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어두운 밤, 황궁에 비할 만큼 웅장한 위엄을 자랑하는 저택은 조용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탑의 꼭대기.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날카롭게 흩날렸다.
마법사 아리엘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라.’
아리엘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말에 홀린 듯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죽여.’
그리고 살육의 밤이 시작되었다.
“……하아, 하아.”
마지막 기사까지 해치운, 망토를 입은 작은 형체가 숨을 쌕쌕 내쉬었다.
망토 밖으로 살짝 드러난 아리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조종당해서 사람들을 죽여야만 하는 이 정신적인 고통은 아무리 거듭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리엘은 피바다가 된 주변을 돌아보며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아냐. 이번이 마지막이야. 더 이상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그리고 곧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의 고통이 곧 그녀의 몸을 덮쳤다.
마법을 무리하게 쓴 후유증이었다.
아파. 너무 아파.
아리엘은 겨우 신음을 삼켰다.
“흑-”
고통으로 허리를 앞으로 말고 웅크리던 몸이 순간 움찔 굳었다.
주위의 공기가 달라졌다.
아리엘이 시선을 겨우 위로 올리자 한 남자가 보였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남자였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끔찍한 위험이 느껴졌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이대로 압살당해버릴 것 같은 위압감.
그가 다가와 그녀가 쓴 두건 망토를 끌어 내렸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작은 소녀가 달빛에 드러났다.
남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지.”
‘제발…….’
아리엘은 천천히 그 손을 잡았다.
그러나 악당에게 조종당하고 있던 그녀의 심장은 그대로 터져버렸다.
눈앞이 핏빛으로 물들며 어두워지는 것이 아리엘이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 * *
그렇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떴을 때는 차가운 다락방 안이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다락 창으로 희뿌옇게 들어오고 있었다.
아리엘은 부스스 몸을 일으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어릴 때 살았던 후작가 다락방이잖아.’
끔찍한 기억이 가득한 곳이라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아리엘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가냘픈 어린아이의 어깨에서 헐렁한 옷이 흘러내렸다.
‘꿈인가? 죽은 후에 꿈을 꾸는 건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히 심장이 터져서 죽었다.
그런데…… 어떻게?
옷자락을 추어올리며 손을 펴보았다.
제 기억과 달리 훨씬 하얗고 작은 손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게…… 뭐야?’
왜 갑자기 몸이 작아졌지?
하지만 줄어든 몸보다도 더 이상한 것은 몸속이었다.
아리엘은 제 목을 더듬어 만져보았다.
‘항상 핏물이 울컥울컥 올라와서 목 안이 쓰라렸었는데.’
그 느낌이 없다.
3년 동안 그녀를 지배하던 고통이 갑자기 사라지니 당황스러웠다.
아리엘은 조그마한 손으로 배에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홀쭉하게 말라 갈비뼈가 드러난 몸 안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고파.’
이것도 이상했다.
아리엘은 배고픔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 지 오래였다.
공격 마법이 차근차근 그녀의 내장 장기들을 상하게 해서 아리엘은 음식을 잘 소화시키지 못했다.
그렇게 먹는 양이 줄어들자 배고픔을 느끼게 해주는 머리의 어딘가가 망가져 버렸는지, 영양실조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식욕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었다.
아리엘은 조심스럽게 옷자락을 걷어 다리를 살펴보았다.
드러난 자신의 다리를 본 그녀가 짧게 숨을 삼켰다.
‘내 다리가…….’
아버지에게 얻어맞다가 뒤틀려 불구가 되어버렸던 왼쪽 다리가…….
‘멀쩡해.’
갑자기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정말 꿈인가? 꿈인데 어떻게 이렇게 현실감이 있을 수가 있지?
아리엘은 할딱거리며 팔딱팔딱 뛰는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없어.”
정신을 반쯤 빼놓은 것 같은 앳된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심장에, 그 자리에 있던 게, 없다.
운디르의 저주.
심장 한가운데에 박혀서 끊임없이 아리엘에게 고통을 주던 그 저주의 보석이 없다.
아리엘은 믿을 수가 없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한결 짧아진 다리로 종종걸음을 쳐서 다락방 창틀로 다가갔다.
“아우렐력 809년…… 12월?”
아리엘이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나이와 날짜를 잊지 않기 위해 그녀가 다락방 창틀에 매일 그어놓은 표시였다.
그 표시는 아리엘이 열네 살에 후작가를 나갈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어놓았기에, 틀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분명 열네 살의 봄까지 표시되어 있어야 할 창틀에는…….
아홉 살의 겨울까지만 표시되어 있었다.
기록대로라면 지금은 8년 전인 것이다.
그럼 지금 내가…… 아홉 살로 돌아온 거라고?
* * *
아리엘라 루실리온.
루실리온 후작가의 하나뿐인 영애.
모든 것이 망가지기 시작한 그해에 아리엘은 열 살이었다.
아리엘은 루실리온 후작가에서 둘째이자 막내였다.
그녀의 위로는 오라비가 하나 있었는데 둘은 어머니가 다른 이복남매였다.
루실리온 후작은 첫 번째 아내를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이 차가 십 년이 넘는 젊은 여인을 두 번째 아내로 들였다.
두 번째 후작 부인인 블랑쉐는 눈부신 금발을 지닌 화려한 미인이었다.
칙칙한 청동빛 머리카락을 지닌 나이 많은 후작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던 셈이다.
후작가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블랑쉐는 아기를 낳았다.
불행이 있다면 그녀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는 것일 것이다.
산모가 죽고 남겨진 아기는 붉은 머리카락에 방금 내린 눈- 백설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아이, 아리엘라였다.
죽은 부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딸이라면 사랑스러울 법도 한데 후작은 아리엘을 끔찍하게 미워했다.
그녀를 낳다가 아내가 죽었기에 아이를 사랑할 수 없다는 진부한 이유가 아니라, 아리엘의 외모 때문이라고 했다.
“붉은 머리…… 계집애라고?”
아리엘은 화려한 금발을 가진 어머니를 닮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스칼렛 레드의 선명한 진홍색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루실리온 후작가의 피를 이은 사람들이 모두 청동색 머리카락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어미의 색도 아비의 색도 물려받지 않은 아리엘.
“이 계집은 내 딸이 아니다.”
후작은 아리엘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했다.
부인이 외간 사내와 사통을 했다고 생각한 그는 광분했지만, 그 사실을 밝혀줄 후작 부인은 이미 죽고 없었다.
후작은 자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며 아리엘의 부친을 찾으려 애썼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후작 부인은 생전에 후작가 저택 바깥으로 좀처럼 나가지 않았고, 저택 안의 사용인 사내 중에는 붉은 머리카락이 없었다.
대충 끼워 맞춰 뒤집어 씌울만한 어중간한 적갈색이나 주황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비를 밝힐 수 없자 후작은 자신의 체면을 위해 아리엘을 후작가 호적에 올렸다.
대신 그녀는 저택의 구석진 다락방에 가두어졌다.
작은 거울 하나 없는 텅 빈 방이었다.
지체 높은 후작가의 어린 영애가 또래 영애들과 모임을 갖지 않는 것을 두고 사교계에서는 소곤소곤 말이 나왔다.
누군가는 아리엘이 흉측한 외모를 갖고 있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녀에게 몹쓸 병이 있다고 떠들었다.
마지못해 아리엘의 존재를 인정한 후작은 주위 사람들에게 딸 이야기를 꺼내지도, 딸에게 붙은 그 추문을 딱히 반박하지도 않았다.
아리엘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고요히 다락에서 자라났다.
외모 때문에 늘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당하다 보니 어린 소녀는 자기가 흉측하게 생겼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극히 드물다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늘 아비의 화를 돋웠다.
후작은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이나, 그녀에게서 나는 붉은 피만 보면 광기에 사로잡혀 주먹을 휘둘러댔다.
어리고 세상 경험이 없는 아리엘이 자신의 적발은 이상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롬 오라버니처럼 청동색 머리카락을 가졌다면 좋았을 텐데.’
틈만 나면 그녀를 괴롭히는데 시간을 죽이는 한심한 오라비지만 부러웠다.
아리엘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와 오라비, 둘과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맞거나, 괴롭힘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도 사랑받는 자식이었을 거라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마음속으로 말하며 아리엘은 하아아 숨을 내뿜었다.
겨울에는 하인들의 방조차 따뜻한 후작가이건만 다락방에 사는 소녀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아리엘은 두 손을 모으고 손끝에 조그마한 마나의 방울을 만들어냈다.
작고 기운 없는 마나 방울이었지만 얼어붙은 손끝을 잠시나마 녹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현재로서 그녀가 가진 유일한 재주였다.
마법.
아리엘은 선천적으로 몸에 마나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였다.
* * *
제국에서 마법은 귀한 재능이었다.
선천적으로 마나를 갖고 태어난 자들만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마나를 가지고 태어난 자들은 마탑에서 직장을 얻거나, 궁정 마법사가 되거나, 마을이나 도시에서 약제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리엘에게는 그런 선택지가 없었다.
후작이 아리엘을 팰 때는 비단 그녀가 눈에 띄었을 때만이 아니었다.
그는 아리엘이 마법을 쓰는 걸 극도로 끔찍해했다.
자신과 블랑쉐에게는 없는 그 재능을, 알려지지 않은 간통남에게 물려받았다고 억측한 결과였다.
정작 마법은 유전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그건 악마의 능력이다.”
그렇게 못 박은 후작은 아리엘이 마법을 쓸 때마다 그녀를 때렸다.
마나를 제어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어린 아리엘은 위급한 상황에 닥치거나 무언가를 간절히 소망할 때 실수로 마나를 방출해버리곤 했다.
아홉 살이 되기까지 그녀의 몸에는 멍과 흉터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아리엘은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다.
후작가는 부유했으나 하나뿐인 후작 영애에게 돌아오는 것들은 형편없었다.
하녀들은 그녀를 돌보지 않았고, 아비와 오라비는 그녀에게 돈이 나가는 걸 매우 싫어했다.
낡은 옷과 형편없는 식사, 다락의 조그만 공간만이 그녀에게 허락되었다.
그렇게 맞고 학대당하다가 그 일이 있었다.
늘 그래왔듯, 그날도 그녀가 사는 다락방의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다락 천장의 문으로 오라비 제롬이 사냥개를 들여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컹, 컹컹!”
“크르르르……”
아홉 살 난 작은 소녀를 앞에 둔 사냥개는 드러낸 이 사이로 침을 뚝뚝 흘리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핏, 물어! 물어버리라니까!”
손바닥만한 다락 안.
도망갈 곳이 없어진 아리엘이 절박해지자 그녀의 마나는 주인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어머나!”
하필 이동한 곳이 후작의 손님인 모니카 공작 부부 앞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공작 부인의 놀란 탄성 말미에, 후작의 거친 손길이 아리엘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이 아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으핫핫!”
아리엘을 잡아챈 후작은 바깥에서 견고하게 잠겨 있는 다락방 문을 보더니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어린 딸을 다시 방 안에 처박았다.
“나중에…… 보자.”
그리고 그 날 밤.
쾅. 다락의 나무문이 거센소리를 내며 열렸다.
다락방 안에 있던 조그마한 소녀, 아리엘은 바싹 얼어붙었다.
열린 다락문 앞에 사람의 모습을 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버지 루실리온 후작이었다.
그에게서 지독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아리엘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했다.
“네 방에 조용히 처박혀 있으라고 했지.”
그의 손이 다락방 밖 복도에 걸어놓은 화병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본 아리엘이 숨을 할딱 들이쉬는 순간, 그녀의 머리 옆으로 화병이 날아들었다.
퍽. 쨍그랑!
후작이 던진 화병이 아리엘 옆의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아리엘은 눈을 감으며 몸을 바짝 움츠렸다.
그가 아리엘에게 한 발자국 다가오며 말했다.
“그런데, 기어이 기어 나와 돌아다니다가 모니카 공작 부부와 마주쳐?”
아리엘은 입을 달싹이며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변명해보았자 소용없을 것이다.
그녀가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라비 제롬의 나쁜 장난질에 쫓겨 도망쳤던 것이라고.
하지만 후작은 아리엘이 변명을 하면 더욱 화를 낼 게 분명했다.
“게다가 또 괴상한 짓을 벌였더구나. 잠긴 문밖으로 나오다니. 그 악마 같은 짓거리가 내 눈에 보이지 않게 하라고 했지!”
아리엘은 발을 바르작거리며 몸을 물렸다.
다가오는 후작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떨어져 보려는 미약한 시도였다.
그녀의 맨발에 깨진 화병의 유리 조각이 박혀 피를 냈다.
“아.”
금세 붉은 피가 송골송골 맺혀 희고 조그만 발바닥 아래 고였다.
유리 조각의 가장자리를 타고 흐르는 선혈.
붉은 것을 본 루실리온 후작의 눈빛이 돌연 변했다.
방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잔악한 눈이었다.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아리엘은 어두운 벽을 더듬으며 다락방 구석으로 도망쳤다.
턱.
하지만 이내 후작의 손에 머리채가 잡혔다.
머리카락이 통째로 당겨지는 고통에 숨이 막혔다.
“끔찍한 색깔이군. 정말 끔찍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다시 내뱉은 후작이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을 세게 틀어쥐고 그녀를 다락방에서 질질 끌어냈다.
계단에 온몸이 부딪혀서 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지만, 아리엘은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울고 비명을 지르고, 애원할수록 더 많이 맞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서재까지 아리엘을 끌고 간 후작이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천천히 빼냈다.
루실리온 후작가의 문장이 그려진 인장 반지와 커다란 녹보석이 박힌 묵직한 금반지였다.
원래 한두 시간이면 끝나던 주먹질은 그날따라 길었고, 아리엘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다가 새벽녘쯤 기절해서 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리엘은 자신의 왼쪽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아리엘의 한쪽 다리가 반 불구가 된 뒤, 후작은 망할 계집이 절름발이까지 되었다며 화를 냈다.
“대강 정략결혼으로 다른 가문에 팔아 치우려고 했더니. 쯧. 그것도 틀렸군!”
후작은 그녀를 제 딸로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이용하고는 싶어 했다.
다른 귀족 가문에 시집을 보내 조금이라도 이득을 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작가 체면에 불구가 된 딸을 시집보낼 수는 없었다.
망가진 다리 때문에 아리엘을 결혼시키려는 계획이 틀어지자 후작은 그녀를 착취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어린 데다 교육받지도 못한 그녀의 마법은 보잘것없었으나, 마법 재능이란 것이 워낙 귀해 제법 돈이 되었다.
아리엘은 마력을 가진 이들이 하는 일 중 가장 천한 일인 마정석 생산을 했다.
몸에 있는 마나를 뽑아 마정석을 만드는 일이었다.
후작은 그녀에게 그 이상의 일은 가져다주지 않았다.
더 돈이 될 일이 많은데도 그렇게 했던 건, 아리엘이 마법 능력을 제대로 갖추면 복수를 하거나, 제 손을 떠날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그때의 아리엘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쓸모를 입증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 싶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 아리엘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가 아리엘을 찾아왔다.
'그'는 아리엘이 만든 마정석이 특별하고 마음에 든다면서 후작에게 그녀를 요구했다.
후작이 거절하자 '그'는 몸값으로 아주 비싼 값을 불렀다.
그렇게 그녀의 눈앞에서 한차례 승강이와 흥정이 끝난 뒤 아리엘은 '그'에게 팔려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후작가에서는 아픈 딸을 요양 보낸다는 그럴듯한 구실을 대 아리엘을 집에서 치워버렸다.
후작가를 떠난 아리엘은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더한 지옥으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 * *
아리엘을 사 온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의 심장에 '운디르의 저주'라는 보석을 집어넣는 일이었다.
그 보석에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보석을 몸속에 지닌 자를 조종할 수 있게 하는.
어리고 힘없는 아리엘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당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저주의 보석을 심장에 넣은 채 살게 되었다.
'그'는 아리엘에게 마법을 배우도록 명령했다.
'그'의 수하에는 그녀를 가르칠만한 다른 마법사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에게 마법을 배우면서 아리엘은 비로소 자신의 마법 재능이 보잘것없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리엘의 안에 숨겨져 있던 마나의 분량은 거대했고, 그녀의 재능은 뛰어났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무리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가 되었다. 겨우 열네 살에.
그녀가 배운 마법은 주로 공격 마법과 저주 마법.
그렇게 아리엘은 하루하루 강해져 갔다.
하지만 점점 강해져 가는 그녀의 이면에는 그만큼 피폐해지고 약해져 가는 그녀가 있었다.
공격 마법은 그녀의 몸을 상하게 했다.
아리엘은 자주 피를 토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장과 피와 살이, 뼈가 망가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아리엘은 조종당하고 있었고, 오직 '그'가 시키는 대로만 자신의 마나를 사용해야 했다.
처음에는 마법 실력이 늘어나는 게 놀라웠지만, 곧 무분별하게 타인을 해치는 마법만을 연마하는 것이 고통스럽고 두려워졌다.
그 마법으로 자신의 몸까지 해치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리엘은 '그'의 아래에서 지독한 3년을 보냈다.
정신도, 육체도, 영혼도 엉망이 되어 너덜너덜해졌다.
그리고 열일곱 살의 성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녀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전에도 사소한 임무를 맡았었지만 이번엔 특별했다.
'그'는 이번 임무를 잘 해낸다면 운디르의 저주를 심장에서 빼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계약 당사자가 죽을 때까지 영구적인 효력을 가지는 마법 계약서까지 건네며 그녀에게 확신을 주었다.
드디어 아리엘에게도 희망이 생긴 것이다.
엉망이 된 몸을 이끌고, 아리엘은 온 힘을 다해 그가 침입하라는 곳으로 침입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죄다 죽였다.
그곳이 라카트옐 대공가였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흑발에 짙은 청색의 눈동자를 가진 젊은 사내를 만난 뒤였다.
“라카트옐의 사자들을 모두 죽이다니. 넌 뭐지?”
아리엘은 말을 잃었다.
제국 유일한 대공가인 라카트옐 대공가는 세 살 어린애도 알만큼 유명하면서 황제조차도 다 파악하지 못할 만큼 베일에 싸인 가문이었다.
아무리 아리엘이 후작가 다락에만 갇혀 살아 세상 물정 모른다 해도 라카트옐 대공가는 알았다.
그 가문의 위세 높은 권력과 부, 혈통을 타고 대물림되는 광기를 모르는 이는 제국에 없었다.
마주친 흑발의 사내는 높은 창틀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있었다.
주변에 죽은 기사들이 뿌린 피가 웅덩이지어 낭자하고, 그들을 죽인 소녀가 바로 눈앞에 있는 상황에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움이었다.
그래서 그 모습이 더욱 오싹하게 느껴졌다.
“…….”
그가 아리엘을 바라보자, 그녀는 자신이 사냥감이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명백한 포식자의 시선에 몸이 얼어붙었다.
이빨을 힘껏 드러내보았자 눈앞의 포식자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머릿속을 짓눌렀다.
