히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그 소드 마나를 가지고 태어나신다는 겁니다. 혈통인 거지요.”
또랑또랑했던 아리엘의 표정이 감탄으로 조금 풀어졌다.
“와아, 선천적으로…… 그렇군요. 드문 건가요?”
“예. 라카트옐 외에는 아무도 선천적으로 소드 마나를 타고 나지 못합니다.”
“아주 특별한 거였네요.”
아리엘은 충분히 납득했다.
라카트옐은 특별한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엄청난 공격력과 타인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소드 마나를 타고 나는.
그것이 라카트옐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고, 그것 때문에 라카트옐은 인간 이상의 어떤 강점을 가지는 듯했다.
그게 개미가 아니라 사자인 이유겠지.
내막은 자세히 모르지만.
“…….”
알렌은 생각에 잠긴 아리엘의 눈치를 살폈다.
해맑고 사랑스러운 줄로만 알았던 어린 마님께는 의외로 예리한 면모도 있었다.
그는 아리엘을 모시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문의 일을 숨겨 마님께서 기분 나빠 하시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저번에 그가 곤란해하는 것을 알고 비밀은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주시기는 했지만, 엄연히 안주인에게 가문의 일을 숨기는 것이었다.
집사인 그는 가책을 느꼈다.
알렌은 아리엘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여 제가 숨기는 것이 있어 불쾌하시다면…….”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에요. 불쾌하지 않아요. 알렌이 대공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다는 건 잘 알고 있는걸요.”
그리고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오히려 안심이에요. 알렌은 나에 대한 것도 밖에서 그렇게 철저히 지켜줄 테니까요. 나는 알렌이 믿음직스럽고 고마워요.”
아리엘은 생긋 웃었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이라면 루시안이나 마티어스님이 알려줄 거예요. 나머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그러니까 정말로 괜찮아요.”
“…….”
알렌은 밀려오는 감동을 느꼈다.
‘다른 여주인 분들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해하거나 두려워하셨거늘.’
오랫동안 대공가 일을 살폈던 그는 아리엘 이전의 여주인, 그 이전의 여주인도 만난 적이 있었다.
라카트옐에서 여주인이 오래 버틴 역사가 워낙 없긴 했지만.
그 전의 여주인들이 보였던 반응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안주인으로서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게 마땅치 않을 수밖에.
하지만 어린 나이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아리엘이 대단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문을 배우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이곳을 존중해주시는구나.’
알렌은 이 상냥하고 영민한 어린 마님이 오래도록 이 집에서 함께 해주시길 마음속으로 깊이 기원했다.
* * *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흰 눈이 휘날렸다.
하얀 눈이 쌓인 길로 우아한 마차 한 대가 희미한 빛을 밝힌 채 천천히 달려왔다.
휘몰아치는 눈바람 속에서 마차에 그려진 라카트옐 대공가의 문양이 언뜻 보였다 사라졌다.
대공가의 문양을 단 마차는 곧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저택 입구에 멈춰 섰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영지에 다녀온 마티어스를 맞으러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나갔다.
바깥에는 늦겨울의 폭설이 내리고 있어서 마차에서 내린 마티어스의 어깨에 하얗게 눈이 내려앉았다.
아리엘은 안주인 자격으로 문 앞까지 나가지 않고 현관 안쪽에 서서 마티어스를 맞았다.
어깨를 털며 사용인들의 인사에 눈길도 주지 않고 들어오던 마티어스가 아리엘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리엘라.”
아리엘이 얌전히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마티어스님.”
그가 뒤따라오던 달튼에게 손을 까딱였다.
달튼이 얼른 들고 있던 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선물이다.”
마티어스가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아리엘에게 내밀었다.
아리엘의 가슴이 순간 두근거렸다.
‘책에서 읽은 적 있는 장면이야.’
아리엘은 요즘 달튼이 선물로 준 그림책 한 질을 차근차근 읽어가고 있었다.
책 속에는 그녀 또래의 아이들이 많이 나왔는데, 아이들은 아버지가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면 선물을 기다렸다.
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어떤 선물을 사갖고 와 달라고 조르는 경우도 있었다.
아리엘은 평생 자신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녀가 친아버지인 후작에게 최대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관심 정도였다.
차라리 관심을 꺼준다면 맞거나 욕설을 듣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후작가에 살 때 아리엘은 아버지가 외출할 때 안심했고, 돌아올 때가 되면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책 속 아이들처럼 아버지가 빨리 돌아오길 기다리는 설렘은 느껴본 적 없었다.
아리엘은 딸이 아빠를 기다리는 기분이 무엇일까 조금쯤 궁금했었다.
“…….”
마티어스에게서 선물 상자를 받은 아리엘은 뺨을 붉히며 발끝을 톡톡 두드렸다.
‘무슨 기분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
마티어스와는 법으로 아버지와 딸처럼 묶이긴 했지만, 진짜 아빠가 아니라 남편의 아버지일 뿐이니까 선물을 조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대공가에 온 직후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뭔가를 더 갖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엘은 선물 상자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마티어스가 외출했다 돌아오면서 가져다준 선물은 무척 기뻤다.
그건 그가 바깥에서도 아리엘을 생각하고 기억해주었다는 증표이니까.
아리엘은 자신도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생소한 느낌에 떨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고, 떨어져 있을 때도 서로를 기억하고, 무사히 돌아오면 기쁘다.
아리엘은 깨달았다.
책 속 아이들이 아빠가 돌아왔을 때 환호성을 지르며 문으로 달려가 아빠에게 매달리는 이유.
선물 때문만이 아니다.
그건 기쁨을 더해주는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선물은 아빠가 아무 일 없이 무사하게 가족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 안도감과 기쁨을 아리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리엘은 “잠시만요.” 하고 마티어스에게 고개를 숙여달라는 제스쳐를 했다.
마티어스는 이유를 묻지 않고 허리를 숙여 키 높이를 낮추었다.
아리엘은 선물 상자를 내려놓고 마티어스에게 인사했다.
“감사해요, 마티어스님.”
그리고 그녀는 발돋움을 해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쪽.
어린 소녀의 입맞춤을 받은 마티어스가 느리게 웃었다.
근엄한 분위기의 긴 흑발 머리 미남자가 미소짓자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흠.”
