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4화
행복 II
올리비아의 첫 번째 생일이 있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바이올렛은 회사 안까지 안내해 준 하옐에게 소곤거렸다.
“내가 온 건 남편이 모르지?”
“네, 전혀 모르세요.”
하옐이 냉큼 대꾸했다. 바이올렛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함께 온 젠과 하옐을 돌려세우며 말했다.
“그럼 이제 내가 혼자 기다릴 테니 두 사람은 식사라도 같이 해. 일 남은거 있으면 나에게 주고.”
바이올렛이 말하며 손을 내밀자 하옐이 얼른 스케줄 수첩을 건네주며 우는 시늉을 했다.
“마님은 천사세요.”
“무슨 당연한 소리를 농담처럼 하고 그래요?”
옆에서 젠이 핀잔하고는 하옐에게 팔짱을 낀 뒤 끌어당겼다. 건물을 빠져 나오자 젠이 소곤거렸다.
“근데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 좋아하는 척해야 돼요? 아휴, 마님도 우리가 적당히 맞춰 주고 있는 걸 아실 때도 됐는데.”
그녀가 재잘거리다가 하옐의 걸음이 느려지는 걸 알고 의아해하며 팔을 놓았다. 그러자 예상대로 하옐이 그대로 멈춰 서더니 젠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우리 아직도 좋아하는 척만 하는 거였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닙니다. 밥 먹으러 가요. 식사 예약해 놓은 곳 있으니까.”
하옐의 말에 이번엔 젠이 멈춰 섰다. 그러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잠깐. 우리 혹시 진짜로 데이트 중인 거 아니에요?”
“다행히도 저랑 비슷한 의심을 하긴 하는군요. 마님 생각만 하는 줄 알았더니.”
두 사람이 이야기 끝에 뒤늦게 좀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젠이 다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쨌든 일단은 계속 할 거죠? 좋아하는 척.”
“그러는 게 좋겠죠. 마님의 로맨스를 지켜 드려야 하니까요.”
“마님이 우리의 노력을 아셔야 하는데 말이에요.”
“맞습니다. 동의해요.”
두 사람은 연신 이야기하며 하옐이 예약해 놓은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 * *
회의실 앞에 남은 바이올렛은 하옐과 젠의 데이트가 잦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점점 더 과감해져서 이제는 제가 볼 때도 둘이 손을 잡고 다니지를 않나, 며칠 전에는 바이올렛이 발코니에서 책을 읽는데 그것도 모르고 정원에서 둘이 하도 신나게 이야기하며 깔깔거리고 있어 원치 않게 이야기를 엿들은 적도 있었다. 라크라운드 수도 남부에서 7월마다 열리는 축제에 가서 맛있는 걸 먹자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 뭘 선물할까, 미리부터 걱정하고 있을 때 회의실에서 쾅 하고 책상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곧 윈터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따위 기획서나 하는 놈들이 잘도 호텔을 지었네. 아주 놀라워! 부실 공사가 아닌지 다시 확인해 봐야겠지. 네놈들 머리로 멀쩡한 호텔을 짓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바이올렛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올리비아가 태어난 이후, 하옐의 말로 윈터는 거의 욕을 하지 않게 되었고 매우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이게 부드러워진 거라니?
바이올렛이 안에서 들려오는 끝없는 비난에 한숨 쉬는데 곧 문이 열리고 사색이 된 회사 임원들이 걸어 나왔다.
그중 바이올렛을 먼저 발견한 이글린이 경쾌하게 인사했다.
“어? 바이올렛! 대표님 기다려요?”
그녀의 이름이 들리자마자 안에서 우당탕 소란이 들리더니 눈이 둥그레진 윈터가 달려 나왔다. 그가 예상대로 표정이 어두운 바이올렛을 발견하고 헛기침을 했다.
“내가 말했나? 나랑 목소리가 똑같은 사람이 있다고.”
“…….”
“로이드, 말해.”
그러자 로이드라 불린 남자가 다급하게 윈터의 목소리를 따라 했다.
“그렇습니다, 부인. 저는 대표님과 목소리가 똑같죠. 오늘의 회의는 제가 주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변명에 윈터는 알겠냐는 듯 바이올렛을 보았고, 그녀는 곧 로이드에게 말했다.
“거짓말에 동조하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기분이 든 로이드가 곧바로 사과하고 다급하게 도망쳤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바라보자 그가 변명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직원들은 모두 바이올렛에게 복수를 맡기며 상쾌한 얼굴로 사라진 후였다.
사람들이 없으니 바이올렛이 윈터를 겁나게 하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상처받았을 거예요.”
“크게 받지. 헤아리지 못한 내 탓이야. 그런데 당신도 저 회의 들어왔으면 내 편 들었을걸.”
“의견에는 동의했을지 몰라도 태도에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았을 거예요.”
“반성하지. 앞으로 안 그럴게. 그보다 무슨 일로 왔어? 그 편지는 뭐야?”
윈터가 화 풀라는 듯 부드럽게 아내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을 돌리자 바이올렛이 별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블루밍 저택에서 온 거예요.”
“그래?”
윈터가 편지를 받아 확인해 보니 블루밍 가문의 파산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가문의 작위 수여식을 바로 진행하고 파산을 막아 주길 부탁한다는 것이 적혀 있었으며, 그 외에도 크게 피해를 입은 몇명 워호슨 가문의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웃기고 있네.”
윈터가 코웃음 치곤 아내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춘 후 말했다.
“내가 버릴게. 이거 보고 나 화날까 봐 여기까지 달래 주러 온 거야?”
“네. 그리고 버리지 말고 고려해 봐요.”