그에게 대항하면 너무나 손쉽게 죽어버릴 것 같은 공포감.
대체 누구지? 죽은 기사들의 상관인가?
분명 눈앞의 인간은 젊은 사내일 뿐인데 그는 무척 거대해 보이고, 그녀는 사자 앞의 생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 공간 속의 모든 공기와 빛과 먼지의 분자들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고.
창틀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가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왔다.
겁먹은 아리엘은 그를 공격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가 내뿜는 위압감에 공기가 끔찍이 무거워졌다.
순식간에 중력이 서너배 강해진 느낌이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아리엘이 쓰고 있던 두건 망토를 끌어 내려 벗겼다.
순간, 그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스쳐 갔다.
갑자기 망토가 벗겨진 아리엘은 드러난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이 수치스러웠다.
역시 이상하고 흉측해 보이겠지.
“너.”
짧게 내뱉은 남자가 당혹스러운 빛을 지우고 싸늘하게 물었다.
“몇 살이지.”
그녀는 곧 열일곱이 될 열여섯 살이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몸을 학대당한 아리엘의 성장은 열두세 살 언저리에 멈춰있었다.
“너무 어리군.”
그가 느리게 말했다.
지독하게 청각을 파고드는 뇌쇄적인 음성.
지배자의 목소리.
아리엘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손에 거대한 공격 마법구를 생성했다.
애초에 받은 임무가 이곳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는 것 아니었던가.
시간을 오래 끌면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손에 시커먼 마나 덩어리가 모이는 것을 보면서도 사내는 무감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던 눈빛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마치 네 발악 따위는 아무 소용없다는 듯이.
그것에 분해진 아리엘이 그를 향해 마나 덩어리를 던지려는 순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주지.”
아리엘의 손이 멈췄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방금 사내의 휘하 사람들을 모두 죽인 참이었고, 살인은 어리다는 이유로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리엘은 그런 말을 태어나 처음 들었다.
도와주겠다고, 나를?
그녀가 아버지인 후작의 손에 매일같이 주먹질을 당할 때도, 오라비가 그녀를 개보다 못하게 취급하며 괴롭힐 때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아리엘의 심장에 저주의 보석을 심을 때도, 처음으로 사람의 피를 손에 묻히고 벌벌 떨던 날에도 그녀에게 손을 내민 사람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도와주겠다고……?
부하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에 사내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신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리엘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그녀의 손에 모였던 검은 마나 덩어리는 사내의 검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처음 보는 광경에 아리엘은 눈을 깜박였다.
사람을 해치는 마법구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듯,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
묘하게 명령조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아리엘은 입술을 짓씹으며 그의 청안을 바라보았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일만 마치면 운디르의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는데.
마음속에서 불쑥 의문이 솟아올랐다.
‘'그'가 정말로 너를 놓아줄 거라고 생각해?’
줄곧 외면하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막연하게나마 희망을 붙잡고 싶어서. 이번에야말로 마법 계약서까지 써주었으니까, 정말일 거라고 믿으며.
아리엘은 3년간 보아온 '그'를 떠올렸다.
탐욕과 증오, 악을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던 '그'.
깨달음이 왔다.
'그'는 절대로 아리엘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그녀는 그의 노예일 것이다.
‘싫어. 더 이상은…….’
아리엘은 눈앞에 선 흑발 사내의 손을 향해 자신의 손을 뻗었다.
그의 크고 긴 손바닥 위에 애처로울 만큼 작은 그녀의 손이 놓였다.
그녀는 동아줄을 잡듯이 사내의 손을 세게 쥐었다.
그녀보다 훨씬 위에 있는 사내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름다움을 많이 경험해보지 못한 그녀가 보기에도 아찔하게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리고 아리엘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심장에 박힌 운디르의 저주 때문이었다.
* * *
그러고 나서 눈을 떠 보니 후작가 다락방에 있었다.
아리엘은 다시 한번 멍하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단풍잎처럼 조그마한 손, 어린 토끼처럼 자그만 발, 짧은 팔다리와 확 낮아진 시야.
분명 그녀는 열일곱 살이 되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8년 전으로 거슬러 깨어난 것이다.
아리엘은 다락 창으로 후작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이른 아침임에도 아침잠이 없는 후작가 집사가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분명 내가 후작가를 떠나기 전에 죽었는데.’
한 번도 아리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뚱뚱한 중년의 집사는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죽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있잖아.’
아리엘이 열세 살일 때 후작가 뜰에 세운 동상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저건…….
아리엘은 뜰 구석에 매여 있는 까만 조랑말들과 그 말들이 매여 있는 놀이 마차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저건 제롬 오라버니가 가지고 놀던 건데.’
아리엘보다 세 살 많은 그녀의 오라비 제롬이 후작에게 조르고졸라 받아낸 비싼 장난감이었다.
까맣고 털이 반지르르한 조랑말들에게 채찍질을 하며 신나게 마차로 정원을 가로지르던 제롬을, 다락에 갇힌 채 하염없이 구경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
갑자기 머리를 맞은 듯이 지금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그렇다면 자신이 열일곱 살까지 겪은 모든 일들이 다 꿈이란 말인가?
아리엘은 자신이 알고 있던 공격마법을 구동해보았다.
“티어리.”
주문을 욈과 동시에 몸 안쪽에서 마나가 거세게 움직이며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으윽.”
그녀는 바로 마법 구동을 멈추었다.
“하아, 하아…….”
되잖아.
과거 아홉 살일 때는 절대로 하지 못했을, 높은 클래스의 공격마법이 구동된다.
물론 그걸 버텨내기에는 몸이 너무 작고 연약해서 기절할만큼 아팠다.
아리엘은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기억을 가진 채 과거로 돌아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망가지기 시작했던, 열 살의 생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분명 죽었었는데.’
흑발 사내의 손을 잡는 순간 심장이 산산 조각나며 죽었다.
아마도 '그'가 아리엘이 자신을 배반하면 저주가 발동되도록 마법을 걸어놓았던 것 같다.
그때의 고통을 떠올린 아리엘은 몸을 옹송그린 채 부르르 떨었다.
심장이 조각조각 찢어지고 터지던 감각…….
아리엘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은 두 손을 심장께에 모으고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고동을 느꼈다.
잘 뛰고 있다.
아홉 살의 심장은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았다.
‘그러니까 바꿀 수 있어.’
아리엘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과거를 되짚기 시작했다.
* * *
과거.
지금의 아리엘이 과거라고 생각하는 시간들은 곧, 앞으로 그녀가 겪을 미래였다.
미래를 보고 돌아온 셈이니 앞으로의 일들을 척척 예측해가면서 행동할 수 있어야 정상이겠지만…….
‘나는 아는 게 별로 없어.’
열네 살까지는 후작가 다락방에, 열일곱 살까지는 '그'의 손아귀에 갇혀있었던 아리엘은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돌아온 지금도 앞으로 제국에 있을 커다란 사건이나 사교계를 휩쓸 유행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 인생만은.’
아리엘은 단풍잎처럼 조그마한 손을 꼭 쥐어 앙상한 가슴에 대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만큼 대단한 정도는 아니지만, 스스로의 인생을 바꿀만큼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나 자신은 구해낼 수 있다.
지금의 아리엘에게는 그것이면 족했다.
‘일단은 후작가에서 나가야 해.’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무력하게 한쪽 다리를 잃고 가족에게 착취만 당하다가 악당에게 팔리고 말 테니까.
“…….”
아리엘은 과거를 떠올리듯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잘 먹지 못한 그녀의 다리는 갓 태어난 새끼 사슴의 다리처럼 가냘프고 말랐지만, 아직까지 불구는 아니었다.
‘이제 앞으로 일주일.’
그 날까지 일주일 남았다.
엿새가 지나면 지금 아홉 살인 아리엘은 생일을 맞아 열 살이 된다.
그리고 생일 바로 다음 날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단지 후작의 손님들 앞에서 그에게 창피를 주었기 때문에 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녀의 존재 자체 때문에 맞은 것이다.
그러니 그 순간을 어떻게 모면한다 해도 어차피 곧 그녀는 맞아 죽거나 불구가 될 것이었다.
‘그 모든 걸 반복하고 싶지는 않아.’
아리엘은 얼어서 곱은 손을 꾹 쥐었다.
과거에는 아버지와 오라비의 애정과 관심을 갈구했었다.
진심으로 그들 사이에 가족으로 섞이고 싶었다.
하잘것없는 마법으로 머리카락 색을 바꿔보려고 하다가 실패해서 더 조롱거리가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오라비는 끝끝내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그렇게 학대당하고 이용만 당하다가 팔리고, 버려지지는 않을 거야.’
아리엘은 조그마한 손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그녀는 더 이상 가족들의 애정을 바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부터 시작이었다.
앞으로 그녀의 삶에 일어날 수많은 일들은 그녀가 이제부터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바뀔 수도, 바뀌지 않을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은 불확실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있었다.
‘내가 일주일 후에 아버지에게 맞아서 불구가 된다는 것이지.’
일단 그것부터 막아야 했다.
그리고 아리엘이 아는 한, 미성년의 어린 영애가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결혼.’
그래서 열 살의 아리엘라 루실리온은 결혼을 결심했다.
* * *
“결혼…….”
아리엘은 조용히 그 단어를 입에 담아보았다.
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연을 맺는 진짜 결혼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아리엘에게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 후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남편이 필요했다.
그 대가로 그녀 또한 남편에게 필요한 것을 줄 생각이었다.
‘계약 결혼인 거야.’
아리엘은 성에가 끼어 창백한 겨울의 창가로 다가갔다.
창에 자그마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 비쳤다.
아리엘은 비치는 제 모습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스칼렛 레드의 맑고 선명한 붉은색 머리카락이 허리께까지 자라 흘러내려 있었다.
아무도 잘라주거나 다듬어주지 않아서 계속 기르기만 한 머리카락이었다.
돌봄을 받지 못해 마르고 야윈 얼굴도 비쳤다.
하지만 새벽의 창백한 빛도 아리엘의 갓 내린 첫눈 같은 하얗고 투명한 피부를 감추지는 못했다.
동그란 눈망울 안에는 달콤한 스트로베리 레드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자리 잡았다.
추위에 트고 갈라졌음에도 입술은 앙증맞게 연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아직 아기 티를 벗지 못한 이목구비 또한 무척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추하다고만 알고있는 아리엘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거슬러왔는데도 이상하게 생긴 것은 똑같구나.’
계약이긴 하지만 결혼을 해야 하는데 끔찍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과거 그녀는 열일곱 평생 남에게 얼굴을 보인 적이 거의 없었다.
후작가에서 살 때는 다락방에만 갇혀있었으니 일 년 중 사람 앞에 나서는 게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그'에게 팔려 마법사들 무리에서 지낼 때에도 아리엘은 자기 얼굴을 철저하게 숨겨야 했다.
그녀가 루실리온 후작 영애라는 것을 감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의 지시였지만 아리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안 그래도 아이에, 여자에, 절름발이인데 흉측하게 생긴 것까지 약점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결혼할 남편 앞에서까지 얼굴을 숨길 수는 없겠지…….’
아리엘은 어느새 김으로 뿌예진 창문에 자그만 손을 문질러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지워냈다.
남편이 되어줄 사람이 부디 계약 결혼의 조건에 외모를 두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 * *
제국의 결혼법은 이랬다.
여자아이는 열 살, 남자아이는 열두 살부터 결혼을 할 수 있다.
다만 미성년의 결혼에는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다.
아리엘은 지금 아홉 살이었고, 결혼을 하려면 열 살 생일이 지나야만 가능했다.
그렇다면 탈출도 생일 이후여야만 한다.
‘언제가 가장 좋을까?’
누구도 다락방에 갇힌 그녀를 신경 쓰지 못할 만큼 후작가가 분주하고,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 누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때.
그때 맞춰 탈출을 시도해야 했다.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던 아리엘의 머릿속에 문득 깨달음이 지나갔다.
‘아!’
후작가에 손님이 오는 날이면 되겠구나.
손님 대접을 해야 하니 저택이 엄청나게 분주할 거고, 식재료나 일손들이 많이 드나들 테니 어린 소녀 하나쯤은 몰래 빠져나가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로서 후작가에 손님이 올 예정은 그 날 뿐이었다.
‘모니카 공작 부부가 방문하는 날.’
과거 아리엘이 왼쪽 다리를 잃었던 날이다.
그 일의 원흉인 오라비 제롬의 나쁜 장난질은 저녁 무렵이니 그 전에 빠져나가면 된다.
운이 좋게도 모니카 공작 부부가 방문하는 날은 그녀의 열 살 생일 바로 다음날이라 결혼이 가능했다.
아리엘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날을 탈출일로 정했다.
하지만 탈출 외에도 중대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부모의 동의.’
아버지인 루실리온 후작은 아리엘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법 능력을 가진 그녀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당연히 결혼에 순순히 동의해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결혼하는 상대가 아버지보다 권력이 강하고 힘센 가문이어야 해.’
아리엘을 후작의 손에서 빼내 주려면 공작가 이상의 가문이어야만 한다.
그중에서 계약 결혼을 할 상대를 정해야 했다.
아리엘은 다락 구석에 먼지를 가득 뒤집어쓰고 쌓여있는 귀족 계보도 책에 손을 뻗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음식이나 초 한 대는 넣어주지 않으면서도, 계보도는 다락방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덕에 계보도를 구할 수 있는 건 행운이었다.
책을 펼치자 어두운 방 안에 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콜록, 콜록.”
아리엘은 기침을 하며 계보도를 보기 시작했다.
제국에는 하나의 대공가와 세 공작가가 있었다.
아리엘은 그 네 가문의 계보도를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훑었다.
‘미혼의 남자, 미혼의 남자…….’
입속으로 종알거리며 계보도를 읽어 내려가던 아리엘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세 공작가의 방계까지 합치면 꽤 많은 자손이 있는데도 그 중 아리엘과 결혼할 수 있는 나이대의 남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이 많은 공작의 아들들은 모두 결혼했거나 외국에 나가 있었고, 손자들은 너무 어려서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대로 후작의 손에 계속 붙잡혀 있어야 하는 걸까?
맞아서 불구가 될 걸 뻔히 알면서도?
아니면 이 후작가를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약한 몸으로 공격 마법을 써야 하는 걸까.
지금의 아리엘이라면 마법으로 후작과 이 집 사람들 모두를 제압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몸으로는 몇 초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게 뻔하지만.
만약 그렇게 그녀가 탈출도 하지 못하고 마법 실력을 들키게 되면 후작은 아리엘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공격 마법이 들어간다면…….
‘모두 내 손에 죽을 거야.’
아리엘이 익힌 공격 마법에 적당함이란 없었다.
쓰면 죽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아홉 살에 살인자가 된 소녀 하나뿐.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과거와는 달리 아리엘은 더 이상 아버지와 오라비의 애정을 바라지 않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이 잔인하고 무서운 학대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마법을 쓰다 몸이 버티지 못해 자신이 죽을 확률도 있었다.
그녀는 또다시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 아리엘의 무릎에서 두꺼운 책 하나가 흘러내렸다.
아리엘은 무심결에 책을 집어 올려서 제목을 읽었다.
[라카트옐 가(家)].
“라카트옐.”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과거의 그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라카트옐 대공가인 줄 모르고 한 짓이었지만 아리엘은 그곳의 기사들을 모두 죽였었다.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남자…….
아리엘은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은 기분으로 계보도를 읽어 내려갔다.
많은 가지를 친 다른 가문의 계보도와 달리 대공가의 계보도는 거의 일직선에 가까웠다. 그 맨 아래로 따라가자…….
아.
“……있다.”
대공가의 자손에 미혼의 남자가 있었다.
현 대공 마티어스 엘윈 라카트옐의 아들.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
계보도의 연도를 보니 그녀보다 네 살이 많았다.
‘남자는 열두 살부터 결혼할 수 있으니까 가능해.’
그렇다면 해가 바뀌고 아리엘만 열 살이 되면, 둘 다 확실히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
그리고 아직 두 사람은 미성년이니까 성인이 될 때 이혼도 가능했다.
제국에서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허용하는 대신 성인이 될 때 한 번 더 결혼을 결정할 기회를 주었다.
계속 결혼을 이어가고 싶다면 다시 결혼 서약을 하고, 헤어지고 싶다면 별다른 절차없이 이혼을 시켜준다.
귀족계에는 가문 간의 이익 관계를 위해 아이일 때 서류상으로만 결혼했다가, 성인이 되어 이혼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찾았어.’
아리엘의 가슴이 희망으로 두방망이질 쳤다.
결혼해줄 수 있을만한 상대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라카트옐 가의 계보도에서지만.
‘그런데, 대공가의 공자와는 어떻게 만난다지?’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아리엘은 지난 17년 평생 다락방과 마법사들 틈에서만 지내서 귀족계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공가 사람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심지어 베일에 싸인 그 라카트옐 가라면 더욱.
그때, 아리엘의 머릿속에 그곳에서 만났던 흑발 청안의 사내가 떠올랐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곳의 기사 중 하나였겠지.
죽기 전에 들었던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도와주지.’
그는 아리엘을 보고 도와주겠다고 했었다.
그녀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얼마나 흉측하게 생겼는지 모두 보고서도.
무엇보다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대공가에 들어가면…… 그 사람도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방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아리엘은 조그마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길 빠져나가서 그곳으로 가고 말 거야.’
* * *
탈출 전날까지 아리엘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계획을 세웠다.
아무리 갇혀 살았다지만 과거, 14년을 후작가에서 보냈었다.
그녀는 저택의 하녀들이 언제 일어나서 무엇을 가장 먼저 하는지, 하인들이 몇 시에 어느 문으로 오가는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후작가의 하녀, 하인들은 집사 몰래 쉴 때 다락방 옆 계단에 앉아 있곤 했다.
쉬면서 저희들끼리 떠드는 소리는 고스란히 아리엘 귀에 들어왔다.
‘천대받는 어린애일 뿐이니까 뭘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겠지.’
아리엘은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끌어내어 탈출 경로를 짜고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이 다락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다락의 문이 단단히 잠겨 있으니 마법을 쓰지 않고서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동 마법에 서툴러.’
아리엘은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했는지를 그 순간에 절감했다.
그녀는 공격 마법과 저주 마법에는 강했지만, 그녀 자신을 보호하거나 몸을 피하는 데 필요한 마법은 익히지 못했다.
언제나 '그'가 붙여준 마법사들이 아리엘을 이동시켜 주었고, 전투할 때는 결계도 쳐주었다.
고작 열네 살이었던 아리엘은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지옥 같은 후작가에서 막 벗어난 참이었으니까.
어리고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그때의 그녀는 '그'가 무엇을 시키든 의심할 줄을 몰랐다.
그게 아리엘이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덫인 것도 모르고.
‘서툴러도 해야 해.’
할 거야.
바꿔야 하니까.
이전의 아리엘은 못하는 것은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했다.
실패하면 모두가 그녀를 얕잡아 볼 것 같았다.
오라비 제롬처럼 그녀를 무시하며 비웃거나, 아버지처럼 쓸모없는 아이라며 때릴 것 같았다.