그가 아리엘의 뺨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
“……선물을 좀 더 자주 사와야겠군.”
아리엘은 어라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 거죠?
그녀는 재빨리 도리질을 쳤다.
마티어스가 고개를 뒤로 기울였다.
“아니면 자주 집을 비우든가.”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그, 그건 싫어요!”
마티어스가 피식 웃었다.
본심을 들켜버린 아리엘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마티어스가 바닥에 놓인 선물 상자를 집어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어린애는 어른보다 선물을 좋아해야지. 자, 방에 가서 풀어봐라.”
아리엘은 선물을 품에 꼭 안고 방으로 돌아왔다.
뒤따라 들어온 수잔이 물었다.
“어머? 대공님이 선물을 사오셨나 보지요?”
“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보는군요.”
수잔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마티어스님은 아들인 루시안에게 한 번도 선물을 해 준 적이 없는 걸까?
“어서 풀어보세요.”
그녀는 조심조심 포장을 벗기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뭘까?
뚜껑 안에 한 겹 더 싸인 얇은 분홍색 종이를 벗기자 조그만 물건이 아리엘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눈부시게 하얀 돌로 조각된 화려한 성 모양 장식품이었다.
“예쁘다…….”
그리고 엄청나게 비싸 보인다.
대체 이런 물건은 얼마 정도 하는 것이길래 마티어스님은 막 사오시는 거지?
얼마 전에 돈에 대한 개념을 배운 아리엘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30데날이 평민 가족이 한 달 동안 살 수 있는 돈이랬지.
1데날은 100세켈이고, 1세켈은 50미노…….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수잔이 다정하게 말했다.
“화이트캐슬 모양 오르골이네요.”
“오르골이요?”
오르골을 처음 보는 아리엘이 되물었다.
“네. 이런 오르골은 장인이 1년에 두세 개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정교한 물건이랍니다. 아마 주문 제작을 넣으셨을 거예요.”
산 게 아니라 주문한 거였구나. 그럼 더 비쌌을 게 분명하다.
아리엘은 장식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성 모양 장식 뒤에 보석이 박힌 정교한 열쇠 모양 태엽이 달려있었다.
“이렇게 가지고 노는 거랍니다.”
수잔이 다가와 태엽을 두어 번 돌려주었다.
태엽이 감기자 작은 성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영롱한 음악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와!”
아리엘은 팔짝 뛸 만큼 놀라며 즐거워졌다.
“예쁜 소리가 나와요.”
그녀는 직접 태엽을 감아보았다.
아름다운 곡조가 방 안 가득 달콤하게 차올랐다.
아리엘은 오르골 앞에 팔을 기대고 엎드려 눈을 감았다.
행복해.
조그만 입술 끝이 사르르 올라갔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날의 오후였다.
겨울이 가려고 하는지 대공저의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볕이 따사로웠다.
아리엘은 발소리를 살금살금 죽여가며 복도를 걸었다.
끌리지 않는 길이의 물방울무늬 민트색 드레스도 살짝 들고, 상아색 굽 낮은 구두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꿈치를 든 채였다.
그녀가 걷고 있는 곳은 대공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였다.
달튼을 만나러 몇 번 와보았지만 마티어스를 만나러 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와보고 싶긴 했지만…….’
일에 방해될까봐 걱정되는걸.
오늘은 마티어스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긴 했지만, 주위를 좀 살펴보고 바쁜 것 같으면 재빨리 돌아갈 생각이었다.
만약 돌아간다면 그녀가 찾아왔었단 걸 아무도 몰랐으면 했다.
지금 아리엘이 살금살금 걷고 있는 이유였다.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집무실 문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리고 살며시 문에 귀를 대어보았다.
엿듣는 건 나쁜 거지만 바쁜지 안 바쁜지 여부만 알아내기 위한 거니까…….
벌컥.
“앗……!”
꽈당.
갑자기 문이 열리는 바람에, 문에 손을 짚고 있던 아리엘은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양탄자 위라서 다치지는 않았다.
아리엘은 발개진 무릎을 문지르며 문을 연 사람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안에서 문을 연 사람은 없었다는 건데 그럼 어떻게 문이 열린 거지? 자동으로?
저 멀리 책상에 앉아있던 마티어스가 넘어진 그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엘.”
그가 혀를 차며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들어오라고 열었더니.”
마티어스가 성큼성큼 다가와 아리엘을 번쩍 안아 일으켰다.
“다친 데는?”
“없어요, 마티어스님.”
다친 데가 없다고 했는데도 마티어스는 아리엘의 무릎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혀를 찼다.
그가 아리엘을 한 팔로 들어올려 방금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에 내려놓았다.
커다란 마티어스의 의자에 앉은 조그만 아리엘은 사람 의자에 앉은 인형 같아 보였다.
“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있었지?”
몸집보다 훨씬 큰 의자의 느낌에 신기해하던 아리엘은 얼른 제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의자에서 쭉 편 두 다리를 톡톡 부딪쳤다.
“그야…… 바쁘실까 봐요.”
마티어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라카트옐에게 급한 일 따위는 없다. 라카트옐은 다른 이를 바쁘게 하지, 자신이 바쁠 일은 없어.”
뭔가 무척 오만한 말 같았지만, 이곳에서 두 달을 보낸 아리엘은 납득했다.
실제로 라카트옐 가의 위상은 그만큼 높았으니까.
“그렇군요…….”
“그래. 그러니 얼마든지 날 찾아와도 좋다.”
아리엘은 그 말을 듣고 뺨을 붉혔다.
다행히 마티어스는 그녀를 그리 귀찮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리엘은 낑낑거리며 마티어스의 의자에서 기어 내려왔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마티어스가 창문이 있는 쪽 벽에 기대며 죄어놓은 자신의 소매 단추를 풀어 걷었다.
마치 조각한 것 같이 아름답게 핏줄이 도드라진 그의 팔이 드러났다.
“무슨 말?”
“그게…….”
아리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말해도 되는 걸까? 주제 넘는 건 아닐까?
망설이던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목소리를 짜냈다.
“저, 예법을 배우고 싶어요!”
“…….”
마티어스에게서 한참 대답이 없자 아리엘은 빼꼼 눈을 떴다.
무표정한 마티어스의 얼굴이 보였다.
