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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76화 (176/176)

특별 외전 5화

윈터가 잠시 생각하다 거만한 눈으로 캐서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당장 나가시죠. 잘됐습니다. 어머니는 본가로 가시면 되겠고, 아버지는…… 말 그대로 길에 나앉으시겠네요.”

그러자 뒤늦게 당황한 캐서린이 대답했다.

“그, 그래도 네 부모인데 어떻게…….”

“이렇게 하죠.”

그는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아버지에게 일절 도움을 주지 마세요. 객사를 하더라도. 어머니만 본가로 돌아가셔서 그냥 적당히, 입 다물고 사시라고요. 그럼…… 제가 이번에 디에브에게 사업 자금을 대 주죠. 어떻습니까?”

“저, 정말…… 정말이니?”

“네.”

윈터가 제임스의 침실을 턱짓했다.

“그러니 당장 아버지부터 내쫓으세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캐서린이 일어나서 이혼을 고하기 위해 제임스의 침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에 만족한 윈터는 유쾌한 얼굴로 저택을 나와, 문 앞에서 기다리는 바이올렛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밝은 얼굴에 이야기가 잘 풀린 게라고 짐작한 그녀가 물었다.

“어쩌기로 했어요?”

“어, 돈을 좀 대 드리기로 했어.”

윈터의 대답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정히 되물었다.

“그게 당신 마음에 편할까요?”

“아주 많이.”

디에브가 사업을 벌이는 것만큼 지갑에 큰 구멍을 뚫는 일은 없다는 것을, 대륙 누구보다 사업 재능이 뛰어난 윈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후련한 얼굴로 바이올렛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여기는 이제 뭐에 쓸까? 별장?”

잠깐 캐서린과 이야기하고 오더니 기분이 확 좋아진 윈터 덕에, 같이 즐거워진 바이올렛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언젠 내가 남부 오는 것도 싫다더니?”

“이제 괜찮아졌어. 후련해졌으니 말이지.”

“그렇군요. 음, 뭐로 쓰면 좋을까. 이렇게 근사하고 역사 깊은 집을 구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니 많이 고민해 봐야겠네요.”

윈터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집에선 당신이 좋은 기억이 없을 테니까, 받자마자 허물어 버리려 했거든.”

“이제 괜찮아졌어요?”

“응. 우리 것이 되니 괜찮아지는군. 우리 것이 아니라서, 저 집에서 당신이 아팠던 거니까.”

“당신도 아팠을 테죠.”

“응?”

“당신도 아플 때가 있었을 거예요.”

바이올렛이 멈춰 서서 저를 바라보며 하는 말에 윈터가 잠시 멈칫했다. 그녀 말이 맞았다. 자신이 언제나 저 집에서 행복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 바이올렛에게 사랑받기 전에는 그 아픔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었다.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얻어맞지 않고, 굶지 않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해 어찌할 바를 몰라 했었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을 꽉 잡은 채로 뒤를 돌아 블루밍 저택을 보았다. 그리고 2층 서쪽 방을 가리켰다.

“내 침실이 저기였어. 주방 바로 위의 방이지.”

“아…….”

“어릴 땐 몰랐지. 그냥 방에 있으면 맛있는 냄새가 바로 올라와서 좋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저 방은 사실 주방장들이 주로 쓰는 방이더군. 가문의 아들이 쓸 만한 방은 아니지”

“……”

“방문이 망가져 있어서 가끔 안 열릴 때가 있었거든. 그럼 창문으로 넘어가서 뛰어내렸어. 다칠 때도 많았지만 어릴 땐 뭐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부모가 나를 키우는 데 그렇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닌 것 같네. 특히…… 우리 아이들을 키워 보니 알겠어. 난 지금, 우리 애들에게 정말 작은 상처만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으니까.”

바이올렛은 말없이 윈터의 손을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윈터가 아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우리 공주님이 저 집에 훨씬 나쁜 기억이 많을텐데. 우리 살던 별채는 정말로 허물어 버리자. 꼴도 보기 싫으니까.”