그래서 잘하는 것만 했다.
못하는 건 싫어하고 기피했다.
'그'의 휘하에 있던 마법사들이 공격 마법에 재능이 있다고 하자, 아리엘은 그 말만 믿고 다른 마법엔 일절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실은 이동도 잘하지 못하고, 혼자 결계도 치지 못하는 자신이 불안했으면서도.
‘이제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
그래서 아리엘은 몇 번이고 시도해보기로 했다.
‘안되면 한 번 더 하고, 또 안되면 다시 한번 더 하면 돼.’
그래도 안 되면 또 한 번 더.
이 어린 몸은 아직 마나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맞아서 몸이 상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여러 번의 시도 중에 딱 한 번이라도 성공한다면.
‘나갈 수 있어.’
이곳만 탈출하면 대공저까지는 멀지 않았다.
대공가의 영지는 수도와 한참 떨어져 있지만, 저택은 후작가 저택처럼 수도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나서는…….
대공저에 도착한 뒤에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아리엘은 담요 안으로 꼬물꼬물 기어들어 갔다.
추워서 달달 몸이 떨렸지만, 내일을 위해 마나를 쓸 체력을 남겨두어야 했다.
몸을 따뜻하게 해줄 마나 방울도 만들 수 없었다.
그녀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거친 담요 안으로 몸을 동그랗게 말아 옹송그렸다.
추위에 지친 아리엘은 가물가물 감기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손톱만큼 덜 찬 보름달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오늘 생일이었구나.’
탈출에 온 신경을 쓰고 있느라 오늘이 생일이란 것도 잊고 있었다.
아리엘은 속삭이듯 스스로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작은 가슴이 찌르르 울었다.
내가 열 살이 되었어.
엄마. 아리엘라 루실리온이, 열 살이 되었어요.
열 살 생일을 겪는 게 두 번째인데 이번 생일은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아리엘에게 열 살이란 기적 같은 숫자였다.
이곳을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희망의 촛불.
생일 케이크에 꽂는 초 대신에 달빛을 눈에 담던 아리엘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열 개의 촛불이 눈앞에 있다고 상상하며 차갑게 곱은 두 손을 모았다.
소원이 있어요.
생일 때마다 소원을 빌었지만…….
열 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소원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지난 삶과는 다르게 살고 싶어요.’
“후우.”
상상 속의 촛불을 끄며 종긋한 입술로 바람을 불었다.
그리고 어린 소녀는 이내 깊은 잠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열 살을 맞은 아리엘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 * *
모니카 공작 부부를 손님으로 맞는 날이니만큼 저택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얼른얼른 서둘러, 굼벵이 같은 것들아! 점심 만찬 준비가 늦어지겠다!”
하녀장과 집사가 목소리를 높여 아랫사람들을 닦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엘은 어딘지 탄 냄새가 나는 식은 곡식죽을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으.”
항상 성의 없는 음식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 심한 것 같았다.
아마도 주방이 바쁘니 그렇겠지.
‘그래도 배가 고픈 건 무서우니까.’
아리엘은 끔찍한 맛을 꾹 참으며 한 숟갈을 더 입에 밀어 넣어 오물거렸다.
루실리온 후작가에서 아리엘의 존재는 참으로 애매하고 불편한 것이었다.
실제 신분은 높디높은 후작 영애인데, 후작이 집 안에서 아리엘을 딸로 인정하지 않으니 아랫사람들 입장에서는 하녀만큼도 대접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하녀는 일이나 돕지, 저 애물단지 아가씨한텐 일도 못 시키잖아.’
하인들과 하녀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아리엘은 몇 번이나 들었다.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소리로 말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녀의 작은 어깨는 움츠러들곤 했다.
만약 아리엘을 천대한다고 후작이나 후작 영식이 화를 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엘의 아버지와 오라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에게 좋은 대접이 가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보니 아리엘에게 주어지는 옷이나 음식, 다락방의 상태는 형편없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처럼 하인들이 먹고 남은 음식이라도 제때 주면 다행이고, 식사 때가 한참 지나도록 음식 구경을 못할 때도 많았다.
아리엘은 귀리죽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인내심 있게 저택이 더욱 바빠질 때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두건으로 눈에 띄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꼼꼼히 감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저택에는 원래 어린 하녀가 없지만, 오늘은 워낙 일손이 바빠서 잔심부름을 할 어린 하녀, 하인 몇 명을 고용했다고 들었다.
아리엘은 차림이 워낙 허름하니 하녀 아이들처럼 머리카락을 두건 안에 감추고 조용히 지나가면 심부름가는 하녀인 줄 알고 참견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녀들이 가장 바쁘고 정신없을 시간까지 기다린 아리엘은 단풍잎같이 조그만 양손을 문 앞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머리에는 옮겨갈 곳의 심상을 그렸다.
“리플라즈마.”
주문을 외자, 몸속에서 마나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더불어 몸에 무리가 오는 것도 실감 되었다.
아리엘은 시공의 틈 사이로 휙 빨려 들어간 뒤, 허공에 내던져졌다.
아주 상냥하지 못한 방식으로, 거칠게.
결국, 아리엘은 견고하게 잠겨있는 다락방에서 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목숨을 건 수 번의 시도 끝에 이뤄낸 일이었다.
밖으로 나온 아리엘은 자신이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후작가 문을 나서지도 못했는데…….’
점점 똑바로 서 있기가 어려워졌다.
몸을 꼿꼿이 펴고 숨을 쉬는 것도 힘에 벅찼다.
희고 보드라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열 살의 육신은 훨씬 더 약하고 망가지기 쉬웠다.
갑자기 끄집어 내져서 불쾌해진 듯한 마나 덩어리가 그녀의 혈관을 타고 난폭하게 흘렀다.
“하아, 흐윽, 하아…….”
아리엘은 조그마한 손으로 심장께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다리를 재촉했다.
마법을 더 쓰면 쓰러질 게 뻔했기에 직접 걸어서 나가야 했다.
후작가 저택 문 앞에 당도하자 문지기들이 그녀를 막아섰다.
“어디를 가는 거지?”
아리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숫기 없는 하녀처럼 문지기에게 심부름을 간다고 웅얼거렸다.
오늘따라 오가는 하녀들이 많았는지 문지기는 귀찮은 기색으로 작은 쪽문을 열어주었다.
문지기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안도하며 아리엘이 문을 빠져나가는 그때였다.
“이봐, 제프, 휴. 조금 있다가 건포도 두 포대가 들어올 거야. 제대로 확인하고 들여보내라고.”
뚱뚱한 집사가 문지기에게 다가와 말했다.
“알겠습니다, 집사님.”
“어, 근데 저 하녀는 뭐야? 이렇게 바쁜 시간에 자리를 비우다니?”
“주방에서 오늘만 고용한 하녀 아이인 것 같은데요. 심부름 간다기에 내보냈습니다.”
심드렁한 문지기의 대답을 듣고도 집사는 소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녀치곤 너무 작은데? 기껏해야 일곱 살 정도의 키잖아. 아무리 일손이 모자라도 저렇게 작은 애를 고용하진 않아. 제일 어린 하녀가 열세 살이라고.”
“엥? 그럼 저 애가 외부인이라도 된단 말씀이십니까?”
문지기 중 하나인 제프의 물음에 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오늘 들어간 사람은 모두 확인했는걸. 저런 애는 없었다구. 분명 저택 안에서 지내던 아이일……”
“……!”
그 순간 뚱뚱한 집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드디어 저 비루먹은 소녀의 정체를 짐작해낸 것이다.
경악에 숨이 막힌 그는 컥컥거리다가 소리쳤다.
“이 댁 아가씨다. 잡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문지기 둘이 집사를 따라 소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아리엘도 바로 뛰기 시작했지만 성인 남자 세 명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몇 걸음 도망가지도 못하고 잡혀버릴 위기였다.
‘안 돼……!’
지척까지 따라온 집사의 손이 그녀를 쥘 뻔하다가 아슬아슬하게 두건만 낚아채 갔다.
‘앗!’
두건 속에서 선명한 스칼렛 레드의 적발이 흘러내려 드러났다.
“아가씨, 이러다가 후작님 눈에 띄면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뒤에서 뚱뚱한 집사가 헉헉거리며 협박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 집에 계속 남아있으면 자신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아리엘은 필사적이었다.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절박해지자 본능적으로 그녀의 입술이 한 단어를 뱉었다.
“디르쉴리!”
예전의 그녀가 가장 자주 썼던 공격 마법의 일종이었다.
아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빛이 번쩍 지나가며 뒤의 집사와 두 명의 문지기가 나가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구동되지 않았어.’
과거의 아리엘이 썼다면 세 명의 남자쯤은 산산조각으로 찢어버렸을 마법이었다.
하지만 마나를 담은 그릇이 어리고 연약해서인지, 그녀가 얼결에 뱉어버린 공격 마법은 추격자들을 튕겨내는 데에 그쳐 버렸다.
더 따라오지 않는 걸 보니 기절한 것 같았다.
아리엘은 자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에 왠지 모르게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순간 다리가 푹 꺾이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흐윽.”
바닥에 푹 쓰러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이 붉게 물들며 속에서 피가 울컥 올라왔다.
속이 뒤집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아파. 아파. 너무 아파.
아무래도 공격 마법을 사용한 후유증인 듯했다.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낀 아리엘은 마지막 남은 힘을 그러모아 라카트옐 대공가의 좌표를 떠올렸다.
“리플라…….”
얄궂게도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과거 그녀가 라카트옐 가로 들어가 그 안의 기사들을 모두 죽였던 날, 그녀를 이동시켜 주었던 마법사가 했던 말.
‘지금 가는 곳은 결계 때문에 이동 마법으로 못 들어간다. 우리가 모두 힘을 합쳐서 결계를 잠시 찢을 테니, 몸이 작은 너만 비집고 들어가라.’
그 당시 그들은 아리엘에게 가는 곳이 라카트옐인 것도 알려주지 않았었다.
아, 그곳에는 결계가 있는데…….
“……즈마.”
아리엘의 입술이 주문을 마저 외자, 주인의 절박함에 응답한 몸속 마나가 그녀를 어딘가로 이동시켰다.
아리엘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아파서 얼굴이 눈물범벅이라 건물의 형상이 어른거렸다.
엄마, 엄마, 나 너무 아파요.
고통에 몸을 웅크린 그녀의 손끝에서 조그마한 나비 모양의 마나가 날아올랐다.
하잘것없는 마법이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가냘프게 속삭인 아리엘은 곧 의식을 잃어버렸다.
소녀가 정신을 잃은 뒤, 나비는 팔랑팔랑 날아서 건물의 어느 창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한겨울인데도 활짝 열려있던 창 안에서 누군가의 손이 나와 자비 없이 콱 나비를 움켜쥐었다.
여리디여린 어린 나비는 소리도 없이 손에 삼켜져 버렸다.
* * *
아리엘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어린 소녀는 소스라치며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잠에서 깨어난 곳이 낯설었다.
그녀는 매일 잠드는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푹신푹신한 침대 위에서 두툼하고 보드라운 이불을 덮고 있었다.
허술한 담요뙈기만 덮던 그녀에게는 침대도 이불도 낯설기만 했다.
한겨울인데도 방 안의 공기가 훈훈하고 따뜻한 것이 아리엘이 살던 춥고 초라한 다락방과는 전혀 달랐다.
‘어, 이제 아프지 않네……?’
아리엘은 정신을 잃기 전까지 느꼈던 무시무시한 고통을 떠올렸다.
한숨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쉽게 사라질 상처가 아니었는데.
아리엘은 조그마한 머리통을 갸웃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어둠에 싸인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리엘이 지내던 다락방에 비해서 엄청나게 큰 방이었다.
후작가의 제일 좋은 손님방보다도 더 넓고 화려했다.
침대도 어찌나 큰지 아리엘 같은 조그마한 소녀라면 열두 명도 더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리엘은 짧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뒤 무릎걸음으로 뽈뽈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침대 아래에는 그녀의 발에 꼭 맞춘 것 같은 자그마한 슬리퍼가 놓여 있었다.
아리엘이 털이 복슬복슬한 그 슬리퍼에 감탄하며 막 발을 뻗는 순간,
쾅.
꽤나 난폭하게 창문이 열리더니 창문으로 누군가가 훌쩍 뛰어 들어왔다.
아리엘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창문으로 침입한 사람이 반쯤 창턱에 걸터앉은 채 말했다.
“깼군.”
아리엘은 간신히 딸꾹질을 삼켰다.
그런데…… 여기가 1층이었나?
보름달이 가득히 차오른 밤.
밝은 달빛의 후광 때문에 창을 등진 채 창턱에 앉은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짧은 전율과 함께 소름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창으로 불어 들어오는 겨울의 칼바람처럼 위험하고 아름다운 기세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실루엣은 얼핏 남자의 것이었다.
짧은 머리카락과 늘씬한 몸. 방만한 자세까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하얀 커튼이 나부꼈다.
휘날리는 커튼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네 건가?”
침입자의 손안에서 무언가가 애처로이 파닥거렸다.
아리엘은 그의 손아귀에 갇힌 나비 모양의 마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건 다락방에 갇혀 살면서 그녀가 외로울 적마다 불러내었던 것이었으니까.
아리엘의 눈빛을 읽은 그가 입을 열었다.
“맞군.”
대답 따윈 필요 없다는 듯 제멋대로 판단 내린 남자는 아리엘 쪽으로 턱을 비스듬히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린 마법사 따위가 이곳엔 어쩐 일로.”
아리엘은 마법사라는 말에 움찔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싸늘하니 무서웠다.
과거, 마법은 그녀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아버지와 오라비에게 버림받고, 악마 같은 자의 손에 이용당하게 만들었다.
아리엘은 겁먹은 어조로 물었다.
“……여기는 어디죠?”
“네가 어디로 찾아온 건지도 몰랐다는 건가.”
어딘지 차갑게 말한 남자가 딱 손가락을 튕겨 창문을 닫았다.
창문이 닫히자 방 안은 조용해지고 춤추던 커튼도 얌전해졌다.
아리엘은 창문이 어떻게 닫히는지 보지 못해 눈을 도르르 굴렸다.
남자가 말했다.
“여긴 라카트옐 대공저다.”
라카트옐!
아리엘은 눈을 크게 떴다.
스트로베리 레드의 둥근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진 채 깜박였다.
아파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맞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곧 정신을 차린 아리엘은 서둘러 대답했다.
“그럼 제대로 찾아왔어요.”
남자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너를 모르는데.”
그러는 당신은 누구신데요, 하는 물음이 아리엘의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남자가 싸늘하고도 오만한 어조로 말했다.
“대공자인 내가 모르는 손님도, 감히 존재하던가?”
대공자.
아리엘은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떠올려냈다.
라카트옐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
‘내가 만나려던 사람이야!’
정확히는 결혼하려던 사람이다.
하지만 정작 상대는 아리엘을 불쾌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 같은 어린애가, 심지어 마법사가 대공가 문 앞에서 뭘 하고 있었지?”
결혼을 해야 하는데 미운털만 박히다니 난감했다.
아리엘은 간신히 용기를 내 목소리를 쥐어짰다.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대공자가 재미있다는 목소리를 냈다.
“나를?”
아리엘은 침대에서 낑낑거리며 기어 내려와 카페트 위에 내려섰다.
한 발 한 발 창가의 인영 쪽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대공자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대공자가 말해보라는 듯 삐딱하게 고갯짓을 했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대공자 쪽으로 둥근 눈을 치켜들었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 * *
“…….”
한참의 침묵 끝에 대공자가 창턱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날랜 맹수 같은 동작이었다.
뚜벅뚜벅 다가온 그가 아리엘의 얼굴에 손을 뻗어 조그만 턱을 붙잡아 올렸다.
상대가 소년이라지만 남자에게 턱을 붙잡혀 고개가 들려진 것이 처음이었다.
아리엘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버렸다.
“새끼 짐승과 결혼할 만큼 궁하진 않은데.”
새, 새끼 짐승이라니.
아리엘의 하얀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사람이에요. 새끼도 아니고요.”
“인간 여자는 열 살이 돼야 결혼을 할 수 있지. 루실리온 후작 영애.”
먼저 밝히지도 않았는데 그는 자신이 후작 영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미 그는 자신이 외부에 드러난 적 없는 후작가의 치부이자 비밀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요람에 매달려 있어야 할 어린 것이 웬 청혼이지?”
아리엘은 잡힌 얼굴을 빼고 싶었지만 대공자의 손힘을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잡힌 턱 때문에 불분명한 발음으로 속삭였다.
“어제…… 열 살이 됐어요. 분명 생일이 지났으니까.”
대공자의 어조가 얼핏 사나워졌다.
“열 살이라고? 일곱 살 이상으론 봐 줄 수 없겠는데.”
당연히 어리다고 생각하고 나이까지는 신경 쓰지 않은 모양이다.
아리엘도 자신이 또래들보다 작고 성장이 느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키는 겨우 일고여덟 살만 했고, 마르고 야윈 몸집 때문에 그 나이보다도 어려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는 분명 열 살이었다.
아리엘은 피하던 시선을 그에게로 치켜들었다.
“정말이에요. 아우렐력 801년생이고, 올해로 열 살이 돼요. 입증할 수도 있어요.”
“…….”
역광에 잠겨든 대공자의 얼굴에선 여전히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목구비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리엘은 어쩐지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차라리 달빛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지금이 편안했다.
아리엘은 조그마한 혀로 입술을 축인 뒤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말해야 했다.
그녀의 인생을 바꿀 시작을.
“제가 열일곱 살 성인이 될 때까지만 당신의 아내로 살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또박또박 덧붙였다.
“저는 보호가 필요해요.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어린 시절에 한 결혼은 성인이 될 때 끝낼 수 있으니, 그때까지만 법적으로 저를 아버지에게서 보호해주세요.”
어린애치고 꽤 당돌한 말을 들은 대공자가 나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결혼이라는 건가.”
흐음, 낮게 신음한 그는 천천히 아리엘의 턱 밑을 쓸어 올렸다.
고양이를 어르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래, 내가 그렇게 하면. 넌 내게 뭘 줄 수 있지?”
물음 끝에 그가 아리엘에게로 바짝 얼굴을 당겨 다가왔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아리엘은 움찔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대공자가 픽, 요염한 웃음을 흘렸다.
“난 딱히 원하는 것이 없는데.”
그렇게 말한 그가 무심히 아리엘의 턱을 놓아주었다.
왠지 발끈한 아리엘은 조그만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 일단 제대로 아내 노릇을 하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입술 아래를 꾹 깨물었다.
치켜뜬 아리엘의 눈동자가 반짝, 예기를 띠었다.
“당신의 마법사가 될게요.”
이것이었다.
수중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리엘이 계약 결혼의 조건으로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돈도, 권력도, 하다못해 아름다움도 없지만, 단 하나, 마법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그것으로 상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법은 돈이 되기도 하고, 권력이 되기도 하니까.
대공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뒤로 기울였다.
“내 마법사라.”