거절당할까 봐 겁이 났지만, 아리엘은 용기를 내서 덧붙였다.
“어려도 대공가 안주인이니까요.”
예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얼마 전부터 계속 하고 있었다.
예법에 어긋난다며 행동을 지적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대공자비답게 행동하고 싶었다.
루시안과의 계약 조건에 분명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한다’는 항목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여기 와서 도리를 다한다기보다는…….’
열심히 먹고 자고 놀고 있는걸?
잘 모르긴 몰라도 아내의 도리란 게 잘 먹고 잘 자고 선물을 잔뜩 받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거창한 대공자비라는 이름도 있는데, 아리엘은 그 직책에 비해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 생각은 얼마 전에 알렌과 대화를 하면서 더욱 굳어졌다.
알렌은 그녀를 마님으로 존중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가문의 비밀만은 직접 말하기를 꺼렸다.
그 문제는 철저히 라카트옐 남자들의 판단에 맡기는 듯 했다.
비밀을 굳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나중에라도 혹시 루시안에게 물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적어도 비밀을 알려주고 싶지 않은 못 미더운 아내가 되고 싶지는 않아.’
물끄러미 아리엘을 바라보던 마티어스가 물었다.
“무슨 예법?”
“어, 저는 식사 예절도 잘 모르고…….”
아리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티어스가 대꾸했다.
“그딴 건 더 커서 배워도 돼.”
“또, 다도도 못하고…….”
마티어스가 아리엘의 조그만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 일러. 그렇게 작은 손으론 다구를 드는 것도 힘들 거다.”
“하지만, 존댓말이나 하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걸요.”
“그냥 모두에게 하대를 써. 그럼 대강 맞을 거다.”
“…….”
각오는 했지만, 정말로 거절당하자 어쩐지 서러운 마음이 솟아났다.
그녀는 마티어스를 올려다보며 눈물이 날 것 같은 눈을 깜박였다.
“……안 돼요?”
울 것 같은 아리엘을 본 마티어스의 얼굴이 굳었다.
“안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럼…….”
마티어스가 난감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나지막하게 신음을 뱉고 말했다.
“넌 좀 더 놀아야 해.”
네?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예법을 배울 수 없는 이유가 고작 그런 건가요?
마티어스가 긴 흑발을 넘기며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늑대 썰매도 타 본 적이 없고, 덤불 딸기가 열리는 계절에 정원을 돌아 다녀보지도 못했지. 그런 걸 해야 어린애가 자라는 거다.”
음…… 과거엔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자랐었는걸요.
아리엘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많이 배울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필요한 만큼은 배우고 싶어요.”
“더 놀기 전에는 안 돼.”
마티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리엘은 어깨를 떨구었다.
엄마, 저는 여기서 노는 것을 강요당하고 있어요.
그래도 다행히 완전히 거절당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조금만 더 놀고 배울게요.”
“그래.”
이번에는 좀 더 빠르게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허락을 받은 아리엘은 속으로만 헤헤 웃었다.
즐거워 보이는 아리엘을 지켜보던 마티어스가 툭 말을 던졌다.
“좋아. 놀기로 했으니 놀아주마.”
“네?”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거죠?
그가 책상 위에 늘어져 있던 종이들을 슥 밀어 치웠다.
얼핏 보아도 중요해 보이는 문서들이었다.
마티어스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보통 뭘 하고 놀지? 인형 놀이?”
“…….”
아리엘은 말문이 막힌 채로 생각했다.
아무리 후견인이라지만 아들의 아내와 놀아줄 의무까지는 없는데……
하, 하지만 마티어스님과 보내는 시간은 왠지 좋고…….
괜찮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녀의 욕심이었다.
매일 저녁 식사 때만 겨우 마티어스의 얼굴을 보다 보니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고민하던 아리엘은 마티어스에게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그럼…… 같이 산책해주세요.”
“산책?”
마티어스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인형 놀이가 아니어도 되나? 어린 여자애들은 그런 걸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아리엘의 얼굴은 빨개졌다.
“그, 그렇게 어리지는 않다구요.”
마티어스가 전혀 납득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아리엘은 수줍음을 감추며 미소지었다.
마티어스와 산책이라니. 요 며칠 있었던 어떤 일보다 기대됐다.
그때였다.
똑똑.
“대공님. 달튼입니다.”
“들어오지 마.”
“네?”
마티어스가 딱딱하게 말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꺼져. 산책 나갈 거니까.”
어…… 평소에 달튼과는 이렇게 대화하시는구나.
그녀는 마티어스의 집무실 앞에서 달튼이 문전박대당하는 것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았다.
기세에 눌려 금방 사라질 줄 알았던 달튼은 의외로 끈질겼다.
“지금은 곤란합니다, 대공님. 진짜 급한 결재란 말입니다.”
“미뤄.”
“황실에서 온 건데…….”
“그럼 더 미뤄.”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말에 소리 죽여 웃었다.
이렇게 보니 루시안과 성격도 비슷하신 것 같아.
역시 부자(父子)라서 그런가?
피는 못 속이나 봐.
그녀는 마티어스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마티어스님. 마티어스님.”
“그래.”
“저는 이만 갈게요. 산책은 저녁 정찬 뒤에 해주세요.”
마티어스가 짜증스레 한숨을 쉬었다.
“……이따보자.”
“네.”
고분고분하게 대답한 아리엘은 총총 집무실을 걸어 나왔다.
문 앞에 있던 달튼이 그녀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아기 마님?”
뒤에서 서늘한 마티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예, 예! 대공님.”
달튼이 허둥지둥 서류를 끌어안고 집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 날 저택 안에는 마티어스 주인님이 아기 마님과 저녁 산책을 나갔다는 기절초풍할 이야기가 쫙 퍼져서 사용인들을 기함하게 했다.
10년 이상 일한 그들도 처음 본 주인의 밤산책이었다.
* * *
마티어스와 산책을 나간다고 말하자 수잔은 흐뭇하게 웃고는 아리엘의 외출복을 챙기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항상 훈훈한 저택 안과는 달리 바깥은 아직 겨울이었다.
얼마 전에 눈이 많이 와서 아직도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수잔은 빨간 벨벳으로 지은 작은 드레스를 가지고 왔다.