“별채에 내가 좋아하는 방이 있어요.”

“좋아하는 방?”

“응.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주고 싶었던 방.”

“……그럼 안 되겠네.”

윈터가 투덜거렸다.

바이올렛이 별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집이 싫었던 건 아니에요.”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윈터는 한심하게도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내는 늘 저의 약함을 감싸 안아 주는데, 정작 그녀의 마음에는 빈틈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윈터가 아내와 돌아서며 말했다.

“여긴 평야가 넓으니까 파일럿 교육장으로 만드는 것도 생각해 봤어.”

“그랬군요. 당신이 원하면 그것도 좋죠.”

바이올렛이 웃으며 말하더니, 저도 모르게 윈터의 손을 꼭 쥐었다.

윈터는 그 행동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해 별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바이올렛이 멈춰 서는 바람에 그도 다시 멈춰 섰다.

그가 돌아보자 바이올렛이 그를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당신은 하지 말아요.”

“뭘?”

“파일럿.”

“난 바빠. 어자피 취미 정도로밖에…… 아예 하지 말라고?”

“다른 좋은 취미도 많잖아요. 굳이 비행일 필요가 있나요?”

“돈이 너무 남아돌아서 그나마 돈이 좀 드는 취미를 가지려는 건데.”

“하지 말라고요, 싫으니까.”

“……왜 그래?”

아내가 생전 보인 적 없는,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자 윈터의 미간이 좁아졌다.

바이올렛은 윈터가 지나치다 느낄 정도의 이해심을 가지고 있었다. 간혹 아내를 언제나 제 옆에 묶어 두고 싶어 하는 마음과 비교해 그녀의 이해심에 섭섭해하던 윈터로서는 낯선 상황이었다. 물론 너무 좋은데, 이유가 궁금했다.

윈터가 대답을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으니,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사고가 났는데 무섭지도 않아요?”

“그거야…….”

사고를 의도한 거였다고 말할 수 없으니, 결국 윈터는 입을 다물었다.

아내는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제가 비 오는 날 비행선을 끌고 나간 것은 모험심이나 객기 같은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머릿속으로도 결코 확정 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로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으리라. 마치 제가 그 객실에 여전히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윈터는 제가 결국 아내의 마음에도 영원히 지울 수 없을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에 그대로 얼어 버렸다.

“앞으로는 조종석에 앉지 말아요.”

바이올렛의 고집 섞인 목소리에 윈터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해. 당신이 원한다면 죽는 날까지 절대로 조종석에 앉지 않겠어.”

“…….”

“미안해.”

윈터가 무작정 사과하고는 아내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안고 나서 보니 그녀의 몸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윈터는 제가 아내를 두렵게 만든 것이 너무도 미안해져 그대로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는 아내의 두 손을 모아 제 손으로 감싸고 손가락에 연거푸 입을 맞춰 바이올렛을 달랬다.

“앞으로 절대 위험한 취미 안 가질게.”

“……”

“사실 난 비행선 조종보다 다림질이 더 재미있어. 진심이야.”

윈터가 능청스레 덧붙이자 그제야 바이올렛이 조금 웃었다.

그러자 안도한 윈터가 말을 이었다.

“효율적이기도 효율적이지. 사실 다림질이 상당히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라고.”

“그런가요?”

“그럼. 뭐, 당신이 다림질을 해 봤어야 알지.”

“시도해 봐야겠어요.”

“내 취미야. 뺏으려 하지 마. 당신은 당신 나름의 취미 있잖아, 꽃이랑 십자말 맞히기.”

“십자말 맞히기는 이상한 취미라면서요?”

“그땐 몰랐지. 우리 공주님이 이렇게 안전한 취미로 날 안심시켜 주고 있는지.”

윈터의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바이올렛이 멈칫하더니 그를 흘기며 물었다.

“혹시 지금 날 놀리는 건가요?”