단 하나뿐인 자신의 패를 내민 아리엘은 온 힘을 다해 삐약거렸다.
“전 이상하게 생긴데다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요. 하지만 마법만큼은, 그것만은 강해요. 예전에도…… 아니. 공격 마법은 잘 할 수 있어요.”
그녀는 과거 자신이 라카트옐 가 사람들을 모두 죽였던 걸 떠올렸다.
그중에 대공자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자신이 적이 아니라 아군이 된다는 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을 지켜드리겠어요.”
대공자가 묘하게 탁한 어조로 물었다.
“나와 거래를 하자는 건가?”
그의 질문은 꼭 지하 세계에서 튀어나온 악마와의 계약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아리엘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마법을 보여드릴게요.”
“……쓸데없이.”
대공자의 손이 다가와 아리엘의 말랑한 뺨을 아프게 잡았다.
“아야.”
뺨을 잡힌 아리엘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올려보았다.
대공자가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그 조그마한 몸에서 더 피를 보고 싶진 않군.”
뺨을 놓고 성큼성큼 창가로 간 그는 유리컵 안에 가둬놓은 나비를 풀어주었다.
아리엘은 방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날아오는 나비 모양의 마나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그만 손을 내밀자 나비가 그녀의 손에 내려앉아서 조금 간질였다.
마치 나 저놈 때문에 고생했어, 하고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아리엘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렸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대공자가 말했다.
“좋아. 네 제안을 승낙하지.”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받아들여 주시는 건가요?”
“그래. 그 대신 나한테도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
그가 까칠하게 말을 잘랐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우우. 정말이지 제멋대로인 사람이네.
아리엘은 어둠 속에서 몰래 볼을 부풀렸다.
이제 열네 살 된 소년이 맞긴 한 걸까?
그래도 나름 과거 열일곱 살까지 살았던 그녀인데도 그가 자신보다 어리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리엘은 그가 제시하는 조건이 너무 불가능한 것이 아니길 빌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이제 루실리온 후작의 동의를 얻어야겠지.”
아버지 얘기에 불안해진 아리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분명 반대할 거예요. 그리고, 대공님께서도…….”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넌 그냥 내 옆에 제대로 붙어 있기만 해.”
한 점 의심도 없이 오만하게 말한 대공자가 울 것 같은 표정의 아리엘을 보고 픽 웃었다.
“내가 하기로 결정한 건 무조건 돼. 그것에 대해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네.”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하지. 아리엘라.”
불시에 이름을 들은 그녀는 얼결에 뺨을 붉혔다.
저렇게 불린 것이 얼마 만이었더라?
대공자가 아까 자신이 들어왔던 창문을 열었다.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창문으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아리엘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의식의 흐름대로 불쑥 질문을 던져 버렸다.
“그런데 여긴 몇 층이에요?”
창틀에 손을 짚고 몸을 반쯤 빼내던 대공자가 삐딱하게 고개를 꺾고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얼핏, 달빛에 그의 얼굴이 비쳐 보인 것도 같았다.
얼굴에 막 관심이 가려는 찰나 그의 대답이 아리엘의 정신을 빼앗아갔다.
대공자는 무심하게 말하고 창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4층.”
순간 아리엘은 비명을 질러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 * *
베일에 싸인 라카트옐 대공가에서 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일에 관해서는 일당백인 사람들만 대공가에서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 중 대공가의 재무관이자, 법무관이자, 행정처리인인 달튼은 늦은 밤 들이닥친 대공자 루시안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노, 놀랐잖습니까, 대공자님. ……그것보다 기세부터 줄여주시면.”
귀찮다는 듯이 루시안이 미간을 찌푸리자 방 안을 넘실거리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대공자는 다짜고짜 달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말씀이십니까?”
“결혼 서약서.”
“예에?!”
달튼은 기절할 듯 놀라며 되물었다.
보통의 가치관으로는 라카트옐 남자들의 행동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매번 당할 때마다 기함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갑자기 결혼 서약서라니요? 공자님 결혼하십니까?”
“내일.”
미쳤네.
암만 라카트옐 가라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대공자의 결혼이 내일인데, 그걸 아는 사람은 대공자 본인 하나뿐이라니!
“결혼 상대는요? 적어도 상대 여성분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 거겠지요?”
루시안 대공자는 신부가 될 사람에게도 말해주지 않고 결혼식장에 끌고 와도 이상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아까 집에 들여놓은 그 여자애야.”
달튼은 4층 작은 손님방에 모셔놓은 붉은 머리카락의 어린 소녀를 기억해냈다.
“루실리온 후작 영애요?”
“그래.”
“그래서 그분이랑은 합의가…….”
“말이 길다.”
대공자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젓자 튼튼한 원목책상이 얇은 비스킷처럼 콰직 내려앉았다.
“빨리 서약서나 내놔.”
열네 살의 수려한 미소년에게서 나오는 무지막지한 파괴력에 본능적인 공포가 오싹 올라왔다.
무조건 복종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공포심이었다.
하지만 달튼은 꿋꿋하게 맞섰다.
괜히 라카트옐 가에서 오래 일한 게 아니었다.
“아니, 결혼을 이렇게 갑자기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대공님께선 아시는 겁니까?”
대공자는 미성년이었기에, 부친인 대공에게 결혼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이 의무였다.
“마티어스에겐 내가 이야기한다. 넌 서류나 준비해.”
“하지만 처음 보는 아가씨와 결혼이라니…….”
대공자가 부서진 책상 위에 걸터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마치 기분이 좋아져 흐트러진 맹수처럼.
“첫눈에 반했다고 해두지.”
첫눈에 반해요?!
달튼의 턱이 땅을 향해 툭 떨어졌다.
저게 루시안 대공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안 움직여?”
곧장 떨어지는 위협에 달튼은 재빨리 몸을 놀려 결혼 서류를 꾸미기 시작했다.
대공자는 좋게 말해도 전혀 인내심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근데, 잠깐만.
“아까 그 아가씨가 열 살이라고요?”
달튼은 쓰러진 소녀를 진찰할 의사를 들여보내면서 본의 아니게 어린 후작 영애를 본 참이었다.
“완전히 잘못 아신 거 아닙니까? 아무리 라카트옐 가 공자님이라도 열 살 미만의 소녀와 결혼하는 건 불법입니다!”
“네가 직접 알아보든가.”
달튼의 손에서 결혼 서류 뭉치를 낚아챈 대공자가 손끝을 까딱여 문을 휙 열었다.
“열 살 맞으면 그 책상 나머지도 부숴주지.”
상큼하게 협박한 대공자가 나간 뒤, 달튼은 허둥지둥 라카트옐 가가 수집한 정보 목록을 뒤져 소녀의 신상을 찾아냈다.
“801년생……?”
정말로 열 살이 맞잖아!
“…….”
달튼은 반만 남아있는 훌륭하고 튼튼한 원목책상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든 책상에게 안녕을 고해야 할 때였다.
* * *
대공자가 떠난 뒤 아리엘은 침대로 돌아와 풀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했다.’
해냈어. 내가 바꿨어.
심장이 콩닥콩닥 커다란 소리를 내며 뛰었다.
이걸로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의 그녀에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변화였다.
당장 아리엘은 자신이 후작가를 탈출했다는 것부터 실감하기 어려웠다.
‘지금쯤 후작가는 나를 찾느라 발칵 뒤집혔겠지.’
그녀 때문에 기절했던 뚱뚱한 집사와 문지기들까지 합세해서 아리엘이 갔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라비 제롬의 사냥개들도 곤히 자다 불려 나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찾을 수 없을 거야.’
나라에 일곱 가문밖에 없는 후작가는 분명 높은 지위였지만, 감히 대공가를 수색할 수 있을만큼 대단한 곳은 아니니까.
아리엘은 난생처음 와보는 대공저가 다른 어느 곳보다 안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결혼하면…… 이곳에서 살게 되는 걸까?’
생각 끝에 아리엘은 양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세상에, 내가 결혼을 하게 되다니.
자신이 대공자를 만나 청혼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와닿지 않았다.
현실감없이 그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주특기인 공격 마법을 눈앞에서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는 결혼을 수락했다.
마치 그는 자신의 강함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한 기색이었다.
‘게다가 내 얼굴을 보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어.’
그것만으로도 아리엘은 제멋대로였던 대공자에게 조금 호감을 품었다.
그는 분명 위세 높은 대공가의 아들답게 오만했지만 그건 뭔가 아리엘만을 향한 오만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누구 앞에서도 그럴 것 같은 느낌?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방이 어둡고 달빛은 애꿎은 그의 뒤통수만 비춰서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뒤늦게야 조금 아쉬웠다.
참 그러고 보니 나, 신랑 얼굴도 안 보고 약혼을 해버렸잖아?
나는 이상하게 생긴 얼굴과 붉은 머리카락을 모두 보여줬는데.
아리엘은 왠지 손해 본 기분에 뺨을 부풀렸다.
“하암.”
잠시 앉아 있었을 뿐인데 어린 소녀에게는 금방 잠이 찾아왔다.
조그마한 입을 벌리며 하품한 아리엘은 다시 폭신폭신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녀가 전날까지 덮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이불의 감촉에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피곤해…….’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었던 데다 마법을 썼던 후유증까지 겹쳐져 아리엘의 정신은 금세 가물가물해졌다.
오늘 약혼한 소년이 그들의 결혼식을 내일로 잡았다는 것도, 내일 아침이 되면 상냥한 하녀장이 들이닥쳐 그녀를 정신없이 준비시킬 거라는 사실도 모르는 채.
어린 소녀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밤이 늦어지자 밤공기가 더욱 싸늘해졌다.
밖은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대공가의 저택 안은 고요했다.
대공의 집무실로 향하는 대공자,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의 미간이 서늘하게 구겨졌다.
단순한 결혼이었다면 그냥 총관인 달튼에게 보고하라고 집어던지고 나와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퍽 복잡한 종류였다.
루시안은 대공을 향해 솟아오르는 진득한 불쾌감을 떨치기 위해 새까만 앞머리를 세게 쓸어 올렸다.
대공의 집무실은 열려있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긴 흑발의 남자가 서류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짧게 들었다.
루시안과 대공의 시선이 차갑게 마주쳤다.
“무슨 일이냐.”
“마티어스.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걜 들였는지 모르겠더군.”
잠시 침묵하던 대공이 여상히 대답했다.
“들이지 않을 도리가 있나. 다친 어린 숙녀가 집 앞에 쓰러져 있는데.”
“그 얘기가 아닌 걸 알 텐데.”
“…….”
말 한마디에 대공과 대공자 사이의 기류가 팽팽해졌다.
이윽고 대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크림슨 하트가 제 발로 이 집에 찾아왔으니 들여야만 했지.”
“직접 이 집에 찾아온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던가?”
“물론 의심이야 들었다. 저런 어린애가 피를 토할 정도로 제 몸을 상해가면서 찾아오는 것이 평범한 일은 아니니까.”
“그런 것치곤 고이 손님방에 모셔놨잖아.”
“깨어나면 여기 온 이유라도 묻고 싶었거든.”
고저없는 어조로 대꾸한 대공이 말을 돌렸다.
“그런데 네가 먼저 다녀갔다지. 그 앨 만나고 온 네게 물어보마. 어때, 의심할 만하더냐?”
“…….”
루시안은 대공을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제 오른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의 턱을 붙잡았던 감촉이 아직 손에 남아있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했던 달콤한 빛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동시에 소녀가 간절히 말하던 소망도.
‘저와 결혼해주세요.’
루시안은 이를 사려 물었다.
“……뭘 알고 온 것 같지는 않더군. 알았다면 이 괴물 소굴에 절대 제 발로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까.”
자조하듯 씹어뱉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알고 왔다 해도 상관없어.”
“상관없다?”
루시안의 눈빛이 어둡게 끓어올랐다.
“그것이 내 것이 되겠다 하더군. 그쪽에서 먼저 손을 뻗은 이상, 나는 내 것을 빼앗길 생각이 없어. 물론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야.”
말을 마친 그가 대공의 책상 위에 결혼 동의서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대공은 무덤덤하게 동의서를 기울여 훑어보곤 서명했다.
“허락하마. 지척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대공의 서명을 그린 잉크가 기묘한 빛을 발하며 푸르스름하게 스며들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루시안의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그래, 나와 당신은 이런 괴물이지.
그는 대공의 서명이 그려진 결혼 동의서를 구기듯 손에 쥐었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
문을 나서는 대공자의 기세는 세상의 공기를 모두 얼어 붙일 것처럼 냉랭했다.
대공 마티어스의 귀에 루시안의 마지막 말이 섬뜩하게 들려왔다.
“성인이 되면 당신부터 죽여버리겠어.”
문이 쾅 닫힌 후 집무실에 홀로 남은 대공은 꽤나 무기력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귀염성이라고는 없는 놈 같으니.”
* * *
흰 커튼 위로 한 겹 더 처져 있던 암막 커튼이 걷히며 거대한 방 안에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쳐들었다.
“일어나세요, 꼬마 아가씨.”
“우웅…….”
아리엘은 눈이 부셔서 팔로 얼굴을 가리고 베개 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베개는 조그만 아리엘의 머리통을 폭 숨겨줄 정도로 커다랗고 푹신했다.
“아가씨.”
아리엘의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한 것은 낯선 부름이었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어른 여자의 목소리.
평생 그런 목소리로 잠을 깨본 적 없는 아리엘은 불에 데인 듯 눈을 떴다.
몸을 발딱 일으키자 눈앞에 있는 중년 여인이 포근한 미소를 건넸다.
“잠투정도 하지 않고, 기특하시네요.”
상황 파악을 하느라 눈을 깜박거리자 여인이 다정하게 아리엘의 등 뒤에 쿠션을 받쳐 바르게 앉혀 주었다.
“귀한 집 아가씨라 들었답니다. 아침엔 보통 어떻게 식사를 하셨지요? 간단하게 맑은 스프로 드셨나요? 아니면 반숙 계란과 흰 밀빵, 짙은 콩스프로 든든하게 드실 건가요?”
마침내 자신이 어제 후작가를 나와 대공저에 와있다는 것을 인식한 아리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저, 누구세요?”
중년 여인은 눈앞의 소녀가 귀여워죽겠다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 집에는 온통 남자들뿐이라 여자아이는 귀하고도 귀했다.
“저는 이 댁의 안살림을 총괄하는 하녀장, 마담 수잔이랍니다.”
하녀장……?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하녀장이 한 집안에서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진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녀장은 안주인의 오른팔 같은 존재였다.
아리엘네 집처럼 안주인이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 위세가 높았다.
오죽하면 하녀장에게 잘못 보이면 국물도 없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신분이 높은 가문의 하녀장은 웬만한 준귀족 취급을 받기도 했다.
아리엘이 본 하녀들은 모두 하녀장의 말을 두려워했다.
“아, 안녕하세요. 마담 수잔.”
아리엘이 보통의 후작 영애였다면 하녀장에게 곧장 하대를 하며 편하게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엘은 집에서 하녀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았었기에, 그녀에게 하녀장은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여겨졌다.
눈앞의 어린 소녀가 자신을 존중하고 있다는 걸 느낀 수잔은 아리엘에게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아리엘의 배경을 모르는 수잔으로서는 귀한 집 아가씨가 겸손함까지 갖췄다고 생각된 것이다.
수잔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선 저를 편하게 대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저는 아직 모르는 게 많은걸요. 앞으로 마담 수잔에게 배우기만 할 텐데, 낮춰 부를 수는 없지요.”
아리엘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머지않아 결혼을 하면 아리엘은 정말로 배울 것이 많을 게 분명했으니까.
아리엘의 대답에 수잔의 가슴 속에는 잔잔한 감격의 파문이 일었다.
앳된 목소리로 배움을 말하는 어린 소녀는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좋아요, 아가씨. 다만 저를 제외한 다른 하녀들에게는 모두 하대를 하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네, 그럴게요.”
“그리고 마담 수잔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수잔이라고 불러주세요.”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되나요?”
“되고말고요. 아가씨께 친근하고 싶어 부탁을 드리는 거랍니다.”
수잔의 다정한 말에 아리엘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럼…… 수잔…… 이라고 부를게요.”
수잔은 빙긋 웃고는 아리엘에게 아침 식사를 권했다.
“무리가 되지 않으신다면 조금 든든하게 식사를 하시는 게 좋겠어요. 오늘은 어린 아가씨께 무척 고된 날이 될 테니까요.”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여 상을 받았다.
침대에 앉은 채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베드 테이블이 놓여지고, 수잔이 그 위에 음식들을 세팅했다.
아리엘은 부드러운 우유향이 감도는 완두콩 스프를 한 입 먹고 깜짝 놀랐다.
“맛있어요!”
수잔은 아리엘의 아이다운 반응에 흐뭇하게 웃었다.
“대공가의 주방장은 솜씨가 아주 뛰어나답니다. 그래도 아가씨 입맛에 맞으신다니 무척 다행이네요.”
아리엘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특히 스프는 멀건 국물에 초라한 건더기가 든 게 전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완두콩 스프는 진하고, 크림이 듬뿍 들어가 달콤했다.
그녀의 뺨은 황홀함으로 살짝 달아올랐다.
고소한 반숙으로 익힌 촉촉한 수란과 노릇하게 구워진 흰 밀빵의 맛도 기가 막혔다.
딱히 요리 솜씨를 발휘할 필요가 없는 간단한 음식 같지만 원래 이런 간단한 요리가 맛있으려면 노력이 두세 배 들어가는 법이었다.
아리엘이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치자 수잔이 나긋나긋하게 말을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대공자님과 함께 친정에 가시게 될 거예요. 아가씨 아버님께 결혼 허락을 맡으러 가는 거지요.”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성년의 어린 영애와 영식이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동의가 가장 우선적이었다.
대공자와 아리엘이 결혼을 약속했더라도, 대공과 후작이 허락하지 않으면 결혼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대공자와 계약 결혼의 조건을 상의하기 이전에 먼저 양쪽 부모에게 허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과연 대공님이 외동아들의 결혼을 순순히 허락하셨을까?’
아리엘의 표정이 걱정스러워진 것을 본 수잔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님께선 이미 루시안님과 아가씨의 혼인에 동의하셨답니다. 이제 대공자님이 남의 집 귀한 딸을 빼앗아 오느라 고생하실 차례지요.”
귀한 딸…….
아리엘은 조금 곤란해지려고 하는 표정을 감추었다.
‘수잔은 아까부터 나를 귀한 대접 받고 자란 후작 영애처럼 대하고 있네. 사실은 전혀 아닌데…….’
식사한 그릇을 깨끗하게 치운 수잔이 활기차게 박수를 짝 쳤다.
“배불리 먹었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수잔은 아리엘을 욕실로 데려가면서, 오늘 몸단장을 도울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으신 아가씨들은 본가 사용인들 외에 손타는 것을 삼가야 하니까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아리엘이 들어갈 석조 욕조에 무럭무럭 김이 나는 목욕물을 받고, 그 위에 향긋한 거품을 잔뜩 만들어냈다.