소매와 목 부근에는 정교한 금빛 자수가 있고 보드라운 안감이 들어 따뜻한 옷이었다.
그 위에는 하얀 담비털이 달린 망토를 걸쳤다.
수잔은 아리엘의 손이 얼지 않도록 작은 주머니에 화로에 달군 돌을 넣어서 망토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신발도 복슬복슬한 털방울이 달린 까만 부츠를 내주었다.
아리엘의 단장을 돕던 수잔이 감탄했다.
“어쩜, 귀여우시기도 해라. 정말 예쁘세요.”
아리엘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았다.
차르르 몸에 감기는 벨벳의 느낌이 기분 좋았다.
“예뻐요?”
“그럼요.”
대답한 수잔이 아리엘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아기마님이 원래부터 이 댁 따님이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수잔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안쓰러움이 묻어있었다.
“그랬으면 어릴 때부터 제가 돌봐드렸을텐데…….”
아리엘은 수잔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럼 결혼해서 다른 집에 가면 수잔과 헤어져야 하잖아요.”
“어머, 그렇네요. 시집오신 게 천만다행이네.”
수잔이 웃으며 아리엘을 껴안아 주었다.
마티어스와의 산책은 조용했다.
원래 과묵하고 무뚝뚝한 마티어스는 산책 도중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아리엘은 이런 분이 어떻게 인형 놀이를 같이 해주려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속으로만 쿡쿡 웃었다.
인형 놀이만큼 계속 재잘대야 하는 게 없는데 말이다.
자박자박 소녀가 걷는 소리와 뚜벅뚜벅 키 큰 남자가 걷는 소리가 겨울의 정원에 고즈넉하게 울려 퍼졌다.
추운 겨울의 끝자락인 2월 말, 밤의 정원은 쌀쌀했지만 밝은 달이 떠올라 그 광경은 무척 아름다웠다.
아리엘은 둥글게 가득 차 빛을 내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하아아아.
옆에서 보조를 맞춰 걷고 있는 마티어스에게 시선을 올리자, 암흑 같은 흑발 머리와 짙은 청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자연스레 똑같은 흑발과 청안을 가진 루시안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루시안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보름달이 뜬 밤이었는데.’
회귀 후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아리엘은 환한 보름달 역광 때문에 루시안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그때 얼굴을 봤다면, 결혼하자고 대담하게 외치지 못했을지도 몰라.’
아리엘에게 과거에 만났던 흑발 머리 남자는 무척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도와주겠다고 말했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아리엘의 가슴 속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루시안은…… 왜 내게 도와주겠다고 한 걸까?’
루시안의 평판을 들어보니 그가 아무에게나 도움의 손길을 뻗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악당으로 인식되어 있던걸.
처음 만났음에도 그에게 자신이 조금은 특별하게 여겨졌던 걸까?
‘아냐, 이건 너무 자만이야.’
아리엘은 도리질을 쳤다.
그녀에게나 중요한 일이었지, 루시안에게는 당연히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마티어스의 음성이 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지?”
아리엘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마티어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 루시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
루시안의 이름을 들은 마티어스가 고개를 돌려 먼 허공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래. 그 녀석…….”
아리엘은 픽 웃음소리를 내며 중얼거리는 마티어스를 보며 생각했다.
‘분명 두 사람 사이가 나쁘다고 들었는데…….’
마티어스님은 전혀 루시안을 미워하는 기색이 아닌걸?
오히려 눈앞에 있는 긴 흑발의 미남자는 우수와 회한이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리엘은 마티어스의 커다란 손을 작은 손으로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왠지 슬퍼 보여요.”
마티어스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참 그렇게 멈춰 서 있던 마티어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 넌 정말…… 그래.”
그가 입속말로 말했다.
“넌 정말로 크림슨 하트로구나.”
아리엘은 대공의 속삭임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마티어스가 그녀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마티어스가 천천히 손을 내려 아리엘의 머리에 얹었다.
아리엘은 처음과 달리 그 손길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다 덮고도 남는 마티어스의 커다란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마티어스가 말했다.
“날이 추우니 들어가자.”
그가 아리엘을 한 팔로 안아 들었다.
아리엘은 깜짝 놀라서 마티어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마티어스에게서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엘은 높이 들려 무섭다는 것을 핑계 삼아 마티어스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늘 그녀를 때리고 착취했던 과거의 어른 남자들과는 다른 마티어스의 애정이 좋았다.
저택으로 들어오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정말로 마티어스님이 내 아빠였으면 좋았을 텐데.’
수잔에게는 다르게 말했지만 아리엘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처음부터 라카트옐 가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거라는.
성인이 되면 루시안과 이혼한 그녀는 이곳을 나가야 한다.
수잔과도 헤어져야 하겠지.
‘내가 진짜 대공가의 딸이었다면…… 난 절대 절대 결혼 같은 거 안 했을 거야.’
평생 마티어스와 루시안, 알렌과 우즈와 수잔 옆에 살았을 거야.
아무와도 헤어지지 않고.
‘그럼 루시안과도 오누이 사이가 되었겠지?’
하루가 멀다 하고 때리고 괴롭히던 오라비 제롬과는 달리 루시안은 좀 제멋대로긴 해도 그녀에게 나쁘게 굴지는 않았다.
‘나도 이런 가족이 있었으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맵고 시원한 향이 나는 마티어스의 옷깃에 얼굴을 파묻으며 아리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뾰로롱, 삐롱.
맑은 새 소리가 창문 앞 가지를 흔들었다.
가지에 맺힌 꽃봉오리도 귀엽게 한들거렸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이 지나고 제국에도 봄이 찾아왔다.
라카트옐 저택 안에도 온풍이 불고 아리엘의 방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정원에는 연둣빛 새싹이 가득 돋아났다.
그리고 아리엘은 요즘 딸기 먹는 데에 푹 빠져있었다.
냠.
딸기는 빨갛고, 달고, 새콤하고 즙이 많았다.
조그만 입을 크게 벌려서 한입에 다 넣은 다음 꼭지만 빼고 깨물면 씨가 톡톡 터지면서 상큼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후작가에 살 때는 제롬의 생일 케이크 속에 뭉개진 것만 먹어봤었는데.’
이곳에서는 싱싱한 생딸기가 모두 아리엘 차지였다.