“반반이야. 놀리고 있기도 하고, 진짜로 당신이 다림질을 할까 봐 무섭기도 하고.”

윈터가 그리 말하고는 짓궂은 얼굴로 웃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남부는 벌써 봄 날씨네.”

“그러게 말이에요. 수도는 아직도 추운데.”

두 사람은 합의 하에 봄 날씨를 즐기려고 두 사람이 결혼 후 3년 동안 살던 집으로 향했다. 올리비아가 태어난 이후 거의 처음 누리는 여유였다.

윈터가 정원사를 두어 가꾸게 했기 때문에, 정원이 여전히 깔끔했다. 바이올렛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정원사를 고용했어요?”

“응. 정원만. 여긴 당신이 돌보던 곳이니까.”

“고마워요.”

“당연한걸.”

윈터가 가볍게 대꾸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제라늄이며 튤립이 핀 정원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나는 꽃을 좋아해서 겨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당신 덕에 겨울도 좋아하게 되었어요.”

“왜? 이름 때문에?”

윈터가 장난치듯 묻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도 그렇고, 당신이 만들어 주는 코코아도 좋아하고, 추워서 당신과 꼭 껴안고 있는 것도 좋으니까. 행복한 기억이 많이 쌓여서, 겨울이 기대가 돼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우쭐해서 대꾸했다.

“당신 날 정말 좋아하는구나. 싫어하던 계절까지 좋아하게 되다니.”

늘 아내의 사랑을 확인하길 좋아하는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즐겁게 웃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그들이 살던 집으로 향했다.

윈터가 허리를 숙여 불쑥 그녀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물었다.

“왜 그래요?”

“혹시 상처받은 표정일까 봐 확인해.”

“전혀요. 그냥…… 이 자리에 서 있으면 당신 일하는 곳이 잘 보여요. 그래서 가끔 당신의 등을 보고 있을 때가 있었어요.”

“……나도 가끔 당신을 봤어.”

“그래요?”

윈터가 제 책상이 있던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서 내다보며 아, 저 공주님은 꽃구경을 할 때도 저렇게 우아하시군, 하고 생각했었지.”

“그랬군요.”

“그러고 나서 금방 등을 돌리고, 내가 아는 방식으로 당신을 만족시키겠다고 고집을 부렸지. 어리석게도.”

그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젠 당신을 아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젠 아마 누구보다 잘 알 거예요. 그때 당신이.”

바이올렛이 봄처럼 싱긋 눈웃음 짓더니 농담처럼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의 열 배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의 말에 윈터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그즈음 봄바람이 산들거리자 그를 따라 날아온 꽃잎이 허공에 떠서 지나갔다. 그 이동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는 바이올렛의 머리칼에 꽃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윈터가 그 꽃잎을 떼서 바이올렛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당신이 여기 있으면 그때에서야 난 봄이 왔구나, 했어.”

그 말에 바이올렛이 윈터를 올려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결혼하고 쭉 그랬지. 당신 없이 딱 한 해, 봄이 되었는데. 그게 나에겐 봄이 아니더라.”

결혼 이후, 아내가 없던 유일한 봄은 윈터에게 사라진 계절이었다. 그토록 혹독한 계절은 더 이상 없으리라는 것이 지금 그에게는 커다란 행복이었다.

그는 애틋한 눈으로 저를 보는 바이올렛을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지금도 그랬다. 바이올렛은 그에게 꽃이고 봄이었으므로, 그녀를 보고서야 윈터는 제게도 봄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요즈음 불안할 때면 혼자 망설이지 않고 언제든 아내에게 달려갔다. 그러면 불안은 늘 그랬듯 바이올렛의 강함과 따듯함 앞에 힘을 쓰지 못하고 녹아 사라졌다.

“앞으로도 나에게 봄을 알려 줘, 사랑하는 공주님.”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소리 내어 맑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와락, 남편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도 행복을 한 아름 끌어안은 소년처럼 웃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특별 외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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