“자아, 아가씨. 욕조로 들어오세요.”
아리엘은 주춤하며 앞섶을 꼭 쥐었다.
“혼자 씻으면 안 되나요?”
어린 소녀의 부끄러움이라 여겼는지 수잔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짜 어른이 된 아가씨들은 목욕 시중받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답니다. 이건 익숙해지셔야 해요.”
“하지만…….”
“어서요! 자, 만세!”
정신없이 답싹 끌려간 아리엘의 머리 위로 옷이 벗겨졌다.
수잔은 아리엘을 달랑 들어 올려서 욕조 안에 퐁당 집어넣었다.
“옳지요,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아리엘은 자그마한 손과 팔로 몸을 가려보려고 했으나 이미 발가벗겨진 몸을 다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수잔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쩜 이렇게 마르셨을…….”
앙상하고 조그마한 아리엘의 체구를 보며 중얼거리던 수잔의 말이 뚝 멎었다.
겨우 일곱 살쯤으로 보이는 소녀의 등과 온몸에는 맞아서 생긴 흉터들이 가득했다.
“아가씨. 이게 무슨…….”
아리엘은 눈을 꾹 감았다. 마치 이 시간이 사라져버리기를 바라는 듯이.
수잔은 한 줌 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소녀를 누군가가 때렸다는 것에 무척이나 분노했다.
대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녀는 눈을 이글거리며 아리엘의 흉터를 샅샅이 훑었다.
이렇게 어린 귀족 영애를 상습적으로 폭행할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뿐이었다.
부친.
수잔은 아리엘이 평탄하게 살아온 보통 양갓집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빛을 바꾸고 부드러운 손길로 아리엘을 돌려 세웠다.
아리엘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수잔이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물을까 봐 겁이 났다.
후작가의 모든 사람들은 항상 아리엘이 잘못해서 맞았다고 말했다.
네가 잘못해서 때린 거라고.
맞을 짓을 했으니 맞은 거라고.
아리엘은 처음 만난 수잔이 자신을 그렇게 볼까 봐, 그리고 후작에 대해서 자세히 물을까 봐 겁이 나고 부끄러웠다.
그때 수잔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아직 아픈 흉터가 있나요?”
아리엘은 고개를 젓다가, 비교적 최근에 맞았던 팔 쪽을 가리켰다.
“여기 말고는…… 이제 아프지 않아요.”
수잔은 안타까운 시선을 거두고 상냥하게 아리엘을 감싸 안아주었다.
“좋아요. 이제 깨끗이 거품 내 씻겨드릴게요. 아프면 말하세요.”
목욕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수잔은 전혀 아프지 않게, 그러면서도 솜씨 좋게 재빨리 아리엘을 씻어 주었다.
상처가 생긴 이유에 대해서 물을까봐 잔뜩 움츠러들어있던 아리엘은 수잔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부드럽게 씻겨 주자 차츰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다 씻은 다음에는 수잔이 커다란 타월로 아리엘의 몸을 돌돌 말아 물기를 닦아주었다.
아리엘이 어찌나 작은지 타월 한 장에 쏙 들어가서 감춰졌다.
몸을 다 닦아준 수잔은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을 말려가며 빗어주었다.
“결혼하시면 머리카락 길이도 다듬어 드릴게요. 아직은 다른 댁 아가씨니까.”
아쉬운 목소리로 수잔이 말했다.
수잔은 아리엘의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선명한 스칼렛 레드의 적발을 섬세하게 땋아 올려 어린아이용 보닛에 넣어 정리하고, 곱슬거리며 흘러나오는 애교머리는 남겨두었다.
그리고는 곧 아리엘의 몸에 꼭 맞는 예쁜 드레스를 가지고 왔다.
연베이지색의 베이비돌 드레스는 보닛과 한 세트였다.
보닛의 안쪽에는 흰 레이스가 덧대어져 있고, 옆에는 상아색 리본이 달려있었다.
드레스도 도톰한 연베이지색 천 위에 얇은 흰 레이스 천을 겹쳐 만들어 앙증맞으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주었다.
드레스의 가슴 중앙에는 비단천을 넓게 잘라 만든 미색의 리본이 있었고 리본 중앙에는 카메오 장식이 물린 브로치가 자리했다.
예쁜 드레스는 안감도 부드러워서 옷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아리엘이 원래 입고 있던 헐렁하고 넝마같은 옷과는 전혀 달랐다.
드레스와 보닛을 착용하고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굽이 없는 부츠까지 신자,
‘와, 나도 아가씨 같아.’
아리엘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꽤나 귀족 영애 같은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어린 아가씨지만 중요한 날이니까 입술에 연지를 좀 발라드리려고 했는데 필요가 없네요! 원래 입술색이 가장 예뻐요.”
밝게 말한 수잔은 분홍빛 입술을 타고 난 건 참 축복받은 일이라고 칭찬해주었다.
“아가씨같이 예쁜 분이 이 집에 들어오시다니. 모두 반해서 쓰러질 거예요.”
그 말을 듣고서는 조금 의아해졌다.
예쁘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예전의 나보다는 훨씬 말쑥해졌지만…….’
자신이 추하게 생겼다고 믿고 있는 아리엘은 수잔의 칭찬에도 수잔이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만 더욱 강해졌을 뿐, 정말로 스스로가 예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서두르지 않으면 늦겠어요. 이제 나가실까요?”
수잔은 아리엘의 어깨를 감싸고 문밖으로 이끌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자 하늘에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 햇살 너머에 훤칠한 키의 소년이 서 있었다.
“대공자님이 벌써 나와 계시네요.”
소년의 몸신은 늘씬하고 길게 뻗어 아름다웠고, 그가 입은 까만 정장은 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무척이나 값비싼 것이었다.
다만 넥타이가 눈에 띄게 풀어져 있어 그는 조금쯤 반항적으로 보였다.
“왔군.”
“네…… 으앗?!”
그가 수잔에게서 아리엘을 휙 낚아채 물건처럼 옆구리에 끼었다.
“날 기다리게 하는 건 별로 좋은 취미가 아닌데.”
아리엘은 눈부신 햇살에 찌푸리던 미간을 펴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대공자의 얼굴이 빛 아래에 환히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아?
아리엘은 대공자 루시안의 얼굴을 보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 사람은……?’
아는 얼굴이었다.
새까만 짧은 흑발 머리에 짙은 청색의 눈동자.
‘라카트옐의 사자를 모두 죽이다니. 넌 뭐지?’
‘도와주지. 잡아.’
과거에 라카트옐 가에서 만났던 위압적이고 아름다웠던 젊은 사내.
대공자 루시안 데츠몬드 라카트옐은, 그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
아리엘은 놀라서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때 그 사람이…… 대공자였어?’
상상도 못했다.
그 당시 라카트옐 가에는 대공자가 없었으니까.
'그'와 마법사 무리만을 따라다니느라 세상일에는 어두웠던 그녀지만 그쯤은 알고 있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작위를 차지한 젊은 대공의 이야기.
그는 그 당시에 벌써 대공자가 아니라 대공이었다.
그리고 선대 대공은…… 어떻게 되었더라?
정상적으로 작위를 물려준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당장 아리엘의 눈앞에 있는 소년의 얼굴이 다른 모든 의문을 앗아갔다.
무척이나 현실감 없는 외모였다.
새까만 암흑 같은 흑발은 단정했고, 드러난 이마는 석고처럼 단단하고 우아해 보였다.
하지만 그 아래로 음영진 눈매는 정반대로 위험한 느낌을 풍겼다.
빼곡한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짙은 청색의 눈동자에는 명료한 폭력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마주한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독한 매혹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가 오만하게 눈을 내리깔자 긴 속눈썹이 그윽하게 눈매를 덮었다.
그 행동이 보는 사람에게 선사한 감각은 엄청났다.
아리엘은 순간 심장이 멈추었다가 다시 가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생긴 사람이 있을 수 있지?’
길게 뻗은 콧날과 붉은 입술은 완벽했고, 아직 사내라기엔 미성숙한 턱선과 목덜미는 소년의 것처럼 희었다.
날카로운 눈매의 끝에 위치한 작은 눈물점이 그에게 색기 어린 느낌을 더하고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그라는 사람을 둘러싼 공기 자체부터가 보통 남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과거에서 보았던 그 사내가 대공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지금 아리엘의 눈앞에 있는 대공자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보다 어렸다.
키는 이미 훤칠하고 아우라 또한 보통의 열네 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강했지만, 그는 아직까지 소년이었다.
“왜 그렇게 보지?”
갑자기 떨어진 루시안의 물음에 아리엘은 홀린 듯이 대답했다.
“예, 예쁘셔서요…….”
무의식적으로 본심 그대로를 말해버린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루시안이 한쪽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미의식이 영 잘못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군.”
“네?”
그가 아리엘이 되묻는 것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유연하게 마차에 올랐다.
“출발해.”
정말, 자기 할 말만 한다니까.
속으로 조금 투덜거린 아리엘은 마차 안에서 그의 팔을 벗어나 꼬물꼬물 자리에 앉았다.
마차의 좌석이 높아서 발이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동동 떴다.
아리엘은 허공에 대고 작게 발장구를 쳤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어째 대공자 쪽이 계속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과거엔 무서워서 생각도 못했는데 지금 보니 정말 아름답게 생긴 사람이야.’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 옆에 서야 한다니.
아리엘은 자신감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걸 느꼈다.
물론 그의 얼굴은 옆에 누구를 데려다 놓아도 상대의 자신감을 바닥에 처박을 것 같기는 했지만.
“고개 들어.”
마차 바닥의 무늬만 보던 그녀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아리엘은 본능의 이끌림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루시안이 서늘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개를 떨구는 것은 내 앞의 것들 뿐이야. 내 옆에 선 것이 바닥만 보는 건 용납 못 해.”
아리엘이 눈을 깜박이자 그가 오만하게 덧붙였다.
“내 옆에 서는 것은 곧 내 것이니까.”
결론은 고개 처박고 있지 말고 고개 들라는 말 같다.
아리엘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를 똑바로 바라보자 그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입매를 풀었다.
무척이나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
드디어 아리엘도 지금 순간을 실감했다.
아.
‘그러고보니 나, 그 사람을 만난 거구나.’
대공가에 찾아오면서 반드시 만나고 싶었던 한 사람.
흑발 청안의 남자.
그가 하필 대공자였다는 것이 난감하긴 했지만, 그녀의 가장 큰 바람 중 하나가 오늘 이루어졌다.
인생의 새로운 장이 펼쳐진 기분이었다.
‘바뀌고…… 있는 걸까.’
따뜻하고 보드라운 드레스와 길들일 필요도 없이 부드러운 가죽 부츠,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까지…….
짧은 순간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리고 마차에 난 창을 통해 아침의 풍경을 바라보자 아리엘에게는 한 가지 깨달음이 더 지나갔다.
‘어제가 지났어!’
과거 그녀의 인생이 부서지기 시작한 그 날.
아버지에게 맞아 왼쪽 다리를 잃었던 그 밤이 지나갔다.
원래 그 밤에 머리채를 잡히고, 계단을 질질 끌려 내려가고, 죽도록 맞다가 기절했던 어린 소녀는 여기 없었다.
태양이 어둠을 밀어내고 아침을 만들어내듯이.
과거의 불행을 밀어내고 오늘을 맞은 아리엘은 분명 달라졌다.
그녀는 멀리 후작가 저택의 모습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 * *
루실리온 후작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제 광산 사업차 중요한 손님인 모니카 공작 부부를 맞아 대접하느라 온 신경을 쏟은 것도 잠시, 이른 오후에 망할 다락방 계집애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이다.
“뭐야? 가둬놨는데 어떻게 도망을 갔단 말이냐!”
“그, 그것이…… 아가씨께서 마법을…….”
후작은 당장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마법 이야기는 이 집에서 입 밖에도 내지 말란 말 못 들었어!”
그는 보고를 한 하인을 흠씬 두들겨 패 화풀이를 한 뒤 당장 사람을 풀어 계집애를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모니카 공작 부인이 은근슬쩍 저택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지적하긴 했지만, 다행히 사업 이야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저녁 늦게 공작 부부가 돌아가고 나서도 아리엘을 찾았다는 소식이 없는 게 아닌가.
붉은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고작 열 살짜리 계집애 하나 못 찾으면서 돈을 받으려고 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후작은 이를 박박 갈았다.
친딸도 아닌 것을 먹이고 입히며 키워줬더니,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괘씸하게 도망을 가?
“잡히기만 해봐라.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버릇을 고쳐 놓을 테니!”
팔다리를 부러뜨려놓으면 도망갈 생각은 못하겠지.
후작은 아리엘이 잡혀 오면 어떻게 버릇을 고칠까 생각하며 술을 퍼마시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숙취를 느끼며 일어난 아침에 청천벽력 같은 서신을 받았다.
“라카트옐 대공가의 후계자께서 우리 집에 방문한다고?”
루시안 대공자.
후작조차 소문으로만 들었던 대공자였다.
그는 올해 열세 살인 아들 제롬에게 내년에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대공자와 친해져야 한다고 매일같이 주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거물이 이 집에 찾아온다니!
‘새해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공작가부터 대공가까지. 올해엔 운이 좋을 모양이야.’
후작은 속으로 껄껄 웃었다.
대공자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리엘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에게 아리엘의 존재는 그 정도로 하찮은 것이었다.
그는 어제 기절한 후 몸져누운 뚱뚱한 집사를 쫓아내고 아랫것들을 닦달해 저택을 다시 청소하게 했다.
그리고 대공자가 방문하겠다고 한 시간에 맞춰 버선발로 뛰어나가서 마차를 맞았다.
과연 대공가여서 그런지, 대공자 한 명만 탄 마차인데도 그 위용이 대단했다.
네 마리의 혈통 좋은 말이 끄는 거대한 사두마차의 벽에는 대공가의 문양이 황금으로 섬세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후작만큼이나 잘 차려입은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자 훤칠한 소년이 우아한 동작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한순간에 주변을 압도하는 외양이었다.
“라카트옐 대공자님.”
그는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면서 옆에 선 아들 제롬의 머리를 눌렀다.
제롬이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숙였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오만한 목소리가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대공자가 삐뚜름하게 웃어 보였다.
왜인지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미소였다.
“아직 다 안 내렸는데.”
그의 말을 들은 후작은 마차의 문으로 눈을 돌렸다.
대공자와 함께 마차를 탈 수 있는 신분의 사람이라면…….
‘설마……!’
대공 각하도 함께 오신 건가?
그렇다면 이건 건수 중의 건수였다.
후작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공자 뒤로 내리는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공자가 가볍게 손을 내밀어 마차에서 누군가를 이끌었다.
여덟 살쯤 되었을까 싶은 어린 소녀였다.
후작은 그 고상하게 차려입은 소녀의 얼굴을 잠시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아들 제롬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헉, 아빠 저거…….”
그렇게 후작도 알아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의 눈앞에 선 고귀한 모습의 어린 레이디가, 몇 시간 전까지 자신이 버릇을 고쳐 놓겠노라 별렀던 다락방 계집애라는 것을.
* * *
“너……!”
아리엘은 후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당장 멱살이 잡히거나 주먹이 날아오는 게 아닐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만큼 후작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크흠.”
루시안이 탔던 마차 뒤를 따라온 재무관 달튼이 어느새 다가와 헛기침을 했다.
그제서야 후작은 대공자를 의식한 듯 다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루시안이 까칠한 태도로 손을 까딱했다.
“달튼. 루실리온 후작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고해.”
달튼이 유려한 솜씨로 입을 열었다.
“후작님. 어제 나들이를 나왔다가 일행과 떨어져 길을 잃은 아리엘 아가씨를 대공자님께서 발견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헤매다 다치셨기에 라카트옐의 주치의를 불러 치료하게 하셨고요.”
전혀 사실이 아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럴듯했다.
후작 영애인 아리엘이 보호자 없이 혼자 바깥에 있었다는 것부터가 후작의 위신에는 치명적인 것이다.
후작은 이 거짓말을 부정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이어 루시안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런데 아리엘 영애를 본 대공께서 이 아가씨가 무척 마음에 드셨나 보더군. 며느리로 들이고 싶다 하셨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제 아버지를 팔아먹는 루시안의 목소리엔 망설임이 없었다.
“물론…….”
그가 몸을 굽혀 아리엘의 손등에 입술을 대며 후작에게 시선을 올렸다.
“나도 이 어린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고 말이야.”
후작은 새파랗게 질린 채 아리엘과 루시안을 번갈아 보다가 더듬더듬 입을 뗐다.
“그, 그 말씀은.”
루시안이 붉은 입술을 비틀며 악랄하게 미소지었다.
“정식으로 청혼하는 바네. 아리엘라 루실리온에게.”
* * *
후작가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무려 대공가의 후계인 라카트옐 대공자가 방문한다는 소식만으로도 저택이 뒤집어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펼쳐진 장면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후작이 땀을 뻘뻘 흘리며 대공자를 안내하는 그 옆에 이 댁 아가씨가 있다니?
하녀, 하인들은 구석에 모여서 눈을 힐끗거리며 수군대느라 바빴다.
저택을 휘 둘러보던 후작은 그들을 향해 험상궂게 눈을 부라렸다.
후작이 대공자의 눈치를 보며 사용인들에게 꺼지라는 듯 손을 휘젓자 다들 도망치듯 흩어졌다.
실내로 자리를 옮겨 대공자 맞은편에 앉은 후작은 속으로 치열하게 계산을 했다.
‘저 계집이 무슨 마법으로 대공자를 꼬셨는지는 몰라도, 이건 우리 가문에게 기회야.’
무려 대공가와의 혼담이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애물단지가 이제야 키워준 값을 하는군. 평생 쓸모없을 거라고 생각했더니만.’
시커먼 속내를 억지로 감춘 후작이 아리엘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냈다.
“아리엘라, 어제 네가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금지옥엽 막내딸을 찾겠다고 잠도 한숨 못자고…….”
저 계집애는 항상 내 애정을 받지 못해 안달이었지.
그러니 적당히 부드럽게 대해 주면 당장 아비 편을 들 게 뻔했다.
대공자는 제 아들뻘이니 살살 구슬려서 제 뜻대로 되게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고.
“온 집안 사람들이 너를 찾았단다. 제롬과 나는 널 찾기 전까지는 식음도 전폐하려고 했어.”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그 자리에서 반박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되고 보니 지금 상황이 좀 우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혹시 이 아빠가 널 일찍 찾아내지 못해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늘 그녀를 깎아내리고, 폭력을 휘두르던 후작이 그녀의 기분을 맞추려고 애쓰고 있었으니까.
아리엘이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루시안에게서 픽 비웃는 소리가 났다.
“딸이 다쳤다는데 그거에 대해 먼저 물어보는 게 정상 아닌가?”
후작의 이마에 진땀이 솟아났다.
“그, 그래! 아리엘, 다친 데는 괜찮니? 어디가 어떻게 다친 것이냐?”
그가 최대한 다정하게 굴고 있는데도 아리엘은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전 괜찮습니다. 아버지.”