아리엘은 딸기를 그냥도 먹고, 생크림에 푹 찍어도 먹고, 수잔이 즙을 내어 우유와 섞어준 것도 먹었다.
대부분의 음식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아리엘이 딸기에 특별히 푹 빠진 것을 보고 수잔과 하녀들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수잔은 엄청난 양의 딸기를 하녀들과 다듬어서 딸기청을 잔뜩 담갔다.
“봄이 지나도 딸기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요.”
딸기 과육을 단면이 보이게 예쁘게 썬 뒤, 설탕과 딸기를 켜켜이 넣어 만든 딸기청은 뜨거운 차로도 먹고 팬케이크에 시럽대신 붓기도 한다고 했다.
아리엘은 딸기로 만드는 건 뭐든 좋았으므로 블루베리 몇 알과 민트 잎이 함께 들어간 빨간 딸기청 병들을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아리엘이 딸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들려오자, 마티어스는 별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제국에서 가장 큰 딸기 재배지를 통째로 사 버렸다.
“거기서 나는 최상등품만 여기로 보내라고 해.”
그때부터 보존 마법이 걸린 알이 굵고 새콤달콤한 딸기들이 4계절 내내 대공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겨울을 나면서 뼈만 남아 있었던 아리엘의 몸에는 조금씩 살이 붙었다.
마른 몸에 살이 오르면서 갓 내린 눈같이 흰 피부는 더욱 뽀얗고 보드라워졌다.
아이답지 않게 홀쭉하던 뺨에도 윤기가 돌고 귀여운 곡선을 그리며 동그래졌다.
밤에 깜짝깜짝 놀라면서 깨는 일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고, 잘 먹고 잘 자는 덕에 키도 약간이지만 컸다.
아직 제 나이인 열 살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입었던 옷을 입으면 손목이 살짝 드러날 정도였다.
아리엘은 작아진 옷이 아까워 울상을 지었는데 수잔은 옷이 작아진 것에 매우 기뻐하며 박수를 쳐 주었다.
“아기 마님, 새 옷이 필요하시겠네요!”
수잔은 이제 열 살 아가씨가 되셨으니 의상실에 직접 가서 옷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고 부산을 떨었다.
“아기 마님 또래부터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차근차근 알아가야 한다고요.”
수잔이 준비해준 옷들로도 부족함 없이 지냈던 아리엘은 직접 의상실에 가서 옷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늘 외모 때문에 움츠러들어 있었던 그녀는 이제 여기 없었다.
아리엘은 자신의 붉은색 머리카락과 백설같이 하얀 피부에 어울릴만한 옷을 맞출 생각에 기대감을 품었다.
봄이 되면서 바뀐 것이 또 있었다.
마티어스가 아리엘에게 예법 교사를 붙여 준 것이다.
새로 들어온 아리엘의 예법 교사는 작년에 백작가에서 후작가로 시집간 우아한 란셀 후작 부인이었다.
란셀 가는 대공가의 지원을 받으며 광산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리엘에 대한 이야기가 새어나갈 위험이 없었다.
란셀 후작 부인 또한 아리엘을 가르치는 동안은 사교 활동도 전혀 하지 않고, 외부 사람에게 철저히 비밀로 했다.
아리엘은 란셀 후작 부인 밑에서 식사 예절과 화술, 다도와 자수 같은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시들도 몇 개나 배웠다.
후작 부인은 금세 아리엘에게 반해서 그녀를 아주 귀애했다.
루비 같은 눈을 반짝반짝하게 빛내며 배움에 열심히 임하는 어린 소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승이 어디 있을까.
란셀 후작 부인이 예법을 가르치고 돌아가면 아리엘은 수잔이 주는 간식을 먹으며 수업에서 배운 것에 대해 재잘거렸다.
“수잔, 수잔. 이것 좀 봐요. 나 이제 머리에 그릇을 얹고도 잘 걷지요?”
“이번 자수가 끝나면 가문의 문양을 수놓는 법도 배울 거래요.”
수잔은 수업을 들은 아리엘을 위해 예전보다 더 든든한 간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처럼 두툼한 연어 살을 넣은 크림치즈 샌드위치라든지.
와앙.
부드러운 훈제 연어 샌드위치를 입안 가득 물며 아리엘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다도는 재미있지만, 홍차는 무슨 맛으로 먹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기 마님 입에는 아직 너무 쓰지요?”
“네. 설탕을 듬뿍 넣으면 맛있는데, 귀부인들 모임에서는 그렇게 먹으면 격식에 어긋나서 안 된대요.”
수잔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 귀부인들도 자기 집에서는 각설탕을 서너 개나 넣어서 마실걸요?”
“정말요?”
“당연하지요.”
그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리엘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리엘이 다도를 배우기 시작한 날부터 수잔은 간식과 함께 내오던 우유대신 종종 차를 내오기도 했다.
물론 그냥 홍차나 녹차를 낸 것은 아니었다.
수잔은 어린 아리엘을 배려해서 꼭 우유를 탄 밀크티를 만들어주었다.
어린 입맛에 홍차는 쓰지만, 우유를 타면 맛이 부드러워져서 아리엘도 향긋한 홍차의 맛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유난히 봄볕이 따뜻하던 날.
아리엘은 마티어스가 선물해준 나들이 마차에 올랐다.
차양을 깊게 내려서 밖에서 아리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라카트옐 가에서 나온 흰 차양의 소녀스러운 마차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대공자비가 외출을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리엘이 마차를 타고 나선 곳은 그녀의 봄옷을 주문할 의상실이었다.
* * *
원래 후작가 이상 높은 신분의 영애나 부인들은 의상실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 디자이너를 집으로 부르는 것이 관례였다.
수도의 내로라하는 부티크, 의상실들은 귀족이 부르면 귀한 옷감과 보석들, 유행하는 스타일의 드레스 견본 등을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달려갔다.
높은 귀족이 한 번 옷을 맞출 때에 올리는 수익이 그만큼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큰돈이 오가다 보니 대부분 고위 귀족들은 단골 부티크를 만들어서 거래했다.
전용 부티크와 거래를 트면 예약을 우선순위로 할 수 있고 희귀한 옷감을 선점하거나, 사교계 유행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다른 스타일의 옷이 필요할 때도 여러 부티크를 이용하지 않고 자신의 전용 부티크를 통해서 다른 부티크에 의뢰를 넣었다.