“내가 왜 내 아내를 괴롭힌 놈들과 타협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당신이 원했던 거니까요.”
“난 당신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사실은 날 위한 것이기도 해요. 내가 당신에게 주고 싶었고, 줘야만 했던 것이니까.”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의 입꼬리가 저절로 끌려 올라갔다.
“그랬었지. 그건 고려해야겠군.”
“그럼 블루밍 저택에 다녀와요, 우리.”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난처한 얼굴로 바이올렛을 보았다.
“가기 싫지?”
“괜찮아요.”
“가기 싫은 것 같은데.”
“당신이 가기 싫은 거 아닌가요?”
바이올렛은 놀리려고 한 말인데 윈터가 대답이 없었다.
진심으로, 그는 바이올렛을 블루밍 부부의 저택으로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아내는 몇 번이나 죽음을 선택했었다.
바이올렛이 키론으로 떠나 있는 동안 윈터는 몇 번이나 블루밍 저택을 떠나 수도에 살고 싶다고 말하던 바이올렛을 떠올렸었다. 그때 바이올렛의 말을 듣자마자 곧장 짐을 챙겨 수도로 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제 부모와 그녀를 떨어뜨려 놓았어야 했다.
윈터는 바이올렛이 제 앞에서 총을 쏘았던 수도 호텔 객실의 벽지며 가구를 전부 바꾸었다. 심지어 가벽을 새로 만들어서 방 구조까지 바꾸어 버렸다.
그렇게까지 바꾸었음에도 그는 결코 그 객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둘째까지 태어났는데도.
아이가 태어나면 이런 두려움이 다 사라질 줄 알았다. 아내는 너무도 견고해 보이는데, 왜 저 혼자 이렇게 나약한지 알 수가 없었다.
* * *
편지를 받은 김에, 부부는 더 미룰 것도 없이 바로 블루밍 저택에 내려갔다.
아이들 앞에서 언성을 높일 수는 없어 테오도, 올리비아도 유모들과 저택에 남았다.
윈터는 아이들을 사흘이나 못 보는 것만도 심기 불편한데 절연한 부모까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자 아내 앞인데도 도저히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결국은 왔군.”
윈터가 중얼거리더니 아내를 힐끔 확인하고,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그러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바이올렛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다니까.”
“이 집이 당신에게 상처를 준 건 사실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괜찮아요.”
바이올렛이 안심하라는 듯 다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윈터는 저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저 혼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듯한 이 상황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아내의 마음이 아팠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제가 너무 한심해 견딜 수 없는 것뿐.
그의 찌푸려지는 표정에 바이올렛이 물었다.
“왜 그래요?”
“아냐. 자, 가자.”
윈터가 말하고는 저택으로 향했다.
* * *
낯설게도 블루밍 저택에는 스산한 공기가 돌고 있었다.
윈터가 저도 모르게 아내의 앞에 한 걸음 나서서 바이올렛을 제 등 뒤로 숨겼다.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집 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집사를 따라 응접실에 앉자, 잠시 후 윈터의 어머니인 캐서린 블루밍이 나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지나친 스트레스로 어두움이 표정에 배어 버려 이전에 가지고 있던, 파티를 즐길 때의 생기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윈터가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불 꺼진 벽난로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 바이올렛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래. 그렇구나.”
“부군께서는요?”
“누워서 일어나질 않네.”
캐서린의 말에 윈터가 실소했다.
“무능하고 책임감이 없는 건 제 친어머니 내쫓을 때와 똑같군요. 그러고 보니, 사람 참 안 변하네.”
그 말에 캐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가 캐서린에게와는 달리 제임스에게는 아주 노골적인 분노를 드러냈으므로, 그는 제 아들 앞에 나서기조차 두려워했다.
캐서린이 곧 집문서를 내놓자 윈터가 그것을 확인하며 말했다.
“근처에 적당한 집을 마련해 드리죠.”
“그건 돈으로 주렴. 난 이제 내 본가로 돌아갈 생각이니까.”
“적당한 집도 호의인데요. 필요 없으면 됐습니다.”
윈터가 건성으로 대꾸하더니 서류를 취합해 서류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곧장 몸을 일으키고는 바이올렛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그러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들어 윈터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다정한 두 눈이 윈터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고는 말했다.
“먼저 나가 있을게요. 인사하고 와요.”
“같이 가.”
“인사하고 와요.”
바이올렛이 두 번 말하니 윈터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렛이 캐서린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그곳을 나갔다.
윈터는 바이올렛이 나간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마 자신이 후련치 않은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마무리를 짓고 오라고 시간을 내 주는 걸 보니.
바이올렛이 몇 번이나 죽을 마음을 먹도록 아내를 괴롭힌 것이 제 부모였다.
그런데도 바이올렛은 그들에 대한 분노를 내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윈터가 제 재산 2,400만 라크네를 날려 버리는 선택을 한 에쉬 로렌스에게 성에 차게 복수하지 못했던 이유와 같았다. 그래도 어쨌든 에쉬 로렌스는 바이올렛의 오빠고, 캐서린 블루밍은 길에서 떠돌던 열두 살의 윈터가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게 해 준 어머니였다. 바이올렛도, 윈터도 제 가족은 제 손으로 끊어 낼지언정 반려의 가족에게는 모질지 못했다.
윈터는 잠시 레위 가문에 처박혀 소문조차 들을 수 없게 된 에쉬 로렌스를 떠올렸다. 살아나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조용해진 그를 떠올리니 윈터는 곧 웃음이 나왔다.
제 부모에게 모질어질 수 있는건, 본인 스스로뿐이었다. 바이올렛이 자리를 비켜 준 이유는 그 반대였을지도 모르지만.