아리엘이 앳된 목소리로 딱딱하게 대답하자 루시안이 신랄하게 비꼬았다.
“저런. 딸에게 영 사랑을 못 받는 부친인가 보군.”
젠장, 저 계집애가 저런 년이 아니었는데. 며칠 만에 왜 저렇게 낯선 눈빛을……!
후작이 무언가 변명을 꺼내려 하자 루시안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 주위를 환기시켰다.
어린 소년일 뿐인데도 그는 좌중을 압도해 자신에게 시선을 모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슬슬 지겨워지는군. 이제 본격적으로 결혼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데, 후작.”
그가 요염하도록 차갑게 웃었다.
“알다시피 내가 시간이 좀 없어서 말이야.”
그 순간 아리엘은 생각했다.
대공자 루시안은 어떤 상대라도 자신의 페이스로 끌고 와 휘두르는 능력이 있는 게 확실하다고.
* * *
후작은 라카트옐 가 재무관인 달튼이 자신 앞에 펼쳐놓는 결혼 서류를 바라보았다.
미성년자의 혼인에 대한 부모 동의서, 결혼 서약서, 혼전 계약서…….
그중, 혼전 계약서는 아리엘과 루시안 사이의 거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귀족계의 결혼은 그냥 결혼이 아니다.
가문과 가문의 정략적인 결합이기에 영지나 재산, 후계 등 수많은 문제가 발생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귀족들은 혼전 계약서를 작성했다.
라카트옐 가에서 온 혼전 계약서이니 분명 결혼 예물에 대한 내용도 담고 있을 것이다.
후작은 자신이 받게 될 결혼 예물에 대한 궁금증을 꾹 눌렀다.
더 큰 것을 얻으려면 지금은 참아야 했다.
어리석게도 후작은 아직까지 자신이 이 상황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믿었다.
“대공자님, 대공 각하와 공자님께서 불민한 제 여식을 어여삐 보신 것은 감사하지만 저희 아리엘은 아직 너무 어립니다.”
그는 진심을 가장한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아이를 벌써 시집보내고 싶지 않고요. 그러니 약혼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약혼을 시키면 아리엘에 대한 권리는 이 집에 계속 두는 채로 대공가와 연을 맺을 수 있다.
후작은 약혼 기간동안 아리엘을 혹독하게 가르쳐 대공가의 부와 권력을 후작가로 가져오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루시안이 방만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가 오만하게 내뱉었다.
“그건 안 되겠는데.”
“예?”
“라카트옐 사전에 약혼이란 없어. 결혼하기로 했으면 하는 거야.”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니면, 결혼시킬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도 있나?”
후작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제길, 이 어린놈은 어떻게 말 한 마디도 지지 않지?
순간 후작의 눈에서 적대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루시안은 가볍게 힘을 개방했다.
그러자, 그 공간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짐승의 그림자를 마주한 듯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바로 앞에서 루시안의 기세를 느낀 후작 또한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온 몸을 벌벌 떨었다.
이 공포는 이성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 무슨…… 어린놈의 기세가 아니잖아!’
옆에 앉은 아리엘까지 살짝 굳는 것을 본 루시안이 다시 힘을 제어했다.
대기를 누르는 힘이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루시안이 소름 끼치게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후작이 동의하지 않으면 후작가 사업에 지대한 영향이 있을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
루실리온 후작은 전형적인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방금 경험한 공포감을 떠올리는 동시에, 후작가 자금줄을 완전히 끊어놓을 수 있는 대공가의 권력을 생각했다.
그러자 결론은 금방 떨어졌다.
“아, 아닙니다…….”
“그럼 결정됐군.”
상쾌하게 말한 루시안이 달튼에게 손을 까딱였다.
달튼이 후작 앞 쪽으로 동의서를 밀어주었다.
패배감이 짙은 얼굴로 후작은 서류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는 만만한 아리엘을 향해 호소했다.
“아리엘, 결혼해도 아비와 오라비를 보러 올 거지? 우리가 막내딸인 널 얼마나 애지중지했니. 네가 없으면 쓸쓸해서 어떻게 지낼지…….”
그가 슬쩍 대공자의 눈치를 보았다.
“그 쓸쓸함을 달래려면 참 많은 게 필요하겠구나.”
돈 내놓으라는 소리로군.
그의 말뜻을 바로 알아 들은 루시안은 후작에게 혼전 계약서를 던져주었다.
“결혼 예물로 힐튼에 있는 사파이어 광산을 주지.”
사파이어 광산!
후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파이어 한 주머니나 1년 채굴권도 아니고, 광산을 통째로 주겠다고?
저 계집애 하나의 대가로?
이어 루시안이 옆의 달튼을 턱짓했다.
“자세한 건 가문의 재무관이 처리할 거야.”
“가,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루시안이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내게 아리엘의 가치는 그깟 광산에 비할 바가 아니거든.”
아리엘은 옆에 앉은 그를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
분명 지금 상황은 과거에 아버지가 악당에게 그녀를 팔아넘길 때와 비슷했다.
악당이 그녀를 원했고, 아버지는 원하는 값을 받을 때까지 흥정했다.
‘지금도 똑같이 나를 두고 흥정하는 것인데도…….’
이번에는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기가 사는 느낌이었다.
그녀를 물건 취급하며 앞에 세워두고 값을 논하던 그때와는 달리, 이 소년이 자신을 아주 귀한 사람처럼 말해서일까?
기쁨으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던 후작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저, 대공자님. 지참금은…….”
원래대로라면 신랑 쪽에서 주는 예물과 신부 쪽이 준비하는 지참금은 비슷한 수준이어야 했다.
하지만 후작은 사파이어 광산만큼의 가치가 있는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의 사업을 다 정리하고 현금으로 바꾸어도 어려웠다.
루시안이 귀찮다는 듯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지참금은 필요 없어.”
그는 삐딱하게 턱을 괴며 후작을 위압적으로 바라보았다.
“지참금 얘길 하는 놈들은 제 여자도 먹여 살릴 능력이 없는 놈들이지. 아니면, 제 여자의 가치가 그만큼도 안된다고 생각하거나.”
“그, 그렇지요.”
후작이 비위를 맞추려고 동의하자 루시안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가 의자의 팔걸이에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아리엘라는 어린 영애이니, 이 집에서 쓰던 물건은 가져가야겠어.”
“예……?”
후작의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새로 사주고 싶지만. 영애가 적응할 때까지는 환경이 바뀌지 않았으면 하거든.”
소년의 짙은 청색 눈동자가 사악하게 빛났다.
“후작, 아리엘 영애가 쓰던 방으로 안내해주게.”
* * *
이번에는 아리엘도 좀 놀랐다.
그녀는 후작가에서 최대한 빨리 동의를 받고 이 집을 떠날 생각이었다.
루시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여겼다.
그에게 이 일은 계약의 일부일 뿐이니까.
그가 스스로를 성가시게 할 일은 만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작의 동의서를 깔끔하게 말아 챙긴 뒤인 지금, 루시안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진득한 의욕을 띠고 있었다.
아리엘은 허옇게 질려있는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지내던 방은 저택 꼭대기의 끔찍한 다락방이었다. 곳곳에 학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후작은 절대로 루시안을 거기에 데려갈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후작이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그럼요! 지금 당장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후작은 루시안과 아리엘, 그리고 달튼을 대동하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다락으로 향하는 계단이 아니었다.
큰 중앙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한 그는 도착한 방의 문손잡이를 잡아 열었다.
“자, 여깁니다!”
방 안에는 과연 어린아이가 사용하고 있을 법한 가구와 물건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기름 먹인 원목으로 통일한 가구들은 호화로웠고, 장난감은 어느 하나 값비싸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어, 아빠!”
이곳이 오라비 제롬의 방이라는 것이었다.
후작이 재빨리 제롬에게 선수를 쳤다.
“이런, 제롬 이 녀석! 또 여동생 방에 와 있었구나.”
“응?”
나쁜 장난질할 때를 제외하곤 멍청한 제롬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여긴 내…… 읍!”
후작은 재빠르게 아들의 입을 틀어막고는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워낙 아리엘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사주다 보니 아들 녀석이 자꾸 여길 드나듭니다. 제롬, 네 방으로 가거라.”
“그러니까 내 방은 여……!”
눈치 없이 말했다가 다시 한번 입을 틀어막힌 제롬이 억울한 눈빛으로 방을 나갔다.
루시안은 여유롭게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영애가 쓰는 방치고는 톤이 어둡군.”
“하하, 아리엘이 핑크색이나 레이스를 싫어해서 말입니다.”
아리엘이 복슬복슬한 분홍색 슬리퍼에 감탄하던 모습을 이미 보아서일까.
루시안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아닌 것 같던데.”
그렇게 말한 그는 슬쩍 방을 둘러보고는 몇 가지 물건들을 가리켰다.
“저 동상은 영애에게 선물로 준 건가?”
“예? 아, 예. 제가 여행을 다녀오면서 딸에게…….”
사실은 아들 제롬에게 준 비싼 선물이었다.
루시안이 흔쾌히 말했다.
“그럼 영애 것이니 챙겨가지.”
후작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벽에 걸려있는 저 그림은? 저것도 영애 것이겠지?”
“……예.”
사실은 상속이나 투자를 목적으로 가져다 놓은 진귀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 방이 아리엘 것이라고 한 이상, 내놓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제롬 방에 있는 귀중품을 싹쓸이한 루시안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밖의 놀이마차는 누구 것이지? 설마하니 다 큰 영식 것은 아닐 테고.”
후작은 이를 악물고 겨우 대답했다.
“무, 물론 딸 아이 겁니다…….”
어느새 제롬이 아끼는 물건과 아리엘에게 자랑해댔던 물건은 모두 아리엘 소유가 되어 있었다.
달튼에게 명령해 물건을 죄다 빼낸 루시안은 마지막으로 후작에게 돌아섰다.
아까보다 더 장난스럽고 사악한 얼굴이었다.
“참, 아리엘 영애에게 가족을 기억할만한 선물 하나쯤은 줘야 하지 않겠나?”
그가 후작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완연히 아랫사람을 보는 눈빛이었다.
“지금 후작이 하고 있는 목걸이면 되겠군.”
후작은 저도 모르게 값비싼 청동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 물건은 집안의 가보 중 하나였다.
“이, 이건…….”
루시안이 협박하는 듯한 어조로 나지막이 말했다.
“금지옥엽 외동딸이 시집가는데 가보 하나도 주지 않겠다는 건 아니겠지?”
후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속으로 사파이어 광산, 사파이어 광산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결국, 사파이어 광산의 엄청난 수익에 굴복한 그는 가보 목걸이를 벗어 루시안에게 건넸다.
그것을 끝으로 루시안은 후작저를 빠져 나왔다.
뒤에 세워진, 달튼이 타고 왔던 마차에는 한순간에 아리엘의 소유가 된 제롬의 물건들이 가득 실려있었다.
후작은 그것들을 보며 화를 참느라 입술을 단단히 모았다.
“결혼식은 언제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오늘.”
“예?!”
후작의 놀라움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루시안이 아리엘의 허리를 휙 붙잡아 마차에 올렸다.
“꺅.”
마치 납치하듯이 아리엘을 태운 루시안이 말했다.
“이날 이후로는 아리엘라 루실리온이 아니라 아리엘라 라카트옐이로군.”
추락한 천사 같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그가 악마처럼 선언했다.
“다음에 만날 땐 내 아내에게 대공자비에게 맞는 존칭을 쓰길 바라, 후작. 그렇지 않는다면 라카트옐을 무시한 것으로 간주할 테니까.”
그리고 루시안은 산뜻하게 덧붙였다.
“참, 후작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어. 내가 허락하지 않았거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어조와는 달리 섬뜩해서 후작은 고개도 끄덕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루시안의 잔혹한 눈이 배웅하러 나온 사용인들을 천천히 훑었다.
모두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대공자와 아리엘이 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후작가 사람들은 꼼짝도 못한 채 마차의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정말 이래도 돼요?”
마차 안에서 아리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넥타이를 목에서 쥐고 흔들어 완전히 풀어낸 루시안이 눈을 치켜들었다.
“뭘?”
“아버지가 결혼식에 오지 못하게 하는 거요.”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짧게 대답했다.
“돼.”
어…… 그러니까 왜 그런지 설명해주면 안 될까요? 그쪽 할 말만 하지 말고.
아리엘은 둥근 눈망울로 빤히 그를 응시했다.
루시안이 흘끗 보고는 쿡 웃었다.
“아깐 쳐다보지도 못하더니.”
“이, 이제 진짜 아내가 될 테니까…….”
되도 않은 구실을 대는 그녀의 무릎 위로 루시안이 서류 하나를 던져놓았다.
“읽어 봐.”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아까 후작이 서명한 혼전 계약서 두 장 중 하나였다.
혼전 계약서에는 대공가가 후작가에게 예물로 지급하는 광산에 대한 내용이 먼저 나와 있었다.
광산의 연간 수익을 보자 입이 딱 벌어졌다.
이거…… 엄청난 거였잖아?
그리고 맨 아래에 적힌 두 문단.
[서명 이후로 아리엘라 라카트옐은 루실리온 가문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루실리온 가는 현시점부터 영원히 딸에 관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음을 명시한다.]
“이건…….”
아리엘은 놀라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앞머리를 흩트리며 요염하게 웃었다.
“왜, 불만인가?”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아뇨. 기뻐요.”
“좋은 자세야. 이제부터 넌 라카트옐 사람이니까.”
아리엘은 루시안이 계약서에 써둔 조항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설사 그게 아리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가문을 위한 것일지라도.
“감사합니다.”
그가 대답 없이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았다.
단정했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넥타이를 풀어낸 그는 영락없는 반항아처럼 보였다.
굳이 말하자면 신께 반항하는 천사 정도일까.
이제 아리엘의 생각은 이 마차 뒤를 따라오는 거대한 짐마차에 닿았다.
저것도 루시안 작품이었지.
루시안은 그녀가 대공가에 적응하는 걸 돕기 위해 원래 사용하던 물건을 가져가겠다고 했었다.
‘사실 내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아리엘은 살짝 두근거리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어쩌면 조금쯤은 배려를 받고있는 것 같기도…….’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달튼에게 명령하는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튼. 저 짐들, 다 버려.”
……?
아리엘의 휘둥그레진 눈을 본 루시안이 기분 나쁜 듯 미간을 좁혔다.
그가 으르렁거리며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설마 내가 저딴 쓰레기들을 내 저택에 들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역시, 배려 따위는 기대하지 말아야겠어.
* * *
대공가로 돌아오자 수잔이 상냥하게 아리엘을 맞아주었다.
“아가씨, 잘 다녀오셨나요?”
“네.”
아리엘은 수줍어하며 얌전히 대답했다.
포근한 수잔 앞에서는 자꾸만 어린아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아리엘을 수잔에게 맡긴 루시안은 저택 안으로 휙 사라졌다.
“잘 먹여.”
짧고 오만하게 명령하고는.
수잔은 아리엘의 어깨를 감싸고 안쪽의 응접실로 이끌었다.
“아가씨 방을 준비하느라 지금은 들어가실 수가 없어요. 배고프시지요?”
후작가에 다녀오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넘어있었다.
긴장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허기가 뒤늦게 몰려왔다.
“조금…… 요.”
“옷부터 갈아 입혀 드릴게요. 외출복이라 식사하기엔 불편하니까.”
수잔은 응접실 안쪽 놀이방에 아리엘을 앉히고 실내에서 입는 옷을 가져다주었다.
흰 바탕에 분홍색 세로 줄무늬가 있는 원피스는 크림색 사각 칼라가 어깨를 덮고 있었고, 허리에는 분홍색 새틴 리본이 앙증맞게 달려있었다.
수잔은 보닛 안에 땋아 넣었던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풀어 예쁘게 빗은 뒤, 원피스 천과 똑같은 천 머리띠를 해주었다.
“어쩜, 꼭 인형 같으시네.”
옷 예쁘다…….
아리엘은 몸에 꼭 맞고도 가벼운 실내용 드레스를 아무도 몰래 몇 번이나 만져보았다.
외출할 때 입었던 연베이지색 레이스 드레스는 너무 비싸 보이고 엄청나서 만져볼 엄두도 나지 않았었는데, 이 분홍색 원피스는 예쁘면서도 편안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집에서는 학대당하고 그 후엔 '그'에게 끌려다니며 살았던 아리엘은 이곳에 와서야 처음으로 예쁜 것들을 접했다.
아리엘은 예쁜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몸을 조심히 움직였다.
“피부가 워낙에 하야셔서 분홍색이 잘 어울려요. 내가 여자 옷 보는 눈은 있다니까.”
너스레를 떤 수잔이 내 정신 좀 봐, 하면서 일어났다.
“금방 맛있는 걸 차려드릴게요. 아가씨는 좀 많이 드셔야 해요. 옷 치수가 겨우 일곱 살 정도밖에 안 된다고요.”
수잔은 곧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식사 쟁반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리엘은 높은 테이블 의자에 낑낑거리며 기어 올라가 앉았다.
수잔이 하얀 냅킨 천을 무릎에 놓아주었다.
“와.”
음식을 본 아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견과류와 말린 과일이 가득 씹히는 영양가 가득한 빵에 오렌지 필이 진한 향을 내는 마멀레이드 잼.
그리고 가장 그녀의 시선을 빼앗아간 건 촉촉하게 젤리를 친 커다란 닭다리 요리였다.
후작가에 있을 때 그녀는 거의 고기를 먹지 못했다. 매년 제롬 생일에 크게 파티를 하면 음식이 썩어나갈 정도로 남는데, 그 때 조금 얻어 먹어보았을 뿐이었다.
식기를 챙겨주며 수잔이 노래를 부르듯 말했다.
“이걸 다 드시면 오후엔 큰 머그컵에 핫 초콜릿을 드릴게요.”
핫 초콜릿? 그건 또 뭘까?
과거 몸이 망가져 식욕을 느끼지 못했던 아리엘은 갑자기 왕성해진 어린 몸의 식욕에 뺨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그녀가 작은 양볼이 볼록해지도록 음식을 입에 넣고 먹기 시작하자 수잔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얼마든지 있으니 더 드시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아리엘은 배가 가득 찰 때까지 달콤한 마멀레이드 잼과 빵, 닭고기를 꼭꼭 씹어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라면 열 접시도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조그마한 위장은 금세 가득 차 버렸다.
“다 드셨으면 잠깐 쉬고 계세요.”
수잔이 식탁을 치우며 아리엘에게 폭신한 털 쿠션을 안겨주었다.
포만감 때문에 아리엘은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가물가물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아가씨?”
남자의 정중한 목소리가 아리엘을 깨웠다.
졸린 눈을 비비고 앞을 보자 이 집의 재무관인 달튼이 서 있었다.
“으음. 안녕하세요.”
“낮잠 주무셔야 할 시간인 건 알지만, 오늘 일정이 아직 남아있어서요.”
“무슨 일정이요?”
역시 모르셨구나.