아리엘도 이제 전용 의상실을 정하게 될 예정이었다.
물론 단순히 그것을 정하기 위해서 외출한 것은 아니었다.
마티어스는 아리엘에게 옷이 필요하다는 수잔의 말을 듣고, 의상실 주인들을 한데 모으라고 명령했다.
“수도에 있는 의상실 주인들을 죄다 불러와. 그중에서 아리엘이 고르도록.”
재무관 달튼은 아기 마님의 옷 맞추는 일에까지 신경을 쓰는 주인에게 놀랐다.
의상실 주인들을 불러들이는 일은 대공가에게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긴 하지만, 대공이 직접 관심을 가지는 건 또 다른 거니까.
달튼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기 전, 잠자코 있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마티어스님. 제가 직접 가서 구경해도 돼요?”
“번거로울 텐데.”
마티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제 아리엘도 마티어스가 말하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저건 나 때문에 번거로워진다는 뜻이 아니라, 날 걱정해서 하시는 말이야.’
“가보고 싶어요. 수도 거리에 나가본 적이 없거든요.”
후작 영애였는데도 불구하고 수도 번화가에 방문해본 적이 없다는 아리엘의 말을 들은 달튼과 수잔은 한마음으로 아리엘의 외출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웬만한 일에는 대공 앞에 나서지 않는 달튼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대공님, 제가 대공자비님을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푸른 사자 기사단원 몇 명을 붙여주시면 호위에도 문제없을 겁니다.”
수잔도 은근슬쩍 말했다.
“아니면 란셀 후작 부인과 함께 내보내셔도 될 것 같은데요.”
마티어스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달튼은 조마조마해서 눈을 도르륵 굴렸다.
의자에 기대앉은 마티어스가 던지듯 말했다.
“다 마음에 안드는군. 내가 직접 가겠다.”
“예에?!”
달튼은 놀란 나머지 무심코 크게 소리쳤다가 마티어스의 살기 어린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대공님이 원래 저런 분이 아니신데!’
여자아이 옷에 관심을 가지시는 건 새로 들어온 아기 마님 일이니 그렇다고 쳐도, 직접 쇼핑을 따라가시겠다니?
달튼이 봐 온 마티어스 대공은 결단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주인은 겨울잠에 들기 전의 맹수처럼 예민하고 차가우며 무기력했다.
그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
거슬리는 일이 있다면 시끄럽지 않게 치워버린다.
라카트옐을 귀찮게 한다면, 그게 누구든 대가를 치렀다.
마티어스는 저택 밖을 나가는 것이나 집안의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변화도 싫어해서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 환경을 똑같이 유지하는 데 애를 썼다.
대공자 루시안이 태어난 직후에 저택에 들어온 달튼은 그 전에 마티어스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요즘 그가 보이는 모습들이 지난 14년간 자신이 봐왔던 대공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매일 혼자를 고수하던 저녁 식사를 아기 마님과 함께 하시지 않나, 장인들에게 수시로 장난감 의뢰를 넣으시지 않나, 아기 마님과 놀아주시겠다고 황실의 전갈을 무시하시지 않나…….
‘이젠 아기 마님의 옷 쇼핑까지 같이 가시겠다고 하고.’
마치 뒤늦게 막둥이 딸을 본 아버지와 같은 태도가 아닌가.
귀여운 딸에게 푹 빠져서 헤롱거리는…….
“와, 정말 같이 가주실 거예요?”
대공님과 함께 하는 외출을 반기는 아기 마님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평소에는 기세를 누르고 있다고 해도 라카트옐은 라카트옐.
달튼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는 절대로 대공과 함께 외출하는 것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가 대공가에 충성하고 대공에게 경외심을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아기 마님은 대공님이나 대공자님이 무섭지도 않으신가…….’
어린애라면 그 기세에 경기를 일으키거나, 눈치만 보며 두려워해야 정상일 텐데.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과연 대공가 안주인다우셔.’
덕분에 아리엘에 대한 달튼의 평가는 한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아리엘이 알았다면 고개를 갸우뚱했을 일이었다.
함께 외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자, 수잔은 아리엘을 공들여 단장해주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답게 회복력이 빨라서 이제 보이는 곳에 상처 자국은 없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오늘 만나는 의상실 사람들은 수많은 영애들과 부인들을 상대해 온, 베테랑들 아닌가.
그들의 예리한 눈에는 아리엘이 보통 귀족 소녀들처럼 정성껏 관리받으며 자라지 않았다는 것이 보일 수도 있었다.
수잔은 조금이라도 아리엘에게서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귀티가 흐르는 외출 차림을 완성해냈다.
남색 바탕에 우아한 흰 꽃무늬가 있는 드레스의 가슴에는 하얀 핀턱 칼라가 자리했고 칼라 중앙에는 얇은 비단 레이스 리본을 맸다.
드레스 밑단에 넘실넘실한 러플이 붙어서 더욱 사랑스러우면서도 격이 있었다.
봄 외출에 입는 드레스치고는 얌전한 차림이지만 화려하고 예쁜 것은 이제부터 맞추면 되니까 지금은 최대한 귀족적으로 보이는 게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스칼렛 레드의 예쁜 붉은 머리카락의 아랫단에만 롤을 말아 굽슬거리게 하고 그 위에 외출용 보닛을 씌워 주자…….
“후, 이제 완벽해요.”
아리엘은 깜찍한 귀족 영애 같아 보였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아리엘을 기다리던 마티어스는 아리엘이 사뿐사뿐 걸어 나오자 습관처럼 보닛 위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네. 마티어스님.”
아리엘은 마티어스가 내민 손을 꼭 잡았다.
아리엘의 키는 너무 조그마하고 마티어스는 너무 커서 손잡은 모양이 우스꽝스러웠지만 간질간질 행복했다.
‘이렇게 잡으니까 진짜 아빠와 나들이 가는 것 같아.’
아리엘은 커다란 루비가 박힌 메리제인 구두를 기분 좋게 바닥에 부딪히며 가볍게 걸어 마차에 올랐다.