달튼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그게…… 아가씨와 대공자님의 결혼식…… 말씀입니다.”
아리엘은 눈을 두 번 깜박거렸다.
결혼식?
그러고 보니 아까 후작가를 나올 때쯤에 루시안이, 결혼식이 오늘이라는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들을 때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고, 후작의 반응을 보면서는 루시안이 그를 내치기 위해 그냥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식이 정말 오늘이에요?”
순진한 병아리 같은 아리엘의 물음에 달튼은 더욱 극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예.”
그는 제멋대로인 대공자의 행동 때문에 아가씨의 마음이 상하지나 않을지 노심초사했다.
어린 소녀이긴 하지만, 이 집에 모실 여자분이 들어온 게 십몇 년 만인데 처음부터 이 모양이라니.
신랑이 신부한테 결혼식이 언제인지도 얘기를 안 해주는 경우가 어디 있냔 말이다.
정작 아리엘은 약간 당황했을 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어차피 어린 시절에 하는 결혼식은 약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그만 애들한테 웨딩드레스나 예복을 입힌 뒤 행진시켜봐야 우습기만 한데다, 어른이 되어 헤어질 수도 있는데 굳이 대대적으로 예식을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식 결혼식은 입회인 한 명과 신랑 신부 두 사람만 참석해 결혼반지와 서약서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이다.
생각을 끝낸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달튼의 눈이 커졌다.
이렇게나 선선히?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대공가에 시집오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결혼식 정도는 제대로 하길 원했을 텐데…….
달튼의 생각과는 달리 아리엘은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과 루시안은 계약 관계고, 성인이 되면 이혼하게 될 테니 크게 결혼식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결혼식을 해서 후작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건 루시안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아까 아버지 앞에서 결혼식이 오늘이라고 말했었으니 미리 얘기를 해주시긴 한 셈이야.’
그녀는 조그맣게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자님은 어디에 계세요?”
결혼식 전에 그에게 계약 조건에 대해 들을 말이 남아있었다.
아리엘의 조건은 '결혼해주면 그의 마법사가 된다'는 심플한 것이었지만 루시안 입장에서는 다를 수도 있었다.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대공자 방으로 안내하는 달튼을 잠자코 따라나섰다.
소녀와 보조를 맞추어 걷던 달튼은 한참 아래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아리엘을 보며 머리를 갸웃했다.
대공자가 하룻밤 객이었던 소녀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무슨 고약한 장난이나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의 신부가 될 어린 소녀가 차분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정신은 아니어도 라카트옐 대공자님이 고르신 분이라 그런가. 저 나이 또래의 아이 같지 않은걸.’
물론 겉모습만 봤을 땐 똘망똘망한 아기 동물처럼 귀여우시지만…….
달튼은 저도 모르게 흐물흐물 풀어지는 표정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여깁니다, 아가씨.”
달튼이 대신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아리엘은 키가 높은 두 쪽 문을 올려다보면서 감탄했다.
하지만 진짜 감탄해야 할 것은 문 안쪽에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엄청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과연 대공가다 싶을 만큼 커다랗고 화려한 공간이었다.
‘첫날에 내가 묵었던 방이랑 비교도 되지 않네.’
바닥에 깔린 자줏빛 양탄자부터, 침대 옆에 깔려있는 엄청난 크기의 사자 가죽 깔개가 당장 시야를 압도했다.
사람 키의 두 배 길이는 되는, 여러 개의 긴 창문들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을 채웠다.
예술 작품처럼 정교한 무늬가 조각된 거대한 대리석 벽난로에서는 붉은 숯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그 위의 벽에는 박제된 사슴 머리가 아름다운 뿔을 뽐내고 있었다.
심오한 빛깔의 흑단목 책상 위에는 방 주인의 성격을 대변하듯 물건이 어질러져 있었는데, 나뒹구는 만년필 하나도 허튼 물건이 없었다.
길게 누울 수 있는 의자에는 희귀한 회색곰의 털이 반쯤 걸쳐져 있고 침상 쪽에 있는 촛대는 심지어 붉은 산호를 깎아 만든 물건이었다.
어느 나라 황태자의 방에 견주어도 뒤질 것 같지 않은 지독히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공간.
‘이러니 제롬 오라버니 방에 있는 물건쯤은…….’
웬만한 사치품은 하찮은 쓰레기로 보일 법도 했다.
그리고 그 방의 중앙에는, 안의 물건들이 내뿜는 모든 빛을 퇴색하게 만드는 수려한 미소년이 서 있었다.
“왔군, 꼬맹이.”
아리엘은 볼을 부풀렸다.
자기 아내한테 꼬맹이라니 이게 무슨 말버릇이람.
“들어와.”
달튼이 아리엘을 들여보낸 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아주었다.
그녀는 밟기도 무서울 정도로 비싸 보이는 양탄자 위로 조심조심 걸어 들어갔다.
그게 답답했는지 루시안이 성큼성큼 다가와 아리엘을 확 들어 올렸다.
“앗.”
그리고는 그녀를 널따란 흑단목 책상 위에 툭 던져놓았다.
“짧은 다리로 이 방을 다 걸어 다니려면 몇 시간은 걸리겠군.”
암만 그래도 몇 시간은 아닐 텐데요.
아리엘은 마치 자신이 조막만한 새끼 토끼라도 되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집어 드는 그의 행동에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루시안도 책상 의자에 앉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이제 대공자님의 계약 조건, 들을 수 있나요?”
“급하네.”
그가 널따란 흑단목 책상 위에 손가락을 느리게 두드렸다.
그 간단한 동작마저도 그가 하니 그림 같았다.
“늦게 들을수록 좋을 텐데.”
말 끝머리에 루시안이 아리엘과 눈을 맞췄다.
그녀는 심해같이 차갑고 어두운 그의 짙은 청색 눈동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루시안이 아리엘이 올라앉은 책상에 팔을 괴었다.
“계약 조건은 간단해.”
그가 느긋하게 희고 긴 손가락을 폈다.
“아내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 내 명령에 복종할 것. 그리고…….”
루시안이 아리엘의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그의 음성이 자못 달콤하게 말했다.
“결혼이 끝난 뒤에도 네 삶은 내 것이라는 것.”
* * *
“…….”
아리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결혼이 끝난 뒤에도 그녀의 삶이 그의 것이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
루시안도 '그'처럼 아리엘의 마법을 차지하고 평생 마음껏 이용하려는 걸까?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마법을 탐내고 착취했었으니 루시안이라고 다를 것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리엘의 가슴 속 깊은 곳은 다른 말을 했다.
‘아냐. 루시안은 날 도와주겠다고 했었어.’
심지어 그때는 서로 적으로 만났었는데도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어쩐지 그가 그녀에게 해가 될 짓은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루시안을 보았던 아리엘에게는 그에 대한 일말의 신뢰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니었다면 후작가를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그랬다면 어차피 그녀에게 남은 인생은 없었을 것이다.
아리엘에게는 더 잃을 것이 없었다.
불행해질 것이 뻔한 길을 걸어가느니 불확실한 곳으로 뛰어드는 편이 나았다.
“알겠어요.”
아리엘이 간단히 대답하자, 루시안이 멈칫했다가 우아하게 미간을 구겼다.
“무섭지도 않나? 내가 널 가지고 뭘 할 줄 알고.”
그녀는 조그만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각오할게요.”
“…….”
길게 침묵하던 그가 급작스레 쿡 웃음을 터트렸다.
“너, 보기보단 재밌는 꼬맹이군.”
아리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작고 하얘서 초식 동물인 줄 알았더니, 맹수였나 하고 중얼거린 루시안이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럼 계약서를 쓰지.”
아리엘은 그가 만년필로 써 내려가는 계약서를 눈으로 따라가며 읽었다.
계약서 조항은 총 네 개였다.
루시안을 '갑', 아리엘을 '을'로 한.
<1. 을은 성인이 될 때까지 7년간 갑의 아내로서 대공가의 보호를 받는다.
2. 결혼 동안 둘은 대외적으로 부부로서 행동하며 서로의 의무를 다한다.
3. 을은 7년간만 갑 소유의 마법사로서 갑이 명령하는 것을 따른다.
4. 결혼은 을이 성인이 되는 시점에 자동으로 종료된다.>
다 읽은 후에 아리엘은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나쁜 조건은 하나도 없는데?’
7년의 계약 기간 동안만 마법사로서 옆에 있다가 성인이 되면 자유.
어디에도 그녀를 영원히 구속하는 조항은 없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루시안을 바라보자 그가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고는 '갑'이라 써진 옆에 지장을 찍었다.
“……조건 더 없으세요?”
“없어.”
그가 아리엘에게 인주를 내밀었다.
“자. 겁 없는 꼬맹이.”
아리엘은 그것이 마법 인주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제국에서 마도구는 굉장히 드물고 비쌌다.
그중에서도 마법 인주는 일반 계약서를 마법 계약서처럼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계약서를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효력이 유지되는 것이다.
아리엘은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다시 계약서를 읽은 후에 지장을 찍었다.
꾸욱.
크기 차이가 나는 두 개의 지장이 나란히 자리했다.
아리엘의 엄지 크기는 루시안의 새끼손가락과 비슷했다.
그녀에게 계약서를 건넨 루시안이 제 손에 묻은 붉은 인주를 닦아내며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 내 마법사라고 해서 날 지킬 필요는 없어. 너에게 보호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으니까.”
“……?”
아리엘은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분명 불공정 계약을 당하고 있는데, 그게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이라니.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당황하는 그녀에게 루시안이 무언가를 가볍게 던졌다.
“받아.”
휙.
아리엘은 그가 던진 작은 벨벳 케이스를 공중에서 두 손으로 받았다.
“결혼 선물이다.”
아리엘은 대체 자신에게 무슨 선물이 더 필요한가 생각했다.
후작가에 광산도 넘겼지, 그녀 몫의 지참금도 거절했지, 심지어 계약 조건도 그녀에게 유리한데.
“열어 봐.”
“네.”
상자를 열어보자 아까 후작가에서 가져온 가보 목걸이가 비단천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걸 왜……?”
의자에서 일어난 루시안이 책상 위에 올라앉은 아리엘과 마주 섰다.
그가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다.
“쓰레기지만, 나중에 루실리온 후작가를 통째로 부숴줄 테니 그때까지 잘 가지고 있어.”
내용만 제외한다면 다정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걸 빼고 생각할 수가 없으니 문제지.
루시안이 그녀의 턱을 검지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그는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네가 가질 것 중에 쓰레기는 이게 마지막이다. 앞으로 네가 갖게 될 건 이따위 조잡한 장난감이 아니니까.”
아리엘에겐 이것도 충분히 과한 것이었다.
후작가 기둥뿌리가 뽑혀온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루시안은 오만하게 단언했다.
“넌 이제 진짜만 갖게 될 거다.”
아리엘이 숨죽이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녀의 턱에서 손을 거두었다.
루시안의 눈동자가 만족감으로 빛났다.
“그럼 이제 결혼하러 가지.”
* * *
약식 결혼식은 금방 끝이 났다.
입회인 역할은 재무관 달튼이 맡았고, 아리엘과 루시안은 대공가 유물인 한 쌍의 반지를 주고받았다.
아리엘은 아들의 결혼식에도 오지 않는 대공에게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그녀의 아버지 역시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곧 잊어버렸다.
짧은 결혼식이 끝난 뒤, 재무관 달튼은 단호하게 루시안과 아리엘을 한 방에 밀어 넣었다.
“두 분은 오늘 한방을 쓰셔야 합니다. 그게 결혼 첫날의 법칙이니까요.”
“그딴 법칙을 만든 놈부터 없애야겠군.”
루시안은 살벌하게 달갑지 않은 티를 냈으나, 명목상일지라도 합방을 해야 결혼 예식이 완성된다는 말에 대강 그녀를 자기 방에 넣어두고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아리엘은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수잔의 부름에 밖으로 나갔다.
수잔이 배가 통통한 머그컵을 아리엘의 두 손에 쥐여주었다.
“자, 뜨거운 핫 초콜릿이에요.”
이게 핫 초콜릿이구나.
겉으로 보기엔 그저 뻑뻑하고 뜨거운 갈색의 액체였다.
하지만 그 액체에서 엄청나게 달콤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아리엘은 눈을 꼭 감고 핫 초콜릿을 한 모금 마셔보았다.
“……!”
난생처음 핫 초콜릿을 먹어본 그녀는 황홀함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갈색의 진한 액체가 뱃속으로 흘러 들어가자 온몸이 노곤노곤 녹아내렸다.
‘매일 매일 이것만 먹으라고 해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수잔은 결혼식을 하느라 고생했다며 핫 초콜릿에 마시멜로를 듬뿍 뿌려주었다.
밤이 되자 수잔은 아리엘을 목욕시켜준 뒤, 하얀 레이스가 달린 어린아이용 네글리제로 갈아 입혔다.
“오늘만 지나면 내일은 아가씨 방이 다 꾸며져 있을 거예요.”
상냥하게 말한 수잔이 아리엘의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아리엘은 쑥스러워서 입맞춤을 받은 뺨을 어루만졌다.
수잔에게선 갓 구운 빵과 햇빛에 말린 빨래 같은 냄새가 났다.
수잔이 아리엘을 루시안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아리엘은 얼마동안은 루시안을 기다렸지만 한참이나 그가 돌아오지 않자 혼자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그녀가 잠이 들려고 할쯤이었다.
벌컥. 루시안이 창문을 통해 방으로 넘어 들어왔다.
‘자기 방에 올 때도 창문으로 들어오네.’
어쩐지 그게 신기해서 아리엘은 살짝 웃어버렸다.
그런데 들어온 루시안이 조금 비틀거리더니 창틀을 붙잡고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헥터 자식…… 안 먹겠다고 했는데.”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감싼 그는 휘청거리며 의자로 걸어가 그대로 쓰러졌다.
아리엘은 루시안이 어디 아픈 줄 알고 발딱 일어나 그에게 뛰어갔다.
“대공자님…… 괜찮으세요?”
물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리엘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살펴보았다.
루시안에게서 알싸한 와인 향이 났다.
술?
아리엘은 깜짝 놀라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이건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그녀의 아버지인 후작은 술에 취했을 때면 더욱 날뛰며 폭력을 휘둘렀다.
그녀는 후다닥 뒷걸음질을 쳐서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머리에서부터 감싸 둘렀다.
술에 취한 남자는 무서웠다.
루시안은 아직 남자라기보다는 소년이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이불을 꽁꽁 감싸고 루시안 쪽으로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는 미동 하나 없었다.
그대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천천히 긴장이 풀린 아리엘은 다시 이불에서 빠져 나와서 살금살금 루시안에게 다가갔다.
‘세상에. 누가 열네 살짜리한테 술을 먹인 거야?’
생각해보니 아까 덩치가 무척이나 큰 남자 하나가 루시안과 함께 있는 것을 봤던 것 같다.
그 사람인가?
범인의 인상착의를 떠올려보려고 애쓰던 아리엘은 이내 눈앞의 소년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예쁘다.”
잠이 든 루시안은 어쩐지 조금 괴로워 보였다.
희던 목덜미가 붉고, 숨이 약간 거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낮의 악랄한 대공자가 아니라 갓 열네 살이 된 무해한 소년처럼 보였다.
아리엘은 그가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만져보고 싶어.’
루시안이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기색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지만 지금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상태였다.
아리엘은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으로 뒤를 한 번 봐둔 뒤 조심스레 그를 내려다보았다.
만져봐도 되는 걸까?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루시안은 마치 조각 같아서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아리엘은 손끝으로 쿡, 그의 얼굴을 살짝 찔러보았다.
‘따뜻해.’
조금 상기돼 있는 소년의 뺨은 온도가 높았다.
그 다음으로는 날카롭게 뻗은 콧날과 입술을 건드렸다.
붉은 것이 묻어나올 것 같은 입술은 말랑하고 촉촉한 감촉이었다.
아리엘은 조금 더 대담하게 손을 뻗었다.
새까맣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소년의 머리카락을 작은 손으로 쓸어보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와, 느낌 엄청 좋다…….’
비록 계약이긴 하지만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남편이라니.
아리엘은 양손으로 턱을 괴고 루시안이 길게 누운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잠든 그의 옆에 있으니 결혼했다는 것이 이제 좀 실감 나는 것 같았다.
‘흠, 그러고 보니 옷이 불편할 것 같은데…….’
루시안은 아까 결혼식을 할 때 입었던 예복 차림 그대로였다.
상의 단추도 목 끝까지 채워져 있었고, 망토 끈도 단단히 매여있었다.
아리엘은 루시안의 옷자락을 살짝 흔들었다.
“저어, 대공자님. 이거…… 이것 좀 풀고 주무세요.”
소곤소곤 말해봤지만 잠든 소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리엘보다 훨씬 키가 큰 루시안을 옮길 힘은 그녀에게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술 취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강했다.
‘그래도, 아내의 도리로…… 옷을 풀어주는 것 정도는 해야겠지?’
아리엘은 조심스럽게 루시안의 상의 단추를 풀었다.
목을 죄고 있는 맨 위 단추 두 개를 풀자 벌어진 옷 사이로 흰 쇄골이 드러났다.
아리엘의 뺨이 붉어졌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그녀는 낑낑대며 망토의 매듭을 풀었다.
숨쉬기에 답답할만한 것들을 조금 풀어내자, 잠든 루시안의 표정이 미세하게 편해진 것 같았다.
아리엘은 더 불편한 게 없나 그를 살펴보았다.
신발도 벗겨주면 좋겠지만 버클을 푸는 법을 모르겠고…….
‘아. 검을 차고 있네.’
루시안의 허리에는 기다란 장검이 매여있었다.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아보였다.
아리엘은 검을 빼내려고 살며시 손을 뻗었다.
조그마한 손이 막 검에 닿으려는 찰나.
여태까지는 움직임 하나 없던 루시안이 불쑥 몸을 뒤척였다.
‘꺄악!’
아리엘은 내적 비명을 지르며 침대로 다다다 도망을 쳤다.
깼나? 깬 건가?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았다.
난 이제 몰라. 대공자님, 전 아내로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녀는 동면하는 다람쥐처럼 이불을 돌돌 감싼 채 생각했다.
빨리 내일 아침이 왔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녀는 그 자세로 불편하게 스르륵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루시안이 눈을 떴을 때는 늦은 오전이었다.
그가 일어나서 설렁줄을 당기자 노집사 알렌이 들어와서 마실 물과 세숫물을 준비해주었다.
어제 헥터 놈 때문에 억지로 먹은 와인의 기운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물잔을 기울였다.
“달튼을 불러와.”
“예, 도련님.”
집사 알렌이 떠나고 혼자 남은 루시안은 어설프게 풀려있는 망토 끈과 상의 단추를 보고 픽 웃었다.
누구 솜씨인지 빤했다.
“……꼬맹이 주제에.”
이 집에서 그의 옷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집 밖에 있는 사람들도 포함해서.
감히 그의 몸에 손을 댔던 인간들의 최후에 대해서는 굳이 떠올릴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먼지로라도 남아있는지 의문이니까.
하지만 일단 아리엘은 아내이긴 하니…….
조그만 소녀가 그의 단추를 푸느라 낑낑댔을 것을 상상한 그의 눈매에 짓궂은 빛이 스쳤다.
똑똑.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넘긴 달튼이 노크를 하고 들어섰다.
옷과 머리가 잔뜩 흐트러져서 더 퇴폐적으로 보이는 흑발의 미소년을 본 그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대공자님, 오늘이 아카데미로 출발하시는 날인데, 어제 음주를 하시다니요.”
루시안이 그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꼬맹이는?”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침 식사를 하신 뒤 다시 잠드셨습니다. 어제 공자님때문에 잘 못 주무셨나 보지요.”
“벌써 내 아내 편을 드는 거야?”
우습다는 듯 말한 루시안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할 일이 있어. 수도에 소문 좀 퍼트려.”
“무슨 소문 말씀이십니까?”
루시안이 제 어깨에 있는 망토를 아무렇게나 풀어 침대에 던져놓았다.
“아리엘라에 대한 소문. 어제 후작가에서 잡동사니를 잔뜩 갖고 나왔잖아?”
“예.”
“루실리온 후작이 너무 애지중지한 나머지 저택 안에서만 끼고 기르던 딸을 시집보내면서, 가문의 가보와 귀한 것들을 마차째 실어 보냈다고.”
“그 말씀은…….”
소년이 상의를 벗어 흰 몸을 드러내며 씨익 미소지었다.
“내 아내의 체면이란 게 있잖아. 꼬맹이 기 좀 살려주라는 거지.”
달튼은 기가 질려서 물었다.
“설마 어제 후작가에서 그 난리를 피우신 게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그럼 내가 뭐 때문에 그 쓰레기들을 갖고 나왔을 거라 생각해?”
되묻는 루시안의 기세가 사나웠기에 달튼은 더 묻는 것을 포기했다.
이 대공자님이 심한 성격파탄자이긴 해도 이번 지랄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니까.
“그 일만 처리하면 됩니까? 아. 여기, 아카데미 수속증입니다.”
목욕 가운을 집어 든 루시안이 턱짓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거기 놔둬. 씻고 나와서 볼 테니.”
“예.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막 방을 나서려는 달튼에게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네 책상, 대리석으로 바꿔주지.”
“네?”
달튼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저 미친 대공자님이 웬일로……?
그의 멍한 얼굴을 본 루시안이 악랄하게 웃었다.
“나무는 영 부수는 맛이 없으니까.”
* * *
아리엘은 자다 일어나서 수잔이 쥐여주는 티스푼을 받아들었다.
“아가씨, 이건 따뜻할 때 드셔야 해요. 갓 만든 우유 푸딩이랍니다.”
“우유? 푸딩이요?”
비몽사몽해하며 스푼으로 우윳빛깔의 푸딩을 뜨자 고소한 향기가 퍼졌다.
수잔이 우유 푸딩 위에 갈색의 캐러멜 소스를 뿌려주었다.
진하게 졸아붙은 설탕의 강렬한 냄새가 흐드러지게 풍겨오자, 잠이 확 달아났다.
아리엘은 푸딩을 한 스푼 커다랗게 떠냈다.
아, 부드러워.
“이제 방 꾸미는 것도 다 마무리가 되었더군요. 기대되시지요?”
“네. 기대돼요.”
아리엘이 솔직히 말하며 뺨 가득 스푼을 물자, 수잔이 웃으며 아리엘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귀여우셔라.”
그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귀여운 거 내가 좀 빌려 가지.”
“도련님!”
루시안이 아리엘의 허리에 팔을 넣어 달랑 들어 올리는 걸 본 수잔이 나무라는 듯 불렀다.
“아가씨를 그렇게 다루시면 안 돼요.”
아리엘은 얼른 나서서 말했다.
“괜찮아요, 수잔.”
익숙해지기로 했거든요.
루시안이 아리엘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리엘은 그가 꽤나 단정하게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대공자님. 우리 어디 가요?”
“너 말고 나만.”
아, 그럼 이건 아내가 남편을 배웅하는 건가?
아리엘은 혹시 꾀죄죄한 모습일까 봐 안긴 채로 머리와 얼굴을 정리했다.
“고양이 세수.”
루시안이 놀렸다.
조금 분했지만 그게 사실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아리엘은 그에게 물었다.
“갔다가 언제 오세요?”
“내년에.”
“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잘못들은 게 아닌지 고민했다.
지금 1월인데요? 내년이면 1년 후잖아요?
루시안이 그녀를 세 계단쯤 위에 내려놓았다.
시선 높이 차이가 한결 줄어들었다.
“원래 1월에 아카데미에 가.”
“…….”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아카데미에…… 가신다고요?”
그러고 보니 후작가에 살 때, 오라비 제롬도 열네 살 1월에 아카데미에 갔었다.
제롬과 루시안이 워낙 다른 생명체로 느껴지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가 팔짱을 끼고 계단 난간에 기대었다.
“원래는 어제 출발 예정이었지. 결혼식이 있어서 하루 늦췄어.”
“그…….”
아리엘은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루시안이 계약에 대해 어긴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는 그녀와 결혼해줬고, 후작가에서 빼내어 이곳에서 보호해주기로 한 약속도 지켰다.
그냥…… 그 자신이 이곳에서 떠날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이 불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멋대로에 종잡을 수 없는 소년이지만 루시안은 이 집에서 그녀와 끈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안 가면…… 안 되나요?’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쯤은 아리엘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
루시안은 눈앞의 소녀가 어미와 떨어지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 걸 보고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대체 이건 뭘 보고 날 이렇게 믿는 거지.
넉살 좋게 이 집에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기에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대강 인사하면 '다녀오세요'하고 손이나 흔들 줄 알았는데.
“……너 이상해.”
그걸 보는 그의 기분도 이상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지배욕이 충족돼서 기분이 좋아야 정상 아닌가?
그는 금세 촉촉해진 아리엘의 눈망울을 보다가 뺨을 세게 꼬집었다.
“아, 아하요, 아흐다고요.”
고 둥그런 눈에 차오르려던 눈물이 쏙 들어간 걸 확인하고서야 놓아주었다.
“가기 전에 명령이 있다.”
“명령이요?”
아리엘이 욱신거리는 뺨을 붙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루시안이 희고 긴 손가락을 차례로 폈다.
“첫째.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마법을 쓰는 건 금지다.”
아리엘은 어리둥절해졌다.
자기 마법사한테 마법을 쓰지 말라는 주인이라니?
“둘째. 내가 없을 때 네 보호자는 마티어스 대공이야. 내 아버지되는데…… 그냥 개겨.”
그, 그것도 명령인가요?
“마지막, 셋째.”
루시안이 아리엘의 조그만 뺨을 한 손으로 붙잡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꾹 눌렀다.
“날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불러.”
상당히 제대로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의미를 담아 말똥말똥 그를 바라보자 루시안이 미간을 구겼다.
“계속 대공자님, 이렇게 부를 건가?”
“그럼…… 루시안님?”
그가 좀 더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님 자 빼.”
“……루시안.”
“그래.”
기특하다는 듯 슬쩍 웃어준 그가 태생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협박했다.
“다음에 만났을 때 제대로 부르지 않으면 벌을 주겠어.”
“네.”
아리엘이 고분고분 대답하자 루시안은 바깥쪽을 향해 흘긋 시선을 돌렸다.
“그럼 간다.”
어어, 잠깐…….
아리엘은 멈칫했지만 그를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의 모습에 금세 입을 꾹 다물었다.
대공가에서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가 출타하는 것이라 그런지, 수잔을 포함한 사용인들 모두와 달튼까지 현관에 배웅을 나와 있었다.
루시안은 그쪽을 향해 척척 걸어가서 백발의 나이 든 사람에게서 외투를 받아들었다.
섬김받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아리엘은 계단에 멈춰 선 채로 망연히 그가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가버린다.
그런데 현관까지 나가서 인사를 받은 루시안이 갑자기 뒤를 돌아섰다.
뭔가 잊어먹은 물건이 있는 것처럼 성큼성큼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왔다.
사용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루시안에게 모여들었다.
소년답지 않게 긴 다리로 순식간에 들어온 그는 아리엘에게 다가와 그녀의 뒤통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아리엘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쪽.
“……?!”
아리엘이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루시안이 삐딱하게 웃었다.
“다시 만날 땐 살 좀 쪄 있어. 지금은 사람이라기보단 털 빠진 병아리 같으니까.”
이마에 키스를 남긴 그는 돌아올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리엘은 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웅얼거렸다.
“으으…… 정말이지 고약해.”
하지만…….
아리엘은 그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문질렀다.
‘어쩐지 가슴이 파닥거려.’
* * *
“아가씨, 이제 대공 각하를 뵈러 가셔야 합니다.”
루시안을 배웅하고 돌아온 달튼이 아리엘을 이끌었다.
‘대공 각하…….’
아리엘은 긴장 때문에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대공자와 결혼을 하긴 했지만, 아직 이 집 주인인 대공과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에도 안 오셨지.’
루시안이 결혼 동의를 받아내긴 했지만, 대공은 이 결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갑자기 대문 앞에 떨어진 허름한 여자애가 하루 만에 아들과 결혼을 한 셈이니까.
게다가 아리엘은 대공자인 루시안의 신부가 되기에는 그다지 내세울 점이 없었다.
열 살치고 너무 볼품없고 어려보이는 데다 흉측한 외모도 가지고 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딱 하나 마법뿐인데 그건 루시안이 금지했으니까 안 되고.
어딜 봐도 어른에게 예뻐 보일 만한 구석이 없는걸?
후작가에 살 때 하녀들이 말하길, 어른들이 예뻐하는 아이는 다 이유가 있다고 했다.
‘제롬 도련님을 봐. 얼마나 순수하셔! 그에 비해 다락방 아가씨는 어떻니? 어린 게 음험해서는 맞을 때 소리 하나 안 내잖아.’
‘어린애는 제롬 도련님처럼 좀 포동포동해야 귀엽지. 비쩍 곯은 애는 정이 안 가. 포동포동한 애한테는 맛있는 걸 더 주고 싶어진다니까?’
‘제롬 도련님처럼 어른에게 스스럼없이 반말도 하고 떼도 써야 어린애답지. 달란 소리도 안하고 뚱하게 저게 뭐람.’
어렸을 때부터 항상 존재를 부정당해온 아리엘이 아무렇지 않게 어리광을 피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학대당한 아이의 몸이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를 수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사용인들은 조금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제롬 편이었다.
제롬이 아무리 난폭하게 굴고 사고를 쳐도 그들은 제롬을 예뻐했고, 손이 전혀 가지 않는 아리엘은 숨쉬듯이 미워했다.
집사와 하녀장조차 사사건건 아리엘이 얼마나 기분나쁘고 소름끼치는 아이인지 떠들어댔다.
그들은 차기 후작이 될 제롬의 눈치를 보며 약자인 아리엘을 비교 대상으로 가져와 깎아내리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열일곱 살 나이까지 어른에게 따스한 대우를 받아보지 못한 아리엘은 그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루시안의 아버지께만큼은 미움받고 싶지 않은데.’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해 한 선택이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싫었다.
아리엘은 잔뜩 얼어붙어서 대공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달튼이 조심스럽게 안쪽을 노크해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대공의 시선을 끌었다.
대공이 고개를 들자, 아리엘은 발발 떨고 있던 것도 잊고 감탄했다.
‘와아, 루시안과 닮았어…….’
그리고 엄청 잘생겼다.
짧은 흑발인 루시안과는 달리 대공은 긴 흑발머리를 늘어뜨린 미남이었다.
‘무척 젊으시네.’
루시안처럼 다 큰 아들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외모였다.
그래도 흑발과 짙은 청안이 루시안과 똑같아서 둘 사이가 부자 관계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루시안이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느낌의 색기 어린 미소년이라면…….
대공은 근엄하고 서늘한 인상의 우아한 미남자였다.
둘다 무척 아름다운 외양을 가졌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달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대공님. 기세를.”
그 말을 들은 대공이 반쯤만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을 채우던 압박감이 스르륵 사라졌다.
아리엘은 그에게 겨우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마티어스 대공님. 아리엘이라고 합니다.”
“…….”
대공이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루시안 녀석에게 한 방 맞았군.”
* * *
대공의 말을 들은 아리엘은 '역시.' 하고 조금 고개를 떨구었다.
예상했던 대로 대공님은 이 결혼을 반기지 않으신다는 거겠지.
‘막상 내 모습을 보니까 더욱 사기를 당한 기분이실 테고…….’
그녀를 보고 처음 한 말이 ‘루시안에게 당했다’는 맥락이니까 말이다.
루시안이 계약 결혼에 대해서 비밀을 지키라고 했기 때문에 아리엘은 대공에게 성인이 되면 헤어질 거라는 얘기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이라도 해드리면 좀 안심하실 텐데.’
그렇게 아리엘이 모종삽으로 끙끙 땅을 파고 있는데, 대공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맡기고 가다니. 난 녀석이 미친 줄로만 알았지.”
아리엘은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씀은 꼭…… 제가 아니라 대공님이 문제라는 걸로 들리는 걸요……?
조그만 양손을 마주 잡은 아리엘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대공이 중얼거렸다.
“널 보니 이해가 가는구나.”
옆에서 달튼이 슬쩍 거들었다.
“예. 저도 대공자님께서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나 했는데 아가씨를 보고 납득했습니다.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분이시지요.”
아리엘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째 상황이 그녀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공이 아리엘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라.”
아리엘은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 오라는 손짓에 대공의 책상 옆을 돌아서 그가 앉은 의자로 다가갔다.
대공이 아리엘에게 물었다.
“몇 살이라고?”
“열 살…… 이에요. 대공님.”
그가 뭔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달튼 쪽을 바라보았다.
“달튼. 루시안 녀석이 여섯 살일 때도 이렇게 작지는 않지 않았어?”
“지금의 아가씨랑 비슷하셨던 것 같은데요.”
“문제가 있군.”
대공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금욕적인 인상의 서늘한 미남의 얼굴은 찌푸린 것마저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서 아리엘과 마주 섰다.
일어난 대공의 키가 어마어마하게 커서 아리엘은 고개를 한껏 꺾어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 아파라.
루시안도 어른이 되면 이렇게 커지는 걸까?
대공이 그녀를 바라보며 여상하게 말했다.
“좋다, 아리엘라. 이제 네가 이 집의 안주인이다.”
네?
아리엘은 그 말을 반쯤 이해하지 못한 채로 숨을 들이켰다.
“하, 하지만 저는 겨우 어제 결혼 했는데…….”
“대공비가 없으니 대공자비가 안주인이지.”
대공의 말은 선을 긋듯이 명료했다.
잠시 당황해서 어물거리던 아리엘은 루시안과 맺은 계약을 떠올렸다.
[첫째. 아내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
‘그래. 아내로서 도리를 다하기로 약속했었지…….’
아내의 의무에는 당연히 대공자비로서의 업무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리엘은 조그마한 양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니.”
“네?”
대공이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말은 이 집이 이제 다 네 거라는 뜻이다. 열심히 할 필요 없어.”
“어…….”
“열심히 하지 말고 일단 누려라.”
한 것도 없는데 누리라니, 그건……
아리엘은 대답을 망설였다.
대공이 딱딱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린애들에게는 권리가 우선이다. 의무는 그다음이야. 어른들은 반대지.”
“…….”
“그러니까 너는 안주인의 의무를 지기 전에 권리부터 누리는 걸 배워.”
아리엘은 대공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조그맣게 대답했다.
“……네.”
대공의 입꼬리가 슬쩍 풀어졌다.
“착하구나.”
그가 아리엘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읏.’
폭력적인 기색은 전혀 없었지만, 아리엘은 갑작스런 어른 남자의 손길에 본능적으로 깜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아버지인 루실리온 후작에게 자주 맞다보니 저절로 생긴 반사작용이었다.
“…….”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뻗던 대공이 동작을 멈췄다.
잠시 침묵한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고 설렁줄을 당겼다.
‘화가 나신걸까? 내가 아이답지않게…… 싹싹하지 않아서?’
아리엘은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무표정한 대공의 얼굴로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학대당하고 착취당했던 아리엘은 사람의 기색에 예민한 편이었다.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마.”
대공의 부름을 받고 도착한 사람은 두 명이었다.
아리엘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미소지었다.
하녀장 수잔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아까 루시안에게 정중하게 외투를 건네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대공과 아리엘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공이 아리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부터 이 아이가 라카트옐의 안주인이다. 주인으로 모셔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백발의 노인이 아리엘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여서 인사했다.
엄청나게 정중한 인사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님. 이 집의 총괄 집사 알렌입니다.”
아리엘은 어쩔 줄 모르며 함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리엘이에요.”
“예, 마님. 앞으로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리엘은 마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해서 조금 몸을 움츠렸다.
나이가 어린 그녀가 듣기에는 너무나 거창한 호칭이었다.
‘하지만…… 익숙해져야겠지.’
어리다고는 하나 결혼을 한 이상 마님이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여염집 귀족 영애들과는 다르게 자라온 아리엘은 어차피 아가씨로 불리는 것도 어색했다.
노집사 알렌이 인사를 마치자 하녀장 수잔이 아리엘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안녕하세요, 아기 마님. 저는 이미 아시지요? 당분간 아기 마님의 시중은 제가 들게 될 거랍니다.”
수잔의 인사는 달콤하고 친근했다.
아리엘은 그녀에게 정중한 노집사 알렌도, 그녀를 보통의 아이처럼 대해 주는 수잔도 다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을 소개한 대공이 아리엘에게 말했다.
“이 두 사람이 집을 안내하고 필요한 걸 준비해 줄 거다.”
“네, 대공님.”
아리엘이 깍듯하게 인사하자 대공이 묘하게 심기 불편한 표정을 했다.
“마티어스.”
“네?”
“마티어스라고 불러.”
이번만큼은 아리엘도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어요.”
“왜지?”
“루시안은 남편이니까 괜찮지만, 대공님은 어른이시니까요. 성함으로만 부르는 건 안 돼요.”
아리엘에게도 나름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었다.
수줍게만 보였던 그녀의 당돌한 말에 대공이 낮게 소리 내서 웃었다.
“그럼 날 뭐라고 부를 거지? 대공님이란 호칭은 사양하겠다.”
“음, 그럼…….”
아리엘은 작은 미간을 모으고 고민한 끝에 말했다.
“마티어스님. 이렇게 부를게요.”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지. 이만 가봐라. 네 방 준비가 끝났으니까.”
“네, 마티어스님.”
얌전히 대답한 아리엘은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감사합니다.”
루시안의 아내이자 이 집의 안주인으로 받아주셔서.
억지로 머리를 쓰다듬지 않아 주셔서.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싫어하지 않아 주셔서.
마음속으로만 속삭이며 아리엘은 그에게 인사했다.
마티어스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받고는 몸을 돌렸다.
닫히는 문 안쪽에서 ‘루실리온 후작에 대해 알아봐.’ 하는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