* * *
마티어스가 선물한 봄용 나들이 마차에는 작은 창이 나 있어서 바깥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창문에는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브루노어의 마법이 걸려 있어서 바깥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봄이 되면서 조금은 사그라들었다지만, 아직 새 대공자비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사교계에 괜한 이야깃거리를 던져주고 싶지 않았던 마티어스가 브루노어에게 직접 주문한 마법이었다.
‘이거 좋다.’
바깥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안에서는 바깥을 원 없이 구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리엘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수도의 큰 거리에는 귀족들의 중소형 저택과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심부름을 맡은 하인들이 작은 마차를 타고 지나다니는 것도 눈에 띄었다.
“와, 아기자기해라.”
바깥을 구경하던 아리엘은 감탄을 내뱉었다.
대공가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다른 것들이 다 작게 느껴졌다.
화려하기로 유명한 제국 수도의 번화가는 대공저의 거대하고 사치스러운 모습에 비하면 퍽 아담해보였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는 수도의 의상실과 보석상들이 모여있는 거리로 접어들었다.
마티어스는 그중 가장 큰 의상실 앞에 마차를 멈추게 했다.
대공과 대공자비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의상실 주인 마담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아리엘을 맞았다.
“세상에, 소문의 대공자비님을 뵈다니 영광입니다.”
아리엘은 창문과 똑같은 마법이 걸린 마법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마담과 마주했다.
아직 마차에서 내리지는 않은 상태였다.
“대공자비님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 것만 같네요. 사람에게 후광이 있다는 것은 말로만 들었는데 오늘 그 빛을 보게 되나 봅니다.”
마담은 초조한 표정으로 웃으며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아리엘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원래 어린 손님들은 이런 알랑방귀에 홀랑 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방금까지 그녀는 밀려든 봄 무도회 드레스 주문들을 처리하던 중이었다.
사랑이 꽃피는 봄 무도회 시즌인만큼 귀족 영애들은 앞다투어 새 드레스를 맞추었다.
연인에게 선물할 드레스를 주문하는 남자 고객들도 많았다.
의상실로서는 다른 손님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바쁜, 대목 시즌인 것이다.
‘하지만 그딴 게 다 무슨 상관이야.’
마담은 눈을 돋우어 부채 사이로 보이는 아리엘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베일에 싸인 대공자비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받은 주문들을 뒤로 미뤄둘 가치가 있었다.
의상실의 특징 중 하나는 소문이 도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의상실 마담들은 소문의 값어치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소문에는 입을 다물고, 남들이 모르는 소문은 물어다 바치며 돈을 벌었다.
마담은 속으로 탐욕스럽게 웃으며 ‘이 소문이 얼마나 비싸게 팔릴까’를 주판으로 계산해 보았다.
아리엘은 양손을 맞잡고 열심히 아부를 하는 마담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내가 정말로 열 살 아이였다면 홀딱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열일곱 살 성년의 나이까지 산 경험이 있었다.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보통의 열살짜리 보다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몇 마디 달콤한 칭찬을 해준다고 넘어갈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았고.
아리엘은 눈에는 계산속과 어린아이에 대한 무시로 가득하면서 입으로만 꿀 바른 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옷을 사고 싶지 않았다.
아리엘은 부채 속으로 마티어스에게 속삭였다.
“마티어스님. 여기에서 옷을 맞추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되나요?”
“넌 라카트옐 대공자비다. 네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대꾸한 그는 마담의 의상실 유리창에 걸린 가장 호화로운 드레스 본을 가리켰다.
“치수를 보내줄 테니 저 디자인으로 한 벌 보내라.”
싸늘한 대공의 기세에 얼어붙은 마담은 일단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예, 대공님.”
마티어스가 가리킨 드레스는 손품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비용이 비싸서 아직까지 주문한 영애가 한 명도 없는 드레스였다.
보통 영애들이 입는 드레스 열 벌의 가격과 맞먹었다.
마담은 이것만으로도 봉 잡은 기분이었다.
그럼 이제 슬슬 안으로 모셔서 본격적으로…….
“가자.”
마티어스의 말이 떨어졌다.
마부는 곧장 부드럽게 마차를 몰아 의상실을 벗어났다.
엥?
마담은 사라지는 대공가 마차를 바라보며 턱을 떨어뜨렸다.
한참 뒤 그녀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어째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 * *
“마티어스님. 방금 드레스는 왜 주문하신 거예요?”
아리엘은 순수한 궁금증으로 물었다.
마티어스가 주문한 드레스 본은 얼핏 보아도 무도회나 연회용 드레스였다.
아직 사교계 데뷔를 하지 않은 아리엘에게는 썩 필요한 옷이 아니었다. 무척 예쁘기는 했지만.
질문을 받은 마티어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막 입을 옷도 하나 필요하니까.”
어…… 막 입을 옷…….
저라면 그거 입고 어디 앉기도 무서울 것 같은데요. 더럽힐까 봐.
살고 있는 저택이야 매일 지내는 곳이니 호화로움에 익숙해진다 해도, 여태까지 줄곧 부족하게 살아왔던 아리엘로서는 대공가 사람들의 씀씀이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여러 의상실을 돌면서 아리엘이 선택한 곳은 그리 유명하지도, 크지도 않은 작은 의상실이었다.
이곳 의상실의 주인인 마담 헬렌은 일손이 아주 빠르고 실력이 좋아서 직원을 두지 않고 혼자서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헬렌은 어린 영애의 허영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아부를 하지 않았다.
어려서 잘 모른다고 무조건 비싼 것만 권하지도 않았다.
“정식 드레스를 맞추신다면 코르셋과 패티코트부터 필요하시겠어요.”
“장식은 참석하시는 자리에 따라서 재질이 달라진답니다. 야외냐 실내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고요.”
헬렌은 아리엘에게 옷감이나 장식, 자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무시하는 투는 없었다.
아리엘의 신분이 까마득하게 높으니 어디에 가서든 무시는 받지 않았겠지만, 아리엘이 옷이나 장식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 뒤에서 수군거리긴 했을 터였다.
정말로 귀족 영애인 거 맞아? 하면서.
하지만 헬렌은 아리엘이 잘 모르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대신 아리엘 자체를 주시했다.
흔하지 않은 붉은 머리카락, 백옥 같은 피부, 절로 미소가 떠오를 만큼 달콤한 색의 눈동자.
어린 탓에 아직 덜 완성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뼈대가 얇고 호리호리하다.
이런 체형은 옷에 따라서 여러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마담 헬렌의 가슴 속에서 열정의 불씨가 확 타올랐다.
‘기본 바탕이 훌륭하니 어떤 식으로 꾸며도 어울릴 거야.’
특히 그녀의 영감을 강렬히 자극하는 건 스칼렛 레드의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식이었다.
아마 넝마를 입혀놓는다 해도 머리카락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이다.
그러니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도록 천의 색깔, 재질만 잘 고른다면……
아리엘은 보석으로 빚은 사람처럼 빛날 게 분명했다.
헬렌은 벌써부터 아리엘이 자라나는 과정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헬렌은 타오르는 눈빛을 감추고 차근차근 아리엘에게 드레스의 기본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코르셋은 보통 열네 살부터 하신답니다. 성숙한 아가씨들은 열세 살부터도 하시지만요. 그전에는 코르셋 모양의 속옷을 입으시지요. 대공자비님은 제일 작은 코르셋도 헐렁하니, 살이 좀 더 찌셔야겠는걸요.”
그녀는 아리엘에게 가장 필요한 것과 잘 어울리는 것을 찾아주려고 노력했다.
그런 헬렌을 보며 아리엘도 어색하기만 했던 의상실에 차차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리엘에게 새삼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수잔이 입혀주는 옷들은 정말 실내 드레스였구나…….’
드레스의 세계는 정말 복잡하고도 방대했다.
첫날 후작가에 갈 때 입었던 베이지색 레이스 드레스를 제외하면 아리엘은 정식 드레스를 입은 적이 없었다.
항상 한 벌로 된 원피스 형식의 어린 소녀용 옷만 입었다.
코르셋, 패티코트, 파니에, 겉드레스를 겹겹이 껴입는 정식 드레스를 입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헬렌이 가져다주는 색깔의 천들은 다 마음에 들어.’
헬렌은 아리엘의 깨끗하고 흰 피부와 예쁜 붉은 머리카락이 돋보일 수 있는 여러 색의 천들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헬렌의 설명을 듣고 난 뒤, 아리엘은 자신에게 꽃무늬나 꽃장식이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교하고 화려한 레이스 장식도 아리엘에게는 맞춤같이 어울렸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는 아무 장식 없이 머리만 땋아도 주변 사람들을 모두 압도해버릴 만큼 예쁜 아우라가 있었다.
헬렌은 그녀에게 영감을 주는 이 어린 뮤즈를 놓칠 수 없었다.
“나들이 드레스 몇 벌과 손님을 초대했을 때 입으실만한 실내 파티 드레스 몇 벌이면 충분하실 것 같습니다.”
헬렌은 조심스럽게 권했다.
아리엘은 아직 사교계에 데뷔할 일정이 잡히지 않아서 무도회나 연회용 드레스는 맞추지 않은 상태였다.
마티어스는 그 말에 따라 아리엘의 치수를 재게 하고 몇 개의 옷을 주문했다.
“저, 대공자비님의 장신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원래 있는 걸 쓰시는 것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어린 분이 쓰기에 마땅한 장신구는 없으실 듯한데.”
반듯한 자세로 앉아서 아리엘이 옷을 결정하는 것을 보고 있던 마티어스가 짧게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대공저로 출장을 올 테니 그때 가문에 있는 보석을 맡기지. 괜찮은 세공사도 붙여주겠다. 그걸로 아리엘에게 맞는 걸 디자인해서 제작해라.”
“예, 대공님.”
“우리 아이가 남들과 똑같은 걸 하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아리엘은 조금 지친 채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옷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무심한 어조로 마티어스가 말했다.
“사실 네가 연회장에 아무것이나 입고 가도 널 감히 욕할 사람은 없을 거다. 있다면 없애버리면 되고.”
없애다니. 이 집 남자들 사고방식은 어떤 모양인 거야?
그래도 자신은 루시안의 아내니까, 대공자비로서 사는 동안은 루시안을 창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것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즐겁기도 했고.
아리엘은 마차 등받이에 몸을 폭 기댔다.
바깥나들이는 재미있었지만…….
‘이제 편안한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까 기분 좋다.’
사고는 그때 일어났다.
* * *
아리엘은 창밖으로 바깥을 구경하고 있었다.
돌아갈 때는 거리 구경보다 풍경 구경이 더 좋았다.
거리에 덤불지어 핀 꽃들,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 멀리 피는 아지랑이.
‘좋다…….’
과거의 삶에서 그녀는 봄을 즐겨본 적이 없었다.
다락에 살 때 봄은 겨울이 지났다는 안도감과 꽃샘추위에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뿐이었고, '그'에게 팔려간 후에는 마법 때문에 피를 토하느라 계절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열 살에 지금 라카트옐 대공저에서 맞은 봄이 아리엘 인생의 첫봄이었다.
아리엘은 따스한 봄 기온을 만끽하며 창에 말랑한 뺨을 눌렀다.
그때였다.
‘어?’
저거 왜 저러지?
창밖을 보는 아리엘의 눈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맞은편 길로 달리고 있는 마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겉으로는 그냥 속도가 조금 빠른 마차 같아 보였지만 과거 고위 클래스 마법사였던 아리엘에게는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마치 뭔가에 조종당하고 있는 듯한…….
그 마차는 꽤나 높은 귀족이 타고 있는 듯 고급스러웠다.
아리엘은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여자애가 있잖아!’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의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구해달라는 듯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 그 마차가 폭주하듯 강이 흐르는 다리 바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안 돼!’
마티어스를 부를 시간조차 없었다.
아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마나를 방출해버렸다.
파앗.
눈앞에 빛이 번쩍 지나갔다.
공기의 흐름이 거세게 역류하는 것이 느껴졌다.
“흐윽……!”
아리엘은 온몸이 조각조각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마나가 그녀의 작은 육체를 쥐어짜는 것 같았다.
아파. 아파. 죽을 것 같아.
아리엘은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마차가 있는 방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행히 보라색 머리의 소녀가 타고 있는 마차는 추락하지 않은 것 같았다.
긴장이 풀리자 아리엘은 그제야 루시안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아. 루시안이 마법…… 쓰지 말라고 했는데.’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뚝. 의식이 끊기며 그녀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아리엘라!”
마티어스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